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나와 서연에게 생긴 일
감동했다.
관객들이야 영화를 재밌게 봐서 기립박수를 보내는 것이겠지만, 세계 영화인들의 진심 어린 박수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화를 어떻게 찍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일반 관객은 잘 모르겠지만 영화 내용과 배경, 쇼트들만 봐도 얼마나 고생하면서 찍었는지 영화인은 안다. 내용을 떠나 그 고생과 열정에 대한 경외를 보여주고 있는 거였다.
기립박수가 자연스레 끝날 기미가 안 보이자 내가 다시 인사를 하면서 천천히 퇴장했다. 우리가 퇴장해야 관객도 극장을 나설 듯해서.
극장 밖으로 나가자 영화제 스태프가 기자 간담회 장소로 우릴 안내했다. 개막작은 영화제 홍보 역할도 하는지라 간담회 장소에 기자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방송사와 유력지 기자만 초청한 자리인데도 300명이 넘어 보였다.
베를린 영화제는 3대 국제 영화제 중에 정치 성향이 좀 있고, 분위기도 비교적 딱딱하다고 한다. 베니스는 예술 성향이 강하고 인프라 부족 때문인지 행사가 좀 단순했다. 깐느는 대체로 상업 성향이며 축제 분위기가 많이 난다고 한다.
예술로서 영화를 평가하는 건 공통점이고.
편견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베를린 영화제는 차분하고 권위적인 느낌이 좀 났다. 썰렁함마저 느껴졌던 베니스보다야 화려하긴 했지만.
나와 서연, 배우들이 자리에 앉았다.
서연은 배우들 통역해주려고 앉은 거였고.
취재진이 질문할 사람을 미리 골라둔 모양이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제레미 테인스 기자입니다. 영화 잘 봤습니다. 세 가지 질문을 하려고 해요. 아마 여기 모인 취재진들은 다들 궁금한 점일 겁니다.”
“네. 말씀하세요.”
“첫째. 영화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전개였는데, 완급조절에 실패한 건가요? 의도한 것인가요?”
“의도한 겁니다.”
“둘째 질문입니다. 혹시 그 의도가 후반에 있었던 기묘한 쾌감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다른 분은 모르겠고, 저는 극한의 긴장에서 갑자기 흥분이 되어서 상당히 놀랐습니다. 이 현상을 의도했다는 말씀이시죠?”
그 말에 웃었다.
기자들의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내 표정을 담으려는 듯.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한국영화 ‘플랜’과 유사한 현상입니다. 플랜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면서 감정에 일정 수준 이상 몰입한다면 특별한 효력이 발생한다는 점을 발견했죠.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긴장으로 인해 몸이 지나치게 경직되고 움츠러들 경우에 특정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는 점이었죠.”
“아!”
내 말에 취재진이 일제히 감탄했다.
한 기자가 물었다.
“혹시 엔돌핀 혹은 도파민인가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뇌가 몸 혹은 정신이 위기상황을 맞이한 것으로 착각하여 자연 진통 효과가 일어난 것이죠.”
“영화로 마약 효과를 냈다고 봐도 되는 겁니까?”
거칠지만 솔직한 기자의 질문이었다.
다들 그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고.
나는 달리 생각했다.
“엔돌핀은 자신의 몸과 정신을 스스로 치유하는 천연 치료제입니다. 잠들어 있을 때 주로 분비되며 피로를 회복하고 병균을 물리치며 암세포도 이기게 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더욱 많이 나오고 사랑을 받아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엔돌핀은 몸이 아프거나 힘들 때. 고통을 받고 긴장을 할 경우에는 더욱 많이 분비된다고 하죠.”
“쇼크 상태가 될 경우는 생각 안 하셨습니까?”
그 말에 다시 웃었다.
“물론 우려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신 버전은 긴장감을 약간 내린 영화입니다. 원본은 더 강했죠. 영화를 통해 심신의 치유 효과와 행복감을 맛보시라는 것이 저의 의도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긴장감을 기대하고, 그것이 영화를 다 봤을 때의 만족감으로 이어집니다. 거기에 약간의 쾌감을 더했을 뿐이죠.”
한 기자가 물었다.
“더 강한 버전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극단적인 긴장감보다 더 강하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심신이 미약할 경우 혼절할 수 있습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본인들이 겪었으니 그럴 만하다는 듯.
한 남자 기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원본을 보면 쾌감이 더 커집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하하하.”
취재진이 질문한 기자를 보며 웃었다.
쾌감이 더 커지면 어쩔 건데? 하는 표정.
처음 질문한 기자가 질문을 이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1인칭 시점에서 매우 특이한 현실감이 느껴지던데, 그 촬영 기법을 공개하실 수 있습니까?”
“제작사 로큐가 자체 제작한 VR 카메라입니다. 여러분이 실제 전장에 들어간 느낌을 주는 것은 그 카메라가 찍는 화면이 여러분의 시야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직접 사지를 돌파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다만 여러분은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죠.”
“어쩐지 긴장감이 굉장하다 했습니다.”
취재진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서인 기자가 물었다.
“영화 소재나 내용은 신선한 편이 아닌데, 혹 의도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영화 자체의 재미와 인물들에게 최대한 집중하게 하려고 단순한 플롯으로 갔습니다. 영화 갓 필드는 지극히 영화적인 영화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영화의 스토리를 말해선 이렇다 할 매력을 찾을 수 없는 영화라는 것이지요? 내용만 들어선 흥미를 끌만 한 게 없는 영화다. 이를테면 영상과 액션만으로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영화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 영화에 재미와 체험이라는 측면에서만 접근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하신 것 같습니다.”
소소한 웃음이 나왔다.
스토리는 매력적이지 않고 소재도 그냥 그렇고 신선한 점도 없다. 오직 영상과 액션만으로 승부를 건 영화다. 이에 전장 체험과 감정의 증폭이라는 영화적 수단을 더했다.
취재진의 얼굴이 대체로 밝다. 영화 전개 중에 받은 스트레스야 당연히 영화적 장치임을 다들 잘 안다. 공포 영화를 볼 때 긴장하려고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취재진이 가장 궁금했던 점이 해소된 후 영화에 대한 시시콜콜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건하와 배우들에게 관한 질문도 이어졌는데, 특히 건하는 집중적인 질문을 받았다.
기자 간담회 후.
다시 모여 사진을 찍었다.
개막작이긴 하지만 취재진이 이토록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베를린 영화제만 이런 건 아닐 테고.
* * *
며칠이 지났다.
베를린 영화제 소식이 전 세계로 퍼졌다.
당일 밤부터 영화 ‘갓 필드’에 대한 평과 리뷰가 쏟아지더니, 전 세계 언론의 문화란에 내 영화가 소개되었다.
숱한 평가가 있으나 종합하면 비슷했다.
[마약 같은 영화.]
오락 영화의 신기원을 열었다. 플랜에 이어 새로운 효력을 영화에 심었다.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영화를 본 것 같다. 여러 번 보면 중독될지도 모른다 등등.
고맙게도 영화의 재미는 기본이라는 말도 해주었다.
원래 예술적 성과가 없는 영화는 영화 전문가들이 별로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런데 갓 필드는 오락영화로서 높이 평가해주고 있었다. 오락이라는 목적만으로도 영화의 가치가 대단히 높다는 ‘버라이어티’ 평론이 있었으니.
