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예상 밖의 시상식
영화 개봉 시기를 미뤘다.
원래는 전국 300개 스크린에서 신작을 상영할 예정이었다. 예술 영화치고는 스크린 수가 많다. 배급사와 극장이 내 영화는 장르 불문하고 기본은 간다고 보는 거겠지.
한데 베니스 영화제 출품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블록버스터와 기대작이 여름 성수기와 추석 연휴에 집중 상영되는데,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해서 연말까지는 기다리겠다고 배급사에 연락한 뒤 기술 시사만 하기로 했다. 반응은 대체로 좋았다. 스태프들도 작업하면서 영화를 수도 없이 봤기에 그냥 예상대로 나왔구나 싶은 얼굴이다.
조감독 최수혁은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대충 찍은 것 같은 영화가 이렇게 매끄럽게 나올 수도 있구나 싶은.
그렇게 기술 시사까지 끝내고 ‘샌드위치’를 베니스 영화제 안드레이 씨에게 보냈다. 심사를 통해 경쟁 부분에 출품할지, 비경쟁 부분에 출품할지 정할 터다.
내 작품을 끝냈을 때.
승철이는 막 ‘사랑의 불시착’ 촬영을 시작했다.
시나리오가 달라지면서 프리 일부를 다시 했기 때문이다.
꽤 규모 있는 세트도 시공해야 했고.
사랑의 불시착에는 89년의 소품이 워낙 많이 들어가고, 도시 풍경도 CG로 처리해야 해서 돈이 제법 들어갔다. 시대물이라 모든 걸 새롭게 만든 셈이다.
3회 차 촬영장에 구경 갔다.
강원도에 1989년 영등포 거리와 구로동 거리를 재현해 놓았다. 겉보기엔 건물 같지만 사실은 판자에 시멘트를 바르고 유리창을 맞춘 뒤 페인트를 발랐을 뿐이다. 거기에 간판과 네온사인을 달고. 도로는 아스팔트가 아닌 보도블록을 깔았다.
촬영이 한창이었다.
이른바 영등포 중앙통 길이다.
아이돌 출신 박형석이 남자 주인공인데 러닝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채 룸카페 입구에 앉아 있다. 당시엔 룸카페라는 곳이 있었다. 호프집에 아가씨가 있는 술집이다.
이번 영화에는 제니스의 연희가 여주인공 친구이자 공장 동료로 출연한다. 지현이도 카메오로 출연하는데 깐깐한 미싱반 반장 역할로 나온다.
“액션!”
박형석과 옆 룸카페 종업원이 한가하게 수다를 떤다.
웨이터라 두 사람의 머리는 단정한데, 오가는 보조 출연자들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촌스럽기 그지없다. 승철이가 어디서 저런 디테일을 찾아냈는지.
“컷! 두원아! 왜 그렇게 건들거려?”
“허세죠, 허세!”
“허세가 아니라 후카시! 허세는 스웩이고! 후카시는 똥폼이라고! 조폭처럼 어깨 힘주고, 인마! 두 놈 다 조폭이 꿈이지, 양아치가 아니야!”
“하하하하!”
승철이의 외침에 스태프들이 웃었다.
평소에도 이상하게 웃기는 놈이 승철이다.
젊은 관객의 선호와 유행을 함께 호흡하는 게 녀석의 장점이다. 영화에도 그 점이 드러난다.
“행동은 무겁게! 자세는 멋짐! 웨이터 주제에 세상 무서울 게 없어! 조직원들 앞에선 착한 동생! 알겠냐!”
“예, 감독님!”
“다시 간다, 조감독!”
“모두 레디!”
승철이 현장에 오면 늘 재밌다.
은하와 민수 때도 즐거웠는데, 복고 코믹 멜로를 찍으니 더 분위기가 밝다.
“오셨어요?”
지현이와 연희, 여주인공 진세경이 왔다.
모두 우리 회사 소속이다. 진세경은 지난번 정효주 소개로 나와 만나려다 불발되고, 나중에 회사에 들어왔다.
지현이와 진세경이 선배이다 보니 연희가 나대지 않고 인사만 하고 분장을 받으러 갔다. 진세경도 우아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지현이가 환하게 웃었다.
“저, 할리우드 영화에 또 출연할 거 같아요.”
“그래, 잘됐다. 어떤 영화야?”
“동양인 킬러 역할인데 비중도 제법 있어요.”
“언제부터 촬영이야?”
“내년요. 건하도 내년에 할리우드 영화 한 편 찍을 것 같다고 최지성 팀장님이 그러더라고요.”
“회사에 러브콜이 좀 오나 보다.”
“네.”
지현이가 밝게 웃었다.
내 덕에 할리우드 배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지현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분장을 받으러 갔다.
촬영이 순조로워서 보기 좋았다.
이 영화를 승철이가 맡기를 잘했다.
내가 했으면 샌드위치는 묻혔을 테니까.
화끈하게 소고깃집을 예약해 주고 서울로 향했다.
* * *
미국에 와 있었다.
수호와 권혁민과 함께 완공된 건물 안을 돌아다녔다.
건물은 내부까지 공사를 마쳤다. 이 건물의 5개 층을 영화사로 쓰고, 2개 층에 로큐 미국 지사와 특수효과 및 CG 팀이 들어온다. 그 외는 임대할 예정이었다.
이어 스튜디오로 향했다.
정말 코엑스 전시관을 보는 듯 텅 비어 있었다. 50미터 가량의 정사각형 공간에 커다란 기둥만 네 개 있다.
공사 진행을 관리했던 수호가 말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입니다. 이 1층은 네 기둥을 기준으로 공간을 나눌 수 있습니다. 천장에는 스크롤 방식의 그린스크린이 설치되었습니다. 풀어서 바닥에 내린 뒤 고정하면 팽팽해집니다.”
천장을 보았다.
그린스크린이 둘둘 말아놓은 형태로 부착되어 있다. 조명을 설치할 구조물과 와이어 장치도 복잡하게 얽혀 있고.
수호가 말을 이었다.
“2층에는 일반 사무실을 비롯하여 녹음실. 특수장비 통제실, 영상 조정실, 편집실 등이 있습니다. 지하 1층은 창고입니다. 습도 조절과 환기가 되도록 하여 장비 관리에 신경을 썼습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로 쉽게 운반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와 특수촬영 장비도 다 구비했어?”
“예. 이동욱 대표와 함께 꼼꼼하게 리스트를 작성하여 거의 모두 구입했습니다. 카메라 종류만 30개가 넘습니다. 크레인 같이 큰 장비도 스튜디오 지하에 있습니다. 탑차가 지하로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차량도 좀 필요하지?”
“할리우드에선 컨테이너를 주로 쓰던데 효율이 낮습니다. 우선 한국처럼 탑차를 쓰고, 회사가 커지면 컨테이너를 구매하는 게 낫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생했다.”
“저보다는 혁민이가 고생했죠.”
권혁민이 말했다.
