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31화 (31/146)

―슬프군.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이란 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나를 자신의 무대에 올려놓고 광대처럼 죽인 게 바로 말피엘이었다.

모두를 선동하고, 제국을 갉아먹으며,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만든 게 저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짜증나는 건 말피엘의 오만방자한 태도다.

나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그저 자신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광대일 뿐이라는 그 빌어먹을 생각이 몸 전체에서 절절하게 흘러나왔다.

모든 걸 걸었음에도 발끝에도 닿지 못했다.

모든 걸 잃었음에도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비참한 광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를 부르는 거냐, 심부름꾼?”

용이 말했다.

이름을 듣고 반응한 것이다.

헌데, 심부름꾼이라.

듣기 좋은 어감은 아니지만 저 용은 어쨌든 확실히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가프를 데려온 심부름꾼으로서 말이다.

이걸 좋아해야할지 나빠해야할지.

이내 용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쉽지만, 내 이름은 말피엘이 아니니라.”

······ 확실히.

얼굴만 같지, 분위기는 미묘하게 다르다.

헌데, 심부름꾼이라.

이내 용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듣기 좋은 어감은 아니지만 저 용은 어쨌든 확실히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가프를 데려온 심부름꾼으로서 말이다.

“아쉽지만, 내 이름은 말피엘이 아니니라.”

······ 확실히.

이걸 좋아해야할지 나빠해야할지.

얼굴만 같지, 분위기는 미묘하게 다르다.

비슷하긴 해도 눈앞의 용과 말피엘은 지닌 기품이 완전히 달랐다.

타고난 기품은 쉽게 바뀌지 않는법.

말피엘은 눈앞의 용보다 훨씬 가벼웠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말라죽는 병에 걸린 중증의 환자였으니까.

그래도 눈앞의 용은 말피엘과 같은 관심종자의 기질은 없어보였다.

용이 이어서 말했다.

“허나 얼굴이 유사해서 한 착각이라면, 내 피로 만들어진 또 다른 타입의 ‘용’이겠지. 이 잘 빚어진 용안은 인세에선 찾아볼 수 없을 테니.”

재수가 없다는 점에선 같은 것 같았지만.

허나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에 나는 되물었다.

“너는 정말 용인가?”

“왜, 내가 용이라서 실망이라도 했느냐?”

실망한 건 아니다.

나는 여태껏 용이 생명체가 아닌 일종의 무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사능을 배출하는 핵무기.

일전 제로가 보여줬던, 찬란한 문명을 모조리 박살내버린 그런 무기의 한 종류라고.

하지만 눈앞의 용은 분명히 살아숨쉬고 있었다.

핵무기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

용이 피식 웃었다.

“용은 거창한 게 아니다. 열 두 위업의 달성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일뿐. 일종의, 신의 대리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신의 대리자.

문득, 신성교가 떠올랐다.

신의 교리를 설파하는 그 교단은 가장 먼저 말피엘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말피엘은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렸다.

어쩌면 신과 말피엘, 그리고 신성교 모두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열 두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누가 만들었다는 거냐?”

하지만,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제로를 얻고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신성교를 비롯한 온갖 교단들은 신성력이 신의 힘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나노머신을 비틀어 사용할 뿐이다.

위업을 주고 달성하면 힘을 부여한다는 이야기도, 그 주체가 ‘신’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초월적인 누군가.

혹은 악마에 가깝다.

신성교가 말하는 그 공명정대하고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말피엘에게 굳이 힘을 줬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용은 하늘을 가리키며 단정지었다.

“신.”

······ 기대를 벗어난 대답이다.

신이 자신의 위업을 실천시키고자 만든 게 용이라는 뜻이다.

나는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열 두 위업을 모두 달성하면 어떻게 되지?”

“신격을 얻는다. 신이 될 수 있다. 나도 열 개 뿐이 이루지 못했지만, 아쉬운 일이지.”

신이 된다.

정말 그럴까?

말피엘은 신이 되지 못했다.

