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아프리카 오지에서
한 달 가까이 액션씬만 찍었다.
중반까지 주인공이 고생만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재난물 특유의 고생이라 관객이 받을 스트레스가 그리 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피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1시간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액션만으로 엄청나게 밀어붙인다. 국경의 끝을 쓸 때는 감정을 극한으로 밀어 올렸고, 나는 보스다를 쓸 때는 상황을 극으로 끌어 올렸다. 그것과 비슷했다. 여기까지겠지. 싶은 순간부터 4단계 정도까지는 더 올라갔다. 숨이 턱 막힐 만큼.
이번 액션이 그랬다. 호흡을 고르는 짧은 쇼트들 외에는 갈수록 더 강렬하고 현란한 액션으로 끌고 갔다. 이전 1시간의 스트레스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
주인공이 싸움의 베테랑이 아니기에 완력을 주로 쓰고 도약과 돌진 액션을 벌인다. 그렇게 싸우면서 점점 더 강해져 간다. 나중에는 헐크에 가까워질 정도로.
“액션!”
땅을 박차는 제이슨!
타앗! 경쾌한 소리와 함께 와이어를 단 몸이 쭉 뻗어 나간다. 그대로 주먹을 뻗으며 녹색 천으로 감싼 ‘로봇’의 몸통의 가격한다.
“그대로 도약!”
로봇을 강타하고 착지한 제이슨이 몸을 낮췄다가 그대로 뛰어올랐다. 컴퓨터 제어식 와이어가 순식간에 제이슨의 몸을 당겨 올린다. 약 20미터를 솟구치더니 포물선을 그리며 저편으로 내려간다.
“다시! 중심이 흔들려!”
도약하는 씬만 여섯 번의 테이크 끝에 끝냈다.
그다음 씬은 개조 전사들과 일당만으로 싸우는 장면.
개조전사 10명이 모였다. 전원 스턴트맨이다. 똑같은 갑주를 착용한 이들이 제이슨을 에워싼 모습.
촬영 전에 가장 공을 들였던 씬이고, 와이어 액션의 진수가 이 장면에서 벌어진다. 특수효과팀이 이걸 프로그래밍을 해 놨다. A 프로그램의 1번에서 10번까지 버튼을 누르면 프로그래밍한 대로 와이어가 움직이는데, 순서를 다르게 누르면 사고가 난다. 이 액션 시퀀스의 프로그래밍만 30개나 된다.
스턴트맨 10명이 수직과 수평으로 연결된 와이어 장치를 착용했다. 앞에 선 사람이 먼저 나가떨어지면서 와이어가 위쪽 뒤편으로 이동하면 그다음 사람이 나서야 한다.
안전 때문에 느리게 움직이고, 촬영 속도도 그에 맞춰 저속으로 찍었다. 편집 때는 패스트를 걸어 정상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특수효과팀장이 외쳤다.
“두 달간 연습한 대로만 하면 다칠 일 없다! 정확하게 동선대로 움직여! 이해했나?”
“예!”
“리허설!”
특효팀장 콜에 따라 액션을 시작했다.
스턴트맨들이 한꺼번에 달려오더니 순서대로 제이슨에게 달려든다. 제이슨은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어깨로 몸통 공격을 걷어낸다. 그때마다 개조 전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날아간다. 마지막 한 명은 명치 가격에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오케이! 다시 위치로!”
제이슨과 스턴트맨들이 번호를 붙여둔 자리에 가서 섰다.
조감독이 외쳤다.
“와이어 통제실!”
위에서 스피커 음성이 들려왔다.
-올 스탠바이!
“카메라와 라이팅!”
“스탠바이!”
슬레이트가 이어지고.
“고!”
제이슨이 이를 꽉! 악문다.
이내 이어지는 액션. 아까와 똑같이 치고 차고 날리고.
제이슨의 한방 한방에 속절없이 날아가는 스턴트맨들.
“컷! B 액션으로!”
같은 장면의 다른 액션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모두 30개의 와이어 액션을 합쳐서 이번 액션 씬이 만들어지게 된다. 제이슨과 스턴트맨들은 프리 때 이 장면을 58일 동안 연습했다.
고작 10명으로 조금씩 다른 액션을 찍는데, 화면에선 거의 만 명에 이르는 개조 전사들과 싸우는 장면이다. 다수가 한 명을 상대하는 장면이라 10명으로 다양하게 액션을 찍어 놓고 그걸 모두 합친다.
이어 더 강해진 엑셀이 개조 전사들 가운데를 무지막지하게 뚫고 들어가는 장면을 찍었다. 제이슨은 그냥 달리는 장면 하나만 찍고, 스턴트맨은 마구잡이로 퉁겨져 나가는 장면을 계속 찍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액션 시퀀스.
거진 60미터를 도약하여 한 방에 로봇의 머리 부분을 날려 버리는 장면이다. 제이슨과 카메라가 연결된 상태에서 함께 도약했다. 속도감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액션!”
제이슨과 카메라가 한순간에 솟구쳐 오른다.
“으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날아가던 제이슨이 천장에 붙어 있는 녹색 스펀지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컷! 아주 좋았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제이슨이 엄지를 보였다.
이 영화의 마지막 액션 장면이었다.
* * *
촬영 81일째.
LA 시청이 저항군 본부가 되었다. 군인들이 오가고 피난민들도 유일한 대피처인 LA 시청으로 몰려들고 있다.
곳곳에 파괴된 비행기의 동체와 차량이 있지만, 오가는 이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다.
제이슨이 군용 셔츠만 입은 채 걸어나온다.
오가는 군인들이 경의를 표하고, 피난민은 환호하고 박수를 보낸다. 그를 지켜보는 저항군사령관만 굳은 얼굴.
액셀은 영웅이자 전 세계인의 희망이 되었다.
저항군 특공대의 대장이기도 하고.
사령관에게 걸어와 경례하는 제이슨.
사령관이 걱정 어린 얼굴로 경례를 받았다.
“모선 내부에 직접 들어가나?”
“네. 모선에 있는 아크람 에너지를 탈취할 거예요. 이제 인류가 반격을 시작하겠죠.”
“흠….”
사령관을 하늘을 보았다.
제이슨도 하늘을 보고.
하늘에는 거대한 모선이 떠 있다.
“한 달째 놈들이 조용하군. 영 불안해.”
“인류 멸종은 계획에 없었을 거예요. 그게 목적이었다면 모선으로 직접 공격했겠죠.”
“그렇겠지.”
제이슨이 예를 보인 뒤 자리를 뜨려 하자.
사령관이 말했다.
