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
사라진 ‘7대 불가사의’라고 불리는 것 중 하나.
고대의 인간은 정령과 함께 살아갔다는 기록이 심심찮게 발견되지만, 작금에 이르러 정령을 발견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제보도 있었고, 정령을 소환했다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거짓이고 사기였다.
어째서 갑자기 인간과 공존하던 정령이 사라졌는지, 그들이 어디로 간 건지조차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정령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군요. 이처럼 또렷하게 새겨진 정령어는 처음 봅니다.”
궁의 서재를 밀고 마련한 너른 공간.
그 안에서 내 오른팔에 새겨진 ‘정령어’를 보며 에디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냉철하기 그지없던 그의 눈에 탐구욕이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뭐라고 쓰여있는지 알아보겠는가?”
“‘··· 나는 빛을 꿰뚫고, 어둠을 물들이는 자.’ 가장 첫 줄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어려운 글자도 섞여 있어서 해석하는데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빛을 꿰뚫고, 어둠을 물들이는 자라.
거창하긴 하지만 제대로 된 정령의 소개였다.
동시에 저것은 시동어의 일부분이었다.
과거 황궁비고에 있는 보물을 모조리 부숴버리고서야 알게 된 비밀.
‘정령은 의지를 가진 생물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정령을 하나의 유기물로 봤다.
실체는 본래의 세계에 놔둔 채, 소환이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지성체로 본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의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오직 인간의 관점이 곁들여진 조악한 생각.
개나 고양이를 인간의 감정에 대입하여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정령은 무기다.’
정령은 그런 게 아니다.
정령이란, 고대의 인간이 만든 무기의 한 가지 종류였을 따름이다.
다만 워낙에 오래되어 제 기능을 못 할 뿐.
부서지거나, 시동어가 지워졌거나, 시동어가 멀쩡하더라도 힘을 잃어 발동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황궁비고의 보물이란 보물은 모조리 깨부순 다음에야 그 안에 시동어가 적혀있는 고대의 무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제대로 작동하는 건 없었지만, 수많은 학자와 마법사가 이를 연구했고 결국 밝혀낼 수 있었다.
정령은 어딘가로 사라진 게 아니다.
정령을 옆에 두고서도 우리는 그것이 정령인 줄 못 알아본 것이다.
“정령어가 인간의 몸에 이렇게 기생하듯 적혀있는 현상은 저도 처음 봅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빛의 탐구자라 불리는 지팡이를 아나?”
“마법사라면 모를 리가 없는 보물 아닙니까? ‘인류의 위대한 유산 100선’에도 등장하는 지팡이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3황자님에게 하사하신 물건이기도 하지요.”
황제는 노력이 가상하다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던져주었지만, 마법사들의 관점에서 그것은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빛의 탐구자를 쥐면 0.5서클 정도의 마나 조절 능력이 올라간다고 하는데 이는 ‘고서클’일수록 어마어마한 효과를 불러왔다.
당장 에디스가 그것을 쥐면 동서클의 마법사 두 명도 장시간 상대할 수 있게 될 터였다.
단순히 문화적인 가치도 엄청나지만 효능은 더 엄청난 것이 빛의 탐구자였다.
그런 보물 중의 보물을.
“부쉈다.”
“··· 예?”
“부쉈다고 했다.”
“빛의 탐구자를, 말입니까?”
“아아. 지팡이의 양 끝을 잡고, 무릎으로 부쉈지. 생각보다 재질이 약하더군.”
에디스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움이 가득 배어 나오는 표정.
본래 3황자에게 있던 것을 내가 어떻게 가졌는 건지도 의문이겠지만, 그것을 부순 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의도는 있었다.
빛의 탐구자에 새겨진 정령어를, 더 빠르게 해석해보려는 의도였다.
과거에도 빛의 탐구자에 새겨진 정령어는 해석하지 못했다.
해석하기 전에 숙청 과정에서 불에 타 유실됐기 때문이다.
마침 마법사들도 모여있겠다,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를 해결해 나름의 입지를 다지려던 것이었으나.
‘내 팔에 기생할 줄은 나도 몰랐다.’
마치 문신과도 같았다.
약간의 빛을 내며 존재감을 발산하는 나노머신.
[‘비인가 나노머신’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높은 보안등급의 락이 걸려있습니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선 더욱 높은 등급의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현재 ‘나노머신 Zero’의 관리자 권한은 9등급입니다. 해당하는 ‘비인가 나노머신’의 분석을 위해선 최소 ‘6등급’의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관리자 권한’의 등급을 올리기 위해선 더욱 많은 양의 나노머신을 지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등급이 올라가면 더 많은 기능이 해지됩니다.]
등급의 상승이 나노머신 제로의 기능을 올려준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도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보이는 게 제로였다.
고작 며칠 만에 아무도 고치지 못한 몸을, 정상화했으므로.
나도 궁금증이 생겼다.
권한의 등급을 올려서 오른팔에 새겨진 이 나노머신을 해제했을 때 무슨 현상이 일어날지.