12가지의 위업을 모두 달성했음에도.

신과 같은 힘은 얻었지만, 분명히 신은 아니었다.

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허나 나는 굳이 그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열 한 번째 위업이 가프를 죽이는 것이었나보군.”

“그래. 내 열 한 번째 위업의 대상은 가프였다. 우리는 십 년이 넘도록 싸웠고, 가프는 내 하반신을 베어냈지만 그로 인해 저주에 걸렸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 내기를 시작했지.”

내기가 시작되고 천 년.

용이 있는 곳은 성지로 변했다.

수많은 전사들이 도전해 죽고, 파간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선 용도 신의 피조물이라 할 만 하였다.

자신이 만든 시련에 따라 힘을 주거나 죽이기도 했으므로.

그리고 가프는 용에게 닿고자 천 년간 이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용은 어떻게 만들어지지?”

“궁금한 게 많구나, 심부름꾼이여. 허나 천 년만에 대화가 통하는 상대다. 내 흔쾌히 대답해주도록하마.”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용이 이어서 말했다.

“나도 모른다.”

“······.”

“확실한 건, 많은 위업을 달성한 용의 피로 같은 타입의 용을 만들어낸다는 것뿐이니라. 네가 나와 비슷한 용을 보았다면 그런 이유일 터.”

일종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피엘이 지금 눈앞에 있는 용을 본따 만든 존재라면, 왜 그토록 자신을 신격화하는데 노력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독창성 없는 복사판이 진짜가 되려고 발버둥친 게다.

카를로스 대공이 이 용을 가졌다면, 정작 원본에게는 덤비지 못한 비운의 가짜라고 할 수 있었다.

실상은 불쌍한 녀석이었다. 물론 동정심은 전혀 가지 않았다.

용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눈이 마치 뱀처럼 변했다.

“그런데 의문은, 너에게서도 미약하게나마 동족의 향이 느껴진다는 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용은 번식이 불가능한데.”

“내게서 용의 냄새가 난다는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일이다만,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너는 분명히 용의 피를 이었군.”

용이 확언하였다.

내게서 용의 냄새가 난다면 이는 황실의 피 때문일 터였다.

제국을 세운 절대자.

그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다만, 그는 열 개의 위업을 달성한 최강자로 알려져있었다.

제국을 세운 게 용이라는 뜻이고, 황실은 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용은 번식이 불가능하다며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경고. 남은 에너지 잔량이 30%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용자 보호모드의 남은 시간 7분 30초.]

[탈출하십시오.]

그러나 더는 문답을 주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잔여 에너지가 부족하다.

이제 슬슬 나가야 했다.

‘칼리번처럼 지배할 순 없나?’

하지만 이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나갈 순 없었다.

정령 칼리번의 때처럼, 저 용을 취할 수만 있다면 분명히 엄청난 힘이 될 것이었다.

열 개의 위업을 달성한 용.

하물며 말피엘의 원본이라면 말피엘을 상대할 좋은 수가 되리라.

그게 아니더라도 등장할 때 찍어눌러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관리자권한의 등급이 부족합니다.]

[A.I가 특급의 프로세스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대상 ‘용’의 지배를 위해선 관리자권한 등급을 1등급까지 상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제로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5등급의 관리자권한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저 용 역시 A.I라는 건 알게 됐다.

‘용이 A.I라면 말피엘 또한 A.I일 가능성이 높다.’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관리자 권한의 등급상향으로 용의 A.I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필시 말피엘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이제 내 차례다.”

궁금증을 풀어주었으니, 자신이 원하는 것도 이루겠다는 말이었다.

용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소름끼치는 뱀과도 같은 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천 년의 기다림도 의미가 있었다. 가프여, 네가 내 다리를 가져와주었구나.”

그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문답 몇 번 해줬다고 다리를 잘라가겠다는 건가?

“최종 승리자는 결국 나다. 가프. 완전해진 육체로 이번에야말로 신이 되리라.”

