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내 대표작이 될 영화 (53/56)

제5장 내 대표작이 될 영화

하늘에서 초대형 모선이 기울어지고 있다.

그 안에서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탈출선들.

모선 내부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이어지고, 거대한 비행체는 중심을 잃은 채 태평양 쪽으로 서서히 추락했다.

바로 위 하늘에는 지구까지 진격한 화성 저항군과 제2 지구인의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체들과 함선 파편들이 드넓은 평원 위로 수도 없이 추락하며 폭발한다.

이 지옥과도 같은 세상을 영웅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 주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조 전사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다. 엄청난 전투가 있었음을 말해 주듯 산에 구덩이가 파헤쳐져 있고, 핏물이 웅덩이를 이룬 상태였다.

쿵-

그들 앞에 액셀이 떨어져 내렸다.

액셀도 동료와 함께 멀어져 가는 초대형 모선을 바라보았다. 가장 연장자가 액셀에게 물었다.

“모선에 부역자들은 없던가?”

“없었습니다. 지구 어딘가에 숨어 있겠죠.”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군.”

“인간이 외계인들보다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렇겠지. 이제 가지.”

액셀과 12인의 영웅이 드넓은 평원을 걸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가운데의 도로.

석양이 지는 먼 하늘에는 초대형 모선이 검은 연기를 피우며 멀어지고 있고, 파괴된 함선 파편이 별똥별처럼 쏟아진다.

그 붉은 노을을 향해 걸어가는 영웅들.

그들의 긴 그림자는 기나긴 전쟁을 상징하였고.

지는 태양은 다가올 여명을 의미하고 있었다.

“컷! 오케이!”

“예!”

함성과 함께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저편으로 걸어가던 배우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펄쩍펄쩍 뛰면서 돌았다. 무슨 월드시리즈 우승 먹은 것처럼.

시리즈를 무사히 마무리했다는 감격이다.

나도 옆에 있는 조감독 에드워드와 수혁이, 스크립터와 깊이 포옹했다. 스태프들도 저마다 악수를 하고. 이어 배우들이 내게 달려왔다.

“액셀. 정말 잘해 줘서 고맙다.”

“감독님…….”

액셀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내 덕분에 자신이 스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이틴 드라마에 출연하던 신인배우가 블루드 워로 슈퍼스타가 되었으니.

1편에선 특공대로, 2편과 3편에선 영웅으로 나온 12명과도 차례로 포옹했다. 이들 역시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 12명도 무명에 가까웠고 이제는 개별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이다. 울컥하지 않을 수 있겠나.

나도 감개무량했다.

1편 찍을 때만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2편이 대흥행을 하고, 이렇게 3편까지 완성하고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결국 해냈구나 싶고.

“오는 토요일에 파티를 할 테니 모두 참석해 주세요.”

“그럼요! 사랑합니다, 감독님!”

“감독님, 고맙습니다!”

“정말 자랑스러워요, 감독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질러 댔다.

눈인사를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며칠 후.

LA 한인타운 고깃집에서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모두 모여 파티를 했다. 식당 안은 자리가 부족하여 주차장에 테이블을 놓고 모여 앉았다. 무려 250여 명이다.

스태프들은 회사 메뉴에 한식이 자주 나와서 다들 좋아하고, 배우들도 나와 영화 찍으면서 한국 음식을 좋아하게 됐다. 해장으로 순두부를 먹는 게 유행할 정도로.

“여러분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감독님을 위하여!”

“소맥을 위하여!”

“하하하하!”

일부 배우들은 소맥까지 말아서 마신다.

나도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술을 비우자 옆에 앉은 건하가 맥주를 따라 주었다.

“소감이 어때?”

“스튜디오 촬영만 했더니 별 느낌이 안나요. 한국 영화가 연기하는 맛은 나죠.”

“그래. 특히나 넌 더 그럴 것 같다.”

건하는 강습팀장을 맡아서 열연했다. 수호도 강습팀 대원. 갓 필드에서 보여 준 특수부대 연기 덕분에 출연했는데,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 수호 덕분에 강습팀 대원들의 자세가 제대로 나왔으니.

한식과 소맥 파티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배우고 스태프고 다 좋은 사람들이다.

이유가 있다.

코어가 호감을 보인 사람들이니까.

* * *

촬영을 끝내고 미국에서 한 달을 더 머물렀다.

찍어 놓은 실사와 스튜디오 촬영 영상에 맞게 CG 시안을 새로 작성했다. 약간 달라진 CG 작업 스케줄도 다시 잡았다.

CG 작업 기간은 대략 8개월.

액셀과 영웅들의 대규모 전투 씬과 우주 교전 장면만 1시간이나 되다 보니 효율적으로 짜도 8개월 이상이었다.

우주 교전 경우에는 애니메이션 작업과 같았다. 우선 우주와 화성 배경을 만들고, 함선을 붙여 넣는다. 그다음 그 주변을 날아다니는 전투기들을 붙여 넣고.

한 시퀀스만 대략 한 달이 걸리고, 테스트도 여러 번 거친다. 선택 과정을 거쳐 최종 시퀀스를 결정하고, 결정된 영상을 가지고 디테일한 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서부터 또 6개월 정도가 걸린다.

그 6개월 동안 내가 할 일은 없었다.

CG팀이 매일 한 땀, 한 땀 그림을 그려 넣는지라.

해서 한 달간 기본 방향만 결정해 주고 귀국하기로 했다. 도중에 나올 테스트는 영상 통화로 하면 될 터였다.

마침 한국에선 영화 ‘레저’가 개봉을 앞두었다.

시사회는 이미 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들었다.

오기성이 매일 전화를 할 지경.

아내와 함께 인천공항 게이트를 나갔다.

수많은 취재진이 모여 있었다.

리연이가 놀라는 바람에 아내 먼저 마중 나온 매니저를 통해 내보냈다.

“최신성 감독님! 영화 ‘레저’ 시사회에서 나온 이상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감독님! 오기성 감독님과 협업은 어땠습니까?”

“기인으로 유명한 오기성 감독과는 사이가 좋으신지요?”

“어떻게 살인마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하셨나요?”

로큐 매니저들이 포토 라인을 만들어 놨다.

회사에 기자들 문의가 너무 많아서 회사에서도 내가 입국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했다. 지성이는 ‘기레기’들이 갈 테니 노이즈 마케팅이 될 거라는 예언까지 하고.

“이상 반응은 일부 매체의 단정이라고 봅니다.”

“살인을 미화한다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범죄를 모방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은요?”

“대중에게 살인의 쾌감을 전달하고 싶었나요?”

“살인의 쾌감이 정상적이라고 보세요?”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먼저 귀국한 수혁이를 통해 시사회 반응을 알고 있었다.

나는 눈도 귀도 없는 줄 아나.

기자들이 자신들의 기사 페이지뷰를 높이려고 자극적인 질문을 해대는 거였다. 친한 영화 기자들이 안 보이는 걸 보니 대부분 영화 안 봤다.

시사회에 초대받지 않은 기자들이 뭐라도 하나 건지려고 온 거다. 그냥 무시하고 갈까. 아니면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할까. 내 말의 앞뒤를 잘라 먹고 멘트 하나만 부각하겠지.

“기자 여러분.”

떠들던 이들이 조용해졌다.

“대중은 늘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저와 오기성 감독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평가는 대중의 몫입니다. 영화의 다양성과 대중의 선택을 폄하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비판하는 평론가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평론가가 비판했죠?”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당연하다. 취향 문제는 거론해도 영화를 비판하는 평론가는 없었으니까. 확인도 안 하고 질문을 막 하는 기자들이다.

