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시리즈 대단원을 향하여 (52/56)

제4장 시리즈 대단원을 향하여

제목 ‘레저’

오기성 감독의 신작 제목이다.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소유한 재산으로 소비만 하는 유한계급의 레저 클래스에서 따왔다. 또한 쾌락을 위해 벌이는 살인도 의미한다.

회사 콘텐츠 팀이 이 시나리오를 읽었다.

다들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충격적이다.’

영화 내용도 물론 그렇다. 콘텐츠 팀원들이 의외의 충격을 받은 것은 자신들이 영화 속 주인공에게 동화되어 살인에 전율을 느끼고 동조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후반 때까지는 이래도 되는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한데 마지막에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 했다. 긴 꿈을 꾼 듯.

정말 다 꿈이었나 싶지만 세상은 상류층 살인마 소식으로 시끄럽다. 해서 주인공이 살인마 소식을 듣고 망상을 한 것인지, 실제로 그가 범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팀장이 물어왔다.

“주인공이 범인인 건 맞죠?”

“맞습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열린 결말로 가기로 했어요.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주인공이 외국 휴양지에서 선탠하는 장면은 나른한 화면으로 찍을 겁니다. 꿈을 꾼 듯. 혹은 스스로 범죄를 저지른 기억을 지우는 듯한 모습으로요.”

“내용도, 살인에 동조하는 느낌이 드는 점도 그렇고. 말이 좀 나올 것 같습니다. 평가도 엇갈릴 것 같고요.”

“죄책감이나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죄책감은 딱히 들지 않지만, 살인에 쾌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좀 위험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런 사람인가 싶기도 했고요.”

한 직원이 말했다.

“저는 오히려 그 점이 이 영화의 특성이라고 봐요.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의 행동과 광기에 대해선 동조하지도, 동의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더 나쁜 놈들을 처단할 때는 짜릿하더라고요. 두 부분에서 구분되는 점이 있었어요.”

“저도 그랬습니다.”

“저도요. 제3자로 주인공을 지켜보다가 누가 봐도 정말 나쁜 놈을 응징할 때는 쾌감이 느껴지긴 했어요.”

수혁이가 거들었다.

“두 지점이 분리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악당이라서 나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지켜봅니다. 그러다 더 나쁜 놈을 처단할 때는 주인공 입장이 아닌, 평범한 대중의 입장에서 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처단해주길 바라는데 주인공이 그 일을 해주는 거죠.”

“수혁이 말이 맞습니다. 쾌감이 느껴진 것은 주인공이 나쁜 놈을 죽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쁜 놈을 처단한다는 점에서 나오는 겁니다.”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이 다시 말했다.

“어쨌든 묘하게 균형감이 있어요. 감정이입이 되다가도 자연스럽게 지켜보게 되고, 쾌감이 있다가도 이래도 되나 싶고. 살인마를 보는데도 연민이 생기고. 이해하기 어려울 듯싶은데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고.”

수혁이가 웃으며 말했다.

“올해 최고의 문제작이 될 것은 확실합니다. 팀장님 말대로 균형감이 너무도 절묘해서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네요. 평론가들도 아마 골치가 아플 겁니다. 어느 한 부분을 지적하기엔 그 지적과 안 맞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관객들은 자기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고요.”

“너도 정확히 분석이 어려워?”

“네. 모든 부분에서 딱 가운데에 있는 영화 같아요. 상업과 예술. 감정이입과 관찰자 시선. 쾌감과 죄책감. 현실과 꿈.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논쟁이 일어날 것은 뻔하고요.”

“흥행성은?”

“예술영화로서도 훌륭하고, 상업영화로서도 충분히 통한다고 봐요. 정말 묘하게 줄타기를 해요. 사고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는 보통사람의 마음을 대리만족시키는 점이 있어요. 그게 흥행성이죠,”

팀장도 웃으며 말했다.

“악당이 주인공인 게임 같다고 보면 될 것 같네요. 이 작품이 빛나는 건 그 부분에 기막힌 밸런스가 있다는 점이에요. 체포되거나 죽었다면 아마 찝찝함이 남았을 거예요. 뻔한 결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완전범죄 아닙니까?”

“맞아요. 다 읽고 난 뒤에 안도감이 들더라고요.”

“저도 그랬어요. 주인공이 안 잡혀서 그렇다기보다는, 저 스스로 안심했다고 할까요. 저도 제 마음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직원의 말에 다들 웃었다.

나와 오 감독이 뜻을 합쳐 접점을 찾았다.

그것이 영화에서 묘한 느낌과 밸런스를 준 것 같다.

그리하여 제작 준비를 시작했다.

아웃사이더 픽쳐스가 제작 본부가 되고, 로큐 스태프들이 그쪽에 가서 프리에 들어갔다. 오기성이 감독이니 그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오 감독 작품을 먼저 제작하고 개봉한 후에 내 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다. 오기성이 내 영화 비주얼 디렉터를 맡아야 하기에 순서가 그렇게 되어야 했다.

만약 내 영화를 먼저 제작하면 오기성의 주장이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한데 ‘레저’가 흥행하고 대중의 호응이 이전 본인 작품과 달라진다면 내 작품에 임하는 그의 태도도 달라질 터다. 이는 내 작품에 도움도 되고.

또 모르지.

나는 오 감독 작품의 스토리 디렉터로.

오 감독은 내 작품의 비주얼 디렉터로 고정될지.

내 작품 프리도 천천히 들어가기로 했다.

레저가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에 들어가면.

그때 오 감독이 내 작품 촬영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제 블루드 워 3편 시나리오 작업을 해야 했다.

원래 네오스타에 시나리오를 넘겨주고 그쪽에서 프리에 들어가면 한국영화를 찍을 예정이었다. 한국 영화 후반 작업쯤이면 블루드 워 3편도 촬영 준비가 되었을 테고.

그러니 블루드 워 3편을 써야 할 시기이긴 했다.

시나리오를 연달아 세 편을 쓰는 것도 처음이다.

오 감독 작품과 협업하고, 내 영화 제작이 딜레이 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일이 엉켰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코어가 전달하는 무엇이다.

이 시기에 세 작품을 동시에 한다는 것.

미래와 연결된 코어는 분명히 뭔가 알고 있다.

어떤 강렬함이 직감 형태로 내게 전달된다.

협업 2부작과 블루드 워 3편의 연관성.

지금으로선 전혀 알 수가 없다.

실제로 연관이 없을 수도 있고.

미국에 전화를 걸었다.

“이 대표님. 잘 지내시죠?”

-네. 한국 영화 안 들어가셨다면서요?

“한 6개월 연기했습니다. 블루드 워 3편 프리를 시작할까 해서요.”

-저희야 좋죠. 권혁민 실장 보고는 받고 계시죠?

“네. 뭐 새로운 거 있어요?”

-글로벌 배급팀을 구성할까 해요. 우리도 이제 해외 배급사를 세워나가야죠.

“혁민이한테 들었습니다. 진행하세요. 무리하시지 마시고, 주요 국가부터 하나씩 설립해야 합니다. 자금은 충분하죠?”

-그럼요. 현재 두 작품 준비하고 있는데 그래도 2억 달러 이상 자금이 있습니다. 두 개별 히어로 영화 개봉 전에 네오스타 첫 히어로 리그 영화를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죠. 네오스타 첫 어벤져스겠네요.”

-우리 회사의 어벤져스는 뭐가 좋을까요?

이전부터 생각해둔 게 있었다.

“마스터스 어떤가요?”

-Masters 말입니까?

“Marsters입니다. 마스와 마스터.”

-화성의 영웅이라는 뜻이 되겠네요?

“네. 어감이 좋아서요.”

-저도 느낌이 좋네요. 화성 저항군이니까요.

“확정하진 마시고 천천히 결정하도록 하죠.”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예. 감독님.

전화를 끊었다.

바로 노트북에 저장된 블루드 워 3편의 시놉을 열었다.

