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블루드 워 ; 라스트 데이 (47/56)

제7장 블루드 워 ; 라스트 데이

정말 기뻐서 눈물이 났다.

운전하고 가다가 신호만 걸리면 서연의 배를 쓰다듬었다.

서연이는 그저 웃기만 하고.

“영화 찍으려고 했는데 당분간 안 되겠네.”

“나도.”

“무슨 소리야, 오빤 영화 찍어야지.”

“행복하게 살려고 영화를 찍은 거고, 가정이 화목해야 행복한 거지.”

서연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입에 발린 말은 아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병원부터 가자.”

“응.”

테스트에 반응이 나왔다면 확실하다.

그래도 모르니 병원에 가서 확인해야 했다.

피검사를 하고 며칠 기다려야 하겠지만.

* * *

“축하드려요. 임신 4주 차입니다.”

“고맙습니다.”

“2주 후에 다시 오세요. 그때 초음파를 하면 아기집이 보일 거예요. 2차 피검사 하시고 임신 수치까지 재 봐야 안심할 수가 있어요.”

“네, 선생님.”

의사 선생님이 환하게 웃음을 보이곤 자리를 떴다.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걱정도 생겼다. 제대로 임신이 안 되었거나 무슨 이상이 생길까 봐.

며칠 동안 서연이 옆에 있으면서 실없이 웃음만 나왔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아빠가 된다는 기분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면 좋으련만.

서연이 활동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일상을 보냈다. 종일 임신과 출산에 관한 정보를 읽어 보면서 지냈다. 코어까지 돌려 가면서.

서연이 배가 불러오면 집에만 두고 내가 모든 일을 하려고 했는데, 그게 오히려 좋지 않았다. 배가 불러도 움직여야 산고가 덜하다고 했다. 아이도 빨리 나오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

자연분만으로 산모의 산도를 통과해야 아이가 건강해진다는 정보였다. 태아가 무균 상태로 자라다가 태어날 때 엄마의 산도에 있는 균을 만나야 면역 시스템이 결정된다. 태어나면서 엄마에게 유익균을 받는 셈이다. 모유도 마찬가지.

반면 제왕절개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장내에 좋은 균을 받지 못하고, 수술대에 있는 유해균을 먼저 받게 된다. 그런 아이들은 알레르기나 아토피 질환 발병이 높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게 된다면 아이의 코에 엄마 산도에서 채취한 유익균을 적셔 주기로 했다. 병원에서 해 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연이 말했다.

“오빠는 자연분만으로 태어났지?”

“응. 나 알러지 같은 거 없어. 약도 안 먹는데 뭐.”

“그건 나랑 비슷하네. 나도 약 잘 안 먹어. 아빠가 약 많이 먹으면 면역이 약해진다고 해서.”

“맞는 말씀이야. 몸이 스스로 이겨 내는 게 가장 좋지.”

다시 2주가 지나갔다.

며칠 전 피검사를 하고 오늘은 초음파로 아기집까지 확인했다. 임신 수치는 일단 정상이긴 했는데.

헤드폰을 끼고 소리를 들었다.

콩. 콩. 콩. 콩.

잡음이 섞인 아기 심장 소리였다.

너무도 작고 앙증맞은 소리.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먼저 아기 심장 박동을 들은 서연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까지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아내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나도 서연도 신세계를 경험하는 중이라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현실의 감동은 영화와 비교할 수가 없다.

의사 선생님이 또 환하게 웃었다.

“맘 편하게 먹으시고 드시는 거 늘 조심하시면 돼요. 아기에게 좋은 말만 해 주시고요. 감독님은 서연 씨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해요. 세상의 모든 엄마는 이 시기에 감정이 복잡해지고 생각도 많아져요. 괜히 눈물도 많이 나오고요. 항상 옆에 있어 주시면 더 좋고요.”

“그럴 겁니다.”

서연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아빠의 힘은 위대했다.

일생 요리를 안 하고 산 인간이 이참에 요리를 배우기로 했다. 나는 안 먹어도 아내는 먹여야겠다 싶어서.

* * *

서연이 임신 12주째.

하루하루가 축복의 나날이었다.

나도 서연이도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태아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걸 확인한 다음부터 일을 시작했다. 이제 일하라는 서연이 성화도 있었고. 내가 너무 엉겨 붙으니까 귀찮다나. 이러다 나는 서열 3위로 밀려나는 거 아닌지 몰라. 개는 키우지 말아야지.

블루드 워 2편 프리 준비에 들어갔다.

오전 6시부터 8시까지 네오스타 팀장들과 영상 회의를 했다. 현지는 오후 2시여서 나도 스태프들도 무리가 없었다.

회의가 끝나면 간단히 아침을 만든 뒤 아내를 깨웠다. 커피를 워낙 좋아하는 그녀지만 임신을 확인한 날 바로 커피를 끊었다. 의사 선생님과 상담한 뒤 지금은 묽은 아메리카노 한 잔 정도는 아주 감사하게 마시고 있다.

구운 식빵 한 조각에 달걀부침과 베이컨.

삶은 아스파라거스 두 줄기와 완두콩.

토마토 반 조각과 우유 혹은 과일 쥬스.

매일 먹어도 안 질리는 아침 메뉴였다.

점심은 어머니와 장모님께서 보내 주신 반찬과 국으로 밥을 먹고, 저녁엔 내가 직접 만든 요리를 먹었다. 서연이 밥을 한 적이 훨씬 더 많지만 아침만큼은 내가 했다.

서연이 식탁에 앉았다.

막 부친 계란후라이를 서연과 내 접시에 놓았다.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오늘도 입맛이 좀 그래?”

“아니. 속이 울렁거려서 먹는 게 힘들었는데 요즘은 괜찮아. 프리 들어갔어?”

“2주 후 들어갈 거야. 한 6개월 걸려.”

“스토리보드 회의해야 하잖아? 한 달은 걸릴 텐데.”

“한국으로 오라고 했어.”

서연이 날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의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

“왜, 또?”

“그냥 행복해서.”

코까지 빨개진 서연이다.

그녀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요즘 인생의 참맛을 느끼는 중이다.

돈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누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려는 서연을 말리고 내가 했다. 그런 뒤 아내와 함께 남산을 산책했다. 산책하고 돌아오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거나 그랬다.

그렇게 무료하지만 행복한 나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다시 한 달 후.

내 집 2층에 임시 사무실이 차려졌다.

네오스타 팀장급 스태프들과 조감독 에드워드, 제작부장 엠마 등이 한국에 왔다. 콘티 작가들과 CG 팀장, 특수효과팀장까지 합쳐 모두 12명이나 되었다.

약 40일 동안 스토리보드 작업을 진행하는데, 근무 시간과 똑같이 오전 9시에 시작하여 오후 5시면 칼같이 작업을 끝냈다. 그 뒤 다들 이태원 등지로 놀러다녔다.

