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우스는 권좌에 앉아 권태로운 표정으로 쌓여있는 보물들을 쳐다보았다.
“카툴루 왕국에서 보내온 공물입니다, 폐하.”
“리겔 왕국의 공물도 도착했사옵니다, 폐하.”
“수르트만 왕국에서도······.”
주변 왕국들로부터 끊임없이 보내져 오는 공물들.
평화의 시대.
제국의 안녕과 평화의 수호가 계속되길 바라면서 보내오는 뇌물이었다.
반백 년간 사이가 좋지 않던 수르트만 왕국에서조차 선물을 보내올 정도로 제국의 위상은, 데우스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그가 황제에 즉위한 이후 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80%가 줄었으니까.
오죽하면 그를 일컬어 평화의 수호자라 부르겠는가.
허나.
“치워라.”
데우스는 저들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들은 들리지 않는가, 평화가 종식되어가는 소리가.’
자신이 만든 평화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 공물이 이제 곧 칼과 창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대륙은 불바다가 될 것이고, 성왕의 이름도 휴짓조각이 되리라.
지금 제국에선 비대하게 몸을 부풀린 괴물들이 기지개를 켜려고 하고 있었다.
황실이 축적한 힘을 웃도는 그들은 내정에도 간섭하고 있었다.
이것이 공화정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북방의 정벌마저 성공한다면 그들을 막을 구실이 없다.’
대륙의 북방. 사시사철 눈보라가 치는 얼음의 땅.
역사상 단 한 번도 정복된 적이 없는 그곳의 정복을 위해 귀족들은 원정에 나섰다.
전쟁에 굶주린 그들을 달랠 유일한 수였기에.
실패하길 바라지만 만약 성공하여 돌아온다면 걷잡을 수 없을 터.
물론, 그 사이의 공백을 노리는 방법도 있었다.
북벌을 위해 비워졌을 귀족들의 영지를 제압하고 재산을 몰수하면 된다.
북벌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돌아온 즉시 포박해서 목을 잘라내면 그만이다.
성왕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꼴이지만 제국이 그들에게 넘어가는 것보단 나았다.
하지만, 데우스는 아무런 선택도 할 수가 없었다.
카를로스 대공. 그가 존재하는 한.
기사왕이자 정복왕이라 불리는 그는 모든 불가해의 영역에 손을 대 정복했다.
황실의 소드마스터는 고작 다섯이지만 그의 산하 기사단에는 스물에 가까운 소드마스터가 있었다.
공개된 숫자가 그 정도이니 어쩌면 이를 아득히 넘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나마 실력 면에선 크로프트를 당해낼 기사가 없다지만 그것도 20년 전의 이야기.
‘크로프트도 늙었지.’
소드마스터도 세월의 역경을 이겨낼 순 없다.
전성기의 실력이라면 크로프트 혼자서 어지간한 소드마스터 서넛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또한 크로프트가 기사들의 육성에 힘을 쓰고 있으나, 황실의 기사가 카를로스 대공의 기사들보다 질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들은 제국 내에서 유일하게 숱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대공의 자식들 또한 황자들 못지않은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평화를 먹으며 힘을 키운 괴물.’
그가 필두로 있는 한 결국 주변 국가끼리의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카를로스는 미쳐있던 라인하르트를 황태자로 책봉시켰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태자 책봉과 바꾼 북벌이었다.
제국의 천 년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북벌.
대륙의 그 어떤 왕국도 성사해내지 못한 과업.
북벌이 실패하거나, 북벌 도중 그가 죽는다면 제국은 계속해서 평화로울 수 있으니까.
“··· 황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더냐.”
스윽.
그의 앞에 다섯 개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황가를 수호하는 또 다른 그림자들.
직속근위대와 달리 어둠 속에서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해결사들이었다.
“1황자께선 황궁비고에서 ‘여명의 검’을 취하셨습니다.”
“기특하군. 항상 보는 안목이 부족해 걱정이었는데.”
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비고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
아무런 조언 없이 혼자서 그 많은 보물 중 쓸만한 걸 골라야 한다.
여명의 검이라면 그중에서도 특등급의 보물.
괜한 걱정이었나 싶었다.
“2황자께선 ‘바람의 보옥’을 통한 마나연공에 들어가셨습니다. 벌써 칠 일째 연공실에 칩거하고 계십니다.”
“하하! 그 만사가 귀찮은 놈이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2황자는 모든 걸 귀찮아했다.
열정이 부족해서 재능을 썩히는 부류였다.