“내가 누구보다 자네를 아낀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구먼. 자네가 인류의 희망이라는 말도 부정하지 않아. 그러니 섭섭해하지 말게나.”
“말씀하세요.”
사령관이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정부에선 자네의 출현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하고 있네. 시민이 정부보다 자네를 더 신뢰한다는 우려지. 더구나 자넨 아직 10대 아닌가. 자네가 너무 호전적이라더군.”
“정부가 저를 통제하고 싶어하는군요.”
“그런 셈이지.”
제이슨이 웃으며 말했다.
“저와 전우들은 이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울 뿐이에요. 오히려 전장에서 멀리 있는 그분들이 저희보다 더 호전적이죠. 전쟁터에는 나서지 않을 분들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정부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에요. 인류를 위해 싸우는 겁니다.”
재미있게 말을 던지고 제이슨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저편 동료가 모여 있는 곳으로 걸었다.
듬직한 젊은 영웅의 뒷모습.
“컷! 오케이!”
“와!”
우렁찬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보조출연자와 스태프 전원이 마지막 촬영을 자축했다.
액셀이 힘차게 도약하며 솟구치는 장면이 크레딧이 오르는 마지막 장면이지만 이미 찍었다.
제이슨이 동료와 포옹하고 내게 왔다.
“고마워요. 감독님.”
“그래. 잘해줘서 고맙다.”
제이슨과 깊이 포옹하고 등을 두드렸다.
이어 스태프들에게 외쳤다.
“그동안 애써 주신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감독님도요!”
“고맙습니다!”
한국 촬영 때와 마찬가지로 그간 고생한 동료를 격려했다.
이럴 때 고생했다는 뜻의 영어가 있으면 좋으련만.
어쨌거나 드디어 촬영이 끝났다.
* * *
한 달 만에 편집을 끝냈다.
실사 촬영 편집본이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CG 작업은 CG 팀이 실사와 그린스크린 촬영분을 바탕으로 콘티대로 하기에 내가 관여할 부분은 별로 없었다.
그로부터 2주간 더 지켜보았다.
문제없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1차 부분 작업본을 확인했다. CG와 실사, 그린스크린 촬영본이 합쳐진 전투 장면을 보니 훌륭했다. 믿고 맡겨도 될 만큼.
남은 후반작업 시간은 6개월가량.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좀 쉬고 싶었다.
* * *
난 한국에 오고 수호는 미국으로 갔다.
수호가 앞으로 후반 작업을 보고할 터였다.
권혁민이 있지만 그 친구는 경영 담당이라.
공항에 마중 나온 서연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서연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미국에 왔지만 아무래도 같이 지내게 되니 얼굴이 무척 밝았다.
“벌써 공사가 다 돼가?”
“응. 외부 공사는 끝났어. 미국처럼 캠퍼스도 꾸미고.”
로큐 신사옥이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주가가 좀 뛰었다고 들었는데.
“주가는?”
“9만 원에서 왔다갔다해. 그림자 사나이 상영 후에 상당히 높이 올라갔어. 난 듣기만 했는데, 오빠가 할리우드 영화 제작에 전념하면서 6만 원대까지 내려갔었어.”
네오스타 스튜디오의 영화 수익과 로큐 엔터는 상관이 없다. 그러니 주가가 떨어진 거다. 내 활동과 로큐 매출이 연결되지 않으니까.
서연이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중국 영화 사업에 진출한다는 공시가 나가면서 7만 원대가 되었어. 몇 가지 공시가 더 나가면서 9만 원대까지 오른 거야.”
“플래닛 씨가 대박 났다며?”
“확인 안 했어?”
“수호에게 보고는 들었지.”
서연이 웃었다.
“그림자 사나이 개봉 후에 플래닛 케이 회원이 천삼백만으로 뛰었거든. 그 영화 조회 수가 지금 천백만이야. 이건 알지?”
“벌써 천만을 넘었어?”
“회원이 늘어난 게 그 영화 덕분인데, 뭐.”
“중국 쪽은?”
“그림자 사나이 개봉하고 몇 주 뒤에 플래닛 씨가 중국에서 출시되었는데, 지금 회원 수가 천오백만이야. 가입이 무료라 그런지 첫날부터 회원 수가 백만이 넘어갔다고 그러더라. 유일한 VR 공포 영화가 있다는 소문도 났고.”
“중국 조회 수는?”
“거기도 천만 넘었어. 중국 쪽은 유료와 무료가 따로 있어서 전체 광고 수익만 매월 2백억이 넘는대.”
“중국 합작사는 다른 요구 안 하고?”
“수익배분에 관해서는 아무 말 안 하고, VR 영화 더 만들어 달라고 그랬대. 공포나 액션 쪽으로.”
아직 모른다.
중국 합작사가 나중에 딴소리할 게 분명하다.
그쪽에서 회원 수를 걸고넘어지면, 우린 우리만이 만들 수 있는 VR 콘텐츠를 들이대면 된다. 그림자 사나이가 회원 확보에 지대한 영향을 준 거니까.
“회사에서 VR 영화 제작하고 있지?”
“응. 박승철 감독 주도로 네 편이나 만들고 있어. 두 개는 공포물. 하나는 액션. 다른 하나는 에로.”
“에로? 재밌겠는데?”
서연이 슬쩍 날 흘겨 보았다.
“에로 때문에 여자들이 걱정이야.”
“왜?”
“너무 야하대.”
그럴 법도 하다.
어떤 느낌인지 직접 봐야 하겠지만.
“액션 영화는 필리핀에서 찍는다며?”
“그 영화는 박 감독님이 직접 찍고 있어. 360도 카메라 말고 1인칭 카메라로.”
승철이가 찍는 VR 영화도 기대가 되었다.
워낙 창의성이 뛰어난 녀석이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뭔가를 만들어 낼 것 같다. 에로 영화도 녀석의 발상으로 찍는다면 좀 다를 것 같고.
승철이가 찍은 1989년 복고 영화는 녀석 말대로 860만 관객이 들었다. 이미 정산까지 끝났는데 중장년층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내가 찍었으면 많이 들어야 600만이었을 텐데 말이지.
천만 영화를 만드는 목표가 있기는 하다.
할리우드 영화를 제작하고 있지만 한국 영화 천만 관객은 타이틀 자체가 좀 다르니까. 천만을 목표로 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로큐에 이런저런 호재가 늘어나서 주가가 9만 원대를 찍은 거였다. 신사옥 건설도 대폭 늘어나는 매출에 대한 자신감이니 투자자들도 호재로 봤을 테지.
집에 도착하여 좀 쉬었다.
그 사이 서연은 직접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던 때였다.
