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아쉬우세요, 아가씨?”
옆에 앉은 레인즈가 한쪽 입가를 말아 올리며 묻자, 이사벨라는 대차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거 아니야, 레인즈.”
“어머나. 그런 게 뭘까요?”
레인즈의 놀림에 이사벨라는 입을 꾹 닫았다.
하지만 이사벨라의 눈은 황궁이 있는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황궁에서 홀로 외로이 싸워가고 있을 한 남자.
벌써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을 그 남자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나라면 진즉에 포기했을 거야.’
어떻게든 깔보고 낮잡아보려는 황실 사람들의 의도가 느껴졌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유유히 빛나고 있었다.
수많은 악의적인 소문과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만약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편견에 맞서 싸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이를 본능적으로 배척한다. 짓밟고 뭉개려고 든다.
라인하르트는 그런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알려주었다.
‘여유.’
그것은 여유다.
너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
자신에 대한 확고한 의지!
지난 3일간 이사벨라는 라인하르트에게 편견과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결심하신 건가요, 아가씨?”
이사벨라의 표정을 읽은 레인즈가 염려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야.”
“제가 언제나 옆에 있을게요.”
“고마워. 힘이 난다.”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내가 기사가 되는 걸 모두 반대하시겠지. 어머니도.”
“··· 머리 정도는 밀릴 수도 있겠네요.”
여자가 기사가 된 기록이 없는 건 아니다.
검을 배워선 안 된다는 법도 없다.
하지만 둘 다 사회적으로 터부시되고 있었다.
그런 사회적 편견에 이사벨라는 맞서 싸울 것이었다.
포기하려 하였으나, 라인하르트를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자신보다 더한 상황에 있는 그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고작 자신의 성별 때문에 포기한다면 그는 웃어버릴 터였다.
―제대로 된 검을 배우고 싶다면 마안의 용병 ‘사밀리아’를 찾아라. 남성 위주의 의례식 검술이 아닌 너에게 맞는 맞춤형 검술을 배울 수 있게 될 거다.
힌트까지 얻었으니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더 강해져서, 당당해진 모습으로 만나러 가자.
저 외로운 황태자에게,
한쪽 팔 정도는 지탱해줄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 따위는 모두 흘려버렸다.
편견도 고쳐잡았다.
그러자 그를 괴롭히는 황실에 대한 짜증이 치밀었다.
‘라인하르트 황태자께서 미친 게 아니야. 미친 건 황실일 뿐.’
‘미친 새끼······!’
조세핀 황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쌍욕을 날려버리고 싶지만 상대가 상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황이 상황이었다.
“황비,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구려?”
“아, 아닙니다, 저언하. 저어언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언제든지 불편하면 말씀하시오. 내 미련 없이 떠나줄 테니.”
“호··· 호호! 어찌 제가 감히 황태자 전하를 불편해하겠사옵니까. 언제든, 제집이라 생각하고 찾아오시지요.”
목에 핏줄이 돋는다.
순간 칼이 어디 있나 위치를 확인했다.
마침 벽에 걸린 박제된 사슴이 눈에 들어왔다.
저 뿔 장식을 뽑으면 긴 레이피어가 나온다.
레이피어롤 뽑아서 당장이라도 찔러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카르몬을 위해서라도.
아들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라인하르트였으니까.
“제집이라. 그런 말까지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는군. 좋소이다. 마음 내키면 와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하겠소.”
제발 그러지 마라.
빈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러는 거다.
얄미워 죽어버릴 지경이었다.
이른 아침. 사자궁의 문을 두드리며 찾아온 라인하르트다.
아무리 같은 황실 사람이라도 미리 허락을 구하고 들어와야 정상이건만.
예의가 없다며 면박을 줘도 이상하지 않지만 카르몬의 치료를 위해서라니 할 말이 없었다.
복도를 거닐며 라인하르트가 감탄했다.
“그나저나, 사자궁이 내 궁보다 훨씬 세련됐군. 예술적 감각이 심상치 않아. 황비가 직접 꾸민 것들이오?”
“그렇습니다, 전··· 아, 그건 만지시면.”
쨍그랑!
500년 전 천재 공예가 아틀뤼엥이 직접 빚어 만든 도자기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그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
조세핀이 직접 주인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 가져온 예술품 중의 예술품이건만.
“이런. 내 궁에는 없는 것들이기에 무심코. 미안하오. 그런데 이런 건 보통 떨어지지 않게 붙여놓지 않소?”
“아아······.”
조세핀이 비틀거렸다.
빈혈이 나는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이 그림도 훌륭하구려. 그런데 이건 무슨 버튼이지?”
“안 됩니······!”
툭.
비명을 내질렀지만 늦었다.
그림 밑에 달린 붉은색 버튼.
쫘아악!
그 버튼을 누르자 그림이 눌리며 찢어지기 시작했다.
현시대를 풍미하는 최고의 화가, 일명 ‘파괴의 화가’라고 불리는 작가의 작품이었다.
그의 얼굴도, 이름도 알려진 적이 없지만 모두가 그를 최고라고 여기는 이유는 단지 화풍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언제든 없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인간의 욕심이나 호기심에 의해 작품이 분쇄되어 파괴되도록 항상 장치를 마련해놓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모두가 자연스럽게 즐기는 것.
본연 그대로 놔두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하여, 구하기도 힘들고 경매시장에 나타나면 경이로운 가격에 팔려나간다.
조세핀이 직접 암시장까지 내려가 힘들게, 정말 힘들게 구해온 작품이었다.
망연자실.
조세핀 황비는 분쇄된 그림을 보며 벽에 기대 반쯤 주저앉았다.
