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9화 (9/146)

본래 3황자 카르몬의 성취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여덟 살의 나이에 2서클을 달성한 불후의 천재.

빛의 속성이라는 흔치 않은 친화력까지 가졌으니 치하 해 마땅하다.

빛의 마탑을 초청하고, 축제를 벌일 생각이었으나, 그 꼴을 다른 황비들이 두고 볼 리 없었다.

‘감히 카르몬의 무대를 망쳐······!’

조세핀 황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른 황비들에게 카르몬의 2서클 진입을 자랑했던 입이 방정이었다.

황태자의 재책봉 이야기가 대두되고 있는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제 아들을 그 자리에 올리려고 혈안이 된 게 그녀들이었다.

그런데 빛의 마탑을 초청해 황제 앞에서 축제를 벌인다?

하물며 황실 황가의 피를 이은 후손은 모두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 여덟 살에 2서클 정도는 하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게 갖가지 이유로 네 마탑이 같은 날 도착하게 된 것이다.

‘카르몬이 가장 눈에 띄어야 해.’

이제는 누가 더 황제의 눈길을 끄느냐의 싸움이 됐다.

그저 빛의 마탑을 초청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알베르토.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황비님.”

일렬로 정렬된 황금 기사단.

서른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기사들이 완전무장한 채 일렬로 늘어서 있다.

3황자 카르몬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려면 입장할 때부터 압도해버려야 한다.

시선이 멀게 만들어 다른 황자는 보이지도 않게끔.

그러기 위한 기사단이다.

조세핀 역시 한껏 단장한 채 황금빛 경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같이 불편한 옷가지는 끔찍이 여기는 그녀지만, 카르몬을 황태자로 책봉시키기 위해선 불길 속으로라도 뛰어들 수 있었다.

“카르몬 전하. 옷 단장은 끝나셨습니까?”

“예, 어머니.”

곧 시녀들과 함께 옆 방에서 카르몬이 뒤뚱거리며 나타났다.

카르몬 역시 황금빛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여기에 진짜 사자의 갈기를 덧대 만든 황금 사자의 투구를 쓰고, 미스릴로 지어 만든 검까지 착용하자 태가 났다.

“멋있으십니다, 전하.”

“어머니도 멋있으세요.”

준비는 끝났다.

조세핀 황비가 알베르토 기사단장을 바라봤다.

“가자꾸나.”

전장에 출전하는 출정식이 이러할까.

비장한 표정으로 사자궁을 나섰다.

황궁의 입구. 그 앞에 준비된 자리에 마탑의 사절단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자 보낸 고위급 마법사들.

단순히 황제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압도하여 친밀한 관계를 쌓아놓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카르몬 전하 납십니다!”

부우-!

병사와 기사들. 도합 백에 달하는 행렬이 황궁 입구로 닿았다.

하지만 입구에 도착한 조세핀 황비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 여우 같은 년들이······!’

다른 황비들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더 눈에 띄냐의 싸움.

그녀처럼 난리를 피우며 등장하진 않았지만, 확실한 색깔을 가지고 각자의 위치한 자리한 황비와 황자들.

그들 모두 자신의 기사단을 대동한 채 견제하는 분위기를 풍겨댔다.

“와, 황실은 진짜 대단하군요. 어지간한 서커스단보다······.”

“제발 쉿!”

마법사들 중 하나가 눈치 없이 입을 열다가 주변 마법사들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황자가 등장할 때마다 볼거리가 생긴다.

어지간한 서커스단을 보는 것보다 더 재밌었던 탓이다.

그 소리를 못 들은 다른 황비들은 조세핀과 카르몬을 보며 뇌까렸다.

“광대가 따로 없구나. 역시 시골 귀족 출신이라 그런지······ 쯧.”

“어린 것이 천하기까지 하군.”

2황비와 4황비.

유일하게 1황비만은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3황비인 조세핀은 애써 못들은 채 했다.

자신을 욕하면 그들 스스로에게 욕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정말로 모르는 걸까.

그렇게 황제를 제외한 모두가 모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태자도 없었다.

마법적인 재능도 없는 그가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황태자를 후원하는 마탑도, 기사단조차도 없으니까.

‘그래도 미리 손을 써놨으니, 황태자도 자리하겠지.’

그러나 조세핀 황비는 황제에게 언질하여 황태자도 자리하도록 하였다.

라인하르트, 그 무능력한 황태자가 재능 넘치는 황자들을 보며 절망하도록.

더욱 고립되도록 말이다.

혹여나 이성을 잃고 또 미쳐 날뛴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오늘은 카르몬의 날이다.’

황태자는 문제가 아니다.

다른 황자들?

3황자와 4황자는 나이 차이가 없다.

하지만 1황자와 2황자는 다 큰 성인이었다.

황태자 재책봉을 한다면 이미 성인인 그 둘에게 쟁점이 가겠으나, 카르몬이 그 둘에 못지않음을 알리는 날.

동갑인 4황자?

아직 어미 젖도 떼지 못한 그런 놈과 카르몬은 질적으로 달랐다.

경쟁하려면 1황자나 2황자와 해야 했다.

1황자는 검의 천재다.

고작 열아홉의 나이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조만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검과 자신에게 화염을 덧씌워 각성하면 소드마스터와도 일전을 겨룰 수 있을 정도라고.

2황자는 마법의 천재였다.

열일곱의 나이로 바람 계통 마법을 무려 6서클 대성했다.

재능이 넘치는 천재도 서른을 넘겨야 닿을 수 있다는 그 영역을 13년이나 빠르게 당겨 닿은 것이다.

‘모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원소 속성일 뿐.’

