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10화 (10/146)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의 시선은 결코 나를 보지 않는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푸훕!”

조세핀이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았다.

다른 황비들도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다.

그의 관점에서 나는 자신의 치부 같은 존재.

성왕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암운 그 자체일 테니.

‘그대로시군. 성왕, 그 같잖은 이름에 목을 매어 혼자 고귀한 척하는 건.’

오히려 과거의 기억과 같아서 다행이었다.

오랫동안 대륙의 평화를 수호한 평화의 수호자로서 그는 한평생을 살아왔다.

황후의 자리를 10년이 넘도록 비워두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본래라면 황비 중 한 명을 황후로 승격하여 국정을 주도하겠지만 ‘자신의 청렴결백함’과 ‘황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그 애달픈 심정을 떨쳐내지 못해 그저 빈자리로 두고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소리. 짜고 치는 쇼다.

이미지는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성왕 데우스만큼 자신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축해낸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크로프트 경. 그대가 이런 자리에 나오다니, 의외로군.”

오직 제국 제일의 검사 크로프트만을 신경 쓸 따름이었다.

크로프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폐하의 빛나는 존안을 뵈니 답답한 속이 뚫리는 것 같습니다.”

“나이만 는 게 아니라 아부도 늘었구려.”

“흰머리도 많이 늘었습니다.”

“소드마스터도 세월을 피해가긴 어려운 모양이로군.”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찬 데우스가 시선을 돌렸다.

이어 황족들이 앉아있는 중앙 구령대에 올라 그가 말했다.

“긴 여정이었을 텐데, 고생 많았소.”

동시에 네 마탑의 마탑주들은 넙죽 허리를 접었다.

“아닙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대륙 반대편에 있더라도 달려왔을 겁니다!”

“폐하를 뵙는데 거리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눈을 빛내며 떠는 아부들.

네 명의 마탑주. 모두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이다.

8서클의 마법사는 대륙 전체로 따져도 이십 명 안팎.

그중 네 명이 이곳에 모였다.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자들이지만 상대는 제국의 황제다. 마탑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는 ‘큰손’이시니 더 말해 무엇할까.

‘어차피 대흉년이 지나고 마탑에 대한 후원이 끊기면 미련 없이 돌아설 자들이다.’

민초의 고생보다 자신의 연구가 더 중요한 게 마법사다.

연구실적으로 먹고사는 게 그들이니 이해는 한다지만, 고작 한 해 지원을 끊었다고 황궁에 있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모조리 철수시켰다.

“듣자 하니, 황자들의 성취를 짐에게 확인시켜주고 싶다고 하더군.”

황제 데우스의 눈이 다른 황자들에게로 향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데우스의 눈에 일말의 감정이 깃들었다.

그때 조세핀 황비가 끼어들었다.

“폐하. 오늘은 주최자인 카르몬 전하의 성취부터 확인하심이 어떠신지요?”

확인의 순서 또한 중요했다.

처음을 누가 장식하느냐, 그것만으로도 가산점이 추가 될 수 있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그녀의 언행을 다른 황비가 지켜볼 리 없었다.

“폐하. 황실의 존엄을 위해선 서열대로 하셔야 합니다.”

2황비가 즉시 받아쳤다.

1황자에게 선수를 줄 수는 있어도 3황자에게 선수를 빼앗길 순 없다는 듯.

오래된 기 싸움이다.

황후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둔 황제의 탓이기도 하였다.

“······ 1황자부터 확인토록 하지.”

그리고 서열대로라면, 1황자가 아닌 나부터겠으나 황제의 시야에는 이미 내가 없었다.

화아악!

전신에 화염을 강림시킨 1황자가 중앙에 비치된 시연대 위로 올랐다.

1황자. 화염의 마탑이 후원하는 불세출의 천재.

그의 피닉스 기사단 역시 제국 최고의 실력자들만 모인 최강의 집단이었다.

그를 따라 열 명의 피닉스 기사단원이 뒤따라 올라왔다.

