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29화 (29/146)

신과 실시간으로 소통이라도 하는 걸까?

나와 제로처럼 말이다.

아니라면 저토록 빠른 허락이 가능할 리 없었다.

‘광기가 느껴지는군.’

매우 익숙한 눈빛이다.

전사들도, 성녀도 하나같이 미쳐서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었다.

이해는 간다.

한 달이 넘도록 아무런 보급 없이 갇혀있었으니.

저장된 식품이라고 해봤자 저 많은 전사들의 수요를 감당할 수준은 못됐겠지.

그나마 나는 배는 안 굶주리고 미쳤었다.

하지만 굶주림으로 인한 광기는 숱하게 봐왔다.

대흉년으로 인해 대륙 전체가 배고픔에 시달렸을 때.

자식을 팔고, 먹고, 같은 인간을 습격해 해체하던 시절이었다.

귀족들은 비축한 식량을 풀지 않았다.

스스로의 사리사욕을 위해 더 모멸차게 수탈했으며, 먹는 입을 줄이고자 전쟁에 기름을 부었다.

“왜 대답이 없지? 겁이라도 먹은 게냐?”

자식을 팔고, 먹고, 같은 인간을 습격해 해체하던 시절이었다.

“왜 대답이 없지? 겁이라도 먹은 게냐?”

귀족들은 비축한 식량을 풀지 않았다.

성녀의 비웃음이 커졌다.

스스로의 사리사욕을 위해 더 모멸차게 수탈했으며, 먹는 입을 줄이고자 전쟁에 기름을 부었다.

전사들 역시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반가운 광기라서 잠시 추억에 젖어있었을 뿐이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저 성지에 들어가서 살아오면 인정해주는 건가?”

“오냐. 열 발 자국만 안으로만 들어가도 네가 성자임을 인정해주마.”

열 발자국은커녕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전사들이 성지로 향하며 즉사하는 모습을 보았을 테니.

‘열 명 중 한 명만 파간이 된다.’

치사율 90%.

하지만 이는 기본적인 숫자였다.

얼마나 깊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파간의 질도 달라진다.

첫 한 발을 들인 채 멈추면 제대로 된 파간이 될 수 없다.

최소 열 발자국은 들어가야 파간이라 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스무발자국을 넘어가면 ‘전사 파간’이라 불리며, 작은 도시를 지키는 수문장이 된다.

서른발자국을 넘기면 ‘대전사 파간’이라 불리며, 성지를 지키는 수호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마흔발자국을 넘기면 ‘위대한 파간’이라 불리며, 북방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다.

허나 위대한 파간이 되는 숫자는 만 명 중 한 명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위대한 길에 들어서고자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

북방을 수호하는 위대한 파간은 오직 모든 상황에서 자유의지로 움직일 수 있기에, 성지를 지키는 전쟁의 참여유무조차도 자유였다.

현재 북방에 존재하는 위대한 파간의 숫자는 다섯.

그중 한 명이 융이었다.

‘위대한 전사가 악마를 성자라 언급하셨다. 바로잡지 않으면 분열이 생길 터.’

성녀는 제국의 악마를 바라봤다.

저 악마가 무슨 수를 써서 융을 회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성공하지 못해.’

막상 성지의 앞에 서면 그 위대함에 겁을 먹고 주저앉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사라면 파간이 되는 걸 명예롭게 여겨 죽음도 불사하지만 저놈은 제국의 악마였다.

제국의 악마 따위가 전사의 명예를 알 리 없지 않나.

그나마 걸리는 게 있다면 다른 이들이다.

저 젊은 악마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지만, 그 주변의 이들이 모두 하나같이 범상찮은 기운을 풍겼다.

“물론, 당연히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선 안 된다. 성자는 오롯이 자신만의 격을 쌓은 존재. 혼자서 도전해라.”

“전하.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제르민이 간곡하게 요청했다.

근심가득한 얼굴.

대부분의 전사들조차 버티지 못한채 즉사해버리는 동굴의 안으로 걸어간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려야 했다.

에디스도 고개를 저었다.

“자살행위입니다. 8서클의 마법사인 저조차도 저 안에 들어가면 살아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일반인도 느껴질 정도였다.

저 성지 안에 깃든 위험한 마나가 말이다.

위험하다.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니다.

저 마나는, 오직 인간을 죽이기 위해 존재한다.

저런 마나들이 뭉쳐있는 현상에 대해 그는 알고 있었다.

“전하, 킬링필드라고 들어보셨습니까?”

“9서클의 마법이라 불리는 그것 말인가?”

“맞습니다. 고대의 ‘용’들이 사용했으며, 오직 9서클의 마법사만이 다룰 수 있다고 전해지던 절대영역이 바로 ‘킬링필드’입니다. 그저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모든 생명을 죽이는 죽음의 대지지요.”

“저 동굴 안이 킬링필드다?”

“예.”

에디스는 확신했다.

저건 마법이다.

그것도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9서클 마법 킬링필드다.

8서클 마법사이며 마탑주인 에디스는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조차도 저 안에 들어가면 열 발자국이나 겨우 버틸까 싶었다. 수십 겹으로 마나벽을 쳐도 그 정도가 한계이리라.

도움을 주는 것도 차단되었으니 라인하르트 혼자서 저 안으로 들어가면 즉사할 것이다.

말려야 한다.

안 된다면 기절이라도 시켜서 빠져나가야 했다.

아무리 충성을 맹세했다지만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라인하르트와 딸을 무사히 내보내리라.

에디스가 숨을 가다듬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습니까?”

그때, 처음에는 막아섰던 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이제야 과거 라인하르트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대공이 숨기려했던 것.’

카를로스 대공이 그림자를 색출하고, 성지의 침략을 미루면서까지 취하고자 했던 것.

