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영화계 괴짜 감독
회사 직원 십수 명이 둘러앉아 영화를 보았다.
다들 예능 보듯 영화를 보다가 사연이 하나 둘 나오는 시점부터 진지해졌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참가자들의 사연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남의 사연을 듣는다는 건 원래 시큰둥한 일이다. 그저 출연자일 뿐인데다 영화 내용과도 상관없고. 그래서 다들 그냥 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사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영화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위기나 갈등 때문이다. 그로 인한 감정이 생긴다. 주인공의 사연과 목적을 알게 되면서 애정을 가지게 되고 응원하게 된다.
이번 영화에는 사연이 그 역할을 했다.
2,000명의 이야기 중 가장 재밌고 인상 깊었던 것만 모았으니 희로애락이 다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 20명의 크고 작은 사연을 들으며 조금씩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사연을 듣고 마음에 약간의 울림이 발생하고, 사연이 늘어날수록 울림은 파문으로 번져간다.
점점 더 ‘강한’ 사연이 추가되고, 파문 역시 커진다. 그런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하나 둘 2라운드에 진출하면서 결과가 궁금해진다.
중후반으로 가면서 영화의 집중도도 달라졌다.
게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내가 편집에 공을 들였던 이들의 사연도 차츰 공개된다.
직원들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한 남자 직원은 노숙자였던 40대 남자의 사연에 깊은 울림을 느꼈고, 여직원들은 암에 걸린 어머니 이야기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거기까지가 감정이 쌓일 대로 쌓인 시점이었다.
그쯤 되니 게임이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슨 게임을 하든 그 사람이 부디 해냈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그리고 고시원 아저씨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직원들 모두가 숙연해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무도 울지 않았다.
마침내 게임이 끝나고 마지막 장면.
1등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한마디씩 하는 컷이다.
집단 감정의 전이를 일으키려고 일부러 헤어지기 전에 모아 놓고 찍었던 장면이다. 동원된 카메라만 50대.
그들 한 명 한 명이 소감이나 하고 싶은 말을 외치면서 점점 화면을 채우기 시작한다. 참가자들의 얼굴을 화면에 채워 넣는 모자이크 방식이다.
“사랑해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엄마 사랑해!”
“우리 아들! 아빠가 사랑한다!”
“여보! 사랑해! 영원히!”
“은진아! 오빠가 정말 사랑한다!”
“엄마, 아빠! 막내딸이 사랑해요!”
“우리 사랑하고 삽시다!”
자신의 소감을 말하던 초반과 달리 중반으로 가자 다들 사랑한다는 말로 넘쳐났다. 앞사람과 옆 사람이 사랑한다고 외치자 저마다 같은 감정이 되어 외쳤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 행복하게 살자는 말은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근원적인 울림을 준다. 그 바람에 울컥 복받친 참가자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이 감정에 동요된 것과 마찬가지로.
직원들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 것도 그때부터다.
고시원 아저씨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다들 감정이 쌓이기만 하고 막혀 있었다. 그런 감정들이 참가자들의 진심 어린 외침을 들으면서 일시에 뚫려 버렸다.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내 친구 영수야! 우리 평생 같이 가자!”
“엄마! 내가 돈 벌어서 행복하게 해줄게!”
“우리 모두 잘살아요! 아프지 말고!”
“여보! 이제 내가 잘할 게!”
“진경아! 나 아직도 널 사랑해! 우리 다시 만나자!”
“정말 행복합니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 나요!”
“여러분! 힘내세요! 세상 살아갈 만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저마다 외치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 참가자.
그는 웃으며 울고 있었다.
“열심히 살게요. 고맙습니다.”
화면 가득 채워진 2,000명.
대부분이 눈물을 쏟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리고 메이킹 영상이 이어졌다.
세트를 짓고 게임 준비를 하고 참가자들이 하나 둘 모이는 영상. 그 옆으로는 크레디트가 오르기 시작하고.
직원 중 8명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누군가가 미소를 짓는다면 보는 사람도 미소 짓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웃고 있으면 나도 웃음이 나온다.
사랑한다고 외치며 우는 사람들을 본다면 그 마음이 전해져 나도 울음이 난다. 행복한 마음은 전이된다. 행복한 걸 보아도 행복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이번 영화는 단합대회를 겸하여 돈을 벌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그들의 행복한 마음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행복과 사랑의 기운이 흐르도록.
“다큐 어떻게 봤어?”
직원들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좋네요. 제가 다 행복해진 기분이에요.”
“촬영할 땐 참가자들이 왜 우는 거지? 그랬거든요. 지금 보니까 왜 그랬는지 알겠네요.”
“보통 사람들 이야기라 더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허구지만, 저분들 이야기는 진짜잖아요.”
“저는 저분들이 말하는 사랑과 행복이 진심 같아서 좋았어요. 진실 되게 말하니까, 느낌이 확실히 다르네요.”
직원들 감상은 비슷했다.
감격이나 감동의 눈물은 아니었다.
삶에 대한 공감과 행복한 느낌의 눈물이다.
그래서 아내도 날 가만히 안았던 거였고.
“혹시 가족이나 애인이 생각났어?”
“저요. 전 부모님한테 잘해야겠다 싶었어요.”
“저도 그런데.”
“저도 집에 있는 가족이 먼저 생각나더군요. 집사람한테 이 영화 보여 주고 싶네요. 사랑이 깊어지는 느낌입니다.”
수혁이가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게임은 그냥 그림을 만드는 수단에 불과했네요. 참가자들 사연을 들었던 것도 마지막 외침의 진정성을 주기 위해 필요했던 거고요.”
“몰랐어?”
“솔직히 촬영 전에는 몰랐어요. 진심을 담은 인터뷰를 하라고 해서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편집하시나 보다 했죠. 참가자들이 우는 거 보고 아! 이거였네 싶더라고요.”
시나리오나 콘티가 없었기에 조감독 수혁이조차도 내 의중을 몰랐다. 난 무슨 영화를 찍든 관객에게 행복감과 만족감을 주고 싶었다. 그게 대리만족이든 간접 체험이든. 그 행복감이 ‘치유력’ 형태로 나오는 것일 테고.
콘텐츠 팀장이 물었다.
“영화는 어떤 식으로 공개하실 생각이세요?”
“유튜브에 올리죠.”
“광고 수익밖에 없을 텐데요.”
“플래닛 케이도 생각을 해 봤는데… 처음부터 수익을 생각하고 만든 영화가 아니니 더 많은 사람이 보면 좋을 것 같네요.”
수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튜브가 맞을 것 같습니다. 플래닛 케이에 올려도 다른 콘텐츠를 보느라 수익이 그리 크진 않을 겁니다. 감독님이 애초에 기부 형식으로 만든 것이니 취지에도 맞고요.”
콘텐츠 팀장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요. 광고 수익은 전액 스태프들 보너스로 지급하도록 하고. 영화가 60분짜리니 4편으로 나눠서 올리면 좋을 것 같네요.”
“나눠서 올려야 광고 수익이 늘어나기는 합니다. 유튜브 담당자와 논의해서 글로벌 상영이 가능하도록 해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크레디트 올라갈 때 삽입곡 있죠?”
“예. 락키 신곡이더군요.”
“락키 매니저가 이번 영화를 뮤비로 활용해도 되겠느냐고 묻더군요. 그러라고 했습니다.”
“이슈도 되겠네요.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직원들이 사무실을 나섰다.
다들 얼굴이 밝았다.
행복이 뭐 별것 있나.
