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전쟁 영화 ‘갓 필드’ (45/56)

제5장 전쟁 영화 ‘갓 필드’

씰팀이 더 많은 적을 몰고 온 격이었다.

민간인이자 정보요원이 입수한 테러 집단의 정보가 매우 중요한 기밀이라, 테러 집단은 총력을 다해 한국 특수팀을 포위하고 압박했다.

한 번에 들이닥치지 않고 탄약이 바닥날 때까지 집요하게 14인의 특수작전팀을 괴롭혔다. 사흘 밤낮으로 놈들이 잠도 못 자게 계속 총질을 해 댔다. 탈출 지점에 저격수까지 배치되어 함부로 이동할 수도 없었다.

촬영 50일째.

매일 같은 작업이 반복되었다.

아침 7시에 소집하여 촬영 브리핑을 한 뒤, 1시간가량 보조출연자들 동선 리허설하고 해질 때까지 찍었다.

시간 순서대로 찍고 있어서 밤 씬으로 이어지면 패턴이 바뀌었다. 영화 속 전투 장면 5분이 대략 하루 촬영분이었다. 쇼트마다 폭약과 총탄 구멍 효과 설치하고, 리허설도 하는 터라. 안전사고 문제로 대충할 수가 없었다.

샌드위치나 하모니와 달리 웰 메이드 영화는 즉흥적으로 찍지 않고 스토리보드 그대로 찍었다. 사전 리허설을 많이 했던 장면들은 대개 롱테이크로 찍어 놓고 중간에 쇼트를 붙이거나, 그냥 가거나 했다.

그런데 이상한 불안감이 있었다.

감정의 흐름 문제없고. 연기도 자연스럽게 되고 있고.

영화 톤도 별 이상이 없었다.

좀 기계적으로 영화를 찍고 있을 뿐.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촬영하려던 스태프들이 일제히 멈췄다.

왜 불안하고 무기력하나 했더니.

내가 어느 순간부터 예술가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창작자는 속박과 억압, 무질서 등에 창작의 영감을 받는다. 그런 게 없고 안정적인 질서가 계속되면 불안해진다. 예술적 동력의 부족으로 매너리즘에 빠진다고 할까.

약간만 달리 가 보기로 했다.

현재까지 작전팀 감정 상태는 내가 ‘이상한 쾌감’을 얻었던 지점을 100으로 했을 때 60 정도. 적들이 한 번에 몰려오지 않고 괴롭힘만 당하고 있다.

감정의 최대 수치를 120으로 올려 볼 생각이었다. 너무 과하면 편집에서 들어내면 된다. 배우들에게 미안하지만 실제로도 좀 힘들게 해 볼 생각이다. 고생은 되겠지만 나중엔 고마워할 것 같다. 수당도 제법 챙길 테고.

보통 위기감이 어느 정도 높아지면 완급조절 타이밍이 온다. 전쟁 영화 경우엔 병사들이 쉬면서 시시콜콜한 고향 이야기 같은 걸 한다. 이 장면이 지나가면 다시 위기감을 켜켜이 쌓아 올리고 영화 후반으로 달린다.

이 브리지 장면을 줄일 생각이었다. 위기감이 어느 정도 유지된 채 더 큰 위기로 직행하도록. 그러면 감정 지수 120으로 치솟는다. 일단 찍어 놓고 편집할 때 붙여 보면 알 테지.

“촬영 가자.”

“촬영 재개합니다!”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대원 중 8명은 지쳐서 늘어져 있고, 나머지는 사주 경계를 한다. 그러다 누가 접근하면 총을 겨눈다. 탄을 아끼려고 쏘지는 않고. 사흘이나 잠을 못 자서 다들 비몽사몽인 상태다. 그나마 특수부대원이라 버티는 거지.

이번 씬은 적들이 작전팀 총탄을 바닥내려고 제법 몰려오는 장면이다. 상당히 격렬한 전투씬이 될 듯했다.

“액션!”

쿠쾅-

폭발에 건물이 흔들렸다.

늘어져 있던 대원들이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밖을 보던 대원이 얼른 머리를 뺐다.

타타타타탕-

이내 입구 벽에 총탄이 박혀 들었다.

“대응 사격하지 마라!”

“저격수부터 잡아야 합니다!”

“아직 어디에 있는지 확인 못 했다! 우리만 지친 거 아니니 조금 더 기다려!”

“놈들이 돌격합니다!”

“저 자식들, 작정을 했어!”

“각자 위치에서 대응!”

탕- 타탕-

순식간에 숨 가쁜 교전이 일어났다.

“7시 RPG!”

7시 방향 대원들이 일제히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쿠콰쾅-

폭발과 함께 먼지가 터지고 천장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7시 저지해! 그쪽으로 온다!”

대원들은 재빨리 수신호를 해 가며 위치를 바꾸어 나갔다. 7시 방향에 있다가 몸을 날렸던 대원들은 다른 쪽에 자리를 잡고.

건하가 외쳤다.

“드론 착륙했다고 했죠?”

“이전에 고립되었던 건물 옥상에 있어! 탈출 경로 찾으려고 몇 번 띄웠더니 배터리가 나갔다!”

“저희 보조배터리 있습니다! 드론 배터리에 연결해서 충전하면 됩니다! 드론을 날려야 저격수 위치를 알 수 있어요!”

“놈들이 수거했을 텐데?”

“그건 아직 모릅니다!”

“지금 포위 상태다! 뭘 어쩌려고?”

“저와 씰팀 셋이서 가겠습니다!”

“나가면 죽는 거 모르나?”

“어차피 탄 떨어지면 죽습니다!”

“그래, 한번 해보자!”

건하와 두 대원이 뛰어나갈 준비를 했다.

공수팀장이 외쳤다.

“세 사람 나갈 때 엄호해! 기철이하고 현호는 건물 밖까지 나가서 커버해 줘!”

“예!”

건하가 입구 쪽에 섰다. 그 뒤에 선 대원들에게 손으로 수를 셌다. 셋… 둘… 하나!

“엄호!”

타탕- 탕- 탕-

동료가 엄호하는 사이, 건하와 두 명이 재빨리 건물에서 총을 쏘며 나갔다. 곧바로 두 대원도 따라나가며 좌측 우측 적을 향해 쏘았다.

“컷! 오케이! 아주 좋아!”

“드론 수색 씬 갑니다!”

“이동!”

스태프들이 장비를 들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건하팀은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현 건물에서 이전 고립 건물까지 내달리는 장면을 리허설했다.

곳곳에 촬영용 폭발물을 매설하고, 건물 일부도 무너지도록 미리 장치해 두었다. 건너편 건물 옥상에선 적들이 RPG 로켓을 쏜다. 이 험로를 세 사람이 뚫고 나간다.

이 장면은 건하의 1인칭 시점이다.

게임 ‘모던 워페어’에서 따왔다.

긴장감이 엄청난 씬.

나중에 건물을 탈출하여 사지를 뚫고 나갈 때도 같은 방식으로 찍는데, 그때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다. 눈앞에서 총탄이 날아오는 가운데를 뚫고 나가기 때문에.