“이 부지 매각한 부동산 업자 있잖아요?”
“응. 왜? 부지를 또 판대?”
“예. 제가 혹시나 해서 추진해 봤습니다. 이 스튜디오 반 정도 되는 부지를 매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인데 내가 마음에 들어 할 걸 예상하고 미리 타진해 본 모양이다. 혁민이 예상대로 난 마음에 들었다.
“매입해 봐. 직원 숙소 좀 짓게.”
“숙소라면 일반 주택으로요?”
“그래. 아파트보다는 일반 주택이 낫지.”
“추진하겠습니다.”
권혁민은 꼭 무슨 잘나가는 대기업 직원 같다.
뚱뚱했던 친구가 근 1년 사이 살이 빠진 것도 놀랍고.
두 사람에게 회사 이전을 맡겼다.
이 대표는 주로 로비 활동을 하고, 수호와 권혁민이 사실상 공사 관리와 회사 실무를 맡고 있었다. 맡은 일이 중요하다 보니, 두 사람도 책임감을 가지고 진행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지.
회사 자본금으로 100억가량을 추가했다.
올해 5월에 또 배당금을 받았던 터다.
그 자금으로 사무실을 꾸미라고 지시했다.
이왕이면 구글 본사처럼 캠퍼스 형태로 자유분방하게.
수호는 몰라도 권혁민은 알아서 잘할 터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그의 재능이니까.
이 대표는 뉴욕에 가 있어서 만나지 못하고 바로 이탈리아로 넘어갔다. 내가 비행기에 오를 즘 서연과 임시환, 제작실장과 수호팀 2명은 베니스에 도착했을 터다.
* * *
마르코폴로 공항에 내렸다.
내가 타고 온 비행기가 베니스 영화제 특별 직항편이어서 미국 영화인과 기자들이 잔뜩 탑승한 상태였다. 기내가 기자 간담회로 변했을 정도다.
게이트에 팬이 꽤 많았다.
할리우드 유명 감독과 배우 등이 게이트를 통과하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난 모른 척 빠져나가려고 했더니, 일부 이탈리아 여성팬이 내게도 환호를 보냈다.
음악 영화 멜로디와 어웨이커 덕분이다.
팬들 사이에 둘러싸인 서연이 보였다.
날 마중 나왔다가 포위된 형국이었다.
나와 서연이 포옹하자 플래시가 수도 없이 터졌다.
일본 기자들은 왜 이렇게 또 많이 왔는지.
“최 감독님! 일본 영화 좀 찍어 주세요!”
“안 됩니다! 차기작도 한국 영화 찍으세요!”
“일본팬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한국팬들은 목이 빠집니다!”
“하하하하!”
한국과 일본 기자들이 외치다가 웃었다.
양국의 분위기가 이렇게 좋았나.
기자가 한국말이 정말 유창하네.
“서연 씨! 감독님과 포즈 부탁합니다!”
일본 기자의 외침에 나와 서연이 나란히 섰다.
사진을 찍은 뒤 일본과 한국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했다. 일본 여성 기자 한 분은 좋아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남자 기자들은 엄지 척을 선사하고.
서구 기자들은 양국 기자들을 보고 왜 저러나 싶다.
* * *
호텔 스위트룸에 들었다.
방에 베니스에 온 모두가 모였다.
경쟁 부분에 출품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수혁이에게 물었다.
“여기 분위기는 어때?”
“느낌이 좋아요. 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집행위원이 세 번이나 호텔에 찾아오더라고요.”
제작실장이 말했다.
“프로그래머가 온 건 배려인데 집행위원이 왔다는 건 기대해도 좋다는 신호일 겁니다. 특히 서연 씨, 시환 씨와 대화를 오래 한 걸 보면 연기상은 노려볼 만합니다.”
서연이 말했다.
“마음 비웠어.”
“저도요.”
임시환도 웃으며 말했다.
제작실장이 말을 이었다.
“집행위원이 그러더군요. 영화가 참신하고 신선했다고요. 일부러 심플하게 만들었느냐고 묻더군요. 대표님 전작을 다들 봤으니까요.”
“뭐라고 하셨어요?”
“감독님 의도였다고 했죠.”
웃음이 났다.
사실 촬영도 편집도 엉성하기 짝이 없다.
나 혼자 만든 영화라는 걸 모르면 일부러 고등학생이 찍은 것처럼 연출했다고 볼 수도 있다. 형용사와 미사여구를 배제한 건조한 문체처럼. 사실 그걸 의도하긴 했다만.
최수혁과 유희진은 내내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감독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듯 만든 영화를 가지고 베니스 영화제에 왔다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특히 최수혁은 조감독으로 직접 봤으니 더 그렇다. 촬영 내내 같은 표정이었다.
영화 이렇게 막 찍어도 되나?
다들 호텔에서 나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했다.
부산영화제처럼 베네치아 섬 곳곳에 세계 각국 영화인들이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국영화 3편이 비경쟁 부분에 출품되어 그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식사한 뒤에는 섬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영화제를 즐기러 온 한국과 일본의 팬들도 많아서 이동하다 사진 찍느라 정신없었다. 즐겁기는 했다. 이국의 풍경 덕분에.
그러다 우연히 마이클 플린 CNN 기자와 마주쳤다.
그가 먼저 날 알아보았다. 마치 날 기다렸다는 듯.
해가 저물 무렵이라 플린 기자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소감이 어떠세요?”
“좋죠. 영화제에도 취재하러 다니세요?”
“아니에요. 회사에서 이번에 한번 가 보라고 권유해서 왔습니다. 세계 3대 영화제에 최 감독이 처음 참가해서 개인적인 흥미도 있었고요. 어떠세요? 수상 자신합니까?”
“글쎄요. 뻔한 말이지만 참석에 의미를 두려고 합니다. 휴가도 즐길 겸 이틀 먼저 왔죠.”
“저는 예감이 좋습니다. 감독님 만나기 전에 집행위원을 만났습니다. 최 감독님 영화는 꼭 보라고 하더군요. 뭔가 있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그야, 마이클이 날 후원해 주셨으니까요.”
“후원이라뇨. 전 기자일 뿐입니다. 놀라운 걸 찾아다니는 게 저의 일이죠. 최 감독님은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내가 먼저 최신성 감독을 지목했다는 게 자랑스럽네요. 감독님을 내가 선점한 셈이죠.”
마이클 기자와 웃으며 건배했다.
뭘 바라고 날 띄워 준 건 아니었네.
마이클은 함께 있던 서연과 임시환과도 인터뷰를 했다.
CNN의 베니스 영화제 소식에 나올 터였다.
도시 너머는 붉은 노을로 물들고, 바로 옆 좁은 해로로는 곤돌라가 유유히 지나갔다.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
* * *
다음 날 전야제에 참석했다.
영화제 메인 극장은 베네치아 섬 옆 기다란 섬인 리도 중앙에 있었다. 팔라조 델 시네마 극장이다. 그 극장 옆에 있는 호텔 베니스에서 전야제가 열렸다.