한국에 처음 오는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며칠 지나자 직원들 모두가 한국의 유흥문화에 중독되고 말았다. 이 사람들이 일을 하러 온 건지 놀러 온 건지.

남자 스태프들은 이태원이나 홍대 쪽 클럽을 드나들었고,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과 금세 친해졌다. 여자 스태프들은 쇼핑하고 로큐에 가서 한류 스타 구경하느라 바쁘고.

직원들이 한국 문화와 기술을 너무도 좋아했다. 차 없어도 어디든 다 가지. 인터넷 빠르지. 이태원엔 지구촌 음식이 다 있지. 술집과 식당은 새벽에도 문을 열지.

사람 사귀고 술 마시느라 매일 아침 숙취 상태로 회의를 시작했다. 솔로 생활 3년 차였던 조감독 에디는 한국에서 미국인 여자친구까지 생겼다.

스태프들이 자유롭게 2층 방에 모였다.

좀 좁았지만 옹기종기 모여 앉은 것도 좋았다.

팀장 몇 명은 오늘도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에디. 어젠 몇 시까지 논 거야?”

“새벽 3시요. 애나가 한국 친구를 소개해서 술집 옥상 집에서 놀았죠. 미국인 친구들이 한국식으로 놀더군요.”

“애나는 어떻게 만난 거야?”

“식당에서요. 이상하게 한국에 있는 미국 여자들은 다 예쁘더라고요. 회사에선 직원들이 화장도 안 하는데 말입니다.”

엠마가 거들었다.

“내가 봐도 그래요. 한국에서 살다 보니 한국식으로 화장을 하고 다니는 걸 봤습니다. 한국 여자들이 다들 날씬하고 예뻐서 위기감이 좀 들었나 봐요.”

“한국 미인들은 다 여배우 같습니다. 아이돌만 그런 줄 알았는데 꽤 충격이었어요. 피부가 정말 좋더군요.”

촬영감독도 한마디 했다.

촬영과 조명을 총괄하는 팀장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솔직히 미국 여배우들은 화장 안 하면 전혀 예쁘지가 않다. 오히려 추해 보일 정도다. 피부가 워낙 안 좋고 잡티도 장난 아니고. 메이크업과 영상 보정의 승리인 거지.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여자들은 피부가 정말 좋다. 여배우들은 아우라가 보이고, 일반인들도 화보 촬영 메이크업을 하면 배우로 보일 정도다. 할리우드 스태프들이 놀랄 만도 하지.

“자, 오늘은 몇 씬이죠?”

내 말에 팀장들이 일제히 집중했다.

놀 땐 놀고 일할 땐 일하는 직원들이다.

조감독이 말했다.

“씬 107부터 시작입니다.”

“액셀과 안티 히어로 군단의 대장이 싸우는 장면입니다. 관객의 몰입에 방해되거나, 관람 중 딴생각이 들지 않도록 독특한 앵글이나 컷은 쓰지 않고 평범하게 갑니다.”

촬영감독이 의견을 냈다.

“마스터 앵글에 4개 컷으로 구성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떤 장점이 있을까요?”

“인물의 액션과 감정의 상호 교환이 가능해요.”

“주고받는 호흡이 있군요. 좋습니다. 몰입을 강화하는 컷 구성이니 여기에 두 인물을 바라보는 제3자 시점의 투 샷도 좋을 것 같네요.”

“아주 좋습니다. 박진감 있게 주고받는 액션에 균형감을 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가십니까?”

“예. 마스터 컷은 와이드 앵글에 노멀 테이크. 4개 컷은 스테디 캠 팔로우 앵글. 투 샷 컷도 스테디 캠 팔로우 앵글입니다. 두 배우의 액션 동선을 따라가거나 주변을 맴돌면서 찍습니다. 그다음 특수효과팀.”

“네. 말씀하세요.”

“두 능력자의 싸움은 슈퍼맨 두 명이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는 액션 디테일에 신경을 좀 써 주세요. 도심에서 싸우는 장면이니 실사가 60%고 나머지는 스튜디오 촬영입니다. CG팀이 빨리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물 동선을 먼저 짜 주셔야 해요.”

“그럼요. 벌써 세 번째 작업 아닙니까.”

스태프들이 이제는 척하면 척이다.

지금 팀장들은 어웨이커 때부터 내리 세 작품을 나와 함께 하고 있다. 블랙버드 제작진은 제작부만 직원들이고.

종일 회의가 이어졌다.

한 장면 한 장면 수를 놓듯 만들어 나갔다.

특수효과팀장과 CG 팀장에게 액션 동선이나 CG 카메라 워킹 등을 일임했다. 무술감독격인 스턴트 팀장도 따로 있고.

어웨이커 때는 내가 일일이 관여를 하고 점검도 했지만 이제는 안 한다. 때론 내가 생각지 못한 것도 만들어 내는 이들이다. 내 말의 틀에 갇히면 창의성도 갇힌다. 이들도 프로다. 나만 잘난 게 아니라.

그로부터 22일 후.

팀장들이 미국으로 귀국했다.

최종 콘티가 나오면 프리 프로덕션도 절정 단계다.

약 석 달 남았다. 프리가 끝나도 내가 미국에 갈 수가 없는지라 느긋하게 하라고 했다. 갓난아이를 아내에게만 맡겨 두고 영화를 찍을 수는 없으니.

* * *

서연이 임신 아홉 달째.

배가 꽤 불러온 그녀와 함께 호텔로 갔다.

무거운 몸으로 매일 산책하고 함께 장도 보러 다녀서 외출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요통이 조금 있을 뿐.

호텔에서 지성이와 지현이 결혼식이 열렸다.

로큐의 모든 직원과 소속 연예인들이 참석했다.

내가 신랑 형인데도 결혼식엔 별 도움을 못 줬다. 아내를 돌봐야 해서. 대신 수호와 건하, 수혁이가 내 역할을 해 줬다.

지성이 결혼식은 우리와 달리 일반적이었다.

연예인이 많아서 재밌기도 하고, 축가도 많이 나오고.

아내가 만삭인지라 결혼식에 영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애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배가 부른 터라.

어쨌든 동생 지성이와 지현이의 결혼식이 끝났다.

내가 신경을 좀 못 썼을 뿐 성대하고 화려하게 잘 치러 냈다. 동생 내외도 우리 부부 사정을 아는지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였다. 둘 다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고.

그렇게 우린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걱정과 기쁨이 온통 뒤섞인 나날이었다.

* * *

“아아!”

잠결에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서연이 내 팔을 부여잡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내를 일으켜 앉힌 뒤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아 주었다.

“후! 후! 후!”

“진통이 커?”

“응. 갑자기 그러네.”

“진통이 몇 분 간격이야? 태동은?”

“주기가 빨라졌어. 태동도 약하고.”

“안 되겠다, 입원하자.”

“또 헛걸음하면?”

“그래도!”

침대에서 뛰어 내려갔다.

몇 주 전부터 입원용품과 출산용품을 다 챙겨 놨다.

급히 전화를 걸었다.