건하의 전투헬멧에 로큐에서 제작한 VR 카메라를 달았다. 화면이 어지럽지 않도록 초소형 스테디 장치를 하고 전방 180도만 찍는 카메라다. 상당한 입체감과 현장감을 준다. 진짜 전장에 진입한 느낌을 주려고 회사에서 정말 연구 많이 했다. CG로 들어가겠지만 총탄이 귓전을 스치는 게 뭔지 보여 준다.

“리허설 갑니다!”

“건하야! 폭탄 터지는 위치와 총탄 스치는 지점 확실하게 숙지할 때까지 연습해! 아주 중요한 장면이다!”

“훈련장에서 리허설 많이 했습니다! 이미 다 외웠어요!”

“그래! 리허설!”

건하를 필두로 대원들이 달렸다.

특수효과는 촬영 때만 나오고 지금은 그냥 밋밋한 리허설이다. 건하가 어느 장면에서 어떤 효과가 나오는지 다 외우고 있었다. 정확하게 동선대로 움직인다.

그렇게 6번을 연습했다.

건하가 외쳤다.

“한 번에 갈 자신 있습니다!”

“그래! 특수효과팀!”

“예!”

“한 방에 못 가면 특수효과 다시 설치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특효팀도 리허설 때 구경만 한 건 아니다.

동선을 보고 타이밍을 잡았겠지.

“슛 갑니다! 모두 긴장!”

조용해진 가운데 콜이 오갔다.

“액션!”

건하팀이 내달렸다. 그 뒤로 스테디 캠이 따라가며 찍었다. 스테디 캠에 찍히는 건하의 VR 카메라는 나중에 지운다.

난 모니터에 집중했다.

건하팀이 달리는 가운데 주변 벽과 땅에 총탄이 무수히 박힌다. 화면에는 안 보이지만 불씨 같은 총탄이 주변으로 슉슉 지나간다. 이 때문에 드론 수색을 안 했는데, 저격수를 잡으려면 드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

타탕- 타타타탕-

펑- 콰콰쾅-

“오른쪽 옥상 RPG!”

건하가 위를 보자 적들이 옥상에 로켓 런처를 겨누고 있었다. 건하팀이 급히 오른쪽 안으로 뛰다가 몸을 날렸다. 거의 동시에 건하와 대원들이 있던 자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건하와 대원들이 인정사정없이 벽에 처박혀 들어간다. 로켓은 CG 처리되고 슈우욱- 하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들려올 터다.

다시 일어나 달리는 건하팀.

총탄이 얼굴 옆을 스치고, 건물은 무너지고.

벽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다가 자리를 뜨자마자 퍼퍼퍼퍽- 하고 벽에 총탄이 틀어박힌다.

나도, 스태프들도 숨도 못 쉬고 보고 있었다. 콘티로 어느 정도는 예상했는데, 생각한 것에 수십 배 이상의 그림이 나오고 있었다. 드론을 찾아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이 3분간 롱테이크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3분 동안 숨이 막혔다.

다들 저도 모르게 숨을 안 쉬고 있었다.

건하가 마침내 드론을 찾아냈다.

건하팀이 귀환하려다 총탄이 날아들자 몸을 숨겼다.

적들이 무수히 몰려오고 있었다.

“엄호해! 여기서 바로 날린다!”

“알겠습니다!”

두 명은 몰려오는 적을 저지하고, 건하는 주머니에서 보조 배터리와 연결 단자를 꺼내 드론 배터리에 연결했다. 그러곤 케이블 타이 두 개로 보조 배터리를 드론에 부착했다.

바로 무전을 보냈다.

“드론 확보! 손상된 부분 없음! 기동 확인 바람!”

-기동 가능! 귀환해! 드론으로 지원한다!

“예!”

드론이 솟구치듯 날아올랐다.

적들이 그 드론을 잡으려고 마구 총질을 해 대고.

드론으로 지상 상황을 알려주면서 건하 팀이 한 발에 하나씩 적들을 제압하며 귀환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지켜보며 적들의 위치를 알고 움직이니 정말 통쾌했다. 그야말로 무적이다. 가끔 드론을 향해 총탄이 날아들 때는 긴장하기도 했으나 시원시원하게 귀환하고 있었다.

건하팀이 무사히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대원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됐어!”

대원들이 건하와 두 대원을 얼싸안고 손을 힘차게 맞잡았다. 공수팀장은 건하를 힘껏 안아 주고.

“수고했다.”

“죽는 줄 알았네요.”

공수팀장이 외쳤다.

“배터리 오래 못 간다! 드론은 놈들 모르게 숨겨 놓고 밤까지 기다린다!”

“알겠습니다!”

대원들이 다시 서로 격려했다.

“컷! 대박!”

박수가 터져 나왔다.

“휴!”

그제야 여기저기서 숨 내뱉는 소리가 들려온다.

긴장감과 박진감이 정말 대박이었다. 이 장면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찍은 영상에 CG가 들어가면 엄청난 씬이 될 것 같다.

저격수를 잡는 건 세 개의 큰 고비 중 하나일 뿐.

탈출 과정은 정말 지옥이 될 터다.

* * *

촬영 52일째.

한밤에 저격전이 벌어졌다.

적들이 드론의 존재를 알아낸 후 저격수 위치를 바꾸었다. 저격수 총격에 드론의 열화상 감지 장치가 파괴되어 쉽게 찾아낼 수가 없었다. 드론의 카메라 화질도 엉망이었고.

두 팀의 저격수들은 각각 다른 위치에 숨어 있었다.

드론 조종수는 산악 지대를 수색한다.

저격수들이 건물에 나와 자리 잡으면서 양측 모두 교전을 중단했다. 놈들도 저격수는 두렵기 때문에.

건하에게 저격수 무전이 왔다.

치직-

-적들이 안 보입니다.

“건물 안에 있겠지. 변동 사항 없나?”

-없습니다. 조용하네요.

“드론 배터리가 이제 5분쯤 남았다. 지상에 가까이 내려갈 거야. 드론이 접근하면 놈들이 한 번은 쏠 거다. 그때 반드시 찾아야 한다.”

-신호 주십시오.

건하가 신호를 보냈다.

“드론 강하. 집중해.”

다들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영화촬영용 드론도 상공에서 찍고 있다.

군사용 드론이 바위산 쪽으로 내려가던 그때.

빛이 반짝였다. 거의 동시에

타앙-

드론이 총에 맞아 휘청거리더니 추락했다.

순간 왼쪽에 있던 우리 저격수가 곧장 총구를 돌리더니 불꽃을 내뿜었다. 스코프 카메라로 보이는 저편 바위틈에서 적의 머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어둠을 가르고 날아가는 총탄은 CG로 처리한다.

“컷! 고생했어요.”

“이틀 휴식하고 월요일에 시작합니다!”

“수고하셨어요!”

* * *

촬영 108일째.

마을을 탈출하면서 대규모 병력이 팀원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4일간 잠을 못 자고 탈진한 작전팀을 적들은 트럭을 타고 쫓아온다. 지옥의 강행군이었다.

총탄 수십만 발은 쏜 것 같다. 총성을 하도 들어서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극 중 인물의 감정이 지나치게 황폐해진 상황인데, 실제 배우들도 정신이 나갈 정도로 지쳐 있었다.

이틀 밤을 새우고 탈출 장면을 찍고 있다.

