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인생을 살아가는 맛 (42/56)

제2장 인생을 살아가는 맛

결혼 준비를 위해 서연과 열심히 돌아다녔다.

어느 예비부부는 결혼 준비 때 많이들 싸우고 감정도 상하고 그런다던데 우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우선 집안과 집안이 신경전을 벌일 일이 없었다.

양가 부모님이 우리가 뜻한 바대로 하는 걸 바라셨기 때문이다. 나도 서연이도 허례허식이나 과시를 싫어하는 편인데, 부모님들도 그랬다.

사실 부모님 입장에서 자식이 결혼하는 걸 널리 알리고 싶기는 했겠지만, 나도 서연도 유명인이란 걸 감안 하셨다. 기자들이 몰려오고, 친지보다 연예인이 더 많은 상황은 당신들도 싫으셨을 테고.

해서 비교적 조촐한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다.

예식장은 용인에 있는 한적하고 작은 리조트를 빌렸다. 음식은 국수를 비롯해 옛날 잔치처럼 떡과 전 등을 마련하고, 예복만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폐백이나 예식 절차 같은 것도 없었다.

사회도 없고 주례만 신성영화사의 이 대표님이 해주기로 했다. 축가도 없고, 퍼포먼스도 없었다. 들러리로는 수호팀 5명과 제니스 멤버들만 참석하기로 했고.

연예인과 회사 직원은 최소한으로 초청하기로 하고, 친지는 아주 먼 친척 빼고 모두 모시기로 했다. 친구들은 서너 명만 초청했다. 우리 둘 다 절친이 별로 없기도 했으니.

2주에 걸쳐 결혼 준비를 거진 마쳤다.

서연과 비서 희진이가 결혼 준비를 꼼꼼하게 해줘서 내 집은 이미 신혼집으로 변해 있었다.

안방에 들어갔다.

어제 침대가 새로 들어오면서 거의 모든 살림이 갖추어 졌다. 방 다섯 개도 잘 꾸며졌고.

내 서재에는 기다란 책상과 책장이 놓이고, 담배를 가끔 태우는 날 위해 재떨이와 공기청정기를 놓았다. 좋아하는 음악 들으라고 커다란 스피커도 있고.

나도 서연도 미니멈을 추구하긴 하는데 막상 살림집을 꾸미니 이래저래 물건들이 꽤 많았다. 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 갖추었는데도.

서연이 커피를 내려서 가져왔다.

그녀와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마셨다.

“살던 집 팔렸어?”

“아직. 아빠 엄마한테 사시라고 했는데, 단독주택이 좋으시대. 내 집이 유지비가 좀 들기도 하고.”

“이참에 지방 몇 곳에 별장이나 몇 개 지을까?”

“왜?”

“장인, 장모님이 땅 보러 지방에 자주 다니시잖아? 매번 모텔 같은 곳에 묵는 것보다 낫지. 아버지 어머니도 놀러 많이 다니시는데 늘 호텔에 묵으시거든. 나나, 회사 촬영팀이 지방에 자주 가기도 하고.”

“그러면 별장보다 작은 펜션이 낫지 않아?”

“그래, 그게 낫겠다. 지성이한테 추진해 보라고 해야겠어. 각 도에 하나씩.”

서연이 커피잔을 내려놓더니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했나 보다.

그녀가 날 쓰러뜨리더니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하하하.

* * *

영화 개봉 4주차.

2주 전의 유행은 시작에 불과했다.

영화 개봉이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열풍은 더욱 커졌다. 광풍에 가까웠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던 것이, 어린이와 중장년층까지 퍼졌다. 유행 때문인지, 궁금증인지. 그게 아니면 뒤늦게 알게 되어서 그런가. 평소 영화 안 보던 사람들까지 극장으로 갔다.

이 현상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텔레비전에서 어느 의사는 영화의 심리치료 효과를 설명하면서 사회 전체를 정화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했다.

영화를 보고 기분이 좋아진 이들이 유쾌한 유행을 만들었다. 그 유행이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켜 영화를 안 본 사람들까지 기분 좋게 한다나.

심리치료라는 게 거창한 것이 아니며 그림이나 음악같이 그냥 보는 것만으로 치유 효과가 있는데, 영화 플랜은 그 효과가 대단히 뛰어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이 아프고 세상에 치일 때 영화를 다시 보면 좋다고 권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며.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 플랜은 현대인의 고질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백신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현재 유행하는 것으로 보면 한국인과 한국 사회 전체를 치료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현상이지요. 단지 치유력만 있거나, 영화적인 재미만 있었다면 그 치유의 힘은 작았을 겁니다. 일종의 상승효과지요. 그러니 이 유행을 우려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내 영화에 대한 분석과 연구까지 연일 언론에 나왔다. CNN에선 한국에서 벌어지는 유행과 영화 효과에 대해 특별히 다루었다. 시사회 때 온 외신기자들은 일찌감치 기사를 냈다. 일본 신문은 대서특필에 버금가는 특집을 냈고.

흥행에 이어 유행. 나아가 사회현상.

그리고 영화 치료 효과의 연구 등등.

정말 연구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영화가 없었기 때문에. 또한 음악이나 그림과 달리 그 치유 효과가 무척 컸던 까닭에.

이 부분은 나도 흥미롭고 관심도 있었다.

영화로 무언가를 ‘발명’했다고 해야 할까.

영화를 제작할 때 재미와 예술성을 기본으로 하고, 또 다른 무언가를 부여할 수도 있는 거니까.

영혼의 치유. 죄의식의 용서.

욕망의 대리만족, 스트레스 해소.

감동 혹은 위안과 만족이라는 목적은 같다.

영화를 만들어갈 때 이 점은 늘 염두에 두기로 했다.

아마도 여러 감독이 영화의 새로운 작용을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 것 같다.

어쨌든 개봉 4주차인 지금.

흥행성적이 1,670만에 이른다.

전국 상영이 아직 1주일 더 남았고 2주 정도 연장 상영할 극장도 200곳이 넘는다. 독과점 소리를 들었던 스크린 수에다 경쟁작도 없다. 게다가 대유행에 사회적 현상까지.

회사에선 2천만 갈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국 최고 흥행 성적은 1,700만이다.

일부 언론에선 전무후무한 2천만 관객 영화가 탄생할 거라는 말이 나온다. 단순한 흥행영화가 아닌 국민을 치유하는 영화라면서.

나로선 흥행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에 위안을 주고 그들의 아픈 마음을 치료했다는 점이 기뻤다. 자부심도 생기고.

또 하나 기분 좋은 흥밋거리가 있었다.

바로 플랜 펀드에 가입한 이들의 반응이다.

지난주에 천만 넘었을 때.

펀드 사이트가 폭발했다. 폭발하고 꺼져야 하는데 그 불길이 점점 번져갔다. 지금도 수많은 댓글이 올라왔다.

[앗싸! 오늘 1670만 찍었음!]

