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할리우드 차기작 (35/56)

제3장 할리우드 차기작

지현이와 지성이도 우리 옆에 앉았다.

여배우 3명이 용인의 시내 커피점에 나란히 앉아 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커피점 안이나 밖이나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왔다.

지현이가 용인까지 온 건 가족이 될 사람으로서 첫 인사를 온 거였다. 다른 날도 아닌 추석 당일이니. 지성이와 사귀는 게 좀 의외이긴 했다만.

“서연이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지성이가 대답했다.

“몰라. 처음 만날 때 내가 그랬어. 아무도 모르게 하자고. 그래야 만약에 헤어져도 지현이가 회사를 안 나갈 거 아니야. 우리 둘만 모른 척하면 되니까.”

“오늘 소개를 한 건 이제 확신했다는 거지?”

“응. 형보다 먼저 갈 수도 있어.”

지현이를 보고 서연을 보았다.

둘은 이미 이야기를 끝냈던 모양이다.

몇 년 후면 동서지간이 되는 거네.

지현이는 서연과 악연이 있었고, 나와 지성이와도 큐즈와의 분쟁 때 감정이 좀 있었다. 그런 애가 지성이와 사귀고 우리 가족이 된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지현이가 달라진 건 지성이 덕분인 것 같다.

사람의 인연이란 게 참.

수줍게 앉아 있는 연희도 어쩌면 수호의 장래를 보고 녀석을 만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일반인과 연예인이 사귀는 것으로 볼 테지만 지현이도, 연희도 얼마간의 계산은 있었겠지.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일단 자리를 떴다.

세 커플이 나가자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이게 뭔 광경인가 싶은 얼굴이다.

함께 서울로 가기로 했다.

각자 차를 댄 곳이 달라서 일단 톨 게이트 쪽으로 먼저 이동했다. 얼마 뒤에 지성이의 BMW가 오고, 그 뒤에 수호가 모는 벤츠 SUV가 따랐다. 각자 여친을 태우고.

왜 다들 외제차를 모나 했더니 유명 배우인 여친을 나름 배려하려고 그런 거였다. 다들 연봉도 센 편이니 내가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나도 외제차 타고 다니기도 하고.

세 커플이 탄 차가 서울로 달렸다.

오늘의 만남은 뭘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지성이와 수호가 내게 연애의 허락을 받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회사 식구이고 하다 보니.

그로부터 4일 후.

서연과 함께 MBS 일산 스튜디오로 향했다.

대기실에 임시환이 먼저 와 있었다.

한 달 만에 만난 터라 포옹부터 했다.

“예능 자주 나갔어?”

“아니요. 아이돌 때 외에는 처음에요.”

유명한 토크 쇼다.

원래 게스트가 4명인데 ‘샌드위치’ 특집으로 우리 셋만 출연하기로 했다. 방송 출연 자체가 난 처음인지라 제법 긴장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대기실에 MC들이 차례로 찾아왔다.

독설가 김근하. 음악인 윤동신. 개그맨 김국민.

간단히 인사만 하고 대기실에서 나갔다.

20분 뒤 방송 녹화에 들어갔다.

늘 보던 프로그램 그대로다.

MC들이 우릴 소개한 뒤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막상 녹화를 시작하니 긴장이 되려 사라졌다.

윤동신이 슬쩍 묻는다.

“저 샌드위치 봤거든요. 처음엔 무슨 이런 영화가 있나 싶었는데 묘하게 마음에 울림을 주더라고요. 롱 테이크 엄청 많던데 일부러 그렇게 찍은 거죠?”

“아니요. 카메라 움직이는 게 귀찮아서요.”

내 말에 서연과 시환이 키득거렸다.

“어쩐지 영상에 그게 보이더라고요. 그냥 대충 알아서 연기하고, 대충 알아서 찍어. 이런 느낌?”

김근하가 끼어들었다.

“화면에 그런 게 보이는 게 말이 돼?”

“영화 봤어?”

“꼭 봐야 알아?”

“영화 안 봤으면 말을 마시라고.”

김근하가 다른 화제로 둘러댔다.

“연예 뉴스 보니까, 본인이 무슨 상을 탔는지 모르고 있던데 혹시 연기 아니에요? 영어를 못하시나?”

“제가 영어를 잘 몰라서요.”

“갑자기 할 말을 잃게 하시네.”

시환이가 나섰다.

“감독님 영어 잘하세요.”

“뭐에요? 잘한다는 거야, 못한다는 거야?”

“솔직히 말할게요. 제가 그때 서연이 손가락으로 내 콧구멍을 파고 있었어요. 하필이면 큰 건더기가 나오는 바람에 나도 서연이도 당황해서 그 코딱지를 어디에 묻힐까 하다가 앞에 앉은 스페인 거장 감독의 어깨에…”

“감독님!”

PD가 당황한 얼굴로 외쳤다. MC들은 입만 쩍 벌리고 있고, 서연이는 얼굴이 새빨개지고. 시환이는 킥킥대기만 하고.

헛소리로 세 MC를 장악해 버렸다.

MC들은 내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 알아서 조심하며 질문했다. 서연이에게도 함부로 곤란한 질문을 하지 못했다. 뭔가 아슬아슬한 게 나올라치면 또 곤란한 소리를 해 댔다.

그 바람에 우리 결혼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시시콜콜한 영화 촬영 이야기, 베니스 영화제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만 말했을 뿐.

그렇게 무난하게 녹화를 끝냈다. MC들은 내게 영화 이야기만 묻고 사생활은 일절 묻지를 않았다. 물어봐야 내 헛소리 때문에 편집될 거 뻔하니까.

녹화 후 김근하 씨가 술을 먹자고 해서 스튜디오 근처 호프집으로 갔다. 초저녁부터 가수와 탤런트, 개그맨들이 잔뜩 있었다. 이른바 김근하 라인이다.

술자리를 만들어 놓고 우릴 초대한 거였다.

여러 분야의 연예인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

로큐 대표인 내게 잘 보이려는 건지. 내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서 그런 건지. 이 술자리의 주인공은 자연스레 내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1시간쯤 지났을 때.

유명 개그맨과 대화하던 중 다음 할리우드 작품 소재 이야기가 나왔다. 옛날에 톰 크루즈 주연의 ‘우주전쟁’을 정말 무섭게 봤다면서 그런 영화 만들 생각 없느냐며. 그러면서 자신은 어릴 적부터 괴물에게 쫓기는 꿈을 많이 꾸어서 유난히 그런 영화가 무섭다고 했다.

놀랍게도 나도 그랬다.

어릴 적부터 괴수에게 쫓기는 악몽을 자주 꿨다.

그래서인지 나도 영화 우주전쟁 초반이 정말 무서웠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고 할까.

그때부터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화성과 지구 전쟁을 베이스로 영화 우주전쟁. 인디펜던스 데이. 클로버필드. 미드 V. 엑스맨. 그리고 헝거게임 3부작.

영화를 3부작으로 만든다.

각각 다른 형식으로.

흥행이 된다면 시리즈를 이어나갈 수도 있다.

제1편. 괴수 침공.

정체 모를 괴수의 공격.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인류. 클로버필드처럼 괴수 공격에 도시가 파괴되는 광경을 리얼하게 묘사한다. 최초의 히어로 출현으로 마침내 거대 괴수를 잡는다. 그러나 초대형 우주 모선이 지구 상공에 나타난다.

