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일본 음악 영화 (44/56)

제4장 일본 음악 영화

시부야 거리에 인파가 몰렸다.

구경하는 사람이 많았음에도 소음은 별로 없었다.

일본인들이 조용히 촬영을 구경해서.

여자 주인공인 미와가 시부야 타워레코드 인근 길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기타를 들고 작은 앰프 하나만 놓고. 오가는 사람들은 보조출연자들인데 공연하는 미와를 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친다.

그 모습을 남자 주인공 사토가 몰래 훔쳐보는 장면이다. 내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고 있었다.

일본 음악 영화도 대부분 롱테이크였다. 사토 뒤에서 찍고 있다가 동선에 따라 그의 정면도 찍고, 사토의 시점으로도 미와를 찍고.

사토도, 미와도 연기 몰입이 예술이었다.

사실 촬영 전에 연기 디렉팅을 할 때는 문제가 좀 있었다. 둘 다 일본 특유의 연기를 했다. 과잉 감정 혹은 과도한 절제. 둘 다 자연스럽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해서 덤덤한 얼굴로 눈으로만 연기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눈에 힘을 준다. 눈에 힘 빼라고 하자 얼굴 근육이 움직이고. 처음엔 연기를 못 하는 친구들인 줄 알았다. 생활하는 것처럼 연기하라고 했더니 그제야 알아들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롱테이크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찍고 있는데 뭘 해야 할지를 모른다.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당황해서 알아서 하질 못했다.

늘 디렉팅대로 연기를 하다가 본인이 직접 창의적인 연기를 하려니 안 되는 거였다.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을 하듯 하면 되는데 그런 연기를 처음 해보는 터라.

해서 수를 썼다.

첫 장면은 야쿠자 똘마니인 사토가 진상 손님과 몸싸움을 하는 씬이었다. 직업과 성격 등을 알려 주는 장면인데 원래는 쇼트 분할이었다. 이걸 현장에서 롱테이크로 바꾸어 버렸다.

당연히 사토는 1분이나 이어지는 롱테이크에 적응을 못 했다. 시나리오에 없는 내용을 애드립으로 연기를 해야 했으니. 진상 손님은 조역이라 더 연기가 안 됐고.

해서 첫날에는 연기 훈련 삼아 첫 장면만 계속 찍었다.

결국엔 사토가 연기 각성을 했다.

앵무새처럼 외운 대사를 읊고 끝내는 게 아니라, 상대와 리액션을 주고받으며 상황 자체에 몰입하여 연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게 사토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미와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직업은 경리다. 말없이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 장면만 무려 3분이나 찍었다. 직원들 그 누구도 말을 걸어 오지 않는다. 묵묵히 일하다가 문득 직원들을 보는데, 그 장면에서 짙은 외로움이 전해졌다.

실제 시나리오에는 없는 장면이다. 이 장면도 연기 훈련 삼아 3시간이나 찍었더니 미와도 뭔가 깨달았는지 알아서 즉흥 연기를 했다.

두 배우의 연기 몰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두 사람이 연기의 맛에 흠뻑 빠진 것도 이때부터다.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연기가 아니던가.

첫 촬영이 끝났을 때 사토가 말했다.

“연기 몰입이 너무도 신기합니다. 쇼트로 나눌 때는 연기를 위한 연기를 했는데, 롱테이크로 찍으니 몰입이 상당히 잘돼요. 정말 연기를 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어쩔 땐 제가 정말 이 인물이 된 것만 같아요.”

미와도 사토의 말에 동의했다.

배우도 예술가다. 지시대로 하는 것이 아닌, 본인의 예술적 감각으로 뭔가를 하면 성취감이 특별한 거지.

하여 촬영 3회 차가 되었는데.

두 배우 모두 알아서 연기를 했다. 한 번 깨달음을 얻은 배우의 잠재력은 무서울 정도였다. 감정 몰입이 뭔지 감을 잡은 친구들에게 멍석을 깔아 주니 바로 그 인물이 됐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미와의 버스킹.

그런 미와를 쓸쓸한 표정으로 보는 사토.

고독과 외로움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사토의 눈빛이 정말 좋았다.

롱테이크의 장점이기도 한데.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게 보였다.

버스킹 따위 왜 하는 거야?

저래서 빚은 언제 갚는 거지?

그런데 좀 귀엽긴 하네.

음악도 제법 괜찮은걸?

그나저나 인간들이 너무하는구만.

여자가 열심히 노래를 하는데 보지도 않고 말이야.

이러한 감정들이 구별되기도 하고 섞이기도 했다.

그냥 무표정한 얼굴과는 확연히 다르다.

희망이 없는 인생과 외로움을 껄렁한 태도로 숨긴다.

바쁜 도시를 살아가는 청춘의 비애가 느껴진다.

어쨌든 느낌이 아주 좋았다.

“컷! 오케이!”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3회 차 촬영을 마무리했다.

두 배우와 함께 바로 버스에 올랐다. 스태프가 워낙 없어서 버스 하나와 탑차 석 대가 촬영 차량의 전부였다.

두 배우는 오늘도 새로운 걸 배웠다는 표정이다.

날 보더니 대뜸 허리부터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촬영이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어요. 연기도 창작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네요.”

“저도 그래요. 감독님 영화를 찍게 되어서 정말 좋아요. 다른 배우들은 이런 걸 모를 것 아니에요?”

웃으며 대꾸해 주었다.

“지금처럼만 하면 돼. 전에도 몇 번 말했지만 이 영화 전체 분위기는 외롭고 쓸쓸해. 남에게 관심도 없고, 세상은 삭막하기만 하고. 그런데 영화에는 따뜻함이 하나 숨겨져 있어.”

“그게 저희들인 거죠?”

“세상에 오직 너희 두 사람에게만 온기가 있는 느낌이야. 그 따뜻함을 표정이 아닌 눈으로 보여 주면 돼. 관객은 너희 두 사람의 사랑과 눈빛만으로 따스함을 느끼게 될 거야. 그게 곧 희망이야.”

“촬영 전에 감독님이 했던 말 기억나요. 세상이 차가울수록 사랑은 따뜻해질 거라고요.”

“그래. 관객은 음악으로 사랑하고 교감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마음이 포근해질 거야. 음악이 외로운 너희 두 사람을 위로하고, 관객도 위로하는 거지.”

두 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와 말대로 두 배우는 날 만나서 연기의 신세계를 경험하는 중이다. 롱테이크가 배우를 얼마나 진화시키는지도 깨달아 가고 있고. 두 사람은 일본 영화 시상식에서 빛을 좀 볼 것 같다. 한국 영화로 분류되어서 연기상 후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 *

두 배우의 연기력은 회가 거듭될수록 좋아졌다.

어떤 장면을 찍어도 시나리오대로 연기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해석해서 본인들의 연기를 했다. 난 그저 장을 마련해 줄 뿐이었다. 관찰자 시점으로 지켜보면서.

내 음악 영화 멜로디와 샌드위치가 절묘하게 섞여 들어갔다. 가만히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들이 수시로 나왔다. 열심히 사는 두 청춘을 보며 관객이 두 손을 모으고 응원하게 되는 장면도 많았다.