[500만 원 넣었는데 얼마쯤 나올까요?]

[수익률 730% 정도 잡으면 됨.]

[헉! 3,700만 원!]

[그럼 천만 원 투자한 사람은 7천3백만? 헐!]

[750%는 근거가 뭐임?]

얼마 뒤 그에 대한 답글이 올라왔다.

[플랜 제작비 130억. 이대로 2천만 관객이 들 경우. 흥행 수익은 부가판권 합쳐서 약 2,000억. 극장 수익 빼고 수수료 같은 거 빼면 1,000억 정도 됨. 로큐는 투자 제작 홍보 다 했으니까, 1,000억으로 수익 배분함. 그래서 서민 펀드임.]

[아, 주식 하지 말고 이 펀드 가입할걸.]

[난 700 넣었음. 수익 5천. ㅋㅋㅋ]

[님들 부러움.]

[쩝. 로큐 펀드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데.]

[빨리 돈 모으세요. 최 감독님 할리우드 영화 언제 펀드 공지할지 모르니까. 난 이번에 3천7백 벌었음. 이번에도 욕심 안 내고 500짜리에 가입할 거임.]

[고맙습니다, 로큐!]

[감사합니다! 감독님!]

[사랑해요! 플랜!]

[그만 합시다. 이젠 좀 지겹네!]

[ㅎㅎㅎ]

펀드에 가입한 사람들은 자랑질이고, 소문 듣고 구경 온 사람들은 부럽다는 댓글 일색이다. 어떤 사람은 4번이나 펀드 가입에 성공해서 2년 만에 1억을 벌었다고 한다.

펀드를 만든 게 뿌듯하고 흐뭇했다.

자발적으로 홍보해주는 투자자들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사회 환원 차원이기도 하다. 투자자들의 수익금 일부가 청년 재단 후원금으로 가니 여러모로 좋은 작용을 한다.

댓글 감상은 늘 재밌었다.

최근 댓글만 보고 떠나려던 그때였다.

다급한 글이 올라왔다.

[큰일 났음! 뉴스에 로큐 펀드가 떴음!]

[이런!]

[이러면 경쟁 심해지는데.]

[여기에 해커 없어요? 이 사이트 다운 시켜야 돼!]

[그러면 가입 못 해요?]

[회원 가입이 안 되니까!]

[이 사람들 심보가 참….]

[플랜에 투자한 사람들이 이러시면 안 되죠.]

[난 신규인데 그럴 만하다고 봄. ㅋㅋ]

기존 투자자와 신규 가입 투자자가 싸우는 양상이 벌어졌다. 다 돈 벌자고 하는 건데 어쩔 수가 있나.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댓글을 올렸다.

[블루드 워 2편 펀딩 외에도 네오스타 개별 히어로 영화 펀딩도 합니다. 미드 펀딩과 중국 영화 펀딩도 있으니 기회는 좀 더 있을 거예요.]

[그 정보는 어디서 들음?]

[제가 그렇게 하려고요. 저 최신성입니다.]

[파닥파닥, 제발 그렇게 되라~!]

[웃기고 있네. 어디서 낚시질이야! 꺼져!]

[이젠 별의별 놈이 다 엮이네.]

[미드 펀딩? 네오가 미드를 왜 만드냐? 미친놈!]

[이 게시판에 이제 관종까지 꼬이네.]

다시 글을 올렸다.

[저 진짜 최신성인데요?]

[네가 최신성이면 난 안서연이다!]

[저 인간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최 감독님이 할 일이 없냐? 댓글을 보고 앉았게?]

[그러게요. 서연 씨와 결혼 준비하신다던데.]

[관심 주지 맙시다. 어느 게시판이나 그래요.]

[옜다 관심! 먹고 떨어져라.]

댓글을 보면서 정말 묘하게 웃겼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장난치고 싶기도 하고.

그때였다.

[저분 최신성 감독님 맞아요.]

[댁은 누군데?]

[저 플랜 조감독 최수혁이라고 합니다.]

[응, 그래. 너도 옜다 관심. ㅋ]

[할 일이 그렇게도 없냐?]

[응? 이분 아이디가 SH-CHOI인데요?]

[설마?]

[진짜네? 정말 최수혁 조감독이에요?]

[네. 지금 우리 감독님 매우 당황하신 것 같아서요.]

[아까 그분이 정말 최신성 감독님?]

[그분 진짜였어요?]

[예. 진짜 최 감독님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댓글이 폭발했다.

나는 웃음이 터졌고.

[죄송합니다! 감독님!]

[죄송해요!]

[저희가 잘못했어요!]

[처음 글을 올리셔서 몰랐어요! ㅠ ㅠ]

[우린 누가 감독님 사칭하는 줄 알고...]

[아니! 이 양반들이 사람을 몰라보고! ㅋㅋ]

[아, 웃겨!]

[대박! 현웃 터짐!]

[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게시판이 순식간에 ㅋㅋㅋㅋ로 도배되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ㅋㅋㅋ를 올리는 바람에 정작 사건이 일어난 페이지는 넘어가 버렸다.

정말 한참이나 웃었다.

이 게시판이 활기를 띠게 된 건 유행 때문이다. 이 펀드 게시판이 일종의 성지가 되고, 직장인들이 놀이터 삼아 댓글을 올리며 놀고 있었다.

이들이 노는 게 나도 재미가 있어서 구경했었고.

진작에 나도 동참을 할 걸 그랬다.

그랬으면 이런 불상사도 안 일어났지.

[무슨 일임? ㅋㅋㅋ]

[직접 찾아보셈. 진짜 웃김.]

수습도 할 겸 다시 댓글을 올렸다.

[여러분, 플랜을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신성 감독님!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펀드 말씀하신 거 진짜죠?]

[네. ^^]

[와! 대박!]

[감사합니다! 최 감독님 오래 사세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게 사세요!]

또 유행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유행어가 따로 없는 착한 사람 놀이다.

고맙다는 댓글을 다시 달려고 했으나 타이밍을 놓쳤다. 너무 많은 이들이 댓글을 올라는 바람에.

영화가 잘 되니 기분 좋은 일이 계속 생긴다.

좋은 현상을 만들어내서 기쁘기도 하고.

수혁이가 들어왔다.

“댓글 보시고 계셨어요?”

“종종 봐. 너도 보고 있었어?”

“아니요. 게시판 담당자가 연락해서요. 정말 한참 웃었네요. 영화보다 현실이 더 웃긴 것 같네.”

“세상이 각박해서 그래. 누구에게 속는 게 싫은 거지. 순진하게 보이는 것도 싫은 거고.”

“잘하셨어요. 저는 보기 좋더라고요.”

“앞으로도 종종 소통하면 좋겠지?”

“그럼요. 아, 금감원에서 조사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경찰과 합동으로 수사한다고 방금 포털 뉴스에 떴어요.”

“증거 추적 자료가 제법 되니까, 잘 될 거야. 그들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원한을 풀겠지.”

