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33화 (33/146)

검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어느 강자와의 싸움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긴장감.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이토록 피가 말리는 기분을 느낀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

크로프트는 숨소리마저 죽였다.

경지에 이른 검사인 그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는 상황.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하여 그는 모든 영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크로프트뿐만이 아니었다.

성지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

위대한 전사의 탄생을 경배하던 파간들과 성녀까지도 모두가 침묵한 채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왜, 나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참다 못한 제르민이 물었다.

라인하르트가 성지에 들어가고 벌써 십여분이 지났다.

40걸음을 걸으면 위대한 전사가 되며, 100걸음을 걸으면 끝을 본다 전해지는 성지다.

5분 내로 나와야 정상인 라인하르트는 들어간지 10분이 훨씬 지났음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라인하르트가 성지에 들어가고 벌써 십여분이 지났다.

하지만 제르민의 물음에 답을 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40걸음을 걸으면 위대한 전사가 되며, 100걸음을 걸으면 끝을 본다 전해지는 성지다.

몰랐기 때문이다.

5분 내로 나와야 정상인 라인하르트는 들어간지 10분이 훨씬 지났음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성녀도, 파간도, 그 누구도.

성지가 사실 얼마나 긴지, 그 끝은 어디인지,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제르민의 물음에 답을 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몰랐기 때문이다.

성녀도, 파간도, 그 누구도.

당연히 대답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보내지 말아야 했던가.’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객관적으로 차갑게 생각하면 말렸어야 했다.

절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섰어야 하였다.

성지 안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저주.

그것은 크로프트도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강력하여, 자신도 들어가면 오래 버티지 못할 터.

그런 곳에 황태자를 들여보냈다. 미치지 않고서야, 죽으라고 보낸 것과 뭐가 다른가.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면 크로프트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라인하르트의 그 선명한 눈빛을 마주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라인하르트 전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책임을 다하리라.

성녀를 죽이고, 자신 역시도 죽겠다.

쿠릉!

그때였다.

성지가 광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지의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흔들림은 주변 전역에 여파를 만들었다.

“신께서 노하셨다!”

성녀가 호들갑을 떨었다.

성지의 주변에서 지진이 일어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허락받지 않은 이가 들어와서 노하신 게 분명하다!”

제국의 악마 따위가 성지에 발을 들였으니, 신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당장에 저 입을 베어버리고 싶지만 크로프트는 그녀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저주를 막는 동굴 입구의 마나벽이 얇아지고 있습니다.”

에디스가 말했다.

8서클의 마법사인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러할 것이다.

크로프트가 보기에도 성지의 입구에 묶인 저주가 풀려나려고 하고 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지?”

“모든 마나를 쏟아부어도 30분이 고작입니다.”

30분이 넘으면 마나벽이 뭉게지고, 저주가 세상에 방출된다.

이곳에 모인 3만의 전사들이 모조리 몰살당할 터.

뿐만 아니라 북방의 전역이 저 저주로 물들 터였다.

20만 제국의 병사들, 제르민과 에디스, 카이첼, 그리고 라인하르트까지.

그 영향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하리라.

‘전하.’

크로프트는 오러를 방출했다.

모든 오러를 방출시켜, 자신의 몸을 감싼 뒤.

“크, 크로프트경?”

“어딜 가시는 겁니까!!”

성지의 안으로, 몸을 날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막무가내로 가는 걸 혼자 보내서는 아니 됐다.

그렇게, 첫 걸음.

“큽!”

발을 뗄 수가 없다.

첫 걸음부터 저주가 전신을 옭아메려는 것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베어내고 막아낸다는 오러를, 저주는 빠르게 갉아먹고 있었다.

오러가 저주에 침범당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것이 성지의 시련.

수많은 전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라인하르트도 겪었을 저주의 무게.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목숨은 부지할 것이다.

하지만.

툭.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크로프트는 움직였다. 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갔다.

열 걸음에 다다르자 그를 감쌌던 오러가 거의 소진되었다.

태양과도 같이 밝게 빛났지만 지금은 연기와 같이 사라졌다.

스무걸음을 넘어가자 오러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서른걸음, 신체의 내부를 지탱하던 모든 힘이 마침내 끊겼다.

그리고 마흔걸음에 다다르자 신체변형이 시작됐다.

손과 발이 부풀어 오른다.

얼굴이 팽창하는 게 느껴진다.

‘100걸음보다 더 멀구나.’

40걸음을 걷고 나서야, 이 앞의 동굴이 훨씬 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질 않는 동굴.

위대한 전사들이 이곳에서 포기하는 건 바로 저 끝없는 동굴에 절망해서다.

어차피 끝에 닿지 못하리라 확신해서였다.

돌아가지 않으면 죽는다······.

‘내 생명에 미련은 없느니.’

있었다. 그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목숨에 미련이 없을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버렸다.

모든 걸 버렸다.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궁극에 닿는 것.

자신의 목숨을 바쳐, 라인하르트를 구해내면 그만일뿐.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심장에 남아있던 미약한 오러가 마치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모든 걸 쳐내고 오직 하나의 목적만이 남자, 그 작은 오러는 들불처럼 일어나 재차 크로프트의 전신을 감싸나갔다.

그 오러는 이전보다 훨씬 강렬했으며, 더욱 선명했다.

‘웃기는군.’

크로프트는 이 상황에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진정으로 모든 걸 버리고 나서야 벽을 넘을 수 있단 말이냐.’

