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심상치 않은 예감
진수희 작가와 함께 회사 사무실에서 일본 음악 영화의 시놉시스 회의를 했다. 그녀도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샌드위치보다 재밌을 것 같다면서 열의를 보였다.
야쿠자 똘마니와 회사원 뮤지션의 로맨스. 그리고 젊은이들의 현실적인 문제 등을 리얼리즘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영화적 기법은 최대한 절제하고 담담한 청춘 영화 느낌으로.
나와 진수희 작가는 플롯과 캐릭터 이미지. 몇 가지 사건들의 초안만 잡았다. 일본식 과장된 연기가 나오면 안 되기에 캐릭터 설정에 신경을 좀 썼다.
그 외의 것은 일본인 작가의 몫이었다.
일본 합작사를 통해 작가와 일본인 프로듀서를 구했다. 작가는 30대 초반이며 무명에 가까웠다. 프로듀서는 독립영화만 했던 분으로 우리 영화 이미지와 잘 맞았다.
시놉시스를 완성했을 때.
그들이 로큐 사무실에 왔다.
둘 다 인상이 참 좋았다. 나와 작품을 하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던지.
회의실에 나와 진수희 작가. 일본인 작가와 프로듀서가 모였다. 통역도 자리했다. 번역한 시놉시스를 먼저 두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이렇다 할 사건이 없는 시놉시스인데 두 사람은 날 믿는 모양이었다. 읽는 내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기대했던 영화였는지 둘 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때요? 이미지가 그려집니까?”
프로듀서가 먼저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는 영화 그대로입니다.”
작가는 얼굴에 수심이 약간 스쳤다.
“이 작품을 제가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담담하고 현실적인 로맨스 소설처럼 생각하고 쓰시면 됩니다. 남자 주인공이 야쿠자지만 한물간 가라오케 술집에서 일하는 정도로만 보여주면 돼요.”
“아, 그래도 되나요?”
“대신 현대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청춘의 고민이나 문제점들.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 그걸 최대한 취재를 많이 해서 작품에 좀 녹였으면 좋겠네요.”
작가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남자는 야쿠자로 살고 있지만 장래가 암담한 거죠? 그래서 음악을 하려고 하는 거고요. 음악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관객도 위로하는 느낌이 맞는 건지…….”
“맞아요. 남녀 주인공이 성공하지 않아도 됩니다. 현실 그대로 마무리 짓는 게 좋아요. 다만 희망이 생기면 좋죠. 꿈도 없고 열심히 살 동기도 없는데 음악이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일을 하면서 살고 있어요. 어차피 장래가 어두운 건 마찬가지라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자는 거죠? 제가 제대로 이해했나요?”
“맞습니다. 성공이 아닌 의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만으로 희망인 겁니다. 그 정도로 두 남녀는 현실이 녹록하지가 않았던 거죠. 관객이 두 사람을 응원하고, 관객들에게도 잔잔한 힘이 되면 좋겠어요.”
통역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기색이었다.
진수희 작가도 흡족한 얼굴이고.
내 재즈 영화는 다분히 영화적이며 로맨스가 큰 축이다. 반면 이번 일본 리메이크 영화는 현실에 가깝고 사랑보다는 인생과 청춘에 대한 주제 의식이 크다. 그래서 음악이 들어간 샌드위치라고 볼 수 있다.
프로듀서가 말했다.
“음악이 관건이겠군요. 한국에 오기 전에도 뮤지션을 알아보기는 했습니다만, 감독님이 특별히 요구하는 음악이나 뮤지션이 있는지요?”
“화려한 재즈보다는 아마추어 느낌이 좀 나고, 어쿠스틱한 음악이 좋을 것 같습니다. 원작에선 여자가 피아노를 치고, 남자가 기타를 쳤지만, 이번엔 남자가 피아노를 치고, 여자는 기타를 칠 거예요.”
“피아노와 기타를 기본으로 작곡하면 되겠군요.”
“예. 주인공들이 직접 연주하는 곡은 그렇게 가고, 그 외의 삽입곡도 대체로 분위기가 비슷해야 합니다. 뮤지션을 섭외할 때도 그 점을 유의해 주세요. 브라스가 들어간 재즈 밴드보다는 기타와 피아노 중심인 밴드여야 합니다. 무명도 상관없어요.”
“알겠습니다.”
프로듀서가 열심히 메모를 했다.
작가는 자신이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아 보인다.
취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내 연출에 자신의 시나리오가 맞을지. 내가 만족할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지 등등.
“작가님 걱정할 것 없어요. 시나리오가 조금 못 나오더라도 서서히 고쳐 나가면 되니까.”
“예.”
작가님이 내 이름값에 주눅이 좀 든 모양이다.
본인이 무명에 가까워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고.
내 의도를 잘 이해하는 걸 보면 잘 쓰는 분이다.
이번 작품에 참여할 스태프들을 모집했다.
일본인 프로듀서가 현지 제작을 책임지고, 로큐에선 그와 함께 프리를 준비할 제작부만 보내기로 했다.
배우들이 악기와 곡 연습을 좀 해야 해서 언제 찍을지는 모른다. 작곡할 시간도 좀 필요하고. 늦어도 내년 2월이 지나기 전에는 찍기로 했다. 겨울에 만난 남녀가 봄에 이루어지는 느낌이 좋을 듯해서.
촬영 기간은 약 한 달. 총 제작 기간은 넉 달가량.
도쿄 신주쿠와 시부야에서 주로 촬영을 하고, 스태프는 최소한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샌드위치처럼 조명도 별로 안 쓰고 촬영도 세미 다큐 분위기로.
일본인 제작진과 로큐 스태프들이 일본으로 떠났다. 진수희 작가도 시나리오 공동 집필을 위해 함께 갔다. 호텔은 합작사에서 거진 반값에 제공하기로 했다. 사무실은 극장 체인 사업부 사무실을 빌려 쓰기로 하고.
* * *
다음 날 일요일 오전 9시.
서연이 차려 준 아침밥을 먹고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펀딩 사이트를 보는 중이었다.
며칠 전 할리우드 영화 펀딩을 공지했는데, 그 반향이 실로 엄청났다. 게시판 댓글이 거의 모두 경쟁률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재직 증명서 제출 등 가입절차가 꽤 까다로운데도 가입을 원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서연이 노트북 화면을 보며 말했다.
“경쟁률이 100대1이 될 수도 있겠어.”
“그럴지도 모르겠네. 낙담하는 사람들 많을 거야.”
“좋은 일 하려다 욕먹을 수도 있겠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가 된다던데.”
서연을 빤히 보았다.
결혼하더니 이젠 아재 개그까지.
내 표정을 보고 배시시 웃는 그녀다.
펀딩 가입 페이지에 투자금에 따라 3개 부분이 떴다.
A. 800만 이상 1,000만 이하 100명.
B. 700만 이상 800만 이하 200명.
C. 500만 이하 선착순.
<카운트가 0이 되는 순간 클릭을 하셔야 가입이 됩니다. 그전에 계속 클릭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0이 되는 지극히 짧은 순간에 클릭한 분들만 집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연이 말했다.
“0.1초 차이에 갈릴 것 같은데.”