“그래야죠.”

작전주 세력이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하겠지.

게시판이 다시 시끄러워져서 보았다.

이건 또 뭐지?

[최신성 감독입니다. 좀 전 저를 욕하신 분들은 펀드 가입이 안 되는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감독님, 저희 실수한 건데요.]

[아이디가 다른데?]

[야, 이씨! 깜짝 놀랐네! 죽을래!]

[이 사람 신고 들어갑니다! 감히 누굴 사칭하고 있어!]

[최신성 감독이라니까. ㅋㅋ]

[꺼져! 미친놈아! ㅋㅋ]

[펀드에 가입해보겠다고 별짓을 다 한다. ㅉㅉㅉ]

나와 수혁이가 낄낄대며 댓글을 보았다.

이런 게 게시판 문화인가 싶다.

소소한 재미를 하나 알아낸 기분이다.

투자해서 돈 벌고, 이런 일상의 즐거움도 생기고.

다들 즐거워 보여서 좋다.

펀드는 내가 말한 대로 할 터였다.

결혼식 올리고 신혼여행 다녀온 뒤 가을쯤에 공지할 예정이다. 블루드 워 2. 개별 히어로. 미드. 중국 영화.

4개 펀드다. 미드로는 큰 수익을 바라지 않으니 네오스타의 투자보다 펀드 비중을 좀 높일 생각이었다.

* * *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토요일.

함을 들고 장인 장모 댁으로 갔다.

요란하게 함 들어가는 행사는 안 했다.

친지 어르신들은 전통 혼례대로 하라고 하셨으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함 들어간다고 소리를 질러대고 그러면 동네방네 서연이 부모님 집을 홍보하는 셈이다. 장인께서 안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도 하셨고.

지난 설에 각자 부모님께 결혼 날짜를 허락받았고, 3월에 상견례를 했다. 어머니들께서는 자주 뵙고 식사도 했던지라 상견례 자리가 편했다. 부모님들 성향이 비슷하니, 나와 서연도 가치관 등 닮은 점이 많은 거겠지.

함을 들고 들어가 장인 장모께 절을 올렸다.

서연도 옆에서 우아한 자태로 절을 올리고.

장인도 장모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두 분 심정을 모를 거라고 보실 테지만 아주 잘 안다. 두 분은 서연이 내게 부족하다고 여기신다. 명성 그런 게 아니라 재산 때문에. 서연이 내 덕을 보았다고 생각하시기도 하고.

서연이 언제 시집을 가나 늘 노심초사하셨다. 잘 만나고는 있지만 언제 헤어질지는 모르는 일이기에. 그런 상황에서 서연이 미국에서 나랑 살겠다고 했을 때 몹시 기뻐하셨다. 우리가 유명인사이고 사람들의 시선도 있으니. 아이가 생기길 바라기도 하셨고.

여태껏 쌓인 마음고생으로 복받쳐 오르신 거다.

외동딸 서연이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셨을까.

나도, 서연도 콧잔등이 시큰했다.

“내 술 한 잔 받게.”

“네. 아버님.”

아버님께서 고급 안동소주를 내 잔에 따라주셨다.

사위에게 한 잔 주시려고 지방 다닐 때 사오신 술이다.

한 잔을 쭉 들이켰다.

소주 맛이 기가 막혔다. 아주 깔끔했다.

“아버님, 받으세요.”

“그래. 고맙네.”

장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어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감격에 복받쳐서 주체가 안 되시는 모양이다.

장인께서 소주를 마시다 결국.

눈물을 쏟으셨다.

“고맙네, 최 감독. 정말 고마워.”

말없이 장인을 안아드렸다.

장인께서 울음을 터뜨리시니 장모도, 서연이도 덩달아 울음이 터졌다. 그 바람에 장인과 장모, 사위와 딸이 얼싸 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 모습이 우리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와서 우는 얼굴로 웃고 말았다.

서연이 장인의 눈물을 닦아 드렸다.

난 장모님께 손수건을 건넸고.

두 분 앞에 공손히 앉았다.

“장모님. 장인어른. 서연이가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걱정 없이 살도록 제가 돌보겠습니다. 곱게 키우시고, 애지중지하신 외동딸 서연이. 제게 주십시오.”

장인께서 붉어진 눈으로 나와 서연을 보셨다.

딸을 보내는 마음이 어떠실까.

장인이 환한 웃음을 보여주셨다.

“잘 살게. 서연이 너도.”

“네. 아빠.”

서연과 다시 절을 올렸다.

장모와 서연이 술상을 가져와서 장인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두 병이 세트라 한 병을 비우고 또 한 병을 땄다.

술이 워낙 술술 넘어가고 맛도 좋아서 별생각 없이 대작했는데, 서연이 안 말렸으면 또 필름 끊길 뻔했다.

안동소주가 45도였다는.

* * *

입장하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친지와 회사 직원, 친구 등 하객들의 차들이 끊임없이 주차장에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은 식장이라 도로 쪽에는 이미 양가 친지가 타고 온 차들로 가득했다.

“축하해요, 감독님.”

“어, 민정이 예뻐졌네.”

“난 어디로 가면 되나?”

“하객분들과 같이 계시면 됩니다.”

“그래.”

이갑성 대표님과 민정이가 웃으며 식장으로 들어갔다.

용인의 작은 리조트를 식장으로 빌렸다. 잔디가 깔린 정원에 의자를 놓고 꽃바구니 등으로 꾸며 놓았다. 바로 옆에는 친척분들과 어머니 친구분들이 요리를 하시느라 바빴다.

축의금은 받지 않았다. 대신 구호 활동을 위한 후원금을 받기는 했다. 내가 그동안 경조사금을 제법 썼기에 그렇게라도 받으라는 지인들의 조언이 있었다.

안 부르면 섭섭해하실 분들만 모셨는데도 하객이 꽤 많았다. 한 300명 되려나. 친지만 해도 150명은 가뿐히 넘었다. 아이들까지 데려온 분들이 많아서 양가 친지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뛰어다녔다.

수호와 그의 후배 거한들이 교통정리 및 안내를 맡았고, 수혁이는 예식 관리를 맡았다. 희진이는 서연이에게 가 있었다. 수호팀 권혁진은 개별 히어로 영화 준비를 하고 있어서 이번에 오지 못했다.

턱시도를 입은 지성이가 다가왔다.

“이제 올 분들 다 오신 거 같네. 내가 손님 맞이할 테니까, 형은 신부한테 가 봐. 거기서 사진 찍고 있더라.”

“알았어.”

리조트 내에 마련한 신부 대기실로 갔다.

지성이와 지현이는 내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지성이 말마따나 똥차가 먼저 가게 되어 두 사람은 한시름 놓았다.

복도에 들어서자 여자의 향기가 물씬 났다. 신부 대기실에 한껏 멋을 낸 여자들만 잔뜩 있었던 터라.

방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서연이 있었다.

