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두 영화 동시 제작
“씬 26! 3에 2!”
“액션!”
닫히기 직전의 식당 뒷문.
주인공 이재훈이 경악한 얼굴로 정면을 본다.
문이 닫히면서 뒤로 물러나는 재훈.
“컷. 바로 다음 쇼트 갑니다.”
재훈이 빠지고 내가 카메라를 들고 그 자리에 섰다.
주인공이 반쯤 닫힌 문 사이로 식당 창밖을 보는 씬.
“그림자 살인마 대기!”
살인마 역할의 배우가 식당 밖에 나타났다.
새카만 붕대를 온몸에 둘둘 만 것 같은 모습이다. 거기에 같은 톤의 검은 망토를 둘렀다. 얼굴도 마찬가지. 그리고 왼손에는 갈고리 모양의 낫이 들렸다.
수혁이가 문을 잡았다.
“액션!”
수혁이가 슬쩍 밀어 닫히는 문 사이로.
그림자 사나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편집 때 슬로우를 걸 장면이다.
이내 닫히는 문.
바로 카메라를 돌려 쇼트를 이었다.
이재훈이 곧장 다음 쇼트 연기를 이어갔다.
뒷걸음치는 재훈. 발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눈은 부릅뜬 채 문쪽을 보고 있고.
사람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는 그림자 사나이를 보고 매우 충격을 받은 모습. 그림자가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주인집 할머니의 말이 진짜임을 확인한 순간이다.
발을 떼려 안간힘을 쓰지만 떨어지지 않는 발.
숨이 점점 거칠어지던 그때.
이재훈이 움찔움찔한다.
그림자 사나이가 식당에 있는 사람들을 마구 난자하는 사운드가 이 부분에 들어간다.
입을 손으로 막고 비명을 누르는 재훈.
떨어지지 않는 발을 마침내 떼고 뒤로 뒤로 물러난다.
손에 든 봉지에선 치약과 비누 따위가 투툭 떨어지고.
그대로 이재훈은 허겁지겁 달려가고, 카메라는 빠르게 재훈을 쫓아가다가 서서히 멈춘다.
점점 멀어지는 재훈.
“컷! 오케이!”
바로 다음 촬영 장소로 이동했다.
영화가 대체로 어두운 편이라 조명은 거의 안 썼다. 그림자 사나이가 나타난 이후로는 계속 밤이 이어진다.
실제 촬영 속도가 매우 빨라서 아무래도 5일은 단축될 것 같았다. 낮에 폐가에서 고립된 씬을 찍고, 밤에 추격전을 찍으면 될 것 같고.
* * *
흉가처럼 꾸미고 여러 장치를 한 세트 방.
얇은 판자로 벽을 만들었는데 벽마다 다른 장치가 되어 있다. 구멍이 뚫리고 벽지만 바른 곳도 있고, 이중으로 만들어진 벽도 있다. 앞 벽은 중간에서 수평으로 잘리고, 뒷벽만 바닥과 이어진 상태. 가운데가 잘린 앞 벽과 뒤 벽의 벽지 무늬가 정확히 일치해서 카메라로 찍으면 벽이 하나로 보인다.
이 세트 방 가운데에 360도 VR 카메라를 설치했다. 기존 VR 카메라는 앞뒤 두 곳에 렌즈가 있어서 ‘어안’ 영상으로 찍히지만, 특별 제작한 카메라는 전후좌우 네 방향에서 찍는다.
이재훈이 이마에 쓰고 찍을 수 있는 장비도 마찬가지.
재훈이가 방에 들어와 대기했다.
촬영 내내 의도적으로 현장 분위기를 어둡게 했다. 밥 먹을 때도 농담을 안 했다. 재훈이는 시종 인물에 몰입하고 있었고. 주인공이 정신 분열로 미친 상황인 터라 제법 연기력이 필요했다. 살인마에게 쫓기는 상황이기도 하고.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다가 곧 어두워졌다.
낮이라서 창문과 뚫린 이중벽 위에만 검은 천막을 쳤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은 분산시켰고. 이 빛이라도 있어야 암흑 상태인 방 안을 찍을 수가 있었다.
재훈이가 바로 감정에 몰입했다.
잠시 후 그가 신호를 보냈다.
“재훈아, 이따금 꼼짝 말고 멈춰. 한 5초 정도. 그게 편집점이야.”
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액션.”
겁에 질린 채 벽에 기대앉아 있는 재훈.
자꾸만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괴상한 소리가 들린다.
그때 타타타탁- 하고 천장에서 뭐가 뛰어가는 소리.
재훈이 입을 벌린 채 천장을 보았다.
주연배우 시나리오에는 없는 상황이다.
놀라 천장을 보는 재훈.
정말 놀란 모습이다.
또 타타탁! 하고 뭔가가 뛴다.
재훈이가 자신도 모르게 팔을 매만졌다.
헤드폰을 끼고 직접 들으니 나도 섬뜩했다.
이 영화 공포의 절반이 소리다.
그 소리가 계속 들린다.
귀를 막은 채 미칠 듯한 표정을 짓는 재훈.
급기야 ‘히히힛’ 하는 기분 나쁜 웃음까지 들리고.
재훈이 일어나 천장을 보던 그때.
창문이 아주 느리게 열린다. 관객만 이 장면을 목격한다. 열린 창문에서 시커먼 손이 스윽 하고 들어온다.
어두운 터라 재훈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방으로 들어왔던 손은 다시 나가고.
탁탁탁- 하는 소리가 멈추자 그제야 재훈이 창문을 본다. 창문이 열려 있었는지 닫혀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가 창가에 조심스레 다가가 창 밖을 본 뒤 창문을 닫는다.
재훈이 잠시 창문을 바라보다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또 탁탁탁- 하는 소리가 천장에서 들려온다.
그때 창 밖에 비치는 시커먼 사람의 얼굴.
“시간 경과.”
내 말에 재훈이 벽에 기대앉은 채 퀭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환각에 빠져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모습.
이 장면이 약 1분간 이어졌다. 이때 맨발로 걷는 소리가 들려온다. 천장이 아닌 바닥에서. 관객은 자연스레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볼 것이고.
바닥에 발목이 잘린 발이 보인다.
이중벽의 트릭이다.
발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으로 편집할 터다.
얼마 뒷벽 가운데에서 머리카락이 스멀스멀 내려온다.
마치 벽에서 처녀 귀신의 긴 머리가 나오는 듯한.
긴 머리카락이 재훈의 정수리에 닿는다. 이내 어깨까지.
재훈은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어 있고.
급기야 머리카락이 재훈의 얼굴을 덮는다.
“으헉!”
재훈이 비명을 지르다 입을 틀어막는다.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위로 올라가며 사라진다.
뒤로 벌러덩 누운 채 자신이 기대고 있던 벽을 보는 재훈.
이번엔 벽에서 시커먼 손이 스윽 나온다.
뒤로 기다가 멈추는 재훈.
그때 뒤쪽 벽에 여자의 얼굴 나타난다.
벽에 얼굴이 붙어있는 괴기스러운 현상.
그 얼굴을 본 재훈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숙였다. 통곡하듯 무릎을 꿇은 자세로 부들부들 떤다.
재훈이가 진짜 놀란 것 같다.
“컷.”
