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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머신 황제-3화 (3/146)

< 돌아오다. > 끝

어릴 적부터 이 빌어먹을 광증으로 인해 나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깊게 사고하고 선택하려 하면 순식간에 이성의 끈이 끊겼다. 정신이 돌아왔을 땐 항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최대한 얕게. 1차원적인 생각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가장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게 전쟁이었다.

누군가는 가장 복잡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테지만, 황제는 ‘명령’하는 존재다.

복잡한 명분 따위는 내려놓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 하면 자연스럽게 정복이 이루어졌다.

명분이니 자비이니 하는 것은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이길 수조차 없다.

‘전쟁만이 나의 유일한 통치 방법이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제국.

가만히 놔두면 곪아 터질 터.

전쟁만이 제국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수이기도 했다.

명분 없는 전쟁을 좋아하는 귀족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마음껏 사리사욕을 챙겨도 모든 화살은 내게로 돌아오는 탓이다.

역대의 황제들은 역사에 자신이 폭군으로 기록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언제나 귀족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화살이 돌려지는 것을 피해왔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귀족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모든 화살을 내게로 돌린 채 전쟁을 승인했다.

내게 화살이 돌려지자 귀족들은 비축해둔 힘을 풀어 날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악마 황제, 폭군이라 불리게 됐다.

물론 말피엘과 같은 괴물이 출현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영웅왕 말피엘의 출현으로 인해 귀족들은 미련 없이 황궁의 문을 열어젖혔다.

‘나를 제물로 바치면 자기들은 살 수 있을 줄 알았겠지.’

말피엘은 그런 귀족들도 모조리 잡아 죽였다.

더러운 피가 흐른다며 갓난아기까지 전부 말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니 않나.

정말로 그랬다.

‘다시 살아보란 말이냐.’

벌레 주제에 황제인 내게 다시 살아보라 말한다.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세상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휘둘리며 살지 않으리라.’

그게 광증이 되었든, 귀족들이 되었든 간에.

온전한 나의 삶을 살 것이다.

오롯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린 게 너냐?”

[의미 불명. 나노머신 Zero에는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이 없습니다.]

벌레가 아니라면 누가?

신이라도 개입했단 말인가?

“언제부터 내 머릿속에 있었던 거지?”

[불명. 알 수 없습니다. 자가발전 프로그램이 뇌의 전기자극으로 미약하게 움직인 것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자극은 16년 전입니다.]

내가 3살일 때 처음으로 자극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내 첫 기억이 3살부터 시작하니 얼추 맞는 듯했다.

그 전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른다는 의미.

“어디서 온 게냐?”

[‘나노머신 Zero’는 한국과학기술원의 박문식 과학자에게서 탄생했습니다.]

“박문식? 생소한 이름이로군.”

[마스터. 저에 대한 기본정보 및 사용법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전이하려고 합니다. 마스터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해보아라.”

이미 나를 수십 년간 괴롭힌 벌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상대가 내게 적의가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적어도 제로는 과거와 다른 관계를 갖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내 승인이 필요하다면, 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지잉.

뇌가 간지러운 느낌과 함께 약간의 울렁거림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헛구역질을 하고 난리를 피우겠지만 내게는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었다.

[프로토콜 변환 완료. 프로그램에 기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단어를 재조합합니다. 언어 변환 완료까지 3초. 2초. 1초.]

“으음.”

약간의 신음과 함께 몸을 휘청거렸다.

그와 동시에 뇌에 강제로 주입된 ‘기억’이 있었다.

나의 기억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질적인 내용.

마치 누군가가 뇌의 주름 하나하나에 글자를 새겨넣은 기분이었다.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핵전쟁? 방사능? 지금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무슨 마법이더냐?”

문제는 내용이다.

지식을 주입했다고 해도 그걸 이해하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내가 아는 대륙과 전혀 다른 황금빛의 도시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메테오라도 떨어진 것 같이.

[마법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리고 ‘나노머신 Zero’는 방사능에 오염된 인류를 건강하게 복원하고자 만들어진 나노머신의 프로토타입입니다.]

“지금 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는 저 거대하기 짝이 없는 건축물들이······ 정말로 존재했던 것이라고?”

황궁보다도 크다.

대륙에서 가장 높다는 신성교의 탑보다도 더욱 큰 것 같았다.

그런 건축물이 셀 수 없이 많았다.