커피 한 잔의 여유. 비 오는 날 공원 걷기. 절친과의 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 한 달에 한 번 비싼 밥 먹기.
이번 영화는 그러한 소소한 행복을 전달한다.
* * *
아내와 함께 미드를 보고 있었다.
긴 제작 기간을 거쳐 지난주부터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다.
블루드 워에 나온 우주 함선과 전투기들이 나온다.
제목은 ‘커맨더 십.’
6개 함선으로 이뤄진 우주 개척 선단 이야기다.
사령관 함. 의회 함. 부자들의 함.
서민의 함. 노동자의 함. 범죄자의 함.
군인과 정치인. 부자와 빈자. 서민과 죄수들.
정권 다툼. 신흥 종교와 기존 질서의 대결. 각 함 대표들의 경쟁. 계층 간 계급 싸움. 그리고 미스테리한 사건들.
이러한 것들이 얽히고설키며 드라마가 흥미진진하게 나아간다. 현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작가진이 5시즌까지 내다보고 시놉시스를 썼기 때문에 이야기가 정말 촘촘했다. 정치의 생리와 본질. 종교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 대단했다.
서구인 특유의 합리적인 사고방식도 놀라웠다.
뭘 하나를 해도 의회에서 결정하고, 군인들과 시민은 정치인의 결정을 따른다. 그러면서도 범죄자들을 노예 취급하고, 그 합리성을 이용하는 부자와 정치인의 이중성도 놀랍게 표현하고 있었다.
선단의 책임자는 군사령관이다. 그가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 추악한 의회 정치보다는 그게 나아 보인다. 그러나 사령관은 그러지 않는다.
“우리가 비록 떠돌이 난민 신세이기는 하지만, 우린 문명 시민이오. 총과 칼로 권력을 찬탈하고 시민의 뜻을 대표하는 이들을 억압한다면. 야만의 시대로 역행할 뿐이오.”
사령관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이유였다.
좀 답답한 것은 있지만 그래서 고급스러웠다.
사령관 말대로 야만스럽지가 않아서.
네오스타 CG 팀이 만든 우주 교전 장면도 훌륭하고, 수많은 캐릭터도 다 입체적이라 좋았다.
남주인공은 전투기 조종사. 정치권에서 자꾸만 정치인이 될 것을 권한다. 여주인공은 주인공의 여사친이자 전투기 정비팀장. 나중에 연인이 될 것 같다. 이 두 사람이 행성 탐험과 반란군 제압 등의 싸움에서 활약을 보인다.
의회 의장 보좌관이 세 번째. 이 인물 중심으로 정치를 푼다. 야망이 대단한 인물로 사악한 면이 있다. 그가 모시는 의장은 더 사악한 인간이고. 네 번째 인물인 노동자 대표 의원도 매력 있다. 좋은 사람인데 정치를 하면서 점점 악인으로 변해가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다섯 번째 인물은 수도사. 신흥종교 ‘예언의 빛’을 포교하는 인물이다. 종교가 매우 모호하다. 선과 악이 섞인 것 같아 신을 믿는 건지, 악마를 신봉하는 건지 헷갈린다. 종교의 변질과 광신을 은유하는 것 같았다.
여섯 번째 인물은 죄수. 감옥 역할을 하는 화물선에서 어둠의 황제로 군림한다. 화물선은 매일 살인이 벌어지는 무법 지대다. 매번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는 것도 화물선 죄수들이고.
일곱 번째 인물은 평범한 서민이다. 원래 조종사 출신으로 술집을 경영하고 있다. 라스트데이 때 자폭 편대와 함께 작전을 벌였던 인물. 라스트데이에도 출연했다. 화성 저항군의 영웅으로 시청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매 회 이 7명이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간다.
함선 내부 분위기에 따라 유토피아적인 인류의 모습. 현 지구 상황과 별다를 것이 없는 사회. 그리고 인류가 멸종한 뒤의 디스토피아 광기가 다 담겨 있다.
드라마가 이제 시작했지만 몰입감이 대단했다.
인물과 사건이 엮여 들어가는 짜임새가 정말 좋았다.
거기에다 인류 사회의 은유가 짙게 배어 있다.
“몰아서 봐야겠어. 감질나서 안 되겠다.”
“블루드 워랑 연결이 되어서 더 재밌는 것 같아. 시청자들은 왜 저들이 화성에서 떠났을까 싶겠지?”
“화성 저항군이 3편에서 패했다고 생각하려나?”
“3편은 어떻게 되는데?”
“2편 봤을 때는 안 묻더니 드라마를 보고는 궁금해?”
“그러고 보니 2편 때는 별로 안 궁금했네. 라스트데이 땐 전투에서 이겨서 그랬나 봐.”
“일부러 그렇게 한 거야. 라스트데이 개봉한 뒤에 드라마를 상영하면 시리즈 3편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게.”
“그런 것도 계산한 거야?”
“응. 지금 드라마에 나오는 주요 인물 중에 시리즈 3편에서 엄청난 배신을 하는 사람이 있어.”
서연이 관심을 보였다.
“그 사람이 저항군을 배신하고 지지자들을 모아서 화성에서 떠난 거구나. 자신이 지구 때부터 권력자인데 화성 저항군 영웅들에게 밀렸기 때문에?”
“정확해.”
“혹시 그 사람… 의장 아니야?”
“글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일 수도 있어.”
“와, 영화와 드라마 다 궁금해진다.”
드라마 시즌 3이 끝날 즘.
블루드 워 3편이 개봉될 터다.
영화와 드라마 시즌 3에서 같은 반전이 일어난다.
영화와 드라마의 절묘한 콜라 보라고 할까.
텔레비전을 끄고 노트북을 열었다.
회사에서 엊그제 다큐 영화를 올렸다.
유튜브 측과 이야기가 잘 되어서 글로벌 이슈 코너에 올라왔다. 아내와 함께 올라온 영화를 봤는데.
조회수가 이미 천만 넘었다.
플래닛 케이에 올렸으면 고작 1만 회 정도였을 텐데.
서연이 말했다.
“이젠 오빠가 만든 거라고 하면 무조건 보는 것 같네.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뭔가 주는 게 있거든.”
“이번 다큐는 반응이 별로 일 거야.”
“무료 공개인데 뭐 어때. 난 좋기만 하더라.”
일단 댓글은 상당히 많았다.
‘좋아요’가 대부분이다.
거의 모든 댓글이 영어고.
[한국인들은 좋겠다. 최 감독 영화에 투자도 하고.]
[이번 라스트데이 수익률이 8배라고 합니다.]
[인도네시아에도 펀딩하면 좋을 텐데. :)]
[마지막에 게이머들 말에 울컥했다. 정말 보기 좋아.]
[최 감독 본인 돈을 출연료로 준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정말 위대하군. 할리우드 감독들은 각성해야 한다. 최소한 펀딩이라도 만들어 줘!]
[최신성 감독은 행복을 주는 사람 같군요.]
[일 때문에 요즘 힘들었는데 기분 좋게 보고 갑니다.]
[이 영화 연출일까요? 실화일까요?]
[표정들을 보세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눈물이 왈칵 납니다. 최신성 감독님 영화는 모두 그래요. 이런 다큐로도 감동을 주네요.]
[대체 싫어요를 누른 359명은 뭐하는 인간일까.]
그 밑의 댓글들이 웃겼다.
[잘못 눌렀음.]
[이 영화 출연에 실패한 사람들.]
[미 공화당 지지자들. 그들은 기부를 싫어함. 하하]
[359명은 싸이코패스.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함.]