공포물로 시작하여, 히어로의 탄생까지를 보여준다.

진지하면서 감동으로 이어지는 전개가 포인트.

제2편. 이종족의 지배.

외계인에게 지배를 당하는 인류.

압도적인 기술 문명으로 지구를 지배하는 외계인. 그 지배에서 벗어난 이들은 레지스탕스가 되어 버틴다. 1편에서 ‘초인’이 된 주인공이 저항군 특공대의 리더다.

저항군은 노예가 된 인간을 구하며 외계인의 기술을 빼돌리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다 우주 모선에 있는 어떤 에너지를 탈취하다 폭발하면서 능력자들이 대거 양산된다.

일본의 압제 당시 독립 투쟁의 정서를 대입한다.

암울한 상황임에도 유쾌한 전개가 포인트.

제3편. 우주 대전.

화성에 저항군 사령부를 만든 반군들.

지구의 레지스탕스로부터 물자를 받고, 자체적으로 우주선을 제조한다. 지구에는 외계인에게 부역하는 자들로 가득하고, 저항군은 갈수록 세력이 약해진다. 반면 화성 반군 기지는 점점 세력을 키워 나간다. 그러다 외계인 부역자가 된 지구인과 독립을 선언한 화성인이 전쟁을 벌인다.

치열한 전쟁 와중에도 희망을 비추는 것이 포인트.

각각 지구편. 지구와 화성편. 화성편으로 나눈다.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지구인과 화성인으로 인류가 완전히 갈리면서 제2차 우주대전을 할 수 있다. 외계인의 기술 덕분에 우주로 나아가게 된 인류 이야기로 확장할 수도 있고.

마블 시리즈처럼 세계관을 무한 확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수호가 전달한 ‘수송 선단’ 이야기도, 에일리언과 같은 공포물도 이 시리즈의 스핀오프로 제작할 수 있다.

영화 어벤져스처럼 개별 영화의 히어로들이 모여서 우리 스튜디오만의 ‘어벤져스’도 가능하다.

당연히 이 시리즈만 할 것은 아니다.

시리즈 제작을 매년 이어가면서 다른 영화도 만들 수 있다. 스튜디오가 확장되어 계열이 나누어진다면, 또 다른 시리즈도 가능하다. 인디아나 존스나 분노의 질주처럼.

수호가 가져온 지구와 화성 전쟁이야기는 스핀오프로 하는 게 나을 듯했다. 1차 우주대전이 발발하고 50년쯤 지난 후. 우주 교전의 전략전술이 제법 발달한 뒤에라야 삼국지 같은 영화가 나온다. 이때는 ‘은하영웅전설’ 같은 내용도 가능하다.

할리우드 차기작의 힌트를 얻기에 예능에 출연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하나의 힌트가 장기 플랜으로 줄줄이 이어지니.

다음 날 아침.

책상에 앉아 줄거리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영화 시리즈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10편까지 간다는 가정하에 종일 줄거리만 썼다.

대략 줄거리를 짠 뒤 관계도를 그려 나갔다.

기본 3부작에 스핀오프 셋.

각 히어로의 개별 영화도 5개.

그리고 어벤져스급 이벤트 3개 정도.

연결은 해 두지만 영화를 찍을지 어떨지는 모른다. 내가 모두 찍으면 30년은 걸릴 듯하고, 다른 감독이 개별 히어로 편을 찍는다면 반으로 줄 터다. 그래도 10년 대계이긴 했다.

모든 시리즈의 첫 번째.

주인공은 평범한 17세 소년. 나중에 슈퍼맨급 힘을 가질 주인공이다. 이른바 원펀치맨으로 다른 히어로와 달리 외계인의 에너지를 무한 흡수한다. 모든 히어로의 리더이기에 나이가 좀 어려야 10년 뒤도 볼 수 있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이혼한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 거대 괴수 로봇이 강림한다. 닥치는 대로 건물을 부수고, 빔을 쏴서 인간을 태워 버린다.

피난민들의 이기심과 약탈은 극에 이르고, 어딜 가도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학살한다. 그 가운데에 고립된 소년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가까스로 살아남고. 겨우 도착한 대피소마저도 한순간에 터진 빛으로 파괴된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어 절망에 빠진 소년.

거대 로봇이 빔을 쏘려던 그때.

홀연히 나타나 괴물을 쓰러뜨리는 정체불명의 소녀.

그 소녀가 주저앉은 소년에게 손을 내민다.

‘휴, 당신의 어린 시절 정보가 없어서 한동안 찾아다녔어요. 당신이 이렇게 약한 소년일 줄은 상상도 못했군요.’

‘당신은 누구죠?’

‘난 미래에서 왔어요. 3년 후에 여러 능력자가 생길 거예요. 물론 당신 덕분이죠. 아, 난 훨씬 더 미래에서 왔어요. 유일하게 시공간을 넘을 수가 있거든요. 이번 차원 이동으로 수명이 10년은 줄어들었을 테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소년은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나 때문에 능력자가 생긴다고요?’

‘네. 당신은 인류의 지도자가 될 거예요. 아니, 신인류의 리더죠. 이 지구인은 훗날 외계인에게 강제로 진화를 당하여 다른 인류가 될 거예요.’

‘외계인이라니? 외계인이 괴물을 보냈다는 거예요?’

‘그래요. 시간이 없군요. 내가 여기에 오래 있으면 세포가 노화되거든요. 자, 이걸 가져요.’

소녀가 녹색 액체가 든 구슬을 준다.

‘이게 뭐죠?’

‘고대종족 아크람의 정수예요. 창조의 힘이 담겨 있죠. 이걸 얻기 위해 수많은 저항군과 능력자들이 목숨을 걸었어요. 단지 과거의 당신에게 보내기 위해서 말이에요. 이걸 당신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없거든요. 이 힘이 어떤 능력으로 바뀔지는 당신의 뜻에 달렸어요.’

‘능력이라니…….’

‘그럼. 훗날 날 만나게 될 거예요.’

소녀가 손목에 찬 장치를 누르자 기이한 빛의 구체가 나타난다. 그 빛 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소녀.

소년은 소녀가 준 녹색 구슬을 손에 쥔다.

그 구슬이 빛을 내더니 소년의 손으로 녹색 기운이 흡수되기 시작한다. 그 기운은 곧 소년의 유전자와 동화되는 듯 전신으로 퍼지며 황금빛으로 변화를 시작한다.

소년이 쓰러졌다가 깨어났을 때.

전신에 강한 활력이 돌고 힘이 요동친다.

소년은 무작정 강해지고 싶다는 의식의 영향으로 말 그대로의 ‘힘’을 각성했다. 고대종족 아크람의 왕족만이 쓸 수 있는 힘을 보유했으며, 그 힘은 무한하다. 무한히 힘을 받아들이며, 힘을 가진 만큼 방어력도 강해지는.

지금은 거대 로봇의 다리를 후려쳐 휘청거리게 할 정도일 뿐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그리고 지구 방어군에 합류하여 전투를 경험하면서 소년은 성장한다.

힘이 느리게 커지다 영화 후반 무렵.

마침내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최후 각성을 한다.

