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코어와 영화의 진화 (51/56)

제3장 코어와 영화의 진화

클럽 안에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잠시 침묵하는 사이 코어를 통해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정보를 읽었다. 여자들은 물론 마담까지.

재벌 3세의 공통적인 특성 하나를 발견했다.

참을성이 없다는 것.

오명성과 남자들이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다.

이 비밀스러운 클럽에서 외부인은 나 하나뿐이다.

내가 놈들에게 구타를 당해도 잡아떼면 그만이다.

그러나 진짜 애들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이라 행동에 옮기진 않았다. 그 참을성이 어디까지 갈진 모르지만.

“하하하. 최 감독님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여기 있는 친구들이야 서로 못 볼 꼴 다 보면서 자라왔고, 내 성격 어떤지 잘 압니다. 저희가 매너 있게 대해 드리니까, 마냥 좋은 사람 같으시죠?”

오명성과 뒤에 들어선 친구들 표정이 가관이다.

평소에 오명성이 겁을 주는 방식 같다.

보통 사람이라면 겁을 먹고 마른 침만 삼킬 테지.

오명성이 말을 이었다.

“오늘 일만 하더라도 저는 참을 만큼 참았고, 애들한테 추한 모습 안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어요. 혹, 로큐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를 탓하진 말아 주세요. 저에게 용서란 없습니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되돌릴 수가 없어요.”

“고작 이런 일로 말입니까?”

“고작이라니요. 석 달 만에 동생들과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두 분이 방해를 한 겁니다. 이미 흥이 깨졌어요. 귀중한 오늘 하루를 망쳤죠.”

“그냥 소동극 정도로는 생각이 안 드나 보군요.”

“내 인생에 소동극이란 없습니다. 내 일에 누가 끼어드는 것도 납득할 수 없어요. 두 분 감독님들은 시간이 남아도나 본데, 저희는 그렇지가 않거든요. 저희에게 시간은 금입니다. 그 황금 같은 시간을 빼앗았으니 보상을 하셔야죠.”

환하게 웃었다.

내가 웃자 오명성과 남자들이 당황했다.

이건 뭐지 싶을 터다.

오명성에게 말했다.

“대기업을 경영하실 분이 이런 사소한 일을 못 참고 일을 크게 벌이려는 겁니까? 누가 때리기라도 하면 사람 하나 죽이겠군요.”

오명성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반면 입꼬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당신은 사소한 일이지만 내겐 사소한 일이 아니야. 내게 사소한 일이란 없어. 당장 이 자리에서…”

“이봐. 오명성.”

“뭐?”

클럽에 날카로운 냉기가 불었다.

재벌 3세들의 표정이 흉흉하게 변했다.

낄낄대던 오기성 감독도 긴장하기 시작했고.

내가 취재를 한다는 것은 인터뷰가 아니다.

코어를 써서 최상류층 인사의 성격, 인간관계. 집안 내부의 분위기 등등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이런 건 인터뷰로는 알아낼 수가 없다.

“인생 선배로서 형이 한마디 하마. 세상에서 네가 가장 강한 줄 알지? 천만에. 대중이 너 같은 어린애 끌어내리는 건 일도 아니다. 회장님이 회사를 지킬까, 널 지킬까? 넌 외동아들도 아니잖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오명성이 벌떡 일어났다.

자기도 모르게 탁자에 있는 술병을 잡으려고 했다.

결국 폭발했네.

“너 같은 애가 어떻게 살든 관심 없어. 그런데 날 건드리는 건 큰 실수하는 거야. 네가 사는 삼지 왕국 참 대단하지? 그런데 하늘 위에는 더 높은 하늘이 있어. 그걸 구경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봐라. 네 인생을 걸고.”

일어났다.

“앉아!”

“아, 쳐들어온 건 사과할게. 난 경고했다. 무너지고 난 뒤에 후회하는 건 늦어. 나도 용서할 생각이 없으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시하고 마담에게 갔다.

“메모지 하나 주시죠.”

“네.”

마담이 펜과 종이를 건네주었다.

거기에 7개 단어를 적어 넣었다.

그걸 곱게 접어서 오명성에게 건넸다.

“술 잘 먹었다. 가지, 오 감독.”

주저 없이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마담이 내게 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사람 처음 보죠?

문을 열고 나가자 보안요원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안에서 지시가 떨어지면 곧장 우릴 제압할 기세. 그러나 막지는 않았다. 나도 오 감독도 지위가 있으니.

복도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잠깐만!”

오명성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얼굴이 질리다 못해 창백할 지경이다.

“잠깐만요!”

“또 할 말이 있어?”

오명성이 기겁을 한 얼굴로 날 본다.

“다, 당신 뭐야?”

“영화감독.”

“어떻게 안 거야? 무슨 수로 안 거야!”

“뭘 말이야?”

오명성이 쪽지를 입에 넣고는 삼켜 버렸다.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나랑 얘기 좀 하죠.”

“왜? 쥐도 새도 모르게 날 없애 버리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내가 조폭이에요?”

“비슷하잖아?”

다시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명성이 몸을 떨기만 할 뿐 따라오진 못했다.

문이 닫히려는 찰나, 오명성의 손이 들어왔다.

“대체 어떻게 안 겁니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술 한잔합시다. 그 정보가 혜성이 형 쪽으로 넘어가면 나 끝장나요!”

오 감독이 물었다.

“뭘 적었기에 애가 이러는 거야?”

“어르신 말씀.”

“어르신? 어르신 누구?”

“오명성. 탈 거냐, 말 거냐?”

“같이 갑시다.”

오명성이 냉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 감독은 이게 뭔 상황인가 싶다.

사실 오명성은 내게 매달려 빌어야 한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서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굽히고 들어왔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굽히는 것도 일생 처음이겠지.

오명성이 지금까지 벌인 온갖 범죄. 여자와 관련한 추악한 과거. 회사 내부 비리. 마약 투여. 본인이 은폐한 각종 사건 사고. 그에 대한 증인과 증거 위치까지 알고 있다.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모를 수가 있나.

놈이 회장님을 매우 무서워한다는 것도.

그 점을 이용했다.

“형님. 하나 물어봅시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네.”

오명성이 정말 궁금한 눈으로 날 보았다.

씩 웃어 보였다.

“말했잖아, 어르신 말씀이라고.”

“혹시 회장님입니까?”

대꾸 안 하고 웃기만 했다.

내 얼굴을 본 오명성이 경기를 일으켰다.

본인이 추측하고 본인이 단정해 버린다.

이런 타입인 거 알고 한 거다.

“회장님과 잘 아는 사이세요?”

“회장님이라고 안 했는데?”

오명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에서 회장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유일하게 이길 수 없는 사람이 그분인 거지.

오명성은 자신의 오점 때문에 형이 계열사 대부분을 물려받을까 봐 우려하고 있었다. 또한 회장 비서실에서 형제를 은밀히 조사하고 있다고 짐작했고. 제풀에 넘어온 거지.

“난 그 일곱 단어가 무슨 뜻인지도 몰라.”

“회장님이 맞네요. 나한테 불만이 있으셔서 이런 식으로 교육하는 겁니다.”

“알았으면 이제 내려.”

“내가 술 한잔 사겠습니다.”

“난 모른다니까 그러네.”

“회장님과 친하시니까, 최 감독님을 보내신 거 아닙니까. 솔직히 감독님이 기성이 형이랑 날 만나러 올 이유가 없잖아요? 회장님이 보내셨으니까 온 거지.”

나와 오 감독의 눈이 마주쳤다.

일이 왜 이렇게 흘러가지?

실실 웃음이 나왔다.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오명성이 앞장을 섰다.

비서가 달려오자 그가 말했다.