서연이 어머님 전화를 받고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 일 좀 그만 하시면 안 돼? … 아빠가 경비 일을 하는데 내가 왜 창피해? 당장 그만두시라고 해. 아니, 오늘 집으로 갈게. 아빠랑 대화 좀 해야겠어.”
서연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말만 들었지만 안 봐도 뻔했다.
아버님이 경비 일을 하다가 주민에게 괄시를 당한 모양이다. 경비 일을 그만두지 않은 건 딸에게 신세 지는 게 미안해서 그렇다.
“같이 갈까?”
“아니야. 아빠한테 편의점이라도 차려 드릴까 봐. 경비원이 편하다면서 계속 고집을 피우시네.”
“원래 하시던 일이 낫지 않아?”
“전에 건설업 하셨어. 나 고1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한 뒤로 공사장 인부로 일하시다가 다치신 후로 경비원 일하셨고.”
“같이 가자. 귀국했으니 인사도 드려야지.”
서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불편할까 봐 말만 그렇게 한 거다.
* * *
아버님이 근무하시는 아파트 단지로 갔다.
훔쳐보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서연이 아버님께 간다고 하면 오지 말라고 할 것이 뻔했기에 연락을 안 하고 갔는데, 하필이면 안 보는 게 나은 광경을 보고 말았다. 서연은 눈물까지 글썽이고.
관리소장이 아버님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젊은 여자는 팔짱을 끼고 있고.
“택배사에선 배달 완료했다고 하잖아요!”
“저는 받은 적이 없다니까요.”
“그럼 주민이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예요? 택배가 왔으면 잘 보관을 해야지, 도난을 당하면 어쩌자는 거냐고요.”
“여기 택배일지 보세요. 택배 온 물건을 다 기재하는데, 저분 집 주소로 온 택배가 없다니까요.”
“그럼 택배 아저씨가 거짓말을 해요? 안 그래도 경비들 근무 수당 가지고 말이 많은데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미안합니다. 무슨 착오가 있는 게….”
여자가 나섰다.
“됐구요! 절도죄로 신고할 거예요! 관리소장님도 각오하세요! 부녀회장님께 말할 거니까!”
서연이 참다못해 나서려 하자 내가 잡았다.
딸이 본 걸 아버지가 알면 가슴이 찢어진다.
바로 뛰어갔다.
“아버님! 저 왔어요!”
“어? 자네가 이 시간에 웬일인가.”
내가 나타나자 여자와 관리소장이 날 빤히 본다.
“오늘 귀국해서 인사차 들렀어요. 서연이는 인터뷰가 있다고 해서 제가 모시러 왔습니다. 일 언제 끝나세요?”
“그게….”
“어디 불편하세요?”
“저, 최 감독 그게 아니고.”
여자를 돌아보았다.
최 감독이라는 말에 여자가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40대 관리소장도 날 알아보는 눈치다.
관리소장에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무슨 실수라도 하셨습니까?”
관리소장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제야 여자의 입이 떨어졌다.
“경비 아저씨가 아버지세요?”
“장인 되실 분입니다.”
관리소장과 아가씨 얼굴이 희한하게 변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아버님 표정이… ”
“아니에요. 제가 오해했나 봐요.”
아가씨가 도망가듯 달려가 버렸다.
관리소장도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아버님은 민망한 표정을 짓고 계시고.
딸이 서연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으신가 보다.
서연이가 무슨 조롱이라도 받을까 봐.
아버님께 말했다.
“아버님, 다른 일을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
“내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땅 좀 보실 줄 아시죠?”
“그거야 경험이 좀 있긴 하다만은.”
“아버님께서 땅 좀 보려 다녀 주시겠어요?”
“땅을 사게?”
“서연이가 요새 땅에 관심이 좀 있더라고요.”
“그래?”
아버님께 일거리를 드리고 싶었을 뿐이다. 어머님과 함께 여행 삼아 땅 보러 다니시는 것도 좋고. 시골에 작은 땅을 몇 곳 사서 차익을 조금 보시면 재미를 붙이실 것 같다. 농지를 사신다면 주말농장으로 가꿀 수도 있고.
종잣돈이 마련되면 당신이 알아서 하시겠지.
* * *
아버님을 모시고 서연과 함께 식당에 앉았다.
먼저 식당에 가서 기다리던 서연에게 아버님께 한 제안을 설명했는데 그녀도 내 의견에 찬성했다.
“아빠, 경비원 그만둘 거지?”
“그래. 너는 갑자기 왜 땅에 관심이 생긴 거냐?”
“그냥. 마땅히 투자할 곳이 없어서. 그렇다고 사업을 하는 것도 그렇고.”
“땅이 투자하기는 좋지. 땅값이라는 게 언젠가는 오르기 마련이거든. 이 대한민국에 개발 안 된 곳이 얼마나 많더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시골이라도 언제 도시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거든.”
아버님께 물었다.
“땅을 사는 방법도 잘 아세요?”
“알지. 등기가 좀 어려운데 그거는 법무사한테 맡기면 돼. 경매에 올라온 땅이 좋아. 일반 시세보다는 70% 정도 싸게 살 수 있거든.”
“농지 같은 걸 사둬도 좋습니까?”
“논은 실제로 농사를 지어야 하니, 도시 사람이 사기에는 좀 그렇고. 임야면 괜찮지. 작물을 키우면 되니까.”
“그런 땅은 좀 싸겠네요.”
“그럼. 서울하곤 달라. 지금이야 모르겠다만 10년 전만 해도 천만 원이면 시골에선 꽤 큰 땅을 샀거든.”
“천만 원요?”
아버님께서 웃었다.
“사람들이 땅을 산다 그러면 거액을 투자하는 줄 아는데, 지방 법원 경매에 올라오는 물건을 보면 천만 원도 안 되는 땅도 많아. 경매에 올라오는 땅이 채무자가 담보로 잡은 부동산이거든.”
“그러면 법원 경매 경쟁이 좀 치열하겠네요.”
“치열하지. 낙찰가를 얼마를 써내느냐에 달렸으니까.”
“좋은 땅을 보실 줄도 아세요?”
“개발이 될지 안될지를 분석하면 잘 보는 거지. 그거야 정보가 없으면 아무도 모르는 거고. 가장 기본이 현장 답사야. 입찰할 땅 권리분석도 꼼꼼하게 하고, 직접 가서 주변 땅 시세도 확인해야지. 담배 한 상자 들고 동네 이장님도 찾아뵙고.”
아버님이 땅에 대해 조금이나마 아실 줄은 몰랐다.
아버님께 땅 이야기를 한 건 그냥 즉석에서 나온 말이다. 어떤 영감이 떠오르면 그건 대개 코어가 전달하는 직감의 일종인데, 그게 통했던 거였다.
