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 (40/56)

제8장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

시나리오를 가지고 회사로 갔다.

오랜만에 출근하는 길이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구 대표가 찾아왔다.

신사옥 완공이 코앞이라 싱글벙글하신다.

“한국에 있으면서 얼굴 보기가 왜 이리 어려워?”

“시나리오 썼죠. 뭐 좋은 일 있으세요?”

“두 개나 있지.”

“뭔데요?”

“중국 합작사가 곧 극장 체인을 열 거야. 33개 극장을 지었는데 내년 안에 100개 채운다고 하더라고.”

“사업 진도가 빠르네요. 다른 하나는요?”

“주가가 곧 10만 원 찍을 것 같아. 자네 할리우드 작품에 우리가 56억 투자했잖아. 그게 얼마로 돌아왔는지 아나?”

“글쎄요. 5배 정도?”

“아홉 배. 500억이 들어올 거거든. 지난번 박승철 감독 복고 영화에 800만 들었지, 플래닛은 한국, 중국 다 잘되지. 락키 애들은 해외 투어 해서 돈 벌어 오고 있지. 지현이 건하는 미국 진출했지. 주가가 안 오를 수가 있나.”

구 대표님이 깜박했다는 듯 말했다.

“아, 중국 합작사 회장이 자네랑 서연이 좀 보고 싶다고 그러네. 멀티플렉스 사업 앞두고 홍보 삼아. 서연이가 그 건설사 CF를 찍을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날짜나 잡아 주세요.”

“오케이.”

나가는 구 대표님을 잡았다.

“시나리오 한번 읽어 보실래요?”

“작전 세력 잡는 그거?”

“네.”

“어디 봐.”

구 대표님에게 출력한 시나리오를 건넸다.

영화에 문외한인 그가 재밌다고 하면 재밌는 거다.

그 대표님이 소파에 앉아 페이지를 넘겼다.

“소재가 좀 약하지 않아?”

“약하죠.”

“인물도 좀 뻔한데.”

“좀 뻔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갔다는 거야?”

“이야기마다 가장 적합한 설정이란 게 있어요. 신선하고 새로운 게 오히려 방해될 때가 있죠. 주의가 분산되거든요. 해서 이번 영화는 익숙한 소재와 사건이라 최대한 빨리 인물과 스토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다른 건 이미 아니까?”

“그렇죠. 관객은 원하는 걸 보러 왔고, 우린 원하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겁니다. 다른 거 다 배제하고요. 스트레스를 풀러 왔으면 스트레스를 풀게 해 주는 거죠. 그게 목적인 영화입니다. 진부함만 벗어나면 관객은 만족할 겁니다.”

구 대표가 눈만 끔뻑였다.

그는 들어도 체감할 수 있는 게 없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이 정도 레벨은 산전수전 다 겪은 시나리오 작가 입에서나 나올 말이다. 내가 작가 영화도 하고 상업 영화도 할 수 있는 건, 영화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가장 잘 맞는 걸 찾았던 거지.

물론 코어를 통한 직관과 경험 덕분이다.

어쨌든 구 대표님이 시나리오를 읽어 나갔다.

조금 읽다가 본인 사무실에서 읽을 줄 알았더니 10페이지 넘어가면서부터 몰입했다.

시나리오를 읽는 구 대표님 얼굴이 웃겼다.

처음엔 낄낄대더니 한 10분 지나자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끙’ 소리를 내고 한숨도 내 쉬었다.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표정도 계속 바뀐다.

‘아이고.’ 소리도 내고.

중후반으로 넘어가자 고개를 끄덕끄덕하신다.

웃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하고.

“햐, 뭐 이런 놈이…….”

혼잣말도 하시고.

그 뒤로는 말도 없고 표정도 변화도 없이 페이지만 계속 넘겼다. 눈에 기대가 들어차는 게 보인다. 급기야 ‘허허허!’ 하고 웃음소리를 내시고.

그렇게 시나리오를 독파했다.

구 대표님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속이 다 시원하네.”

“재밌죠?”

“진짜 재밌네. 형사가 좀 뻔한 것 같은데도 묘하게 정이 가는 구석이 있어. 날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 내가 그 재벌 놈 때려잡는 기분이더라고. 중간에는 어찌나 열이 받던지. 내가 그 새끼 잡아 족쳐야 한다! 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주인공이 놈 잡으러 가는 거야. 그런 게 한두 번이 아니야. 내가 형사와 텔레파시가 통하나 했지.”

“관객이 좀 들 것 같죠?”

“내가 장담한다. 이 작품 대형 사고 칠 거야. 자네가 이제 물이 올라도 단단히 올랐구만. 언제 들어갈 거야? 빨리 봤으면 좋겠는데?”

“올해 안에는 들어갈 겁니다.”

“그래. 시나리오 보고 기분 좋기는 또 처음이네.”

구 대표님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나갔다.

정말 기분 좋아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은 각본보다 영화가 200%는 더 잘 나온다. 황정우 같은 대배우가 본인의 연기력에 애드립까지 더해서 캐릭터를 생생하게 살려 놓을 테니까.

형사가 구 대표를 닮았다는 말.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다. 형사가 구 대표를 닮은 게 아니라 현대 사회를 사는 평범한 사람을 닮았기 때문이다. 적당히 선하고, 돈 밝히고. 적당히 일하고. 놀 궁리도 하고.

그런 평범한 사람의 대표가 형사다.

반면 재벌가 차남은 현실에는 없는 악을 대표한다.

악이 거대할수록 나의 선도 거대해지는 효과가 있다.

나의 선함으로 거대한 악을 응징하는 셈이다.

형사가 악당이 꼬불쳐 놓은 거액도 슬쩍해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심’도 건드려보고

그렇게 형사에게 감정이입하는데, 그 정도가 상당히 깊다. 관객이 형사가 되는 것은 물론 스스로 영웅시된다. 내가 악을 때려잡는 효과가 발생하면서 오는 통쾌함이 무척 크다. 게다가 큰일 해낸 형사에게 보내는 찬사와 감사가 내게 향하는 것 같아 우쭐해진다. 대리만족의 극치라고 할까.

우연히 이렇게 한 게 아니다.

철저히 계산된 인물 설정과 구성 안배였다.

물론 영화사에 이 각본을 보내면 100% 까인다.

진부하다면서 읽지도 않으니까.

초대박이 난 영화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소재는 크게 특별한 게 없고, 인물 성격도 아주 새롭지는 않다. 디테일과 구성에서 갈리긴 하겠지만 줄거리도 일부 작품을 빼고 단순한 편이다.

그럼에도 초대박이 난 이유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관객은 새로운 무언가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게 아니다.

내 마음의 강렬한 울림을 만나러 가는 거지.

수혁이를 불렀다.

“구 대표님이 재밌어하세요?”

“응. 재밌다고 하시네.”

“형사 역할은 생각해 둔 분이 있어요?”

“글쎄. 황정우 배우가 딱이긴 한데.”

“송강석 씨는 어때요?”

송강석이라.

황정우와 함께 한국 최고의 배우다.

황 배우처럼 서민을 대표하는 면이 있다.

예술성이 약해서 하시려나 모르겠네.

“일단 시나리오 보내드리고 섭외해 봐.”

“예.”

프리는 천천히 들어가기로 했다.

영화에 깨알 같은 개그도 좀 추가할 겸.

* * *

일주일 후 서연과 함께 중국에 갔다.

상하이 공항에 내렸는데.

중국 팬이 너무 많이 나와 있었다.

중국 합작사가 중국 뉴스에 나오라고 일부러 사전에 알렸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불편한 건 없었다. 경호원이 무려 20명이나 동원되어서.

마중 나온 사람은 김판수였다.

현재 중국에 홍콩인과 함께 영화 제작사를 차렸다.

로큐의 계열사인데 중국 합작사가 투자하고, 로큐가 제작 지원하기로 협의를 끝낸 터다.

“여, 최 감독!”

“여, 김판수!”

김판수와 포옹했다.

둘의 기묘한 인사를 보고 서연이 배를 잡고 웃었다.

김판수와 내 관계가 좀 이상하긴 하겠지.

“바로 호텔로 가자. 중국 회사가 신경 많이 썼어.”

김판수를 따라 게이트를 나섰다.

나도 이젠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전에는 사인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손을 흔들면서 팬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안전사고 문제도 있었지만 솔직히 좀 불편했다.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는데 가로등에 블루드 워 포스터를 새긴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저건 뭐야?”

“아, 저거? 중국 회사가 너 온다고 환영차원에서 걸어 놓은 거야. 실제로 중국에서 엄청 흥행하기도 했지. 미국 다음으로 흥행했을걸?”

“얼마나 들었는데?”

“관객 수는 모르겠고, 극장 수익이 2,500억이야.”

“중국이 다르긴 하네.”

“다르지. 내가 보기엔 어이없는 수준인데 단지 자국 영화라서 4,000억 버는 영화가 나오니까.”

“어이없는데 그런 수익이 나올 수가 있나?”

“내 말은 내러티브가 그냥 그렇다는 거야. 한국 영화나 할리우드 영화에 비하면. 중국인만 보는 영화지 뭐.”

“해외 성적은 낮아?”

“대다수 나라가 흥행은커녕 개봉도 안 했을걸?”

중국은 자국에서만 흥행해도 충분하겠지.

김판수가 다시 말했다.

“어웨이커 때는 흥행이 그냥 그랬어. 왜 그랬는지 알아?”

“제법 된 걸로 아는데?”

“아니야. 훨씬 더 흥행할 수가 있었거든. 단지 한국 감독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안 본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왜?”