“내일 오전 스케줄 모두 취소해.”

“예? 내일 구미 신설 공장 임원단과 오찬이…”

“취소하라고.”

“알겠습니다.”

“가시죠, 형님들.”

* * *

최고급 일식집에 왔다.

재벌에게 비싼 밥이란 의미가 없다.

그냥 술 마시러 온 거다.

일본에서 공수한 청주를 마시며 회를 먹었다.

오명성 이 친구. 참, 말이 많다.

집안 내력인지.

“기성이 형이야 잘 알지만, 최 감독님은 모르시니 말씀드릴게요. 우리 집안은 원래 왕래가 없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때가 아니면 만날 일이 없어요. 명절에도 본가에 가면 회장님이 인사 온 사장단을 먼저 챙기고요.”

“가족의 정이 없다는 말이야?”

“그런 건 아니고. 회장님이 나와 혜성이 형이 경쟁한다는 걸 아시고 일부러 거리를 두시는 거예요. 누구 하나 챙겨 주면 형제들 싸움만 커지니까.”

회장이 사장단을 챙기는 이유.

자식들의 경영 수완이 본인만 못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사장단이 잘해야 회사가 잘 굴러가는 것일 테고.

오명성은 내가 회장과 친하다고 착각한다.

그렇게 믿기만 할 뿐 회장에게 묻지는 않을 터다.

회장의 뒷조사를 모르는 척하는 거지.

오명성이 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나중에 회장님과 식사할 자리라도 있으면 말씀 좀 잘해 주세요. 나 일할 때는 열심히 해요. 솔직히 3세들 중에 안 놀아 본 놈 없잖아요. 내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지, 경험 쌓고 40대가 되면 달라질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기성이 형 덕분에 회장님과 최 감독님이 친해지신 거구나. 내가 기성이 형 말은 잘 안 들으니까.”

“알면 다행이네.”

오기성 감독이 히죽 웃었다.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흘러가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오명성이 이대로 착각하고 살면 본인에게도 좋으니까.

오명성이 각본을 짜 주니 우린 연기를 한다.

“형님. 내가 그래도 틈틈이 형님 영화는 봅니다.”

“뭘 봤는데?”

“블루드 워 시리즈는 다 봤고요. 갓 필드랑 전에 좀비 나오는 거. 그것도 봤습니다. 멜로디도 봤고요.”

“플랜은?”

“흠…….”

오명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연하다. 미친 재벌 3세 때려잡는 영화니까.

내가 물었다.

“본 것 중에 뭐가 제일 좋아?”

“갓 필드요. 야, 그 영화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애들이랑 그 클럽에서 봤거든요.”

“극장에는 안 가나?”

“집에 극장에 있는데 왜 갑니까. 애들이랑 볼 때는 클럽에서 보고요.”

오 감독이 물었다.

“내 영화는 안 봤냐?”

“형은 영화를 왜 그렇게 찍어? 기분 잡치게.”

“야! 네가 예술을 알아?”

“참나, 지가 언제부터 예술가였다고.”

이복형제가 으르렁댔다.

가만 보니 친형보다 이복형과 더 가까운 것 같다.

오명성이 친한 척을 하지만 비수를 숨기고 있다.

나에 대한 조사를 하겠지. 정말 회장과 친한지.

헛수고다. 혼란만 가중될 테니까.

언제 날을 세웠느냐는 듯.

술자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오기성 감독은 알면 알수록 재미가 있다.

그의 동생 오명성은 자신이 당한 일을 잊지 않을 인간임을 확인했다. 다만 갚아 줄 방법이 없어서 그렇지.

어쨌든 근 한 달 사이.

친구 하나와 시다바리 하나를 얻었다.

* * *

일요일 아침.

아침밥을 먹고 리연이와 놀아 주었다.

아이가 날이 다르게 자라고 있다.

우리 딸이 언제 예쁜 소녀가 되려나.

아내가 과일을 깎아 와서 소파에 앉았다.

“취재하는 거 어렵지?”

“사람 만나기가 어렵지 뭐.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니까.”

“나도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어. 강남 사모님들 자주 가는 레스토랑이나 카페, 마사지샵 같은 곳. 그런 곳도 연 회비에 따라 급이 다르데.”

“연 회비가 몇억씩 되나?”

“초일류 샵은 수십억 될걸?”

“그런 데는 서비스나 시설이 다른가?”

“같을 거야. 그냥 자기들끼리 우월의식 느끼면서 그런데 모이는 거지. 연예인들도 그러는데 뭐.”

띵동-

“아침부터 누구지?”

아내가 카메라를 확인해 보았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다. 뒤에는 트럭이 있고.

그걸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는데.

코어도 별 느낌을 주진 않고.

“누구지?”

“내가 나가 볼게.”

집에서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정장을 입은 30대 남자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삼지에서 왔습니다.”

“삼지에서 무슨 일로요?”

“다름이 아니옵고. 저희 회사 상무보님께서 우정의 의미로 조촐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직원이 애처롭게 웃었다.

그냥 돌아가면 정강이 몇 대 맞으려나.

이런 걸 두고 뇌물이라고 한다.

“감독님. 저희 얼굴을 봐서라도 꼭 좀 받아주십쇼.”

“뭔지 보기나 합시다.”

“예.”

직원이 짧은 안도의 한숨을 쉬곤 윙탑 트럭의 개폐문을 열었다. 트럭에 고급스러운 상자가 가득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삼지전자의 최고급 전자제품은 모두 있습니다. 최고가 제품만 선별했습니다. 그리고 리연 양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입을 수 있는 명품 100종에, 사모님께 드리는 명품 100종을 세심하게 골랐습니다.”

“오빠, 이 사람들이 왜 이런 걸 줘?”

뒤에 서연이 나와 있었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트럭을 보았다.

“삼지 그룹 차남과 친해졌거든.”

“친해지면 이런 걸 주는 거야?”

“글쎄. 나도 왜 주는지 모르겠네.”

직원이 매우 당황했다.

“별 뜻은 없습니다. 꼭 좀 받아주십시오.”

아내는 고개를 젓는다.

나도 마찬가지고.

“어떤 의도가 있는지도 모를 선물을 누가 받겠습니까? 저희는 이런 거 없어도 잘 삽니다. 가지고 돌아가세요.”

“감독님. 저희 사정 좀 봐주세요. 저희 전달을 못 하면 되팔지도 못하고 어디 가서 태워야 합니다. 상무보님께서 아시면 경위서 정도로는 안 끝납니다. 꼭 좀 받아주세요.”

서연이 나섰다.

“이 선물의 의미가 뭔데요?”

“저희는 우정의 의미라고만 들었습니다.”

“오빠,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집에 짐만 쌓이겠네.”

“아, 그럼 다른 걸 원하십니까? 그거라면 저희가!”

“다른 것도 필요 없습니다. 명성이한테는 받았다고 할 테니, 이 물건들은 직원들에게 나눠 주세요.”

“감독님…….”

직원이 매달릴까 봐 얼른 문을 닫았다.

아내가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나랑 친해지고 싶은 놈이 하나 있어. 사실 받아도 되긴 해. 받든 안 받는 달라질 게 없거든. 그 친구에게 저 정도 금액은 그냥 조카에게 선물 하나 사 준 거밖에 안 돼.”

“그럼 받지 그랬어?”

“저 많은 걸 어디다 둬?”

“리연이 옷이나 몇 벌 받아 둘 걸 그랬나?”

나도 서연도 사람이다 보니 혹 하긴 했다.

특히 리연이 옷에 욕심이 조금.

일요일 아침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 * *

다시 일요일 아침.

또 초인종 소리가 나서 나갔다.