서연이 말했다.
“아빠. 그거 하고 싶지?”
“왜? 네가 돈 좀 대게?”
“그럼. 아빠가 나 대신 땅을 사주시고, 아빠도 아빠 명의로 땅을 사. 따로 5억 빌려줄게.”
“5억이나?”
“좀 모자라지?”
“모자라기는. 그런데 아빠를 믿어?”
“땅값이 안 올라도 상관없고, 안 팔려도 상관없어. 오빠 말대로 엄마랑 땅 보러 다니면서 이제 느긋하게 사시면 좋잖아. 무슨 큰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님이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서연에게 미리 말해놨다. 경비 일을 하며 남에게 무시를 당하느니, 비록 소액이지만 전문투자자가 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부모님 나이대에서 하기에 좋기도 하고.
사실 내가 돈을 빌려 드리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다. 해서 난 개입 안 하기로 했다. 내가 땅을 살 일도 없고.
현재 보유한 로큐 주식 총액이 7천억에 육박한다. 계좌에는 현금만 160억이고, 배당금으로 매년 5월에 120억가량이 들어온다. 청년지원재단에 100억을 출자했는데도 그렇다.
아버님의 고민을 내가 해결한 셈이 됐다.
이렇다 할 기술도 없고, 딸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그래서 경비 일을 했는데, 이젠 안 해도 되었으니.
내가 제안한 그대로다.
어머님이랑 여행 다니듯 땅 보러 다니는 재미. 법원 경매에 입찰해서 낙찰받는 재미. 그렇게 느긋하게 사는 재미.
해서 장래 사위의 선물로 차를 구입해 드리기로 했다. 안 받으실 게 뻔해서 깜짝 선물로. 험한 길을 달리려면 튼튼한 사륜구동 차가 있어야 하니까.
자식으로서 그저 종잣돈만 건네 드리면 되는 거였는데, 너무 무심했다. 서연이야 땅 투자는 전혀 생각을 못했던 거고.
아버님이 땅을 좀 아실 줄 누가 알았겠나.
코어가 효도한 셈이지.
* * *
서연이와 함께 본가에도 다녀왔다.
귀국했다고 인사하러 갔더니 부모님은 당신들 하시는 일에 바쁘셨다. 은퇴하신 아버지는 도자기 만드신다고 바쁘시고, 통장이 되신 어머니는 마을 도서관을 만들겠다고 하시고.
바쁜 두 분을 따로 만나 뵌 뒤에 내 집으로 향했다.
내 집에서 서연이와 함께 여행 계획을 세웠다.
나만 휴가를 즐기는 게 미안해서 네오스타 직원 및 스태프들에게도 두 달가량 차례로 유급 휴가를 보내라고 했다. 어차피 다음 작품 들어가기까지 5개월 이상 남기도 해서.
서연이 말했다.
“아프리카에 갈 때는 국제구호단체가 없는 곳은 위험할 수도 있어. 중동에 갈 건 아니지?”
“내전이 벌어지는 곳은 안 갈 거야. 세계 일주는 아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정도만.”
서연이 지도에 동그라미를 쳤다.
“코이카나 굿네이버스가 활동하는 지역을 우선으로 찾아볼 게. 다른 나라 국제구호협력단이 있는 곳도.”
“그래. 우리 재단은 잘되고 있지?”
“그럼. 오빠 미국에서 영화 찍을 때 내가 얼마나 뛰어다녔는데. 지금은 자리 잡았어. 기술교육원은 아직이고.”
청년지원재단 일도 수호를 통해 들었다.
서연이 주도로 재단 설립을 했고, 구 대표를 비롯한 회사 직원들이 설립 실무를 맡아 봉사해주었다. 난 돈만 댄 셈이다.
강사진과 커리큘럼이 완성되는 대로 교육원이 문을 연다. 거기서 배출되는 이들은 로큐와 관련한 여러 분야에 채용될 터다. 채용 공고 모집을 통해 다른 회사에 취업도 할 테고.
또한 네오스타에 인턴십과 어학연수에도 참여할 수 있다.
청소년 지원 사업은 이미 시작했고.
여행 계획을 세우고 일주일 뒤.
나와 서연은 베트남 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난 위험도 있고 해서 짐은 배낭 하나로 최소화했다.
하노이 공항에서 굿네이버스 자원봉사자를 만났다.
손하영이라는 여성분이었다.
터프하게도 직접 몰고 온 지프에 우릴 태웠다.
“대충 사진이나 찍으려고 오신 건 아니실 테고, 실질적으로 도움 좀 주실 거죠?”
그녀의 말에 나와 서연이 서로 보았다.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1억요.”
“좋습니다.”
나와 서연, 손하영 씨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걸 두고 단도직입이라고 한다.
손하영 씨가 말했다.
“지금 가는 곳은 화빙성의 오지 마을이에요. 몹시 가난한 마을인데 도로가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하죠. 아이들이 20킬로미터를 걸어서 학교에 다니거든요. 거기에 두 분의 후원금으로 학교를 지을 수 있어요.”
“다행이네요.”
“저희가 코이카와 협력으로 10년 전부터 사업을 하긴 했는데 지원할 게 너무 많아요. 콩 재배에서 성공하고 식수와 용수 개발도 해서 좀 나아지긴 했어요.”
“더 필요한 건 없어요?”
“아이들 학용품이나 축구공 같은 걸 사주셔도 좋고요.”
“그거 좀 사서 들어가죠.”
“이미 가고 있어요.”
“하하하하!”
나와 서연이 말 그대로 빵 터졌다.
베테랑 자원봉사자, 손하영 씨.
어째 우리 머리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녀 말대로 도중에 작은 도시에 들렀다.
후원자가 올 때마다 이곳에 오는 모양이다.
웬만한 물품이 다 있어서 시골 마을에 필요한 물건들을 제법 많이 샀다. 봉사단의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도 잔뜩 샀고.
물품을 실은 트럭과 함께 다시 마을로 출발했는데.
얼마 가지도 못하고 트럭 바퀴가 진창에 빠지고 말았다. 나도 서연도, 손하영 씨도 흙범벅이 된 꼴로 트럭을 밀었으나 좀처럼 차가 빠지질 않았다.
우리가 낑낑대고 있자 지나가던 현지인들까지 합세했다. 손하영 씨를 알아본 사람들이었다. 다섯 명이 힘을 합쳐도 안 되자 지켜보던 농부가 소까지 끌고 나와서 차를 끌고 밀었다. 그렇게 겨우 차를 뺐다.
“깜언.”
우리가 고맙다고 하자 농부가 순박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사진을 찍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다시 차가 달렸다.
