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34화 (34/146)

악마가 미친 게 분명하다.

꿇으라니. 신이라니!

사악한 술수를 사용하여 성지를 돌파한 게 틀림없었다.

제국의 악마들이 성지를 노리고 있다는 건 성녀 역시 아는 사실이었기에.

‘대체 무슨 수를 사용한 거냐.’

찾아내야 한다.

밝혀야만 했다.

“신내림이 치유된다······.”

“오오.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파간을 비롯한 전사들의 눈에는 다르게 비쳤나 보다.

단순히 악마만 나왔다면 이런 반응까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성지로 들어간 노인은 과도한 신내림을 받은 탓에 죽어가고 있었다.

신체가 변형되고 하얀색의 피 칠갑을 했으니 얼마 못 가 죽으리라.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진대.

변형이 사라지고, 피부와 털 따위가 재생되며 원상으로 복구되어가는 중이다.

‘재생되고 있어?’

아니, 단순한 원복조차도 아니었다.

“진정으로 신을 받았다.”

“신의 축복이다.”

······ 젊어지고 있었다.

얼굴의 주름이 사라지며 탱탱한 피부가 자리 잡았다.

흰색의 머리칼은 원래의 강렬한 노란색으로 되돌아갔다.

신의 축복.

북방에선 마나샤워라는 개념이 없었다. 하지만, 신의 축복을 받아 젊음을 되찾은 전사에 관한 이야기는 간간이 존재해왔다.

하물며 제국의 젊은 악마는 성지에서 신과 함께 나타났다.

검은색의 용.

모든 상황이, 저 악마를 ‘신’으로 만들고 있었다.

위대한 전사도, 성자도 아닌 그 이상의 존재로 말이다.

‘성지의 끝에 도달한 자. 시련을 마주하여 돌파한 자만이 신을 얻는다.’

천 년전부터 전해져내려온 전설이다.

성지가 출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신’을 마주하고자 성지에 도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구에서 죽었으며, 고작 40걸음 이상을 들어간 사람이 없었다.

그마저도 위대한 전사라고 추앙받는 판이다.

오직 성녀만이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성녀는 진짜 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성지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전승되어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신화를 더욱 신화답게 만드는 게 바로 그녀의 역할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닌 모든 성녀가 그래왔다.

‘신을 얻은 자는 파간을 치료하고 다스릴 권능을 지닌다······.’

천 년 동안 전승되어온 신화.

아무도 이룩한 적 없으나, 성지에 끝에 다다라 신을 얻은 자는 파간을 치료하고 다스릴 힘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성지에 들어가 힘을 얻은 파간의 생명은 극히 짧다.

길어야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위대한 전사라 칭해지는 이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마나로 말미암아 생명을 연장하지만 성지의 독은 그 마나를 소모하게 만드는 탓이다.

치료할 방법은 없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파간은 신격화되어 떠받들어지는 것이다.

유일한 희망, 언젠가는 신과 함께 나타날 ‘신성자’의 출현만을 기다리며.

신성자의 출현은 구원이었다.

머지않은 죽음을 기다릴뿐인 파간들에게 있어서, 자신을 치유할 권능을 지닌 신성자는 당연히 받들어 모셔야할 존재였다.

“신이시여.”

“받들겠나이다.”

전사들이 하나, 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파간들도 조심스럽게 예를 다했다.

위대한 전사, 융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남은 건 성녀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라인하르트를 ‘악마’로 규정했던 그녀다.

‘제국의 악마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단 것이냐.’

천 년 동안 제국은 시시탐탐 북방을 노려왔다.

하물며 이번 전쟁에서 북방이 입은 타격은 적지 않은 수준이다.

수많은 전사가 죽었다. 마을의 아낙들도, 어린아이들도 무참하게 죽였다.

헌데 그 원흉인 제국의 인간을 신으로 받들란 말인가?

수십만의 희생은 그럼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싸워야한다.

죽여야한다.