“기분 나쁘다 이거지. 옛날에 박지성이 맨유에 있을 때 중국에서 방문 시합한 적 있거든. 그때 중국 관중이 박지성이 볼을 잡을 때마다 야유를 하는 거야. 클럽 친선 게임인데.”

“한국인이 맨유에서 뛰는 게 기분 나빠서?”

“그래.”

나와 서연이 서로 보았다.

박지성과 맨유 선수들은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김판수가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너 황당이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아?”

“어디서 나온 말인데?”

“조선 후기 때 우리 바다에서 불법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을 황당선이라고 했거든. 당시 우리 어부들이 얼마나 황당했으면 황당선을 보고 황당하다고 했겠냐고.”

나와 서연이 소리 내어 웃었다.

김판수의 말발은 여전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때 이후로 중국인들 시민의식이 나아진 것 같지? 달라진 거 하나도 없어. 대국인 코스프레를 하다가 자기 이익만 걸리면 본색이 나오더라. 대인인 척하는데 소갈머리는 코딱지 수준밖에 안 돼.”

“그거야 사람마다 다른 거지.”

“평균이 그렇다는 말이야. 누가 선동하면 등 돌리는 거 순식간이야. 본인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건 아니다 싶은 주관이 있어야 하는데, 대중 대다수가 선동에 동조하게 된다고. 그게 왜 그런 거 같아?”

“사회주의 국가라서?”

“공산당이 내거는 가치가 이 나라의 상식인 거야. 공산당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지. 멀쩡한 지식인이 어이없는 선동질에 휘둘리는 거 보면서 이 나라는 세계의 리더는 못 되겠구나 싶더라.”

김판수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하소연하듯 말이 쏟아지고 있으니.

그가 다시 말했다.

“내 말 안 믿는 눈친데?”

“그걸 일반화의 오류라고 하지.”

“예를 들어 볼게. 어웨이커 개봉 첫날에는 영화 재밌다는 사람이 많았거든. 그런데 뉴스에서 한국인이 만든 영화라고 소개한 뒤에, 미국 영화보다 자국 영화를 봐야 중국 영화 산업이 발전한다. 그래야 중국 영화가 미국 영화를 넘어설 수 있다. 중국 영화 수준은 이미 할리우드 영화에 근접했다. 이 따위 헛소리를 앵커가 아주 진지하게 늘어놓는 거야.”

헛소리가 아니다.

중국인의 연간 영화 관람 횟수가 고작 2회다.

중국 시장의 잠재력과 자본력은 미국을 넘어선다.

어쨌든.

“한국에서 앵커가 그랬으면 욕 좀 먹겠는데.”

“200살까지 살지. 그런데 여긴 달라. 앵커 인기가 올라가. 시원시원하게 말 잘한다면서. 그 뉴스 이후에 어웨이커 예매율은 뚝뚝 떨어졌고.”

그냥 웃음만 나온다.

사회주의 국가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뭐.

그것도 애국심으로 봐야 하니까.

김판수가 말을 이었다.

“내가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그런 중국인들 특성을 잘 알고 있어야 뒤통수 안 맞는다는 거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거겠냐, 사회가 그렇다는 거지.”

중국이든 일본이든 자국을 위하는 거다. 한국도 그런 점에선 마찬가지고. 중국이 우릴 이용해 먹겠다면, 우리도 이용해 먹으면 되는 거다. 웃으며 인사한 뒤 돈만 벌어 가면 된다.

“그래서 초청료와 CF 출연료는 얼마야?”

“10억. 20억.”

“상당히 센데?”

“돈 만큼은 대륙답지.”

“마음고생 많았나 보다.”

“야, 말도 마라. 계획은 엉성하게 하면서 돈만 관련되면 사람 피곤하게 한다. 사업 파트너만 그런 건지, 중국인들 특성이 그런 건지. 자꾸 우리와 돈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면 관계가 좋겠냐고. 영화 제작해서 1,000억 벌 생각을 해야지, 몇 푼 되지도 않는 자기들 이익 때문에 하느니, 마느니 밀당을 해 댄다. 아이고, 진짜!”

서연이 킥킥대며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진정성 있는 넋두리였다.

그렇게 리무진을 호텔로 향했다.

* * *

5성급 호텔 라운지에서 만찬이 벌어졌다.

중국 영화계 인사들과 감독, 제작자가 꽤 많이 초청받았다. 공산당 간부는 왜 이 자리에 왔는지 모르겠다만.

그냥 바이어들 만나는 자리인 셈 치고 소개도 받고 인사도 하고 그랬다. 김판수 말대로 다들 여유가 넘치고 대인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 반. 정말 대인인 사람 반.

그런데 말에 은근히 대국의 자긍심이 넘친다. 또 은근히 깔보는 것도 있고. 네가 할리우드 감독으로 잘 나간다며? 우리 중국도 곧 따라잡는다. 긴장하시는 게 좋다.

사람을 사귀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김판수의 스트레스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일상다반사였던 거다.

한국 영화 잘 나가는 거 알지만 중국 영화는 이미 한국 영화는 뛰어넘었다는 말까지 들려왔으니. 그러면서 중국영화, 한국영화 모두 잘해 보자고 마무리한다.

내게 잘 보이려는 모습을 보이는 배급사나 투자자들까지도 은연중에 그런 내색이 담겨 있다. 이 파티는 중국 영화인 협회가 주최했는데, 중국 합작사 회장이 나와의 인맥을 자랑하려고 날 불렀던 거였다.

난 하루 만에 10억 벌고, 서연은 중국 합작사 CF 출연으로 20억 벌게 되었으니 그냥 참았다. 뭐, 말에만 야릇한 가시가 있을 뿐 사람들은 다 친절했다.

만찬 말미에는 합작사 회장과 단독 면담을 했다.

날 만나려는 목적이 자랑이었기에 대화는 길지 않았다. 블루드 워 2편은 ‘우리’ 극장에서 개봉하고 싶다고 했다. 난 로큐 대표로서 영화 사업 잘해 보자고 했고.

그렇게 3시간에 걸친 파티를 끝냈다.

대접은 확실히 대국다웠다.

나와 서연이 묵은 곳은 호텔에서 가장 비싼 스위트 룸이었다. 하루 숙박비가 수천만 원대다. 나와 서연이 아직 남남인데도 같은 방에 밀어 넣어 준 건 배려일까, 착각일까.

방을 돌아다녔다.

서연은 침대에 벌러덩 눕고.

“오빠. 3시간 파티였는데 종일 촬영한 느낌이야.”

“당연하지. 3시간 내내 메소드 연기를 했는데.”

내 말에 서연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나도 가끔 촌철살인의 개그를 칠 때가 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방을 보고 있어?”

“몰카 없나 해서.”

“설마.”

사람은 모르는 거다.

중국 합작사가 훗날 ‘협박’을 위해 수를 썼을 수도 있다. 한 방에 나와 서연을 묵게 한 게 영 마음에 걸렸으니.

내가 오바한 모양이다.

이상한 낌새는 없었다.

대접해 주는 ‘회장님’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고.

물론 본인 영향력 행사를 위해 우릴 초청한 거지만.

다음 날 서연은 CF 촬영을 했다.

난 김판수와 중국 제작사 창립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중국인들 정서를 내가 모르니 시나리오는 내가 쓰지 않고 감수만 하기로 했다. 아직 시놉도 안 나온 상황이다.

김판수가 말했다.

“중국 측에선 항우와 유방의 전쟁이나, 만주 항일 유격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데 좀 고리타분해.”

“로맨틱 코미디 쪽은?”

“그쪽도 제법 흥행하긴 하는데 리스크가 좀 있어. 앞서 말한 영화들은 일단 먹고 들어가는 게 있거든.”

어제 김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중국에서 영화 만드는 건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거다. 중국 측에서 제안한 소재와 같이 중국인이 열광하는 영화를 만들면 된다. 그들의 애국심을 격양시키는 소재.

그러면 앞으로 김판수가 이끌 사업도 평탄해질 테고.

“중국인들 애국심 자극하는 영화를 추진해 봐. 사천성 대지진 때 구조대원들 이야기도 좋고, 알리바바 회장의 전기 영화도 좋고.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이야기 있잖아. 아무튼 첫 작품은 그런 게 좋고, 차기작은 중국 판타지도 괜찮고.”

“우리나라 네티즌한테 욕 좀 먹을 텐데?”

“아주 영리했다고 칭찬받을 수도 있지.”

“그렇기도 하네. 하하.”

중국에서 제작하고 중국인이 보는 영화다.

대중이 선호하는 영화를 만드는 게 제작자고.

다만 모택동이나 공산당 찬양하는 영화는 좀 그렇다.

당일 바로 공항으로 갔다.

나와 서연이 게이트를 나갈 때. 배웅 나온 김판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어째 짠했다.

고생은 하겠지만 성공의 열매는 달겠지.

* * *

며칠 후 송강석 씨를 만났다.

영화와 현실의 이미지가 똑같은 분이었다.

소속사에서 연락이 와서 만나 뵈러 갔는데, 곱창집에서 매니저와 소주를 드시고 계셨다.

“자자, 한 잔 쭉 드세요. 술 드시지요?”

“예.”

송강석 배우가 따라주는 소주를 마셨다.

이미 술이 좀 되셔서 혀까지 꼬이셨다.

“책은 재밌게 보셨어요?”

“책? 야, 기~가 막힙니다. 역시 최 감독이야. 근데 나한테는 그간에 왜 책을 안 보내줬어요?”

