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시리즈의 첫 개봉
CG팀은 실사 편집본에 그린스크린으로 찍은 촬영본을 더하여 CG 작업을 한다. 그런 뒤 늘어난 분량을 합쳐 팀장이 가편집한다. 편집 가이드는 완성된 영화의 최종 콘티이고.
이번 영화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찍었다.
하나는 재난의 참혹함을 보여 주기 위한 주인공 시점.
가만히 주시하는 느낌의 롱 테이크다.
다른 하나는 재난 전체를 보여 주는 마스터 쇼트와 액션의 긴박감을 위한 짧은 쇼트.
액션 씬에선 싸움의 생동감을 주려고 주인공을 뒤에서 찍는 앵글도 자주 썼다. 영화에 집중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주로 찍어 놓고 편집을 위한 보충 씬도 찍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에 편집한 게 아닌 다른 편집이 나왔다.
CG팀이 작업을 마무리한 10분 분량을 누가 재편집했다는 말이다. 감독 뜻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편집한 사람이 누구냐고?”
수호가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 오리지널 편집본은 따로 있고, 그건 임의로 편집한 겁니다. 제가 보기엔 더 나아서 먼저 보여 드렸던 겁니다.”
“그래서 누가 한 건데?”
“CG팀 막내요.”
“불러와.”
난 또 수호 녀석이 한 줄 알았네.
하기야 수호가 영화에 대해 뭘 알겠나.
그러니까, CG팀 막내가 오리지널을 자기 멋대로 재편집했다는 거네. 원본이 있으니 다행이긴 하다만.
얼마 뒤 귀엽게 생긴 여자가 들어왔다.
겁을 먹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회사 전속 CG팀 막내 중 하나다.
“이름이… 은영이라고 했지?”
“네? 네…….”
내가 자기 이름을 모를 줄 알았나 보다.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그나저나.
액션 편집 감각이 남자인 것 같았는데 여자였네.
나이가 24살이었던가.
“무슨 생각으로 재편집을 한 거야?”
“그냥요. 콘티보다 나을 것 같아서요.”
“감독 무시하는구나?”
은영이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전 그냥 재미로 한 건데.”
“원본과 뒤바뀌면 사고 나는 거 몰라?”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저만 연습해 보다가 지우려고 했어요. 근데 수호 오빠한테 들키는 바람에.”
수호가 변호하듯 나섰다.
“뒤에서 보고 있으니까, 훨씬 더 좋아서 말입니다.”
“흠…….”
콘티는 촬영과 영상의 설계도다.
설계도대로 찍는 것이 편집의 재료다. 그 재료를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영화가 달라진다. 재료가 같아도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른 요리와 같다.
CG팀 막내 은영이는 같은 재료로 다른 요리를 만든 거였다. 그것도 이미 편집된 분량을 가지고.
“편집된 걸 보니까, 어째 2% 아쉬웠어?”
“그런 건 아니고요. 작업 때 미스 난 부분 찾으려고 계속 봤는데 이 쇼트가 앞에 오면 어떨까. 이 씬 중간에 이 쇼트가 들어가는 게 낫지 않나? 그래서 재미삼아 해 본 거예요.”
“액셀이 전사들에게 포위당해 싸우다 시점 변환하는 거?”
“네. 마스터 쇼트가 길어서 중간에 호흡 한 번 자르고 액셀의 시점에서 잠시 보여 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편집 때 나는 인식조차 안 했던 부분이다.
어쩐지 그 장면 편집할 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현란한 액션 장면인데 왜 밋밋하지? 했던.
액션 전체의 화려함을 보여 주려고 찍었던 장면이다. 그 부분을 부각하려고 다르게 편집할 생각을 안 했다. 찍은 의도를 중심으로 생각하니 발상의 전환이 없었던 거지.
은영이야 촬영 의도를 모르니 발상이 자유로웠던 거고. 편집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편집의 클리셰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영상이 한결 부드럽고 몰입감도 높아졌다. 단지 시점 변환만 있었을 뿐인데도.
오랜만에 코어로 사람을 분석해 봤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일이니.
내가 느낀 그대로였다.
은영이는 편집에 재능이 있는 것은 물론, CG에도 잠재력이 제법 있다. 이건 미학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말이다. 대중적 균형감도 좋아서 디자인을 해도 성공할 친구다.
“너 CG 계속 배울 거야?”
“모르겠어요. 매일 같은 일만 반복해서 힘들어요. 학원에서 선생님들이 영화판의 노가다라고 하더니. 정말 그래요.”
CG는 팀 작업이라 개인의 능력이 주목받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은영이는 CG보다는 편집에 맞을 것 같다.
내 영화 전속 편집 어시스트.
“너 정식으로 편집해 볼래?”
“제가요?”
“당장 따로 배울 건 없어. 작업 분량이 나오면 네가 나름대로 재편집해 봐. 콘티는 상관없이 순전히 네 감각으로.”
“저, 편집 모르는데도요?”
“씬 연결에 어색한 건 있어. 그건 앞으로 배우면 되는 거고. 너만의 편집 방식을 연습하는 셈 치고 해 봐. 한 5년 편집 보조 노릇을 하면 회사 전속 편집실장이 될 수도 있어.”
“CG도 하고 싶긴 한데.”
“병행해.”
“아, 알았어요!”
금세 은영이 얼굴이 밝아진다.
그래도 배운 게 CG라 버리긴 아까운 듯.
은영이가 넙죽 인사를 하고 나갔다.
“수호야.”
“네. 대표님.”
“은영이 덕분에 영화 조금 달라질 거 같다.”
“그러면 저도 보람이 있지 말입니다.”
조금이 아니다.
아주 많이 달라질 것 같다.
관객의 기호에 들어맞는 영상으로 나올 것 같으니.
* * *
내 생각은 적중했다.
은영이에게 작업이 끝난 분량의 재편집을 맡겼는데, 기발하고 신선한 편집본으로 변화했다.
길게 갈 곳은 길게 가고, 호흡을 끊어야 할 곳도 정확하게 찾아냈다. 내가 재편집을 한다면 바꿀 부분을 은영이가 감각적으로 알고 편집을 했다.
어쨌거나 편집이 달라지니 영화가 훨씬 더 좋아졌다. 안 그래도 중후반의 카타르시스와 전투 씬의 몰입감이 상당히 큰 편인데, 재편집을 달리 하니 더욱더 살아났다.
그렇게 후반작업이 종료되어 최종본이 나왔다.
그 최종본을 가지고 은영이와 함께 처음부터 다시 재편집했다. 앞부분은 은영이가 편집하지 않은 부분이라.
“과학자가 액셀한테 아크람을 알려 주는 부분 있잖아요. 대사가 좀 나오는데 긴장감이 좀 약한 것 같아요.”