단역 배우가 벽에서 얼굴을 뗐다. 그녀의 얼굴형태 그대로 벽에 구멍이 나 있었다. 벽지를 밖에서 뜯고 얼굴을 대는 장면. 이 역시 몇 초 잘랐다가 이어붙인다. 재훈이 동작 중 잠시 멈추는 장면이 편집점이다.
재훈은 쓰러지듯 누웠다.
실제로 무서웠는지 얼굴이 핏기가 가신 모습.
“힘들어?”
“아, 죽겠어요. 아까 그 천장에서 들렸던 소리! 연기고 뭐고 듣는 순간 소름이 확 돋았잖아요. ”
“그림 잘 나왔어. 나도 무섭더라.”
“각오는 했는데 이건 진짜. 소리 좀 어떻게 하면 안 돼요? 안 그래도 방에 혼자 있어서 무서워 죽겠구만.”
“네가 무서워야 관객도 무섭지.”
“쩝. 할 말이 없네.”
바로 자리를 떴다.
“밤에 다시 갑니다.”
“예!”
* * *
촬영 10일째.
낮에는 쉬고 밤에만 살인마와 주인공이 쫓고 쫓기는 장면을 찍었다. 재훈이가 미치광이처럼 달리다 자빠지고 또 달리다 넘어지는 씬. 도중에 유령처럼 서 있는 사람들을 배치했다.
달리던 재훈이가 그 귀신 같은 모습에 놀랐다가 다시 보면 사라지고 없다. 재훈이가 못 보는 상황에서도 관객만 보고 놀라도록 누가 늘 지켜본다.
며칠 동안 찍은 낮 씬도 마찬가지였다. 주인공 가족이 마을에 와서 도피 생활을 할 때. 귀신들린 듯한 마을 풍경을 관찰자 시선으로 찍었다.
뜬금없이 아이 하나가 지붕 위에 서 있거나, 저편 나무 위에 목을 맨 시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거나. 슈퍼 주인이 생필품을 산 뒤 나가는 주인공을 이상하게 노려보기도 하고.
주인공의 환각 혹은 심리 상태다.
빚에 쫓겨 도피 생활을 하고, 가족의 앞날을 망친 남자의 피해망상이다. 다들 자신을 비난하고, 욕할 거라는.
어쨌거나 작품성보다는 오락성에 중점을 두고 촬영을 이어나갔다. VR 기어로 영화를 보는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시각 및 사운드 효과를 극대화했다.
추격전을 사흘에 걸쳐 찍고 ‘그림자’가 주인공의 아내와 아들을 무참히 죽이는 장면을 찍었다. 끔찍하기에 그림자로 표현했다. 이때 이후 주인공은 자꾸만 아내와 아들의 환청이 들리기 시작한다. ‘여보, 살려줘.’ ‘아빠, 왜 그래?’ 하는.
그림자 사나이는 주인공의 다른 자아다. 생을 포기한 자아를 의미했다. 그래서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죽으려니 죽음의 공포와 갈등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림자 살인마와 주인공의 추격과 격투다.
모든 괴현상과 이상한 주민의 행동이 귀신이 들려서 그런 것이 아닌, 주인공의 환각이 빚어낸 일이라는 것도 그때 드러날 테고.
그리하여 마지막 고립씬.
주인공이 살인마와 추격전과 격투를 벌이다 가까스로 도망 나와 처자식이 있는 집으로 왔는데, 아내와 아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림자 살인마는 주인공이 숨은 집까지 따라오고.
또 다른 방에 재훈이가 대기했다.
이번에는 재훈이가 이마에 VR 촬영 장치를 썼다. 정신없는 상황을 찍게 되는데, 영화를 보는 사람이 어지럽기 때문에 고정된 카메라로 찍은 영상과 교차 편집할 예정이었다.
“자, 갑니다! 레디!”
“씬 76에 1에 1!”
“액션!”
덜컹덜컹. 덜컹덜컹.
그림자 살인마가 밖에서 문을 흔든다.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문을 막고 있다. 경첩이 떨어질 듯 위태롭다. 그 상태로 한동안 문을 잡고 밀며 버틴다.
“컷! 이대로 다음 씬 연결!”
재훈이가 녹초가 된 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그의 시선으로 자신의 손을 본다. 말라붙은 핏자국. 왜 피가 묻은 건가 싶어 한동안 손을 보고 있다.
이 장면에서 편지를 읽는 내레이션이 나오고.
“컷. 문을 열고 나가는 씬으로 연결!”
문 앞에 서 있는 재훈.
망연자실한 얼굴로 방을 본다. 손에는 피가 묻은 편지지가 있다. 친구에게 보내려는 편지다. 살인마에게 쫓기고 가족이 사라졌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 편지지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문을 열었다. 눈 부신 빛이 쏟아진다.
“컷. 카메라 설치하고 다시.”
급히 분장팀이 들어와 재훈이가 쓴 촬영 장비를 벗기고 분장을 고쳤다. 옷에 이미 피가 묻어 있지만 뚝뚝 떨어지게 분무기로 더 뿌렸다. 이때 관객 대부분이 주인공이 그림자 살인마였다는 걸 눈치챌 것 같다.
“액션!”
재훈이가 좀 전과 똑같이 문을 막는 연기를 했다.
이전 연기와 다르지만 시점도 다르기에 상관없었다.
이 촬영을 마지막으로 강원도 촬영은 끝났다.
다음 촬영은 서울에서 편지를 받는 주인공의 친구와 주인공 가족이 빚 때문에 도피하는 장면을 찍는다.
* * *
15일 만에 촬영이 끝났다.
한 지역에서 주인공 단독 촬영이 워낙 많았다.
조명과 카메라 설치에 드는 시간도 별로 없었고.
서울에서 마지막 촬영을 끝낸 뒤 바로 편집실로 향했다.
보름 만에 편집을 끝냈다.
일반 촬영 영상과 VR 촬영 영상이 약간 다르기에 VR 영상이 나오면 관객이 이리저리 주변을 돌아볼 터였다. 그때마다 한 가지 이상의 섬뜩한 뭔가가 나온다. 주인공이 마을을 보고 있을 때, 뒤에 웬 여자가 물끄러미 보고 있다던가 하는.
혼자서 편집본을 감상했다.
그럭저럭 매끄럽게 나왔다.
완벽하진 않아도 만족스러웠다. 깜짝 놀라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섬뜩함을 주는 장면도 많다.
촬영 도중에 미국에 여러 차례 전화를 했고, 시안이 나올 때마다 선택을 했다. 한데 거대 로봇이 도시를 파괴하는 장면 일부 중에 CG 팀이 잘못 이해한 콘티 초안이 있어서 다시 맡겼다. 그 바람에 20일 정도 딜레이 되었다.
20일 여유가 생긴 터라 공포물 영상 보정 작업을 지켜보았다. 회색 질감의 영상에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었다. 주인공이 방에서 사투를 벌이는 장면 등은 콘트라스트를 주고 찍긴 했는데, 보정 작업에서 명암 대비를 더 주었다. 어둠 속 인물이 조금 더 잘 보이도록.
이어 사운드를 입히는 작업도 녹음실에서 상주하며 일일이 관여했다. 공포 영화는 소리만으로도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기에 제법 신경을 썼다.
