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기묘한 감동의 정체
정신없는 액션의 연속이었다.
블랙버드 주인공과 특공대가 액셀을 구하러 모선에 침투하는 장면이다. 우주선 내부 세트를 복도. 중앙홀. 격납고 등으로 바꿔 가며 침투와 전투 장면을 계속 찍어 나갔다.
현재 LA는 한여름이라 스튜디오 촬영을 몰아서 하고 있었다. 배우들이 촬영하다가 그을리면 영화상에서 피부톤이 튀기 때문에 어느 스튜디오나 한여름엔 그렇게 한다.
블랙버드가 액셀을 구출하고 특공대 12명이 아크람 에너지를 흡수하는 장면까지 10일이 걸렸다. 그 뒤 영웅이 되어 몰려드는 안티 히어로 군단과 싸우는 장면도 10일이 걸렸고.
이어서 대망의 액션씬 차례였다.
액셀 역의 제이슨과 안티 히어로 군단장 역의 토니라는 배우가 열심히 합을 맞추었다.
이 영화의 절정이자 대미를 장식할 액션 장면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 씬을 위해 석 달이나 연습했다.
스튜디오 촬영용 콘티로 촬영을 하는데, 이 콘티에 있는 액션과 완벽하게 같아야 했다. 그래야 9월부터 찍을 실사와 CG를 매치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에선 매우 강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이어질 텐데, 촬영 때는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액셀이 한 대 때리면 와이어를 당겨 토니가 멀리 날아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녹색 천으로 감싼 스펀지 블록을 쌓아 두고 그걸 뚫고 들어가는 장면의 연속이다. 스펀지들이 영화에서 벽돌로 바뀐다. 때론 초강자 두 명이 뒤엉킨 채 아스팔트에 추락하고 미끄러져 나가는 장면을 찍기도 하고.
“와이어!”
제이슨과 토니가 위에서 떨어졌다가 매우 거칠게 당겨지며 굴러갔다. 영화에선 거진 100미터를 굴러가다 미끄러지는 장면이다.
“컷!”
내 옆에 앉은 CG 팀장이 곧장 도로 배경에 데이터를 넣어 시뮬레이션을 해 봤다. CG 처리를 하기 전이지만 OK인지 NG인지는 척 보면 안다.
“오케이.”
“다음 컷 갑니다!”
다시 격투 장면이 이어졌다.
구경꾼이 보면 이게 액션인가 싶을 것 같다.
그러나 영화의 박진감과 속도감은 촬영한 모든 것이 편집되었을 때 나온다. 콘티 그대로 찍기만 하면 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전투는 이처럼 단순 작업처럼 이어져 정교하게 연결된다. 그리고 이 전투와 화성에서 벌어지는 우주 교전이 교차 편집된다. 지구에선 액셀이 멸망을 막고, 화성에선 조종사들이 핵무기를 막는 장면이다. 박진감과 절정의 위기감을 동반하며 빠르게 이어질 터다.
내가 스튜디오 촬영을 하는 동안.
촬영 B팀은 CG 배경으로 쓰일 소스를 찍으러 다녔다. 다양한 앵글로 찍어서 소스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게 촬영 B팀의 일이었다.
와이어 액션 장면이 끝나자 스튜디오에 세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물 세트다. 우주전투기 조종석. 화성 기지 내부. 함선 함교와 격납고 등등. 바닥과 장비 등만 실물이고 벽은 그린스크린을 댔다. 매우 넓은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야외 촬영을 하고 돌아오면.
세트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을 터다.
* * *
촬영 109회 차.
액셀과 군단장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액션!”
와이어를 몸에 단 제이슨이 골목에서 튀어나와 내달린다. 그러다 상공을 보곤 자세를 낮췄다가 힘차게 뛰어올랐다. 이 장면에서 스튜디오에서 찍었던 도약과 연결된다.
“컷! 오케이.”
“점심들 드세요! 1시에 촬영 재개합니다!”
스태프들이 밝은 얼굴로 임시 식당으로 향했다.
할리우드 촬영장 식사는 최고급 뷔페다.
스테이크는 기본이고 가재요리가 나올 때도 있다.
근데 난 좀 지겨웠다.
스테이크도 하루 이틀이지.
트레일러에 들어갔다.
아내가 딸아이와 놀아 주고 있었다.
“리연아.”
소파에 기대앉은 리연이가 손뼉을 치며 방긋 웃었다. 생후 9개월이 다 되어 가니 이젠 혼자 기어 다닌다. 날 아빠로 인식하는 것은 물론이고.
리연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자신의 다리로 버티긴 하는데 아직 혼자 설 줄은 모른다. 지난주에 아이가 소파에 손을 짚고 일어나는 걸 보고 깜짝 놀라긴 했다.
“꺄아.”
리연이가 뭐라 말을 하려고 한다.
기분 좋다는 표현이다.
아랫니 두 개가 앙증맞게 났다.
“리연이 밥 먹었어?”
“응. 입이 짧아서 걱정이야. 이유식이 안 맞는 건지.”
“그래도 먹는 게 어디야.”
“그러게.”
서연이 주방으로 갔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자마자 군침이 돌았다.
역시 난 한국 사람이다.
김치찌개에 달걀말이. 고등어조림과 파김치.
그 외 밑반찬들.
장모님에게 배운 서연이 솜씨다.
사실 파김치에 김만 있어도 밥 한 공기 뚝딱이지.
아내와 함께 밥을 먹었다.
샌디에이고에 일주일째 와 있다. 장모님은 어제까지 계시다가 어바인에서 사귄 한인 아주머니들과 놀러 가셨고.
“아버님께 연락드렸어?”
“응. 혼자 적적하실 줄 알았는데 잘 지내고 계셔.”
“촬영 끝나면 바로 한국 들어가자.”
“후반 작업 준비하고 같이 들어가. 미국 사는 거에 적응해서 나도 엄마도 별로 불편한 거 없으니까.”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만 더 있다가 집으로 가.”
“응.”
혼자 박수를 치며 웃는 아이를 보았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의 웃는 얼굴만 보면 피로가 싹 가셨다. 가장이 일하고 버티는 힘은 가족인 거지.
* * *
다시 스튜디오 촬영.
커다란 화성 기지 세트에 배우들이 잔뜩 모였다.
기지의 전투통제실 모습이다.
사령관과 통제관들이 긴장한 얼굴로 통제실 화면을 주시한다. 실제로 CG 팀이 작업한 우주 교전 장면이 대형 화면에 나온다. 미리 만들어 둔 덕분에 가능한 촬영이었다.
“액션.”
벙커에 들리는 음성.
-사령관님! 방금 귀환한 정찰 편대가 놈들의 함선 30여 척을 발견했습니다! 화성 인근까지 2시간 이내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모선 호위함인가?”
-그렇습니다! 아크람 에너지 소모가 커서 호위함이 주포는 쏘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우리 전투기 숫자는?”
-본 함대에는 109기에 불과합니다!
“주포는 쏘지 말게. 전투기로 최대한 버텨 봐야지. 지상에서 미사일 지원을 할 테니 교전 시 놈들 함선에 유도장치를 부착해 주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령관님.
“말하게.”
-놈들이 정말 핵을 쓴다면 요격할 수 있습니까?
사령관이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가 가진 레이더 범위가 부족하군. 놈들이 10발 이상 쏜다면 반 이상은 화성에 떨어질 걸세. 이 기지가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군.”
그때 참모가 사령관에게 말했다.
“놈들이 핵미사일을 쏜다면 수백 발은 넘을 겁니다. 우리가 보유한 미사일로는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핵미사일을 저지한 후 놈들 함선에 침투해서 파괴해야 합니다.”
“나도 아네. 우리 기지가 핵폭발에 큰 영향이 없기를 바랄 뿐이지. 자네에게 좋은 생각이 있나?”
“핵미사일을 전투기 기체로 막을 수 있습니다.”
“전투기로 미사일을 막는다고?”
“핵부터 저지해야, 화성에 진입하는 적함을 미사일로 막을 수 있습니다. 미사일 기지가 핵폭발에 붕괴되면 끝장입니다.”
“자원할 조종사가 있겠나?”
“본관은 조종사 출신입니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참모의 말에 벙커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를 보았다.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겠다는 말이다. 통제실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사령관이 말했다.
“작전을 허가하네.”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참모가 절도 있게 경례를 하곤 나갔다.
사령관은 탁자에 두 손을 대곤 눈을 감았다.
부하를 사지에 보내야 하는 존재가 사령관이다.
그 지독한 무게가 사령관의 표정에 담겼다.
“컷! 오케이!”
“장면 이어서 갑니다!”
바로 촬영을 이었다.
같은 조명에 같은 배우들 그대로.
“액션!”
벙커에 다급한 음성이 들린다.
-사령관님! 놈들이 화성에 근접했습니다!
-적 함대에서 전투기가 쏘아져 나옵니다!
“특별 돌격 편대는?”
-대기 중입니다! 아악!