대련의 형식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채앵!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검과 검 사이의 간극이 없다.

현란하기 짝이 없는 검술로 순식간에 기사단원들을 베어 넘겼다.

최소연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자다운 모습.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끼아아아악!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불꽃이, 피닉스의 형상을 만들며 날개를 활짝 폈다.

“아···! ‘피닉스의 고리’를 완성하셨군요!”

화염의 마탑주가 감탄을 내뱉었다.

피닉스의 고리. 화염의 마탑이 개발해낸 최상급의 서클 단련법.

피닉스를 강림시켜 각성한 1황자의 전신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바로 전에보다 두 배는 빨라진 속도로 순식간에 열 명의 기사단원을 모두 쓰러트렸다.

짝짝짝!

1황비가 손뼉을 쳤다.

짝짝짝짝!

“대단하십니다, 전하!”

“소름이 돋았습니다!”

남은 기사단원들과 화염마탑의 마법사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허나 허식으로 치는 박수가 아니다.

저 실력은 진짜였다.

‘노력하는 천재.’

1황자의 무서운 점이다.

불세출의 천재가 노력까지 한다.

하루도 쉬지 않고, 단련만을 고집하니 저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2황자의 차례였다.

2황자는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둘렀다.

“바람이여, 연쇄하며 강하게 불지어다.”

쿠릉!

천둥이 치며 소용돌이가 2황자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허나 6서클의 바람 마법 치고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세, 세 개······!”

“태풍 세 개를 동시에 조종한다고?”

문제는 그 숫자였다.

3개의 태풍을 동시에 만들어 조종하는 것.

이는 일반적인 6서클 마법사도 힘든 것이다.

마나가 비정상적으로 많고, 여기에 마나 감응력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아야 겨우 가능한 신기.

그것을 저런 귀찮다는 표정으로 해내고 있다니.

“······ 조만간 7서클에 드시겠군요.”

바람 마탑의 마탑주가 감탄했다.

7서클. 대륙에도 50명이 채 안 된다는 그 숫자를 고작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담으려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재능인가······.

황실의 미래가 참으로 밝았다.

빠드득!

유일하게 이를 악무는 자라면 조세핀 황비일 것이다.

1황자도 2황자도 상상 이상의 재능을 보여줬다.

설마 벌써 저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괜찮다. 카르몬 전하는 빛의 인도자. 1황자와 2황자는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그 경이에 있으니.’

빛이란 무엇인가.

희망이다.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카르몬은 빛의 인도자가 될 자격을 쥐고 태어났다.

그녀의 눈빛을 받은 카르몬이 시연대 위로 올라갔다.

쿵!

“아···!”

갑옷이 거치적거려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하지만 이내 일어난 카르몬이 흙이 묻은 다리와 얼굴을 털어내곤 씩씩하게 조세핀 황비를 향해 웃어 보였다.

“빛이여.”

카르몬의 주변으로 빛의 마나가 모여든다.

하나, 둘, 빛은 점점 더 카르몬의 주변을 밝혔다.

이제 2서클.

빛을 부르고, 방향을 지시하는 것 정도밖에 못 하지만.

“빛이여, 더욱 찬란하게 춤출지어다.”

카르몬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더욱 찬란하게. 3서클에 도달해서야 가능한 ‘강화’의 주문을 외운 것이다.

“이, 이중중첩······!”

허나 마법사들은 그게 문제가 아님을 단번에 알아봤다.

카르몬이 두 번 ‘빛이여’란 말을 언급하지 않았나.

마나는 언어에 깃든다. 언어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허나 이런 마법적 언어에도 금기가 있었다.

이중중첩.

동시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그 결과는 ‘폭주’로 이어진다.

기초이며 반드시 지켜야할 금기사항.

긴장한 나머지 카르몬이 실수를 저질렀다.

물론 그저 단순한 폭주라면 별 일 없겠으나 욕심까지 부렸으니 그 여파가 적을 리 만무.