그런 뒤 단독으로 괴물을 잡기 위해 내달린다. 그리하여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거대 로봇을 잡는 성과를 올린다. 인류가 희망을 품는 것도 잠시. 전 세계 주요 도시 상공으로 거대한 우주 모선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으로 1편 마무리.

이 작품이 흥행하면 다음 편을 할 수 있다.

시리즈 첫 작품으로는 적당한 규모다. 배우는 가능한 한 신인으로. 신인을 발굴해야 슈퍼스타로 만들어 준 내가 고마워서라도 시리즈에 계속 출연할 터다.

자세하지는 않아도 각 편의 줄거리를 대충이나마 만들어 갔다. 내용이 제법 다층적으로 깊어진다. 한 5편 후에나 나올 복선을 시리즈 첫 번째에서 깔아놓을 수도 있으니.

15편이나 되는 간단한 줄거리를 하나씩 시놉시스로 정리해 나갔다. 줄거리에 이어 5장 이상의 시놉을 쓰니 내용이 한층 더 다채로워졌다. 마블의 작가 팀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모두 짜놓고 마블 시리즈를 써 나가고 있겠지.

세계관을 짜는 재미가 있었던지라 종일 시놉을 쓰고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시리즈 10년 후에나 나올 반전도 미리 만들어 두었다. 인물과 인물의 관계도 좀 더 흥미롭게 엮어 보기도 하고. 내용은 복잡하게 가지 않았다.

2주 내내 시놉시스 작업에만 매달렸다.

3부작 세 편만 10장 내외로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고, 나머지 12편은 5장 정도로 맥만 잡아 놨다. 나중에 바뀔 수도 있고, 제작이 안 될 수도 있으니. 혹은 다른 감독이 할 수도 있는 거고.

1편이 성공하면 2편과 3편은 동시에 제작할 수 있다. 우주 함대와 전투기 등의 시안도 미리 만들어 두고, 그에 따른 우주 교전 CG도 미리 해 놓을 수 있으니까.

하루를 쉰 뒤.

참고삼아 관련 영화를 몰아서 보았다.

우주전쟁에 나오는 인간들의 이기주의. 클로버필드에서 보이는 페이크 다큐 특유의 현장감과 몰입감. 인디펜스데이의 항공 교전. 이 영화들에 나오는 할리우드 특유의 클리셰는 애써 넘겨 버렸다. 장점만 따는 것으로.

영화를 모두 본 다음 1편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전형적인 히어로 무비가 아닌 성장 영화다. 궁지에 몰린 인간적인 소년의 심리 그대로. 지옥 같은 세상을 혼자 버티면서 영웅이 될 그릇임을 보여 줄 뿐. 감정 표현도 한국 영화처럼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간다.

며칠 동안 구상을 끝낸 후.

1편의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 * *

시나리오 작업은 이틀 만에 끝났다.

소년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하여 쓰다 보니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몰입감이 컸다. 계속 이를 악물었고 숨 쉬는 것도 이따금 깜박했다. 소년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과 극한에 이르는 감정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써 놓은 시나리오를 다시 읽었다.

리얼리즘의 극치다. 내가 재난 현장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수정하려고 해도 대안이 없다. 코어의 추천을 통해 최고의 선택만 했으니까.

영화가 시작되고 인물과 배경을 설명하는 10분 뒤.

로봇 괴수 출현 직후부터 5여 분간 숨 막히는 극한으로 몰아갔다. 그 뒤 5분 혹은 10분 간격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쉴 틈을 안 주면 관객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상당히 공을 들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시리즈가 잘되려는 징조로 봐야 할까.

지금까지 내가 쓴 상업 영화 중에 가장 잘 나왔다.

소재에 따라 내용을 풀어가는 한계나 흥행의 제한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런 게 없다. 재난을 당한 당사자처럼 1인칭 시점으로 갔더니 현장감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곧장 한국 차기작 시놉을 써 내려갔다.

할리우드 차기작을 쓰면서 느낀 공포감.

감정이 남아 있을 때 한국 저예산 영화로도 풀어보고 싶었다. 할리우드 프리가 좀 긴 편이니 그때 공포물 하나 찍어도 될 듯해서.

한국 차기작은 공포물.

철저히 다큐 형식으로 간다.

여기에 VR 촬영 기술을 도입해서 극장보다 플래닛 케이에서 기어를 착용한 채 보는 게 더 무섭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심령 공포로 시작해서 심리 공포로.

눈 폭풍이 불던 날.

한 회사의 직원들이 폭설로 인해 산장에 고립된다.

그런데 산장에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누군가가 웃는 소리. 등산객이 잡담하는 소리.

직원들이 귀를 기울이면 안 들린다.

게다가 산장 2층에 분명 주인 내외가 있었는데, 10분 후에 찾으니 산장 어디에도 없다. 주인 내외가 산에서 내려갔나 싶어 기다리니, 난데없이 2층에서 내려온다.

얼마 후 다시 사라진 부부.

다들 부부를 찾고 있을 때 부부와 함께 등산객 3명이 들어온다. 직원들은 산에서 내려갈 만한지, 눈이 얼마나 온 것인지 묻는다. 등산객은 눈이 별로 안 왔다고 하고. 그런데 밖에는 폭설이다.

너무도 이상한 부부와 등산객들.

그 다섯 명이 2층으로 가더니 안 내려온다.

얼마 뒤 가 보자 5명이 또 사라졌다.

결국 직원들은 산장에서 탈출하기로 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원 몇 명이 구조대를 불러오겠다고 산에서 내려갔으나 연락 두절.

다들 오도 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

사원들이 돌아온다. 그들마저도 2층으로 가더니 안 내려온다. 분명 폭설을 뚫고 왔는데 몸에도, 배낭에도 눈이 없다. 얼굴만 창백할 뿐.

주인공이 2층으로 가 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다.

‘왜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거야!’

‘과장님! 귀신들린 집 같습니다!’

‘말이 되는 소릴 해!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정 대리님이 안 보여요!’

‘아까 옆에서 자고 있었는데?’

‘정 대리 나간 거 본 사람?’

‘과장님!’

‘왜?’

‘정 대리는 이번 산행에 안 왔는데요?’

‘……!’

대혼란에 휩싸이는 직원들.

시간이 지나자 직원들도 하나씩 안 보인다. 몇 명은 2층으로 올라간 뒤 내려오지 않았고, 몇 명은 산장에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주인공과 신입사원 둘만 산장에 남는다.

둘 중 하나는 유령이었다.

이 죽음의 산장으로 이끌고 온.

어쩌면 모든 직원의 시신이 폭설에 묻혀 있을 수도.

할리우드 차기작 시나리오와 3부작 시놉시스를 이동욱 대표에게 보냈다. 한국 영화 신작 줄거리는 최수혁에게 보냈다. 이런 류의 심령 공포물을 하겠다는 뜻으로.

다음 날 아침에 이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장 차기작 시작하자며.

* * *

최수혁이 내 집으로 왔다.

시놉을 보고 고민을 좀 했는지 표정이 복잡했다.

이번 공포물은 좀 아니라는 거겠지.

수혁이가 말했다.

“반드시 이 시놉으로 찍을 건 아니죠?”

“이런 느낌으로 하고 싶다는 거야.”

“네.”

대표가 써도 아닌 건 아니라는 거다.

나도 대충 휘갈겨서 보낸 것이긴 했다.

