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나만 몰랐던 시상식
원래 영화 시리즈는 흥행이 좀 어려운 편이다.
1편과 2편을 봐야 3편도 보기 때문에.
전편을 보지 않으면 3편을 안 보게 된다.
그럼에도 역대 최고의 첫주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블루드 워 1편과 2편의 누적관객이 그만큼 많았다는 방증이었다. 전편보다 완결편이 더 재밌으며 완벽한 마무리를 했다는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도 큰 도움을 준 것 같다.
거기에 갓 필드의 광적인 팬층도 한몫한 것 같고, 그동안 내 영화가 준 신뢰도도 큰 영향이 있었다.
즉, 블루드 워 3편은 그동안 내가 찍어 온 모든 영화의 누적된 팬과 지지도, 영화에 대한 믿음 등이 쌓인 결과였다.
언론과 매체에선 연일 블루드 워 소식을 전하고, 할리우드 스타들은 물론이고 유명 감독들까지 블루드 워를 봤다는 SNS 멘트를 남겼다. 나보고 제발 SNS 좀 하라는 배우들도 있고.
평론이 늦게 올라온 이유가 있었다.
영화적으로 분석하고 어떤 메시지를 읽거나 해석할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30년 동안 평론하면서 처음으로 관객이 되었어요. 블루드 워.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단지 이 말밖에.]
[최신성 감독은 어디까지 진화할까. 블루드 워 시리즈에서 더 진화한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대중에게 즐거움과 쾌감과 감동을 준 영화.]
[블루드 워. 다시 나오지 못할 트릴로지.]
[순수하게 즐긴 영화. 평론은 의미가 없다.]
평론 혹은 매체 리뷰 내용 대부분이 이랬다.
물론 평론할 거리는 있다. 사운드나 우주 교전.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들. 연기력을 꼬집을 수도 있고, 영화에 별다른 메시지나 성찰이 없음을 언급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걸 할 수가 없다.
왜냐.
어느 평론가가 자조적으로 올린 글이 있었다.
<나는 블루드 워의 평론을 포기했다. 영화를 무시하느냐고? 천만의 말씀. 오히려 너무도 좋아하기에 그랬다. 평론가가 한 감독의 영화 팬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다. 지난 며칠 ‘블루드 워 ; 다가오는 여명’에 대한 평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당연히 영화적 결함은 있다. 어느 영화나 마찬가지다.>
<평론가가 어떤 인간인가. 감독들이 만든 영화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재미로 사는 족속이 아닌가. 천재라 추앙받는 감독의 영화도 피해 갈 수 없다. 그런데 최신성 감독의 영화는 그럴 수가 없다.>
<블루드 워에선 장르 특성상 연기가 돋보이지는 않는다. 촬영과 앵글도 단순하며, 미술적인 부족함도 있다. 의상과 소품에 공을 덜 들인 표시도 난다. 다른 영화였다면 아마 난폭한 개처럼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블루드 워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런 결함들은 영화의 산맥 같은 서사에서 극히 사소하고 의미부여가 안 되는 잡초와도 같기 때문이다. 일개 잡초를 두고 산맥을 나무랄 수가 있겠는가.>
<최신성 감독은 이미 전작을 통해 영화의 미학과 예술성, 인간과 사회를 보는 고찰과 통찰을 보여 주었다. 그런 예술적 재능을 블루드 워에서 찾을 이유는 없다. 이 영화는 최 감독이 오직 관객을 위해 만든 영화다.>
<따라서 나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영화를 본 감상과 즐거움을 만끽하며 글을 남길 뿐이다. 고백하건대. 난 블루드 워 시리즈를 평론가가 아닌 평범한 관객으로서 관람했다. 그리고 즐겼다. 여러분도 마음껏 영화를 즐기기를 바랄 뿐이다.>
이 소소한 감상에 평론이 안 올라오는 이유가 있었다. 블루드 워 시리즈는 대중을 위해 만든 영화다. 오직 그 목적을 위해 만든 영화인데 무슨 토를 달겠느냐는 거다.
이건 내가 전작에서 예술성이 짙은 영화를 만들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술 영화에 대해선 신 나게 평가하고 해석하면 했지 블루드 워까지 그럴 이유가 있느냐는 거지.
평론을 올린 분들 대부분이 영화 ‘레저’에 광분했던 분들이기도 하다. 그런 영화는 평론가로서 열광하고, 블루드 워는 관객으로서 열광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느낌.
이러한 모습들도 내가 그간 쌓아 온 경력의 결과다.
세간의 평가에 내가 만능감독이라는 말이 있듯. 내 영화를 이젠 구분해서 본다는 의미겠지.
아무튼 북미에서 흥행이 폭발했고, 영화가 개봉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박스오피스 1위다. 한국은 압도적인 좌석 점유율과 예매율을 보이고 있고.
영화를 즐겨 보는 인도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초대박 조짐이 보인다는 소식이 있었다. 두 나라만 합쳐도 북미 성적을 넘을 것 같다며.
세계적인 신드롬 현상도 일어났다.
아이맥스 극장에서 관람하는 붐이 일어나고, 최신 사운드 시스템을 갖춘 영화관에서는 암표까지 돌 지경이었다.
혁민이나 수혁이가 보고하는 상황을 듣기만 해서 신드롬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잘 모른다. 스타워즈 수준을 넘었다는 말은 하는데, 그건 동생 놈들 말일 뿐이고.
사실 영화적 재미로 따지면 스타워즈보다 재밌다는 말은 리뷰에서 많이 봤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스타워즈는 우주 활극을 선구한 업적이 있으니.
한국 쪽 반응은 어떨까.
한국 포털에 들어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김판수였다.
“웬일이야?”
-여, 최 감독. 잘 지내?
“요즘은 한가하나 보네. 돈은 좀 벌었지?”
-벌었지. 중국 흥행 소식은 들었어?
“초대박 조짐이 있다며?”
-말도 마라. 우리 합작사 극장체인이 블루드 워 3편에 사활을 걸었다. 극장 체인들끼리 스크린 확보하려고 정말 피 터지게 싸우더라.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알아?
“대충 듣긴 했는데.”
-진짜 웃긴다. 중국 극장체인이 중국 영화 개봉을 다 미뤄 버리고 죄다 블루드 워만 걸었다. 점유율 87%. 극장에 가면 볼 영화가 블루드 워밖에 없어.
“그게 가능해?”
-합작사가 당국에 뇌물이라도 먹였는지 텔레비전에서 홍보성 뉴스를 엄청 내보내고 있어. 그 왜, 리이펑이라고 강습부대장 있잖아. 카리스마 넘치게 지휘하는.
중국이 왜 그러는지 대충 이유를 알 것 같다.
김판수의 말이 이어졌다.
-강습부대장이 용감한 중국인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고 네 영화 무지하게 칭찬하고 있어. 너 일부러 그 캐릭터 넣었지?
“그랬지. 어웨이커 때 중국 언론이 내 영화 무지하게 씹었잖아. 말도 안 되는 논리 펴면서 선동하고.”
-야, 최 감독 영리해. 아주 머리가 돌아가.
“딴소리 그만하고 왜 전화했어?”
-여기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 현재 흥행 1위인 건 당연한데, 역대 최고 흥행 성적이 나올 것 같다.
“중국 언론이 띄워 줘서 그런가.”
-원래 중국인들 영화 많이 안 보는 편이거든. 시골에서 온 대도시 농민공들은 영화 관람 문화 같은 것도 없고. 근데 극장이 미어터진다. 수상하지 않아? 중국인들 왜 이러지?
이상한 김판수식 개그다.
기쁜 소식을 희한하게도 알려 준다.