“외계인에게 들킬 것 같은 긴장감 말이지?”
“네. 앞에 외계인이 지나가는 쇼트 있죠? 그걸 대화 중간에 넣는 건 어떨까요? 과학자 바로 뒤를 지나가는 것처럼.”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그냥 과학자 아저씨 뒤를 지나가니까요.”
“연결이 어떨지 한번 해 보자.”
은영이 조언대로 장면을 잘라서 외계인이 다가오는 장면과 멀어지는 장면으로 나누었다. 그 두 쇼트를 대화와 대화 사이에 끼워 보았다. 외계인이 방금 지나간 느낌이다. 마침 과학자가 조심스럽게 외계인 쪽을 보는 방향이기도 하고.
일단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다시 보니 확실히 긴장감이 생긴다.
이 외에도 편집본을 보다가 은영이가 짚어 내는 장면을 다르게 편집해 보았다. 은영이가 연출과 영화 기법을 모르다 보니 늘 맞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선한 점이 많았다.
달리 해 보고 더 나으면 편집했다.
보름 후.
최종 편집본이 완성되었다.
조금씩 바꾼 것이 쌓이니 전체의 디테일이 확연히 달라졌다. 기존 편집대로 간 것보다 재미는 확실히 있었다.
그 최종본을 그래픽 팀에 맡겨 타이틀 및 크레디트 작업을 하고, 미리 만들어 둔 네오스타 로고를 붙였다. 그런 뒤 영상 보정을 시작했다.
다시 보름 후 영상 보정이 된 최종본을 사운드 팀에 전했다. 사운드 팀에서 넘어온 걸 음악감독에게 맡겨 사운드트랙 작업을 했다. 모두 새로 작곡한 배경 음악과 삽입곡이다.
그리하여 모든 작업이 끝났다.
사내 시사실에 혼자 앉아 막 탄생한 영화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 한 점의 빛이 생겨났다.
네오스타 스튜디오의 로고다.
어둠 저편에 생긴 빛이 지평선을 밝히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웅장한 영웅 서사시 같은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지평선의 어둠을 밝히며 점점 다가오는 빛.
그 빛이 눈앞까지 다가와 폭발한다. 흩어졌던 빛이 저마다 별이 되어 어둠 속이 박혔다가 두 개의 빛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여러 별들은 영웅을 의미한다.
헤쳐 모인 두 빛 무리가 하나는 별의 형태로 변하고, 하나는 그 아래로 모여들며 글자가 된다. 그리고 파란 불꽃을 내며 빛나다가 별은 황금빛으로 글자는 흰색으로 변해 간다.
동시에 고조되던 음악은 짠- 하고 끝나고.
캬!
이 글자를 보는데 어찌나 감격스러운지.
영화의 얼굴이 로고인지라 이 로고와 음악을 만드느라 꽤 신경을 썼다. 특히 황금색 별은 촌스러운 노란색이 아니라 정말 금빛이었다. 빛바랜 듯 고귀한 금빛으로.
음악 또한 아주 좋다. 유명 영화음악 작곡가 만든 곡으로 긴박감을 주는 장엄함이 특징이다. 곡이 정말 좋아서 음악 감독까지 맡긴 터다.
이어 세상 편한 자세로 영화를 봤는데.
정말 재밌다.
대개는 객관성을 잃어서 긴가민가 싶을 때가 많은데, 이번 영화는 달랐다. 긴가민가 싶은 게 없다.
스토리는 단순 명쾌하고 중후반까지 고난은 내가 봐도 힘들다. 또한 액셀이 강해지길 바라는 열망과 희망을 품게 한다. 그리고 납치되었을 때의 위기. 그 위기가 기회로 바뀌면서 영웅이 되어 옥상에 쿵- 하고 떨어졌을 때.
정말 압권이었다. 심리적으로.
시리즈라 1편이 잘되어야 하는데, 흥행성만큼은 자신 있었다. 액셀이 고생하는 중반까지의 ‘재미없음’은 다 잊어버리고 중후반 40여 부분은 정말 미친 듯이 달린다.
그냥 치고받는 것에 무슨 감흥이 있겠나.
어벤져스처럼 화려한 액션으로 사로잡는 것도 아니다.
액셀이 겪은 고생. 울분. 복수심. 그리고 희망.
관객과 함께한 그 모든 것들이 담긴 액션이다.
쌓였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전율이 일어난다.
내가 만든 영화를 보고 박수를 쳐 댔으니.
며칠 후 사내 시사가 열렸다.
50명 정원의 시사실에 100명가량이 모였다.
반은 의자에 앉고 반은 바닥에 앉았다.
영화 관람하듯 팝콘과 콜라를 들고 온 직원도 있고.
애플 CEO처럼 스크린 앞에 마이크를 들고 섰다.
객석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이들을 보니 흐뭇했다.
“두 달 놀고 오셔서 그런지 새카맣게 탄 분들이 많군요. 살이 좀 찌신 분들도 계시고요.”
“감독님은 눈만 그을렸는데요?”
“닌자 거북이 같아요!”
“하하하하!”
기분 좋은 웃음이 터졌다.
아프리카의 뙤약볕 때문에 눈만 빼고 다 싸매고 다녔더니 정말 눈 주변만 탔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음에도.
“지금부터 네오스타 창립 작품을 관람하겠습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관람하세요. 소리를 질러도 되고, 아이들처럼 박수를 쳐도 됩니다. 짜증 나면 욕해도 돼요. 아마도… 다들 그렇게 될 겁니다. 단, 영화 내용에 대한 보안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난 맨 뒤로 가서 이동욱 대표 옆에 앉았다.
팀장들도 모두 맨 뒷자리에 있었다.
곧 시사실에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강렬한 음악과 함께 우리 회사 로고가 떴다.
“우와아!”
영화 시작도 안 했는데 로고만 보고 난리가 났다.
무슨 전설적인 게임의 최신작 쇼케이스 같다.
박수 치고, 휘파람 불고, 발 구르고.
시끌벅적하던 시사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하교한 뒤 집으로 가는 액셀의 동선이 시작이다.
집에 와서 아버지를 만나 보라는 어머니 쪽지를 보고 LA 다운타운으로 향한다.
괴수가 출연하면서부터 직원들 모두가 집중했다.
잡담하는 직원이 한 명도 없었다.
괴수 재난 상황이 워낙 무지막지해서.
30분쯤 지나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왔다. 인간의 이기심이 나오거나, 액셀이 고난을 겪는 장면 등에서다. 여자 직원들은 기도하듯 두 손을 부여잡고 있고.
