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37화 (37/146)

일촉즉발의 분위기.

전투가 벌어지는 그 어떤 전장보다도 회장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1군주가 모두를 속이고 있었다는 점도 한몫했지만, 그것을 지금까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그의 기량은 대단한 것이었다.

가뜩이나 북방의 전사 중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1군주다.

그런 그가 ‘신의 축복’을 통해 젊어졌다면, 그 무력이 어느정도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천년 전 북방을 일통했다 전해진 마왕 가프에 비견될 수도 있지 않을까.

‘최소 셋은 달려들어야 맞수. 세력전으로 가면 훨씬 유리하다.’

‘저 야욕은 위험해. 여기서 제거하는 편이······.’

군주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경쟁자다.

다른 한 명이 앞서나가는 걸 가만히 두고보지 못한다.

자신의 모습을 군주회의에서 드러낸 이상, 1군주는 이곳에서 돌아간 즉시 정복전을 펼칠 것이다.

그들의 앞에서 ‘북방의 절반을 준다’느니 하는 오만방자한 말을 지껄이는 것만 보더라도 절대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었다.

어찌해야할까.

만약, 저 1군주가 ‘신성자의 사자’를 이기고 신성자까지 취한다면?

“잠깐.”

사슴탈을 쓴 2군주가 말했다.

“이곳은 군주회의다. 군주의 자격이 없는 이상 발언권은 없지.”

2군주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로 인해 모이긴 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나는 군주가 아닌 탓이다.

어찌해야할까.

“잠깐.”

만약, 저 1군주가 ‘신성자의 사자’를 이기고 신성자까지 취한다면?

사슴탈을 쓴 2군주가 말했다.

그런 내가 이 군주회의에서 의견을 내어 다른 군주에게 반영시키는 건 그간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짓이었다.

‘크로프트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군.’

억지이긴 했다.

애당초 군주회의로 소집을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은 저들이 원하는 게 있어서 모였을뿐, 어디까지나 서로의 필요에 의해 자리한 것이지 무언가의 논의를 위해 이곳에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군주회의’를 언급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크로프트의 패배.

크로프트가 지고, 내가 1군주에게 귀속되는 순간 일어날 여파를 상상한 것이리라.

2군주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성지에 나타나 ‘신’을 자처하는 자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모였다. 오직 군주만이 발언할 수 있으며 의결을 거치지 않은 결정에 대해선 무효로 처리한다.”

3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2군주의 말이 옳다. 오래전부터 합의한 사항이지 않은가? 전쟁에서 ‘성지’에 간섭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군주회의’에서 의결되었던 것처럼.”

오호라.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성지가 휑하니 비어버린 게 ‘군주회의’에서 결정난 사항이었다?

과반수가 동의하여 성지의 파병을 금지했다는 건데.

‘의도가 느껴지는군.’

카를로스 대공이 손을 썼나?

확실한 건, 카를로스 대공이 이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높은 확률로 이 군주들 중에 그와 손이 닿은 이가 있다.

카를로스 대공을 뒷배로 둔 채 전쟁을 북방에 불리하게 끌고가려는 자가 있었다.

일단 샨은 아니다. 성지를 지키던 이들도 아니다.

‘조용히 성지에 파병을 보낸 군주도 있었을 터.’

카를로스 대공에게 성지는 반드시 취해야할 보물이다.

그러니, 대공과 손을 잡은 이라면 성지를 수수방관했겠지.

누굴까. 누가 범인일까.

2군주가 계속해서 말했다.

“하물며 저 ‘신’을 자처하는 자, 얼굴조차 가린 채 우리의 회의에 참석했다. 고작 성녀나 융의 보장 따위로 우리 군주의 자격을 대신한다는 건 아닐 테지?”

“······ 내가 보장한다.”

그때였다.

7군주, 샨이 검은 곰의 탈을 쓴 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위대한 전사이며 동시에 군주인 샨의 보장이다.

성녀도, 파간도 아닌, 군주가 보장했으니 무시할 수 없다.

다른 군주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7군주······.”

“군주의 자리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진대. 너무 나서는군.”

가장 마지막에 군주가 된 자.

하지만 샨은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였다.

“그가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군주’로서의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7군주, 미친 건가?”

2군주의 물음에, 샨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나를 이겼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뒷짐만 쥔 채로.”

“······!”

7군주를 이겼다.

그것도 뒷짐을 쥔 채로?

