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 제1장 대중과 함께 (49/56)

내가 영화다 7권

글드림 현대판타지 장편소설

차례

제1장 대중과 함께

제2장 영화계 괴짜 감독

제3장 코어와 영화의 진화

제4장 시리즈 대단원을 향하여

제5장 내 대표작이 될 영화

제6장 레저, 블루드 워 그리고 후계자

제7장 나만 몰랐던 시상식

제8장 내 영화의 파노라마

제1장 대중과 함께

멍하게 도시를 바라보았다.

세상이 빛으로 뒤덮여 있다. 마치 건물에 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처럼. 그 빛의 알갱이 하나하나는 모두 정보다.

정보의 홀로그램과 실물이 겹쳐진 형태였다.

내 차를 보았다.

무수히 많은 글자가 빛줄기로 이어져 차 지붕과 타이어 등을 타고 흐른다. 정보의 창이 뜨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 새겨진 것만 같은.

차의 정보를 알고자 하자 이전처럼 수많은 정보창이 동시에 발생했다. 제작사와 제조년, 자동차 브랜드. 심지어 금속 재료와 타이어 마모도. 사소한 문제까지 표시된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자동차 내부구조가 겹쳐 보였던 것이다.

엔진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보닛을 열어 보려고 했다. 순간 눈앞에 빛줄기가 몰려들었다. 허공을 떠다니던 정보의 줄기들이 내가 의식하는 순간 내게로 날아왔다고 할까.

머릿속에 난데없이 자동차에 대한 지식이 쌓이는 것 같더니 갑자기 보닛 내부가 보였다. 실제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코어가 자동차 내부를 홀로그램으로 구현한 거였다.

보닛을 열지 않아도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엔진 축에 연결된 벨트 베어링이 마모된 상태였다.

어쩐지 엔진 쪽에서 끼긱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했다.

코어가 갑자기 진화를 하여 제멋대로 정보 검색을 했는지, 사물과 겹쳐 보이던 빛들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엄청난 수준의 광역 분석임에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텍스트로 분석하면 정보의 맵이 거의 무한대로 뻗어 나갈 것만 같다. 시나리오로 영상구현을 해도 30분 이상은 두통 없이 진행할 것 같고.

갑자기 이상 현상이 일어나 제법 놀랐지만 금세 적응했다.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봤다. 코어의 진화로 이상한 게 생기는 건 아닐까 했는데, 같은 능력의 확장이었을 뿐이니까.

갑자기 눈에 영혼이 보이고 내 머리가 컴퓨터처럼 되어 버린다면 정말 무서울 것 같다. 내가 보는 것이 현실인지 허상인지 분간도 안 되어 버리면 큰일인 거지.

스위치를 켜듯 코어를 발동하고 끄는 건 그대로였다.

무슨 청소를 한 것처럼 이전보다 시력이 좋아진 것 같고 머릿속도 시원했다. 안경을 벗어도 될 정도다.

심지어 몸까지 가벼워졌다.

무협지 주인공이 혈맥을 타통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통은 진화의 과정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두통을 앓을 때마다 코어 레벨이 높아졌으니까.

다시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걱정이 컸는데 막상 변화를 하자 기분이 정말 좋았다.

우선 코어가 같은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걸 확인했고, 웬만한 분석에는 두통도 없다. 내 경험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이번 영화 덕분에 코어도 성장한 모양이다.

* * *

아내와 함께 한국에 돌아왔다.

다시 같은 일상을 보내면서 내 영화 소식을 찾아보는 재미로 하루를 보냈다.

내가 궁금한 영화의 흥행 성적은 최종 성적이다. 한두 달 느긋하게 기다리면 나올 것이니 매일 찾아보거나 하진 않았다. 반응에 대해서는 댓글 보는 재미가 있어서 즐겨 찾아보았다.

혁민이 말대로 포털 영화 부분이 내 영화 이야기로 도배가 될 지경이었다. 리뷰도 많고 댓글도 정말 많았다.

고맙게도 대부분이 호의적이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리뷰부터 보았다.

[한국인만이 만들 수 있는 블록버스터.]

자신의 감상을 주로 써 내려가긴 했는데 군데군데 영화의 맥을 제대로 지적한 부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영화에 대입한 것 같다는 말도 있고.

댓글들도 확인했다.

[아마 한국 사람만큼 영화에 몰입한 사람도 없을 듯.]

[우리나라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 다 그만큼 몰입했을 걸요? 미국만 봐도 지금 장난 아니던데.]

[북한 주민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데.]

[폭동 일어나는 거 아님? ㅋㅋ]

[난 액션이 좀 진부하던데. 내용도 그냥 그렇고.]

[윗분은 감정이입이 안 되어서 그런 듯.]

[다른 영화랑 별 차이 없다는 분들 다 그럼. 그래 놓고 영화 자체는 재밌다고 그러고. 어쩌라는 건지.]

[그냥 영화로 봐도 어벤져스급은 되죠. 문제는 심하게 감정이입한 사람들은 영화의 재미도 못 느끼고 덜덜덜 떨다가 영화가 끝났다는 점. 내가 그랬음. ㅋ]

이 댓글 밑으로 죄다 자기도 그랬다는 반응.

[재미를 못 느꼈다는 사람들이 영화가 재밌다고 하는 이유는 대체 뭔지. 두 번 본 건가?]

[윗님은 영화 안 본 듯. 이번 최신성 감독님 영화는 보는 영화이면서 체험하는 영화임. 본인이 게임 하는 게 재밌겠어요? 남의 하는 거 구경하는 게 재밌겠어요?]

[내가 롤러코스터 타는 게 재밌겠어요? 남이 타는 거 구경하는 게 재밌겠어요?]

[내 여친이란 뽀뽀하는 게 좋겠어요? 남들 뽀뽀하는 거 보는 게 좋겠어요?]

[내가 똥 싸는 게 시원하겠어요? 남이 똥 싸는 걸 보는 게 시원하겠어요?]

[ㅋㅋㅋ]

[ㅋㅋㅋㅋㅋ]

댓글 놀이가 이어지다가 누가 정리를 했다.

[윗분들 말이 얼추 맞긴 합니다. 영화 속에 들어간 느낌이 굉장히 강해서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겪는 기분이 들거든요. 안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왜놈들한테 당해서 한이 맺혀 있는데, 오죽했겠어요. 조종사들 죽어나갈 땐 정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내 동료가 죽는 느낌이라.]

[저도 그랬네요. 그 전투에서 이겼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영화 본 사람들은 압니다. 영화 속 상황 자체가 정말 사람 마음을 건드리죠. 힘들어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나중엔 감격이 장난 아니더라고요.]

[위쪽 분들 은근히 스포를 하시네.]

[윗분들 말은 예고편에도 나오는 수준임.]

[내가 스포함. 주인공 죽음 ㅇㅇ]

[응. 아니야. ㅋㅋ]

댓글 내용이 엉뚱한 화제로 넘어갔다.

[님들 코난 쇼 봤음? 웃겨 뒤짐. ㅋㅋㅋㅋ]

[ㅇㄱㄹㅇ ㅂㅂㅂㄱ]

[코난 쇼가 뭐임?]

[코난 오브라이언 쇼. 겁나 웃긴 토크 쇼.]

[방금 유튜브에서 보고 왔는데 대박! 전 세계 팬들이 댓글 엄청 달고 있음. 최신성 감독 진짜 웃김.]

[인정. 근데 그거 다 대본임. ㅋ]

[나도 보고 옴. 너무 웃겨서 눈물 났음.]

[최신성 감독은 코미디 안 찍나?]

[그러네. 코미디 영화만 없네요.]