쿠쿵-
“어떻게 된 거야?”
-본 함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놈들 전투기 수는 얼마나 되나?”
-500기가 넘어 보입니다!
“핵미사일을 쏘려는 징후는?”
-아직 없습니다!
통제관 하나가 외쳤다.
“사령관님! 적함 한 척이 화성으로 진입합니다!”
“미사일을 발사하라!”
“미사일 발사!”
“맙소사! 방금 진입한 함선에서 뭐가 떨어집니다!”
“이런!”
사령관이 다급히 방송 버튼을 눌렀다.
“핵폭발 충격에 대비하라!”
기지 내부에 요란한 사이렌이 울렸다.
사령관과 통제관들이 머리를 숙이고 충격에 대비했다.
쿠르르릉- 하는 소리가 들린다.
통제실 지붕에서 먼지가 후두두 떨어지더니.
기지 내부가 몹시 흔들렸다.
지진파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산소 유출 지역 없나!”
“공기압 이상 없습니다!”
“폭발 규모 보고하라!”
“초대형급입니다! 단 한 발에 캘리포니아가 날아가는 위력입니다! 지진파가 화성을 돌고 있습니다!”
“같은 걸 또 맞는다면?”
“두 발 이상 맞으면 산소 유출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들려왔다.
그때 방위 함대에서 연락이 왔다.
-기지 좌측 지점에서 버섯구름이 오르고 있습니다! 다들 무사합니까?
“무사하네! 상황 보고하게!”
-역부족입니다! 함선 하나가 반파되어 화염에 휩싸인 상태입니다! 아! 적함 다섯 척이 화성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적함과 화성과의 거리는?”
-약 2만 킬로미터입니다!
“특별 편대는 출격하라! 놈들이 핵을 쏜다!”
-알겠습니다, 특별 편대 출격!
사령관과 통제관들이 대형 모니터를 보았다.
자폭특공대가 함대에서 출격하는 모습. 화성에 진입하려는 적함으로 곧장 날아갔다. 그 와중에 적 전투기들이 따라붙는다. 뭘 하기도 전에 격추당할 것 같은 위기!
다들 손에 땀을 쥐고 화면을 본다.
통제관이 전투기 조종사 통신으로 돌렸다.
-톰! 왼쪽 맡아!
-젠장! 뒤에 두 놈이 붙었어!
-1편대, 2편대! 특별 편대를 지원하라!
-첸! 안 돼!
콰쾅-
핵미사일을 저지하려던 전투기 하나가 폭발했다.
-1편대장이다! 특별 편대를 지원해야 돼! 특별 편대에만 미사일 유도 장치가 있다! 그들이 전멸하면 핵을 못 막아!
-알았다! 3편대 모두 날 따라와!
-6편대! 특별 편대를 호위한다!
-7편대도 간다! 이 개 같은 놈들!
화성에 진입하려는 적함 쪽으로 화성 방어군 전투기가 쏘아져 들어갔다. 적 전투기들도 맞은 편에 몰려오며 빔을 쏘아 댔다. 마치 빛의 동굴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듯한.
정신없는 우주 교전! 수도 없이 폭발하는 아군 전투기와 적 전투기. 마침내 저지선을 뚫은 특별 편대가 적함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적함에서 미사일 다섯 기가 쏘아졌다.
-놈들이 핵을 쐈습니다!
-막아!
-미사일이 너무 빠릅니다!
-최대 출력으로!
특별 편대가 급속도로 강하하며 휘어져 들어갔다. 놈들이 빗발처럼 빔을 쏘아대서 특별 편대를 호위하는 전투기들이 무수히 폭발한다.
그때 특별 편대 한 기가 날아가는 핵미사일을 전투기로 들이받았다. 콰쾅- 미사일이 반 토막 나는 동시에 폭발했다. 이어 다른 전투기도 하나둘 화성으로 진입하는 핵미사일들을 육탄돌격으로 막아 내며 방향을 돌렸다.
-다섯 기 모두 막았습니다!
벙커에 있는 모든 이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사령관님!
“이번엔 뭔가?”
-적 함대가······ 남은 적함 모두가 화성으로 진입합니다.
통제관들의 눈빛이 이내 무거워졌다.
사령관이 침착하게 물었다.
“남은 특별 편대는?”
-32기에 불과합니다.
“반드시 막아야 하네.”
-물론입니다!
“컷. 좋아요.”
“휴…….”
여기저기서 숨통이 터지는 소리가 나왔다.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바로 다음 장면을 재개했다.
통제실 대형 화면에는 격렬하고도 숭고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군 함선 하나는 반으로 동강이 난 채 우주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고, 화성으로는 불붙은 전투기가 무수히 추락한다. 특별 편대와 전투 편대는 다시 핵미사일을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아가고 있다.
화면을 보던 사령관이 마이크를 들었다.
“기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알립니다. 민간인은 기지에서 가장 깊은 제8구역 벙커로 이동하십시오. 만약 기지가 붕괴된다면 아이들만이라도 수송선에 태워 지구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사령관의 눈에 슬픔이 깃들어갔다.
“우리는 외계인 놈들에게 지구를 빼앗기고 화성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구에는 이미 인류 멸절 작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지금 이곳에 핵미사일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마저 놈들에게 죽는다면 인류는 우주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사령관의 음성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기지 책임자의 말이 유언처럼 들렸을까.
일부 통제관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합니다. 모두가 죽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둘만 살아남을지라도 인류는 생존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선조가 지구에서 문명을 일으키고 번영했듯. 우리도 후손을 남겨 다음 세대를 기약해야 합니다. 후손들에게 이 위기를 넘긴 역사적인 순간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는 인류가 이종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선 안 된다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벙커에 있는 모든 이가 울고 있었다.
사령관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갔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이 위기만 견뎌 내면 우리는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마음을 굳건히 먹고 버티십시오.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
“컷!”
스태프와 배우들이 사령관에게 박수를 보냈다.
나도 조감독 에디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연기도 연기지만 이 장면이 어떻게 편집될지 알기에 목젖까지 뜨거움이 차오른다. 매우 긴박한 상황과 이 장면이 교차 편집되면서 큰 울림을 준다. 스태프들 말에 따르면.
그다음은 특별 편대 조종사들 장면을 찍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작전을 불멸의 의지로 해내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조종사 한 명 한 명을 조명했다. 관객은 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고 있다.
저마다 마지막 순간에 고함을 질렀다.
죽음을 맞이하는 조종사들의 외침이다.
“지미! 나 먼저 간다!”
“미사일 따라잡았다! 내 가족을 부탁하네!”
“희망을 위하여!”
“하하하하! 끝내주는군!”
“에이미! 아빠가 사랑한다!”
“여보!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우리 아이들이 날 자랑스러워할 거야! 여보! 행복하게 살아야 돼!”
“내 아들에게 알려 줘! 아빠는 용감했다고!”
“젠장! 왜 이렇게 눈물이 나냐!”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스태프들 일부가 눈물을 쏟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 장면을 연상하니 다시 눈물이 나오는 모양이다.
모든 연기가 끝났을 때.
우렁찬 박수가 나왔다.
나도 한동안 멍했다.
조종사들의 외침은 절반은 애드립이었다.
배우들이 본인들에게 닥친 것처럼 외쳤던 거였다.
그로부터 보름 뒤.
마지막 촬영을 했다.
지구에선 액셀과 새로운 영웅들이 지구를 지켰고, 화성에선 조종사들이 화성 기지를 구해 냈다. 그리고 전투에서 이긴 이들의 감격과 눈물, 포옹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의 시작이었다.
블루드 워 3편은 지구와 화성의 우주 대전이다.
세뇌된 지구인과 화성 저항군.
누가 인류의 존속을 이어 가느냐를 놓고.
그리하여 마지막 장면까지 왔다.
추락한 우주 모선 위에 나란히 선 액셀과 영웅들.
그들이 폐허가 된 LA를 바라보고 있다.
새로운 희망이 깃든 눈으로.
“컷! 오케이!”
내 콜이 끝나자마자 배우들이 서로 안고 격려했다.
가장 먼저 제이슨이 내려와 나와 포옹했다.
서로의 등을 두드리면서.
장장 6개월에 걸친 촬영이 끝났다.
어떤 영화로 나올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촬영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났다.
촬영 직후 콘티대로 편집할 생각이었던 터라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길 반복했다. 첫 한 주일은 그랬다.
한데 미리 만들어둔 CG 분량과 실사 촬영분을 편집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감정 과잉 현상이었다.
자칫하다간 영화가 신파로 빠질 수 있음을 직감하고 감정의 밸런스와 컷 배치. 지구와 화성에서 벌어지는 각기 다른 액션의 조화도 철저히 계산해야 했다. 감정을 절제하는 편집을 하면 시나리오상의 감정 흐름이 깨질 수도 있기에.
시나리오 때와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했다.
2주 만에 그 이유를 알아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여러 타입의 편집을 해보면서 겨우 찾아낸 점이었다.