힘든 상황이 이어져서 스트레스를 받는 직원도 좀 있었다. 한숨 소리가 제법 나오고 있었으니. 그럼에도 간절한 눈빛으로 스크린을 주시했다.
딱히 내 눈치를 봐서가 아니라 시사실을 나가는 직원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조짐이 들어서다. 영화의 터닝포인트 지점인데, 일반 관객도 그 지점을 대충 안다.
그러다 과학자의 말이 나왔을 때.
와우.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액셀이 폭주하듯 내달리는 신에선 다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영화를 보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러다 액셀이 아크람의 힘을 흡수하고 다 때려 부수기 시작할 때 환호가 터지더니, 우주선을 탈출하여 옥상에 쿵- 떨어졌다.
“예에~!”
모든 직원이 탄성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손뼉 치고 비명 지르고 얼싸안고.
“가라! 액셀!”
“다 부숴 버려!”
“액셀! 액셀! 액셀! 액셀!”
직원들이 액셀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이 대표도 시위하듯 액셀을 외치고 있고.
이후 다시 잠잠해졌는데 액셀이 전투에 참가하면서 저마다 눈을 빛내며 영화를 보았다. 그러다 혼자 개조전사 만 명과 싸울 때는 이구동성으로 또 ‘예에!’ 하고 환호했다.
야구에서 적시타를 친 것처럼.
전투가 치열해지고 액셀이 점점 더 강해지니 직원들도 덩달아 흥분했다. 액션이 차츰 더 강렬해져 가면서 다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영화에 몰입했다.
극한의 액션이 뭔지를 보여 준다.
원초적인 전투라서 그랬을까.
쌓인 감정이 폭발하는 액션이라서 그런가.
액션에 대한 직원들의 몰입이 대단했다.
그러다 마침내 60미터를 단숨에 도약하며 괴수 머리를 날려 버렸을 때. 직원들이 또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러댔다.
자유롭게 관람하라는 말에 ‘오바’하는 것은 아닐 터다. 직원들이 진심으로 영화를 즐기고 있었으니. 본인들이 만든 회사 작품이기도 하고.
내 영화라서 인식을 못 하고 있었는데.
이번 작품 ‘블루드 워 ; 영웅의 탄생’은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을 건드리고, 그걸 제대로 터뜨리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 전 직원이 기립하며 뒤를 돌았다.
그러곤 영화 볼 때와 전혀 다른 정중한 모습으로 기립박수를 보냈다. 감동이 크지 않음에도 눈물이 맺힌 직원들도 제법 보이고. 아마 고생한 보람이 있었던 거겠지.
“여러분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더욱 힘찬 박수를 보내 주었다.
이 대표와 악수하고 포옹도 했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것 아닌가 싶겠지.
아무도 그걸 의심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영화를 봤으니까.
* * *
한 달 후 LA에서 대대적인 시사회가 열렸다.
어웨이커 때는 로봇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이번엔 개조 전사 갑주를 착용한 이들이 빔 건을 들고 서 있었다.
주연인 제이슨을 비롯해 배우들이 속속 도착하여 포토 라인에 섰다. 수없이 많은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가 몇 명이나 온 것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배급사인 월트디즈니의 홍보 덕분이다.
사내 시사 이후 월트디즈니에 영화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쪽에서 다급한 반응이 왔다. 월드와이드 마케팅을 할 테니 개봉을 3주 정도 미루자고. 100억에 이르는 마케팅 비용도 디즈니 측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게다가 스크린수도 3,000개에서 4,300개로 늘어났다.
해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홍보를 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각국 매체 기자들을 불러 인터뷰도 했다. 3주 동안 미디어 노출이 워낙 많아서 무명인 ‘액셀’ 제이슨이 하루아침이 할리우드 루키가 되었다. 네오스타 스튜디오도 강제로 메이저 스튜디오가 되는 일도 벌어지고.
기자들과 VIP들이 잔뜩 기대를 하고 시사회 영화를 관람했다. 반응은 사내 시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점잖게 영화를 보다가 몇 장면에선 직원들과 똑같이 환호를 질러댔다.
나중엔 이게 영화관인지 야구장인지.
코미디 영화를 보며 웃어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반응이 기자들도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뉴욕타임즈 기자가 리뷰 끝에 이런 말을 남겼다.
‘영화를 마음껏 즐겨라. 소리를 지르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왜냐고? 옆 사람도 소리를 지르고 있거든.’
그 때문에 개봉하기도 전에 호기심이 상당히 커졌다.
디즈니의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영화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도 높아졌다.
그리고 1주일 뒤 영화가 개봉했다.
개봉 당일.
CNN의 마이클 플린 기자가 말했다.
‘영화가 미쳤다.’
* * *
정말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것이었나.
개봉 첫날부터 어마어마한 관객이 몰렸다.
영화가 미친 것이 아니라 관객이 미쳤다.
극장 안이 미쳐 돌아갔다.
뉴욕타임즈 리뷰가 분위기 조성이라도 한 건지.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관객이 하나같이 같은 장면에서 ‘예에!’하며 환호했다. 한 영화에 한해서 독특한 관람문화가 발생한 거였다.
그 때문에 내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도 생기고, 극찬에 가까운 리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고. 관람문화를 즐기려고 재관람하겠다는 사람도 늘어나고.
기존 할리우드 영화는 적당하게 감정선을 건드리고 화끈하게 싸우고 끝난다. 그런데 블루드 워 1편은 주인공과 관객을 동시에 시궁창에 밀어 넣다가 최대 위기를 넘자마자 날개를 달아 버린다. 거기에서 오는 쾌감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미국 관객이 기존에 없던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깊은 골과 높은 산의 간격은 카타르시스의 크기다.
블루드 워는 그 격차가 상당히 컸다.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격차다.
반응은 개봉 첫날 매체 리뷰와 관객 SNS에서 터졌다.
영화내용이 어떻다는 말은 거의 없었다.
시원시원했다. 통쾌했다. 짜릿했다.
이 단어들로 축약되는 말들이 SNS에서 범람했다.
리뷰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의 내용은 상관없고 엔터테인먼트로서 영화가 어떻게 기능했는지만 전해주고 있었다. 영화의 작품성을 언급하는 매체도 없었다. 즐겁게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화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최신성 감독.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새 지평을 열다.’
‘어웨이커에서 더욱 진보한 블루드 워!’
‘인간의 감정을 통찰하는 감독의 엔터테인먼트.’
‘이것이 베니스 은상 수상자의 블록버스터!’
여러 언론이 내 전작 ‘샌드위치’를 언급했다. 그 영화처럼 인간의 본성과 감정을 통찰하는 감독이 블록버스터를 만들었을 때 어떤 영화가 나오는지 보라는 식으로.
베니스 수상 덕분인지 신랄한 비판을 안 한다.