“그래서 포인트가 뭐야?”
-야, 최신성!
“왜?”
-네가 나 중국에 안 보냈으면 나 어쩔 뻔했냐!
“전화 끊자.”
-양수리 주차장에서 너 안 만났으면 내 인생 어쩔 뻔했냐고!
이 인간이 우는 건지 웃는 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블루드 워로 우리 제작사가 벌어들일 잠정 수익이 자그마치 300억이나 된다! 우린 영화 배급만 했는데도!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그래! 우하하하하! 네 덕에 내게 돈을 버는 구나!
“좋아?”
-좋아!
“그럼 끊어.”
전화를 끊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중국 예상 흥행 성적이 6억 달러쯤 되는 모양이다.
중국 박스오피스 최고 기록이 될 것 같다.
합작사인 극장체인이 극장 수입의 절반을 가져가고, 나머지 절반은 네오스타 수익이다.
배급 수수료는 매출의 10% 정도. 약 700억이다. 김판수의 제작사는 로큐 계열사로서 배분을 나누므로 300억을 가져간다. 중국 내 마케팅과 배급 업무를 맡았기에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업무량에 비하면 꽤 큰 액수다.
중국 합작사는 극장 수익을 고스란히 가져가서 2천억 이상 벌 것 같고, 로큐도 중국 극장체인에 지분이 있기에 수백억을 벌어들인다. 거기에 블루드 워에 투자도 했으니 총 수익은 1천억을 훌쩍 넘는다.
엉뚱한 김판수 때문에 실실 웃음이 났다.
김판수가 이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극장체인 사업과 중국 사업엔 이제 도가 튼 것 같고.
네오스타와 로큐가 합작하여 극장체인을 세울까.
CG E&M처럼 투자, 제작, 배급, 상영 다 되도록.
그렇게 된다면 김판수가 적역이다.
한국에 새로운 극장체인을 설립하고, 미국과 중국, 동남아 등에도 진출할 수 있다. 그 담당을 김판수가 맡아 줄 수도 있고. 사업 확장할 생각은 딱히 없지만 어쩐지 그렇게 될 것 같다.
김판수.
코어가 내 인생의 조력자라고 했던 인물.
어쩌면 로큐가 극장체인을 가진 엔터테인먼트 대기업으로 거듭나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당장은 아닐 것 같다.
난 아직 40대도 되지 않았으니.
포털에 들어가 보았다.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블루드 워 팬과 스타워즈 팬이 싸우고 있다.
각자 지지하는 영화가 더 낫다며.
[스타워즈. 물론 존중하고 위대한 시리즈죠. 하지만 스타워즈는 구시대의 문화이고, 이젠 블루드 워입니다. 유튜브에 가 보세요. 블루드 워 팬이 압도적입니다.]
[블워는 스워 같은 유니크한 맛이 없어요. 비교할 걸 비교하셔야지. 내가 니 애비다. 포스가 함께하길. 같은 명대사가 있길 하나. 매니아적인 뭔가가 있길 하나.]
[윗분. 그런 분이 왜 블워에 5점 만점을 줬는데요?]
[솔직히 스워보다는 블워가 재밌다는 ㅋㅋㅋ.]
[영화의 재미를 떠나 스타워즈가 대우받아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007처럼 이전 세대 문화죠. 요즘 20대는 스타워즈 안 본 사람도 많아요.]
[윗분 말에 동의합니다. 저는 먼저 나온 스타워즈 456편만 위대한 시리즈로 평가하고, 프리퀄 123편은 그냥 블록버스터로 취급합니다. 젊은 층은 스타워즈보다는 어벤져스죠.]
논쟁이 다시 넘어갔다.
이번엔 어벤져스나 블루드 워냐.
이 논쟁도 내가 보기엔 민망하기만 하다.
[어벤져스는 만화 원작 때문에 캐릭터로 뜬 거지 정말 재미로 떴다고 보기 어렵지 않나. 뭐, 액션도 엄청나긴 했지만. 그건 블워 나오기 전의 일이고. 이젠 비교가 안 되죠.]
[솔직히 어벤져스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이보다 더 큰 스케일은 없을 걸로 생각했는데, 블워 나온 뒤로는 어벤져스 액션은 그냥 그럼.]
[나도 그랬음. 어벤져스는 영웅들이 그냥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 같고. 블워는 내가 함께 싸우는 느낌임. 스케일만 크다고 좋은가. 스케일에 감정몰입이 돼야지. 어벤져스는 만화 같은데, 블워는 현실적인 느낌이 있음. 딱 우리가 보고 싶은 걸 그대로 보여 주는.]
댓글 중에 ㅋㅋㅋ가 많이 붙은 게 있었다.
또 무슨 ‘드립’이 있었기에.
[최 감독님 왈. ‘응. 여기가 끝이 아니야. 더 가야 돼. 여기서 열 단계는 더 가야 클라이막스가 있어. 아주 끝장을 보지 않으면 개운하지가 않아.’ 이렇게 중얼중얼하면서 만든 영화가 블루드 워. ㅋ]
[외국인은 생각 못하는 13대 200만. ㅋㅋ]
[외국인은 생각 못하는 우주선 박치기. ㅋㅋ]
[외국인은 생각 못하는 액셀의 개폼. ㅋㅋㅋ]
[개폼이라니. ㅋㅋㅋㅋㅋ]
[개폼. ㅋㅋㅋㅋ]
[개뿜을 뻔했네. ㅋㅋ]
커피 마시다 나도 뿜을 뻔했다.
액셀이 멋 부리는 게 좀 있기는 하다.
할리우드에선 좀처럼 안 나오는 포즈도 많고.
나도 한국 드라마 영향을 좀 받은 거지.
하여간 네티즌들 재치는 최고 수준이다.
유튜브 영어 댓글에는 이런 재치가 없으니까.
[역시 최 감독은 한국 사람이야.]
[다른 감독이 블워 찍었으면 스타워즈는 고사하고, 어벤져스랑 비교도 못 했을 거임. 최 감독이 찍은 블워는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버림. ㅋㅋ]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다 좋은 영화 아닌가요.]
[윗분 말이 정답. 다 재밌는 영화.]
[블루드 워를 최신성 감독님이 만들어서 그런 겁니다. 기분 좋은 분들이 너무도 많으니까, 이런 분위기를 경계하는 분들도 있는 거고요.]
[맞음. 요즘 정말 기분 좋음.]
재밌는 댓글들이 참 많다.
영화를 재밌게 보고 여운도 즐기려고 글들을 올린다.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정서적 포만감도 생기고.
일상의 즐거움인 거지.
이번엔 펀딩 사이트에 들어갔다.
알려줄 말도 있고 해서.
사이트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포털보다 여기가 더 난리 났다.
당연하다. 블루드 워 3편에 투자한 이들이니까.
[방금 첫 주 성적 올라왔어요! 북미 박스오피스 첫주 2억 1,300만 달러!]
[헐! 대박!]
[저도 확인했음! 완전 미쳤음!]
[아! 아쉽게 역대 1위는 놓쳤네.]
[역대 1위는 뭔데요?]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2억 4천.]
[와, 난 블루드 워가 더 대단하게 보이네.]
[스타워즈 이름값은 못 이기는구나.]
[근데 그게 몇 년 전 기록이라는 거. ㅎ]
[근데 어벤져스는 꺾었다는 거. ㅋㅋㅋ]
잠깐 확인해 보았다.
박스오피스 모조 사이트에 방금 위크엔드 성적이 올라왔다. 현재 1위이자 역대 2위 기록이다.
숫자가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와 닿지가 않는다.
