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9화 (19/146)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짙은 고양감. 전신의 모든 세포가 깨어나는 감각.

나노머신이 활성화되며 신체의 모든 부위를 지탱하기 시작했다.

크로프트가 했던 대로. 그가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자세 그대로.

검왕, 최강이라 불렸던 검사의 ‘기본’을 따라 했다.

‘느려진다.’

세상이.

두 번째로 겪는 시간의 이변.

이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마치 멈춰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더, 더, 한없이 0에 가깝도록.

이것이 크로프트가 보는 세계다.

‘그대의 세계는 이토록 느렸군.’

첫 번째로 겪었던 시간의 이변과는 차원이 다르다.

검은 앞으로 출수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뻗어낼 수만 있다면 저 나무를, 산을, 심지어 세상을 베어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극한의 영역.

모든 검사가 도달하길 바라는 꿈의 경지!

그 위치에 나는 올라섰다.

‘이게 끝이 아닐진대.’

하지만 만족이 되지 않는다.

이 정도로는 내 갈증을 채울 수 없다.

만족을 모르는 제왕.

모든 걸 먹어치우는 나는 포식자였다.

더, 더, 더.

깊게, 심연의 끝까지 손을 뻗는다.

세상은 이제 아예 멈춰버렸다.

세상의 중심에는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그러자 보였다.

그 너머가.

나는 짧게 전율했다.

거대한 달.

푸른 달이 눈앞에 있었다.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나며 그 빛무리가 모든 걸 압도하고 있다.

황제에 즉위했을 때도, 타국을 점령했을 때조차도 느껴보지 못한 이 감각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이것이.’

알겠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부른다.

‘정점인가.’

정점(頂點).

누구도 도달하지 못할 지고의 영역이라고.

[뇌의 동시 활성 영역이 20%까지 확장됩니다.]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재현의 영역을 초과해 세포의 이상 변이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강제종료합니다.]

허나 짙은 고양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대로 검을 배워본 적조차 없는 내가, 최강의 검사를 한순간이나마 모방한 것이다.

현실의 시간으로 기껏해야 1초 안팎.

‘아쉽다.’

결국, 검은 휘두르지도 못했다.

재현하는 것도 몸이 받쳐줘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욕심을 부린 걸까.

하지만 그 감각만은, 정점에 이르렀던 그 시간만은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내 뇌리에, 전신에, 세포 하나하나에.

그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는 극명하기 마련.

“······.”

크로프트와 에디스, 그리고 제르민이 가만히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실망했으리라.

제대로 휘두르지조차 못했으니 이해는 갔다.

“생각보다 쉽지 않군.”

“지, 지금 제가 본 게 맞습니까?”

동시에 제르민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비비며 고개를 털어댔다.

혹시나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에디스도, 크로프트도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침묵한 채 미묘하기 짝이 없는 눈빛만을 내게 보내올 따름이다.

하여,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을 봤단 말인가?”

“오··· 러입니다, 전하.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전하의 전신에서 달빛과도 같은 푸른색의 오러가 피어올랐습니다.”

오러.

경지에 이른 검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기예다.

마스터의 상징으로도 불리며, 그것을 피워 낸 자만이 진정한 강자의 취급을 받는다.

오러를 피워낼 수 있는 이를 오러마스터, 혹은 소드마스터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한 왕국에 많아야 두, 세 명 정도.

오러를 피워내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왕국들이 귀족의 작위와 영지를 하사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제 막 검을 잡은 내가 피워냈다는 소리다.

‘오러 역시 마나. 재현이라는 게 오러까지 만들어낸다는 뜻이었나?’

물론 재현의 영역을 초과해 얻은 성과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나는 모두 ‘비인가 나노머신’이었다.

마법사는 그것을 내부에 갈무리해, 의지를 입혀 여러 방식으로 사용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검을 쓰는 자들은 마나를 갈무리해 온전히 자신의 강화만을 위해 사용했다.

그 결과가 오러다.

하지만 오러 역시 마나이고, 마나는 나노머신이기에, 그 방식만 알면 나도 잠깐이나마 흉내는 낼 수있다는 의미일지.

찰나의 순간임은 아쉽지만 이는 당연한 것이다.

오러를 만들어내기 위한 나노머신의 양이 압도적으로 부족했으니까.