2편에서 화성저항군이 외계인의 함대를 저지하고 전투에서 이겼다. 그로부터 3년이 지닌 시점.

화성 저항군은 3년 동안 지구 탈환 준비를 하고, 액셀을 중심으로 13명의 히어로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네오스타 스튜디오 ‘마스터스’의 시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힌트를 얻은 쓴 3부작이다.

스타워즈 시리즈 영향도 받았고.

1부 험난한 여정과 영웅의 탄생.

2부 압제의 해방과 전쟁의 서막.

3부 저항군의 반격과 새로운 희망.

규모가 점점 커지는 방식이다.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기에 전쟁 씬만큼은 압도적이다.

반지의 제왕 3편, 왕의 귀환에서 보여준 역사에 남을 대전투를 지구와 화성 그리고 우주에서 벌인다.

영화 전반 1시간까지는 전쟁 준비 상황과 각 캐릭터 및 배경 설명. 그리고 지구에 남은 영웅 13인의 전투와 우주 교전이 교차로 벌어진다.

영화 후반 1시간은 전체가 전투 장면이다.

지구에선 13명과 초인 군단 30만 명이 격돌한다.

저항군과 개조 전사 100만 명의 싸움도 겹쳐지고.

이 전투는 육상 전쟁이다.

우주에선 60대의 외계 함대와 31대의 화성저항군 함대가 치열한 우주 교전을 벌인다. 이 전쟁은 화성과 지구의 1차 우주대전이었고, 약 30년 뒤 길고 긴 2차 우주대전이 벌어진다.

시리즈 3편에서 마침내 외계인을 전멸시킨다. 전쟁도 끝나는가 했지만 아니었다. 부역자들과 개조 전사들은 이미 이전의 인류가 아니었다. 외계인의 비밀 기술을 그대로 흡수한 그들은 신인류라 자처하며 지구를 지배할 야욕을 드러낸다.

외계인의 기술을 모두 흡수한 신인류.

그들은 매우 빠르게 안티 히어로를 육성하며 스스로 초인이 되어갔다. 인류의 적은 결국 인류였던 것이다.

이 두 종의 인류가 싸우는 것이 시리즈 이후의 이야기다.

화성인과 지구인은 인류의 적자를 놓고 다시 전쟁을 벌이며 그 전쟁은 백 년이나 걸린다.

이전에 삼국지식 전략전술이 들어가는 영화 배경이 이 시대의 이야기다. 드라마 1시즌 종영을 앞둔 개척선단 이야기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개척 선단은 지구에서도 살기 어렵고, 화성도 식량 문제로 점점 어려워지자 독립을 선언하고 선단을 꾸려 우주로 나아갔던 거였다. 그중에는 배신자 무리도 있었고.

결국 모든 것은 인류의 역사와 같다.

권력과 영토. 생존과 식량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 기반이 없는 세력은 신세계를 개척하는 거고.

3편 시놉시스와 2편까지의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촬영 때 추가한 내용만 더해서 시나리오를 완성하면 되었다. 몇 년 동안 쌓인 아이디어도 추가해 넣으면 되고.

단, 내가 우주 교전이나 함대 운용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자료 조사를 좀 해야 했다. 우주 교전은 미사일과 레이더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했다. 함대 전은 해군과 공군이 합쳐진 형태라 그와 관련한 지식도 있어야 했고.

해서 로큐 작가들과 머리를 맞댔다.

수혁이를 비롯한 작가 6명이 매일 회의실에 모였다.

젊은 작가들이 저마다 지식을 자랑했다.

“우주 함대전이지만 중세 해전 느낌을 주는 게 영화적으로 맞아요. 멀리서 미사일 쏘고 회피 기동하고 그러면 별로 재미가 없죠.”

“그럼 현실성이 좀 부족하지 않을까요? 미사일을 쏘는 함대가 코앞에서 포를 펑펑 쏘는 건 좀 그런데.”

“야, 외계인이 언제부터 미사일을 썼다고.”

“2편에선 미사일 쏘잖아요. 부역자들이 외계인 우주선을 개조한 것이기는 하지만. 3편의 지구인은 우주선을 더 효율적으로 개조해서 미사일과 레이더 성능이 좋아졌을 걸요?”

내가 나섰다.

“미사일 비축분이 양측 다 없는 것으로 해도 돼.”

“그래도 돼요?”

“2편 이후 3년이 지났어. 그동안 전투가 계속 있었고. 기존 인류가 생산한 미사일을 거진 다 소진했다고 설명하면 돼. 내가 봐도 현대전처럼 미사일만 쏴대면 재미없다.”

“그럼 외계인 고유의 포를 쓰면 되는 거네요.”

“그렇지. 미사일은 아껴두는 무장이고, 외계인의 에너지 포를 쏘면 중세 해전 느낌이 좀 날 거다. 그 에너지 포 출력도 높이지 못해. 동력과 같은 에너지라서.”

“주포 에너지는 어느 정도죠?”

“외계인 함선 주포 출력을 100% 올리면 한 발에 함이 반파된다. 세 발 맞으면 격침. 30% 출력으로 15발 정도는 맞아야 격침되는 것으로 해. 10초가량 출력을 높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설정도 넣고.”

작가들이 메모했다.

한 작가가 물었다.

“방어막 같은 게 있는 건가요?”

“에너지 파동이 함선을 에워싼 형태. 30% 출력 포에 맞으면 30% 깎인다고 보면 돼. 방어막이 사라진 후 포를 맞으면 함선 일부가 파괴되고. 반파는 아니야. 격실 차단으로 산소유출만 막으면 되니까.”

“반파는 기동이 어려운 상태인가요?”

“배로 치면 침수 상태야. 엔진이 멈췄거나 산소 과다유출로 전투 불능 상태가 되거나.”

“반파가 곧 침몰이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격침은 두 동강 나거나 폭발하는 거고.”

작가들이 같은 정보를 공유해야 오류가 안 난다.

수혁이가 말했다.

“아까 민철이가 중세 해전 이야기를 했는데, 중세 때 해적이 상선 약탈할 때 배를 바짝 붙인 뒤에 줄을 잡고 배를 건너가잖아요. 함대 교전에 넣으면 재밌을 것 같은데.”

“특수강습부대를 만들면 되죠. 교전 중에 작은 수송기를 타고 적함 갑판에 강습한 뒤 내부로 파고 들어가는 식으로요.”

“오, 그거 괜찮네.”

“나도 좋다. 함선 한 척이 귀한 시대라 파괴보다는 탈취가 낫겠지. 저항군도 그렇게 함선을 하나씩 가지게 된 거고.”

나도 메모했다.

우주 교전에서도 다양한 그림이 나와야 한다.

지구에선 액셀이 엄청나게 많은 군단과 싸우고, 우주에선 온갖 전략전술이 나온다.

“이번 시리즈 이후에 만들어질 영화도 염두에 둬야 돼. 1차 우주대전 때 있었던 전투가 함대 교전의 전략전술 교본으로 남는다고 보면 돼. 다양한 교전 형태와 기발한 전략 전술을 좀 짜야 한다.”

수혁이가 말했다.

“감독님이 쓰신 시놉을 토대로 각자 조사를 좀 해 와. 민철이 넌 해전 역사와 전술. 은혁인 현대 공중전과 미사일 체계 같은 거. 인호는 친구 동생이 해군 장교 전역했다고 했지?”

“예. 잘하면 기밀까지도 알아낼 수 있어요.”

“실제 함에서 쓰는 용어나 장비 등은 우주 함선에 응용할 거야. 그렇게 말하고 물어보면 알아서 설명해줄 거다.”

“알겠습니다.”

내가 정리했다.

“함대 교전은 멀리서 미사일 몇 발 쏜 뒤 접근해서 빔을 발사하는 교전 방식이야. 외계인 전투기는 주로 빔을 쓰고, 화성저항군이 개조하거나 새로 생산한 우주선은 총탄을 주로 쓴다. 빔만 쏘는 것보다는 타격감이 좀 있을 거야.”