“그럴 거야. 1위와 100위는 거의 동시에 클릭한 사람들이니까. 0.3초만 지나도 500위권으로 밀려날 수도 있어.”
“휴… 사람들이 얼마나 긴장될까.”
“댓글 보니까 중학생 아들한테 맡긴다는 사람도 많더라. 아무래도 반응 속도가 느리다 보니.”
잠시 지켜보자 A 부분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A 부분 시작됐어요!]
[난 C 부분인데도 벌써 긴장되네!]
[A 부분 투자자들 대박 나세요! 파이팅!]
카운트가 0이 되는 순간.
삽시간에 결정이 나버렸다.
그 즉시 게시판에 난리가 났다.
[앗싸! 성공!]
[나도 성공! 대박!]
[0 뜨자마자 클릭했는데 234위라니!]
[이거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야?]
[아! 난 추첨 기다려야 하네.]
[대체 100위 안에 든 사람들은 얼마나 빠른 거야?]
[에이 씨! 그냥 500짜리 할걸.]
당연하게도 실패한 사람들이 월등히 많았다.
어쩔 수가 없다.
기회는 한정되어 있고, 지원자는 많으니.
펀딩을 100억 규모로 한다 해도 경쟁률이 높은 건 마찬가지다. 회사 수익도 그만큼 줄어들고.
그래도 욕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본인 운을 탓하는 사람들만 많을 뿐.
이어 B 부분과 C 부분도 순식간에 갈렸다.
게시판에는 성공한 사람들의 환호와 축하. 실패한 사람들의 푸념과 다음 기회를 노리겠다는 말들로 가득했다.
그때 새로운 공지가 떴다.
<로큐에서 제작하는 최신성 감독님의 일본 음악 영화 펀딩을 1시간 후에 진행하겠습니다. 20억 규모의 특별 펀딩입니다. 이 펀딩은 C 부분 500만 이하의 투자만 있습니다. 수익률이 크지 않은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이거라도 해야지 별수 있나요.]
[일본 영화가 흥행이 되려나.]
[일본에선 모르죠. 음악 영화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눈만 높아졌네. 이것도 수익률이 2배는 될 텐데.]
[그러게요. 저는 투자하려고요.]
[고민할 거 뭐 있습니까? 펀딩이 올라오는 족족 가입하면 되는 거지. 최신성 감독님 영화잖아요?]
일본 음악 영화가 한국에선 망할 수도 있다. 일본에서도 500만 넘을지는 미지수고. 내 영화라면 무조건 수입하는 바이어들이 워낙 많아서 해외에서는 모르겠다.
내가 봤을 때 이번 음악 영화는 한국에서도 흥행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샌드위치와 재즈 영화를 합쳐 놓은 영화이고, 음악의 치유력도 무시 못한다. 영화의 정서도 따뜻하고.
그동안 일본 영화가 힘이 없어서 흥행이 안 되었을 뿐, 한국 관객은 일본 영화라고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 애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익숙한 편이다.
일본 영화 펀딩도 금세 끝났다.
정확하게 410명이 가입 완료되었다.
여기까지 보고 노트북을 덮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서연이와 한가한 일요일 오전을 누렸다. 일본 영화 제작은 아무래도 넉 달은 지나야 할 것 같고, CNN의 마이클 플린 기자가 한국에 오기로 해서 내가 미국에 갈 일도 없다.
개별 히어로 영화 제작에 나는 시나리오 말고는 개입을 안 한다. 네오스타 스태프들이 그 영화에 집중하기 위해 블루드 워 2편 제작은 내년으로 미뤄 놨다.
텔레비전을 보며 점심으로 국수를 먹었다.
서연은 요리를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엔 실력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나야 워낙 요리에는 젬병이다.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닌 놈이 요리를 잘할 리가 있나.
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성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왜?”
-형. 포털에 난리 났다. 유튜브에 형네 부부 영상이 떴어.
“무슨 영상?”
-일단 봐. 한국 유튜브 메인에 떴어. 회사 대응팀이 유튜브 측에 영상 내려달라고 했으니까, 곧 내려갈 거야. 근데 중국 쪽은 좀 어려울 거 같아.
“알았다, 확인해 볼게.”
서연이 곧바로 유튜브 사이트를 열었다.
정말 동영상이 있었다.
<최 감독의 보디가드?>
영상을 보곤 나도 서연이도 헛웃음을 지었다.
파리에서 있었던 사고를 누가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찍은 위치를 보아 맞은편 카페의 손님 같아 보였다. 중국어도 들려오고.
서연의 팬이 찍은 것 같은데 미국인들이 시비를 걸고, 싸움이 나는 장면까지 다 찍혀 있었다. 수호팀이 순식간에 백인들을 제압하는 것도 나오고. 다만 수호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안 나온다. 서연이만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수준.
서연이 말했다.
“그 미국인들이 이 영상 보고 고소할 수도 있겠어.”
“아닐 거야. 누가 봐도 백인들이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한 상황이야. 사람 밀치고 먼저 주먹질한 것도 저쪽이고.”
“그렇긴 한데…….”
미국 유튜브에는 아직 안 떴다.
아마도 중국인이 중국 영상 플랫폼에 올린 걸 한국인이 퍼 와서 올린 모양이다. 제목이 한글이라 외국어 댓글은 안 보인다.
[최 감독 경호원들 진짜 대박이네!]
[특수부대 출신인가?]
[저 백인들이 뭐라고 했기에 싸움이 난 거죠?]
[뻔하죠. 인종차별 발언.]
[저 한국남자도 대단하다. 진짜 싸울 줄이야.]
[최 감독도 싸움 잘하나? 겁을 안 먹네.]
[프랑스면 한국인 외인부대원일 수도 있음.]
[경호원 맞다니까요. 지나가던 한국사람이 저런 덩치일 확률이 몇 퍼나 된다고.]
최근 순으로 보던 댓글을 인기순으로 돌려봤다.
첫 댓글을 보고 흠칫했다.
[저 두 사람 내 동기임. 특수부대 맞음.]
↳[헐! 특수부대 어디임?]
↳[저 사람들 데리고 전쟁 영화 찍으면 대박!]
↳[굿 아이디어. 전쟁 영화 보고 싶네.]
↳[최 감독 차기작은 음악 영화.]
↳[그건 일본 영화고, 한국 영화로 할 수도 있지.]
↳[현대물이면 소재가 없을 텐데?]
↳[소재가 없기는. 한국 특수부대가 시리아에서 미 델타포스와 연합 작전한다더만. 특수부대가 뭐 하는지 알려지면 그게 특수부댄가.]
↳[님은 그걸 어떻게 앎? ㅋ]
↳[최신성 표 남자 영화 좀 보고 싶긴 하네.]
그 밑으로 특수부대 아니면 전쟁 영화에 대한 언급뿐이었다. 특수부대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고.
곧 유튜브에서 내려가면 우리나라에서만 이슈가 되고 해외토픽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유튜브 측이 글로벌 이슈로 올리지도 않을 것이고. 중국에서 화제 되는 거야 그들만의 놀이터에서 노는 것이니 상관없다.
결론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런데 수호팀을 데리고 영화를 찍어 볼 생각이 들었다.
전쟁 영화가 아닌 특수 작전을 그린 영화.