[펀딩 사이트 가서 글 올려봐요. 갓 필드도 거기 아저씨들 댓글 보고 제작했다는 말이 있던데.]

오늘은 여기까지 봤다.

리뷰마다 댓글이 워낙 많아서 아껴 볼 참이다.

근데 코난 쇼가 벌써 방영된 건가.

곧장 유튜브로 들어갔다.

어제 올라왔는데 조회수가 그야말로 폭발했다.

댓글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영상을 클릭해 보았다.

소파에 앉아 5분 남짓 되는 쇼를 보았다.

나도 코난도 대본에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제법 재치를 발휘했다. 녹화할 때는 이게 재미있나 싶었다. 코난이 하도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몰아가서 난 리액션만 했을 뿐이다.

한국식으로 아무 말 대잔치라고 할까.

나도 코난도 능청스럽게 이어갔다.

코난의 화법에 휘말린 거지.

“영화에 왜 여주인공은 없는 겁니까?”

“저항군이 한가하게 사랑할 여유가 없었어요.”

“여주인공이 꼭 사랑하라는 법이 있나요?”

“여주인공이 꼭 나와야 한다는 법이 있나요?”

“미국에는 그런 법이 있습니다만?”

“없는 걸로 압니다.”

“전처가 여주인공을 반대하던가요?”

“제 아내는 멀쩡히 집에 있습니다. 반대 안 했고요.”

“지금 아내 말고 전처 말입니다.”

“지금 아내 말고는 없습니다.”

“첫 번째 결혼이라고 아내를 속였군요.”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코난의 질문이 또 이어졌다.

“현재 엄청난 흥행을 하고 있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기분 좋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요?”

“많은 사람이 봐 주셔서요.”

“돈은 상관없다 이 말이군요.”

“여러 스태프가 고생해서 찍었으니 대가가 있어야죠.”

“감독님은 돈이 필요 없는 거군요.”

“필요합니다. 다음 영화 찍어야죠.”

“그 영화 주인공은 접니다.”

“그럴 리가요.”

“신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나는 신이 아닙니다.”

“정말 신의 계시를 받았는데요?”

“나는 연락 안 했습니다만.”

“그럼 내게 계시를 준 그분은 누굴까요?”

“코난의 전처 아닐까요?”

또 웃음이 나왔다.

코난이 다시 물었다.

“다음 작품은 뭔가요?”

“블루드 워 세 번째이자, 시리즈 마지막 편입니다.”

“거기엔 여주인공이 나오나요?”

“고려해 보도록 하죠.”

“게이도 나옵니까?”

“코난이 나온다면 그런 거죠.”

“내가 그쪽인지 어떻게 압니까?”

“대기실에서 내 엉덩이를 만졌잖아요?”

“미안하지만 난 게이가 아닙니다.”

“그럼 내 엉덩이는 왜 만졌죠?”

“지갑을 훔치려고 했죠.”

폭소가 터졌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요즘 힘든가 봅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다음 영화 주인공으로 나를 쓰세요.”

“차라리 돈을 드리겠습니다.”

“얼마를 주실 겁니까?”

“12달러.”

“왜 12달러입니까?”

“그 돈으로 블루드 워를 보세요.”

“영화 푯값은 10달러입니다만.”

“잔돈으로 팝콘이나 사 드세요.”

“영화도 봤습니다만.”

“안 본 걸로 압니다.”

“정말 봤는데요?”

“어떤 내용입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

“안 본 게 확실하군요.”

“영화가 끝났을 때 누가 내 바지에 오줌을 쌌더군요.”

“하하하하!”

유튜브에 올린 영상은 여기까지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무슨 만담 콤비 같다.

이 대화 후로 영화에 대한 질문이 본격적으로 나왔다.

질문만 대본에 있고, 내 대답과 코난의 리액션은 애드립이다. 당연히 코난은 영화를 봤다. 연출이 골라준 질문이지만, 내 말에 대답하는 걸 보면 영화 분석까지 했다.

“뭘 그렇게 봐?”

내가 웃고 있자 아내가 내 옆에 앉았다.

그녀도 키득거리며 쇼를 보았다.

“오빠 왜 이렇게 말을 잘해?”

“몰라. 이상하게 휘말리게 되더라고.”

“오빠가 원래 웃기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

“이참에 코미디 영화나 찍어 볼까.”

“그냥 코미디면 흥행이 좀 어려울 텐데.”

“다른 걸 섞어 볼 수도 있고.”

“우아하고 예술적인 코미디면 재밌겠네.”

“블랙코미디?”

“그런 것도 좋고. 그래도 오빠 이름값이 있는데 그냥 코미디 영화를 만들면 그것도 좀 그렇잖아.”

“그런가.”

포털 댓글에도 코미디 영화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근데 코미디 장르는 성공하기 어렵다.

정말 웃긴 TV 예능도 많은데 굳이 극장 가서 코미디 영화를 볼 이유가 있을까. 풍자 블랙코미디면 영화적 가치가 좀 있을 것 같긴 하다.

풍자 코미디면 한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주인공은 진지한데 관객만 웃겨 죽는 코미디. 웃픈 현실도 보여 주고, 마냥 웃기기만 하는 건 아닌 영화.

당분간 차기작을 할 생각은 없었다.

쉬면서 이런저런 소재를 찾아보는 거지.

코미디 영화에 느낌이 좀 왔던 터라 찰리 채플린 영화를 몰아 보기로 했다. 다 봤지만 감독으로서 본 적은 없으니.

찰리 채플린이 그랬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페이소스 코미디의 창시자다.

종일 채플린의 영화만 보았다.

첫 장편 키드부터 시작해서 황금광 시대. 모던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시티라이트. 서커스 등등.

하나같이 눈물을 머금은 코미디다.

당시 시대의 부조리를 꼬집고, 현대 기계 문명도 우스꽝스럽게 비판한다. 위대한 독재자에선 히틀러가 지구본 풍선을 가지고 노는 장면으로 기막힌 풍자를 했다.

채플린이 부랑자나 가난뱅이로 나오는 영화는 늘 길고 먼 길을 혼자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지팡이를 들고 발랄한 척 걸어가지만 뒷모습이 처량하고 애처롭다. 현대인의 삶에 비춰 봐도 어울린다.

코미디 영화에 해학과 풍자, 연민의 감정 등을 넣는 방식을 배웠다. 감독이 되어 보니 여러 면이 달라 보였다.

페이소스 코미디의 대가는 한 명 더 있다.

주성치 감독.

초기에는 병맛 코미디로 홍콩인들의 배꼽을 낚았는데, 돈을 좀 버신 뒤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만들었다. 코미디의 장인이 되면서 격이 올라갔다고 할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희극지왕이다.

영화 엑스트라를 전전하는 무명 배우와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매우 진지한 장면을 기괴한 주성치식 코미디로 연기를 해서 웃기면서 슬픈 영화다.

다시 보니 정말 페이소스가 진득하니 묻어났다.

장백지와 주성치의 연기가 정말 일품이다. 만만치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연기를 하는데, 웃기는 장면이 아닐 때는 마음이 먹먹해질 정도로 깊은 연기력을 보여 주었다.

후반은 좀 막 나가지만 그것마저도 인생의 막장을 은유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목숨 건 연기를 하는 장면은 왜 사는 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먹고 살기 위해서다.

채플린이나 주성치나 본인들이 살아온 인생이 영화에 강한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주성치 본인이 무명 배우 시절이 길었고, 시궁창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고생을 해 본 사람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크다.

그녀도 나도 무명 생활을 꽤 했다. 미래도 암울했고.