시나리오는 글이다. 글이 주는 감동이 있다.
한데 영화는 사람이 연기를 하면서 ‘글’에 생명을 담는다. 글을 읽고 받은 감동의 배 이상이 전달되면서 다소 과잉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걸 알아낸 날부터 잠도 안 자고 편집에 몰두했다.
신파 느낌이 들지 않기 위해 수도 없이 편집 방향을 바꾸고 컷 분할을 달리해 보았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 봐도 신파 느낌이 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재촬영을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려하던 중 코어를 강하게 끌어 올려 분석해 보기로 했다.
1시간 동안 분석하여 겨우 찾아냈다.
시나리오에선 화성 기지 사령관의 연설이 먼저 나오고, 전투기 조종사들의 교전과 마지막 외침이 나중에 나온다.
이걸 섞었다. 조종사들이 필사적으로 핵미사일을 저지하며 하나 둘 폭발하는 장면과 기지 사령관의 연설을 빠르게 교차 편집했다. 그랬더니 훨씬 좋아졌다. 동적인 전투의 박진감과 정적인 사령관의 차분한 연설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냈다.
기존 시나리오보다 훨씬 나은 컷 구성이었다.
조종사들의 연이은 외침 때문에 생긴 감정 과잉이 사라지고, 사령관의 연설과 대비되면서 묘한 울림이 발생했다.
이게 정확히 뭔지는 최종본이 나와야 알 듯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거의 몇 년 만에 코어를 과다하게 사용했다.
두통이 와서 잠시 멈추기는 했으나 좀처럼 두통이 가라앉지를 않고 눈도 부셨다. 시야가 약간 뿌옇게 될 정도로.
그렇게 틀어졌던 편집을 바로 잡았을 때.
내가 일주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몸이 나른하기만 할 뿐 피곤하지가 않았다. 몸이 이상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아서 코어가 또 진화했다고만 여겼다.
하루만 푹 자고 나면 괜찮을 것 같아서 병원에는 안 갔다. 서연이 걱정할까 봐 집에도 안 가고 트레일러에서 샤워를 한 뒤 잠을 청했다.
* * *
아내가 매우 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 맞은 편에는 매우 부유해 보이는 여자가 우아하게 앉아 있다. 뭔가 기묘한 위화감이 드는 느낌.
서연의 눈빛도 어째 차갑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경멸에 찬 눈으로 본다. 재벌가의 여자처럼 도도하고 우아하고 고상한 몸짓도 이상하고.
여자가 말했다.
“글쎄 쥐뿔도 없는 게 얼굴 좀 반반하다고 우리 도련님한테 꼬리를 치더라고. 천박한 것들. 돈 많은 남자들이 싸구려 같은 것들은 더 잘 알아보거든? 못 배운 거 티 내는 년들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헛똑똑이들이지 뭐. 돈 많은 남자 물어서 결혼까지 성공하겠다는 건 좋아. 자기 천성을 숨길 거면 끝까지 숨겨야 하는 거야. 본인은 물론 친정가족들까지 철저히.”
“너처럼?”
“넌 아닌 것처럼 말한다?”
“너랑 난 다르지. 난 그래도 아버지가 판사시고, 넌 솔직히 여배우인 거 말고 집안은 좀 그렇잖아?”
서연의 표정이 냉담해졌다.
상대 여자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이 상황이 대체 뭔지 모르겠다.
아내는 왜 비싼 정장을 입고 저런 여자와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 건지. 나이가 약간 들긴 했는데.
두 여자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슨 칼을 가는 듯한. 혹은 서로 비웃고 있거나.
아내도 그렇다. 평소에 보지 못한 모습이다.
주변을 보니 강남 같은데 서연이 언제 한국에 갔지?
게다가 서연이 말투도 이상하고.
무슨 상류층 여자들의 한가한 하루를 보는 것 같은.
그때였다.
11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달려왔다.
서연이 바로 일어났다.
“엄마!”
엄마?
저 아이가 우리 딸이라고?
“응. 우리 딸. 배고프지?”
“엄마, 나 햄버거 먹을래.”
“안 돼. 한창 자랄 나이 그런 음식 먹으면 안 좋아.”
“우리 반 애들은 다 사 먹는단 말이야.”
“그런 아이들이랑 너랑 같니? 잔말 말고 차에 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마주 앉은 여자에게도 또래의 딸이 왔다.
그 여자가 말했다.
“자기야, 내일은 내가 살 게.”
“그래. 내일 봐.”
묘하게 아내를 헐뜯던 여자가 방긋 웃으며 자기 딸을 차에 태웠다. 벤츠다. 아내가 오르는 차도 벤츠다.
두 외제차는 금세 떠나 버렸다.
한데 아까 그 여자아이가 정말 내 딸이란 말인가.
날 조금 닮기는 했는데.
그때였다.
쿠쾅-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내와 아이가 탄 벤츠를 트럭에 들이받혔다.
그런데 트럭이 들이받은 곳이···
리연아! 안 돼!
미칠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이마에 피가 흐르는 아내가 조수석에 있는 아이를 안간힘을 쓰고 끌어냈다. 그녀가 겨우 아이를 끌어내 바닥에 함께 쓰러졌다. 우리 딸이 피투성이였다.
이게 대체···
“오빠?”
갑자기 큰 울림이 들려왔다.
이상한 공명 현상.
아내는 딸을 안고 울부짖고 있다.
날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오빠? 왜 그래?”
순간 빛이 터지면서 세상 모든 것이 사라졌다.
바로 그때 내 손을 잡는 촉감이 느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
눈을 떴다.
서연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떡 일어났다.
“여기 어디야?”
“어디긴 트레일러지.”
급히 주변을 보았다.
정말 트레일러다. 내가 잠들었던.
꿈을 꾼 거였다.
시야가 약간 뿌옇다.
서연이 말했다.
“오빠. 잠 안 자고 일했다고 하던데 몸이 좀 안 좋은 거 아니야?”
“괜찮아. 리연이는?”
“1층에.”
1층으로 내려갔다. 서연도 따라 내려오고.
딸아이가 1층 소파 겸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아이가 깰까 봐 옆에 앉아 들여다보았다.
서연이 몰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가 말했다.
“밥 차려 놨으니까, 아침 먹고 출근해. 오늘 종일 여기에 있을 거야. 점심도 여기서 먹어.”
“응.”
정신이 몽롱해서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꿈을 꾼 것 같다.
그런데 꿈이 아니라면?
코어 때문에 미래를 본 것이라면.
샤워기 물줄기를 맞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게 10년 후의 미래라면, 지금의 서연과 그때의 서연은 너무도 다르다. 의상은 너무 사치스럽고, 화장도 평소에 한 적이 없는 방식이다. 말투는 딴 사람 같았고.
상류층 여자처럼 보인 것도 정말 이상했다.
평소 그런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아내다.
카페에서 대화하던 그런 여자도 싫어한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심경에 큰 충격이 있지 않은 한.
10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변하는 건가.
졸부들처럼.
만약 꿈이 아니고 미래를 본 것이라면.
정말 큰일이 일어난다.
내 딸아이가 크게 다친다.
샤워를 끝내고 나갔다.
“오빠, 밥 먹어.”
“그래.”
아내와 함께 밥을 먹었다.
내 표정을 본 서연이 걱정스레 바라본다.
“왜 그래? 무슨 걱정 있어?”
정말 미래를 본 것이라면.
코어가 괜히 보여준 것은 아닐 터다.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면 막을 수 있다.
“리연이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다니고, 미국에서 살자. 고등학교 때 다시 한국에서 학교 다녀도 되고.”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했잖아.”
“그랬나?”
아무래도 내가 뭔가 불안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내가 날 물끄러미 보았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눈빛도 불안해 보이고.”
“별것 아니야. 근데 혹시··· 상류사회 같은 것에 관심이 있어?”
“갑자기 웬 상류사회?”
“부자들처럼 누리며 살고 싶다던가.”
서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나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내가 혹시 아이 키우면서 이상한 엄마가 될까 봐 걱정 돼?”
“그런 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상류층에서 자란 사람들이나 그렇게 살지 오빠나 나나 그런 인생은 못 살아. 우린 고생해 봤잖아.”
내가 아는 서연이 맞다.
나도 아내도 상류층 사람들처럼 살진 못한다.
그런데 카페에서 보였던 서연의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재벌가의 며느리처럼 보였다.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도대체 내가 뭘 본 건지.
그때 또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아내를 중심으로 입체 영상 같은 것이 무수히 스치며 사라졌다. 일순 통제가 안 되었다.
나이 든 서연이 얼핏 스친 것 같기도 하고.
교복을 입은 리연이 모습도 얼핏 스치고.
나와 아내의 늙은 모습. 성인이 된 리연이도 포착했다.
휙휙 지나간 영상이지만 그것만은 확실히 봤다.
마치 다운로드가 끝난 듯 입체 영상이 멈췄다.
코어가 또 진화를 한 것 같다.