“다시 묻겠습니다. 누가 레저를 비판했죠?”

“포털에 보면 비판 리뷰가 많습니다!”

“예. 포털 리뷰를 쓰시는 평론가분들이 무척 많으시죠.”

“하하하하!”

몇몇 기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개인이 쓴 리뷰를 가지고 평론가가 썼다고 우겨대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평론가도, 기자도, 대중도 개인이긴 하다만.

“저는 우리나라 대중을 믿습니다. 대한민국 관객은 세계 최고 수준이니까요. 그러나 여러분이 대중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상입니다.”

플래시가 수도 없이 터졌다.

“감독님! 마지막 말은 무슨 뜻입니까?”

외침을 듣고 멈췄다.

기자들 수준하곤.

내 앞에서 카메라로 찍고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이분은 로큐 직원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담아서 펀딩 사이트에 올리도록 하죠. 모자이크 처리와 음성 변조는 해 드리겠습니다.”

“감독님! 잠깐만요!”

“그거 올리시면 안 됩니다!”

매니저들에게 에워싸인 채 공항에서 빠져나갔다.

매니저들이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회사에 오늘 온 기자들 전화가 빗발칠 거다. 영상 올리지 말라고. 합의해서 기사를 좋게 쓰던가, 아예 안 쓰던가. 영상 올라가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거 뻔하니까.

* * *

다음 날 금요일 저녁.

오기성 감독을 만나 가볍게 맥주 한잔했다.

날 보자마자 덥석 안는 오 감독이었다.

잔뜩 고무된 표정. 영화 개봉도 안 했는데 대중의 기대가 상당히 커서 그랬다. 영화 매체의 평론도 하나같이 찬양 일색이었고. 충격이라는 말과 함께.

오 감독은 술도 마시는 둥 마는 둥 노트북만 보았다.

전화받고 문자 보내고 또 노트북 들여다보고.

“뭘 그렇게 봐?”

“예매율.”

“얼마나 돼?”

“89%. 신기록이야.”

“그전에는 얼마였는데?”

“36%가 최고 기록.”

또 전화가 왔다.

“응. 나 최 감독이랑 술 마시고 있어. 씨네 매거진? 아, 그 기자는 왜 자꾸 날 찾아와. 최 감독 왔으니까 최 감독하고 인터뷰하라고 그래. 난 싫다니까.”

오기성이 전화를 끊었다.

“기자 인터뷰를 왜 거절하는 거야?”

“씨네 매거진 기자 말발이 너무 세서. 살인 쾌감을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했냐고 묻더라.”

“그래서?”

“엔터테인먼트로 받아들일 것 같다고 했지. 그랬더니 인간의 폭력적 본능을 대리만족으로 적용할 생각은 어떻게 했느냐? 뭐라 대답은 했는데 영 못 미더운 눈치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손해인 것 같아서 안 했지.”

“뭘 자꾸 설명하려고 그래? 레저는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안 되는 영환데.”

“누가 몰라? 자꾸 귀찮게 하니까 그렇지.”

기자들에게 꽤 시달렸나 보다.

쏟아지는 관심이 즐거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앞으로는 각자 해석과 감상에 맡기라고 해. 감독이 본인 영화에 대해 자꾸 설명하면 모양새가 그렇잖아. 무슨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처럼 하라고. 실제로 레저는 그런 영화이기도 하니까.”

“알았어. 기자들이 매일 몰려오는 통에 정신이 없네.”

“인기를 실감해?”

“좀 당황스럽긴 해. 개봉도 안 했는데 말이야.”

내 덕이라곤 차마 말을 못했다.

나와 오기성이 힘을 합쳐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도 충격적이다.

두 사람의 스타일이 합쳐지면서 나도, 오기성도 그동안 만들지 않았던 작품이 나왔기도 하고. 그런 상황인데다 레저는 영화의 유희 개념과 제작 가능한 소재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나와 오기성이 만나지 않으면 태어날 수 없는 영화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영화는 예술이면서 사업이다.

수십억이 들어가는 실험을 할 수는 없지 않겠나.

해서 평론가들은 연일 극찬이고. 영화를 본 시사회 셀럽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 충격파가 개봉하기도 전에 퍼져 갔다.

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그러한 관객 반응을 오늘 확인할 참이다.

“이제 나가지?”

“아, 긴장되네.”

“초짜처럼 왜 그래?”

“흥행 영화는 처음이라.”

오기성. 보면 볼수록 귀엽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순수해서 그런 거겠지.

바로 극장으로 향했다.

금요일 저녁이라 극장에 사람이 붐빈다.

레저가 확보한 스크린 수는 1,100개.

오기성의 영화로는 최대 기록이다.

그전에는 400개 정도였으니.

배급사는 이익 계산이 빠르다.

내가 제작한 영화라서가 아니라, 흥행성이 있다고 본 거다. 사실 내가 참여한 영화라 흥행에 베팅을 했지, 다른 감독이 찍은 영화라면 애매했을 거다. 오기성 단독 영화면 더했고.

극장에 들어가 좌석에 앉았다.

살인마가 주인공이라는 말만 듣고 호기심에 온 관객도 상당히 많다. 커플들도 많고. 넥타이부대도 좀 있고.

주인공이 살인마면 어쩌라는 거야? 근데 최신성 감독이 공동제작했대. 그럼 좀 다르겠네. 평론가들이 극찬하면 재미없지 않아? 난 오기성 영화는 별로던데. 평론가들이 최 감독 비판하는 거 봤어? 최신성 영화 비판하면 평론가가 욕먹거든.

이런 대화들이 들려온다.

나는 웃음이 났고, 오기성은 콧방귀를 뀌고.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도입부가 정말 현란하다. 금빛으로 번쩍거린다.

금융 재벌가 출신인 주인공이 외환 딜러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화면 구성과 편집이 바쁘게 돌아간다.

몽타주만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직업은 뭐고, 인간관계는 어떤지. 좋아하는 명품은 무엇인지. 얼마나 부자인지를 컷과 컷으로 점프하며 말해 준다. 이미지만으로 인물의 모든 걸 설명해 버린다.

셔레이드의 퍼레이드.

흥미진진한 배경과 인물 설명 뒤에 갑자기 벌어지는 사고. 고급술집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한 남자를 찌르고 도주한다.

일을 보고 나가니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쓰러진 남자. 웨이터에게 갑질하던 진상 손님이다.

주인공의 눈동자가 바삐 돌아간다.

3초 만에 완전범죄의 계산이 끝난다.

그리고 눈빛에 일렁이는 강렬한 욕구.

바닥에 떨어진 칼을 줍는 주인공.

피를 꾸역꾸역 토하는 남자에게 다가간다.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그 남자의 목에 칼을 푹 꽂아 버리는 주인공.

물끄러미 죽어가는 남자를 본다.

주인공의 흔들리는 눈빛.

자신의 거침없는 행동에 놀라면서도 처음 맛보는 기이한 쾌감에 몸을 떤다.

배우 강동언의 눈빛 연기가 정말 일품이다.

떨리는 눈만 봐도 감정이입이 될 지경.

그 후 주인공의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아주 깔끔하고 꼼꼼한 성격 그대로 살해 대상을 물색한다. 자신의 행동이 범죄인 것은 정확히 인지한다. 그래서 죽어야 할 자의 모든 것을 확인하고 계획을 짠 뒤 실행에 옮긴다.

