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보호 모드로 전환됩니다.]
[보호 모드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남은 사용자 보호 시간 37분 12초]
[경고. 고농도 방사능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고. 지속시간 내로 탈출을 권합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제로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러자 친절하게 눈앞으로 남은 시간을 띄우며 벗어날 것을 권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줄어드는 시간.
‘충분하다.’
거침없이 발길을 옮겼다.
‘기동하고 있는 한, 방사능으로부터 완전히 나를 지킨다고 하였지.’
과거 제로가 했던 말들.
그 자신감을 믿었다.
방사능에 오염된 인류를 구하고자 만들어진 인공지능 머신.
그것이 제로인 탓이다.
물론 제정신이라면 하지 못할 짓이었다.
눈앞에서 전사들이 육체변형을 일으키며 죽어나가는 걸 보았으니까.
어지간히 담이 큰 사람이라도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일 생각은 못하리라.
그것이 제로인 탓이다.
어지간히 담이 큰 사람이라도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일 생각은 못하리라.
물론 제정신이라면 하지 못할 짓이었다.
‘용을 취하지 않으면 어차피 죽는다.’
눈앞에서 전사들이 육체변형을 일으키며 죽어나가는 걸 보았으니까.
카를로스 대공에게 죽거나 말피엘에게 죽을 것이다.
아니면 바알의 말마따나 위업으로 선정되어 갑작스럽게 변고를 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용을 취해야만 카를로스 대공의 힘을 빼놓고, 말피엘로부터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
말피엘이 용의 존재로 인해 카를로스 대공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가 절반만 사실이라도 용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으므로.
그리고 시기의 차이일뿐 어차피 죽는다면, 내 스스로 선택하고 도전하다가 죽고 싶었다.
‘속이 매스껍군.’
문제는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위액이 역류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제로는 모든 에너지를 오직 방사능의 침입을 막는데 사용했다.
미세한 방사능이라도 유입되는 순간 인체에 치명적이었으니.
그 공백으로 인해 어지럼증상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애써 고개를 털며 몇 걸음을 더 걷자, 어느새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위대한 전사의 영역을 넘어섰다.’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동굴을 깊게 들어갈수록 파간의 급이 결정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위대한 전사. 북방에도 몇 없다는 명예로운 존재들.
열 걸음을 한참 넘겼으니 성녀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쯤하고 돌아간다 하더라도 소기의 성과는 이룬 셈이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을 보는 게 내 목표였으니.
계속해서 걸어, 대략 100걸음 정도를 넘어가자 허허벌판이었다.
입구에 쌓여있던 시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도달한 전사가 지금껏 한 명도 없었다는 방증이었다.
[방사능 수치가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주의를 바랍니다.]
온갖 가스 같은 것들이 눈에 확연하게 들어올 지경이었다.
도저히 이 이상은 인간이 가라고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카를로스 공작은 성역을 강화해서 들어온 건가?’
그래서 카를로스 대공이 용을 취한 방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인간은 끝까지 닿는게 불가능할 것 같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그의 장기인 ‘성역’이다.
자신의 주변을 성역화시켜, 그 무엇의 침입도 불허하는 권능.
하지만 제아무리 성역이라도 이 방사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을 터였다.
이곳의 방사능은 나노머신으로 정화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말인 즉, 성역 또한 마나라면 결국 방사능에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소문대로 리치와 밀접한 관계여서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리치.
자신의 생명을 따로 저장하여, 영원불멸하는 존재.
리치나 언데드와 같은 흑마법은 오래전에 사장됐다.
하지만 카를로스 대공이 리치와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은 있었다.
그 리치를 이용해 성지의 ‘용’을 취했을 가능성은 있었다.
죽은 자를 이용해 성지를 공략한다. 가능할 법한 발상이다.
정말로 리치가 실존한다면 말이다.
뭐가 됐든, 카를로스 대공이 용을 취했다면 나 또한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사······려저······.”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지하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했을 때 그 옆에 놓인 ‘살뭉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살뭉치였다.
뭉게지고 터져서 눈, 코, 입이 제대로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말을 하고 있었다.
‘허.’
놀라운 일이었다.
여기까지 들어와서 살아있는 것을 만날 줄은.
저들이 말하는 파간의 기준을 한참 초과한 영역.
족히 천 걸음 이상은 들어온 곳이었다.
위대한 전사도, 성지를 발견한 이래 그 누구도 닿지 못했을 이 장소에 살아있는 인간이라니.
그야 형체는 인간과 거리가 멀었지만.
거의 슬라임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너는 누구냐?”
“나··· 느······.”
분명히 인간이었다.
하지만 살뭉치는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가 누군지도 잊어버린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하루이틀 이곳에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지나가는 게 상책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시시각각 줄어드는 중이었다.
사용자 보호모드가 꺼지면 순식간에 내 육체도 변형될 것이다.
용을 취해 돌아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허나, 가만히 지나갈 수가 없었다.
보였기 때문이다.
[방대한 양의 비인가 나노머신이 생명을 유지하는 중입니다.]
엄청난 양의 나노머신이.
나노머신은 살뭉치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단순히 배회만 하는 게 아니라 방사능으로부터 살뭉치의 ‘생명’을 유지시켰다.
그 양은 8서클의 대마법사 에디스보다도 많았다.
하여, 나는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살아있는거지?”