관객이 감정이입 될 수밖에 없는 연기였다.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장면. 웃기면서도 따스한 장면.

사랑하는 마음을 숨긴 채 티격태격하는 귀여움.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해서 서로 엇갈리는 장면에선 안타까움이 들고 애가 탄다. 부디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생기고. 감정이입의 정도가 상당히 커서 두 주인공이 뭐만 했다 하면 눈물이 찔끔 날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본 적이 없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영화였다. 드라마틱한 게 없음에도 감정이입 때문에 사소한 일이 재미있어진다. 덩달아 주인공들의 매력도 급상승하고.

영화를 찍으면서 이렇게 훈훈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한국식 촬영과 연기. 일본식 감정 표현이 조화를 이루면서 독특한 정서의 영화가 탄생할 것 같았다.

일본 감독이 찍는 일본 영화도 이렇게는 못 만들며, 한국 배우들도 이런 연기를 못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사토와 미와는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연기 세계를 이룩한 것인지도 모른다.

“컷! 정말 좋다!”

요요기 공원에서 둘만의 합주 씬을 찍었다.

이전에는 내가 칭찬하면 넙죽넙죽 절을 하던 두 친구가 이제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한다. 촬영 24회 차가 되니 이젠 배역에 완벽히 몰입했다. 외로운 청춘 남녀이니 호들갑을 안 떠는 거지.

“다음 씬 갑니다!”

한국 스태프가 외치자 두 배우가 이동했다.

이젠 한국식 촬영현장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이다.

세팅을 지켜보고 있는데 사토가 왔다.

“저… 감독님.”

“왜?”

“일본 영화 또 찍을 생각 없으세요?”

“내 영화에 또 나오고 싶어?”

“네. 감독님의 액션 영화 찍어 보고 싶네요. 일본에는 감독님 같은 분도 없고, 영화계도 어렵고 해서.”

사토의 표정을 보니 어째 짠하다.

내 영화 같은 영화를 찍고 싶은데 그런 영화가 없다.

“일본 영화는 또 찍을 생각은 없어. 너만 뜻이 있다면 한국 영화에 캐스팅할 수는 있고. 주연은 아니겠지만.”

“네.”

사토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미와에게로 갔다. 일본에는 왜 나 같은 감독이 없을까 아쉬워하는 얼굴이다.

일본 영화계는 한국 영화계보다 쌈마이가 더 많다고 한다. 쌈마이들 때문에 일본 영화계가 망했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이런 환경에서 인재가 나올 리가 있나. 창작 재능이 있는 이들은 죄다 만화나 애니 쪽으로 가고.

“슛 들어갑니다!”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조명 설치도 최소. 카메라는 대학생들 영화 찍듯 작은 카메라로 내가 찍었다. 동선도 연기도 확정하지 않고 테스트하듯 영화를 찍는다. 한 번 찍으면 NG가 나든 말든 계속 찍고.

“컷. 좋아.”

미와가 달려왔다.

사토도 의아한 얼굴이다.

“저, 감독님. 제가 발이 약간 삐끗했는데요.”

“응. 걷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다시 안 찍어요?”

“사람이 늘 예쁘게 걸을 순 없잖아.”

내 말을 듣고 사토가 엄지를 내밀었다.

“감독님 최고! 하하하하!”

미와도 그제야 웃으며 이동했다.

아마 관객은 미와가 발을 삐끗하는 장면을 보고 웃을 터다. 사토가 미와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자연스러운 연결이니 NG가 아니다. 사토는 알아서 반응한 거고.

일본 배우들은 촬영 초반에 내가 영화를 대충 찍는 것으로 의심했다. 내가 프리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영화도 설렁설렁 내키는 대로 찍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 방식에 적응했다.

대충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찍고 있다는 걸.

두 배우는 연기에 정답이 없다는 점도 깨달았다.

영화의 촬영과 연기는 대개 만들어 둔 틀 안에서 한다. 그 틀에서 벗어나면 NG다. 하지만 사람 인생에 NG가 있던가.

삶이 늘 보기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영화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번 영화는 삶을 그대로 찍는다. 예쁘게 꾸밀 필요가 없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찍을 뿐이다.

배우가 걷다가 발이 꼬이면 발이 꼬인 거다.

* * *

시부야 미야시타 공원에서 마지막 촬영을 했다.

연애 감정을 느낀 두 사람이 합주를 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공원에 놀러 온 사람들이 구경하는 걸 그대로 찍었다.

사토는 얼굴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였다. 여자에게 돈을 받으러 온 야쿠자들을 말리다 두들겨 맞은 다음 날이다.

이 장면에서 일본 관객들 눈물샘을 건드린다. 두 사람은 현실 문제로 음악을 관두고 잠시 헤어졌었다.

그 뒤 사토는 옥상 난간에 서서 도쿄의 야경을 보며 엉엉 운다. 관객도 함께 울고. 그동안 쌓인 감정이 폭발하는 씬이다. 드라마가 없음에도 그간 서럽고 힘든 일을 많이 겪은 터라.

사토가 야쿠자에게 맞은 걸 계기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동안 연습했던 곡을 연주한다. 서로 진실한 감정을 눈과 음악을 통해 표현한다.

버스킹이 끝나고 구경꾼이 흩어졌다.

말없이 악기를 챙기던 사토가 말했다.

“이봐. 내일… 우동 먹으러 갈까?”

“좋아요.”

사토는 씨익 웃고, 미와는 수줍게 웃는다.

그러곤 손을 흔들며 헤어진다.

한참을 걷다가 동시에 뒤를 보곤 또 웃는 두 사람.

둘 다 환하게 웃으며 걷는다.

연애가 시작된 느낌.

이게 엔딩이었다.

“컷! 오케이!”

짝짝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고맙습니다, 감독님!”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서로 격려했다.

한국말로 인사하는 두 배우를 차례로 안아 주었다.

감독과 배우가 아닌,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된 것 같다.

미와가 내게 안겨서 떨어지질 않자, 사토가 나와 미와를 함께 안았다. 그러곤 오랜만에 상봉한 사람들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깊은 아쉬움이 전해진다고 할까.

그렇게 일본 음악 영화 촬영을 끝냈다.

영화가 아주 잘 나올 것 같았다.

* * *

이번에도 나 혼자 편집했다.

편집자가 보면 멘붕에 빠질 정도로 편집 방향을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토리보드도 없고.

촬영 때 각 씬을 기억하기에 편집은 온전히 내 머릿속에서 나왔다. 네오스타 CG팀 막내의 편집 방식을 이번에 좀 써먹었다. 샌드위치 때 편집했던 방식도 쓰고.

너무 긴 것은 자르거나 다른 장면을 중간에 붙였다. 일부 장면은 인위적인 느낌이 좀 커서 다 들어내 버리고. 톤은 다큐처럼 무덤덤하게 유지했다. 너무 무미건조하면 한 번쯤 감정이 격해지는 NG 장면도 잘라 넣었다.

그런 식으로 20일 만에 편집을 끝냈다.