턱시도를 입고 가려다 큰일 날 뻔했다는 제작실장이 말에 편한 여름옷으로 바꿔 입었다. 왜 큰일이 날 뻔했는지는 호텔에 도착한 뒤에야 알았다.
참석한 이들 중 턱시도를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수영장을 중심으로 파티가 열린 터라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는 물론, 슬리퍼를 신고 온 배우도 있었다. 수영복을 입고 노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세계 3대 영화제에 처음 와서 그런 걸까.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처음엔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날 소개하더니, 나중엔 바이어들이 줄을 섰다. 배우들도 줄줄이 내 주변에 모였다. 심지어 할리우드 배우까지.
처음엔 왜들 이러나 싶었는데.
내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이들이었다.
눈도장을 찍어 놓으려는 거지.
한 이탈리아 여배우는 노골적으로 유혹을 했다. 결국 사람들 만나느라 바쁜 서연이 슬쩍 내 옆에 끼면서 눈빛으로 제압해 버렸다.
어쨌든 전야제에서 무수히 많은 인맥을 쌓았다.
깐느와 베를린 영화제 프로그래머도 만나서 차기작 출품을 요청받았다. 샌드위치에 대한 무슨 소문이라도 들었는지 할리우드 영화건, 한국 영화건 반드시 초청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놀랍다는 말을 계속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어 내는 게 신기하다면서. 블록버스터와 예술영화를 번갈아 만들며, 영화의 연출도 작품마다 다른 감독이라며.
아비도와 이동원. 어웨이커와 샌드위치.
작가영화와 상업영화를 넘나들기는 했다.
네 작품 모두 연출 스타일이 다르기도 하고.
* * *
다음 날 레드 카펫 행사가 열렸다.
나와 서연. 임시환이 레드 카펫을 걷고 사진을 찍었다.
열기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는데, 기자간담회만 참석하곤 호텔로 돌아갔다.
그 뒤 6일 내내 호텔에서만 지냈다.
제작실장은 마켓 부스에서 열심히 바이어를 만났다. 예술 영화라 수입하려는 바이어가 별로 없을 줄 알았더니 바이어들 관심이 꽤 많았다. 대체로 유럽 쪽이다.
일본은 상영도 안 했는데 이미 계약했다. 지난번 아메리칸 필름 마켓에서 일본인 바이어들이 멜로디를 놓고 박 터지게 경쟁한 터라 처음부터 높은 단가로 사 버렸다.
영화 망하면 어쩌려고.
그리하여 7일째.
나와 서연, 임시환은 우리 영화 샌드위치가 상영되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외신기자를 비롯해 일반 관객들로 극장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 셋은 2층 계단 구조로 된 객석 중 2층 맨 앞에 나란히 앉았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앉는 자리다.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에게 인사하기 좋은 위치.
우릴 알아보는 이들이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이탈리아인이 대부분인 관객들 태반이 우릴 모른다. 마이클 플린 기자가 와 있었고, 평론가와 유력 미디어 기자들도 대부분 온 것 같았다. 경쟁 부분에 오른 영화라서 그런지.
이윽고 영화가 상영되었다.
우리 셋 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영화를 보았다.
솔직히 난 조금 부끄러웠다. 편집에 어색한 부분이 보여서.
한 10분 지나자 더 부끄러운 일이 벌어졌다.
관객 세 명이 슬그머니 일어나 나갔다.
앞에 앉은 젊은 관객은 하품을 하고 있고.
30분 지나자 또 4명이 빠져나갔다. 한 명이 자리를 뜨자 눈치를 보던 다른 관객도 이때다 싶어 나간다.
애써 모른 척하며 영화를 보았는데.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닌 것처럼 영화에 몰입했다.
단조로운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상하게 집중이 된다.
흡사 마라톤 중계를 보듯.
어느새 영화의 크레딧이 오르고 있었다.
“오빠. 정말 좋아.”
“감독님. 고맙습니다.”
서연과 임시환이 눈물이 맺힌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나도 콧등이 시큰했다.
역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편집실 모니터로 보다가 극장에서 보니 조금 다른…
서연의 손짓에 옆을 보았다. 그리고 뒤를 보았다.
관객이 눈물을 쏟고 있었다.
앞에 앉은 관객들은 흐느끼고 있고, 뒤에 앉은 관객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손수건을 든 채 멍하게 스크린을 보는 이들도 있고.
그때였다.
앞에서 남자 두 명이 일어나더니 박수를 보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도미노처럼 모든 관객이 기립하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휘파람도, 환호도 없었다. 그냥 눈물이 흐르는 가운데 묵묵히 박수만 보냈다.
관객 모두가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마이클 플린 기자를 비롯한 외신기자들도 기립박수를 치고, 카메라는 열심히 찍고 있었다. 급기야 플래쉬도 터져 나왔다.
나와 서연, 임시환은 사뭇 감동했다.
뒤늦게 일어나 박수를 보내는 관객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곤 나가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기립 박수가 계속 이어졌다.
수차례 답례 인사를 했는데 기립박수가 너무 길어져서 민망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관객들이 그제야 감정을 수습했는지 몇 분 지나자 휘파람을 불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한 일본인은 ‘산도이치!’ 하고 비명 같은 고함을 질러 댔다. 기자인지, 샌드위치를 구매한 바이어인지. 그 바람에 극장에 웃음보가 터졌다.
이 기립박수는 자그마치.
10분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난리가 났다.
10분 넘게 이어진 기립박수가 끝나자 내 체감 상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일반 관객이 영화의 여운에 못 이겨 몰려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갇힌 채 강제로 기자회견을 했다.
별의별 질문이 다 쏟아졌다.
의도적인 연출인가. 드라마가 전혀 없는데 관객을 울리는 건 어떤 장치 덕분인가. 이 영화는 어떤 장르로 봐야 하는가. 두 주연배우에게 어떤 연기를 요구했나. 미숙한 연출 기법은 관조자의 따스함을 의미하는 것인가.
질문에 대답하면서 내심 놀랐다.
나도 몰랐던, 스태프도 배우들도 몰랐던 부분을 프랑스 기자가 포착했던 것이다.
샌드위치에서 카메라는 관찰자의 시선이다.
그런데 그 시선에 온기가 있었던 거였다. 그냥 타인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친구나 가족의 안쓰러운 시선 같은.
나도 모르게 카메라 앵글에 그런 정서를 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주인공이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힘든 상황을 지켜보는 내 감정이 담겼을 테니.
임시환은 무명작가일 때 내 모습이자, 이 시대 청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당연히 찍으면서 연민의 감정이 들었고.
따뜻한 손길 같은 카메라의 시선이 사람들을 울린 배경이었다. 내 가족, 내 친구의 외로운 일상을 들여다본 셈이다.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했고.
의도적인 미숙한 연출.
이건 전문가가 아닌 관객의 시선을 닮은 거였다.