그렇게 보름 만에 최종본이 나왔다.
사운드를 입혀 놓으니 영화가 200% 무서워진다.
서연과 함께 VR 기어를 착용하고 보았는데.
서연이 옆에서 난리가 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찌나 비명을 지르고 내 팔을 잡고 늘어지던지. 손을 잡아 주니 손에 땀도 흥건하고.
그러다 후반에 가선 멍하게 영화만 보고 있었다.
서연은 이번 공포물이 어떤 내용인지 모르고 봤다.
영화가 끝나고 그녀가 기어를 벗었을 때.
표정이 슬퍼 보였다. 휴… 하고 한숨도 쉬고.
“왜, 슬픈 느낌이 들어?”
“처음엔 무서웠는데 살인마 정체를 알고 나니까, 주인공이 불쌍해. 샌드위치 주인공을 보는 것처럼. 내가 이상한가?”
“아니야. 의도한 거야.”
“내가 악몽을 꾸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그래?”
“응. 악몽을 영화로 보여준 거야.”
“어쩐지 안도의 한숨이 나오더라.”
안도의 한숨이라.
내가 의도한 게 통한 모양이다.
악몽이었음에 안도하는 것처럼.
이상하다는 서연의 말도 맞다.
처음엔 으스스하다. 그다음엔 이상하고. 살인마가 나타난 뒤로는 공포스럽고 괴기스럽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는 묘한 슬픔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상한 거다. 멍하게 슬픈.
수혁이가 쓴 초고를 봤을 때 내 느낌이 그랬다.
역시 영화라는 건 찍어 봐야 안다.
편집까지 다 해봐야 어떤 영화인지 알게 된다.
특히 공포 영화는 시나리오 외적인 게 많기도 하고.
이를테면, 한 인물이 밤에 산길을 걸어갈 뿐인데도 공포물 하나가 나온다.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면? 게다가 그 주변에 잡풀이 무성한 묘지가 있다면? 시나리오를 볼 때는 그냥 그렇지만 영상화가 되면 달라진다.
이번 영화는 불안과 안타까움. 두 가지에 집중해서 찍었다. 공포는 수단이었고. 그리고 주인공에게 최대한 몰입할 수 있게 몰아갔다. 감정이입까지는 아닐지라도 같은 혼란과 두려움이 전달되게끔.
그런데 내가 의도한 점을 서연이 그대로 느꼈다.
사실 공포 영화로서 공포만 충실히 해도 되지만, 주제의식에도 신경을 썼다. 현대인 3부작 중 ‘불안’이 주제이기에.
악몽의 꾸고 난 뒤의 안도감도 의도한 부분이다.
이걸 관객들도 같이 느껴야 할 텐데.
회사에서 바로 스트리밍 작업을 했다.
편집할 때 포털에 예고편과 함께 광고를 하고, 플래닛 케이에도 올렸다. 해외 각 지사 사이트에도 예고편을 올렸고.
한 달 전부터 영화 시작 전에 붙일 광고도 모집했다. 플래닛 케이 대다수 콘텐츠는 회원이 되면 무료로 감상하지만, 자체 제작 작품은 광고가 붙는다. 단가도 꽤 높다. 단일 콘텐츠를 전 세계 천만 회원이 볼 수도 있으니.
그런데 광고가 한 달 만에 20편이나 붙었다. 광고가 로테이션 되는데도 홍보 효과가 있다고 본 모양이다. 광고주 요청에 따라 20편 이상 붙일 수가 없어서 단가도 더 올라갔고.
해서 광고 수익만 4억이 들어왔다.
스트리밍 준비를 완료하고 개봉 날짜를 공개했다.
호응이 상당히 컸다. VR 기기로 보는 플래닛 케이 첫 공포물이라 기대하는 회원들이 그만큼 많았다.
그리하여 출국 당일 아침.
영화 ‘그림자 사나이’를 개봉했는데.
스트리밍 수치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동시 시청자 수가 무려 90만.
오전 10시라 한국 접속자 수는 1만도 안 되었다. 북미는 밤 9시다. 밤에 공포물을 보려는 북미 쪽 시청자들이었다.
1시간 더 지나자 동시 시청자 수가 120만으로 뛰었다.
20분이 더 지나 영화가 끝났다.
직원들이 모두 모여서 게시판을 보고 있었는데.
“우와!”
“와~!”
직원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게시판 댓글이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그랬다. 수만 명이 동시에 댓글을 달았는데, 그게 데이터에 순간 정체되었다가 한꺼번에 올라오면서 발생한 일이다. 순식간에 댓글이 올라왔다가 밀려나는 통에 흥미로운 제목의 댓글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 중 ‘DAEBAK!!!!’ 이라고 쓴 댓글을 클릭했다.
영어로 무서워서 울었다는 내용이다.
악몽을 꾼 것 같다는 남자의 댓글도 있고, 자신도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어서 더 무서웠다는 말도 있었다.
그 뒤로 거의 다 비슷한 댓글 내용이었다.
분명 영화를 보는 데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는.
그리고 안도했다는.
서연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청자 수가 180만까지 오른 걸 보고 공항으로 향했다.
출국 수속을 밟을 때였다.
조감독 에디에게서 연락이 왔다.
-와우! 끝내줍니다! VR 공포 영화가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사운드가 정말 예술이네요! 계속 들리는 이상한 소리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잖아요! 특히 천장에서 들렸던 아이 발소리! 직접 딴 거예요?
“그래.”
-그 발소리 때문에 오줌 지릴 뻔했습니다! 지금 회사에서 직원들이 단체로 관람하고 있는데요!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어요! 내가 지옥에 온 건가? 하하하하!
조감독의 흥분한 목소리를 듣고 전화를 끊었다.
공포 영화가 공포를 주면 제 역할 한 거지 뭐.
기분 좋게 게이트를 통과했다.
* * *
네오스타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회사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국식 제작 시스템에 적응했는지 한가하게 늘어져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다들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촬영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내가 도착하자 각종 시안과 초안 등 문서가 잔뜩 배달되었다. 보안상 각 팀이 보관하고 있던 문서들이다. 절반 이상은 내가 한국에서 이미 선택하고 결정한 것들이기에, 특수효과팀과 CG 팀은 벌써 작업을 시작했다.
실사로 찍을 부분에 대한 콘티 초안도 잡혔다.
난 책상에 앉아 실사 콘티. CG가 들어가는 촬영 콘티. CG 콘티를 면밀하게 살폈다.
그림책처럼 만들어진 책을 한 장씩 넘기며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동시에, 현장에서 촬영할 부분들을 이미지 메이킹했다. 내가 생각한 것과 약간 달라도 큰 차이는 아니기에 그냥 넘어갔다. 지금은 스태프가 짠 초안대로 가는 게 맞다.
4시간에 걸쳐 실사 콘티 분석만 끝냈다.
조감독 에디가 내 사무실에 들어왔다.
“제이슨은 몸을 좀 만들고 있어?”
“예. 그런데 제이슨이 지금 에이전시가 없어요. 회사에서 매니지먼트를 겸한다고 했는데, 그를 첫 소속 배우로 하는 건 어떨까요? 제가 물어보긴 했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어떻게 생각한대?”
“좋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말을 안 했는데 세 편 전부 계약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확실해서 좋지.”