‘나노머신의 양을 늘리면 오러를 더 오랫동안 피워낼 수 있다.’

내가 가진 나노머신의 양은 크로프트의 0.1%.

고작 천 분의 일이었다.

하지만 폭주한 나노머신을 대량으로 지배할 수만 있다면 이 문제 역시 어느 정도는 해결될 터.

‘가짜 소드마스터라.’

오러를 사용하는 가짜 소드마스터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검술을······ 배우신 적이 있으십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크로프트가 물었다.

이런 경우는 그 역시도 처음이었다.

이제 막 검을 쥔 사람이 오러를 피워내는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검술을 배운 적이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크로프트였다.

틈만 보이면 나타나는 광증.

그로 인해 황태자의 궁에는 그 흔한 날붙이 하나 없었다.

당연히 검을 쥐어본 건 어릴 때 이후로는 없을 것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일전 알베르토 기사단장이 황태자와의 대련에서 패배했다는 소문.

알게모르게 퍼져나간 소문이지만 믿지는 않았다.

아무리 3황자의 ‘황금 사자 기사단’이 조세핀 황비의 얼굴마담 용으로 뽑힌 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명색이 기사는 기사다.

그런 이가 황태자에게 패배한다면 그만한 굴욕이 없었다.

하지만 소문이 사실이었다면?

황태자가 남몰래 검술을 배워온 게 아닌가.

자신의 눈조차 피하고서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만약 가능하다면 누구의 원조를 받았을지 알아내야 했다.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만. 그건 그대가 더 잘 알지 않나?”

“······ 손을 좀 잡아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리하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손을 건네자 크로프트가 맥을 짚었다.

‘사사로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금기 된 흑마법들.

그런 것중에는 생명을 먹고 마나를 증폭시키는 종류의 마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크로프트는 자신의 마나를 라인하르트에게 흘려넣었다.

[허가되지 않은 나노머신의 침입을 확인했습니다.]

[지배가 불가능한 나노머신입니다.]

[멸합니다.]

“흐읍······!”

크로프트가 급히 손을 뗐다.

튕겨져나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흘려넣은 마나가 모두 소멸됐다?’

어안이 벙벙했다.

반백년이 넘게 수많은 기사들을 가르쳤고, 그중에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체내로 흘려넣은 마나를 강제로 소멸시키다니!

그것도 일반적인 마나가 아니다.

검왕이라 불리는 자신의 마나다.

그것을 고작, 마나의 양조차 적을 터인 황태자가 없애버린 것이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찰나였지만, 분명히 나를 그대로 흉내내었다.’

뿐만인가.

검을 휘두르지도 못했으나 그 기세는 분명히 자신과 똑같았다.

그저 보았다고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니건만.

수십 년을 갈무리한 그 기세를 따라하는 건 단순히 자세를 같이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모든 현상을 결부시킬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뿐이었다.

‘뒤늦은 피의 각성인가?’

라인하르트의 체질이 하루아침에 변했다.

일반인의 30배에 달하는 대사를 갖게 됐다.

크로프트는 그것이 황가의 특수한 피에 기인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뒤늦게나마 황태자도 재능을 각성한 것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재능들이 한꺼번에 개화하고 있는 것이라면?

광증에 가려졌던 재능들이 뒤늦게 꽃피는 것이라면 어떨까.

‘······ 제국을 건국한 절대자. 열 개의 위업을 달성했던 그가 이와 비슷했다고 들었다.’

천 년전 제국을 세운 초대 건국왕.

절대자라 불리던 그는 검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오러를 피워낼 수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신화 속 이야기이니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야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12위업이니 뭐니 하는 것들 또한 크로프트는 맹신하지 않았다. 젊을적에 위업 달성자를 만난 적이 있으나 그들은 힘 쎈 갓난아기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헌데, 지금 눈앞에 불신했던 이야기들의 집합체가 존재했다.

무능력함의 대명사.

광인.

모두의 괄시를 받던, 맞지 않는 왕관을 짊어졌던 바로 그 황태자가.

만에 하나.

정말 뒤늦게 절대자의 재능을 피워낸 것이라면······.

‘위험하다.’

너무나도, 위험했다.

황태자의 존재는.