서연의 연기력 바탕에 그러한 경험이 있다. 나 역시 내 영화의 정서에 그런 것들이 담겨 있고.

서연이를 여주인공으로 하면 어떨까.

안 그래도 차기작은 아내를 주인공으로 하려던 참이다. 코미디 영화와는 맞지 않아서 그렇지.

서연과 블랙코미디.

뭔가 묘하게 일렁이는 느낌이 온다.

코어가 전달하는 것일까.

* * *

휴가를 끝내고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가도 막상 할 일은 없다. 희진이가 여전히 나 대신 결재를 하고 있고, 회사 경영도 잘되고 있었다.

출근하면 회사에 들어온 시나리오도 보고, 재단에도 나가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확인했다. 한데 회사든 술집을 가든 블루드 워 라스트데이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미국에선 타이타닉의 흥행 성적을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있었다.

타이타닉은 역대 흥행 수입 2위다. 1위 아바타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만들었으니 혼자 다 해먹은 거지.

은근히 기대는 했지만 흥행 추이를 들여다보진 않았다. 안달 난 사람처럼 매일 들여다보는 것도 피곤한 노릇이다. 흥행은 차기작을 만들고 직원들 월급 주고 나도 수익이 좀 나는 정도면 충분했다.

“감독님. 맥주 한잔하시죠?”

오늘도 회사에서 빈둥거리다 퇴근하려는데 수혁이가 내 사무실에 찾아왔다. 감독 입봉 준비나 하라고 했더니 고민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술이 당겨서 호프집에 갔다.

퇴근 시간에 직장인들이 북적대는 호프집에서 한잔하는 재미가 있다. 맥주를 마신 뒤 포장마차에서 인생을 안줏거리로 소주를 마시는 운치도 있고.

적당히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빙하는 아가씨와 업주는 날 알고 있고, 자주 오는 손님도 날 안다. 눈인사를 할 정도다.

“오늘 손님 많네. 무슨 날이야?”

“요즘 회사에서 단체로 영화 관람하고 그런답니다. 영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관람하고 뒤풀이하는 것 같네요.”

“학생도 아니고 무슨 단체 관람을 해?”

“어떤 영화를 보면 투쟁심을 고취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심어주는 효과가 있다고 그러네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도 준답니다. 회사 직원들 교육용인 거죠.”

“무슨 영환데?”

“알면서 왜 그래요?”

나도 수혁이도 낄낄대며 웃었다.

사실 미국에 있는 혁민이한테도 들었다. 나도 모르는 신드롬이 뭔가 했더니 방금 수혁이가 말한 그거였다.

블루드 워 ; 라스트데이를 보고 나면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긍정적으로 달라지고, 용기가 생긴다고. 우울하거나 염세적인 사람에게 특효라고 한다. 나만 불행한 건가. 나만 운이 없나. 이런 사람에게도 열심히 살아갈 동기 부여가 된다고도 하고.

뭐, 믿거나 말거나.

내가 나도 모르게 또 영화에 ‘치유력’을 담았나 보다.

내 영화에 왜 그런 게 담기는 것인가 했다.

지금은 대충 짐작한다.

주성치 감독처럼 나도 곤궁하고 힘든 시절을 겪었다. 내 무의식에 그러한 아픔이 있었던 거다. 치유 받고 싶은 내 마음이 영화에 녹았던 거지.

결국 창작이라는 건 창작자 스스로 위안을 받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거다. 나의 꿈. 나의 욕망을 창작을 통해 실현하는 것일 테고. 그게 다행히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거였다. 운 좋게도.

코미디 영화도 그런 방향이 좋을 것 같다.

한국 사람들 참 힘들게 산다.

우리 한국인을 위로할 영화나 만들어 볼까.

샌드위치와 달리 웃음이 넘치는 영화로.

생맥주가 나와서 수혁이와 건배했다.

한 모금 시원하게 마셨다.

“고민 있으면 털어놔 봐.”

“감독 입봉 말인데요.”

“고민할 거 뭐 있어. 이때다 하고 감독하면 되는 거지.”

“그거 저… 아직 더 배워야 할 것 같아서요.”

“충분히 배웠어.”

“할리우드 연출도요.”

속으로 감탄했다.

수혁이 녀석 야심 하나는 걸출하다.

네오스타에서 연출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래. 다음 작품에 합류해.”

“고맙습니다.”

다시 건배했다.

맥주를 들이킨 후 둘 다 웃었다.

뒤에서 직장인들이 라스트데이에 대한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데, 나와 수혁이가 그 소리를 듣고 웃음이 났다.

“최신성 영화는 무조건 봐야 돼. 영화도 재밌지만 건질 게 있거든. 사람이 좋으니까, 영화도 좋은 거지.”

“최 감독님이 좋은 사람인지 어떻게 아세요?”

“얌마. 펀딩 사이트 만들어 놓은 거 보면 모르냐? 청년 재단은 어떻고? 여태껏 나온 영화를 봐라, 새꺄. 다, 사람을 위로 해주는 영화 아니냐고. 우리 아들이 뭐라 그러는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힐러란다, 힐러. 광역 치유 스킬 난사하는 힐러.”

“한참 게임 할 때죠.”

“과장님. 그 힐러 분 여기 계시는데요?”

“누구?”

“최신성 감독님요.”

“어?”

과장이 화들짝 놀랐다. 직원들은 날 의식하고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과장만 날 몰랐던 터라.

“아이고! 감독님!”

과장이 나서자 그제야 직원들도 인사를 하러 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술집에 있던 모든 직장인이 내게 몰려왔다.

다들 적당히 취한 바람에 회사 단합대회가 되고 말았다.

“최신성! 최신성! 최신성!”

내 이름을 연호하는 직장인들에게 인사를 했다.

다들 정말 신이 난 얼굴이다.

“오늘 술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와아~”

“최신성! 어이! 최신성! 어이! 최신성! 어이!”

직장인들의 복창이 내게 위안을 준다.

이렇게 서로가 힘을 주는 거겠지.

아무튼 기분은 무척 상쾌했다.

* * *

드디어 블루드 워 ; 라스트데이가 막을 내렸다.

소식을 듣고 바로 박스오피스를 확인했다.

수치를 보곤 한숨 같은 탄성이 나왔다.

북미 최종 성적 7억 2천7백만 달러.

혁민이 말대로 7억 달러 넘었다.

타이타닉은 넘어섰고, 아바타는 못 넘었다.

만약 같은 조건이었다면 아바타마저 넘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라스트데이 신드롬이 아바타가 나왔을 때 이상이었던 지라.

한국처럼 영화를 보면 용기를 얻는다는 말이 진실처럼 통하면서 일부러라도 보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아바타가 혁신적인 영화였다면 라스트데이도 그런 셈이다. 기술적인 측면이 아닌 영화에 내재된 특별한 힘 덕분에.

전 세계 흥행 수익을 합치면.

총 수익이 18억에서 20억 가까이 될 듯했다.

3억 달러 들여서 찍은 영화의 수익이다.

블록버스터를 6편이나 찍을 수 있는 거액.

내 이름으로 기부나 후원은 하겠지만 이 수익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길은 없을까 생각했다. 혹은 돈 대신 재능 기부도 좋고. 수익에 비하면 그야말로 푼돈이 들겠지만.

안 그래도 호프집에서 만난 회사원들에게 큰 힘을 받았다. 내 영화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도 나를 응원해 주는 진풍경이었다. 그때 받은 걸 오롯이 돌려주는 영화를 하면 어떨까.

해서 펀딩 사이트에 공고를 냈다.

이번 주 토요일에 플래닛 케이에서 영화 관련하여 실시간 개인 방송을 할 것이니, 관심이 있는 분은 들어와 달라고.

