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7화 (17/146)

“젠장! 이게 왜 안 뽑히는 거야?”

“네 힘이 약하니까 안 빠지는 거지!”

긴 행렬. 기사들이 앞다투어 검을 뽑고 있었다.

몰려든 인파로 인해 황궁은 오랜만에 활기가 띠었다.

“북적북적하군.”

나는 궁의 정원에서 그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이백 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도전하고 실패했다.

일명 검 뽑기를.

이틀 전, 하늘에서 떨어져 황궁의 중심부에 처박힌 칼리번은 모두의 이목을 끈 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칼리번. 위대한 왕의 정령. 나를 뽑는 자만이 진정한 군주의 자격을 갖추리라.

난데없는 정령의 출현에 황궁은 뒤집혔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확인 결과, ‘진짜 정령’임이 밝혀지며 너나 할 것 없이 검 앞으로 모여들었다.

천 년 전 사라진 신비를 직접 보며 자격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마법사들은 모조리 실패했고, 기사들이 도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 황실의 사람들은 도전하고 있지 않군요.”

에디스가 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나는 빵을 입에 욱여넣고는 미소지었다.

“조심스러운 거겠지.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나를 뽑는 자, 왕의 자격을 갖추리라.

감히 이곳 제국의 심장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인다?

천 번 죽어 마땅하지만 상대는 정령이다.

게다가 이 상황은 황실에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

황자 중 한 명이 저 검을 뽑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자격 없는 황태자를 폐위하고 새롭게 차기 황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황비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끝마치고 도전하려는 셈이다.

기사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뭐.

‘기사의 것은 주인의 것이기도 하니.’

기사가 뽑아도 손해 볼 건 없었다.

에디스가 물었다.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 예상하셨습니까?”

“마법사나 기사에게 도전권을 주는 그런 상황을 말하는 건가?”

“예.”

“아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폐하께서 덮으실 줄 아셨습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다. 외부인사가 없다면 모를까, 마탑주가 넷이나 있는 상황에서 숨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일부러 결계까지 뚫어가면서 만든 무대다.

내부인사만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신비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마법사들이 대거 결집한 상황.

다 죽이지 않는 이상 덮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아내곤 말했다.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 궁 밖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 터.”

“설마 황제 폐하께서 궁을 열고 일반 시민에게 도전권을 주겠습니까?”

“검이 뽑히지 않으면, 줄 수밖에 없다.”

천 년 만에 등장한 정령이다.

소문이 퍼져나가는 순간 삽시간에 제국의 시민들 전부가 알게 될 것이다.

이 평화의 시기에 등장한 정령이 궁 안에서 ‘왕의 자격’을 논한다고.

가만히 있다간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와 추문으로 부풀려지리라.

왕은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궁을 열고 일반시민들에게도 기회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검을 뽑지 못한다.

칼리번을 뽑는 건 나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시간이다.

소문이 새어나가 모두가 알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

세간의 이목이 집중 될 시간.

나는 적당한 사이에 궁을 나가, 에디스의 손녀를 치유하고 돌아와 검을 뽑을 작정이었다.

‘설마 그사이에 누가 검을 뽑지는 않겠지.’

8서클 대마법사들도 뽑지 못한 검이다.

설마 그 사이에 누가 뽑는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전하께선 엄청나게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구나.’

그런 황태자를 보며 에디스는 짧게 감탄했다.

황태자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저 확신에 찬 눈동자를 보라.

누가 감히 그를 미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오오! 라우넬님!”

“라우넬님께서 도전하신다!!!”

“음?”

잠깐 눈빛이 흔들렸다.

1황자의 이름이 귓가에 들려왔다.

1황자가 도전하는 건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라우넬. 붉은 머리칼의 귀공자가 팔을 걷어붙이며 걸어 나왔다.

기사와 병사들의 시선이 오롯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정령 칼리번이여! 너의 주인이 될 자는 바로 나다.”

―오호라. 확실히, 네놈은 여태껏 도전한 자들 중 가장 군주에 가깝구나.

칼리번이 감탄을 내뱉었다.

아무리 봐도 진심이었다.

나를 처음 보았을 때와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와 말.

‘벌써 도전할 줄은 몰랐는데.’

