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제하고 있었다.
북방에 도착한 이후부터 느껴지는 이 익숙한 기분을.
제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기 짝이 없는 이 학살의 현장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었다.
제아무리 나노머신의 짓눌림에 의해 광증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미친 황제로 지낸 20년의 모든 시간이 다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미친 황제로 20년쯤 살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게 있다.
생명의 덧없음, 인간의 초라함을.
‘카를로스 대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무리한 전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카를로스 대공은 나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웠다.
그의 의도대로 나는 제스스로 황실의 모든 힘을 축출했다.
이후 불명예스럽기 짝이 없는 전쟁을 선포했다.
카를로스 대공은 어느 정도 전쟁을 완료한 뒤 반역을 일으킬 계획이었을 것이다.
‘미친황제를 죽인다’는 누구나 바라는 명분으로.
전쟁영웅이 되어 온전하게 제국을 갖겠다는 욕심을 부렸다.
하지만, 카를로스 대공도 몰랐던 게 있었다.
바로 나라는 존재를 말이다.
나는 전쟁을 부풀리고, 또 부풀려, 내전 따위는 일어날 수가 없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5년은 진짜 광인처럼 살았다.
내 편 따윈 없는 궁에서 수십년을 살며, 하루도 암살의 위험으로부터 편안하게 잠든 적이 없었으니.
오히려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과거 나의 열화판이 존재하고 있었다.
‘테베우스.’
광인.
아니······ 망나니라고 해야겠지.
진정한 미친놈들의 세계에 끼기에는, 이놈은 너무 재미가 없다.
“테베우스님. 예의를 지키십시오.”
보다못한 제르민이 나섰다.
테베우스가 크게 웃어버렸다.
“하하! 예의? 우리 가문과 라인하르트 전하의 사이에 격식이 없음은 제국 신민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오. 난 정말 반가서워 그러는 것이고.”
서로 예의를 따지지 않을 만큼 가깝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예의를 따질 수가 없는 것이다.
황태자의 자리에 나를 앉힌 게 온전한 황제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때의 멍청했던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두 대공, 특히 카를로스 대공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이리라.
하여 나는 그들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황제 데우스였건만.
그 데우스조차 꼼짝 못하는 가문이라니!
“실망이다, 테베우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 지금, 저한테 실망이라 하셨습니까?”
테베우스의 웃음기가 단번에 사라졌다.
만만하게 보던 상대가 실망이란 단어를 운운하니 김이 새는 건 당연했다.
허나 정말로 실망이었다.
“고작 도망도 못치는 것들을 죽이는 게 ‘사냥’이라니. 왜 아직도 이런 후방에 남아있는 지 알 것 같구나.”
북벌이 시작되고 벌써 반 년이 넘게 흘렀다.
그리고 이곳은 로카리 산맥의 주변.
카를로스 대공이 가장 먼저 쓸어버렸을 지점이었다.
그야말로 후방 중의 후방.
테베우스는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남은 잔당이나 죽이며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테베우스. 아직 제대로 된 전투는 너도 겪어보지 못했을 테지?”
“······.”
“흠. 보아하니, 첫 전투에서 크게 실수를 했나보군. 카를로스 대공이 자신의 친아들을 후방 잔당을 처리하는 일에 쓴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안 가서 말이다.”
테베우스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해졌다.
사실이었다.
첫 전투에서 실수를 해 테베우스는 후방에 배치됐다.
‘대충 떠본건데 맞았나보군.’
얼추 그럴 것 같기는 하였다.
카를로스 대공의 친아들들은 모두 한가락하는 천재들이다.
더불어 황자들과는 달리 서로간의 경쟁심이 치열했다.
전방에서 공을 세우는데 혈안이 되어야 정상이건만, 후방에 안전하게 있다는 건 좀처럼 용서하기 힘든 실수를 저질렀다는 뜻이다.
그 분풀이로 테베우스가 모든 마을의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카를로스 대공이 용서하기 힘든 실수라. 뭔지 알겠다. 네놈, 지렸나?”
“··· 닥쳐라.”
살인을 해봤더라도 전쟁의 긴장감과 잔악함은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다.
하지만 대공의 자식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의연해야 한다.
카를로스 대공은 자식들의 나약함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강하게, 더욱 강하게.
오줌을 지리며 꼴사납게 검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면, 후방으로 좌천시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스릉!
테베우스가 검을 뽑았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사악!
순식간에 테베우스의 검이 잘려나갔다.
크로프트. 지금 이곳은 그의 절대영역 안이었다.
“전하를 향한 공격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테베우스님.”
두 번은 없다.
그렇게 못을 박았다.
그러자, 주변 수백의 기사들이 검을 뽑아들었다.
“크로프트님. 이곳은 궁이 아닌 북방입니다.”
“테베우스님을 향한 공격 또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래도 기사는 기사라 이건가.
싸우면 어떻게 될까.
크로프트와 에디스. 그리고 실력있는 삼백여에 달하는 기사들.
두쪽 다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건 확실했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테베우스. 심기를 건드렸다면 미안하군. 우리는 그저, 길잡이 한 명만을 원할 뿐이다.”
“그따위 말을 해놓고 길잡이를 원한다고?”
“네놈이 주변 마을을 죄다 전멸시켜놓은 덕에,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더구나. 며칠을 차가운 눈밭에 있다보니 내 신경이 곤두서있었음을 인정하마.”