플래닛 케이는 무료 회원 가입이 된다. 최신 콘텐츠만 빼고 무료 관람한 뒤 회원탈퇴해도 되고. 회원 수를 늘리려는 꼼수가 아니라는 건 밝혔다.

그리하여 토요일 오후 9시.

내 서재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플래닛 케이와 연결했다. 댓글 놀이를 구경하는 것도 재밌지만, 직접 말과 글로 소통하는 것도 재밌을 듯했다.

책상에 앉아 방송 준비를 했다.

[연결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실시간입니다.]

로큐 직원의 문자와 함께 바로 방송이 시작되었다.

화면 옆 채팅창에 무수히 많은 글이 올라갔다.

너무 빨리 올라가서 읽지도 못했다.

실시간 접속자 수는 천 명이었다.

딱 천 명만 접속하도록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최신성입니다.”

말 한마디에 또 채팅창이 폭주했다.

인사말. 영화 잘 봤다는 말. 날 응원하는 말.

무슨 일로 방송하느냐는 말.

그리고 리연이 보여 달라는 말.

“리연이는 지금 자고 있어서요. 오신 분 중에 라스트데이에 투자하신 분들 계세요?”

[저요! 초대박! ㅎㅎㅎ]

[8배 예상된다고 공지 떴어요!]

[500 넣어서 4000 벌었습니다!]

[난 700 투자해서 5600. 우하하하하!]

[님들 부러움!]

[이번에도 펀딩 하나요?]

“펀딩은 몇 개월 후에 공지할 겁니다. 혹시 투자하고 싶었지만 탈락한 분들 계십니까?”

절반가량이 본인은 탈락했다고 글을 올렸다.

“지금부터 방송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할게요. 실은 제가 여러분과 함께 영화를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다큐도 좋고, 아마추어 느낌의 영화도 좋고. 여러분이 생활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찍어도 되고요. 아이디어 좀 구합니다.”

또 댓글이 무수히 올라갔다.

로큐 직원이 빠르게 올라가는 댓글들 중 하나를 찾아서 내가 보는 영상에 올려 줄 터다.

직원이 올려 준 댓글을 읽었다.

“직장 다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요?]

[다큐는 흥행이 안 되잖아요?]

[왜 저희와 영화를 찍으시려는 건지.]

[우리가 출연을 하는 건가요?]

“네. 출연하는 겁니다. 여러분과 함께 호흡하며 영화를 한번 찍어 보고 싶어서요. 수익이 목적은 아닙니다.”

[출연료 주시나요?]

“예. 출연료 드립니다. 펀딩 수익보다는 낮겠지만 출연자 전부에게 출연료를 드려요.”

[일반인이 어떻게 연기를 하죠?]

[오디션을 봐야 하는 건가요?]

[영화 망하겠네. ㅋㅋㅋ]

[수익 때문에 찍는 게 아니라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뜻을 물어보려는 겁니다. 다른 생각은 없으세요? 연기와 상관없는 영화라도 됩니다.”

그때 직원이 찾아준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예능은 어떠세요?”

[예능?]

[게임 하는 건가요?]

[난 게임 잘 못하는데 쩝.]

예능은 그나마 반응이 컸다.

“어떤 예능이 좋을 것 같나요?”

[편 갈라서 게임 하기!]

[OX 퀴즈!]

[서바이벌 게임!]

[두뇌 대결 어떤가요?]

[머리 나쁘고 몸 둔한 사람은 어떻게 해요?]

[감독님! 운에 맡기는 게임이 그나마 공평할 겁니다!]

“운에 맡기는 게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찬성과 반대가 무수히 올라왔다.

좋은 아이디어도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1라운드는 남녀 구분으로 체력 게임과 두뇌 게임. 2라운드는 운에 맡기는 게임을 하는 겁니다.”

댓글 대부분이 찬성이었다.

수많은 안건이 올라오고 있는데, 그중 괜찮은 것은 직원이 골라서 내 화면에 띄어 주었다.

“여러분 의견을 로큐에서 종합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니까. 등산, 마라톤. 닭싸움 등등 많이 나오네요. 이렇게 합시다. 5개 종목의 체력 토너먼트에서 이긴 분들 250명. 5개 종목의 두뇌 토너먼트에서 이긴 분 250명. 이 500명이 마지막 행운 대결을 하는 것으로요.”

[좋아요!]

[행운 대결은 뭘 하시나요?]

[아, 난 지지리도 운이 없는데!]

[1라운드 통과하면 출연료 더 주시나요?]

“네. 출연료는 같고 상금만 다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참가자에게 블루드 워 3편 펀딩 카드를 드립니다. 300만 원까지 투자할 수 있는 카드입니다.”

[와! 대박!]

[펀딩 탈락하는 것보다 300만 원이 낫죠!]

[설마! 2라운드는 그 이상인가요?]

“2라운드에 진출하는 분은 행운 순위에 따라 600만 원에서 1천만 원 카드를 지급합니다. 1등은 3천만 원을 투자할 수 있는 카드이며 제가 대신 투자금을 지불합니다.”

[펀딩에 투자하려면 게임에 참가해야 하는 거네요.]

[펀딩만 기다리는 사람은 배 좀 아프겠네.]

[아마 다 여기 있을 걸요? 펀딩 공지만 눈 빠지게 기다리던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맞음! ㅋㅋㅋ]

“그것과는 별개입니다. 블루드 워 3편의 펀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존 펀딩으로 게임과 상관없이 모집하고요, 다른 하나는 게임에 참가한 분들만 모집하는 겁니다.”

[그럼 펀드 규모가 커질 텐데요?]

[늘 100억 이하 펀딩이었는데.]

[이것도 설마!]

“이번 펀딩은 300억 규모입니다.”

[헐!]

[초대박!]

[감독님이 미쳤다아~ ㅋㅋ]

[완전 기대!]

[감독님! 이번에 돈 버신 거 다 푸실 생각인가요? ㅋ]

[이번 게임 때문에 한국이 난리 나겠네!]

[참가자 경쟁률이 어마어마할 듯!]

[돈 걸고 게임 하면 욕먹을 수도 있는데…….]

일부 네티즌이 돈을 걸고 게임 하는 걸 우려했다.

예상했던 바였다.

“게임 참가 자격도 심사가 엄격할 겁니다. 제가 이번에 영화 제작을 제안한 것은 제가 벌어들인 수익을 조금이나마 돌려드리려는 차원이에요. 그 방법을 찾으려고 이렇게 방송을 한 거고, 여러분 덕분에 좋은 방법을 찾아냈네요.”

[감독님이 욕먹으면 저희가 실드 칠게요!]

[제가 앞장서서 막겠습니다! ㅋㅋ]

[감독님은 따로 기부도 하시잖아요. 사람들이 욕은 안 할 거라고 봅니다.]

[맞아요. 돈 벌고 싶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건데.]

[그나저나 게임 할 때 사고 나는 건 아닌지.]

“사고 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참가자 전원에게 혜택이 갑니다. 그 점 유의해 주시고 과열되지 않도록 저희도 신경을 쓸 겁니다.”

[행운 게임은 어떻게 하시나요?]

“글쎄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영화적으로 재미있는 뭔가가 없을까요?”

[감독님! 보물찾기 어떤가요?]

[보물찾기! 옛날 소풍 가면 하던 거!]

[제비뽑기나 돌림판 돌리는 것보다는 나음!]

내 생각도 그렇다.

단서를 하나하나 획득해서 보물을 찾는 것.

영화에 추리기법이 저절로 들어간다.

“보물찾기 원하세요?”