그녀가 날 보고는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서연이 주변에는 심플한 드레스를 입은 제니스 멤버들과 지현이, 그리고 락키 아이들과 여자 연예인 몇 명이 있었다.

“형부! 우리 사진 찍어요!”

“어, 그래.”

앉아 있는 서연이 바로 뒤에 섰다. 위로 내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들 연예인이라 그런지 정말 꽃밭에 있는 느낌이다. 사진사는 희진이었다.

“자, 찍어요! 맑고 깨끗하고 자신 있게!”

그때 서연이 말했다.

“희진아. 너도 같이 찍어. 셀카 봉 있잖아.”

“아니에요. 전 들러리도 아닌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얼른 와.”

결국 희진이가 셀카봉에 폰을 장착한 뒤 앞에 섰다.

가까이서 찍게 되다 보니 다들 몸을 밀착시켰다. 이렇게 찍으니 더욱 친밀감이 생긴다.

“자, 찍어요! 하나, 둘, 셋!”

찰칵.

“몇 장 더 찍어요!”

락키 애들의 말에 사진을 여러 번 찍었다.

다들 화보를 수도 없이 찍은 친구들이라 사진을 찍을 때마다 표정과 자세가 달라졌다. 어색한 건 나와 희진이뿐.

말없이 서연의 손을 잡고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들러리들은 야유를 하고.

지현이에게 물었다.

“내년 봄에 한다며? 영화 때문에?”

“네. 재촬영할 수도 있다고 해서 대기해야 해요.”

“우리 먼저 가니까 좋지?”

지현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은 남이지만 내년이면 내게 제수씨가 된다. 서연이와는 동서지간이 되고.

지현이가 20대 시절의 사고뭉치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면 내가 반대했을 터다. 지금은 손윗동서인 서연에게 잘하고, 서연이도 지현이와 잘 지내고 있으니 변하긴 확실히 변했다.

다른 집안은 월드 스타급 며느리가 둘이나 들어오면 부담이 될 텐데, 우리 부모님은 전혀 신경을 안 쓰신다. 두 며느리가 양가 부모님에게 잘하는 편이기도 하고.

“곧 시작합니다!”

복도 밖에서 예식을 알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서연에게 말했다.

“긴장하지 마.”

“응.”

모두 복도로 나갔다.

서연이와 들러리들은 뒤뜰을 통해 밴으로 향하고, 난 예식이 열리는 정원으로 갔다.

배우 김강헌와 한동원. 한쪽에 혼자 있는 건하. 라이터스 대표인 홍준석 작가. 박승철 감독과 김영석 감독. 미국에서 날아온 동업자이자 친구 동식이. 네오스타 이동욱 대표. 이젠 거물이 된 임성희 드라마 작가 등등.

화분과 예술품 선물도 상당히 많이 왔다.

라이터스 작품을 통해 아직도 영화 투자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는 CT 인베스트먼트의 황 회장님. CG E&M의 이지은 상무. 이젠 중견급이 된 오천일 감독과 조상미 감독. 황정우 배우와 송강석 배우의 이름도 보이고.

바빠서 못 오신 분들인데 축의금을 안 받는다고 하니 각자의 안목으로 그림이나 도자기, 난 등을 보내오셨다.

서연이와 우리 부모님도 가장 앞에 자리 잡으셨다.

수호팀은 경호원들처럼 뒤편에 듬직하게 서 있고.

식장 입구 쪽으로 갔다.

지성이가 내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선임이 신병 복장 점검하듯.

“긴장돼?”

“당연히 되지.”

“아이고, 우리 형이 이렇게 가는구나.”

“섭섭하냐?”

“섭섭하기는. 똥차 빠지니 좋기만 하네.”

“서연이는?”

“밴에 계셔. 이제 하려나 보다.”

수혁이가 신성영화사 이 대표님을 앞으로 모셨다.

그 모습을 본 하객들이 일제히 소리를 죽였다.

이 대표님이 마이크 앞에 섰다.

“지금부터 신부 안서연 양과 신랑 최신성 군의 결혼 예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신랑 최신성 군은 앞으로 나와 주세요.”

하객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지성이가 내 등을 툭 쳤다.

그걸 신호로 늠름하게 버진 로드를 걸었다.

짝짝짝짝.

하객들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음악이 없어서 심심하긴 했지만 원래 이렇게 하려고 했던 것이라 마음이 편했다.

주례사인 이 대표님께 인사하고 돌아섰다.

이어 대표님이 말했다.

“신부 안서연 양. 입장해주세요.”

다들 뒤를 보았다.

한 10초 지나자 주차장까지 이어진 버진 로드 카펫으로 서연이 들러리들의 도움을 받아 걸어왔다. 하얀 드레스도 예뻤지만 서연이는 정말 아름다웠다. 지금 이 순간 서연은 세상에 둘도 없는 여신이었다.

장인께서 기다리고 있다가 서연의 손을 잡았다.

아빠를 본 서연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보였다. 그런 서연을 보고 장인도 울컥하시고.

장인과 서연이 조심스레 내게 걸어왔다.

거의 내 앞에 왔을 때 한발 다가섰다.

장인과 먼저 깊이 포옹한 뒤 서연의 손을 잡았다.

함께 돌아서자 서연이 내 팔짱을 꼈다.

이 대표님이 말했다.

“최신성 군과 안서연 양. 두 분은 서로 사랑하지요?”

“예!”

“네.”

“하하하하!”

내 고함 같은 대답에 식장에 웃음이 터졌다.

이 대표님이 다시 말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 늘 간직한 채 살아가면 돼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항상 그 점만 잊지 않고 살면 됩니다. 부부의 연은 하늘이 맺어준 거예요.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말고. 늘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가정을 이루기 바랍니다. 두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모인 분들께 약속하나요?”

“약속합니다!”

“네.”

이 대표님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서약의 증표를 보여주세요.”

서연을 끌어당겨 다정하게 입술을 들이댔다.

그러자 서연이 슬쩍 얼굴을 빼더니 뭐라 입을 오물거렸다.

뭐? 뭐라고? 아, 반지!

“하하하하하!”

“그렇게 급했냐!”

“신랑 귀여워요!”

못 들은 척 반지를 꺼내 서연의 손에 끼워주었다.

이 결혼식에서 유일하게 비싼 물건이다.

5캐럿 다이아몬드.

서연은 내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

파텍 필립 손목시계였다.

내가 비싼 거 사지 말라고 했는데 제네바 본사에서 심사까지 받았다는 걸 보면 수억 대일 것 같았다.

반지와 시계를 채워준 뒤.

서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곤 키스가 아닌 입맞춤을 했다.

짝짝짝짝!

박수와 환호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나란히 돌아서서 인사를 했다.

“잘 살겠습니다!”

“잘 사세요!”

“행복하세요!”

이어 버진 로드를 걸었다.

친지 아이들이 꽃잎을 던지며 앞장서고, 나와 서연은 하객들에게 인사하며 걸었다. 결혼행진곡 없이 끝을 냈다. 축하하러 오신 분들의 환호와 박수, 행복을 바라는 외침이면 충분했다.