잘만 만들면 대우해주는 거겠지.
현재로선 독보적인 영화이기도 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 냈다는 평가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영화의 파급력이 대단히 컸다. 플랜도 비슷하지만 다른 효력이 있긴 했는데, 그 영화는 한국 정서가 강했다. 반면 갓 필드는 정서적인 이질감이 별로 없다. 나라에 헌신했다기보다는 생존과 본분에 충실한 군인들의 이야기라.
영화제 개막작인데다 특수한 경험까지 더해지면서 베를린 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 되었다. 한국과 일본에선 연일 베를린 소식이 타전되고, 대체 어떤 영화인가 하는 호기심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뉴욕 타임즈와 가디언지 영향이다.
두 유력지는 비슷한 기사를 냈다.
갓 필드를 보면 영화 관람 내내 고통을 받을 것이며, 그 고통이 결국 행복감으로 바뀐다. 그 행복감은 마약에 버금가며 영화 감상의 만족감을 배가시킬 것이다.
이 기사가 세계 언론에 인용되면서 퍼졌던 거였다.
결국 마켓에서도 터졌다.
영화제 2일째부터 마켓 부스가 차려진 호텔 룸이 바이어들로 미어터졌다. 자기들끼리 경쟁하느라 생난리였다.
첫날부터 바이어들이 높은 금액을 불렀는데, 그럼에도 입찰에 참여하는 바이어들이 정말 많았다. 친분이 있는 바이어들에게는 좋은 조건에 팔고 싶었으나 내 소관이 아니었다.
권혁민과 이동욱 대표가 알아서 처리했다.
이번 영화는 혁민이가 직접 북미 배급을 맡아볼 참이었다.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니 부담감도 좀 덜할 테고. 혼자 미국에 있는 동안 발로 뛰며 만든 인맥이 상당해서 자신 있어 했다.
내 영화가 경쟁 부분에 출품한 게 아니라서 우린 영화제 도중에 귀국할 생각이었다. 해서 느긋하게 놀러다녔다. 베를린은 딱히 볼 게 없어서 저녁에 맥주만 마신 게 다였지만.
나와 서연이. 수혁이와 희진이. 그리고 건하.
다섯이서 마지막 날 밤에도 맥주를 마셨다.
건하는 독일 현지인 아가씨들도 사로잡았다. 길을 걸으면 거의 모든 여자가 곁눈질로 보았다. 미소년 같은 얼굴도 그렇거니와 근육질 몸매에 비율이 워낙 좋다 보니.
수혁이가 웃으며 말했다.
“건하는 늦게 결혼할 거 같다.”
다들 의아하게 수혁이를 보았다.
건하는 피식 웃을 뿐이고.
수혁이와 건하는 동갑이다.
서연이가 물었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
“일단 건하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으니 여자가 먼저 다가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착하고 좋은 여자가 먼저 고백할 리가 없죠. 건하 외모와 돈만 보고 접근하는 여자들만 있을 테고요. 그런 여자는 건하가 연예인 싫어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싫어할 테고요.”
일리가 있는데.
수혁이 말이 이어졌다.
“건하가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려면 건하가 먼저 고백을 해야죠. 그런데 여자에게 도통 관심을 안 보이니 좋은 여자인지 어떤지 알 수가 있나. 그러다 보면 나이만 먹는 거죠.”
“너나 결혼해 인마, 남 걱정 말고.”
수혁이 씩 웃었다.
“저야 여자친구 있죠. 미래가 워낙 깜깜해서 여자 만날 생각이 없었거든요. 근데 로큐에 입사하고 감독님 보조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좋은 여자가 저절로 찾아오더라고요.”
“좋은 여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형수님 후배.”
서연을 보았다.
그녀가 미소 짓고 있었다.
완벽하게 설득되었다.
사람은 끼리끼리 논다고 한다.
애인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알고 싶으면 애인의 친구들을 보면 안다고 했다. 애인의 가족도 그렇고.
서연이 소개해준 후배라면 안 봐도 합격이다.
내 지령을 받은 수혁이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이젠 건하가 알아서 할 일이지.
결혼하고 보니 동생들이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 부쩍 커졌다. 지성이와 수호는 곧 결혼을 할 테고, 수혁이는 만나는 사람이 있고.
건하만 짝을 만나면 된다.
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걸 보는 것도 인생의 맛이다.
* * *
일행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수많은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건하와 나만 취재진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베를린 영화제에 참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현지 반응이 뜨거웠다고 하는데, 영화 판매 실적은 어느 정도 되나요?”
“감독님! 특별한 현상이란 정확히 뭔가요?”
“윤건하 씨!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영화를 못 봤으니 질문의 한계가 있다.
어쨌든 성심껏 대답했다. 건하도 짧지만 대답을 했는데 녀석이 대답할 때마다 여성팬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마침 건하와 지현이가 찍은 할리우드 영화가 상영 중이라 인기가 더욱 오른 상태였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밴으로 향했다.
차가 출발하자 건하가 말했다.
“결혼은 일찍 하는 게 좋을까요?”
“좋지. 배우 활동에 영향이 조금은 있을 거야.”
“그런 건 신경 안 씁니다. 돈을 바라고 배우가 된 게 아니라서. 형님이 구원해준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에요.”
잘생긴 놈이 심성까지 순수하다.
착한 여자를 볼 줄도 알고.
“연애를 오래 하고 나중에 결혼하는 길도 있어.”
“몰래 사귀라고요?”
“그래도 되고.”
건하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내키진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서연이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네. 몇 년 동안 지켜봤어요.”
서연은 녀석이 누굴 좋아하는지 모른다.
건하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모르고 하는 소리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을 뿐이지.
귀국 첫날은 집에서 쉬었다.
일주일 정도 더 쉬다가 블루드 워 시나리오를 쓸 참이었다.
올해 초에는 들어가야 네오스타 직원들 스케줄에 맞출 수가 있었다.
갓 필드는 설 전날에 개봉이 잡혔다.
임시 휴일까지 정해져서 6일간의 황금연휴에 영화가 걸리게 되었다. 스크린 수는 방법 때보다는 작은 1,200개.
수위가 약한 버전을 주로 상영하고, 원본 버전은 300개 극장에서 개봉하기로 배급사와 합의를 했다.
외국인과 한국인 반응이 조금은 다를 듯했다.
흥행은 플랜보다 약할 것 같고.
과연 한국에선 어떤 반응이 나올지.
베를린 영화제가 끝나면서 혁민이에게 연락이 왔다.
-감독님. 기뻐해 주십시오.
“많이 팔렸어?”
-142개 영역. 173개 나라에 팔렸습니다. 거의 다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비싼 가격에 팔렸어요. 조건도 아주 좋아요. 판매 수익과 흥행 수익 합치면 3천억은 벌 것으로 봐요.
“수고했다. 북미는?”
-아직 논의 중이에요. 어떻게든 스크린 2,500개는 확보할 겁니다. 미국 와서 열심히 뛰어다녔는데 보람이 있어야죠.
“마켓 대행 수수료는 챙겼고?”
-그럼요. 하하하.
“지금까지 해준 것만큼만 해.”
