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27화 (27/146)

[녹화한 동영상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구성합니다.]

[수집한 데이터를 기초하여 재구성합니다.]

[대상 ‘크로프트’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정신 보호 프로그램이 가동 중입니다.]

그간 크로프트에 대해 쌓아온 전투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아바타.

무표정하기 이를데 없는 크로프트의 아바타가 바로 내 수련상대다.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수련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기능이 바로 ‘딥 드림’이었다.

관리자 권한의 격상으로 새로 개방된 능력!

‘똑같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핏줄 하나, 주름 하나까지 전부 완벽하게 구현해낸 것이다.

이곳이 꿈속이라는 생각조차도 전혀 들지 않았다.

‘허.’

제로의 기능에 새삼 감탄이 나올 따름이었다.

하지만 마냥 넋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크로프트의 전신에서 오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패트릭을 압살할 때 보여줬던 바로 그것이다.

제로의 기능에 새삼 감탄이 나올 따름이었다.

패트릭을 압살할 때 보여줬던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마냥 넋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 손에도 어느덧 검 한자루가 쥐어져있었다.

크로프트의 전신에서 오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엄청난 위압감이로군.’

패트릭이 느꼈을 감정이 이러했을까 싶었다.

정신 보호 프로그램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오금이 저리는 것 외에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나는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몸의 움직임 역시 자연스러웠다.

현실의 몸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의 수련성과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내가 준비를 끝마치자 제로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

어느덧 눈앞에 크로프트가 있었다.

크로프트의 존재감을 느끼자마자, 검에 두동강이 났다.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었습니다.]

잘린 목을 두 손으로 매만졌다.

다행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크로프트의 아바타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처음 상태로 초기화된 것이리라.

목이 잘린 느낌이 생생하지만 금새 가라앉았다.

이 역시 정신 보호 프로그램에 의한 현상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현실에서도 영향이 있을 것 같았다.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했다.’

이맛살을 구겼다.

처음부터 이길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한 건 자존심이 상했다.

“이번엔 패트릭으로 하지.”

그래. 크로프트는 너무 욕심이었다.

눈높이를 조금 낮춰서 현실적으로 수련을 할 필요가 있었다.

[대상 ‘패트릭’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자. 이번에야말로 일격을 막아······.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었습니다.]

······ 역시,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다.

오히려 올라야 할 산이 높음에 감사한다.

그만큼 오르는 순간 성취감도 커질 테니까.

“테베우스로 하겠다.”

[대상 ‘테베우스’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생각해보니 테베우스가 제대로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결국 회심의 일격으로 목이 잘렸으니.

쌓을 데이터조차 없는 게 당연했다.

제로가 말했다.

[세부설정을 이용해 가상의 아바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간의 전투측정 데이터를 활용하여 세분화한 지표에 따라, 설정을 해주십시오.]

곧이어 눈앞에 몇 개의 창이 떠올랐다.

―평범한 성인남성의 수준입니다.

―정예병사의 수준입니다.

―일반기사의 수준입니다.

―정예기사의 수준입니다.

[현재까지 측정된 전투기반 지표로는 전투력 레벨 40의 아바타까지 생성 가능합니다.]

[레벨을 정하고 인원수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배경 등의 세부설정 또한 가능합니다.]

녹화된 내용이 없어도, 전투 데이터가 쌓이면 더높은 레벨의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레벨, 인원수, 상황과 배경 따위를 설정해 모든 경우에서 싸움이 가능토록 만들어주는 만능의 머신.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크로프트는 몇 레벨인 거지?”

[현재까지 쌓인 전투데이터를 기반으로 결과를 도출하면 전투력 레벨 110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오차범위 10% 내외이며, 그날의 상황이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110이라.

여전히 아득하다.

그래서 더욱 감이 잡히지 않았다.

“패트릭은?”

[녹화된 내용으로만 결과를 도출했을 때 90이라는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꽤 강한 축에 끼는 게 패트릭이다.

크로프트와 20합을 나눌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가 레벨 90. 그렇다면 일반적인 소드마스터는 70이나 80정도라는 건데.

“그럼 나는 몇이냐?”

[마스터의 전투력 레벨은 측정불가입니다.]

측정불가?

측정이 안 된다는 의미다.

“왜 측정이 불가한 거지?”

[변수 작용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더 많은 전투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아쉬움에 혀를 찼다.