“장모님! 저희 입원합니다!”

-어서 가게, 어서! 어른께 말씀드렸고?

“장모님이 연락 좀 해 주세요!”

-알았네!

전화를 끊고 침대에 앉은 서연에게 코트를 입혀 주었다.

30주 넘어가면서부터는 옆으로 누워 자던 아내다. 그 자세도 힘들어서 자다가 수도 없이 일어나 앉곤 했었다. 손발도 저리고 부어서 내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주물러 주었었다.

서연이 침대에 앉은 채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바로 그녀를 부축하여 일어났다.

“수호야!”

“내려갑니다, 형님!”

2층에서 지내던 수호가 급히 뛰어 내려왔다.

녀석이 바로 차고로 달렸다.

집에서 나가자 수호가 차를 대기 시켜 놓았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서연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후! 후! 오빠!”

“왜, 왜, 왜?”

“양수가…….”

“이런! 수호야, 빨리! 아니 조심해서 빨리!”

“알겠습니다!”

이미 양수가 터졌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서연이 이를 악문 채 내 손을 움켜잡았다.

얼마나 진통이 클지 나는 상상도 못한다.

몇 주 전부터 잔뜩 부은 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도 비명 한번 안 지르는 그녀다. 정말 엄마의 힘이란!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뛰어나왔다.

“양수 터졌습니다! 갑자기 그래요!”

“출산이 임박한 겁니다!”

의료진이 서연이를 빠르게 옮겼다.

병실이 아닌 분만실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따라들어갔다.

서연이 분만실로 들어가자 간호사가 막았다.

“세균 감염 우려가 있으니 남편분은 밖에서 기다리시는 게 좋아요!”

“알겠습니다!”

닫히려는 문을 잡았다.

“서연아!”

진통 와중에도 서연이 날 보았다.

“파이팅!”

서연이 그 와중에도 웃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분만실 밖에서 기다렸다.

갑자기 출산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서연이 묵묵하게 견뎌서 예측을 못 한 걸까.

정말 초조했다.

애가 타는 심정이 뭔지 제대로 알았다.

산통이 10시간 이상 넘어갈까 걱정되기도 하고.

제발 무슨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장인 장모와 부모님이 달려오셨다.

부모님이 한발 물러나 주셔서 장모님이 먼저 말을 하셨다.

“바로 분만실에 들어간 건가?”

“예.”

장인께서 말했다.

“너무 초조해하지 말게.”

“그게 잘 안 되네요.”

아버지가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어머니는 안아주시고.

* * *

3시간 22분이 지났다.

너무나도 길고 긴 시간이었다.

양가 부모님은 밝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만 앉아 있질 못하고 복도를 왔다갔다했다.

드라마를 볼 때는 왜 그러나 했더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가…

그때였다.

분만실에서 방송 음성이 나왔다.

-안서연 씨 배우자께서는 소독하신 후 분만실로 와 주세요.

이미 옷도 갈아입고 소독도 두 번이나 했다.

다시 한 번 더 전신을 소독하고 분만실로 들어갔다.

서연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입에 수건을 문 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고.

“나, 왔어.”

서연은 말도 못하고 날 보았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날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머리 나옵니다!”

응애-

우렁찬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 울음을 듣자마자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간호사가 뭐라 말했다.

“…24일 오전 9시 32분 출생! 축하드려요! 공주님이세요!”

“축하드려요!”

말 그대로 핏덩이 아이였다. 의료진이 급히 탯줄을 자르고 아이 몸을 닦는 등 조치를 했다.

우두커니 서 있는데 떨리는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서연이 기진맥진한 얼굴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급히 아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고생했어. 정말 고생했어.”

아내가 힘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떨리는 그녀의 손을 매만져주었다.

눈물이 눈앞을 가리고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토록 경이로운 일이 또 있을까.

조치를 끝낸 간호사가 아이를 우리 앞에 데려왔다.

우린 말도 못한 채 아이를 보았다.

눈도 뜨지 못하고 쭈글쭈글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나도, 서연이도 하염없이 울었다.

서연과 나의 아이였다.

소중한 우리 딸.

* * *

최리연.

우리 딸 이름이다.

아버지와 장인께서 ‘합의’하시고 지어 주신 이름이다.

우리 부부도 마음에 들었고.

리연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나와 서연, 양가 부모님이 둘러앉아 아이를 지켜보았다.

서연과 함께 산후조리원에서 2주 동안 지내고 막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쭈글쭈글했던 아이의 얼굴은 이제 예쁜 아이다워졌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나와 서연을 반반씩 닮았는데 날 닮았다는 것도 신기하고, 생명이란 존재도 경이롭고. 아이가 너무도 예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조리원에서 베이비마사지도 하고 목욕도 시키면서 아내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이제야 정말 가족이 된 느낌. 특히 서연은 살짝 우울할 정도로 삶이 심심했었는데 아이 덕분에 생기가 돌았다.

양가 부모님은 우릴 키울 때 말씀과 당부를 해 주시고 가셨다. 초보 부모이니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나도 준비를 많이 했다. 시나리오 쓸 때 취재하는 것 이상으로 육아에 대한 모든 것을 수집했다. 조리원에서 매뉴얼을 작성했을 정도로.

공들여 만들어 놓고 지성이와 동생들에게도 줄 참이었다. 앞으로 우리가 겪을 일도 일지 형태로 작성해 둘 테고.

둘 다 육아전쟁에 임할 마음의 준비는 했다.

아이가 깨어나서 울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 * *

딱히 전쟁은 없었다.

내가 직장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간밤에 잠을 못 자면 낮에 틈나는 대로 자면 되었으니.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울기는 했다.

그때마다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하나 알아 갔다. 어르고 달래고 하면서 아이가 왜 우는지를 이해해 나갔다.

배고프거나. 기저귀가 젖었거나. 잠이 오거나. 트림하고 싶거나. 덥거나 짜증이 나도 울고. 배앓이가 있어도 그렇고.

우는 소리가 미묘하게 달랐다.

서연은 아이가 우는 이유를 내가 먼저 알아차리고 대처하니 무척 신기해했다. 그 덕분에 서연도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고 바로 젖을 물리거나, 트림을 시키거나 했으니까.

우는 것은 그나마 나았다.

갑자기 토하고 설사하고 그러면 나도 서연이도 무척 당황했다. 둘이서 겨우 수습해서 재워 놓으면 정말 진땀이 났다.

육아를 함께하는데도 막상 내가 할 일이라곤 아이를 안고 달래는 것과 재우는 것, 목욕시키고 기저귀 가는 게 전부였다. 엄마가 항상 옆에 있어야 아이가 편안해하는 터라.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신기한 건 있었다.

엄마도 초보고, 아이도 세상에 갓 나왔으니 서로가 힘들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엄마와 아이의 호흡이 좋아졌다.

아이가 날 알아보고 빤히 쳐다보기라도 하면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날 아빠로 인식하는 건지 내가 안고 거실을 돌아다니면 어느 새 잠이 들기도 하고.