서연도 리연이를 안고 따라나섰다.

문을 열자 그 직원 절을 하고 있었다.

“감독님! 제발 좀 살려 주십쇼!”

“일어나세요. 왜 이러십니까?”

“선물 받으시기 전에는 못 일어납니다!”

“또 선물…”

말을 하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고 옆에 웬 납작한 차가 한 대 와 있다.

저건 또 뭐야?

직원이 날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시승 한번 해 보시죠! 키 여기 있습니다!”

시커멓고 날렵한 스포츠카다.

마크를 보니 페라리.

정말 잘생겼다.

직원이 급히 설명했다. 영업사원처럼.

“최신형 페라리 라페라리입니다. 중후한 검은색에 날렵한 몸체. 감독님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차입니다. 아! 혹시 저렴한 차라서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사실 람보르기니를 구해 드리고 싶었는데 두 가지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하나는 구매 신청을 하니 2년 후에 온다고 하고, 또 하나는 한국에선 AS가 잘되어 있지 않아…”

“됐고요. 이것도 도로 가져가세요.”

직원이 내 앞을 막더니 또 엎드렸다.

“감독님! 우리 가족 생계가 달려 있어요! 저도 리연이만 한 딸이 있습니다. 좀 살려 주십시오!”

무슨 코미디 공연을 보는 것 같다.

서연은 리연이만 한 딸이 있다는 말에 짠한 모양이다.

안 받으면 계속 찾아올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받는 게 나을 것 같다.

오명성이 내 입을 두려워하여 미친 짓을 할 수도 있으니.

내 입을 돈으로 막을 수 있다는 믿음도 주고.

사실 놈만 아는 비밀을 내가 무슨 수로 알겠나.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내가 아는 건 없다고 볼 터다.

그 7개 단어는 어떤 경위로 나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할 뿐인 거지.

말 그대로 놈이 선물을 준 것일 뿐.

다른 해석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예. 이건 받을게요.”

“정말이십니까?”

“네.”

직원이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눈가가 촉촉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직원이 내 손에 키를 주고 도망갔다.

행여나 내 마음이 바뀔까 봐.

대체 직원을 어떻게 대하기에 저러는 건지.

세심한 배려도 했다.

차에 리연이 옷이 잔뜩 있다.

지난번에 우리 부부가 한 말을 들었던 듯.

그런데.

“마음에 걸려?”

“조금.”

“문제 있으면 돌려줘. 아님 팔아서 기부하던가.”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차고에 내 차와 아내 차가 있다.

이 차는 어디에 두지?

차에 리연이 앉을 자리도 없고.

* * *

페라리는 결국 회사 주차장에 두었다.

지성이든 건하든 수혁이든.

타고 싶으면 타라고 열쇠를 내 사무실에 두었다.

상류층 사회 취재는 계속되었다.

오명성과 아는 사이가 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물론 그의 이복형 오기성을 만난 게 먼저겠지만.

내가 뭔가 질문을 하면 오명성의 대답을 받은 그의 비서가 즉시 취재원이나 취재 장소를 알려 주었다. 정확히 대한민국 1%만 오는 그런 장소.

오기성 감독을 통해서는 최상류층이 주로 입는 명품 메이커나 장신구, 자주 가는 식당과 백화점 등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최상류층 인사를 만나면 코어로 분석했다.

현재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문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오명성의 이름을 대자 최고급 마사지샵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서 만난 부유층 사모님들의 행태도 관찰하고 어떤 수다를 떠는지도 보았다. 코어로 확인하는 것은 물론.

근 두 달간 취재만 했다.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인 것은 맞았다.

서민과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확히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해 놓고, 그 안에서만 활동했다.

그들만의 유행이 있었고, 그들만의 서열이 있었다.

한국에서 손에 꼽는 대기업은 서열 1위권.

100위까지 서열이 있다면, 부동산 재벌 정도는 서열에 끼지도 못한다. 반명 유력 정치인과 법조계 명문가는 서열에 들어간다. 정치와 재계가 공생 관계라서.

하위 서열은 상위 서열 단골집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한다. 사모님들도 마찬가지. 동급이 되어 버리면 상위 서열 사모님들이 단골집을 바꾸기 때문에 단골집에서 미리 차단해 버린다.

최상위 서열 사모님들은 오히려 검소한 편이었다

서열 100위에서 20위 안에 드는 이들이 과시를 하거나, 서민들 속에 섞여 있다. 남편보다 한 끗발 낮은 가문에서 시집온 이들이다. 블랙코미디는 이 서열에서 나올 듯했다.

서열이 낮아도 씀씀이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상위 서열은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이고, 기준도 평균도 없다.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그런 것도 없다. 어려서부터 다 해 봤기 때문에. 돈 써 본 적 없는 사람들이나 돈을 물 쓰듯 쓴다는 느낌이다.

취재는 열심히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블랙코미디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데, 웃음이 날 부분이 별로 없었다. 관객들에게 위화감만 줄 뿐.

그래서 재벌가의 별종 캐릭터를 다시 구성했다.

회장도 모르는 회장의 혼외 자식이 재벌가에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며느리 역할의 서연은 그와 손을 잡고 일을 벌이게 되는 거고.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한 재벌가에 양아치가 들어온 셈이다.

거기에 막장 같은 재벌가의 비밀도 추가한다.

회장은 후천적 고자다. 현 장남과 차남은 회장의 친아들이 아니다. 갓난아기를 입양했다. 회장과 사모만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회장의 아들을 자처하는 자가 나타난다. 회장의 첫사랑이 자기 엄마라면서. 게다가 현 장남과 차남은 회장을 안 닮았고, 양아치는 회장과 빼닮았다.

회장은 자신의 친자임을 직감하고 일단 가문에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양아치의 행동이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장남의 차를 몰고 나가서 들이박지를 않나. 양아치 친구들을 저택에 불러 술판을 벌이지를 않나. 어디서 똥개를 끌고 와 사모님의 애견과 교배를 시키질 않나.

일상과 극단을 수시로 오간다.

양아치의 행동으로 인해 평소에 완벽하게 감추고 있었던 재벌가의 민낯이 속수무책으로 드러난다.

귀족의 품위가 벗겨졌을 때 보이는 인간의 치졸함과 얄팍함에 실소를 머금게 한다. 그럼에도 재벌가 인물들은 우아한 척을 하고 보통 사람보다도 못한 대처 양상을 보인다.

이런 인간들이 재벌들 모임에선 또 고상하게 예술을 논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논하니 우스울 뿐이다. 집에선 인성의 밑바닥을 보이고, 사회에선 지도층으로 존경받고.

이러한 재벌가의 균열을 그린다.

색감 대비도 준다. 재벌가 일원은 이상하게 겉옷은 흰색, 속옷은 검은색을 입는다. 서연이 맡을 재벌가 며느리만 겉옷은 검은색, 속옷은 흰색을 입고. 반면 양아치는 온통 노란색.

검은색은 권력과 지배. 품위와 격식. 그리고 외로움.

흰색은 순응과 순수. 정직과 자유. 그리고 새로움.

노란색은 정신과 지성. 희망과 행복 그리고 즐거움

겉옷과 속옷으로 외면과 내면을 은유한다.

상징성이 노골적이지만 일부러 이렇게 간다. 코미디 효과를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소품도 흑백 구조로 가고, 조명 톤도 그렇게 대조를 준다.

기본 설계를 해두고 전체 구성을 만들어 나갔다.

소재의 디테일은 재벌가 인물들이 해 주고, 주제는 여주인공이 짚어 간다. 재미는 양아치인 남자주인공이 담당하고.

구조적으로는 서부극 플롯이다.