범죄에 대한 자기 기준을 만들어 놓았다.

외환 거래에 대한 기준을 만들 듯.

악의 지수. 세상에 존재해야 할 가치.

이 인간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피해.

증거가 남을 확률. 대상의 사회적 지위와 파급.

성공확률 88% 이상. 완전범죄 90% 이상일 경우에만 움직인다. 한밤에 벌어지는 자신의 유일한 쾌락을 위해. 자신이 세운 정의를 위해. 그것이 반사회적일지라도.

관객들은 흥미진진하게 영화에 몰입했다.

한 40분 지나자 관객 대부분이 즐기고 있었다.

본인들도 놀라고 있다. 내가 왜 주인공의 살인에 기분이 좋지? 왜 이렇게 쾌감이 느껴지지?

현실에선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 있다.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이면 몰라도 지금은 영화를 보고 있다. 관객은 내심 원한다. 죽이라고.

레저는 그걸 건드리고 있었다.

관객의 내밀한 기대를 주인공이 그냥 해 버린다. 무턱대고 하지 않는다. 살인자의 자기 합리화는 있을지언정, 속 시원하게 가 버린다.

관객은 영화를 즐기러 왔다.

악이 더 큰 악을 처단한다는 내용을 알고 왔다.

그 기대를 그대로 충족시킬 뿐.

관객들은 이런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내가 이런 걸 즐기는 사람이었나?

쾌감과 양심의 가책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1시간 20분이 지나자 분위기가 또 달라졌다.

주인공이 청부업자에게 쫓기기 시작하면서.

한두 명이 아니다. 뛰어난 두뇌로 오히려 청부업자들을 하나씩 잡아 나간다.

경찰에게 쫓긴다면 관객들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주인공이 경찰에 잡히지 않길 원하면 죄책감이 생긴다. 주인공이 경찰에 잡히면 찝찝함이 남는다.

주인공의 적은 같은 살인자.

따라서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감정은 동요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을 더욱 끌어당긴다.

세상 그 어떤 쾌락도 내성이 생기면 재미없다.

주인공에게 살인도 그렇다. 멍청한 살인마가 아니다.

자신의 쾌락보다 자신의 위치와 가문이 더 중요하다.

주인공이 살인을 그만두기로 했을 때.

청부업자들이 들이닥친다.

한바탕 벌어지는 추격과 칼부림.

관객들의 눈에 열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청부업자들을 이기면서 오는 쾌감. 주인공이 살인을 그만두면서 생기는 안도감. 두뇌 액션에 대한 기대감.

주인공이 명석하고 꼼꼼한 살인자였기에 가능했다.

주인공의 지적 수준이 곧 관객의 지적 수준이다.

이는 또 다른 대리만족!

마침내 주인공은 청부업자를 모두 제거하고, 자신에게 청부업자를 보낸 인물에게 찾아간다.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를 아는 인물. 바로 주인공 아버지 회사의 전무다.

주인공의 수상한 행적을 보고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살인마임을 직감한 전무. 주인공 가문을 몰락시켜 회사를 집어삼킬 의도로 벌인 납치 의뢰. 그것이 살인청부가 될 줄은 전무도 몰랐다.

전무는 주인공만큼이나 용의주도하다. 전무와 주인공의 은밀한 신경전과 추격전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두 사람은 경찰에 알릴 수가 없다. 악인과 악인의 대결이다.

전무는 납치의뢰가 왜 살인청부가 되었는지 의문이다. 그는 진짜 살인을 의뢰하러 또 다른 청부업자를 만나러 간다.

그 청부업자의 칼이 전무의 목에 박혀 들어간다.

또 다른 청부업자는 주인공이었다.

주인공은 자신이 죽인 청부업자가 전무를 죽인 것으로 위장한다. 전무가 자신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청부조직 우두머리와 전무가 주고받은 문자는 처음부터 주인공이 조작한 것이었다.

철저한 준비와 처리 과정에 관객이 탄성을 흘렸다.

착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영화.

관객도 악당이 되어 버리는 영화.

한바탕 범죄를 저지르고 유유히 손은 씻는 기분.

주인공이 발리에서 휴가를 보낼 때.

관객들도 주인공과 같이 휴식을 만끽했다.

완벽한 마무리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마침내 영화가 끝났다.

극장에 불이 들어오자마자 소란스러워졌다.

저마다 함께 온 사람들과 한마디씩 한다.

대부분이 웃고 있다. 당연하다.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 버렸으니까.

특히 직장인들은 함박웃음을 짓는다.

직장 상사가 떠올랐나.

오기성이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영 내내 관객 반응을 보던 오 감독이다.

“영화 재밌나 보네.”

“놀랍지?”

“신기하네.”

오기성도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영화를 보고 웃으며 일어나는 걸 처음 보니까.

이런 맛에 영화 찍는 거지.

내일 어떤 리뷰가 올라올까

사뭇 기대가 된다.

* * *

수혁이와 함께 회사 분위기를 보았다.

회사에 항의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웃음 나는 현상이 일어났다.

영화를 본 사람은 정말 재밌어하고, 안 본 사람은 신문기사와 사설만 읽고 영화를 단정해 버린다.

놀랍게도 지금 항의를 하는 사람들은 죄다 영화를 안 봤다. 언론의 몰아가기 식 논조에 휘둘린 ‘노인네’들이 대부분이다. 전화를 해선 다짜고짜 욕설부터 한다.

수혁이가 웃으며 말했다.

“재벌과 부자를 리얼하게 그려서 그런 거겠죠.”

“이런 영화가 나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지. 언론사도, 그 언론의 독자도.”

유력 일간지는 연예면이 아닌 사회면에 영화 ‘레저’를 언급하며 무슨 문제가 생긴 양 크게 보도하고, 논설까지 실었다. 사회의 도덕적 해이가 의심된다면서.

반면 일부 일간지는 영화 역사에 유례가 없는 영화가 나왔다며 대중의 감각과 함께 가고 있다. 레저를 관람한 관객이 대부분 중년층 이하이기도 했고.

사회에 큰 충격을 준 것은 맞다.

악인에게 감정이입하여 살인의 대리만족을 느꼈으니 당연한 일이다. 영화 안에서의 개연성이 설득력 있으면 영화로 볼 일이다. 즐기려고 영화를 봤으니 즐기면 그뿐이다.

그런데 신문사 논설위원들은 영화를 안 봤거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평가하고 있다. 시리아 사태를 잘 모르면서 시리아 사태의 해결법을 제시하는 꼴이다.

한국 사람이야 그런 논설을 들으면 ‘그런가 보다.’ 싶겠지만 시리아 사람들이 논설 전문을 보면 황당무계하거나 자다가 남의 다리를 긁는 주장인 거지.

유력 언론이 왜 레저를 씹어대는지는 안다.

부자들이 이 영화의 등장을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일그러진 상류 사회의 단면을 리얼하게 보여주는데, 언론에선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다며 열을 올린다.

그럼 영화가 실패했느냐.

정반대다.

개봉 이틀 만에 무려 170만이 들었다.

예매율이 빠지지 않고 있으니 거의 천만 관객 속도다.

관객의 리뷰 추이도 흥미로웠다.

첫날에는 이랬다.

[레저가 과연 흥행할까.]

[이상한 영화였습니다. 조심스레 리뷰를 적어 봅니다.]

[나쁜 영화? 좋은 영화? 해석이 어려운 영화다.]

[레저. 너는 정체가 뭐냐?]

