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21화 (21/146)

크로프트는 마차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방자하고 교만하며 사람을 업신여기던 라인하르트다.

자신밖에 모르던 그가 궁을 떠나 북방에 왔다.

에디스의 손녀를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조차도 믿기지 않건만, 두 아이를 구하고자 마차를 멈춰세운 것도 그였다.

명목상이야 테베우스를 통해 길잡이를 구하겠다는 것이었지만, 크로프트는 그 속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렸다.

‘변했다.’

결국 크로프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 황태자 라인하르트가 변했음을.

단순히 광증을 벗어난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수준으로 말이다.

게다가 테베우스를 대할 때의 태도는······.

‘테베우스의 성격을 이용해 모든 답을 유도해냈지.’

돌발적인 상황에서 판을 짜고 원하는 답을 유도해내는 건 노련한 정치판의 귀족들도 쉽지않아 하는 일이었다.

결국 라인하르트는 두 아이를 구했으며 테베우스를 굴복시켰다.

전략적으로 오러를 엿보이고, 자신을 이용해 신뢰도를 끌어높이는 수까지 사용해가면서.

제대로 된 대결이었다면 백중 백 라인하르트의 패배였을 터이나.

‘······ 광증은커녕 그 눈빛과 기세는 제왕의 면모였다.’

허나 그러한 기세는 성왕 데우스에겐 없는 것이었다.

다른 황자들도 갖지 못한 또 다른 제왕의 재능.

왜 여태껏 몰랐던 걸까.

어쩌면, 황태자의 이러한 변화는 갑작스러운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관심이 없었기에, 누구하나 제대로 황태자를 보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래서 몰랐을 뿐.

크로프트가 주먹을 쥐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렇다면 광증에 가려진 게 아니다.

광증이라는 편견으로 모두가 라인하르트를 덮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 두꺼운 편견의 막을 라인하르트는 혼자 깨버리고 나왔다.

누구의 도움없이 홀로 세상에 나와 포효하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그 포효가, 크로프트는 너무나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라인하르트의 재능은 제국을 내전으로 이끌 것이다.

오직 무능하고 미쳐있었기에 그는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유능하다는 게 밝혀지면 대공가에서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하여, 막을 깨고 나왔으나 계속해서 막 안에 있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테베우스를 대하는 라인하르트의 태도를 보고선 생각이 달라졌다.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있다.’

수백의 기사와 테베우스를 향해, 카를로스 대공을 향해, 귀족들과 황실의 사람들을 향해 라인하르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황태자의 자리가 이제 오롯이 자신의 위치임을.

막을 뚫고 더 높이 올라가 꼭두각시로 살지 않을 것임을.

그 의지는 모두를 파멸시킬 수도 있으나.

···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을지도 모른다.

황실의 영광은 모두 귀족의 것들이 되었다.

긴 평화가 오히려 황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귀족들의 검은 야욕은 지고한 황권조차도 엿보고 있었다.

“크로프트 경.”

“예, 전하.”

“북벌이 성공할 것 같나, 실패할 것 같나.”

눈을 뜬 라인하르트가 물어왔다.

북방의 정벌이 시작되고 벌써 반년.

아직도 성지탈환을 하지 못한 채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막상막하라고 들었으나, 이상하긴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성공할 것이다.”

북벌이 성공한다. 완전히 단정짓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후방에 배치된 기사의 숫자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진즉 절멸시킨 후방.

아무리 테베우스의 호위라 하더라도 기사의 숫자가 너무 많다.

족히 삼백. 보이는 것만 그 정도이고 분명히 더 많을 것이다.

하물며 그들 모두 실력자였다.

전방에서 적을 도륙할 일당 백의 기사들이 후방에서 잔당처리나 하고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효율을 극도로 따지는 카를로스 대공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선택을 내릴 리 없었다.

“의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카를로스 대공은 철두철미한 자다. 심어놓은 병사들로부터 연락이 줄어들고 있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굳이 숨길 필요 없다. 그림자들의 총괄 책임자가 그대인 건 알고 있었으니.”

그림자.

황실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해결사들.

그 해결사들을 부리는 총책임자가 바로 크로프트였다.

크로프트는 자신의 존재감을 낮춰, 귀족들의 칼날로부터 스스로를 숨겨왔다.

대신 그림자들을 움직여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건 황제를 포함한 극소수의 인물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감히 대공들도 모르는 것을 라인하르트가 어떻게 알았을까.

“황룡기사단을 이곳저곳에 전출시키는 척, 그림자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황태자에게 실망해 황룡기사단을 나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전출을 갔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실상은 귀족들의 감시를 위해 크로프트가 직접 그림자로 운영하는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것까지 안다는 건 전부 알고 있다는 뜻이다.

크로프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실을 어떻게 알고있느냐고 중요한 게 아니다.

더욱 중요한 건, 황태자가 왜 지금 이 이야기를 꺼냈냐는 것이었다.

“······ 맞습니다. 북방으로 보낸 그림자들의 연락이 대부분 끊겼습니다.”

카를로스 대공을 언급하고 그림자를 말했다.

전쟁 중 죽은 게 아니라 대공이 의도적으로 그림자를 제거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카를로스 대공은 힘을 숨기고 있다. 황실에 자신의 힘이 전부 드러나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있는 게다.”

“그래서 물밑작업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래. 당장 성지를 정복할 수 있음에도 그는 후방으로 병력을 몰래 빼내고 있다. 비밀이 새어나갈까봐 첩자들도 색출해내는 중이지.”