한 마을에 방랑자 총잡이가 찾아온다. 그 마을 주민은 총잡이를 경계한다. 그러다 총잡이는 마을 주민이 악당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총잡이는 관여하지 않고 싶었으나 악당들이 총잡이를 위협한다. 이를 계기로 악당과 마을의 관계에서, 악당과 총잡이 및 마을의 관계로 변한다. 이에 총잡이는 악당과 싸워 이긴 뒤 홀연히 방랑의 길을 떠난다.

여기서 총잡이는 양아치. 마을은 재벌가 며느리.

악당은 재벌가 일원이다.

영화에선 양아치가 친자인지 아닌지 유전자 검사가 나올 때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앙숙이었던 장남과 차남은 한편이 되어 온갖 방법으로 유전자 검사를 방해하고, 양아치를 내쫓으려고 한다. 이 모든 상황에서 벌어질 코미디들이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여 갔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장면들도 만들어지고, 포복절도할 장면도 다섯 장면 정도 나왔다. 혀를 차는 장면과 헛웃음이 나올 장면도 있고, 절묘한 은유로 풍자한 장면도 두 개 건졌다.

서연이 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 난 장면.

그건 대체 어떤 장면일까 싶었다.

아주 중요한 장면이었기에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기억나는 부분이 그것뿐이라서 그랬을까.

이야기를 연결하다 보니 어떤 장면인지 알아냈다.

양아치는 결국 회장의 친자식으로 드러났다.

그 사실을 먼저 안 형제가 양아치를 사고사로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양아치가 여주인공의 벤츠를 매일 타고 다녔는데, 그날만 여주인공과 아이가 타고 있었던 거였다.

막장 드라마 같지만 코미디 풍자 효과를 높여 준다. 두 인물이 내내 헛발질만 하다가 자충수를 두는 장면이다. 멘붕에 빠진 형제가 결국 찾아낸 묘수라는 게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었던 거다. 그게 대사로 나온다.

그 차량 사고는 위기를 단박에 바꿀 전환점이었다.

그전까지 주인공들이 처하는 위기는 극에 달한다.

유전자 검사 결과는 번번이 날조되고, 두 주인공은 장남과 차남의 약점을 찾다가 발각된다. 게다가 둘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누명까지 써서 쫓겨나기 직전이었다.

이 일이 회장의 귀에 들어가면서 두 형제는 후계자 순위에서 밀려난다. 회장도 냉혈한이라 살인청부는 모르는 척했다.

이어 양아치는 재벌가의 일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고, 여주인공은 이혼하여 아이와 함께 자립한다.

코미디 포인트도 다 다르게 갔다.

양아치는 시원시원한 조롱과 상징적인 풍자.

재벌가 인물들은 의도치 않은 슬랩스틱.

여주인공은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한마디.

두 주인공 모두에게 감정이입이 가능하고, 남자와 여자 관객은 따로 남녀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한다. 남자들은 양아치가 재벌가의 위선을 깨부술 때 대리만족하고, 여자들은 여주인공의 자유와 해방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 같다.

저급한 코미디가 되지 않도록 굴리고 또 굴렸다. 소재 자체가 오락과 예술이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냥 웃다가 극장을 나서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슴에 뭔가 콕 박히는 영화여야 했다. 감동은 배제했다. 대신 여운이 길어야 했다.

이 영화는 모든 면에서 복합적이며 반어적이다.

상황이나 사건은 긴박한데 인물들과 앵글은 정물화처럼 차분하다. 트럭이 돌진하고 있는데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듯한 느낌. 고상한 태도로 앉아서 대화하는 두 사람이 살인 공모를 하고 있다거나.

스토리는 단순하고 흔하다. 그래야 영화 외적인 부분에 눈이 간다. 화면 구성만 봐도 부조리함과 조롱이 느껴지고, 연기와 대사의 괴리감만으로도 웃음이 나야 했다.

보통사람은 화장실에 가서 휴지가 없어야 웃기겠지만, 최상류층 인물은 공동화장실에 가야 하는 상황 자체가 웃음을 유발한다.

소소한 일로도 폭소를 터뜨릴 수 있는 장면이 정말 많았다. 인물이 최상류층이기에 그들이 겪지 않았던 일과 당황할 일을 불쑥 내밀면 웃기는 장면이 만들어진다.

인물들은 시종일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품위가 바닥을 친다. 그러한 부조화에서 나오는 웃음코드가 많다. 이런 웃음이 고급지다는 장점도 있었고.

그렇게 구성을 끝내고 시놉 작업을 시작했다.

* * *

3일에 걸쳐 무려 30장짜리 시놉시스를 써냈다.

중요 대사와 씬을 디테일하게 묘사해 놓았다.

그 시놉을 아내가 읽어 보았다.

내내 기다렸던 터라.

읽으면서 킥킥거리더니 어떤 장면에선 박수를 치며 웃었다.

“우아한 그림을 상상하면서 읽으니까, 너무 웃기다.”

“웃음의 강도가 약하지 않아?”

“전혀. 나 개그 프로그램 봐도 별로 안 웃는데 이건 진짜 웃겨. 무슨 느낌이냐 하면. 감독은 아주 진지한 영화를 찍었는데 관객들은 막 웃는 거야.”

“몹시 낭패겠는데.”

“딱 그런 느낌이야. 감독도, 배우도. 사람들이 왜 웃지? 싶은 거. 오빠가 찍어 봐야 알겠지만, 대사 없이 인물만 찍어도 웃길 것 같아. 어떻게 분위기가 이럴 수가 있지?”

“초반에 인물들 실체가 드러나게 설정해뒀어. 그 뒤로는 인물들 본색이 어떻다는 걸 아니까, 뭘 해도 웃긴 거지. 정말 가만히 있어도 웃기는 거 같아?”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인공 남편이 카페에서 우아하게 커피 마시는 장면 같은 거. 그렇게 앉아 있는 이유를 알고 나니 너무 웃긴 거야.”

씬 첫 장면은 멋진 모습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면.

그다음 장면은 10분 전 상황.

차남이 설사가 나서 급히 카페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일생일대의 멘붕에 빠진다. 화장실에서 난리를 치고 나와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거였다.

공용 화장실 앞에서 망설이다가 설사가 조금 샜다. 결국 들어갔는데 물수건으로 변기 청소하다가 또 찔끔 새고. 그나마도 앉지를 못해서 엉거주춤 변을 본다. 푸다다닥! 설사 터지는 소리까지 나고.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화장실에서 나와서 그냥 가도 되는데, 굳이 커피를 주문하는 것도 재밌어.”

“어떤 심리인지 알 것 같지?”

“응. 매너에 집착하는 모습. 화장실에서 나와선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는 장면 보고 어찌나 웃기던지. 커피 마시고 나갈 때는 젖은 팬티 자국 보고 빵 터졌어. 팬티를 빨았다는 건 알겠는데 그걸 또 왜 입어?”

“노팬티는 품위가 없거든.”

아내가 말을 이었다.

“이 장면 이후로 이 남자가 나오기만 하면 웃겨. 시놉에선 몇 장면 없지만 영화로 보면 진짜 웃길 것 같아. 도입부나 전개부에 이런 식으로 인물을 소개해 놓으면 뭘 해도 빵빵 터지겠다. 그냥 앉아 있어도 웃음이 나거든.”

이 에피소드는 실화다.

내가 만난 어떤 사모님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다.

젖은 팬티는 내가 넣었고.

그 외에 코어를 통해 발견한 사건 사고가 많다. 대부분 위선 떨다가 벌어진 일. 격식 차리다 자기 발에 자기가 넘어지는 소동이었다. 융통성 없는 걸로 따지면 부자가 더하다.