누군가가 역대 오프닝 성적을 말해 주고 있었다.
[1위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2위 쥬라기 공원. 3위 어벤져스 1편. 4위 어벤져스 2편. 5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6위 미녀와 야수. 7위 아이언 맨 3. 8위 해리포터 죽음의 성물 2. 9위 저스티스 리그. 10위 다크나이트.]
[7위 안에 마블 영화가 4개나!]
[이래서 마블 마블 하는구먼. ㅋㅋㅋ]
[아바타는 없네요?]
[타이타닉도 없음. 북미와 월드와이드 차이.]
[무슨 차인데요?]
[북미 최고 흥행은 1위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2위 아바타. 3위 타이타닉. 월드와이드 최고 흥행 성적은 1위 아바타. 2위 타이타닉. 3위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이런 차이가 있는 이유가 있다.
스타워즈는 미국인이 특히 열광했고 매니아 문화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외국에는 그런 문화가 약했기에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역대 1위는 어려울 것 같음.]
[아직 모름. 아바타도 첫주 성적 8천만이었음.]
[맞아요. 아직 모릅니다.]
[누구 최종 성적 예상 가능한 사람?]
[북미요? 월드와이드요?]
[둘 다요.]
[북미는 7억 가뿐히 찍을 것 같고, 월드와이드도 23억은 넘을 것 같네요. 참고로 아바타는 27억.]
[헉! 27억 달러!]
[또 참고로. 블루드 워 2편 월드와이드는 22억 벌었습니다. 역대 2위. 북미에선 3위.]
[북미는 몰라도 월드와이드는 승산이 있음.]
[블루드 워 3편이 27억 넘을 수 있을까요.]
[어렵다고 봄.]
[가능하다고 봅니다. 중국도 지금 대박이라는데.]
[중국과 인도에서 대박 나면 가능함.]
댓글이 다시 변해 갔다.
[다들 점심 드셨어요? 전 안 먹어도 배부름. ㅋㅋ]
[저도 500만 원 투자했음. ㅎㅎㅎ]
[요즘 마누라한테 거들먹거림. ㅋ]
[몇 배 수익이 날까요?]
[블루드 워 2편으로 최종 9배 수익 났음. 아마 이번엔 10배 정도?]
[500 투자해서 5000. 정말 후덜덜하네. ㅎㅎ]
[아, 시리즈 끝나면 펀딩도 끝나려나.]
[감독님 좀 쉬게 해드립시다.]
[그래요. 돈도 좋지만 감독님은 좀 쉬셔야 함.]
나더러 쉬라는 이야기가 나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안 그래도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참이었다.
[안녕하세요. 최신성입니다. 한 1년만 쉴게요.]
글을 올리고 확인했더니.
[우왁! 감독님!]
[아앗! 지금 미국에 계실 텐데?]
[와, 대박! 보고 계셨구나!]
[감독님이 우리 댓글을 보신다!]
[오셨구나, 오셨어!]
[감독님! 사랑해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댓글이 너무 빨리 올라와서 감독님이 다음 글을 못 쓰심. ㅋㅋㅋ]
[흥분한 건 알겠는데, 자제 좀 합시다. ㅋ]
[자자, 감독님 말씀부터 들어보자고요.]
미친 듯이 올라오던 댓글이 차츰 줄어들었다.
글을 올리면 순식간에 밀려 버리니 내 글 찾기도 어렵다.
[영화가 흥행하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조심스럽지만 중국 쪽은 역대 1위가 될 것 같다고 하네요. 북미 수입의 반 이상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인 캐릭터 때문 같아요.]
[감독님의 센스! ㅋㅋ]
댓글들이 주르륵 올라오다가 다시 멈췄다.
[소식 하나 전할게요. 무작정 펀딩을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네오스타에서는 당분간 개별 히어로 영화를 찍을 것 같고. 주요 영웅들을 소개하고 나면 영웅들이 뭉치는 영화를 찍을 겁니다.]
[와! 드디어 나오네요! 마스터스!]
[네. 마스터스 맞습니다.]
[마스터스도 펀딩하나요?]
아내가 맥주 캔을 건넸다.
리연이를 재우고 나온 모양이다.
맥주 캔을 따서 시원하게 마셨다.
역시 주말에는 아내와 함께 맥주 한 잔.
“펀딩 사이트 봐?”
“응. 언제 봐도 재밌어.”
“오빠, 댓글 봐. 무슨 말을 하려다 만 모양인데.”
“아!”
[마스터스도 펀딩 하나요?]
라는 질문에서 내가 대꾸를 안 했다.
그랬더니 생난리가 났다.
[감독님?]
[감독님 나가셨나 봐요. ㅠ_ㅠ]
[접속이 끊어진 건가.]
[저는 그냥 물어본 건데. ㅠㅠ]
[저희가 너무 돈을 밝히는 건가요?]
[감독님! 나가신 거 아니죠?]
왜들 이렇게 성격들이 급하신지.
누가 한국사람 아니랄까 봐.
[아, 오해들 마세요. 아내가 캔 맥주를 가져와서 한 모금 마셨습니다.]
[민망합니다. ㅋㅋㅋ]
[아우 창피해. ㅋㅋ]
[지켜보는 내가 다 부끄럽네. ㅋㅋ]
[나도 맥주가 급 땡기네. 곧 업무 시작인데.]
다시 글을 올렸다.
[네오스타에서 제작하는 모든 영화는 펀딩을 합니다.]
[대박!!! ^^]
[한 번 투자한 사람도 가능한가요?]
[네. 가능합니다. 1년에 한 작품에 한해서요. 동시에 두세 작품을 제작하거든요.]
[개별 영화들은 다른 감독님이 찍으시죠?]
[모두 다른 감독이 찍습니다. 다만 마스터스 시리즈는 모두 제가 찍습니다. 2년 후부터 제작에 들어갈 것 같네요.]
또 댓글이 무수히 올라왔다.
환호와 웃음과 대박 세례다.
[그동안 개별 영화에도 투자해 주시고, 2년 후 마스터스 펀딩 때 많이들 참여해 주세요. 그럼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미국에서 푹 쉬시다 오세요, 감독님!]
[사랑합니다, 감독님!]
[후계자도 응원할게요!]
[감독님! 고맙습니다! 리연아 예쁘게 커라!]
[서연 씨, 후계자 기대할게요!]
[리연아! 빨리 커라! 나 결혼 좀 하자!]
[윗분 미쳤구만! ㅋㅋㅋ]
아내와 함께 댓글을 보며 웃었다.
펀딩 사이트에 오면 늘 내 편만 있어서 언제나 기분이 좋다. 서로 응원하며 살아가는 느낌도 들고.
맥주 한 캔을 비우고 새 캔을 땄을 때였다.
혁민이에게 전화가 왔다.
첫 주 성적이 놀라워서 전화한 모양이다.
“응. 왜?”
-감독님! 기쁜 소식이 있어요!
“알고 있어. 나도 확인했다.”
-영화 성적 말고요, 다른 소식입니다!
“뭔데?”
누가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사무실에 있는 듯.
-블루드 워가요.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어요!
예상 못한 소식이라 깜짝 놀랐다.
“이제 막 개봉했는데?”
-블루드 워 시리즈 전체를 평가한 거죠! 방금 아카데미 측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시리즈 마무리한 이 시점이 딱 좋다네요. 3편 상영이 끝나고 내년 2월 다음 시상식 때면 이슈가 식어서 지금이 좋다고 합니다. 다시 전화 드릴게요! 지금 언론사 전화가 빗발칩니다!
전화를 끊었다.
서연을 보자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
그녀를 안았다.
그렇게 아내를 안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작품상이라.