“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귀찮은 짓을?”

전쟁 중이다.

아무리 우위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여유가, 그러한 귀찮은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철저한 통제.

북방 전체를 아예 가둬버리는 형국이다.

대공은 조용한 승리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정보가 새어나가는 걸 차단해야할 정도로 중요한 게 눈앞에 있다는 뜻이겠지.”

바로, 용을 노리고 있다.

북방의 모든 민족들이 우상하는 성지에는 용이 있었다.

용을 취하는 걸 숨기고, 병력을 숨겨 카를로스 대공은 황실을 단번에 압박한다.

그가 궁으로 입성하고나서야 모두가 알았다.

황실이 패배했음을.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혹시, 테베우스에게 얼굴을 보인 것도······.”

단순히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단 말인가.

후방에 배치된 기사들을 면밀히 확인하고 의심을 심어주기 위해.

더불어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라인하르트는 마차에서 내린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몇 수 앞을 내다본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 생각에 답하듯.

“모든 걸 차단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나타났다. 카를로스 대공도 나를 죽일 순 없으니 고민에 빠질 터.”

나를 황태자에 책봉하고자 대공은 온갖 작업을 해왔다.

북벌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가 북방에 나타났다.

그것도 테베우스를 굴복시켜가면서.

과연 대공은 내 광증이 나았다고 생각 할까?

‘사람의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만, 확인은 하고자 할 것이다.

내가 크로프트와 함께 왜 북방에 왔는지 궁금해 미쳐버릴 것이었다.

대공이 다루는 체스판의 말 중 당장 나만큼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우리는 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그럼 자연스럽게 길이 열릴 테니.”

나만큼이나 대공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카를로스 대공은 패악적이라 알려졌지만 그만큼 신중한 사람은 없었다.

나를 잡아, 진의를 확인하기 전까진 쉽게 움직이지 못하리라.

잡는자와 도망치는자.

자고로, 도망치는 쪽이 잡는 쪽보다 재미는 있는 법이다.

“길, 말입니까?”

“크로프트 경. 카를로스 대공이 무엇을 그리도 숨기고 싶어하는지, 알고 싶지 않나?”

알고싶다.

미친 듯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더욱 미치게 하는 건 라인하르트였다.

‘단순한 검의 재능만이 아니었던 건가.’

검의 재능.

단순히 재능만을 따지자면 그는 천재였다.

고작 일주일만에 어지간한 기사급의 실력을 갖췄으니까.

특히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은 가히 압도적이라 할 수 있었다.

기본기만 닦였음에도 벌써부터 광이 나고 있었다.

제대로 가르친다면, 어쩌면 1황자가 가진 검의 천부적인 재능조차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것만으로는 카를로스 대공을 상대할 수 없다.

그런데.

‘힘을, 보태드려야 하는가.’

크로프트는 가능성을 보았다.

물론 지금의 변화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모든 걸 빨아들이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제왕의 재능이다.

다른 황자들도, 황제 데우스조차도 갖지 못한.

오직 라인하르트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재능 말이다.

‘내가 멍청했구나.’

크로프트는 자책했다.

부족한 게 아니라 그저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면······.

가장 먼저 저 재능을 알아차려야하는 게 자신이었건만 그대로 방치해버린 게 되는 것이다.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린 채, 황태자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있었다.

아무리 부족해도 잘하는 게 있었을 텐데.

하고 싶어하는 게 있었을진대.

누구 하나 그런 것을 황태자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그치고, 외면하기만 하니 광증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궁은 라인하르트에게 지옥과도 같았으리라.

‘그런데도 혼자 알을 깨고 나오셨다.’

궁을 벗어나자마자 마치 폭발하듯 가려진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슬퍼하는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정도의 자비 또한 그는 갖추고 있었다.

겉으로는 방자하고 교만하나, 그 이면에는 다른 면모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니 알을 깨고 나왔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출 게 아니라 축하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황태자가 알을 깨고 나온 것을 축하해줄 사람이 없었다.

자신조차도 그랬으니까.

그냥 계속 알 속에 있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황태자의 무능력함에 진저리를 치며 포기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그냥 자기 위안, 합리화였을 뿐이다.

어차피 무능한 황태자이니 포기하는 게 맞다고. 차라리 계속 무능한 게 낫다고.

죽여야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로프트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선, 이런 날이 오기를 은연중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황태자가 태어났을 때의 그 기쁨이, 황제의 첫 아들이며 제국의 굳건한 기둥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환희가.

―크로프트경. 그대가 라인하르트를 지켜주시오. 그대라면, 믿고 맡길 수 있으니.

―부탁드려요, 크로프트. 내 오랜 친구여.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뿐입니다.

황제와 황후가 아이를 건넸을 때, 라인하르트를 처음으로 품에 안아보았을 때의 그 감동이.

자신을 보며 웃던 그 작은 아이가.

불현 듯,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라인하르트가 정말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이어서 말했다.

“왜 웃으면서 우는 게냐?”

······ 그러게나 말입니다, 전하.

애써 크로프트가 고개를 돌렸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봅니다.”

“소드마스터도 눈에 먼지가 들어가면 눈물이 나오나보군.”

“사람이니까요.”

사람이었다.

그도, 라인하르트도.

크로프트는 생각했다.

알을 깬 건 라인하르트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자신을 가두고 있던 두꺼운 벽을 라인하르트가 부숴버린 것이다.

< 알을 깨고 나오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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