“유령이 나오는 것보다 심령 현상이나 심리 공포가 아무래도 낫겠지?”

“한국 관객은 그런 편이죠. 페이크 다큐로 가신다고 했으니까, 1인칭 시점은 그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응. 좋은 생각 있으면 편하게 말해.”

수혁이나 잠시 정리를 하더니 말했다.

“산장 이야기와는 다른 건데요. 아무래도 샌드위치 영향이 아직 남아 있나 봐요. 보통 사람이 겪는 공포를 그리면 어떨까 싶어요. 보통 사람이 겪는 외로움처럼요.”

수혁이 말을 듣고 나니 이거다 싶었다.

예술 영화인 샌드위치가 흥행한 이유가 뭐겠나.

공감이다.

공포도 공감을 포인트로 잡는 게 맞다.

적어도 내가 처음 찍는 공포 영화라면.

어릴 적 괴물에게 쫓기는 꿈 말고 내 잠재의식에서 발현된 악몽은 몇 개 있다. 정말 끔찍하게 싫어하는 꿈들이다.

좁은 복도에 수백 명이 바짝 붙은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데 점점 물이 차오르는 공포. 난간도 없는 계단을 강제로 올라가는데 그 계단이 흔들리는 공포. 살인마에게 쫓기는 공포.

이런 악몽을 꾸는 이유는 현재의 내 상황 혹은 무의식에 자리 잡은 두려움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살인마에게 쫓기는 악몽은 내 몸이 말을 안 듣는 데서 오는 공포다.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어떤 불가항력이 꿈으로 나왔던 거겠지.

내가 지금껏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꿈이 있다.

무명작가 3년 차였던 때다.

메이저 영화사인 드림메이커에서 6개월 동안 고생한 후 시나리오 작가를 처음으로 그만둘 생각을 했었다. 당시에 은행 잔고도 없어서 고시원에서 살아야 했다.

그 무렵 그림자 살인마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

내가 작가여서 그랬는지.

그 그림자 살인마에게서 반전이 일어났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반전.

이 꿈을 영화로 각색해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악몽을 꾸겠지만 현대인이 가진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다들 비슷할 터다. 꿈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다들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을 테니까.

사람들이 공포 영화를 보는 이유는 뭘까.

불안과 두려움을 즐기려는 심리다. 오싹한 경험의 대리만족이며 이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심리와 유사하다.

또한 공포 영화 속 주인공을 보며 나는 저 지경은 아니구나 하는 보상 심리도 있을 것 같다. 거기에 현실 회피심리. 파괴본능 등이 충족될 것 같기도 하고. 인위적인 자극과 긴장 후 이완이 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도 있겠고.

따라서 샌드위치가 외로움을 해소하는 영화라면.

이번 공포물은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하는 영화가 된다.

영화 속 인물에 대해 공감한다면 저마다 가진 불안을 치유하는 영화가 될 수 있다.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다들 불안을 떠안고 산다.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것과 같이 이 역시 인간 본성의 측면이다.

수혁이와 함께 시놉을 만들어 나갔다.

내가 미국에서 프리를 준비할 동안 수혁이가 조감독으로서 이 작품 프리를 진행할 수 있도록.

3시간 뒤 대략의 시놉시스를 작성했다.

주인공의 친구가 편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주인공의 상황으로 이어지고 간간이 편지 내용이 내레이션으로 나온다.

주인공은 무리한 주식 투자로 큰 빚을 지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도피 생활을 한다. 장문의 편지는 빌린 돈을 갚지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시골에서 숨어 사는 형편을 차분하게 알려준다. 그러다 이상한 상황에 대해 고백한다.

[이 시골은 참 기분 나쁜 곳이다. 네게 말해봐야 이런 곳을 찾아내기도 힘들뿐더러 내가 숨어 지내는 형편이라 함부로 말을 못해.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사정이 있다. 이건 내 목숨과 와이프, 아이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서 그래.]

[내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말하마. 네가 믿든 말든 개의치 않아. 다만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희한한 일을 너도 알고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쓰는 거다. 넌 아마 내가 돈에 쫓겨 숨어 지내다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 내레이션과 함께 주인공 가족의 상황이 나온다.

주인공 가족이 숨어 사는 곳은 이상한 마을이다. 노부부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사람들이 죄다 창백하고 텔레비전도, 신문도 없다. 주민은 아무런 대화도 인사도 하지 않는다.

하도 괴상해서 주인공이 주인집 할머니에 물었더니.

‘읍내에 가면 몸조심해요. 검은 그림자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소릴 들었거든.’

주인공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어쨌든 매우 기괴한 마을이었다.

주인공이 도피 생활을 하던 도중 온몸이 시커먼 ‘그림자 남자’가 살인을 벌이는 걸 목격하게 된다. 귀신 같기도 하고, 귀신들린 사람 같기도 한 이상한 존재.

기이하고 괴상하기 짝이 없는 그림자 남자에게 쫓기며 숨 가쁜 상황이 전개된다. 그때 주인공은 그림자 사나이가 시종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보고 의문을 품는다.

쫓고 쫓기던 끝에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둘 다 사라지고 없었다. 손에는 핏물이 가득하고 주인공은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괴한 심령 현상들.

[아내와 아이는 결국 못 찾았어. 놈은 계속 날 죽이려고 해. 지금도 내가 숨은 방 밖에 있다고. 이 동네 자체가 처음 왔을 때부터 이상했어. 사람들은 날 흉보는 것 같고, 날 끔찍하게 쳐다보고.]

[아무튼 지금 내가 이런 상황이다. 돈을 갚지 못해 미안하다. 채무자들에겐 네가 대신 좀 미안하다고 전해 줘라. 처자식 먹여 살리고 잘살아 보려다가 이렇게 됐다. 난 죽더라고 마누라와 민우는 살아 있으면 좋겠다. 도대체 날 혼자 두고 어디로 간 건지.]

[근데 형식아. 나… 살고 싶어. 나 정말 너무너무 살고 싶어. 이대로 죽기 싫어. 나 정말 살고 싶다 형식아. 네가 날 구하러 와 주면 안되겠냐? 나 좀 도와줘. 제발……]

주인공의 편지는 이게 끝이다.

눈물이 얼룩진 편지지 일부에 피가 묻어 있다. 살고 싶다고 애원하는 부분은 글씨가 뭉개져서 알아보기 어렵다.

주인공 친구는 생각한다.

처음엔 빚쟁이들의 돈을 갚기 싫어 꾸며낸 것으로 여긴다. 혹은 약물 중독에 빠져서 헛것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편지는 12월 13일 자 소인.

편지를 받은 날짜는 12월 15일.

주인공 친구는 급히 오늘 아침에 본 신문 기사를 펼친다.

그 기사를 본 친구는 충격에 휩싸인다.

주인공은 정말 살인마에게 쫓기고 있었다.

<지난 12월 13일. 강원도의 한 낡은 흉가에서 한 여자와 아이가 칼에 난자당한 채 살해되었다. 경찰은 지난달 노파 살인 사건 및 식당에서 발생한 5명의 살인사건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동일한 자의 범행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죽은 여자 및 아이와 동행한 남자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 남자를 용의자로 추적하고 있다.>

한국 차기작은 이 정도로 정리했다.