웰메이드 영상이 아닌, 인위적인 개입도 없는.
그래서 두 주인공에게 깊이 감정 이입이 되었던 거다.
어쩐지 대충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했더니.
기자회견을 하면서 방금 생각한 것들을 원래 의도한 것처럼 설명했다. 얼굴에 철판 깔았지, 뭐. 서연과 임시환은 내 말에 눈이 동그래져서 날 본다. 그런 의도였다는 걸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듯.
전작의 연출이 형편없었다면 내가 일부러 미숙한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했을 때 코웃음을 쳤을 터다. 그러나 아비도에서 나만의 스타일을 보여줬고, 이동원에선 박진감이 뭔지 확실히 보였다. 어웨이커에선 스케일을 보여줬으며, 멜로디에선 현대적이고 세련된 미장센을 자랑했다.
기자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넘어간다.
마이클 플린 기자는 연신 함박웃음을 짓는다.
슬픈 영화가 아닌데 왜 눈물이 나지?
따스한 시선 때문이었다.
이점이 해결되자 기자들 대부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희망이 없는데 희망이 느껴진 이유도 그거였고.
영화는 재미없었는데 감동했다는 희한한 말도 나왔다.
그 말에 다른 기자는 상업 영화 기준으로 영화를 평가하느냐는 반박을 한다. 또 다른 기자는 예술 영화의 상업적 기능을 제대로 발휘한 영화다. 흥행할 것 같다는 덕담도 했다.
그렇게 30여 분이나 이어진 기자회견을 끝내고 극장에서 나갔다. 극장 밖으로 나와서도 기자들이 따라오는 바람에 노천카페에서 30분을 더 간담회를 했다. 진귀한 풍경이었다. 기자 50여 명이 대충 바닥에 앉아 내 말을 듣고 있는 게.
2차 기자회견까지 마친 뒤 호텔로 돌아왔다.
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자꾸만 사진을 찍자, 사인을 해달라 요청을 해서 한가하게 맥주나 마시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호텔에서 일본인 무리를 만났다.
기자와 바이어가 섞인 그들 중 한 명이 ‘산도이치’를 외쳤던 사람이었다. 코미디언이자, 영화배우이며 MC였다.
왜 샌드위치를 외쳤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좋아서 그랬단다.
옛날 일본 영화 보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나.
내 영화를 산 바이어도 감격한 얼굴로 나와 포옹했다.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이라며. 그러면서 와인 하나와 크리스탈 와인잔 두 개를 주었다. 크리스탈이 베니스 특산품이라네.
일본인들과 인사를 한 후 룸으로 올라갔다.
내 방에 또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다들 애써 흥분을 감춘 얼굴로 나와 포옹했다.
“서연이도, 시환이도 고생했어.”
“별로 고생한 것도 없잖아요.”
“그러게.”
시환과 서연의 말에 다들 웃었다.
그러고 보니 고생한 게 없네. 웬만한 씬은 한 번에 찍었고, 하루에 8시간 이상은 촬영하지 않았다. 촬영 기간은 고작 17일.
아비도 때 배운 게 있었다.
촬영에 여유가 있으면 배우들 연기력이 좋아진다는 점.
쫓기듯 찍으면 연기에 대한 고민과 집중을 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널널하게 찍었다. 예술 영화는 그래야 한다.
* * *
잠결에 문자 온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스마트폰을 보니 오전 8시.
지난밤에 새벽까지 와인 파티를 하고 잤다. 조식 먹으라는 수혁이 문자인가 싶었는데 제작실장 문자였다.
[오늘 아침에 유력 미디어들 평점이 나왔어요. 최수혁 씨가 찾아서 정리했는데 보내드릴까요?]
[네.]
[잠시만요.]
얼마 뒤에 꽤 긴 문자가 왔다.
세계 유력 매체의 리뷰와 평점이었다.
‘이토록 조용한 감정의 폭풍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할리우드 리포터. 평점 5/5
‘슬프면서도 카타르시스가 폭발하는 최신성의 예술.’
버라이어티. 평점 8/10
‘영혼을 위로하는 마법의 영화.’
가디언. 별 다섯.
‘영화와 삶을 돌아보게 하다.’
스크린 데일리. 3.7/4
[그 외에 평론가 40명이 참여하는 ‘투다스 라스 크리티카스’에서는 10점 만점에 8. 8을 받았습니다. 현재까지는 경쟁 진출작 중 가장 높습니다. 위 스크린 데일리도 11개국 매체가 평점을 주는데 거기서도 지금 최고 점수입니다.]
경쟁작 중에는 세계적인 거장이 수두룩하고, 레드 카펫 때 가장 주목받았던 영화들도 있다. 그 영화들을 제치고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압도적인 걸작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직 3일 더 남은 터라 지켜봐야 했다.
지루했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호평이었다.
서연이 말처럼 나도 마음을 비웠다.
첫 세계 3대 영화제에 출품해서 이 정도 호평이면 할 만큼 했다. 이게 예술 작가로서 내 정점일까 봐 두렵기도 하고.
서연이가 내 방에 조식을 가져왔다.
내가 늦잠을 자는 동안 챙겨두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놓는 조식을 보고 빵 터졌다.
샌드위치였다.
“호텔 측에서 오빠를 위해 준비했나 봐.”
“성의가 고맙네.”
서연과 마주 보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러 나갔다.
수혁이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어났다.
“제작실장님 연락받으셨어요?”
“응. 네가 작성한 거 잘 받았어.”
“그거 말고요. 지금 마켓 부스에 난리 났대요.”
뭔 난리가 매일 벌어지는지.
“무슨 난리?”
“바이어들이 입찰 경쟁하느라 바글바글하다네요. 규모가 워낙 작은 예술 영화라 시작 단가가 좀 낮았거든요.”
“그래, 싸게 많이 팔면 좋지.”
“이젠 싼 게 아니에요. 프랑스 쪽은 5억까지 올랐거든요.”
“5억? 과열 경쟁 아니야?”
“프랑스 사람들 취향이라고 하더라고요.”
일본사람도 좋아하고, 프랑스는 취향이라고 하고.
현대화의 그늘이 있는 나라는 다들 비슷한 거겠지.
서연이 매니저 노릇을 하는 유희진도 쉴 새 없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 서연의 인터뷰 요청을 완곡히 거절하는 중이다. 같이 있는 임시환 매니저도 그렇고.
호텔 로비에 잠깐 머물렀는데도 기자와 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본팬들은 정말 극성이다. 멀리서 떨어져 지켜보기만 해서 편하긴 한데 그렇게도 좋을까 싶다.
팬과 기자는 신경 안 쓰고 느긋하게 영화제를 즐겼다.
곤돌라도 타고, 본토 피자와 파스타도 먹고.
선물용으로 와인과 크리스탈 컵도 여러 개 샀다.
그렇게 3일이 훌쩍 지나갔다.