-알겠습니다.
비서들이 하나같이 능력자들이다.
수혁이는 내 뺨을 칠 정도로 재능과 감각이 뛰어나고, 혁민이는 타고난 사교성으로 나 대신 인맥을 만들어 가고 있다. 희진이는 내가 한마디 하면 알아서 열 가지를 한다. 미모도 눈이 부실 정도고.
* * *
고급 빌라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우아한 걸음걸이. 얼굴을 반쯤 가리는 긴 머리가 무척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듯한.
그녀는 주차장에 있는 벤츠에 올랐다.
곧장 차를 몰고 나갔다.
그녀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돈이 있음에도 차를 구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차도 없이 고위 인사를 만나고 다닌다는 걸 안 그녀의 보스가 대뜸 벤츠를 사주었다. 비서라고 무시당하지 말라며.
그녀는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로비에서 문이 열리자 직원들이 그녀에게 인사하느라 바빴다.
“유 실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팀장. 식사는 하셨어요?”
“아휴, 출근하느라 바빠서 못 먹어요.”
팀장급만 말을 건네고 다른 직원들은 넙죽넙죽 인사만 할 뿐이었다. 남자들은 그녀와 시선도 못 마주치고 앞만 보며 서 있었다. 여자들은 부러운 눈길로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고.
그녀는 7층에 내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출근한 직원들이 저마다 정중히 인사를 해왔다. 그녀도 공손히 인사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거의 모든 직원이 그녀를 어려워했고, 남자들은 흠모의 눈길을 보냈다. 로큐의 직원들이라면 거의 모두 명문대 출신이고 고액 연봉자들이다. 그런 직원들이 하나같이 그녀만 보면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 그녀가 경영지원부 사무실 구석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회사 직원들이 어려워하는 여직원치고는 자리가 협소하고 볼품없었다.
그녀는 자기 자리에 앉아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보았다.
서류를 검토한 뒤 메모를 했다.
보스에게 메일로 보고할 내용이었다.
그때 회사 전속 감독이 왔다.
“저, 유 실장.”
“네. 한 감독님.”
“아침 식사 안 했으면 같이 할래?”
“저 아침 안 먹는 거 아시잖아요.”
“내가 왜 이러겠어. 사람 좀 만나주라. 그냥 투자자야.”
“회사에 돈이 있는데 왜 투자를 받으시려고요?”
“유 실장도 알다시피, 투자자들이 우리 회사 작품에 투자하려고 안달이잖아. 내가 꼭 좀 해보고 싶은 시나리오인데 다른 회사 작품이라서.”
“제작이사님이 결정하실 일인 것 같은데요?”
“이사님은 대표님 영화 말고는 신경도 안 쓰셔. 투자팀이 안 된다고 해서 이러는 거지. 유 실장이 난감하면 수혁 씨한테라도 말 좀 해줘. 수혁 씨가 오케이 하면 제작이 되니까.”
“로큐 합작이죠?”
“당연하지. 5대5.”
“제가 최수혁 조감독님께 말해볼게요.”
“오케이! 유 실장, 내가 밥 한 번 살 게.”
감독이 신 난 얼굴로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넘겼다.
회사에서 그녀나 최수혁의 결정은 최신성 대표의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최신성의 결재가 필요한 사항을 대행하고, 주요 사안이 두 사람에게 향하면서 자연스럽게 굳어진 일이다.
그녀는 오전 업무를 마치고 MBS 드라마 국장과 점심 약속이 있어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방송사 드라마 국장도 제작부장보다는 그녀에게 로비를 하는 형편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차로 걸어갈 때였다.
걷던 그녀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멋진 코트를 입은 키 큰 남자가 웃고 있었다.
윤건하였다.
그를 보는 순간 그녀는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갑자기 불쑥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윤건하가 말했다.
“외근 나가요?”
“네. 여긴 어쩐 일로…….”
윤건하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사귈래요?”
“네?”
“나, 희진 씨 좋아해요.”
좋아해요.
이 말이 유희진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이내 그녀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 * *
영화가 어제 개봉했다.
언론 시사회 때 기자들 반응은 외신 기자들보다 더 컸다. 한국어가 나오는 한국영화라는 이유만으로 그랬다.
게다가 이제껏 없었던 액션 스타일이었고, 지금까지 없었던 체험형 영화였으며, 전례가 없는 쾌감까지 주는 영화였다. 세계적으로도 비교할 대상이 없는 영화이기도 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는 점만으로 언론이 관심을 기울일만했는데, 영화가 재미있다고 했다. 거기에 베를린 개막작이었고, 한국 영화 최대 판매기록까지 앞두고 있다.
한술 더 떠 최근 작전세력이 검거되면서 내 영화 플랜이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작전 세력과 영화 플랜을 관련짓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시사회 때 전례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인이 외국인보다 더 감정적이고 공감능력이 큰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주인공이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지.
언론 시사회 때 기자들은 기자 특유의 냉철함을 잃어버리고 일반 관객이 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기자간담회 때 영화 내용은 묻지도 않고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쏟아냈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느낌이라면서.
VIP 시사회 때는 더했다. 거의 모든 셀럽이 반쯤 취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베를린 때와 달리 관객이 자막을 볼 필요가 없으니 집중이 더 강했던 거지.
놀라운 점은 잠깐이라도 혼절한 사람은 없었다는 거였다. 그만큼 정신력도 강하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영화를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만.
하긴 로큐 여직원들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영화를 보다가 일순 실신한 거였다. 베를린 상영 이후 기절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나서 셀럽들이 각오를 하고 본 것일 수도 있다. 공포 영화를 볼 때 마음의 준비를 하듯.
하여 개봉 이틀째인 토요일.
서연과 함께 리뷰, 관객 반응 따위를 보고 있었다.
반응이 내가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갓 필드라는 전쟁터에 다녀오다.]
[당신은 이 영화를 두 번 이상 볼 것이다.]
[고통이 큰 만큼 행복해지는 영화!]
[최신성, 영화의 신대륙을 발견하다!]
[갓 필드는 영화인가, 가상현실 게임인가.]
개봉 첫날부터 포털 영화 게시판에 리뷰와 댓글이 폭발했다. 다들 한마디 하고 싶어서 속이 근질근질하는 듯, SNS에도 남기고 포털 게시판에도 한마디씩 하고.
영화 보면서 힘들었다는 말이 많이 나왔는데, 영화가 끝났을 때는 그게 사라져서 신기했다는 말이 많았다.
서연이 말했다.
“나도 이게 제일 신기하더라. 스트레스가 엄청나면 후유증이나 뒤끝이 남을 수도 있는데, 갓 필드는 그런 게 없었어. 엔돌핀 때문에 몸이 개운해져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베를린에서 영화가 어땠는지 서연에게 묻기는 했다.
스토리에는 딱히 몰입할 게 없는데 액션과 상황이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무서웠다는.
그때 지성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즘 한참 결혼 준비하느라 바쁜 녀석이다.
-형!
“왜? 영화 봤어?”
-와, 영화가 미쳤다! 나랑 지현이랑 정말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잖아! 영화 보는데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커플들은 끌어안고 영화보고, 여자들은 막 비명 지르고. 뭔 쾌감이 있다고 해서 뭔가 했더니… 하하하!