내가 상업영화를 만들었으며, 상업영화로써 철저히 그 역할에 충실했음을 알아준 것이다. 환경이 어떻게 인간을 이기적이고 추악하게 만드는지. 재난 상황 속에서 그 점을 자연스럽게 녹여서 그런 것도 있을 테고.
이동욱 대표 말대로 기존에 없는 전개 방식이긴 하다.
평범한 시민이 주인공이면 끝까지 평범한 시민이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히어로이거나, 스파이더맨처럼 도입부에서 영웅으로 변모하거나. 영웅이 되는 과정에도 별다른 감정이 일어나진 않는다.
그러나 블루드 워의 액셀은 죽도록 고생하다가 마침내 날아오른다. 거기서 오는 쾌감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관객이 바라는 부분을, 관객이 바라는 시점에서 영웅이 되었던 거지. 타이밍이야 작가라면 다 아는 거고.
다음 날 토요일.
늦게 회사에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아 빈둥거렸다.
개봉 첫날 성적이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수호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대표님! ABC 뉴스에 우리 영화 소식이 나와요!”
“정말이야?”
“TV 틀어 보세요, 7번요!”
텔레비전을 틀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뉴스 중 하나인 월드 뉴스 투나잇이었다. 리포터가 뉴욕 맨해튼의 한 극장 앞에서 리포팅을 했는데, 한 영화의 색다른 관람 방법이 흥미롭다는 내용이었다. 문화 코너에서 잠깐 언급하곤 다른 뉴스로 넘어갔다.
영화의 내용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관객이 즐거워하는 영상을 슬쩍 보여 주어서 재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긴 했다. 방송 뉴스가, 그것도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메인 뉴스가 한 영화를 밀어주면 안 되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영화가 개봉하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도 아니고.
개봉 다음 날이다.
언제 관람 문화가 퍼졌다고 벌써 뉴스가.
수호가 말했다.
“ABC가 하루 만에 어떻게 알았을까요? 리포터가 어제 영화를 보고 신기해서 취재한 걸까요?”
“글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작동…
생각 도중에 깨달았다.
ABC 방송사는 월트디즈니의 자회사다.
디즈니가 우리 영화를 로비해 준 거였다.
자사 제작 영화가 아닌데도.
이러다 우리 회사도 인수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확실히 미국 회사는 ‘돈’이 보인다면 자존심이든 경쟁 관계든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디즈니 입장에선 푼돈에 불과한데도.
아무튼 전국 방송에 우리 영화가 소개되는 바람에 관객이 한층 더 늘 것 같다. 영화를 자주 안 보던 사람들을 극장으로 유도할 듯하니까.
한 시간 후.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성적이 떴다.
박스오피스 모조라는 사이트다.
1위가 블루드 워다.
그런데 극장 수입 총액이.
$ 81,735,900
입이 쩍 벌어졌다.
첫 주 예상 수치인가 싶어 다시 봤더니 아니었다.
어벤져스 1편의 첫날 성적을 넘어서다니.
일단 이건 디즈니의 홍보 덕분이라고 봐야겠고.
첫 주 오프닝 예상 성적은….
보려다 말았다.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이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독님! 흥행 성적 올라왔는데 확인하셨어요?
“예. 지금 보고 있습니다.”
-첫 주말 3일간 예상 성적은요?
“그건 안 봤어요. 실제 성적이 중요해서요.”
-그럼 저번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극장에 와 있는데 오늘은 더 난립니다! 우리 영화만 전부 매진입니다. 심야 표까지 없을 정도예요! 이대로 가면 다음 주에 스크린이 더 늘어날 수도 있어요!
“디즈니 측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 건 아니겠죠?”
-감독님 없으면 네오스타를 인수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한국에서 로큐를 인수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디즈니는 그냥 수익이 목적일 뿐이에요.
“수익뿐일까요?”
-그럼요. 디즈니가 왜 마케팅에 100억이나 투자했겠습니까. 그쪽에선 우리 영화 배급 및 부분 투자로 최종 1억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100억 투자해서 1,000억을 버는 거군요.”
-그렇죠!
“그래요. 일주일만 기다려 보죠. 정말 그런지요.”
-네.
잔뜩 흥분한 이 대표를 진정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개봉 첫날의 극장 수익만 8천만 달러.
우리 영화 제작비는 1억 달러.
제작비를 개봉 하루 만에 거진 건졌다.
제작비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주인공 출연료가 거의 안 들어갔다. 게다가 스타급 계약에 들어가는 개봉 첫 주 성적 러닝 개런티도 없다.
어웨이커 수익 때를 떠올렸다.
북미 및 전 세계 흥행 수익이 약 8억 달러.
이번엔 극장과 배급사 수익 등을 빼면 우리 수익이다.
더구나 우리가 90%를 투자했고.
부가판권 수입까지 합친다면…….
어쩌면 이 영화가.
내 영화를 통틀어 최고의 수익이 될 것 같다.
대충 성적이 어떨지 감이 왔다.
그래서 애써 떨쳐냈다.
최종 성적을 예상하고 있으면 기쁨이 좀 희석된다.
모르고 있다가 듣는 게 낫다.
예상 수치는 예상 수치일 뿐이다.
더 안 나올 수도 있고, 더 나올 수도 있는 거고.
* * *
차분하게 일주일을 보냈다.
첫 주말 3일 성적이 화요일에 올라왔는데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말라고 했다. 첫날 성적을 확인한 뒤 더는 찾아보지도 않았다. 직원들이 희희낙락하는 걸 보고 대충 알 뿐.
직원들의 대화가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첫 금요일 이후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
블루드 워가 새로운 영화 관람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
그게 신드롬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둘째 주 성적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런데 한국에서도 극장에서 탄성이 터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예에!’ 하면서 좋아했는데, 한국 관객들은 ‘오올!’ 하면서 환호를 보냈다나.
한국에서도 흥행 돌풍이 분다고 한다. 영화 자체의 흥행성에다 한국인 감독이 만들었기에 다른 나라보다 관객이 더 든다. 어쩌면 천만 관객이 들 수도 있다는 말도 들려왔다.
기분이야 좋지만 한국 영화로 천만 관객이 아니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할리우드 영화가 천만이 드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할지라도.
금요일 오후 4시.
LA 공항으로 나갔다.
서연과 연희. 지성이와 지현이. 그리고 건하가 온다고 해서. 지현이와 건하는 이번에 할리우드 영화에 동반 출연한다
공항 게이트로 다섯 명이 나왔다.
함께 혼 수호가 얼른 달려가 연희부터 맞이한다.
난 서연이가 끌고 온 캐리어를 들었고.
지현이와 연희는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지성이 녀석은 심드렁하게 손 인사만 한다. 건하와는 포옹했다.