일하는 것보다 더 정신없는 일상이었다.

정말이지 세상 모든 부모는 영웅이다.

우리 부모님도 같은 걸 겪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났다. 옛말이 맞다. 아이를 낳아 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 * *

아이 백일이 되자 여기저기서 선물이 들어왔다.

난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방을 돌아다니고, 서연은 선물을 풀어 보았다. 붓기는 빠졌지만 몸매는 이전 때로 돌아가지는 못한 아내다.

서연이 말했다.

“오빠 이제 영화 촬영해야 하잖아?”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기는 해.”

“이젠 혼자 리연이 키울 수 있어. 100일쯤 되니까 나도 아기도 호흡이 척척 맞네.”

그동안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아내와 아이를 두고 6개월이나 떠나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것 아닌가. 아이와 나 사이의 애착에도 문제가 있을 것 같고.

“미국 가서 사는 건 어때? 장모님 모시고.”

서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느냐는 듯.

“로케이션이 멀면 집에 오가기 힘들잖아?”

“2편도 촬영지는 LA야. 1편 때처럼 애리조나로 가지도 않고. 조금 벗어나면 장모님 모시고 따라오면 돼. 나야 장모님이 해 주시는 밥 먹으면 좋지.”

“엄마랑 같이 오빠 따라다니면 나도 좋기는 해. 근데 매번 호텔에 묵는 것도 좀 그런데.”

“이동하는 호텔에서 지내면 돼.”

“그런 게 있어?”

“리연이 태어나기 전에 주문한 거야.”

스마트폰으로 사진 하나를 보여 주었다.

서연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이게 뭐야? 호텔 같은데?”

“괜찮지?”

서연은 대답도 잊은 채 사진을 보았다.

할리우드 배우용 트레일러를 개조한 캠핑카다.

1층과 2층 33평에 바퀴만 22개.

내부 인테리어는 호텔 스위트룸 그대로다.

1층에 소파 겸 침실. 회의실. 욕실. 주방. 냉장고. 바가 있고, 2층에는 넓은 침실과 테이블 및 소파. 라운지가 있다. 침실은 스위트 룸 방식으로 꾸며졌고 욕실과 옷장이 따로 있다.

차량 진동을 분산시켜 정숙성이 매우 뛰어나고, 600마력 엔진을 탑재하여 오르막길 주행도 무리가 없었다.

할리우드 슈퍼스타가 실제로 쓰는 트레일러다.

가격은 21억.

1주일 대여료가 천만 원이라서 그냥 구입하기로 했다.

영화 하루 이틀 찍을 것도 아니니.

내가 한국에 있으면 대여해도 되고.

“이 차를 사려고?”

“벌써 샀어. 불편하게 다닐 순 없잖아.”

“그래도 너무 비싼데.”

“내가 우선 편하게 쓰려고. 촬영 끝나고 바로 들어가서 샤워하고 잘 수 있으니까.”

내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름 후.

아내와 리연이, 장모님과 함께 LA로 향했다.

* * *

네오스타 주차장에 차를 댔다.

은빛 트레일러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혁민이가 공항에 마중 나왔다. 아내와 장모님을 어바인의 집에 데려다 주고 함께 회사로 온 터였다.

“끝내주죠?”

“실물이 훨씬 낫네.”

대형 트레일러에 들어가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정말 호텔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런 차를 진작에 사둘 걸 그랬다.

“기사는 뽑았어?”

“예. 회사 트레일러 기사 중에 성품 훌륭하신 50대분으로 뽑았어요. 대표님 자택 근처에 집도 하나 렌트해 드렸습니다. 대표님 집 관리인을 겸해서요.”

“잘했다.”

회사로 들어갔다.

아이 출산과 육아 때문에 촬영이 8개월이나 지체된 상태였다. 반면 우주 교전 CG 분량은 이미 완성단계였다. 촬영 중에도 계속 수정을 할 테니 완성도가 매우 높아질 터다.

내가 출근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팀장들이 속속 회의실에 몰려들었다.

한국에 있으면서 최종 점검은 이미 끝냈다.

배우 캐스팅. 로케이션 헌팅. 액션 동선 등등.

팀장들이 최종 서류를 내 앞에 쌓아 놨다.

문서에 사인만 하면 되었다.

“제이슨은 몸 만들고 있나요?”

“머슬맨이 됐죠. 근육이 너무 커서 체지방만 줄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캐스팅 먼저 확인했다.

배우 몸 상태. 출연료. 경력 등등이 일목요연했다.

액셀 역의 제이슨은 출연료가 두 배로 올랐다.

인기에 비하면 아직은 적은 편이다.

새로운 영웅이 되는 12명의 명단을 보았다.

이 중 6명은 개별 히어로 영화를 찍는다. 해서 신인이나 무명 중에 잠재력이 높은 사람을 캐스팅했다.

기존 스타를 쓰면 출연료가 높아 제작비가 급등한다. 게다가 스타가 출연 비중도 적은 특공대 중 한 명으로 나오면 관객이 반전을 예상할 수가 있다.

팀장들이 꼼꼼하게 오디션을 봤고, 나도 영상을 통해 연기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했다. 코어도 높은 점수를 준 배우들이고.

이어 촬영 일정과 로케이션 허가 문제. 최종 제작 예산. 로케이션 촬영팀과 스튜디오 촬영팀 구성. 특수효과 준비 상황. 액션 리허설 상황. 투자와 배급 상황 등을 확인했다.

네오스타에서 70% 투자하고 할리우드 인맥의 마르지 않는 샘이기도 한 투자사 블루스톤에서 20%. 나머지는 로큐와 펀딩으로 제작비를 모두 맞추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네오스타가 직접 배급하기로 했다.

아직 해외 직배사가 없어서 해외 수익에 약간의 손해가 있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시작해서 하나씩 이뤄 나가는 거지.

“10일 후에 촬영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종 마무리를 해 주세요. 그동안 시간이 많았으니 프리에 오류가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에디는 배우들 좀 소집해 줘. 리허설도 보고 몸 상태도 봐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팀장들이 환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난 남은 문서에 사인을 해 나갔다.

* * *

촬영 하루 전 저녁.

어바인의 집에서 장모님이 해 주신 밥을 먹었다.

이젠 리연이가 날 보면 방긋방긋 웃는다.

잘 울지도 않아서 엄마 속을 덜 태우는 아이다.

장모님이 말했다.

“당분간 멀리 가지는 않는 건가?”

“네. LA와 롱비치 등에서 촬영하고, 한 달 정도는 샌디에이고에서 찍을 겁니다. 그때 구경 오셔도 되고, 집에 계셔도 돼요. 2시간 거리라 제가 집에 오면 되니까요.”

“그렇게 하게.”

밥을 먹은 뒤 아이를 안았다.

아빠들이 아이를 안고 ‘아르르 깍꿍?’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어르면 아이가 정말 해맑게 웃기 때문에.