1황자, 라우넬.

녀석은 누가 봐도 군주의 재목이었다.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갖고 태어났다.

노력하는 천재, 모두의 사랑을 받는 1황자.

자격 있는 자만이 검을 뽑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가 이 궁에서 제일가는 적임자이리라.

라우넬이 천천히 칼리번의 손잡이를 쥐었다.

“흡!”

덜컹!

“······ 지금 조금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에디스의 말마따나 검이 약간 빠져나온 것 같았다.

삭제되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헉!

내 살기를 느꼈는지 칼리번도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왕의 정령이라 자신을 소개했듯, 아마도 진짜 왕의 자격을 지닌 이라면 칼리번을 뽑을 수 있도록 설계된 모양이었다.

“끄으으으윽!”

―끄으으읍!

둘 다 온 힘을 주고 있었다.

빼내기 위해, 빼내 지지 않기 위해.

라우넬의 위로 피닉스가 날갯짓했다.

각성상태까지 갔지만 결국 칼리번을 뽑지는 못하였다.

“······ 젠장.”

라우넬이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쉽, 구나. 너에겐, 후욱! 자격이 없노라.

아무래도 칼리번의 진짜 주인은 라우넬인 것 같았다.

칼리번 역시 삭제되지 않겠다는 필사의 의지로 겨우 버텨낸 것이다.

나도 살짝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가장 고비였던 라우넬이 지나가서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전하.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해보라.”

“결계의 취약점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 취약 부분은 마탑주들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만······.”

덕분에 에디스가 별 무리 없이 결계를 뚫어낼 수 있었다.

허나 황궁에 마나결계를 친 건 네 명의 마탑주들이다.

그들은 완벽을 자부했다. 결계에 결점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말피엘이 알려줬지.’

개새끼.

정말 빌어먹게도 고마운 놈이다.

황궁에 쳐들어오기 전, 놈은 결계의 취약 부분까지 알려주며 한번 막아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다중결계를 치고, 취약 부분까지 고쳤지만 결국 그 미친 괴물을 막아내지 못했다.

전격 한 방에 뚫려버렸으니까.

그때 마법사들의 넋 나간 표정을 봐야 했는데.

‘놈을 어떻게 죽여야 할까?’

말피엘과 나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

회귀 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결론을 하나였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물론 내가 죽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12위업을 달성한 말피엘은 진짜 신과도 같았다.

그나마의 가능성이라면 위업을 모두 달성하기 전에 죽이는 건데, 아직 놈이 최초 등장한 시기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그러니까 그 전에 최대한 힘을 키워서 말피엘을 죽이자.

황실의 힘이 부족하면 마법사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조차도 부족하면 대륙의 모든 용병과 암살자를 고용해서라도.

그조차도 부족하면······.

고개를 털며 답해주었다.

“그냥 그 부위가 약할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

“역시 그렇습니까.”

역시?

에디스의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정말 정령왕과 관계된 줄 아는 건가?’

칼리번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을까.

정령왕과 계약이라도 한 거라고 내심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정령왕과 관련되어 있다면 폭주를 완화하는 것도, 칼리번을 다루는 것도, 심지어 결계의 취약점을 알아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알아서 착각해주니 고맙긴 하군.’

애써 거짓말을 지어낼 필요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편했다.

거짓은 결국 거짓을 낳게 되고, 들통나기 마련이었으므로.

저처럼 알아서 착각하고 확신해주는 게 최고였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검이 그사이에 뽑히진 않을 테지.”

“그게 아니라······ 제 손녀가 있는 곳 말입니다.”

“북방 말인가?”

북방.

사시사철 눈보라가 내리는 빙하의 대지.

에디스의 손녀는 그곳에 있었다.

폭주를 멈추고자 얼려버린 손녀를, 절대로 녹지 않을 대지에 놔둔 것이다.

위치를 듣곤 나도 잠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북방은 지금쯤 한창 전쟁 통일 터였다.

카를로스 대공과 그가 이끄는 귀족들, 그의 자식들이 북방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정복전을 펼치고 있을 것이었다.

‘북벌은 성공한다.’

나의 책봉과 맞바꾼 북벌.

