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검을 들어라?’
알베르토 기사단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반년이 넘도록 궁에 칩거한 황태자.
광증이 더 심해져서 강제칩거 당했다는 소문만 파다했다.
이를 계기 삼아 궁 내부에선 황태자의 책봉을 다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죽은 황후가 아니었다면, 황후에 대한 황제의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저 미친 황태자는 책봉은커녕 단두대에 목이 잘렸을 터.
아무런 재능도 갖지 못한 무능력자.
군주가 지녀야 할 덕목에 들어맞는 게 단 하나도 없다.
황태자가 제국을 다스리면 필히 제국은 망할 것이다.
오죽하면 황제가 직접 임명해 황태자를 따르던 서른 명의 ‘황룡 기사단’도 이제 고작 세 명만 남았을 따름이었다.
직속 기사단마저도 황태자의 자질에 실망하고 대부분 떠나갔으니, 그 실력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너무 오냐오냐 자란 탓이다.’
알베르토 기사단장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약에 찌들어 피골이 상접한 몸.
제대로 검이나 휘두를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허약해 보였다.
자격 없는 황태자라지만 그래도 황태자였다.
강하게 나오면 져줄 수밖에 없으니 자신이 진짜 강한 줄 아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기사에게 검을 겨눌 생각을 하겠는가.
‘적당히 놀아줘야겠군.’
아무리 알베르토가 황금기사단의 단장이라도 이곳은 황궁이다.
보는 눈이 있으니 적당히 맞춰줄 필요는 있었다.
“······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짐이 황태자이기 때문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검술시연’이 끝날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대련이 아닌 검술시연.
황태자의 춤사위를 그저 막으며 지켜보겠다는 말.
자신들을 ‘광대’ 취급한 것에 대한 복수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그 말, 지킬 수 있나?”
가장 명예 없는 자가 기사의 명예를 운운한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걸지요.”
이만한 안전자산이 어디있겠나.
저 엉성한 자세를 보라.
제대로 된 격식조차 갖추지 못한, 그저 힘에 의지해 검을 들고 있는 자세였다.
마치 검술이라곤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기본기도 안 닦여있군. 3황자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그에 반해 자신이 모시는 3황자는 어떻던가.
나이가 어린 것만을 제외하면 천재 중의 천재였다.
고작 여덟 살의 나이에 기사 후보생을 이길 정도의 실력.
황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아 마법도 벌써 2서클을 달성했다. 그것도 만 명 중 한 명뿐이라는 ‘빛’ 속성 친화력을 가진 채로.
‘소문보다 더 최악이다.’
적당히 맞장구나 쳐주다가 물러나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후웅.
위에서 아래로 찍어내리는 종베기.
보인다. 느려터진 저 검은 어린아이도 막을 수 있을 듯했다.
이에 검을 들어 막자, 그대로 황태자의 검이 물 흐르듯 떨어졌다.
손아귀에 검을 쥘 힘조차 없던 걸까?
투악!
순간 알베르토의 몸이 뒤로 밀렸다.
예상하지 못한 몸통박치기다.
정확히 두 발자국 밀려났다.
“움직였군?”
알베르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검술 대련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검을 들라고 했지, 검으로 싸운다고 말한 적은 없다만?”
“이건 기사도에 어긋나는······.”
“짐이 기사로 보이는가?”
기사도는 예법이고 예의이다.
그것은 기사가 아니라도 지켜야 할 도덕 같은 것이었다.
예컨대 검의 대결에서는 검만 쓰는 것 같은 암묵적인 약속 말이다.
라인하르트 황태자.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의 자질은 아니었다.
진정한 기사도라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알베르토가 입을 열었다.
“······ 검을 드십시오.”
“검의 대결을 고집하겠다? 참으로 기사다운 친절이군.”
대놓고 놀리듯 느릿하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든다.
그 특유의 건방짐까지 더해져 화를 억누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허나 방심은 한 번이면 족하다.
곧이어 시작된 대련.
공격하는 쪽은 여전히 황태자 쪽이고, 알베르토는 방어만을 고집했다.
채엥!
횡베기. 막는다.
이후 들어오는 검 역시 비스듬하게 쳐낸다.
막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검술에 무지하다’는 편견이 시시각각 깨지고 있었다.
집요하게 치명상만을 노리는 검.
한 번 허용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부위만을 노리고 있다.
그것도 진심으로.
‘제국의 검술이 아니다.’
제국은커녕 어느 왕국에서도 저런 살기 넘치는 검을 가르치진 않는다.
그런 검술이 존재한다면 그건.
‘용병. 용병의 검술이다.’
질 낮은 용병들이나 배우는 그런 검술임이 분명했다.
대체 어디서 저런 검술을 배운 거지?
용병이 황궁에 들어온 일은 없었다.
더불어 황태자와 접선할 수 있는 용병은 더더욱 없었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황태자의 검이 점점 더 빠르고, 정교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뀌었다.’
기세가.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사자, 감정 없이 적을 짓밟는 제왕의 얼굴이다.
“흐읍······!”
그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알베르토가 검을 휘둘렀다.
다가오는 황태자를 향해.
기사도를 가르쳐주겠다는 목적조차 잊은 채로.
채엥!
부딪힌 검이, 날아갔다.
누구의 검이 날아갔는가.
“다, 단장님······!”
기사들이 놀라 소리쳤다.
황태자의 얼굴에 가느다란 선혈이 생겼다.
제아무리 자격 없는 황태자라 할지라도, 이곳은 황궁이다.
황태자의 얼굴에 손상을 입혔으니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일.
하지만, 알베르토 단장의 정신은 그렇게 온전하지 못했다.
