성지의 전사들이 수근거렸다.
“여덟 번째 군주라고?”
“용군주라는데?”
여덟 번째 용군주의 출현!
군주회의의 결과를 발표하자, 파간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이 어떻게 인간과 같은 위치에 선다는 것이냐?”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전사를, 파간을 우롱하는 짓이다.”
지난 세월 파간은 희생을 강요당했다.
북방을, 성지를, 사람들을 수호하고자 그들은 죽음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들이라고 죽고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희망이 제발로 찾아왔음에도 저 군주를 자처하는 인간들은 자신의 시선에서 신을 해석하려고 들었다.
입장의 차이다.
그들은 파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7군주를 제외한 그 누구도 죽음을 강요받은 적이 없는 탓이다.
“너희들은 모른다. 어둠밖에 없는 세계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기분을.”
군주의 입장에선 파간 역시 쓰고 버리는 말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런 선택을 내린 것이겠지.
“······ 살고싶다. 나 역시도, 그저 살고싶다.”
“파간들이여! 신을 따르라!”
결국 억눌러진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졌다.
성지의 모든 파간이 8군주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7군주를 제외한 그 누구도 죽음을 강요받은 적이 없는 탓이다.
군주의 입장에선 파간 역시 쓰고 버리는 말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런 선택을 내린 것이겠지.
“너희들은 모른다. 어둠밖에 없는 세계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기분을.”
“······ 살고싶다. 나 역시도, 그저 살고싶다.”
그 숫자가 무려 200.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지만 다른 군주 휘하의 파간도 많았다.
그들은 혼란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지의 파간들은 직접 기적을 목도했다.
그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파간은 신성한 존재다.
신성한 존재의 희망이 그저 같은 ‘군주’로 치환될 수는 없는 것이다.
파간이 따른다면, 그것은 신이다.
신이어야만 했다.
그때, 7군주가 검은 곰의 탈을 벗었다.
“··· 샨?”
“빅풋의 얼굴이?”
샨의 얼굴은 유명하다. 그의 끔찍한 몰골은 북방에서도 ‘빅풋’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동시에 그가 파간이 되며 재생의 권리를 잃은 사실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샨의 얼굴이, 딱지로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 새살이 돋고 있었다.
“재생되고 있다.”
“허, 재생의 권리를 잃은 것 아니었나?”
“정말 파간을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산증인이 눈앞에 있었다.
신성자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파간이 치유되고 있다.
그것을 본 모든 군주 휘하의 파간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짧으면 며칠, 길어야 1, 2년을 살다 죽는 게 파간이다.
그런데 살 수 있단다. 나을 수 있다고 한다.
신성한 존재라는 의식 하에 전쟁병기처럼 쓰다 버려지는 게 파간의 인생이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님에도 희생을 강요받았다.
그런 파간의 동요는, 다른 전사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만-.”
쿠우우웅!
1군주가 발을 굴렀다.
지면이 갈리며 지진이 난 듯 진동했다.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파간의 눈에 깃든 불신은 지우지 못했다.
‘······ 반드시 이겨야겠군.’
1군주는 이게 단순히 신성자와 자신의 싸움이 아님을 직감했다.
이 대결의 결과에 따라 모든 게 변할 것이다.
군주의 입장에서 파간은 그저 인간병기다.
병기는 생각이라는 걸 하면 안 된다.
추앙받으면 받는대로, 스스로를 내던지며 적들을 소탕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신성자가 나타나며 파간에게 희망이 생겼다.
희망은 저들에게 생각이라는 걸 하게 만들었다.
물론,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찍어누른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저 신의 사자를 짖밟는다면 이 소란은 가라앉을 것이다.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밝혀낸다면 파간들도 계속해서 난리를 피우진 못하리라.
어차피 이기면 신성자를 취할 수 있다.
신성자를 취해 다른 파간들도 함께 끌어들이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군주, 진정한 제왕으로 거듭나는 길!
‘축복을 받았다고 하여, 같은 수준이라 생각하진 마라.’
마나의 축복.
경계를 넘고 벽을 부순 자만이 도달한다는 영역이다.
신체가 재구성되며 더욱 양질의 마나를 갈무리하게 되는 경지.
그는 두 번이나 겪었다.
눈앞의 남자, 크로프트는 기껏해야 한 번 겪었을 것이다.
‘제법 강해보인다만.’
다른 이들은 몰라도 1군주는 확실히 크로프트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읽었다.
허나 그뿐이었다.
1군주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을 따름이다.
제국의 개들과 군주들이 치고 받고 싸우며 서로 자멸하기를.
결국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스으읍.
샨이 창을 들었다.