3편이 개봉되었으니 더 기다릴 것이 없다고 봤나.
줄곧 지켜봤을 테니까.
아카데미 시상식.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네.
* * *
흥행에 가속이 붙었다.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타오르는 흥행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3편을 개봉하고 내년 2월이 되어야 아카데미에서 연락이 올 줄 알았다. 한데 생각해 보니 1년 뒤에 블루드 워는 반쯤 잊힌 영화가 되고 만다.
해서 아카데미 측에서 묘수를 냈던 것이다.
대중이 현재 블루드 워 3편을 보고 있으며, 대흥행을 하고 있다. 2편을 후보로 올렸으나 시리즈 전체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대중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테고.
3편이 개봉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후보에 올렸다는 점이 의미심장했다. 기껏 후보로 올려놓고 맨손으로 보낼 것 같진 않다. 나야 상관없지만, 아카데미 측은 좀 뻘쭘하지 않을까.
내가 모르는 어떤 약속이 오갔을 수도 있고.
반지의 제왕도 3편이 끝나고 나서야 상을 주지 않았던가.
한데 난 그동안 아카데미에 초대받은 적이 없다. 어웨이커로 할리우드에 데뷔했고, 그 뒤 바로 블루드 워 시리즈를 찍었기 때문이다. 신인인 셈이다.
신인의 작품을 작품상 후보에 올리는 예도 드물다.
내가 그동안 찍은 한국 영화들과 그 영화들의 예술적 성과도 감안했다고 봐야 했다.
세계 3대 영화제도 그렇다.
어느 영화 한 편만으로 큰 상을 주지 않는다. 그간의 영화적 공로와 업적을 두루 평가한 뒤 한 영화를 ‘명분’ 삼아 상을 준다.
내 경우에는 베니스에서 은상을 받았기에 아카데미에서도 신인이라 보지 않고 어느 정도 공로를 인정한 모양이다.
신인인데다 미국인도 아니다. 더구나 동양인이다.
보수적인 아카데미에서 과연 큰 상을 줄까.
어쨌거나 폭발적인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도 무섭게 관객이 들고 있다.
이제 개봉 3주 차.
북미 성적이 6억 달러가 넘었다.
매체들은 블루드 워 3편이 아바타를 아슬아슬하게 넘을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인도 쪽 흥행 성적 집계가 약간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중국만큼만 들면 역대 최고 성적이 가능하다. 현재 인도에서도 그런 분위기고.
3주차가 되니 평론 이외의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학술적으로 내 영화를 분석하는 내용들이다.
<최신성 감독은 어떻게 예술성과 상업성.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나. 소재 선택인가. 시각의 차이인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최신성 블록버스터의 차이.>
<최신성 감독 방식의 감정 쌓아 올리기.>
<최 감독 특유의 영화 구성 이론.>
<극단적으로 치밀한 구성. 과연 천재만이 가능한가.>
<한국인 감독이 할리우드 영화를 찍을 때 생기는 일.>
내 영화의 구성과 감정 부분에 관심이 정말 많았다.
내가 봐도 내 영화는 다른 영화와 조금 다르다. 감정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게 많고, 액션을 보여 줘도 극단으로 끝까지 밀어 올린다. 그런 구성을 하는 게 놀라운 모양이다.
원래 내 스타일이기도 하고. 코어가 전개를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정적 압박과 해소의 줄타기가 된다는 말이다. 이게 안 되면 무너진다.
그래서 일반 감독은 정말 어렵다.
내가 감정을 쌓는 방식으로 구성을 하면 전체 흐름이 깨지거나 균열이 날 가능성이 높다. 직관적으로 흐름에 따라 전개를 하면 최적의 구성을 못 할 수도 있고.
다른 감독은 이렇게 못 하기에 내 영화가 유니크해진다. 다른 영화에서 맛보지 못한 재미를 보기에 흥행하는 거고. 이러한 점이 배우든, 관객이든 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일 터다.
블루드 워 3편의 구성이 유난히 더 그랬다.
아무튼 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그만큼 독보적인 영화로 뜻하지 않게 할리우드에 군림하게 된 셈이다. 아무도 못 따라 하니까. 유일무이한 영화이다 보니 흥행도 하는 거고.
아바타가 3D 혁신을 일으켜 대흥행을 한 것처럼.
* * *
2월 28일.
아내 서연. 제이슨과 건하. 이동욱 대표와 혁민이. 그리고 후보에 오른 팀장들과 함께 매우 긴 리무진에 올랐다.
아카데미 측에서 보내 준 리무진이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9개 부분 후보에 올랐다.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편집상. 시각효과상. 음악상. 음향믹싱상.
신인 감독의 영화치고는 기록적이다.
쟁쟁한 작품이 많아서 3개 받으면 많이 받는다.
시각효과상과 음향믹싱상은 유력한 후보고.
“제이슨. 소감은 준비했어?”
내 말에 제이슨이 피식 웃었다.
“아직 신인인데 남우주연상은 욕심이죠. 전 감독님 축하하러 가는 겁니다.”
“그래도 몰라. 액셀 팬이 워낙 많으니까.”
“팬은 팬이고, 연기는 연기죠.”
“건하 너는?”
“제가 왜 조연상 후보에 올랐는지 의문이네요.”
서연이 말했다.
“건하는 내면 연기가 정말 좋았어. 대사 많다고 연기 잘하는 건 아니야. 갓 필드에서 주연한 사람이니 자격이 있지.”
“맞아요. 솔직히 나보다 건하 씨 연기가 더 나았다고 봐요. 저는 자리를 빛내러 가는 거고, 건하 씨는 정말 후보로 참석하는 거고요.”
제이슨의 말에 다들 웃었다.
이 대표가 말했다.
“제이슨은 갈 길이 많이 남았으니 아카데미에서 아직은 지켜보는 겁니다. 이번 참석은 아카데미에 데뷔한다는 측면이 클 겁니다. 배려를 해 준 거죠.”
“그냥 초청할 순 없으니 후보에 올린 거네요.”
“그렇게 마음 편히 생각하라고.”
“오스카도 가만 보면 정치적이야.”
다시 웃었다.
이 대표의 말이 맞다.
신인배우를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린다는 것은 할리우드 영화계에 공식적으로 데뷔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관리를 해서 영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지. 주요 부분 수상도 이해관계가 다소 얽혀 있을 테고.
“도착했네요. 와, 사람 정말 많네요.”
스타를 구경하러 온 팬들이 정말 많았다.
블루드 워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고.
리무진이 멈추자 팀장들이 먼저 내려 대충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이어 건하와 제이슨이 내렸다.
“와-!”
“꺄아!”
환호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이슨과 건하의 인기는 거의 비등하다.
남자는 제이슨. 여자는 건하의 팬이 다수이고.
이어 아내와 함께 리무진에서 내렸다.
대충 레드카펫을 통과하려는데 두 꽃미남이 ‘길막’을 해서 도중에 멈췄다. 결국 함께 손 흔들며 천천히 걸었다.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고. 짧은 인터뷰도 하고.
그러던 중 눈에 익은 사람이 보였다.
사토 다케루. 내 영화 ‘하모니’의 주인공.
“너 여기에 왜 왔어?”
“테레비 리포터 자격으로요! 감독님 멋져요!”
뒤를 보니 일본 TV 연예 프로그램에서 나왔다.
한국 방송사에서도 왔고.
일본의 톱스타가 리포터를 하다니.
사토가 사람들에게 마구 밀리면서 외쳤다.
“인터뷰 좀 해 줘요! 감독님 회사 매니저가 약속을 안 잡아줘서 이렇게 왔잖아요! 제가 가야 인터뷰가 된다면서!”