[원합니다! 대박 재밌겠다!]

[이거 스케일이 어마어마할 듯!]

[한 명이 여러 개 찾으면 어떻게 되나요?]

“여러 개를 찾으시면 가장 좋은 걸 선택하시면 돼요. 나머지는 저희가 회수한 뒤 추첨해서 아무것도 못 찾은 분들에게 지급할 겁니다.”

[좋아요!]

[대체 몇 개나 숨겨 놓으시려나.]

[게임 참가 인원은 몇 명이죠?]

“지금 여기 계시는 분들 모두와 선착순 1천 명입니다. 물론 자격이 되셔야 합니다.”

[헐! 2천 명!]

[진짜 빡세겠다!]

[대체 운이 얼마나 좋아야 1999명을 이기지? ㅋ]

[블루드 워 3편 수익률이 6배 정도면 사실상 1등 상금이 2억 가까이 되네요. ㄷㄷ]

“그럼 저는 영화를 준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즉시 펀딩 사이트에 가셔서 등록하세요. 자격 심사는 차후에 합니다.”

[감독님! 사랑합니다!]

[부디 예능 영화도 대박 나라!]

[나도 이제 배우가 되는 건가? ㅋㅋㅋ]

[배우 아님. 우리 모두 엑스트라임! ㅋ]

마지막 말을 남겼다.

“여러분 모두가… 이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아우, 닭살이야.

내게 인사하는 댓글들이 무수히 올라갔다.

다들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방송 화면을 껐다.

무슨 영화를 찍을까 했는데, 제법 재미있는 다큐 영화가 나올 듯싶다. 사고가 우려되긴 하지만 싸움이 일어나진 않을 것 같다. VJ가 계속 따라다니고 있고, 게임에서 퇴출되면 본인만 손해니까. 게임 참가자 모두 좋은 걸 받도록 할 참이다.

난데없이 예능이라니.

상금을 놓고 경쟁하는 미국 리얼 버라이어티 쇼처럼 하진 않을 터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보려고 찍는 게 아니다.

잔잔한 감동을 줄 자신이 있다.

그 감동은 참가자들이 만들어 낸다.

* * *

로큐 직원들이 바빠졌다.

회사의 실익이 되는 일이 아니지만 다들 열심히 준비해 줬다. 로큐는 네오스타에 지분이 있고 영화에 투자도 했다. 네오스타 영화가 대박을 내면 직원들 보너스도 두둑해진다.

한국 영화와는 수익 자체가 다르다 보니.

그로부터 25일 뒤.

최종 준비를 끝냈다.

촬영지는 인천광역시 무의도. 촬영일정은 주말 1박 2일.

6월 말이라 참가자 전원 야외 취침이다.

순 제작비는 30억.

VJ 수만 50명에 이르고 고정 카메라도 30대 이상.

로큐 스태프들이 총출동했고, 외부 스태프까지 모집했다.

작가진이 체력 게임 5종과 두뇌 게임 5종을 만들었다.

체력 게임은 제비뽑기로 결정하도록 했다.

납덩이 차고 등산. 한 발로 달리기. 줄넘기 등등.

두뇌 게임은 전부 추리게임.

해서 선발대가 무의도로 가서 허가를 받고 텐트를 치는 등 사전 준비를 했다. 2천 명이 먹을 밥은 캐터링 업체에 맡겼다. 또한 작가들은 등급이 다른 펀딩 카드 104개를 무의도에 숨겨 두었다. 각 카드에는 상급 카드에 대한 각기 다른 단서가 있다.

의료진도 구성하고, 안전사고에 대비하여 지역 조사를 철저히 했다. 위험 지역이나 주택가에는 가지 않도록. 또한 촬영지 인근 주민에게는 보상으로 가구당 30만 원씩 지급했다.

그리하여 6월 23일 토요일.

새벽부터 월미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엄연히 영화 촬영인지라 취재진은 단속했다.

스포일러가 유출될 수 있기 때문에.

여객선이 부지런히 참가자들을 실어 날랐다.

그렇게 오전 10시에 모든 참가자가 모였다.

촬영 장소이자 숙박 장소는 실미도 해수욕장.

백사장에 참가자 2천 명과 스태프 150여 명이 모였다.

텐트만 해도 100개 넘고, 생수나 간식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간이화장실과 샤워실도 늘어서 있고.

촬영장소 여러 곳에 이미 카메라가 설치되었으며, VJ들도 카메라를 들고 곳곳에 포진했다.

이미 촬영을 시작했다.

메가폰을 들고 나섰다.

“자, 주목!”

참가자들이 일제히 날 향했다.

“출발 전에 안전 수칙을 다들 보셨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상기해 드릴게요. 과다한 욕심을 내시지 않아도 됩니다. 3등 이상만 받게 되는 게 좀 더 클 뿐이지, 그 이하는 크게 차이가 없다고 보셔도 돼요.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됩니다.”

“뭔가 숨겨 둔 게 있나요?”

“제가 돈 벌려고 이번 영화를 찍는 게 아니라는 건 다들 아시죠?”

“예!”

“경쟁이 아니라 단합대회에 온 것으로 여겨 주세요. 즐기기만 하셔도 충분한 보상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혹 아쉬운 일이 있더라도 웃고 넘겨 주셨으면 합니다. 제 말을 믿어 주시면 그 결과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도 즐기러 왔어요!”

“저희 안 싸웁니다. 쫓겨나면 어쩌려고요!”

말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표정이 좋았다.

그만큼 날 믿는다는 거겠지.

등수와 상관없이 뭔가가 있다는 눈치를 챘다.

“지금부터. 펀딩 카드 게임을 시작합니다. 체력 부분과 두뇌 부분을 선택하신 분들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이동해 주세요. 카메라가 계속 찍고 있으니 욕하시면 본인 손햅니다.”

“하하하하!”

“고정된 카메라는 가능한 한 쳐다보지 마시고, VJ 카메라는 상관없습니다. 브이자를 그려도 좋고, 메롱 하고 혀를 내밀어도 됩니다.”

“예!”

참가자들이 대답을 하며 이동했다.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사람들 조를 나누고 제비뽑기를 시작했다. 종목마다 심판도 배정되었고.

수혁이가 외쳤다.

“준비 끝났습니다!”

“자! 게임, 시작!”

바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가을 운동회를 하는 모습 같다.

참가자들은 심판과 진행 요원을 맡은 스태프들 유도에 따라 웃는 얼굴로 게임에 임했다.

과열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웃고 떠드느라 정신없었다.

게임 진행이 좀 느리기도 했고.

그렇다고 게임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었으니까.

한쪽에선 수혁이와 작가진이 참가자들 인터뷰를 한다.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게임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돈은 왜 벌려고 하는지. 각자 사는 건 어떤지.

무의도 서쪽 하늘에 석양이 질 무렵.

1라운드가 끝났다. 다들 모여서 밥을 먹고 캠프파이어를 했다. 우리가 하라고 한 게 아니라, 본인들이 그냥 한 거였다.

덕분에 좋은 그림이 나왔다.

수혁이와 작가진은 계속 인터뷰를 하고.

인터뷰 중에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도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있고. 어렵게 입사한 회사가 너무 일을 시켜서 그만두고 나온 사람도 있다. 취업을 못해 알바만 전전하다가 온 참가자도 있고.

사람은 누구나 사연이 있다.

가슴 아픈 과거도 있고, 씩씩하게 살고 싶은 데 그게 잘 안 되는 사람도 있고. 직장 상사 때문에 회사 다니는 게 힘든 사람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람도 있고.

이번 영화의 목적은 그 사연을 들어보는 것이었다.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이 게임을 하느냐다.