이것으로 결혼식은 끝났다.

바로 사진 촬영으로 이어졌다.

가족 및 친지들과 먼저 사진을 찍고, 그다음 연예인과 영화인들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친지와 동료를 나누어서 찍었음에도 사람이 빽빽하게 모였다.

그다음은 신랑 신부 들러리 촬영이었다.

신랑 측과 신부 측을 찍고 모두 모여서 또 찍고.

“합창해요, 최신성!”

“최신성!”

찰칵!

“신부 측은 안서연!”

“안서연!”

찰칵!

사진사 노릇을 하게 된 승철이가 재치를 발휘한다.

나와 서연이 이름이 부르면 미소가 된다는 걸 또 어떻게 알았는지. 김치나 치즈보다는 환하게 웃게 된다.

이어 피로연이 열렸다.

기본 음식은 국수와 전, 떡인데 보조로 준비한 뷔페 음식이 세 배 정도 많았다. 안주를 겸하는 요리도 많고.

지방 리조트에 오신 하객들이니 술도 마음껏 드시게 했다. 그야말로 잔치를 즐긴 뒤에 리조트에 하루 묵고 내일 떠나실 수 있도록. 친지는 친지대로. 연예인과 영화인은 그들대로 모여서 식사하고 술도 드시고 그랬다.

나와 서연은 편한 차림으로 오신 분들에게 다시 인사를 올리며 돌아다녔다. 예식도 자유롭고 잔치를 즐기는 방식도 다양했다. 돗자리를 깔아 놓고 음식과 맥주를 드시는 분들도 많았으니.

양가 부모님 앞에 가선 절을 올렸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서연이한테 잘해라.”

“당연하죠.”

“당연한 게 제일 어려운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장인 장모께도 인사 올렸다.

장인께서 말씀하셨다.

“서연이 너만 잘하면 돼.”

“네.”

“그래, 한번 안아 보자.”

“여보, 또 우실라.”

“우리 딸이 이렇게 다 컸네.”

서연이 안기자 장인께서 또 눈물을 보이셨다. 내가 딸 가진 부모라도 그러겠지. 장인께선 딸에게 해준 게 없다고 생각하시니 더 그런 거고.

연신 장인 장모께 인사를 한 뒤 하객들에게 갔다.

서연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서연은 어제 장모랑 단둘이서 잤다고 한다.

엄마도, 딸도 얼마나 애틋했을지.

그 마지막 밤이 얼마나 소중했을지.

“형수님! 인사 다하셨으면 식사해요!”

“네.”

지성이가 우리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수호팀과 들러리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다들 장난스럽게 손뼉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 자리에 앉아 우리도 식사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오늘따라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 바람에 밥 먹다가 또 우르르 모여서 사진도 찍고.

그렇게 결혼식 첫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나와 서연은 런던 거리를 돌아다녔다.

신혼여행을 어디로 가느냐 고민이 많았는데, 마음 내키는 대로 유럽을 돌아다닌 뒤 일본에 며칠 머물기로 했다. 일본 합작사에서 하도 요청을 해서.

런던에 도착한 후 반나절을 쉰 다음, 반팔 셔츠에 반바지,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녔다. 서연이는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이었고. 선글라스를 써서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동양인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나서야 우릴 알아보는 현지인이 좀 있긴 했다.

우리 여행 컨셉은 말 그대로 휴식이었다.

사진 찍으러 여행 온 것도 아니고, 뭘 구경하려고 온 것도 아니었다. 한가하게 쉬다가 심심하면 외출하는 식이었다.

런던에서 사흘을 보내고 네덜란드로 이동했다. 암스테르담에서 하루 묵은 뒤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갔다. 어디로 가자는 목적 없이 그날 내키는 대로 목적지를 잡았을 뿐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뒤에는 현지인처럼 지냈다.

호텔에서 뒹굴 거리며 쉬다가 해 저물 때 나가서 밥 먹고 에펠탑 구경하고.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들도 보고.

여전히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다녔음에도 일본인 관광객은 거의 100% 우릴 알아보았다. 런던에서 본 관광객들도 있었다. 여행 코스가 겹쳤던 모양이었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결국 한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했다. 한데 일본인 관광객이 너무도 좋아했다. 한국 관광객들은 어째 당연하다는 표정이고.

한국 사람은 우리 부부를 잘 아는 편이다. 펀드다, 청년 재단이다 해서 우리가 소탈한 편이라는 걸 안다. 반면 일본인은 그 나라 연예인처럼 우리가 스타처럼 산다고 보았을 테고.

함께 떠들며 술 마시고 그랬는데.

갑자기 백인 남자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좀 조용히 해! 동양인 원숭이들아!”

그 남자의 외침에 우리 팬들이 겁을 먹고 입을 닫았다.

내가 봤을 때 그렇게 시끄럽게 한 건 아니다. 주변에 다른 관광객들도 떠들고 있었는데 뭘. 그저 못 알아듣는 동양의 언어가 귀에 거슬렸던 거지.

그런데 일행 중 건장한 남자 하나가 결국 욱했다.

여자친구와 여행 온 한국 남자였다.

그가 그 백인에게 따졌다.

“방금 뭐라고 했어? 원숭이?”

“그래서 뭐?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백인이 일어났다. 키가 190은 넘어 보였다. 그러나 한국남자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의 여자친구는 안절부절못하고. 그런데 그 백인의 동료가 둘이나 있었다.

백인이 한국남자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여자들 앞이라고 용기를 냈다 이거냐? 뭐 어쩔 건데? 어쩔 거냐고? 이 미개한 동양인 새끼야.”

“이 새끼가 진짜!”

“오빠, 하지 마!”

“아주머니들 데리고 뒤로 가 있어.”

한국남자가 제법 깡이 있었다. 정말 붙어버릴 기세다. 그의 여자친구와 아주머니들이 말려 보려고 하지만 이미 백인 세 명에게 포위된 상황.

나도 일어났다.

“오빠 싸우면 안 돼.”

서연을 보며 웃었다.

“안 싸워.”

내가 백인들에게 걸어갔다.

백인 세 명이 이건 또 뭐냐는 얼굴로 날 보았다.

그들에게 말했다.

“그쪽도 잘한 거 없으니 이쯤에서 관두시죠.”

“헛소리 말고, 꺼져.”

“프랑스에서 미국인 망신 줄 참입니까?”

“꺼지라고 경고했다.”

그때 한 백인이 한국남자를 밀쳤다.

한국남자가 주먹을 날리려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우리 때문에 참는 모습이다.

그 모습에 백인들은 낄낄대며 뭐라 조롱하고.

“내가 경고합니다. 이쯤에서 그만 해요.”

“꺼지라고 하잖아!”

날 밀치려는 백인의 손을 부드럽게 쳐내며 물러났다.

서연이 급히 말했다.