“내일 인터뷰하자.”
“정말이죠?”
“그래.”
발길을 돌리려는데 사토가 다시 외쳤다.
“감독님!”
“왜?”
“저도 할리우드 영화 출연시켜 줘요!”
“알았다!”
“좋았어!”
사토가 주먹을 불끈 쥔다.
일본인들에게 또 어떤 욕을 먹으려고.
아니다. 녹화 중이니 개그를 친 거겠지.
레드카펫을 지나 바로 시상식장으로 들어갔다.
포토 콜 행사는 따로 없었다.
LA 돌비 극장 로비에 수많은 영화인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나와 만난 사람들도 인사를 해오고, 배우들도 먼저 다가왔다. 감독들도 마찬가지.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카데미에 처음 왔고, 이제 막 공식 데뷔했다. 그런데 내가 이 시상식의 주인공인 된 것처럼 내 주변에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말을 걸고 인사를 해 와서 이미 나와 인사를 한 사람은 다른 분에게 양보해야 했다.
다들 슈퍼스타인데 이런 수난을 겪다니.
다행히 감독님들과 배우들이 웃으며 이 상황을 이해한다.
당연히 이 자리는 네가 주인공이라는 눈빛을 보이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멜 깁슨. 니콜 키드먼. 덴젤 워싱톤. 리들리 스콧 감독. 맷 데이먼. 마크 러팔로. 리즈 위더스푼. 베네딕트 컴버배치.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 그리고 제니퍼 로렌스.
그런데 배우들이 하나같이 같은 눈빛이다.
한국 배우들처럼 내색은 안 하지만 내 작품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보였다. 내 희소가치가 그렇게 높았나. 아니면 내가 이제 막 공식석상에 나타나서 그런 걸까.
배우들이 한 말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나중에 기억 못 하면 무례가 되니까.
마크 러팔로.
“좋은 영화 있으면 스크립트 좀 보내 줘요. 함께 일 좀 하고 싶은데 기회가 와야 말이죠. 나 한국에도 몇 번이나 다녀갔단 말입니다. 하하하.”
“저도 한국에 자주 갑니다.”
멜 깁슨.
“각본은 대체 어떻게 쓰는 거요? 나중에 내 집에 초대할 테니, 놀러 오시겠어요? 맥주 마시면서 대화나 좀…”
“예, 나중에 초대해 주십시오.”
니콜 키드먼.
“생각보다 훨씬 핸섬하고 젊으시네요. 서연 씨가 여배우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받는 거 아세요?”
“네? 그게 무슨…….”
덴젤 워싱톤.
“플랜이라는 영화를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 혹, 그 영화의 할리우드 리메이크를 만들 생각은 없나요?”
“좋은 아이디어네요. 고려해 보겠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
“초면에 실례가 됩니다만, CG에서 VR 기법은 어떻게 한 겁니까? 한국 장비라고 듣기는 했는데?”
“영화용 VR 엔진이 따로 있습니다.”
리즈 위즈스푼.
“정말 보기 어려운 분을 만나 뵙네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는 안 하세요? 저 여자 살인마도 잘할 수 있는데.”
“하하하.”
배네딕트 컴버배치.
“영국 영화 만들 생각 없습니까?”
“한국 영화에 출연할 생각 없나요?”
맷 데이먼.
“천재 감독님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감독님 영화를 모두 봤죠. 레저 같은 영화를 또 하신다면 저 좀 불러 주세요. 저 그렇게 안 비쌉니다.”
“레저는 제가 연출한 영화가 아니라서요.”
알폰소 쿠아론 감독.
“네오스타에 취직 좀 시켜 주세요.”
“하하하하하!”
제니퍼 로렌스.
“감독님 스크립트를 정말 보고 싶어요. 출연료 때문이라면 좀 줄여서라도 출연하고 싶거든요.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네. 고마울 따름이네요.”
다들 농담과 진담을 섞어 가며 말을 걸어왔다.
특히 두 번째 보는 제니퍼 로렌스는 흡사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무슨 위기의식을 느낀 듯.
시상식이 시작된다는 말과 함께 다들 극장으로 들어갔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앉아 있었다. 로비에 있던 이들은 알고 보니 날 기다리고 있었던 이들이었다.
자존심이 강해서 나와 인사를 안 한 배우와 감독들 같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눈인사는 한다. 내가 동양인이라고, 신인이라고 자격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인사를 나눈 배우들의 어투와 표정을 보면.
내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 같다.
슈퍼스타가 돈이 없어서 그럴까.
내 영화에 자신들이 나오는 모습. 내가 만든 배역을 연기하는 모습. 내 연출 스타일 등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할리우드에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소문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혁민이는 할리우드 배우들이 내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이유로 이상한 걸 댔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서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핀잔을 주었다.
모든 영화가 역사에 남는데 말이야.
요란한 음악과 함께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배우 닐 패트릭 해리스가 나왔다.
그가 스탠딩 코미디 방식으로 사회를 시작했다.
이런저런 말을 하더니 갑자기 내 이름이 나왔다.
“요즘 캐스팅도 안 되어서 이렇게라도 돈을 벌고 있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여겨 주시고 조크를 하면 억지로라도 좀 웃어 주세요. 오늘 진지한 연기를 해야 해서 그런 건가요? 웃어야 할 땐 웃어야지, 지금은 아니라고요.”
“하하하하!”
무슨 멘트를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최근에 유행하는 말인가.
“아, 오늘 여러분이 왜 저한테 집중을 안 하시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지금 남자 분들은 전부 한국에서 온 여배우를 보고 계시고, 여자 분들은 전부 한국에서 온 남자감독을 보고 계시느라 그랬군요. 시상식에서 사랑의 화살이 오가는 건가요?”
객석에 웃음이 터졌다.
그냥 대본 멘트를 할 뿐이다.
“그런데 그거 아나요? 여러분이 보시는 그 두 분은 부부라는 거. 따라서 여러분이 추파를 던지면 몹쓸 짓이라는 거. 불륜은 시상식이 끝난 뒤에 마음껏 하시고, 지금은 시상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웃음이 터진다.
야유도 나오고.
“하하하. 저도 압니다. 영화인으로서 한 영화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있다는 것. 영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을 해내고 있는 한 감독에 대한 경외 어린 시선이라는 거 잘 알아요. 특히 남자 분들은 사랑의 눈빛이 너무 강렬해요. 최 감독님이 게이라면 오늘 호텔로 찾아가겠어요.”
객석에 폭소가 터졌다.
무대 위 화면에 나와 서연이 잡혔다.
아내는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데 난 눈알을 굴렸다.
내 표정 때문에 또 웃음이 터졌다.
정말 게이라서 눈치 보는 것처럼.
서연도 옆에서 배를 잡고 웃고.
본격적인 시상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블루드 워가 호명된다.
음향믹싱상을 수상했다.
몇 차례 시상이 지나고 다시 수상했다.
이번엔 음악상.
1편부터 음악 하나는 워낙 좋았다. 1편 때 아카데미 음악상 하나는 받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로.
다큐멘터리 상과 외국어 영화상이 이어지고.
다시 수상했다. 이번엔 시각효과상.
CG 팀장과 특수효과팀이 함께 나가서 상을 받았다.
공로상 시상이 이어진 뒤.
이번엔 편집상을 받았다.
후반 편집이 워낙 빠르고 현란해서 그런 듯.
미술상과 각색상이 지나간 다음.
“각본상에 최신성!”
박수가 터져 나왔다.
덤덤하게 일어나 무대로 걸어갔다.
아버지 어머니도 이 모습 보고 있겠지.
