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핀 황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히 그딴 무능력한 황태자에게 무릎을 꿇어? 그러고도 네놈이 3황자를 모시는 기사라고 할 수 있는 게야?”
“죄, 죄송합니다, 황비님.”
알베르토 기사단장은 고개를 숙였다.
신성력으로 붙인 새끼손가락이 아직도 저릿하건만.
하지만 얼굴은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웬일로 그냥 넘어가나 했다.’
자고 일어나니 어제의 일이 마음에 걸리기라도 한 걸 테다.
하지만 자신이 무릎 꿇은 거로 질책할 생각이었다면 어제 불러 경을 쳤겠지.
‘이사벨라 영애 때문이군.’
베르사유 백작가의 이사벨라 영애.
현 시각, 그녀가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란 듯이 라인하르트 황태자와 궁의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조세핀 황비는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었다.
괜한 화풀이.
그 대상이 자신이 된 거다.
“네놈 때문에 베르사유 백작가의 영애가 그딴 무능력한 황태자에게 관심을 가진 게 아니냐?”
사교계에서 이사벨라는 독특하면서도 유명하다.
꺾을 수 없는 꽃, 도도한 장미.
그 외견만큼이나 수많은 고위귀족가로부터 추파가 던져졌지만, 하나같이 매정하게 차버리기로 유명했다.
그 과정에서 알려진 게 있다면 허례허식을 미친 듯이 싫어한다는 것.
이사벨라의 성격을 이용해 황태자에게 망신을 주려 했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조세핀 황비가 손가락을 깨물었다.
‘광증이 치료된 건가? 아니야, 그럴 리 없다. 분명히 약은 먹고 있다고······.’
광증을 더욱 유발하는 약.
그 약을 꾸준히 먹는 이상 광증은 치료되기 힘들다.
하지만 멀쩡하게 바깥으로 나와 티타임을 즐길 정도면, 예전과 같이 아주 미쳐버린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폐하께서 다시 놈에게 관심을 두게 해선 안 돼.’
광증이 심해지며 황제의 관심도 황태자에게서 멀어져갔다.
황태자가 반년간 궁에 칩거했음에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베르사유 백작가와의 혼담도 귀족들의 입김에 못 이겨 마지못해 승낙한 것. 황비 역시 이에 힘을 보탰다.
그런데, 황비가 바라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버렸다.
고작 하루다.
권위에 흔들리지 않는 별종 이사벨라가 대관절 황태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남아있는 건지.
아니면 그래도 ‘황태자’이기 때문에 순종적인 척이라도 하는 걸까?
‘소문과 달리 이사벨라도 여우였던 게야. 그러면서 혼자 도도한 척이란 척은 다 했구나. 가증스러운 년 같으니.’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모든 귀족가의 여식들이 그러하듯, 자신을 가장 비싸게 쳐줄 남자를 찾고 있던 게 분명했다.
“저, 황비님.”
“닥치거라. 네놈은 말을 할 자격조차 없다.”
“······.”
알베르토가 입을 닫았다.
황태자의 실력과 광증에 관해 이야기하려 했지만, 원천봉쇄당했다.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는 것.
황태자가 실력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흥, 오늘은 빛의 마탑에서 사람을 보내오는 날이다. 내 아들, 카르몬의 빛나는 재능이 발휘되는 날이지.”
그러거나 말거나 황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빛의 마탑에서 사람을 보내오는 날이다.
많은 귀족이 모여, 3황자 카르몬의 성장을 지켜보며 축하하는 영광스러운 날.
‘폐하께서도 계신 자리. 확실하게 각인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엔 황제도 포함되어있었다.
***
“전하, 정말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이사벨라가 찻잔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쳐다보며 어렵게 물었다.
본래라면 오늘 떠나기로 되어있지만, 그녀는 아직도 황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혼담, 없던 거로 하지.
오찬에서 황태자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좋게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황태자 쪽에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인 것이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그러려니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의 말이었다.