[코난도 한 표. 본인보다 최 감독 인기가 더 올라가서.]
[코난 쇼 봤어요? 최 감독은 유머 감각도 대단함.]
[한국인이 그렇게 웃긴 줄은 몰랐어요.]
[정작 한국 사람들에게는 별로 안 웃겼음. 한국인의 유머 감각은 미국인보다 높음. 그 정도 말장난은 그냥 피식 정도.]
[위에 한국인. 당신이 싫어요 눌렀지?]
[나 일본인임. wwww]
[위에 한국인! 일본인 사칭하지 마!]
[싫어요 누른 사람은 중국인과 일본인임.]
댓글이 중구난방으로 튄다.
영화 이야기하다가 코난 쇼로 가더니 이번엔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를 놓고 다투고 있고. 영어권 사람들은 미친놈들은 꺼지라고 하고.
댓글이 알아서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최 감독은 다큐 영화로도 감동을 주는군요.]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절실하게 느껴질 줄이야.]
[과연 인류에게 사랑을 주는 감독.]
[한국인이 부럽다.]
[인류 모두의 감독이죠. 최 감독은 자격이 있어요.]
[다들 너무 띄워 주는군. 고작 이런 영화 가지고?]
[이봐, 디엘슨. 넌 최 감독 영화를 보기나 했냐?]
[디엘슨. 이 다큐는 제대로 보고 댓글 남기는 거야?]
[꺼져! 디엘슨!]
[관심 두지 마세요. 사랑할 줄도, 행복을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을 보여줘도 사랑인지 모르는 사람이겠죠. 본인만 불행하게 살 뿐입니다.]
댓글이 다시 변화했다.
[아, 정말 사람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동감. 어머니에게 전화 좀 해야겠어요.]
[저도 가족이 보고 싶어졌네요.]
[여러분, 늘 행복하기 바랍니다.]
[늘 좋은 일만 있기를. 영화 잘 보고 갑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사랑을 주면 사랑이 오는 거죠.]
[윗분 말이 맞아요. 최 감독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고, 우리도 그 사랑을 받아서 여러분에게 주고. 하하하.]
[전 인류에게 사랑과 행복을!]
[하하하!]
영화 마지막 장면처럼 댓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그래야 사랑하게 되고 사랑이 퍼진다.
그 사랑이 퍼지면 행복이 되는 거고.
댓글을 죽 읽어 보니 나도 행복해졌다.
누가 한 말처럼 되는 것 같다.
내가 사랑을 주고 사람들도 내게 사랑을 주고
노트북도 덮었다.
이젠 한국 영화 차기작을 생각해 볼 때였다.
코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번엔 코미디 영화를 하고 싶고, 여주인공은 아내를 쓰고 싶었다. 아주 고급스러운 코미디.
리연이와 놀아주는 아내에게 물었다.
“차기작으로 블랙코미디 어때?”
“오빠 작품이면 뭐든 괜찮아.”
“혹시 뭐 생각해 둔 건 없어?”
일단 아내의 뜻이 중요하다.
본인이 생각해둔 것도 있을 테니까.
그녀가 잠시 기억을 떠올렸다.
“전에 내가 찍으려고 했던 드라마 있잖아.”
“어떤 거?”
“왜, 바람둥이 재벌 3세와 시장통 빵집 딸의 영혼이 5일 주기로 바뀐다는 내용.”
“그거 아직도 제작 안 됐어?”
“무명작가가 투고한 건데 잘 안 됐어. 그 드라마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더라.”
“근데 로맨틱 코미디 쪽은 아니야. 풍자 코미디로 가려고.”
“재벌가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면 되겠네.”
“재벌가? 상류사회?”
“응. 오빠가 전에 물었잖아. 상류사회에 관심이 있냐고.”
예전에 그 이상한 꿈을 꾸고 그렇게 물은 적 있다.
서연이가 재벌가의 며느리처럼 행동하던 꿈.
내 아이가 차량 사고로…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내가 봤던 그 꿈.
코어가 미래를 예견했다고 하기엔 너무도 이상했던 꿈.
아내가 변하고 아이가 다쳐서 애써 부정했던.
그런데 정말 미래를 본 거였다.
아내와 아이의 미래가 아니다. 꿈도 아니었다.
바로 영화 속 장면이었다.
서연이 재벌가의 며느리로 나왔던 거였다.
* * *
차기작은 블랙코미디 영화로 결정했다.
내가 본 미래가 영화 속 장면인지, 촬영 장면인지는 모르겠지만 코어가 뭔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코미디 영화가 갑자기 당겼는지도 모른다.
사실 유튜브 댓글 중에 코미디 영화는 안 만드느냐는 내용이 있어서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찰리 채플린 영화도 챙겨 봤던 것이고. 그것이 이렇게 연결될 줄을 미처 몰랐다.
그러면 어떤 코미디여야 하나.
재벌가와 상류 사회를 그린다. 화려하고 우아하지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 봤을 때는 헛웃음이 나오도록 까발린다. 여기에 풍자를 강화하기 위해 판타지 요소를 약간 가미한다.
재벌가에 정신이상자 혹은 별종이 하나 있다.
사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제멋대로 사는 인간이다. 이 인물이 시도 때도 없이 괴상한 행동을 한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 미친 남자만 정상으로 보이고, 품위있는 재벌가의 사람들은 비정상으로 보이는 현상이 발생한다. 판타지는 해학으로 작용할 터다.
주제는 이 정도로 정해두고.
스토리는 어떻게 갈 것인가.
드라마 소재에선 재벌 3세와 빵집 딸의 영혼이 바뀐다고 했는데, 현실적이지 않으니 영혼 부분은 패스.
일단 서민 연예인 출신의 재벌가 며느리로 설정한다.
서연을 그대로 대입한다.
슬기롭고 내면이 강한 여자다. 상류 사회에 적응하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오만한 재벌가 일원으로 살아간다. 미래에서 본 서연의 모습은 생존을 위한 연기였던 셈이다.
재벌가에 시집가서 처음엔 좋았지만 점점 상류층 사회에 환멸을 느끼는 여주인공. 그녀가 본 재벌가와 상류 사회는 겉만 화려할 뿐 속은 음흉하고 비정하고 우스꽝스러운 비정상 사회였다.
이에 여주인공은 아이를 빼앗기지 않고 이혼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화려한 꽃들로 장식된 상류 사회. 그 이면에 감춰진 악취 나는 진실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재벌가는 만만하지 않았다.
‘작전’이 발각되어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이혼당할 위기.
그때 손을 내밀어 주는 재벌가의 미치광이 별종.
그녀는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아마 그 작전은 차량 사고로 아이가 다치는 것과 연관이 있을 성 싶다. 왜 그런 사고가 났는지는 시나리오를 구상하다 보면 나올 것 같다. 야비하고 잔인한 재벌가 사람들의 특징을 이용한 것이겠지.
결말은 정해두지 않고 일단 이렇게 잡았다.
전체 스토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상류 사회의 민낯을 어느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풍자하느냐에 달렸다.
그러려면 제대로 된 취재도 필요하고.
* * *
호텔 라운지에서 사람을 기다렸다.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눈에 익은 사람이 걸어왔다.
CG E&M의 이지은 상무다.
“오랜만에요. 리연이는 잘 크죠?”
“네. 딸바보 다 됐습니다.”
이지은 상무가 귀한 시간을 내줬다.
그녀가 말했다.