내레이션 중간에 살인마와 주인공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몸싸움도 벌인다.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게 등장인물은 가능한 한 나오지 않고, 주민이 모두 떠난 듯한 마을도 유령 마을처럼 묘사한다. 주인공이 귀신에 홀린 것처럼.

천장에 뭔가 뛰어다니는 소리를 비롯하여, 귀신들이 가득한 마을이라는 느낌을 물씬 준다. 그래야 사람 같지 않은 그림자 살인마의 존재가 자연스러워진다. 살인마가 귀신인지, 귀신들린 인간인지 모호한 느낌으로. 실제로는 신경쇠약으로 미쳐버린 주인공의 환각이지만.

꽤 그로테스크한 영화가 될 것 같다. 눈치 빠른 관객은 모든 것이 미친 주인공의 환각이며, 그림자 살인마는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임을 알 터다.

따라서 영화를 보면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엔 이상하고. 중간은 무섭고. 후반은 안타까운.

일단 이것으로 하기로 했다.

공포 영화는 앞으로도 몇 편 더 찍을 듯싶다. 공포, 멜로, 스릴러, 코미디 등은 저예산으로 찍을 수 있는 영화니까.

이번 작품 줄거리를 쓰면서.

현대인의 3대 숙명적인 질병을 찾아냈다.

외로움. 불안. 그리고 분노.

이왕 외로움과 불안을 주제로 삼았으니 다음 작품은 ‘분노’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어서 완결성을 주는 거다.

현대인 3부작으로.

그다음 공포물은 순정 공포로 간다.

수혁이에게 초고 집필을 맡기고 난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이거 하라고 수혁이를 뽑기도 했고.

할리우드 차기작 프리에 들어갈 때.

한국에 오면 바로 촬영을 할 수 있을 터다

* * *

LA 공항에서 나가자 이동욱 대표가 마중 나왔다.

권혁민을 보내도 되는데 직접 나온 이 대표다.

이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독님은 참 신기해요.”

“뭐가요?”

“어떻게 이렇게 할리우드 영화를 기막히게 비틀 줄 알죠? 이번에도 미국 작가는 발상이 어려운 부분이 많아요.”

“어떤 점에서요?”

“가령 영화 우주전쟁을 들 수 있는데, 그건 그냥 일반 시민이 주인공이고 그대로 쭉 가잖아요. 외계인을 이기는 방법이 좀 허무해서 그렇긴 하지만요.”

할리우드 영화가 대부분 그렇다.

처음부터 히어로물이 아니라면.

이 대표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중간 이후부터 주인공이 능력을 얻게 되잖아요. 그 후로 정말 보는 제가 다 시원시원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도 이런 부분이 나와서 사람 기분 좋게 좀 해주면 좋을 텐데, 그놈의 갈등을 유지하겠다고 안간힘을 쓰니 말입니다.”

“영화 작법의 정석이긴 하죠. 하지만 괴수 침공은 상대가 너무 강해서 주인공 하나쯤 시원하게 싸워도 갈등 구조가 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영웅 하나가 괴물들 다 잡을 수도 없고.”

이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게 있어요. 육체는 약해도 내면은 강한 소년이 힘을 얻는 부분 말이에요.”

“개연성 문제군요.”

“네. 왜 그렇게 하신 건지는 알아요. 이기적인 피난민들 때문에 너무도 고생한 소년이 과연 강해진 후에 그들을 위해 싸우겠느냐. 약한 소년이 갑자기 강해질 수도 없고, 미래에서 온 소녀가 소년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 다시 태어난 셈이겠죠. 그래서 인류를 위해 싸우는 것으로 가신 거고요.”

“맞습니다. 시간의 패러독스 문제도 있습니다.”

“예. 그 점만 보완하면 될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 부분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코어는 만능이 아니다. 어떤 선택, 어떤 방향으로 전개하든 내 지식과 경험에서 나오는 거지, 코어가 알아서 만들어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번 경우에는 다양한 방법을 찾지 않고, 소년의 기연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런 선택이 나왔다. 일단 선택한 것 이후로는 최선의 전개를 했으나, 내 의지가 반영된 그 선택 자체가 잘못되었던 거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어야 했는데.

수정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바로 대안이 나왔다.

“이건 어떨까요. 소년이 외계인에게 납치를 당하여 유전자 변이로 자아를 잃은 전사로 개조가 됩니다.”

이 대표가 눈을 번쩍 떴다.

척하면 척인 거지.

“그때 사고가 일어나는군요. 다른 소년, 소녀와는 달리 주인공 액셀만 달랐던 거예요.”

“바로 그겁니다. 시리즈 2편에서 인간이 유전자 변이로 개조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부분을 먼저 보여주면 됩니다. 외계인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시험할 때 첫 실험 대상으로 주인공과 그 또래들이 잡혀갔죠. 그런데 주인공 액셀만 유일하게 자아를 잃지 않아요.”

“그다음 뭔가를 얻는군요!”

“네. 전사가 된 액셀이 상당히 강해졌는데 통제가 안 되었던 거죠. 우주 모선 탈출 과정에서 액셀이 인간 개조 시설의 무언가를 폭파했는데, 그 에너지파가 액셀의 몸으로 흡수되었던 겁니다. 좀 할리우드식이죠.”

“저는 좋습니다. 할리우드 식이긴 하지만, 익숙한 게 더 나을 때도 있어요. 소년 소녀가 납치되어 전사로 개조되는 것도 그럴듯하고요.”

미드에 비슷한 설정이 있다.

차이점은 노예가 아닌 전사가 된다는 점만 다르다.

이 대표가 다시 물었다.

“자아를 잃지 않은 이유는 단지 강한 내면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문명과 생물학적 차이가 있어서 외계인은 인간의 기술과 관련한 일은 인간을 동원합니다. 그때 납치된 과학자가 개조 작업에 동원되었는데 목숨을 걸고 자아가 잃지 않도록 했던 겁니다. 그 과학자는 죽고요.”

“그렇군요. 다음 내용은 같죠?”

“네.”

시나리오를 조금 다듬을 생각이었다.

한국적인 특색은 감정 표현에 주력하고, 웬만한 건 할리우드식으로 가는 게 나을 테니.

이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이번 작품처럼 중후반까지 온갖 고생을 하다가 힘을 얻고 제대로 싸우는 걸 보니 속이 다 후련하더군요.”

이 대표가 말한 부분은 이번 영화의 최대 흥행 포인트다. 영화 내내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봉기하는 민중처럼. 그런 부분에서 전달되는 카타르시스가 매우 크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적수와의 마지막 결전 때 긴장하면서 볼 텐데, 주인공 이기는 거야 뻔하지 않나.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산이 높은 법.

이번 작품 주인공은 측은지심이 드는 소년인데다, 중반까지 엄청나게 굴린다. 괴물들에게 쫓기는 것도 그렇고, 이기적인 피난민들에게 당하는 것도 그렇고.

* * *

이동욱 대표와 함께 스튜디오를 보았다.

외관은 물론 내부 장비 설치와 주차장까지 끝냈다.

스튜디오 내부로 들어가자 내부 마감 공사가 아주 깔끔했다. 혁민이 솜씨인지, 미국 건설이 원래 마감이 좋은지.

회사 건물에도 들어갔다.

혁민이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영어가 유창하다.

날 보더니 눈인사만 대충하곤 전화를 이어 갔다.

내부를 둘러보니 이사도 끝났고, 인테리어도 마쳤다.