베니스 영화제 폐막 당일 아침에 집행위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영화제 측에서 마련해준 호텔 마지막 날이라 체크 아웃을 하려던 참이었다. 폐막식에 꼭 참석해 달라는 말.
폐막식에 머릿수를 채워달라는 말은 아닐 터였다.
해서 오후에 나와 서연, 임시환은 폐막식이 열리는 살라 다세나 극장으로 향했다. 샌드위치가 상영되었던 그 극장이다.
폐막식 레드 카펫을 밟고 포토콜 행사를 했다.
베니스 영화제에 온 모든 기자가 모인 듯했다.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와 서연, 시환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포토 라인에 서서 사진 찍고 짧은 소감도 말하고.
포토콜 이후 한국 기자를 모아 따로 기자회견을 했다.
우리보다 기자들이 더 격양된 상태였다.
한국에서도 이번 영화제에 관심이 크다고는 들었다.
그러니 방송국에서도 촬영팀을 보냈겠지.
기자회견을 끝내고 극장에 입장했다.
경쟁, 비경쟁 감독과 배우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았다.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하거나, 그들이 먼저 날 안았다. 먼 곳에서 인사를 하는 이들에게는 눈인사로 보답하고.
다들 착석하고 얼마 뒤.
베니스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나와 폐막 선언을 하고 이탈리아 가수의 공연이 이어졌다. 오페라 가수도 나오고.
이어 단편 영화부터 시상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제작실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 ^]
이게 무슨 의미일까.
영화제 측이 당사자 모르게 수상 여부를 알려준 모양이다. 폐막 만찬 초대장을 받았다고 하더니 그때 말해준 듯.
그렇게 시상이 진행되어 마침내 여자주연상 시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시상자였다.
나와 시환이는 긴장했는데, 서연은 담담했다.
쟁쟁한 여배우들이 워낙 많아서.
“제80회 베니스 영화제 볼피컵 여우주연상은…”
서연이 일순 긴장하는 게 보였다.
내 손을 잡아온다.
이자벨 위페르가 우리 쪽을 보더니 윙크했다.
“샌드위치의 안서연. 축하합니다.”
팡파르가 터져 나왔다.
나와 서연, 시환이가 벌떡 일어났다. 서연은 시환이와 먼저 포옹하고, 날 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녀를 힘껏 안아주었다.
서연은 박수를 보내는 관중에게 우아하게 인사를 한 뒤 무대로 나갔다. 나와 시환이는 열심히 박수를 보내고.
상상은 했으나 실제로 보니 정말 꿈만 같았다.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상을 받다니.
서연은 능숙한 영어로 소감을 말했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콧등이 시큰해지는 바람에.
서연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객석으로 돌아왔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감격에 겨운 눈물을 애써 참고 있었다. 아이돌 출신 배우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적이 있던가.
상을 받는 걸 보는데도 현실 같지가 않았다.
시환이는 한결 짐을 던 모습으로 서연을 환영했다.
보통은 한 영화가 한 부분만 수상하는 터라.
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여우주연상을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베니스 영화제에 온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남자주연상 수상자는… 샌드위치의 임시환!”
시환이가 입을 크게 벌린 채 날 보았다.
나도, 서연도 저절로 입이 쩍 벌어졌다.
셋 다 눈은 튀어나올 듯 커지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뒤에 앉은 한국 감독이 시환이 등을 툭 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환이가 나와 서연과 포옹한 뒤 허겁지겁 나갔다. 경황이 없었던지라 나가다가 앞으로 자빠졌다.
아이고 시환아!
시환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무대로 달릴 듯 걸었다.
객석에서 휘파람이 들리고 요란한 박수가 터졌다.
이제 서른을 갓 넘은 아이돌 출신 배우가. 그것도 세계 영화 무대에선 무명인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서연이 받은 것보다 더 충격이 컸다.
시환이는 무대에 오르고 나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전혀 예상을 못 했나 보다.
솔직히 시환이가 신인배우상이나 신인연기상은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주연상을 받을 줄은 미처 몰랐다.
시환이는 횡설수설하듯 소감을 말한 뒤 무대에서 내려왔다.
영혼이 가출한 표정으로 우리 쪽으로 올라왔다.
이 상 받아도 되는 건가요? 하고 눈으로 내게 묻는다.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다시 시상이 이어졌다.
주요 상을 두 개나 받았으니 더는 수상이 없다.
작품 자체의 기술적인 면이나, 예술성은 다른 작품에 비해 좀 떨어진다. 엄밀히 말해서 샌드위치라는 영화의 연출력도 사실상 보잘것없고.
관객이 울음을 터뜨린 것은 서연과 시환이의 연기 때문이며, 두 인물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질적 수준은 그냥 그렇지만 연기력만큼은 심사위원들이 제대로 평가해준 것 같다.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한 영화에 상을 두 개나 준 건 이례적이다.
황금사자상은 기대 안 했다.
내 작품을 내가 가장 잘 아니까. 더구나 황금사자상은 세계 영화사에 업적이 있거나, 예술적 명성이 있어야 한다. 30대 애송이 감독에게 줄 상도 아니고.
해서 여유를 가지고 시상식을 구경했다.
내일 한국 언론에 대서특필 될 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한국 영화 역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으니.
“수상자는… 샌드위치의 최신성 감독! 축하합니다!”
응?
이건 또 뭐야?
내가 두리번거리자 서연이가 눈물을 쏟으며 날 안았다.
시환이도 울며 나와 서연이를 동시에 안았다.
그뿐 아니라 뒤에 앉은 한국 감독과 배우도 내려와 우릴 안았다. 플래시가 수도 없이 터지고 있었다. 한국 방송사는 아예 우리 앞까지 와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고.
유명 감독과 배우들이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시상자인 마이클 만 감독은 환하게 웃는다.
진행 요원은 열심히 무대로 손짓하고 있고.
“내가 뭘 받은 거야?”
서연이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입을 뗐다.
“은사자상.”
“아까 다른 감독이 받았잖아?”
“그건 심사위원대상이고, 이번에 감독상.”
“아!”
그제야 무슨 상을 받았는지 이해했다.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진행되는데다 신경을 안 썼더니.
시환이가 장난치듯 내 등을 떠밀었다.
말 그대로 등 떠밀린 채 무대로 걸어갔다.
더는 수상이 없다고 여겼는데 이럴 수가!
무대에 올라 상을 받았다.
마이클 만 감독이 트로피와 부상을 주곤 날 안았다.
그러곤 마이크 앞에 섰다.
수많은 눈들. 카메라 플래시 불빛들. 조명들.
수상 소감 준비도 안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먼저… 세계 영화계에 신인에 불과한 저에게 이 뜻깊고 영광스러운 상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샌드위치에서 열연해준 안서연과 임시환이 큰 상을 받아 전혀 기대를 안 하고 있었네요.”
내 말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영화 샌드위치를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베니스 영화제와 심사위원장님, 그리고 작품을 초청해주신 집행위원분들께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객석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시상자와 악수를 나누었다. 다시 팡파르가 터져 나왔다. 성큼성큼 무대를 가로질렀다. 무덤덤했던 기분이 점점 흥분되고 있었다.