“그게 왔어?”
-그거 묘하데. 술 마시다가 갑자기 확 올라오는 것처럼 알딸딸해지더니 몽롱한 게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여기저기서 관객들 이상한 신음까지 내고.
“플랜과 비교하면?”
-조금 달라. 플랜은 행복해지는 게 더 크고 내 자존감이 굉장히 높아지는 느낌이 들었거든. 근데 갓 필드는 좀 더 오락적인 쾌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플랜은 친구들과 수다 떨면서 맥주 한 잔 마신 느낌? 반면에 갓 필드는 놀이동산에서 신 나게 놀다가 가는 느낌?
“스트레스 푼 것은 같은데 갓 필드는 몸이 좀 개운했다?”
-그거지. 실제로 몸이 반응했으니까.
서연이 지성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성이 분석이 얼추 맞는 모양이다.
“관객은 좀 들었어?”
-전회 매진이야. 개봉 삼일 전에 주말 예매 끝났다고 하더만. 건하가 멋있긴 하더라. 여성 관객들이 건하 나올 때마다 비명을 질러대서 몇 번이나 극장에 웃음 터지고 그랬어.
“그래. 데이트 잘하고 들어가.”
-우리 형이지만 형은 정말 대단해.
“알면 됐고.”
전화를 끊었다.
서연이 물어왔다.
“흥행은 잘되고 있지?”
“그렇다네.”
“안 그래도 어제부터 친구들한테서 계속 톡이 오고 있어. 영화 정말 재밌게 봤다고. 건하 때문인지 너무 잔인한 게 없어서 그런지 여자들도 많이 보나 봐.”
“여자들이 놀이동산에 가는 거 좋아하는 것처럼?”
“응. 그런 것과 비슷하겠네.”
누가 기절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영화를 봐서 그런 듯.
영화 내용상의 어떤 충격이나 반전 그런 것이 없다 보니 리뷰 내용은 다 비슷했다. 보는 영화가 아닌 체험하는 영화라는 말이 대다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도 하고.
마침 공지할 사항도 있고 해서 펀딩 사이트에 들어갔다.
연휴 첫날 토요일인데도 댓글 놀이가 한창이었다.
열심히 갓 필드를 홍보해주는 분들이기도 하고.
[님들 갓필드 보고 왔음?]
[보고 왔음. 죽는 줄 알았음. ㅋㅋ]
[저는 진짜 2시간 내내 롤러코스터 타는 줄 알았음. 뭐 이런 미친 영화가 다 있나 했음. ㅎ]
[전 애들이 무섭다고 해서 아직 못 봤는데.]
[무섭죠. 근데 다 보고 나면 몸이 개운해집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현상 때문에요?]
[네. 매운 거 드시고 나면 스트레스 풀리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해요. 그것의 10배 이상 상쾌해질 겁니다.]
[갓 필드 수익률 예측 가능한 사람?]
내가 적을까 하던 중.
답글이 올라왔다.
[현재 흥행 추세와 반응을 보아 천만 넘을 것으로 봐요. 총 매출이 천억이면 극장 수익 빼고 500억 정도 되죠. 제작비가 300억이니 로큐 순수익이 2배는 안 될 것으로 보입니다.]
[천만 넘어도 2배를 못 넘기는구나. 할리우드 영화와는 확실히 다르긴 하네요.]
누군가의 댓글에 댓글이 무수히 올라왔다.
무슨 소릴 하느냐는 듯.
답글을 단 사람이 다시 답글을 달았다.
[한국 수익만 그렇다는 거고요. 현재 187개국 판매. 올해 안에 200개국 판매까지 가능하리라 봅니다. 선판매 수익만 1,000억에 이르고, 흥행 수익에 부가판권까지 합치면 3,000억은 나올 것으로 봄.]
[할리우드 영화나 마찬가지네요.]
[그럼요. 누구 영환데요. ㅎㅎ]
투자자들의 기분 좋은 댓글이 수없이 올라왔다.
다들 고향에는 가셨는지.
[여러분은 연달아 천만 관객을 넘기는 감독님의 영화에 투자하신 분들입니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영화에 투자까지 한 분들이죠. ㅎㅎ]
[정말 좋다. 돈도 벌고 역사적인 영화도 보고.]
[최 감독님 늙으면 은퇴하시겠죠?]
[감독은 정년 없잖아요. 이참에 최 감독님 댁에 보약이라도 한 첩 놔드릴까요?]
[굿 아이디어! 이번 펀딩 정산되면 돈 좀 모아서 감독님 선물이나 하나 합시다. 우리도 늘 받기만 하면 안 되죠.]
[좋죠. 다들 수익의 0.1%만 모아도 감독님 차 한 대 뽑아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감독님 차, 레인지 로버 아닌가요? 1억 넘는데?]
[그럼 없던 일로. ㅎ]
투자자들이 내 선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글을 올릴 타이밍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차 바꿀 생각 없습니다. 선물을 하시겠다는 마음만 받을게요. 굳이 선물하시고 싶으시면 청년 재단에 기부를 하셔도 좋고요.]
[와! 최 감독님이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진짜 최신성 감독님이세요?]
[최 감독님 맞습니다. 전에 사고가 한 번 있었어요. 그때 다들 몰라봐서 현웃 터지고 난리 났던. ㅋㅋ]
[감독님! 영화 진짜 잘 봤습니다!]
올라오는 인사가 많아서 잠시 지켜보았다.
인사가 뜸해지자 다시 글을 올렸다.
[다름이 아니옵고. 곧 네오스타가 투자 및 합작하는 미드가 제작될 겁니다. 그 작품 펀딩을 하려고 해요. 제작비는 천억 규모이며, 펀딩은 50억입니다. 영화와 달리 미드는 수익률이 그리 높지는 않으니 참고해 주세요. 플래닛에서 동시 방영할 예정입니다.]
[드디어 미드 펀딩! 언제 공지하나요?]
[다음 주 일요일에 할 겁니다. 방식은 같아요.]
[알겠습니다! 대박!]
[감독님이 연출하시면 좋겠는데…….]
[전 블루드 워 2편 제작을 시작해요.]
[잘 만들어 주세요! 저, 투자했어요!]
[네. 그럼 설 잘 보내세요!]
또 인사가 줄줄이 올라온다.
소통하는 재미가 있다.
내게는 영화만큼 기분 좋아지는 재미였다.
* * *
일요일 아침.
지성이 커플과 함께 고향 큰집으로 갔다.
큰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터라 서연이 먼저 가서 준비할 일은 딱히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서연은 큰어머니와 어머니를 도왔다. 결혼도 안 한 지현이도 그랬고.
다음 날 제사를 지내고 오후까지 있다가 우리 내외 먼저 인사를 드리고 서연이네 큰집으로 갔다. 처가에서도 큰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터라.
그렇게 설 당일을 보내고 집으로 왔다.
우리 둘 다 녹초가 되어 나가떨어졌다.
서연이나 나나 명절만큼은 처녀 총각 때가 좋았지.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건하가 집에 찾아왔다.
세배를 드리겠다고.
내가 무슨 어르신이냐고 핀잔을 주었는데, 희진이랑 같이 왔다. 녀석이 드디어 고백을 했던 모양이다.