[레저라는 영화. 나만 좋았을까?]

[친구들과 3시간이나 논쟁했습니다. 한번 풀어볼게요.]

[영화보고 정말 스트레스가 풀렸다. 왜?]

이렇게 흘러가던 리뷰 혹은 댓글이.

[고백합니다. 저는 영화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과감한 평가. 레저는 최고의 예술이자, 오락영홥니다.]

[욕먹을 각오로 올림. 레저는 영화의 혁신!]

[우리 솔직해집시다. 영화 재밌잖아요?]

[왜 항상 착한 주인공이어야 하나? 편견 아닐까.]

[재밌는 걸 재밌다고 왜 말을 못해? ㅋㅋ]

리뷰가 이렇게 변화하더니 한 리뷰에서 폭발했다.

<이틀 내내 고민하다 리뷰를 올려 봅니다. 저는 레저를 너무도 재밌게 봤습니다. 최 감독님의 플랜과 갓 필드 이후 이렇게 재밌는 한국 영화는 처음입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보고 난 뒤에도 무척 놀랐어요. 시사회 때 연예인들 반응은 공인이기에 조심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왜 이 영화를 보고 쾌감을 느낀 사실을 쉬쉬하는 걸까요?

오기성 감독과 최신성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최 감독님 전작이 그러했듯. 이 영화는 인간의 악에 대해 관객들이 대리체험을 하게 합니다. 주인공을 통해 관객의 본성을 끄집어낸 것이죠. 그게 불편하고 민망하고 꺼려졌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선과 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선을 통해 영화를 보고 만족했지만, 악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레저를 통해 깨달았던 것일 뿐입니다. 처음 겪기에 당황했던 것이죠.

여러분은 악한 사람인가요? 선한 마음과 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클 뿐, 사람은 누구나 악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레저는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영화죠. 상업성이 있는 영화에 한하여, 레저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라고 단언합니다.>

이 리뷰에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동의합니다. 이 리뷰가 핵심이네요.]

[좋아요, 누르고 갑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요. 좋은 리뷰입니다.]

[저는 영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레저 같은 영화는 정말 만들기 어렵습니다. 레저처럼 악과 양심에서 외줄을 타는 건 최신성 감독만이 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일반 감독은 하고 싶어도 못해요. 균형이 자칫 어긋나면 이상한 영화가 되는 거죠.]

[영화 잘 모르지만 윗분 말에 동감합니다.]

[비슷한 빌런 주인공 영화는 많지만 흥행한 영화는 레저가 처음일 듯. 그런 면에서 걸작인 건 확실함.]

[저랑 제 친구들만 재밌게 본 게 아니네요. 지금 흥행 속도 보니까, 천만 나오겠는데요. 이게 뭘 의미할까요? ㅎㅎ]

이후 댓글은 토론의 장으로 변했다.

영화 정말 잘 만들었고 재밌게 보고 왔다. 관객이 영화 내용을 이해하고 대리만족도 했다. 스트레스까지 풀었는데 그러면 좋은 영화 아닌가?

두 감독이 매우 특이한 영화를 만들어서 충격과 혼란이 일어났을 뿐 영화를 재밌게 본 건 사실이다. 그냥 재밌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본성을 탐구했다는 면에서 예술성도 매우 뛰어나다. 리뷰 말대로 체험까지 했을 정도다.

대충 이런 분위기로 흘러갔다.

즉, 전에 없었고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 나오면서 혼란에 빠졌다가 대중이 스스로 자리를 잡아 가는 거였다.

최근 댓글은 또 분위기가 다르다.

낄낄대면서 노는 분위기다.

이슈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결과다.

[회사 동료와 영화 보러 갔는데 스트레스 완전 풀렸음. 곱창 먹으면서 부장님 엄청 씹어대고. ㅋㅋㅋ]

[스트레스 푸는 데는 직방임! 역시 최 감독!]

[오 감독은 최 감독 안 만났으면 평생 대박 못 냈음. ㅋ]

[난 나쁜 놈인가 봅니다. 영화 보다가 지림. ㅋㅋ]

[영화 보고 뭐라 하는 사람 이해할 수가 없음. 내가 평범한 사람인 거 내가 더 잘 아는데, 무슨 상관? 난 예술 영화를 재밌게 본 것 같아서 뿌듯하기만 하더만.]

[나도 뿌듯했음. 정말 지적인 영화임.]

[제가 정리함. 레저는 매우 상업적인 예술영화임. ㅋ]

관객이 예술성을 알아주니 다행이다.

살인 유희가 지적 유희이기도 했고.

[혹시 주인공이 꿈을 꾼 것 아닐까요?]

[나도 그런 느낌이 들던데.]

[오기성 감독이 그랬어요. 열린 구조로 갔다고.]

[솔직히 FPS 게임이랑 무슨 차이?]

[다 필요 없고. 나만 스트레스가 풀렸으면 장땡. ㅋㅋ]

[윗분 말이 맞음. 스트레스 푸는 데는 최고임.]

[생각해 보셈. 왜 영화 제목이 레저인지?]

[정말 그러네! ㅋㅋ]

[관객에게는 영화가 레저였네? ㅋㅋㅋㅋ]

플랜보다 스트레스가 더 풀렸다는 말이 많았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스트레스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그중에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스트레스도 있다.

부자가 되고 싶은 갈망. 인간으로서 가지는 욕망. 나쁜 일을 했던 후회. 잊고 싶은 기억. 내가 상처 준 과거.

이러한 인간의 어두운 면과 죄의식을 지닌 채 사람들은 살아간다. 해소하기가 무척 어렵다.

영화가 그러한 관객의 어두운 면을 끄집어내었다. 주인공의 행동에 동조하고 함께 가면서 자신의 어두운 본성을 인지하고 인정했다. 의식의 기저에 가라앉아 있던 어두운 면을 일으킨 뒤 시원시원한 ‘악행’을 체험하면서 정화해 버린 것이다.

댓글에 있는 것처럼 자신이 보통사람인 걸 자신이 잘 안다. 영화의 악행이 옳다고 믿어서 쾌감이 있었겠나. 그러니 인정을 하고 나면 편해지고 영화를 즐길 수가 있게 된다.

스트레스 해소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어쨌거나 레저는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안 봐도 안다.

1. 기대감으로 영화를 보러 간다.

2. 혼란이 일어나서 궁금해진다.

3. 주인공이 살인마인데 재밌다고? 더 궁금하다.

4. 댓글에서 논쟁이 터졌다. 살짝 망설여진다.

5. 영화 재밌다는 사람이 정말 많다. 대체 뭔데?

6. 대박 흥행 중이다. 이제 나도 한번 볼까.

7. 스트레스 해소 영화라고? 사람들이 이상해졌나?

8. 사람들이 찬양하고 난리다. 이번 주엔 봐야지.

9. 야, 스트레스가 다 날아갔다. 진작 볼걸.

10. 리뷰와 댓글 구경하고 직접 소감도 달아보고.

사회에 들이닥친 태풍이 해소되어 가는 과정이다.

영화를 본 관객은 언론이 뭐라 하건 신경도 안 쓴다.

오히려 코웃음만 칠 뿐.

* * *

한 달 뒤.

오기성 감독을 만났다.

이 인간이 날 보자마자 또 덥석 안았다.

“돈맛이 어때? 돈에 연연하지 않는 오 감독.”

“언제까지 놀릴 거야. 요즘 정말 살만 난다.”

“밥값 내는 거지?”