‘검이······.’
검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 화단의 정중앙에 떨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체적인 우위도, 검술에 대한 이해도 자신이 월등하건만.
왜 진 거지?
아니, 왜 공격한 거지?
순간적으로 보였던 포식자의 얼굴.
아직도 환각을 본 것인지, 진짜였던 것인지 구분이 안 간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도, 방어만 하겠다는 말도 무엇 하나 지켜진 게 없군. 심지어 기사가 검까지 놓았다?”
어느새 말려진 입꼬리.
놀리는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토는 입이 두 개라도 말할 자격이 없었다.
말마따나 내뱉은 말 중 지킨 게 없기 때문이다.
초짜와 같이 움직이는 황태자를 상대로 검을 놓기까지 해버렸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얼굴에 작은 생체기까지 냈다.
아무리 자격 없는 황태자라지만 적당히 놀리는 것과 직접 상해를 입힌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것도 황궁 내에서.
그가 마음 먹기에 따라 파면은 고사하고 목숨줄 부지하기도 어려울 수 있는 일.
빠드득!
“······ 용서해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결국 알베르토는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
어찌할까.
예전이라면 분을 못 이겨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정신은 놀랄 만큼 냉정했다.
‘몸이 가볍다.’
기분만이 아니었다.
나노머신의 치유력에 의해 내 몸은 건강을 되찾고 있었다.
3황자와 조세핀 황비의 취향에 의해 꾸려진, 허울뿐인 기사단이라 하더라도 기사는 기사다.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기사를 상대로 선전을 한 거다.
‘용병왕의 검술을 봐두길 잘했군.’
모든 게 허약했던 나지만, 그 대신 다른 감각이 발달했다.
바로 눈이다.
유독 발달한 이 눈으로 나는 수많은 이들의 전장을 지켜봤다.
그중에는 이름난 검술가도, 심지어 소드마스터나 용병왕도 포함되어있었다.
예법을 중시하는 작금의 검술은 실전에 특화된 용병왕 카르발의 검술을 당해낼 수 없다.
아무리 천대받는다고 하더라도 전장에서 먹히는 건 고리타분한 기사의 검보다 격식 없는 용병들의 검술이었으므로.
게다가.
‘세상이 잠깐 느리게 보였다.’
단순히 눈이 좋은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그로 인해 나는 잠깐이나마 알베르토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 짜릿한 기분이, 흥분이 아직도 가시질 않았다.
[순간 뇌 동시 영역 활성도 12.2%]
[뇌의 활성 기능이 확장됐습니다.]
뇌의 활성 기능?
처음 깨어났을 때에도 뇌 활성도라는 말을 언급했다.
그게 무엇이기에 확장이 되었다는 건지.
내 궁금증을 알아차린 듯 나노머신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평범한 인류의 뇌는 10%만 활용됩니다. 하지만 나노머신 Zero는 뇌의 기능을 확장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습니다.]
[뇌의 기능이 확장되면 자체 치유력이 높아지며 신체의 능력이 한계를 돌파합니다. 이로 인해 방사능을 비롯한 온갖 오염물질에 궁극적인 면역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몸의 가벼움을 떠나 더 활력이 넘친 건 이 때문이었나.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12.2%의 뇌가 활성화되어서 이 정도라면 그 이상은 어떨까.
20을 넘기고, 30을 넘기면 또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에 대한 설명은 없군. ’
하지만 나노머신도 방금 전 내가 겪은 현상에 대해선 설명이 없었다.
누락한 건지, 나노머신조차도 모르는 현상인지는 차차 알아보면 될 일.
“일어나라.”
그보단 알베르토의 처후를 정해야만 했다.
“하, 하오나······.”
알베르토 기사단장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물론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광증이 없더라도 당하고만은 못 사는 성격.
게다가 3황자와 조세핀 황비가 지켜보고 있는 와중이다.
내 광증이 완전히 치료됐음을 알릴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무릎을 굽혀 알베르토 기사단장과 눈을 맞췄다.
“흠, 좋다. 그대의 마음이 편치 못하다면 벌을 주도록 하지.”
알베르토의 두 눈에 공포가 서렸다.
미친 황태자. 자칫하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아직 적당히 ‘미쳐있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스스로 정해보아라. 명예를 잃은 기사가 무슨 벌을 받아야 할지.”
“그, 그게······.”
자신에게 줄 벌을 스스로 정하라는 것.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작게 정한다면 작게 정한대로, 크게 정한다면 크게 정한대로 문제가 될 것이다.
알베르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과거의 그 무능력한 황태자가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특히 저 눈. 단순히 미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눈빛이 아니다.
백전의 노장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눈. 하지만, 궁을 나간 적조차 없는 황태자가 그럴 리가 없었다.
착각일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답답해 죽겠군.”
한숨을 내쉬며 검을 들었다.
평화에 찌든 이때의 제국은 지금의 내가 봐도 답답함 그 자체였다.
자기가 저지른 일의 대가조차 모르는 이런 어중이떠중이가 황실의 기사단장 중 한 명이라니.
콰득!
“끄흡······!”
그대로 내리 찔러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냈다.
알베르토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신음을 죽이며 버텨냈다.
“가져가거라.”
뚝뚝 피가 흐르는 새끼손가락을 건네자, 알베르토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고개를 숙였다.
“감사··· 합니다.”
“꺼져라.”
잘린 손가락을 든 알베르토가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쇼는 이정도면 됐다.
그렇게 혀를 차고 고개를 저으며 눈길을 돌리자.
“······.”
베르사유 백작가의 영애.
이사벨라가 서리한보다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
―죽어서도 너를 원망할 것이다, 라인하르트.
< 서리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