이 장면을 일부러 힘들게 찍을 거라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합의를 했는데, 현장에서 내가 더 몰아붙였다. 당연히 나도 잠을 안 잤다. 스태프는 그나마 눈을 좀 붙였고.

“컷! 다시 원위치!”

“아아악!”

배우 일부가 악을 써 댔다.

화를 내는 건 아니고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소리를 질렀다. 일부러라도 고생을 하는 만큼 다들 눈에 광기가 들어찼다.

특히 건하는 무서울 정도로 감정에 몰입했다.

온갖 감정이 눈에 다 들어 있었다.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수호팀도 눈에 독기를 품었고.

어슴푸레한 새벽. 절정의 장면이 다가온다.

이윽고.

“액션!”

쿠쾅- 쾅!

투타타탕- 타타탕-

폭발과 총성이 난무했다.

적들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작전팀은 탄약이 바닥나서 적들의 총인 AK를 들고 있다. 정보요원임이 밝혀진 두 민간인도 총을 쏘고 있고.

100미터 이동하고 따라붙는 적들을 잡은 뒤 다시 이동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물도 못 마셔서 다들 입술이 터졌고, 너무도 지쳐서 눈이 퀭한 대원들도 있었다.

공수팀장이 옆 대원에게 물었다.

“탄 얼마나 있나?”

“거의 없습니다! 방금 잡은 놈들을 뒤져야 할 판입니다!”

“재범아! 미군 헬기는 오는 거야, 마는 거야!”

“지대공 미사일을 쏘는 놈들 때문에 이 지역으로 오기 어렵다고 합니다! 여기서 52킬로미터 지점까지는 가야 합니다! 우리 군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이런 망할!”

다들 다시 걸었다. 뛸 힘이 없었다.

쓰러질 듯 걷던 이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췄다.

다들 헛웃음을 지으며 전방으로 보고 있었다.

이동 경로 방향인 넓은 들판에.

적 수백 명이 탄 트럭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팀원 전원 망연자실한 얼굴로 평원을 보았다.

저격탄도 없고. 소총탄도 없고.

무전기 배터리는 방전됐고. 식량도 물도 없고.

산으로 올라갔다가 포위되면 고립무원이 될 거 뻔하고.

방법은 왔던 길 되돌아가서 쫓아오는 놈들 다 잡고 총탄을 챙기는 수밖에 없다. 이대로 전진하면 전멸이기에.

다들 주저앉은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이젠 군인이고 뭐고 그냥 인간일 뿐이었다.

그때, 망원경으로 보고 있던 건하가 일어났다.

그 모습에 대원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몰려오는 병력을 보는 건하의 뒷모습.

목숨을 건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대원들이 분분히 일어나 건하와 함께 앞을 보았다.

건하가 말했다.

“승하, 민수, 지원이. 나와 함께 저들 옆을 친다.”

“알겠습니다.”

“형님은 뒤쪽 놈들 잡아 주세요. 저 산 중턱에서 집결합시다. 둘 다 성공하지 못하면 전멸합니다.”

“알았다. 건투를 빈다.”

건하가 정면을 보았다.

전방을 응시하는 우수에 젖은 눈.

앙다문 입과 거칠게 자라난 수염.

“가자.”

건하와 세 대원이 앞으로 나아갔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걸어가는 네 사람.

정말 늠름하고 멋지다.

그들의 걸음이 빨라지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컷! 좋았어!”

건하 저거 왜 저렇게 멋있어?

건하의 연기가 눈물 날만큼 좋았다.

수혁이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소름이 돋았는지 연신 팔을 만지고 있다. 안 그래도 몰입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건하였다. 마지막 비장미는 정말이지….

마지막 촬영이 얼마 안 남았다.

이번 마지막 고비가 절정이다.

이미 감정의 100%는 달성했다.

내가 경험했던 쾌감은 이제 곧 나온다.

영화가 정말 잘 나올 것 같다.

문득 신을 불러 보고 싶었다.

이대로 끝까지 가길 바라는 마음에.

신이시여.

정녕 이 영화를 제가 만들었단 말입니까?

* * *

열기로 가득한 대지에.

정말 미친 듯한 열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타타탕-

펑- 쿠콰콰쾅-

“지원아! 탄창 받아!”

“예!”

“놈들 사살하고 안전 확인한 뒤에 탄창 확보해!”

대원 뒤로 갑자기 적이 나타난다.

타앙-

적이 쏘기도 전에 건하의 총에 맞아 굴러떨어졌다.

엄폐물이 많은 바위산을 뛰어다니며 그야말로 게릴라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네 명이 100여 명을 상대했다. 대원들의 반응 속도가 훨씬 더 빨랐기에 아직은 버티는 중이었다. 한꺼번에 몰려와 네 사람을 에워싸면 그때는 답이 없다.

“총성 듣고 몰려옵니다!”

“이동!”

네 명이 흩어지며 바위산을 내달렸다. 마름모 전술 대형으로 달리며 전후좌우에서 나타나는 적들을 잡으려 달렸다.

“전방에 8명.”

“자세 낮춰.”

건하가 재빨리 주변에 적 위치를 살폈다.

빠르게 손짓으로 사살할 적을 정했다.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네 명이 두 명씩.

턱짓으로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네 명이 동시에 일어나며 총을 쏘았다.

타탕-

네 명이 쏘았는데 총성은 두 번 들려왔다.

올라오던 8명은 동시에 쓰러져 굴러 내려가고.

“승하! 민수! 탄창 확보!”

두 명이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컷! 오케이!”

“얼음물 드세요!”

“현지 출연자분들에게도 드려!”

“예!”

촬영이 중단되자 스태프들이 파라솔을 설치하고, 배우들에게 물을 건넸다. 휴대용 선풍기로 땀을 식히긴 했으나 공기가 뜨거워서 별 소용이 없었다. 얼음을 얼굴에 대자니 분장이 지워지고.

그늘막에서 숨을 몰아쉬는 건하와 배우들.

쉬면서도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

어찌나 독기가 센지 분장팀이 겁을 먹을 정도다.

휴식도 잠시, 다시 정신없는 전투 장면이 이어졌다.

* * *

정말 미친 듯이 영화를 찍었다. 현장도 미쳐 돌아가는 분위기고, 영화 내용도 광기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나도 내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미쳐 갔다. 배우들을 너무도 몰아붙여서 스태프들이 넋을 잃고 날 보고 있을 지경이었다.

폭탄은 수도 없이 터지지. 총성에 머리는 멍하지. 찍은 쇼트인지, 안 찍은 쇼트인지 분간도 안 되지. 스크립터는 꾸벅꾸벅 졸다가 기록 놓치기 일쑤지.

나와 수혁이, 스크립터. 셋 중 하나만 방심하거나 뭘 놓치면 사고가 나는데 세 사람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콘티대로 무사히 찍기는 했다는 점이다.

가수는 자기 노래대로 간다고 했던가.

영화도 좀 그런 것 같았다. 영화 후반에 미친 듯한 위기에 몰리자 스태프와 배우들도 반쯤 미쳐 갔다. 너무도 지쳐서 악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어차피 촬영 막바지인 터라 촬영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태산처럼 쌓인 촬영 일정표에 찍은 장면을 지워 나가면서 기계적으로 찍어 댔다. 배우들도 다 미친 상태라 내가 따로 디렉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찍고 또 찍고.