건하는 덤덤한 표정이고 희진이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건하가 말했다.
“대표님께 알려드리려고요.”
“그래, 잘 왔다. 이모님 댁에는 다녀왔어?”
“네. 형님께도 찾아뵙고 싶어서요.”
서연이 희진이에게 말했다.
“벌써 이모님을 뵙고 왔어?”
“네. 건하 씨가 소개하고 싶다고 해서…….”
“잘했어.”
건하와 희진이가 정말 우리 앞에서 절을 했다.
녀석이 정말 날 친형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절을 하는 두 사람에게 5만 원씩 건넸다.
“자. 둘이 예쁘게 만나.”
“네.”
두 사람이 웃으며 세뱃돈을 받았다.
둘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우리가 다 행복해진다.
서연이와 희진이가 안방에 들어갔다.
여자들끼리 이런저런 할 이야기가 있는 듯.
난 커피를 내려 두 사람에게 건네주고 나왔다.
건하와 난 딱히 할 이야기는 없었다.
그냥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볼 뿐.
건하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기나 하고.
“희진이 만나니까 좋아?”
“네. 빨리 만날 걸 그랬어요.”
“그러지, 왜 기다렸어?”
“희진 씨 마음을 잘 몰라서.”
그래, 내가 그 마음 안다.
희진이는 톱스타인 건하와 만날 자격이 될까 했을 터다. 호감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겠지. 건하는 자신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음이 걸렸을 테고.
“저, 형님.”
“응?”
“저 부모님 안 계시고, 이모밖에 없어요. 명절 때마다 찾아와도 되죠?”
“당연하지. 희진이 부모님을 봬도 되고.”
건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희진 씨 부모님 돌아가셨어요, 오래전에. 희진 씨는 할머니 손에서 컸는데 그 할머니도 여고생 때 돌아가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느닷없이 가슴에서 복받치는 게 있었다.
두 사람의 애틋함이 얼마나 클까.
그랬구나.
어쩐지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 했더니.
살아온 환경이 비슷했던 거였다.
친척은 있겠지만 의지하고 돌봐줄 사람이 두 사람밖에 없는 거다. 그 사랑이 아직 여물지는 않았어도.
그래서 건하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희진이를 이모에게 데리고 갔던 거였다. 명절에 혼자 있을 희진이가 외로워할까 봐.
한데 저녁이 되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지성이가 지현이와 함께 놀러 오더니, 수혁이와 수혁이 여자친구가 찾아왔다. 녀석의 여자친구가 서연이 후배이기도 해서. 얼마 뒤에는 수호도 약혼자가 된 연희를 데리고 오고.
4시간 사이에 우리 집에 모인 사람이 10명이나 되었다. 마치 우리 집이 큰집이라도 된 듯. 사람이 많아지니 남자들은 거실에서 놀고, 여자들은 안방에서 놀았다.
시간이 늦어지면 다들 갈 줄 알았더니 웬걸.
수호 녀석이 고스톱을 치자고 해서 판을 벌였다.
나와 건하는 고스톱 칠 줄 몰라서 빠지긴 했다만.
그렇게 집에서 시끌벅적하게 놀았다.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니 서연이 내 옆에 앉았다. 이미 거실 바닥은 고스톱 판이다. 맥주도 곁들이면서. 가만 보니 수호와 연희 커플이 판을 휩쓸고 있다.
“하하하! 지성이 형은 나한테 안되지 말입니다!”
“연희야! 광 팔고 나갔으면 중립 지켜야지!”
“어머? 저 코치 안 했는데요?”
“안 하긴 뭘 안 해? 슬쩍 눈치를 주더만!”
“벌써 예비신랑이 챙기세요? 수호 형은 좋겠다.”
“이번 판은 커플 레이스로 갑시다.”
“좋아, 커플로 한 판 해.”
떠들며 노는 모습을 보니 더욱 기분 좋아졌다.
서연도 그렇고.
그렇게 설 연휴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블루드 워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시놉시스는 이미 있었고, 구상도 충분히 했다.
영화 갓 필드가 플랜만큼이나 신드롬을 일으키고 흥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자꾸 들어와서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열풍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 확인하기로 했다.
기존 내용에서 디테일만 깊이 들어갔다.
외계인이 지배하는 지구와 인류의 이야기다.
육체적 능력이 부족한 대신 미지의 힘을 보유한 외계인이 인간을 개조하여 매우 강한 병력을 육성했다. 그 세뇌된 병력이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한다.
외계인의 인간 개조 실험 후 대대적인 병력을 만들어내자 인류 60만여 명이 외계 모선을 타고 화성으로 대피한다. 훗날 그들 중 일부가 거대 함선을 제조하여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는데, 이들이 미드의 난민 선단 이야기다.
외계인과 개조 인간 병력은 슈퍼 히어로가 된 액셀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액셀 전담 군단까지 창설했다. 이에 액셀은 저항군 특공대장이 되어 인류를 지배하는 외계 종족 및 변이된 인간 병력과 싸운다.
일본강점기 때 왜놈과 맞서 싸운 독립군 이야기와 거의 비슷했다. 액셀과 저항군은 세뇌되지 않은 이들을 구출하여 화성으로 보내는 임무를 주로 했고, 외계인 기술을 빼내는 작전을 벌였다.
한데 외계인이 액셀을 슈퍼 히어로로 만들어준 고대의 힘 ‘아크람’이 인간에게 유독 잠재력이 크다는 점을 알아낸다. 하여 액셀과 저항군을 궤멸시킬 특수 개조 능력자를 육성하기 시작한다.
안티 슈퍼 히어로 군단이다.
또한 외계인은 뒤늦게 화성에 저항군 기지가 건설되었다는 걸 알아내고 함대를 보내기에 이른다. 인류는 외계인에게서 탈취한 각종 기술로 해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었고, 마침내 자체 우주 함선 제작이 가능해진다.
지구에서 저항군이 각종 물자와 정보, 기술 등을 빼서 화성 저항군에 전달한 덕분이었다. 화성 저항군은 탈취한 외계인 함선 4척과 자체 제작 함선 1척으로 외계 함대와 맞서야 하는 상황.
이때 지구 저항군은 최대 최후의 작전을 전개하기로 한다. 지배당하는 인류를 최대한 많이 화성으로 이주시키고, 외계인들의 초대형 마더십에서 ‘아크람의 정수’를 폭파하는 임무였다.
외계인들도 인류 초토화 작전을 전개한다.
세뇌당한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인류 전부를 몰살하고, 화성에는 인류가 만든 핵폭탄 수천 발을 터뜨리기로.
이 마지막 작전이 박진감 있게 맞물려 들어갔다.
시리즈 2편은 먼저 개봉할 개별 히어로 영화 ‘블랙버드’의 프리퀄이다. 해서 블랙버드의 주인공이 액셀의 특공대 일원으로 카메오 출연을 할 터였다.
미국 영화답게 배신자는 꼭 나온다.
액셀이 매국노 격인 저항군 장군에게 속아 세뇌당할 위기에 처한다. 액셀 주변에는 액셀만큼이나 강한 안티 히어로 군단이 지키고 있고, 혼자 탈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화성에선 외계 함대가 침공하기 직전이고, 지구에선 인류 멸절 작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그 상황에 액셀은 잡혀 있고. 저항군은 무수히 죽어나가고.