전 세계 생중계된다고 생각하니 약간 긴장이 되긴 했다. 첫 백상예술대상 때에 비하면 자신감이 넘치긴 하지만.
그런데 뭔가 좀 썰렁했다.
다들 무표정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내가 각본상 받는 게 마음에 안 드나?
웃고 있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만.
상을 받고 짧게 소감을 마치고 내려왔다.
이번에도 별 감정 없이 박수를 보낸다.
아내는 그냥 웃고 있고,
이 대표와 혁민이도 마찬가지.
이어 주요 시상이 시작되었다.
남우조연상과 남우주연상 모두 수상하지 못했다.
연기력이 돋보이진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이어 감독상 시상.
내심 기대는 했는데.
“감독상에 최신성!”
휘이익-
2층에서 휘파람이 들려왔다.
초대받은 분들이 열렬히 박수를 보낸다.
영화인들은 또 담담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킥킥대며 웃는 사람들은 뭐지?
무대에 나가서 소감을 말했다.
“…첫 오스카 무대에 감독상을 받아서 정말 영광입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니, 영화로서 모든 대답을 대신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수가 나왔다.
이전보다는 박수가 크긴 했다.
근데 코어로 전달되는 뭔가 어색한 느낌.
다들 열심히 박수는 보내는데 웃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물론 제니퍼 로렌스와 일부 배우는 정말 환한 얼굴로 박수를 보낸다. 모두가 열렬히 축하해 주길 바란 것은 아니다만.
자기들만의 파이에 내가 손을 대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날 비주류로 생각해서?
아니다. 분명히 뭐가 있다.
아내 옆에 앉았다.
나와 달리 서연은 그냥 웃고 있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정말 이 분위기를 모르나?
나만 지금 어색한 건가?
이어 작품상 시상이 이어졌다.
시상자는 덴젤 워싱톤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좋은 작품이 많았죠. 모든 부분에서 경쟁이 정말 치열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장일치로 결정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작품상입니다. 그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오늘 오신 분들에게 그 사실을 미리 전달해드렸죠. 지금의 분위기를 봐서는 다들 예상하시는 것 같군요.”
“하하하하!”
왜 웃지?
다들 작품상을 예상하고 왔다고?
시상자 멘트가 이어졌다.
“이번 작품상은 정말 의미가 큽니다. 여러분도 그 의미를 알기에 극적인 순간을 기다려 주셨고요. 그분의 영화를 사랑하고, 그 분의 열정을 존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광스럽게도 그 작품을 제가 시상하게 되었습니다.”
리들리 스코트 감독 작품이겠지.
작년에 흥행도 하고 평점도 아주 높았다.
배우들 연기력도 기가 막혔고.
“지금부터 작품상을 시상하겠습니다. 다들 예상하실 겁니다. 올해의 오스카 작품상! 승자는!”
두두두두두.
드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블루드 워!”
“와아아아아아-”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가 터졌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다들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일어나 주변을 보았다.
수많은 배우와 감독들이 환하게 웃으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정말 열렬한 박수와 축하가 쏟아지고 있었다.
작품상을 예상하고 왔다더니. 가만…….
덴젤 워싱톤이 말했다.
“지금까지 시상을 겸하여, 위대한 젊은 감독에게 헌사하는 위대한 신고식이었습니다. 최신성 감독님과 블루드 워의 주역들을 이 자리로 모십니다!”
“와아-!”
온 극장이 박수와 환호로 뒤덮였다.
감독상 받을 때와는 완전 딴판이다.
무대로 나오는 이동욱 대표와 액셀도 밝게 웃고 있었다.
서연도 웃으며 박수를 보내고.
이 대표와 액셀, 건하도 함께 무대로 향했다.
무대로 나가자 더욱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정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장난을 쳐서 미안하다는 표정도 있고.
다들 연기력이 진짜.
무대에 올랐다.
덴젤 워싱톤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받았다.
그와 악수를 하고 마이크 앞에 섰다.
이 대표와 액셀도 웃으며 내 뒤에 섰고.
객석을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그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첫 마디를 던졌다.
“이런 젠장…….”
“하하하하하!”
대폭소가 터졌다.
이렇게 받아넘기는 거지 뭐.
* * *
객석에 앉은 배우들과 감독들을 보았다.
눈부신 무대. 웃고 있는 덴젤 워싱턴.
화려한 의상을 입고 저마다 빛이 나는 배우들.
모두가 웃으면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빛이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애써 마련해 준 이들의 장난에 진심이 느껴졌다.
장난에 당한 나도 유쾌해졌고.
“작품상을 받고 나니 많은 것이 이해가 되는군요. 저는 제가 각본상을 받은 것도, 감독상을 받은 것도 못마땅한 줄 알았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저희가 작품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마음을 아껴 둔 것이었군요. 그런데 말이에요. 작품상을 받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러게요!”
“하하하하!”
젊은 배우가 하나가 소리치자 또 웃음이 터졌다.
극적인 순간을 위해 작품상 때까지 무표정으로 축하를 했던 거였다. 작품상을 못 받았으면 이상한 시상식이 되지 않았겠나. 객석에 있는 이들만 옹졸한 사람이 되는 거고.
그러니 다들 확신했다는 말이다.
혹은 아카데미 측이 작품상 후보 주인공들에게만 수상 여부를 알려 주지 않았든가.
세계 3대 영화제도 수상 여부는 미리 알려 준다.
이른 귀국으로 수상자가 트로피를 못 받는 사태를 방지하려고. 물론 당사자에게는 알려 주지 않고 스태프에게 알려 준다. 이번 경우에는 혁민이에게 알려 준 것 같다.
어쩌면 ‘신고식’도 아카데미 측의 ‘음모’일지도 모른다. 시상식 이벤트도 하고, 의미도 부여하려고. 날 특별하게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다들 짜고 장난을 친 거였다.
모두가 동참한 장난.
그 장난에 넘어간 나.
그 사이에는 끈끈한 정 같은 게 있었다.
진심이 통하는.
고마움이 밀려들었다.
날 위해 모두가 준비했다고 생각하니.
결국 울컥 치밀어 오르고,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여배우들도 눈이 붉어진다. 아내도 그렇고, 제니퍼 로렌스는 울 듯한 얼굴이고. 남자들은 희미하게 웃으며 나와 눈을 맞추며 턱을 끄덕인다.
그 바람에 시상식에 약간의 ‘울림’이 발생했다.
아카데미가 마련한 감동인가 보다.
유쾌한 분위기가 먹먹하고 훈훈하게 바뀌고 있으니.
“우리는 하나뿐인 인생을 살면서 영화를 통해 타인의 삶을 봅니다. 타인의 삶에서 교훈을 얻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지표로 삶기도 하죠.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그 어떤 시련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극복할 수 있으며, 그 어떤 실패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지혜를 배웁니다. 그것이 영화의 힘입니다.”
모두 숨을 죽인 채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영화 예술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삶의 위안을 주며, 일상의 재미와 소통 그리고 만족을 줍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영화를 만드는 예술인으로서, 또한 동지이자 동료로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무료로 대중에게 예술을 제공하면 좋겠습니다만.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니 그건 어쩔 수 없지요.”
“하하하하.”
극장에 온풍이 불어오는 느낌이다.
내 생애에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영화는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삶이 바로 영화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를 찍고 있습니다. 때론 위기가 생기고, 갈등도 있겠지만 결국 해피엔딩이 되는 영화. 여러분 모두 그런 영화를 찍어 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앉아서 보던 이들이 다시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다. 고함도 휘파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들 ‘감격’한 얼굴로 묵묵히 박수를 보낼 뿐이다. 감동까지는 모르겠고.