“당연하지.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하하하!”

고급 참치전문점에 왔다.

오기성이 가장 비싼 부위를 마구 주문했다.

난 입맛이 서민이라 맛도 잘 모른다.

“어때? 흥행하고 나니 영화관이 좀 바뀌지?”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상업과 예술 다 잡을 수는 없다고 믿었던 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다 자기 합리화야.”

“개구리가 우물에서 나왔구만.”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대중성이 뭔지 이제 대충 알 것 같지?”

“그게 하루아침에 습득이 돼? 두 번만 더 해주라.”

“소재만 좋다면.”

오 감독이 술을 따라주었다.

“후계자 촬영은 언제 들어갈 거야?”

“두 달 더 걸릴 것 같네.”

“공사가 아직 덜 끝났어?”

“외관 공사는 끝났는데 디테일이 좀 부실해서. 오래된 건물처럼 보여야 하거든.”

“나… 후계자 다시 읽어 봤다.”

솔깃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정말 웃기더라. 에휴… 내가 얼마나 쫀쫀한 인간이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당신에 대한 시기와 질투. 상업영화에 대한 편견. 꽉 막힌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내 눈을 멀게 한 거지.”

“아부하는 거지?”

“솔직히 레저 시나리오 작업할 때만 해도 당신 능력이 의심스러웠거든. 그런데 촬영할 때 뭔가 슬슬 보이기 시작하더라고. 극장에서 레저 볼 때. 아! 이거구나 싶었어.”

“그걸 개과천선이라고 하지.”

오기성이 웃으며 술을 마셨다.

“크, 술맛 좋다. 지나고 보니 알겠더라고. 당신은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난 그 아래 바닥에서 놀았던 거야. 상업과 예술을 구분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지. 아마 거의 모든 감독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그냥 좋은 영화를 만들면 돼.”

오기성의 눈빛이 변했다.

“당신은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야?”

“재밌고. 만족을 주고. 생각할 여지도 있고. 여운도 있는 영화. 그리고 인간과 사회가 담긴 것. 상업이든, 예술이든 이것들만 갖춰지면 좋은 영화지.”

“그래. 상업과 예술 다할 수 있는데 말이야.”

나도 오기성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요즘 씁쓸해. 나 혼자 레저를 쓰라고 하면 못 써. 다른 작가들도 레저는 못 쓸 거야. 당신이 얼마나 아득하게 먼 곳에 도달했는지 레저를 보면 알아. 그리고 말이야.”

“뭐?”

오 감독이 다시 웃었다.

“레저보다 한 차원 높은 게 후계자더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레저는 주제를 그대로 전달하는 1차원이야. 그런데 후계자는 주제를 코미디로 한 번 꼬고, 막장 스토리로 다시 한 번 꼬는 3차원이더라고. 일부러 막장을 선택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 다시 읽으면서 ‘이 인간 도대체 뭐야?’ 이랬다.”

오기성이 후계자에 담긴 코미디 본질을 본 모양이다.

나와 함께 레저를 하기 전에는 남의 시나리오를 볼 줄 몰랐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의 말 그대로다.

코미디로 풍자하고 그걸 막장 스토리로 다시 풍자했다.

그냥 보면 상류층 사회를 풍자하는 것 같지만, 더 높은 곳에서 보면 인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노란색은 지성과 정신, 창조를 의미한다.

색상학에선 그렇게 해석한다.

붉은색이 열정과 혁명. 흰색이 순결을 상징하듯.

영화 속에서 양아치가 노란색 옷을 입고 있는 이유.

아무도 그렇게 해석하진 않겠지만, 신이 인간으로 화하여 인간 세계에서 유희한다는 뉘앙스를 주기 위함이었다.

영적인 상징이라고 할까.

해서 양아치의 언행을 살펴보면 신이 장난치는 모습을 닮았다.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몸소 체험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봐라. 이것이 너희 인간의 모습이다. 라고.

모든 대사와 행동에 그런 은유를 넣었다.

아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아내도, 수혁이와 직원들도 되게 웃기는 영화인데 묘하게 고급스럽다고 한 거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니까. 무의식에는 전달되고 인식은 안 되기 때문에.

아무튼 공사가 지연되어서 촬영이 또 연기되었다.

영화와 내가 밀당하는 기분이다.

내가 한 걸음 다가가면 영화도 한 걸음 물러나는 듯한.

그러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느껴지는.

“레저 관객은 얼마나 들었어?”

“어제까지 1천1백 만. 레저가 천만 관객 영화가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한국 사람들이 변했나 봐.”

“해외에서도 꽤 흥행할걸?”

“정말 그럴까?”

“서구 쪽은 쿨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일본에선 한국보다 더한 충격에 빠질 거다. 거긴 본심과 배려를 무서울 정도로 구분하니까. 속으론 아주 재밌어하고 겉으로는 한국영화 따위. 이럴걸?”

“그런데 흥행은 하고?”

“그렇지. 웃기는 상황이지.”

“하하하하,”

오기성 감독이 정말 기분 좋아 보인다.

일부 나라에선 레저가 흥행하긴 어려울 것 같다. 관객이 한국 관객 수준은 되어야 평가라도 제대로 이뤄질 테니까.

* * *

강원도 용평의 산자락.

울창한 삼림이 있는 한 지역에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한 지 넉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외관 마무리가 끝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정원은 이미 갖춰졌다. 귀족의 허영심이 드러나는 조각상과 분수대도 만들어졌고.

오기성과 저택을 둘러보았다.

그가 비주얼 디렉터이기에 함께 왔다.

“내부는 호텔식이라고?”

“그래야지.”

“당신 집으로 하지, 왜 호텔로 만들려고?”

“집이 크면 좋을 것 같지?”

“당연한 거 아니야?”

“집이 크면 나도 아내도 불편해. 청소할 공간이 많아지거든. 정원 넓은 이층집이 딱이지.”

“가사도우미 쓰면 될 거 아니야?”

“당신은 그렇게 살아. 재벌가 출신이니까.”

웃으며 저택 뒤편으로 돌아갔다.

미술팀장이 공사를 관리하고 있었다.

“수고 많다. 언제쯤 끝나?”

“50일쯤 걸려요. 외관 공사가 늦춰지니 내부 공사가 먼저 끝나겠네요. 재벌가답게 정원을 꾸미려니 쉽지가 않아요.”

“서두르지는 마. 아, 뒤 뜰에 때 먼지 묻은 마리아 조각상을 하나 놓을 생각이야. 적당히 찾아봐.”

“마리아요? 이 재벌가는 정원만 화려하고 뒤 뜰은 잡초가 무성한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 말도 맞아. 마리아 조각상을 대충 놔둬. 방치한 느낌으로. 나중에 양아치가 잡초를 하나 둘 뽑고 마리아상을 닦아 놓을 거야.”

“알겠습니다.”

오기성이 참견했다.

“마리아상은 왜?”

“며칠 전에 생각나서. 어떤 비주얼이 생각나?”

“글쎄. 보여주기 식의 신앙이 더는 필요 없으니 마리아상을 치워 버린 느낌? 재벌가 가족들이 매주 성당에 다니다가 양아치가 온 뒤로는 안가잖아.”

“그 장면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어?”

“글쎄. 뭔가 들킨 느낌? 전에 수혁이가 그러더라. 재벌가 차남이 자신의 위선이 관객에게 들통 날까 봐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시나리오를 다시 읽으니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

‘신’에게 들통 나지 않으려는 느낌이 그렇게 전달되었던 거다. 가짜 신앙심이든, 허영과 위선이든.