이 대표에게 물었다.

“에너하임 지사에서 모두 이사 온 거죠?”

“직원들은 다 왔습니다. 감독님 한국에 가 있는 사이 직원들이 30명 늘었어요. 한국 직원을 염두에 두어서 1/3만 채웠습니다.”

“잘하셨어요.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을 한국 직원들도 배워야 하니까. 엠마와 에드워드는요?”

“작품을 보냈는데 둘 다 좋아하더군요. 주인공 액셀이 최종 각성을 했을 때 에드워드는 박수를 치면서 읽었다고 합니다.”

에디가 환호하며 손뼉을 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혁민이가 전화를 끊고 내게 왔다.

“오셨어요.”

“전화가 많이 와?”

“예. 감독님 신작한다고 알렸더니 빨리 스크립트 보내라고 난리네요. 블루스톤이 이번에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배급은 월트디즈니가 할 것 같아요.”

혁민이는 지시하지 않은 일도 척척 해버린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업무를 몰라서 미국인들 사이에 겉돌기만 하더니, 이젠 직원들을 압도하는 포스다.

“잘했다. 지금처럼 하면 돼.”

“감독님. 우리 회사가 앞으로 배급도 할 거죠?”

“그래야지. 쉽지는 않을 거야.”

“저한테 일임하시면 안 될까요?”

“자신 있어?”

“해 봐야죠. 영화에 대해 알고 나니까, 제작도 중요하지만, 배급이 영화계 파워의 핵심이더라고요. 인맥 만들고 회사도 좀 커지면 제가 배급 담당으로 맡아보고 싶어서요. 수혁이는 제작 담당. 저는 배급. 희진이는 매니지먼트 쪽 관리하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혁민이가 이젠 무섭다.

내가 세 명을 비서급으로 뽑은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수호팀의 브레인답게. 그만큼 야망도 크고.

아무래도 전에 혁민이를 분석할 때 본 턱시도 입은 모습은 머지않은 미래 같다. 같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 대표가 물었다.

“스튜디오 이름은 지어 놓으셨죠?”

“네오스타 스튜디오 어때요?”

“감독님 이름에서 딴 거네요.”

“네. 네오스타가 자리를 잡으면 여러 작품을 동시 진행할 수 있도록 계열 영화사를 하나 설립하도록 해요.”

“그래야죠. 동시 제작이 가능하겠네요.”

내 할리우드 스튜디오인 네오스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메이저 스튜디오다.

영화 멋지게 한번 찍어 보자.

* * *

5일 뒤.

네오스타 스튜디오 창립식을 했다.

많은 손님이 왔다. 서연을 비롯한 로큐 식구들과 할리우드 투자사 및 메이저 스튜디오 임원 등. 내가 베니스에서 상을 받은 덕분인지, 눈도장을 찍으려는 건지 유명 감독과 배우들도 제법 왔다.

내가 주최한 파티는 격식이 없었다.

한쪽에선 우아하게 샴페인을 마시고, 다른 쪽에선 바베큐를 먹고. 또 다른 곳에선 게임을 하고.

회사 건물 내부와 주변이 워낙 자유분방했다. 구글 본사처럼 캠퍼스 형태로 조성하라고 했더니 혁민이가 정말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꾸몄다. 딱 적당한 균형 감각이다.

파티를 마무리하고 회사 식구들만 모였다.

미국에선 미국식이다. 직원들이 낄낄대며 수다를 떨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우리 직원들 중 이름이 묘하게 겹치네.

“제임스. 존. 그리고 피터.”

남자 직원 두 명과 이동욱 대표가 날 보았다.

갑자기 세 명을 지목해서 의아한 얼굴.

“여러분 앞에 이렇게 서 있으니 내가 예수가 된 것 같군요. 머리라도 기를까요?”

“하하하하하!”

미국인 직원들이 정말 박장대소를 했다.

한국 직원들만 대체 뭔 소리인가 싶다.

제임스는 야고보. 존은 요한. 피터는 베드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3명의 이름이다

이동욱 대표의 영어 이름이 피터이고.

한국식 아재 개그가 제법 통하네.

“오늘 네오스타가 출범했습니다. 창업의 주역인 여러분은 앞으로 스튜디오의 기둥이 될 겁니다. 이제 여러분을 믿고 영화를 만들어 나갈 겁니다. 자신이 맡은 일만 무난하게 처리한다면 여러분은 회사의 중역으로 성장할 겁니다. 각자에게 일을 일임할 테니,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가 봅시다. 자, 위하여!”

“위하여!”

손에 든 병맥주를 병째로 마셨다.

미국식으로 열고, 한국식으로 닫았다.

미국은 철저히 성과 위주로 직원을 고용하는데, 난 한 식구라는 소속감을 형성하기 위해 일부러 한국식으로 했다.

며칠 후 월요일.

조감독 에디. 제작부장 엠마가 모였다.

에디와 엠마에게는 한국처럼 전속을 제안했는데, 둘 다 전속 직원이 되기로 했다. 연봉 외에 작품 수당을 따로 받는다. 에디는 감독이 될 기회도 얻고.

“이번 신작 어땠어요?”

신작 이야기가 나오자 둘 다 환하게 웃었다.

에디가 먼저 말했다.

“저는 어웨이커보다 낫습니다. 초반은 이렇게 심하게 가도 되나 싶어 걱정이 되었는데, 후반에선 정말 통쾌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지만 감독님 작품은 다른 작품과 좀 달라요. 전개 방식이라든가, 표현 같은 게 말이죠.”

“저도 에디와 비슷해요. 감독님이 예술영화를 찍고 와서 이번 작품 분위기가 좀 다르면 어쩌나 했는데, 제 기대를 배반하지 않으시네요. 그냥 놀라울 뿐이에요. 관객이 뭘 좋아하는지 확실히 아시는 것 같아요. 예술영화로서도.”

아부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다.

두 사람은 비합리적인 게 있으면 직설적으로 말을 한다.

내가 직원의 말을 무시하는 사람도 아니니.

“이번 작품은 제작비가 1억 달러쯤 될 겁니다. 주연배우가 신인급이라 어웨이커보다는 제작비가 덜 들어갈 것 같네요. 우리가 9천만 달러 정도 자체 투자하고, 나머지는 투자사 블루스톤과 로큐 엔터가 투자할 거예요.”

“액셀 역은 누구를 생각하세요?”

“주인공 액셀은 오디션을 통해 뽑을 겁니다. 연기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정도 중요합니다. 출연료 때문에 2편과 3편을 안 할 사람이라면 뽑지 말아야 해요.”

이동욱 대표가 뽑아 놓은 리스트를 건넸다.

“거기에 우리 스튜디오 전속 스태프가 될 분들의 명단을 뽑아 놨습니다. 리스트 외에 두 분이 생각하는 유능한 스태프가 있다면 불러도 돼요. 앞으로 우리 스튜디오는 가능한 한 전속 스태프들로 영화를 찍을 겁니다. 스튜디오에서 동시 제작하는 영화가 몇 편 될 테니, 놀면서 월급을 받지는 않겠죠.”

에디와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속 스태프는 돈이 더 들어간다. 대신 안정적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번 영화가 시리즈 첫 작품이고, 같은 스태프가 다음 작품도 해야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새로 온 스태프가 파악해야 할 시간을 줄일 수 있으니.