제국을. 악마들을.

도망치는 놈들의 뒤를 잡아, 몰살시켜버릴 생각이었는데.

“······ 모시겠습니다.”

굴욕이고, 굴종이지만.

모든 신의 증거를 들고 나온 저 자를 몰아낼 명분이 없다.

성녀는 이를 악물며 몸을 낮췄다.

성지에서 새로운 신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운이 좋았군.’

신이 된 순간, 나는 미소지었다.

크로프트의 ‘마나샤워’가 저들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 알 것 같았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자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그 죽음을, 파간의 앞에서 나는 극복해보였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한 거라곤 방사성 물질을 체내에서 제거한 것뿐이지만, 덕분에 크로프트의 마나샤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방사성 물질은 돌연변이를 일으켜 힘을 주지만 가능성을 막는다.’

급격하게 체급을 불려 힘을 주기는 하지만, 이는 체내 나노머신에 변형을 일으켜 생명력을 소진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변형된 나노머신은 방사성 물질을 정화하고자 에너지를 전부 사용하게 되고, 머지않아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체내에 흡수된 나노머신은 복제되지 않는다.’

또 하나 알아낸 게 있다면 인간이 몸에 흡수한 나노머신은 대기의 나노머신과는 달리 ‘자가복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기의 나노머신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복제하며 늘어난다.

하지만 인간의 신체에 흡수된 순간부터 복제를 멈추고 신체의 회복이나 기능향상 따위를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몸과 일체화한 나노머신이 전부 소모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노머신은 본래 한 가지 이상의 명령은 수행하지 못하는 게다.’

몸으로 들어온 다량의 방사성 물질.

그것을 없애기 위해 체내의 모든 나노머신이 움직인다.

그러니 방사성 물질을 폭식으로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자정작용이 일어나 회복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신이 되는 게 낫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저들의 신이 맞다.

어차피 이상한 놈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으니 내가 신이 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가프가 아니라 용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웃기는 일이었다.

체내의 나노머신을 망가트려 힘을 주는 존재가 신이 되고, 정작 그 체계를 정상으로 되돌려줄 힘을 지닌 ‘가프’는 마왕으로 배척받았다.

애당초 용을 봉인해 방사능이 퍼지지 않도록 한 것도 가프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북방의 절반은 방사능에 절어 인간이 살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었을 터.

저들이 떠받들고 모셔야할 존재는 용이 아니라 가프인 것이다.

때마침 가프의 권능을 내가 이었으니, 원래 주인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나는 발을 들었다.

그리고.

“······!!”

꽈아악.

성녀의 머리를, 밟았다.

성녀의 전신이 모욕감에 떨렸지만 확실하게 누가 위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이후, 나는 성녀의 머리를 밟은 채 파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북방 전역에 알려라. 너희들의 신이 이곳에 있음을.”

단순히 성지의 신이 된 채 끝낼 생각은 없었다.

카를로스 대공의 북벌을 막기 위해선 북방 전역에 내 존재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천 년 전, 가프의 출현을 제외하면 북방은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다.

설령 성지라고 해도 제대로 된 전사들을 출자하지 않고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최정예의 전사들은 이곳 성지에 없다.’

위대한 전사, 융과 같은 파간이 아예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카를로스 대공이 빠르게 북방을 정벌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들이 현상을 깨닫고 뭉치기 전에 성지를 중심으로 각개격파하려는 것이다.

금지된 마약까지 사용해가며 몰아붙인 까닭이다.

허나 성지에서 신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 모두가 간과하진 못할 터였다.

특히 수많은 파간들.

“너희들을 구원하고자 내가 찾아왔음을.”

그들을 구원할 존재가 이곳에 있었으므로.

***

『북방의 군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꽈아악.

받아든 전서를, 카를로스 대공이 구겨쥐었다.