“배역이 마음에 안 드실 것 같아서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배우가 하면 하는 거지. 이번 영화 형사는 딱 나던데? 내가 책을 보면서, 야! 시바 이거는 되겠구나. 영화가 중간부터 시바, 어마어마하게 가더라고! 그런데 감독님.”

“예?”

“시나리오를 왜 이렇게 잘 써요?”

송강석 선배님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귀여우시다.

그의 재미있는 술주정을 들어가며 나도 술을 마셨다.

어째 내가 영화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한데.

처음 뵙는 분과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실 줄 몰랐다. 더구나 캐스팅을 하려고 나간 자리였다. 계약은 뒷전이고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면서 소주를 4병이나 마셨다.

그러다 필름이 끊기고 말았다.

눈을 떴더니 웬 모텔방이었다.

옆에는 송강석 선배님이 팬티 바람으로 자고 있고.

나도 팬티 바람으로…

누가 내 옷을 벗긴 거야?

아주 민망했다.

다행히 새 옷이 와 있어서 그 옷을 입었다.

회사 직원이 와서 기다리던 터였다.

송강석 선배님 매니저 말을 들어보니 나도, 송강석 선배님도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많이 마셨다고 한다. 매니저가 로큐에 전화해서 날 실어 나르려고 했는데, 내가 그냥 모텔에서 자겠다고 했다. 그 바람에 송강석 선배님도 모텔에서 자고.

그런데 내가 토하는 바람에 나와 송강석 선배 옷에 토사물이 묻고 말았다. 매니저는 우리 두 사람 옷을 벗긴 뒤 간신히 침대와 바닥에 눕혔고.

송강석 선배님은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지난밤 사이에 의기투합했었다는 기억이 났다.

“아이고, 속이야. 해장국이라도 좀 먹자.”

“예.”

“최 감독, 오해하지 마라. 나 필름 끊긴 적 별로 없어.”

“누가 뭐랍니까.”

둘이 또 낄낄대며 웃었다.

송강석 배우와 함께 근처 해장국 집으로 갔다.

밤에 고생한 그의 매니저는 보냈다.

내 옷을 가져온 직원도 보냈고.

둘이서 콩나물해장국을 먹다가 또 웃었다.

송강석 선배님이 말했다.

“최 감독은 사람 긴장을 놔 버리게 하는 재주가 있어.”

“선배님이 편하게 대해 주시니까요.”

“그런데 말이야. 작가 영화 찍을 생각 없어?”

“있죠. 그쪽에 갈증이 좀 있으세요?”

“내가 요새 권태긴가. 매사에 나른한 게 말이야. 옛날에 박찬익 감독 영화 같은 거 좀 해 보고 싶네.”

“복수 시리즈요?”

“딱히 그런 게 아니라도.”

안 그래도 아주 건조한 누아르도 해 보고 싶었다.

박찬익 감독의 복수 시리즈는 작가 영화라기보다는 장르 영화로 본다. 선배님은 작가 영화인데 그런 느낌이 드는 작품을 해 보고 싶다는 말씀이시고. 예술인으로서 어떤 자극이 필요하신 듯.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써 볼게요.”

“그래.”

해장국을 먹고 송강석 선배와 헤어졌다.

송강석 선배와 코드가 잘 맞는 느낌이었다.

왜 이제야 만났나 싶을 정도로.

* * *

석 달이 지났다.

‘플랜’ 프리 프로덕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 영화 중 캐스팅이 가장 화려했다.

형사 역에 송강석. 피해 투자자 역에 박해인.

재벌가 차남 역에 조성. 리더 역에 소진웅.

네 명 모두 주연을 하는 배우들이다.

특히 조성은 악역이 처음이다.

처음 맡은 악역이 정말 극악무도한 게 재밌다.

연기 스펙트럼에 욕심이 있었던 듯.

소진웅은 악역을 더러 했고 인상도 강렬해서 ‘페이크’ 악당으로서 섭외했는데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송강석 선배님과 몇 작품 했었던 박해인은 책도 안 보고 오케이 했고.

여기에 천만 배우라 불리는 오달주는 가짜 큰손으로 나온다. 제니스 멤버 미주도 형사 역할을 맡았다.

로큐에서 워낙 많은 작품을 제작하다 보니 시스템이 훌륭하게 정착되었다. 플래닛 전용 영화와 극장 개봉 영화로 스태프가 나누어졌는데, 개봉 영화 스태프들은 한국 최고 수준의 실력자들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플래닛 전용 영화 스태프는 일종의 2군이다.

개봉 영화 스태프는 1군이고.

당연히 2군은 1군에 들기 위해 열심히 한다.

게다가 개봉 영화 스태프들은 이미 최고 수준을 이룬 뒤에 회사에 전속이 된 경우가 많았다.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월급 따로 받고 제작 수당도 받고.

이건 네오스타 스튜디오 시스템을 적용한 거였다.

전속 스태프들은 일 년에 두 작품 정도는 꾸준하게 참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중국 영화 제작에도 참여한다. 일이 꾸준하게 들어오지, 프리랜서들보다 두 배 넘게 벌지.

영화판에서 우리 회사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줄을 설 지경이었다. 초보자든 베테랑이든. 2군에 있는 스태프가 내 영화에 투입된다면 일종의 승진이 되는 셈이었다.

덕분에 난 최고 수준의 스태프들 지원을 받아 아주 깔끔하고 무난하게 프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제작부와 연출부 등은 이미 최고 실력자였고, 그간 쌓아 놓은 노하우도 풍부했다. 경력직 스태프들이 체계적인 시스템을 보고 놀랄 정도로.

한국과 할리우드 방식을 합쳤다고 할까.

내 영화 제작부 인원만 9명.

연출부도 8명이나 된다.

전속 콘티 작가만 5명이다.

회사 제작부 총인원이 30명이 넘는다.

제작이사가 된 전 제작실장이 전체를 관리했고, 인사권도 그가 맡았다. 스태프들 실력을 가장 잘 알기에.

해서 제작이사가 내 영화에 투입될 스태프들을 선택했다. 승진시킬 사람은 승진시키고, 입봉시킬 사람은 입봉시키는 식으로. 내 영화에 들어온 스태프들은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석 달 만에 프리를 끝내고 고사까지 지냈다.

촬영을 6일 앞두고 회사에 큰 행사가 있었다.

신사옥 이주 기념 파티였다.

* * *

용산에 있는 신사옥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신사옥이 M자 모양인데 그 가운데 9층에 넓은 정원이 있었다. 그 정원과 통하는 층은 임시 식당으로 꾸며 놓았다. 식당에선 뷔페 음식을 즐기고, 정원에 나와선 담소를 나누고.

배우들이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오면 스태프나 직원들이 소외감을 느낄까 봐 일부러 편안한 옷으로 입고 오라고 했다. 자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기도 하고.

구 대표와 성 부사장과 나란히 섰다.

이런 파티가 두 분은 낯설어했다. 미국식이라.

성 부사장이 말했다.

“우리 직원이 이렇게 많았나요?”

“여기 온 분들만 300명은 될 것 같네요.”

언제 이렇게 식구가 많아졌나 싶다.

직원이 200명쯤 되고, 소속 아티스트는 60명가량이다. 거기에 스태프들이 또 150명이 넘고, 플래닛 케이 직원들, 파견 나간 직원들. 지사 직원들까지 합치면 한 500명 된다.

신인 아이돌은 이름도 잘 모르겠다.

재계약 포기하고 나간 사람은 별로 없고 들어오는 사람은 매달 늘어난다. 톱스타만 12명에 이른다. 세계적인 스타가 된 락키 애들은 언제 저렇게 성숙해졌는지.

서연은 여자 연예인들 중심에 있었다.

여자들이 눈웃음치며 서연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이다. 지현이와도 친해지려 애쓴다. 회사가 더 켜져서 분리되면 지성이가 분리된 계열사 대표가 될 것이 확실했기에.

그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콘텐츠 제작이사로서 일을 상당히 잘해 냈고, 경영도 녀석의 학벌에 비하면 꽤 잘했다. 내 동생이라는 프리미엄도 있고.

아직 이렇다 할 말이 나오진 않지만.

로큐 본사는 지주사가 되고 계열 분리될 가능성이 좀 있었다. 제작사. 기획사. 플랫폼. 이 세 계열로.

분리된다면 지성이는 제작사 대표가 될 터다.

구 대표와 성 부사장은 그룹 이사가 된다.

난 그룹 회장으로 추대될 테고.

귀찮은 일 많은데 대주주로 그냥 갈까 싶다.

회장 없이 구 대표가 의장 맡으면 되지, 뭐.

난 경영에서 완전히 탈출하고.

담소를 나누는 이들을 보니 미묘한 흐름이 보였다.

이전에도 좀 느꼈는데 오늘은 유난히 강해 보였다.

직원들의 경쟁. 연예인들의 시기와 질투. 지성이에 대한 임원들의 견제. 구 대표와 성 부사장도 웃고는 있지만 서로 의식하고 있다.

코어가 저절로 발동된 것이 아닌데 그게 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당한 수준으로 진화한 모양이다.

심리가 기운의 형태로 보인다고 할까.

어쩌면 그래서 시나리오를 쓸 때 인간의 감정과 심리를 최적으로 극대화했는지도 모르겠다.

“임직원들의 경쟁이 정말 치열하네요.”

구 대표가 내 말을 받았다.

“치열하지. 여태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과열이다 싶을 정도로 심해. 회사가 계열 분리된다는 소문 때문에 미리 입지를 다져 놓으려는 거지. 각 계열사가 상장하기 전에 자사주를 무상배분할 거 아닌가. 직급에 따라 배분 비율이 다르니까.”

구 대표의 말이 맞다.