그 순간 어마어마한 숫자의 방사능을 품은 나노머신이 그의 주변으로 일어났다.

바깥에 있는 숫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밀도.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뻔히 보였다.

“얌전히 보내줄 생각은 없나보군.”

“걱정마라. 죽어서 내 다리가 되는 건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니.”

내가 용의 피를 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자 용의 두 눈에 탐욕과 광기가 머물렀다.

나를 죽여 자신의 잃어버린 하반신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살면서 들은 말 중 기분 더럽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말이었다.

내가 하반신이라니.

[경고. 특급 프로세스 ‘용언’이 실행됩니다.]

[경고. 잔여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경고. 탈출하십시오.]

용언.

용의 말에 깃든 힘은 절대적이다.

그 힘은 전설이었다. 9서클 대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을, 용은 숨쉬듯이 사용할 수 있었다.

“죽어라.”

동시에, 압도적인 양의 나노머신이 나를 덮쳐들었다.

[경고. 남은 에너지 잔량이 29%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경고. 남은 에너지 잔량이 28%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경고. 남은 에너지 잔량이 27%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빠르게 떨어지는 에너지.

저 용언을 막기 위해 제로가 에너지를 방출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0%가 되면 제로가 멈추고 나 역시 죽겠지.

크리스탈에서 튀어나온 선들이 내 몸을 옥죄었다.

빠져나가야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버티는 게 고작.

그렇다고 넋놓고 용의 하반신이 될 수도 없는 노릇.

“······ 오호라.”

즉사의 용언을 견뎌내는 나를 보며 용이 흥미롭다는 눈빛을 던졌다.

보통이라면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죽어야 했다. 평범한 인간이 견뎌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제로가 기동하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이다.

즉사의 용언을 비트는 상대라니.

“역시 평범한 인간은 아니로구나. 하기야, 용의 피를 이었으니 당연한 소리겠지. 더욱이 좋다.”

용의 두 눈에 흥미가 생겼다.

비틀고 쳐내도 한계가 있는 법.

어디까지 막아내나 궁금해졌다.

[경고. 특급 프로세스 ‘용언’이 실행됩니다.]

“죽어라.”

[경고. 특급 프로세스 ‘용언’이 실행됩니다.]

“죽어라.”

[경고. 특급 프로세스 ‘용언’이 실행됩니다.]

“죽······ 흠?”

잔여에너지가 3% 아래로 떨어졌다.

죽음이 다가옴에 따라 공포를 느낄 만도 하지만 나는 그저 웃고 있었다.

“실성이라도 한 거냐?”

“웃겨서 말이다. 패배자 주제에 승리자인 척 하는 꼴이.”

용은 가프에게 패배를 선언했지만 저 태도를 보아하니 제대로 승복하고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언행불일치의 끝판이다.

용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않느냐. 내기라고 했지만, 너는 버러지같이 기다린 게 전부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여기서 죽음을 기다릴뿐이었던 벌레 주제에, 가프와 네가 같은 선상에서 ‘내기’를 했다는 게 좀처럼 믿겨지지가 않아서 말이다.”

가프는 아니었다.

가프는 천 년동안 쉬지 않고 싸워왔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목표를 이루고자.

반면에 저 용이 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내기’를 한 것인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싸구려 도발이군. 그런 도발에 넘어갈 것 같나?”

“도발이라니. 나는 너와 가프가 같은 격이 아니라고 말한 것뿐이다. 10년을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도망친 벌레에 불과하다는 게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곳에 천년간 꼭꼭 숨어있지도 않았겠지.”

“··· 겁을 상실했구나.”

[경고. 특급 프로세스 ‘용언’이 실행됩니다.]

[잔여 에너지가 1% 이하입니다.]

[피하십시오.]

“죽어라.”

인상을 굳힌 용이 용언을 발동했다.

1%도 채 남지 않은 에너지.

그 순간이었다.

“내가 이겼다, 용.”

가프.

쥐고 있던 살뭉치가, 내 손으로 빨려들어왔다.

< 용(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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