“그게 좋네요. 세계 대전 때 항공 교전 느낌도 나고.”

“미래형 전투와 아날로그 전투를 섞을 거지. 기계가 싸우는 게 아닌 사람이 싸우는 느낌으로. 다들 어떤 건지 알겠지?”

“예. 영화적 재미를 위한 전투를 만든다.”

“그래.”

회의를 끝내고 일어났다.

작가들이 조사도 하고 씬도 만들어 갈 터다.

여러 사람 머리를 합치는 게 전투씬에선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나는 동안.

구성을 끝냈다.

우주 교전에 대한 회의를 워낙 많이 했다. 가장 좋은 장면. 가장 기발하고 참신한 장면만 취합해서 시나리오에 넣기로 했다. 액셀과 영웅들의 전투도 작가들 아이디어를 모았다.

1시간 내내 전투만 나온다.

매 씬이 달라야 하고, 압도적인 전투씬을 선보일 생각이었다. 반지의 제왕 마지막 평원 전투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듯 내 영화에선 다른 방식으로 놀라움을 줄 작정이다.

지구에선 13명의 영웅과 100만에 이르는 개조 전사 및 안티 히어로가 맞붙는다. 물량과 규모로 압도한다. 지구에서의 액션은 통쾌하고 시원시원하다.

우주에선 숨 막히게 치열한 교전을 보여준다. 보통 사람의 전투이며 인간적이고 스릴이 넘친다. 상대 함대보다 열세이기에 아슬아슬하다. 화성 기지에 적들이 침투할 때는 긴장감이 매우 높아진다. 이런 싸움이 계속 간다.

의도적인 완급조절은 없다.

지구에서 액셀이 보일 장면들이 쉬어가는 타이밍이다. 액셀 장면에선 마음이 조금 놓이기 때문에 저절로 이완이 된다. 따로 강약과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없었다.

감정을 완전히 풀지 않고 쭉 가버리기에 전투가 절정에 이르면 긴장도 극에 이른다. 이 엄청난 전투를 끝내고 10분가량은 시리즈 전체를 마무리한다. 말 그대로 대단원.

블루드 워는 매 편 색다른 영화적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 마지막 편에선 뭐가 나올지 아직 알 수 없었다. 2편처럼 내가 저항군의 일원이 되어 인류를 지켜냈다는 느낌이 그대로 들 것 같기도 하고.

액션과 감정 위주로 구성을 정리한 뒤.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했다.

영화 제작은 안 하고 시나리오만 연달아 3편을 쓰니 마음은 편했다. 작가일 땐 비즈니스를 고려하진 않으니까.

* * *

4일에 걸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1편과 2편이 3편을 위해 있었다는 느낌이다.

전투만으로 시리즈 전작들을 훌쩍 넘어섰다.

이 3편 때문에 1편과 2편을 만들었구나 싶을 정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2편 때는 위기감이 상당히 컸는데 3편은 박진감과 긴장감의 연속이다. CG도 절반 이상이고.

우리 작가진이 구성한 우주 교전과 지구의 대규모 전투를 어떻게 CG로 구현할지 걱정이 될 지경이다. 기존에 없었던 장면이 많고 창의적인 전략 전술도 많다.

내 대표작이 코미디 영화가 될 거라는 느낌은 여전히 강하지만, 2편 라스트데이보다는 잘 나왔다. 감정 흐름도 아주 좋고. 솔직히 비교 평가할 영화가 없을 것 같다.

3편 제목은 ‘다가오는 여명.’

이 시나리오를 로큐 자막 팀에 번역을 맡겼다.

세 작품을 쓰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이러는 건지.

블루드 워는 시리즈 삼부작을 끝냈으니 무슨 일이 있을 것 같긴 하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보니.

서양에서 어떤 ‘업적’을 진행하면 그 일을 끝내야 제대로 된 평가를 해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 딱히 뭘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아니라면 흥행 신기록이라도 나오는 걸까.

며칠을 쉬고 이동욱 대표에게 영문 스크립트를 보냈다.

바로 대답이 안 오면 재미없다는 의미다.

이어 펀딩 사이트에 공지를 냈다.

지난 이벤트에 참가하지 못한 이들이 이번 펀딩만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펀딩 규모도 역대 최고고.

아니나다를까.

난리가 났다.

[와!! 드디어 펀딩 한다!]

[이번 펀딩 150억 규모랍니다!]

[노노. 300억임. 지난번 게임 이벤트 때 절반 채웠음. 그때 최 감독님 방송 못 본 게 지금도 한이 맺힘. ㅋ]

[저도요. 그날 친구들이랑 술 마시느라.]

[전 그날 선착순에 밀려서 밖에서 구명만 했음. ㅠㅠ]

[저도 구명만. 얼마나 배가 아프던지. ㅎㅎ]

[그래서 펀딩 사이트는 매일 들어와야 함.]

[이번에도 펀딩 방법은 같겠죠?]

[네. 따로 공지 안 한 걸 보면 같을 거예요.]

[아, 이번엔 꼭 돼야 할 텐데.]

재밌는 부분도 있었다.

[이미 펀딩된 영화배우가 인사 올립니다.]

[영화배우요? 누군데요?]

[391번 참가자.]

[ㅋㅋㅋ 영화배우래.]

[영화배우 맞죠. 조회수 1억 넘는 영화. ㅋ]

[저도 영화배우임. 973번 참가자. ㅋㅋ]

[나도 영화배우. 6등 했었죠.]

[아, 그 뚱뚱한 아저씨? 여자들한테 껄떡대던?]

[맞다! 그 아재!]

[껄떡대다뇨? 다 설정이고, 연기입니다.]

[껄떡대는 메소드 연기. ㅋㅋ]

[님들 좋겠다. 이미 펀딩되어서.]

[고맙습니다. 여러분도 화이팅 바랍니다.]

[저도 동지로서 구경 왔어요. ^^]

댓글을 대충 보고 글을 올렸다.

[최신성입니다. 많이들 모이셨군요. 이번 영화 펀딩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영화는…]

글을 올린 뒤 읽어보려고 하는데 사라지고 없다.

어디 갔나 싶어 찾아보니 한참 아래로 내려갔다.

너무 많은 글이 동시에 올라오는 바람에.

[우왁! 오셨다!]

[감독님, 오셨다!]

[만세! 최 감독님 등판!]

[끝판왕 납시오~ㅎㅎㅎ]

[감독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왔구나! 우리 감독님이 왔어!]

[에헤라디야~~]

[다들 댓글이 왜 이래? ㅋㅋㅋㅋ]

절로 웃음이 났다.

다들 잘 먹고 잘살면 얼마나 좋을까.

마침 이동욱 대표에게서도 문자가 왔다.

막 시나리오를 본 듯.

[감독님! 만세! ㅎㅎㅎ]

이 대표도 이 사이트 댓글을 보나?

이렇게 기뻐하는 이동욱 대표를 처음 본다.

어째 2편이 흥행했을 때보다 더 신이 났다.

문자를 보내고도 모자라 전화까지 했다.

“왜요?”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혹시나 3편에서 영화가 무너지면 어쩌나 걱정 많았거든요. 그런데 3편이 1편, 2편을 뛰어넘어 버리네요. 중후반에 대규모 전투 장면 보다가 너무 좋아서 눈물까지 났어요.

“그렇게 걱정이 많으셨어요?”

-시리즈니까요. 1편이 흥행한 덕에 무사히 마무리하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3편이 정말 잘 나왔어요. 1편과 2편을 아우르면서 전체를 마무리 짓는 게 너무나도 좋습니다.

“직원들도 보고 있어요?”

-그럼요. 제가 대표로 전화 드린 거예요. 다들 좋아합니다. 자랑스럽다는 말을 많이 하네요. 지구의 전투 씬과 우주 함대 전투가 어떻게 나올지 다들 기대가 큽니다. 서양식 전투방식에 동양식 전략전술이 나와서 직원들이 놀라워들 합니다.