찍고 나면 촬영 시트에 X 표시를 하고.

한 쇼트, 한 쇼트 묵묵히 지워 나갔다.

까마득히 먼 길에 놓인 걸림돌을 하나하나 치우듯.

엄청난 액션과 긴장감이 몰아치는 장면인데도 쇼트별로 나눠 찍으니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지쳤고,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찍다 보니 어느새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넘어가 버렸다. 바위산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포위될 때가 있었는데 그때 건하가 감정의 120%를 찍었다.

머나먼 길을 묵묵히 앞만 보고 갔더니 어느새 목적지를 지나쳤던 거였다. 물론 촬영할 때 확인할 거 다 확인했다. 특히 건하의 연기와 감정선을 중심으로. 그것만 오케이 되었다면 다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큰 고비를 넘으니 마음이 편했다.

이후로는 교전이 없는 고행의 걸음만 있었으니.

오늘이 터키에서 마지막 촬영이었다.

122일 동안 사건 사고도 좀 있었다.

종일 총을 들고 있다 보니 오발 사고가 몇 번 있었다. 공포탄이라고 해도 바로 앞에서 사람을 쏘면 다친다. 대부분 자기 다리나 앞사람 등을 쏜 사고였다. 보조출연자 십 수 명이 피 봉지가 터질 때 살이 벗겨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스태프들 몰골은 거지꼴이 된 지 오래고.

몸은 씻는데 빨래는 안 하는 바람에.

게다가 터키의 한여름 날씨는 어찌나 더운지.

다들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겠지만 낙오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냥 고생만 하고 있다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너무나도 잘 나올 것임을 다들 확신했다.

대원들이 태양이 작열하는 대지를 좀비처럼 걷기만 한다.

중상자만 5명이다. 그들을 대원들이 나무와 군복으로 엮은 들것에 비스듬히 눕혀 질질 끌고 가고 있다.

지독했던 최후의 교전 이후 이틀 내내 걸었다.

달궈진 땅도 공기도 너무도 뜨거웠다.

영화 속에서만 대원들이 죽도록 고생을 하는 게 아니라 배우들도 그랬다. 며칠 전에는 힘들다고 말하던 배우들이 이젠 말할 힘도 없어서 묵묵히 촬영에만 임했다.

싸우는 장면은 그나마 총성 때문에 정신이라도 번쩍 들지. 촬영 내내 걷기만 하니 다들 죽을 맛이었다. 실제로 배우 중 하나가 쓰러지기도 하고.

그렇게 영화상으로 이틀을 걸었을 때.

몇몇 대원들이 걸음을 멈추고 저편 하늘을 보았다.

나머지는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다.

그나마 정신이 멀쩡한 건하가 망원경을 꺼내 지평선을 보았다. 다른 대원은 겨우 군복만 걸친 상태인데, 건하만 생존에 필요한 걸 아직 지니고 있었다.

건하의 태도에 그제야 다들 관심을 기울였다.

하나둘 일어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지랑이가 오르는 지평선 저편에서.

작은 뭔가가 흐릿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일렁거리는 어떤 물체가 점점 가까이 온다.

그 모습을 본 대원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은 허탈하게. 조금은 미소를 지으며.

환희에 빠질 힘도, 소리를 지를 힘도 없었다.

옆에 앉은 동료를 부둥켜안을 뿐이다.

건하는 정말 멋진 자세로 망원경을 보다가 내려놓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소총은 꽉 움켜쥔 모습으로. 씰 대원들도 하나둘 건하 뒤와 옆에 같은 자세로 앉았다. 공수팀도 마찬가지였다. 군복 단추를 채우며 총기를 고쳐 잡았다.

그렇게 대기했다.

대한민국 특수부대의 자세였다.

타타타타타타-

눈물 나게 반가운 헬기의 로터음.

지옥을 탈출한 대원들 앞에 헬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태극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먼지 폭풍을 일으키며 수송 헬기가 착륙했다. 그 헬기에서 공수특전단 대원들이 줄줄이 내리며 사주 경계를 하며 자리를 잡았다. 양옆으로 퍼지며 한쪽 무릎을 꿇는다. 사지에서 탈출한 대원들에게 경외와 존경을 보내듯.

작전 통제관이 헬기에서 나왔다.

건하가 대표로 통제관 앞에 서서 경례했다.

“대한민국 해군특전전단 씰팀이 임무 완수를 보고합니다. 부상자 5인이 있으나, 14명 전원 무사합니다.”

통제관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가 경례를 받지 않고 건하를 덥석 안았다. 이어 나란히 서서 경례하는 다른 대원들도 안았다. 공수팀과 부상자들을 안을 때에는 결국 눈물을 쏟았다.

사령부에서 본인도 엄청난 마음고생을 했다는 듯.

통제관이 말했다.

“이제 집에 가자.”

그 말에 대원들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부상자들 먼저 헬기에 올랐다. 대원들도 하나둘 헬기에 오른다. 가장 늦게 건하가 남아 있다가 뒤를 보았다.

멀고 먼 저편에 그들이 있었던 지옥의 바위산이 보인다.

그 바위산을 물끄러미 보는 건하.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 건하의 얼굴에서.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했다는 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말할 힘도 없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힘을 짜내서 외치는 소리였다. 다들 눈물이 쏟아진다. 이미 펑펑 우는 친구들도 있고.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영화 찍으면서 이렇게 힘든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감격스러운 것도 처음이었다. 이만큼 성취감이 컸던 것도 처음이다.

영화가 형편없었다면 눈물도 안 나왔겠지.

현장 분위기가 엉망진창이었어도 마찬가지.

연기가 그저 그런 수준이었어도 그렇고.

지상 촬영은 끝났다.

나와 배우들, 카메라감독만 탑승해서 헬기 내부 씬을 찍었다. 처참한 몰골이 된 대원들이 숙연해지는 장면. 그들이 묵묵히 격려하고 포옹하는 모습도 찍고.

이어 카메라는 지옥 같았던 땅을 담았다.

바람을 맞으며 그 땅을 바라보는 건하도 찍고.

건하의 시선으로 땅이 점점 멀어지면서 엔딩.

촬영을 끝내고 헬기가 다시 캠프로 날아갔다.

헬기는 우릴 내려주고 곧장 남쪽으로 향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한 명씩 안아주었다.

4개월간 이어진 촬영이 마침내 끝났다.

* * *

한국에 돌아오고 보니 가을이 되었다.

서연이 정성스레 차려 주는 밥을 먹으며 집에서 쉬기만 했다. 너무도 힘든 촬영을 했더니 꼼짝도 하기 싫었다.

내가 어찌나 초췌했는지 서연이 인천공항에서 날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을 정도다. 시커멓게 타서 그런 것도 있고.

왜 그렇게 고생을 해 가면서 일을 하나 싶을 터다.

귀국한 뒤 꼬박 일주일을 쉬기만 했다.

서연은 넉 달 동안 나 대신 회사 일도 챙기고, 청년 재단 일도 하고 그랬는데 귀국한 뒤로는 나와 함께 쉬었다.