곧장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했다.

소녀를 만나 녹색 구슬을 받는 장면을 지웠다. 대신 액셀이 납치되는 장면과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전사로 개조당하는 모습. 과학자가 은밀히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을 추가했다.

액셀을 개조하면서 자아를 잃지 않도록 했던 과학자가 외계인 놈들 에너지 근원이 ‘아크람’이라고 알려 준다. 납치한 소년들을 전사로 개조할 때 약간 불어넣은 힘이라면서.

이에 주인공 액셀은 납치당한 곳이 외계인 우주선 내부라는 걸 파악하고 탈출할 때 그 아크람 에너지 결정체를 파괴한다. 그 순간 아크람 에너지가 액셀의 전신을 뒤덮는다.

그 계기로 액셀은 특별한 전사가 된다. 엄청난 에너지가 액셀의 몸에 잠재적으로 축적되었던 것이다. 이는 외계인 몸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었다. 액셀의 변화를 확인한 과학자는 인류의 희망이 너에게 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고.

이후는 기존 내용과 같았다.

시나리오 재고를 마친 뒤 직원과 함께 또 번역 작업을 했다. 기존 영문 스크립트에 수정한 내용만 붙여서 넣었다.

그렇게 완성된 각본을 프린트해서 투자사 블루스톤과 특수효과팀 등 스태프들에게 배포했다.

이후 조감독은 배우와 스태프 섭외에 집중하고, 제작부장 엠마와 난 기초 예산 문서 작업을 했다. 모선의 형태와 외계인의 모습. 건물이 파괴되는 초안 등을 자세하게 묘사해서 특수효과팀 및 CG팀이 시안을 잡아야 놔야 했다.

그래도 한 작품을 해 봐서 그런지, 엠마와 에디가 내 성향을 파악해서 그런지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루하루 사무실 풍경이 달라지고, 문서가 쌓여 갔다. 얼굴이 익은 스태프와 처음 보는 스태프들도 하나둘 늘어나고.

어웨이커 제작 때는 나도 스태프를 못 믿고, 스태프도 내가 못 미더워서 일일이 관여하고 그랬는데 이번엔 믿고 맡겼다. 감독이 작은 사안 하나하나까지 관여하면 나도 스태프도 피곤할 뿐이다. 감독 욕심이기도 하고.

해서 영 아닌 경우만 아니면 오케이했다.

그렇게 준비 작업을 2주간 한 뒤.

마침내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갔다.

제목도 그제야 결정되었다.

<블루드 워 ; 영웅의 탄생.>

혈통 전쟁이란 뜻이다.

변이된 지구인과 저항군인 화성인이 서로 인류의 적자임을 주장하며 벌이는 전쟁이다.

본격 프리에 들어가면서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어웨이커는 기존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으로 제작했지만, 이번 작품은 한국식에 가깝게 했다. 할리우드식 ‘느긋함’을 버린 셈인데, 그건 느긋함이 아닌 시간 허비나 다름없었다. 주먹구구가 때론 더 나은 점도 있었고.

해서 제작 기간은 18개월.

3년을 1년 반으로 단축하는 만큼 스태프 연봉을 두 배로 올렸다. 3년 동안 줄 월급과 진행비를 따지면 오히려 그게 더 나았다. 스태프들이 곧장 다음 작품을 하면 3년에 두 작품을 하는 격이다.

사실 일정을 효율적으로 짜고, 선행 작업만 한다면 힘들 것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여유 있을 때가 더 많다. 팀별 과제에 기한을 두어서 회사에서 빈둥거리는 일이 없도록 했다. 과정이 더디면 알아서 야근하는 거고.

네오스타 스튜디오는 한국인의 회사다.

그런 업무 방식이 싫다면 나가야지 별수 있나.

대신 성과급이 상당하고 수당도 많이 줄 터였다.

미국 스태프들 다수는 내 방식을 환영했다. 그동안 할리우드 시스템의 타성에 젖어 있었을 뿐.

시안이 하나둘 나오고 CG 팀도 기본 스토리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콘티 작가와 함께 장면별 CG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러는 사이 오디션도 계속 열렸다.

조감독이 먼저 본 뒤 내가 확인하는 식으로.

그러다 프리 두 달 만에 샛별 하나를 발견했다.

건하의 백인 버전을 보는 듯한 친구였다.

21세. 제이슨 루카스.

키는 178. 조금 마른 체격.

삼류 연기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B급 영화와 하이틴 드라마에 단역 출연한 게 경력의 전부. 하지만 무척 근사한 분위기에 눈도 연한 푸른색이라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수많은 오디션 참가자를 보고, 뛰어난 연기력도 봤지만 주인공 액셀에 맞는 친구는 없었다. 연기는 내가 지도하면 되기에 분위기를 우선 보았다.

오디션 참가자 대부분이 열정적으로 연기에 임했는데 이 친구만 세상 다 산 친구처럼 무기력하게 연기했다. 떨어질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히어로치고는 몸이 약해 보였으니까.

이 친구를 지목한 것은 코어다.

회의실에 비척거리며 들어오는 자세부터가 뭔가 남다른 아우라가 있었다. 미국 10대를 거리에서 보면 어째 매가리가 없다. 긴 양말에 슬리퍼를 신고 속옷을 노출하고 다니는 모습.

그런 친구와 달리 눈빛에 힘이 있었다.

연기를 제대로 배우질 못한 데다 주눅이 좀 들었을 뿐.

몸짓과 표정에 강단도 제법 있고.

무엇보다 이 친구의 역할 적합성은 96%에 이른다.

강한 호감도 느껴지고.

“날 노려봐요.”

연기는 시키지 않고 노려보라니 의아한 표정이다.

그러나 떨어질 마당에 뭔들 못하겠느냐는 모습.

“피난민들 때문에 오기가 생겼어요. 좀 더 강하게!”

제이슨의 눈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자신이 타고난 연기자인 걸 모르는 친구다.

모르고 연기를 해도 정석이 나오고 있으니.

“고함을 질러!”

“으아아아!”

제이슨이 악을 써 댔다.

금세 얼굴이 붉어지고 목에 핏줄이 돋는다.

“지금 절망적이야!”

이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변하는 제이슨.

그럼에도 눈에 독기가 서린다.

딱 액셀이다.

“됐습니다.”

“이게 다예요?”

“네.”

제이슨이 눈인사를 하곤 나갔다.

옆에 앉은 조감독 에드워드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엔 별 관심도 없더니.

그리하여 프리 52일 만에 스토리보드 작업에 돌입했다.

이 작업도 한 달 이상 가는 게 아니라 보름 안에 끝내도록 했다. 회의하다가 허투루 시간을 보내느니 내가 각 콘티의 초안을 잡아 주었다.

각 팀의 콘티까지 마무리하자 남은 건 최종 시안을 제작하는 거였다. 그 시안을 토대로 특수효과 테스트 및 제작. CG 사전 작업을 할 수가 있다. 내게는 약 50일간의 공백이 생기기도 하고.

그 무렵 엠마가 최종 전 단계 문서 작업을 끝냈다.

제작비 1억 달러.

촬영기간 90일. 후반작업 210일. 총 제작 기간 15개월.

배급은 월트 디즈니. 스크린 수는 약 3,000개.

그렇게 프리 최종 전까지 완료했다.