자사주 배분 때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고 경쟁이 심해진 거다. 회사 임직원들에게 자사주 배분하고 나머지를 공모주로 풀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사려고 하겠지.

다른 기업처럼 음모와 술수가 난무할지도 모르겠다.

그쯤 되면 회사가 아니라 전쟁터다.

다른 대기업들처럼.

“계열 분리 꼭 필요할까요?”

“비대해지면 분리해야지. 직원 수에 비해서 자본금이 너무 많거든. 사업 확장하라는 이사들 요구도 많아. 음원유통사에, 극장 사업에, 방송사까지. 임직원과 고용창출을 위해서라도 투자를 해야지.”

“자금이 얼마나 축적된 겁니까?”

“은행에 넣어 둘 수는 없으니 다른 회사 지분을 사들였지. 올해 주식시장이 좋아서 1조에 육박해. 보유 현금만 700억이지. 중국 합작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거기서 상당한 수익이 들어올 거야. 매년 5천억 이상 늘어날 것으로 봐.”

돈이 돈을 낳는 구조가 되었다.

그 상황이 되면 난 손을 떼야 한다.

경영 때문에 영화를 못 만든다.

계열 분리가 된다면 지분만 확보하면 된다.

많이 확보할 필요도 없다.

로큐에서 내 지분은 넘사벽이다.

계열 분리가 된다면 로큐는 그룹으로 바뀌고 지주사가 된다. 지주사가 계열 분리 전 계열사 건물을 매입하고 자본 출자를 해야 하기에 자연스럽게 지분을 가진다.

따라서 지주사가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가 되며, 그 지주사 최대 주주는 나다. 나 혹은 로큐 본사가 모든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가 된다. 또한 계열사도 지주사 지분을 확보해서 순환 출자 구조가 될 수도 있다. 대기업이 이런 식이다.

구 대표님이나 성 부사장님이 계열사 사장을 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외부 공격을 당했을 때 내가 지켜 주지 않으면 회사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플래닛과 콘텐츠 계열만큼은 내가 반드시 지키려 하겠지만.

그러니 계열 분리해도 회사만 커질 뿐.

내가 바빠질 일은 없다.

“구 대표님이 진행하세요. 전 영화만 하렵니다.”

“허락한 것으로 봐도 되는가?”

“투자를 하시든, 인수합병을 하시든. 이사회에서 잘 결정하리라 믿습니다.”

구 대표님과 성 부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경영은 경영인이 해야 하니까.

안 그래도 촬영이 임박했다.

총제작비는 130억. 제작 기간은 6개월.

최고의 배우와 최고의 스태프가 만드는 영화다.

시나리오에 대한 소문이 났는지, 내가 블루드 워 이후에 찍는 한국 영화라서 그랬는지.

벌써 내년 여름 최고의 기대작이라 불리고 있었다.

* * *

촬영이 시작되었다.

영화 도입부는 작전 세력이 형사와 피해투자자가 투자한 작전주를 주가 조작하는 장면이었다. 주가 조작을 대략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고, 긴박함을 줘서 영화 시작과 함께 몰입할 수 있도록.

리더 역의 소진웅이 스마트폰을 들고 대기했다.

귀에는 인이어를 꽂고.

통화 중인 휴대폰만 4개다.

그의 앞에는 넉 대의 PC와 팀원들이 있다.

이미 리허설은 3번이나 했다.

“액션!”

리더 역의 소진웅이 다급히 외쳤다.

“1팀! 18,500원에 5만 주 매수 걸어! 2팀은 20,000원에 50만 주 매도 걸고! 개미들이 매도 주문 50만 주 보면 깜짝 놀라서 빠져나갈 거다! 3팀은 18,000원에 10만 주 매수 건다! 음봉 3개 뜨면 차례로 호가 걸고 즉시 매수! 개미들이 따라오게 돼 있어!”

“알겠습니다!”

소진웅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팀원이 소리쳤다.

“17,000원까지 빠질 것 같습니다!”

“매도 조정! 1팀 17,000원에 매수! 2팀 16,500원에 매수!”

“17,000원 체결됐습니다!”

“음봉 차례로 3개 떴습니다!”

“3팀, 4팀! 16,500원부터 전량 소화해! 양봉 뜨면 곧장 물량 흡수! 이대로 계속 간다!”

“매수가 조정!”

“체결됐습니다! 대부분 소화합니다!”

“양봉 떴어요!”

“곧장 치고 올라가! 장대 양봉 나올 때까지 쭉쭉!”

소진웅이 이를 악문 채 화면을 보았다.

“22,000원 20만 주 매수 체결!”

“23,000원 15만 주 매수 체결!”

“바로바로 소화해!”

“팀장님! 외국인이 물량 풉니다!”

“계속 매수! 전량 소화해! 외국인이 눈치채면 바로 올라탄다! 개미들도 이때다 싶어 따라붙어!”

소진웅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다.

팀원들은 분주히 마우스를 움직이고.

“컷! 오케이!”

조감독 수혁이가 외쳤다.

“리더 바스트 따겠습니다!”

배우들이 일제히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한 씬 찍었는데 기진맥진이다.

마스터 쇼트를 찍었다. 이후 배우 소진웅의 외침에 따라 리더와 팀원들, 컴퓨터 화면을 각각 딴다.

컴퓨터 화면은 대사에 따른 주가의 변동을 보여 준다. 존재하지 않는 회사와 주가이기에 그래픽으로 정교하게 주가와 차트를 제작하고 있다. 편집 때 붙인다.

* * *

형사와 피해 투자자가 붙는 씬.

송강석 선배가 PC방에 쳐들어와 폐인 꼴이 된 박해인을 잡고 난리 치는 장면이다. 스테디 캠이 PC방 문 앞에 대기.

롱 테이크라 리허설 6번에 NG가 3번 났다.

형사의 첫 등장 장면이다. 그의 성격과 현재 상황 등을 첫 등장 때 거진 보여준다. 코피가 터졌는지 콧구멍에 솜이 박혀 있고, 근무 시간인데 찜질방 옷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씬 3에 1에 4!”

“액션!”

문이 벌컥 열린다.

씩씩대며 들어오는 송강석. 사람을 찾아 PC방 안을 마구 헤집고 다닌다. 이놈이 그놈인가, 이놈이 그놈인가 싶어 게임 하는 손님들을 방해한다. ‘이 새끼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하면서 혼잣말까지 한다.

그러다 구석에 있는 박해인을 발견한다. 달려가다가 슬리퍼가 벗겨지자 슬리퍼를 오른손에 들고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박해인의 머리통을 냅다 갈긴다.

퍽!

“아이 씨!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나다, 이 새꺄!”

슬리퍼로 마구 때리는 송강석.

퍽퍽퍽퍽!

아주 쥐잡듯 잡는다.

“아악! 그만 때려요!”

“죽어! 죽어! 죽어! 너한테 맡기면 5천으로 5억 만들어 준다며! 5억 만들어 준다며 이 새꺄! 니가 잠수타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아!”

“요즘 다시 오르잖아요!”

“뭐머 뭐야? 오르잖아요?”

“넉 달 물리긴 했지만 최근에 다시 올랐잖아요!”

“그랬지. 그랬는데! 오늘은 상장 폐지다, 새꺄!”

“예에?”

두들겨 맞던 박해인이 튀려고 하자.

그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송강석.

쿠당탕탕.

두 사람, 바닥에 넘어져서 엎치락뒤치락.

“네가 튀면 내가 못 잡을 것 같아!”

“놔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급기야 박해인의 목을 조르는 송강석.

“켁! 형사가 사람 잡네!”

“야, 이 새꺄! 내 돈 물어내!”

“나도 피해자라고요!”

“이 새끼를 확! 잡아먹어 버려!”

송강석이 박해인의 어깨를 물어 버린다.

“아악! 아파, 아파요!”

송강석을 밀치고 일어나는 박해인.

그가 외쳤다.

“시발, 복구하면 되잖아!”

송강석은 주저앉은 채 엉엉 눈물 없이 운다.

어째 측은해 보여 그 앞에 앉는 박해인.

“형사님. 제가 복구해 드릴게. 형사님은 5천이지만 난 3억 잃었다고요.”

“야, 이 새꺄.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그 돈을 어떻게 모았는데! 이 업소 가서 5만 원 뜯고, 저 업소 가서 3만 원 뜯고. 엉! 그렇게 열심히 번 돈으로 투자한 돈이야 새꺄! 내 전 재산이라고!”

아이처럼 우는 송강석의 손을 잡아 주는 박해인.

“형사님. 우리 그놈들 찾읍시다. 놈들 찾아서 돈도 복구하고, 그 새끼들 빵에 처넣자고요. 나 주식 전문가고, 형사님 경찰이잖아. 놈들 찾는 거 시간문제라니까.”

“그래?”

“그렇다니까.”

박해인과 송강석이 서로 보며 웃었다.

순간 박해인을 끌어당겨 헤드락을 거는 송강석.

“그렇다니까? 그렇다니까? 그렇다면 죽어!”

“아우, 진짜 좀!”

그렇게 몸싸움을 벌이다가.

“컷! 오케이!”

짝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두 분의 연기 호흡이 정말 예술이다.

안 그래도 연기 잘하는 두 분이 호흡까지 잘 맞으니.

스태프들 표정이 정말 좋았다.

다들 시나리오를 보았다. 그 시나리오에 이 배우들의 연기가 담기면 어떤 영화가 될지 감을 잡은 거다.

모니터로 방금 찍은 영상을 확인했다.

송강석 선배님 연기가 너무도 좋다.

촬영을 재개하려던 그때였다.