물론 관객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느낌도 있고. 이건 캐릭터가 잘살아서 자연 발생한 점이다.

오기성이 대략 알고 있어서 그냥 가면 될 듯했다.

중첩된 뉘앙스를 다 알려줄 필요는 없다. 알 듯 말 듯한 느낌만 전달되면 된다.

“세트는 끝났지?”

“네. 보실래요?”

“가 보자.”

저택에서 50미터 떨어진 큰 공터에 저택 내부 세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저택이 5층인데 세트는 1층만 구현되어 있다.

넓은 1층에는 거실과 주방, 계단 등이 있고, 뒤쪽에는 2층 이상의 각 방 세트가 만들어져 있다.

인테리어는 끝났고 미술품이나 살림살이만 채워 넣으면 된다. 전체적으로 흑백 구도다. 소파는 초고가 제품을 사서 나중에 우리 집에 들여놓을 생각이다.

오기성이 사진을 찍어가며 세트를 살폈다.

“여기에 야수파 그림 하나 걸어 놓으면 되겠네. 건너편에는 입체파 그림. 저기 계단 옆 벽에는 추상파 그림.”

“통일성 없게 무슨 야수파와 입체파야?”

“야수파 그림은 서구 귀족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작품이거든. 입체파는 재력과 예술 수준을 과시하는 그림이고. 추상파는 허영심. 그림도 모르면서 흉내만 낸 거지. 그림 좀 아는 서구인들이 보면 폭소가 나올걸? 아주 지적인 코미디지.”

“비주얼 디렉터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한 미장센 하는 오 감독이다.

그림에 대한 주장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미술팀장에게 다시 말했다.

“거실 전체는 흰색이니 설정에 맞고. 방들 색깔은 어때요?”

“재벌가 일원의 방은 벽만 흰색이고 물건들은 검은색이에요. 며느리와 차남의 방은 흰색인데 검은 커튼이 쳐졌고요.”

“옷 방의 옷 정리 상태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하얀 겉옷은 아무렇게나 걸려 있거나 대충 처박아 놓은 느낌. 검은 속옷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둔 느낌입니다.”

“흰색은 선한 척. 검은색은 본색인 거죠?”

“본인들도 순수한 척하는 게 불편했던 겁니다.”

내가 나섰다.

“은유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

“꼬아 놓은 걸 한 번 더 꼬는 거지. 그래야 뭘 의미하는지 알 거 아니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면 그게 무슨 은유야.”

“그렇긴 하네.”

오기성 감독은 꼼꼼하게 세트 미술을 정리해 나갔다.

프리 프로덕션은 올해 초에 끝냈다.

세트가 완성되면 바로 촬영이다.

대체 영화가 어떤 작품이 되려고 이리 조바심을 내는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내 대표작이 될 거라는 느낌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시나리오에서도 인물이 살아 숨 쉬었는데, 실제 사람이 연기를 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시간이 흘러 흘러.

마침내 두 달이 훌쩍 지나고 촬영을 코앞에 두었다.

영화 레저의 최종 흥행 성적은 1,230만.

한국 영화 역사상 스릴러 장르 최고 기록이다.

그것도 살인마가 주인공이 영화로.

한국의 영화 시장과 수준 높은 관객이 부럽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을 정도였다. 영화에 대한 소문과 소식은 해외 판매 호조로 이어졌다. 168개국 판매. 이미 개봉한 나라에선 충격에 휩싸였다는 뉴스가 연일 쏟아지고 있고.

언론의 보도 방향도 완전히 달라졌다.

오기성과 나에 대한 칭송 일색이다.

단체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언론이 선동해도 대중은 휩쓸리지 않는다.

대중은 자신이 생각과 여론을 믿는다.

시대가 변했다.

그런데 촬영을 사흘 앞두고 있을 때였다.

레저가 청룡영화제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백상에서 플랜으로 대상을 한 번 받았다.

미국에 있을 때라 직접 받진 못했고.

다른 영화제는 출품을 전혀 안 했다.

나눠주기식 시상에 들러리가 되는 게 싫어서.

한데 요즘 청룡영화제는 권위가 상당히 높아졌다. 나도 앞으로는 출품할 생각을 했으니.

그 청룡영화제에 레저가 무려 11개 부분 후보에 올랐다.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조명상. 음악상. 미술상. 기술상. 편집상. 최다관객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만 받으면 아주 웃길 것 같다.

과연 몇 개나 받을 수 있을지.

* * *

영화 ‘후계자’ 촬영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들만 모였다.

회장님 역의 백윤석. 장남 역의 이동혁.

차남 역의 조승운. 양아치 역의 김수형.

그리고 둘째 며느리 역의 안서연.

첫 장면은 재벌가 며느리역의 서연이 장을 보고 아이 엄마들 모임에 갔다가 귀가하는 씬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재벌가의 며느리.

아이와 같은 반 아이들 엄마들도 다들 부자이지만 여주인공의 재력에는 못 미친다. 다들 부러운 눈길과 어조로 잘 보이려 애쓰고.

엄마들 시선처럼 관객들도 과연 얼마나 잘 살까 싶을 터다.

그런 여주인공이 막상 재벌가에 들어가면 삭막한 집안 풍경에 숨 막혀 한다.

이어지는 아침 식사 장면.

“액션.”

회장님 내외. 장남 가족. 차남 가족.

그리고 도우미 아주머니.

8명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어른도 아이도 말 한마디 없이 밥만 먹고 있다.

차남 부부의 딸이 밥 먹기 싫은 내색을 한다. 여주인공 서연은 회장님 내외인 시부모 눈치를 보고.

회장님이 근엄하게 말했다.

“밥 먹기 싫으면 먹지 마라.”

“죄송해요, 아버님. 아이가 저 몰래 아이스크림을 몇 개 먹었나 봐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며칠 동안 졸라대서요.”

“아침 식전부터 아이스크림을 먹어?”

“어제 사둔 게 있어서…….”

“애가 그런 게 먹고 싶다고 하거든 전문가를 불러. 길거리에서 불량식품 사 먹이지 말고.”

“죄송합니다.”

차남이 수저를 놓았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마저 먹고 가거라.”

“회장님. 9시에 긴급회의가 있습니다.”

“그래도!”

차남이 일어나려다 앉았다.

차남을 빤히 쳐다보는 회장.

장남 내외는 입가에 미소를 담고 있고, 형제의 13살 아들과 10살 딸만 잔뜩 움츠러들었다.

회장이 말했다.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이냐?”

“죄송합니다.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왜 속이 안 좋아? 자네가 접대라도 했어?”

“친구를 만나서 술을 좀 했습니다.”

“쯔쯧. 세상에 친구란 것이 있더냐.”

“고교 동창입니다.”

“네놈에게 접근하는 놈들은 더러운 속을 감추고 접근한 게야. 그 나이가 되도록 친구 운운이라니.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니 회사 매출이 그따위지. 모자란 놈 같으니.”

“죄송합니다.”

다시 말없이 밥을 먹는 회장 일가.

“컷.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찍을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영화는 웬만하면 시간 순서대로 찍기로 했다.

강원도와 서울을 왔다갔다해야 하는데, 미묘한 감정 흐름 연결 때문에 비효율적이라도 그렇게 하는 게 나았다.

서연이 우아한 모습으로 내게 왔다.

온갖 명품으로 치장했더니 귀부인 다 됐다.

자태에서 귀족의 품격도 느껴지고.