“오빠, 이 영화 흥행도 하고 상도 받을 것 같아.”

“그런 느낌이 와?”

“오빠 앞에서 이런 말은 좀 쑥스러운데. 인간의 위선에 대한 통찰이 담긴 것 같아. 근엄하신 분들도 실컷 웃을 것 같고. 대체로 품격이 있어서 예술성도 높아 보여.”

“여주인공이 마음에 드니 다행이네.”

“또 묘한 느낌이 하나 있어.”

“뭔데?”

“앞서 설정해서 그런 건지. 영화 속 인물들이 관객에게 자신의 위선이 들통 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한 느낌이야. 인물은 우아하려고 애쓰는데, 관객은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웃기기만 하고.”

이건 저절로 발생한 뉘앙스다.

아내가 받은 인물의 느낌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서 그런 거다. 그런 느낌을 준다면 서연이 말대로 인물이 뭘 해도 웃기게 된다.

기분 좋게 쉬었다.

웃기는 에피소드를 최대한 굴리려고 했는데, 그런 걸 만들어서 집어넣으면 영화를 망칠 것 같다. 과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한 작품이 되고 만다.

아내가 조언한 것도 참고했다.

인물들의 내면 연기가 아주 뛰어나면 영화가 성공한다.

이번 영화는 내 느낌에 대표작이 될 것 같다.

플랜도, 갓필드도, 블루드 워도 아닌.

미장센과 소품에 정말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

음악도 신경을 써야 하고.

앵글로 은유를 담고 화면만으로 웃음을 줄 수도 있기에 준비할 것이 정말 많았다.

프리 프로덕션만 6개월 이상 걸릴지도 모르겠다.

제작비도 150억은 들 것 같고.

명배우를 캐스팅해야 하고 소품도 죄다 초고가라서 어쩔 수가 없다. 빌려서 찍어도 그 정도다.

하루를 쉰 뒤.

바로 시나리오 집필에 들어갔다.

* * *

3일 만에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영화 분위기가 묘했다.

매우 정적인데 심리 상황은 동적이다. 불꽃이 튄다.

쓰고 나니 실실 웃음이 났다.

웃긴 장면이 정말 많다. 아내 말대로 그냥 앉아 있어도 웃음이 난다. 영화로 보면 얼마나 웃길지 상상이 갔다.

장면 장면에 웃긴 요소가 계속 있어서 관객이 2시간 내내 웃는 상을 지을 것 같다. 그냥 웃다가 그치는 게 아니라 마지막에 주인공들이 승리한다. 카타르시스도 있고 만족감도 있다.

평론가분들이 코미디 영화로 치부하기엔 주제도 묵직하다. 관객에게 만족을 선사했다고 상업 영화로 단정하기엔 주제가 가볍지 않다. 아내 말대로 난 아주 진지한 영화를 만들었다. 관객이 웃어서 그렇지.

시나리오를 쓰고 늘 만족하지만 이번엔 유난히 애정이 컸다. 웃음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웃음을 주는 사람도 그렇다. 또한 웃고 난 뒤에 관객에게 지적인 쾌감도 주고.

어떤 영화가 될지 조목조목 짚어 보았다.

나중에 수정하면 늦으니까.

영상미와 미장센은 최고 수준이 될 것 같다.

배우들 연기력도 정말 자신한다. 서연이만 잘하면.

주제 의식은 날카로우면서도 유연하다.

풍자와 해학에 나름의 격조가 있다.

상류층 사회의 일면도 매우 리얼하다.

스토리는 막장 같아서 오히려 주제를 부각한다.

웃긴 장면이 많아서 흥행성도 있다.

영화의 완성도가 꽤 높아서 작품성도 있다.

인간과 특정 사회를 조명한 터라 예술성도 있다.

명대사도 많다.

캐릭터는 여주인공 빼고 모두 개성 있다.

여주인공은 유일한 정상인이기에 일부러 무난하게 갔다.

하나하나 검토하니 걸리는 게 없다.

정말 내 대표작이 될 것만 같다.

내 경력을 따지면 이제 하나쯤 나올 때도 됐고.

시나리오를 출력했다.

회사에 가서 수혁이와 이야기를 좀 해 볼 참이었다.

시나리오를 크게 수정하진 않겠지만 수혁이가 내는 아이디어도 있을 테니까. 오기성 감독과도 이야기를 해 보고.

출력한 ‘책’ 4부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내가 내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어째 웃는 소리가 난다 했더니.

“아! 너무 웃겨!”

아내가 날 보며 박수를 쳐댔다.

내 시나리오를 읽고 있었다.

어찌나 웃었는지 눈물이 찔끔 난 모습.

“무슨 장면인데?”

“양 씨가 소리 크게 틀어 놓고 야동 보는 장면. 재벌집 사람들이 놀라서 허둥지둥하는 게 너무 웃기다.”

“그거 별로 안 웃긴데.”

“양 씨는 평소에 하던 대로 하는데 가족들은 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충격적이라는 게 웃겨. 양 씨가 처음 왔을 때 밥 먹다가 코 파는 걸 보고 경악하는 반응도 그렇고. 이렇게 나올 줄은 알았는데 상상하니까 더 웃긴 거 있지. 영화로 나오면 한 10배는 더 웃기겠다.”

코미디든 뭐든 감정이 쌓이면 증폭 효과가 나는 거다.

양아치로 인해 품위와 질서가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웃음 코드가 있다.

“회사 다녀올게.”

“응.”

아내가 소파에 앉아 있는 리연이를 안고 마중 나왔다.

날 보며 웃는 리연이에게 뽀뽀를 해준 뒤 집을 나섰다.

* * *

“하하하하!”

“아, 미치겠네.”

내 앞에 앉은 수혁이와 승철이가 정신없이 웃고 있다. 처음엔 어떤 작품인가 싶더니 10페이지 넘어가자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장면들이 연상된다는 말이다.

“캐릭터가 기가 막히네요.”

“그지? 양 씨는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해도, 장남과 차남은 진짜 골 때리네. 똑똑한 사람이 당황하면 이러는 건가.”

“캐릭터 코미디네요. 여주 남편이 카페에서 똥 싼 다음부터 위선 떠는 게 보여서 더 웃깁니다. 여주에게 화를 낼 때는 어째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회장님이 들을까 봐 그러나?”

서연과 똑같은 반응이다.

“회장이 아니라 관객.”

“예?”

“관객?”

수혁이와 박승철 감독이 날 의아하게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싶은 거다.

지금 영화를 보고 한 말이 아니다.

글을 보면서 영상을 떠올릴 뿐이다.

“인물이 관객 눈치를 본다고요?”

“두 사람이 그걸 느낀 거지.”

“시나리오에 그런 건 없는데?”

“위선이 들통 날까 봐, 자신의 추한 모습을 누가 볼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보여서 그래.”

“아!”

승철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영화적 효과는 처음 보는 걸 거다.

캐릭터가 너무 생생하면 스크린을 뚫고 나온다.

작가가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제멋대로 움직이기도 하고.

물론 캐릭터는 보는 사람이 형성하는 거지만.

“묘한 현상이네.”

“영화로 그렇게 찍을 건 아니죠?”

“아니지. 관객도 그런 느낌을 받을 거야.”

“이러니 보는 내내 실실 웃음이 나오지.”

“마저 읽어 봐.”

두 사람은 다시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두 사람이 소리를 내든 안 내든 계속 웃음 짓고 있다. 옛날 만화방에서 큭큭대며 만화를 보던 동창 놈들이 생각난다. 그 모습이랑 똑같다.

두 사람이 시나리오를 다 읽었다.

여전히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형님. 이거 진짭니다. 형님 영화 중에 가장 좋아요.”