그게 바로 저 동굴 안에 있는 무언가라면?

북방의 전사들조차 살아돌아오지 못하는 죽음의 대지. 그 안에 있는 것을 몰래 빼돌리고자 시간을 끈 것이었다면?

······ 그 방법을, 라인하르트 황태자도 알고 있다는 건지.

‘처음부터 이곳이 목적이었다. 전하께선 알고 계셨다.’

카를로스 대공이 취하고자 하는 것을 빼앗을 작적으로 북방에 온 것이다.

에디스의 손녀를 치료한다는 명목하에.

이제와서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이 목표였다면 그간 라인하르트가 보인 행보가 이해되었다.

크로프트는 라인하르트의 눈을 마주했다.

자신감 가득한 표정.

흔들리지 않는 눈빛.

과거의 흐리멍텅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저런 자신감이 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방법이 잘못되어 라인하르트가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 또한 이곳에 묻혀야만 했다.

‘살 만큼 살았으니, 내가 죽는 것은 걱정되지 않으나.’

라인하르트는 희망이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도와주진 못할망정 사지로 몰 수는 없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저 동굴 안에 도전하는 게 낫다.

“크로프트. 나를 믿지 못하겠나?”

하지만.

믿고 따르기로 했다면, 주인의 선택 또한 존중해야 옳다.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크로프트는 결단을 내렸다.

“··· 믿고 따르겠습니다.”

라인하르트의 결정에 따르겠노라고.

라인하르트가 여태껏 보여준 이적들. 그 신비한 재능들의 가능성을 믿었다.

설령 라인하르트가 잘못된다면 이곳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저 성녀.

저 성녀의 목만큼은, 반드시 베어버리리라.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 내가 무서워라도 할 줄 알고?”

성녀가 몸을 잘게 떨었다.

크로프트의 살기를 읽은 탓이다.

에워싼 파간들도 동요했다.

―강자.

강자의 기척.

크로프트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깊이.

그 깊이는, 마치 무저갱과도 같았다.

위대한 전사라 불리는 존재들보다도 더 깊어보였다.

제국의 악마들 중 특출난 이들조차도 저런 기운을 풍기진 않았다.

―마왕······.

꿀꺽!

긴장한 파간들이 본능적으로 무기를 들고 겨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힘이야말로 마왕이라 불릴만 했다.

본능이 강화된 파간들만이 크로프트를 알아보고 전율하였다.

“그럼 다녀오지.”

나는 가볍게 산책이라도 다녀올 것 같이 말했다.

제르민과 에디스는 여전히 걱정 가득한 눈빛이지만 크로프트가 믿음을 보냈다. 자신들 또한 그저 믿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조심하세요.”

웬일로 카이첼이 걱정어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녀가 보기에 이곳은 정상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에픽. 그것도 상당한 레벨의.’

어쩌면, 태고의 에픽 중 하나가 이곳에 잠들어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두 태고의 에픽이 맞붙는 셈이다.

누가 이길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엄청나게 전투적인 에픽이야. 대체 어쩔 셈일까?’

입구에서부터 저런 죽음의 마나를 풀풀 풍겨대는 걸 보니, 상도덕 없는 에픽임에는 분명해보였다.

저런 에픽은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왜 굳이 죽을지도 모르는 길로 들어서는 걸까.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지만, 태고의 에픽만이 가진 자존심 대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원래 자기자아가 강한 에픽들은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이라고 하니까.

그녀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 정도로 부릴 자존심 같은 건 없어서 다행이었다.

“비켜라.”

툭.

발걸음을 옮겼다.

성녀가, 파간들이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라인하르트가 움직였다.

마침내 동굴 앞에 섰을 때,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울 거다. 포기하고 싶겠지.’

성녀의 비웃음이 더욱 커졌다.

동굴 앞에서 멈춰선 걸 보니 이제야 겁을 먹은 모양이다.

자. 포기를 외치며 울며불며 매달릴 시간이다.

자신은 성자가 아니라고, 그냥 흔한 악마새끼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살려줄 용의는 있었다.

‘살려달라고 해라. 속죄하겠다고 해!’

성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이내.

툭.

“······!”

“흐읍!”

제르민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라인하르트가,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인 것이다.

허나 육체변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에 성녀가 이맛살을 구겼다.

‘운이 좋은 녀석이로군. 그래도 이제 고작 첫 걸음이다. 한 발, 한 발이 죽음과도 같이 느껴지겠지.’

열 발자국.

그 정도는 가야, 파간의 힘을 얻는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게 지옥이라고 모든 파간이 말했다.

저 안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숙련된 전사조차도 발을 옮기길 꺼려할만큼.

투욱-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한 발자국을 더 옮겼다.

툭.

툭.

바닥을 차는 소리와 함께, 거침없이 나아갔다.

“뭐··· 야···?”

멈추지 않는다.

거리낌이 없었다.

그냥 걷고 있었다.

아무런 육체변이도, 아무런 생체기조차도 생기지 않는다.

체질에 적합한 육체라도 약간의 변이는 생기기 마련인데.

그렇게 열 발자국.

“말도 안돼······!”

성녀가 목놓아 외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더욱 놀라운 건, 열 발자국을 가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무발자국.’

전사 파간이라 불리는, 도시의 수호자의 격을 갖게 되는 구간.

역시나 라인하르트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

서른 발자국.

대전사, 성지의 수호자라 불리는 구간.

하지만 성녀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나아간다.

······ 그렇게, 마흔 발자국.

“아.”

“경배하라.”

파간들이, 무릎을 꿇는다.

모든 전사가 경외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곳에서, 위대한 전사가 탄생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마흔 발자국을 가서도 멈추지 않았다.

더, 더욱, 깊숙하게.

이윽고.

“······.”

모두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용(3)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