건하는 오랜만에 보는데 이젠 톱스타다.
과거 ‘비정상인’ 시절 때를 한 연극배우가 폭로해서 회사에서 수습한 적이 있다. 그 사건으로 여성팬의 모성애를 자극하면서 안티팬이 없는 스타로 떠올랐다.
“지현이와 건하는 언제부터 찍어?”
“다음 달부터요. 감독님 촬영할 때 리딩에 참가했고 계약도 했어요. 촬영 시작한 지는 석 달이나 되었는데 우리 분량은 이제 찍네요.”
지현이와 건하가 출연하는 할리우드 영화는 누아르 영화다. 국제 암살단 조직과 민간군사업체인 블랙워터 용병들의 전쟁을 그린다. 각각 거대 무기밀매 조직과 미 정보국과 정치인을 배후에 두고.
지현이와 건하는 각각 홍콩인 킬러와 한국계 용병으로 나온다. 미국에서 촬영한 뒤 한국에서도 찍는다. 한국 촬영은 로큐가 지원하기로 했다.
시나리오는 못 봤지만 줄거리를 들어보니 내용이 흥미진진했다. 나는 좀 약한 부분인 정치와 암투, 심리전이 디테일하게 나온다는 최수혁의 전언이 있었다.
내가 몰고 온 회사 밴에 일행을 태웠다.
다들 피곤해 보였다.
특히 지성이는 밤을 새우고 왔는지 눈에 퀭했다.
“지성이 넌 많이 바쁜가 보다.”
“말도 마. 콘텐츠 본부장이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몰랐어. 대부분 결재 사안인데 내가 혹시 잘못 판단해서 망하면 어쩌나 싶어서 스트레스가 장난 아냐.”
동생 녀석 말보다 더 힘들 터다.
음반 제작. 영화와 드라마 제작. 플래닛 케이의 콘텐츠 제작 등등. 회사에서 동시에 제작하는 게 많다 보니 일일이 파악하고 오케이 하려면 매일 야근일 것 같다.
“구 대표님하고 의논해서 본부를 세분화하도록 해. 음악사업부와 영상사업부로. 플래닛 콘텐츠 부분도.”
“본부장이 3명이나 늘어나는 건 좀 그래.”
“왜?”
“회사에 그만한 경력자가 아직 없어. 외부에서 이사급을 모시는 건 우리 회사 스타일도 아니고.”
“영진이는 지금도 팀장이야?”
“응. 매니지먼트 본부장님이 버티고 계시니까.”
잠시 회사 조직도를 그려 보았다.
위계질서 때문에 이사급이 늘지 않았다.
없는 조직은 만들면 된다.
“매니지먼트 본부를 배우와 가수로 나눠. 영진이는 배우 본부장을 시키고, 기존 본부장님은 매니지먼트 총괄이사로 승진하시면 돼.”
“그럼 나는?”
“콘텐츠 본부도 음악, 영상, 플래닛 콘텐츠로 나누고 네가 총괄 이사를 맡아. 웬만한 건 본부장 선에서 처리하도록 하고, 넌 주요 사안만 맡으면 돼. 투자와 제작 관련해서.”
지성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째 조직 개편에 대해 넌지시 찔러 보려고 미국에 온 것 같다. 녀석도 능구렁이가 다 되어서 말이지.
지성이 말했다.
“수혁이가 제작과 각본 쪽에 관여하고 있는데 정식으로 합류시키지 않을 거야? 형이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직원들 사이에선 수혁이 영향력이 꽤 커.”
“시나리오를 잘 봐서?”
“수혁이가 오케이 하는 작품은 제작된다고 보면 돼. 작품 보는 눈은 형을 제외하곤 회사에서 가장 뛰어나거든. 그러니 당연히 파워가 있지. 희진 씨만 해도 형이 지시하는 업무 처리하는 데도 직원들이 어려워할 정도라고.”
회사 분위기 이상하게 돌아가는 거 아닌가.
“그 친구들이 무슨 비선 노릇이라도 해?”
서연이 대답했다.
“아니야. 수혁 씨도 희진이도 착해. 오빠가 지시하는 일만 하고 있을 뿐이야. 오빠가 결정하는 게 회사에선 다 중요한 거라서 팀장들도 본부장님도 두 사람이 약간 부담이 되는 거지.”
지성이가 덧붙였다.
“본인들이 특별지원팀 평사원이라는 걸 잘 알아. 형의 비서라고 직원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게 아니라, 실력 때문이야. 형이 선택한 사람들답게 작품 보는 안목이 범상치가 않거든.”
운전하는 수호가 말했다.
“우리 팀은 판타스틱4입니다. 우린 정의를 위해서만 움직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곧 옳은 길이지 말입니다.”
녀석의 말에 연희와 지현이가 키득거렸다.
내 앞에서만 군대 말투를 쓰는 게 우스웠던 듯.
연희 있다고 뜬금없이 정의 드립이나 해 대고.
팀은 팀장의 스타일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수호가 지원팀장으로 있는 한.
권혁진과 최수혁, 유희진이 바뀌진 않을 것 같다.
본인들이 어떻게 로큐에 들어왔는지 잘 아니까.
“한인식당에 갈래? 집에 가서 밥 먹을래?”
“무슨 식당에 가. 여기 톱스타가 다섯 명이나 있는데.”
“다섯 명? 서연이. 지현이. 연희. 건하. 네 명인데?”
“댁도 톱스타예요, 이 양반아.”
지성이의 말에 다들 웃었다.
뭐 인지도만 따지면 아니라곤 할 수 없네.
교포들도 이젠 다 알아보는 지경이니.
도중에 마트에 들러 장을 보았다. 마트에 톱스타 4명이 뜨니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여자들과 건하는 사인하고 사진 찍기 바쁘고, 나머지 일반인들은 느긋하게 장을 보았다.
진짜 톱스타가 나타나니 나도 일반인이다.
* * *
내 집에서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어웨이커 때처럼 이번에도 영화 개봉 첫 주 개봉 성적이 나올 때 바베큐 파티를 하게 되었다.
여자들은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남자들은 돌아가며 고기를 구웠다. 건하는 반찬을 만들었는데 지난 몇 년간 요리에 빠졌다고 하더니 뚝딱뚝딱 잘도 만들어 낸다.
나와 서연. 수호와 연희. 지성이와 지현이.
건하만 싱글이다.
내색은 안 하지만 외로움이 얼굴이 보였다.
건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건하는 마음에 둔 사람 없어?”
건하가 묵묵히 고기를 자르다 날 보았다.
“무서워요. 연애하는 게.”
“그래.”
건하는 여자친구를 잃고 폐인이 됐다.