“이 호텔에서 최 감독님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세계적인 감독님이 되셨네요. 감독님 영화 배급을 따려고 우리 직원들이 얼마나 눈치 싸움을 하는지 모르시죠?”
“그런가요? 늘 CG 배급인 줄 알았는데요?”
“2천만 들었던 플랜을 놓쳤잖아요.”
이지은 상무가 투덜대긴 하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재벌가는 큰 그림을 보고 경영을 하지 제품 하나의 성공 여부에 연연하는 그릇이 아니니까.
“그래, 상류 사회의 민낯을 보고 싶다고요?”
“네. 슬그머니 엿볼 방법이 없겠습니까?”
“부자들 웃음거리 만드시려는 거죠?”
“맞습니다.”
이지은 상무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 영화를 그만큼 잘 안다는 뜻.
이지은 상무는 재벌가 자제 특유의 범 같은 기상이 있다. 그건 사람의 본성이라기보다는 재벌집에서 자라면서 받은 영향 같다. 그만큼 재벌가는 호랑이 굴 같은 거겠지.
재벌가 자제들을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다들 인상 좋고 사람 좋아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도사린다. 사이코패스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
그에 반해 이지은 상무는 열린 사람이고 인간적이다. 자라면서 만나 온 또래 재벌가 자제들에게 인간적인 실망이나 혐오를 가진 것 같다. 그러니 내 의중을 바로 파악하지.
“소개해드릴 사람은 있어요. 삼지 그룹 3세인데, 영화감독이에요. 뉴월드 아시죠?”
“뉴월드 감독이 삼지 그룹 자제라고요?”
“네. 세상은 최 감독과 오 감독을 라이벌로 본다죠?”
깜짝 놀랐다.
내놓는 작품마다 문제작이라 불리고, 깐느에도 갔었던 감독이다. 나이도 나와 동갑이다. 뉴월드는 2년 전에 개봉한 작품으로 기업과 기업 간의 조폭과 다를 바 없는 분쟁을 그렸다.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 영화라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흥행은 300만에 그쳤지만 나도 그 영화 보고 꽤 충격을 받았다. 매체에선 나와 함께 영화계 양대 천재라 부른다.
“오기성 감독을 만나보세요. 다른 곳에서 취재할 것도 없이 오 감독을 만나면 많은 걸 얻어낼 수 있을 거에요. 오 감독은 재벌가 자제이지만 소위 서자입니다. 오 회장님의 혼외 자식이거든요. 기업 경영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분이죠.”
“재벌가 자제들과도 친하겠네요.”
“저와는 친했죠. 먼 친척이기도 하고요. 성격이 유쾌해서 두루 친한 사람이 많아요. 좀 괴짜 기질이 있긴 한데 영혼은 순수하다고 할까요. 어린애 같은 면도 있고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오 감독도 최 감독님 소개해달라고 한 적 있어요. 최 감독님이 워낙 바쁘셔서 미처 연락을 못 드렸네요. 아, 재벌이나 상류층 사람들 조롱해도 되지만, 실재 인물을 모델로 하면 제가 좀 곤란해요.”
“그건 염려 마세요.”
“네. 그럼 멋진 영화 만들어주세요. 감독님.”
“이번 영화는 CG에서 배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이지은 상무와 악수를 하고 호텔을 나섰다.
그가 소개하는, 혹은 그를 통해 만나는 상류층 인사들을 코어로 분석한다. 속마음까지 들어볼 생각이다. 살면서 이런 짓은 안 했지만 이번에는 할 참이다.
오기성 감독.
나와는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대척점에 있다.
유사한 주제를 다루지만 표현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나도 그도 현실적으로 영화를 만든다.
난 현실적인 묘사로 공감과 감정이입을 통한 행복. 치유. 만족 등을 영화 제작의 가치로 삼는다.
반면 오 감독은 똑같이 현실적으로 영화를 만들지만 구성으로 인한 공감이나 감정이입이 별로 없다. 전통적인 기승전결도 안 쓴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내 영화는 대중 친화적이다. 관객을 배려하는 편이고, 영화에 대한 만족도도 높다. 내 성격에서 기인한다.
오 감독은 평론가 친화적이다. 관객이 불편해하는 장면이 많지만 예술성이 매우 강하다. 해서 골수팬이 많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간단하다.
나는 서민 집안에서 태어났고, 고생한 경험이 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주변에 따뜻한 사람들이 있고, 그것이 영화에 반영된다. 불합리하고 힘들지만 희망이 보이는 세상을 보고자 한다.
오 감독은 재벌가에서 태어났고, 궁핍한 생활을 한 적은 없을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어머니 빼고 죄다 칼 하나씩 품은 사람들이었을 테고. 그러한 환경이 영화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비참하고 희망 없는 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나와는 정반대다.
평론가들은 오 감독을 더 높이 평가하고, 대중은 날 더 높이 평가한다. 외국에서는 매체와 평론가에 따라 갈린다. 나와 오 감독이 비슷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할까.
그런데 그와 날 라이벌로 여기는 것은 불만이다.
영화의 방향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난 대중성과 예술성 둘 다 있다고 볼 수 있고, 오 감독은 무섭도록 예술성이 강하다. 영화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안 그래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영화 철학이 옳다고 믿으면 좀 불편하겠지. 영화의 넓은 범위를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동갑이니까.
오기성 감독에게 문자를 보냈다.
[최신성입니다. 언제 밥이나 한 끼 할까요?]
30분이 지나서야 답장이 왔다.
밀당은 아니겠지?
[내일 저녁 어때요? ㅋㅋ]
이 상무는 오 감독에게 어린애다고 했다.
영화를 봐선 매우 진지한 사람 같고.
이 이질감의 정체가 뭘까.
* * *
고깃집으로 갔다.
오 감독이 혼자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가 날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최 감독님! 처음 뵙습니다.”
“네, 반가워요. 덩치가 크시네요.”
“최 감독님은 실물이 더 잘생기셨네요.”
“감독이 왜 그렇게 근육이 많아요?”
“안 맞고 다니려고요.”
일단 자리에 앉았다.
“한잔 드시죠.”
오 감독이 따라주는 소주를 받아 바로 마셨다.
나도 오 감독에게 한 잔 따라주고.
“안 맞고 다닌다는 말은 뭐죠?”
“어릴 때 형제들이 하도 패서 운동 배웠죠. 그 뒤로는 안 때리더라고요. 운동이 재밌기도 했고요.”
“괴롭힘 많이 당했나 보군요.”
“어릴 땐 그랬죠. 지금은 그냥 무시합니다. 이젠 서로 얼굴 볼일도 없고요. 고기 좀 드세요. 이 집 고기가 아주 좋거든요.”
등심을 구워 놨는데 정말 맛이 좋았다.
재벌 2세라고 볼 수는 없지만 서민 코스프레는 안 하는 사람 같다. 롤렉스를 차고 있고, 입은 옷도 명품이다.
오 감독이 내 시선을 보더니 말했다.
“돈은 좀 있어요. 그렇다고 영화를 취미로 찍는 건 아닙니다.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살고 있어요. 제가 제작하고 투자하는데 영화 망하면 안 되거든요.”
“누가 뭐래요?”
“괜히 찔려서요.”
다시 술잔을 나누며 웃었다.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보니 미묘하게 말에 가시가 생길 수도 있다. 나도 그도 열정으로 영화를 시작하긴 했지만 돈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
“그래,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는요?”
“영화 취재도 하고, 오 감독님도 궁금해서요.”