손에 든 트로피를 보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사자 형상.
이 번쩍거리는 트로피가 내 손에 있다니.
* * *
호텔에서 만찬이 열렸다.
그냥 뒤풀이 같은 식사 자리였다.
마침 같은 곳에서 ‘한국 영화인의 밤’ 행사도 열려서 베니스에 온 한국 영화인들과 함께했다.
다들 자기 일처럼 축하하고 기뻐해 주었다.
기자회견을 하고 나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제작실장이 내내 웃고 있었다.
“미리 언질 받았죠?”
“네. 세 분 모두 상 받을 거라고 하더군요. 저만 알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참느라 혼났습니다.”
시환이가 말했다.
“상을 3개나 받는 경우도 있어요?”
“글쎄.”
제작실장이 더 환하게 웃었다.
“심사위원들이 엄청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황금사자상을 줄 것이냐, 주연배우 상을 줄 것이냐. 황금사자상을 주고 싶은데, 그 상을 받으면 다른 주요 상을 못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기엔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 아까워서 궁리 끝에 묘안을 선택했다더군요.”
다들 그제야 이해했다.
제작실장이 말을 이었다.
“이번 베니스 영화제 최고의 작품이었다는 뜻이죠.”
그럴지도 모르겠다.
심사위원들이 작품상, 연기상 다 주고 싶었다면.
아직 젊은 내겐 황금사자상보다 낫다.
베니스에 온 세 명 모두 상을 받았으니.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밤이었다.
* * *
다음 날 오전에 호텔을 나섰다.
호텔 로비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몇 마디 질문에 대답만 하고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어제 만찬 때 기자회견을 했는데도 3관왕이 워낙 이례적이라 그런 듯.
기내에도 한국 기자들이 많았다.
그들과 기자간담회를 또 했다.
영화 개봉과 베니스 영화제 참가 소회를 얘기하다가 따로 받은 부상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서연과 시환이 부상을 선 보였다. 황금사자상, 주연배우상, 공로상 4명에게만 주는 스위스 명품 시계였다. 2천만 원 상당.
내가 받은 건 사파이어 반지다.
해서 셋이 반지와 시계를 착용한 뒤 사진을 찍었다.
나란히 왼손을 들어 올린 채 미소 지으며.
이후에는 조용히 각자 좌석에 앉아 잠을 청했다.
한국에 도착해서 짐을 챙길 때였다.
내 뒤에 앉아 있는 MBS PD가 말했다.
“감독님. 두 분과 함께 토크쇼 출연은 어떠세요?”
“예능은 별생각이 없습니다.”
“한 번만 나와주세요. 특집 방송으로 편성할 겁니다.”
서연과 시환을 보자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능은커녕 방송에도 나가본 적이 없다.
방송에 출연하면 부모님이 좋아하시긴 할 텐데.
“좋습니다.”
“예!”
PD가 도장이라도 박아둘 기세로 급히 전화를 했다. 상을 받았으니 대중이 궁금하기는 할 터다. 그냥 인터뷰보다는 예능 출연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게이트로 나가자 또 빛이 폭발하듯 터졌다.
무슨 폭죽이 터지는 듯했다.
이어 함성과 환호가 쏟아지고.
나와 서연, 시환이는 환하게 웃으며 걸었다. 연예인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좀 알 거 같았다. 이젠 좀 지겹다. 같은 말 또 하는 것도 그렇고, 자유를 잃은 것 같은 기분도 그렇고.
자연스레 포토 라인도 만들어져서 몸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우리 셋이 또 손을 흔들며 인사한 후 기자회견을 했다. 유명세려니 생각하고 힘든 내색 없이 말을 이어갔다.
공항에서 벗어난 뒤에야 숨통이 트였다.
영진이와 시환이 소속사의 매니저가 나와 있었다.
임시환과 포옹했다.
“고생했다. 토크쇼 때 보자.”
“네. 감독님 작품이라면 언제든 할 겁니다.”
“그래.”
시환이는 자기 매니저 차에 타고 우린 영진이가 몰고 온 밴에 올랐다. 밴에 한국의 모든 일간지가 놓여 있었다.
신문의 머리기사가 우리 셋의 수상 소식이었다.
영진이가 말했다.
“대표님이랑 서연 씨랑 상 받을 때 한국은 새벽 5시였거든요. 그래서 하루 지난 오늘 조간신문에 기사로 뜬 거예요. 보통은 당일 9시 뉴스에서 보도를 하고 조간신문에는 짧게 나오는 편인데, 이번에는 다들 헤드라인에 올렸네요.”
영진이 말 그대로다.
하루 전의 속보는 다른 매체를 통해 볼 사람은 다 보기에 다음 날 조간에는 헤드에 올리지 않는다. 이번에는 한국 영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신문 기록 차원에서 헤드에 올린 것 같다. 신문 검색 자료에 남을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뜻이다.
영진이가 다시 말했다.
“영화 개봉 날짜가 바로 잡혔어요.”
“벌써?”
“네. 다음 주 금요일이에요. 지난주에 150억대 작품 하나가 개봉했는데, 성적이 영 좋질 않아서 그 영화 스크린 좀 내리고 샌드위치를 올리기로 했나 보더라고요.”
“스크린 수는?”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뒤에 앉은 수혁이가 바로 전화를 했다.
곧 응답이 왔다.
“700개 스크린이라네요. 성적이 좋으면 1000개 이상도 간다고 합니다.”
유희진이 말했다.
“제 생각엔 외국 관객보다 우리나라 관객 반응이 더 좋을 것 같아요. 한국 영화이고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으니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럴 것 같다.
영화 속 사건이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니까.
* * *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푹 쉬었다.
베니스에서도 쉬기는 했지만 역시 집에 와야 마음도 편하고 제대로 쉬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했다.
반년 가까이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을 했더니, 이제는 몸에 뱄는지 운동을 하고 나야 하루가 덜 피곤했다. 잘 나가는 사람들이 왜 운동을 하나 했더니 건강도 건강이지만, 체력 때문인 것 같다. 체력이 좋아지니 피로도 덜 하고.
매일 같은 일상을 보냈다.
운동하고 회사에 들러 일을 조금 하고 서연이와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았다. 수호팀이 보내오는 스튜디오 상황과 할리우드 및 한국 차기작 시놉시스도 확인해 보고.
아무 일도 안 하고 일주일을 보낸 뒤.
샌드위치가 개봉했다.
수십억씩 드는 마케팅을 전혀 안 했다. 베니스 영화제 수상으로 홍보가 되었던 터라. 그럼에도 예매율이 상당히 높았다. 영화 지루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데도 그랬다.
멀티플렉스 10개 스크린 중 2개에 샌드위치가 걸렸다. 예술 영화로 멀티스크린을 확보한 건 샌드위치가 처음이다. 그럼에도 예매율 대비 스크린 수로 따지니 표가 매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바람에 내 전화도 무척 뜨거워졌다.