이동욱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고할 일이라도 있는 건가.

“네.”

-감독님. 드라마 제작사에서 합작 제의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드라마요? 무슨 드라마?”

-유명 제작사인데요. 우리 시리즈에 관심이 좀 있었나 봐요. 그래서 검토나 해 보자 해서 만났는데, 제가 감독님이 써 두신 시놉을 하나 보여 줬거든요. 그 왜, 시리즈 번외로 지구를 탈출해서 300년 동안 우주를 유랑하는 선단 나오는 거.

“그거에 관심이 있대요?”

-네. 영화와 연동하면 재미있겠다면서 제의를 하네요.

“한국에 한번 오라고 하세요. 제가 지금 촬영 중이라.”

-긍정적으로 보세요?

“나쁘지 않죠. 시리즈 세계관이 풍부해지니까요.”

-예. 그쪽에 타진해 볼게요.

“네.”

별일이 다 있네.

합작이라 부담도 별로 없고.

조감독이 왔다.

“세팅 끝났습니다.”

송강석 선배가 박해인에게 헤드락을 건 채 대기.

자세도 표정도 정말 웃긴다.

“씬 3에 2에 1!”

“액션!”

* * *

송강석과 박해인이 컴퓨터 앞에서 머리를 맞댔다.

나와 안성욱 씨가 했던 그대로다.

열심히 작전주를 찾고 있다.

박해인이 말했다.

“작전주와 비슷한 건 있는데 이평선을 뚫고 올라간 지점이라 딱히 작전주라 보긴 어려운데요.”

“이평선은 뭐야?”

“이동평균선요. 5일, 20일, 60일 주가 평균인데요. 20일 선을 뚫고 올라가면 상승 추세가 좀 있다고 봐야 하는데.”

“그러면 자연스러운 상승 아니야?”

“그런데, 요 앞에 모양이 딱 작전주 같단 말이죠.”

“뭐가 표시가 나?”

“여기 이 최고점요. 이전 최고점이랑 이상하게 맞네. 그때부터 하락하다가 여기서 딱 오른 것도 희한하고. 당시에 호재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송강식 선배가 화면을 보다가 모니터로 삿대질했다.

“요 새끼들 요거 맞네. 내가 형사의 직감으로 보니까, 딱 그림이 나와 그림이. 작전주인 거 들킬까 봐 일부러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야, 이 새끼들 머리 좋아.”

박해인이 콧방귀를 뀐다.

“뭐가 그림이 딱 나와요? 일부러 이런 차트 만들기도 어려운 건데? 그렇게 차트 잘 보시면 저한테 돈은 왜 맡겨서······.”

송강석이 박해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퍽.

“악! 왜 때려요, 또!”

송강석이 손을 휘저으며 딴청을 한다.

“겨울에 웬 파리가 날아다니고 그러네.”

“아이, 진짜!”

“야, 이 회사 느낌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

“약간요.”

“그래, 이 회사부터 파 보자. 회사 대표나 대주주가 누굴 만나는지, 어떤 노무 새끼와 한패인지 찾아보자고. 수사 뭐 별것 있어? 한 다리, 두 다리 파다 보면 밟히게 돼 있어.”

“이 회사 아니면요?”

“아니면 찾을 때까지! 그 망할 새끼들이 말이야. 신성한 경찰의 돈을 해 먹어? 넌 이 새끼들 다 찾아낼 때까지 잠도 자지 마! 알겠어?”

“예. 형사님.”

“그럼, 수고해.”

“어디 가세요?”

“어디 가긴 새꺄. 나쁜 놈들 잡으러 가지.”

“나쁜 놈들이 찜질방에 있어요?”

들은 척도 안 하고 몸을 돌리는 송강석.

소리 없는 욕을 해대는 박해인.

“컷, 오케이!”

두 배우가 바로 스테이션에 와서 찍은 화면을 확인했다.

송강석 선배가 말했다.

“좀 약한데. 애드립으로 다시 가 볼까.”

“생각해 둔 게 있어요?”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이번엔 두 분이 알아서 한 번 가 보죠.”

조감독이 외쳤다.

“세팅 그대로요! 다시 갑니다!”

얼마 뒤, 똑같은 장면을 다시 찍었다.

두 번째 슛에선 발음이 좀 꼬이고 더듬기까지 했으나 그게 더 나았다. 편집할 때 붙여 보고 더 나은 걸 선택해도 된다. 밋밋한 대사가 배우를 통해 나오니 생동감이 생긴다.

다음 날부터 경찰서 세트 촬영이었다.

형사가 출근하여 형사과장에게 혼나는 장면을 비롯해 경찰 옷 벗게 생긴 사정. 후배 형사들과의 팀워크 등을 보여 준다. 속물이지만 주인공이 유능한 경찰이라는 것도.

원래 시놉에선 이 장면이 첫 장면이었는데, 주인공의 행동 목표를 먼저 보여 주려고 바꾸었다. 관객이 큰돈을 잃은 주인공의 사정을 알고 나면 감정이입이 빠르다.

빨리 작전 세력을 잡아야 하는데 형사의 팀에 꽤 큰 사건이 떨어진다. 그 나쁜 놈들 잡으랴, 작전 세력 잡으랴. 두 가지 다 하려다 보니 형사로선 죽을 맛이고.

형사과장의 압박. 인간적인 강력계장의 격려. 동료인지 적인지 구분이 안 가는 다른 강력팀과의 신경전. 그리고 끈끈한 강력 2팀의 분위기.

그 장면들 이후 사기 도박단을 일망타진하는 활극이 벌어졌다. 액션과 코믹이 섞인 이 에피소드로 팀장 ‘정우석’과 강력 2팀 형사들의 매력을 한껏 드러냈다.

그다음 일가족 살해 사건이 강력팀에 넘어온다. 형사과장이 강력 1팀에 그 사건을 배정하려고 하는데, ‘정 팀장’이 우격다짐을 해서 그 사건을 떠맡는다. 뇌물수수로 징계 먹을 상황인 터라 이 사건 해결 못 하면 경찰 옷 벗겠다면서. 이 사건의 이면에 본인이 당한 주가 조작 사건이 있었던 거였다.

이 영화의 동력은 이때부터 시작이다.

정 팀장은 그제야 본격적으로 자신도 피해자인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팀원들과 수사권을 총동원해서.

여기까지가 촬영 21회차였다.

* * *

신사옥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이동욱 대표와 AMG 스튜디오 임원이었다.

AMG 임원은 키가 훤칠한 40대 초반 백인이었다.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AMG 제작 총괄 이사 조나단 빌트라고 합니다.”

“먼 곳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하네요. 최신성입니다.”

“미안하실 것 없습니다. 급한 쪽은 우리니까요.”

“하하하.”

웃음으로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한국 음식 좋아하세요?”

“그럼요.”

“가시죠.”

AMG 스튜디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좀비 드라마를 제작한 회사이고, 케이블 방송사도 있다. 모회사인 AMG 엔터테인먼트는 북미 2위권 극장체인도 가지고 있다. 우리와는 우호적인 회사다.

그뿐만이 아니다. AMG 엔터테인먼트가 중국 미디어 그룹인 완더에 인수되면서 중국 시장에선 로큐와 경쟁 관계이자 협력 관계도 된다. 여러모로 얽히고 얽힌 관계가 된 셈이다.

두 사람과 함께 한정식집에 앉았다.

미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궁중음식이 나오는 집이다.

문화 경험이라도 하라고 데려왔다.

“중국에서 로큐가 극장체인 사업에 투자를 했습니다. 중국 완더 그룹의 극장체인과 경쟁 관계에 있는데, AMG 극장체인을 인수한 완더가 혹시 북미 배급에 불이익을 주지는 않을까요?”

김판수가 하도 중국인의 치졸함을 선동하는 바람에 나도 그게 슬쩍 우려가 되었다. 완더는 북미 2위권 극장체인을 소유하면서 세계 최대 극장체인 그룹이 되었다.

조나단 이사가 웃었다.

“그 점은 염려 마세요. 그렇게 따지고 들면 물리고 물리지 않은 관계가 없을 정도니까요. 완더가 인수하긴 했지만, 제작과 배급에 관해선 현지에 일임한 상태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요.”

“이유가 있습니까?”

“중국의 완더가 회사를 인수하면 회사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때 내린 결론은 중국의 차와 딤섬으로 콜라와 빅맥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거였죠.”

“지금까지 할리우드가 만들어 낸 영화를 중국이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거네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소유권만 바뀔 뿐 제작과 브랜드는 중국이 건들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그건 완더 측에서도 정확히 인지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아무런 압력과 문제가 없습니다.”

중국이 할리우드를 뛰어넘는 영화 대국이 되어도.

중국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를 대체할 수는 없다.

제작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정서의 문제다.

곧 식사가 나왔다.

조나단 이사는 신기한 눈으로 큰상 가득 차려지는 음식을 보았다. 눈으로 포식한다고 할까. 맛과 상관없이 대접받는 기분이 들 터다.

음식을 절반 정도 비웠을 때.

드라마 제작 이야기가 나왔다.

“지구를 떠난 수송 선단 이야기는 어떻게 보셨어요?”

“360년에 걸친 기나긴 여정 끝에 마침내 지구와 닮은 행성에 도착했죠. 그런데 거기에 다양한 외계인들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우주 시대의 개막이었던 거죠.”

“맞습니다. 다양한 외계 문명권에 처음으로 인류가 발을 디딘 지점이죠. 스타워즈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시작이라고 할까요.”

AMG 측이 드라마 시리즈를 길게 보고 있었다.