할리우드 톱스타들은 영화를 다 찍기 전까지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쉽게 빠지기 위해서. 그런데 제이슨은 신인이고, 에이전시도 없다.
이참에 차기작까지 계약하고 우리가 에이전시도 맡는다.
“계약하도록 해. 세 편 전부 계약하고, 액셀이 주인공인 개별 영화도 두 편 이상 하는 것으로. 에이전시 계약금 후하게 주고, 흥행에 따라 출연료가 오르는 것은 물론 수익 배분까지 붙여 준다고 해. 이제 우리 배우니까.”
“알겠습니다.”
“몸은 너무 탄탄하게 만들지 말고, 촬영 전에는 다소 약하게. 이후 촬영 중에 운동을 계속해서 점점 단단해지도록 하자고. 본인은 좀 힘들겠지만.”
“제이슨도 그 정도는 알더군요. 생각보다 똑똑한 친굽니다. 기회를 준 우리 회사에 보답할 줄도 알고요.”
“다행이네.”
조감독이 나가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1층 카페에 직원들이 한가하게 쉬고 있다가 눈인사를 해 온다. 일만 한국식으로 할 뿐이다.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아메리카노죠?”
바리스타의 말에 미소가 지어졌다.
미국인이 아메리카노라고 말하니 어색하다.
다른 회사에서는 로스팅 된 커피를 한 번에 많이 내려 재워 두고 보리차처럼 마신다. 유리 주전자에 든 커피가 그거다.
그런데 우린 한국 커피전문점처럼 직접 로스팅하고 브렌딩해서 한 잔에 커피를 내린다. 그래서 매우 진하다. 미국에서는 보편적인 커피가 아니라서 직원들도 ‘아메리카노’라고 부른다. 사무실에 있는 그 묽은 커피는 그냥 커피고.
해서 직원들도 사무실 커피는 수시로 마시고, 진한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는 이 카페로 내려온다. 주변에 스낵바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컵라면, 과자, 음료수 모두 공짜다. 우리 직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컵라면과 멜론 맛 아이스크림이다. 한국에서 공수한.
커피를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직원. 농구 하는 직원.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는 직원. 그들이 날 보더니 저마다 눈인사를 했다.
잔디가 깔린 벤치에 앉아 산 쪽을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직원 숙소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아직 겨울이지만 날씨가 참 좋았다.
커피 맛도 기막히고.
그런데 좀 울적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괜히 감상적인 건지.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내가 외로움을 타나.
* * *
4일간 콘티를 확인하고 최종 결정을 했다.
초안에서 약간만 더 수정을 부탁했다.
다른 감독은 완벽하게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초안을 그리라고 할 텐데, 난 의견을 내는 것으로 끝냈다.
그다음 결정할 부분은 후반 작업이었다.
음악. 사운드. 영상 보정 팀 선택 등.
제작부장 엠마가 작성한 최종 문서도 점검했다.
최종 예산. 최종 촬영 회차. 촬영지 허가 등등.
최종 문서 확인까지 끝낸 후 스튜디오로 갔다.
특수효과 촬영에 필요한 기본적인 장비는 이미 설치되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대여하면 되고.
특수효과팀이 최종 소품을 만드는 동안.
보름이 훌쩍 지나갔다.
엠마의 호출을 듣고 특수효과팀 사무실로 갔다.
소품 제작실에 1미터 크기의 거대 로봇 모형과 우주 모선. 외계인 실물 모형이 있었다. 그린스크린을 통해 이 로봇들을 실제로 찍어서 실사에 붙여 CG 처리 한다.
거대 로봇은 모양이 좀 특이했다. 네 개의 기다란 다리. 얇은 유선형 몸체와 기다란 촉수 둘. 점액질 외피가 있어서 겉으로 보면 그냥 흉측한 생물체처럼 생겼다. 외계인의 형태와 비슷하다. 거미와 오징어를 합쳐놓았다고 할까.
“로봇은 무선 조종 가능하죠?”
“네. 거대한 체구 특성상 느리게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촉수의 끝에는 LED 램프를 안쪽에 숨겨 놨어요. 강한 빛을 내는데 그때 빔이 쏘아져요.”
촉수를 잠깐 살펴보았다.
안에 철사 같은 걸 박아 놨을 뿐.
“촉수는 무선조종이 안 되려나.”
“그건 어렵다고 하네요. 아시다시피 괴수가 움직이지 않을 때나 동작이 느릴 때만 이 모형을 쓰고, 빔을 쏠 때는 CG 처리를 할 수밖에 없어요.”
“네. 이대로 가야겠어요.”
모형 제작이 끝난 날.
촬영 날짜가 결정되었다.
주인공 액셀의 동선에 따라 촬영이 진행된다.
LA 다운타운. 롱비치. 샌디에이고. 애리조나 피닉스.
황무지. 그리고 다시 LA로.
영화 속 이미지가 좋았는지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주 방위군이 항공대대와 기갑부대를 비롯해 병력 1,000명을 지원하기로 했다. 주 방위군은 월 1회 주말 소집에 생업이 따로 있는 시간제 군인이다. 보조 출연으로 특별 수당을 받는 셈이다.
주 방위군 지원은 각각 1번씩. 지난번 어웨이커 때처럼 하루에 다 찍거나, 주말 이틀에 걸쳐 몰아서 찍어야 했다. 특히 전투기와 헬기 장면은 딱 한 번. 항공 교전 장면이라 이 역시 콘티를 보내 공중 기동 동선을 잡아 주었다. 기체 등은 CG 용 3D로 따로 찍어 두고.
그리하여 11일 후 토요일 아침.
LA 다운타운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거리에 스태프 200여 명과 보조출연자 500여 명이 모였다.
사진으로 확인한 장소인데 생각보다 배경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도로 폭은 그리 넓지 않다. 6차선 정도.
양옆으로 고층 빌딩이 즐비하고 저편 끝에 고풍스러운 건물인 중앙도서관이 자리했다. 그 뒤에는 미국 서부 최고층 빌딩인 US 뱅크 타워가 우뚝 서 있고. 초고층 빌딩과 옛 건물이 공존하는 그림이다.
건물 파괴 영상에 대한 허가는 받았다.
주인공이 정신없이 달려 처음 대피하는 곳이 LA 시청인데 시청 공무원들이 투철한 공익 정신으로 시민 대피에 앞장선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촬영 허가를 받으려고.
주말인데다 원래 교통량이 많은 곳이 아니라서 도로 세 블록 전체를 통제했다. 그리고 택시와 승용차, 트럭 등을 배치했다. 주요 도로가 아니지만 어쨌든 정체된 상황.
보조출연자들이 본인들 의상을 입고 거리로 나왔다.
출연자가 다양해서 직업군을 배치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을 향해 조감독 에디가 외쳤다.
“신호를 주면 일부는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서 도서관 상공을 보세요! 보행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는 차에서 나와서 무슨 일인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면 깜짝 놀라세요! 도서관 뒤편에서 대형 괴물이 나타날 겁니다! 괴물의 높이는 지상에서 250피트쯤 됩니다. 모두 저길 보세요!”
멀리 도서관 위로 큰 풍선이 올라왔다.
그게 76미터 정도에서 멈췄다.