“오빠! 싸우면 안 돼!”

“안 싸워. 제압만 할 거야.”

“뭐?”

백인이 실실 웃으며 내게 다가오던 그때였다.

옆에서 거구가 스윽 다가섰다.

백인이 이건 또 뭐야 하며 옆을 보았다.

건장한 근육질 한국인이다.

“아놔, 이 양아치 새끼들 이거. 우리 대표님 그냥 쉬게 좀 해드려라. 깝죽대지 말고. 엉, 이 새끼들아!”

한 명 더 있었다.

“누가 우리 대표님 귀찮게 하나!”

두 한국인이 백인과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세 백인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다.

거구의 두 한국 남자가 날 보곤 눈인사했다.

수호팀이다. 처음과 처럼.

여행 내내 원거리 경호를 하고 있던.

수호팀 두 명이 싸움 직전에 개입했다.

그러나 백인 3명은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들 눈에는 그냥 동양인이었을 뿐이니.

“Not your business. get the fuck off!”

백인이 꺼지라며 ‘처음’의 가슴을 툭 밀었다.

전형적인 백인들 싸움 기세다.

처음이 말했다.

“한 번만 더 밀어 봐라.”

“What? what did you say? motherfucker?”

“더 해 보라고.”

“Fuck you! fuck you ass…”

백인이 처음을 다시 밀치려던 그때였다.

처음이 밀치려는 백인의 손목을 잡아채는 것 같더니. 어? 하는 사이에 덩치 큰 백인이 허공에 붕 떴다. 그러곤 그대로 바닥에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뭘 어떻게 한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다른 백인이 ‘처럼’에게 주먹을 날렸다.

처럼이 순식간에 백인의 주먹을 피하더니 양 엄지로 놈의 겨드랑이를 쿡 찌르는 것 같았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백인이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놈은 극심한 고통에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한데 한국남자는 기습적인 주먹을 맞고는 뒤로 주춤 밀렸다가 반격을 가했다. 백인의 얼굴을 연타로 때리자 백인도 두 대 맞자마자 주먹을 날렸다. 그런데 그 주먹이 처럼의 손에 막혔다. 처럼이 그대로 놈의 손목을 꺾어 버렸다.

우두뚝.

“으악!”

손목이 꺾이면서 백인 남자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백인 3명이 제압되었다. 세 놈은 너무도 압도적인 무력 앞에 멘탈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처음과 처럼이 주저앉은 세 백인 앞에 섰다.

백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로 눈치만 보았다. 무슨 싸움이 돼야 다시 덤비든가 하지.

처럼이 백인들에게 말했다.

“뭘 쳐다 보냐. 확!”

“눈 안 깔아, 이 새끼들아!”

처럼이 발길질을 하듯 발을 굴리자 세 백인이 흠칫 놀라며 뒤로 기었다. 처음이 때려눕힐 기세로 다가서자 세 명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더니 냅다 도주했다.

그 모습을 보던 처음과 처럼이 내게 넙죽 인사를 했다.

“놈들 쫓아가는 척하다가 빠지겠습니다.”

“대표님, 그럼.”

처음과 처럼이 씩 웃더니 도망간 백인들을 향해 달렸다.

백인들이 해코지 혹은 신고 못 하게 쫓다가 대충 숨겠다는 뜻이었다.

싸웠던 한국 남자에게 갔다.

오른쪽 뺨이 조금 부어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냥 민망하네요.”

체격이 다부진 게 이분도 보통은 아닌 것 같다.

관광객들이 다들 놀란 얼굴이었다.

이래저래 흔하지 않은 일을 겪은 터라.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죠.”

카페에 모여 있던 한국인, 일본인 관광객들이 일제히 소지품을 들고 일어났다. 내가 계산을 치렀다.

“잘 먹었어요, 감독님.”

“네. 저희도 즐거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일본인들은 연신 고맙다며 허리를 숙였다. 다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제 갈 길을 갔다.

나도 서연과 함께 호텔로 향했다.

한참을 걷다가 서로 보고는 웃었다.

신혼여행 와서 별일을 다 겪는다.

서연이 말했다.

“그 사람들 신고하면 어떡해?”

“신고 안 해. 목격자가 한둘이 아닌데. 동양인한테 무기력하게 당한 걸 알면 창피해서라도 신고 못 해. 두들겨 맞아서 무슨 큰 상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모르잖아.”

“수호팀과 우린 모르는 사이야. 지나가던 두 남자가 같은 한국 사람이 당하는 거 보고 도와줬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웃음이 나네. 하하하하!”

“그러게.”

한참을 걷다가 또 서연이 물었다.

“수호팀은 언제부터 따라다녔던 거야?”

“우리 런던 갈 때 같은 비행기에 있었어. 수호가 유럽에 가면 경호가 붙어야 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 매번 따라다닌 건 아니고, 우리 외출할 때만.”

“난 왜 전혀 몰랐지?”

“항상 50미터 거리에 있었거든. 우리가 카페에서 맥주 마실 때 그 친구들도 커피 마시고 있었어. 내가 웬만하면 나서지 말라고 했는데, 두 사람 일어나는 거 보고 나도 일어났던 거야.”

“그랬구나.”

서연은 그냥 웃고 말았다.

내가 경호를 준비했다는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이제 어디로 갈까? 로마? 바르셀로나?”

“오빠, 산티아고는 어때?”

“순례자의 길? 상당히 오래 걸릴 텐데?”

“도중에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고 가면 돼.”

“그래, 가 보고 결정하자.”

호텔에 돌아왔다.

스마트 폰으로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검색했더니 무려 750킬로미터나 되었다.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에서 시작하여 스페인 서북단까지.

너무 멀어서 우리 둘 다 포기했다.

우린 순례하러 온 게 아니라 신혼여행을 왔으니까.

그래도 스페인에는 들러 보고 싶어서 바르셀로나에 가기로 했다. 거기서 며칠 보내고 스위스에 가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오전.

호텔 체크 아웃을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한데 공항에서 한국인 커플을 또 만났다.

남자의 얼굴이 어제보다 부어 있었다.

“병원에 가보셨어요?”

“이게 뭐 병원 갈 일인가요.”

“그런데 운동하신 분이세요?”

“경찰입니다. 이쪽은 제 약혼자고요.”

“어쩐지.”

“경찰이 주먹질하고 다녀서 창피해 죽겠네요.”

“귀국하시게요?”

“아니요. 5년 만에 얻은 장기 휴가라서 좀 더 놀다가 가려고요. 제가 바빠서 그동안 여자친구한테 잘해 주질 못했네요.”

“그럼 어디로 가세요?”

“여자친구가 이탈리아에 가 보고 싶다네요.”

“저희는 바르셀로나에 갑니다.”

“잘 보내세요. 반가웠습니다. 감독님. 서연 씨.”

“저희도요.”

경찰분 커플과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심심한 여행에 내가 무슨 연출이라도 한 것 같다.