“매체에서 감독님이랑 저를 영화계 쌍별로 부른다죠?”
“듣기는 했습니다. 민망하죠.”
“저는 좋던데요. 감독님 같은 희대의 천재 감독과 쌍별이라니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름 따라가나 봅니다. 감독님은 새로운 별. 나는 괴상한 별.”
“기이할 기(奇)자예요?”
“네. 형제들은 혜성. 명성인데 저만 기성이네요.”
“괴상한 별이 아니라 뛰어난 별입니다. 기(奇)자에는 뛰어나다는 뜻도 있어요.”
오기성 감독이 날 물끄러미 보았다.
“영화와 감독님이 닮았네요. 배려하시는 거 보니.”
“오 감독도 영화 닮았어요?”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영화에 그 성향이 드러나는 거죠. 감독님 영화 같은 영화는 저는 못 만들어요.”
“저는 오 감독 영화 스타일을 만들 수 있을까요?”
“만들 수 있죠. 샌드위치가 약간 그랬으니까요.”
“관찰자 시선인 것은 맞지만 시선은 따뜻한데요?”
“그렇군요. 그럼 제 고유의 영역이라고 합시다.”
“하하하. 그래요.”
논쟁하러 온 것은 아니지만 둘 다 영화 철학이 확고하다 보니 뭔가 묘하게 아슬한 느낌이 든다. 어느 영화감독을 만나도 이런 분위기는 있다.
오 감독이 물었다.
“제 영화는 어떻게 보셨어요?”
“솔직하게 말할까요?”
“반만요. 조금 무섭네요. 하하하.”
솔직하게 말했다가 싸움날라.
“영화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현실 그대로 보여줘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거죠. 다른 하나는 현실은 힘들지만 희망을 가지고 살자고 말하는 것. 둘 다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 감독 영화는 현실을 견지하는 면에선 내 영화보다 낫고 날카롭다고 생각해요.”
오 감독이 자신의 술잔을 보고 있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단어를 고르는 듯한.
“그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희망고문이면 현실이 더 힘들지 않을까요? 그냥 현실과 영화는 다르다는 것으로 치부하면 되는 걸까요?”
“그래서 두 부류의 영화가 필요하다는 거죠. 관객이 내 영화에서 희망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현실도피든, 대리만족에 그치든 현실이 힘들다는 건 누구나 아니까요.”
“그 희망이 낯간지러운 적은 없으세요?”
“별로요. 오 감독은 그런 편인가 봅니다.”
“저는 솔직히 좀 오글거려요. 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그렇다는 거지. 최 감독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대중성이 부족할 뿐이에요.”
“대중보다 본인의 영화관이 더 중요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오 감독이 씨익 웃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부정하기 어렵네요. 요즘은 소통의 필요성을 좀 느낍니다.”
그럴 수 있다.
무명작가였을 때 많은 감독이 같은 생각을 했다.
대중을 따라가지 않고, 대중이 날 따라오게 만들 것이라고. 제작자가 좀 더 대중적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대중과 타협한다고 생각했다.
대중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감독이 대중보다 뭐 잘난 게 있다고 따라오라 마라 하는 건지. 본인은 자신감에 차서 만들었지만 관객이 보기엔 독선과 아집으로 가득 찬 영화가 되어 버리는 거다.
돈에 연연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오 감독 영화도 그런 면이 좀 있었다.
예술성은 높으나 너무도 적나라해서 불편한.
당연히 폄하는 아니다. 내 영화와 다를 뿐이지.
오 감독 말대로 영화로 헛된 희망을 주는 것도 그렇지만, 대중이 영화를 왜 보느냐도 따져야 한다. 현실도 힘든데 영화를 보면서도 힘들게 할 수는 없다. 내 철학은 그렇다.
“이젠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뜻이에요?”
“저는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지은 상무님을 통해 만나보려고 했던 거에요.”
“관객이 영화를 보고 힘들지 않으면 됩니다.”
“관객이 제 영화를 보고 힘들었을까요?”
“영화의 완성도가 높아서 만족도는 있지만 편하지는 않았겠죠. 대중은 쉽고 편하고 재미있는 걸 좋아하니까요.”
“신인 때 어느 제작자가 그러더군요. 대중의 눈에 맞추려면 네 수준을 낮추라고요. 제 수준이 높다는 말은 아닙니다.”
수준을 낮추는 게 아니다.
본인이 관객이 되면 된다.
대중은 수준이 낮아서 오락 영화만 볼까.
“관객이 영화를 보는 이유를 알면 간단합니다.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것과 상품으로 만드는 차이라고 봐요.”
“동의하기가 좀 어렵네요. 영화를 상품으로 만들면 그냥 업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을 벌거면 왜 영화를 찍습니까? 사업을 하죠. 물론 영화가 재밌어야 하는 건 맞지만요.”
오 감독의 철학이 조금씩 드러난다.
대중적인 영화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대중성을 가미해보겠다는 뜻이겠지. 상업영화는 못 찍겠다는 말이기도 하고.
재미의 개념도 나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좀 아프게 들리시겠지만 내가 보기에 오 감독님은 대중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대중에게 과시하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것 같네요. 좀 더 많은 관객이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중성을 생각하신 것 같은데 관객은 감독의 뜻을 금방 압니다. 대중을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이 영화에 담기지 않으니까요.”
“좀 아프네요.”
오 감독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난 고기를 집어 먹었고.
분위기가 살짝 썰렁해졌다.
진지하게 물었다.
“상업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안 하셨죠?”
오 감독이 한참 지나서야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상업 영화를 하면 형제들과 회장님이 절 우습게 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영화를 만들어야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돈과 상관없으니까요. 이런 말을 하는 제가 부끄럽네요.”
그런 배경이 있을 줄은 생각을 못했다.
돈 많은 가족들에게 영화로 돈 벌었다는 것이 무슨 어필이 될까. 부자들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는 예술이 아니고서야.
그가 말했다.
“가족이 어떻게 보든 이젠 상업영화는 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미 저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하기도 했고요. 치열하게 영화 예술에만 천착해볼 생각입니다. 상업영화를 하면 돈에 굴복한 느낌도 들어요.”
“누구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적어도 제 골수팬들을 배신했다고 여길 겁니다. 영화를 하기로 한 이상 쉬운 길로 갈 생각은 없어요.”
뭔가 오해가 있다.
“오 감독님. 상업영화가 쉽다고 생각하세요?”
“어렵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예술영화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작가주의 영화는 감독이 자기 마음대로 찍어도 됩니다. 그러나 상업영화는 대중 대다수가 좋아하는 영화여야 합니다.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고 감동과 만족을 줘야 합니다. 그 기술적인 부분은 상업영화가 더 어려워요.”
“이번에도 동의하기 어렵네요.”
“예를 들어볼게요. 할리우드 영화 찍는데 보통은 3년. 제 경우에는 2년 걸립니다. 한국 상업영화도 저는 8개월쯤 걸려요. 그런데 제가 찍은 이른바 예술영화. 아비도는 3개월 걸렸고, 샌드위치는 2개월 걸렸습니다. 이게 뭘 뜻할까요?”
오 감독이 의아한 눈으로 날 본다.
“예술영화가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화를 대하는 자세가 저와는 다르다는 것은 압니다. 예술적 지향도 다르고요. 이왕 대중성을 불어넣고 싶다면 대중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만들면 됩니다. 얼마든지 오 감독의 예술성을 유지할 수 있어요. 상업영화와는 다른 겁니다. 현재의 박찬익 감독님 작품처럼요.”