난 블루드 워 3부작 이후 같은 세계관의 시리즈와 개별 영화 시놉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 블루드 워가 인류의 싸움이라면, 난민들이 그 행성에 도착한 후로는 별들의 전쟁이다.

지구를 탈출한 60만 난민 수송 선단 이야기는 영화로 풀기보다는 드라마로 푸는 게 더 어울렸다. 또한, 삼국지와 비슷했던 지구와 화성 간의 3차 전쟁도 드라마로 푸는 게 더 좋았다. AMG 측은 그 이야기도 할 것 같고.

“제 영화 3부작 이후 지구와 화성의 3차 전쟁도 드라마로 하실 것 같은데, 제 예상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먼저 언급해 주시니 저희로선 고맙네요. 회사에선 수송 선단 이야기를 먼저 하고, 그다음 3차 우주 대전 이야기를 해 보자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감독님의 히어로 영화와 저희 스튜디오의 드라마를 번갈아 가며 공개하면 시너지가 있을 것으로 봤습니다.”

미드 특유의 미스터리를 기반으로 하고 정치와 사회, 종교를 씨줄 날줄로 엮을 것 같다. 복제 인간과 로봇, 우주 교전 등이 나올 테고. 전형적인 미국 드라마로 갈 것 같다.

나와는 정서적으로 좀 다르지만, 상관없었다.

제작 주체는 AMG이고, 우린 투자와 콘텐츠 제공, 기술 지원 등만 하게 된다. 여기서 콘텐츠는 시리즈의 스핀오프다.

시리즈 본편과 번외 편 등이 15편이나 된다.

이 중 드라마로 만들어도 되는 게 몇 개 있는데, 영화가 공개되면서 드라마도 함께 가려는 의도다.

우리 회사가 드라마도 제작하면 되지 않겠나 싶겠지만, 방송사를 소유하지 않으면 실익이 별로 없다. 드라마의 주요 수익은 광고이기 때문에. 또한, ANG 측은 우주선 등의 특수효과와 CG 부분을 우리에게 맡기면 되는 거고.

앞으로 우주 교전 장면 등의 제작 경험을 위해서라도 이번 드라마는 해 볼 만했다. 드라마로 실전 연습을 한 뒤 영화에선 완성도를 높이는 식으로.

“시즌은 어느 정도로 보세요?”

“시청률에 따라 다르겠지만 4시즌 정도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독님 영화의 3부작 시리즈와 시간대가 물리지는 않으니까요. 같은 세계관의 다른 드라마는 감독님 영화 개봉을 보고 판단할 문제고요.”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 의지가 있으니 한국까지 온 거다.

나도 내 영화 흥행에 도움이 되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진행해 봅시다. AMG 작가진이 잘하시겠지만, 혹 지원이 필요하면 하겠습니다.”

“저희야 좋지요.”

“저희는 제작 효율을 위해 CG 작업을 미리 만들어 두는 편입니다. 대본이 나오기 전에 여러 시안을 만들어 보내 주시면 작업이 빠를 겁니다.”

“감독님 방식이 저도 마음에 드는군요.”

“잘해 봅시다.”

“저희도 부탁드립니다.”

조나단 이사와 악수를 했다.

네오스타는 앞으로도 드라마는 만들지 않겠지만, 같은 세계관의 장편 드라마가 나오는 것은 환영할 일이었다.

기분 좋게 두 사람과 식당을 나섰다.

내일부터는 다시 영화 현장에 있어야 했다.

* * *

촬영 57회차.

영화 내용상 중간 이후 지점이다.

형사는 큰손의 진짜 정체가 누구인지 알아냈다.

이 직전에 형사는 엄청난 감정의 고통을 겪었다.

주가 조작에 당한 수많은 사람을 수소문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유가족도 만났다. 절망에 빠져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도 만났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재벌가의 차남이 벌인 온갖 악행이 은폐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두 손목이 잘리고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숨어 사는 전직 보안팀 직원. 이른바 차도식 전무의 전담반 출신이다.

그에게서 차도식이 벌인 천인공노할 범죄들의 전말을 듣게 된다. 증거는 없다. 살해당하거나, 회유당했기에. 차도식이 전처를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죽이고, 장인 내외도 자살로 꾸며 살인 교사했다는 말도 듣는다.

전담반이었던 남자가 말한다.

‘형사님. 제발 부탁합니다.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면 차도식이 절 죽이려고 할 겁니다. 경찰에 진실을 폭로해도, 언론사에 알려도 소용이 없어요. 경찰과 기자까지 죽이는 놈이 차도식입니다. 저는 형사님이 그냥 덮었으면 좋겠어요. 형사님이 죽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난 안 죽습니다. 놈은 체포될 겁니다.’

‘형사님이 아직 놈이 가진 힘을 몰라서 그래요. 놈의 배후에 거물들이 수두룩합니다. 경찰 옷 벗는 것은 물론이고 몇 년 안에 변사체로 발견될 거예요. 놈은 그냥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인 적도 있습니다. 한 번 자기를 짜증 나게 한 사람은 그냥 두질 않아요.’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해친다고?’

‘놈은 진짜 악마입니다. 사이코패스 같은 게 아니에요. 놈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어요. 유아적인 사고를 하는 악마에게 힘과 돈이 있습니다. 그런 놈에게 상식이 통할 것 같습니까!’

형사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도 처자식이 있는 가장이고 사람이었기에.

그러나 며칠 후.

이 전담반 남자가 목을 맨 시신으로 발견된다.

이 죽음을 보고 형사의 분노가 폭발한다.

이번 촬영은 그런 정 형사와 차도식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집에서 나오는 차도식의 차량을 정 형사가 다짜고짜 가로막는다.

대저택이 보이는 골목에 서 있는 형사.

지친 기색이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너무도 거센 분노가 눈에 갇혀 있는 듯한.

“액션!”

대저택 차고 문이 스르르 열린다.

시커먼 차량이 미끄러지듯 나온다.

보안요원들이 사열하듯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차가 빠져나와 골목을 내려왔다.

그때 갑자기 뛰어드는 송강석 선배.

끼이익-

빵빵-

송강석 선배는 클랙슨이 울려도 물러서지 않는다.

운전석 창문이 열린다.

“당신 뭐야? 비켜요!”

그래도 꿈쩍 않고 있는 송강석 선배.

빵―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

차가 오른쪽으로 빠지려 하자 다시 막는다.

그때 송 선배가 외쳤다.

“야! 차도식!”

운전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당신, 콩밥 먹고 싶어! 좋은 말할 때 비켜!”

“차도식! 너 때문에 죽은 사람이 내가 아는 것만 9명이다! 너 때문에 인생 망치고, 폐인인 된 사람은 300명도 넘어! 너 때문에 직장 잃고, 가정 잃은 사람이 수천 명이야! 너 하나 때문에 이 새끼야!”

그때 저편 저택에서 보안요원들이 달려 내려왔다.

차가 송 선배를 칠 듯 위협한다.

움찔거리지 않고 오히려 차 범퍼에 발을 올린다.

“똑똑히 들어 차도식! 다른 경찰과 기자들이 너 잡으려고 했다가 죽은 거 안다! 네놈에게 복수하려다 죽은 사람이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나는! 반드시 너 잡는다! 법으로 못 잡으면 주먹으로! 주먹으로 못 잡으면!”

송 선배가 총을 뽑아들었다.

달려오다 놀라 멈춰서는 보안요원들.

송 선배가 다시 외쳤다.

“이 총으로 잡는다! 알아들어!”

그제야 차 뒷좌석에서 문이 열렸다.

조성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차에서 내려 송 선배에게 다가왔다. 그가 송 선배에게 다가와 마주 섰다.

“요새 웬 벌레 하나가 내 근처에서 꼼지락 꼼지락 한다는 말은 들었어요. 그런데 누가 그래요?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그래, 웃어라. 나중엔 웃을 일이 없어.”

조성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말해 봐요.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누가 그래?”

“내 말 명심해라. 법으로 안 되면, 내가 너 죽인다.”

“누가 그랬냐고, 내가 묻잖아요.”

“야, 이 개새끼야! 네가 인간이야!”

보안요원들이 달려들려고 하자 조성이 손으로 저지했다.

그러곤 말했다.

“우리 게임 할까요?”

“그래, 한마디만 더 해 봐라.”

송 선배가 눈을 부릅뜬 채 조성을 노려보았다.

조성은 그저 웃을 뿐.

“그럼, 우리 게임 시작한 것으로······.”

퍽!

송 선배가 그대로 조성을 들이받아 버렸다.

조성이 코를 움켜쥔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동시에 보안요원들이 송 선배를 덮쳤다. 송 선배가 보안요원들을 마구 밀어내지만 역부족이었다. 보안요원들은 차마 경찰을 폭행하진 못하고 제압하기만 했다.

송 선배가 악을 써댔다.

“더 지껄여 봐! 네놈 새끼 혀를 자르고, 눈깔을 뽑아 버릴 테니까! 세상이 네 마음대로 돌아가는 거 같지! 지랄하지 마라! 너도 벗겨 놓으면 그냥 사람 새끼야!”

손으로 코를 잡은 조성의 턱으로 핏물이 주르륵 떨어진다. 어이없는 얼굴로 손에 묻은 피를 본다. 본인의 피를 처음 보는 듯. 그가 핏물이 배인 입으로 말했다.

“오늘 일은 신고하지 않을게요. 형사님이 체포되면 게임을 못하잖아요. 자, 형사님은 50일 안에 사고로 죽어요. 정말 그런지 아닌지 내기합시다. 그런데요. 내가 내기에 져 본 적이 없어. 하하하하하하!”