“플랜보다 좋아?”

“전체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좋네요. 프랑스식 코미디를 본다고 할까. 외국의 명장이 만든 수준 높은 코미디 같습니다. 형님도 명장이긴 하지만.”

수혁이도 말했다.

“저는 코미디보다 상류층 사회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놀랍네요. 그걸 직설적으로 보여 주지 않고 코미디로 승화했다는 점이 기가 막힙니다. 저는 정말 한참 멀었네요.”

승철이가 다시 말했다.

“형님은 형님 영화 세계를 만든 거고, 너도 네 영화 세계를 만들면 되는 거야. 나는 아직 만들어 가는 중이지만.”

“승철이 말이 맞다. 고유의 세계가 있는 거지.”

셋이 환하게 웃었다.

이 작품 정말 공들여 찍어야겠다.

과연 이 영화는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 * *

또 오기성 감독을 만났다.

맥주나 한잔하자며 불러내더니 본인 제작사로 날 데리고 갔다. 본인 소유 건물에 제작사가 있었다.

“직원도 없는데 왜 이리 사무실이 커?”

“어차피 공실도 많은데 뭐 어때. 요즘 사무실 임대업도 잘 안 돼. 엄마는 창고로 임대하라고 그러는데, 건물 로비가 너저분해져. 박스가 어찌나 쌓이던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직원은 달랑 4명.

제작부장과 회계 담당 경리. 제작부와 연출부.

오 감독이 씩 웃었다.

“로큐에 비하면 구멍가게지.”

“기본 관객이 있으니까, 이 정도도 충분하지.”

“시나리오 썼다며?”

“한번 볼 텨?”

“좋지.”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꺼냈다.

호된 비평이라도 할 참인지 바로 앉았다.

난 소파에 앉아 사 온 캔맥주를 홀짝거렸다.

“책이 더 있으면 저도 볼 수 있을까요?”

“그러시죠.”

제작부장도 호기심을 보여서 한 부 내밀었다.

연출부도 쭈뼛거리며 다가와 책을 청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시나리오를 읽었다.

제작부원이 중국요리를 잔뜩 시켰다.

나머지 세 명은 탁자에 둘러앉아 깐풍기와 팔보채 따위를 먹었다. 제작부원과는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오 감독과는 얼마나 됐어요?”

“두 작품 했어요. 그런데 저 실례지만, 혹시 로큐에 제작부 자리 좀 없을까요?”

“예?”

“너무 심심해요. 일도 없는데 월급만 받고 있네요.”

제작부장이 대화를 듣고 낄낄댔다.

오기성은 들은 채 만 채 책만 읽고 있고.

이 사무실 분위기가 그만큼 좋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책을 읽는 세 사람의 표정이 영 딴판이다.

제작부장과 연출부는 키득거리면서 읽는데, 오기성은 심드렁한 표정이다. 가끔 두 사람을 힐끔거리는 걸 보니 왜 웃나 싶은 얼굴. 일부러 안 웃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거 진짜 웃기네요. 시나리오로 웃기면 영화에선 얼마나 웃긴다는 거야?”

“최 감독님 시나리오를 본 건 처음인데, 이렇게 직관적으로 영상이 떠오르게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웃기긴 웃기네요. 말장난이 아니라 캐릭터와 상황 코미디라 상당히 고급스럽습니다.”

옆에 앉은 오기성이 앓는 소리를 내며 책을 보았다.

두 사람은 소감까지 말해 가며 읽는데, 오 감독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다. 자기만 이상한 건가 싶다.

결국 두 사람이 먼저 읽고 탁자로 왔다. 둘 다 환한 얼굴이다. 한바탕 신 나게 놀고 온 듯한 얼굴. 입이 귀에 걸렸다.

“빨리 영화 보고 싶네요. 이런 류의 코미디 영화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최 감독님은 코미디도 예술적이네요. 뭐든 했다 하면 새로운 걸 만들어 버립니다. 아비도 때만 해도 작가주의 감독님인 줄 알았는데, 갓 필드는 상업영화의 극을 달리더라고요. 역시 명감독은 장르나 상업과 예술의 구분이 없다니까.”

“그냥 좋은 영화를 찍는 거죠.”

“아, 조용히 좀 해! 집중 좀 하게!”

오기성이 버럭 성질을 냈다.

직원들을 킥킥대며 음식을 먹고.

잘 읽히지도 않는지 30분이 넘어서야 오 감독이 겨우 시나리오를 완독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날 보더니 내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어떤 말이 나올지 대충 감 잡았다.

“재미없나 봐?”

“나하곤 안 맞네.”

“코미디 싫어해?”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닌데. 뭐랄까. 좋은 재료를 가지고 평범한 요리를 만들었다고 할까. 이건 뭐, 상류층 사람들은 죄다 바보로 만들어 놨잖아. 엄연히 현실 왜곡이지.”

“그놈의 현실은 코미디에서도 찾아?”

오기성 감독에겐 재미없었나 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최상류층의 비열하고 오만하고 재수 없는 면을 부각해서 그들이 이 사회를 움직이는 현실을 묘사해야지, 희화화하면 가볍게 보이잖아? 뭐, 디테일은 있을 법한데 최상류층 느낌이 안 살아. 이상한 사람들만 만난 거야?”

“당신은 블랙코미디의 의미를 몰라?”

“그러니까, 왜 코미디를 하냐고. 그냥 그런 놈들 잡아 죽이는 연쇄살인마 이야기를 하지. 그 왜, 아메리칸 사이코라고. 주인공이 상류층 인물인데 살인마로 나오는.”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든지.”

오기성이 짜증 난 얼굴로 깐풍기를 씹었다.

진심으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반면 직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고 있고.

제작부장이 오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이 소재는 블랙코미디로 하는 게 맞습니다. 최 감독님이 가장 잘하시는 걸 하는 거죠. 감독님은 본인 스타일에 안 맞을 뿐이고요.”

“인물들이 머저리처럼 나오는 게 재밌어? 현실에는 그런 인물들 없어. 얼마나 비정하고 냉정하고 계산적인데.”

“감독님이 재벌가 출신이라 그런 건 아니고요?”

“나도 재벌가 싫어해. 거들먹거리는 부자 놈들 죽이는 살인마 이야기가 더 재밌다고.”

“감독님만 재밌으면 뭘 합니까. 관객이 안 드는데.”

“돈이나 벌겠다고 이런 가벼운 작품이나 만드는 것보다야 낫지. 웃기지도 않고 설정도 너무 눈에 띄어서 거슬리기만 하구만. 게다가 스토리는 그게 뭐야? 회장의 장남과 차남이 입양아라는 게 말이 돼? 억지로 끼워 맞춘 거지. 줄거리 자체가 어이가 없는데 무슨 고급이야.”

열변을 토하던 오 감독이 그제야 내 얼굴을 봤다.

직원들은 슬쩍 긴장하고.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싸늘해진 분위기는 금세 사라져 버리고.

“오 감독.”

“뭐? 화났어?”

“당신은 그렇게 대중성이 없어서 어떡해?”

“뭘 어떡해? 내 스타일대로 찍는 거지.”

“당신의 영화관은 그렇다고 쳐. 직원들은 무슨 죄야?”

“직원들이 뭐? 월급 잘 나오지. 3년에 두 편은 찍지. 제작 때만 바짝 일하고 나머지는 놀지. 얼마나 좋은 직장이야.”

오 감독의 말에 직원들의 입이 슬쩍 나왔다.

이 인간은 원래부터 본인 위주 같다.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

“직장인은 노는 것보다 월급 더 받는 걸 좋아해. 월급보다 칼퇴근하는 걸 더 좋아하고. 직원들이 몇 개월씩 노는 게 좋을까. 영화 잘돼서 보너스 두둑하게 받는 게 좋을까?”