촬영까지는 두 달 정도 시간이 남았다.

내가 확인할 게 있으면 메일로 봐도 된다.

조감독이 말했다.

“정말 믿기지가 않네요. 보통 6개월 걸리던 걸 3개월에 끝내 버리다니요. 별로 힘든 것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감독님이 선택과 결정을 워낙 빨리해서 그랬나 봅니다.”

“네오스타만의 방식이라는 걸 직원들이 이해해서 그럴 겁니다. 다들 열심히 해 줬어요.”

“직원들이 그러더군요. 감독님은 무슨 마법사 같다고.”

에디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 길로 공항으로 향했다.

* * *

로큐 콘텐츠 본부에 스태프들이 가득했다.

제작실장이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프리를 얼추 끝냈다.

시나리오는 두 달 전에 나왔고 수혁이와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3고 작업까지 끝냈다. 시나리오가 두 개다. 스태프용과 주연배우용. 캐스팅도 내 선택에 따라 마무리되었고. 내 영화에 배우들이 줄을 서니 어쩌겠나. 선택해야지.

내가 들어서자 팀장들이 몰려들었다.

최수혁은 이번에도 조감독이고, 팀장급은 플래닛 케이 영화를 만들어 왔던 전속이다. 최신성 사단이라고 해야 하나.

문서를 검토하며 수혁이에게 물었다.

“VR 카메라 제작했어?”

“네. 주인공이 방에 고립되어 있을 때 공백없이 360도로 찍힙니다. 착용 방식과 설치 방식 두 가지로요.”

“문서 다 볼 필요는 없어. 중요 사항만.”

“제작비는 약 20억. 촬영 기간은 20일가량입니다. 촬영 장소는 박승철 감독이 은하와 민수를 찍었던 폐광촌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실제로 주민 대다수가 떠난 곳이에요.”

“조연들은 다 캐스팅됐지?”

“예. 주연 이재훈을 비롯해 모두 캐스팅했습니다.”

이번 영화는 극장 개봉을 안 한다.

오직 플래닛 케이에서만 상영한다. 현재 플래닛 케이 회원 수는 천만에 육박하는데 VR 기술로 찍은 첫 공포물이라 반응이 좀 있을 듯했다. 영화가 악몽을 꾸는 듯한 내용인 것도 그 때문이다. 기어를 착용하고 보면 공포가 좀 다를 터다.

촬영은 간소화하고 세밀한 준비는 이번에도 안 한다.

스토리보드도 없다.

내 머릿속에 있는 그림 그대로 찍을 뿐.

스토리보드를 작성하는 건 팀장들과 현장에서 합을 맞추고 예산대로 찍기 위함인데 내 작품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20일 찍고 30일 안에 편집한다.

그리고 다시 미국행.

누가 보면 영화에 미친놈인 줄 알겠네.

대략의 구성을 짜고 영상 구상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뒤.

스태프 18명과 함께 강원도로 떠났다.

* * *

강이 있는 폐광촌.

스태프들이 강변 근처로 흩어졌다.

메가폰을 잡고 외쳤다.

“드라이아이스 설치됐어?”

“다 돼 갑니다! 바람이 좀 부는데요?”

“상관없어. 한 번에 가게 드라이아이스 다 깔아!”

“예!”

오전에 촬영하고 있으나 새벽처럼 보이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카메라에는 그레이 필터를 끼웠다. 내 특유의 음울한 영상을 위해. 거기에 영상을 보정을 해서 거친 질감을 준다.

한겨울에다 날씨까지 흐려 을씨년스러웠다.

주연 배우에게 외쳤다.

“재훈아! 촬영 전에 말한 거 잊지 마. 돌발 상황이 많다는 거. 그 때문에 깜짝 놀라서 연기 중단하면 안 된다. 민우야, 너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자연스럽게 반응하면 돼. 무서우면 무서운 그대로 가는 거야.”

“네, 감독님.”

아내 역이 물었다.

“너무 무서운 거 나오는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몰라요.”

“어떡해. 무서움 많이 타는데.”

“아내와 민우에게는 몇 번 없을 거예요.”

계약 때 명시했다.

촬영 중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고. 방에 갇혀서 살인마와 대치를 벌이는 장면은 배우 혼자 들어간다. 어떤 상황이 닥칠지 배우도 모른다.

주인공 시점의 시나리오를 따로 썼다. 그림자 살인마가 언제 나타날지, 어떤 행동을 할지 전혀 알 수 없다. 배우가 알아서 반응하고 연기할 뿐. 말 그대로 공포 체험이다.

기본 연기에다 실제로 놀라서 반응하는 게 이 영화의 특징이다. 관객이 주인공 시점으로 그대로 전달되도록.

멀리 주인공과 그의 아내와 아들이 대기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오는 장면이다.

첫 장면부터 이상한 현상이 보이는 씬.

“민주 선배님도 대기하세요!”

“네!”

뒤에서 한 노련한 여배우가 대답했다.

곧 바람이 멈추었다.

“안개!”

스태프들이 일제히 드라이아이스 포장을 뜯어 뿌렸다. 안개가 많아 보이도록 드라이아이스를 조각조각 내서 밀봉 보관하다가 한꺼번에 풀었다. 승화가 많아지도록 핫팩도 던져 놨다.

이내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다. 안개가 적당하게 퍼질 때까지 기다렸다. 너무 많아서도 안 되고 한쪽에 몰려서도 안 된다. 얼마 뒤 산맥의 운해처럼 안개가 유유히 흘러갔다.

“카메라! 음향!”

팀장들이 바로 스타트했다.

수혁이가 슬레이트를 카메라에 댔다.

“씬 5에 1에 2!”

“액션.”

누군가가 은밀히 지켜보는 듯한 카메라 앵글.

화면 저편에서 주인공 가족이 강변 자갈을 밟으며 걸어온다. 음산한 마을 분위기에 다들 겁을 먹었다. 세상에 없는 마을에 온 듯 안개가 기이하기 짝이 없다.

힘든 기색으로 걸어오던 주인공 가족.

문득 안갯속에 아른거리는 뭔가를 보고 멈춘다.

“저기… 저기요?”

안갯속 누군가를 목격한 일가족의 표정.

“컷. 그 상태로 유지하고.”

바로 카메라를 들었다. 이재훈의 시선으로 안개 저편을 그대로 찍었다. 고정하지 않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처럼.

안개 저편에 누군가가 있다.

으스스한 모습으로 서 있는 중년 여자.

주인공 가족을 빤히 보다가 안개 저편으로 들어가 버린다. 상체를 움직이지 않아 뒤로 미끄러지는 듯한 광경.

기이하기 짝이 없다.

다시 카메라 원래 위치.

일순 넋이 나간 채 안개를 보는 일가족.

대체 저 여자는 뭐지? 하는 표정.

그 순간!

쿠콰쾅-

“꺄악!”

천둥 벼락이 쳤다.

주인공 일가족이 정말 깜짝 놀랐다.

세 명 다 뒤로 주저앉은 채 하얗게 질렸다.

“컷! 좋아요! 강우 씬 준비!”

이재훈이 질색이 된 얼굴로 일어났다.

“돌발이 이런 식이에요?”

“응. 리얼하지?”

“아, 나 이제 죽었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주연배우 이재훈이다.

어째 애도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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