이 편집본의 흐름과 톤, 연결의 자연스러움을 3일간 확인한 뒤 로큐의 영상 보정 팀에 보냈다.

겨울인 초반에는 차가운 느낌이 들게 색감을 좀 빼고 약간 그레이 톤을 줄 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살아나고 후반엔 따뜻한 톤으로 간다.

MI팀이 작업하는 동안.

난 복사한 편집본으로 음악을 넣는 작업을 했다.

음악을 영상에 일일이 맞춰 보면서 곡을 고르고, 선택한 곡은 영상 시간과 음악 재생 시간을 0.1초 단위로 맞췄다.

그렇게 다시 20여 일이 지났다.

1차 기술 시사가 있었다.

나와 수혁이, 통역과 프로듀서만 영화를 보았다.

프로듀서는 영화를 보는 내내 멍했다.

중간쯤 가서는 눈이 그렁그렁하더니. 사토가 술집 옥상에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장면을 보곤 갑자기 펑펑 울었다.

“왜 우세요? 저렇게 밥 먹은 적 있어요?”

“그게 아니라…….”

프로듀서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좀 의외였다. 사토의 삶이 불쌍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지독한 외로움이 쌓이고 쌓이다 터진 거였다. 사소한 장면인데도 갑자기 복받친 거다. 내가 예상한 지점이 아니었다.

“너무 빨리 터지면 안 되는데.”

“그러게요. 마지막에 눈물이 나야 하는데.”

수혁이가 내 말에 응수했다.

한데.

괜한 우려였다.

프로듀서가 이후에 또 울먹거리더니 우리가 울 거라고 예상한 장면에선 아예 대성통곡을 했다. 일본인은 감정표현 잘 안 한다고 하더니 대인관계만 그럴 뿐이었다.

40대 남자 프로듀서가 손수건을 부여잡고 꺼이꺼이 우는 걸 보니 어째 내 마음도 짠했다. 사는 게 힘든 건 청춘이나 중년이나 마찬가지지 뭐. 안 그래도 그런 대사가 나왔다.

영화 속 미와가 말한다.

“삶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일까요?”

“65.”

“어째서요?”

“내 몸무게.”

“전 삶의 무게가 1톤 같아요.”

그 말에 사토가 미와를 물끄러미 본다.

이때의 표정과 눈빛이 정말 좋았다.

자신의 연애 감정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사토가 말한다.

“지금 네 삶의 무게는 네가 짊어진 기타 무게일 뿐이야.”

“그런 것 같진 않은데.”

“그 기타… 내가 들어 줄게.”

그 말에 미와도 사토를 물끄러미 보고.

사랑을 처음 표현한 말이다.

삶의 무게를 내가 덜어주겠다는.

관객은 알아듣는데, 미와는 못 알아듣고.

그러다 영화 후반에 이르러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신 나는 곡을 합주한다. 프로듀서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 박자에 맞춰 손뼉을 쳤다. 발까지 구르면서.

울고 웃는 걸 보니 한바탕 굿판을 벌인 느낌이다.

영화의 크레딧을 보는 프로듀서의 표정이 너무도 밝았다.

그가 화면을 보며 내게 말했다.

“감독님. 영화 너무 좋아요.”

“다행입니다.”

“영화 보면서 감격했어요. 감독님 영화를 보면 기분 좋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 행복하네요. 빨리 일본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네요.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면 제 마음까지 평화로울 것 같습니다.”

중년 남자인 프로듀서가 소녀처럼 감동했다.

소녀 감성이 있었나. 아니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건가.

아무튼 영화가 아주 잘 빠졌다.

일본 대중과 언론의 관심도 무척 컸다.

주연인 사토와 미와는 연일 인터뷰를 했고.

다시 10여 일이 지나 VIP 시사회를 했다.

일본은 한국만큼이나 시사회가 활성화되어 있는데, 우리와 달리 레드카펫 행사를 크게 했다. 이어 포토콜도 하고.

한데 유명인이 어마어마하게 왔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셀럽들이 하나같이 나와 사진을 찍자고 졸라 댔다. 그들이야 한 번 찍는 거지만, 나는 수도 없이 찍어서 영화도 보기 전에 나가떨어질 판이었다.

수혁이가 보다 못해 날 데리고 숨었다.

“휴… 왜 이 난리들이야?”

“감독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사토도 미와도 감독님과 영화 찍은 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고 그러더라고요. 다른 배우들도 혹시나 해서 그러는 거죠.”

“사진 찍으면 친해진대?”

“그래도 모르니까요. 하하하.”

지친 몰골로 극장에 들어섰다.

참석한 모든 이들이 기립하며 날 맞이했다.

나도 연신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30분 후.

참석한 모든 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소리 내어 울진 않았다. 코만 훌쩍일 뿐.

영화 후반엔 프로듀서처럼 펑펑 울더니.

마지막 버스킹 장면에선 모든 관객이 똑같이 음악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쳤다.

스크린에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이 밝아졌을 때.

모든 유명인이 다시 기립하여 박수를 보냈다.

눈물범벅이 된 채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다들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삶의 무게를 덜어낸 것처럼.

마지막 연주 장면에서 음악에 맞춰 신 나게 박수를 칠 때는 울음이 멈췄었다. 한데 모두가 기립하며 내게 찬사를 보내면서 또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영화 외적인 감격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리둥절한 사람은 나와 수혁이뿐이고.

주연배우인 사토와 미와와 포옹했다. 내게 안기는 두 사람의 기운이 무척 따뜻했다. 안도와 기쁨이 전해지고 감개무량한 마음까지도 전해졌다.

배우에 이어 셀럽들과도 악수를 하거나 인사했다. 영화가 재밌다, 잘 봤다 이런 이야기는 안 하고 그저 일본인 특유의 인사로 깊이 허리를 숙일 뿐이다.

내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이건 어떤 의미로 봐야 할까.

그렇게 우리도 극장을 나섰다.

프로듀서와 함께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에서 시사회 기념 파티를 했다. 배우들과 초대받은 셀럽들이 간단한 안주에 맥주를 마시는 조촐한 자축파티였다.

프로듀서는 시종 흐뭇한 얼굴로 자리를 옮겨 다니며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손님들도 프로듀서에게 감사의 의미가 분명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인사를 받은 프로듀서는 연신 맞절을 해대고 있고.

조연 배우들과 초대받은 이들도 한 번씩은 내 자리에 와서 인사를 하고 갔다. 나도 깊이 허리 숙이며 응대해야 했기에 솔직히 좀 불편했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인사하며 하는 말이 대부분 이랬다.

한참 뒤에야 프로듀서가 내 자리에 왔다.

환하게 웃는 그에게 맥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손님들이 왜 고맙다고 하는 거죠?”

“일본인들이 가장 보고 싶었고, 가장 필요했던 영화를 만들어 주셔서 그렇습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큰 위안을 주는 영화가 없었다고들 하네요. 감독님의 영화는 재미를 넘어서 사람의 영혼마저 울리는 영화라고들 합니다.”

“치유력이 있다는 뜻이네요.”