“제작비도 없는데 무슨 보너스?”

“에효…….”

여기저기서 한숨이 나온다.

그런 직원들을 보다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오기성은 본인 위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작사나 영화계 흐름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다.

“내 영화를 예를 들어 볼게. 플랜 때는 직원들이 성과급으로 월급의 1000%를 받았고, 갓 필드는 보너스가 500%였어. 조감독과 팀장급만 해도 흥행 배분으로 2억을 받았고. 스태프들 보너스도 최소 천만 원이 넘어.”

오기성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조 감독에게 2억을 줘? 왜?”

“왜긴 왜야. 흥행 배분 계약을 했으니까. 관객이 2천만이 들었는데 그럼 제작사만 수익보고 입을 씻어?”

“스태프들도 그런 계약을 한다고?”

“당연하지. 로큐 스태프들은 한 작품당 기본이 2천이야. 그것도 일 년에 두 작품씩 찍고.”

“세상에!”

경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제작부장과 제작부, 연출부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제작부원이 로큐에 자리가 있나 물어보지.

“그렇게 주고도 이익이 돼?”

“해외 판권 포함하면 2천억, 3천억이지. 갓 필드는 최종 4천억까지 수익이 났고. 블루드 워 2편은 전 세계 흥행 수익이 8억 달러 가까이 돼. 아바타 다음으로 좋았으니까.”

“헉!”

둘러앉은 일동이 일제히 경악했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툭-

오기성의 젓가락에서 깐풍기가 떨어졌다.

얼굴을 보니 정말 놀란 모양이다.

“지금 뻥치는 거 아니지?”

“로큐 주식 담당에게 물어봐. 실적 그대로 말해 주니까.”

오기성을 비롯한 직원들 표정이 복잡해졌다.

오 감독은 진지하게 자신의 영화관을 생각하는 것 같고, 직원들은 심각하게 이직을 고려하는 것 같고.

오기성이 물었다.

“영화 한 편 찍어서 3천억이나 번단 말이지?”

“이젠 내 작품을 우선 사고 보는 바이어들이 많으니까. 당신 작품도 해외에서 인기 있잖아?”

“인기는 있는데 흥행 수입은 거의 없어.”

“왜?”

“내 해외 팬들은 죄다 DVD로 봐서.”

“하하하하!”

진심으로 안타까워서 웃겼다.

그러니까, 오 감독 영화는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성적이 신통치 않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300만 들었다면 해외 각국 성적은 30만 내외다.

극장주와 바이어는 돈을 벌려고 영화를 선택한다.

돈 안 되는 영화가 안 팔리는 건 당연하고.

그러니 DVD 같은 부가판권만 파는 거지.

“돈에 연연하지 않을 것 같더니 심각해 보이네?”

“으흠.”

오기성이 헛기침을 하고 소주를 마셨다.

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돈을 그 정도로 번다면 상업영화도 해 볼 만하네.”

“영화 찍으면서 비즈니스 개념은 아예 없었어?”

제작부장이 거들었다.

“감독님은 한국 영화 잘 안 봐요. 타락한다면서.”

“타락? 하하하하!”

오늘 이래저래 웃음이 터진다.

본인이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이거지.

오기성이 말했다.

“그건 농담이고, 상업영화는 좀 유치해. 치열한 고민도 없이 영화 막 찍는 거 같고. 재미도 없어.”

“천만 영화도 그래? 재미없고 유치해?”

“난 그냥 그렇던데.”

“그럼 원래 하던 대로 해. 흥행 영화는 좀 힘들겠다.”

웃으며 소주를 마셨다.

오기성이 날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당신이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뭘?”

“지금 작업 중인 시나리오.”

“내가 왜? 돈 많은 당신이 특급 작가 불러서 쓰면 되지.”

“내 작품을 왜 작가에게 맡겨? 당신이면 몰라도.”

“댁은 뭐 해 줄 건데?”

“돈 줄게. 한 5천만 원?”

“에휴…….”

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진다.

이 영화계 무지렁이 감독을 보라.

바보인지. 천재인지, 어린애인지.

제작부장이 보다 못 해 나섰다.

“최 감독님은 거의 1조 원대 부자세요. 로큐와 플래닛 케이 지분만 해도 그런데, 미국에 있는 네오스타 스튜디오까지 합치면 3조 원대로 넘어갑니다. 그런 분이 5천만 원 받고 시나리오를 써요?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3조 원대? 최 감독이?”

“돈에 연연하지 않는 오기성 감독은 3조 원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 삼지전자 연간 영업이익이 30조가 넘더라. 삼지가 패밀리로서 아주 가소롭지?”

“그래, 실컷 놀려라.”

오기성에게 소주를 따라 주었다.

그가 물었다.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 왜 SUV를 타고 다녀? 옷도 티셔츠만 입고 다니고.”

“페이스북 사장님 마크 주커버그는 왜 같은 티셔츠만 입을까? 내가 편한 옷이 가장 좋은 옷이거든. 과시를 안 해도 남들이 부자인 걸 아니까 그런 거지.”

“그걸 누가 모르나. 그럼 내가 뭘 해 주면 도와줄래?”

“댁이 알아서 해야지, 내가 돕긴 뭘 도와? 흥행에 욕심은 좀 나나 봐?”

“인식이 바뀐 건 있어. 상업영화도 하고, 나만의 영화도 하고. 직원들 모두 로큐로 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제작부원이 말했다.

“로큐 경쟁률이 얼마나 심한데요. 웬만한 경력이나 실력이 아니면 낙하산도 못 타요. 최 감독님이 오셨으니 나도 슬쩍 말씀을 드린 거죠.”

“맞습니다. 솔직히 저희도 로큐에 가고 싶긴 합니다. 의리 때문에 감독님 옆에 붙어 있었던 거고요. 제작부장으로서 투자받느라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점만 해도 얼마나 좋은 직장인데요. 그래서 직원들이 다들 모인 거 아닙니까.”

“최 감독 온다고 모인 거야?”

“당연하죠. 일도 없는데 뭐 하러 출근을 합니까?”

오기성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에서 나온다. 다만, 그 세계관 속에서만 살아서 영화계의 현실을 너무 모른다. 만나는 사람도 정해져 있는 것 같고.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

“오 감독. 내가 제안 하나 하지.”

“뭔데?”

“비슷한 주제로 각자 다른 영화를 만드는 건 어때?”

“비슷한 주제? 상류층 사회 말이야?”

“그래. 아까 말한 상류층 살인마. 악인을 주인공으로 가 보는 거지. 지금까지 진행한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데 그건 일단 묵혀 놓고.”

“저는 찬성입니다.”

“재밌을 것 같은데요?”

“흠…….”

오 감독이 고민하며 턱을 매만졌다.

한마디 더 했다.

“대신 내가 그 시나리오에 각색으로 들어갈게. 당신 영화관은 안 건드려. 구성만 조금 손보면 될 거야.”

“나는 뭘 해 주고?”

“내 조감독.”

“뭐!”

오기성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직원들은 대체 뭔 소린가 싶고.

“농담이야. 비주얼 디렉터를 맡아 줘. 미국식으로 촬영 및 조명 감독인 셈이지. 난 당신 작품의 스토리 디렉터를 맡고.”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이유가 뭐야?”

“당신 특유의 영상을 써먹으려고.”

말은 안 했지만 영상미와 앵글, 미장센은 오 감독이 나보다 낫다. 난 전문적인 연출 공부를 안 했다. 학교에선 현장 이론만 공부했을 뿐이고. 반면 오기성은 유학파다.