“풍선 위치가 괴물의 높이입니다! 다들 괴물을 볼 때 저 풍선을 봐야 해요! 사운드로 신호를 줄 테니! 소리를 듣고 리액션하면 됩니다! 사람이 마구 죽어나가요! 옷은 불타고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저편에서부터! 저쪽까지! 뒤로 점점 물러나다가 사인이 나오면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세요! 팀장들에게 촬영 시트를 나누어 주었으니 기억이 안 나면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곧 출연자들이 차와 인도 등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도로가 좀 길어서 배치하는 데에만 30분이나 걸렸다.
분장을 한 제이슨도 백팩을 맨 채 내게 왔다.
주연으로서 첫 촬영이 대형 씬이라 꽤 긴장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한 달 동안 토요일에만 다운타운 씬을 찍어야 해서. 난리가 난 상황이 첫 주연 연기에 집중하기에도 더 좋다.
“제이슨.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어서 앞쪽 상황을 잘 몰라. 택시 기사가 나가자, 너도 나가서 무슨 일인가 보는 거야. 그때 저 멀리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건물이 파괴돼. 그리고 US 뱅크 타워 옆으로 괴물이 나타나게 돼.”
“그걸 보고 깜짝 놀라면 되는 거죠?”
“적당히 놀라. 액셀은 차분한 성격이니까. 그냥 뒷걸음치면서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는 정도.”
“알겠습니다.”
제이슨이 택시에 탔다.
도로 가운데쯤이다. 카메라는 제이슨을 근접 촬영하는 보조 카메라 하나. 택시 밖에 대기하는 스테디 캠 하나. 그리고 스파이더 캠이 건물과 건물 사이로 오가고, 드론도 스테디 캠이 지나가면 도로를 따라 비행하며 찍는다.
난 골목 안 스테이션에서 모니터를 보았다.
각 카메라가 찍는 모니터가 5개다.
이번에도 촬영이 곧 리허설.
“음향 스탠바이!”
“모든 카메라 스탠바이!”
조감독이 외쳤다.
“촬영이 시작되면 사운드에 따라 반응하면 됩니다! 다시 한 번 반응 순서 숙지하시고요!”
에디가 각 스태프 팀장들에게 콜을 보냈다.
스태프들은 빠지고 보조출연자만 도로에 남았다.
“올 레디!”
연출부가 스테디 캠 앞에 슬레이트를 댔다.
“씬 4. 테이크 1!”
“고!”
행인은 걷고 차량은 정체되어 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클랙슨. 제이슨은 택시 뒷자리에 앉아 무료하게 음악만 듣고 있고.
그때 멀리서 틀리는 쿵! 하는 소리.
땅을 울리는 진동 효과를 위해 카메라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제이슨도 택시기사도 이상을 감지하고.
다시 쿵!
택시 기사가 앞을 보다가 옆 창문을 내리고 머리를 내밀어 본다. 제이슨도 무슨 일인가 싶어 앞을 보고.
순간 울리는 소리.
크르하아아아-
거대한 괴물이 포효하는 소리가 도시 전체를 쩌렁쩌렁 우린다. 다시 들려오는 충격음과 진동. 택시기사가 나가자 제이슨도 나간다.
이때부터 스테디 캠이 찍는다.
도로에는 이미 많은 운전자가 차에서 나와 멀리 도서관 쪽을 보고 있다. 제이슨도 마찬가지.
순간 쿠쾅- 하는 소리와 함께 도서관 뒤쪽에서 큰 먼지 구름이 올라온다. 제이슨 옆에 서 있는 단역 배우들이 연기를 한다. 무슨 일이야? 지진인가? 스테디 캠이 그들을 찍다가 다시 제이슨 주변을 맴돌며 그를 찍는다.
그때 저편에서 비명과 폭발음이 연쇄적으로 들려온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안 시민이 차를 버리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난다.
키이이잉-
또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이 들리더니.
US 뱅크 타워 옆으로 거대 괴수가 나타난다.
“으악!”
“맙소사! 저게 뭐야!”
앞쪽에서 치징- 하는 빔 발사 소리와 폭발음이 연달아 들려오고 보조 출연자들이 허겁지겁 제이슨 쪽으로 달려온다. 이내 모든 출연자가 몰려오면서 순식간에 일대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제이슨도 이어폰을 뽑으며 뒤로 뒷걸음치고.
해일처럼 사람들이 도로 저편에서 밀려 나오기 시작한다. 금세 도로가 사람으로 가득해진다. 저마다 자기 먼저 살겠다며 사람을 밀치고 차 지붕을 타 넘는다.
“비켜!”
“밀지 마세요!”
사람들이 마구 밀치는 통에 아주머니 하나가 쓰러지자, 제이슨이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그 사이 시민 하나가 제이슨의 어깨를 치며 지나가고.
제이슨이 쓰러질 뻔했다가 그제야 사람들과 섞여 달리기 시작한다. 스턴트 맨들이 절묘하게 제이슨 앞뒤로 섞이며 달리고, 스테디 캠은 약속한 동선대로 제이슨 뒤를 잡으며 달린다.
“컷! 액셀 중심으로 다시 갑니다!”
제이슨 주변 상황을 중심으로 찍어 나갔다.
세 쇼트까지 끝내고 도로 앞쪽으로 이동했다.
출연자들이 도서관 쪽에서 마구 달려나오고 괴물은 빔으로 도서관을 파괴한 뒤 뚫고 들어온다. 그 뒤편 US 뱅크 타워는 중간에 구멍이 뚫린 채 상부가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고.
이어 도망가는 시민을 향해 괴수가 촉수로 빔을 쏴 댄다. 빔을 맞은 사람은 삽시간에 타들어 가 재가 되어 날리고 불붙은 옷가지는 불씨를 날리며 떨어진다. 그 바람에 도로가 온통 흩날리는 불씨와 재로 뒤덮인다.
이 씬을 개별 쇼트로 따기 시작했다.
“크레인 스탠바이!”
“스턴트 스탠바이!”
“고!”
괴물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시민들.
그때 자동차 하나가 바닥에서 퉁겨져 오르며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돌더니 다른 승용차 지붕으로 처박힌다. 스턴트맨인 승용차 운전자가 아슬아슬하게 차에서 나와 피하고.
달려오는 사람 중 스턴트맨들은 달리다 움찔하며 멈춘다. 빔을 맞아 일순간에 숯덩이로 변하게 될 이들이다. 스태프들은 불씨와 검은 재를 대형 선풍기 바람에 날린다. 그 와중에 건물 파편과 먼지가 양옆으로 무수히 터져 나온다.
도로를 이동하며 유사 쇼트를 계속 찍어 나갔다.
CG 처리하기 어려운 컷이 있을 수도 있기에 넉넉하게 찍어 놔야 했다.
빔을 맞는 사람들은 CG 작업 때 지운다. 사람이 순식간에 숯덩이가 되어 터져 나가는 모습과 타 버린 옷가지가 날리는 것도 CG 처리 한다. 빔에 맞은 건물이 파괴되고, 자동차가 나가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
수많은 사람이 재가 된 터라 바닥에 검은 재를 잔뜩 깔았다. 파괴된 차량이 배치되고 불씨를 날리는 옷가지는 공중으로 날릴 터다.
옆 사람, 앞사람이 마구 죽어나가고 건물이 폭발하듯 먼지를 뿜어내는 가운데 액셀이 정신없이 질주하는 씬.