덴젤과 다시 악수하고 이동욱 대표와 제이슨, 건하와 포옹했다. 모두 함께 손을 잡은 채 뮤지컬 피날레를 하듯 허리를 숙였다. 더욱 큰 갈채가 쏟아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시상식이었다.
웃음. 기쁨. 훈훈함. 그리고 감동.
뭐, 나만 감동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카데미의 ‘작전’이었다고 생각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게 미국 문화의 저력일까. 시상식을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이슈를 발생시킨다. 날 꼭 집어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뒤 모든 걸 준비한 느낌이다.
객석으로 가서 앉았다.
얼마 뒤 시상식이 끝났다.
식전에 인사했던 이들과 다시 악수하고 포옹도 했다.
“감동적이었어요.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고맙네요, 니콜.”
“정말 나와 맥주 마시는 겁니다.”
“그럼요. 깁슨 씨.”
“인상적인 소감이었습니다. 축하해요.”
“고맙습니다. 리즈 씨.”
덴젤 워싱톤과는 포옹했다.
“감독님은 현실에서도 영화를 보는 것 같군요.”
“그런가요?”
인사했던 사람들과 다시 인사하고, 오늘 처음 만난 분들에게도 축하 인사를 많이 받았다. 내 수상 소감 이야기를 많이 한다. 미국 영화인들과 좀 다른 소감이었나.
파티장으로 향했다.
1년 중 유일하게 슈퍼스타가 모두 참석하는 파티다.
아카데미 측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참석한 이들은 빠지지 않고 파티도 즐긴다고 들었다.
거진 30분 내내 또 인사를 하러 다녔다.
혁민이와 이동욱 대표와 함께.
제작자나 감독은 스튜디오 운영, 제작비 등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특히 감독들은 네오스타에서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뜻을 은근히 비추었다. 사운드도 CG도 할리우드 최고 수준이라.
배우들은 주로 내 작품 출연이나 차기작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시사회 때 기자들 말대로 블록버스터보다는 예술성이 깊은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예술영화도 나만의 독보적인 영역이 있다는 거겠지.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아내를 보았다.
제니퍼 로렌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국 연예인이라고 뭐 다를 건 없다.
일반인이 봤을 때는 다른 별에서 왔나 싶겠지만.
“무슨 이야길 하고 있어?”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제니퍼 로렌스는 눈인사를 하고.
“후계자. 내용 설명해 줬더니 재밌어하네.”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오빠 덕분이지 뭐. 제니퍼가 정말 오빠 영화 하고 싶나 봐.”
제니퍼 로렌스에게 물었다.
“어떤 영화가 하고 싶어요?”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감독님 작품이라면 뭐든 괜찮아요. 욕심을 좀 내자면 여주인공 비중이 좀 컸으면 좋겠어요.”
“제니퍼가 출연하면 당연히 그래야죠.”
“말만 들어도 좋네요.”
금세 소재가 떠올랐다.
“여성 빌런은 어때요?”
“여자 악당 말이에요?”
“네. 월 스트리트의 늑대라는 영화 보셨죠?”
“그럼요.”
제니퍼 로렌스가 호기심을 보였다.
“내용은 좀 달라요. 천재적인 자산운용사 대표 역할입니다. 욕심에 눈이 먼 남성 거부들의 돈을 갈취하는 역할이죠. 마피아까지 농락하는 희대의 사기꾼입니다. 남몰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양면성도 있고요. 어때요?”
제니퍼의 입이 슬쩍 벌어졌다.
“저! 그 작품 할게요!”
“나도 할래! 그 작품!”
“저도요!”
서연과 옆에서 듣고 있던 리즈 위더스푼까지 끼어들었다.
즉석에서 꺼낸 말인데 이렇게 달려들다니.
하긴 정이 가는 악역은 매력적이다.
여성 배우라면 누구나 욕심나는 소재이기도 하고.
여성과 남성의 대결이 아니다. 악당을 자처하며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을 박살 내는 영화임을 다들 알아챈 거였다.
캐릭터 또한 카리스마 넘칠 것 아닌가.
전 세계 여성들의 환호도 받을 테고.
의상과 뷰티 등 여성들의 볼거리도 있고.
두 배우가 급기야 실랑이까지 벌였다.
“제니퍼는 악당 역할이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리즈 씨는 얼굴이 선하잖아요?”
“당신이 더 선해 보여. 안 그래요? 감독님?”
“감독님이 나한테 먼저 제시한 거라고요. 나와 대화하다가 즉석에서 아이디어를 꺼냈으니까.”
“이봐, 제니퍼. 당신 악역 맡았다가 팬들 다 떨어져 나가면 어쩌려고? 난 감독님에게 여자 살인마를 해도 된다고 말했거든?”
“저도 이미지 변신이 필요할 때거든요? 리즈는 원래 연기 잘하기로 유명하지만, 난 아직 의심을 받고 있다고요.”
“제니퍼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받았잖아?”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슬쩍 눈치를 주자 서연이 나섰다.
“제니퍼 씨. 리즈 씨. 잠시만 기다려 봐요.”
두 배우가 동시에 날 본다.
아내가 내게 물었다.
“방금 만들어 낸 소재지?”
“응. 줄거리 같은 것도 없어.”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는 거고?”
“그럼. 어차피 스토리는 조건에 맞게 만들면 돼.”
“내가 제시해도 돼?”
“얼마든지.”
서연이 바로 두 배우에게 말했다.
“두 분 모두 주인공인 건 어때요?”
의외였나 보다.
두 여배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서연이 말을 이었다.
“두 분이 투톱으로 출연하면 되죠.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 같은 영화로.”
“아!”
제니퍼와 리즈가 서로 보았다.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라는 말을 듣고 단박에 어떤 영화인지 감이 잡힌 거다.
한국 제목은 ‘내일을 향해 쏴라’다. 은행털이범 두 명이 나온다. 여성 악당 두 명이 동업자로 나와 티격태격하며 사기 치는 내용이라면 더 재밌을 것 같다. 여성의 동지애도 보여 주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원톱보다 훨씬 낫다.
두 배우가 금세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척하면 척이다. 나와 비슷한 예상을 했겠지.
더 재밌는 영화가 탄생할 거라는 걸 안다.
시너지 효과도 나고.
“좋아요.”
“저도 좋네요.”
나도 웃으며 나섰다.
“저도 마음에 드네요. 그럼 진행해 볼게요.”
“정말이죠?”
“그냥 이렇게 가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역시 최 감독님은 다르시네.”
서연이 말했다.
“내가 이야기 좀 더 해 볼게.”
“그래. 여자들만의 세계가 있으니까.”
서연과 두 여배우가 발코니 쪽으로 갔다.
이내 셋이 웃으며 뭐라 대화를 나눈다.
두 여자 악당. 재미있을 것 같긴 하다.
건하가 지켜보다가 말했다.
“누가 보면 대충 만드는 줄 알겠네.”
“원래 시작은 이렇게 하는 거야.”
건하가 웃으며 잔을 들었다.
건배를 하고 샴페인을 마셨다.
녀석이 말했다.
“저… 올해 5월 15일에 결혼하려고요.”
“벌써?”
“좀 이른 나이이긴 하지만 희진이가 마음고생이 많아서요. 나도, 희진이도 부모님이 안 계셔서 일찍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빨리하기로 했어요.”
“이리 와. 한번 안아 보자.”
잔을 내려놓고 건하를 안았다.
녀석이 결혼한다고 하니 마음이 울컥했다.
폐인 같았던 녀석이 이렇게 멀쩡하게 달라지고, 스타가 되더니 이제는 결혼까지. 지성이가 결혼할 때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건하가 간다니 마음이 짠해졌다.