오 감독이 생각에 잠겼다.
이지은 상무가 말한 어린애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같은 재벌가의 자제로서 오 감독은 아직도 재벌집 소년처럼 살고 있다고 본 거겠지.
내가 봐도 온실에서 자란 잡초 같다. 본인은 거칠게 성장했다고 여기겠지만, 생각하는 걸 보니 부잣집 도련님이 예술 영화를 찍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예술적 재능은 천재급이다.
“한 잔 드시죠.”
“화났어요?”
“아니요. 영화 철학이 이렇게 다르구나 싶습니다.”
“화난 거 같은데요?”
“아니라니까요.”
“화났는데 뭘.”
“아니라니까!”
오 감독이 버럭 소릴 지르곤 웃었다.
나도 웃으며 받은 술을 마셨다.
오 감독 스타일로 영화 찍을 생각은 없다.
그의 영화 철학을 존중할 뿐.
주거나 받거니 술을 마셨다.
오 감독의 환경을 짐작하고 보니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되었다. 나와 오 감독은 인생 자체가 달랐으니 그럴 수밖에.
“근데 영화 취재한다고 하셨죠. 무슨 취잰데요?”
술을 마시며 만난 이유를 설명했다.
오 감독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와, 대박이네! 난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뭐가요?”
“상류층 바보들요! 내가 찍었으면 겁나 까버리는 건데!”
“그러면 욕먹을 텐데요?”
“내가 뭘 도와주면 돼요? 아니다. 저랑 그런 인간들 만나러 다닐래요? 파티라면 신물 나도록 많이 있어요. 그 이야기 하면서 맥주나 한잔 더 합시다.”
“좋죠.”
바로 일어났다.
오 감독과 의외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화 안 내는 걸 보니 배려심도 좀 있고.
아무래도 오늘 친구가 하나 생길 것 같다.
야생잡초 옆에 잔디가 생겼다고 할까.
* * *
오기성 감독.
첫날 내게 보인 사람 좋은 모습은 그냥 배려였다.
내가 선배라 존중해 준 것도 있고.
이 인간이 술에 취하더니 하는 말마다 욕이요, 막말이었다. 은근슬쩍 반말을 하질 않나, 사람 면전에서 무시를 하질 않나. 다른 사람 같았으면 재벌가 자제라고 안하무인이라고 여길 듯도 싶은데, 내가 보기엔 순수해서 그런 것 같았다.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학생 같다고 할까.
혹은 천재의 돌출행동이나 기행이라고 할까.
“야! 최신성 감독! 당신은 돈 많아서 좋겠어!”
오 감독이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떠들어 댔다. 감정 기복이 심해서 웃고 떠들다가 또 한동안 시무룩하게 술잔만 바라보기도 하고. 마음에 쌓인 게 많은 사람 특징이다.
그런데 재미가 있다.
살면서 이런 친구는 처음 본다.
나와 다른 점이 너무도 많아서 흥미롭다.
오기성 감독도 자신과 다른 내게 호감이 있는 듯하고.
고깃집에선 처음 봤기에 서로 존중했지만, 나중에 친해지면 욕하고 헐뜯을 것 같다. 내 영화를 처음으로 대놓고 ‘디스’하는 감독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뭐 나도 할 말은 많다.
스스로 틀이나 경계를 짓지 마라.
대중성 있으면서 예술성 높은 영화는 많다.
예술 영화 찍는다고 겉멋 부리는 거 아니냐.
네가 아직 덜 커서 그렇다. 장가나 가라.
“응? 표정이 왜 그래요?”
“내 표정이 뭐?”
“똥 씹은 얼굴인데? 내가 창피해요?”
“오기성.”
“뭐요?”
“존대를 하든가, 말을 놓든가.”
“에이, 오늘 처음 봤는데 어떻게 말을 놔요.”
“아까 말 놨잖아.”
“내가? 그러고 보니 최 감독도 슬쩍 말을 놓네?”
“그래, 동갑이고 하니까 말 놓자. 그렇다고 아직 친하지도 않은데 욕하고 막 대하는 건 좀 그렇고.”
“오케이! 자, 원샷!”
챙-
둘이 호기롭게 맥주를 들이켰다.
이 친구와 친해져도 되는 걸까?
* * *
일주일에 두 번가량은 오기성을 만났다.
본인이 재벌가의 아들이면서 재벌 3세는 아니다. 그래도 글로벌대기업인 삼지그룹의 일원이라 어릴 때부터 대한민국 1%에 해당하는 상류층 인사들을 많이 만났다.
영화 속 재벌가 며느리와는 다르지만 오기성도 가문의 아웃사이더였고, 재벌가의 속성과 이면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내게는 최고의 취재원이었다.
그렇게 한 달 내내 오기성을 만나 상류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짐작한 것도 있고, 전혀 몰랐던 이야기도 있고. 어떤 이야기는 이게 진실인가 싶을 정도로 놀라웠다.
남자들이야 그렇다 치고 재벌가 며느리들의 실상이 특히 그랬다. 돈을 쓰는 규모가 내가 상상한 수준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여자와 마약 파티로 돈을 쓴다. 그게 놀이고 유흥이다. 반면 여자들은 쇼핑과 고상한 취미에 돈을 쓴다. 남자들 노는 건 그냥 오락 수준에 불과할 지경이었다.
오늘도 오기성을 만나기로 했다.
이 인간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인간을 생전 처음 만난 것 같다. 매일 톡을 보내고 시답지도 않은 유머를 웃긴다면서 보내 준다.
가로수길 카페에 앉아 있을 때.
오기성이 포르셰를 타고 왔다. 그가 내리자 카페에 있던 여자들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많이 기다렸수?”
“당신은 영화 안 만들어?”
“시나리오 작업 중이지. 차에 타슈.”
“드디어 파티야?”
“가 보면 앎.”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오기성의 차에 올랐다.
부아아앙-
포르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나갔다.
“마약 파티 아니지?”
“그나마 건전한 파티야. 술에 취하면 엑스터시 정도는 하겠지만 클럽에 가도 그 정도는 하잖아?”
“당신도 마약해?”
“미쳤어? 걔들이야 걸려도 돈으로 때울 수나 있지. 나 같은 놈은 걸리면 답이 없어. 이때다 싶어 형제 놈들이 가문에서 날 잘라 내겠지.”
“돈은 어디서 나오는데?”
“나 태어났을 때 엄마가 빌딩 하나를 받았어. 엄만 룸살롱 크게 운영하다가 지금은 부동산 사업하시고. 그 빌딩이 지금 내 명의야. 엄만 빌딩만 6채고.”
“수완이 좋으시네.”
“그럼. 삼지 그룹 회장님 첩이 되는 게 쉽지 않지.”
포르셰가 지나가자 힐끔 보는 여자들이 상당히 많다.
오기성이 운전하면서 피식 웃었다.
“금요일 저녁만 되면 저런 애들이 몰려나오더라고. 누굴 꼬셔 보겠다고 나온 것 같은데 바보짓이지.”
“어째서?”
“외제차 몰고 여자 꼬시러 오는 놈들이 있거든. 허우대만 멀쩡하고 속은 빈 놈들이야. 괜찮은 남자가 왜 가로수 길에 오겠냐고.”
“저분들은 퇴근하고 친구 만나러 온 것 같은데?”
“겸사겸사. 좋은 남자는 대기업이나 금융가 뒷골목 곱창집에 가야 있지, 이런 데는 없다고. 하다못해 고급 피트니스 클럽에라도 가야 쓸 만한 남자가 있지.”