댓글 중에 내가 만든 남자 영화가 보고 싶다는 댓글이 있었다. 그 댓글에 좋아요가 700개나 붙었고, 동감하는 이들도 많았다.
정말 그런 걸까.
조폭 영화가 아닌, 순수한 남자의 매력이 물씬 나는 영화. 남자라면 누구나 영화를 보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영화. 섬세한 감정 따윈 집어치우고 남자의 의리와 수컷의 향기가 물씬 나는 영화.
“서연아. 남자 영화 만들어 볼까?”
“조폭 영화 그런 거?”
“뭐가 됐든. 나 어릴 적에 첩혈쌍웅 보고 일주일 내내 멍했던 적이 있어. 너무 멋있어서. 40대 분들이 종종 그러더라. 영웅본색이 나왔을 때 남자들이 죄다 무게 잡고 다녔다고.”
“그러고 보니 요즘은 그런 영화가 없네.”
“그러니까.”
남자들만의 영화를 잘 안 하는 이유는 나도 안다.
영화 티켓 파워가 여성 관객이기 때문에.
남자다움을 잘 어필하면 여성 분들도 좀 볼 것 같긴 한데.
꽃미남을 캐스팅해서 진짜 남자의 반전 매력을 보여 주면 되지 않을까. 싸움질 잘한다고 남잔가. 성실하고 예의 바르며, 자기 여자 지킬 줄 알면 진짜 남자인 거지.
전쟁 영화들을 떠올려 보았다.
모티브와 주제를 놓고 세 영화가 먼저 생각났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블랙 호크 다운.
액트 오브 밸러.
세 영화는 각자 다른 의미로 전쟁 영화의 걸작이다.
액트 오브 밸러는 실제 네이비실 대원이 출연한 만큼 현실에 가장 가깝게 만든 영화가 아닌가 싶다. 감정 변화나 드라마는 없는 영화다.
그러고 보니 전쟁 영화도 꽤 흥행을 했네.
그 어떤 영화보다 주제 의식이 강한 게 전쟁영화다. 사람의 생사가 걸린 게 전쟁이고 전투인데 주제가 약할 리가 있나.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 주는 건 당연한 거고.
그런 것보다 임무에 목숨을 건 순수한 남자들을 그린다. 그림자 사나이처럼 전쟁의 공포를 직접 전달하는 느낌을 주고, 묘사도 매우 사실적으로.
어떤 영화가 될지 감을 잡았다.
인위적은 드라마는 없다. 대신 말도 안 되게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붙인다. 그게 곧 드라마다. 작전도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고. 작전은 성공하나 적들에게 포위되고 고립된다.
두 팀으로 나눈다.
고립되는 쪽. 그들을 구출하는 쪽.
어떤 부분에서 감동이 밀려올지 바로 나왔다.
고립된 아군을 구하기 위해 구출팀이 나타났을 때. 그리고 인해전술과도 같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때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코어가 너무도 강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대체 어떤 영화가 나오려고.
“차기작으로 전쟁 영화 해야겠어.”
“필이 꽂혔나 보다.”
“응. 심장이 두근두근하는데.”
“가만 보면 오빠도 마초 기질이 좀 있어.”
“나 지극히 냉철하고 이성적인데?”
“칭찬으로 들으면 돼.”
서연이 웃으며 또 커피를 내리러 갔다.
난 바로 수혁이에게 전화했다.
“수혁아. 차기작 결정했다.”
-뭔데요?
“전쟁 영화 하자.”
-전쟁 영화요? 한국 전쟁?
“아니, 현대전. 그냥 전쟁이 아닌 남자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 해외 올 로케로.”
대꾸가 없었다.
수혁이 두뇌가 휙휙 돌아가고 있다.
몇 개의 단어로 어떤 영화인지 조합하는 거지.
-와! 재밌겠는데요?
“감이 오지?”
-예. 블랙 호크 다운 같은 영화?
“바로 그거야. 제대로 한번 보여 주자.”
-대박이네요. 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내일 출근하면 자료 좀 모아 봐. 바로 시놉 들어가게.”
-알겠습니다!
수혁이 음성도 신이 났다.
수호팀 싸움 영상이 영화 모티브를 줄 줄은 몰랐다.
블루드 워 2편보다 이 영화가 더 땡긴다.
플랜의 치유 효과처럼.
이 영화로 어떤 부가 효과를 줄 수가 있을까.
그것만 잡으면 된다.
* * *
수혁이와 함께 차기작 논의를 시작했다.
자료 수집은 딱히 할 것이 없었다. 수호팀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군사기밀 사항은 말해 주지 않겠지만 리얼리티는 확보할 수가 있다. 군에 협조를 요청하면 제작지원도 해 줄 듯하고.
내용은 간단했다.
UN 산하 구호단체가 시리아와 터키 접경지대의 난민에게 구호물자를 전달하려다 거대 테러집단에 납치된다. 당시 호위하던 평화유지군 및 자유 시리아군은 전멸하고 그들을 구출하려던 헬기까지 추락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이에 미군을 비롯한 평화유지군은 납치된 구호단체의 일원을 구출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겪는다. 그러던 중 뒤늦게 구호단체에 한국인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미군이 한국에 연합구출작전을 요청한다.
이에 한국 공수특전여단 정예팀이 델타포스와 작전을 벌이고 인질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테러집단의 봉쇄 작전으로 탈출에 실패하고, 산악지대에서 고립되는 상황에 처한다.
어쩔 수 없이 미군은 공중 지원을 하여 탈출 작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포기한다. 너무도 많은 적이 몰려 와서 대원들이 한 마을에 숨었는데, 그 마을을 폭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원들은 마을에 포위된 채 밀려드는 테러집단을 막아야 했다. 대원 2명이 전사하고 탄마저 바닥이 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미군과 한국군의 갈등도 벌어진다. 테러집단이 왜 이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지 미군 측이 속 시원하게 밝히지 않았던 까닭에.
결국 민간인 중 하나가 거대 테러조직의 지도부 명단 및 은신처를 확보하고 탈출한 미국 CIA 요원이었음이 밝혀진다. 양측 군인들의 갈등이 더욱 심해졌으나 아군끼리 싸우고 있을 수가 없었다. 1천 명에 가까운 적들이 이동하고 있었으니.
인질 당사국인 한국. 미국. 프랑스. 터키 정부는 최고의 팀을 구성해서 고립된 자국민과 군인들을 구출하기로 한다. 여기에 한국은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던 UDT/SEAL 정예를 파견하기로 한다.
인원이 가장 많은 터키 특수부대가 적들의 뒤를 쳐서 주의를 돌릴 때. 델타포스와 한국군은 서쪽과 북쪽에서 진입한다. 프랑스군은 드론 정찰과 저격 지원을 맡고.
이후 말 그대로 대전투가 벌어진다.
영화의 30분 분량이다.
마을을 탈출한 뒤에도 테러집단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이들이 지대공 휴대 미사일을 확보하면서 헬기가 떴다 하면 추락하는지라 공중 지원도 못 받는 상황이었다.
해서 한국팀이 미사일 공격 저지 작전을 전개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시퀀스다.
이 작전이 마침내 성공하면서 공중지원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을에서 탈출한다.