“그 이상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기쁨을 맛보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공감했으며, 영화가 끝냈을 때는 만족감이 밀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극장에서 기립했을 때는….”

셀럽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며 다시 울었던 때다.

왜 또 우는지 의아했다.

“너무도 행복했답니다. 일본인에게 큰 힘을 주는 이런 영화를 한국감독님이 만들어 주셔서 고마웠다고도 하네요. 일본인 감독은 만들기 어려운 영화이니 당연하겠지요. 사토와 미와의 연기에 대한 충격도 상당히 큰 것 같습니다.”

사토와 미와를 보았다.

둘 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단지 영화 반응이 좋아서 보이는 행복감은 아니다.

자신의 연기. 영화의 힘. 사람들의 표정.

그런 것들이 겹쳐져서 더 행복해 보이는 듯했다.

수혁이가 말했다.

“저희는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플롯만 진수희 작가와 내가 관여하고, 스토리와 일본적인 내용은 일본인 작가에게 일임했다. 일본인 작가가 쓴 내용이 일본 관객에게 얼마만큼 전달이 될지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정서적인 면도 그렇고.

프로듀서가 내용이 현실적이라며 완고를 건의했고, 두 배우도 정말 좋다고 해서 그렇게 간 거다. 사람 사는 거야 다 비슷하니까, 내 눈에도 좋아 보였고. 그런데 한국 사람은 잘 모르는 미묘한 정서가 있었던 것 같다.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제가 모르는 일본만의 정서가 있나 보군요.”

프로듀서가 의아한 얼굴로 날 보았다.

“알고 찍으신 게 아니고요?”

“어떤 부분 말이죠?”

“사토와 미와가 정말 리얼하게 일본 현재 젊은 층의 고민을 연기했어요. 기존 일본 영화에는 없었던 현실적인 감각입니다. 영화적인 대사나 습관적인 연기는 전혀 없고, 모든 장면이 현실 그대로였습니다. 언어, 표정, 유행어 등이 말이죠.”

“시나리오에는 없는 내용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사토와 미와가 시나리오에 없는 현실적인 부분을 감독님께 건의했는데 감독님이 거의 모두 반영하셨다고 할까요? 젊은이들의 고민을 감독님이 너무 잘 아셔서 저희는 놀랐습니다만.”

이건 또 무슨 행운의 장난이냐.

촬영 때 시나리오대로 가지 않고 사토와 미와에게 맡긴 건 맞다. 대부분 롱테이크라 장면의 내용을 토대로 두 사람에게 연기를 맡겼다. 발음이 꼬인 부분은 배우들이 알아서 다시 찍자고 했었고.

한데 사토와 미와가 내 촬영 방식 그대로 자기들이 알아서 현실의 대화 그대로 해버린 것이다. 꾸밈이나 영화적 설정을 전혀 하지 않고 현실 그대로.

내가 일본어를 모르니 어떻게 달리했는지 알 수가 있나.

그냥 영화 내용 그대로 연기를 한 것으로만 알았지.

현실과 영화는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극현실주의다.

사토와 미와가 영화 색깔을 빼버리고 생활 연기 그대로 해버렸던 거였다. 그게 이 영화에 너무나 잘 맞기도 했고.

두 사람의 자유로운 연기. 이 영화의 특징. 내 연출방식.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면서 시너지가 발생했던 거다.

게다가 음악이라는 치유의 힘도 크게 작용했고.

수혁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일본 감독님이 사토와 미와의 연기를 봤으면 그건 영화 장르와 맞지 않다고 했을 것 같네요. 한국만 해도 30대 감독이 청춘 영화를 하면 본인이 아는 청춘의 정서로 찍을 것 아닙니까? 실제 청춘이 보면 현실과는 안 맞는 거죠.”

“그런데 사토와 미와는 그냥 해버린 거지?”

“본인들이 아는 그대로 해버린 거죠. 일본인들이 봤을 때는 너무 리얼했던 거예요. 안 그래도 시나리오 자체가 상당히 리얼하다고 말은 들었어요.”

30대가 20대 이야기를 하면 본인이 20대 시절의 영화 정서를 담기 마련이다. 따라서 실제 20대는 공감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 유행과 정서가 빠르게 변화하니까.

수혁이가 다시 말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본 게 아니라, 영화 치료를 받은 셈이네요. 음악 치료처럼요. 극장에 상영할 게 아니라, 병원 심리 치료 과에서 상영해야 할 판입니다. 감독님 영화가 늘 그렇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상업영화임에도 예술영화처럼 느껴졌을 것 같네요.”

그 말에 그냥 웃었다.

사토와 미와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애들이 왜 이러나 했더니 내게 절을 했다.

민망해서 나도 두 사람에게 맞절을 하고.

“감독님,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그래.”

사토가 따라주는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술잔을 건네자 한국 술 문화를 아는 사토가 잔을 받았다. 사토도 단숨에 마셔 버렸다. 미와와도 술을 주고받고.

두 사람은 날 보다가 또 울먹울먹 해졌다. 자신들이 이 영화를 찍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이다. 내 영화를 다시 찍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보이고. 다시 그런 연기를 못 하리라는 안타까움도 비치고.

“감독님 한 번 안아봐도 되죠?”

“그래.”

사토를 안았다. 서로 등을 토닥인 뒤 미와와도 포옹했다. 결국 두 사람 다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감격을 애써 떨치고 담담하려 해도 잘 안되는 모양이다.

술을 많이 안 마시는 일본인들이 이날만큼은 다들 만취했다. 나도 셀럽들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술을 마시다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로부터 6일 뒤.

내 일본어 영화 ‘하모니’가 개봉했다.

* * *

서연이 일본에 와서 그녀와 함께 오사카에 놀러 갔다.

나도 그녀도 도쿄보다는 오사카가 정서적으로 좀 맞았다. 한국인에게 더 잘 맞다고 해야 하나.

지난번 여행 때 들렀던 고기극장이란 곳에서 고기를 먹고, 도톤보리 번화가를 걸어 다녔다. 일본에는 독특한 물건을 파는 곳이 많아서 영화 소품으로 쓰려고 뭘 잔뜩 샀다.

서연과 함께 오늘 개봉하는 ‘하모니’를 보기로 했다. 합작사인 극장 체인 측에서 표가 없을 수도 있다며 미리 예매를 해줬다.

영화 상영할 시간이 되어서 극장으로 갔다.

상영관이 6개인 멀티플렉스 극장인데 4개 상영관에서 ‘하모니’가 상영되고 있었다. 4개 상영관 전석 매진.

“오빠, 일본에서 이런 경우가 별로 없는데.”

“그러게.”

나와 서연은 변장하다시피 오사카를 돌아다녀서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극장에서도 사람들이 붐벼서 우릴 못 알아봤다.

인파에 휩쓸리듯 극장에 들어가 좌석에 앉았다.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서연이 일본어를 곧잘 해서 영화 내용은 얼추 알아들었다. 그런 그녀가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영화 시작 10분 만에 흠뻑 빠져들더니 중간쯤에서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감정이 격해지는 지점은 관객마다 달랐다. 영화 시작 20분 만에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극장 전체가 울음바다가 된 적도 있었다.