조성이 핏물을 질질 흘리며 웃었다.

피가 가득한 입으로 웃는 모습이 기괴하고 섬뜩하다.

조성이 송 선배에게 윙크한 뒤 차에 올랐다. 이내 보안요원들이 송 선배를 길가로 밀어내면서 차가 빠져나갔다.

“놔! 이 새끼들아!”

보안요원들을 밀치며 욕을 해대는 송 선배.

씩씩대며 주변을 노려보던 송 선배가 멀리 사라지는 차도식의 차를 보았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외쳤다.

“너희처럼 이용만 당하다가 실종된 전담반만 12명이다! 너희는 그 꼴 안 당할 것 같지! 살고 싶으면 자수해라! 이 모지리 같은 새끼들아!”

일성을 토해 낸 송 선배가 발길을 돌렸다.

그런 송 선배를 차 전무의 비서가 보고 있었다.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차도식의 광기. 압도적인 힘. 통하지 않는 상식.

정 형사는 거대한 벽에 마주 선 느낌이다.

결국, 이 거대한 벽을 넘었을 때의 통쾌함.

그 카타르시스는 어마어마하다.

“컷! 오케이!”

송강석 선배가 진이 빠진 모습으로 주저앉았다.

나 역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감정만으로 숨찬 영화는 또 처음인 듯싶다.

* * *

조감독 수혁이가 무전기를 들고 외쳤다.

“연출부! 차량 우회됐어?”

-예! 주유상품권 엄청 들어가네요!

“넉넉하게 드려! 스턴트 팀?”

-1팀, 2팀 모두 스탠바이 했습니다!

“정 형사 시점 카메라 스타트 하세요!”

-알겠습니다!

“슛 갑니다!”

수혁이 신호를 받고 촬영팀, 음향팀이 콜을 했다.

“액션!”

내가 올라선 렉카가 질주했다.

앞에 승합차가 달리고 승용차가 뒤쫓는다.

정 형사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괴한들을 쫓는 장면이다.

4차선 도로에서 카 체이스를 벌이는 씬이다. 승합차가 앞차를 추월하는 것은 보통이고, 위험천만하게 역주행을 벌인다. 마주 오는 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난다. 달려가는 차와 마주 오는 차량 운전자는 전문 스턴트맨들이다. 프리 때 리허설을 수도 없이 했다.

거칠고 사나운 차량 추격전이 2분간 이어졌다. 카메라가 설치된 렉카는 두 차량 뒤를 따르다가도 옆으로 붙어 찍기도 하고, 앞서 나가며 찍기도 했다.

승합차가 신호 바뀜 직전 교차로를 지나가 버린다. 추격하던 정 형사의 차도 굉음을 내며 가로지르던 그때.

갑자기 트럭이 나타나 정 형사의 차 뒤편을 들이받았다.

쿠쾅-

트럭이 그대로 차를 받고 지나가고, 정 형사의 차는 앞뒤가 순식간에 바뀌며 세 차례 회전하다 뒤집어져 굴러간다.

“컷! 연출부!”

굴러가던 정 형사의 차가 멈추자마자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스턴트 운전자의 부상 여부를 확인했다. 뒤집어진 차에서 스턴트맨이 기어 나와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난도 쇼트를 한 방에 끝냈다.

트럭에 박힌 차는 경주용처럼 내부 프레임을 개조한 터라 사람이 다칠 일은 없었다.

승합차 괴한들은 미끼였다. 트럭에 받혀 사고사로 위장하려 했는데, 정 형사가 교차로에서 속력을 높여서 운전석에 직격당하지는 않았다.

메가폰을 들고 외쳤다.

“원래 위치로 다시 가세요! 송 선배님 쇼트입니다!”

“전원, 시작 위치로 이동!”

방금 찍은 것은 마스터 쇼트이자, 송 선배 시점의 쇼트였다. 이어 같은 동선에서 송강석 선배가 운전하고 연기하는 쇼트를 따로 딴다. 괴한들 시점 쇼트와 부감 쇼트도 찍고. 이 쇼트들을 편집해서 붙이면 추격전이 9분으로 늘어난다.

교차로에서 트럭에 받히는 순간은 따로 찍는다. 송 선배가 운전대를 잡은 상태에서 트럭에 받혀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나고, 차가 정신없이 휘돌아 가는 씬이다. 고속촬영으로 찍는다.

송 선배가 다칠까 봐 스턴트용 스테빌라이저를 좌석에 장착했다. 좌석이 차체에서 약간 떠 있게 하여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다. 충돌 시 사람만 움직이면 다치게 되는데, 이 장치는 의자가 움직인다. 사람도 움직이니 이상하게 보이진 않는다.

이 카 체이스 장면을 장장 나흘에 걸쳐 찍었다.

차량 통제에 들어간 상품권만 2천만 원.

고맙게도 최신성 감독 영화라고 하니 양해해 주셨다.

* * *

촬영 86회 차.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등촌동의 한 도로를 봉쇄했다.

촬영일은 일요일이었고, 경찰분들이 지원해 주었다.

정 형사가 차도식의 살인교사 증거를 확보했다. 차도식의 사냥개 노릇을 했던 전담팀 중 하나가 그의 범죄 행위를 폭로한 직후다. 주가조작팀 리더도 증언하기로 했고.

정 형사는 감찰 조사, 경찰 간부의 압박. 팀원들에 대한 테러. 가족 납치 미수 등등. 온갖 압력과 협박을 이겨 내고 여기까지 왔다.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강력팀 전원이 제복을 벗겠다며 동료애를 발휘했고, 경찰서장까지 위에서 내려온 압력을 버티고 정 형사를 도왔다. 이 과정에서 나온 감동이 제법 컸다.

특히 계장과 과장에 이어 서장까지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선 연기를 보는 내가 다 울컥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치인들에게 압박을 당하던 경찰청장까지 성명을 발표한다.

‘경찰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합니다. 경찰은 결코 정치권과 재벌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경찰은 국민의 안전과 국민의 권리와 국민의 주권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우리 경찰은 국민의 뜻에 따라 극악무도한 범죄 용의자 차도식을 체포할 것이며! 대한민국의 법 집행과 정의를 반드시 실현하겠습니다!’

이 성명이 결정적이었다.

경찰청장이 정치권의 압박에 오랜 시간 갈등하다가 자신의 자리를 걸고 결단을 내렸다. 국민이 이 성명을 지지하면서 정치인들은 알아서 차도식과 관계했던 흔적을 지워야 했다.

차도식의 형이자 그룹 후계자는 그룹을 위해서라도 차도식을 도울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룹 후계 경쟁자이기도 했고. 철옹성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번 장면은 김포공항을 통해 중국으로 도주하려는 차도식을 잡는 씬이었다. 놈을 확실히 잡으려고 일부러 도주하도록 두었고, 작전은 은밀히 진행되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위해 리허설을 수차례 했다.

메가폰을 들었다.

“촬영이 막바지입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어 봅시다! 며칠 고생해 주신 보조 출연자 여러분께 감사 말씀을 올리고, 지원 나와 주신 경찰 공무원 여러분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파이팅!”

“화이팅!”

모여 있는 이들이 소리쳤다.

단합과 집중을 위해서 일부러 하는 기합이었다.

수혁이가 외쳤다.

“슛 갑니다! 자! 레디!”

“스피드!”

“스타트!”

“씬 168에 1에 2!”

“액션!”

차들이 오가는 가운데 도로 저편에서 검은 고급승용차 10대가 줄줄이 달려왔다. 뭔가 급한 듯 차량을 추월하며 진행하던 그때.

앞에서 천천히 달리던 승용차들이 일제히 도로를 막듯 지그재그로 멈춰 섰다. 그 바람에 끼이익- 소리를 내며 멈추는 고급 승용차들. 뒤로 빠지려고 하지만 뒤편 승용차들도 가로로 정차하며 퇴로를 막았다.

그때 승합차가 튀어나오더니 검은 승용차들 바로 앞에 멈췄다. 그 승합차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정 형사가 뛰어내렸다. 그 뒤로 정 형사의 팀원들이 줄줄이 내리고.

도로 양옆으로는 경찰특공대와 경찰들이 무수히 진입하기 시작했다. 앞뒤로 갇힌 고급승용차에선 검은 양복 사내들이 허겁지겁 내린다.

송 선배가 외쳤다.

“저 시커먼 새끼들 전원 체포한다!”

“예!”

경찰들이 일제히 달렸다.

고급승용차에 있던 이들은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거액을 받고 차도식의 탈출을 돕기로 한 전담반이다.

송 선배가 다시 소리 질렀다.

“차도식! 어딨냐! 얼굴 좀 보자!”

막내 형사 역의 미주가 소리쳤다.

“팀장님! 저기 뒤에서 두 번째 차! 모자 쓴 남자!”

“잡아!”

정 형사와 형사들이 달렸다.

그와 함께 경찰들과 차도식 전담반이 도로 가운데에서 맞붙었다. 조폭 싸움질이나 마찬가지 광경.

위에서 찍던 지미집이 빠지고 스테디 캠이 들어왔다.

정 형사팀과 스테디 캠이 곧장 달렸다.

“컷! 오케이!”

* * *

이틀째 추적 씬이었다.

차도식이 화곡동 주택가에 숨으면서 끈질긴 도주와 추격이 벌어졌다. 두 번이나 잡을 뻔했으나 그때마다 놈의 전담반이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경찰을 칼로 찌를 정도로 무시무시한 저항이었다.