“다행이네요. 로큐 작가들이 애를 좀 썼습니다.”

-애쓴 보람이 있을 겁니다. 다른 스튜디오에선 나오기 어려운 전투 방식이 많아서 미국인들에게도 새로울 거예요. 한국인이 연출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다르긴 다릅니다.

“그럼 바로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가도록 해요. 저도 보름 안에 스튜디오로 가겠습니다. CG가 많아서 미리 준비를 좀 해서 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로큐 작가들이 작업한 만큼 기본 시안을 로큐에서 해가는 게 나을 듯했다. 2편에 사용한 함대나 전투기 시안을 토대로 좀 더 세련되게 변형할 생각이었다.

세 작품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로큐에선 조감독 수혁이를 중심으로 코미디 영화 프리를 시작했고, 블루드 워 3편 프리도 일부 진행했다.

오기성 감독의 제작사에선 영화 ‘레저’ 프리에 들어갔고.

난 프리 진행 상황을 점검하면서 쉬었다.

앞으로 한 2년까지는 정신없이 바쁠 터라서.

상류층을 다룬 두 한국영화와 블루드 워 3편.

이 세 영화의 연관성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보면 알 일이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2주를 쉰 뒤.

나온 시안과 프리 문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 * *

4개월이 지났다.

그 넉 달 동안 미국과 한국을 8번이나 오갔다.

네오스타는 본격적인 프리에 들어가서 2달 후에 촬영을 시작할 터였다. 오 감독은 이미 촬영 중이고.

설 명절을 보내고 다음 날.

오 감독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밤이 되면 주인공이 킬러로 변신하는 영화이기에 살인 장면은 늘 밤에 찍고 있었다.

촬영지는 서울 방배동 주택가.

차에서 내리자 제작부장이 날 반겨주었다.

“설 잘 보내셨어요?”

“네. 스태프들은 연휴 쉬고 나온 거죠?”

“그럼요.”

현장으로 들어갔다.

저편 어둠 속에 비옷을 입은 배우 강동언이 대기하고 있다. 그 앞에는 마이바흐 승용차가 대기 중이고.

이번 영화를 찍으려고 연기가 되는 꽃미남 스타들이 경쟁을 벌였다는 소식이 있었다. 시나리오가 충격적이라는 소문과 함께 나와 오 감독이 협업했다는 소식도 화제가 되었었고.

한데 설치된 조명 톤이 놀랍다.

가로등으로 콘트라스트를 줬는데, 명암대비가 놀라웠다. 채도를 낮춰서 찍을 것 같고, 빗물에 빛이 분산되는 효과가 날 것 같다. 어둠을 밝히며 들어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은 불길함을 줄 것 같고.

옅은 흑백영화 느낌.

조명으로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듯.

“강수!”

“씬 21에 3에 4!”

“액션!”

빗물이 흩뿌려지고 헤드라이트를 켠 승용차가 천천히 주택가로 진입했다. 정말 불길한 느낌을 준다.

차고 앞에 서는 승용차. 차고 문이 서서히 열린다.

승용차가 유유히 차고 안으로 들어간다.

차고 문이 닫히려던 그때. 어둠에 숨어 있던 강동언이 재빨리 몸을 굴려 안으로 숨어 들어간다.

잠시 후 차고 문이 다시 열린다.

차고에서 나오는 강동언.

손에 작은 칼이 들려 있다. 그 칼과 비옷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핏물이 도로를 따라 흘러내려 간다.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강동언.

“컷! 좋아요!”

“차고 내부 씬 갑니다!”

배우 강동언과 그제야 인사했다.

곧장 오 감독에게 갔다.

“어, 왔어?”

“별문제 없지?”

“당연히 없지. 왜? 내가 똥고집이라도 피울까 봐?”

“현장에서 자기 마음대로 찍을까 봐.”

“내 영화 망칠 일 있어?”

“방금 찍은 화면 좀 보자.”

“그러셔.”

찍은 화면을 보았다.

예상한 그대로다. 흑백 영화 같다.

색감이며 화면 톤이 기가 막히다.

역광을 받은 빗방울이 눈처럼 쏟아지는 느낌이다.

“당신 생각이야? 조명 감독 생각이야?”

“이런 화면 처음 보지?”

“어디서 배운 거야? 미국에서도 잘 안 쓰는 기법인데?”

“유럽 영화 자주 보는데, 독특한 조명이나 화면이 나오면 늘 메모하거든. 똑같진 않아도 비슷하게 할 수는 있어.”

“조명감독도 이 기법 알아?”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지. 유명한 분들은 그래서 나랑 작업 안 하려고 해. 싸움나거든.”

“지금 조명감독은?”

“내 영화만 한 친구야. 감독급은 아니고 기사.”

자기 뜻대로 영화 찍으려면 후배를 쓰는 게 맞긴 하다. 감독이 카메라와 조명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면.

오기성이 촬영만큼은 감독답다.

프리와 포스트 프로덕션에는 내게 밀려도, 현장에서 촬영을 리드하는 것은 나보다 낫다. 현장 분위기는 날이 좀 서겠지만.

지금 스태프 표정을 보니 그렇다.

로큐 스태프들은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오 감독이 워낙 깐깐하게 연출을 해서.

“슛 갑니다!”

차고 안에 세팅이 되었다.

좀 전에 찍은 쇼트와 앞뒤로 연결되는 장면이다.

“액션!”

마이바흐에서 내리는 정장 남자.

삑-

차 문을 잠그고 나가던 남자가 거울을 본다.

콧구멍 안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멈춘다.

거울에 시커먼 뭔가가 비친다.

“거기 누…”

퍽-

뒤를 보며 말을 하려던 남자가 멈춘다.

남자의 관자놀이 옆에 작은 칼이 박혀 있다.

부들부들 떠는 남자.

이내 칼이 뽑힌다. 쭉- 뿜어지는 핏물.

보닛 위로 쓰러지는 남자.

경련하는 남자의 가슴으로 칼이 퍽퍽퍽퍽 박혔다가 뽑힌다.

죽어가는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강동언.

그가 비옷 후드를 벗는다.

흠뻑 젖은 얼굴. 그 얼굴에 무수히 튄 핏방울이 빗물과 함께 흘러내린다. 연기가 정말 놀랍다. 무표정한 얼굴에 눈에만 극도의 쾌감이 느껴진다. 눈동자로 전율한다고 할까.

“컷! 아주 좋아!”

정말 기뻐하는 오기성을 보았다.

저 인간이 사이코 아닌가 몰라.

다시 차고에서 컷 분할 촬영을 이어갔다.

기괴한 느낌을 주려고 분할 컷을 찍는 모양이다.

인위적인 편집 느낌이 좀 날 것 같지만 살인 장면에선 쓰는 게 맞다. 관찰자 시점에선 고정 앵글이고.

오기성에게 바보스러운 면이 좀 있어서 과연 어떻게 찍을까 싶었는데, 믿어도 될 듯했다. 자신 만의 스타일로 약간 변형하는 것도 있고.

데이터 매니저에게 갔다.

“지금까지 찍은 것들 따로 복사해 놨어요?”

“네. 원본은 편집실에 넘겼고, 복사본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현장 편집본도 있고요.”

“한번 봐요.”

“네.”

메모리 카드가 수두룩하다.

그 중 하나를 골라 노트북에 연결해서 영상을 틀었다.

현장 편집한 장면들을 이어붙인 데이터였다.

영상이 정말 좋았다.

주인공의 화려한 삶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따뜻한 조명으로 지위와 신분을 보여주고, 일을 할 때는 차가운 톤으로 성격을 암시한다.

살인 장면 때는 여지 없이 명암대비.

살인 방식이나 살해 대상에 따라 조명 색감도 달라진다.

전체적인 영상의 톤은 유지하면서 조금씩 변화를 준다.