촬영 중에도 될 수 있으면 매일 집에 들를 생각이었다. 정 못 보게 되면 아내를 현장에 부르면 되고. 호텔 같은 트레일러에서 머물면 기분 전환도 될 것 같다.

드디어 내일부터 촬영이다.

몰입도가 상당히 큰 도입부를 찍는다.

미국행을 중단하고 사흘 후.

블루드 워 2편 영문 시나리오를 네오스타에 보냈다.

그다음 날 바로 스태프들 반응이 왔다.

수혁의 반응과 흡사했다.

어메이징을 찾고 지저스를 찾고 야단법석이었다.

1편을 훌쩍 능가하는 스크립트라는 팀장이 있는가 하면, 조감독은 어벤져스 시리즈도 넘었다며 ‘아부’를 떨어 댔다. 제작부장 엠마마저도 하트 이모티콘을 다 보내고.

이제나저제나 시리즈 2편 제작을 기다리던 네오스타 직원들에게 큰 선물을 준 것 같은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빨리 제작해서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스태프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내가 만든 영화 중 가장 잘 나온 시나리오라고 했다. 이번 촬영 때는 할리우드 영화 최초로 VR 와이드 카메라까지 쓴다. 스태프들이 시나리오만 봐선 알 수 없는 한 가지가 더 들어가는 셈이다.

아니, 스태프들도 예상은 하겠지.

다들 갓 필드를 봤으니까.

* * *

대영웅 액셀이 외계인들의 거대 모선을 추락시키고, 인류를 구해 내는 듯했다. 그러나 그 무렵 외계인들도 정치인과 군인 등을 납치하여 하수인으로 부리기 시작했다.

외계인이 인류를 지배한 지 어언 3년.

외계인 부역자들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졌고, 저항군의 투쟁도 날로 강해졌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류가 지구를 탈출했다.

지구에 남은 인류의 절반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으며, 나머지 절반 대부분은 개조 전사가 되었다.

인류의 1%도 되지 않는 저항군은 외계인들에게 눈엣가시였다. 자신들의 기술을 빼내 가는 것은 물론, 새로운 기술로 개조해서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몸에 달라붙는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들이 어둠 속에 잠복하고 있었다. 온몸이 검은빛이고 손에 든 복합소총마저도 새카만 색이었다. 저항군 특공대 A팀이다.

그들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7층 건물 근처에 있었다. 그 건물은 인간을 전사로 개조하는 시설이었다. 외계인들은 젊은이들을 집단으로 끌고 와서 뇌에 마이크로 칩을 이식하고 통제를 시작한다. 그리고 능력을 발생시키는 ‘아크람’을 불어넣어 전사로 개조한다.

팀장이 무전을 보냈다.

“개조시설에 도착했음.”

-작전 개시하도록.

“아직 세뇌당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을 겁니다.”

-그 시설에 들어갈 때 이미 죽은 친구들일세. 뇌에 박힌 칩을 빼면 살지 못하는 거 알지 않나.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잡혀간 친구들은 우리들의 형제였거나, 이웃이었습니다.”

-노예로 사는 수많은 시민도 우리의 가족이고 친구일세. 개조 전사들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말게나.

“임무 전개합니다.”

-무사히 귀환하게.

팀장이 시설 쪽을 보며 말했다.

“9분 안에 완수하고 귀환한다. 클로킹.”

“클로킹.”

특공대 전원이 투명해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탁탁탁탁-

빠르게 달리는 소리만 들려오더니 슉슉슉- 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형체들이 담장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등 쪽에서 중력파가 뿜어지면서 5미터 담장을 단숨에 넘는다.

“반드시 살아서 귀환하도록.”

투명한 윤곽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팀장은 중력파를 힘차게 내뿜으며 단숨에 건물 3층으로 뛰어올랐다. 벽에 붙은 채 창문을 열고 들어간다.

복도를 내달리는 팀장.

퓩- 퓨퓩-

복도를 걸어오던 개조 전사가 소음기를 부착한 권총에 맞고 쓰러져 나간다.

순간 들려오는 경보음.

삐삐삐삐삐-

개조 전사를 통제하는 외계인이 침입자를 포착했다. 순식간에 개조 전사들이 복도로 몰려나온다. 자아가 사라진 전사들의 움직임은 로봇이나 다름없었다.

투명한 상태로 벽에 붙어 있던 팀장이 다시 달렸다. 공간의 일렁임을 일으키는 투명한 실루엣이 보이지만 자아를 잃은 전사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빠르게 내달리며 점점 깊숙이 들어가는 팀장.

그가 보안잠금장치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수천에 이르는 개조 전사가 캡슐에 갇힌 채 아크람 에너지를 주입받는 장소였다.

팀장은 다시 달렸다.

타타타탕-

멀리서 총성이 들려왔다. 흔적도 없이 침입했다가 탈출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팀장의 귀에 다급한 무전이 들려왔다.

-아크람 송출 장치에 폭탄 설치했습니다!

-못 보던 전사들이 있습니다! 너무도 강합니다! 이놈들은 총탄이… 커헉!

“제랄드!”

-놈들이 너무 강합니다!

-팀장님! 으아악!

“앤디, 마이크!”

쿠콰콰쾅-

건물 아래쪽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건물이 흔들렸다.

“망할!”

팀장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쉴 새 없이 달려 옥상에 도착한 팀장.

그가 상자를 열어 뭔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내 상공으로 레이저 빔이 솟구쳐 올랐다.

그때였다.

상공을 오가던 외계인 전투기들이 레이저를 발견하고 급히 날아오기 시작했다.

팀장이 다급히 무전을 보냈다.

“좌표 송신한다! 056-12-98! 새로운 전사가 나타났다! 다시 알린다! 지금까지 없던 전사가 나타났다!”

-좌표 확인. 2분 안에 타격합니다.

팀장이 빠르게 달렸다. 그때 전투기 하나가 강력한 빔을 쏘았다. 거의 동시에 옥상에서 몸을 날리는 팀장.

쿠콰쾅-

옥상에 폭발이 일어났다.

몸이 뒤집히며 추락하는 팀장. 등에 장착한 추진 장치를 벽 쪽으로 쏘며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붙었다.

쿵-

팀장은 중력파를 발출하는 상태로 벽에 붙은 채 추락했다. 아래에는 개조 전사들로 바글바글한 상태. 살아남은 특공대원들이 포위된 채 총을 쏘다가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다.

착지한 팀장이 그대로 질주했다.

몰려 있던 새로운 개조 전사들이 저마다 도약하며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팀장 뒤를 따라잡는다.

“위장 해제! 이 망할 것들!”

타타타탕-

모습을 드러내며 소총을 난사하는 팀장.

개조 전사들은 총에 맞아도 그냥 주춤거릴 뿐. 이들은 액셀을 잡기 위해 육성된 실험체들이었다.

팀장이 어찌할 사이도 없이 포위되었다.