하긴, 제로의 말도 이해는 되었다. 제로 자체가 워낙 변수인데다 최근 얻은 사이오닉 에너지도 정확한 무력수치로 표현하기는 애매한 것이다.

물론 이 레벨에 대해 맹신할 필요는 없다.

여러 요소가 들어가면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다.

제로도 그날의 상황이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 만큼 ‘절대적’인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참고사항.

그리고 그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하여, 대비하고 수련이 가능토록 만들어주는 게 바로 이 공간이었다.

“레벨 1, 한 명으로 시작하겠다.”

그러니 처음부터 차근차근 올라가자.

한계를 확인하고, 뚫어내며, 정상에 오르는 게 나의 목표였으므로.

***

“······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습니까?”

제르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은 제대로 잤다.

문제는 증강현실 속에서 몇 번이나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정신보호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더라도, 열 번에 가깝게 죽음을 맞이하자 누적된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너무 심취해버렸군.’

처음에는 레벨설정만 해놓은 아바타로 전투를 벌였지만, 나중에 이르러선 아예 여러 레벨의 아바타를 설정해놓고 전쟁터의 어지러운 상황까지 연출시켰다.

‘대략 정예기사 정도.’

현재 내 수준을 보면 그렇다.

정예기사와 1:1을 겨룰 수 있는 수준. 다만, 정면대결을 고집하지 않으면 그 이상의 상대도 가능할 것 같았다.

“괜찮다. 좀 뒤척였을 뿐이니.”

얼굴을 털며 바깥으로 나가자, 마을의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모두 프렐류드 숲의 주민들이다.

그들은 파간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앉아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북방의 민족들은 모두 파간을 숭상하며, 그를 신처럼 여긴다.

“숲을 지키던 파간과 죽은 사람들을 기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제르민이 말했다.

그간 브리저튼 후작으로 인해 치르지 못한 장례식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신성한 의식이 끝나자, 주민들이 일어나 이번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우호적인 눈빛.

파간과 함께 동행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브리저튼 후작을 죽이고 병사들을 가둬놔서?

의식 중이던 두 아이가 흰색의 꽃을 든 채 내게로 다가왔다.

테베우스에게서 구해냈던 아모라, 아피르였다.

두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꽃을 건넸다.

“내게 주는 것이냐?”

내가 묻자 아모라와 아피르 모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흰색의 꽃.

죽은 이들의 영혼이 이 꽃에 깃든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바라며 주는 꽃입니다. 보통 가족이나 동반자에게 주는 게 맞지만, 저 아이들은 모두 잃었으니까요.”

그래서 내게 주었다.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함의 표시이리라.

“물론, 영원히 함께하자는 뜻도 있기는 합니다만······.”

작게 중얼거린 제르민이 미소지어보였다.

꽃을 받은 라인하르트의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해야할지 반응조차 못 하고 있지 않은가.

타인에게서 받는 선의가 아직은 어색한 것이다.

허나 익숙해져야할 일이었다.

‘계속해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십시오.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라인하르트는 조금씩 주변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그에 맞게 변해갔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

제르민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 폐쇄적이었던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영역에 단 한 명도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던 그가, 지금은 사람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

잠시 후 두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라인하르트를 껴안았다.

“허, 무엄한 녀석들이로군.”

감히 제국의 황태자를 마음대로 껴안다니.

“두 아이의 후견인이 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궁으로 데려가자는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전쟁이 끝나면, 이 숲에 학교를 세우는 것도 좋겠지요. 프렐류드의 숲은 개방적인 곳이니까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숲이 남아있을 것 같나?”

“그건······ 모르겠습니다.”

제르민은 솔직하게 답했다.

모르겠다.

어쩌면, 이 숲 자체가 없어져버릴지도 모른다.

카를로스 대공이 북벌에 성공하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다.

‘북벌을 실패하게 만들어야 한다.’

허나 그의 취지에는 공감하는 편이었다.

북방은 제국의 염원과도 같은 장소였다.

북방에 존재하는 광산들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야만인이라고 하여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또한 카를로스 대공은 착각하고 있었다.

북방의 민족들은, 절대로 지배되지 않는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고자 움직일 것이다.

그로 인한 손실은 제국 1년 재정의 20%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대흉년을 겪으면 그 비율은 더욱 늘어난다.