[Yes. 인류의 건축물은 하늘 너머까지 닿았습니다.]

“그렇게 높고 거대한 것들이 단번에 쓸려나갔다?”

[그것이 바로 핵의 두려움입니다. 세계전쟁으로 인해 수천 년간 이룩한 인류문명의 총아는 고작 십여 분만에 전부 쓸려나갔습니다.]

대륙을 단번에 파멸로 몬 전쟁 병기.

저 핵이면 불멸의 말피엘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핵이라는 걸 만들 수는 없나?”

[그에 대한 정보는 입력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쉽군.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게 이런 걸까.

하지만 몇몇 중요한 정보들을 알게 됐다.

‘나노머신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

왜, 무슨 이유로 나노머신이 이 세계에 떨어졌고 내게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영원히 고통만 주는 게 아닌 내게 도움이 되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나는 이용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설령 그것이 철천지의 원수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마스터. 제게 주어진 권한만으로 마스터의 몸을 온전하게 치료하기 힘듭니다. 뇌와 몸에 쌓인 독극물을 정화하고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선 마스터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나노머신은 오직 인간의 치료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몸에는 수많은 독기가 쌓여있었다.

진정과 진통을 위해 매일 복용하던 마약들이 몸을 썩게 만들고 있다.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 기로였다.

나노머신이 전해준 정보를 온전히 믿을 것인가?

믿을 수는 있는 존재인가?

하지만 나노머신이 내게 전해준 정보에는, 나노머신 스스로가 파멸하여 배출되도록 하는 ‘명령어’도 포함되어있었다.

내 명령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진짜 적이라면 자신의 약점까지 내게 전달하지는 않았을 터.

“······ 승인한다.”

나는 내 머릿속의 벌레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반신반의. 벌레가 약에 찌든 이 몸뚱어리를 고칠 수 있을지도 궁금했던 것이다.

“하아······.”

멋들어지게 꾸며진 정원의 식탁에 앉아, 이사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와의 오찬이라니.

누가 들으면 부럽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시집 잘 가는 게 귀족가 사교계 여자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으니, 만에 하나 성사만 된다면 인생이 피는 거라고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떠들었을 테다.

‘하필이면 라인하르트라니.’

문제는 그 대상이 ‘라인하르트’라는 것이었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미친 황태자.

정신병자, 여색에 미친 바람둥이, 피만 보면 환장하는 혈귀 등등······.

“이사벨라 아가씨, 들으셨어요?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얼굴에 주름밖에 없대요. 매일 인상을 찌푸려서. 인상을 안 찌푸린 걸 본 사람이 없다던데요?”

“시끄럽다. 그리고 사람을 외관으로 판단하는 건 나쁜 버릇이야.”

재잘거리는 레인즈의 말을 애써 한 귀로 흘렸다.

이사벨라는 일반적인 귀족가의 아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처럼 시집 잘 가서 잘 살았네~ 라는 말을 듣기보단, 이사벨라 본인이 잘나서 잘 산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다른 아가씨들처럼 꽃꽂이나 만드는 그런 취미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검을 좋아했고, 기사를 동경했다.

고귀한 기사라고 품평이 자자했던 아버지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왕 만난다면 그런 품격있는 남자였으면 했다.

라인하르트는 그런 의미에서 완전 대척점에 있는 존재였다.

‘··· 지금은 남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집안 어른들의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나온 자리였다.

‘문제 있는 것들끼리 잘 만나보란 뜻이겠지.’

집안의 어른들은 이사벨라에게 하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꺼리는 황태자에게 자신을 이렇게 내던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이 자리가 너무 싫었다.

정략혼의 산 제물로 바쳐진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탓이다.

‘최대한 좋게 거절하자.’

좋게. 최대한 웃으며 거절하는 거다.

비록 약속시간은 지났지만, 먼 곳에서 달려온 자신보다 늦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는 안 되지만!

입꼬리를 억지로 말아올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정원을 지키던 병사들이 나팔을 불며 요란을 피웠다.

저 나팔을 왜 들고 있나 했더니 설마 이러려고 그런 거였나?

자신의 위세를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그런 유치한 생각은 아니겠지?

“아······.”

쓸데없이 요란하다.

애써 올린 입꼬리가 내려왔다.

이런 남자, 안 봐도 뻔하다.

그 순간이었다.

“언제부터 황금 기사단이 광대가 된 거지?”

< 정오의 오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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