3시간 만에 마을에 도착했다.
한국인 봉사단원과 함께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달려왔다. 뭘 달라고 달려오는 게 아니라, 외국인이 마냥 신기해서.
손하영 씨와 함께 마을 어른을 만나러 갔다.
거기서 소개와 인사를 하고 앞으로 뭘 할 건지 알려주었다. 그러자 주민이 다소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나와 서연의 손을 잡았다. 그마저도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나와 서연은 주민이 마련해준 임시 숙소에서 묵었다. 자원 봉사단 두 명이 지내는 허름한 나무집이었다. 전기가 안 들어오는 오지인 터라 두 사람은 LED 램프를 걸어 넣고 지내는 상태였다. 그렇게 넷이서 지원 사업을 조금 더 의논했다.
이 마을에 사흘을 머물렀다.
첫날에만 도시에서 온 건설 기술자와 논의를 하고, 그 뒤로는 쉬거나 산책을 했다. 때가 꼬질꼬질한 애들이 우리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머리에 도마뱀을 올리고 다니는 아이도 있고.
아침과 저녁이면 마을 주민이 꼬박꼬박 음식을 챙겨서 가져왔다. 뭘 하나라도 더 주려는 기색인데 마땅히 줄 게 없어서 부족 특유의 팔찌를 주는 분도 있었다. 그게 꽤 예뻐서 계속 차고 다녔더니 옷을 주기도 하고.
그리하여 마지막 날.
동네 공터 나무와 나무 사이에 하얀 천막을 쳤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어 보고 있었다. 그 새카맣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천을 팽팽하게 조인 뒤. 앉아 있는 아이들 뒤에 책상을 이단으로 쌓고 그 위에 미니 빔 프로젝트를 놓았다. 그러곤 스마트폰과 블루투스로 연결했다. 영화를 재생했더니.
“우와!”
아이들이 입을 벌린 채 천막에 영사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은 애니메이션 정글북이다.
전기가 안 들어오니 텔레비전도 못 봤을 터다. 신기한 눈으로 보던 아이들이 금세 영화에 집중했다. 어른들도 몰려나와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베트남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나와 서연은 마을 주민과 아이들의 환송을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손하영 씨가 주민 모두 모여 사진을 찍자고 했지만 그냥 갔다. 아이들과는 사흘 동안 지내며 사진을 찍었으니.
우리에겐 그냥 여행일 뿐이다. 평소에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싶었기에 오지에 왔던 것이고. 이왕 오지에 가는 것이니 구호단체를 통해 후원도 좀 하자는 거였다.
바로 미얀마로 넘어갔다.
미얀마에선 북부 소수부족 마을에 가서 우물을 파고, 발전기를 사서 설치해 주었다. 해당 마을을 지원하는 코이카 직원과 봉사단원이 그게 가장 필요하다고 해서.
말을 들어보니 웬만한 개발도상국에는 한국 자원봉사단원이 나와 있단다. 코이카 직원이야 준공무원이라지만, 봉사단원은 말 그대로 자원봉사요원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나보다 어린 청년들이고. 여성도 무척 많고.
이어 캄보디아로 갔다.
거기선 이미 짓고 있는 학교가 있어서 서연과 함께 벽돌을 쌓고 페인트칠을 했다. 후원금만 전달하는 게 나은 곳은 그렇게 하고, 일손이 부족한 곳에선 한 손 거들었다.
일을 끝낸 후엔 데이트 삼아 마을을 돌아다니고, 아름다운 이국의 풍경과 정글을 카메라에 담았다. 뭘 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훗날 CG 장면에 참고가 될 것 같아서.
미얀마 국제공항으로 가던 차에서 서연이 잠이 들었다.
괜히 오지 여행을 가자고 했나.
힘든 기색은 안 했지만 무척 힘이 들었을 터다. 낭만적인 여행도 아니고, 일하러 온 셈이니까.
내가 가만히 보고 있을 때 그녀가 눈을 떴다.
배시시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왔다.
“나 행복해.”
“이렇게 험한 데만 다니는데?”
“오빠랑 누굴 도울 수 있다는 게 좋아.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잖아.”
“그렇긴 하네.”
“오빠한테 말은 안 했지만 해외자원봉사 다니는 거. 내 꿈이었어. 사실은 오빠가 힘들 것 같아서 말은 안 했는데, 오빠가 먼저 말을 꺼내서 깜짝 놀랐거든.”
난 내가 하자는 대로 서연이 따라오는 줄 알았다. 마지못해 하는 것일까 봐 걱정이 좀 되었는데, 그런 게 없기는 했다. 꿈이었다는 건 전혀 몰랐고.
서연은 고생이 뭔지 안다.
그래서 힘들게 사는 이들을 도울 줄도 알고.
사실 난 세상의 이면을 보려고 이번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몰랐던 걸 보고 있다.
오지의 마을 주민이 모두 착한 사람이라는 것도.
내가 자원봉사자에게 물었을 때였다.
“왜 주민들이 돈을 벌 생각을 안 하죠?”
“돈을 벌 필요가 없으니까요.”
“돈이 있으면 지금보다는 나을 텐데요?”
“오지의 부족 마을 주민에게는 뭔가 모은다는 개념이 없어요. 오늘 먹을 건 오늘 찾고, 내일 먹을 건 내일 찾는 거죠. 그래서 저희도 고민이 많아요. 이분들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래도 돕는 이유는.
약간의 지원만으로도 생활이 편리해지기 때문이다.
본인들이 힘들게 산다는 걸 모르는 주민도 많고.
그러니 자원봉사자들은 고민이 생긴다.
문명화가 과연 옳은 길인가. 하고.
아프리카에선 그런 고민을 할 여유도 없었다.
코이카가 지원하는 한 마을 주민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썩은 내가 진동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병들어 있었다.
썩은 물을 마셔 배가 볼록한 아이들. 너무도 굶주려 뼈만 남은 아이들.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청년들. 파리 떼에 시달리면서도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이 든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죽어가는 터라.
나와 서연이 간 곳은 르완다 오지 마을이었다.
학교도 병원도 없고 우물도 말라버린 곳.
코이카가 의료 막사를 지어 놨는데 장비와 의약품이 너무도 부족했다. 환자는 넘쳐 나고.
코이카 직원이 말했다.
“이 나라 이 부족만 이런 게 아닙니다. 아프리카 오지로 가면 거의 다 비슷한 상황입니다. 아프리카는 나라보다 부족 개념이 강해요. 다른 부족을 안 돕습니다. 여기보다 더 열악한 곳도 많고요. 코이카에선 가장 상황이 안 좋은 곳부터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겨우 이 마을 순서가 된 겁니다.”