카메라와 조명이 한 세트이다 보니, 두 장비로 기가 막힌 빛의 연출을 해낸다. 화면 구도도 정말 좋다. 나는 전혀 쓴 적이 없는 앵글도 많고. 미장센도 다른 영화에선 보기 어려운 소품 및 인물 배치다.

다른 영화와 달리 관행적인 화면이 거의 없다.

전부 오 감독 특유의 느낌이 담겨 있다.

매 장면을 이런 식으로 가져가면 스태프들만 죽어날 것 같다. 일일이 다 감독에게 물어봐야 하기에.

지금도 그렇다.

세팅하는데 스태프들이 하나하나 허락을 맡고 진행한다. 칼 하나라도 신중하게 고른다. 자기 세계관이 강한 감독들 특징이다. 평론가들은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고.

이래저래 나와는 다른 스타일이다.

8회차까지 찍은 장면들을 다 보았다.

기막힌 영상에 스토리까지 실리니 남다른 영화가 나올 것 같다. 살인 장면도 시나리오로 묘사한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자극적이다. 로큐 특수효과팀 덕분에 오 감독의 진가가 더욱더 발휘된 면도 있고.

이 영화가 줄 충격파를 생각하니 기대가 된다.

관객이 이 영화를 재밌게 본다는 점에서 문제작이 될 수도 있다. 파격적인 오 감독 스타일에 내 특유의 내러티브가 들어가면 어떤 영화가 탄생하는지 확인하게 되겠지.

만족한 기분이 되어 촬영장을 나섰다.

* * *

다시 석 달이 지났다.

영화 ‘레저’는 촬영 막바지다.

원래 일정은 석 달이었는데 한 달이나 늘어났다.

오기성이 촬영 도중에 욕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찍는 스타일인데, 이제는 스토리보드에도 없는 보충 장면까지 찍어대고 있었다. 촬영 실험을 하기도 하고.

그 바람에 제작비가 20억이나 추가되었다.

제작자 입장에서 한소리를 하려다 관두었다.

영화가 정말 잘 나오고 있었던 터라.

늘어난 제작비는 로큐가 반. 오 감독이 반을 책임지기로 했다. 오기성은 이번 영화에 자신의 영화 인생을 건 것처럼 보였다. 본인 돈 10억을 추가로 쓸 정도로.

그런 탓에 스태프들도 상당히 지쳤다. 현장에서 싸움도 나고 고성도 오가고 그랬던 모양이다. 모른 척하는 대신, 고생하는 스태프들 수당을 높여주고 자주 소고기를 쐈다.

밥심으로라도 일을 해야지 어쩌겠나.

오 감독 영화 제작 기간이 늘어나는 바람에 내 영화 제작도 차질이 생겼다. 레저를 찍고 난 뒤 바로 코미디 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블루드 워 3편을 먼저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서연은 이미 준비를 끝냈는데 말이지.

“촬영이 50일 정도 연기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난 괜찮아. 오빤 그냥 쉬면 되지.”

“블루드 워를 먼저 찍을까? 현장에 리연이를 데리고 가도, 2살 때와 3살 때는 또 다르잖아.”

“블루드 워 촬영 기간은 얼마나 되는데?”

“넉 달 정도? 스튜디오 촬영이 워낙 많아서 다른 영화보다 실사 촬영은 짧은 편이야. 대신 CG 작업은 8개월이나 걸리고.”

“그럼 블루드 워를 먼저 하는 게 낫겠다. 그거 찍고 나면 레저 개봉할 시기가 되잖아.”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

“그렇게 해.”

코미디 영화 ‘후계자’가 정말 내 대표작이라 되려는지.

쉽게 다가오지 않는 느낌이다.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안 잡히는 느낌.

혹은 프리에 더 공을 들이라는 코어의 뜻인지.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디테일이 강화되고 있다.

대저택 섭외가 어려운데 아예 지어버릴까.

세트가 아닌 실제 건물로.

폐쇄적인 느낌이 드는 저택. 음산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면도 있고,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기운을 주는 구조.

한국에 없는 건축양식으로.

차라리 잘 됐다.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라면 아예 건물을 짓자.

재벌가 이야기에서 재벌집이 상징하고 은유하는 바가 무척 크다. 생각해보니 일반 주택에서 안일하게 찍고자 했던 것도 있다. 이 역시 코어가 인도하는 방향이라면 무섭다.

대표작이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지성이에게 전화를 했다.

“난데, 펜션 사업 잘되고 있지?”

-잘 되지. 초기 24개에서 지금은 32개로 늘었어. 외국에도 있고. 갑자기 펜션은 왜?

-경치 좋은 곳에 독특한 호텔 하나 짓자. 펜션 사업 예산에 영화 예산을 좀 투입하면 될 거야.

-영화? 촬영장으로 쓰게?

“그래. 후계자 주 무대로.”

-오! 그러니까, 재벌가 저택으로 촬영한 뒤에 호텔로 사용하자? 영화를 본 분들이 관광객으로 갈 수 있으니까? 세트 허물 필요도 없고, 사업 수익성도 있고?

“그래.”

-아무튼 형 잔머리 하나는 대단해.

“헛소리 그만하고. 예산은 얼마나 나와?”

-대략 30억. 영화 예산으로 한 10억만 대. 나머지는 펜션 사업부에서 댈 테니까.

“넉 달 안에 외관만이라도 시공을 끝냈으면 좋겠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일단 끊어.”

-알았어.

곧장 수혁이에게 전화했다.

-예.

“대저택 아직 못 찾았지?”

-예. 실제 부자들이 사는 집인데 영화 내용 속이고 빌리면 나중에 문제가 돼요. 펜션은 리조트 느낌이 강해서 어렵고요. 차라리 외국 고성에서 찍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아예 짓기로 했다.”

-저택을 짓는다고요? 돈 많이 들 텐데?

“촬영 후에 호텔로 쓸 거야.”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와! 그거 진짜 좋은 아이디어네. 회사에 펜션 사업부도 있는데, 영화 촬영지로 관광 많이 가겠는데요?

“그래서 지으려고. 내가 어떤 저택을 바라는지 알지?”

-알죠. 화려하지만 답답한 느낌. 음산한 느낌도 있고요. 드라큘라의 성 같은 분위기에 현대와 한국식 저택의 분위기도 좀 나면 좋고. 전체적으로 특이한 느낌?

“거의 비슷해. 벽이나 창문 등도 꽉 막힌 느낌을 주고, 오랜 명문가 분위기를 내려면 담이나 벽에 덩굴이나 이끼 같은 것도 좀 붙어 있으면 좋아. 내부는 세트에서 찍을 거야. 나중에 호텔로 리모델링 할 필요 없이.”

-알겠습니다. 그럼 블루드 워 먼저 찍으시겠네요?

“그래. 시간이 촉박하니까, 넌 내일 펜션 사업부와 함께 건축가를 만나. 건물 설계도 결정되면 함께 미국 가자.”

-알겠습니다. 영화가 한층 살겠네요.

“그래야지.”

* * *

아내와 딸과 함께 미국에 왔다.

리연이도 한국과 다른 환경에 또 다른 집이 있다는 걸 아는 눈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혼자 거실을 막 돌아다녔으니.

건하와 희진이. 수호와 연희. 블루드 워 조감독이 될 수혁이의 여자친구도 이번 미국행에 함께 왔다.

건하는 이번 영화에 조연급으로 출연한다.

갓 필드의 인기 덕분에 분량도 상당히 많다.

해외 팬들 요청으로 수호도 저항군 특공대로 출연하고.

해서 여자친구들까지 함께 온 거였다.

이 세 커플 모두 내년에 결혼할 예정이기도 했고.

코어가 동생 놈들 여자친구를 ‘감별’한 덕분에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사귀고 있었다. 수혁이와 녀석의 여자친구는 이미 동거 중이기도 했고.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아주 친해졌고, 남자들은 형 동생 사이라 더없이 친했다. 다들 내 집에서 모여서 수다 떨며 바베큐 파티를 열면 정말 분위기가 좋았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난 거지. 리연이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있고.