7군주 샨의 주특기는 투창이다.

그의 투창은 수km 밖에 있는 물체도 정확히 가격한다.

그 파괴력은 산을 가를 정도이며 정면에서 맞은 이들은 형체도 없이 박살난다.

감히 투창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샨이 패배를 선언했다.

공식선상에서의 선언이니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얼마나 강하기에?’

‘정말로 성지의 끝에 도달할 수준의 무력도 지녔단 건가?’

성지는 힘을 준다.

힘이 있던 자는, 더 깊숙하게 들어가 더 큰 힘을 얻는다.

하지만 대개의 군주들은 성지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성지에서 힘을 얻으면 성장이 멈추기 때문이다.

수명도 줄어드는데다, 파간의 고통은 너무나도 유명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존재가 파간이다. 그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것도 그들이 항상 ‘고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신을 자처하는 자가,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그만한 힘을 지녀서 성지의 끝에 다다랐다면?

‘1군주보다 더 강하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내심 긴장했다.

파간을 치료하는 권능과 압도적인 힘까지 지녔다.

게다가 성지의 전사들과 파간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모든 자격에 합당하다.

군주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7군주가 오른손을 들어 선언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8군주의 자리를 추천하는 바다.”

군주가 되는 방법은 다른 군주의 추천이 있어야만 한다.

이후 군주회의에서 과반수의 투표를 받아야, 군주가 된다.

난잡한 북방을 정리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런 제도가 없었다면 수많은 세력들이 일어나 왕을 자처했을 것이다.

일종의 공화정같은 상태.

지금 군주가 되기 위해선 이곳에 모인 일곱 명 중 네 명이 동의해야만 한다.

무력의 강함이나 세력의 크기와는 관계 없이.

2군주가 반대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자를 여덟 번째 군주로 앉히자는 말이냐?”

“출신성분이 중요한 건 아닐 거다. 너도 사슴탈을 썼고, 나 또한 검은 곰의 탈을 썼듯이, 우리의 자리와 자격은 ‘얼굴’로 대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잠시 말을 쉰 샨이 이어서 이야기했다.

“파간을 치료하고, 성지의 끝에 도달한 존재다. 우리에게 득이 되면 되었지, 해를 끼칠만한 존재로 생각되진 않는다.”

자격은 충분하다.

그리고 군주의 자리는 그 자체만으로 증명이다.

북방에 있는 수많은 민족들.

그들의 경계를 지우고자, 군주는 탈을 쓰고 얼굴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짐승군주’다.

군주마다 특정한 짐승의 가호를 받는다.

2군주는 사슴군주라고도 불렸으며, 7군주 샨은 검은 곰군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만약 8군주가 나타난다면 그는 이렇게 불릴 것이다.

‘용군주.’

성지의 끝에서 수호신 용과 함께 세상에 나타난 자.

용군주 외에 따로 붙을 이름은 없어보였다.

‘좋은 생각이군.’

탈로 자격을 대변한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제로.’

[예, 마스터.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된 ‘용’의 얼굴을 축소해 홀로그램으로 입히는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폭식이 먹어치운 ‘용’은 제로의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된 상태였다.

그리고 입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로는 홀로그램을 띄울 수 있었다.

이 또한 폭식과의 공생관계 중에 생겨난 능력인 듯싶었다.

“······ 음?”

“용의 얼굴이······!”

군주들이 나를 보며 웅성거렸다.

용의 얼굴이 축소되어 투구처럼 씌여있었다.

검은 용, 천년 전 가프와 싸웠던 형태 그대로.

마법이 아니다. 그 정도는 모두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러니 정말 신의 기척처럼 보일 것이다.

샨이 거수했다.

“여덟 번째, ‘용군주’의 자리에 그가 앉는 것을 찬성하는 군주는 손을 들어 가결하도록 하지.”

우선 한 표.

“어쩔 수 없군.”

1군주가 손을 들었다.

나를 군주의 자리에 앉혀야만 대등한 상태에서 결투가 가능했다.

모두의 입회 하에 진행되어야만 그 효력이 발효되는 것이다.

이로써 두표.

아직 두표가 부족하다.

2군주는 아예 팔짱을 꼈다.

3군주도 고개를 저었다.

자칭 ‘신’에 대한 처분을 어찌할지 의논하고자 모인 자리인데, 그를 군주로 세우는 건 어불성설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재밌네. 나는 찬성이다.”

4군주가 찬성했다.