미군과 갈등을 벌이긴 하지만 결국엔 함께 사지를 넘은 전우가 된다. 델타포스 대원들의 희생 덕분에 탈출하기도 했고.
하여 미군과 프랑스는 2명, 터키군은 6명이나 죽었다.
반면 한국군은 부상자는 있어도 전사자는 없었다.
이 기적적인 작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
민간인인 줄 알았던 구호단체 일원들이 전원 각국 정보국출신의 평화유지군 비밀 요원이었던 것이다.
간단한 플롯으로 갔다.
전쟁 자체가 소재다. 새로운 뭔가가 있으면 집중이 분산되기에 관객의 직관을 믿고 설명도 별로 안 할 참이다.
생생한 전투와 전장의 공포.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인간의 심리를 묘사한다. 리얼리즘 전쟁 영화라서 드라마틱한 전개는 없다. 관객이 직접 전투를 벌이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둘이서 초안을 작성했다.
수혁이가 말했다.
“좀 밋밋한데 괜찮을까요?”
“전쟁 영화는 액션 영화야. 극한 상황만으로 충분해. 감정이나 드라마를 넣으면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몰입에 방해될 거야. 관객이 전장에 던져진 것처럼 해 보자고.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긴장감도 극대화될 테고.”
“감정이입에 의한 부가 효과는 뭐가 있을까요? 플랜 때처럼 주연배우에게 몰입하면 뭔가 발생할 것 같은데.”
“글쎄. 초고를 써 봐야 알겠지.”
아직은 모른다.
뭐가 나올지.
휴머니즘일지. 용기일지.
* * *
며칠 후 수호팀을 불렀다.
그들에게 영화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들었다.
작전 수행 방식. 군사 장비. 작전 암구호. 통신어. 작전 모의 훈련. 훈련장 구조. 특수팀이 평소 생활하는 모습 등등.
군사 기밀은 본인들이 알아서 함구했다. 대신 현실과 조금 다르게 표현하라며 대안을 말해 주었다. 실제와 비슷하게 설정하는 식으로. 훈련 정보나 훈련장 위치 같은 것들.
“영화 내용은 어때?”
처음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저희도 미 네이비실과 연합 훈련한 적이 있는데, 이 영화처럼 비열한 느낌은 별로 없어요. 평범합니다. 밥 먹을 때 농담하고 장난치고. 반면에 한국군은 좀 많이 무뚝뚝하죠. 실은 말이 안 통해서 그런 건데.”
“맞습니다.”
수호팀 4명이 아이처럼 웃었다.
수혁이가 말했다.
“미군과 갈등하는 부분은 좀 빼야겠네요. 민간인 전원이 합동조사단이었다는 걸 미리 밝히면 미군이 속인 게 아니니 갈등할 이유도 없을 것 같네요.”
인물 갈등을 빼야 하나 고민이 슬쩍 들었다.
사실 고립된 환경의 스트러글이 너무 심해서 인물 갈등까지 있으면 관객들 스트레스가 좀 클 것 같긴 하다.
“그래, 남자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인물 갈등이 있으면 그 점이 좀 약해지긴 하겠다. 특수부대원들 전원 쿨하게 가자. 진행 상황에 따라 인물 성격이 약간씩 변하는 정도면 되겠지. 웃던 미군은 진지해지고. 무뚝뚝한 한국군은 상황이 악화할수록 여유롭고. 어때?”
수호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습니다. 폼 나잖아요.”
그때 억울하게 막내가 된 ‘이슬’이가 말했다.
“저희 큰아버지가 월남 다녀오셨는데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어느 날 정찰을 나갔는데 밀림에서 갑자기 총격이 벌어지면서 두 명이 총에 맞았대요. 그런 상황이면 미군은 전원 엎드리거나 밀림을 향해 마구 총질을 한답니다. 그런데 한국군은 달랐다고 그러데요.”
“어떻게?”
“정찰 분대가 8명이었는데 전우가 총에 맞는 순간, 나머지 6명 전원이 눈이 뒤집혀 가지고 밀림에 뛰어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도망가는 베트콩을 쫓아가서 다 사살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거 나도 들었는데?”
“너희 큰 아버지도 들은 이야기겠지.”
“그런가?”
월남전 때 한국군은 무시무시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베트남 국부인 호치민이 한국 해병과는 싸우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겠나. 미군이 몇 년 동안 못한 걸 한국군은 3일 만에 끝내 버렸다는 말도 들었고. 물론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벌인 잔혹한 일도 많다.
어쨌든 한국사람이 용맹해서 그렇다기보다는 한번 눈이 뒤집히면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그런 거다. 죽는 거 겁나는 건 당연하지만 ‘에라, 모르겠다!’가 되는 거지.
영화를 보면 옆의 전우가 총에 맞자 광분하여 뛰어나가는 장면이 더러 보인다.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광기다. 공포와 비극으로 인해 죽음이 한없이 가벼워진다고 할까.
“너희 출신 부대에 촬영 지원 좀 받으려고 하는데 가능하겠지?”
“보안 문제로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처럼의 말을 처음이 반박했다.
“한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찍는데 보안이 뭐가 문제냐. 쓰는 장비야 영화에도 수도 없이 나오더만. 전술 정보야 슬쩍 바꾸면 되는 거고.”
“저는 영화 내용이 좋아서 될 것 같습니다.”
“군이 딱 좋아하는 내용인 것은 맞습니다.”
수호팀이 긍정적으로 보았다.
군의 지원이 없으면 돈이 엄청 든다. 리얼리티가 대폭 떨어지는 것도 감수해야 하고.
“미 특수부대가 영화에 나오는 건 괜찮아?”
“한국군이 그 지역에서 단독 작전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실전 경험을 위해 연합작전에 투입된다는 말은 들었어요. 현실에 부합되기는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론 우리 군만 나오면 더 좋겠습니다. 군에서도 델타포스와 비교가 되니 그게 낫다고 볼 것 같고요.”
수혁이가 말했다.
“일리가 있어요. 사실 미군 협조를 위해 시놉을 이렇게 짠 건데 한국군으로만 가도 될 것 같습니다. 공중 지원 부분을 없애고, 테러집단 병력을 줄이면 됩니다.”
장단점이 있다.
미군이 나오면 액션 규모가 커진다.
한국군만 나오면 집중에는 더 낫고.
결정은 빨랐다.
“그래, 대규모 전투 씬에 욕심내지 말고 인간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 팀 규모도 두 팀 합쳐서 14명 정도로 하고. 저격과 기습 우선으로 전투 장면 묘사하고, 그 7명이 300명과 싸우는 것으로 가야겠어. 민간인 인질은 한국인만 둘. 정보요원인 건 동일하고.”
“저희도 그게 좋을 것 같긴 합니다.”
스케일이 크다고 좋은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감정이입 없이 펑펑 터지기만 하는 게 재미있겠나.
처음이 말했다.
“첫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고립되는 공수특전단이 약하게 나오면 안 될 겁니다. 해군특전단에 비교할 부대는 아니지만 그쪽 자존심도 있으니까요.”
처음의 말에 수호팀 3명이 피식 웃었다.
자기 출신 부대는 누구나 자랑스럽지.
다 조국에 헌신하는 군인이다.