넉 달 동안 부부관계가 없었던 터라 지난 며칠 정말 불타올랐다. 떨어져 있다가 사랑을 나누니 정말 애틋했다. 그 바람에 서연이 애정 표현도 늘어나고.

나는 편집을 해야 하고, 서연이도 이제는 출근해야 해서 내 차를 타고 함께 회사로 향했다. 회사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구 대표의 출근 요청이 있기도 했고.

청년 재단이 있는 건물에 서연을 내려주고 난 회사로 들어갔다. 직원들이 날 보곤 깍듯이 인사를 했는데 다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유는 대충 알고 있다만.

로비에 회사 사명이 세 개나 있다.

회사가 세 개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R&C 엔터테인먼트.

RC E&M

플래닛 케이.

R&C 엔터테인먼트는 지주사이자 영상제작사다.

RC E&M은 연예기획사 및 공연제작사.

플래닛 케이는 이전과 같이 영상 플랫폼.

같은 건물을 그대로 쓰고 계열 분리만 되었다.

두 회사는 아직 상장을 안 한 상태이고.

지분 변동이나 현재 주가 등 알아둘 점이 좀 있었다.

내 사무실에 들어가자 구 대표가 급히 찾아왔다.

“자네 얼굴 보는 게 이리 반가울 줄은 몰랐구먼.”

“대주주들이 난리를 쳤다면서요?”

“말도 말게. 자네 터키에 있는 동안 계열사 지분을 확보하려고 온갖 편법을 동원하더구먼. 이사회에서 대주주들이 다수결로 결의를 해버리니 내가 어쩔 수가 있어야지.”

마침 내 책상 위에 지분 현황표가 있었다.

뭐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당연히 로큐가 계열사의 최대 주주가 되어야 하는데, 웬 중국 자본이 잔뜩 들어와 있었다. 회사 규모에 비해 자본금이 너무 많다.

로큐 대주주들이 세력을 모아 결의를 한 모양인데 최대주주의 의결이 없는 가운데 무모한 짓을 했다. 물론 회사 자본금이 일시에 커져서 자기들은 좋은 일을 했다고 볼지도 모르겠다.

이건 누가 봐도 내가 신경을 안 쓸 때 지분을 확보하려는 모양새다. 게다가 계열사 대표들까지 자기들 사람을 내세우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지분이 그만큼 있다는 말이겠지.

간단히 말해서.

계열사를 크게 키워서 먹어치우려는 사전 작업이다.

배후에는 중국 자본이 있고.

구 대표가 말했다.

“자네가 회사 경영에 신경을 안 쓰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세. 최 대표가 터키에 가자마자 대주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더구먼.”

“예. 저도 보고는 받았습니다. 촬영에 바빠서 회사에는 신경을 못 썼네요.”

“심각한 일인데 최 대표는 너무 태평해.”

“심각할 거 뭐 있습니까?”

“어째서?”

“회사 매각하면 되죠.”

“뭐?”

말을 하고 씩 웃었다.

말 그대로다. 회사 매각하면 된다.

현재 로큐 주가는 9만 원대다. 작년 연말에 12만 원까지 올랐다가 회사가 분리된다는 공시를 한 뒤 9만 원으로 빠졌다. RC E&M과 플래닛 케이가 상장하면 주가는 각각 2만 원대와 3만 원대에 그친다. 상장 때만 반짝하고 반 토막 날 수도 있다.

구 대표가 말했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진심입니다. 임시 이사회를 열어 주세요.”

“나한테도 말해주지 않고?”

“말씀드리죠.”

구 대표에게 내 구상을 설명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

내 말이 통하면 그대로 가고, 안 통하면 매각한다.

나야 현금 8천억가량이 생기는 거고.

며칠 후.

임시 이사회가 열렸다.

구 대표와 함께 회사 대회의실에 들어가자 주주들이 모여 있었다. 대주주뿐 아니라 증권사 등 기관의 임직원들도 와 있었다. 중국 자본이 배후에 있는 대주주들은 자못 긴장한 표정이고, 기관 임직원들은 입가에 조소를 띠고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상한다는 듯.

난 대주주들에게 인사도 안 하고 그냥 앉았다.

그동안 헤지펀드와 거대자본이 왜 로큐를 넘보지 않았을까.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 안다. 그걸 아는 대주주가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중국 측의 압박 때문이겠지.

쓸데없는 임시 총회 절차가 이어졌다.

인사하고 설명하고 이런 순서를 왜 밟는지 모르겠다.

“이어 R&C 엔터테인먼트의 최대주주이시고, 대표이사이신 최신성 감독님께서 임시 이사회를 개최한 이유를 설명하시겠습니다.”

조용히 일어나 연단 앞에 섰다.

좌우로 앉아 있는 주주들을 빤히 보았다.

무슨 조폭들이 모여 있는 것 같다.

“제가 영화 찍느라 바쁜 틈을 이용하여 꼼수를 좀 부리셨더군요.”

내 말에 일부 대주주가 발끈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꼼수라니요!”

“말이 심하십니다, 감독님!”

씩 웃어 주곤 다시 말했다.

“회사에 아무런 기여도 안 하신 분들이 회사를 거저먹으려고 하는 건 심한 게 아니고요? 세상에 돈이면 다 된다고 보십니까?”

“최신성 대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계열사 대표이사로 거론되는 분들은 어디서 온 분들이죠? 계열사 대표는 당연히 로큐의 임직원이 승진해서 앉을 자린데 말입니다. 누가 그 사람들을 대표직에 앉히려고 합니까?”

내 말에 발끈한 주주들이 입을 닫았다.

대주주들의 얼굴에 낭패가 서리는 게 보였다. 내가 영화에만 몰두하고 경영에는 전혀 신경을 안 쓸 것으로 보고 과감한 시도를 했던 모양이다. 사람을 얼마나 무르게 봤으면.

“긴말 않겠습니다. 중국 자본 모두 빼시고, 경영에서 손을 떼세요.”

“최 대표!”

“회사를 위해 자금을 유치한 건 아닙니까!”

“최 감독이 경영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럽니까!”

“감독님, 화이팅!”

“하하하하!”

회의장이 시끄러워졌다.

대주주들은 얼굴이 시뻘게졌고, 기관 임직원들은 실소를 참느라 애쓴다. 일반투자자들은 웃고 박수 치고.

한 대주주가 심각한 얼굴로 외쳤다.

“우리가 중국 자본이 들어와야 중국 진출에 유리한 겁니다! 없던 일로 한다면 중국 사업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이게 다 회사를 위해서 한 일입니다!”

“회사가 아니라 본인들을 위해서겠죠.”

“좋게좋게 갑시다! 우리가 회사를 차지하려는 것도 아니고, 최 감독이 회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회사의 자본이 늘어나면 그만큼 회사가 다양한 분야에 투자하고 사업도 확장하여…”

“솔직해집시다. 로큐를 중국에 넘길 생각 아닙니까?”

내 말에 대주주가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로큐 주식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대주주가 된 이들이 지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다들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경영을 안 해도 못은 박아 둔다.