누군가의 숨겨진 사연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사연에 공감하는 것이며, 그 공감은 감동으로 이어진다. 각자의 사연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물론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니 편도 갈리고,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말싸움이 생기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아 따돌림도 당한다.

이 역시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연들이다.

과거의 사연. 현장의 사연. 그리고 그들이 게임을 통해, 이 촬영을 통해 이뤄나갈 사연들이 바로 이 영화다.

지금 현재.

너무도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꾸밈이 전혀 없는 진실 된 이야기들로.

* * *

다음 날 오후 3시.

그늘에 앉아 느긋하게 게임을 지켜보았다.

1라운드에 탈락한 이들은 한가하게 놀고 있고,

수혁이가 진이 다 빠진 얼굴로 내게 왔다.

“새벽에 잤어?”

“네. 어제 참가자 한 분의 사연이 정말 감동적이라 그 이야기를 담는 데에만 2시간 걸렸네요. 그분은 지금 보물 4개나 찾았어요.”

“잘됐네.”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거죠. 근데, 감독님은 좋은 사연이 나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까지 나온 사연만 해도 눈물 한 바가지는 나올 텐데.”

“어떻게 알긴. 나나 남이나 다를 거 없으니까.”

내 말에 수혁이가 잔잔한 충격을 받았다.

그 간단한 걸 왜 이제야 알았느냐는 듯.

“정말 그러네요. 전 의식을 못 했어요.”

“너만 해도 할 말 많잖아?”

“그렇긴 하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책 한 권도 부족하다고 그래.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당사자에겐 다 소중하고 힘들었던 일이야. 상대적인 게 아닌 거지.”

“솔직히 제 인생이 영홥니다. 시나리오 공모전에 맨날 떨어지고 뭘 하고 살아야 하나 싶을 때. 감독님이 저를 거둬 주셨잖아요.”

“내가 귀인인 거네?”

“그럼요. 진짜 귀인은 생색내지 않는 법이죠.”

“그렇긴 하네.”

내게도 귀인들이 있다.

CT 황 회장님. 신성영화사 이갑성 대표님 등등.

다들 좋은 분들이다.

보물찾기가 후반에 이르렀다.

산 곳곳에서 기쁨의 외침이 들려왔다.

마침내 게임이 끝났다.

1등. 2등. 3등이 결정되었다.

그들만 실질적 상금이 좀 크고 나머진 비슷했다.

참가자들이 다시 모였다.

다들 웃고 있었다. 전날 인터뷰 때 눈물을 흘린 참가자가 상당히 많았다. 수혁이가 진솔하게 사연을 들어준 터라.

어쨌든 쌓인 감정을 다 털어내 버린 후련한 모습이다.

“여러분. 이틀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정말 재밌게 놀았어요!”

“저희 정말 잘 온 거 같아요! 1등이 다 무슨 소용이야!”

“하하하하.”

다시 말을 이었다.

“자, 펀딩 카드는 다들 한 장씩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이제 출연료를 말씀드릴게요.”

“얼마씩 주시나요?”

참가자들이 정말 사심 없이 웃고 있었다.

이틀 치 일당 정도 받을 거라고 생각한다.

2천 명 전원 엑스트라 출연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참가하신 전원에게 출연료 500만 원씩 드립니다.”

“예?”

“오, 오백이요?”

“네. 여러분이 가진 기본 펀딩 카드도 전부 500만 원 투자 카드입니다. 상위 등급 카드를 획득하신 분들은 해당 금액으로 투자하시면 되고요. 바로 지금! 여러분 모두 펀딩 가입이 됐습니다.”

“우와아아아!”

지하암반수가 터지는 듯한 함성 터져 나왔다.

옆 사람을 껴안고 펄쩍펄쩍 뛴다.

이 모습마저도 영화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보는 사람도 참 흐뭇하고 기분 좋다.

영화 잘 나올 거라는 건 이미 확인했고.

이 예능 영화. 시리즈로 만들어 볼까.

할리우드 영화를 찍을 때마다.

매번 다른 참가자로.

* * *

집에서 느긋하게 편집했다.

찍어 놓은 분량이 워낙 많아서 내가 다 볼 수가 없었다. 해서 VJ들과 카메라 팀이 자체 편집을 한 뒤 그걸 플래닛 케이 서버에 전송했다.

2,000명이나 되는 참가자들 사연을 다 확인하긴 어려워서 작가진이 우선 확인해 보라는 데이터만 보았다.

가장 슬픈 사연부터 가장 웃기는 사연까지.

내용을 메모해 두고 어느 부분에 붙일지 콘티를 짜 나갔다. 초반에는 웃기고 발랄한 사연들. 중반에는 힘들었던 사연들. 후반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을 배치했다.

사연마다 분량도 다르게 조절했다.

발랄하고 유쾌한 참가자는 짧게 한마디 하고 지나가도록 편집 분량을 모았다. 왜 참가했죠? 라고 물으면 저마다 대답하는 식으로.

반면 절실한 사연이 있는 분들은 초반에 드러내지 않고 카메라가 관찰하는 식으로 편집 방향을 잡았다. 저 사람은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지도록.

그렇게 사연 노출 없이 게임 하는 모습과 참가자들끼리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하나 둘 사연을 드러낸다. 오디션 프로그램 편집 스타일처럼 게임 직전에 사연을 공개하기도 하고, 떨어진 후에 공개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반전도 있었다.

유난히 성격이 밝은 23살 아가씨가 나온다. VJ와 농담도 하고 같은 참가자와 친하게 지낸다. 성실해 보이는 친구다. 게임도 열심히 하고. 양보할 줄도 안다.

그런데 혼자서 먼 바다를 보는 장면이 더러 있었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VJ가 가까이 가서 묻는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아가씨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다 해가 진 뒤 또 혼자 쓸쓸히 바다를 보고 있었다. VJ가 넌지시 옆에 앉았다. 그 친구를 찍지는 않고 바다를 찍었다.

“왜 혼자 있어요?”

“혼자 있는 게 편해서요.”

“낮에는 참가자들과 잘 어울리던데요?”

“즐기려고 왔는데 저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면 안 되잖아요. 혼자 있을 때는 저 혼자 뭘 해도 상관없어서요.”

“힘든 일이 있군요.”

“그냥….”

카메라가 그 친구의 옆모습을 찍었다.

시간이 좀 흘렀는지 점프 컷이 나왔다.

아가씨가 말했다.

“엄마가 아파요.”

“그랬군요. 많이 아프세요?”

“췌장암 말기에요. 너무 강한 진통제 때문에 이젠 저도 못 알아보세요. 실은 엄마 옆을 지켜드려야 하는데.”

“지금은 어머님 곁에 누가 계세요?”

“남동생이 있어요. 저도 동생도 일을 해야 해서 엄마 혼자 병원에 있을 때가 더 많아요.”

“실례하지만 아버님은요?”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VJ가 물었다.

“그럼 동생분이랑 둘이서 병원비를 댄 거예요?”

“네. 알바로 벌어선 병원비 감당이 안 되어서 저는 학교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해요. 동생도 그러겠다는 거 말렸어요. 일단 휴학하고 엄마 돌아가시면 다시 복학하라고.”

아가씨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연기가 아닌 현실이다.

마음이 느껴지기에 표정만 봐도 마음이 짠해진다.

“공장에서 일해도 병원비가 모자랄 것 같은데요.”

“빚이 좀 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년 지나면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감독님이 도와주셔서 1년이면 갚을 수 있겠네요.”

아가씨가 촉촉이 젖은 눈으로 웃었다.

“그동안 정말 힘들었겠네요.”