그래서 묻는 게 조심스러웠다.
“여배우 중에 너 좋아하는 사람 많다더라.”
“전 연예인은 관심 없어요. 제가 좀 부족해서.”
정신적인 면에서 부족하다는 말이다.
의지할 수 있는 여자친구가 필요할 텐데, 연예인은 그게 좀 어려울 듯싶다. 여자친구 본인도 바쁘니까.
건하에겐 내면이 강하고 착하며 성실한 사람이 어울린다.
그런 여자를 한 명 알고 있다.
“건하야. 내가 소개하는 사람은 만날 생각 있어?”
건하를 날 물끄러미 보았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 눈동자와 표정만큼은 대학로에서 처음 봤던 건하의 모습 그대로다. 내가 바빠서 챙겨 주진 못했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날 가장 믿고 의지한다.
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소개하시는 분이면 전 좋아요.”
“그래. 그 친구도 널 좋아할 거야.”
“그래요?”
“그래.”
그 말에 서연이와 지현이가 속닥거렸다.
누군지 알아챈 모양이다.
건하가 원할 때 그 친구를 소개할 생각이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건하를 좋아할 테고 건하도 당장 누굴 사귈 것 같진 않으니까. 그녀를 좋아하는 직원들이 많아서 누가 먼저 채 갈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가 지금은 남자에게 관심이 없기는 하다만.
소주와 맥주를 잔뜩 꺼내왔다.
서연도 술이 늘고 건하도 이젠 소주 한 병은 거뜬했다. 나와 수호. 지성이와 지현이는 주당이고.
“먹고 살기 위하여!”
“위하여!”
지성이의 건배 구호는 아직도 유효한 모양이다.
다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고기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어떻게 데이트를 하는지 묻기도 했는데, 다들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성이는 지현이에게 이벤트를 조금 더 하는 편이고, 수호는 묵묵하게 연희를 잘 챙겨주는 것 같다.
지성이와 지현이는 아무래도 내년에는 결혼할 듯했다.
녀석도 나도 그 점에 관해선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와 서연에게 마음의 짐이 생길까 봐.
여배우는 결혼하면 주가가 좀 떨어지긴 한다.
상업영화 캐스팅에선 영향을 주는 편이다.
그런데 서연은 상업영화에는 출연을 잘 안 한다. 드라마 출연을 안 한 건 이미 오래됐고.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다는 무게 때문이 아니라 원래 그런 성향이었다.
미혼의 자유보다는, 안정적인 삶이 더 나아 보인다.
지금은 그렇다.
조만간 서연이와 이야기를 좀 해야 할 듯싶다.
웃음과 수다로 파티의 밤이 무르익었다.
밤 10시가 되었을 때였다.
어웨이커 때처럼 또 이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엔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감독님!
“왜요? 1억 9천만 달러 넘었어요?”
-넘었습니다! 초대박이 났어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요! 지금 확인해 보세요. 하하하!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다.
개봉 첫날 반응은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격이었다.
첫 주말의 반응이 성적으로 이어졌던 모양이다.
극장 수익이 얼마나 됐기에.
이 대표가 말을 이었다.
-지난 금요일보다 오늘 관객이 더 많습니다. 이런 경우는 오로지 영화의 힘이에요. 첫날 성적은 디즈니 홍보 영향이 컸거든요. 어느 영화든 그 정도 마케팅을 하면 관객이 그만큼은 듭니다.
“박스오피스 예상 성적을 넘어섰나 보네요.”
-그럼요. 영화 자체만으로 관객을 끌어당겼던 겁니다. 그런데 그 흡인력이 엄청났어요. 영화도 재미있는데, 영화 관람 방식까지 신이 났던 거죠.
“신드롬이 그 정도랍니까?”
-감독님이 언론에서 본 것 이상의 열풍입니다. 제가 직접 체감하는 느낌은 어벤져스와 동급이에요. 역시 사람이란 화려한 볼거리보다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액셀에 대한 애정이 무척 커요.
“알겠습니다. 바로 확인해 보죠.”
-예. 놀라지나 마세요.
전화를 끊었다.
“수호야, 노트북 좀 가져와.”
“예.”
다들 정원에 마련한 테이블에 앉았다.
서연이 물어왔다.
“이 대표님이 성적 말해줬어?”
“아니. 직접 확인해 보라네.”
“어웨이커 때보다 성적이 나은 가 봐.”
“개봉 첫날보다 오늘 관객이 더 많은 거 같아.”
“그럴 수도 있어?”
“간혹 있어. 어벤져스도 첫날보다 다음 주에 더 들었으니까. 그 힘 덕분에 어벤져스 2편은 첫날부터 대박이었고.”
수호가 노트북을 가져왔다.
노트북으로 열어 박스오피스 사이트를 보았다.
내 어깨너머로 다들 지켜보았다.
현재 박스오피스 오프닝 위크 1위다.
그런데 극장 수입이.
$ 272,394,867
“어?”
“엉?”
일순 눈을 의심했다.
뒤에서 보는 일행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지현이가 말했다.
“2억 7천2백만?”
“2억 달러가 넘었다고?”
“우와!”
연희와 수호가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지성이는 내 등을 두드리고, 서연은 내 손을 잡아왔다.
이 대표 말대로 초대박이다.
어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어웨이커 때는 첫주 성적이 1억 4천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어벤져스 1편 기록을 깼다.
약 2백만 차이로.
총수익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사이트는 현 흐름을 기준으로 극장 수입을 예상했다.
4주차까지 상영했을 때 북미 수입 약 5억.
월드와이드 수익은 약 7억.
모두 합쳐 약 12억 달러.
1억 달러를 들여 만든 영화가 12억 달러를 벌다니.
잠시 회사 수익을 계산해 봤다.
북미 수입부터.
5억 달러 중 2억 5천은 극장 수익이다.
나머지 2억 5천으로 배급사 및 투자사와 나눈다.
두 회사 몫과 세금을 떼면 약 1억 8천.
디즈니가 직배한 해외 극장 수입.
약 7억. 그 중 3억 달러가량이 들어온다.
이 3억에서 우리 몫이 2억 2천가량.
여기에 부가판권 수입이 1억 남짓 될 테고.
총수익 5억 달러.
한화로는 5천6백억
시리즈 두 편에 개별 작품을 만들어도 남는 수익이다.
영화 한 편으로 로큐 자산을 훌쩍 넘어버렸기도 하고.
게다가 이 수익의 80%는 내 돈이나 마찬가지다.
이동욱 대표 말대로.
디즈니는 배급만으로 1억 3천만 달러를 벌었다.
우리 영화가 될 성 싶으니 마케팅을 한 거였다.
지성이가 말했다.