게다가 조폭들까지 난입하어 화곡동 일대가 전쟁터로 변했다. 곳곳에서 경찰들과 조폭들의 싸움이 벌어졌다. 총성이 수시로 들려오고, 응급차도 쉴 새 없이 오갔다.

상황이 크게 번지자 경찰서장까지 나왔다.

“공권력 우습게 아는 새끼들! 모조리 잡아들여! 저 용역 새끼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차도식이 사무실 압수수색은 어떻게 됐어?”

“그룹 직원과 경비원들이 문을 막고 있습니다! 빨리 진입하지 않으면 증거 자료가 폐기될 겁니다!”

“이 노무 새끼들이 발악을 하는구만! 특공대 투입해! 우리 직원들 공무 방해하는 놈들도 모조리 체포해!”

“알겠습니다!”

고함을 지르곤 씩씩대는 경찰서장.

“오케이! 아주 좋아요!”

수혁이가 외쳤다.

“조성 씨와 송강석 선배님 리허설 끝났습니다!”

“A팀으로 이동!”

이틀 내내 정신없었다.

넓은 지역에서 동시 다발로 세팅과 촬영이 이어지고 있었다. 촬영팀을 세 팀으로 나누어 여기서 촬영 끝나면 다른 곳에 달려가서 찍고, 다른 팀 세팅이 끝나면 또 이동해서 찍고.

주택가에서 촬영은 가능한 한 빨리 찍어야 했다. 주민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날짜가 더 길어지면 주민단체가 거액을 요구할 수도 있으니.

화곡동 주택가와 우장산 공원 경계 부근에서 리허설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택가에서 도망 나온 차도식을 정 형사 혼자 따라잡아 쫓는 씬이다.

내가 도착하자 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액션!”

주택가에서 튀어나오는 차도식.

겁을 먹은 표정이 아닌 신이 난 얼굴이다. 마치 술래잡기 놀이를 하듯. 내가 디렉팅한 부분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표정이 섬뜩했다. 어린애 같은 악마 그 자체다.

조성이 숲으로 진입하자 저편에서 송 선배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카메라 앞까지 달려와서 무릎에 양손을 짚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담배 끊었는데 왜 이렇게 숨 차. 헉, 헉, 어제 끊어서 그런가. 근데 저 새끼는 왜 저렇게 잘 뛰어.”

송 선배가 폰을 꺼내 든다.

“차도식이 찾았다. 헉, 헉, 우장산 공원.”

전화를 끊은 뒤 다시 달리는 송 선배.

스테디 캠이 뒤따라 달린다.

“컷! 오케이!”

그리고 얼마 뒤.

우장산 숲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조성은 다년간 연마한 격투술로 손쉽게 송 선배를 제압한다. 그러나 송 선배는 악착같이 물고 늘어진다.

게임을 하는 자와 목숨을 건 자는 투지가 다른 법.

처음엔 정 형사가 몇 대 맞고 나가떨어졌지만 차도식도 지친 상태라 점점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정 형사는 코피가 터지고 눈이 붓도록 맞았다. 그러다 기어코 차도식을 자빠뜨리더니 놈의 몸에 올라탔다.

송 선배가 그대로 주먹질을 했다.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내가 왜 맞은 줄 알아! 차도식이 패 죽이려고 맞은 거다, 이 새꺄! 이게 정당방위거든! 이건 너 때문에 죽은 사람 목숨 값! 이건 너한테 당한 사람들 복수! 이건 너 쫓아다니느라고 고생한 내 선물이다, 이 악마 새끼야!”

퍽-

마지막 주먹질에 차도식이 축 늘어졌다.

이 장면을 9개 쇼트로 계속 찍었다.

조성의 얼굴이 점점 망가져 가는 분장을 하면서.

“컷!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두 배우는 곧장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5시간 이어진 격투 씬이 마침내 끝났다.

이 장면 이후 정 형사는 차도식의 목걸이 펜던트를 분석하다가 그 안에 USB 메모리가 있는 걸 발견한다.

그 메모리가 잭팟이었다. 차도식이 숨겨 놓은 비자금 내역이 그 메모리에 있었다. 정 형사는 함께 고생한 피해 투자자와 함께 그중 하나를 슬쩍 먹기로 한다.

모두 은행 계좌였는데 딱 하나 비밀금고가 있었다. 게다가 비밀번호까지. 그 금고 위치를 추적해서 찾아냈는데 하필이면 영화 초반에 나왔던 사기 도박단의 근거지였다. 또 한바탕 난리 법석을 떨다가 제법 거액을 빼돌린 뒤 영화가 마무리된다.

송 선배와 조성 씨가 내게 왔다.

두 사람과 차례로 포옹했다.

“고생했다, 최 감독.”

“선배님이 고생하셨죠.”

“술이나 한 잔 먹자. 조성이 역할이 역할이라 그동안 술도 한잔 못했어.”

“조성 씨, 힘든 배역 하느라 고생했어요.”

“역할에 몰입하느라 힘들었네요. 그래도 재밌었어요.”

“네, 가시죠.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좋지.”

그렇게 셋이서 가볍게 마시기로 했는데.

송 선배의 마력 같은 대화에 빠져서 또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 송강석 선배님과 술자리는 언제든 즐거웠다. 필름 좀 끊기면 어때.

* * *

최 감독이 영화를 찍느라 바쁜 동안.

서연은 늘 같은 일상을 보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이후 한 달째 제대로 된 데이트를 못했다. 촬영에 지친 신성이 몇 시간 더 쉴 수 있도록 일부러 데이트를 잡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바쁜지 아는 그녀다. 그런 사람을 이해하고 있으며 이제는 익숙했다. 그럼에도 외로움을 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서연은 오전 7시에 피트니스 클럽에 가서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 식단으로 아침을 먹었다. 아침 9시에 청년지원재단에 출근해서 임원들과 지원 사업 회의를 했다.

보름에 한 번 여러 나라에 있는 자원봉사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고, 직접 관리하는 아프리카와 동남아 빈국의 아이들에게 후원금도 보냈다. 후원 아이들이 200명이 넘었다.

재단 이사장인 최신성 감독이 바쁜 관계로 서연이 이사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상업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시간이 좀 있었다.

그러한 일상이 석 달이나 이어지자 외로움이 더욱 깊어졌다. 이 역시 익숙했다. 신성이 미국에 있을 때나, 한국에서 영화 촬영에 집중할 때면 늘 찾아오는 외로움이었다.

영화 샌드위치 때 서연이 보여 준 뛰어난 연기는 본인이 그런 감정과 외로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채우지 못하는 외로움.

이날도 서연은 업무를 마치고 혼자 집으로 갔다.

늘 그랬던 것처럼 혼자 집에서 영화보고 책을 읽고 할 참이었다. 빨래하고, 밥해 먹고. 청소도 하고.

서연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물끄러미 올라가는 층수를 보는 그녀.

22층에 도착하면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로 나갔다.

또각또각.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문 앞에 섰다.

현관문 번호키를 눌렀다.

띡띡띡띡. 띠리릭-

서연은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멈췄다.

집 안에서 장미향이 흘러나와 그녀의 코를 스쳤다.

바닥에는 웬 꽃잎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순간 서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꽃잎을 밟으며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 바닥에 장미 꽃잎으로 만든 하트가 보였다.

유리잔 촛불도 수없이 밝혀져 있고.

서연은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거실과 방을 둘러보았다. ‘무단침입자’는 없었다. 테이블에는 와인과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편지와 함께.

서연은 소파에 앉아 노트를 먼저 집어 들었다.

꽤 오래된 노트였다. 손때가 묻은.

그녀는 조심스레 첫 장을 넘겨보았다.

「2017년 3월 6일. 촬영장에서.

훗날 이 일기가 내게 어떤 기록이 될지는 모르겠다.

무엇이 되었든 내 운명의 여인에 대한 기록이 되겠지.

오늘은 서연이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떨쳐낸 듯 연기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응원한다, 서연아.」

서연이 다음 장을 보았다.

「2017년 3월 12일. 세트장에서.

서연이는 날 좋아하긴 하는 걸까. 어제만 해도 내게 따뜻한 눈길로 보던 그녀인데, 오늘은 날 바라보지도 않네. 이제 지친 걸까. 아니면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 걸까.

서연이는 내 운명의 여자인 줄 알았는데.

그냥 내 착각이었던 건가.」

서연은 다음 장, 그다음 장도 읽어 보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져 갔다.

그리고 가운데쯤을 펼쳐 보았다.

「2021년 12월 23일. 미국에서.

서연이 보고 싶다. 내일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나도 서연이도 혼자 있는 거네.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외롭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곧 달려갈게.

서연아,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서연은 가슴이 복받치는 바람에 일기를 덮었다.

신성과 감정의 밀당을 하던 시기부터 바로 며칠 전까지.

약 7년에 걸친 연애 일기였다.

각기 다른 펜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 썼던.

신성 자신의 기록이었던 것이, 3년 전부터는 서연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조금씩 바뀌어 갔다. 어떻게 연애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떤 결혼을 꿈꾸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 건지.

서연은 울 듯한 얼굴로 편지를 펼쳐 보았다.

짧은 글귀가 있었다.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지? 이런저런 연구도 하고 남들은 어떻게 했나 찾아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영 어색하고 서툴고 그러네. 나 이런 거 처음이니 이해해 줘. 약속할게. 앞으로 서연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 진짜야. 그런데 서연아…>

마지막 문장을 본 서연이 피식 웃었다.

그때였다.

띵동.

서연은 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심조심 현관으로 가서 섰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후.

문을 열었다.

턱시도를 입은 신성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미소였다.

신성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작은 반지가 있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신성을 보며 미소 짓는 서연의 뺨으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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