제이슨은 검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으로 분장했다.
“고!”
건물 벽에 숨어 있는 제이슨. 위에서 건물 잔해가 우수수 떨어지고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 터져 나간다. 놀라 엉거주춤할 때 차량이 날아와 제이슨을 덮친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차!
“으악”
급히 건물 모퉁이로 몸을 빼는 제이슨.
“컷!”
실제로는 차가 없다. CG로 그렇게 입힌다.
“제이슨! 거기서 3시 방향으로 가로지를 거야! 그때 좌우 건물이 수도 없이 폭발해! 건물 파편과 먼지가 한꺼번에 널 덮치는 장면이야! CG에선 먼지와 파편의 양이 상당히 많아. 앞이 잘 안 보여!”
“네! 감독님!”
몹 씬 찍으랴, 개별 쇼트 따랴.
첫 촬영부터 정신이 없었다.
* * *
첫 촬영은 스펙타클하게 끝났다.
에디가 외쳤다.
“출연자 시민 여러분 아주 잘해 줬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도 촬영이 있으니 가족과 함께 출연하시는 것도 좋아요! 이것으로 오늘 촬영은 종료합니다!”
보조출연자들이 박수를 보내며 첫 촬영을 축하했다.
스태프들도, 출연자들도 온통 검은 재투성이였다.
대기하던 뒤처리 전문팀이 곧장 청소를 시작했다. 대형 진공청소기로 재를 빨아들이고, 차량도 속속 운전을 하여 도로에서 빼기 시작했다. 스태프들보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뒷말이 안 나올 터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쉬고 월요일부터 오늘 찍은 장면들 우선으로 CG 작업용 촬영을 한다. 정신없이 대피하는 액셀 주변으로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장면과 건물이 폭발하여 산산조각이 나는 씬이다.
밤 9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샤워하고 노곤한 몸 상태로 냉장고를 열었다.
식은 김치찌개를 그릇에 담은 뒤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를 식탁에 놓고, 즉석밥도 데워서 식탁에 놓았다. 거기에 김 한 봉지도 꺼내고.
소주도 한 병 꺼내 왔다.
소주를 따른 뒤 우선 한 잔 마셨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노곤한 몸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젓가락만 들고 밥을 먹었다.
조용히 밥을 먹고 있으니 문득 외로움이 밀려왔다.
좋아하는 영화를 하고 있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런데 샌드위치 속 인물들처럼 외로움이 밀려든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너무 일만 했다. 창작 욕구 때문이긴 하지만 욕심도 많이 냈다. 아마도 무명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늘 마음이 조급했던 모양이다. 이미 이룬 게 많은데도 더 안정적인 위치에 서겠다는 조바심.
나도 이젠 나이가 든 걸까.
일만 하다 가족과 멀어져 버린 느낌이 이런 걸까.
밥을 먹고 있는데도 지독한 공복감이 밀려든다.
위장이 뻥 뚫려 버린 듯한 느낌.
소주를 다시 마셨다.
요즘 왜 이러는 거지.
뭔가 부족한 게 있는데 채워지질 않는 느낌.
그랬다.
몸을 혹사했다. 정확히는 정신을 혹사했다.
채우는 것 없이 계속 만들어내기만 했으니.
몸은 괜찮은데 정신이 감당을 못했던 거다.
그래서 정신적 측면으로 이상 신호를 주는 거겠지.
외로움과 공허함이 공복의 느낌으로.
이번 영화 촬영을 끝내고 좀 쉬기로 했다.
CG 작업이 8개월 가까이 걸리니까.
어디 여행이나 갈까.
아니면 여행 다큐라도.
쓴웃음이 났다.
여행을 생각하면서도 뭘 찍을 생각을 하니.
그래. 서연이랑 세계 여행을 좀 다니자.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다 보면.
영화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
* * *
주연배우 트레일러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액셀 역의 제이슨이 대기 중이었다.
“컨디션 어때?”
“좋아요.”
“운동은 잘되고 있고?”
“네. 근육이 좀 생기긴 했는데 패딩 점퍼를 입고 있어서 별로 표시는 안 나네요.”
“중후반부터 봄이니까, 그때 전사의 면모로 변신하는 것으로 가면 된다. 소품 챙기고.”
“지금 나가요?”
“응.”
제이슨이 점퍼를 입고 그 위에 두툼한 배낭을 멨다.
행색이 거지꼴이다. 점퍼 곳곳에 불탄 흔적과 재가 묻어 있고, 뜯겨 나간 곳도 많다.
첫 괴수 재난 이후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이다.
액셀은 LA 시청에 잠시 대피했다가 거기도 박살이 나면서 피난민들과 함께 롱 비치로 남하했다. 그 과정에서 괴수들의 기습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 무렵 액셀은 대도시에만 괴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른 도시로 갔으나, 크기만 작을 뿐 도시마다 괴물이 하나 이상은 있었다. 이미 전멸한 도시도 한둘이 아니었고.
해서 혼자 헤매고 다니며 온갖 종류의 피난민을 만나고, 혼란의 틈을 탄 약탈자들도 수없이 만났다. 괴물보다 사람이 더 무서울 정도로 곳곳에서 총격전과 살인이 벌어졌다.
그러다 괴물이 물에 못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피난민들과 함께 하와이행 여객선을 타려 롱비치로 왔다. 그런데 그 소문을 들은 피난민이 너무도 많았다.
제이슨과 함께 트레일러에서 나갔다.
부두에 엑스트라 2,000명이 모여 있었다.
항구 근처 바다에는 보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전날 보조출연 업체에 영화 장면에 대한 설명과 보조 출연자의 동선을 정해주었다. 보트 소유주에게도 마찬가지.
일반 영화에선 보조 출연자 하나하나의 동선을 정해준다. 그러나 나는 보조 출연자들의 동선을 기계적으로 정하지 않고 전체 상황을 설명했다. 출연자들이 알아서 판단하도록.
세 가지 장점과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장점은 연기가 리얼해진다는 점과 보조출연자들이 실제 상황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촬영의 집중도와 애정이 높아진다는 점.
단점은 한 번 엉키면 뒤죽박죽이 된다는 것과 같은 그림이 안 나온다는 것.
단점보다 장점이 커서 이 방식을 썼다.
두 작품에서 비슷한 몹씬을 찍어 보니 이 방식이 그리 나쁘지가 않았다. 실제로 재난이 벌어지면 뒤죽박죽되기도 하니까.
메가폰을 들었다.
“현재 위치에서 들어주세요! 정해진 연기 동선은 있겠지만, 상황에 따라 여러분이 판단하여 움직여도 됩니다! 이번에 찍을 장면은 서로 먼저 배에 타겠다고 몸싸움을 벌이는 씬입니다! 이기심. 절망. 포기. 등등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하여 연기하세요! 다만, 아이들에게 힘을 써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5분 후에 촬영 시작합니다!”
스태프들에게 스탠바이를 물었다.
그리고 얼마 뒤.
“고!”
부두로 수많은 사람이 내달렸다. 제이슨도 그 틈에 섞여 달렸다. 좁은 부두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통에 몇 사람은 바다에 떨어지고, 몇 명은 쓰러져 밟힌다.
보트 6대가 사람들을 태우고 있다.