모두 트레일러를 타고 스튜디오로 갔다.

여자들은 트레일러에 남고 동생들과 함께 네오스타 사무실로 올라갔다. 첫 스크립트 리딩이 있는 날이다.

레스토랑 뺨치는 회사 식당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출연배우 모두가 모였고, 회사 직원들과 기자들도 상당수 왔다. 제작발표회를 겸하는 리딩 행사였다.

부사장까지 진급한 혁민이가 나섰다.

내 비서여서 승진이 빠른 게 아니라 배급을 따낸 실적 등. 실력이 빼어나서 고속 승진을 한 녀석이다. 공부만 잘하는 사람을 뽑았으면 이런 친구를 알아보겠나.

“귀한 시간을 내어 찾아주신 귀빈 내외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영화 블루드 워 시리즈 마지막 편, ‘다가오는 여명’의 스크립트 리딩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배우들을 소개합니다. 여러분!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블루드 워의 영웅, 액셀 역에 제이슨!”

제이슨이 웃으며 일어나 눈인사를 해 보였다.

힘찬 박수가 쏟아진다.

언제 또 저렇게 몸을 만들어 놨는지.

“이어 저항군 부사령관인 토미 맥과이어 역의 마크 라이런스!”

대배우라 액셀만큼 박수가 크다.

저 배우는 미드 개척선단에도 나온다.

저 사람이 배신자가 될 거라는 걸 아는 스태프들만 웃고 있다. 다들 드라마를 봤던 터라.

건하는 4번째에 소개를 받았고, 수호는 한참 뒤에.

건하와 수호를 알아본 이들이 많아서 박수도 많이 받았다.

여직원들은 건하를 보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이젠 세계적인 스타가 됐지 뭐.

인사가 끝나고 리딩 전문 성우가 책을 들고 나왔다.

혁민이가 마이크를 넘기고 내려왔다.

그것을 신호로 기자들은 일단 나가 주었다.

내용이 유출되면 안 되기에.

곧바로 리딩이 시작되었다.

시끌시끌하던 식당이 조용해졌다.

다들 성우의 지문 낭독과 배우들의 음성 연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시나리오를 안 읽어본 이들도 많다.

스크립트 리딩 때 편히 내용을 들을 수 있으니까.

영화가 갈수록 고조되어 갔다.

이번 리딩 때는 분위기에 따라 음악까지 동원했다.

성우도 내용에 따라 자유자재로 음성을 고조시켰다.

배우들의 열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긴장한 신인배우와 수호의 이상한 영어 발음 때문에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애교 수준이었다.

액셀은 지구 액션 담당이다.

우주 교전의 액션 담당은 건하였다.

적어도 여성팬들에게 건하의 인기는 제이슨에 버금간다.

우주 교전 장면은 글로만 보면 재미없다.

그러나 성우의 감칠맛 나는 지문 리딩과 배우들의 연기는 라디오 드라마를 보듯 박진감 있게 펼쳐졌다.

영화 장면 그대로 쉴새 없이 몰아쳤다.

직원들은 숨도 못 쉬고 빠져 있는 상태.

요리사들도 요리에 집중을 못 하고 듣고 있다.

점차 고조되는 장면.

점점 높아지는 음성.

손에 땀을 쥔다.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렸을 때.

좌중이 고요했다.

다들 할 말을 잃었다.

권혁민이 일어났다.

“이상으로 리딩을 마칩니다.”

“와-!”

함성과 함께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들 정신없이 손뼉을 쳤다.

북한 독재자에게 보내는 충성 박수처럼.

배우들이 하나 둘 일어나 내게 박수를 보냈다. 스태프들도, 귀빈들도 모두 일어났다.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던 이들도 모두 내게로 향했다.

다들 열광한 얼굴이었다.

일부는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표정이다.

리딩을 잘 들었다는 눈빛이 아니었다.

경이로움과 경외심이었다.

부끄럽지만 존경도 있었다.

* * *

샌디에이고 해군기지 옆 도로에서 촬영이 한창이었다.

군과 시에서 적극 협조해준 덕분에 군인 300명이 동원되었고, 도로 통제도 해주었다. 시나리오에는 그냥 저항군 기지라고만 했는데, 더 나은 그림을 만들 수가 있었다.

수많은 개조전사가 몰려오고 기지를 사수하려는 저항군은 필사적으로 막아 낸다. 전투기 폭격이 일어나고 미사일이 수도 없이 터진다. 아비규환 그 자체다.

스태프들은 초반 도입부부터 이런 장면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보통은 영화 클라이맥스에서나 나올 전투씬이 처음부터 등장하니까. 1편과 2편에서 쌓아 놓은 영화적 배경이 있으니 전면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거지.

액셀과 영웅 12명은 기지 저지선에 대기했다.

그 뒤편에는 군인들과 보조출연자들이 섞였다.

조감독 에드워드는 인물 파트를, 세컨드 조감독인 수혁이는 사물 파트를 담당하여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에디가 외쳤다.

“특수효과 배치 끝났습니다! 리허설 더 합니까?”

“이대로 한번 가 보자!”

“예. 모두 집중! 보조 출연자분들은 총성과 폭발 소리가 대단히 크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촬영 중에 놀라시면 안 됩니다!”

“오늘 온 출연자들은 2편 출연자들이에요!”

“아, 베테랑들이 오셨군요.”

“하하하하!”

이번 보조출연자들은 1편과 2편에 출연했던 분들이다. 네오스타 덕분에 꾸준히 돈벌이를 하는 분들. 경력자들이라 연기도 잘하고 리액션도 좋다. 총성이야 익히 경험했고.

“마스터 쇼트 갑니다! 조용!”

“특수효과?”

“스탠바이!”

“카메라?”

“올 스탠바이!”

“모두 움직이세요!”

슬레이트가 화면에 들어왔다.

“씬 3! 테이크 투!”

“액션!”

타타타타탕-

쿠쾅- 콰콰콰쾅- 펑!

바리케이드를 친 군인들이 동시 다발로 총격했다. 총탄이 빗발치고 폭발이 수시로 일어난다. 하늘로는 벌컨포 총탄과 미사일이 수도 없이 솟구쳐 오르고.

카메라는 액셀과 영웅들을 중심으로 찍고 있다.

총격을 중단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이때부터 녹음한 총성과 폭발음이 배경으로 들어간다.

영웅들이 저마다 외쳤다.

“병력 손실이 너무 큽니다! 병사들은 퇴각하고 우리가 막아야 합니다!”

“어디로 퇴각하나! 사방에 개조전사들이야!”

“유인하는 건 어떻습니까? 놈들의 목적은 우리 13명이지, 잔존 저항군이 아닙니다!”

“어디로 유인을 해?”

“황무지로 놈들을 모두 유인해서 제대로 싸웁시다!”

“테리 말이 맞아요! 더는 구할 수 있는 민간인도 없고, 남은 저항군이라도 살리려면 우리가 놈들을 잡아야 합니다! 언제 핵이 날아올지 몰라요!”

“핵은 못 써! 지구가 오염되면 놈들이라고 살 수 있나!”

“소형 핵은 아직 많습니다!”

“액셀! 어떻게 생각하나!”

액셀은 묵묵히 전방을 보고 있었다.

영화에선 개조전사들이 무수히 나가떨어지고 있다.

액셀이 외쳤다.

“지금부터 놈들과 싸우면서 길을 열겠습니다! 이대로 저항군 임시 본부가 있는 네바다까지 갑니다!”

“좋아! 놈들을 끌어모아서 끝장을 내자고!”

“초인군단이 몰려 온다면요?”

“어차피 싸워야 할 놈들이다! 전세계에 있는 놈들을 죄다 불러 모아서라도 싸워야 돼!”

영웅들과 눈빛을 교환하는 액셀.

액셀이 외쳤다.

“나와 미첼이 중앙을 뚫고 들어간다!”

“준비됐나?”

“됐습니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군인들이 일제히 총을 거두었다.

“가자!”