고급술집이 즐비한 긴자 거리에 사토가 점퍼를 입은 채 물끄러미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을 보는 장면이다. 그냥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뭔가를 갈망하는 사토의 눈빛만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가 터진 부분이다.

정작 클라이맥스는 오지도 않았는데.

사토가 정상적인 삶을 사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장면. 술집 손님들에게 굽실거리며 사는 사토의 모습을 보여준 직후다.

“이 장면에선 왜들 우는 거야?”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이 장면 때문은 아니야.”

“감정이 쌓였다가 이 장면에서 복받친 건 맞지?”

“그런 거 같아.”

영화가 끝나자 거의 모든 관객이 눈이 붉어진 채 일어나고 있었다.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시사회 때처럼 마지막 연주 장면에서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래도 다들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극장에서 나서자 로비에 있던 이들이 나가는 관객들을 물끄러미 본다.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분명 다들 운 것 같은데 표정은 무척 밝았으니.

서연이 앞서 가는 두 여성의 대화를 듣는 듯하더니.

내게 알려주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는데. 특히 미와.”

“자기라면… 직장 생활 부분?”

“그런 거 같아.”

“너무 행복해서 고기가 먹고 싶어졌대.”

낮에 고기를 먹었기에 우린 스시를 먹으러 갔다.

저녁 식사를 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맥주를 홀짝이며 언론 리뷰가 올라오길 기다렸다.

그러다 야후 재팬에 리뷰가 떴다.

바로 한국어로 번역기로 돌려서 읽어 보았다.

<하모니. 한국식 리얼리즘의 극치! 신화를 쓰다!>

해석이 약간 어려운 문장도 있었으나 내용은 이러했다.

내 영화 특유의 치유력이 매우 강한 영화로, 일본의 현실을 담담하게, 또는 적나라하게 그려냈다고 한다.

현실적인 두 청춘의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 점도 놀라웠다고 했다.

일본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물기가 전혀 없는 모래와 같다. 세상이 삭막하고 어려워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다.

일본인들은 다들 그렇게 사는 게 불편했음에도 인식하지 못했다. 사토와 미와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현실적인 면에서 공감을 했고, 두 주인공의 삶에서 대리만족을 했다.

또한 관객들은 자신만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안 것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삶을 떠올리니 갑자기 복받쳐 올랐다는 해석이다.

이 리뷰가 이상한 건지, 번역기가 이상한 건지.

뭔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아먹기가 어려웠다.

서연이 원문을 보더니 말했다.

“쉽게 말해서 일본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불편한 삶을 오빠 영화가 그대로 보여줬다는 뜻이야. 사회적 병폐가 있는데 그 누구도 그걸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 정부는 일본 서민들의 삶에 무관심했다는 점. 일본인들은 시위도 안 하잖아.”

“가면을 쓰고 산다는 건 무슨 뜻이야?”

“일본인들은 남에게 친절하잖아.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고. 그게 본인들도 불편했던 거야. 사회적인 속박이라고 할까. 그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는데, 하모니에선 그걸 지적하고 있었어. 잘못된 것이라고.”

“일본인은 원래 그렇잖아?”

“응. 그게 자유롭지 않고 편하지 않다는 걸 영화를 보고 알게 된 거야. 사토와 미와는 그렇게 안 살았거든. 그래서 관객들이 뭔가 자유를 얻은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아. 여기 댓글에도 있어.”

서연이 댓글을 읽어주었다.

“일본인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게 잘못된 것인지도 몰랐다. 사토와 미와의 삶을 보기 전까지는. 앞으로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가난해도 개의치 않아.”

다음 댓글도 서연이 읽었다.

“속마음을 숨기고 살았으니 직장 상사한테 대꾸 한번 못하지. 잘못된 걸 알면서도 예, 예. 거리기나 할 뿐. 일본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이유가 그거였어.”

또 다른 댓글.

“이 한국인이 일본을 얼마나 안다고 그따위 영화를 만든 건지 어이가 없군. 그 밑에 댓글에는 반박이 줄줄이 달렸어. 한국인이니까, 일본의 병폐가 보였던 거다, 이 멍청아. 이토록 일본에 대한 현실적인 영화를 내 생애에 본 적이 없다.”

서연이 다른 댓글도 쭉 살펴보았다.

“그 외 댓글은 감동적이다. 재미있게 봤다. 눈물이 나왔다. 행복했다는 감상이야. 현실적이어서 놀랐다는 말도 많고. 악플도 좀 있긴 한데 영화도 안 보고 욕하는 댓글이야.”

얼마 뒤 전문적인 리뷰가 하나 나왔다.

먼저 올라온 리뷰와 비슷했다. 영화적 재미에 대해 언급하고, 이런 일본 영화가 나왔음에 감격했다는 내용이다. 스트레스가 해소되었음은 물론 영혼마저 정화되었다는 내용도 있고.

일본인이 모르던 사회적 문제를 짚었다는 말도 있다. 한국인 감독이 너무도 잘 아는 것이 이상하므로, 배우인 사토와 미와가 시나리오를 쓴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여기까지만 읽고 노트북을 닫았다.

서연이 말했다.

“아무래도 오빠가 일본에 큰 사고 친 거 같아.”

“잡혀가진 않겠지?”

“사토와 미와가 깨달은 것처럼 일본인들도 이제야 깨달은 거야.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거. 그게 자유롭게 사는 거라는 거. 영화 내용에는 그런 메시지가 없지만 일본인들은 느낀 것 같아.”

어쩌면 촬영 때 사토와 미와가 나 혹은 한국인 스태프들과 일본인이 다른 점을 느낀 것 같다. 내가 한국인 감독이라서 한국 배우처럼 연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일본인들에게는 달라 보였던 것 같고.

한동안 이야기를 더 나누다 침대에 들었다.

아무리 들어도 잘 모르겠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라 그런 건지.

* * *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깼다.

가운을 입고 문을 열자 한국계 지배인이 와 있었다.

그가 간단한 아침 식사와 함께 일본 신문을 가져왔다.

“편히 주무셨는지요?”

“네, 덕분에. 웬 신문입니까?”

“일본 주요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네요.”

“예?”

정말 그랬다.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니혼게이자이.

헤드라인은 아니고 아랫부분에 단독으로 떴다.

<하모니 충격!>

<영화가 일본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최신성 감독의 선물>

<위대한 영화의 힘!>

영화 하모니 옆에 붙은 문장들이다.

서연이 읽어 보더니 요약했다.

“리뷰 내용과 비슷해. 충격이 상당히 컸나 봐.”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 거지?”

“일본인들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나 봐. 사토와 미와가 자연스럽게 일본인이 좀 기이하게 산다는 걸 알려줬다고 그러네. 아사히에는 이번 계기로 일본이 달라져야 정치도, 경제도 달라질 것이라고도 하고.”

“하여간 일본인들 호들갑은.”

“좀 그렇긴 해.”