“미국이 다르긴 다르네. 우리가 한 5년을 일해야 나올 수익이 영화 하나로 뽑아버리니.”
“대신 할리우드 영화는 제작하는데 3년 이상 걸리지 않습니까. 대표님이 영화를 2년 만에 찍었지만 말입니다.”
“그렇긴 하네. 돈이 돈을 버는 거지.”
“오빠, 감독님 작품이니까 그렇지, 할리우드 영화라고 다 그런 건 아니잖아.”
“그것도 그러네.”
수호와 지현이가 한마디씩 했다.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로 웃었다.
나도 실감이 안 난다.
이렇게 수익이 나도 되나 겁도 슬쩍 나고.
밤이 늦어져서 다들 기쁜 마음으로 각자 숙소로 향했다.
나와 서연은 가을바람이 솔솔 부는 정원에 의자를 내놓고 앉았다. 손에는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둘이서 와인을 홀짝이며 밤하늘을 보았다.
워낙 조용한 마을이라 풀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서연은 내가 분위기 잡는 이유를 눈치챘다.
물끄러미 날 보는 걸 보면.
“이제 우리도 때가 온 거 같아.”
서연이 날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말은 안 했으나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다.
“연기랑 병행할 수 있지?”
“응. 그런데 연기 열정이 식을까 봐 두려워.”
“애를 늦게 낳으면 되지.”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렇지.”
사실 나도 서연도 그게 약간 걱정이 되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가정에 신경을 쓰다 보면 여배우로서 서연은 점점 잊히게 된다. 베니스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니 배우로서 이룰 건 다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녀와 내가 함께 깐느에 가자는 꿈이 아직 남아 있다.
“아직도 깐느에 가고 싶어?”
“응. 언제가 되었든. 수상은 상관없이 오빠가 찍은 영화로 깐느에 가는 것 자체가 꿈이었거든. 연기에 대한 욕심도 아직은 있어.”
“아이가 생기면?”
“글쎄. 내 욕심보다 가족이 우선이 될 거 같아.”
서연의 손을 잡아 주었다.
포기하지 않도록 내가 도울 생각이었다.
그 꿈은 내 꿈이기도 하니까.
결혼이란 단어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프로포즈를 이렇게 싱겁게 할 수는 없다.
서연도 그저 웃기만 하고.
그녀도 멀지 않았다는 정도는 안다.
사흘 뒤 로큐에서 매니저들이 오면서 지성이와 수호, 연희는 한국으로 갔다. 지현이와 건하는 촬영을 위해 뉴욕으로 갔는데, 나와 서연도 따라갔다.
난 뉴욕은 처음이었다.
* * *
뉴욕 롱아일랜드 브룩클린 공장 지대로 갔다.
밴에서 내려 지현이와 건하와 함께 감독에게 찾아갔다.
감독이 환한 얼굴로 악수부터 청해 왔다.
“반갑습니다. 요즘 영화 잘 되고 있더군요.”
“고맙습니다. 감독님 작품도 잘 될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가 무척 좋다고 들었어요.”
“하하, 고맙소.”
겉치레가 아닌 동업자 의식으로 인사했다.
감독은 두 배우와도 짧게 인사한 뒤 찍을 장면과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매니저가 통역사 역할을 했기에 내가 따로 도울 일은 없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건하를 비롯한 정보요원들이 국제암살단 소속 킬러 두 명을 쫓는 장면이다. 킬러 역할인 지현이와 남자배우가 공장 안에서 포위되었다가 총격을 벌인 후 차를 타고 도망간다. 이후 카 체이스 장면으로 이어진다.
지현이와 건하가 옷을 갈아입고 분장 트레일러로 갔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지현아, 내용 숙지했어?”
“네. 대사는 없고 총격만 있어요.”
“건하는?”
“이번 씬은 저도 대사 없어요. 영화 초반 씬이라 자동차 추격전 이후에 대사가 나올 거예요. 전 가장 뛰어난 요원 역할이에요.”
이 영화의 감독 성향은 미리 파악해 두었다.
연기 디렉팅에 관해.
“캐릭터도 그렇지만 한국 영화와 달리 두 역할은 표정에 감정이 없어야 한다. 지현이도 건하도 따로 인물 연구한 게 있겠지만 눈빛에 너무 힘을 주진 마. 무덤덤해야 킬러처럼 보인다. 불안하게 눈 굴리지 말고.”
“네.”
두 배우가 아는 이야기임에도 새삼 상기시켰다.
어웨이커 때는 내가 연출했기에 할리우드 감독 성향을 잘 모를 터였다. 안 그래도 캐릭터가 잔인하고 감정이 없는 인물인데 디테일을 살리겠다고 감정 연기를 하면 안 된다. 분명 감독이 다른 걸 요구한다.
얼마 뒤 촬영이 시작되었다.
건하는 정말 무표정하게 연기를 한다.
지현이는 암살자답지 않게 얼굴에 미세한 감정이 실린다.
내 영화 찍을 때와 달리 긴장했다.
아니나다를까.
감독이 컷을 외치며 다시 촬영했다.
긴장이 풀리지 않는지 또 컷이 되었다.
내가 외쳤다.
“지현아! 넌 최고의 암살자야! 나한테 걸리면 다 죽는다는 자신감으로 몰입해! 독기를 품지 말고 오히려 비웃어! 속으로 비웃으면 얼굴에 비친다!”
“네!”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지현이가 잠시 몰입을 하더니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
독기와 긴장감이 아닌 비웃음이 담겼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는 감독은 금세 달라진 지현이의 표정에 흡족해했다.
이후 촬영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나와 서연은 공장 씬 촬영까지만 지켜보고 자리를 떴다. 바로 맨해튼으로 가서 한가하게 놀러다녔다.
서연은 세 번 와봤기에 날 위한 코스를 돌았다.
첫날은 맨해튼 남부 투어였다.
911 메모리얼 박물관을 시작으로, 트리니티 교회를 거쳐 브로드웨이를 걸었다. 그다음 월스트리트.
트리니티 교회의 고풍스러운 위엄에 놀랐는데, 월 스트리트도 인상적이었다. 거리 자체가 그냥 영화 세트다. 조명 없이 찍어도 되는 촬영 현장 느낌.
그런데 웃긴 관광객들이 있었다.
관광객들이 뒤로 가운뎃손가락을 내밀며 사진을 찍는다.
왜 그런가 했더니.
뒤쪽 배경 건물이 트럼프 빌딩이었다.
저녁엔 부룩클린 브리지를 걸었다.
뉴욕에 명물이 많지만 이 다리도 그랬다.
개를 끌고 산책 나온 뉴욕커부터 외국인 관광객까지.
수많은 사람이 저녁노을과 바다가 보이는 이 다리를 건넜다. 나도 서연도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걸었다.