‘누가 저자를 죽여다오······.’
예술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복도를 거닐 때마다 그들의 세계를 감상하며 상상하는 게 그녀의 낙이었건만.
그 낙을, 지금 황태자가 부숴버렸다.
“미안하군. 내 궁은 이런 게 없어서 무심코. 아무래도, 치료는 다음에 하는 게 낫겠구려.”
“괘, 괘괜찮, 쿨럭, 습니다, 전하.”
억지로 벽을 짚고 일어난 그녀가 사람을 불렀다.
“게 누구 없느냐.”
“예, 마님.”
“치우거라. ··· 조각은 따로 모아두고.”
“예.”
근처에서 대기하던 시녀들이 목소리를 듣고 찾아들었다.
당장 이놈을 반으로 갈라 밖으로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아낸 조세핀 황비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치워둘 것을 명했다.
겨우 카르몬의 방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카르몬을 본 그녀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 깨어나질 않습니다. 황실의원도, 빛의 마탑주도 원인을 모르겠다고만 합니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카르몬은 잠들어있었다.
폭주를 일으킨 다음부터 통 깨어나질 않는다는 말이다.
[‘강제흡착’에 의해 잃어버린 비인가 나노머신이 육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남은 비인가 나노머신들이 주변의 나노머신을 끌어들여 부족해진 부분을 채우는 중입니다.]
[완전복구까지 앞으로 20시간.]
나는 카르몬의 손을 쥐어보았다.
제로의 말에 따르면, 20시간이면 깨어난다는 것이다.
몸속의 마나를 내가 강제로 뺏어가, 그것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뜻이었다.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복구하는데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
허나 그 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큰 일이군.”
“왜, 왜 그러십니까, 전하. 혹시 카르몬 전하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아주 큰 문제가 있지. 오늘이 고비겠어.”
“아아!”
또다시 비틀거린다.
[빈혈은 산소결핍과 철 결핍 때문에 일어납니다. 참고로 철분이 풍부한 음식은 소고기, 계란 노른자, 시금치, 브로콜리 등이 있습니다.]
때때로 제로는 묻지 않아도 주변을 해석하여 정보를 내놓았다.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지식이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제발 부탁드립니다, 전하. 카르몬 전하를 살려주십시오.”
“그건 어렵지 않지. 그런데 괜찮겠소?”
“예?”
“내가 카르몬의 치료를 맡아도 정말 괜찮겠냐 물었소.”
표정을 지운 채, 물었다.
이 한 마디에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있었다.
나는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는 의미심장함.
조세핀 황비의 표정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요 며칠간, 약을 보내지 않았더구려.”
“약이요?”
“황비가 보낸 약이 있지 않소. 내 광증을 낫게 하려고 직접 손을 써주었다고 들었는데?”
반대다.
조세핀 황비는 내 광증을 더욱 유발하고자 마약을 보냈다.
정신을 헤집고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마약, ‘악마의 속삭임’을.
강력한 중독성으로 인해 한 번 손대면 폐인이 되어버린다는 그것을.
하지만 나는 굳이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혼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밀리에 진행한 일. 내가 알고 있으리란 사실은 꿈에도 몰랐겠지.
지금쯤 ‘대체 누가 황태자에게 말을 한 건가?’라는 사고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더불어 ‘정말 황태자가 알고 있는 건가?’하는 의심이 끊이질 않을 터.
그러나 그녀의 표정만 봐도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묻겠소. 내가, 카르몬의 치료를 맡아도 되겠소?”
내 말의 저의를 깨달은 그녀의 눈가에 파도가 쳤다.
인정하고, 꿇어라.
그것이 카르몬을 살릴 유일한 길이니.
“······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것이 나를 향한 원망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아들을 살리기 위한 모정이 깊다는 것이다.
족쇄. 그리고 목줄까지 확실하게 매었다.
―살려주시옵소서, 폐하. 제발 제 아들만은 살려주시옵소서!
―부탁드립니다, 형님! 저를 죽이시고 어머니만은 살려주세요!
나는 과거, 둘의 목을 베었다.
끈질기게도 나를 괴롭혔던 조세핀은 카르몬이 보는 눈앞에서 목을 베어, 성 앞에 걸어놓았다.
몸뚱어리는 개에게 먹였다.
머리가 맑아졌기 때문인가.
광증과 광기로 휩싸였던 그때의 기억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입안이 썼지만, 같은 길을 걷지는 않을 것이다.
“맨입으로는 곤란하지.”
물론 그냥 좋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죽이지 않겠다는 거지, 얌전히 놔준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므로.
“제가 무엇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흠. 글쎄. 그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나 혼자서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오.”
사실이다.
그녀가 구할 수 있는 건 나도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딱 하나.
딱 하나 내가 구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저게 괜찮겠군.”
“저, 저건, 폐하의 하사품······.”
빛의 탐구자.
황제가 3황자 카르몬에게 직접 하사한 하사품.
그게 침대 옆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황실에서도 아직까지 저 지팡이에 얽힌 비밀을 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 지팡이 안에 든 비밀이 뭔지.
“당연히 폐하의 하사품을 내가 가져갈 순 없지. 잠깐 빌리겠다는 것이오.”
“······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치료를 시작하겠소.”
치료를 하는 척 손을 잡곤 빛의 탐구자를 바라봤다.
‘다시 돌려주진 못하겠군.’
부숴야 했으니까.
진짜 내용물은 저 지팡이 안에 들어있다.
위대한 빛의 마법사와 그를 따르던 정령의 흔적이.
< 빛의 탐구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