여객선은 저편 바다에 있는 것으로 CG처리 된다.
여객선이 항구에서 좀 떨어져 있기에 보트를 타고 여객선으로 가야 하는데, 보트가 턱없이 부족하다. 심지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남자들도 있고.
그때 누가 외친다.
“어? 이봐! 여객선이 움직이고 있어!”
“지금 떠나면 어떡해!”
“우릴 버리고 가고 있어요!”
“거기 멈춰! 멈추라고!”
“밀지 말아요! 아이가 바다에 떨어져요!”
“젠장! 비켜!”
부두 앞쪽에서 비명과 함께 무수히 많은 사람이 바다로 뛰어든다. 이때부터 아비규환으로 변한다. 사람들이 먼저 여객선에 타겠다고 사람들을 마구 밀어낸다. 제이슨은 가운데 껴서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
“정말 여객선이 떠나고 있어!”
“얼른 헤엄쳐가서 올라탑시다!”
좁은 곳에 너무 많은 사람이 밀집한 터라 상황만으로 연기가 나온다. 밀치고 밀리고 넘어지고 깔리고. 악다구니와 고함, 비명이 뒤섞여 나온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크르하아아-
천둥 같은 소리에 모든 피난민이 뒤를 본다.
뒤쪽 언덕에 거대 괴수가 우뚝! 버티고 서 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모두가 얼어붙었다.
치지이잉-
굵은 빔이 쏘아져 날아오며 뒤쪽에 있는 20여 명이 동시에 재가 되어 불씨와 함께 흩날렸다.
그제야 찾아온 엄청난 공포!
“으악! 비켜!”
“비키라고!”
그나마 여자와 아이는 배려하던 남자들이 일제히 힘으로 밀어붙이며 제 살길을 찾았다. 좀 전의 아수라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생지옥이었다. 출연자들이 다칠까 봐 걱정될 정도로!
제이슨도 아주머니와 아이 하나를 보호하다 쓰러지면서 마구 짓밟혔다. 운 좋게도 쓰러지는 바람에 날아든 빔을 피했다. 앞에 있던 남자 십 수명은 일제히 숯덩이가 되어 흩어져가고.
그때 제이슨 앞에 길이 열렸다. 그는 여자와 아이를 양손으로 잡은 채 무작정 달렸다. 그러다 빔이 날아들던 찰나! 두 명과 함께 부두 아래 바다로 떨어졌다.
첨벙!
“컷!”
내 외침에 다들 동작을 멈췄다.
“여러분! 정말 훌륭합니다!”
스태프들이 진심을 다해 박수를 보냈다.
출연자들이 정말 재난을 맞이한 사람들처럼 움직였다. 곳곳에 숨어 있는 연기자와 스턴트맨들이 분위기를 제대로 만들어준 덕분 같다.
보조출연자들은 뭘 잘했다는 건지 전혀 모른다. 거대 여객선도 거대 괴수도, 숯덩이가 되어 쓰러져 나가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후 이 장면의 개별 쇼트들을 따기 시작했다.
몸싸움. 주먹질하는 남자들. 주저앉아 우는 아이. 넋을 잃고 헤매는 노인. 사람들에게 밀려 바다에 떨어지는 사람들. 그리고 보트에 탄 사람들과 헤엄쳐 여객선으로 가는 이들.
이 장면 이후 액셀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부두에 모여 있던 사람 태반이 재로 변했고, 헤엄쳐 가던 사람들도 괴물의 빔에 하나하나 사냥당한다. 물 위에는 죽은 사람들의 옷과 재만 둥둥 떠있고. 여객선도 마찬가지 운명.
* * *
촬영 32일째.
애리조나 피닉스 근처 작은 마을에 와 있었다.
액셀이 겨우 살아남아 군대가 있다는 샌디에이고로 갔지만, 거긴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피닉스로 퇴각했다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향하는 중이다.
“고우!”
제이슨이 차를 몰고 가다가 멈췄다.
도로 저편에 바리케이드가 있고 그 너머에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탱크와 전차들도 뒤쪽에 무수히 많고.
군인이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제이슨이 손을 든 채 말했다.
“샌디에이고에서요!”
“거긴 어떻게 됐나?”
“파괴되어서 사람이 없어요!”
“젠장 할! 얼른 들어와!”
“고맙습니다.”
제이슨이 몰고 온 차에서 여자와 8살 딸이 내렸다. 부두에서 구해준 후 줄곧 함께 이동했다. 훗날 이 8살 딸이 액셀의 유일한 친구가 된다.
군인이 바리케이드를 열며 말했다.
“용케도 살아남았군. 캘리포니아엔 블랙 피쉬가 몇 놈이나 있다던가?”
“블랙 피쉬?”
“거대 괴수 말이야.”
“대도시에는 하나 이상은 있다고 해요.”
“놈들이 해변 쪽에서 내륙으로 이동하고 있다더군. 그 바람에 시애틀. SF. LA. 마이애미. 뉴욕. 워싱톤은 끝장났지.”
“여기는 공격 당하지 않았나요?”
“여긴 무사해. 아래도 위도 내륙뿐이니까. 여기뿐 아니라 텍사스. 오클라호마. 콜로라도도 무사하지.”
제이슨과 모녀가 바리케이드를 통과했다.
그때 뒤에서 또 굉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제이슨이 뒤를 보니.
거대 괴수 5마리가 일제히 이동하고 있었다. 서부 해안을 초토화한 괴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었던 것!
군인이 외쳤다.
“서부와 동부는 기습을 당해서 졌다! 우리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자고! 전원 전투 배치!”
탱크 6대가 앞으로 나갔다.
미사일 탑재 차량도 공격을 준비하고.
그때 제이슨이 외쳤다.
“저놈들은 총이 안 통해요!”
아무도 제이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제이슨이 이를 악문 채 뒷걸음쳤다.
이 저지선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표정.
“컷! 오케이!”
테이크 5번 만에 마스터 쇼트를 끝냈다.
이번 장면도 개별 쇼트를 다시 따야 했다.
탱크의 움직임. 공격 직후 전멸당하는 장면 등등.
* * *
촬영 40일째.
애리조나 황무지에 있는 폐공장.
이 폐공장 지하에 거대 벙커가 있다는 설정이다.
제이슨과 모녀가 갖은 고생 끝에 벙커에 도착했는데, 벙커 내부에서 식량 문제로 다툼이 벌어진다. 이 벙커에서 인간의 추악한 일면이 조목조목 드러난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 벙커에서 버텨보려고 했는데, 괴물이 이 벙커까지 공격한다.
“고!”
벙커 입구에서 뛰어나오는 제이슨과 모녀.
최후 방어선을 구축한 진지에서 벌컨포 총탄이 수도 없이 날아간다. 군인들이 무수히 총을 쏴대고. 공중에는 전투기와 헬기가 날아다니지만 미사일을 쏴도 괴물은 끄떡도 안 한다. 오히려 빔을 맞아 공중 폭발하는 기체만 늘어나고 있을 뿐.
군인 하나가 외친다.
“방금 레드 코드가 전달되었습니다! 1시간 안에 이 지역에서 청소작전이 시작됩니다!”
“뭐야? 우리까지 다 죽이겠다는 거야?”
“대피해야 합니다! 핵이 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망할! 모두 철수해!”