―대신 ‘3일간’만 적당히 짐의 맞장구를 쳐줬으면 하는데.
3일간 궁에 머무르며 같이 차나 마셔달라는 말.
혼담이 폐기되었다면 당연히 이사벨라는 떠나는 게 맞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녀가 궁에 머물길 바랐다.
―물론 그대도 얻을 게 있어야 하니, 짐이 그대의 ‘친구’가 되어주지.
더 가관인 건 자신이 친구가 되어주는 게 엄청나게 대단한 일인 양 떠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지만 황태자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 3일만 참자, 이사벨라.’
더러워도 이곳은 황궁이고 상대는 황태자다.
3일이 지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거다.
“되다마다. 왜, 보는 눈이 신경 쓰이나?”
황태자궁의 2층 정원.
다른 궁에서도 충분히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중간중간 피부가 아려오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예. 왠지는 모르겠지만, 적대적인 시선이······.”
“신경 쓰지 마라. 짐을 시샘해서 보내오는 시선이니.”
후룩!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라인하르트는 하늘을 올려다 봤다.
오늘도 날씨가 좋았다.
그리고 당장은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사벨라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은 생각할 것이다.
황태자의 광증이 나은 건가?
정말 황태자가 달라진 걸까?
··· 라고.
내가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선 보여주는 게 최고였다.
남에게 ‘나는 괜찮다’라고 말한들 믿을 리 없으니까.
고양이 못지않은 호기심을 가진 게 인간이라는 동물.
소문은 금세 퍼지리라.
이후 사람들은 스스로의 믿음에 따라,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 해석하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미쳐있다고 확신하는 자는 그저 잠시의 변덕으로 치부하겠으나, 일말의 희망을 품은 자는 반드시 확인하려 들 터.
내 궁극적인 목적은 검왕 크로프트였다.
그의 귀에 소문이 들어가게 만드는 것.
찌는 던져졌다. 과연 원하는 물고기가 물릴 지.
‘사람이 하루만에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그리고 그 모습을 이사벨라가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담았다.
완전 다른 사람이 됐다.
키도 조금 큰 것 같고, 어제는 없던 살도 붙었다.
분위기도 마찬가지. 어제와 달리 여유가 넘친다.
하루 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그때 황태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가 재빨리 손을 내렸다.
“손은 안 감춰도 된다. 그 굳은살은 숨겨야될 게 아니라 영광의 증표이지 않느냐.”
“······!”
진심으로 놀랐다.
자신의 손바닥에 난 굳은살.
몰래 검술을 익히다가 생긴 것들이었다.
의도적으로 감췄기에, 아무도 몰랐다.
이런 자리에서 만난 남자라면 더더욱.
그녀의 굳은살을 알아본 건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처음이었다.
“‘친구’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 귀족가의 여식이 검을 익히는 게,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더욱 그녀는 냉정해졌다.
지금의 시대, 이 평화의 시대에 검은 온전히 남자의 상징이 되었다.
여자가 검을 익히는 걸 수치로 생각했다.
가문의 어른들도 모르는 비밀.
“짐은 멋있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단순한 성별의 차이로 재능을 썩히는 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지.”
··· 그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후벼 파고 있었다.
멋있다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말은 질리도록 들어봤어도.
멋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헌데 그 말이 ‘미치광이 황태자’에게서 나올 줄은.
‘달라······.’
이제야 알겠다.
황태자는 일반적인 귀족들과 개념의 궤가 다르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작금의 시대에 귀족가의 여식이 검을 휘두르는 걸 보고 ‘멋있다’고 품평하는 황태자라면, 자신이라도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정말 그런 남다른 사고방식 탓에 이상한 소문이 생성되고 돈 것이라면?
‘같은 처지네.’
자신과 같은 처지다.
남다른 세계관.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이 세계에, 조금이라도 다른 행동을 보이면 ‘치부’라고 여기는 이 세계에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고.