성지의 너머에 있는 북방의 거대 민족들. 그들의 주인은 스스로를 ‘군주’라 부르며 북방의 정통한 주인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숫자가 일곱이고, 뭉치지만 않으면 각개격파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움직여 힘을 합치면 상황은 달라진다.

『황실에선 여전히 이야기가 없습니다.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북방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계속 부정하고 있습니다.』

『황궁에 정령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정령의 주인을 찾기 위해 대륙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약의 공급이 미뤄지고······.』

화르륵!

모든 전서를 태워버렸다.

카를로스 대공의 두 눈엔 분노가 가득했다.

‘핑계도 좋구나. 정령이라니.’

황실은 정령을 핑계로 제대로 된 답변조차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정령이라니. 사라진 신비가 하필 황궁에 왜 나타난단 말인가.

정령 때문에 정신이 없다는 핑곗거리는 잘도 만들어 내었다.

도리어 황제는 ‘제정신이 아닌 황태자가 북방으로 향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논지로 대공을 압박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북방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이상, 이곳에서 라인하르트를 죽여도 별 탈은 없겠으나 십 년 넘게 공들인 말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직접 제거하길 바라는 거냐, 데우스.’

정령은 핑계다. 북방에 있는 것도 황태자가 아니다.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직접 죽여 기강을 세우라는 뜻이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라인하르트의 독단이라는 소리인데.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북방의 머저리들이 성지로 모여들고 있다. 왜?’

알 수 없다.

몇몇 군주들이 급히 움직이는 탓에, 제대로 정보를 취합할 시간도 없었다.

뭉치기 전에 공격해야하지만 약의 공급이 늦춰진 상황.

시간을 지연하면 불리한 건 이쪽이다.

“‘데이몬’을 불러라.”

결국 카를로스 대공은 최후의 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

7군주, 샨은 눈앞의 존재를 바라봤다.

검은 면사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이자가 신이었다.

성녀가 인정하고 위대한 전사 ‘융’의 보증을 받은 인물.

파간을 치료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신이 성지에 나타났다고 했을 때, 샨은 믿지 않았다.

성녀의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두렵지 않느냐?”

거대한 거구.

괴물 같은 얼굴로, 샨이 물었다.

샨은 ‘위대한 다섯 파간’ 중에 일인이었다.

군주들 중에선 유일하게 파간이며 그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곱 군주 중 가장 빨리 성지에 도달한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파간이 된 이후로 ‘재생의 권리’를 잃었다.

다치면 재생되지 않는다.

벗겨진 피부와, 상처들은 도저히 그를 인간으로 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북방의 사람들도 혐오스러워하는 괴물.

다른 파간들보다 더욱 끔찍한 형상!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조차 그를 보고 비명을 내질렀을 정도다.

그런 자신을 마주하는 자들은 반드시 겁을 먹고 떨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면사 위로 보이는 것은 입뿐이지만, 도리어 미소를 지어보였다.

“샨. 가족을 되찾고자 인간의 형상을 잃은 자여. 내가 너를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있느냐?”

“······!”

샨의 몸이 움찔거렸다.

노예상인으로부터 가족을 되찾고자 그는 파간이 됐다.

파간이 된 이후 노예상인들을 죽이고 가족을 되찾았지만,

그를 괴물이라 생각한 가족은 먹히기 전에 제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측근들도 모르는 사실이다.

위대한 전사들은 다른 파간들에 비해 수명이 긴 편이었다.

그래서 이후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일곱 번째 군주가 되었다.

대륙에서 흘러들어오는 노예상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 같이 슬퍼하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다른 군주 중에는 그들과 알게모르게 유착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는 모르겠다만.’

샨의 두 눈에 분노가 새겨졌다.

어디에도 말하지 않은 슬픔을 감히 입에 담는다.

어디서 신의 행색을 하려 드는 건가.

거짓이면 죽일 것이다. 자신을 농락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나를 치료해라. 네가 정말 신이라면, 이 빌어먹을 몸뚱아리 정도는 고칠 수 있을 테지.”

< 파간의 구원자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