“일주일 드립니다. 제가 없는 동안 벌어진 일. 모두 원상복귀 해놓으세요. 여러분이 계열사 경영에 압력을 넣거나, 앞으로 또 이런 쓸데없는 일을 꾸민다면 저는 지분을 전량 매각하고 회사를 나가겠습니다. 아마 전 직원과 소속 배우들이 제가 새로 만들 회사로 이직할 것 같군요. 당연히 플래닛 케이도 가지고 갑니다. 그럼.”

바로 회의실에서 나갔다.

“이봐요! 최 감독!”

“최신성 대표! 우리 말도 좀 들어봐야지 않소!”

기관 임직원과 일반투자자들이 회의실에서 나가는 날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걸 보려고 급히 달려왔던 분들이겠지. 대주주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고.

안 될 거 알면서 왜 헛수고를 하는지 모르겠다.

인간이 돈에 눈이 멀어 판단이 흐려지는 거지.

이사회에서 내가 한 말은 며칠 후 실현되었다.

나는 곧장 편집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 * *

영화 찍을 때도 정신이 없더니.

편집 때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쇼트가 많아서 보조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로큐의 편집실장이 작업을 하고, 나는 옆에서 감독 노릇을 했다. 수혁이는 내가 찾는 데이터를 모니터에 띄워 주고.

스크립트에 기록한 순서대로 편집했다. 그러다가 더 나은 그림이 나올 것 같으면 슬쩍 바꿔 보기도 하고. 그렇게 더 나은 장면을 수차례 건졌다.

롱테이크로 찍은 장면이 많은데 롱테이크 자체가 나은 것은 그냥 두고, 중간에 쇼트를 붙이는 게 나으면 그렇게도 가 보고.

“이거 좀 잔인하지?”

“전쟁물이면 이 정도는 될 걸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15세 관람가인데.”

내장이 쏟아진다든가 하는 장면은 없지만 영화 분위기가 좀 잔인한 면이 있었다. 총탄이 빗발치는 게 너무 아슬아슬하고 긴장감의 수위가 높다. 청소년은 부담이 좀 될 것도 같다.

어쨌거나 애초에 편집 방향대로 갔다.

시퀀스별로 가편집해 놓고 다시 점검하고, 가편집본을 모아서 전체 연결도 확인해 보고. 그렇게 영화 중간 분량까지 편집을 했는데.

“왜 그래?”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요.”

나와 수혁이가 커피 한 잔 마시고 들어왔더니.

편집실장이 덜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건하가 드론을 찾아내고 귀환한 장면까지다.

편집실장이 웃었다.

“와, 너무 소름이 돋으니까 정말 춥네요. 난 무서워서 잘 안 보는데 공포 영화 왜 보나 했네.”

“건하 멋있지?”

“그럼요, 우리 건하 씨. 여자들의 로망. 헤헤.”

“전쟁물이라 건하의 매력이 좀 희석되긴 했어.”

“아닌데요? 더 멋있는데요?”

“그래?”

“그럼요. 건하 씨가 좀 약해 보이고 남성적인 매력이 좀 떨어졌는데, 이번엔 묘하게 멋있어요. 모성애를 자극하면서도 남자답다고 할까? 꽃미남과 상남자를 합쳐 놓은 것처럼.”

수혁이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의도한 걸 편집실장이 바로 포착했다.

연민이 느껴지는 남자다움을 보여 주고 싶었으니.

“영화는 어때?”

“지금까지는 너무 재밌어요. 전쟁 영화 잘 안 보는데 건하 씨랑 배우들이 다 멋있게 나와서 남자 보는 맛도 있네요. 너무 현실적이라 좀 무섭긴 하지만. 그런데 너무 긴장이 되어서 머리가 아파요.”

“머리가 아프다고?”

“네. 숨을 안 쉬어서 산소가 부족한가?”

여자들에게 전달되는 긴장감이 훨씬 더 큰 모양이다.

극장에서 정말 졸도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수혁이가 말했다.

“여성 관객은 관람이 힘들겠는데요?”

“일단은 원래 방향으로 가 보자. 사내 시사회 한 다음에 직원들 반응 보고 편집 방향을 달리해 보든가 하자고.”

“네.”

다시 편집에 집중했다.

귀국해서 보름쯤 지나니 일상으로 돌아왔다.

서연이와 오전 5시에 일어나서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을 1시간 하고 집에서 밥을 먹었다. 밥은 서연이 해도 설거지는 늘 내가 했다. 청소도 주로 내가 하는 편이었고.

내 책상은 늘 어지러운 상태로 두었다.

서연이 그런 날 이상하게 보았다. 거실과 침실은 매일 청소를 하면서 서재만 책이나 메모 등으로 어질러 놓은 상태로 그냥 두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었다.

주변이 어지러워야 시나리오 쓸 때 집중이 잘 된다.

무질서가 창작의 영감을 주는 까닭에.

공부할 때는 반대겠지.

어쨌든 매일 출근해서 8시간 편집을 하고 서연과 함께 퇴근해서 밤에는 블루드 워 2편 구상을 했다. 구상을 치밀하게 해서 집필에 들어가면 바로 나올 수 있도록.

다른 감독들은 작품 하나 하는 데 3년씩 걸리고 그러는데, 난 코어 덕분에 쉬지 않고 작업을 할 수가 있었다. 시나리오 재고 과정만 1년이 걸리는 경우가 없으니까.

그리하여 한 달 만에 최종 편집본이 나왔다.

편집실장은 일부러 편집본을 안 봤다. 극장에서 보고 싶다며. 내용이야 다 알지만 감정의 흐름은 모르는지라.

그때 오랜만에 네오에 있는 혁민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대신 네오스타 경영을 대리하는 친구다.

“응, 왜?”

-11월 5일에 아메리칸 필름 마켓이 열리는데 전쟁 영화 출품 안 하세요? 이동욱 대표가 인맥 좀 넓혀 보라고 함께 가자고 하시는데요.

“베를린 영화제 출품하려고 하는데?”

-아, 그러시구나. 베를린 때 저도 가도 되죠?

“그럼. 블랙버드는 촬영 중이지?”

-예. 다다음 달에 크랭크 업 할 것 같습니다.

“전화 잘했다. 네오 CG팀 한국으로 보내.

-예. 다들 대기하고 있었어요.

“그래, 베를린에서 보자.”

-알겠습니다.

블랙버드는 네오스타에서 촬영 중인 개별 히어로 영화다. 몸에서 강력한 힘을 분출하는 영웅으로 분출되는 힘으로 비행이 가능해진 인물이다. 나중에 시리즈 주인공인 액셀의 동료가 된다.

네오스타 합작 드라마도 제작 중이다.

네오스타에 원안을 투고했던 작가를 중심으로 4명의 작가가 공동 집필했고, 16부작 대본 작업만 10달이 걸렸다. CG가 꽤 들어가는 우주 배경이다 보니 프리가 길어지고 있었다.

편집이 끝나고 4일 후.

네오스타 CG팀이 한국에 왔다.

다국적 직원 6명에 한국인 3명이다.

프로그램만 있으면 한국에서 작업할 수 있기에 내가 미국으로 안 가도 되었다. 직원들은 한국 생활도 좀 해 보는 거고.

한 달간 이어진 CG 작업이 끝나고 영상보정팀에 영화 데이터를 넘겼다. 그 작업이 끝난 뒤에는 사운드팀과 영화음악팀에 넘겼고.