서연과 둘이서 커피를 마셨다.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하모니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유명한 아침방송인데 하모니 특집이다.

서연이 통역을 해주었다.

“하모니를 통해서 일본 사회가 붕괴되어 가는 근본적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본심을 숨긴 채 살아가는 것이 조직에 대한 복종의 측면에서 기술 혁신과 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나, 기업의 혁신과 과감한 투자에는 결코 맞지 않다.”

한 패널의 말도 이어진다.

“이제라도 일본인이 바뀌어야 국가가 다시 설 수 있다. 최신성 감독은 일본에 위대한 선물을 주었다. 이것을 무시하면 일본은 결국 몰락의 길로 향할 뿐이다.”

진지하게 코미디 쇼를 하는 것 같다.

하루 만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도 희한하고.

“영화 하나 가지고 왜 이러는 거지?”

“그만큼 충격이 컸나 보다. 누가 같은 지적을 하면 무시했을 텐데, 영화에선 느낄 수가 있잖아. 관객 반응도 하나같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어쨌든 내가 무슨 선물을 준 건 아니다.

영화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만들어 준 것일 뿐.

역할을 했다면 작가와 배우들이 한 것이고.

호텔에서 나갔다.

로큐에선 나만 기다리고 있는 터라, 귀국하자마자 촬영 준비를 해야 했다. 일본에 있는 사이 달라진 점도 좀 있고.

그런데 호텔 밖에 웬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꺄아!”

“감독님! 사랑해요!”

“숀 짱! 욘 짱!”

“하모니! 감사합니다!”

손 흔들고 비명 지르고 넙죽넙죽 허리를 숙인다.

나와 서연의 사진 피켓까지 들고 나왔다.

따라나온 지배인이 말했다.

“아무래도 감독님께서 일본에 큰 변화를 주신 것 같습니다. 몇 주 지나면 사회 전체가 들썩일 것 같습니다.”

“그저 영화일 뿐인데요?”

“일본의 국민 영화가 될 겁니다.”

내가 잘한 건지, 실수를 한 건지.

일본에 와서 약에 취해 지내다 가는 기분이다.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 난리야?

* * *

한국에 온 지 15일째.

회사에서 프리 점검을 하는데 일본 기자들이 회사에 아예 진을 쳤다. 출퇴근할 때마다 들러붙어서 뭐라도 한마디 들으려고 난리였다.

일본에서 내 영화 하모니가 유례가 없는 대흥행을 했다. 현재 관객 수는 무려 700만. 우리나라에서 초대박이 나는 영화 관객 수보다 2주일이나 빠르다.

일본 영화 중 가장 흥행한 영화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2,000만이 들었다. 실사 영화로는 ‘춤추는 대수사선’이 1,300만. 애니에는 못 미치겠지만 실사 영화의 흥행 성적은 넘어설 것으로 보였다. 저예산 영화임에도.

한데 일본 극장 푯값은 2만 원에 육박한다. 일본에서 천만 관객은 한국에서 2천만에 가깝다. 수익이 어마어마하다.

그런 이유로 하모니에 펀딩 투자한 이들은 생난리가 났다. 두 배 예상하고 투자했는데 거의 9배에 이르는 수익률이 예상된다면서.

수익보다 영화가 일본 사회의 미친 영향이 정말 엄청났다. 신드롬을 넘어 일본 열도를 뒤흔드는 파급력이었다. 내 영화 불매 운동을 벌이는 쪽과 일본을 바꾸어야 한다는 세력이 갈려서 시위까지 일어날 지경이었다.

나는 영화로 행복을 준 것에만 만족했다. 내 영화가 일본에서 신뢰감을 줄 테니 흥행에도 도움이 되고. 일본인이 달라지면 역사문제에도 변화가 좀 있을 것도 같고.

수혁이는 일본에 괜한 짓을 했다는 농담을 했다만.

한편 일본에 석 달 넘게 있는 동안 프리 프로덕션은 거진 마쳤다. 계약과 촬영 허가 문제로 변동 사항이 좀 있었다.

촬영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터키 동북 바위산 지대로 변경했다. 영화 보조 출연도 비교적 편하고, 실제 시리아인도 많았기 때문이다. 해서 해당 지역에 대형 마을 세트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배우들은 여섯 달 동안 말 그대로 지옥 훈련을 했다. 하루 3시간 근력 운동을 하고, 군사 훈련 및 전술 훈련을 했다. 다들 군대를 다녀오긴 했으나 특수부대 장비 사용법을 모르는 이들이 많아서 제 몸처럼 사용할 때까지 연습에 연습을 되풀이했다.

리허설도 수없이 했다.

훈련장에 아크릴판으로 마을 세트를 만들어 놓고 무술 감독과 함께 동선을 짰다. 특수팀이 작전 훈련하는 것과 비슷했다.

난 9일 내내 최종 완료된 프리 문서들을 확인했다.

문서를 보는데 수혁이가 들어왔다.

“터키 현지 세트 시공이 보름이면 끝난다네요.”

“구축함에서 찍고 가면 충분하겠지?”

“네. 터키 협력사에 현지 배우 캐스팅, 보조출연, 세트 시공 등을 다 일임했어요. 감독님이 최종 결정하시면 됩니다.”

“그 정도는 네 선에서 처리해. 건하는 왔어?”

“왔어요.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가 보자.”

회의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앉아 있던 배우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건하가 말했다.

“총원 열중쉬어.”

척.

14명이 한몸이 되어 움직였다.

전원 열중쉬어 자세로 정면을 본다.

내가 무슨 교관이 된 것 같다.

수호팀은 살이 좀 빠졌고, 건하는 건장해졌다.

특히 상반신의 근육이 장난이 아니다.

우수에 젖은 눈을 가진 녀석이 몸까지 단단하니 이젠 넘사벽이다. 특유의 시크한 연기도 되고.

“쉬어.”

“전체 쉬어.”

내가 앉자 모두 앉았다.

앉아서도 정면을 보는 배우들을 보니 정말 듬직했다. 몸도 제대로 만들었고, 무엇보다 눈빛들이 좋다. 군대처럼 하는 건 이미지 메이킹 때문이다. 훈련을 군대처럼 하기도 했고.

“다음 주 수요일에 이집트로 갑니다. 거기서 한국 화물선을 얻어 탄 뒤 홍해를 지나 아덴만에 있는 대한민국 구축함에 오를 겁니다. 구축함에서 약 10일간 촬영을 한 다음, 다시 화물선을 타고 터키 안탈리아로 들어가서 터키 동북 지역으로 향합니다. 수혁아, 촬영 장비는 먼저 갔지?”

“예. 촬영 장비 대부분은 항공편으로 터키에 먼저 도착했고, 스태프 절반이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현지 스태프를 포함하여 90명쯤 됩니다.”

다시 배우들에게 말했다.

“현지 촬영은 약 4개월입니다. 지금의 이미지 메이킹을 유지하고, 촬영 때는 안전사고에 주의합시다. 고립되어 전투를 벌이는 영화이니 고생이 좀 될 겁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잘해 봅시다. 파이팅.”

“화이팅!”