개봉 첫날부터 문자가 쏟아지는 통에.
[개봉 첫날 현재. 서울 전 지역 매진이랍니다!]
[스크린 수를 늘리겠다고 하네요.]
[반응이 속속 올라오고 있어요!]
[다들 미쳤다고 난립니다!]
대체 뭐가 미쳤다는 건지.
포털 영화 리뷰를 확인해 보았다.
정말 미친 반응이었다.
댓글 놀이를 하는 건지,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건지.
‘미친 감독! 미친 연기력!’
‘베니스 영화제는 불공평했다. 황금사자상 감이다!’
‘예술 영화? 이것은 상업 영화!’
‘영화 시작 5분 만에 울었다는.’
광적인 반응이었다. 영화가 지루했다는 평이 올라오자 온갖 비방이 터졌다. 넌 액션 영화나 봐라. 영화나 보고 와서 댓글을 달아라. 남자인 나도 5분 만에 울었다는 둥.
이건 또 무슨 사태로 봐야 하는 건지.
집단광기 같기도 하고. 한국에선 반응이 더 좋을 거라고 짐작은 했다만 이런 반응은 아니었다. 100명이 극장에 간다면 10명 정도가 샌드위치를 보고, 그 10명은 호평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내용이 지루해서 볼 사람만 볼 거라고 봤다.
그런데 첫날부터 댓글이 너무 많이 올라온다.
흥행이 될 영화가 아닌데.
다들 그렇게 생각했기에 놀라서 문자를 보내오는 거였다.
일단은 지켜보았다.
내 감각으로는 흥행할 영화가 아니다. 대체 어떤 영화기에 상을 받았나 싶어 첫날에 좀 몰린 거겠지. 아니면 예술 영화를 재밌게 봤다는 지적 허영심과 우월감 때문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한국 사회에 힘든 사람이 너무도 많았거나.
다시 일주일이 지나갔다.
평일 내내 샌드위치 관람 붐이 일어났다. 블록버스터 100편을 보느니 샌드위치를 1번 보는 게 인생에 훨씬 도움된다는 댓글이 최고 점수를 받고 있었다.
광적인 반응의 열쇠가 그 댓글이었다.
동시대에 살면서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라는 것.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면서.
SNS에선 나름의 감상평이 수도 없이 올라왔고.
또 일주일이 지났다.
예매율이 떨어지고 신드롬 수준이었던 반응도 3주차에선 잦아들었다. 이제 볼 사람은 다 봤다는 말이다. 액션 영화만 보는 사람은 사회적 이슈가 있건 말건 지루한 영화는 안 보는 분들인 거고.
내 집에서 서연이와 한가하게 쉬고 있을 때였다.
수혁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3주차 성적 확인하셨어요?
“아니. 300만 이상은 들었다고 들었어.”
-3주차인 현재 560만이에요.
“정말이야?”
-네. 이대로 가면 700만까지는 나올 거라네요. 한국 예술 영화 사상 가장 흥행한 영화로 남을 거랍니다.
“내가 참 운이 좋네.”
-천재에게 운까지 좋으면 무적이죠, 뭐.
또 그놈의 천재.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죄책감이 조금 들었다. 남들은 몇 년을 고생해서 만든 영화가 흥행은커녕 중박도 가기 어려운데, 난 고작 15억을 들이고 17일 만에 찍었다.
이런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3관왕을 하고, 흥행도 대박을 냈다. 다른 감독들이 박탈감에 빠질 일이다. 내 전작이 쫄딱 망해서 절치부심하다가 이런 성과를 냈으면 몰라도.
결국 고심 끝에 재단 하나를 설립하기로 했다.
그 일을 위해 서연을 집에 불렀다.
그녀가 내 의견을 듣고 물었다.
“청년 재단?”
“응. 영화 속 두 주인공 같은 사람들을 돕는 재단. 안 그래도 내가 가진 능력보다 이룬 게 많아서 이젠 좀 베풀고 살고 싶었어. 그냥 돈만 내고 끝내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도울 길이 없을까 싶었거든. 샌드위치로 번 돈 이기도 하고.”
“어떤 재단인데?”
“친목 단체 겸 청년 취업 지원. 이자 없이 대출도 해주고, 거의 무상으로 기술 교육이나 창업 지원도 하고. 기업과 연예인 후원도 받을 예정이야.”
서연이 무척 맑은 미소를 보였다.
왜 그걸 이제야 시작했나 싶은 표정이다.
더없이 행복한 표정.
“오빠. 영화 찍으면서 재단 운영할 수 있어?”
“힘들긴 하겠지. 초기엔 내가 주도하지만, 재단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 그땐 이사들이 알아서 할 테고.”
“자금은?”
“이번 영화 순수익이 약 300억이야. 내 지분 몫과 배당금을 합쳐서 100억가량 출자하려고. 그 돈으로 건물과 교육원을 먼저 설립해야겠지.”
“교육원은 어떤 건데?”
“처음엔 우리 회사와 관련 있는 기술 교육을 우선할 거야. IT, VR. 촬영 기술. CG 같은 거. 재단 교육원을 나와서 취직이 되어야 할 테니까.”
“매년 교육비와 재단 유지비용이 100억씩 들지도 몰라.”
“응.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매년 자금을 댈 게. 여자 청소년 지원을 해보고 싶어. 재단에 여성 청소년 지원과를 만들어 주면 내가 직접 관리해보고 싶기도 하고. 여배우들도 동참해줄 거야.”
“그래.”
최수혁과 유희진을 불러 함께 논의했다.
3시간의 회의 끝에 기초를 잡았다.
한별 재단.
장학 개념으로 청소년을 지원하고, 청년은 현실적인 부분에서 지원하는 재단이다. 취업이 되도록 하는 것.
취업 정보. 기술 교육. 아르바이트 지원. 500만 원 이하 무이자 대출. 미국 스튜디오 인턴 및 어학연수 등.
여기에 친목 그룹의 소풍과 MT도 있었다. 청춘 남녀가 주기적으로 만날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이사장을 맡고 서연이 이사를 하기로 했다.
내 취지를 전해 들은 로큐 임직원들이 자원봉사 형식으로 초기 설립과 관리를 맡기로 했다. 후원금도 냈고.
샌드위치 개봉 4주차인 금요일.
재단 설립 준비를 하다 보니 추석 연휴가 다가왔다.
이번 추석에는 서연과 함께 본가에 가기로 했다.
부모님과 두 번 식사를 한 적은 있으나 명절에 큰집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용인시로 지성이 차와 내 차가 달렸다.
경영지원팀장에서 석 달 전에 콘텐츠 본부장으로 승진한 지성이다. 박상희 본부장은 콘텐츠 총괄 이사로 승진했고.
그런데 차는 언제 BMW로 바꾼 건지.
성남에 들러 사촌들 용돈을 주기 위해 현금 인출을 좀 받았다. 나도 지성이도 현금을 안 가지고 다니다 보니.