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 ‘나노머신’을 모으는 건 세월이 걸린다.
단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폭주’한 나노머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접선해온 게 바로 에디스였다.
정령어의 해석?
물론 중요하지만, 진짜 의도는 따로 있었다.
“그 보물을······ 허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에디스에게 나는 말했다.
“빛의 탐구자에 새겨진 정령어가 갑자기 내 팔에 붙어버렸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지 않나?”
“전하, 보물을 부숴서 만들어지는 운명이라는 건 없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드디어 본론이다.
이 부분에 있어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폭주를 완화하는 것.
하지만 그 이면은 결국 마나를 강탈해가는 것이다.
자칫하면 마녀이니 사도니 하면서 몰릴 수도 있었다.
금기된 흑마법에 손을 댔다며 특급 죄수동에 갇히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여, 누군가가 이것을 공론화시킨다면 마녀사냥당하기 아주 좋다.’
미친 황태자가 흑마법에 손을 댔다!
폭주를 막는 게 아니라 마나를 빼앗는 것이다!
아무나 폭주의 치료를 할 수 없는 이유다.
마구잡이로 폭주를 치료했다가 그렇게 몰리면 답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힘을 주어, ‘연기’를 했다.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대를 보니 ‘운명’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더군.”
“운명이요?”
“우연히 얻은 이 능력이, 우연히 찾아온 그대로 인해 확증되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거짓말쟁이로 몰렸을 터.”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그것은 온전히 전하의 능력이 아닙니까? 필시 사람들도 알아주었을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렇겠지만 이곳은 황궁이다.
그가 나타나 능력의 재확신을 심어주지 않았다면 일이 조금 더 복잡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자. 이제 시작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대의 사정과 나의 사정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나한테는 그대가 필요하고, 그대에겐 내가 필요하듯.”
“제가, 필요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당장 정령어의 해석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나?”
“그건··· 다른 마탑주들도 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그대처럼 직접 나서지 못할 거다. 황실과의 관계, 마탑주가 보여야 할 체신 따위만 신경 쓰고 있을 테니.”
“······.”
“내게 필요한 건 그딴 관계를 아랑곳하지 않는,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자다.”
“저는 그저 손녀의 치료가 급했을 뿐입니다, 전하.”
그렇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손녀를 위해 모든 것을 집어던지는 사람은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저만한 위치에 있으면서 모든 걸 내던지며 오직 손녀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
몇이나 되겠는가.
손녀가 죽은 이후 그는 마탑주의 지위마저 내려놓았다.
초야에 묻혀, 손녀를 묻은 곳에서 쓸쓸하게 죽었다고 들었다.
이자는 신념이 있는 자다.
자신만의 길을 걷는 자였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운명이라 하지 않던가? 운명이, 그대의 간절함이 그대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지.”
순간 에디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찾지 못했던 해결법.
그것을 이곳에서 마주했다. 마치 운명처럼.
지금까진 운명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겠지만, 내 말을 들음으로 인해 ‘운명’이라 여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전하.”
의도를 파악하고자 에디스가 물었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에디스가 애써 진정하며 나를 쳐다봤다.
황태자가 원하는 게 없는 것이 이상했다.
어쩌면,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으나.
“그대의 완치다.”
완전한 치료.
폭주의 부작용을 없애는 것.
능력에 대한 확신을 주고, 더불어 의심 없이 폭주한 나노머신을 가져오기 위한 수이다.
계산적으로 사고하던 에디스의 눈빛이 더욱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에디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의 순수한 선의를 몰라보고서 이기심에 젖어있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순수한 선의?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만 에디스의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을 테니.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러니 고개를 들라.”
“아닙니다. 제가 저를 용서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마법사는 계산적이며 냉철해 보이지만 그와 반대로 순진한 면도 있었다.
‘믿음이 흔들릴 때 그들은 더욱 큰 믿음을 보인다.’
믿음에 대한 상식이 깨지면 보통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고서클의 마법사는 그러한 ‘상식의 저편’을 더욱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벽을 깨고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 탓이다.
에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소문에 대한 편견과 상식들.
그것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며 내가 새롭게 보였겠지.
이것을 잘 끌고만 갈 수 있다면, 에디스를 완전한 ‘나의 편’으로 만들 수도 있을 터.
“그렇게 있으면 치료를 하기가 어렵다. 앉아라.”
“······.”
저러다 울겠다.
***
8서클 마법사의 폭주.
그 나노머신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흡착하는 나노머신의 양이 매일 한계치를 초과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나는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폭주한 나노머신을 전부 빨아들일 때 즈음.
[6등급 관리자 권한이 해제되었습니다.]
6등급 관리자 권한이 해제되었다는 제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해지 된 제로의 수많은 ‘능력’들.
더불어 팔에 기생한 정령어의 분석을 시작한다는 그 말을 듣고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을 뒤집어놓을 준비가, 끝났다.
< 관리자 권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