그리하여 4개월에 걸친 후반 작업이 끝났다.

한여름 터키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벌써 한겨울이었다.

사내 시사회를 하려고 했는데, 전쟁 영화에 대한 직원들 기대가 대단히 컸다. 극장에서 보겠다는 직원들이 대다수였다.

남녀 직원 10명만 모여 영화를 보았다.

남자와 여자 반응이 어떻게 다른지 보려고.

* * *

사내 시사 반응이 충격적이었다.

영화를 본 직원들에게는 절대 본인들이 보인 반응을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다. 이상 반응을 보인 여직원은 일하지 말고 쉬라고 했다.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혁이와 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이걸 어떻게 재편집을 해야 하나.

남녀노소가 따로 관람하게 구분할 수도 없고.

“남녀 구분 상영이라도 해야 할까요?”

“극장이 그렇게는 안 해 줄 텐데?”

“이대로 상영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그래, 심장이 약한 분들도 있으니까.”

수혁이와 의논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각오하고 영화를 봐야 한다고 홍보를 하면 좀 나을까. 너무 긴장해서 기절할 수도 있다고.

그러면 영화 안 볼 사람이 많아질 텐데.

남자들은 일단은 보러 갈 것 같고.

여직원들이 건하가 나올 때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걸 보면 여성 관객에게도 이번 영화는 좀 통할 것 같다.

아, 이 일을 어쩐다.

너무 현실감이 강해도 탈이다.

전쟁 영화에 VR 카메라 효과가 이렇게 클 줄 알았나.

그때 수혁이 눈이 반짝였다.

“음악! 직원들이 공통으로 반응했던 지점에 음악을 까는 건 어떨까요? 평화로운 클래식 음악을 깔아서 전쟁의 참혹함을 반어적으로 표현한다든가, 로큰롤을 넣어서 경쾌하게 간다든가.”

“과도한 집중을 분산해 보자는 거지?”

“네.”

수혁이 말대로 시도는 해 보기로 했다.

음악이 긴장을 너무 낮춰도 안 되니 여러 음악을 써 보고 적정선을 찾아야 했다. 현실적인 전쟁물인데 음악이 뜬금없이 들어가는 것도 좀 그렇지만.

음악을 넣었더니 튀었다.

결국 없던 일로 하고 고민을 하다가 해당 장면 앞에서 긴장감을 한 수치 내리는 쇼트를 집어넣기로 했다.

적들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줄줄이 미끄러지지는 NG씬이 있었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붙였다. 피식 웃음이 터지면서 긴장감이 약간 사라지는 효과가 있었다.

재편집한 최종본을 다른 직원들에게 보여 주었다.

덜 충격적이었다.

최소한 관객이 졸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원본을 버리진 않았다.

배급사와 논의를 해서 두 가지 버전으로 개봉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여성 관객은 재편집 버전. 남성 관객은 원본 버전을 보는 것을 권유하기로.

예고편을 만들어 베를린에 보냈다.

독일에 터키 이민자가 워낙 많아서 그랬는지 자연스레 독일에 홍보가 되었다. 그 덕에 베를린 영화제 측에서 먼저 출품 요청을 했었다. 경쟁 부분이 아닌 포럼 부분에.

나도 이 영화로 상을 받을 생각이 없었으니 당연히 포럼 부분이다. 재기 발랄한 영화들이 출품되는 부분인데, 마켓에 큰 힘을 작용한다. 베를린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전쟁 영화를 보다가 희한한 경험을 한 게 분명했다.

베를린 영화제가 2월 6일에 열리는 터라, 영화 출품 후 설 명절을 즈음하여 한국 개봉이 될 듯했다. 전 세계 바이어들이 몰리는 영화제이니 마켓에서 제법 팔려 나갈 것 같기도 하고.

하여 2월 4일.

나와 서연이, 건하와 배우 2명이 베를린으로 떠났다. 배우들도 아직 영화는 못 봤다. 아마 깜짝 놀랄 거다.

* * *

베를린 영화제는 베니스 영화제보다는 화려한 편이었다. 메인극장이 베르리날레 팔라스트 극장인데, 그냥 할리우드 영화 시사회 행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서연과 함께 온 것은 영화제 측에서 서연도 함께 초청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영화제에선 감독 부인도 초청하는 모양이었다. 내 아내는 세계적인 배우이기도 하니.

나와 서연이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분장을 했다. 회사 코디 팀이 따라온 터다. 수혁이와 희진이도 휴가 겸 비서 노릇 하느라 따라왔고.

똑똑.

코디가 문을 열어보자 권혁민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녀석과 악수를 하고 같은 비서진인 수혁이와 희진이와도 인사를 했다. 이동욱 대표도 필름 마켓 멘토 역할을 하러 함께 왔다.

“영화 잘 나왔다면서요?”

“네. 촬영 때만 해도 확신을 못했는데, VR 카메라 효과가 예상보다 컸네요. CG와 그렇게 잘 맞을 줄은 몰랐어요.”

“기대됩니다. 시리즈 2편 시나리오는 쓰고 계신 거죠?”

“그럼요.”

“올해 상반기에는 제작하셔야 해요. 네오스타야말로 감독님 회사 아닙니까. 아, 죄송해요. 보자마자 잔소리해서.”

“그럴 만하죠.”

건하와 배우들도 턱시도를 입고 나왔다.

꾸며 놓으니 정말 배우들 같다.

공수팀장 역의 연극배우와 수호팀의 ‘처음’이 참가했다.

영화에서 가장 연기가 빛났던 배우들이라.

“갑시다.”

호텔에서 나갔다.

베를린 영화제에 협찬한 BMW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앞차에 나와 서연이 타고, 뒤차에 배우들이 탔다.

난 파란색 타이를 매고, 서연도 새파란 드레스를 입었다.

회사 코디 팀이 일주일이나 고른 의상이다.

드레스에 제법 가슴이 파여서 야하긴 했다.

차를 타고 극장으로 향했다.

왜 파란색 드레스를 골랐는지 극장에 도착한 후에야 알았다. 극장 주변이 온통 붉은색이다. 조명도, 레드 카펫도, 극장 앞에 세워진 커다란 영화제 간판도.

파란색이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돋보였다.

무명 배우들이 먼저 내리면 ‘쟤들 누구야?’ 할 게 뻔해서 우리가 먼저 내렸다.

“와아아-”

함성과 플래시가 함께 터졌다.

서연이를 에스코트하며 대기했다. 우리 뒤에 건하와 배우 두 명이 섰는데 다들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른다. 건하를 알아보는 사람은 꽤 많다. 관중 대부분은 웬 경호원들이 레드 카펫에 서 있느냐는 표정이다.

다 함께 레드 카펫을 걸었다.

포토 라인에 서서 사진도 무수히 찍히고.

이걸 즐기는 사람도 많겠지만 난 언제나 고역이었다.

“숀짱! 욘짱!”

“감독님! 서연 언니!”

일본팬과 한국팬들도 있다.

두 나라 팬들이 마구마구 손을 흔들었다.

내가 손을 흔들자 되게 좋아하신다. 그런데 건하가 웃으며 손을 흔들자 비명을 질러 댄다.