“복귀 소감이 어때?”

“아직 모르겠어. 좀 떨리긴 하네.”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신 분이 왜 이러셔.”

“놀리지 마. 사모님 역할 쉽지 않아.”

아내와 함께 내 차로 갔다.

오늘이 첫 촬영이었다.

다음 날 촬영은 강남.

직원들이 배꼽을 잡았던 차남의 화장실 씬이다.

집으로 갈까. 회사 전용 화장실로 갈까.

그런데 너무도 급하다. 방심하면 샐 것 같다.

결국 카페에 들어온 차남.

스태프들이 분무기로 차남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게 뿌렸다. 어떻게 감정 몰입을 하는 것인지, 실제로 설사 사태가 난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차남 역의 조승운이 촬영 위치에 대기했다.

촬영하기도 전에 이미 완벽하게 몰입했다.

콜이 지나가고.

“액션.”

화장실 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차남. 화장실 칸에 들어가야 하는데 불결해서 들어가질 못한다. 맨손으로 노크를 하려다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을 꺼낸 뒤 손에 말아 쥐고 똑똑.

누가 있다.

엉덩이를 한껏 오므린 채 다른 칸으로 가는 차남.

다시 똑똑. 아무도 없다.

손수건으로 문을 잡았다. 차마 들어갈 수가 없다.

그때 움찔하며 질린 얼굴을 한다.

설사가 조금 샜다.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고.

카메라는 화장실 칸 위로 이동한다.

화장실 안에 들어와서도 어쩔 줄을 모르는 차남.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변기를 흉물 보듯 살펴본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주섬주섬 물수건을 꺼내 변기를 닦기 시작한다. 그러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벽에 손을 대고 참는다. 화장실 벽에 손을 댔다는 걸 알고 깜짝 놀라 손을 뗀다.

그 순간 또 삐직- 설사가 샌다.

결국 허겁지겁 바지를 내리고 변기 위에 앉으려다 우뚝 멈춘다. 차마 앉지는 못하고 그 자세 그대로.

푸타타타탁-

물똥이 사방으로 튄다.

자신의 허벅지와 엉덩이까지 온통 똥물.

좀 전보다 더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컷!”

바로 다음 컷.

차남이 팬티를 벗고 바지를 다시 입는다. 쥐꼬리를 잡듯 똥 싼 팬티를 엄지와 검지로 들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간다.

그다음 컷.

카페에 앉아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는 차남.

다리를 꼰 채 아주 여유로운 모습.

여자 손님들이 힐끔거린다.

바쁜 일과 중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긴 사람처럼 일어나 유유히 커피점에서 나간다. 그런데 바지 엉덩이 부분이 젖었다. 여자 손님들이 그 모습을 보며 입을 가리고 웃고.

“컷! 오케이!”

“바로 다음 컷 갑니다!”

카페 근처 주차장.

차남이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온다.

그의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차남의 뒷모습을 보고 킥킥대고 웃고 있고.

주차된 벤틀리까지 온 차남.

차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표정이 멍해진다.

오늘 자신의 행동이 너무도 비참하고 부끄럽다.

하늘은 왜 이런 고난을 주는가.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간다.

평생을 우아하고 고상하게 살아온 차남이다. 화장실에서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수치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그 화장실 옆 칸에 누가 있었던 건 아니겠지.

팬티를 빨 때 누가 본 건 아니겠지.

이런 생각이 담긴 얼굴로 눈알을 굴린다.

차남이 이상한 눈치를 보는 버릇이 이때부터 생긴다.

대체 누구 눈치를 보는 건지.

표정이 너무 웃긴다.

“컷! 아주 좋아요.”

“하하하하!”

스태프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화장실에서 난리를 치던 때보다 지금 표정이 더 웃긴다.

화장실 사건 이후 차남의 모든 행동과 표정이 웃긴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차남은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고, 우린 그걸 구경하는 느낌. 혹은 차남이 주인공인 ‘트루먼 쇼’를 보는 것 같은.

글로 보는 것과 달리 사람이 표정으로 연기하니 훨씬 더 웃긴다. 뮤지컬 스타이기도 한 조승운 배우의 연기력이 정말 기가 막히다.

이후 차남 씬이 나올 때도 그랬다.

스태프들이 컷만 끝나면 웃었다. 조승운은 분명 평범한 연기를 하고 있는데 모든 행동이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집에서 몰래 그 문제의 ‘팬티’를 들고 낙담한 표정을 짓다가 서연이 들어가자 화들짝 놀라는 장면도 그렇고. 괜히 아내한테 성질을 내다가 또 눈치를 보고.

그쯤 되자 차남이 눈알만 굴려도 웃음이 나왔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어째 누가 본 것 같은 느낌.

차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장남도 업무를 보거나 쉴 때.

문득 뒤를 본다. 옆이나 먼 곳을 보기도 하고.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방에는 아무도 없다.

귀신이 들어왔나 싶기도 하고.

회장님도 테라스에서 파이프 담배를 태우면서 수상한 느낌을 받는다. 누가 지켜보는 듯한 기분. 그 근엄하고 무섭기 짝이 없는 회장님이 십자가 묵주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백윤석 배우의 능청맞은 연기에 한 번 웃음이 나고, 회장님의 성격과 상반된 행동에 또 웃음이 나고. 그 지켜보는 존재라는 것이 실은 관객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웃음이 나고.

지켜본다는 느낌.

그것이 이 영화의 맥점이다.

재벌가의 허영. 위선. 민낯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물론 인물들은 매우 진지하다.

떳떳한 사람은 여주인공과 양아치뿐.

양아치는 여주인공에 구원자로 온 것이고.

여주인공은 그를 ‘믿음’으로 따른다.

양아치는 또한 ‘신’의 은유고.

영화 속에서 누가 지켜보는 느낌은 신이 보고 있다는 뉘앙스다. 양아치가 곧 이 가문에 올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고. 하여 양아치는 이 가짜와 위선투성이 집안과 사람들의 질서를 타파하고 자유와 진실을 의미하는 기행을 벌인다.

또한 양아치가 이 가문의 후계자 후보가 된다는 것은. 관객에게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양아치의 시선이 곧 관객의 시선이다.

하여 이 영화에서 관객은 신이 된다.

그래서 지켜보는 시점이 되고, 영화 속 인물들은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여주와 차남의 연기.

서연이 숨겨 놓은 차남의 ‘팬티’를 꺼내 보인다.

씻고 들어와서 팬티를 보고 흠칫 놀라는 차남.

“이 팬티. 왜 옷장에 숨겨놨죠?”

“뭐하는 짓이야. 남의 속옷을 가지고.”

“왜 화를 내죠?”

“내가 무슨! 조용히 해. 회장님 들으신다.”

“언성을 높인 건 당신이에요. 말해봐요. 이 팬티를 왜 숨겨 놨죠?”

“이리 내.”

차남이 팬티를 낚아채려 하자 서연이 뒤로 감춘다.

더욱 당황하는 차남.

서연이 다시 몰아붙였다.

“말해봐요. 왜 팬티를 숨겨 놓은 거죠?”

“숨겨 놓다니. 아주머니가 세탁하려다 빠트린 거야.”

“이 팬티에서 낯선 비누 냄새가 나네요. 누가 빨아준 건가요? 그게 누구죠?”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왜 당황하는 거예요? 여자가 빨아준 거라서?”

“여자가 빨아주다니! 천박하게.”

스태프들이 입을 틀어막고 웃고 있다.