“자원봉사자들도 버티기 어렵겠네요.”
“그렇죠. 파리와 악취 때문에 일주일도 못 버티는 분들이 허다합니다. 봉사도 환경이 좋아야 하는 거예요. 이런 곳은 정말 천사 같은 사람이 있다고 보시면 돼요. 저야 가끔 오갈 뿐이지만, 6개월씩 여기서 환자를 보시는 분들은 정말.”
그 주인공이 진료를 하고 있었다.
30대 남녀다. 의사 부부인 것 같았다.
우리를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물이 없어서 몇 주 동안 씻지도 못한 모습이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제 손이 각종 병원균에 오염되어서 악수는 못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오셨어요?”
“여행 왔어요.”
내 말에 의사부부가 또 환하게 웃었다.
정말 천사 같은 분들이다.
출세하려고 의사가 된 분들이 아닌 진짜 의사.
“혹시 콜라 있어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게 정말 마시고 싶어서 죽겠습니다. 집사람은 비누라도 하나 사주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네요. 아내에게 어찌나 냄새가 나는지.”
그 말에 아내분이 남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당신은 냄새 안 나느냐는 듯 쏘아보며. 천사는 천사처럼 말을 하는 게 아님을 확인했다.
“우물이 잘 안 나온다면서요?”
“쉽지가 않네요. 코이카와 프랑스 구호단체가 2년 동안 스무 번 넘게 팠는데 물이 안 터져요. 굴착기 한 번 부를 때마다 돈은 또 어찌나 드는지.”
“저희가 시도해 볼게요. 물 나올 때까지 안 갈 겁니다.”
“후회하실 텐데요?”
“나중에 후회하도록 하죠. 아, 저기 오네요.”
내 말에 다들 뒤를 보았다.
트럭 2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경유지였던 이집트에서 구매한 각종 물품과 의약품, 의료 장비 등이었다. 수맥을 찾는 장비까지.
트럭을 본 의사부부가 또 환하게 웃는다.
별로 놀라지도 않는 모습이다.
그저 서로의 손을 잡을 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가 여기 있었다.
그들을 닮고 싶어하는 예비부부도.
수맥을 찾기 전까진 이 마을 안 떠난다.
물을 찾아야 사람을 살린다.
트럭에 가서 냉동박스에서 콜라 캔 네 개를 꺼내왔다.
그걸 본 의사부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코이카 직원에게도 하나 건넸다.
치익-
“크!”
의사 남편분이 탄성을 질렀다.
콜라 하나에 이렇게 사람이 행복해질 수가 있다.
다들 콜라를 마셨다. 나와 서연은 나눠 마시고.
의사 남편이 말했다.
“야, 탄산이 들어가니 정신이 번쩍 드네.”
“콜라가 아주 시원해서 좋네요.”
“남편분께서 하도 콜라 타령을 해서 제가 감독님께 좀 구해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걸 마시는 게 좀 미안하네요.”
콜라를 비우고 트럭에서 실린 물건을 내렸다.
트럭 가득 별의별 것이 다 있었다. 겹치는 것도 많고.
이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도 지원하라고 대량 구입을 했다. 필요하다고 한 의료 장비는 모두 사 왔다.
의사 내외와 코이카 직원과 함께 의료 막사로 장비를 옮겼다. 의약품 상자도 차곡차곡 쌓았고. 나나 서연이나 의료 지원을 할 수가 없으니 우물 파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트럭에서 모든 물건을 내린 뒤.
난 수맥탐지장비부터 살펴보았다.
치료도 치료지만 내가 당장 물이 급했다.
생수로 세수를 할 수는 없으니.
현지 우물 시추 전문가는 안테나처럼 생긴 엘로드 장비를 쓴다고 하는데 그건 400미터까지가 한계다. 안테나 들고 왔다가 갔다 하는 방식이라 정확하지도 않다.
반면 내가 사 온 장비는 1,000미터까지 가능했다.
이 장비를 쓸 줄 아는 전문가가 없어서 그렇지.
결국 내가 익혀야 했다.
영어로 된 사용설명서를 들고 사용법을 익혀 나갔다.
서연은 주민에게 배급할 라면을 끓이고 있고.
굶주린 사람이 워낙 많아서 건빵과 생수를 먼저 배급해서 빈 위장을 달래게 했다.
수맥 탐사 장비 사용법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초반에만 헤맸을 뿐.
전기비저항 탐사 방식인데 원래는 지하자원탐사 장비다.
간단히 말해서 땅에 구리 막내를 꽂은 뒤 전류를 보내 지하의 전기 저항 분포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전기저항 값으로 지하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높은 저항은 암석. 낮은 저항은 물.
낮은 저항이 일정 흐름으로 이어지면 지하수다.
탐사 준비를 한 뒤 마을 지도를 보았다.
코이카에서 제작한 것인데 10년 전 우물이 있었던 곳을 표시했다. 수맥의 흐름이 어디로 향하느냐를 알 수 있다.
우물이 마른 곳을 보니 이 부족 마을 지하를 관통하던 수맥이 끊겼다. 물을 가두는 암반이 깨졌거나 수원지가 막혔거나. 이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우물은 20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마을 주민이 물을 뜨러 가면 왕복 반나절이 걸린다. 그나마도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잠시 쉬었다가 탐사를 시작했다. 적당한 곳에서 구리 막대 두 개를 땅에 꽂고 전류를 흘렸다.
3시간을 돌아다녔는데도 높은 저항만 나온다.
200을 기준으로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
100 정도는 전해질이고 그 이하는 물인데.
그늘에 가서 좀 쉬었다.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누가 보면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 싶을 터다.
베트남에 도착한 순간부터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마음에 뭔가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인류애? 자기만족? 혹은 위선?
내 마음에 새록새록 살이 돋는 그 은근한 감격을 단정 짓지 않았다. 그게 뭐든 상관없으니까. 남을 돕기 위한 마음이 그리 큰 편도 아니다. 새로움에 대한 경험을 위해 하는 거다.
난 코어 덕분에 성공했다.
공짜로 행운을 얻었으니 그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부채의식도 있고.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게 아니라는 것.
영화만 찍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이 행복 좀 나누며 살자 이거지.
고생하는 건 죽을 맛이지만.
서연이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왜 그렇게 웃어?”
“왜 고생을 하나 싶어서.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평생 이렇게 살잖아. 생수 한 병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인데 난 베니스 트로피를 받고도 눈물이 안 났어.”