카르몬은 그들에 비하면 아직 검술 실력도, 서클도 낮지만, 대륙에서 가장 보기 힘들다는 빛계통 속성의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것보다 보기 드문 것에 더 눈길이 가기 마련.

황제라고 다르지는 않으리라.

그때였다.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왜 여길······?”

웅성거리는 소리.

조세핀 황비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황실근위대가 직접 발을 옮겼으니 처음부터 라인하르트에게 거부 권한은 없었던 셈이다.

그야말로 황실근위대에 잡혀 오는 형국.

자신의 기사단에게조차 버림받은 황태자에게 어울리는 형벌이다.

마법사들도 웅성거렸다.

“저분이 그 라인하르트 황태자?”

“다른 황자들과 달리 행렬이 소박한데?”

“그러네. 세 명?”

따로 보낸 근위대는 어디 가고 황태자는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베르사유 백작가의 영애가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저, 저분이 왜?”

“허······.”

조세핀 황비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잡아 오라는 근위대가 왜 없는지 알겠다.

기사단을, 대동했기 때문이다.

비록 한 명이지만, 그 한 명만으로도 기사단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을 데려온 탓이다.

“······ 크로프트 경.”

황룡 기사단의 기사단장.

최강의 소드마스터이며 검왕이란 칭호가 허락된 남자.

궁에 있으나, 대외활동은 전혀 하지 않던 그가.

황태자라면 이를 갈던 그가.

··· 지금 라인하르트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이 따갑군.’

이런 시선, 익숙하다 못해 평상시의 일이었다.

여유롭고 능숙하게 나는 그 시선을 가로질렀다.

이사벨라는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내 ‘맞장구’에 보조를 맞췄다.

크로프트는 여전히 굳어있는 표정으로 옆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그가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크로프트가 이토록 빠르게 나를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르민이 무릎을 꿇으며 부탁하더군.

근위기사단을 물려낸 검왕 크로프트가 말했다.

제르민.

그가 찾아와 무릎을 꿇으며 부탁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나서지 않았을 거라고.

황실근위대가 찾아온 즉시 제르민은 이 속에 얽힌 ‘정치’를 읽었다.

또다시 나를 희생양 삼아 황비들이 축제를 벌일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허나 나는 너의 광증이 나았다는 걸 믿지 않는다. 또 변덕에 지나지 않겠지.

실망하고, 또 실망했다.

수십, 수백, 수천 번 실망하고 난 다음에야 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

황제의 명만 아니었다면 검왕 크로프트는 궁에 남아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르민에게 말했다. 내 눈앞에서 다시 광증이 도진다면 네놈의 목을 날려버리겠다고. 제국이, 황제 폐하께서 네놈으로 인해 멸망할 순 없지 않으냐?

크로프트는 모두 알고 있었다.

현재의 제국이 누구의 것인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이 나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무슨 짓을 할지조차도.

결국 내가 황제에 즉위하자 크로프트는 제국을 떠났다.

마지막 억제제가 사라지자, 귀족들은 대놓고 날뛰었다.

크로프트는 귀족들조차 두려워하는 검사.

그가 있어서 이 가짜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거였다.

크로프트가 동행하는 건 나를 보필하기 위함이 아닌, ‘만에 하나의 상황에서 목을 베어버리기’ 위함이었다.

살벌하지만 나도 동의했다.

또다시 이성을 잃고 광증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 바에야, 죽는 게 나았으므로.

“황태자는 대외활동은 아예 안 하는 거 아니었어?”

“소문보다 훨씬 잘 생겼네.”

“인상도 안 찡그리고 있는데?”

나를 보는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럴 수밖에.

대외적인 활동을 책봉식 이후 아예 하지 않았으니 오직 소문으로만 나를 접했을 터다.

그리고 그 소문은 굉장히 악의적이었을 것이고.

마탑의 얼굴들이 모두 모인 자리.

본래라면 자신이 후원하는 황자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의 시선은 오직 나에게로 모였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황제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옆으로 조금 더 떨어지면 황비들의 자리다.

그녀들은 내 거침없는 행보에 당황하거나 의아해하고 있었다.

‘폐하의 눈도 못 마주치던 황태자가······.’

폐하의 옆자리에 저토록 당당하게 앉는다니.

‘허세인가?’

‘미친 거지. 또 광증에 먹힌 게 분명해.’

어차피 허세이리라.

황제가 나타나면 꼬리를 말고 바닥만 내려다보기 바쁠 것이다.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황비들의 눈을 마주했다.

실로 오래간만이다.

아직도 저들의 비명이 귓가에 생생했다.

모두 직접 목을 베어버렸는데.

‘덕분에 공작들을 견제할 황족의 힘이 모두 사라져버렸지.’

두 공작의 음해에 홀려버렸다.

오랜 시간 나를 무시하던 황비들에 대한 감정이 폭발해버린 결과였다.

지금 생각해도 진저리쳐질 만큼 아둔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죽여선 안 된다. 차라리 빼앗으면 몰라도.

“황제 폐하 납시오!”

부우우우우!

수많은 나팔소리와 함께 마침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백의 기사들과 함께 자리한 황제가 손을 들자 모두 고개를 숙였다.

성왕, 평화의 수호자 데우스.

······ 그 이름에 얽매여 모든 것을 방관한, 방만한 황제.

과거의 나는 그가 두려웠다.

아무 감정 없는 눈빛이, 나를 바라보는 무저갱 같은 저 두 눈이.

그의 앞에만 서면 잔뜩 위축되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입도 뻥끗 못한 채 병신 같이 굴었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전혀 두렵지도 않았다.

나는 진심을 담아서 말을 전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아버지.”

그와 동시에.

[모든 비허가 나노머신의 지배가 끝났습니다, 마스터.]

< 오래간만입니다, 아버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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