액셀이 몸을 움츠렸다가 그대로 날아올랐다.

그냥 솟구쳐 버리는 영웅도 있고, 사라져버리듯 쏘아져 나가는 영웅도 있다. 물론 CG로.

“컷! 오케이.”

“이어서 개별 컷 찍겠습니다!”

스태프들이 다음 컷 촬영 세팅을 시작했다.

군인들의 총격 쇼트. 폭발에 나가떨어지는 저항군. 벌컨포를 쏘는 사수. 스팅어미사일을 겨누는 병사 등을 찍는다.

* * *

촬영 57회 차.

네바다 주 모하비 평원.

LA에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사막이다.

서부극에서 볼 법한 황량하고 광활한 지대.

다른 평원도 많지만 이곳은 포위된 느낌이 있어서 선택했다. 전후좌우 평지와 언덕으로 초인군단과 개조전사 100만 명이 몰려온다. 기가 질리는 장면이다.

평원 가운데에 13명이 모였다.

싸우면서 여기까지 오느라 다들 지친 기색.

“액션!”

13명이 긴장한 모습으로 앞뒤와 좌우를 본다.

액셀에 버금가는 능력자인 6명만 묵묵히 진군하는 적들을 주시하고 있고, 나머지는 긴장한 모습.

영웅 하나가 말했다.

“놈들이 눈치채진 않았겠지?”

“미사일이 뜨면 놈들이 후퇴할 수도 있어.”

액셀이 한 영웅에게 물었다.

“본부에선 아직 연락 없나?”

“군단장이 누군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놈들 모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1년 전부터 클로킹 상태로 있는데, 그 어떤 기지도 놈들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지구 밖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영웅이 고개를 저었다.

“지구는 아닐 거야. 저 많은 놈을 통제하려면 대기권 안에 있어야 한다. 저 구름 속에 분명히 놈들이 있다.”

다들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온통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액셀이 말했다.

“가르시아. 놈들이 수신받는 전파를 추적할 수 있겠어?”

“초인군단의 군단장에게 통신 분배기 같은 게 있어. 그걸 찾으면 내가 잡아낼 수가 있을 거야. 매우 강하거든. 문제는 군단장이 누군지 모른다는 거지.”

“미첼. 토드. 그리고 짐.”

세 영웅이 액셀을 보았다.

액셀이 이어 말했다.

“우리 넷은 군단장을 먼저 잡는다. 가르시아가 전파를 잡아서 놈들 모선 위치를 파악하면 바로 외계인 놈들을 치는 거야. 함선 대부분이 추락하거나, 화성으로 향했다. 남은 놈들은 초대형 모선에 모여 있을 거야.”

“모선이 하나가 아니라면?”

“지구에 온 외계인은 고작 159명이다. 함선 수와 정확히 일치한다. 다른 모선은 본 적도 없고. 지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는 부역자들이지, 외계인이 아니야. 부역자들이 외계인을 배신할 수도 있다.”

“그렇겠지.”

한 영웅이 외쳤다.

“초인 놈들이 옵니다!”

영화상에선 구름처럼 밀려오는 군단 중 매우 빠르게 치고 나오는 수만 명의 초인이 보인다. CG로 들어가겠지만 일대 장관이 펼쳐질 터다.

액셀이 고함을 질렀다.

“이번이 마지막 전투입니다! 우린 반드시 이깁니다!”

“물론이지!”

“오늘 끝장을 내자고!”

“살아서 보자! 형제들!”

13명이 각자의 전방을 향해 달려나갔다.

“컷! 오케이!”

에디가 소리쳤다.

“오늘 촬영 종료합니다! 내일부터 마스터 컷 액션을 찍은 뒤 한 분씩 개별 컷을 따겠습니다!”

배우들과 눈인사를 하곤 내 트레일러로 향했다.

내일부터는 노가다의 연속이다.

* * *

스튜디오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스튜디오 섹터를 2개로 나누어서 스턴트 팀장과 조감독 에디가 2팀으로 나뉘어 각자 촬영을 시작했다. 수혁이는 내 지시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고.

와이어 액션인데다 따로 연기력이 필요한 장면이 아니라서 내가 액션 연출을 할 필요는 없었다. 영상조정실에 앉아서 오케이와 NG 콜만 했다.

내 옆에 앉은 CG팀 은영이가 찍은 영상을 실사와 합성하여 계속 내게 보여 준다. 두 팀은 리허설을 한 뒤 슈팅 간다고 외친 후 바로 찍고 있고.

수혁이는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을 처음 보는 터라 촬영 내내 뭔가 메모를 하고, 카메라로 찍기도 했다. 실사 때도, 스튜디오 촬영 때도 한국 촬영 때와 다른 점이 무척 많았으니.

“실사 촬영 때는 콘티를 봐도 이해가 안 되던 게 스튜디오에서 찍은 걸 합성하니까, 영화가 되네요. 이렇게 세밀하게 구분하는 노하우가 부럽습니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 이렇게 가는 게 맞나 싶었거든. 축적된 노하우가 있으니까, 콘티를 그릴 수 있는 거지. 어떤 영상이 나올지 아니까.”

“실사와 스튜디오 촬영의 괴리가 커서 저는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콘티대로 하고 있기는 한데.”

“한국 영화 몇 편 찍고 나서 한 1년 유학생활 해 봐. 나도 할리우드 특수효과 아카데미에 다녔어. 거기서 안 배웠으면 나도 적응하기 어려웠을 거다.”

“네. 그래야겠네요.”

아래층 두 스튜디오에선 액션 촬영이 한창이다.

리허설을 해서 합이 제대로 맞으면 촬영한다는 콜을 하고 찍는다. 은영이가 시뮬레이션을 해서 맞아떨어지면 오케이.

“1 스튜디오 테이크 갑니다!”

액셀이 달려드는 초인 전사 세 명을 투타탁!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먹과 발로 쳐내곤 바닥을 박차며 쏘아져 간다. 스태프들이 녹색스펀지 따위를 내던지면 액셀이 그걸 쳐내면서 나아간다. 촬영 때는 느리지만 영화에선 매우 빠르다.

“컷!”

방금 찍은 영상을 은영이가 바로 시뮬레이션했다.

땅을 박차고 날아가는 액셀을 향해 프로그램된 초인들이 덤벼든다. 그들을 주먹으로 마구 쳐내면서 돌파하는 장면이다.

수혁이가 영상을 보곤 말했다.

“시뮬레이션이 엉성한데 이것만 보고 결정해요?”

“이번 장면은 제이슨의 연기에 따라 CG를 붙일 장면이라서 그래. 와이어 격투씬과는 조금 다르지.”

은영이가 말했다.

“지금 찍은 제이슨의 연기대로 초인 CG를 입히면 돼요. 와이어 액션 장면은 대게 실사와 합성하고. 이런 장면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에 따라 CG를 새로 만들죠.”

“휴. 할리우드 감독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네.”

“네가 콘티 작업에 참가를 안 해서 그래. 콘티 작업할 때 팀장들과 액션을 다 정해놓고 하니까, 너도 해보면 알아.”

“영어부터 유창해져야겠네요.”

영화의 감정과 흐름. 박진감 등은 시나리오와 콘티 작업 때 끝냈다. 연기를 하는 장면은 그래도 내가 공을 들일 부분이 있지만 이런 액션 장면만 계속 찍을 때는 그냥 노동이다.

이번엔 액션이 워낙 많아서 노동을 엄청 하고 있다.

그나마 이번 영화는 촬영 기간이 짧다. 후반에 다시 실사를 찍고 앞으로 두 달 동안 계속 스튜디오 촬영만 할 터였다.

* * *

촬영 82회 차.

어느새 영화 촬영 후반에 이르렀다.

함대 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상황.

스튜디오에 전투기 조종석 모형 다섯 대가 있다.

내부에 조종사를 찍는 카메라가 앞뒤로 있고. 조종석 좌우에도 카메라가 부착되어 있다. 조종사가 조종대를 움직이면 실제로 모형이 좌우로 움직인다.