“수고했다. 너희 네 명. 이 영화에 출연 좀 해라.”
내 말에 네 명이 깜짝 놀랐다.
“저희가요?”
“전 연기할 줄 모르는데.”
“대사도 별로 없어. 너희가 훈련할 때처럼만 하면 메소드 연기가 될 텐데 뭐.”
“그럼 하겠습니다.”
“저도요.”
다들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이 네 명에다 실제 배우 3명을 더해 해군특전전단 대원으로 구성한다. 공수특전여단 대원은 2명만 배우이고, 나머지는 특전단 출신 예비군으로.
수호팀을 내보냈다.
종일 떠들었던 터라 심신이 지쳤다.
술 마실 기력도 없어서 나도 수혁이도 퇴근했다.
* * *
며칠 후 강남역에서 마이클 플린 기자를 만났다.
CNN이 인터뷰를 원했기에 그가 직접 왔다.
휴가도 보낼 겸.
마이클 플린에게 언제 한번 밥을 사려고 했기에 정말 거하게 대접했다. 식사부터 하고 커피를 마시며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먼저 인사와 할리우드 차기작 동향. 그다음은 한국 생활과 미국 생활의 차이. 영화감독으로서 추구하는 방향과 가치관.
마지막으로 내 영화 플랜에 대한 것.
“한국에서 영화에 치유력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미국에서도 그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감독님이 의도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요?”
“한국 언론에 이미 말했지만 우연입니다. 영화의 새로운 장치를 발견한 셈이죠. 앞으로 영화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선 영화의 혁명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앞으로 찍는 영화에도 그와 같은 효과 혹은 장치를 부여하실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그 효과는 무엇입니까?”
“효과는 영화마다 다를 겁니다. 영화에서 받는 감동이나 위안이라는 측면에선 동일하죠. 다만 그게 어떤 종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크게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현상으로 귀결이 될 것 같네요.”
“다음 한국 영화는 어떤 내용입니까?”
“전쟁 영화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영화에도 부여한 효과가 있습니까?”
“있을 겁니다.”
“어떤 효과인가요?”
“그건 영화를 보시고 경험하는 게 좋겠네요.”
“그럼 기대하도록 하죠.”
플린 기자가 카메라로 돌아섰다.
“영화 플랜으로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킨 최신성 감독을 만나 봤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영화의 새로운 진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진 당대의 사람들은 훗날 역사의 평가가 어떠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영화의 진화를 우리의 후손들은 어떻게 평가할까요? 지금까지 한국에서, 마이클 플린이었습니다.”
마이클 기자가 리포팅을 마치고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
“고맙습니다. 이제 쉬는 일만 남았군요.”
“미국에서도 현상이 제법 크나 보네요.”
“좋은 의미로 집단 광기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싶어도 이미 종영이 되어서 DVD 발매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더군요. 소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한국 영화사상 북미에서 가장 흥행하긴 했다.
할리우드 영화에 비하면 대단한 성적은 아니지만.
플린 기자가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치유 효과가 벌어졌을 때만 해도 한국인이라서 그렇다고 봤죠. ‘한국 영화 특유의 감정 과잉 때문이다.’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미국인도 같은 걸 겪을 줄은 몰랐군요. 현대인의 질병은 공통인가 봅니다.”
마이클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공통점도 있겠죠. 마침 휴가를 내셨으니 편히 쉬다가 귀국하세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희가 처리해 드리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아, 최근 소식인데 북미 관객들이 블루드 워 2편에도 그러한 효과를 넣어 달라는 요구를 하더군요. 치유력이 될지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영화 플랜으로 특별한 경험을 해서 그럴 겁니다.”
“저도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플린 기자와 헤어졌다.
그와 난 묘한 동반자 관계가 되었다.
난 그의 보도 덕분에 인지도가 대폭 상승했고, 내가 승승장구하면서 날 발견한 플린 기자의 명성도 크게 올랐다. LA 지부에서 애틀란타 본사로 발령났으니.
이번 독점 인터뷰가 그에게도 도움이 되니 바쁜 와중에도 한국에 온 거겠지.
* * *
며칠 후 수혁이와 함께 시놉을 수정했다.
도입부에서 공수특전단의 현란한 구출작전으로 눈을 잡아끌고, 타이틀은 그다음에. 그러고 나서 주인공과 그의 팀이 주도적으로 나온다.
이때부터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이 시작된다. 다른 나라 특수부대는 제외하고 전투 규모도 줄였다. 관객의 감정에 별 도움도 안 되는 폭격과 헬기 지원 등을 빼버리니 확실히 집중도와 응집력이 좋아졌다.
여기에 세계적인 전투게임인 ‘모던 워페어’ 분위기의 앵글과 시점. 그와 비슷한 전투 씬 등을 참고했다. 주인공 시점의 몇 장면은 VR 장비를 사용해서 실제 전장에 있는 듯한 현장감을 줄 터였다.
시놉시스가 나온 뒤.
집에서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코어를 발동한 채 최상의 장면. 최고의 대사. 최적의 묘사만을 선택해서 진행해 나갔다.
영화야 나중에 찍을지라도 시나리오가 어떻게 나오는지 내가 먼저 궁금했다. 부가 효과로 무엇으로 나올지도 기대가 컸고.
그 어떤 시나리오 집필보다 집중했다.
평생을 남자다움에 천착했던 학자처럼 시나리오를 써 나갔다. 내가 보고 싶은 남성상. 내가 찾던 남자의 순수. 남자면 누구라도 반할 만한 캐릭터를 그려 나갔다.
첫날에 절반 정도를 쓰고 마무리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음 날 분량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적들을 막고 또 막다가 최악의 위기에 몰리던 그때였다. 예상치 못한 사고가 벌어졌다.
주인공 상황에 너무 몰입했는지 갑자기 이상한 쾌감이 느껴지더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과호흡까지 일어났다.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결국 중단하고 침대에 누웠다.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라 무척 놀랐다.
대체 뭐였지?
내게 공황장애가 있었나.
아니다. 그것과는 달랐다.
너무 흥분하여 죽을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이상한 느낌의 쾌감이었다.
마치 궁극의 절정을 맛본 듯한.
“오빠! 왜 그래?”
서연이 침대에 누워 있던 날 보더니 깜짝 놀라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얼굴이 창백해. 어디 아파?”
“아니. 조금 어지러워서.”
“어지러워? 혹시 공황 온 거 아니야?”
“모르겠어. 갑자기 그러네.”
서연이 근심 어린 얼굴로 날 보았다.
공황장애. 공포나 스트레스가 오래가면 뇌가 착각하여 불안 증세에 빠지는 병이다. 한 번 스트레스 받았다고 오는 건 아니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다가 터지는 질환이다.
그런데 내가 느낀 건 정반대였다.
스트레스가 극심한 것은 같은데 불안 증세가 아닌 쾌감 증세로 왔다. 이 역시 뇌가 착각한 것처럼.
그러고 보니.
집필을 하면서 주인공에게 과도하게 몰입해 있었다. 몸까지 긴장되어 경직될 정도로. 주인공 상황이 너무 힘들고, 긴장감이 극에 이르다 보니 뇌가 오작동을 일으킨 모양이다.
그런데 왜 쾌감이 느껴지지?