자신의 모든 미련을 털어낸 순간 넘어선 벽.

소드마스터에 오른 이후 수십년을 바쳤지만 절대로 넘어설 수 없었던 벽.

그저 꿈이겠거니, 자신의 한계겠거니 생각하며 포기했다.

결코 넘을 수 없음에 좌절하며 희망을 접어버렸다.

그런데 그 벽이, 지금 허물어졌다.

그것은 마법사들이 꿈에 그리는 9서클의 경지와 같았다.

전설로만 화자되는 경지.

소드 엠페러.

‘보인다.’

벽을 넘자, 그의 눈에 마나가 보인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마나들.

‘저게······ 마나라고?’

하지만, 곧이어 그는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마나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날개를 푸닥이며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인 모습.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

크로프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세상은, 자연적이지 않다.

인공적이다.

여태껏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의 부분이 활성화 된 기분이었다.

뇌가 열린 것 같은 느낌.

새로운 게 보이고, 느껴지며, 그래서 의문이 생긴다.

허나.

‘지금은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크로프트는 상념을 지운 채 성지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벽을 넘었다고 해도, 이 저주는 장시간 견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백 걸음, 천 걸음, 마침내 크로프트가 문 앞에 섰다.

하지만 이미 그의 형체는 돌연변이처럼 변이한 이후였다.

온 몸이 짖뭉게지고, 모든 털이 빠졌으며, 하얀 피가 전신의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상태.

이제 더는 걸을 수 없었다.

사고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터벅. 터벅.

발걸음 소리를 내며, 한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전······ 하.”

남자, 라인하르트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가 변했다.

전혀 다른 생물을 접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혹여나 착각한 것일까.

지쳐 쓰러져서 환각이라도 보는 것일는지.

“고생했다. 크로프트.”

라인하르트가 손을 뻗었다.

스르륵. 동시에 수마가 밀려들었다.

“이 앞은 내게 맡기고 쉬어라.”

크로프트는 그 수마에 몸을 맡겼다.

[축하합니다. 경계를 넘은 자여.]

[그대는 ‘??? 번 째 위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대의 격에 알맞은 용을 배정하는 중입니다.]

[배정이 완료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

······ 의외였다.

크로프트가 성지 안으로 들어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온다는 것을, 사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미친 황제.

죽여야만 하는 역적.

모두가 울부짖으며 나를 저주하기 바빴으므로.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는 상황?

처음이었다.

그래서 한참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문앞에 쓰러진 크로프트를 보곤 당황하고 말았다.

용을 상대할 때조차 하지 않던 당황을 쓰러진 크로프트를 보고 한 것이다.

‘왜?’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왜 크로프트가 이곳에 있는가’였다.

동굴 안으로 숨은 건가?

아니면 누군가를 좇아서 들어온 걸까?

‘나를 구하러 들어왔다?’

허.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확신이 없었다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뭐가 걱정이 되어서 나를 믿지 못하고 들어온 것인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짓이다. 자살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허나, 그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제로. 치료할 수 있겠느냐?’

[방사선에 노출된 시간이 짧아, 가능성이 1%로 없진 않습니다.]

[자율신경 A.I ‘폭식’의 도움을 받으면 생존확률이 10%로 상승합니다.]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이 있다.

그거면 족하다.

손을 대자 폭식이 방사능을 먹어치웠다.

이어 사이오닉 에너지가 담긴 비인가 나노머신을 크로프트의 체내에 쑤셔넣자, 제로가 손상된 부위의 치유를 시작했다.

임시방편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혈색이 돌아왔다.

[세포가 빠르게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자연치유력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오류코드에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혈색이 돌아오고, 머리가 자라나며, 새살이 돋고 있다.

장애물을 제거한 것만으로도 크로프트 혼자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마나샤워.’

이 현상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마법사나 검사가 일정한 벽을 넘으면 겪는 마나샤워현상.

이로 인해 그들은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마나샤워와도 거리가 멀었다.

아예 재창조되고 있었다. 모든 몸의 세포가.

신기함을 넘어 경이로운 수준이다.

나노머신의 양도 훨씬 많아졌다.

어쩌면,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선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크로프트를 들쳐엎고 바깥으로 나갔다.

“······!”

바깥으로 나가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멍청한 표정의 성녀였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나의 귀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제국의 악마가, 성지에 도전하여 보기좋게 성공했으니까.

허나 그녀도 내가 성지의 끝에 도달해 저들이 모시는 신을 만났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나는 성녀와 전사들을 향해 말했다.

“꿇어라.”

쿠오오오오!

그 순간, 거대한 검은색 용의 형상이 내 머리 위로 생겨났다.

용의 전신. 신화에서 전승되어온 그 모습 그대로.

모두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특히 성녀의 두 동공의 흔들림은 지진이라도 난 것만 같았다.

폭식이 용을 먹어치운 후, 나는 용의 형상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용의 피부와 폭식이 결합해 세상 어느 것보다 단단한 절대적인 갑옷을 손에 넣었다.

갑옷은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알아서 재생되고 먹어치운다.

일종의 공생관계.

북방에서 얻은 가장 값진 보물이었다. 황궁비고에서도 이런 건 보지 못했다.

그러니, 꿇어라.

“내가 너희의 신일지니.”

경배하라.

무릎을 꿇고, 고개를 낮춰, 내 발에 입을 맞출 지어다.

< 경배하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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