모형 5개에 배우들이 들어갔다. 외부에서도 배우들이 이들과 무전을 주고받으며 연기한다. 실감 나는 호흡을 위해 내가 개발한 촬영 방식이다.

“리허설 시작합니다.”

“에디!”

“네. 감독님!”

“리허설 없이 가 보자. 다섯 분 모두 상황 숙지했죠?”

-예!

-저희끼리도 연습 많이 했습니다!

“좋아요! 바로 가 봅시다!”

촬영팀이 카메라를 작동시키고 일제히 물러났다.

“사운드!”

“스탠바이!”

“레디!”

“씬 148! 테이크 원!”

“고우!”

-정말 징그럽게도 몰려드는군.

-초보자 놈들만 있나. 놈들 움직임이 좀 둔해 보여.

-조종사는 죄다 저항군이 됐으니 당연하지.

그때 들리는 다급한 음성.

-강습작전이 시작됐다! 12편대! 전원 2-1-9 방향으로!

-13편대는 2-3-6 방향으로 돌려!

-사령함에서 알린다! 강습작전이 시작되었다! 12와 13편대는 수송기 호위를 맡고! 그 외에 편대는 기존 임무를 수행하도록!

-편대장님! 두 편대로는 호위가 어렵습니다!

-적기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다!

-젠장! 전투 편대보다 수송기가 더 많으면 어쩌자는 거야!

-수송기 일곱 기가 폭발했습니다!

-빨리 따라붙어! 수송기 공격을 저지해야 한다!

배우들이 이를 악문 채 조종대를 잡고 있다.

전투기가 빠르게 날아가는 장면이다.

조종사들 눈앞으로는 적함으로 미친 듯이 날아가는 수송기들이 보인다. 2차 대전 때 독일군의 대공포를 뚫고 날아가는 미 공수부대 수송기를 보는 듯할 터다.

빔이 빗발치고 수많은 수송기가 도중에 폭발한다. 강습대원들이 수도 없이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 버리고, 파편이 투타탁하고 조종석 앞을 때린다. 어지럽고 정신없는 우주 교전의 한가운데.

양측 함대가 빔 사정거리에서 대치한 채 8자 꼬리 물기를 하며 돌아간다. 서로의 뒤를 잡으며 포를 쏘아댄다. 그 주변에는 파리떼가 들끓듯 무수히 많은 전투기가 공중전을 벌이고.

-12편대 도착!

-수송기를 공격하는 적기부터 잡아!

-편대장님! 적들이 눈치챘습니다! 3-2-0 방향으로 네 편대나 날아옵니다!

-수송 편대! 흩어져라! 아군이 다 못 막는다!

-여기는 강습팀. 우리 걱정은 마라. 수송기가 폭발하기 전에 뛰어내릴 테니까.

-그냥 강습하면 귀환하지 못한다!

-적함을 탈취하기 전까진 우리도 돌아갈 생각 없어!

-이런 미친놈들!

-하하하하! 그거야! 그래야 강습팀이지!

-13편대! 한번 죽어 보자!

-아아아악-

전투 편대가 줄줄이 날아오는 수송기들 옆을 따라붙으며 적기를 하나둘 잡아 나간다. 함에서 날아와 적함으로 향하는 수송기가 100여 대. 이미 30여 대가 도중에 폭발했다.

적함 갑판 위에 도착한 수송기에서 강습팀이 줄줄이 뛰어내린다. 도착도 안 한 수송기에서 강하하는 대원들도 많다. 전원 등에 추진기를 장착했다. 뛰어내린 뒤 곧장 에어 제트를 분사하며 적함으로 날아간다.

-수송 22함! 낙하 대기!

-수송 23함! 낙하 대기!

-수송 26함! 낙하…

도착하기 전에 뛰어내리는 강습대원들이 너무도 많다. 도중에 폭발해 버리는 수송기도 허다하고. 강습대원들이 적함 상륙에 성공하면서 여러 적함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갑판 정비용 출구가 뚫리고 산소가 빠지면 대원들이 빠르게 진입해 들어간다.

이어 다른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재개되었다.

이번엔 사령함 내부.

함대 사령관이 함교에서 대화면을 보고 있다.

곧 음성이 들려왔다.

-강습부대 절반이 적함 상륙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진입한 강습팀은 보고하라!”

-강습 8팀입니다! 함선 내부에 무장 병력은 거의 없습니다! 이대로 함교까지 진격하겠습니다!

“다행이로군! 건투를 비네!”

-강습 23팀입니다! 이곳에도 무장 병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역자들만 있나?”

-개조전사들입니다! 부역자 놈들이 목숨을 걸겠습니까!

사령관의 눈이 빛났다.

“전군에게 알린다! 현재 적들은 로봇이나 다름없는 상태! 지금부터 충파작전을 전개한다! 전 함대는 좌우로 산개하여 전속력으로 적함을 향해 돌진하라!”

-아군 함대도 위험합니다!

-적함 포격이 집중될 수 있습니다!

“주포 출력을 방어막으로 전환하도록!”

-알겠습니다!

-전 함대 포격 중지! 에너지를 방어막으로!

사령관이 다시 소리쳤다.

“놈들은 뒤늦게 주포 에너지를 동력 에너지로 전환할 것이다! 놈들이 회피할 겨를도 없이 충돌한다! 전속으로 근접한 뒤 방향을 돌리는 놈들의 옆구리와 엔진에 미사일과 주포를 먹여주도록!”

-강습부대장입니다! 12척 탈취 직전입니다! 다른 적함에는 아군이 없습니다!

“수고했다! 충파 목표는 나머지 적함 함교! 충돌 직전에 속도를 줄여라! 충격에 대비하라!”

전 함대가 적함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간다. 이번 작전을 위해 모든 함의 함수에 뿔 같은 충각을 달아 놨다. 아군 피해를 각오한 작전이다.

아군 함대가 적들의 주포를 맞아 가며 매우 빠르게 적함에 접근한다. 저항군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적함이 뒤늦게 에너지를 전환하여 피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군 함대 30척이 그대로 적함 함교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함선 60여 척이 뒤엉키고 적함들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장관. 관객의 카타르시스도 여기서 터질 것 같고.

“전 함대와 편대는 파괴된 적함부터 공격하라!”

-1편대에서 10편대는 적함으로!

-적함 탈취에 성공했습니다! 아군으로 전환합니다!

“고맙다, 강습팀!”

그때 들려오는 아련한 음성.

-사령관님. 3함장입니다. 본관의 배가 격침 직전입니다. 재수가 없었는지 함교 바로 아래를 제대로 맞았네요.

사령관이 다급하게 외쳤다.

-승무원들을 탈출시키게! 자네도!

-저는 쿨럭! 함에 남겠습니다. 반평생을 함께한 아틸러스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탈출하게!

-평생 사령관님 명령에 따랐지만 이번에는 어렵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탈출해!”

-쿨럭. 사령관님. 실은 제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인가? 잠시 기다려라! 구출팀이 아틸러스로 갈 테니!”

-그러지 마십시오. 함교가 불길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령관님! 3함이 적함으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뭘 하려는 건가?”

-적함 하나와 함께 가겠습니다.

“마이클 안 돼! 이미 이긴 전투다!”

대답이 없었다.

화면에는 3함이 적함과 충돌하기 직전.

그때 다시 들려오는 음성.

-아버지… 사랑해요.

“마이클!”

콰콰쾅-

두 함선이 충돌하면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 장면을 보며 눈을 부릅뜨는 사령관.

떨리는 그의 눈동자에 점점 눈물이 차올랐다.

“전 함대는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이 전투는 인류 역사에 남을 것이다! 전 함대는 주포를 발사하라!”

사령관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사령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화면 속에서 산산이 깨져 흩어지는 아들의 함선을 바라본다.

그의 뺨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고 있었다.

내가 썼는데 마음이 짠하네.

부디 CG가 잘 나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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