시공간을 넘어 어떤 정보와 연결되었던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예전에 들었던 과학자들의 가설이 생각났다.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이고 난 그 안에 있는 캐릭터다. 코어는 일종의 버그였던 거다. 그래서 미래 정보가 갑자기 전송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허구는 아니겠지.
다음날 눈을 떴더니 프로그램이 초기화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내 팔 좀 꼬집어 봐.”
서연이 말없이 웃으며 팔을 꼬집었다.
살짝 아프긴 하네.
이게 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코어가 처음 생겼을 때 뇌의 착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고 있었다. 허상을 만들어 내고 그 촉감까지 느껴졌으니.
아무튼 이 모든 현실이 가짜가 아니고, 내가 본 게 미래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그저 개꿈에 지나지 않기를.
어른이 된 리연이를 분명히 봤다.
나와 아내가 정말 행복해 보이는 모습도 봤고.
분명 꿈이다. 틀림없다.
* * *
편집이 끝나고 CG 합성 작업을 시작했다.
미리 만들어 둔 부분이 많아서 4개월 정도면 끝날 듯했다.
귀국 준비를 하면서 CG 부분과 실사, 스튜디오 촬영분의 합성 과정을 지켜보았다.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바로 잡은 편집본을 중심으로 매끄럽게 합성만 하면 되었다. 일일이 수작업을 거치기에 시간이 많이 들 뿐이다.
나야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점검을 하고 합성을 완료한 가편집 본만 보면 되었다. 미국에서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가편집 본이야 한국에서 확인하고 지시할 게 있으면 하면 되었고.
해서 미국에 온 지 거진 7개월 만에 귀국했다.
때는 11월 중순이었고 리연이 돌을 한 달 앞둔 때였다.
* * *
한국에 오니 집에 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편했다.
전과 같은 일상을 보냈다.
회사는 날로 번창하고 계열사들은 자리를 잡았다. 곧 새 사옥으로 이전할 계획이었다. 청년 재단도 규모가 제법 커져서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히 컸다.
특히 김판수가 대표로 있는 중국 합작 사업이 대박이 났다. 합작사 극장 체인이 첫 중국 영화를 개봉했는데, 그게 초대박이 났다. 현재 중국 박스오피스 1위이고, 역대 중국 영화 흥행 성적 5위에 들었다.
김판수 대표가 수백억대 부자가 된 셈이었다. 로큐의 지분이 절반인 터라 로큐 주가도 연일 상한가를 치고. 한때 8만 원까지 떨어졌던 주가가 현재는 14만 원이나 되었다.
아무튼 중국 쪽 직배가 가능해졌다.
김판수가 딱히 내 인생의 조력자가 된 적은 별로 없지만, 사업으로는 도움을 주고 있었다. 김판수의 현지 제작사가 중국에서 잘나간다면 로큐보다 더 커질 수도 있고.
이런저런 좋은 소식을 들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한국 영화 차기작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떤 영화를 하든 아내를 출연시키고 싶어서.
금세 겨울이 되고 12월 24일이 왔다.
조촐하게 아이 돌잔치를 했다.
아이가 태어난 날이 크리스마스이브이기도 해서 가족과 동생 커플들만 불러서 식사만 했다.
그렇게 또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오고.
지난 몇 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은 미국에 가서 후반 작업 진행을 점검했다. 그리하여 후반 작업이 거진 끝났을 때. 다시 아내와 리연이와 함께 미국으로 넘어갔다.
* * *
사운드가 들어가지 않은 가편집 본을 확인했다.
CG팀 막내 은영이의 편집 재능을 믿고 맡긴 가편집본이다. 확인해 보니 대부분 콘티대로 했고, 약간만 달라졌다.
“은영아, 영화 흐름 어때?”
“흐름요? 전 그냥 좋은데요?”
“감정 과잉이나, 신파 느낌은?”
“신파요? 아, 후반 조종사들요?”
“그래, 후반 쪽에.”
은영이가 무슨 소릴 하느냐며 날 보았다.
“신파라는 느낌은 전혀 없던데. 전 그냥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봤을 때 울컥하긴 했어요. 편집할 때 너무 봐서 나중엔 아무 느낌이 없긴 했지만.”
“너 신파가 뭔지는 알아?”
“당연히 알죠. 주인공들이 질질 짜는 거.”
신파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감동의 눈물이라는 게 갑자기 터져야 하거든. 그런데 관객을 울리려는 의도가 느껴지느냐 이거지. 울어라, 울어라. 이래도 안 울래? 하는 느낌.”
은영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울컥한 장면은 많아요. 저항군들이 싸울 때 그랬고, 조종사들 마지막 장면 때도 그랬어요. 눈물은 그냥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기지 사령관 마지막 대사 때는 마음이 먹먹하더라고요. 감동 받은 건 맞는데, 뭔가 좀 달랐어요.”
“그게 뭔데?”
“잘 모르겠어요.”
내가 느낀 걸 은영이도 느낀 모양이다.
조종사와 기지 사령관 컷을 교차 편집했을 때였다. 가슴이 묵직해지는 묘한 감동이 전해졌다. 편집 때 영화를 하도 봐서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가편집이 제대로 나왔다.
최종 편집은 내가 직접 했다.
그다음 후반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여 LA에 봄이 찾아온 3월 중순.
네오스타 사내 시사실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회사 시사실이 소극장이고 사운드 시설도 좋아서 로큐 직원들처럼 극장에서 보겠다는 직원이 별로 없었다.
불이 커지자 시끌시끌하던 극장 안이 조용해졌다.
이내 스크린이 네오스타의 로고가 떴다.
장엄하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예!”
뭘 하지도 않았는데 또 야구장 탄성이 터진다.
직원들이니 회사 마크가 남다르긴 하겠지.
그렇게 영화 시사를 했는데.
회사 직원들이 또 발광을 했다.
극장에선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조용하게 관람한다. 어쩌면 블루드 워만의 특별한 영화 관람법인지도 모르겠다.
1편에선 액셀이 중반까지 고생만 한다.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러다 영웅이 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커서 직원들이 ‘예에!’ 하고 야구장 탄성이 일어났던 거지.
그런데 이번 영화는 시작부터 달린다. 거침없이 날뛴다. 1편이 울분과 답답함이 한 번에 해소되는 쾌감이었다면, 이번엔 거침없고 시원시원한 액션이 펼쳐진다.
직원들이 말 그대로 지랄발광을 했다.
고함을 지르는 직원들 때문에 웃음이 터질 정도로.
신 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곳곳에 묵직하게 전달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노예 시민의 비참한 삶. 악마와도 같은 부역자들. 외계인 놈들의 이해하지 못할 지배 방식. 고통 또 고통.
이 부분들이 영화의 위기이자 갈등이었다.
그런 것들을 액셀과 특공 대원들이 나타날 때마다 깨부쉈다. 노예 시민을 통해 체험하는 피지배자의 울분과 괴로움을 거기에서 다 날려버린다. 울분을 해소하고 답답함을 깨면서 카타르시스가 점점 커져 간다.
저항군의 눈물겨운 투쟁과 전멸. 인류 멸망을 앞둔 긴박감. 영화적 위기는 2편이 훨씬 컸다. 거기에 감정의 차곡차곡 쌓여 곧 폭발할 듯했고, 영화 속에선 마지막 결전으로 향했다.
직원들의 마음에 감정적 폭발이 일어날 무렵.
기지 사령관과 조종사들이 그런 직원들의 마음에 불을 놓았다. 그래서 결국 터졌다.
영화가 끝났을 때.
모든 직원이 멍하게 앉아 있었다.
중반까지 그렇게 환호하고 박수 치며 영화를 즐기던 직원들이 아무 말도 없이 스크린만 주시했다.
그러다 한두 명이 일어나 날 향해 손뼉을 쳤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모든 직원이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마치 자신들이 자유를 쟁취한 것 같은 얼굴이 된 채.
함께 영화를 보면서 감동의 정체를 알았다.
직원들은 영화를 본 게 아니라, 영화 속에 들어갔다.
영화 속 모든 일이 본인들의 일처럼 느껴졌다.
따라서 영화에 감동한 것이 아니다.
인간 자체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해 싸운 인간의 위대함에 대해.
우리가 해낸 일에 대해.
* * *
사무실에 앉아 직원들을 살펴보았다.
회사에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영화를 안 본 사람들은 늘 그런 것처럼 그냥 일하고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만 업무 중에 멍하게 컴퓨터 모니터를 보거나, 차를 마실 때 먼 산을 본다.
난데없이 고독이 찾아온 것은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사색에 빠졌을 뿐.
그렇다고 표정이 우울하거나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좀 지친 듯한 직원들도 있고.
이동욱 대표만 해도 그렇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다 생각에 빠진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웃음을 보인다.
때때로 한숨을 쉬는 직원도 있다. 휴게실에 가 보면 대화를 나누다 피스트 펀치를 나누는 남직원들도 보인다. 여직원들은 집에서 가져온 간식도 나눠 먹고 그런다.
영화를 본 사람들만 그랬다.