그렇게 혼자 삭이고 있었는데, 동지를 만난 기분이다.
“얼굴 뚫리겠다.”
“예? 아······.”
너무 뻔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그때였다.
휘이잉-!
쿠웅!
하늘에서 빛이 터진다.
황홀할 정도로 밝은 빛의 무리.
“빛의 마탑 사람들이로군.”
“빛의 마탑이라면, 설마 마탑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힌다는?”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마탑.
그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마탑이라는 건 대륙적인 차원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3황자 카르몬의 성장확인차, 황비에 대한 예우차 들린 것이리라.
더불어 카르몬을 띄우기 위함도 있을 터.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화아악!
하늘에서 불꽃이 인다.
그 뒤로 태풍이 치고, 얼음꽃이 사방을 수놓았다.
“빛의 마탑만 온 게 아닌 것 같군요······?”
“전부 왔다.”
자신을 제외한 4황자들.
각각 화염, 바람, 빛, 얼음 속성의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마탑에서 동시에 행차를 한 것이다.
우연이라고 치기엔 공교롭다.
아마도 모든 황자와 황비가 경쟁을 위해 무리하여 부른 것일 터.
‘기억난다.’
본래라면 이날 나는 황태자궁에 갇혀있어야만 했다.
광증이 도져 이사벨라를 덮치려고 했으니, 황제의 명에 따라 밖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마법적인 재능이 없던 내게 후원하는 마탑도 있을 리 만무했다.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행사다.
‘왜인지 제로에게서도 제대로 된 언급이 없다.’
비인가 나노머신을 지배하여 활용하겠다는 말에 나는 승인했다.
주변의 마나를 모조리 빨아들인 제로는 그 뒤로 비슷한 말만 내뱉고 있었다.
[해석 중······.]
[비인가 나노머신을 해석 중입니다.]
[자가복제 바이러스를 발견, 관리자의 권한으로 바이러스를 제거합니다.]
[제거 완료.]
[‘유도만능줄기세포’의 인자를 이식합니다.]
[엑세스 완료. 비인가 나노머신의 지배에 성공합니다.]
[모든 비인가 나노머신의 지배까지 16% 남았습니다.]
거의 다 됐다.
완료되면 무슨 현상이 일어날지 궁금할 지경.
그 순간이었다.
척. 척.
기사들이 내 정원으로 침입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게 가능한 자들이었다.
“황실근위대가 내게 무슨 일이지?”
무려 황제의 직속근위대다.
근위대장이 나를 보며 무겁게 말했다.
“전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나를?”
“예. 함께 ‘행사’에 참여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행사라.
지금 저 마탑들이 모인 걸 행사라고 하는 건가?
과거에는 없던 일이다.
비록 어제 내 광증이 도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갑작스럽다.
아버지. 황제는 내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탓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하루만에 변심하여 나를 부를 리가 없을 텐데.
‘조세핀 황비.’
그녀가 압력을 넣은 것이리라.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나를 불러 3황자와 비교시키며 황제의 이목을 끌려는 수작 같았다.
무능한 황태자와 유능한 황자들.
그저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평화롭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장난질도 평화가 보장되니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짜 광기가, 지옥이 뭔지도 모르는 작자들.
예전의 나였다면 그 의도조차 읽지 못한 채 멍청이처럼 당해줬겠지.
회귀한 지금, 죄인처럼 끌려갈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차는 마저 마시고 가겠다 전하라.”
“당장 모셔오라는······.”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던가? 당장 나를 데려오라고?”
“······.”
“황제폐하의 말을 멋대로 해석하고 지어낼 권한이 그대에게 있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알아서 가겠으니 돌아가라.”
근위대장이 입을 닫았다.
데려오라고만 했지, 정확히 언제 데려오라곤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말렸다. 근위대장의 눈빛이 혼란해졌다.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듯이.
“맛이 좋군.”
나는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황비의 장난질에 어울려주긴 힘들 것 같다고.
< 마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