바로 인근 호텔로 향했다.

개막작 상영 전에 모여 영화인들이 담소도 나누고 인맥도 만드는 자리. 기자와 바이어도 많다.

유난히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기자가 많았다.

건하와 두 배우가 소외당할까 봐 인터뷰와 인사는 대충하고 그들과 샴페인을 마셨다.

공수팀장 역의 배우가 말했다.

“유명 배우도 아닌데 제가 참석해서 민망하네요.”

“곧 유명해질 겁니다. 긴장 푸세요.”

“아, 진짜 꿈만 같습니다. 제가 이런 데를 다 오고.”

웃으며 배우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건하가 무심하게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데, 자꾸만 여배우들이 기웃거렸다. 일본 배우, 중국 배우, 유럽 배우들. 잘생긴 남자 옆에 선 못생긴 남자처럼 그들을 차단했다. 내 모습에 서연은 킥킥대며 웃기만 하고.

건하는 임자가 있다고.

내가 일부러 이곳에 데려왔거든.

처럼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건하 형이야. 여배우들 관심 폭발이네.”

“건하가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게 문제지.”

“그러니 여자들이 더 미치지.”

거의 모든 여자가 건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 남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지?

저 근육질에 저런 얼굴이라니.

이런 생각이 여배우들 눈에 담겨 있었다.

노인네가 대다수인 이 연회장에서 건하는 정말 빛이 났다. 군계일학이라고 할까. 배우들의 실제 모습은 사실 일반인과 별 차이가 없다. 분장을 해서 배우로 변신하는 거지.

유명한 남자 배우들도 그냥 아저씨들이다.

그런데 건하는 존재 자체가 화보다.

비쩍 마르고 허리가 구부정할 때도 타고난 멋이 있었는데, 이제는 남자의 향기가 물씬 난다.

건하는 정신적 육체적 성장통을 겪었다. 드라마도 하고, 이런저런 영화도 하면서 건하가 성장했다면, 바로 오늘 그 건하가 완성된다. 위대한 배우로.

연회가 끝나고 다들 극장을 이동했다.

우리도 극장으로 함께 갔다.

이번 베를린 영화제 개막작이 내 영화다.

베니스에서 2위 했다고 대접해 주는 건 아니고.

영화제 초반에 화제 몰이를 하려고 선정한 거였다.

화제가 아니라 사건이 될지도 모르는 판인데.

극장에 영화인과 일반 관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개막작인 터라 기자와 바이어도 많다. 개막작 반응을 담으려는 방송 카메라도 꽤 많이 보였다.

객석이 다 채워지자 독일 배우가 나와 뭐라 인사를 했다. 영어로도 짧게 인사를 하고. 내 영화 ‘갓 필드’ 소개도 했다. 우리 일행 모두 일어나 객석에 앉은 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눈빛들 보니 어떤 영화인지 지레짐작한 것 같다.

그동안 내가 한국과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들의 정서를 아니까. 오늘 이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인사가 끝나자 극장이 어두워졌다.

로큐의 트레이드 마크가 나오고 이내 어둠만 가득한 스크린이 나왔다. 그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공수대원들이 인질을 구출하는 첫 장면이다.

시작부터 액션이 시작되자 관객들이 집중했다.

그냥 전쟁 영화의 오프닝이니 다들 편안한 자세로 영화를 보고 있다. 일부의 눈에는 한국인 애국심 고취하는 전쟁 영화가 왜 개막작이냐는 불만도 보이고.

그다음 시퀀스는 씰팀 장면.

뭐 이때도 뻔한 전개네 싶은 얼굴들이다.

작전에 투입되어서 진부하기 짝이 없는 람보식 전투를 하다가 무사 귀환하겠지 싶은 표정.

씰팀이 적진에 투입되어 진입 작전을 벌일 때부터 관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 오! 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영화감독들은 촬영 기법에 호기심을 보이고.

VR 카메라로 찍은 영상의 생동감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데 묘하게 작전팀을 따라가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총알이 날아오면 내가 맞을 것만 같은.

고립되어 버티던 공수팀에게 씰팀이 짠! 하고 등장할 때 탄성과 함께 영화에 초집중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몰아쳤다. 한 10분 싸우고 심정적으로 쉴 틈을 줘야 하는데,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적들이 쉴 틈을 안 주는데 어쩌란 말이냐.

그러다 건하가 드론을 찾으러 내달리는 장면에서 다들 숨 쉬는 걸 잊었다. 봐도 봐도 어마어마한 장면이었다. 촬영 때는 밋밋하기 짝이 없던 액션에 CG가 추가되고, 사운드가 더해지니 현실감과 긴장감이 엄청났다.

서연은 입을 쩍 벌리고 보고 있고, 건하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 내가 찍은 게 이런 거였어? 하는 표정.

약 120초에 걸친 액션에 이어 드론을 찾았을 때.

“휴!”

“하아-”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드론을 날리고 귀환했을 때는 미국 관객들처럼 “에에!” 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이후부터는 지옥의 탈출이었다.

긴장의 강도가 점점 올라갔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를 건하가 1인칭 시점으로 보여 주는 장면부터다.

겨우 지옥을 뚫고 나서도 쉬는 타이밍이라곤 쫓기면서 싸우는 장면이 다다. 쌓였던 긴장감을 완전히 해소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 평원에서 달려오는 대부대를 만났을 때.

건하가 멋진 모습으로 ‘가자’ 하고 그들과 싸우러 달려갈 때. 그리고 얼마 싸우지도 못하고 고립되었을 때.

이 순간 긴장의 밀도가 120%를 찍어 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으….”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객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몸이 경직되어 있고, 절반은 몽롱한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몸을 부르르 떠는 사람도 부지기수고. 영화를 볼 때 느끼는 새로운 형태의 감흥이 나타났다고 할까.

한차례 소리가 나온 뒤 절반 이상이 흥분 상태에 빠져 스크린을 주시했다. 이미 나른한 상태로 영화를 보는 사람도 많았다. 다행히 기절한 사람은 없었고 일부는 행복한 표정으로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회사 시사회 때는 여직원 하나가 쇼크로 일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극도의 긴장감을 버티질 못했던 거였다. 버텼던 직원들은 반쯤 술 취한 상태가 되어 버렸고.

미묘하게 흐르던 극장 분위기도 잠시.

늘어졌던 이들이 자세를 바로 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몽롱했던 이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영화에 몰입했다. 그러다 긴 고행 끝에 구조 헬기가 나타났을 때.

“오!”

깊은 안도감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제야 옆 사람과 이야기도 나누고, 한숨 쉬고 웃기도 하고.

흥분상태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지.

아니면 정말 감격스러워서 그랬는지.

건하가 헬기에서 지상을 바라보고 있을 때.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미리 기립박수를 보내는 이들이었다. 박자까지 맞춰가면서.

그리하여 마침내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브라보!”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미 모든 관객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휘파람과 외침, 터지는 플래시 불빛이 극장 안을 뒤덮었다.

짝! 짝! 짝! 짝-

난 서연과 포옹한 뒤 배우들과 악수했다. 그러곤 다들 손을 맞잡고 나란히 늘어섰다.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이들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답례했다.

더 힘찬 박수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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