잠시 쉬었다.
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 10분 누워 있으니 몸이 나른해지고 힘이 쭉 빠졌다.
이건 또 무슨 현상이지?
정말 쾌락의 절정을 맛본 뒤 나른해진 것처럼.
내가 혼자서 뭘 했나?
그럼 내가 느낀 게.
오르가즘?
뭔진 몰라도 머릿속과 몸이 아주 개운했다.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 것 같았다. 기분도 상당히 좋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조차도 납득이 안 되는데.
너무 강한 외부 스트레스로 인해 내게 쌓인 스트레스가 사라져버린 것만 같은. 강한 통증이 기존의 약한 통증을 잡아먹듯. 그 강한 통증은 원래 내 것이 아니니 금세 사라졌고.
그러다 비슷한 뭔가를 떠올렸다.
러너스 하이라고 있다. 마라토너가 질주하다가 묘한 쾌감이나, 머리가 맑아지고 상쾌함을 경험하는 걸 뜻한다.
그것과 좀 유사한 느낌이었다.
해서 찾아보니.
<러너스 하이는 달린 지 30분이 지나고 심박수가 안정적일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몸이 고통을 받으면 천연 진통제인 엔도르핀과 아난다마이드가 분비된다. 특히 아난다마이드는 마리화나를 피울 때 환각을 일으키는 THC와 비슷한 카나비노이드의 일종으로 쾌감을 맛보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이 물질이 쾌락을 느끼게 하는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하여…>
정신이 아득하고 짜릿했던 느낌.
엔돌핀이 과다 분비된 거였다.
몸이 고통받고 있다고 뇌가 착각을 했나.
내가.
마약 영화를 만들어 버린 건가?
* * *
이틀에 걸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영화 자체로도 상업영화로서 아주 훌륭했고, 캐릭터도 매력이 상당했다. 캐릭터가 부각이 되는 영화인데 물량 공세를 했으면 어쩔뻔했나 싶을 정도다.
물론 영웅본색 같은 ‘멋’은 없다.
멋보다는 인물의 성격 등의 매력이 철철 넘친다. 행여나 겉멋이나 허세를 부리는 느낌이 들까 봐 그 점을 철저히 관리했다. 배우들이 얼마나 해주느냐에 달렸다.
일반인이 시나리오만 봐선 재미없다.
나야 어떻게 영상화될지 아니까 예상이 되는 거고.
시나리오 작가는 이런 플롯은 팔리지 않기에 쓰지 못한다. 오직 감독만이 쓸 수 있는 시나리오다. 소재도, 액션도 눈에 잡히는 게 없으니.
씬 32.
대원들과 테러 집단이 치열한 교전을 벌인다.
여기서 제작자고, 투자자고 뭘 볼 수가 있겠나.
총알이 빗발치는 교전 상황을 일일이 지문으로 묘사해도 읽는 사람은 딱히 와 닿는 게 없다. 설계도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전문 작가는 소재와 기발함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런 시나리오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반면 단순하고 명확한 건 리스크가 적다. 이런 영화는 어떻게 찍느냐가 문제다.
난 어떻게 찍느냐를 정해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한 문장에 담긴 장면과 쇼트들이 이미 머릿속에 다 담겨 있으니. 또한 제작자 등이 읽었을 때 잘 잡히지 않는 인물의 심리 등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거고.
그 심리의 변화를 따라가며 찍는 거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이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으면 당연히 엉망진창이 되고, 망할 수밖에 없다.
누가 읽었을 때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이 시나리오에 엄청난 공포와 긴장감을 심어 놨다. 수혁이도 시나리오만 봐선 잡아내기 어렵다. VR 장비로 찍어 총알이 빗발치는 장면이 자주 나올 텐데, 그 현장감은 글로 묘사해봐야 의미가 없다.
정리하자면 지극히 영화적인 영화라는 의미다. 스토리가 아닌 영상만으로 압도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전쟁 영화의 묘미이자, 특별함이기도 하고.
여기에 쾌감을 일으키는 중독성까지 담기기 됐다.
나야 지극히 몰입해서 이상 현상을 겪었지만 관객은 상쾌함. 기분 좋음. 만족감 등을 경험할 터다. 위험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은 뒤의 해소감이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영화가 끝났을 때는 나른한 행복감마저 밀려들 것 같다.
온몸의 탁한 기운이 모두 휩쓸려 나간 듯한.
여자들은 뜻 모를 해방감을 느낀 뒤 배우들의 팬이 될 것 같고, 남자들은 본인들이 특수부대원이 된 것처럼 기세등등해지고 남자다움을 동경할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쓰고 정리한 점들이다.
이것들이 실제로 구현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 * *
수혁이가 시나리오를 읽었다.
녀석이 내가 몰입하고 연상한 것의 반의반만 따라가도 시나리오를 제대로 읽은 것으로 봐도 된다.
“와…. 이건 진짜.”
“왜? 느낌이 와?”
“긴장감이 장난 아닌데요? 영화 보다가 졸도하는 사람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게 보여?”
“당연히 보이죠. 감독님이 어떻게 연출할지 아니까요. 1인칭 시점으로 사지를 돌파할 때 공포와 스릴은 정말 엄청날 겁니다. 내가 전장에 있는 느낌인데 실제로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그 긴장감이 전달될까?”
“당연히 되죠. 예를 들어 어제 면허 딴 초보운전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초보운전자가 무섭겠어요? 그걸 옆에서 보는 사람이 무섭겠어요?”
비유 한번 기막히네.
수혁이 말이 맞다.
초보운전자가 횡단보도 지점에서 미리 속도 줄이지 않고 앞차 바로 뒤에서 급정거를 한다든가. 교차로에서 좌회전하는데 핸들을 너무 꺾어서 중앙선으로 간다든가. 교차로에서 녹색불 바뀌려는데 그냥 통과한다든가.
그런 운전을 지켜보는 사람의 긴장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심장이 쫄깃쫄깃해지고 식은땀까지 흐른다. 욕 나오는 건 당연하고.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전에 유튜브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 있는데, 긴장감이 엄청났다. 그냥 보면 무섭지 않다. 초보 운전이라는 점과 운전자가 너무 미숙하다는 점. 실제로 몇 번 충돌할 뻔했다는 점. 그런 것으로 감정이입이 되면서 긴장이 극에 달했던 거지.
한데 이런 긴장감이 영화에서 수도 없이 나온다.
영화에서 감정이입이란 주인공과 동화되는 현상으로 감정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몰입은 증폭된다. 감정이입한 인물에 대한 애정이 크면 클수록 증폭력은 극대화된다.
플랜에 이어 이번 작품에도 부가 효과가 발생한 이유가 바로 그거다. 감정을 충실하게 쌓아 올린 덕분이다. 관객은 내가 겪었던 그대로 몰입하며 따라갈 것이고.
수혁이는 시나리오를 보면서 그러한 감정이입 과정을 읽었고, 그걸 토대로 시나리오를 봤던 거였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문장으로도 인물과 상황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되는 거다.
“인물들도 매력 있지?”
“그럼요. 명대사는 말이 멋져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상황과 절묘하게 어우러져야 나오는 거지. 인물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평범한 인물일지라도, 상황에 따라 매력이 달라지는 거죠. 저는 후반에 읽다가 주인공이 ‘가자.’라는 한 마디에 소름이 돋았어요.”