다른 직원들도 회사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딱히 소외를 시키는 건 아닌데 소외당하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영화를 본 직원들만 이상하게 어울리다 보니.
영화를 본 직원들은 마치 2차 대전 때 독일군과 전투를 벌여 죽을 고생을 하다 생환한 사람들 같고. 영화를 안 본 직원들은 후방에만 있다가 전쟁이 끝나서 귀환한 사람들 같은.
영화를 본 직원들만 같이 고생을 하고 전우애 같은 것이 생긴 듯한 느낌이다. 몇몇 직원은 말수가 줄었다. 잘 웃지도 않는다. 웃으며 수다 떠는 직원들은 죄다 영화를 안 본 직원들이고.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분위기는 그렇다 치고 표정들을 보면 정말 고생한 사람들 같아 보인다. 어떤 연륜이 보인다고 할까. 삶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얼굴이라고 할까.
예컨대 전장 한복판에 던져진 꿈을 꾸었다고 치자.
그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겠나. 전쟁의 참혹함과 인류의 어리석음을 통해 생명의 가벼움과 소중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지금 일부 직원들이 그런 얼굴이다.
꿈속에서 엄청 고생하고 깨어난 사람들처럼.
그 꿈이 블루드 워 2편이었던 거다.
마치 영화를 본 직원들이 같은 꿈을 꾼 듯한.
직원들이 영화 속에 들어갔다는 건 그래서 생각한 거였다. 애초에 영화 작업을 할 때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줄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관객이 아예 스크린 속에 들어가 버렸던 거였다.
플랜 때 배우 송강석에게 감정이입하고 관객이 자신과 동일시한 것. 그리고 갓 필드 때 주인공 건하에게 감정이입하여 본인이 전장 한복판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 것.
이번 영화에는 그 두 가지가 다 있었다.
마치 내가 노예 시민이 되어 핍박을 받은 것 같고, 내가 저항군이 되어 싸운 것 같은.
조종사가 죽어갈 때 내 동료가 죽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리고 화성 방어를 하고 난 뒤의 감격이 실제 자유를 쟁취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기지 사령관의 말 한마디에 울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실제로 지배를 당하는 상황이 되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저항군이 되면 그 심정이 어떨까.
그러한 걸 간접체험을 한 셈이다.
“뭘 그렇게 보세요?”
이동욱 대표가 내 사무실에 왔다.
“직원들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요.”
“제가 봐도 그러네요.”
이동욱 대표와 함께 직원들을 보았다.
말은 안 했지만 다들 비슷한 걸 느낀 것 같다.
이 대표가 말했다.
“이거 후유증이 오래가겠는데요.”
“부정적인 겁니까?”
“글쎄요. 길게 보면 긍정적이겠죠. 당장 일이 손에 안 잡히기는 합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드네요.”
“어떤 생각요?”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 걸까. 그러다가 근본적인 가치를 잊고 살면 안 되겠다 싶더군요. 이를테면 가족. 나 개인의 자유. 사랑과 희망 등등요. 막연했던 그런 소중한 것들이 이렇게 절실하게 와 닿는 건 처음입니다. 저항군은 그 가치를 위해 싸웠으니까요.”
이 대표가 말을 하곤 웃었다.
“고생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까?”
“정말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기분입니다. 내 힘으로 자유를 얻어낸 것 같아서 뿌듯하긴 한데,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말 행복합니다. 크나큰 안도감이라고 할까요. 지금의 자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내가 짐작한 그대로였다.
전쟁을 겪고 돌아온 용사가 된 기분.
길고 긴 꿈을 꾼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 대표가 말을 이었다.
“저는 정말 좋았습니다. 매번 감독님 영화가 좋았긴 했지만 이번엔 이전 영화와 좀 달랐어요.”
“어떻게요?”
“영화의 재미만 따져도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감동도 아주 컸습니다. 그냥 남들처럼 살아가던 저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흔들었다고 할까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인간이란 참으로 아름답구나. 이미 자유가 있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앞서 말한 의문의 시작이었죠. 그 시점에서 감동이 잔잔하게 밀려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인간에 대한 감동이라고 할까요.”
이동욱 대표가 환하게 웃었다.
그도 영화의 여운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
내가 정확히 의도한 바는 아니다. 내가 심리학자나 철학자가 아니니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어렵다. 해당 지식이 없으니까. 어떤 것인지 감은 잡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무엇을 건드렸다는 것.
이 대표가 이어 말했다.
“감동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감격이라는 말도 좀 의미가 좁고. 일종의 해방감이자 성취감. 자부심 같은 게 섞였다고 할까요. 뭔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벅차오르는…”
무슨 느낌인지 단박에 들어왔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을 맞이한 심정 같은 거요?”
이동욱 대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겁니다! 그거네! 와! 기가 막히네요!”
“정말 그거에요?”
“네, 그겁니다! 감격과 감동을 뛰어넘는 이건 대체 뭔가 했더니…. 제가 한국 역사를 잘 몰라서 짐작도 못 했습니다. 당시 한국 사람 심정이 어땠나 따져보니까, 그것과 비슷하네요. 혹시 의도하신 거예요?”
“의도한 게 맞습니다.”
“그랬구나. 직원들이 누군가에게 지배를 당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았을 겁니다. 한국 특유의 정서가 직원들 마음에 새겨졌다고 할까요? 한이나 정 같은 것 말입니다.”
이 대표의 말에 감탄했다.
한(恨). 정(情)
그러고 보니 영화를 본 직원들의 얼굴이 보였던 게 한과 정을 닮은 감정이었다. 한국의 정서가 가슴에 스며들었던 거였다. 한이라는 말은 일본인이 지어주기는 했다만.
한은 마음의 응어리다. 역설적으로 한이 있어야 밝음과 희망을 향할 수 있다. 그것은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며 끌어당기는 힘이다.
정은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같으나 한과 달리 내어주는 마음이다. 한을 가진 사람은 정을 안다.
여기에 흥(興)을 하나 보태도 된다.
영화 중반까지 흐르는 것이 흥이고, 모든 전투가 끝났을 때 함께 기뻐하는 저항군들의 모습이 흥이다.
나도 모르게 영화에 한국인 정서를 심어 놨네.
서구 영화 평론가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테고, 한국 평론가는 바로 짚어 낼 것 같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나도 정확히 뭔지 몰랐던 것을 영화가 완성된 후에 찾아냈다. 애초에 의도한 것들이긴 하다.
플랜 만큼의 감정이입. 갓 필드와 같은 현장감.
지배를 받는 이들의 울분. 자유를 위한 갈망.
이러한 것들을 의도하고 시나리오를 썼는데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이다 보니 한민족 고유의 정서가 담겼던 거였다. 일제강점기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써서 그랬는지.
퇴근하면서 직원들을 보았다.
오전에 받은 영화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서 술을 마시러 가는 직원들이 꽤 있었다. 세상살이에 지친 직장인들이 동료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한잔하듯.
직원들 뒷모습을 보니 뭔가 짠하다.
이번 영화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졌다.
흥행은 제법 할 것 같다. 영화 자체의 재미는 정말 자신하니까. 북미 관객이 영화의 정서를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 * *
대대적인 시사회를 했다.
마케팅팀에서 예산을 더 들여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자고 먼저 제안했고, 이동욱 대표도 적극 홍보에 나섰다. 이번 영화는 네오스타가 직접 배급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대한 레드카펫 행사와 포토 콜을 하고 극장에 들어섰다. 사진 찍느라 일일이 인사를 못했는데, 할리우드 스타와 신인 배우들이 많이 왔다. 언론 시사회를 겸한 시사회라 기자들도 정말 많이 왔다.
극장 안에 빈자리가 없었다.
혁민이가 턱시도를 입은 모습으로 영화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내게로 왔다.
그 모습을 보고 꽤 놀랐다.
예전에 혁민이를 면접할 때 얼핏 봤던 모습이다. 할리우드 배우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었던가. 그게 바로 지금의 혁민이었다. 그때 혁민이와 사진을 찍은 유명 배우들이 시사회에 참석했다. 코어가 확실히 미래를 본다.
“대표님. 이쪽은 윌 스미스 씨입니다. 이쪽은 최신성 감독님이시고요.”
“반갑습니다, 초청해주셔서 고맙네요.”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윌 스미스와 악수했다. 함께 온 그의 아들과는 포옹을 하고. 이들 부자는 내 영화 팬이라고 들었다. 이들 외에 이름만 대면 아는 배우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혁민이가 미국에 오래 있으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사귀었다. 나는 모르는 투자자와 평론가들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기자들과도 두루 친해 보였고.
어쨌든 인사를 하고 난 뒤 좌석에 앉았다.
제이슨을 비롯한 배우들은 영화가 어떻게 나왔는지 자못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시나리오에는 볼 수 없는 VR 효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도 궁금할 테고.
그때 혁민이가 갑자기 무대에 올랐다.
그가 마이크를 잡더니 말했다.