“형.”
“응.”
“희진이… 형이 데리고 들어가 줄 수 있어요?”
“그럼. 주례가 아닌 게 어디냐.”
“하하하. 그러네.”
“주례는 누구에게 부탁할 거야?”
“예식장이 좀 썰렁할 것 같아서 그냥 지인들만 불러서 하려고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유난히 친구와 가족이 별로 없다.
아는 사람이라곤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전부다.
건하의 인기 때문에 희진이가 마음고생을 하긴 했다.
여성팬이 어딜 가도 있으니까.
건하 여자친구라는 말도 못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의 밤도 그렇게 깊어 갔다.
오늘은 이래저래 훈훈한 날이었다.
내 인생에 또 이런 기쁜 날이 있을까 싶다.
* * *
며칠 후 귀국했다.
수많은 기자가 공항에 진을 치고 있었다.
외신도 무척 많이 왔고.
시상식 이벤트가 한국에서도 화제였나 보다.
짧게 기자회견을 하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공식 기자회견은 앞으로 많이 남아 있어서.
소파에 앉아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아카데미에서 부상으로 준 다이아몬드 반지다.
내 것만 준 게 아니라 서연의 것도 있다.
리연이에게는 목걸이.
리연이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3살이 넘어가면서부터 부쩍 호기심이 많아졌다.
“이거 뭐야?”
“응. 누가 아빠하고, 엄마한테 선물 줬어.”
“나는?”
“리연이 것도 있어.”
앙증맞은 목걸이를 리연이 목에 걸어주었다.
목에 걸린 걸 보더니 귀찮다며 바로 벗었다.
“왜? 불편해?”
“차가워.”
아이가 바로 자기 방으로 달려가 버렸다.
아내가 웃으며 거실로 왔다.
“리연이는 장신구 같은 거 안 좋아해. 다른 여자아이들과 조금 달라서 예쁜 것에도 별로 관심 없고. 매번 관심 분야가 달라지는데 요새는 오빠가 만든 영화에 빠져 있네.”
“영화? 애가 알아들어?”
“그냥 보는 거지 뭐. 블루드 워도 보던데.”
“내가 만든 걸 알고 보는 거야?”
“그럼. 아빠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대충 알아.”
아이는 내가 그저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영화 찍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사회 행사 때 당연한 일이라는 듯 가만히 있었던 거였다.
“예쁜 거에 관심 없는 거. 문제는 아니지?”
“유난 떨지 않아서 그렇지, 리연이도 또래 여자애와 크게 다르진 않아. 분홍색도 좋아하고. 그런데 오빠 서재에 자꾸 들어가는 걸 보면 아빠가 하는 일에 관심이 있나 봐.”
“애가 영화를 하려는 건가?”
“아빠 닮았으면 그런 거지 뭐.”
아내가 커피를 가져왔다.
“오빤 리연이가 뭘 했으면 좋겠어?”
“글쎄.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밀어주려고.”
“나도 그런데. 아무래도 배우를 할 것 같아.”
“그런 끼가 있어?”
“응. 텔레비전 보다가 노래도 따라 하고 춤도 추고 그래. 날 닮아서 그러나 했는데, 시사회 처음 다녀오고 난 뒤로는 계속 아빠가 하는 일에만 관심을 보이네.”
리연이와 시사회에 갔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이 봐줄 사람이 없어서 데리고 갔었다.
“괜한 걱정인지도 모르겠는데… 리연이가 배우가 되겠다고 하면 상처를 좀 받을 거야.”
“우리 딸이라서?”
“응. 금수저로 태어난 덕분에 배우가 됐다고. 리연이가 혼자 열심히 해 나간다고 해도 그런 말은 나올 거야.”
“그렇게 따지면 다른 일을 해도 마찬가지지 뭐. 로큐에 입사해도 그렇고, 다른 일을 해도 부모가 도와줬다는 말이 나올 거고. 오빠 말대로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네.”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상처도 안 받게끔.
“리연이 다 클 때까지 좀 숨겨야겠어. 우리 딸인 거 모르게. 공식석상에 노출 안 하고, 아이도 SNS 안 하면 될 거야.”
“아이 본인이 인정받을 때까지?”
“응. 실력이 있으면 인정받겠지. 아빠 엄마 덕을 보려고 한다면 내가 먼저 말릴 거야. 그렇게 키우지도 않을 거지만.”
“좋은 거 같아. 나도 조심할게.”
애가 커서 과연 뭐가 될지 궁금하다.
나처럼 감독이 되려는지.
엄마 닮아서 배우가 되려는 건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해도 좋고.
* * *
후계자 후반작업에 들어갔다.
편집실에서 콘티대로 가편집한 것을 내가 다시 편집했다.
한데 시사실에서 편집 영상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현장에서 보지 못한 디테일이 보였던 것이다.
현장 스테이션 모니터에선 잘 안 보이는 눈빛 연기.
스크린으로 보자 정말 깊은 내면이 보인다.
언제 저렇게 연기를 했었는지 나도 몰랐다.
바로 아내, 서연의 연기였다.
엄마가 되고, 연기에 대한 욕구가 쌓이고 또 쌓이다 보니 정말 연기력이 폭발한 것 같다.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니다.
누가 봐도 압도적인 연기였다.
정적인 연기의 교과서를 만들어 냈다고 할 정도.
재벌가 며느리의 불안.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 그와 더불어 재벌가를 휘어잡고 싶은 야망. 딸의 미래에 대한 걱정. 현실에 안주하고, 부를 누리고도 싶은 양면성. 아이들 엄마들과 만날 때의 오만함. 회장님 앞에서 보이는 두려움.
이러한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감정들이 온통 뒤섞여 있다. 각각의 감정이 관련 장면에선 두드러지고, 영화 내내 혼재하기도 한다. 차남과 양 씨가 과장된 연기를 해서 웃음을 줄 때. 재벌가 며느리만 고뇌하는 내면 연기를 보였다.
당연하다.
재벌가 며느리가 주인공이며 극의 화자이니까.
영화 전체의 균형을 잡아 주기도 하고.
외부와 내부. 일반 사회와 상류 사회.
정상적인 삶과 비틀어진 삶.
이러한 경계에 있는 인물 아니던가.
그 균형을 정말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것들은 아내와 현장과 집에서 수차례 이야기를 했던 부분이다. 나중엔 서연이 뭔가 영적인 느낌이 든다고 말했을 정도로 묘한 감을 잡았었다.
내가 숨겼던 ‘신’을 포착했던 것이다.
이 ‘신’이 서연의 눈에 보였다.
내면 연기가 좋았다는 것은 현장에서 내내 확인했다.
눈빛에 그런 디테일이 담겼을 줄은 몰랐다.
사실 무표정한 연기가 많아서 아내에게 좀 미안했었다. 주인공인데 비중만 많을 뿐 눈에 띄는 연기력을 선보일 장면이 없어서. 하지만 액션이 큰 연기만 좋은 연기로 칠 수는 없다. 오히려 감정을 절제하고 눈빛만으로 연기하는 게 더 어렵다.
후계자에서 서연의 연기.
일반인은 잘 모른다.
연출가나 영화인 눈에는 보인다.
이런 연기가 정말 어렵다는 걸.
“허…….”
편집본을 보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배우를 그냥 쉬도록 두었다니.
감독이 남편이고, 현장이 편안해서 이런 수준의 연기가 나온 걸까. 나와 캐릭터 대화를 많이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진정한 대배우의 길에 들어섰나.
아무래도 아내가 대형사고 칠 것 같다.
어디에서 벌어질 사고일지는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