난 스토리텔링에 능하고, 오기성은 영상 미학에 강하다. 스토리텔링은 대중친화적. 영상 미학은 예술친화적이다.

영화 스타일이 다른 이유도 그 영향이다.

따라서 나와 오 감독이 협업한다면 시너지가 난다.

내게 부족한 영상. 오 감독에게 부족한 구성.

서로에게 부족한 걸 채워 줄 수가 있다.

“어때? 비슷한 주제로 다른 이야기를 해서 평가를 받아 보자고. 평론과 대중 모두에게. 대신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는 거야. 서로 잘되자고 하는 거니까.”

“그래도 내가 당신 밑에 들어가는 건…….”

오기성 표정이 웃겼다.

억울한 일을 당한 소년 같은.

“누가 들어오래? 협업하자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두 작품에 협업 감독으로 이름을 넣자고.”

제작부장이 말했다.

“저는 대찬성입니다. 최 감독님의 대중성을 전수받으면 감독님 영화도 조금 달라질 수 있어요. 팬들도 뭐라 안 할 겁니다. 팬들은 두 분 감독님을 다 좋아하니까요.”

“저도요.”

“저도 꼭 했으면 좋겠네요.”

오기성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아. 조감독으로 타이틀 올리면 죽는다?”

“당신 하는 거 봐서. 하하하하!”

다들 표정이 밝아졌다.

오 감독이 다시 말했다.

“내기라면 내기인데 뭘 걸래?”

“진 사람이 10회 대리운전 해주기.”

“열 번이나?”

“질 것 같아서 그러지?”

“무슨 소리! 승패 기준이 뭐야?”

“흥행은 당신이 좀 불리하니까, 당신이 400만 먹고 들어가. 평론은 내가 불리하니까, 토마토 평점 20%는 내가 먹고 들어가지.”

“그냥 공평하게 하면 안 되나?”

“흥행 800만 넘을 자신 있어?”

이 인간은 꼭 현실을 말해 줘야 아나.

“쩝. 원래대로 해. 난 400만 먹고 들어가고. 당신은 평점 10% 깔고. 당신 평점도 높다고.”

“그러던가.”

“합의.”

“오케이.”

오 감독과 피스트 펀치를 나누었다.

그가 술잔을 들었다.

“자! 건배하자고. 우리 두 영화를 위하여!”

“위하여!”

다들 밝은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조짐이 좋다.

업무량은 오 감독이 훨씬 크지만, 스토리를 만져 주는 것은 흥행에 큰 영향을 준다. 서로에게 배우는 것도 있고.

* * *

다음날부터 오기성의 제작사에 출근했다.

아웃사이더 픽쳐스다.

흥행 안 되는 영화 제작사답다.

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로큐와 합작 형태로 투자도 로큐가 한다.

나는 공동제작과 각본, 협업 감독 타이틀이 오른다.

당연히 내 필모그래피에도 들어가고.

내 영화를 먼저 할지. 오 감독 영화를 먼저 할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장르 특성상 오 감독 영화를 먼저 공개하는 게 나을 것 같긴 했다. 냉엄한 현실을 먼저 보여주고, 그 현실을 풍자하는 구도가 되기에. 협업 2부작이라고 할까.

어쨌든 매일 시나리오 회의를 하고 줄거리와 캐릭터 등을 같이 잡아 나갔다. 예상은 했지만 오기성은 시나리오의 기본 작법만 알 뿐, 고도의 구성 능력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참신하고 독창적인지도 모르겠다만.

뭔가 구성을 하면 왜 그래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지금은 내가 가르치는 형국이지만, 스토리보드를 작성할 땐 내가 배우는 입장이 된다. 그래서 오 감독도 발끈하진 않았다.

오 감독이 생각한 첫 줄거리는 이랬다.

재벌 4세가 우연히 사람을 죽인 뒤 점점 살인에 중독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모든 쾌락을 겪어 본 인물이 살인이라는 극한의 쾌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심리를 담았다.

내 영화 주제와 비슷하다.

최상류층의 위선과 욕망의 근원을 통찰한다는 점.

하나는 코미디로 풀어서 풍자하지만, 다른 하나는 인간의 욕망을 날것 그대로 파헤친다.

오기성 특유의 건조하고 감정이 담기지 않은 영화 플롯과 줄거리다. 과연 천재 감독다웠다. 스토리는 평범하지만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무척 심오하고 영상 표현은 강렬했다.

매우 잔인하고 거침없다. 인간성이라곤 보이지 않고, 따뜻함도 없다. 파멸되어 가는 인간을 철저히 해부할 뿐.

주변 인물들은 모두 추악하기만 하고, 악인은 더 큰 악을 죽인다. 응징이 아니라 본인의 쾌락을 위한 살인이다.

그런 점도 내 영화와 다르다.

이 내용을 내가 개입하여 바꿔 나갔다.

오기성의 영화관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를테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라고 살인의 명분을 넣는 것. 그런 식으로 관객의 공감을 얻으려는 것은 주제를 흔드는 부분이다.

오기성이 이런 걸 싫어하기 때문에 상업영화를 보면 오글거린다고 하는 거다. 보편적인 정서도 뻔해서 싫다고 하고. 착한 것도 재미없어하고. 반항아의 심리와 똑같다.

나도 노골적이면 닭살 돋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있어야 대중적이다.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취향을 가진 이들은 대중 전체로는 비중이 낮기 때문에.

범죄 행위에 대한 대리만족만 준다.

나쁜 일이라도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범죄에 대한 대리만족은 있다. 모든 인간에겐 선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왕 하는 거 최악의 빌런 주인공을 만들어 보는 거다.

악인이지만 매력 터지는 주인공. 착한 주인공이 사람 때리면 욕먹지만, 나쁜 주인공이 더 나쁜 놈 패면 쾌감이 올라온다.

권선징악도 없다.

주인공이 체포되거나, 스스로 죽는 일도 없다. 사회를 충격에 빠트려 놓고는 사라질 뿐이다. 완전범죄다.

관객이 악당이 되어 날뛰는 꿈을 꾸듯.

이처럼 오 감독의 영화 철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상업 영화와 같은 구성을 쌓아 갔다. 오 감독 스타일에 없는 갈등과 위기도 만들어갔다. 주인공을 쫓는 자는 형사가 아닌 청부업자다. 경찰과 싸우면 관객이 동요하게 된다.

살인자의 심리를 복층적으로 다루면서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게 한다. 관객이 과하게 불편하지 않고, 살인 장면도 기분 좋거나 그러지는 않는 수준에서 줄타기를 했다. 관객이 저 인간은 어떻게 좀 했으면 좋겠다 싶은 인간만 처단했다.

하여 관객은 주인공과 동화되어 간다.

같은 고민에 빠지고 심리적으로도 흔들린다.

공범이 되었다고 할까.

여기에 주인공이 재벌가에서 비정상으로 자랐던 과거를 보여 준다. 그 불쌍한 아이가 이런 어른이 되었다고.

연민을 일으킬 최소한의 동기다.

최상류층 사회의 추악한 현실을 보여 줘서 주인공만 비정상인 건 아니라는 점을 짚어준다.

그렇게 모든 구성과 설정 및 시놉을 끝낸 뒤.

함께 시나리오를 써서 완성했다.

나도 오 감독도 시나리오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로선 색다른 경험이었고, 오 감독은 신세계를 맛봤다. 내 각본 작업을 무척이나 신기해했으니.

“와… 이거 충격적이네요.”

시나리오를 본 수혁이의 첫 마디였다.

이 영화가 한국 사회에 정말 충격을 줄지도 모르겠다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가 최초로 흥행한 것으로.

혹은 초유의 문제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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