“··· 불가.”

5군주는 반대표를 던졌다.

마지막, 6군주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전신에 호랑이 같은 문신을 한 6군주가 나를 쳐다봤다.

짐승같은 눈.

호의인지, 불신인지 알 수 없는 눈빛.

잠시 후 그는 성호를 그리곤 합장했다.

“성지의 수호신이시여. 환영하는 바이오.”

이로써 4표.

여덟 번째 군주, 용군주의 탄생이었다.

*

다짜고짜 저들이 나를 신으로 떠받드리란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대등한 관계, 혹은 그 이상으로 나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한 번 자격을 쥐어줬으니 그 이상으로 가는 길은 훨씬 편하리라.

8군주? 내가 고작 그런 자리에 만족할 리 없지 않나.

‘반대하는 자 중에 첩자가 있다.’

2, 3, 5군주.

저 셋 중 한 명, 혹은 그 이상이 카를로스 대공과 손을 잡았다.

새로운 군주가 성지에서 나타났다.

그야 반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이전 성지의 파병 금지 조항을 주장할 때 누가 주장하고 찬성했는지만 알아내 대조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터.

남은 건 하나.

1군주와의 한판승부뿐.

모든 군주와 병사들의 입회 하에, 승부는 치러졌다.

“안색이 어둡군, 크로프트. 자신이 없느냐?”

결투가 치러지기 전 나는 크로프트를 향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안색은 회복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어두웠다.

회의장 안에선 자신있게 답했지만 1군주는 어쨌든 북방 최강의 전사다.

마나샤워를 겪으며 얼마나 강해졌을지 가늠이 안 되는.

크로프트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저······.”

크로프트는 고개를 저었다.

결투에 대한 걱정 때문에 표정이 어두운 건 아니었다.

“말 못할 고민이라도 있나보군. 말해봐라.”

“전하. 아무 일도 아닙니다.”

“말 해보라 하였다.”

크로프트가 정색하며 내게 시선을 던졌다.

예전이라면 이런 고민 따위, 내게 아예 내색조차도 안했을 테지만.

지금의 나와 크로프트는 전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가까운 관계가 됐다.

그래서 나도 정색하며 고민이 있다면 털어놓을 것을 명했다.

곧이어 크로프트가 생각을 정리한 듯 속내를 털어놓았다.

“··· ‘위업’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위업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신들의 심부름 같은 거라고 들었다. 그건 왜 묻는 것이냐?”

“성지 안에서 정말 용을 만나셨습니까?”

“그래. 만났다.”

“혹, 그 용이 ‘위업’을 처리하는 대상입니까?”

“······ 맞다.”

이건 나도 성지 끝에 도달하고서야 알게 된 진실이었다.

그것을 크로프트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이 세상에 9서클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군요.”

마지막 9서클 대마법사는 천 년 전에나 존재했다.

이후 천 년 동안 9서클에 도달한 인간은 없었다.

크로프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신의 비밀을 엿본자는 모두 처분이 된다······.”

그의 눈빛.

왠지 익숙하다.

너무나도 익숙했다.

과거, 궁을 떠나기 전, 결심을 했을 때의 그 눈빛이었다.

‘설마?’

신의 비밀이란 말까지 언급하는 걸 보면 간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문득 바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행위는 ‘위업’으로 선정될 빌미가 될 수 있다고.

“크로프트. 위업으로 선택되었느냐?”

“그렇습니다, 전하.”

이.

빌어먹을.

혹시나 했다.

이번에 마나샤워를 겪으며, 극의를 본 크로프트가 위업으로 선정됐다는 말이다.

‘과거에 궁을 떠난 것도 그럼?’

크로프트는 경계에 있었다.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히 벽을 넘을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과거 궁을 떠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혹시 ‘위업’으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라면?

······ 그래서 밖에서 조용히 용과 싸우고 죽은 것이라면?

비약일 수도 있다.

허나 크로프트의 성격상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크로프트가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그 위업 때문에 제가 떠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않는다. 그딴 것에 그대가 패배하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으니까.”

“······ 빠르게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전하.”

크로프트가 고개를 숙이며 결투를 위해 발을 옮겼다.

1군주의 자신만만한 얼굴.

벌써부터 황금빛 미래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빠드득.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는다.’

이를 갈았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기분은.

이런 거지 같은 분노는.

나의 것을 건드린 대가는 크다.

그게 누구든,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할 것이다.

< 대군주회의(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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