서연은 태연한 얼굴로 연기를 이어간다.

“누구죠? 술집 여자인가요? 아니면 비서?”

“이리 안 내놔?”

차남이 급히 팬티를 낚아채곤 또 눈알을 굴린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 이혼하려고 수작을 부리는데… 어림없는 짓이야. 나가려면 수연이 두고 혼자 나가. 위자료는 넉넉하게 주지.”

“왜 그렇게 내 눈치를 보죠?”

“내가 왜 당신 눈치를 봐?”

“당신 바람피우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죠? 계속 그렇게 해요. 법정에서 내가 유리할 테니까. 수연이는 반드시 내가 데리고 갈 거야.”

“얼마든지 해 보라고.”

“그런데… 당신.”

“또 뭐?”

서연이 차남이 든 팬티를 보았다.

“당신 혹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교양 없이!”

차남이 부리나케 문을 열었다.

서연이 말했다.

“당신 설마… 바지에 똥 쌌어요?”

“별 소릴 다 하는군. 하하하.”

웃으며 방에서 나오는 차남.

문을 닫고 난 뒤 멍한 얼굴로 정면을 본다.

화장실 사건 이후로 빈번하게 찾아오는 공허 타임.

누가 보는 사람 없나 눈알이 돌아간다.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영화제 참석 관계로 오늘은 여기까지 찍을게요!”

스태프들이 웃는 얼굴로 촬영 정리를 시작했다.

이 영화 찍으면서 늘 웃는 얼굴이다.

조승운 배우가 일어서며 말했다.

“현장이 정말 재밌네요. 연기 톤이 튀지는 않죠?”

“잘하고 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네. 서울에서 봐요.”

“그래요.

서연이 나왔다.

그녀도 환하게 웃고 있다.

“조 선배 때문에 웃음 참느라 배가 아파.”

“표정을 안 보면 되지.”

“그러면 몰입이 안 돼. 근데 조 선배님은 나랑 붙을 때도 자꾸 눈치를 봐. 그게 웃겨 죽겠어. 본인도 너무 몰입했다는 걸 모르시는 거 같아.”

“본인 캐릭터가 재미있는 거지.”

“시나리오에도 캐릭터가 생생했는데, 선배님이 연기하는 걸 보니까 훨씬 더 사네. 아마 영화 속 인물이 관객 눈치 보는 건 처음일 거야.”

아내에게도 관객이 아닌 신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창작이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감독도 신이다.

정확히는 인물들이 내 눈치는 보는 거지.

내가 만든 영화니까.

* * *

나와 아내 서연이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밴을 타고 갔다.

청룡영화제에 부부가 초대받았다.

나는 후보로, 아내는 시상자로.

밴이 멈추자 차 문이 열렸다.

수없이 많은 플래시가 터진다.

진행 스태프들이 잠시 대기해달라고 손짓한다.

“와-”

“최신성 감독님!”

“서연 언니! 예뻐요!”

밴의 뒤를 따라온 포르셰가 멈추고 오기성이 내렸다. 부자들 씹어먹는 영화 찍어 놓고 저런 차를 타고 오면 어쩌자는 건지.

오기성은 영화제 참석을 잘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제 주최 측도 상을 안 줬고.

웃으면서 걸어오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나다를까.

쿠당탕-

과하게 팬들을 의식하다가 제 발에 걸려 자빠졌다.

오 감독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은 시뻘게지고.

당황함을 애써 감춘 오 감독과 나란히 걸었다.

포토 라인에서 서서 사진을 찍었다.

“감독님! 수상을 기대하십니까?”

“감독님! 작품상 후보에 오른 소감이 어떠세요?”

“한마디 해주십시오!”

오 감독이 내 얼굴만 보며 웃고 있다.

이 인간이 긴장해서 정신이 나갔나.

오기성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 나한테 묻는 거였어?”

둘 다 감독이다 보니.

오기성이 급히 말했다.

“아, 근데 뭐라고 하셨죠?”

“11개 부분 후보에 올랐는데 수상을 기대하세요?”

“참석에 의의를 두려고 합니다.”

진심이다. 오기성은 감독상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참석했다. 스릴러로 천만 관객이 든 것도 믿기 어려운데, 작품상까지는 어렵다고 봤다.

사진 촬영을 끝내고 시상식장으로 들어갔다.

오기성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만했다.

영화 ‘레저’의 영향력이 내게 더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수많은 영화인이 앉아 있었다.

선배 영화인들에게 먼저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내게 인사 오는 후배들도 많고.

내가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알았나 싶다.

작가 그룹 ‘라이터스’의 작가가 4명이나 왔다. 이젠 다들 특급 작가들이다. 조상미 감독도 와 있고. 그녀는 작년에 베니스에 다녀왔다. 지금은 박찬익 감독님 제작사의 작품을 찍는다.

내 작가 입봉작을 찍은 엄아인과 이유현도 와 있고. 오천일 감독도 왔다. 조상미 감독과 함께 넷이서 포옹했다.

다들 이게 얼마만 인지.

멜로디를 함께 했던 황정우 배우. 플랜을 함께 한 송강석 배우. 샌드위치를 찍은 임시환. 이동원을 함께 한 한동원. 아비도의 주인공 김강헌. 그리고 갓 필드를 찍은 건하까지.

공교롭게도 내 작품에 출연한 배우가 모두 왔다.

이들 중 3명만 남우주연상 경쟁자다.

나머지는 시상하러 왔고.

다들 자리에 앉았다.

곧 생방송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가수들 공연을 이어지고 가슴 뭉클한 한국 영화 역사에 대한 영상이 나왔다. 단역 배우들의 뮤지컬 공연도 있고.

신인과 조연, 촬영 등의 수상이 이어졌다.

후보들이 다들 쟁쟁했다.

레저를 찍은 이들이 수시로 시상 무대로 올랐다.

남우조연상. 편집상. 최다 관객상. 촬영조명상.

그리고 각본상과 남우주연상까지.

각본상은 나와 오기성이 함께 올라가서 받았다.

아쉽게도 감독상은 못 받았다.

조상미 감독이 받아서 기분 좋기는 했다만.

오기성도 무척 아쉬워하고.

그리하여 마지막 순서.

시상자는 지난해 작품상 주연배우인, 황정우였다.

그리고 아내 서연이다.

후보작을 본 뒤 황정우 배우가 입을 뗐다.

“다섯 편의 작품상 후보를 보셨습니다. 다들 쟁쟁한 작품들이네요. 어떤 작품을 받아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습니다. 긴장을 웃음으로 모면하시려는 감독님과 제작자분들이 보입니다. 특히 오기성 감독님. 감독상을 놓쳤을 때 많이 아쉬워하시던데. 좀 웃어 주세요. 생방송입니다.”

“하하하하.”

“서연 씨는 어떤 작품이 받기를 원하세요?”

“다 훌륭한 작품이라, 꼽기가 어렵네요. 제 마음속에는 모든 영화가 작품상입니다.”

“물어본 제가 바봅니다.”

“하하하하!”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황 배우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자, 지금부터 작품상 후보를 발표하겠습니다. 서연 씨.”

아내가 시상 봉투를 받았다.

그녀가 화사한 미소를 보인 뒤.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제45회 청룡영화제 작품상…”

서연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축하드립니다, 레저!”

“와아아!”

함성과 꽃가루가 터져 나왔다.

수많은 영화인이 기립하여 박수를 보냈다.

오기성이 엉거주춤 일어나 날 보았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런 오 감독을 힘껏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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