이렇게 아득바득 살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본래의 몸조차 잃어버린 채 억지로 버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육체변이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을 텐데도 저 살뭉치는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의지에 이끌렸다.
“궁···극······.”
궁극?
마지막. 끝. 벽을 넘겠다는 의미일까?
“데려다··· 줘······.”
“동굴의 끝까지 데려다달라는 말이냐?”
“······.”
살뭉치가 기력을 다한 듯 말을 멈췄다.
긍정이다.
살기 위한 의지보다도, 동굴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이 더 큰 듯싶었다.
무엇이 그를 이 동굴로 이끌었을까.
무엇이 그를 계속해서 나아가게 하는가.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시간낭비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추잡스러운 게 말을 걸었다며 걷어찼을 것이다.
혐오스럽다는 표정과 함께 저 멀리 치워버렸겠지.
지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나는 발을 뗐다.
살뭉치를 무시하고, 용에게 닿기 위하여.
하지만 이내 멈춰섰다.
등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살뭉치를 들어올렸다.
“··· 넌 나보다 강한 놈이군.”
나는 강하지 못했다.
결국 광증을 이겨내지 못했으므로.
제아무리 제로가 뇌를 누른 탓이라고는 하나, 마지막에 이르러선 나 스스로도 광증에 몸을 맡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죽이고, 또 죽이며, 대륙을 피로 물들였다.
세상을 그저 저주하기만 했다.
하지만 살뭉치는 이런 형체가 되고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을, 목표를.
모두가 죽어버린 이 지옥과도 같은 장소에서 셀 수 없이 오랜시간동안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 의지에 예의를 표했다.
내가 해내지 못한 걸 해낸 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의였다.
생명이 꺼져가고 있음이 느껴졌지만 적어도, 끝을 보게 해줄 순 있으리라.
‘가볍다.’
살뭉치는 가벼웠다.
한 손에 든 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철문 하나가 나타났다.
쿵!
문을 밀고 당겨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노머신을 빨아들인다. 이 안에 방사능을 뿜어내는 게 있다.’
오러나 마법으로도 문을 강제로 열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강력한 마법. 권능 같은 것에 의해 문은 지켜지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이 너머가 성지의 끝일 것이다.
다 와서 멈출 순 없었다.
[마스터. 문의 가운데에 손을 올려주십시오.]
그때였다.
방법을 구상하고 있을 때 제로가 말했다.
천천히 철문의 중심부에 손을 대자 틱- 소리와 함께 철문의 내부에서 톱니가 맞춰졌다.
[보안코드 해킹을 시작합니다.]
틱. 티리리릭.
묘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푸른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해킹이 완료되었습니다.]
끼이익.
철문이 비명을 내지르며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제로의 기능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것도 가능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만능의 열쇠가 따로없군.’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인생이라고 했던가.
머릿속의 벌레.
매일같이 원망하던 그 벌레가, 지금은 내 오른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잘하면 황궁비고도 열 수 있겠는데.’
황제만이 열 수 있도록 온갖 장치가 되어있는 문.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철문도 그 황궁비고에 비견되는 수준이었다.
몰래 열 수만 있다면 비고 안에 있는 또 다른 정령무기도 가지고 나올 수 있을 터.
하지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문의 내부.
거대한 크리스탈의 위에, 한 흑발의 남자가 있었다.
크리스탈 곳곳에 튀어나온 선들이 남자의 신체와 연결돼 있었는데, 상반신만 존재할뿐 하반신은 잘려나간 듯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나를 바라봤다.
아니,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살뭉치에게 가 있었다.
“마왕이여, 우리의 내기가 천 년만에 막을 내렸다.”
······ 마왕?
설마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살뭉치를 마왕이라고 부른건가?
백은의 마왕이라 불렸던 카이첼처럼, 마왕이라 불린 존재는 더러 있었다.
하지만 북방에서 마왕이라 불린 자는 천 년 동안 단 한 명뿐이었다.
천 년전 북방을 유일하게 통일했다 전해지는 ‘마왕 가프’가 바로 그였다.
4황비가 마왕 가프의 피를 이은 전승자였으니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살뭉치가 정말 마왕 가프라면, 어마어마한 양의 나노머신이 설명이 됐다.
남자가 말했다.
“나는 결국 너를 죽이지 못했고, 너 또한 나를 죽이지 못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무승부겠으나······ 그래도 내게 닿은 그 노력만큼은 인정해주마.”
남자의 눈이 가라앉았다.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눈빛으로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이겼다, 가프.”
부르르르!
살뭉치가 거세게 흔들렸다.
비록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감동은 절로 느껴졌다.
남자의 말을 듣고, 나 또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왕 가프!
혹시나 했는데 정말 마왕 가프였다.
‘용.’
그렇다면 저 남자는 용일 것이다.
마왕 가프가 용과 대결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북방의 전설로 전승되고 있었다.
그 대결이 천년동안 지속되고 있었다는 뜻.
무엇보다 성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허나 용의 눈에 나는 없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로 일관했다.
하지만 저 용을 본 순간부터 내 인상은 펴지지가 않았다.
무시를 당해서가 아니다.
이건 숨길 수 없는 거부반응이다.
하늘 아래 같이 있을 수 없는 이를 만났을 때의 현상이었다.
그도 그럴 게.
“······ 말피엘.”
저 빌어먹을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용(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