내 영화가 늘 그렇듯 미친 듯이 몰아붙인다.
지구도 화성도 이렇게 다 죽는구나 싶을 정도로.
인류 멸절 카운트다운이 불과 30분 남은 그때!
블랙버드 주인공이 속한 특공대 300명이 액셀을 구하려 목숨을 걸고 뛰어든다. 슈퍼맨이 크립톤 스톤에 힘이 약해졌듯, 액셀은 아크람의 힘을 약화하는 굴레에 묶여 있었다. 특공대가 눈부신 작전을 통해 그걸 깬다.
이때부터 다시 액셀의 가공할 대활약.
아크람의 정수를 파괴하기 위해 살아남은 특공대 33명과 함께 외계인 마더십에 침투한다. 외계인들은 다급히 인류 멸절 작전을 시작하고, 화성에선 핵미사일 수십 기가 이미 쏘아졌다.
그리하여 결국 액셀과 생존한 특공대 12명이 아크람의 정수를 파괴한다. 그 폭발 때 특공대 12명 전원이 아크람의 힘을 흡수하면서 액셀처럼 능력자로 변신한다.
능력자가 된 특공대 12인. 그 중 6명은 액셀에 버금갈 정도로 강했다. 그 중 하나가 블랙버드다.
이 새로운 히어로 12명이 안티 히어로 군단과 격돌한다. 이때 어마어마한 액션이 벌어진다. 아크람의 힘을 더 흡수한 액셀은 그야말로 슈퍼맨이 되었고.
한편 화성에서는 날아오는 핵미사일을 우주 공간에서 저지하기로 한다. 핵미사일을 향해 우주전투기를 몰고 날아가 직접 충돌해버리는 위대한 조종사들.
‘브루드 워 ; 라스트 데이’
액셀과 새로운 영웅 12인.
화성을 지키려 장렬히 산화한 무명 영웅들.
영화는 바로 이들의 이야기다.
이야기를 정리하고 바로 집필에 들어갔다.
새로운 효력이 발생할 것 같진 않았다.
다만 감동을 위해 최대한 노력할 참이었다.
* * *
3일에 걸쳐 정신없이 시나리오를 썼다.
코어가 진화하는 것인지, 내 경험이 무르익어서 그런지. 갈수록 시나리오가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영화에 가장 적합한 플롯과 진행을 감각적으로 선택했다. 고려하고 계산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면 나왔다. 어떤 게 가장 좋은지.
각 영화에 주력하는 포인트가 있다.
플랜 때는 감정이입과 공감을 우선했다. 그 덕분에 예상치 못한 특별 효력이 발생했었고. 갓 필드 때는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그 덕에 체험 영화라는 독특한 영화가 탄생했고.
이번엔 지금까지 내가 집필해 온 영화의 집대성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캐릭터와 영상화. 플롯과 감정이입. 공감과 체험 등등. 그 모든 것이 다 들어가는 게 보였다.
무엇이 관객을 감동케 하는가.
수많은 영화의 클리셰와 전개 방식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고 코어 혹은 내가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진부한 것이라면 신선하게 바꾸었고, 다른 영화에서 나온 것을 조합하기도 했다. 조금만 비틀어도 새로운 것이 되는 게 창작이다.
이 영화에 가장 잘 맞는 전개로 감동을 주는 것.
그 감동을 위해 시작부터 하나하나 쌓아 나갔다. 감정을 쌓아 나가는 것과 같다. 잔잔한 감동과 크고 작은 사건들, 인물 간의 갈등, 환경이 주는 스트러글.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다가 후반에서 폭발시킨다.
각각의 감동적인 사연들을 마지막에 한꺼번에 몰아 한 방에 터뜨린다. 감정적으로 감당이 안 되도록. 감동을 위한 감동의 전개는 예측 가능하며 맥이 풀린다.
인물의 반전. 사건의 반전. 상황의 반전 등으로 예측을 어렵게 한다. 늘 염두에 두는 말이지만 기대는 충족시키고, 예측은 다르게.
카타르시스는 어떤가.
강자의 지배를 받는다는 상황만으로도 관객의 울분을 건드린다.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과 투쟁심이 발생한다. 지배를 당하는 자는 정말 힘들게. 지배하는 자들은 너무도 악하게.
이것을 깨고 나갈 때의 카타르시스는 대단해진다.
플랜에서 거대 악을 이겨냈을 때의 카타르시스보다도 크다. 왜냐. 플랜에선 그저 형사였고, 법으로 심판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선 주인공이 직접 악을 때려 부순다. 그것도 시원시원하게 거침없이.
액셀은 주인공이기에 감정이입이 저절로 된다. 무명 병사나 특공대는 그들의 싸움을 응원하게 되기에 감정이입이 이뤄진다. 그들은 왜 싸우는가에 관객이 공감하면 된다.
한국인은 그 싸움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일본강점기에 한민족이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어렵게 싸웠는지 알기에. 독립투사의 희생이 어땠는지도 알고 있고.
독립투쟁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라도 많을 터다.
나치 지배하의 유럽 상황을 떠올리게 되겠지.
난 지배를 당하는 것이 어떤 건지, 지배자와 맞서 싸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한국 사람이니까.
이번 영화를 통해 그걸 체험하게 할 생각이었다.
외계인과 자아를 잃은 인간 병력.
이는 세계대전을 일으킨 집단 광기의 은유다.
악이라 불리는 광기에 맞서는 이들.
자유의 소중함. 자유를 향한 숭고한 정신. 인간애.
이러한 인류의 지고한 가치를 되찾으려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관객이 함께 체험한다.
영화의 체험이란 내가 그 영화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플랜에서 발견했고 갓 필드로 증명했다. 관객이 관찰자로 지켜보는 것이 아닌, 내가 직접 싸우는 것과 같다. 함께 싸웠기 때문에 감동은 배가 된다.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 되므로.
함께 싸우고 고생해서 쟁취하는 자유는 얼마나 소중한가.
영화와 관객이 얼마나 동화되느냐, 관객과 스크린 사이를 얼마나 좁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시나리오를 끝냈다.
이번 영화에 내가 한 모든 것이 담겼다.
나는 보스다처럼 사건이 한곳으로 모이는 광장씬. 아비도의 집단광기와 이기주의. 좀비 영화 이동원의 절체절명의 상황과 가족애. 어웨이커에서 인조인간들의 싸움처럼 초대형 전투씬. 블루드 워 1편에서 고난을 딛고 일어나 영웅이 되는 카타르시스. 플랜의 극단적인 감정이입. 갓 필드의 현실적인 전투.
이 모든 것을 고려하고 주제의식까지 염두에 두고 쓴 시나리오다. 최대한 멋진 영상이 나오도록 했으며, 여러 인물도 내 능력이 닿는 한 개성 있고 매력 있게 만들었다. 액셀은 소년에서 진정한 영웅이자 리더로 진화하고.
총 상영시간 2시간. 제작기간은 12개월 걸릴 듯했다.
우주 교전 장면 때문에 CG 분량이 꽤 많다.
제작비는 생각보다 덜 든다. 2천억 정도.