차로 향할 때 지성이에게 물었다.
“넌 연애 안 해?”
“내가 알아서 할 게.”
지성이가 몇 년 사이 연락이 좀 줄었다.
우애가 소원해진 건 아니고, 녀석도 회사에서 무척 바쁘기 때문이다. 음반 제작, 영화와 드라마 제작 등을 지성이가 책임지고 있었다. 연애할 시간도 없을 지경이다.
“나이 더 차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만나.”
“똥차가 가야 뒤차도 가지.”
서연이가 킥킥대며 웃었다.
여친이 있다는 뉘앙스 같은데?
“뭐야? 만나는 사람 있어?”
“형이란 사람이 이래요. 동생이 누굴 만나는지, 무슨 일을 하고는 있는지 관심이 없어, 관심이.”
“너 연애하고 있어? 누군데?”
“궁금해?”
“궁금하지 그럼.”
“내일 부를까?”
“용인으로? 그 정도로 오래 사귀었어?”
“에휴, 말을 말자.”
서연을 보자 그녀는 웃기만 한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사귄 사람이 있었다는 건데. 어째 근 몇 년간 나한테 전화도 잘 안 한다 했더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경 쓰느라 그랬다는 거네.
* * *
본가에 도착했다.
나와 서연이 안방에서 첫 절을 올렸다.
부모님은 세상 다 가진 얼굴이 되셨다.
“그래, 오느라 수고했다.”
“서연이는 볼 때마다 예뻐지네.”
“고맙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다 아버지 눈치를 보시더니 말을 꺼내지 않으셨다. 나오려던 말이 100% 결혼일 터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애들한테 맡겨 놔.”
“그래도 신성이 나이가 있는데.”
“30대 중반이면 아직 한창이지 뭘 그래.”
지성이도 나섰다.
“형 나이는 상관없고 형수가 아직 젊어서 그래요. 여배우가 32살이면 아직 시작도 안 한 거예요. 베니스에서 연기상을 받기 했지만.”
“그래, 서연이는 아직 이르긴 하다.”
“지성이 너는 언제 데려올 거니?”
“내년 설에는 데려올게요.”
“그래?”
부모님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잘하면 몇 년 뒤에 두 놈 다 보낼 듯하니.
부모님과 함께 큰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안은 다른 집안과 별 차이가 없다.
명절날 어느 집에 가도 볼 수 있는 그런 풍경.
그런 집안에 여배우 ‘며느리’가 가는 셈이다.
아니나다를까.
큰집에 서연이 뜨자 야단법석이 벌어졌다.
“우와! 연예인이다!”
“엄마! 서연이 누나 왔어요!”
“언니, 진짜 예뻐요!”
큰집에 모이신 어른들께 제대로 절을 올렸다.
할머니. 큰집과 작은집 내외 분들이다.
인사를 올리고 거실로 나가자 아이들이 서연에게 매달렸다.
다 큰 사촌 동생들은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처음엔 일반인이 연예인을 대할 때의 모습이었는데, 식사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족을 대하는 태도로 바뀌었다. 아이들도 서슴없이 서연이 등에 업히기도 하고. 서연이 따로 큰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말을 듣기도 하고.
다음 날 아침 제사를 지냈다.
오전까지 그렇게 보낸 뒤 인사를 올리고 큰집에서 먼저 나왔다. 용인 시내로 지성이 여친이 온다고 해서 만나볼 생각이었다. 굳이 용인까지 온다는 걸 보면 보통 사이는 아니다.
대체 누굴까.
시내에 차를 대고 서연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추석 당일 시내에 영화를 보러온 친구들이 커피전문점에 잔뜩 몰려왔다. 고향에 오면 시내에 들렀다 가는 게 용인에선 전통이 되어 버린 터라 동창과 후배도 많이 만났다.
사인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럴 때.
뒤에서 우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성이가 왔나 싶어 밖을 보니.
수호였다. 그런데 연희와 함께 있었다.
뭐야, 귀국했다는 말도 없이.
연희도 수호네 본가에 같이 갔었던 모양이다.
수호가 커피점에 들어오더니 인사했다.
연희는 불장난이 들킨 것 같은 모습으로 내게 인사하고 서연과는 포옹했다. 연희가 수호를 더 좋아하는 느낌이 들었다. 만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영 적응이 안 된다.
“언제 들어왔어?”
“어젯밤에요. 부모님과 누나가 연희 보고 싶다고 해서요. 대표님에게 할리우드 신작 이야기도 할 겸.”
“뭐 좋은 게 나왔어?”
“몇 개 있어요.”
“그래, 잘 왔다.”
수호와 연희가 우리 옆에 앉았다.
연희가 있다고 또 군대식 말투가 사라진 수호다.
커피를 마시며 할리우드 신작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세 가지로 시리즈가 가능했다.
세부 소재가 있으나 간단히 요약하면 이랬다.
1. 지구와 화성 식민지인과의 우주 전쟁.
2. 지구 멸망 후 수송선 단에 탑승한 이들의 이야기.
3. 카우보이 비법의 실사 판.
세 작품 모두 항목이 남달랐다.
지구와 화성, 제3세력의 우주전쟁은 우주판 삼국지를 방불케 하는 시나리오였고, 함대전과 우주 교전 묘사가 뛰어나다는 분석이다.
거대 수송 선단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정치와 세력 다툼이 주된 이야기이다. 산소와 식량을 자체 공급하며 300년 넘게 우주를 떠돌아다니며 온갖 일을 겪는다. 행성 탐험과 모험, 반란 등이 나오기에 긴 시리즈가 될 수 있었다.
카우보이 비법은 원작 그대로고.
원작도 화성을 중심으로 하는 우주 활극이다.
다만 원작자가 영화를 찍게 할는지가 문제다.
세 작품 모두 우주 배경.
내가 스타워즈를 언급했더니 이런 작품을 골랐던 듯.
“딱히 우주를 배경으로 고집할…”
그때 또 ‘우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이와 연희는 모른 척 커피를 마시고, 나와 수호만 무슨 일이지 싶어 일어났다. 지성이가 온 것 같기는 한데.
“어?”
“지성이 형?”
나와 수호 모두 황당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지성이가 사귄다는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죄송해요, 연락도 없이.”
“네가 지성이랑 사귀고 있었어?”
“네. 그렇게 됐어요.”
“혹시 날 대표가 아닌, 아주버님이나 뭐 다른 걸로 대한 거였어?”
“반반이에요. 서연이랑 그 덕분에 친해지긴 했어요.”
서연을 보았다.
어쩐지 갑자기 친해졌다 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우리 LA 공연 갔을 때. 두 사람 만났나 봐. 두 사람 다 오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해서 말 안 했어.”
내가 반대할 것으로 생각했나.
그러고 보니 그때 이후 같기는 한데.
지성이가 말했다.
“우리 둘… 결혼할 거야.”
지현이를 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