바로 그때! 상공의 어둠을 찢어발기는 미사일 2기가 있었다. 슈우유우욱- 하는 굉음을 내더니 그대로 옥상을 때렸다.

콰콰콰콰쾅-

엄청난 폭발!

팀장이 속수무책으로 휘돌아 날아갔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팀장. 사람의 비가 내리듯 개조 전사들이 무수히 추락하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건물 파편과 먼지 폭풍에 휩싸였다.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LA 인근 잠수함에서 발사한 미사일이었다.

팀장은 이를 악문 채 어둠 속으로 달렸다.

동료의 희생이 오늘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늘까지 찍은 내용이다.

“컷! 오케이!”

“오늘 촬영 마무리합니다!”

어둠 속으로 뛰어갔던 팀장이 웃으며 돌아왔다.

훗날 새로운 영웅 블랙버드가 될 에릭 린치다.

전신 녹색 쫄쫄이를 착용한 모습. 총도 녹색이고.

투명 슈트는 CG로 들어간다

에릭이 말했다.

“초반부터 강해서 제가 주인공인 줄 알겠어요.”

“액셀이 나오면 달라질걸요?”

“그렇겠죠?”

에릭이 웃으며 자신의 트레일러로 갔다.

8회 차로 도입부 촬영을 끝냈다.

도입부로 관객들 시선과 집중을 모았다.

진짜 액션은 액셀이 나오면서부터.

* * *

너무도 오래 기다려서 그랬나.

촬영 현장에 활기가 돌았다.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을 정도로 다들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긴 프리 시간 동안 촬영 일정 숙지가 잘되어 있는 덕분이기도 했다.

이번 보조출연자들 연기가 너무도 좋았다.

이유가 있었다.

회사 전속 보조출연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보조출연자들은 촬영 당일 현장에 와서 영화 촬영을 하는데, 대부분이 내용도 모르고 찍는다. 업체 매니저나 연출부의 지시대로 움직일 뿐이다.

내용을 알고 출연하는 것과 모르고 출연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동선와 리액션 자체가 달라지는 까닭에. 사실 어웨이커 때부터 우린 출연자들에게 내용을 알려 줘서 보조출연자들의 연기가 괜찮은 편이었다.

에디는 그 점에서 착안하여 회사 전속을 건의했고,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서 결정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결정이었다. 촬영 전날 회사에 접수된 출연자들에게 촬영 내용과 동선을 메일로 보내 주고 준비를 하도록 했다.

현재 캘리포니아는 최저임금이 너무 높아서 히스패닉계와 저소득층이 일자리를 잃어서 생계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런 분들이 보조출연을 많이 했는데, 그들에게 꾸준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셈이었다. 영화에 얼굴이 노출된 출연자는 얼굴 돌려막기로 배치하면 되는 거였고.

노예 시민 역할을 하다가, 저항군 역할도 하고. 특공대 역할이나, 개조 전사 역할도 하면 되고. 그런 식으로 한 출연자가 6개월 내내 출연할 수가 있었다.

어쨌든 회사에서 그렇게 하자 무직 상태였던 보조출연자들의 호응이 대단히 컸고, 그 효과는 연기로 이어졌다. 보조 출연 연기는 별것이 없다. 리액션만 적절하게 하면 되니까.

오늘 촬영 장면은 강제 노동 씬.

외계인들은 지구를 자신들이 살기 편한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건물을 파괴하고 해체했다. 그런 뒤 그들이 가져온 양치류 식물을 심으려 한다. 지구를 원시 상태로 만든다고 할까.

하여 수많은 시민이 콘크리트 잔해를 실어 나르는 등 극심한 노동을 했다. 외계인은 지배를 위해 정치 활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인간은 그저 노예일 뿐이었다. 노동을 하다가 죽어나가든 말든.

보조출연자들 전원 의상팀에서 제작한 옷을 입었다. 체격이 마른 사람을 주로 배치했는데 모두 옷이 헐렁했다. CG로 몸을 홀쭉하게 만들려고 준비한 의상이다.

실제로 매우 마른 사람들을 섭외해서 몸과 얼굴에 센서를 수없이 붙인 뒤 CG용 매크로 촬영을 해 두었다. 각 인물에 매크로를 적용하여 사람을 비쩍 마르게 한다.

대기 중인 출연자들을 향해 메가폰을 들었다.

“여러분은 지금 3년째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힘도 없어요! 전문 연기자가 벽돌을 옮기다가 쓰러지기도 할 겁니다! 그런 꼴을 하도 많이 봐서 놀랍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죠?”

“예! 내용 확인하고 왔습니다!”

“좋습니다! 여러분은 CG 처리가 되어 매우 마른 모습이 될 겁니다! 그나마 일을 할 수 있는 건강 상태인 것만 알고 계세요! 상황에 따라 리액션을 해도 좋고, 그냥 묵묵히 일만 해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에디가 외쳤다.

“리허설 갑니다!”

두 차례 리허설이 이어졌다.

도입부 이후 지금 지구가 어떤 상황인지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다. 이 도시가 LA였다는 것은 초고층 빌딩인 뱅크 타워가 저편에 있는 것으로 알 뿐.

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고, 거대한 우주 모선 하나가 그 유명한 할리우드 산에 처박혀 있다. 노예 시민이 나오는 장면에선 건물을 폭파하는 폭음과 먼지 구름이 계속 나오고.

나중에 도시 곳곳에서 건물과 아스팔트를 해체하는 노예 시민을 공중에서 보여 준다. 실제로는 오늘처럼 강제 노동하는 출연자들을 CG로 붙여 넣을 테지만.

“슛 갑니다! 모두 대기!”

보조출연자들과 배우들이 늘어섰다.

개조 전사가 총을 들고 지켜보는 가운데. 낡고 먼지가 가득한 옷을 입은 시민이 건물 잔해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이동한다. 한쪽에 커다란 덤프트럭이 있고.

“카메라 스탠바이!”

“사운드 스탠바이!”

“씬 22! 테이크 원!”

딱-

“액션!”

노예 시민이 묵묵히 돌 바구니를 들고 이동한다. 덤프트럭에 대 놓은 판자를 밟고 올라가 잔해를 트럭에 쏟아 붓는다. 포크 레인은 건물을 부수고 있고.

한동안 그렇게 오가다 한 명이 쓰러진다.

검은 투구를 쓴 개조 병사가 걸어와 쓰러진 자의 상태를 본다. 무슨 지시를 듣는 듯하더니 권총을 꺼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쓰러진 시민의 머리를 쏴 버린다.

탕-

놀라는 시민도 있으나 대부분 힘없이 잔해를 옮긴다. 감독이 일일이 지시하고 리허설을 수도 없이 해야 나오는 연기다.

다시 묵묵히 노동하는 사람들.

그때 고급 승용차 하나가 공사장으로 들어온다.

차에서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남자가 내렸다. 주변 먼지를 보고 진저리를 치더니 입을 손수건으로 막는다.