내 말에 서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힘든 와중에도 내가 농담을 하니 그녀의 표정이 좋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햇볕이 뜨겁지 않은 아침과 밤에 집중적으로 탐사를 하고, 낮에는 쉬거나 의사부부를 도울 생각이었다. 열악한 환경이라 의사부부도 하루에 6시간 정도 일하고 있었다.
해가 지자 바로 탐사에 들어갔다.
밤에 4시간이나 했는데도 찾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탐사를 시작했다. 마을 외곽을 돌며 탐사했는데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갈수록 마을에서 멀리 나갔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5일 내내 탐사를 해도 물의 흐름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결국 코이카 아프리카 지부에 가서 인근 부족의 우물 지도까지 확보해서 지하수의 흐름을 분석했다.
확인해 보니 인근 부족 마을도 물이 말랐다.
극심한 가뭄 때문이었다. 우기 때 생기는 지하수는 건기 때는 마를 테니 큰 수맥을 찾아야 했다.
아침과 저녁에만 탐사를 해선 답이 안 보일 듯했다. 해서 파라솔까지 공수한 뒤 낮에도 탐사를 했다. 내가 힘들어 보였는지 이동할 때마다 서연이 파라솔 설치를 도왔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갔다.
원래 우물이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지도를 만든 뒤 수맥이 바뀌었다는 가정 하에 찾기 시작했다.
인근 다른 부족 중 물이 마른 곳과 아직 살아 있는 곳.
최근에 물이 마른 곳과 오래전에 마른 곳.
각 부족 우물의 수량까지 측정해서 계산했다.
함께 지도를 보던 서연이 말했다.
“이 마을과 이 마을은 수맥이 연결된 것 같은데, 왜 가운데 있는 우리 마을만 물이 마른 거야?”
“확실히 이상하지?”
“지하수가 흐르던 곳이 무너진 거 아닐까?”
“나도 그렇게 보고 있어. 여기 어딘가에 수맥이 있다는 건데.”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을과 마을 사이 황무지다.
원래 수맥이 흐르던 곳인데 지하 어딘가의 암석 지대가 붕괴하면서 지하수 흐름이 바뀌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거고.
천천히 지형과 지도를 살펴보았다.
약 22킬로미터 거리의 부족 마을에선 물이 나온다. 약간 높은 지대다. 그 뒤편 상당히 먼 곳에 꽤 높은 산이 있다. 저 산이 수원지일 가능성이 크다.
저 산을 따라 이어지는 마을에는 물이 나온다. 그게 22킬로미터 앞에 있는 마을까지만 이어지다 수맥이 끊겼다. 우리가 있는 마을을 비롯해 두 개 마을 우물이 마르고,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선 또 물이 나온다.
높은 산과 물이 나오는 마을을 일직선으로 긋고. 그 마을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까지 또 줄을 그었다. 우리가 있는 쪽에서 우측으로 약 800미터 지점.
두 마을의 우물은 수량이 풍부하고 수압도 세다. 수시로 휘어지는 수맥이 아닌 일직선이라는 뜻. 물이 마른 마을 지하에도 원래 일직선이었을 것이다. 물살이 세서 암반이 깨진 것일지도 모른다. 수만 년에 걸쳐 물이 흘렀으니.
암반이 깨지거나 무너지면 물은 새 길을 연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 있는 아래는 암반 지대라는 뜻.
바로 탐사를 해 보았다.
정말 암반 지대였다. 이 암반 지대 옆으로 물이 돌아나가고 있다는 의미다. 물이 끊겼다가 이어지는 각도는 약 45도. 각도를 재서 지도에 표시를 해 보았다.
현 위치에서 우측으로 약 600미터.
“가 보자. 저기쯤일 것 같아.”
현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걸었다.
600걸음 때 탐사를 시도하니 암반이 잡힌다. 다시 이동.
620걸음에서 다시 탐사하니 마찬가지.
640걸음 부근에서 탐사해 보았다.
“저항이 낮아졌어.”
“어디 봐.”
둘이서 쪼그려 앉아 작은 모니터를 보았다.
그래프 상에서 저항 수치가 뚝 떨어졌다.
이 부근 일대에 물이 있다는 뜻.
지금 위치에서 5미터 간격으로 6번을 재 보았다.
약해지는 곳과 강한 곳에 표시도 하고.
그리하여 수맥의 흐름을 찾았다.
수맥이 암반지대 옆으로 아주 큰 원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나와 서연이 서 있는 곳은 수맥의 흐름 바로 위다. 이 흐름대로 커다란 원을 그려 나가면 2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의 우물과 이어진다. 지도에 원을 그려 보니 확실했다.
정확히 가운데인지 확인하기 위해 흐름의 좌우를 오가며 4번을 더 쟀다. 그러곤 가운데를 잡아냈다. 유난히 개미집이 많은 곳이었다. 개미가 물이 있는 곳에 집을 지은 건가.
“여기야.”
“드디어 찾았네.”
나와 서연 환하게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마을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마을 가운데를 관통하는 수맥이 멀리서 끊어진 상태다. 이전 시추 때는 수량이 적은 지하수를 포착하고 시추했을 터였다. 깨진 암반에 고여 있던 물이었을 수도 있고.
몇 시간 뒤 코이카 직원을 불렀다.
그에게 지도를 보여 주며 수맥이 있음을 설명했다.
그가 정말 반색했다.
“감독님이라서 관찰력이 다르시네요. 왜 물이 말랐는지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감독님이 찾은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바로 시추 가능하죠?”
“네. 내일 시작할까요?”
“그러면 좋죠.”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계산하고 탐사하느라 하루가 훌쩍 갔다.
아프리카 마을에 온 지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나와 서연의 꼴은 난민 수준이었고.
* * *
시추 18일째.
굴착 드릴이 힘차게 땅을 뚫었다. 프레셔 기계의 호스에서 하얀 돌가루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사방은 온통 돌가루투성이고, 주변에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주민이 잔뜩 모였다. 나와 서연도, 의사부부와 코이카 직원도 자리를 잡고 시추를 보았다.
이렇게 구경하는 것도 벌써 일주일째다.
지하에 암반이 있으면 한 달 넘게 걸리고, 무른 흙만 있으면 이틀 만에 굴착이 끝난다. 그런데 강한 수맥이 있는 만큼 시간이 꽤 걸렸다. 주변 암반이 물길을 형성케 하는 터라.
지하수가 140미터쯤에 있다고 봤다.
언제 물이 터질지 모르니 지켜봐야 했다.
주민도, 의사부부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3미터짜리 배관 로드가 45개나 들어갔다.
140미터는 들어갔다. 그러니 오늘 터질 가능성이 컸다.
시추 작업 5시간째.
다들 돌가루를 뿜어내는 시추기만 보고 있었다.
밥 먹을 겨를도 없었다.