“좋은 여자는 어디에 있고?”
“이미 시집갔지.”
오기성은 자신만의 세계관이 좀 강한 것 같다.
어른과 아이가 뒤섞인 느낌도 들고.
재벌가 자제의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실제로 있을까?”
오기성이 피식 웃었다.
“재벌 애들은 저런 여자들 거들떠도 안 봐. 강북엔 아예 오지도 않고. 멤버십 클럽에 예쁜 애들 널렸는데 뭐 하러 일반인을 만나겠어. 게다가 연예인들이 만나 달라고 매달리는데 평민이 눈에 들어오겠냐고.”
“멤버십 클럽은 룸살롱 같은 거야?”
“아니. 재벌 애들만 노는 클럽이 있어. 돈이 있어도 회원 가입이 안 돼. 의사, 검사, 벤처 기업 대표 이런 친구들도 명문가 아니면 못 들어가. 철저히 비밀 보장. 클럽에서 온갖 변태 짓거리를 하지.”
“여자 연예인은 되고?”
“급이 된다면. 재벌 애들이랑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고 발을 들여 놓는데,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버림받거든. 재벌 애들에게 연예인은 그냥 유명한 예쁜 애야. 클럽에 오는 연예인치고 정신 제대로 박힌 애들도 없고.”
우리 회사에는 그런 애들 없겠지.
지성이가 눈치 하나는 빠르니까.
“소문이 안 나나?”
“안 나지. 재벌 애들 만나면 돈은 엄청 만지거든. 본인들이 스폰서 받으려고 오는 것도 있어. 비싼 콜걸이지 뭐. 근데 요즘은 연예인도 잘 안 만나.”
“왜?”
“꼴에 연예인이라고 버림받으면 구질구질해지거든. 소송이니 어쩌니 하면서 말이야. 어차피 결혼은 재벌들끼리 하는 거야. 연예인이 재벌가에 시집가도 가족 취급 안 해줘.”
“왜?”
“결혼도 기업 간의 거래야. 집안에 연예인이 들어오면 혼수 없이 들어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냐고. 어른들이 혀를 차지. 어리석은 놈이라고.”
그 어른들이 보기에 순수한 사랑은 어린애 같은 행동이 되는 것 같다. 이지은 상무가 오기성을 두고 아이 같은 면이 있다고 한 이유와 비슷하다. 순수한 행동은 어려서 그런 것.
일생을 이윤만을 위해 살아가는 짐승 같은 느낌이 든다.
영화 속 재벌가 며느리가 가문의 일원을 보는 시선이다.
대기업은 정글이고, 재벌가는 맹수 우리 속이다.
“어디로 가는 거야?”
“큰 오피스텔이 하나 있어. 거기가 클럽이야.”
“오늘 오는 사람은?”
“아직 몰라. 후계자들 이너서클이야. 몇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업무 스트레스를 풀지. 구설수에 오를까 봐 룸살롱 같은 데는 안 가.”
“나도 들어갈 수 있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럼 왜 같이 가는 거야?”
오기성이 날 보며 씩 웃었다.
“재벌 애들 특징을 말해 줄까?”
“뭔데?”
“걔들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늘 언행을 조심해. 자기들끼리 놀 때만 미친놈들이 되는 거지. 그런데 무식하게 들이대면 걔네들 엄청 당황해. 살면서 무식한 행동을 겪은 적이 없거든.”
“무식하게 진입하겠다는 거야?”
“일단 진입만 하면 받아주긴 해. 속으로만 짜증 내지.”
“꼭 그렇게 해서 들어갈 필요가 있나.”
오기성이 또 웃었다.
“한국 최고의 재벌 3세들이 오랜만에 뭉치는 날이야. 오늘 아니면 그놈들 만날 일이 없어. 다들 바쁘거든. 장차 이 나라의 대기업을 경영할 애들 실체를 겪어 보라고.”
“실체가 어떤데?”
“대기업 후계자라면 뭔가 대단할 것 같지? 아마 깜짝 놀랄 거야. 당신 영화의 핵심 주제가 될걸?”
“어떤 면에서?”
“대기업이라는 왕국에서 자란 왕자들이야. 몸만 어른이고 어릴 때 습성은 그대로지. 아주 볼 만할 거야. 하하하!”
* * *
비밀 클럽으로 가는 길은 정말 험난했다.
오피스텔이 아니라 궁전이었다.
보안 시설은 어찌나 또 삼엄한지.
주차장 들어갈 때 ‘검문’을 하더니 로비에서 또 ‘검문’하고 22층에 내려 클럽에 들어갈 때 또 ‘검문’을 당했다. 이 빌딩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가는 걸 원천 봉쇄하는 듯했다.
결국 최종 관문에서 막혔다.
“죄송하지만 회원분만 입장 가능하십니다.”
오기성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나 회원인데?”
“제명되신 걸로 압니다.”
“누가 날 제명해? 어떤 새끼야?”
“감독님. 그냥 돌아가시죠. 회원분들이 편히 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괜히 들어가셔서…”
“야! 명성아! 형 왔다, 문 열어라!”
“감독님!”
보안요원이 오기성을 떼어 내려고 하자 오기성이 오히려 보안요원의 팔을 꺾어 버렸다.
“뭐해! 출입 카드!”
언제부터 우리가 콤비였던가.
오기성의 외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보안요원의 목에 걸린 카드로 문을 열어 버렸다.
띠리릭-
내가 먼저 뛰어들어갔다. 그다음 오기성이 들어오려고 했는데 보안 요원 2명이 달려와 그의 허리와 다리를 잡았다.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놔, 이 새꺄! 나도 좀 놀자!”
“어이! 놔 줘!”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보안요원이 오기성을 놔줬다.
실내를 살펴보았다.
호텔 스위트룸처럼 꾸며 놓은 곳이었다. 내부에 바가 설치되어 있고, 모인 사람은 남녀 20명쯤.
다들 어이없고 황당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나도 이러려고 이런 건 아니다.
재벌 3세의 실체를 보려면 이만한 상황도 없지.
“어? 최신성 감독?”
“실례합니다. 이런 상황인 줄 몰랐네요.”
모인 이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다가온 이들은 웃고 있고, 뒤에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들은 차가운 얼굴이다. 오만이 얼굴에서 뚝뚝 떨어진다.
이 모임의 리더들이다 이거지.
오기성이 내 옆을 스쳐 지났다.
“여, 동생. 몇 년 만이냐?”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조금만 놀다 가.”
“민석이는 잘 크냐? 3년 전 설날 때 보고는 못 봤는데.”
“남의 일에 신경 끄시고. 어이, 두 분한테 술이나 몇 병 내 줘. 너랑 넌, 두 분 잘 모시고.”
“네.”
아가씨 두 명이 나와 오기성에게 왔다.
내가 난처해할까 봐 그랬는지 오기성이 두 아가씨를 끌어당겨 어깨동무를 한 채 한쪽 소파로 갔다. 나도 그쪽으로 가서 앉았다.
아름다운 마담이 양주와 안주를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영광이에요. 최 감독님.”
“고맙습니다.”
“오명성 회원님이 화가 좀 나신 모양이에요.”
“그럴 만하죠.”
마담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오기성이 바로 양주를 따서 내 잔에 먼저 따라 주고 자신도 잔에 따라서 마셨다.
모인 이들은 불쾌감을 비치며 우리를 주시했다.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테이블과 소파가 6개씩이다.
보드게임과 카드가 놓여 있다. 칩도 쌓여 있고.