“여러분. 블루드 워 1편을 보셨죠?”
“봤습니다!”
“블루드 워 1편을 어떻게 관람하셨죠?”
“자유롭게 마음껏!”
“바로 그겁니다. 블루드 워 2편 라스트데이도 자유롭게 보시면 됩니다. 그것이 블루드 워 시리즈의 특징이죠. 감독님도 그러십니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관람 방식이 영화 속으로 빠져드는 데 큰 효과가 있다면서요.”
내가 언제?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럼 영화 재미있게 보시고, 기자들님들께선 솔직하게 리뷰를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네오스타 스튜디오의 신작, 블루드 워 라스트데이를 공개합니다.”
혁민이가 눈인사를 하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곧 극장에 불이 꺼졌다.
네오스타 로고가 뜬 후 바로 영화가 시작되었다. 난 하도 많이 봐서 이젠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여느 영화의 전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후반의 내용도 그렇고.
북미 관객들은 익숙한 걸 좋아하기에 완전히 새로운 것을 가급적 자제했다. 조금만 비틀어도 새로운 느낌을 주기도 하니까. 거기에 내 영화 특유의 극한으로 밀어붙이기가 있다.
액션이든 감정이든.
관객들이 점점 영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액션과 상황들이 나오는데 왜 이렇게 몰입이 되는 거지 싶을 터다. 감정이 끊어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데 그런 연계 방식의 구성을 일반인은 잘 모르니까.
20분쯤 지나자 환호와 휘파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직원들만큼의 열광적인 반응은 아니다. 점잖은 기자들이 많은지라. 웃다가 멍해지고. 통쾌해하다가 또 먹먹해지고.
그런 장면들이 계속 쌓여 갔다.
처음엔 답답한 상황이 해결되어서 통쾌했는데 액셀의 액션으로도 채울 수 없는 지배당하는 자의 서러움과 울분이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외계인들의 인류 말살 작전 등이 나오고, 개조 전사들이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자 극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침묵이 돌았다. 여자 관객들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있고, 남자 관객들은 이를 악물고 있고.
저항군이 지하에서 전멸하는 장면.
곳곳에서 깊은 탄식이 나왔다.
우는 관객들도 있었다.
영화는 그대로 후반까지 미치광이처럼 질주했다.
단 한 순간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액션도, 감정도 극으로 치달았다. 아마도 영화 속 일이 자신들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이때부터일 것 같다.
슬쩍 뒤를 보았다.
관객 대부분이 넋이 나간 얼굴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입을 벌린 채 보는 이들도 있고, 눈동자가 인물의 동선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도 있고.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얼굴만 보면 영혼이 이탈한 듯한 모습.
시간이 갈수록 극장 안이 기이한 열기에 휩싸였다.
너무 몰입하고 긴장한 나머지 많은 관객이 사색이 되었다. 어떤 여배우는 손을 부들부들 떨기도 했고.
“NO!”
“Oh, my….”
“Jesus! run!”
“Hey, behind you.”
관객들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무도 그 소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화 속에서 들려온 소리처럼.
심지어 특공대원에게 조심하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드디어 액셀이 풀려나고 특공대가 영웅으로 변신했다. 박수나 환호 같은 건 안 나왔다. 화성에서 핵 공격이 벌어지는 시점과 교차되기 때문이다.
외계인의 함대가 화성에 접근하고. 다급한 무전이 오갔다. 돌격 편대가 구성된 뒤 우주 교전도 벌어졌다.
원래 이 장면에서 비장미와 함께 숨 막히는 박진감이 전해져야 한다. 그런데 관객들은 재미를 느끼기보다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현실에서 정말 벌어진 일을 보는 것 같은. 영화를 즐기는 모습이 아니었다.
표정만 봐도 그랬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전투기들의 교전을 보며 다들 하얗게 질렸다. 임무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도 커서 액션 따위를 즐길 겨를이 없었다.
조종사들이 외침을 끝으로 하나 둘 죽어나가자 결국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졌다. 첫 번째 핵 공격을 막아내자 기지 통제관들처럼 관객들도 말없이 주먹만 불끈 쥐었다. 환호하는 장면도 찍기는 했는데, 그 장면은 들어내고 주먹만 쥐는 것으로 바꾼 터였다.
관객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조종사들을 응원했다. 한 평론가만 흥미롭다는 얼굴로 관객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주 유명한 프리랜서 평론가다. 조시 맥브라이드.
이어 기지 사령관의 담담한 연설.
그리고 전투기 조종사들의 마지막 절규.
수많은 관객이 눈물을 훔치거나 먹먹한 얼굴로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핵미사일 저지 임무에 성공하고 있지만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조종사들의 희생을 먼저 생각하는지.
마침내 액셀은 매우 강한 상대와의 싸움에서 이겼고, 화성에선 핵 공격을 막았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안도감과 감격, 기쁨이 뒤섞인 희열에 눈동자만 바쁘게 돌아갈 뿐.
그렇게 영화가 끝났다.
직원들과 똑같았다.
다들 멍하니 스크린에 오르는 크레디트만 보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극장에 불이 켜지자 그제야 곳곳에서 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너무도 지쳐서 좌석에 축 늘어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배우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함께했던 동료 배우들을 안고 있었다. 마치 전투를 끝낸 전우들처럼.
짝짝짝짝-
어디선가 박수가 나왔다.
뒤를 보니 조시 맥브라이드 평론가였다.
그가 혼자 일어나 박수를 치자 먹먹한 얼굴로 앉아 있던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보내주었다.
휘파람도 없고 환호도 없다.
다들 지친 기색으로 열렬히 손뼉만 칠 뿐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말없이 일어나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더 우렁찬 박수가 나왔다.
부끄럽지만 거장에게 보내는 박수 같기도 하고.
시사회는 이렇게 끝났다.
* * *
평론가 맥브라이드는 극장에서 나와 자신의 차로 향했다. 원래 시사회가 끝나면 제작사 측에서 마련한 파티 겸 간담회에 참석하는데 이번에는 가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받은 놀라운 감명을 파티 도중에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는 차 운전석에 올라 멍하게 앞을 보았다.
처음 경험하는 혼란스러움에 무척 당황한 그였다.
철옹성 같았던 그의 이성이 무너져 내렸다.
“믿을 수가 없군.”
조시 맥브라이드는 20년 넘게 평론을 했고 무수히 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런 그에게 이런 충격을 준 영화는 처음이었다.
그는 그 충격이 무엇인지 따져보고 있었다.
최신성 감독 작품들에 호감이 있었고 최 감독의 예술영화에 높은 평점을 준 적도 있다. 그러나 블록버스터만큼은 높은 점수를 준 적이 없다. 아니, 이번 영화는 혹독하게 평가를 할 작심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졌던 자신의 오만이 너무도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최신성 감독은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 예술가가 아니라는 것을 이번 영화로 절실히 깨달았다.
세상 모든 감독에겐 단점이 있고, 완벽한 영화는 없다고 믿었다. 더구나 블록버스터 영화에 오락 말고 무슨 가치가 있겠나. 돈벌이 수단일 뿐이지.
블루드 워 라스트데이는 달랐다.
상업과 예술의 경계가 없다. 영화 예술의 모든 것을 담은 작품을 무슨 기준으로 경계를 나누겠는가.
오락. 예술. 메시지.
영화로 보여줄 수 있는 모두 것을 가지고 있었다.
라스트데이를 액션 영화로 치부하는 것은 평론가가 스스로 편협한 눈을 가졌음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여타 영화와 다를 바 없는 액션과 전개를 비방하는 것은 숲을 보고 산맥을 조롱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라스트데이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평론가가 본인의 수준 낮음을 드러내는 것밖에 되질 않는다. 만약 자존심 때문에 라스트데이를 깎아내린다면 이는 영화 역사에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일이다. 껍데기만 보고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멍청이라고.
맥브라이드에게 라스트데이는 그런 영화였다.
우울함. 피로. 서러움. 기쁨. 성취감. 감격. 감동.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이 그의 가슴을 헤집고 있었다.
맥브라이드는 차분히 감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 형언하기 어려운 영화를 냉정히 들여다보았다.
영화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
그것은 대사와 장면 몇 가지로 던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백 번 듣는 것은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최신성 감독은 듣고 보는 것을 넘어서서 체험하게 했다.
그래서 저항군이 된 심정으로 영화를 보았던 것이 아닌가. 또한 그래서 이토록 처절한 여운이 남지 않았는가.
맥브라이드는 자신만 그런 줄 알았으나 관객 모두가 그런 상태였음을 관람 도중에 알았다. 그걸 깨달은 후 그는 일생일대의 충격을 받았다.
영화의 액션 따위는 나무 몇 그루에 불과하다.
숲만 보고 산맥의 경이로움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영화의 정점에 있는 작품을 두고 상업과 예술을 논할 수 있겠나.
맥브라이드는 연신 한숨을 쉬며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을 내리눌렀다. 당장 이 순간의 감정과 분석을 잊거나 희석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을 시작했다.