유명배우라곤 액셀과 블랙버드 주인공뿐이다.
제작비를 상당히 차지하는 할리우드 슈퍼스타가 안 나온다. 제작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CG도 외주제작이 아닌 자체 제작이라 비용 절감이 되었다.
이 시나리오로 다른 회사에서 제작하면 3천억은 들어간다. 제작기간이 3년이면 스태프들 인건비가 엄청나기 때문에. 한국식으로 제작에 돌입하면 스태프들이 힘든 것은 있지만 네오스타 직원들은 이미 적응했다. 회사 시스템을 오히려 반긴다.
효율이 워낙 좋다 보니 워너브러더스나 월트디즈니 등에서 시스템을 따라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린 스태프들이 모두 직원이고, 다른 스튜디오는 계약제이기 때문에.
“다 썼어?”
“응. 한번 볼래?”
“아니, 영화로 보려고.”
“그래.”
서연이 과일을 들고 서재로 들어왔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에는 텔레비전도 안 보는 그녀다. 시나리오를 안 보겠다는 건 완성된 영화로 보고 싶어서다. 내용을 알고 영화를 보면 재미가 반감되니까.
서연이 말했다.
“나, 영화 할까 생각 중이야.”
“감독이 누군데?”
“박승철.”
승철이 이놈은 좋은 소재 없나 매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더니 결국 작품 하나 물었나 보다.
“내용이 어떤데?”
“재판을 받던 여자 미결수가 수송 중에 탈출해서 딸 아이를 해친 놈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소재는 별로인데 시나리오가 정말 좋더라. 지현이도 하고 싶어 하고.”
“하기야 요새 여배우 원톱이 워낙 없으니.”
“그것도 그렇고. 어때?”
“마지막에 엄청 슬플 것 같은데?”
“응. 경찰에 쫓기다가 마지막에 딸아이 인형을 끌어안고 우는 장면이 있는데 눈물 나서 혼났어. 그나마 하고 싶은 영화야. 영화 찍고 싶은데 할 만한 작품이 너무 없네.”
“흠…….”
서연이가 하기엔 소재가 좀 그렇다.
그녀는 근 몇 년간 작품 출연을 안 했다. 화보 찍고, CF 찍은 게 다다. 결혼한 후 들어오는 작품이 제한적인 건 사실이다. 서연도 그저 그런 작품은 안 했고.
“일단 보류해. 내가 다른 작품도 좀 알아볼 테니까. 연기력이 좀 필요한 것 같은데 지현이도 꽤 어울리겠네.”
“지현이한테 먼저 간 시나리오이긴 해. 예비 신부인데 양가 부모님 보실까 봐 무섭다고 그러더라.”
“그래, 회사에 가서 들어온 시나리오 좀 볼게.”
“응.”
서연이가 몸이 근질근질했던 것 같다.
회사에 워낙 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오니 그녀가 할 작품은 분명히 있다. 직원들이 놓친 것 중에도 있을 테고.
수혁이에게 시나리오 좀 모아 달라고 일렀다.
* * *
간만에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변화가 좀 있었다.
우선 지성이가 마침내 임원이 되었다.
매니지먼트 계열사인 RC E&M의 상무이사.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하는 로큐에 남지 않고 본인이 계열사로 갔다. 임원 욕심이 있었는지. 기존 로큐 대표와 부사장은 그대로고, 이전 로큐 임원이 두 계열사의 대표가 되었다. 자연스러운 승진이었다.
한 빌딩에 세 개 회사가 있는데다 직원을 더 뽑아서 회사가 복잡했다. 한동안 이런 상태로 있어야 했다. 계열사들이 자리를 잡아 이전할 때까지는.
사무실에 오랜만에 보는 분이 앉아 있었다.
안성욱 씨.
영화 플랜의 동기를 준 분이다.
뉴욕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곧 죽을 사람처럼 초췌했던 분이 이제는 안색이 무척 좋았다.
“오랜만에 뵙네요.”
“감독님. 갓 필드 찍을 때 매일 출근했는데 이제야 뵙네요. 그동안 준비하느라 좀 바쁘긴 했습니다.”
“포트폴리오가 나왔군요.”
“예. 사람들 많이 만나고 다녔어요. 기업들 현재 실적을 파악한 뒤에 실적 좋은 회사 위주로 투자하려고요.”
“저는 좋습니다. 좋은 회사가 좀 있던가요?”
“많지는 않아도 투자할만한 회사는 더러 있습니다. 대형주나 우량주도 주가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장기 투자로 돈 번다는 것도 한국에선 이젠 옛말이네요. 직장인들은 점점 돈 벌기 어려워지고 있고요.”
“당장 수익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길게 보고 가죠.”
“예.”
안성욱 씨에게 투자 방식에 대해 들었다.
현재 내가 보유한 현금은 600억가량.
매년 배당금이 나오고 있었고, 몇 년 전 증권사에 맡긴 100억도 2배가 되어 계좌에 쌓였다. 사실 증권사 펀드는 몇 년간 겨우 손해만 안 보다가 올해 들어 수익이 늘었다.
요즘 주식시장이 워낙 좋아서.
안성욱 씨가 설명하는 자금운영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거액을 움직이다 보면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다. 본인 욕심 때문에 내가 욕먹을 일은 안 할 사람이다. 적어도 코어는 그렇게 보고 있다. 고통을 받고 수렁에 빠져 본 사람은 남을 이해하기 마련이지.
“자금 현황 보고는 1년에 한 번만 하셔도 돼요. 분기마다 수익이 날 수도 없는 거니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부담이 한결 덜 하네요.”
안성욱 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 행복하게 살아봅시다.”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독님.”
“별말씀을요.”
내 손에 안성욱 씨의 진심이 전해졌다.
나에 대한 고마움. 새 출발을 앞둔 각오 같은 것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행복하게 살길 바랄 뿐이다.
안성욱 씨가 나간 뒤.
갓 필드 성적과 반응을 확인했다.
개봉 2주 차에 벌써 680만이 들었다.
플랜과 거의 비슷한 흥행 속도다.
설 연휴 덕을 톡톡히 봤다.
한데 동시 개봉한 외국에서도 흥행이 장난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흥행 1위 아니면 2위다. 놀랍게도 할리우드 영화를 밀어내고 올라간 성적이다.
성적은 그렇다 치고 각국에서도 신드롬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도 재관람 열풍이 불었는데 외국은 더한 편이었다. 특히 중국은 유난히 더 심했다. 20번이나 봤다는 사람도 있고, 중독되었다는 사람까지 나왔다. 중국 당국이 영화 상영을 금지시킬 거라는 루머까지 돌 지경이다.
한국 특수부대 이야기라 일본에선 망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그 우려를 보기 좋게 날려 버렸다. 한국의 스릴러 영화를 봐도 벌벌 떠는 사람들이 일본인이다. 그러니 갓 필드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영화 보다가 실신한 사람만 39명. 남자도 2명이나 있고. 일본에선 심각한 문제라고 여겨 진지한 토론까지 했는데, 결국 상영 금지는 없던 일이 됐다. 관객이 보고자 하는데 그 권리를 강제할 수는 없으니.