샨이 자세를 잡고, 투창을 하였다.
콰르릉!
정확히 1군주와 크로프트의 중심부에 창이 꽂힌 순간.
스팟!
폭발하듯 지면을 박차며 1군주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외부와 내부의 마나를 진동하고 폭발시켜 번개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
제아무리 고수라도 모든 걸 담아낸 그의 일격은 막을 수 없다.
길게 끄는 것도 사치다.
찍어누르기 위해 이 한 합에 끝낸다.
지면을 박찬 소리가 채 들려오기도 전에 목전에 도달한 1군주가, 검을 들어 사선으로 크로프트를 베어내려고 했다.
“흡······!”
하지만, 검은 닿지 않았다.
아니, 1군주는 본능적으로 검과 몸을 틀어 자리를 회피했다.
크로프트의 뒤에서 겨우 멈춰선 1군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피했다고?’
순간적으로 죽음을 감지하고 몸이 움직였다.
정작 크로프트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다.
착오인가?
‘그럴 리가.’
극한까지 담금질한 감각이다. 야생조차 뛰어넘는 초(超)감각이 틀릴 리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찰나의 순간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뜻이다.
1군주의 전신에 푸른색의 오러가 덧씌워졌다.
전신의 근육을 팽창시켜 그대로 검을 바닥에 박아넣었다.
쿠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아!
유형화한 오러가 지면을 타고 크로프트가 있는 영역에 광범위하게 솟아올랐다.
‘용오름’이다.
반경 수백미터를 집어삼키며 도망칠 장소 자체를 없애버린다. 설령 피하더라도 1군주의 광속의 검을 빗겨갈순 없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대로 용오름에 먹혀 죽을 셈이냐?’
용오름은 절대적인 공격력을 자랑하는 그만의 비기.
오러를 길게 늘어트려 지면과 함께 폭사시키는 수는 다른 소드마스터는 엄두도 내지 못할 기예였다.
예외는 없다.
저 안에 들어가 살아나올 순 없었다.
“괴물이냐······?”
1군주가 중얼거렸다.
지금, 예외가 생겼다.
태양과 같이 빛나는 오러.
전신에 넘실거리는 저 오러의 양은 태양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용오름을 막아낼 수준의 양이라니.
‘대체 얼마나 오러가 많으면.’
마나를 정제한 게 오러다.
효율 면에서 일반 마나를 사용하는 것보다 나쁜 건 당연하다.
게다가 공격보다 방어를 하는데 더 많은 오러가 들어간다.
저런식으로 뽑아 쓸 수 있다는 건 상상을 초월할만큼 많다는 뜻.
1군주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금어졌다.
‘재밌군.’
재밌다. 저런 인간은 처음이었다.
스르르.
크로프트가 검을 뽑았다.
1군주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잔재주로 끝낼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듯싶었다.
오러의 양에서 절대적으로 차이가 난다면, 실력으로 찍어누르면 된다.
이윽고, 빛과 같이 쇄도하며 1군주와 크로프트가 동시에 움직였다.
*
[녹화를 종료합니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극의에 다다른 두 괴물의 싸움을 온전하게 담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지금당장 내가 따라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보고,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실력은 가파르게 상승하게 되어있었다.
‘훌륭하군.’
내 눈에 보인 건 십합(十合) 정도였다.
그나마 뇌의 동시활성 영역을 넓혀서 이 정도였지, 다른 전사들은 검을 휘두르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한 듯했다.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느덧 쓰러진 1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1군주가 진 거 같은데?”
“허.”
그나마 본질을 파악한 파간들만이 놀라워할 따름이었다.
하늘 위의 하늘. 두 하늘이 부딪혔다.
[정확히 76번 검이 부딪혔습니다. 검을 휘두른 횟수는 266회입니다.]
이건 제대로 복기를 해봐야겠다.
그간 현실과 증강현실을 오가며 강해졌다 생각했는데, 둘의 싸움을 보니 아직 멀었다.
“······.”
1군주는 믿기지 않는단 눈초리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졌다고?’
무적이다.
최강이었다.
북방의 어느 전사도 자신을 이길 순 없으리라.
아니, 대륙 전체를 따져봐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졌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변명할 틈도 없이 깨져버렸다.
‘저놈은 뭐냐. 정말 인간이냐?’
반백년이 넘게 검을 휘둘렀다.
천재적인 재능, 압도적인 노력으로 보낸 시간이었건만.
‘내가 넘지 못한 벽을 넘었다. 궁극의 벽을.’
무(武)는 끝이 없다.
궁극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지만, 그 위에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저자는 분명히 자신이 보지 못하고 넘지 못한 벽을 넘었을 것이다.