“최신성 감독의 신작, 블루드 워 라스트데이. 먼저 결론부터 밝히고 싶다. 이 영화는 내 생애 최고의 영화다. 세상 모든 영화를 집대성한 영화이고, 영화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냈으며, 그 어떤 영화도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이에 나는 몇 가지 체험적 논거와 주장을 바탕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이 영화는……”
맥브라이드는 차분하게 자기 생각을 녹음했다.
1시간가량 녹음을 한 뒤 집에 가서 집필을 했다.
그 평론은 라스트데이 개봉 당일 유명 매체에 실렸다.
[인류에게 전하는 최신성 감독의 메시지.]
라는 제목의 평론이었다.
* * *
시사회 다음 날 회사가 좀 바빠졌다.
분명 관객이 영화에 열광하긴 했는데 반응이 기대했던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영화 잘 봤다는 기자들 멘트도 없었고.
흥행의 적신호가 켜졌다며 홍보팀이 분주해졌다.
그런데 회사에서 소동이 벌어진 것이 우습게도.
스타들의 SNS에서 난리가 터졌다.
초대받은 스타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소감을 밝혔던 것이다. 그 소감이 순식간에 전 세계 팔로우들에게 퍼져 나갔다.
윌 스미스.
[전 인류가 봐야 하는 영화.]
엠마 스톤
[블루드 워 ; 라스트데이는 정말 놀라운 영화입니다. 저는 전쟁을 경험했어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됩니다.]
케이트 블란쳇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남은 날들을 살아갈 거예요. 최신성. 그는 정말 최고입니다.]
제이슨
[내가 액셀 역을 하고, 블루드 워를 찍었다는 것에 무한한 영광을 느낍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세계 최고의 행운아입니다. 최신성 감독님이 저를 행운아로 만들었어요.]
그 외 스타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저녁 9시가 되자 리뷰가 쏟아졌다.
[피지배자의 간접체험. 그 생생한 현실감.]
[상업영화의 가면 속에 숨은 치열한 예술성.]
[최고의 액션과 최고의 예술. 딱 그 한가운데.]
[블록버스터에 감동과 사유를 담다.]
[할리우드와 미국인을 바꿀 영화. 위대한 충격!]
리뷰가 너무 많아서 다 읽지도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예술 언급이 많았다.
나야 예술영화를 찍을 생각은 전혀 없었고, 진지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생각도 안 했다. 영화 내용이 사유를 담을 만한 것이었고, 관객이 영화 속으로 들어가서 체험하는 형식이 되면서 메시지와 예술성이 발생한 것이다.
리뷰를 보니 블록버스터 영화로 이러한 것들을 담았다는 게 놀라운 모양이다. 감정이입 정도가 매우 큰 것도 놀라워하고.
플랜과 갓 필드를 거치면서 나만의 영화적 진보가 있었는데, 두 영화가 한국영화다 보니 미국인들은 낯설면서도 신기했던 거겠지. VR 효과와 특별 현상도 한몫했을 테고.
영화를 만들 때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두진 않았다. 상업 영화 관람에 거슬리지만 않으면 메시지가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고, 진지한 예술 영화라도 재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으니까.
흥행에 대한 우려는 안 해도 될 듯했다.
영화의 만듦새나 액션 수준은 마블 시리즈와 별 차이가 없었다. 너무 몰입하여 영화를 즐길 정신적 여유가 없을 뿐이지.
그냥 게임보다 가상현실 게임이 더 재미있는 것처럼 관객이 영화 속에 들어간다는 체험을 하는 것도 흥행 요소는 될 듯했다. 감정이입이 안 되면 그냥 영화를 즐기면 되는 거고.
코어 레벨이 상당히 높아진 것은 확실했다.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전개와 구성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정도가 극대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영화의 특별 현상이 발생하고, 관객이 영화 속에 들어가는 현상까지도 일으킨다. 코어가 유도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정말 마법인 거지.
솔직히 코어를 풀가동해서 세상과 사물을 보면 안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긴 했다. 사람의 운명을 보고자 한다면, 정말 보고자 한다면 볼 수 있다.
나 스스로 인간이고자 하기에 안 하는 거지.
코어가 급격한 진화를 할까 봐 두렵기도 하고.
* * *
영화 개봉 때까지 딸아이와 놀며 집에서만 지냈다.
혁민이가 영화 예매율을 비롯해 매일 보고를 하고 있어서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웬만한 정보는 다 알고 있었다.
약 120개국에 선판매가 되었고 한국과 중국, 일본에선 미국과 동시 개봉이었다. 중국과 일본은 로큐의 합작사가 극장체인이라 내 영화가 두 나라의 스크린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국도 스크린 수가 1,300개나 되었고.
이번 영화에 대한 전 세계 영화팬의 관심이 유난히 컸다. 블루드 워 시리즈에 호감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 갓 필드를 보고 팬이 되었던 이들의 관심은 광적일 정도였다.
그렇게 한가하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개봉일이었다.
아내가 영화를 보고 싶어 했지만 아이 때문에 보러 가진 않았다. 한국에 가서 봐도 된다면서.
내가 개봉 당일 성적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지 말라는 눈치를 줘서 그런지, 이동욱 대표도 혁민이도 연락하지 않았다. 혹시 망했나 싶어서 예매율을 확인해 보면 1위였다.
그러다 혁민이가 한 번 보라며 링크 주소를 보내주었다.
조시 맥브라이드의 영화 평론이었다.
시사회에 왔던 그 평론가.
[인류에게 전하는 최신성 감독의 메시지.]
평론 제목이 흥미로워서 들어가 보았다.
영화 평점 사이트 토마토에 올린 평론이었다.
평점이 놀랍게도 신선도 100%다.
댓글도 어마어마하게 붙어 있고.
<… 그 기이하면서도 압도적인 몰입 방식에 의해 관객은 영화 속 상황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관객은 지배를 당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되고 투쟁심과 자유를 향한 갈망 등을 일으키며 저항군과 동조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자신과 동일시하는 효과로 이어져…>
<… 영화 속 저항군은 우리가 쉽게 여기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숱한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는 인류에게 전하는 제언이다. 인간의 광기와 악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며, 각 개인의 삶이 긍정적으로 향하도록 하는 이정표다.>
<… 예술과 상업 영화를 오가던 최신성 감독은 급기야 스스로 진화하여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허물고 영화를 통합해버리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적어도 최신성 감독에 한해서는 영화 예술에 경계는 없을 것이며, 어떤 영화를 만들어 내든 지금보다는 진화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단언컨대 블루드 워 ; 라스트 데이는. 미국인의 의식을, 나아가 인류의 의식을 바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대중이 쉽게 접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이러한 의식의 전환을 일으키게 한 최신성 감독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하는 바다. 이런 영화를 동시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꽤 긴 평론이다.
많은 평론을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의도했거나, 혹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부분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짚어 낸 평론이다.
당연히 인류에게 메시지를 주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몰입을 위해 나라를 잃은 백성과 독립군의 마음을 대입해서 영화를 풀었다. 관객은 그런 울분을 고스란히 겪었던 거고.
댓글 내용도 보았다.
독립전쟁을 체험했다는 내용이 대다수다.
‘미국은 제국인가’를 두고 갑론을박도 벌어지고.
유튜브에도 논쟁 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영화를 보고 멍하게 생각에 빠진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화의 여운 때문에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
* * *
영화 개봉 6일째.
슬슬 귀국 준비를 했다.
미국보다 한국이 더 난리라고 한다.
지배를 당한다는 것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체험이지만, 한국인에게는 공감이다. 한국인의 ‘한’이 꿈틀거렸겠지.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있던 때였다.
혁민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입이 근질근질했나.
“왜?”
-대표님! 아직 미국이죠?
“그런데?”
-방금 TBS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토크쇼에 좀 나와 달라고 합니다.
“TBS? 케이블 채널 아니야?”
-영화 전용 채널이죠.
“무슨 쇼인데?”
-코난 쇼요.
“코난? 코난 오브라이언?”
-네. 국민 코미디언이죠. 보신 적 있죠?
“유튜브에서 봤지. 스티븐 연과 한국에도 왔고.”
-거기 나가 보세요. 대박일 겁니다.
서연을 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코난이 진짜 웃기긴 한다. 쇼도 재밌고.
혁민이가 다시 말했다.
-코난이 시종일관 웃기기는 하지만 진지할 땐 진지해요. TBS가 영화 채널인데다 최근 라스트데이가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어서 인터뷰하려는 거죠. 사실 여러 방송사에서 제의가 왔는데 다 잘랐어요.
“그건 잘했다. 근데 우리 귀국하려던 참이야.”
-언제 귀국하세요?
“아직 예약은 안 했어. 이번 주에 들어가려고.”
-그럼 제가 녹화 일정 조정 좀 해 볼게요. 3일 안에 못 찍으면 없던 일로 하죠. 답답한 쪽은 저쪽이니까요. 안 그래도 핵폭탄급 흥행 중인데 북미 최고 기록 한번 세워 봐야죠.