이게 여행의 묘미겠지.

우린 3시간 기다린 뒤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 * *

21일 후.

스위스의 마테호른 산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스위스 베른에 도착한 뒤 렌트카를 타고 스위스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유명한 산은 다 보고 남하하는 중이었다.

왜 영국과 프랑스에 갔나 싶을 정도로 스위스가 좋았다.

높은 지대에 있는 노천카페에 앉아 알프스 산맥을 보며 커피를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나도 서연도 워낙 산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래서 스위스에서만 2주 동안 머물고 있었다.

우리야 한가하게 쉬기만 하니 더없이 좋은데, 수호팀은 우릴 따라다닌 지 한 달 가까이 되자 좀 지친 모양이었다.

처음은 멀리 카페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고, 처럼은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고.

처럼에게 문자를 보냈다.

[심심하면 귀국해.]

바로 답장이 왔다.

[아닙니다. 세계 여행도 하고 좋기만 한데요.]

[남자 둘이서 있으니 따분하지?]

[조금 그렇긴 합니다.]

서연이 말했다.

“이제 우리도 귀국할까? 스위스는 겨울에도 한번 와 보고 싶어. 이번에 다 볼 필요는 없잖아.”

“그래. 겨울에 와서 트레킹도 하고 그러자. 매년 한 달쯤 여행할까? 다음엔 그리스도 좋고.”

“나야 좋지.”

한 달 조금 넘은 우리 신혼여행은 스위스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호텔에 가서 짐을 챙긴 뒤 공항으로 향했다. 런던에 갈 때는 짐이 거의 없었는데, 도중에 이것저것 기념품을 사들이다 보니 짐이 꽤 많아졌다.

수호팀이 우릴 따르다 짐을 보더니 본인들이 챙겨서 귀국하기로 했다. 우린 바로 일본으로 가고. 해외에서도 늘어지게 쉬기만 했어도 집 나오면 고생은 고생이다.

* * *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합작사 극장체인 오너인 일본 할머니에게 우리 일정을 알려 주었더니 리무진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이전 그 한국계 호텔 지배인이 우릴 맞아 주었다. 할머니는 오사카 출장을 갔는데, 회사 직원들이 우리 부부를 극진으로 대접했다. 뭐든 최고급이었다.

“일본에서 편히 쉬시다 귀국하시라는 뜻도 있고, 저희 부탁도 좀 들어주십사 해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탁이 뭔가요?”

“실은 이곳 일본 팬들이 감독님 작품을 너무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최근 작품인 플랜이 일본에서도 대흥행을 했습니다만, 일본 팬들이 따로 보고 싶어 하는 영화가 있어서요.”

“재즈 영화 말이군요.”

“네. 이왕이면 일본 영화로 만들어 주시면 어떨는지요.”

서연이 말했다.

“플랜처럼 음악으로 치유할 수도 있겠는데?”

“괜찮을 거 같아?”

“응.”

예상했던 바다.

일본에서 자꾸 초청을 했던 터라 음악 영화를 찍어 달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내 재즈 영화가 일본에서 유독 인기가 대단했던 작품이기도 했고.

“이왕이면 한국 색이 없는 게 낫겠죠?”

“감독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가령 여주인공은 한국인, 남주인공은 일본인도 좋고요.”

“안 그래도 한국 감독이 만들어서 영화 보이콧하는 분들도 있으니 일본인 배우들이 나오는 게 나을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희는 그저 고맙습니다.”

혐한이 이전보다 약해졌지만, 그래도 일본에선 ‘한국’하면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2016년까지가 혐한이 극에 달했고, 17년부터 한국에 대한 호감이 커지더니 내 재즈 영화가 흥행한 뒤로는 상당히 풀렸다.

지금은 일본의 10대와 20대가 한국 노래만 들을 지경이다. 문화 식민지화되었다고 일본 언론이 호들갑을 떨 정도로.

할머니가 날 초빙해서라도 일본 영화 업계를 살려보려고 하는 거다. 그래 봐야 산소호흡기를 대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 영화계는 몇 년 전만 해도 숨이 붙어 있었는데, 이제는 자력으로 숨을 쉴 수도 없다. 일본 문화 전체가 바닥을 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와 경제 발전을 끝내 부정하던 일본 넷 우익들이 이제는 다 포기했을 정도면 말 다했지.

그 이유는 일본도 주변국도 모른다.

사회 자체가 활력을 잃어서 그런 것인지, 정치가 무능해서 그런 건지. 일본의 선대가 저지른 악행으로 벌을 받는 건지.

아무튼 음악 영화는 또 해 볼 생각이 있었기에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대신 내 영화의 리메이크 느낌으로 가겠다고 했다. 지배인이 오히려 반겼다. 내용만 좀 다르다면 리메이크가 낫다면서. 일본 관객이 보고 싶은 건 내 영화의 일본 버전이었고 한다.

“그러면 시놉시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릴 것 없어요. 지금 당장 하나 나왔으니까.”

“아, 그렇습니까. 내용이 어떠한지?”

이전에 써 둔 시나리오가 있다. 그걸 일본 정서로 바꾸고 소재를 음악으로 하면 된다. 지금 그 시나리오를 보면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형편없다. 소재도 그렇고.

하지만 플랜에서 보듯.

소재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어쩌다 야쿠자가 되어 버린 소심한 남자가 있어요. 고교 동창에게 허세 부리려고 조직에 들어갔다가 발목 잡힌 남자예요. 하루는 한 여자에게 돈을 받아내려고 찾아갔는데, 그 여자를 보고 반하고 말았죠.”

“음악 하는 여자였군요?”

“네. 직장 생활과 버스킹을 해서 열심히 빚을 갚아 나가는 착한 여자였어요. 남자 주인공은 늘 허세 때문에 자기 손발을 자기가 묶는 타입입니다. 어째 짠하면서도 정이 가고 웃기는 캐릭터죠. 여자 주인공은 전 남자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고 큰 빚을 져서 남자를 믿지 않아요.”

“더군다나 상대가 야쿠자라면 더하겠네요.”

“그렇죠.”

서연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오빠. 그 영화, 샌드위치 느낌으로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뭔가 감이 와?”

“응. 오빠 원작은 달달한 로맨스잖아. 웰 메이드 영화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번 작품은 샌드위치 느낌으로 가면 좋을 거 같아서. 일본 청춘들의 현실을 묘사하면 반응이 좋을 거 같아.”

지배인이 거들었다.

“저는 좋은 생각 같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현대인의 외로움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샌드위치가 일본에서 제법 흥행한 걸 보면 그래요. 저도 샌드위치를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

나도 좋은 느낌은 왔다.

‘샌드위치’에 재즈를 넣는다?

야쿠자든 회사원이든 직업은 중요하지 않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현실의 벽 때문에 사랑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거다.

샌드위치가 건조하고 고독하며 외롭기만 해서 슬픈 영화라면, 일본 리메이크 영화는 외로움에 따뜻함이 담긴다. 거기에 음악은 치유와 위로를 해 주는 기능을 할 테고.