“너는 내 명예를 모욕했다. 대결을 청한다, 라인하르트.”
막무가내가 따로없었다.
일장연설을 했음에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집.
저기서 고집을 피우면 정말로 지렸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지.
더불어 저게 진짜 본심이다.
황실보다 대공가가 더 위에 있다 생각한다는 방증이었다.
아니라면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고 바로 말을 깔며 명예를 운운하진 않았을 터.
테베우스만이 아니라 대공가 전체의 분위기라고 봐도 좋으리라.
한숨을 내쉬자 크로프트가 중재에 나섰다.
“테베우스님. 진정 내분을 원하십니까?”
어쨌든 같은 제국의 사람들이다.
서로 싸워봤자 이 전쟁통에서 좋을 게 없었다.
차가운 크로프트의 눈빛이 테베우스를, 기사들을 훑었다.
꿀꺽!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고는 하나, 그를 1:1로 당할 자는 이곳에 없었다.
아니, 그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크로프트를 확실하게 죽인다고 장담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존재인 것이다.
제국에게, 기사들에게 크로프트란 존재는.
“됐다. 크로프트 경, 대결에 응하도록 하지.”
“··· 전하!”
“대신 조건이 있다.”
그냥 싸우는 건 자살행위다.
테베우스가 후방으로 좌천됐다고는 하나, 그 역시 대공의 자식.
황자들 못지않은 천재성을 지닌 괴물이었다.
특히 테베우스는 소드마스터의 위치까지 오를 정도로 검술에 일가견이 있었다.
하여, 나는 조건을 걸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끝나는 거다.”
내 조건을 들은 모두가 술렁거렸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대결.
그딴 게 성립할 리 없었다.
누가 죽더라도 결국은 파국이다.
이에 기사들은 생각했다.
‘허세겠지.’
‘황태자가 진짜 미치긴 했나보네.’
‘푸하! 아무런 능력도 없는 황태자가 테베우스님과 생사대결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쯧쯧, 테베우스님의 성격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저딴 허세.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테베우스에겐 통하지 않는다.
‘제발 그만하라고 울며불며 매달리게 만들어주마.’
이에 테베우스가 씨익 웃으며 대결을 승낙하려고 할 때였다.
번쩍!
찰나의 순간, 황태자의 몸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유형화 된 마나.
익숙하기 짝이 없는 기운.
카를로스 대공의 산하 소드마스터들에게서도 익히 보아왔던 그것!
“오, 오러······?”
기사들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모두가 들었다.
오러. 소드마스터의 상징이 왜 거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길게 유지되진 않았으나 분명 오러가 맞았다.
여전히 이해가 불가능하지만, 황태자가 소드마스터라면.
이 싸움, 테베우스의 필패다.
‘테베우스가 소드마스터가 되는 것도 나중 일이지.’
지금의 테베우스는 소드마스터가 아니다.
기껏해야 1황자의 순수 검술 실력에도 못미친다.
하여, 나는 어깨를 펴고 모두의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생사대결이다. 내가 죽더라도 크로프트 경은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내 모든 명예를 걸고 약조하지. 그렇지 않나, 크로프트 경?”
“······ 예. 전하께서 그리하시겠다면, 따르겠습니다.”
크로프트가 동조했다.
모든 ‘보여주기’는 끝났다.
남은 건 테베우스에 대한 압박뿐.
“테베우스, 검을 들어라.”
“······.”
테베우스가 입을 닫았다.
그럴 수밖에.
황태자의 무능함은 대공가에서 진즉에 확인한 사항이다.
그럴진대 황태자가 소드마스터라고?
‘속인건가?’
모르겠다.
미친놈은 분명한데 실력까지 겸비한 미친놈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무능력함’을 여태까지 연기한 거라면?
황태자로 책봉되기 위한 연기였을 뿐이었다면?
사실은 다른 황자들과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거짓으로 오러를 피워낼 순 없으니까.
저 자신감, 저 태도. 진정한 강자의 여유였다.
‘하필 왜 지금이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태껏 숨겨왔다면 왜 지금 그 능력을 보이는 걸까.
‘젠장.’
내심 고개를 저은 테베우스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 길잡이는 우리도 없다. 필요가 없어져서 다 죽였거든.”
“그럼 저 아이들이라도 데려가도록 하지.”
북방의 사람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길을 찾는다.
아이들이라도 방향을 잡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테베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 명만 데려가라.”
“허락한 걸로 알고 둘 다 데려가마.”
“라인하르트······!”
자신을 어디까지 무시하는 건가.
테베우스가 라인하르트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몸을 돌리자, 두 눈이 부딪쳤다.
‘뭐야······?’
순간 테베우스는 흔들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인하르트의 눈.
‘이 새끼 눈빛이······.’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진정한 광인의 그것이 이러할까.
아버지에게서도 이런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마치 무저갱에 빠진 기분이었다.
“한 번 더 나의 허락 없이 내 몸에 손을 대면, 그 즉시 네놈의 손목을 잘라버리겠다.”
그리고 그 눈빛과 말투에,
테베우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이건 단순한 광인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지배하는 자의 격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지배당하고 말았다.
압도되었다.
‘빌어처먹을······!’
그 사실에, 테베우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북방에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