“네. 이젠 담담해요. 남들은 평범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저랑 남동생은 왜 이렇게 힘들까 싶었어요. 저도 그래서 밝게 살고 싶은데… 자꾸 엄마 생각이 나서.”

카메라는 바다를 보는 그녀를 묵묵히 담았다.

덤덤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복받쳐 오르는 모습.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그런데요. 우리 아빠랑. 우리 엄마. 정말 좋은 분들인데 왜 데려가시는 걸까요? 우리 가족은 그동안 아무런 죄도 안 지었는데 왜 우리만 이런 걸까요?”

아가씨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우리 남매 키우느라 정말 고생했어요. 식당 일도 하고, 파출부 일도 하면서 우리 남매 키웠어요. 그런 엄마가 왜 암에 걸려야 하는 거죠? 왜 가장 고통스러운 암에 걸리는 거죠? 엄마가 등이 아프다고 제 팔을 잡고 엉엉 우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짜증이나 내고…….”

아가씨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녀가 급히 눈물을 닦았다.

파도 소리만 들려왔다.

카메라는 가만히 그녀의 옆모습을 담았다.

한참 뒤에야 아가씨가 담담히 말했다.

“저랑 남동생. 열심히 살 거예요. 항상 밝은 모습으로 살고 싶어요. 힘들다고 우울한 모습으로 살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야 엄마도 아빠도 좋아하실 것 같고.”

“밝게 살면 밝은 기운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네. 고마워요, 언니.”

아가씨는 VJ에게 인사를 하고 걸어갔다.

암전이 되었다가 다시 그녀가 나타났다.

2라운드에 진출하여 웃는 얼굴로 카드를 찾아다니는 모습.

팀을 이룬 3명과 함께 열심히 머리도 쓰고 뛰어다니면서 마침내 3등 카드를 찾아냈다. 1500만 원 투자 카드다.

아가씨가 팀원들과 얼싸안고 정말 좋아한다.

그러더니 혼자 구석에 가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VJ가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정말 펑펑 운다.

이번 촬영에서 가장 극적인 참가자였다.

이 아가씨에 버금가는 사연의 주인공도 있다.

사업을 하다가 망하고 큰 빚을 진 40대다.

5년 전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막노동을 하다가 다친 뒤 노숙자가 되었던 참가자다. 2년이나 노숙을 하며 공사판에 다니다가 3개월 전에 겨우 쪽방을 얻었다고 한다.

수혁이가 물었다.

“공사 일은 꾸준하게 나가시는 건가요?”

“예. 고맙게도 꾸준하게 저를 써주는 형님이 계십니다. 제가 그 형님 보조로 일하고 있는데, 한 3년 더 하면 혼자 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사무실 같은 거 차리시게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 얼른 빚 갚고 아이들 좀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안 본 지 5년이 넘었네요, 하하.”

“그냥 보러 가면 안 됩니까?”

“빚쟁이들이 집사람 괴롭힐 것 같아서요. 집이랑 차에 경매 딱지 붙었을 때 이혼 도장 찍어도 된다고 했는데, 집사람이 아직 기다려주고 있네요. 반지하 방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내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요.”

40대 참가자의 눈이 붉어졌다.

가족 생각을 하니 콧등이 시큰해지는 모양이다.

수혁이가 다시 물었다.

“빚은 언제쯤 갚을 수 있을까요?”

“기술 배워서 한 10년 일하면 갚지 않겠습니까. 제 인생은 다시 시작하기에는 늦은 거 같고. 아내와 아이들이나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족과 같이 살면서 빚을 갚을 순 없나요?”

“제가 욕심부리다 진 빚인데 아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고생을 시킵니까.”

이 참가자의 인터뷰는 이게 다였다.

자신의 얼굴이 노출되는 게 꺼려지는 눈치다. 아내와 채권자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았고.

게임이 끝났을 때.

그 참가자가 전화를 보며 뭔가 망설이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수혁이가 슬쩍 다가가 말을 걸면서 잠시 대화가 오갔다.

결국 참가자가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를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네. 어디시죠?

목소리를 듣자마자 참가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나야.”

응답이 없었다.

잠시 뒤 전화기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40대 참가자도 금세 눈이 뜨거워지고.

-왜 전화했어.

“그, 그냥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지금 어디야?

“일하는 중이야. 나 요즘 공사 일 하고 있어.”

다시 그의 아내는 말이 없었다.

전화와 전화 사이에 어색함이 흘렀다.

-밥은 먹고 다녀?

“현장 나가면 함바집에서 밥 하나는 제대로 먹어.”

또 침묵이 흘렀다.

-여보….

“응.”

울먹이는 듯한 여보라는 말.

그 절절한 음성에 참가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까지 눈물이 차오른다.

여보라는 단어에 이렇게 울림이 클 줄 몰랐다.

-여보. 이제 집에 와.

“당신까지 고생시킬 수는 없잖아.”

-고생 좀 하면 어때! 당신이나 나나 생이별해서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한 번 힘들게 하면 됐지, 왜 집을 나가서 사람을 더 힘들게 해!

“미안하다.”

-듣기 싫어! 애들이 주말마다 서울역에 가서 당신 찾아다녔단 말이야! 빚쟁이들이 집에 좀 찾아오면 어때! 같이 빚을 갚을 생각을 해야지, 당신만 도망가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아!

참가자가 급히 눈물을 훔쳤다.

이렇게 기다릴 줄은 몰랐던 듯.

“3년 안에 들어갈 게. 기술자가 되어서…”

-오든지 말든지!

전화가 끊어졌다.

눈물을 훔치던 참가자가 애처롭게 웃었다.

가족을 배려한다는 게 오히려 잘못되었던 거였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아내가 이혼하자고 했어요. 집이 경매 처분될 때 나도 집사람도 너무 힘들었거든요. 말하는 거 들어보니 이제는 화가 좀 풀리긴 했네요. 그래도 미안해서 집에 갈 마음은 아직 없습니다.”

수혁이가 물었다.

“정말 3년 안에 들어가실 생각입니까?”

“예. 어엿한 기술자가 되어서 제가 열심히 살았다는 거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면목이 설 것 같네요.”

“일하실 때 항상 안전 조심하세요. 빨리 기술자가 되어서 가족과 함께 지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조감독님.”

40대 참가자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내와 함께 고생하면서 살았을까.

작가진이 선별한 참가자들의 사연들이 다 잔잔한 감동이 있었다. 사람의 경험에 따라 공감 지수가 다를 뿐이다.

여자친구가 임신했는데 수중에 돈이 300만 원밖에 없어서 참가했다는 대학생도 있고. 대리 운전하다가 벤츠를 긁어서 수리비를 물어주려고 참가했다는 분도 있고.

직장 상사가 하도 갈궈서 회사를 나왔다는 분도 있다. 이 분의 사연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였다.

보는 내가 다 화가 치밀 지경이었으니.

발랄하고 재밌는 이야기도 많았다.

푸드 트럭을 하려고 돈을 모은다는 친구. 네일아트 가게를 열고 싶어서 참가했다는 아가씨. 내 눈에 들어서 배우가 되어 보겠다고 참가한 연기 지망생.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심한 배탈이 나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바지에 똥을 쌌다는 친구.

한 친구는 사람이 너무 많은 곳에 있다가 급히 여친의 손을 잡고 탈출했는데, 웬 할머니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더라는. 여친은 저편에서 박장대소를 하고 있고.

감동은 아니지만 인상적인 사연도 있었다.

내 또래였다.

이번에도 수혁이가 인터뷰했다.

“고시원 생활은 얼마나 하셨어요?”