그런데도 어린 나이에 6서클을 달성할 수준의 천재성.
단순히 재능만을 따지자면, 황자들 중 제일이었다.
데우스가 세 번째 그림자에게 물었다.
“3황자는?”
“깨어나셨습니다. 다만, ‘빛의 탐구자’를 다루진 않으시는 듯합니다.”
“하기야. 빛의 탐구자에 얽힌 비밀은 천 년간 풀리지 않았으니.”
“하오나 깨어나신 이후부터 비약적인 성장을 하셨습니다.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대폭 향상되셨는지 3서클에 도달한 듯 보였습니다.”
“폭주의 여파인가?”
“정확한 원인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괘념치 않는다.”
데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폭주는 마법사들도 고개를 젓는 내용이다.
그에 관한 지식은 모두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빛의 속성을 가진 3황자 카르몬. 그는 정말 빛과도 같은 아이였다. 그 아이와 조세핀 황비는 이 무료한 황궁에서의 생활에 감칠맛이 되어주었다.
“4황자께선 ‘얼음새의 알’과 교감을 마치셨습니다.”
“그녀의 피를 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4황비.
3황비와 비슷한 시기에 궁에 들어왔으나 그것은 그녀가 이은 ‘피’를 위함이었다.
과거 북방에서 마왕이라 불렸던 존재.
북방을 통일한 마왕의 후손이 그녀였다.
최강의 피, 오직 그것만을 위해 그녀를 황궁에 들였다.
마왕의 피를 진하게 이은 4황비의 아들이니 얼음새와의 교감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실을 더욱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네 명의 황자들은 모두 천재적이다.
저 아이들은 제국의 기둥이 될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다.
“······ 황태자는, 무엇을 하고 있더냐.”
데우스가 물었다.
그러자 다섯 번째 그림자가 말했다.
“여전히 궁에 칩거해 계십니다. 얼음 마탑의 마탑주 에디스와 함께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디스의 영역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 그 이상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절대영역을 다루는 8서클의 대마법사다. 같이 있다면 파악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 이 또한 괘념치 않으마.”
“감사합니다, 폐하.”
“헌데······ 이상하군.”
이상함을 넘어 수상하기까지 하다.
일전 행사에서부터 황태자의 상태가 예전과 달라졌음을 느끼고는 있었다.
‘광증이 나은 건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던 광증.
머릿속에 벌레가 있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몸부림치던 라인하르트다.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음에도 광증은 낫질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고, 그 틈을 카를로스 대공이 노리고 들어온 것일진대.
“특급 죄수동의 관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들르지조차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들르지조차 않았다.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면 그렇지.’
괜한 기대였나보다.
특급 죄수동의 관리를 맡긴 건 황태자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말 많고 탈 많은 그들의 관리를 해낼 수만 있다면 광증이 완화되었음을 어느 정도 믿었을 것이다.
반대로 광증이 도져 학살을 일으켜도 상관은 없었다.
그냥 미친 황태자인 채로 평소와 같이 대하면 되니까.
‘제정신이 된다 한들, 그게 짐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능력한 황태자는 결국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황태자를 폐위하면 다른 황자들을 조정하려고 손을 뻗을 것이었다.
차라리······ 귀족들의 시선이 황태자에게 가 있는 게 나았다.
그저 미쳐있는 채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채로.
어중간하게 능력을 발휘해봤자, 광증이 나아봤자, 변하는 건 없을 테니.
보나마나 얼음 마탑의 마탑주도 뭐 떨어질 거 없나 기웃거리는 것일 테다.
그게 얼마나 멍청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짓인지도 모른 채.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천축이 뒤흔들리는 소리.
무언가가 침입하여 궁 내에서 터졌다.
“황궁의 결계가 깨졌습니다,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그림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허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황궁에 쳐놓은 결계형 마법들은 모든 마탑주들이 합심하여 만든 것.
그것을 깨트리며 감히 제국의 심장부를 습격한다니?
데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감히, 평화의 상징인 이곳에서.
자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 장소에서!
어느 누가 공격을 해온 것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그가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궁의 중심에 놓인 그것을 보았다.
“검?”
바위에 꽂힌 검.
바위 째로 떨어졌으며, 그 가운데에 검이 꽂혀 있었다.
더욱이 드는 의문은.
“······ 정령?”
검 위를 감도는 흐릿한 연기와도 같은 존재.
‘7대 신비’라 불리는 정령이 그곳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
정령, 칼리번.