황제 데우스는 북벌 도중 카를로스 대공이 죽기를 원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성공하여 황궁에 입성한다.

이후 대흉년까지 겹쳐, 황제는 완전히 힘을 잃고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황실과 황자들이 힘을 합쳤으나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내가 황제에 즉위한 이후로는······ 최악이었다.

죽고, 죽이고, 궁은 하루도 빠짐없이 피와 비명이 난무했다.

“예. 지금 그곳은 전쟁 중입니다.”

“어쩔 수 없지. 약속은 약속이니.”

그가 나를 도우면 나도 그를 돕기로 했다.

북방인 게 못내 걸리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면 된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시기에 북방을 가는 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이맘때에 들려온 소문.

『북방에서 신비가 발견됐다.』

7대 신비.

그중 하나가 북방에서 발견되었노라고.

후에 이 소문은 이렇게 변했다.

『카를로스 대공이 그 신비를 취하고, 북방을 굴복시켰다.』

신비의 힘으로 인해 북벌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없어도 성공시키긴 했겠지만 솔깃한 건 사실이다.

7대 신비 중 하나인 정령은 이곳 황궁에.

그리고 다른 하나인 ‘용’의 신비가 저 북방에 있었다.

북방은 위험한 곳이지만 8서클 마법사인 에디스가 옆에 있다면 해볼 만한 일이다.

‘용이라곤 했지만 나도 정확하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카를로스 대공이 말피엘을 위해 남겨둔 비장의 수라고 밖엔.’

카를로스 대공은 용의 신비를 접하고 취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극구로 숨겼다.

황제에 즉위한 뒤에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말피엘이 귀족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다닐 때 카를로스 대공만은 쉽게 건드리지 못한 이유가 그 ‘용’ 때문이라는 소문은 들었다.

‘위치는 알고 있다. 아직 카를로스 대공도 발견 못 했을 테고.’

밝혀진 사실은 없지만 그 신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에디스가 함께라면 해볼 만하다.

“······ 준비됐습니다, 전하.”

멀리서 들려오는 제르민의 목소리.

‘마차가 준비됐나 보군.’

최대한 조용히 궁을 떠날 생각이었다.

간다고 말해봤자 ‘나 좀 죽여주시오’하는 꼴이니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 최상이다.

모두의 시선이 정령 칼리번에게 쏠려있을 때 단출한 마차로 조용히 이동할 계획이었건만.

고개를 돌린 나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왜 그대가?”

“어딜 가십니까, 전하.”

··· 크로프트 경.

왜 그대가 제르민과 함께 있는 거지?

혹시 제르민이 말한 건가?

‘그건 아닌 거 같군.’

제르민은 필사적으로 눈을 양쪽으로 젓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차를 구하다가 걸린 듯싶었다.

“궁이 답답해, 산책을 좀 하려고 했다.”

“함께 가시지요.”

처음에는 반말로 꾸짖던 그가 웬일로 말을 높이고 있었다.

이전 황실의 행사에서 보인 활약으로 인해 심경의 변화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같이 가자고?

왜?

―황태자일 때 너를 죽였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내 인생 최고의 한이다.

황제가 죽고 그가 내게 한 말이었다.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 이러할까.

가다가 죽이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도 그럴 게 아직 크로프트에게 있어서 나는 ‘죽여야 할 미친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터.

“꼭 같이 가야 하나?”

“저는 황룡기사단의 기사단장입니다. 전하가 가시는 곳 어디든 따라가야 하는 처지지요.”

“조금 멀리 산책 할 예정이다만.”

“괜찮습니다. 어디로 가실지 예상은 됩니다.”

크로프트가 에디스를 노려봤다.

순간 에디스의 몸이 움찔했다.

최강의 마법사라 일컬어지는 8서클의 대마법사.

그리고 전성기 시절 적수가 없었다는 최강의 소드마스터가 서로 만났다.

크로프트는 에디스의 사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해 내가 멀리 떠날 것을 눈치챈 것이리라.

‘황제에게 말했다면 근위대가 와서 잡아갔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크로프트 혼자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크로프트는 황제 쪽 사람이다.

왜 그가 나의 외출을 황제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찾아온 걸까?

“······ 좋다. 함께 가지.”

< 떠나는 길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