“6년 살았어요. 입실비가 고작 18만 원짜리 방이었죠.”

“고시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고시원에 지냈어요. 이혼했나 보더라고요. 아들은 15살쯤 되었는데 방학 때만 서울에 와서 아빠랑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각기 다른 방에서 살았다는 거죠?”

“네. 그 아저씨한테 무슨 지병이 있었어요. 중풍인가 고혈압인가. 없는 듯이 지내던 분이었죠. 아들한테 잘 해주는 것 같았데, 아들은 자주 짜증을 내더라고요. 그 아저씨는 아버지가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고요. 고시원 벽이 얇아서 방에서 대화하면 다 들립니다.”

참가자가 한숨을 쉬었다.

“방학 끝나고 아들이 방을 비운 뒤에 그 양반 혼자 막노동하면서 지냈어요. 매일 라면 끓여 먹는 것도 봤고요. 아들한테 전화하는 소리도 종종 들었습니다. 솔직히 당시에는 좀 화가 났어요. 낮이면 몰라도 밤에 그렇게 통화하면 남한테 피해를 주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떤 방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예요. 아흐흐흐. 으흐흐흐. 하는 소리요.”

“무슨 소리죠?”

“그때가 새벽이었어요. 술에 만취한 사람이 신세 한탄하는 소리 있잖아요. 누가 술 먹고 우나. 했죠. 저도 자다가 몇 번이나 깼어요. 아흐흐흐 하면서 흐느끼는 소리가 계속 나는 겁니다. 몇 시간이나 그러니까, 고시원에 있던 사람들이 막 짜증을 냈죠. 잠 좀 자자! 조용히 좀 합시다! 라고요.”

“자주 있는 일입니까?”

“싸구려 고시원에는 알콜중독자나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또 이상한 놈이 사람 잠 못 자게 하는구나 싶었죠. 당시 전 새벽에 일 나가야 해서 잠 못 자면 종일 힘들거든요. 정말 짜증 나서 미치겠더라고요. 결국 누가 문을 두드리면서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까지 질렀죠.”

말을 하던 참가자가 먹먹한 얼굴이 되었다.

표정이 복잡했다.

“새벽 4시쯤 되니까, 조용하더라고요. 전 겨우 1시간 자고 출근했는데, 지각하는 바람에 일거리 허탕치고 고시원에 돌아왔죠. 근데 고시원에 웬 구급차가 와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들어갔더니.”

“설마!”

수혁이의 설마라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참가자가 한숨을 쉬곤 말했다.

“예. 그 아저씨가 죽었더라고요.”

참가자의 얼굴에 후회가 서렸다.

그가 말을 이었다.

“밤새 잠 못 자게 했던 소리. 그거 술 취해서 내던 소리가 아니라, 그 아저씨 죽어가던 소리였어요. 우린 그것도 모르고 짜증 내고 욕하고 그랬던 거고요.”

참가자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아파서 내는 소리라고 왜 생각을 못했을까. 왜 다들 자신들 잠 못 자는 것만 생각하고 다른 생각은 못했을까. 왜 문 한번 따볼 생각도 안 했을까.”

참가자가 공허한 눈길로 바다를 보았다.

“정말 미안했습니다. 죽어가는 소리인 줄 알았으면 문이라도 따고 들어갔을 텐데. 그러면 그 아저씨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나도 나만 생각하는 인간이구나. 아무리 막장 같은 고시원에서 살아도 이거는 정말 아니구나 싶었어요.”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아저씨 시신을 봤어요. 침대도 없는 한 평짜리 방에 반듯하게 누워 있더라고요. 소독약 냄새가 안 났다면 그냥 자는 줄 알았을 겁니다.”

“나중에 아들이 왔겠네요.”

“네. 장례를 치르고 왔던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살던 방에 들어가서 까만 봉지에 옷가지만 챙겨서 나갔어요. 아버지 유품이라곤 낡은 옷이 전부였습니다. 그 방은 5일 뒤에 다른 분이 입실했어요. 아무도 그 방에서 사람 죽었다는 말을 안 하더라고요.”

“고시원 원장이 말하지 말라고 했나요?”

“아니요. 그냥 말 안 했어요. 뭐랄까. 다들 저랑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 같아요. 미안하고. 후회스럽고. 세상 사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카메라는 가만히 참가자를 지켜본다.

짙은 무언가가 배인 먹먹함이 전달된다.

참가자가 쓸쓸한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그때 이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사실 인생을 반쯤 포기하고 살았는데, 그래선 안 되겠더군요. 덕분에 지금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건 가족이라고 여기면서 살고 있어요.”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겠네요.”

“그 일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제가 나태해질 때마다 그 아저씨 생각이 나요. 밤새 들리던 그 소리는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잘 살지는 못해도 쓸쓸하게 살지는 말자고 다짐하면서 삽니다. 여러분도 하나뿐인 인생, 열심히 후회 없이 살았으면 좋겠네요.”

참가자 말이 맞다.

열심히 살면 적어도 후회할 일은 없다.

후회는 대충 살았기 때문에 하는 거지.

대략 사연들을 집어넣을 위치를 정했다.

게임 장면과 군중 장면 등을 다양하게 편집했다. 그 사이 사이에 각오를 외치는 활기찬 모습을 붙여 넣었다.

이어 게임 틈틈이 웃기거나 황당한 사연을 넣고. 특별 사연을 공개할 이들은 자주 노출 시켰다. 2 라운드 보물찾기에 들어갔을 때는 추리 형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붙여 나갔다.

1등 후보 9명을 선택한 뒤.

그들이 1등 카드를 찾아가는 과정을 편집했다.

과연 1등은 누가 되는가. 1등 카드는 어디에 있는가.

참가자들이 획득한 카드로 순위권 카드의 단서를 확보할 때. 관객도 함께 추리하며 따라가도록 했다.

편집의 마법도 부렸다.

순위권과 상관없는 사람이 1등인 것처럼 몰아갔다. 관객이 응원하게 될 참가자들은 특별 사연을 공개한 사람들이다. 후반은 그들 위주로 편집했다.

마지막엔 순위권 카드를 찾다 달리는 장면이 많아서 저절로 긴박한 편집이 만들어져 졌다. 그 과정에서 경쟁심이 드러나서 영화적인 긴장감도 형성되었고.

단서를 찾아 달리는 이 후반에.

사연들이 하나 둘 나온다.

사연을 말하는 장면과 고함을 지르며 달리는 장면이 교차된다. 관객은 사연을 들었기에 응원하게 될 테고. 이어 마지막에 내가 나와 반전 아닌 반전을 보여준다.

출연료와 펀딩 카드의 실제 액수 공개.

이렇게 편집을 한 뒤.

디테일하게 다시 편집해 나갔다.

워낙 데이터가 많기에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속도감과 현란함이 달라졌다. 광고처럼 편집한 부분도 있고, 모든 참가자를 한 화면에 다 넣어 보기도 했고.

그리하여 50일 만에 편집을 끝냈다.

편집에 따라 영화의 수준과 질이 달라지기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강약과 완급 조절을 하면서 온갖 편집 기술을 다 동원했다.

최종 편집본을 백업한 뒤 회사에 보냈다.

영상 보정을 하고 사운드트랙 및 타이틀 작업을 할 터다.

회사에서 작업 방향을 알려주고 집에 왔을 때였다.

서연이 소파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텔레비전으로 복사본을 봤던 모양이다.

아이는 우는 엄마를 달래려 하고.

리연이를 안아 들고 소파에 앉자 아내가 날 꼭 안았다.

그런 아내의 등을 쓸어내렸다.

어떤 사연이 아내를 울렸는지는 모르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