“벙커에 있는 민간인은 어떻게 합니까?”
“그딴 인간들 알게 뭐야! 얼른 움직여!”
제이슨과 모녀는 하얗게 질린 채 뛰었다.
“컷! 바로 연결합니다!”
액셀과 모녀는 정신없이 달리다 철수하는 군인들 트럭에 겨우 올라탄다. 그로부터 1시간 후 떨어지는 핵폭탄.
액셀은 트럭에서 물끄러미 그 버섯구름을 본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핵폭풍과 지진에 휘말려 트럭이 엎어지고 만다.
* * *
온통 은색으로 빛나는 기이한 내부 구조.
제이슨은 속옷만 입은 채 괴상한 금속 침상에 누워 있다.
그 앞에는 동양인 과학자가 있고.
그가 제이슨에게 소리 죽여 말했다.
“자네 눈 뜨지 말고 내 말 듣게. 다른 전사와 달리 자넨 기억이 그대로야. 외계인들의 통제를 당하는 척해. 머릿속에서 놈들 말이 통역되어 들릴 테니까. 알았으면 엄지를 보여.”
제이슨이 슬그머니 엄지를 내밀었다.
“좋아. 외계인 놈들의 육체적인 능력은 보잘것없어. 그래서 인간을 놈들의 노예 전사로 개조하는 거지. 자넨 외계인 놈들의 힘을 일부 가지게 되었네. 인간의 5배에 이르는 힘이지. 그러니 놈들의 통제에 따르다가 여기서 도망치게.”
과학자가 주변을 살피다 다시 말했다.
“놈들의 에너지 원천인 ‘아크람’은 인간에게 더 효율적이야. 잠재력이 더 크다고 할까. 놈들은 아직 그걸 몰라. 자네들이 첫 실험대상이거든. 살아남는다면 어른들에게 알려주게. 아크람을 빼앗아야 인간이 외계인 놈들과 맞서 싸울 수가 있네.”
제이슨이 다시 엄지를 보였다.
“인간 개조 실험을 하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 걸세.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인류는 영원히 놈들의 지배를 받을 거야. 그래서 나도 목숨을 걸었네. 다시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과학자가 목이 메는 음성으로 말했다.
“부디 살아서 나가게. 어쩌면 자네가 인류의 희망이 될지도 몰라. 아크람의 존재를 알렸다는 것만으로도.”
외계인이 다가오면서 과학자는 물러났다.
제이슨은 의식이 없는 척하고.
“컷. 다음 씬 갑니다.”
촬영 55일째.
스튜디오 세트에서 찍고 있었다.
세트는 모두 7개. 우주선 내부 몇 군데와 통로들이다.
아크람 에너지 룸도 따로 만들고.
액셀이 외계인 통제를 받으며 자아가 없는 것처럼 움직이는 장면을 찍어 나갔다. 그리하여 강하 수송선에 타기 직전. 노예 전사들과 함께 서 있던 액셀이 통제에서 벗어나며 탈출하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고!”
제이슨이 복도에서 달려온다. 하얀 빔이 쏘아져 들어오지만 도약과 동시에 몸을 비틀며 피한다. 속도와 힘, 민첩성이 일반 인간의 다섯 배 수준이다.
그의 탈출을 막는 자들도 개조된 인간인데, 스스로 판단을 못 하여 쉽사리 액셀을 잡을 수가 없었다. 외계인의 반응 속도가 일반 인간보다도 느리다 보니.
달리는 제이슨 앞에서 괴이한 무기를 겨누는 전사들.
그들이 빔을 쏘려는 찰나, 제이슨이 왼쪽 벽을 박차며 한순간에 오른쪽 벽으로 이동했다. 와이어를 썼는데 연습을 많이 했는지 NG 없이 바로 이동. 그대로 개조 전사들을 밀쳐 버리며 질주했다.
“컷! 다음 씬으로!”
탈출 과정을 이어서 찍어 나갔다.
액셀이 전사들을 때려눕히다 빔 건을 탈취한다. 그 뒤 느려 터진 외계인들까지 통쾌하게 태워버리며 내달린다.
마침내 대망의 에너지 룸.
탈출보다는 아크람의 파괴를 우선으로 생각한 액셀.
죽을지도 모르지만 아크람의 녹색 구체를 파괴하기로 한다. 우주선 내부에 전사 수천 명이 있었기에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
“액션!”
제이슨이 녹색 구체를 향해 빔을 쏘았다. 아크람을 파괴할 방법을 몰라 무작정 빔을 쏘는 모습이다. 빔을 맞아도 끄떡도 안 하는 구체. 폭발할 듯 점점 달아오르기만 할 뿐.
그러던 구체에 구멍이 뚫리는 듯한 순간.
건에서 쏘아져 나간 빔과 아크람의 힘이 연결되어 버린다.
총을 놔 버릴 수가 없는 상황에 당황하는 제이슨.
빔 건과 아크람의 힘이 상호 교환을 시작한다.
구체에서 녹색 힘이 빔을 타고 흘러오더니 총을 통해 제이슨의 몸으로 스며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내 전신이 녹색 빛으로 물들어가는 제이슨!
“으아아아!”
제이슨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그때 뒤에서 빔이 빗발친다. 어느새 개조 전사 수십 명이 몰려와 제이슨을 향해 빔을 쏘지만 빔이 퉁겨져 나간다.
순식간에 녹색 빛으로 화하는 제이슨!
그러던 어느 순간!
번쩍!
쿠콰콰콰쾅-
빛이 터진다.
아크람 구체가 박살 나며 녹색의 빛이 사방으로 펴졌다가 이내 회오리치며 제이슨의 몸으로 밀려들어 간다. 연기를 순식간을 빨아 들이듯.
아크람 에너지 흡수가 끝나자 쓰러지는 제이슨.
쓰러진 채 부르르 몸을 떤다.
“컷! 바로 연결한다! 와이어 팀!”
카메라를 이동시켰다.
특수효과팀은 개조 전사들의 몸에 와이어를 달고.
콜과 슬레이트가 이어지고.
“액션!”
빔이 빗발치는 가운데.
서서히 일어서는 제이슨.
카메라는 그 뒤를 찍고 있고.
제이슨은 빔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데도 통증조차 못 느낀다. 촬영 내내 근육을 만든 그의 뒷모습이 정말 멋지다.
개조 전사들을 향해 발을 내딛는 제이슨.
조금 걷다가 그대로 달린다.
들소처럼 전사들을 들이받아 버리고 나간다.
사방으로 퉁겨져 나가는 전사들.
그다음 장면부터는 호쾌한 탈출이었다.
다 때려 부수며 전진 또 전진.
우주선 일부를 파괴하고는 그대로 뛰어내린다.
바로 아래에 있던 고층 건물 옥상으로.
쿵-
착지한 그대로 먼 곳을 바라보는 제이슨.
바람에 어지럽게 날리는 그의 머리카락.
그리고 저편에 보이는 파괴된 도시.
그린스크린 안에서 이 장면을 찍고 있었다.
“컷! 오케이!”
폭풍 같은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브라보!”
“좋았어, 제이슨!”
제이슨은 늠름한 모습으로 웃을 뿐이다.
그의 연기력이 무척 늘었다.
정말 히어로를 보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