6등급의 관리자 권한으로 오른팔의 주박을 풀어내자, 나타난 정령이 말한 이름이었다.
―나 칼리번을 깨운 게 그대인가, 인간?
놀랍게도 자의식이 있었다.
단순한 무기도 아니었던 건지.
칼리번은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믿기지가 않는군. 빛의 왕과 함께 위대한 정령이라 일컬어지던 나를 고작 너 같은 인간이 깨웠단 말이냐?
“문제있나?”
―인간, 너는 너무 약해 보인다. 차라리 옆에 있는 나이 많은 인간이 훨씬 더 강해 보이는군.
자신을 깨운 게 나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다.
하긴 바로 옆에 8서클의 대마법사가 있으니 굳이 비교하면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 정말로, 정령의 소환해 성공하셨군요.”
“다 그대 덕이지.”
7대 신비 중 하나가 깨졌다.
에디스가 놀라움에 몸을 떨어댔다.
하지만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8서클 대마법사의 폭주한 나노머신은 구하기 쉽지 않을 터이니.
바위에 꽂힌 검의 형태로 나타난 정령.
아마도 저 검이 칼리번의 본체이리라.
그리고 자신이 인정한 사람만이 저 검을 뽑을 수 있는 듯싶었다.
“음. 안 뽑히는군.”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에디스가 나섰다.
그러나 단순히 힘만으로는 검은 뽑히지 않았다.
마나를 주입하고, 마법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안 되는군요.”
에디스가 살짝 아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8서클의 대마법사도 뽑을 수 없는 검이라.
―인간들이여. 나 칼리번은 내가 인정한 자가 아니면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계에 내 인정을 받을 만한 인간은 이제 없다.
“방법이 없는 건가?”
―없다. 포기해라.
칼리번에게 말한 게 아니다.
내 말을 인식한 제로가 답했다.
[비정상적인 프로그램으로 작동되고 있는 A.I입니다. 현재 관리자 등급에서 제거하는 게 가능합니다. 제거하시겠습니까?]
비정상적인 A.I라.
인공지능. 만들어진 지능이라는 뜻이다. 제로 또한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지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번은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제거하는 게 낫겠군.”
―어이가 없구나. 누가 누구를 제거한다는 거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제거하는 게 낫다.
내 뜻을 알아들은 제로가 그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거 프로그램을 가동합니다.]
[0.1%]
―······?
순간 뺀질대던 칼리번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0.2%]
―자, 잠깐.
칼리번의 목소리에 경각심이 묻어났다.
[0.3%]
―끄으윽?!
참기 힘든 고통이 추가됐다.
[0.4%]
―이게 대체? 어찌 부동 영역에 있는 내 영혼을 지워낼 수 있단 말이냐?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인간이 부동 영역에 있는 정령의 본체, 영혼에 타격을 주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초월자들도 할 수 없는 기예다.
하물며 상대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정령무기의 시동어는 오직 자격이 있는 자만 입에 담을 수 있는 것.
그런데 느껴지는 마력조차도 터무니없이 작았다. 차라리 옆에 있는 인간이 자신을 깨웠다는 게 더 타당할 수준이었다.
[0.5%]
―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를 다룰 자격이 있는 것 같구나.
문제는 이대로 있으면 자신이 완전히 지워진다는 것이었다.
부동 영역을 타파해 자신을 지우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결국 칼리번이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리가 없었다.
“있는 것 같구나?”
―······ 저를 깨웠으니 확실하게 자격이 있습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제거 프로그램 가동을 정지합니다.]
삭제처리가 정지되자 정령 칼리번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요동쳤다.
다소 겁에 질리기까지 한듯한 태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검을 쥐어보았다.
스릉, 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검이 뽑혔다.
정령무기. 천 년만에 되찾은 7대 신비!
크게 감흥은 없었으나 마침 기발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거면 되겠어.’
황궁 내에서 파급을 일으키기에 이만하면 안성맞춤이다.
순간 말피엘이 떠올랐다.
재수 없는 놈이지만, 녀석의 ‘쇼맨십’은 확실히 극강이었다.
보여주는 것 하나만큼은 놈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고 영웅으로 추앙했다.
‘나라고 못 할 건 없지.’
7대 신비의 정령.
바위에 꽂힌 검과 함께 나타나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살은 알아서 붙일 것이다.
인간은 상상의 동물이고 이야기 만들기를 아주 좋아하니까.
―호, 혹시 정령왕 님이십니까?
< 7대 신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