여자들은 하나같이 연예인급이다.
남자들은 삼지 그룹 차남을 비롯하여 전원 대기업 3세다.
재벌 2세는 졸부 자식이라고 끼워 주지도 않는 듯.
여자들은 야한 옷을 입었고, 남자들은 캐주얼 차림.
평범한 직장인들 모습이다
일반인이 노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히려 깔끔해 보인다. 이렇게 놀다가 술에 취하면 달라지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도 좀 뻔뻔해졌다.
오기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와 대화하며 술을 마시니 나도 거리낌이 없었다.
오기성이 말했다.
“명성아. 혜성이 형님하고는 요즘도 안 보냐?”
모임 리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회원들도 싸늘한 표정이고.
“형님은 술 사 드실 돈이 없나 보네. 제가 돈 좀 줄 테니까, 좋은 술집에서 마시는 건 어때?”
“여기보다 좋은 술집이 어딨어?”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자동차 기업의 차남이다.
“형님. 좋은 말로 할 때 나가 주시죠. 명성이 형님과 달리 저는 매너 그런 거 잘 모릅니다.”
“집안일로 왔다. 제3자는 빠지지?”
“안 나가시면 끌어냅니다.”
“이 모임 회장이 놀다 가라고 했다. 네가 명성이 시다바리라도 되냐? 너희 아버님이 아시면 가문에 똥칠했다고 그러겠네?”
“말 다했습니까!”
“그만!”
모임 리더의 외침에 남자가 물러났다.
그가 그제야 일어나 걸어왔다.
나와 오기성을 물끄러미 보더니 손짓했다. 우리 자리에 앉았던 여자 두 명이 일어나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오명성이 앉았다.
오기성을 빤히 보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날 보며 환하게 웃었다.
“한잔 받으세요.”
“좋죠.”
오명성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곤 잔을 건넸다.
그러자 오명성이 ‘이건 뭔가?’ 싶은 얼굴로 날 본다.
뒤에서 구경하는 이들은 킥킥대며 웃고 있고.
오기성도 흥미진진한 얼굴이다.
과연 어떻게 되느냐는 듯.
오명성이 이 자리에 올 때 이미 눈치챘다.
매너 있게 날 대하면서 망신을 주겠다는 의도.
무례하게 쳐들어온 건 분명 우리 잘못이다.
이왕 친 깽판이니 취재나 하지 뭐.
오명성은 영민해 보인다. 그럼에도 속내가 훤히 비친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자신의 왕국에선 모든 것이 발아래에 있었다. 기업 내에서도 마찬가지.
그런데 정작 왕국 밖의 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 모른다. 주변 모든 사람이 굽실굽실. 예예 하면서 떠받들기만 했으니. 세상은 만만하고, 세상 밖의 사람들도 그런 줄 알겠지.
어린애의 습성을 가진 어른.
그게 어떤 것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오명성이 입을 뗐다.
“영화 잘 보고 있습니다. 돈도 많이 버셨겠네요.”
“많이 벌었죠. 근데 누구시죠?”
“예?”
오명성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이내 활짝 웃었다.
“아, 인사가 늦었네요. 삼지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 오명성이라고 합니다.”
“영화감독 최신성입니다.”
돈 얘기로 입질을 하려다 막힌 오명성이다.
무엇으로 날 엿 먹일 것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다.
재벌가의 자제라고 천재로 태어나는 건 아니지.
인간관계 면에선 일반인보다도 못할 수도 있다.
기업 경영은 최고 관리자의 설명을 듣고 결정만 하는 거다. 실무진과 최고 관리자가 똑똑하면 기업은 잘되는 것이고.
상무보 직책에 걸맞은 실력은 있을까.
코어를 발동했다.
입체 영상이 가동되면서 그에 대한 모든 것이 내 머릿속을 스치기 시작했다. 코어가 진화한 후 눈으로 보는 정보뿐만이 아니라 저절로 입력이 된다.
순식간에 오명성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오기성 말대로 정말 깜짝 놀랐다.
애 같은 게 아니라 애다.
회사 업무와 경영에 관해선 유능한 것 같다.
그런데 애들의 심리적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내 상식으로 봤을 땐 정상인이 아니다.
그때 속내가 들려왔다.
‘저 병신 새끼가 이 딴따라는 왜 데리고 온 거야, 넌 오늘 여기 쳐들어온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속내와 달리 환하게 웃는 오명성.
“야, 음악 좀 틀어.”
“네!”
곧 재즈 피아노 연주가 나왔다.
나도 흥미진진해진다.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건 미안하다만.
뭐로 날 후회하게 하려고?
“전 음악 좋아합니다. 이 곡 참 좋죠?”
“좋네요.”
“재즈 음악 좋아하시죠? 영화도 하셨는데.”
“이 곡 좋아하시나 보군요.”
“희귀 음반인데 아주 어렵게 구했죠.”
“저도 좋아하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오명성이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실수했군요. 재즈 영화도 하신 분이라 저는 아실 줄 알고.”
“앨범 명이 뭔가요? 기억날 것도 같은데.”
“키스 자렛의 데스 앤드 플라워라고 하죠.”
오명성이 기세등등해졌다.
아주 우아하게 날 망신주려는 모양이다.
“아, 기억나네요. 데스 앤드 플라워. 1975년에 발매된 앨범이죠. 근데 이 앨범은 2015년에 발매된 리마스터 앨범이네요. 이 시디는 인터넷에서 만 오천 원이면 삽니다. 사기당하셨나 보다.”
오명성이 당황했다.
‘이 새끼 봐라?’
오기성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고, 모임 회원들은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유치한 공격은 유치하게 받아준다.
오명성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엔터 사업에 관심이 좀 있는데, 괜찮은 기업 없을까요? 로큐가 요즘 잘나가던데 어떤가요?”
“로큐에 입사하고 싶나 보군요.”
내 말에 오명성과 남자들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입사가 아니라 인수입니다.”
“인수요? 로큐를?”
“네. 로큐 인수하는 데 몇 푼 든다고요.”
“그 회사 대표가 저라는 건 압니까?”
오명성이 당황한 척했다.
“아이고 저런! 제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감독님이 로큐 대표님일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자네들은 알고 있었나?”
“중소기업 대표를 저희가 어떻게 압니까?”
“하하하하.”
늘어선 남자들이 마음껏 비웃었다.
오명성의 속내가 들려왔다.
‘넌 여기까지다. 삼지가 인수할 거라는 찌라시만 돌아도 넌 잠을 못 잘 거다. 딴따라 주제에 감히…’
웃는 오명성을 향해 나도 웃어 보였다.
“삼지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님이 돈이 많으시나 보네요. 로큐를 인수할 생각까지 하시고. 회사원이 그만한 돈을 가지고 계시다니 놀랍습니다.”
“네?”
오명성이 벙찐 얼굴이 되었다.
뒤에서 누가 말했다.
“최 감독. 명성이 형님은 삼지가 차남이십니다!”
나도 당황한 척했다.
“아이고 저런! 제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상무보님이 삼지가의 차남일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큰 기업을 경영하실 분이 이렇게 영혼이 맑으실 줄이야. 오 감독은 알고 있었어?”
“나야 아는 줄 알았지.”
오명성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의 이복형인 오기성은 낄낄대고 있고.
뒤에 선 남자들은 그제야 화난 내심을 드러낸다.
쳐들어와서 미안한 건 싹 사라졌다.
동심 어린 32살 놀리는 재미가 아주 꿀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