“맞다. 가자는 한 마디에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으니까. 전우애. 삶과 죽음. 탈출 의지. 자신의 본분 같은 거.”
“예. 말씀하신 것들이 복합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매력적인 모습이 한꺼번에 터지니까 일순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감당이 안 돼?”
“왜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산 주식이 상한가를 친 날. 부모님은 땅을 물려주신다고 하고, 평소 좋아하던 미인이 내게 관심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이게 한 번에 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좋아 미쳐버리겠는데?”
“바로 그거죠.”
“하하하하!”
수혁이가 비유 하나는 기막히게 잘한다.
여러 매력이 한방에 들이닥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거겠지. 남자는 남자다움에 반하는 거고, 여자는 배우에게 반하는 거고.
“묘한 쾌감 같은 건 안 들었어?”
“쾌감요? 그런 건 모르겠고 기분은 좋았어요. 플랜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표현하기는 어렵네요.”
당연하다.
나야 직접 쓴 당사자로 몰입이 대단히 컸기 때문에 이상 현상을 겪었던 것이다. 글로 봐서는 잘 모른다. 영화를 보면서 감정이입을 하면 달라질 것으로 확신했다. 나만큼은 덜 할지라도.
“군에 지원 공문을 보내 봐. 우리가 제작에 필요한 건 실제 사용 장비와 전술 정보를 어느 선까지 공개할 수 있나 정도야. 군함과 헬기까지 지원해주면 더할 나위 없고.”
“알겠습니다. 군 지원 상황 보고 캐스팅하시려는 거죠?”
“그래. 장면에 따라서 실탄을 쓸 수도 있거든. 현역이 아니면 어려운 부분이야. 딱히 애국심 고취 시키는 장면은 없지만 전체 느낌은 군에서도 환영할 거야. 대한민국 특수부대원들이 다 멋지게 나오니까.”
“그럴 것 같네요.”
수혁이가 나가려다 말했다.
“배우는 누구 생각하고 있어요?”
“전원 오디션을 봐야 할 것 같다. 신인 위주로.”
“한빈은 어떠세요? 해병대 전역인데.”
“수호팀과 체격이 좀 안 맞아. 키가 좀 커야 돼. 근육이야 계약한 뒤에 만들면 되고.”
“연기가 좀 그럴 텐데요.”
“찾아봐야지.”
“쉽지 않을 거예요. 주인공이 키 크고 잘 생기고, 우수에 찬 눈동자까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 별로 없죠.”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거야. 한국에서 못 찾으면…”
말을 하다가 뇌리가 번뜩였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혹시 이번 영화 때문에 그 친구를 만났던 것은 아닐까. 이 전쟁 영화의 주인공을 하라고 그동안 경력을 쌓았던 거 아닌가? 서연이 다음으로 강한 인연이 있는 친구인데 그 인연이 무색할 정도로 나와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 주인공으로 정말 어울린다.
내가 무의식중에 그 친구를 염두에 두었던 모양이다.
코어가 확실히 미래를 본다.
그렇지 않으면 이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과거에 이미 그 친구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이 영화를 하려고 만났던 거다.
곧장 전화를 걸었다.
“미국 촬영 끝났지?”
-네. 집에서 쉬고 있어요.
“회사로 와.”
-알겠습니다.
윤건하.
전쟁 영화의 주인공이다.
내 연출작 첫 주연에 본인도 첫 주인공.
* * *
건하와 마주 앉았다.
할리우드 영화 촬영을 끝내고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조금 그을렸다. 창백했던 녀석이었던 터라 건강해 보여서 좋았다. 표정도 몇 년 전과 비하면 아주 좋다. 꾸부정하고 약해 보이던 때와 달리 지금은 운동도 열심히 해서 보통 체격이다.
“키가 몇이야?”
“187 정도 될 거예요.”
수호팀이 185 정도다. 근육량이 커서 거한으로 보이는 친구들이다. 건하도 근육을 좀 키우면 수호팀 덩치에 견줄 수 있을 것 같다.
“현역 복무했지?”
“네. 7사 GOP 근무했어요.”
“네가?”
“입대할 때는 멀쩡했잖아요.”
말을 하고 씩 웃는 건하다.
이젠 이 친구를 보고 정신 문제를 거론할 수가 없다.
정상이 된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밝다.
내 앞에선 안 그러지만 카리스마까지 있다고 들었다.
“이번에 전쟁 영화 하려고 한다. 네가 주인공이야.”
“제가요?”
“왜? 걱정 돼?”
“그런 건 아닌데, 주인공은 처음이라…….”
“너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연기와 얼굴 보면 몸이 달리고, 몸을 보면 연기가 안 돼.”
“역할은요?”
“해군특전단 최정예 팀장.”
“근육 만들어야겠네요.”
“그래. 너무 많이 만들 필요는 없고, 지금보다 10킬로그램만 찌운 뒤에 체지방을 좀 낮춰. 고생은 되겠지만.”
“알겠습니다.”
“수호팀 알지?”
“그분들과 훈련하면 되겠네요.”
“그래. 다섯 달 정도면 될 거 같아?”
“네. 5개월이면 충분해요.”
건하에게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읽어봐. 그냥 봐선 감이 좀 안 올 거다. 캐릭터에 대한 건 따로 적어 놨어. 배우 강동운이 특수부대에 있다고 보면 된다.”
“제가 그 정도는 아닌데.”
“곧 그렇게 될 거야. 훈련이 좀 힘들 거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촬영 끝나면 여자친구 소개해줄 게.”
“정말요? 연예인 아니죠?”
“아냐.”
“기대할게요.”
건하가 시나리오를 들고 일어났다.
건하는 내가 누굴 소개할지 감을 잡은 것 같다. 회사 행사할 때 둘이 눈빛 교환하는 거 봤다. 호감은 있는데 둘 다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그 이유야 나는 잘 알고 있고.
* * *
시나리오가 나온 지 한 달.
오디션이 한창이었다.
특수부대원 역할에 맞는 지원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체격만 된다면 배우를 우선 통과시키고, 수색대나 해병대 출신 지원자들도 1차 통과를 시켰다. 아쉽게도 특수부대 출신 지원자는 2명에 불과했다.
2차부터는 개별 면접이었다.
몸이 무척 단단한 남자가 내 앞에 앉았다.
“해병수색대 전역하셨고, 대학로에도 있었네요?”
“연기를 제대로 못 배웠습니다.”
“연기는 크게 상관 안 해요. 내면 연기가 별로 없으니까. 살을 조금 뺄 수 있죠?”
“뺄 수 있습니다.”
“예. 나가보셔도 돼요.”
지원자가 환한 얼굴로 넙죽 인사를 하고 나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신인 뽑기가 너무 어렵다. 지금 나간 지원자는 20명을 본 뒤에 겨우 건진 사람이다.
어떻게든 내 영화에 출연하려고 뻥을 친 지원자도 있었고, 체격과 연기는 좀 되는데 성격이 안 맞는 사람도 있었다. 외모보다는 분위기를 보는데, 다짜고짜 성대모사를 하질 않나.