미국에선 쿨한 전쟁 영화로 흥행가도를 달리고, 유럽에서도 흥행 질주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중동만 흥행이 비교적 저조했다. 마약 영화라는 어감 자체를 그쪽은 싫어했는데, 아랍인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니 그럴 수밖에.
수혁이가 박스 3개를 들고 사무실에 왔다.
“외국 반응 웃기죠?”
“웃기긴 재밌기만 하네.”
“우리나라만 재관람 바람이 불 줄 알았는데 외국은 더하더라고요. 지금 유튜브에선 전 세계 갓 필드 팬들이 집결해서 댓글 놀이하느라 난리법석입니다. 거기 내용 번역해서 보면 진짜 웃겨요.”
“그래?”
유튜브에 있는 갓 필드 트레일러를 확인했다.
정말 댓글이 수만 개다.
최고 인기 댓글이 있는데 차마 말을 못하겠다.
온갖 섹슈얼 드립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런 댓글 말고는 대부분 자기 소감을 올려놨다. 강력한 팬덤이 형성된 것 같았다. 갓 필드보다 더 자극이 강한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와 바람도 있고. 드립과 연관하여 아예 에로 영화를 찍어 달라는 사람도 있고.
“거기 전쟁 영화 속편이 보고 싶다는 댓글 있잖아요?”
“응. 꽤 있네.”
“갓 필드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영화도 가능할 것 같아요. 첩보나 좀비 영화 같은 걸로 말이죠.”
“좀비 영화?”
“공포감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당장은 아니라도 나중에 같은 방식의 액션 영화를 찍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공포든 액션이든 VR 카메라를 쓰는 게 나으면 그렇게 찍는 게 낫겠지.”
한데 유튜브 반응을 보니 심상치가 않다.
무슨 사이비 종교 집단을 보는 느낌이다.
서양권 사람들이 이런 쪽에 영향이 큰 건지.
수혁이가 다시 말했다.
“감독들도 관심이 엄청나요. 회사에 VR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들어온다고 하네요.”
“넌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안 되죠. 독보적인 기술로 만든 건데. 특허 출원도 했고요. 감독님 친구분이 개발한 기술이라 짝퉁 만들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가상현실 게임 엔진과는 다르기도 하고.”
“들고 온 박스는 뭐야?”
“아, 이거 감독님이 말씀하신 시나리오들에요.”
“그렇게 많아?”
“많죠. 100 작품 들어오면 하나 건질까 말까입니다. 대부분 시놉시스 앞쪽 몇 장만 보고 판단하죠.”
잘 쓴 시나리오는 시놉도 좋다.
워낙 많은 작품을 검토하다 보니 제작부 직원들도 이젠 도가 통하는 거지. 시나리오 보는 게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최근에 들어온 작품 모두 가져온 거야?”
“아니요. 지금까지 로큐에 들어온 작품 중 1차 통과한 작품만 따로 보관했죠. 우리 회사가 주로 플래닛 상영 작품이거나, 극장 개봉 작품이라 예술성이 있는 작품은 드물어요. 형수님이 할 만한 작품이 있을진 모르겠네요.”
이 작품들 다 보려니 한숨이 나온다.
직원들은 다 봤을 것 같고.
“직원들에게 공지 좀 하자. 지금까지 들어온 작품 중에 서연이가 할 만한 작품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제작으로 채택되면 보너스 500% 준다고 해. 본인 원안이나 아이디어도 좋고.”
“그거 괜찮네요.”
수혁이가 환하게 웃었다.
녀석도 이 작품들 읽을 생각을 하니 갑갑했던 거지.
수혁이에게 공모 진행을 맡기고 퇴근했다.
블루드 워 2편의 시나리오 감상도 부탁하고.
* * *
미국행 준비를 했다.
네오스타 팀장급 스태프들과 함께 블루드 워 2편 시나리오를 분석한 뒤 프리에 진입하면 귀국할 생각이었다.
프리가 6개월은 걸리니 미국에서 체류할 이유가 없었다. 주요 사안은 메일로 확인하면 되는 거고.
서연과 함께 인천공항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부터 서연의 얼굴이 좀 부은 상태였다.
오늘은 아침부터 뭔가 망설이는 기색도 보이고.
무슨 일이 있나.
“몸이 안 좋아?”
“아니야. 요새 잠을 충분히 자도 피곤하네.”
“재단 일 이젠 쉬엄쉬엄 해.”
“그러려고.”
서연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때 수혁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독님!
“왜? 좋은 작품 나왔어?”
-그게 아니라 와! 이건 진짜!
“뭐? 말을 해, 말을.”
-블루드 워 2편요! 이거 진짜 대박이네요!
“그래?”
-액션 영화 책을 보다가 운 건 또 처음이네. 방금 읽었는데 가슴이 먹먹해요. 조종사들이 핵미사일로 향하는 장면 보고 갑자기 눈물이 막 나더라고요. 전혀 예상을 못 했어요.
액셀과 특공대는 액션 담당. 무명용사들은 감동 담당이다.
조종사들은 다 사연이 있는 이들이다.
영웅 심리가 아닌 가족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무명용사들. 각자의 사연을 만들고 감정을 쌓느라 공을 들였다.
“다른 건 없고?”
-액션 템포와 스케일. 적재적소에 사람 마음을 흔드는 장면들이 정말 좋습니다. 제가 어떤 때는 감독님 따라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런 시나리오를 보면 맥이 쭉 빠집니다.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못 써요.
“못 쓸 건 뭐 있어. 쓰면 쓰는 거지.”
-한 10년을 쏟아 부으면 쓰겠죠. 수정을 거듭해도 흐름만 깨지지 않는다면요. 감독님은 이거 일주일 만에 쓰셨잖아요. 인간의 범주가 아닙니다.
낯 뜨겁게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그래서 전화한 용건이 정확히 뭐야?”
-너무 재밌게 봐서 한마디 해야겠더라고요. 마침 괜찮은 시나리오도 하나 찾았고요.
“메일로 보내. 기내에서 읽어 보게.”
-예.
비행기 탑승 시간이 되어 일어났다.
서연의 얼굴이 애처로워 보였다.
결혼 전과 달리 나나 서연이나 좀 외롭긴 할 것 같다.
서연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밥 꼬박꼬박 챙겨 먹어. 나 없으면 대충 먹는 거 알아.”
“응. 오빠도 끼니 거르지 마.”
서연을 남겨두고 게이트로 향했다.
그녀가 손을 흔들던 그때였다.
“우욱!”
갑자기 서연이 입을 틀어막더니 구역질을 했다.
급히 서연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체했어?”
서연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안 그래도 요 며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서연이 몸을 일으키더니 날 보고 웃었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심정이 그녀의 눈에 있었다.
서연이 말했다.
“실은… 오늘 테스트를 했는데 오빠가 미국에…”
“서연아? 혹시?”
서연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아니 이럴 수가!
“서연아아아!”
서연이를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다 서연이를 덥석 안아 들곤 내 차로 향했다.
미국행이고 나발이고!
“하하하하하!”
“오빠, 미국 가야 하잖아.”
“미국이 나한테 오라고 그래!”
서연이 킥킥대며 웃었다.
공항 로비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쳐다본다.
일부 아주머니분들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고.
그제야 눈치를 챈 이들도 박수를 보내 주신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다!
나와 서연의 2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