기술자들이 새 배관 로드를 장착하려던 그때!
한 기술자가 배관에 귀를 기울였다.
앉아서 보던 모든 이들이 벌떡 일어났다.
아픈 몸을 이끌고 온 동네 주민도 시추기 옆으로 왔다.
시추기는 굴착을 중단했다.
배관에서 들리는 크르르릉 소리.
배관에 귀를 댄 기술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됐다!”
“온다!”
“물이 올라오고 있어!”
쿠르르릉 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힘찬 물줄기가 배관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 순간 정말 소름이 돋았다.
세상에 이렇게 감격스러울 데가!
뿜어져 오르는 물줄기가 사방으로 퍼지며 빗물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러곤 배관 위로 물이 콸콸콸콸 쏟아졌다.
“여보!”
의사부부도, 나와 서연도 서로 얼싸 안고 방방 뛰었다. 금세 온몸이 흠뻑 젖고 발이 진창에 빠졌으나 상관없었다.
이제 목욕할 수 있다! 씻을 수 있다고!
마을 주민과 아이들은 소리 지를 기력도 없어서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물세례를 받았다. 입을 벌리고 물을 먹는 아이도 있고, 넋이 나간 채 물줄기를 보는 이들도 있고.
모인 모두가 감격에 젖은 얼굴로 여전히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물을 보았다. 기술자들은 능숙하게 시추기 해체 작업을 실시했다. 물을 아끼려고 바로 배관 입구를 막기도 했고.
코이카 직원이 내게 넙죽 인사를 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이건 정말 기적이네요.”
“소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수량은 풍부하겠죠?”
“그럼요.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보니 위치를 제대로 잡은 모양입니다. 수맥도 큰 편이고요. 여기서 물을 올리면 아랫마을의 물이 마를 수도 있는데, 기술자들이 아무 말 안 하는 걸 보면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물이 뿜어져 나오는 걸 더 보고 싶었으나 이것으로 만족했다. 그 귀한 물을 땅바닥에 쏟아지는 게 아깝기도 했고.
코이카 직원 말했다.
“펌프 발전기 대여와 관리 비용은 부족장이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부족장이 설치해 줘야 도난당하지 않거든요. 현지인이 돈을 대면 주인 의식도 생기고요.”
“나중엔 마을 주민이 관리하겠죠?”
“그럼요. 물 한 동이에 얼마씩 받고 팔아서 발전기 대여비를 충당할 겁니다.”
물이 터진 날.
마을 축제를 벌였다. 멀쩡한 사람보다 아픈 사람이 더 많아서 떠들썩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고마움을 전하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찾아왔다. 우리 손을 잡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메마른 눈물을 흘렸다.
의사부부와 우린 근 한 달 만에 라면으로 포식했다.
주민 대부분이 굶다가 우리가 온 뒤로는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과 물을 마셨다. 배급받은 물을 아끼려고 맨 빵만 먹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우리도 ‘물 쓰듯’ 물을 마시진 못했다.
의사 남편분이 말했다.
“한국에 가시면 이번 일을 알려 주세요.”
“인터뷰가 좀 귀찮아서요.”
“그렇긴 하겠네요. 그런데 감독님과 서연 씨가 하신 일이 전해지면 후원금도 늘어나고, 봉사단원도 많아집니다. 돈보다는 인력이 좀 부족한 편이죠. 특히 아프리카는요.”
서연이 말했다.
“내가 전할게. 나야 익숙하니까.”
“그래. 난 병풍 노릇 좀 할게.”
“응.”
의사 부부에게 물었다.
“언제 귀국하실 거예요?”
“3개월 더 있을 겁니다. 두 분이 가져오신 약품이 충분해서 제가 진료하는 분들이라도 낫는 거 보고 귀국하려고요.”
“귀국하신 뒤에는요?”
“저희 원래 큰 병원에서 근무했어요. 아내와 논의해서 1년만 NGO 활동하고 보건소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정해진 건 없어요. 섬 보건소에서 일할지, 도시에서 일할지.”
“그렇군요.”
네오스타 스튜디오 전속 주치의를 맡아 달라고 하려다 관두었다. 우리 직원보다는 보건소 환자에게 의사부부가 더 필요하다.
아프리카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해외여행의 마지막 밤이기도 했다.
정말 많은 걸 보고 듣고 겪었다.
특히 아프리카에선 ‘삶의 존엄’을 직접 체험했다. 단어만 보면 이 말의 무게를 모른다. 짐작하는 건 짐작에 불과할 뿐이고. 나와 서연은 사람의 죽음을 9번이나 봤다.
영화나 내 삶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것. 희망과 노력, 그리고 긍정.
막연히 알고 있던 그런 단어들의 실체를 확인했을 뿐.
그리고 베풂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캄보디아에서 한 마을 노인이 내게 그랬다.
‘사람의 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운이 없다고 하는데, 아니야.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일세. 다만, 평소에 노력해서 앞으로 찾아올 운을 잡을 수 있어야 하네. 자네처럼 젊은 나이에 운이 좋은 사람은 남에게 베풀어야 찾아온 운이 꺾이지 않는다네. 그리고 자네는 그걸 실천하고 있고. 본능으로 아는 거겠지.’
그 말을 하고 노인은 허허허 웃었다.
노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직감 혹은 본능으로 이번 여행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찾아온 운을 유지하고 불행을 막으려고.
아무튼 두 달에 걸친 여행은 끝났다.
이번 여행이 아주 서서히 내 인생을 바꿀 것 같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높아지고 넓어진 느낌이니.
* * *
서연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고생한 서연과 내게 보상이라도 하려고 미국에서도 일주일 더 놀러다녔다. 라스베이거스에도 가고, 에너하임에 있는 디즈니랜드에도 가고.
서연이 한국으로 떠난 뒤.
그제야 후반작업 중간 결과물을 확인했다. 수호가 전화 통화 때 호들갑을 떨어서 꽤 궁금하기도 했다. CG 콘티도 본 녀석이 왜 그러나 싶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림이 나왔다.
액션씬 10분 분량을 누가 재편집을 해 놨는데 콘티와 느낌이 달랐다. 콘티대로 영화를 찍어도 편집에 따라 영화가 달라지기는 한다. 그래도 예상하는 그림이 있는데, 내가 본 편집본은 그게 아니었다.
연결되는 영상과 분할 컷이 정말 기가 막혔다.
한마디로 콘티보다 훨씬 나았다.
당장 수호를 불렀다.
“이거 누가 재편집했어?”
“그게…”
수호가 얼버무린다.
편집 센스가 대단한 친구다.
내가 편집한 걸 바꿀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텐데.
대체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