“핵폭탄급 흥행이라고?”
-뭐에요? 성적 확인 안 하셨어요?
“안 했는데?”
-나 참!
딸각, 딸각.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극장 수입. 2억 8천만 달러.
“뭐?”
-아바타 다음으로 역대 북미 오프닝 최고 성적입니다.
“잘못 본 거 아니야? 이제 고작 6일째인데?”
-그러니까, 역대급 성적이죠. 스크린이 1,000개 정도 늘어날 예정이고요. 이번 주말에 영화 보려는 사람도 엄청 많아요. 이대로 가면 총 입장 수입이 7억 넘어갈 겁니다.
“말도 안 돼.”
-잘하면 아바타도 넘을 수 있어요. 아바타는 스크린 수가 5,000개였거든요. 우린 3,000개로 시작해서 이 정도 성적인 거라고요. 대표님이 토크쇼에 나가서 홍보 좀 해 주시면 아바타가 이룬 7억 5천만 깰 수도 있어요.
이놈이 돈독이 올랐나.
혁민이가 다시 말했다.
-아바타 전 세계 흥행 수입이 얼만지 아세요?
“얼만데?”
-27억 달러.
기가 찬다.
“넌 아바타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해?”
-전 세계 흥행 수입은 넘기 어렵겠죠. 아바타는 전 세계에 직배했고, 우린 판매 형식이니까요. 최소한 북미 수입이라도 넘어 보자는 거죠.
“그래, 배포는 마음에 든다.”
-그럼 토크쇼 출연하시는 걸로 갈게요.
“그래라. 나도 조금 욕심은 나네.”
-근데요. 대표님.
“왜?”
-너무 무관심한 거 아니에요? 지금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시큰둥하고 있으니까요.
“신경을 쓴다고 뭐가 달라지냐? 대중에게 맡기는 거지.”
-흥행 성적 모르시는 거 보니까, 대중이 라스트데이를 어떻게 보는지도 영 모르시겠네. 한국 포털에 들어가 보세요. 거기가 가장 극명하니까.
“알았다.”
전화를 끊었다.
아내가 물어왔다.
“아바타를 뛰어넘는다고?”
“혁민이가 야망이 좀 크네.”
“그 정도 흥행이면 어마어마한 거 아니야?”
“그렇긴 해.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둔 게 아바타니까. 현실적으로 넘긴 어려워. 스크린 수도 부족하고 해외에 직배사도 없고. 흥행 배분이 다르거든.”
“비행기 예약은 토크쇼 촬영하고 해.”
“그래.”
흥행이 내 예상을 넘은 모양이다.
영화 자체의 특별함에 갓 필드로 형성된 팬덤이 움직인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아바타급 신드롬이 벌어졌던가.
3일 후 토크쇼 출연이 결정되었다.
내가 귀국한다고 하자 바로 날짜를 잡았다고 한다.
코난 이 작자가 무슨 해괴한 짓을 할지.
* * *
네오스타 스튜디오로 갔다.
날 TBS 본사가 있는 애틀란타로 부르지 않고 코난이 직접 왔다. 네오스타 스튜디오에 쇼 세트도 지었고.
차를 몰고 회사로 가는데 웬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방청객이 있는 모양이다.
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이 시위하듯 외쳤다.
“네오스타! 네오스타!”
“블루드 워!”
“감독님, 영화 재밌게 봤어요!”
교민들도 온 것 같다.
모인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혁민이가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는 왜?”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려고요.”
내가 진입하자 쇼 연출이 왔다.
“안녕하세요. 코난쇼 연출을 하는 조니라고 합니다. 한국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일정을 잡았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충분하시죠?”
“네. 충분합니다.”
“다행이네요. 여기 대본입니다. 코난이 대본대로 하는 편이긴 한데, 즉흥적인 멘트도 많이 합니다. 다소 노골적이거나 놀리는 멘트도 있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니 오해는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럼요.”
대기실로 가서 대본을 보았다.
나올 질문과 조크 등이 적혀 있었다.
내가 할 말이나 리액션도 예시 삼아 적어 놓았고.
15분쯤 지났을 때.
코난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키가 무척 커서 깜짝 놀랐다.
“여, 반갑습니다! 최 감독!”
“네, 만나서 반갑….”
코난이 내 옆을 지나더니 혁민이를 덥석 안았다.
혁민이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니라 이쪽입니다.”
“아!”
코난이 낄낄대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았다.
“영화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바지에 지렸거든요.”
“안 본 거 압니다.”
“봤는데요?”
“안 봤을 걸요?”
코난이 연출에게 고함을 질렀다.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 망할 놈아!”
욕을 하곤 다시 씩 웃는 코난.
그의 조크 스타일을 조금 알 것 같다.
코미디언이라 그런지 리액션이 대단하다.
“미국 쇼에 출연하는 건 처음이죠?”
“네. 살살 좀 해주세요.”
“감독님은 오늘이 라스트데이입니다. 하하하하!”
코난이 크게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넙죽 절을 하고 대기실에서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나와 혁민이 둘 다 빵 터졌다. 실제 모습인지, 연기를 하는 건지.
혁민이에게 물었다.
“원래 저래?”
“긴장 풀어주려고 그러는 걸 겁니다. 저분이 저래 봬도 하버드 출신이에요.”
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녹화 들어가겠습니다! 코난! 준비해 주세요.”
혁민이와 함께 대기실을 나섰다.
세트 뒤쪽에서 구경했다.
방청객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잠시 장비 테스트를 하더니 바로 녹화를 시작했다.
코난이 나가자 방청객이 기립하며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곧 코난의 멘트가 이어졌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내 영화로 넘어갔다.
“여러분, 소개합니다! 미국 전역에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전 지구적 신드롬을 일으킨 영화, 블루드 워의 최신성 감독!”
음악이 터져 나왔다.
연출의 수신호를 보고 무대로 걸어나갔다.
환호와 박수가 폭풍처럼 터졌다.
손을 흔들며 걸어나갔다.
코난이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영화 진지함 때문인지 장난을 치지는 않았다.
“네오스타 스튜디오에서 쇼를 하는 건 처음이시죠? 내 집에 왔다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생각하세요.”
“코난도 집에 온 것처럼 여기셔도 됩니다.”
“아, 그럼 그럴까요?”
코난이 갑자기 바지를 벗으려는 시늉을 했다.
대본에는 막으라고 적혀 있다.
안 막으면 진짜 벗어야 하니까.
“왜 바지를 벗으려고 그러세요?”
“전 집에선 알몸으로 다니거든요.”
“하하하하.”
방청객들이 박장대소했다.
난 미국식 조크가 영.
어쨌든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코난의 개그에 점점 익숙해지긴 했다.
조크로 분위기를 풀어 준 뒤 영화 이야기로 들어갔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블루드 워 ; 라스트데이로 인해 자유의 소중함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죠. 영화를 통해 그러한 가치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가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과 가르치려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죠. 현실을 닮은 영화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현실에서 외계인을 만나셨군요.”
“이 순간에도 만나고 있습니다.”
“하하하하하!”
코난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방청객도 빵 터지고.
TBS가 영화 채널이라 그런지.
질문이 무척 깊이가 있었다.
방심할 때면 나오는 농담도 촌철살인이었고.
녹화가 끝나갈 즘 코난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감독님은 전 인류에게 사랑을 받을 겁니다.”
“저는 아내의 사랑만 받아도 충분해요.”
“저도 감독님의 아내에게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네요.”
“어림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최신성 감독이었습니다!”
또 음악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코난과 악수를 하고 포옹했다.
정말 멋진 사람과 사귀게 된 것 같다.
혁민이 생각이 맞았다.
이 쇼가 방영되면 흥행에 큰 도움이 된다.
웃겨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으니.
대기실에서 코난과 다시 인사를 했다.
마중 나온 혁민이를 뒤로하고 차를 몰고 나갔다.
쇼에 너무 집중해서 그랬던 걸까.
차를 몰고 가다는데 머리가 너무도 아팠다.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난번에 코어를 강하게 발동한 후유증인 것 같았다.
두통이 가시질 않아 머리를 흔들던 그때였다.
갑자기 번개가 치는 듯 눈앞이 번쩍거렸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뭔가 보이는 듯한 느낌까지 들고.
마치 머릿속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듯한.
코어가 확장되는 건가. 아니면 뭔가가 열리는 건가.
한동안 눈을 감은 채 꼼짝 않고 있었다.
30분쯤 지났나.
두통이 가라앉았다. 머릿속 폭풍도 멎었고.
눈을 떴다.
매우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희뿌연 시야가 점점 가셨다.
그러다 시력이 온전해지는 순간.
어?
앞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입이 벌어졌다.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보았다.
환상이 아니었다. 내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었다.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빌딩들. 지나가는 차들.
심지어 멀리 있는 건물까지.
모든 사물이 빛의 형체와 겹쳐져 있었다.
그 빛들은 모두 정보였다.
7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