배우들이 일제히 주먹을 지르며 구호를 외쳤다.

설레고 긴장되는 전쟁 영화 촬영이다.

* * *

화물선에서 내려 보트를 타고 이동했다.

눈앞에 거대한 함선이 늠름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선원들이 길게 늘어서서 우리를 환영해준다.

나와 수혁이가 먼저 구축함에 올랐다.

멋진 제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악수를 청해 왔다.

“반갑습니다. 함장, 우준택입니다.”

“반갑습니다, 함장님. 최신성이에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자, 이쪽으로.”

함장님을 따라 함 내 이곳저곳을 구경 다녔다. 일반인은 함선 내부를 모르니 쭉 한번 보고 촬영 장소를 찾으라는 뜻이다. 전투통제실과 무장 관련 섹터만 빼고 다 돌아보았다.

구축함에 해군특전전단팀 숙소도 있었다.

구축함 상주 인원은 9명이 전부였다.

이틀 동안 해군처럼 지냈다.

같이 밥 먹고 족구도 하면서.

그렇게 3일을 보내며 스토리보드를 짠 뒤.

촬영을 시작했다.

첫 장면은 선내 브리핑 룸이었다.

중견 배우가 작전 통제관 역을 맡았다.

“공수특전단 알파팀이 SI 장악 지역에서 고립되었다. 민간인 2인 및 대원 전원 무사하지만 몹시 위급한 상태다. 우리 군은 이 지역에 고립된 아군과 민간인 구출을 위해 본함의 SEAL팀을 파견하기로 했다. 미군이 협조하기로 했으며, 해당 지역 지도와 병력 상황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도록 하고, 시간이 없으므로 모의 훈련 5회 실시 후 작전에 임한다. 질문 있나?”

건하가 말했다.

“SI의 병력 규모는 알 수 없습니까?”

“추정 병력은 100명. 현재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입니다.”

“해산.”

대원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SEAL팀이 여유롭게 브리핑 룸에서 나간다.

“컷! 오케이.”

대원들의 표정이 정말 좋다.

긴장과 여유가 뒤섞였다. 자신감도 넘치고.

다들 분위기가 그럴듯해서 그림 자체가 좋다.

이어 대원들의 전술 회의 장면.

모의 훈련하는 장면. 장비 챙기는 장면 등을 찍었다.

그다음은 헬기에 탑승하여 날아가는 장면.

해군 특수팀 기동 헬기의 로터가 굉장한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갔다. 완전무장에 탄약 상자까지 든 7명이 차례로 걸어 나왔다. 바람을 맞으며 걸어와 작전 통제관에게 엄지를 내밀곤 하나둘 헬기에 올랐다.

잠시 끊었다가 카메라 감독만 헬기에 올랐다.

이내 헬기가 상승하더니 하늘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여기까지 찍고 선상의 카메라는 안으로 숨었다.

헬기에 탄 카메라감독이 대원들을 찍다가 점점 멀어지는 구축함을 찍을 터였다. 이어 구축함 외경 화면을 담기 위해 함선 상공을 선회하면서 몇 차례 찍는다.

사라졌던 헬기 로터음이 들려왔다.

카메라와 무선 연결이 된 게 아니라서 카메라감독이 찍은 걸 나중에 확인해야 했다. 화면이야 당연히 잘 나올 테고.

* * *

또 장거리 이동이 계속되었다.

터키에 도착한 뒤에도 버스를 타고 종일 이동했다.

한 14시간 걸렸나.

다들 지쳐서 말할 힘도 없을 때 마침내 세트장에 도착했다.

커다란 마을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임시 숙소도 있었다. 장비를 보관할 대형 트레일러도 4대나 늘어서 있고.

버스에서 내려 다들 세트를 구경했다.

5개월 만에 한 마을을 구축했다는 게 놀라웠다.

내부는 좀 허름하지만 겉보기에는 진짜 마을 같다.

세트 시공을 관리했던 미술팀장을 만났다.

“오셨어요?”

“아직 봄인데 밤에 춥죠?”

“아유, 말도 마세요. 세트 어떠세요?”

“아주 좋습니다. 외부는 어느 정도 된 것 같고, 내부 미술도 끝났어요?”

“예. 현지인 고증까지 확인했어요.”

“3일 후에 촬영 시작합니다. 서둘러 주세요.”

“네, 감독님.”

연출부 세컨드도 왔다.

“보조 출연 모두 완료했어요. 모두 시리아 난민이고요. 일당이 꽤 세다 보니 지원자가 상당히 많아요.”

“테러집단 병력은 해결됐어?”

“예. 터키군 출신이나 시리아 군인출신을 주로 쓰기로 했습니다. 얼굴을 아랍 머플러로 가려서 겹치기 출연도 가능해요. 다들 AK 소총을 능숙하게 사용합니다.”

“무기류는 군 협력관 감독하에 내일 들어올 거야. 도난 사고 나지 않도록 관리 잘해.”

“당연하죠.”

배우들과 함께 숙소로 이동했다.

대형 텐트 막사다. 모두 8개로 하나는 식당이었다.

식당에 가 보니 한국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세요.”

“네, 감독님. 반가워요!”

교포 아주머니들이다.

현지에서 식당을 하는 분을 중심으로 주부들도 합세했다. 앞으로 넉 달 동안 우리 밥을 책임져 주실 분들이다.

건하가 숙소를 보고 와서 말했다.

“숙소가 아늑하고 좋네요. 캠핑 온 것 같습니다.”

“밤에는 춥고 낮에는 좀 더울 거야.”

“건조해서 저는 그리 덥진 않네요.”

“그래. 다들 쉬세요! 사흘 후 촬영입니다!”

“예!”

다들 무명이라 그런지 쉬는 동안 딴짓하는 배우들은 없었다. 근처에 도시가 없기도 하고. 그래도 촬영장에 있을 건 다 있었다. 커피. 컴퓨터. 샤워장. 현지 의료진까지.

사흘 후.

산악지역에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공수특전단이 민간인을 구출하는 장면.

첫 씬은 저격수 장면.

저격 및 작전 통제팀이 작전을 지원하는 장면이다.

“액션!”

어둠 속에서 드론 하나가 스르르 날아올랐다. 초정밀 카메라와 적외선 열화상 감지 장치, 레이저 좌표 장치 등이 있는 군사용 드론이다. 지원 나온 예비역이 조종했다.

실제 작전과 똑같이 찍을 터였다.

동원된 카메라는 모두 넉 대.

마을을 찍는 메인 카메라. 드론 카메라.

저격팀을 찍는 카메라. 저격수 조준경 카메라.

각 대원도 전투헬멧에 카메라가 있다.

시커먼 위장막을 뒤집어쓴 저격팀이 말했다.

“진입팀, 위치 확보.”

-말하라.

“진행 방향 1명. 3시 2명. 감시탑에 1명. 12시에 9명. 중앙 건물 내부 16명. 총 병력 29명. 12시 앞쪽 창고 내부에 앉아 있는 열화상 2인 포착. 인질 위치 예상.”

-이동 상황 확인바람.

“알았다.”