결국 북방은 독립하고, 하나로 뭉치며, 제국을 압박해오기 시작하겠지.

다시 한 번 그 지옥을 겪을 수는 없었다.

“제르민. 파르셸 행정관으로부터 받은 ‘악마의 죽음’의 양이 얼마나 되지?”

“오크통 스무개 분량이었습니다.”

“200만 명이 동시에 흡입 할 수 있는 양이로군.”

달리 말하면 20만의 병사들이 열 번 흡입할 수 있는 양이다.

‘슬슬 재고가 떨어지고 있었겠지.’

악마의 죽음은 중독성이 다른 마약보다 현저히 높다.

재고가 떨어지면, 병사들이 무슨 짓을 일으킬지 모른다.

대량으로 공급을 하려는 걸 보니 성지의 주변에 머물며 지낸 시간 동안 재고를 거의 탕진한 모양이었다.

더불어, 본격적인 성지 공략을 위한 공급이기도 할 것이었다.

“전부 태워라.”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다른 항복한 도시에도 이와 비슷한 마약 유통처가 존재할 터.

‘위치는 알고 있다. 찾아서, 태우기만 하면 될뿐.’

카를로스 대공이 빠른 북벌을 위해 투여한 악마의 죽음.

이것이 그의 발목을 잡으리라곤 지금쯤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약물 유통에 대한 꼬리자르기가 시작됐을 때, 오크통이 저장된 위치들에 대하여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니 전부 찾아내 태운다면 저들은 안쪽에서부터 자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면 성지로 향하는 길이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리라.

7대 신비.

북방의 수호신.

‘용.’

그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

***

카를로스 대공의 인상이 구겨졌다.

“테베우스가 죽었다고?”

“예. 대공각하. 패트릭, 크로우와 함께 묻혀있었습니다.”

한참이나 소식이 없어 보낸 다른 추적대였다.

그들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쉽사리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다.

테베우스가 죽었다.

패트릭과 크로우를 함께 보냈음에도, 죽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자 보낸 이들이었다. 크로프트를 상대하고, 설령 여의치 않다면 충분히 빠질 수 있는 구성으로 보냈다.

그런데 돌아오지 못했다.

“크로프트만 있던 게 아니었군.”

“예. 최소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 그리고 파간이 함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마법사의 흔적과 파간의 흔적은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저런 구성이라면, 전멸한 것이 이해는 되었다.

“······ 멍청한 녀석.”

쯧, 카를로스 대공이 혀를 찼다.

테베우스는 자식들 중에서도 머리가 가장 나쁜 녀석이었다.

그래서 후방으로 빼둔 건데 결국 사단이 나버렸다.

다시 인원을 편성해야 할까?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의도를 갖고 북방에 온 건 확실해보였다.

황실에 서신을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빌어먹을 데우스가 황태자 궁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렸다.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게다.

아니면 정말로 황제 데우스도 이번 일에 대해선 아예 모르고 있거나.

‘의도가 무엇이냐, 라인하르트.’

읽히지가 않는다.

원래라면 세상에서 가장 읽기 쉬운 놈이었을 텐데.

“대공각하. 큰일입니다.”

순간 천막을 열어젖히며 기사 한 명이 급하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악마의 죽음’이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다.”

“유통이 늦는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아예 입고 자체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 의문은 곧이어 풀렸다.

“대공각하! ‘어스름의 굴’이 습격당했습니다!”

“‘얼음 사원’도 습격당했습니다.”

속속들이 들어오는 소식들.

습격 자체는 큰 일이 아니다.

그곳에 주둔하는 병사라고 해봐야 몇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모두 ‘악마의 죽음’을 저장해둔 중간 도시라는 점이었다.

습격당하고, 악마의 죽음이 전부 타버렸다는 그 소식에, 카를로스 대공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체 어떤 놈이······.”

쿠릉!

그의 주변으로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천막이 날아가고, 주변의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허공을 날았다.

콰릉! 콰르르릉!

번개가 몰아치며, 카를로스 대공의 전신에 전격이 휘몰아쳤다.

절대영역 ‘성역’이 발동된 것이다.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절대적인 권능!

휘하의 소드마스터들조차 두려움에 떨며 거리를 벌렸다.

‘박살을 내주마.’

설령 그게 황제나 신이라고 할지라도.

카를로스 대공의 두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

< 용(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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