이번 작품의 배우들은 실제로 남성적인 매력이 좀 있어야 하는 이들이다. 꾸며낸 매력은 우러나오지 않으니까. 해서 눈빛이 좀 깊고 분위기 있는 사람을 우선으로 선택했다.
그렇게 최종 7명을 뽑았다.
배우도 있고. 갓 제대한 사람도 있고.
건하와 수호팀을 합쳐서 12명이다.
나머지 두 명은 현역을 출연시키려고 했는데, 얼굴이 공개되면 안 된다고 해서 무산되었다. 해서 수혁이가 모델 중에 출연 의사가 있는 분을 찾아보기로 했다. 정말 특수부대원들처럼 보이게 하려고 건하 빼고 기존 배우는 일부러 안 썼다.
캐스팅을 마친 뒤 전쟁 영화 펀딩을 했다.
이번 펀딩은 30억 규모였다.
제작 준비로 바빠서 게시판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다.
또 난리가 났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렇게 8일이 더 지났을 때.
마침내 군에서 지원을 허용한다는 공문이 나왔다.
군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등 조건이 있기는 했는데, 시나리오를 수정해 달라는 내용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지원 사항은 중동 아덴만에서 감시활동을 하는 구축함 내외 촬영. 실제 UDT/SEAL 대원들 복면 촬영. 일급 기밀 사항을 제외한 우리군 장비 및 전술 정보 공개. 수송헬기 지원. 공군 수송기 지상 촬영. 각종 최신 장비 및 총기 지원 등.
인력 지원도 있었다.
합동참모부 소속 대외협력관 1명.
해군과 공군 예비역 기술 고문 2명.
현역 해군특전전단 부사관 2명.
인력 지원은 총기 관리 및 감독 역할을 할 터였다.
현역은 훈련 교관을 겸할 테고.
군의 지원이 떨어지자 프리 프로덕션이 시작되었다.
프리 기간만 여섯 달이나 된다. 외국에서 촬영을 하자니 이래저래 걸리는 것이 많고, 현지 허가와 계약 문제도 걸림돌이 좀 있었다.
어차피 일본 영화를 먼저 찍어야 하니 문제 될 건 아니었다. 배우들 준비 기간이 길어지니 영화 완성도도 좀 나아질 테고. 특히 안전사고에 철저히 대비할 수 있어서 프리가 긴 것이 오히려 나았다.
촬영 장소는 우즈베키스탄 남동부 산악 지대. 테러집단과 마을 주민으로 나올 보조출연은 현지에서 조달하기로 했다. 각종 무기도 아덴만 구축함에서 촬영을 먼저 한 뒤 수송헬기로 옮기기로 했다. 당연히 현역이 참관한다.
제작이사 지휘하에 제작부가 일사불란하게 프리를 진행했다. 제작비가 대략 300억이다. 준비할 것이 워낙 많아서 제작부와 연출부만 각각 10명이 넘었다.
나와 수혁이, 스태프 팀장들과 콘티 작가팀이 연일 스토리보드 작업을 했다. 전쟁 영화는 쇼트가 워낙 다양하고 많아서 씬 하나를 완성하는데 종일 걸릴 때도 있었다.
게다가 이번엔 VR 기술로도 영화를 찍기에 그쪽 기술진도 콘티 작업에 참가했다. 시나리오만으로는 알 수 없는 영상을 설명해야 했기에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그렇게 스토리보드를 만드는 데에만 한 달이 걸렸다.
콘티만 나오면 내가 할 일은 일단 다한 셈이었다.
배우들 몸이 만들어지면 연기 디렉팅만 하면 된다.
장면 리허설은 수혁이가 진행하면 되고.
* * *
석 달이 지나갔다.
수혁이와 함께 일본에 와 있었다.
한국영화 제작에 신경 쓰는 동안 일본 쪽 제작 상황도 틈틈이 점검하고 있었다. 시나리오 재고 작업도 줄곧 했었고, 작곡한 음악도 메일이 올 때마다 확인했던 터다.
주연 배우는 일전에 언급된 그들로 확정되었다. 프로듀서가 섭외를 했더니 당일 응답이 왔다고 한다. 시나리오는 볼 필요도 없다면서. 뮤지션들은 일찌감치 섭외가 끝났다.
일본인 프로듀서와 작가가 우릴 맞이했다.
프로듀서가 말했다.
“그러면 최종 시나리오로 오케이를 하신 거지요?”
“네. 일본 청춘 세대의 현실이 어느 정도로 리얼한지는 모르겠더군요.”
“그 점은 저희를 믿으셔도 됩니다. 사토 타케루 군이 시나리오를 보고 감탄했어요. 너무 현실적이어서 놀랍다고 하더군요. 일본에는 이런 스타일의 영화가 없었습니다.”
“주연배우들도 시나리오에 만족해합니까?”
“영화 잘 나올 것 같다며 흥분할 정도였습니다. 감독님이 오신다고 해서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감독이 배우도 못 보고 있었으니 미안하네요.”
“아닙니다. 바쁘신 거 아는데요.”
작가에게 악수를 청했다.
“고생했습니다. 작품 잘 찍어 볼게요.”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감독님.”
작가님 표정이 환했다.
그간의 부담감이 일시에 사라진 모습이다.
직원이 작가를 데리고 회의실로 향했다.
잔금을 주기 위해서.
“음악은 다 나왔죠?”
“최종 12곡을 결정했는데, 2곡은 여러 방향으로 편곡해 보고 있습니다. 삽입곡은 24곡까지 준비했고요.”
“음악은 다 마음에 듭니다. 배우들이 어느 정도까지 연습했습니까?”
“바로 찍어도 될 정도로 맹연습을 했습니다. 한국 원작에 지면 안 된다는 각오로 임했죠. 하하하.”
“혹시 녹음한 거 있습니까?”
“그럼요.”
프로듀서가 들려주는 연습곡을 들어봤다.
가수 겸 배우인 미와 씨 기타 연주는 프로 수준이고, 남자 주연인 사토 타케루의 피아노 연주도 좋았다. 기타 실력이 그냥 그랬던 황정우 배우보다 낫다.
“연습 많이 했네요. 바로 촬영해도 될 것 같습니다.”
“사토 군이 원래 피아노를 쳤다고 합니다.”
“캐스팅이 좋았네요.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별말씀을요.”
이후 주연배우들과 처음으로 미팅했다.
감독이란 작자가 프리가 거의 끝났을 때 주연배우를 만나는 황당한 경우였다. 원래 내 스타일이 그런 줄 아는지 섭섭해하진 않았다.
전쟁 영화 프리는 3달쯤 남았다.
일본 영화 촬영을 한 달 하고 편집과 보정을 두 달 하면.
전쟁 영화 촬영에 맞출 수가 있었다.
나와 수혁이는 프리 단계에 하자나 오류가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저예산이고 ‘샌드위치’ 방식으로 찍는 영화라 오류가 좀 있어도 상관 없었다. 로큐 스태프들이 워낙 잘해준 것도 있고.
5일 만에 모든 준비를 끝냈다.
고사도, 제작발표회도 없이 촬영을 시작했다.
한데 일본 촬영 첫날부터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두 주연배우가 보석이었다.
일본 영화계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