크게 차이나지는 않으나, 그 미세한 차이마저도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무한대와 같기에.
“하!”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하하하!”
오를 곳이 또 있음에 그는 광소를 터트렸다.
아무래도 다시 수련을 해야겠다.
저 영역에 닿을 때까지 다시.
‘어리석었군. 내가.’
동시에 파간들의 동요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저만한 강자를 수하로 부리는 존재를, 같은 군주로 취급해버렸다.
내기에서 졌으니 자신을 부릴 권한까지 갖게 됐다.
이제 그가 같은 군주의 선상에서 존재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 신이라 부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먼지를 털고 일어나, 1군주가 선언했다.
“내가 졌다. 결과에 승복하며, 나는 8군주에게 복종할 것을 선언한다.”
“······!”
모든 군주와 전사, 파간들이 보는 장소다.
성녀 또한 있으니 이 선언은 절대로 무를 수 없다.
무르게 되면 모든 이들이 1군주를 떠날 것이기에, 그는 더 이상 군주라 불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사안을 1군주는 담담하게 쏟아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새롭게 바라건대, 나는 8군주를 ‘신성’이며 동시에 ‘대군주’의 자리에 올리는 안건을 건의하는 바다. 지금 이곳에서. 반대하는 자는 손을 들어라.”
대군주!
그 이름에 모두가 전율했다.
천 년 전 마왕 가프만이, 북방을 정벌해 대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단 한 명도 대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는 없다.
대군주가 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였다.
가프처럼 정복하던가, 모든 세력들의 동의를 얻던가.
지금 1군주는 후자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손을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선 파간이 문제였다.
모든 파간들이 직간접적으로 저 신성자를 따르고 있다.
억지로 같은 군주의 자리에 얽메어뒀건만, 대군주가 되면 정말 신처럼 떠받들어 질 것이다.
허나 1군주가 합류했다.
7군주도, 심지어 1군주를 이긴 저 강력한 사자도 마음에 걸린다.
쉽사리 손을 들 수 있을 리가 없다.
1군주는 일부러 찬성자를 골라내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하는 자를 먼저 골라내는 방식을 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각인효과’를 위해서다.
지금 손을 든 자, 신에 반하는 의사를 지닌 군주라고.
성지를 벗어나기도 전에 공격받을 가능성조차 있었다.
바람을 탔다.
이 바람은, 결코 거스를 수 없다.
“모두가 찬성한 걸로 알겠다. 8군주. 아니, 이제 대신성군주라고 불러야되나?”
신성이며 동시에 대군주인 자.
그런 칭호에 관해선 전해내려온 게 없었다.
1군주가 무릎을 꿇었다.
“신이시여. 저희를 이끌어주시옵소서.”
“신이시여!”
하나, 둘 무릎을 꿇는다.
순식간에 모든 이가 내게 경배했다.
이어 시선을 던지며 묘한 눈빛들을 하고 있었다.
수상소감이라도 말해보라는 건가?
멋쩍은 일이지만 당황스럽진 않다.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저 시선들은, 나로서도 익숙하지 않은 종류였다.
기대감.
내가 황제에 즉위한 이후, 저런 눈빛을 보내오는 자는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물며 수많은 이들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기는 나도 처음이다.
묘한 기분이다.
하지만 알겠다.
이런 기분이다.
내가 바랐던, 바라왔던, 정점에 오르는 기분.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가장 강한 순간이다.
하여 첫 마디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신이 된 자.
이제는 모두를 이끌 자격마저 쥐었다.
전무후무.
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신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런 이의 첫마디는 북방 전역을 움직이게 될 터.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믿는 자는 살 것이다.”
단 한 마디.
동시에 파간들이 몸을 떨었다.
살 수 있다는 그 말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희망이 보였으니까.
정말로 살아났으니까.
잃었던 것을, 포기했던 것을, 이제는 놓지 않아도 된다.
파간의 떨림은 모든 전사에게 전염됐다. 이는 곧 북방 전역으로 퍼지리라.
천 년만에 대군주가 탄생했다.
그들의 신이, 이곳에 있었다.
모두가 하나 될 구실로는 차고 넘쳤다.
*
성지에서 목격된 용오름을 시작으로 모든 게 변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주목할 점은 경계해야할 존재가 탄생했다는 것이었다.
‘대신성군주가 나타났다?’
대군주면 대군주지, 대신성군주는 뭐란 말인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대체 누가?
변수는 없었다. 계산은 완벽했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제3의 인물이 나타났다.
북방을 통합할 대군주이며 신이라니!
‘누구냐, 네놈은.’
카를로스 대공의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 전무후무한 존재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