“공사 진행이 왜 이리 더디나! 3일 안에 저 지긋지긋한 건물을 치워 버리지 않는다면 너희 모두 돼지 사료로 쓸 거야! 이 돼지만도 못한 것들 같으니라고!”

남자가 쿨럭거리며 공사 관리인에게 갔다.

관리인이 남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둘 다 부역자다.

외계인은 선과 악이 없었다. 생존을 위해 지구를 침공했을 뿐. 반면 그들에게 부역하는 인간은 실로 악랄했다.

“자네 말이야. 여동생 남편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다는 거 알기나 하나?”

“압니다! 총독 각하!”

총독이라 불린 자가 관리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러곤 빙빙 돌렸다.

“알면 잘하란 말이야. 멍청한 네놈 때문에 내가 LA에서 벗어나질 못해. 이 미국에 총독만 36명이다. 내 전공 순위가 몇인 줄 알아?”

“자,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니까, 이따위로 일하는 거 아니야. 3일 안에 끝내. 관리자가 되고 싶어 줄을 선 인간이 수십만 명이다. 알겠나?”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총독!”

“두고 보겠어. 쿨럭.”

총독이 기침을 하며 자신의 차로 갔다.

차에 묻은 먼지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그가 버럭 소릴 지른다.

“이놈의 먼지 좀 어떻게 안 되나!”

총독에 차에 올랐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시민들.

차가 출발하려던 그때였다.

위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슈우우욱-

쾅-

매우 무거운 무언가가 승용차 보닛에 떨어지더니 차 뒤쪽이 높이 들려 올라갔다. 보닛은 움푹 파여 버렸고.

액셀이었다.

그가 보닛에서 내려와 총독이 앉은 쪽으로 갔다.

하얗게 질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총독.

액셀이 문짝을 뜯어 버리더니.

총독의 멱살을 잡고 끄집어냈다.

“으아악! 왜 하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액셀이 건물 저편으로 총독을 내던져버렸다. 총독이 으아아아- 소리를 내며 하늘 저편으로 발버둥치며 날아갈 터다.

지금은 와이어 액션.

“컷! 오케이! 제이슨, 다리 괜찮나?”

“괜찮습니다!”

“액셀이 자동차에 떨어지는 씬 따로 땁니다!”

“출연자들은 쉬세요!”

“연기 이대로만 해 주시면 돼요!”

스태프들이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 주었다.

출연자들 연기가 정말 생생했다. 카메라는 출연자들 속에 섞인 연기자를 중심으로 찍었는데, 배경으로 걸리는 보조출연자들의 연기도 무척 좋았다.

총독을 바라볼 때의 공포. 좌절감.

액셀이 나타났을 때의 말 없는 환호.

영웅을 보고 기뻐할 기력도 없는 연기다.

다음 장면은 특공대가 나타나 시민을 구출하여 지하수로를 통해 저항군 본부로 이동한다. 저항군 본부는 LA 지하에 있는 거대한 빗물 저장고다. 저항군 최후 격전지이기도 하고.

* * *

촬영 52회 차.

에너하임에서 촬영 중이었다.

“액션!”

액셀과 특공대원들이 빌딩 옥상에 숨어 있었다.

액셀에게 무전이 왔다.

치익-

-대장님! 앞에서 세 번째 트럭에 우주선 부품을 싣는 걸 확인했습니다. 개조 전사가 네 트럭에 60명가량 탑승했는데, 어떤 놈이 신종 전사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수고했어요. 놈들 전투기들이 융단폭격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바로 수로로 진입해요.”

-알겠습니다.

망원경으로 보던 대원 하나가 말했다.

“옵니다! 트럭 다섯 대입니다.”

“전 대원 작전 준비.”

대원들이 난간에 박아 둔 고리에 로프를 걸었다.

액셀이 맞은편 건물에 있는 대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가 말했다.

“펄스팀. 작전 시작과 동시에 외계인 놈들 통신 전파를 차단하도록. 탈취에 실패하면 미련 없이 퇴각한다.”

-알겠습니다.

액셀이 아래를 보다가 주저 없이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어 특공대원들도 로프를 손에 쥐고 몸을 날렸다.

“컷! 좋았어!”

제이슨이 와이어에 매달린 채 올라왔다.

날 보더니 엄지를 보여 준다.

이어지는 장면은 트럭 앞에 쿵- 하고 떨어지는 액셀이다. 달려오는 트럭을 그대로 주먹을 내질러 멈춰 버린다. 트럭은 전봇대에 충돌한 것처럼 앞부분이 움푹 들어가 버린다. 액셀도 주먹을 내지른 채 밀려나고.

단단히 고정한 쇠기둥에 실제로 트럭이 달려와 충돌하는 식으로 찍었다. 여기에 액셀이 주먹질하는 장면은 스튜디오 그린스크린 앞에서 촬영한 뒤 합성한다.

곧이어 벌어지는 싸움.

액셀이 트럭에서 뛰어내리는 개조 전사들을 마구 쳐내며 돌진하여 세 번째 트럭을 어깨로 들이받아 옆으로 쓰러뜨린다. 이때 처음 안티 히어로 군단의 전사 두 명이 나타난다.

2대1의 슈퍼맨급 전투 리허설을 4번 거쳤다.

각 쇼트를 전부 따로 따는 장면이다.

꽤 난이도가 높다.

“리허설 끝났습니다!”

“와이어 팀! 스탠바이!”

“액션!”

두 전사가 액셀에게 달려들었다.

액셀이 두 전사의 얼굴을 차례로 쳐낸다.

주먹을 맞은 한 명이 휘돌아 날아가 벽에 충돌한다. 나머지 하나도 오른쪽으로 날아가 버리고.

“컷! 뒤로 날아갈 때 허우적대지 말고!”

“호흡이 조금 안 맞았습니다!”

“다시 갑니다!”

영화에선 액셀의 주먹을 맞은 전사가 순식간에 날아가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 버린다. 촬영 때는 녹색 매트리스를 세워 놓은 벽에 날아가 가볍게 충돌할 뿐이고.

이 전투씬만 사흘에 걸쳐 찍었다.

액셀이 끝내 물리친 안티 군단의 전사가 얼마나 강한지 깔아 두고, 두 명은 고작 하급 전사였음을 밝혀 준다. 군단장은 액셀이 가진 힘의 10배 이상이라는 말도 슬쩍 흘리고.

이후 외계인들이 화성에 함대를 보내 핵폭탄을 터뜨린다는 것과 인류 말살 작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정보를 저항군이 입수한다.

영화 중간 지점이었다.

* * *

촬영 77회 차.

라스트데이 직전 장면을 찍고 있었다.

비쩍 마른 청년 두 명이 거리에 앉아 있다.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 세계로 퍼졌다. 외계인들이 언제 작전을 벌일지 알 수 없어 두 청년의 눈에 긴장이 깃들었다.

액셀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신자가 된 저항군 장군에게 속아 사로잡히고, 개조 전사들의 움직임은 분주해졌다. 액셀이 부재한 상황에서 인류 말살 작전은 시작되려 하고.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이다.