-10초 후 진입한다.”

어둠 속에서 시커먼 신형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같은 모습들이 마을로 접근했다. 그들이 마을 벽에 서자 그들 앞에 있는 병사가 피를 뿌리며 엎어진다.

내 앞에 있는 네 모니터에는 네 카메라가 찍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저격수의 스코프에 적병 하나가 잡힌다. 저격수를 찍는 카메라는 총을 쏘는 장면을 찍고 있고.

텅-

저격 음과 함께 또 적병 하나가 쓰러지고.

쓰러진 테러조직원을 지나 마을로 진입하는 대원들.

그들 앞에 있는 적들이 소리도 없이 하나둘 쓰러져 나갔다.

타타탕- 투타타탕-

이내 총격전이 벌어졌다.

테러집단 병력의 고함과 함께 폭발이 일어난다.

저격수는 아군의 동선에 따라 연신 총을 쏜다.

텅- 텅- 텅-

격발과 동시에 적들이 쓰러진다.

네오스타에서 공수한 장비 덕분이다.

방아쇠를 당길 때 공포탄이 쏘아지는 동시에 적의 몸에 설치한 피 봉지가 터진다. 보조출연자들은 피가 터지면 총 맞은 느낌이라 그냥 쓰러지면 되고.

진입팀과 민간인이 마을에서 빠지자 저격팀이 서둘러 일어났다. 저격수는 곧장 아래로 달리고, 저격팀의 작전 통제원은 드론을 자동비행으로 바꾸고 뒤따랐다.

“컷! 오케이.”

“오케입니다! 전투 쇼트 땁니다!”

이어 마을 내부 전투를 쇼트별로 다양하게 땄다.

여섯 달 동안의 훈련 덕분에 정말 특수부대원들처럼 움직였다. 총을 겨누는 자세나, 특유의 걸음걸이. 수신호 등.

영화 시작과 동시에 눈을 잡아끄는 이 장면만 내리 나흘을 찍었다. 이 특수대원들이 누구이며, 무슨 작전을 한 것인지는 나중에 대화로 알려지게 된다.

* * *

촬영 21회 차.

공수특전단과 민간인이 한 마을에 고립되어 치열한 방어를 하는 장면을 찍었다. 이 마을에서 고립되어 버티는 장면만 일주일 내내 찍고 있었다.

“다들 탄이 얼마나 남았나.”

“탄창 하납니다.”

“저도 하납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조국을 믿자고.”

“놈들이 300명이나 몰려온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이대로 3시간도 못 버팁니다.”

“그래서 죽을 거야?”

“아닙니다.”

“힘 빠지는 소리 하지 마라. 탄이 바닥나면 놈들 총을 주워서라도 버틴다. 아무도 죽지 마라. 대한민국 군인은 빡치면 돌아버린다. 우린 이미 빡쳤어.”

“하하하.”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대원 하나가 말했다.

“또 옵니다. 2시. 3시.”

“이쪽도 옵니다.”

“집중해. 한 발에 하나씩.”

타타타탕-

건물 밖에서 총격이 벌어지면서 대원들 옆 벽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먼지와 함께 귀청을 찢는 총성이 들려왔다.

스테디 캠으로 끊지 않고 롱테이크로 찍었다.

이 전투 장면만 배우들이 한 달을 연습했다.

7명이 쉴 새 없이 접근하는 자들을 쏘았다.

소총 탄약이 떨어지자 권총을 뽑아들고 쏘기 시작했다.

한 발에 정확히 한 명씩.

권총 탄환도 금세 바닥났다.

“RPG!”

총격하던 대원들 일제히 엎드렸다.

쿠콰쾅-

폭발과 함께 건물 잔해가 터졌다.

대원들은 순식간에 하얀 가루로 뒤덮였다.

“쿨럭!”

“다들 살아 있나!”

“아악!”

“성욱이 팔이 날아갔습니다!”

“망할!”

팀장이 쓰러져 비명을 지르는 팀원에게 빠르게 기어갔다. 총탄이 하도 빗발쳐서 시멘트 벽돌벽이 남아나질 않았다. 팀장이 왼팔이 너덜너덜해진 대원의 팔을 지혈하고 붕대로 감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도 총탄이 수도 없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으헉!”

“누가 맞았나?”

“괜찮습니다! 다리에 스쳤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알 수 없는 고함!

“팀장님! 2시 방향에 20여 명이 접근합니다!”

“수류탄!”

퍼퍼퍼벅-

총탄이 벽을 때리는 가운데.

대원 두 명이 수류탄을 손에 들었다. 이를 악문 채 기다리고 있다가 수류탄을 던졌다. 대원 하나가 수류탄을 던진 직후 옆구리에 총탄을 맞고 옆으로 굴렀다.

콰쾅-

수류탄이 터지며 밖에서 먼지가 들이닥쳤다.

“괜찮나?”

“놈들이나 막아!”

옆구리에 총을 맞은 대원이 스스로 지혈을 했다.

팀장이 원위치로 돌아왔다.

그때 입구를 혼자 저지하던 대원이 외쳤다.

“탄 없습니다!”

“누구 남은 탄 없어?”

“제가 마지막이었습니다!”

한 대원이 이를 악문 채 외쳤다.

“제가 쓰러진 놈들 총을 가져오겠습니다!”

“나가면 벌집 된다! 입구에서 어떻게든 막아보자!”

대원들이 일제히 단검을 뽑았다.

총을 들고 진입하는 적을 칼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웅크리고 있던 민간인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희 때문에.”

팀장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미안합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서.”

한 대원이 소리쳤다.

“놈들이 입구로 진입합니다!”

“내가 육탄으로 저지한다! 총부터 확보해!”

“제가 하겠습니다, 팀장님!”

“헛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해!”

팀장이 입구 옆에 서며 외쳤다.

“잘 싸웠다, 이 새끼들아!”

“팀장님도요!”

대원들 전원 희미하게 웃었다.

칼로 한두 명이야 막겠지만 결국 전멸이다.

적 3명이 동시에 건물에 진입하던 그때였다.

입구에 들어선 놈들이 총을 쏘려는 순간.

가슴에서 퍼퍼퍽- 하고 핏물이 터지더니 쓰러졌다.

뒤쪽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김포 독수리 맞습니까?”

공수팀이 이를 악문 채 미소를 머금었다.

상 남자가 감격하는 방식이었다.

퍼퍼퍽-

다시 입구로 적들이 진입하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져 나갔다. 이어 SEAL팀이 전방으로 총을 겨눈 채 건물에 속속 진입했다. 일부는 부상자들에게 곧장 가서 치료를 하고.

그들이 입구 쪽에 자세를 취하고 공수대원들은 물러났다. SEAL팀은 곧장 아군에게 탄약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건하가 성큼성큼 걸어와 악수를 청했다.

“고생했습니다. 해군 씰팀입니다.”

“눈물 나게 반갑구만.”

두 팀장이 악수했다.

고립팀과 구출팀의 만남.

사나이의 멋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컷! 오케이!”

앞으로 들이닥칠 온갖 위기를 생각한다면.

영화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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