후우우우우!

빛의 무리가 순식간에 팽창한다.

“아······.”

조세핀 황비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카르몬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 막으세요! 마탑은 뭘 하는 겁니까!”

“빛이여, 진정할지어다!”

“빛이여, 원래대로 돌아올지어다!”

빛의 마탑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미 명령이 입력된 마나를 더 강한 마나로 찍어누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어, 어머니.”

“카르몬 전하!”

“아, 아파요··· 아아.”

고작 여덟 살.

어린 몸에 강대한 마나들이 찍어누르니 그 고통은 배가 됐다.

이대로면 터져버릴 것이다.

그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빛의 마탑도 이렇다 할 해결책을 못 내고 있었다.

다른 마탑 역시 마찬가지다.

속성이 다른 마나가 간섭하면 오히려 폭주가 더 강해진다.

“어떻게 좀 해보란 말입니다!”

“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빛의 마탑주까지 나섰다.

하지만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비인가 나노머신의 폭주를 확인.]

그 순간 뇌를 울려오는 한 마디.

[‘비인가 나노머신’은 ‘유도만능줄기세포’와 결합해 한 가지 명령어를 따르도록 프로세스 되어있습니다.]

[저와 같은 A.I적 지능은 없지만 그 대신 외부를 돌며 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명령 중첩으로 폭주한 나노머신의 경우, 현재 지배에 성공한 나노머신들을 활용해 ‘강제흡착’할 수 있습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한 마디로 저 폭주를 잠재울 수 있다는 의미다.

“아파, 아아! 아프단 말이야!”

카르몬이 바닥에 드러누워 온몸을 벅벅 긁었다.

“전하···!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멈춰주세요!”

조세핀 황비가 눈물을 흘리며 구걸하기 시작했다.

비록 조세핀 황비는 꼴도 보기 싫지만.

카르몬은 죄가 없다.

‘승인한다.’

[마스터의 승인을 확인했습니다.]

그 순간 내 손끝을 통해 투명한 마나, 나노머신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배출된 나노머신들은 빠르게 공기를 타고 날아올라 카르몬에게 닿았다.

폭주한 카르몬의 마나를 ‘흡착’시킨 뒤, 유유히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강제흡착’한 비인가 나노머신에 대한 지배를 시작합니다.]

[지배가 완료되었습니다.]

폭주해서인지, 오히려 지배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곧 심장을 채운 나노머신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는 게 느껴졌다.

‘······ 1서클.’

동시에 깨달았다.

마법적 재능이 없다고 천시받던 내가, 1서클을 이루었음을.

“어어···?”

“포, 폭주가?”

“폭주가 멈췄습니다!”

빛의 마탑 마법사들이 외쳤다.

갑작스럽게 폭주가 멈추더니, 빛의 무리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빛의 마탑 마법사님들. 이 고마움을 어떻게 전해야할지.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말만하세요.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조세핀 황비가 고마움을 전했다.

“그, 그게······ 다행입니다, 황비님.”

하지만 빛의 마탑 마탑주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일 따름이다.

그들로 인해 폭주가 멈춘 게 아님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빛의 마탑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마나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비정상적이군.”

“이중중첩에 마나폭주 현상까지 일어났어. 그걸 어떻게 막아?“

“허무의 마법사라면 모를까······.“

“그건 마법사들이 지어낸 허상의 속성이잖아.”

마법사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마탑의 얼굴들. 방금 전 폭주의 진화에 이상이 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폭주를 멈춘 건 빛의 마탑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를 지적하듯, 누군가가 나섰다.

그가 나서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절대로 나설 리 없는 이가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다.

“조세핀 황비님께서 진정으로 고마워해야할 사람 또한 그들이 아니지요.”

제국 제일의 검사, 검왕 크로프트!

절대적인 공신력을 지닌 그의 발언에 모두가 침묵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동시에, 크로프트의 두 눈이 내게로 향했다.

< 폭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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