청년 하나가 말한다.

“이대로 끝나는 걸까?”

“지구인은 전멸해도 인류는 망하지 않아. 화성에서 다시 시작할 거야.”

“우리도 결국 죽겠지?”

“어딘가에서 우주선을 고치고 있어. 그동안 부품을 모으느라 얼마나 많은 대원이 죽었는데. 그 우주선만 고치면 함께 탈출할 수 있을 거야.”

“우주 밖에 놈들의 모선이 많대. 놈들 공격을 뚫고 화성까지 갈 수 있을까?”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지. 어?”

도시가 점점 그림자에 덮이고 있었다.

청년이 하늘을 보자 거대한 모선이 해를 가리고 있었다.

그때 도심 전역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

청년들이 두리번거리다 깜짝 놀란다.

텅 빈 넓은 도로에 엄청난 수의 개조 전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해일이 밀려오는 듯한!

“놈들이 우리 본부를 알아냈어! 빨리 본부에 알려!”

“케빈! 반드시 살아남…”

말을 하던 청년이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친구의 죽음을 본 다른 청년은 눈물을 머금고 골목으로 달렸다. 맨홀 뚜껑을 열더니 그대로 뛰어내렸다.

“컷! 오케이!”

맨홀 아래는 지상에서 지하 본부까지 길고 긴 파이프라인으로 이어져 있다. 긴급 상황 시 빠르게 지하로 미끄럼을 타고 내려간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긴박하고 속도감 있는 영상을 위해 설정했다.

이어 실제 수로에서 촬영했다.

본부로 이어지는 수로 입구에서 경비를 서던 저항군이 무슨 소리가 나서 어둠 저편을 플래시로 비춰 본다. 순간 어둠 속에서 총탄이 빗발친다. 이어 무수히 많은 개조전사가 수로로 달려오는 장면.

두 시간 후.

스튜디오 촬영이 시작되었다.

스튜디오 칸막이를 모두 없애고 사방 벽에 그린스크린을 설치했다. 매우 큰 지하 시설을 표현하고, 수만 명의 개조 전사들이 난입하는 장면을 찍는다.

“수로 씬에서 이어지는 저항군 본부 장면입니다. 수로 저편에서 개조 전사들이 수도 없이 몰려와요!”

“알겠습니다!”

콜이 오갔다.

“액션!”

타타탕- 타타타탕-

“놈들이 모든 수로에 진입했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후퇴해!”

“으악!”

총을 쏘던 대원들이 하나둘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그들이 전멸하자 대기하던 개조 전사들이 와이어에 매달린 채 휙휙 지나가고.

이어지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매우 넓고 높은 공간 가운데에 대원 1,000여 명가량이 모여 있고, 동서남북 방향의 커다란 수로에서 수만에 이르는 개조 전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선두에 설치된 개틀링 미니건 10대가 난입하는 개조 전사들을 미친 듯이 쏜다. 나자빠지는 개조 전사들이 금세 언덕을 이룰 정도로 쌓인다. 결국 머신 건의 총탄이 바닥나고.

개조 전사들은 시신의 언덕을 뛰어넘어 좀비처럼 저항군을 향해 달려든다. 인해전술을 넘은 해일전술이었다. 너무나도 압도적이라 관객이 숨을 못 쉴 장면이 될 터다.

스튜디오 위에서 부감 앵글로 대원들을 하나하나 따로 땄다. 몰려드는 개조 전사들도 집단별로 각기 다른 연출로 따고. 스튜디오 촬영팀이 비슷한 장면을 수없이 찍어놨다. 이 모든 걸 합성해서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한다.

이 와중에 배우들 연기도 찍었다.

저항군 부사령관이 고함을 질렀다.

“2중대! 너희만이라도 살아야 한다! 전 세계 저항군에게 디데이가 시작되었다는 걸 알려! 안드레아! 2중대가 탈출하면 천장에 설치한 폭탄을 터뜨려라! 놈들과 같이 가는 거야!”

“알겠습니다!”

“나머지 대원은 2중대가 무사히 탈출할 때까지 버틴다! 단 한 놈도 사다리를 못 오르게 해!”

“예!”

전 대원이 이를 악문 채 총기를 난사한다.

스튜디오 가득히 총성이 울려 퍼졌다.

1,000여 명에 이르던 저항군이 빠르게 줄어들며 주변은 죽은 개조 전사들로 산을 이룬다. 대원들은 원진을 이룬 채 달려드는 전사들을 쏘며 점점 3시 방향으로 이동한다.

3시 방향 벽에 천장까지 이어진 철제 사다리가 있다.

사다리 아래에 도착한 대원은 고작 300여 명. 미친 듯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진다. 심지어 화염병까지.

2중대는 청소년과 여자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그들이 허겁지겁 사다리를 올랐다. 도약력이 강한 전사는 총에 맞아 가며 뛰어올라 사다리에 매달린다. 그러나 이내 총탄에 벌집이 되어 추락하고.

저항군의 원진은 점점 좁아진다.

100명. 50명. 30명.

다시 연기 장면.

“2중대 모두 나갔습니다!”

“폭탄!”

쿠콰콰쾅-

거대한 지하 천장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돌무더기가 무수히 낙하한다. 이내 천장이 쩍 갈라지고 흙이 쏟아진다. 균열이 점점 더 커지며 붕괴 직전에 이른다.

부사령관이 외쳤다.

“전 대원! 잘 싸웠다! 희망을 위해!”

“희망을 위해!”

고함을 지르는 그들을 개조 전사들이 덮친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었다.

“후… 컷! 정말 좋아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일부 스태프들은 눈가가 뜨거워져 있었다.

영 몰입이 안 되는 스튜디오 촬영임에도 어떤 내용인지 알기에 감명을 받았던 거였다.

저항군이 전멸할 때의 비장함과 동지애. 아이들과 여자들을 탈출시켰다는 기쁨이 배우들의 얼굴에 서렸다.

이 저항군의 인간다움과 가족사랑은 영화 중반 이전에 관객에게 전달했다. 그런 이들이 전멸을 맞이하는 상황이었다. 관객들도 이 지점에서 눈물을 글썽거릴 것 같다.

스태프들과 인사를 하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남은 촬영 일정은 강행군이었다.

해서 일주일간 휴가를 주었다. 나도 좀 쉴 겸.

라스트데이가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는 미칠 듯이 후반으로 달린다.

영화 내내 각 인물이 쌓아 놓은 사연과 감정들.

카타르시스가 솟구칠 액셀의 액션과 맞물리며 묵직한 뭔가를 터뜨릴 터다. 그 절정은 핵미사일에 맞서는 화성 저항군의 전투기 조종사들일 테고. 영화 내내 쌓인 감정과 모든 인물의 사연이 한순간에 응집되며 폭발한다.

어벤져스가 눈물을 훔치게 하던가.

라스트데이에는 그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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