“일본인들, 일상적인 영화 좋아하죠?”

“그럼요. 잔잔한 일상물 좋아합니다.”

“진지하면서도 허세 때문에 웃긴 그런 젊은 배우 있을까요? 여주인공은 착하고 억척스럽고 허당끼도 좀 있는데 사랑스러운 느낌이 있어야 해요.”

지배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사토 타케루 씨는 어떻습니까?”

“누구죠?”

“영화 바람의 검심이라고.”

“아, 그 배우. 잘생겼죠. 분위기도 있고.”

“진지하고 점잖은 이미지가 좀 있는데, 실제로는 밝은 성격이거든요. 그게 허세로 이어지면 좋은 인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확인해 보도록 하죠. 여주인공은 누가 좋습니까?”

“미와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신 그 이미지에 가장 어울리는 여배우가 같습니다. 평범한 회사원 느낌도 나고, 일본에선 참한 이미지입니다. 그런 친구가 허당이면 웃음이 좀 날 겁니다.”

“그런데 여주인공은 음악을 좀 해야 합니다.”

“미와 씨는 원래 가숩니다.”

“그래요?”

서연이 스마트 폰으로 두 배우를 찾아서 보여 주었다.

내가 짐작한 이미지와 흡사했다.

“그런데 여배우 키가 좀 작네요?”

서연이 대신 대답했다.

“일본에선 키 작은 게 유리할 거야. 키 큰 여자는 남자도, 여자도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미와 씨가 내가 보기엔 좋은 거 같아.”

미와의 음악을 들어보았다.

목소리가 독특하다. 작사, 작곡 다 하고.

지배인에게 말했다.

“시나리오는 일본인이 써야 합니다. 디테일한 시놉시스는 우리가 쓰도록 할게요. 샌드위치를 쓴 진수희 작가에게 맡겨 보려고 합니다.”

“정말 진행하시는 거죠?”

“그럼요. 샌드위치 제작 때처럼 빠르게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조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현지에서 구성해 주세요. 영화 제작사는 있죠?”

“아직은 없습니다. 로큐가 제작해도 무방합니다. 사실은 감독님이 할리우드 작품을 하셔야 하고, 직접 제작 연출하시기에 무리라는 걸 압니다. 그래서 저희는 배급만 하기로 했습니다. 투자까지 하면 면목이 없어서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로큐에서 제작하도록 하죠. 일본 쪽에선 통역과 배우, 음악 정도만 준비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일본 영화가 아닌, 한국 영화가 됩니다.”

“저희도, 관객도 상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본어 영화이니까요. 영화 제작에 관해선 한국을 더 높이 평가하니 로큐에서 만드는 것이 저는 더 낫다고 봅니다.”

“네.”

“그럼. 아무쪼록 푹 쉬시다 귀국하시길 바랍니다.”

지배인이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방에서 나갔다.

서연이 말했다.

“샌드위치에 음악이 들어간다고 하니까, 왠지 재밌을 것 같은데.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하다.”

“일본 팬들이 보고 싶어 하니 만들어 줘야지.”

“잘했어. 안 그래도 일본 기자들이 일본 영화 좀 만들어 달라고 워낙 성화였거든. 이번에 하면 되지 뭐.”

나도 서연도 편히 쉬었다.

호텔 측에서 와인을 보내 주어서 서연과 함께 홀짝홀짝 마셨는데, 맛과 향이 기막히게 풍부했다. 검색해 보니 무려 300만 원짜리 와인이었다.

둘 다 와인 맛도 잘 모르면서 한 병을 다 비웠다.

오늘이 우리 신혼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 * *

우리가 신혼여행을 다녀왔을 때.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영화 플랜이 정말 2천만 관객을 넘었다.

최종 성적 2,086만.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었다.

해외에서도 대박이 났다.

최종 186개국에서 영화를 개봉했는데 중국에서만 3천만 가까이 들었고, 미국에서도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대박이 났다.

총 흥행 수익은 4,000억가량.

할리우드 영화 수익에 버금가는 수익이었다.

수익도 수익이지만 각국에서도 신드롬이 벌어졌다.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체로 선진국에선 한국과 비슷하게 치유를 받은 효과가 있었다.

한국 사람이 봤을 땐 뒷북을 친다고 해야 하나.

몇몇 나라는 한국만큼이나 사회적 파장이 컸다.

한국이 그렇게 떠들썩할 때는 우리를 미친 것처럼 보더니 자기들이 더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차에 이동욱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폭스 TV 토크쇼에 좀 나와 달라고 합니다. 어떠세요?

“글쎄요. 딱히 마음이 없네요.”

-언론 인터뷰는요? 회사에 연락이 너무 많이 와요.

“CNN도 있나요?”

-그럼요. 마이클 플린 기자도 연락을 했습니다.

“CNN 인터뷰만 할게요. 독점으로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개별 슈퍼 히어로 시나리오가 나왔어요. 저는 꽤 재밌게 봤습니다, 확인 좀 해 주세요.

“그러죠. 제작 준비는 무난합니까?”

-예. 시나리오만 오케이 되면 바로 프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스태프들 반응도 좋아요. 감독님 시놉시스 덕분이죠.

“알겠습니다. 그 영화 펀드 시작해도 되겠죠?”

-당연히 하셔도 됩니다.

전화를 끊었다.

바로 미국에서 보내온 시나리오를 읽었다.

재미있긴 했는데 감정으로 밀어붙이는 부분이 좀 약했다.

대신 액션 부분이 엄청났다. 주인공을 위기에 몰아넣는 솜씨와 액션만큼은 나보다 낫다고 해야 하나.

마블 시리즈보다는 배트맨 라이즈에 가깝다.

이런 암울한 분위기의 히어로 영화도 괜찮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냉철한 성격이기도 하고.

해서 몇 군데만 손을 보기로 했다.

현 시나리오도 충분히 훌륭했으니까.

어쨌든 개별 히어로 영화는 제작된다.

펀딩을 기다리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공지를 했다.

게시판에 들어가 내 아이디로.

[최신성 감독입니다. 네오스타에서 같은 세계관의 슈퍼 히어로 영화가 제작됩니다. 해서 그 영화 펀딩을 진행하겠습니다. 내일 정식으로 공지할 것이며, 펀딩 개시 날은 다음 주 일요일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공지 전에 투자금액별로 카운트다운을 할 것이니 많은 관심 부탁 드려요.]

또 게시판이 터졌다.

[와! 펀딩 공지 떴다!]

[감독님이 직접 올렸어요!]

[드디어 가는구나!]

[여러분! 이제 전쟁입니다!]

[제발 이번에는 돈 좀 벌자!]

[다들 파이팅! 500만 원 간신히 모아놨음!]

[전 마누라 몰래 비상금을! ㅋㅋ]

기분 좋게 게시판 댓글들을 보았다.

다들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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