다리 중간쯤 갔을 때였다.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바다 저편을 보고 있었다.
뭔가 위태로운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다.
흡사 당장에라도 아래쪽으로 뛰어내릴 듯한.
행여나 사고가 일어날까 봐 그 옆에 슬쩍 섰다.
그러자 그 남자가 우릴 보았는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와 서연을 알아본 남자가 말없이 눈인사를 하곤 자리를 떴다. 나와 서연은 서로 보았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대로 모른 척할 수가 없는 위험을 감지했다.
서연도 느낄 만큼 불안한 기운.
코어는 확실히 그 기운을 포착했다.
그냥 두면 저 사람 죽는다는 걸.
게다가 저 사람과 내가 어떤 인연이 있다는 것도.
서연이 말했다.
“오늘이 저분 마지막 삶인 것 같아.”
“그래 보여?”
“응. 모든 걸 다 잃고 마지막 여행을 온 것 같아. 죽기 전에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
직감이 그걸 포착했는데 서연도 같은 걸 느꼈다.
“가서 얘기나 들어볼까?”
“응.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우연히 만난 척하려고 남자를 따라다녔다.
남자는 다리를 건넌 뒤 곧장 월 스트리트로 갔다.
그 길로 뉴욕증권거래소로 가서 한참이나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더니 다시 이동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돌진하는 황소’ 동상이었다.
많은 사람이 황소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황소의 주요 부위를 만지는 모습.
“오빠, 저긴 왜 만지는 거야?”
“저길 만지면 부자 된다고 해서.”
“그래서 저기가 반들반들하네.”
“그러네.”
남들은 황소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남자는 그냥 보기만 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시도라도 해볼 텐데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증권사 건물을 보는 것도 그렇고, 월 스트리트 명물을 보고 있는 것도 그렇고. 무슨 관련이 있을 듯했다.
이때가 타이밍이다.
“사진 안 찍어요?”
“어? 여기서 또 뵙네요.”
“만져봐요. 찍어 드릴게요.”
남자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생각 없어요. 제가 두 분 사진 찍어 드릴게요.”
“사실 저희도 별생각 없어요. 아, 혹시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하실래요?”
남자가 의아하게 우릴 보았다.
왜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나 싶은.
한데 다리에 있을 때보다는 표정이 한결 풀렸다.
그래도 희망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남자도 뉴욕에서 우릴 만난 게 보통 인연은 아니라고 본 모양이다. 어쩌면 실낱같은 희망을 꿈꾼 것일지도 모르고.
멕시칸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리 이야기부터 풀어놓았다.
얼마 전에 개봉한 내 영화 이야기. 뉴욕의 가을 날씨 이야기. 내일은 센트럴파크에 갈 거라는 이야기.
식사하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는데, 남자는 이따금 웃으며 듣기만 했다. 그러다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풀었다.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었고, 아내와 5살 아들이 있다는 말도 했다. 이름은 안성욱. 나이는 37세.
“왜 아내분이랑 같이 안 왔어요?”
“미안해서요.”
“실수하신 게 있나 봐요.”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주식 때문이죠?”
“네?”
안성욱 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랬다. ‘그림자 사나이’의 현실판을 만난 거다.
주식 때문에 삶을 포기하려 했던 모양이다.
“빚이 얼마나 되는데 그러세요?”
안성욱 씨가 다시 한 번 놀랐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
그는 한동안 망설였다.
여러 감정이 얼굴에 뒤섞였다가 하나 둘 사라지고 마지막엔 희미한 미소가 남았다.
결국 그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실은 빚이 9억이나 됩니다. 작전 세력에 낀 친구 놈에게 속아서 평생 모은 돈 20억하고 부모님과 장인어른의 돈 3억을 날렸어요. 주식 해서 돈을 좀 벌었는데, 제 실력을 과신했어요. 돈에 눈이 멀었던 거죠.”
그 친구란 사람은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친구를 작전주에 끌어들인 걸까. 이 분은 그저 수많은 개미의 하나일 뿐인데.
“친구분이 왜 그랬던 겁니까?”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 때 제법 친했는데, 제가 모르는 원한 같은 게 있었나 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책임이 큽니다. 그 친구놈이 종목 하나를 봐달라고 해서 봤더니 작전주더군요. 그때 그 친구가 그랬어요. 본인의 지인이 작전세력인데 제대로 한 번 먹어보자고요.”
안성욱 씨가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놈이 오른다고 했을 때 올랐고, 조정기간 있다고 했을 때 하락했거든요. 저도 차트는 웬만큼 볼 줄 알아서 약간 변형된 작전주 형태로 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리했습니다. 제가 모은 돈 다 집어넣고, 돈까지 빌렸어요. 너무 자신이 있어서 양가 부모님께 추천도 했고요. 그 당시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지인들에게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던 짓을 제가 하고 있더라고요.”
그럴 수 있다.
나도 주식을 해 봐서 안다.
안성욱 씨 말대로 욕심 때문에 눈이 멀게 된다.
“마지막까지도 그 친구분 말대로 갔겠네요.”
“그랬죠. 절친은 아니었지만 그 친구가 날 속일 이유가 없다고 봤습니다. 놈이 내 돈을 떼먹는 것은 아니니까요. 최고점 전에 털고 나갔다면 혼자 이렇게 뉴욕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친구분 정보를 기다리다가 매도 시점을 놓쳤군요.”
“네. 6개월 잡혀있다가 결국 상장 폐지됐습니다.”
빚이 그리 많지 않다.
왜 극단적인 생각을 하려 했을까.
“혹시 생명 보험 들어 놓고 뉴욕에 온 겁니까?”
안성욱 씨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너무도 힘들고 죄책감도 커서 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빚 때문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힘들어서 살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죽자니 또 죄를 짓는 일이더군요. 아내가 유산상속을 포기하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되니까요.”
“지금은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빚 갚는데 세월을 보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합니다. 아내까지 그런 인생을 살게 하려니 마음이 너무 아파요. 끝낼 것인지, 그래도 살아서 버틸 것인지. 이 뉴욕에서 결정을 하려고 했는데…….”
안성욱 씨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뉴욕에 왔는데 나와 서연을 만났다는 뜻.
코어가 전해준 인연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차기작이 떠올랐다.
안성욱 씨 이야기를 한다.
분노를 주제로 한 복수극으로.
“그 작전 세력 지금도 있죠?”
“예. 그들에게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그 인간들에게 복수합시다.”
“어떻게요?”
나도 아직 모른다.
돈으로 맞서든가, 그들을 추적하든가.
취재를 겸해 그들의 실태라도 확인하는 거다.
안성욱 씨가 날 보았다.
비장한 미소를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