미쳐있을 때보다도 더더욱.

***

그로부터 일주일.

산맥을 겨우 넘고나서야 거친 북방의 땅이 시야에 들어왔다.

‘죽겠군.’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마차 안에서조차도 훈련을 받느라 나로서는 미쳐버릴 일이었지만 그래도 용케 미치진 않았다.

나노머신 제로의 회복능력 덕분이었다.

완벽한 서포팅이 빛을 발하다 못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산맥을 넘어 주변 마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북방은 넓다. 사시사철 부는 눈보라와 끊임없이 변하는 지형 덕분에 길잡이 없이는 길을 찾는 게 불가능하다.

길잡이는 현지에서 구해야만 했기에, 마을을 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시체밖에 없군요.”

하지만 마을에 들어선 제르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렵게 찾은 첫 번째 마을.

모든 게 불타고, 수많은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서.

그런 마을의 중심부에는 몇 개의 깃발들이 꽂혀있었다.

‘카를로스 대공.’

바로 카를로스 대공을 상징하는 독수리의 표식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두 번째 마을도, 세 번째 마을도.

모두 시체뿐이었다.

살아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북방 정벌을 위해 대군과 함께 떠난 카를로스 대공은 모든 북방의 민족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아예 씨를 말려버릴 생각인 건가?

‘예상은 했지만, 더 참혹하다.’

내가 즉위한 이후부턴 이 상황이 제국에서, 대륙 전체에서 재현된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전쟁을 승인한다.

입안이 써지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몇 개의 마을을 더 전전했을 때였다.

“아모라 아피르!”

저 멀리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곧 그녀의 등 뒤로 창이 날아와 꽂혔다.

즉사.

뒤이어 달려가던 두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 주저앉았다.

“크하하! 역시 도련님! 투창 실력이 그사이에 또 느셨군요!”

“이곳에 올 때만 하더라도 바로 앞에 있는 것도 못 맞추셨던 분이!”

“뭐야, 왜 안 도망쳐? 애새끼들아! 살고 싶으면 어서 뛰라고!”

시끌벅쩍한 소리와 함께 수백의 병사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 가운데에, 독수리 깃발이 있다.

하지만 여흥은 이어지지 않았다.

저들이 마차의 존재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응? 웬 마차?”

“뭐야, 누가 내리는데?”

“으응?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거리가 꽤 있음에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들 역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실력자라는 방증이었다.

이윽고 크로프트를 본 그들은 눈을 비볐다.

“크, 크로프트 경?”

“그분이 북방에는 왜 와?”

“잘 보라고!”

“좀 닮은 거 같기는 한······ 미친!”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다섯을 꼽으라면 그중 반드시 들어가는 게 크로프트였다.

하물며 기사들이라면 더욱이 모를 수가 없었다.

크로프트를 확인한 기사들의 표정이 백짓장처럼 굳어버렸다.

하지만 단 한 명.

도련님이라 불리었던, 창을 던진 남자만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르민이 떪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테베우스님.”

테베우스.

카를로스 대공의 셋째 아들.

그가 기사들과 함께 마차로 다가왔다.

“크로프트 경, 이 먼 북방에는 무슨 일로 오시었소?”

테베우스가 피가 잔뜩 묻은 손을 건넸다.

몇 명을 죽인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혈향이 짙었다.

“잠시 볼 일이 있어 들렀습니다.”

손을 맞잡은 크로프트가 간결하게 답했다.

“크로프트 경의 볼일이라. 굉장히 궁금해지는군.”

제르민을 보고, 에디스를 보던 테베우스의 눈이 내게 다다르자 멈춰섰다.

“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인상을 찌푸리던 테베우스가 이내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라인하르트 전하 아니십니까? ”

“오랜만이군.”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 이후 만날 일이 없었으므로.

과거에도 북벌에 성공한 이후 입성할 때나 봤다.

황제와 황자들의 어두운 표정을 뒤로하고 환하게 웃던 카를로스 대공과 그의 자식들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때와 같이, 테베우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침 잘됐습니다. 오랜 재회의 기념으로.”

그가 죽은 어미 근처에서 떨고 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곤, 내게 창을 건네며 말했다.

“사냥할 게 두 마리가 남았으니 같이 즐기시죠, 전하.”

< 전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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