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제1장 이상하게 슬픈 영화 (33/56)

내가 영화다 5권

글드림 현대판타지 장편소설

차례

제1장 이상하게 슬픈 영화

제2장 예상 밖의 시상식

제3장 할리우드 차기작

제4장 두 영화 동시 제작

제5장 아프리카 오지에서

제6장 시리즈의 첫 개봉

제7장 작전 세력 추적

제8장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

제1장 이상하게 슬픈 영화

진수희 작가가 미국으로 왔다.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는데 진 작가가 날 보고는 넙죽 인사를 했다. 표정이 복잡했다. 장시간 비행에 피곤하면서도 기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긴장감도 있고 두려움도 보인다.

“피곤하시죠?”

“네. 제가 외국에 처음 와 봐서요.”

진 작가가 신기한 듯 공항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진수희 작가 외모가 시나리오 샌드위치의 여주인공 느낌이다. 분위기도 어째 서연을 닮았고. 작가라기보다는 대기업 직원 느낌이 좀 난다. 회사원티가 아직 남았는지.

“용기가 대단하시네요. 7년 다니던 직장 그만두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너무 힘들었어요. 매일 늦게까지 야근하고, 휴일도 없이 일하다 보니 내가 돈 버는 기계인가 싶더라고요. 신입 때는 너무 힘들어서 3년쯤 지나면 괜찮아지려나 했는데 승진을 해도 달라지는 게 없었어요.”

그 말에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번 영화 잘해 봅시다.”

“네, 감독님.”

진수희 작가를 내 차에 태우고 회사로 향했다.

* * *

회사 회의실에 나와 서연, 진수희 작가가 모였다.

스태프들과 계약 종료된 후 사무실이 텅 비었다.

로큐 지사 직원 십 수 명만 남아 있을 뿐.

셋이서 인사를 하고 몇 시간이 지났음에도 진수희 작가는 쉽게 적응을 못 했다. 일반인이, 그것도 영화인을 꿈꾸던 사람이 톱스타와 영화감독과 대화를 하려니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화 내내 진 작가의 얼굴이 상기된 상태였다.

“긴장이 안 풀려요?”

“네.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분들이라.”

우리가 편하게 대하면 진 작가도 편해지겠지.

시간이 해결할 문제다.

“지금 시나리오대로 찍으면 60분 분량밖에 안 나와요. 그래서 남자 인물 하나를 추가해야 합니다.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남자로 한 번은 스쳐 지날 거예요. 비중은 낮지만 남자 주인공이니 여주인공과 교집합이 되는 부분이 있으면 좋을 것 같네요.”

진수희 작가가 곰곰이 생각했다.

극 중에 몇 번 나오는 남자는 회사 직원들. 편의점 사장. 중고차 거래단지 직원. 옆집 남자 등이다.

진 작가가 말했다.

“영화에 갈등 구조가 너무 없는데, 그걸 만들 수 있는 캐릭터면 더 좋겠죠?”

“자연스러운 갈등이면 상관없습니다. 딱히 심리묘사를 할 필요는 없어요. 작위적인 걸 최대한 빼려고요. 이 영화의 핵심은 누구나 겪는 일이죠. 실제로 늘 일어나는 일인데 대다수는 겪어 보지 않았던 일도 되고요.”

진수희 작가의 눈이 반짝였다.

“남자 주인공이 출근할 때 여주인공과 몇 번 엇갈리기는 하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이고, 영화가 끝날 때쯤 그녀의 옆집으로 이사 오는 건 어떨까요?”

서연이 말했다.

“둘이 연애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결말이네요?”

“네. 너무 희망이 없어 보여서요.”

남녀가 나오지만 아는 사이는 아니다. 영화는 두 남녀를 번갈아 보여 주기만 한다. 어떤 접점이 있을 거라고 관객은 생각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른다. 그러다 영화 결말 때 남자가 옆집으로 이사 오는 것. 두 사람을 번갈아 보여 주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연애하는 뉘앙스를 일부러 주지는 말죠. 소외당하고 삶이 힘들고 외로운 두 사람이 옆집에 살게 되었다. 그냥 그게 결말입니다. 이후는 관객의 몫이에요. 연애를 하게 될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살아가게 될지.”

“네. 저도 그게 좋겠네요.”

진수희 작가가 메모를 했다.

다시 말했다.

“그 어떤 인위적인 전개를 넣어서도 안 돼요. 넣는 순간 영화의 흐름이 깨집니다. 어색해질 거고요. 다만 살면서 일어나는 분쟁 정도는 가능해요. 일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도 되고요. 그건 고된 삶의 일부이지, 영화적 갈등은 아니니까요.”

“혹시… 남자가 중고차 거래단지 직원인 건 어때요?”

“그쪽에 경험이 있어요?”

“네. 전 남자친구가 겪었던 일이 있어요.”

“어떤 일이죠?”

“남자친구가 중고차를 사러 매매단지에 갔었는데, 허위 매물에 속아서 간 거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가려고 했더니 거기 직원들이 문 잠그고 협박하고 그랬다네요. 주먹 싸움까지 날 뻔했는데 경찰을 불러서 겨우 빠져나왔대요. 그쪽 중고차 딜러들은 다 조폭이라면서요.”

중고차 사기는 들은 적 있다.

특정 지역 중고차 단지에는 사기꾼들로 득시글하다고 했다. 어느 스태프의 경험이다. 차가 사고로 반파되었는데 입원 중이라 폐차 대행을 시켰다. 그런데 그 차가 몇 달 후에 무사고 차량으로 매물에 올라와 있더라는.

그런 차를 파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악인이라서 그럴까.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경쟁 사회의 한 단면일까.

남자주인공이 좌절을 겪는 장면에 어울린다.

“남자 주인공이 사기꾼 딜러들 틈에서 일하면서 힘들어하는 걸 보여 주면 되겠네요. 이렇게라도 먹고 살아야 하나, 그만두어야 하나 갈등하는 부분이에요.”

서연과 진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이어갔다.

“딜러와 고객 간에 매일 악다구니가 벌어지는 남자 상황. 일상이 권태롭기 짝이 없는 여자 상황. 살아가는 환경은 전혀 다른데 삶의 외로움은 비슷할 것 같네요. 남자 주인공은 취업이 하도 안 되어서 딜러 일을 했는데 결국 관두는 것으로 가죠.”

“네. 저는 마음에 들어요.”

서연이 말했다.

“오빠, 이건 어때? 여자는 바쁘고 아는 사람도 많고, 학벌도 좋고 썸 타는 남자도 있어. 남자는 여러 직업을 가져 보지만 다 적응을 못 하고 친구도 없고 돈도 없고 성격마저 내성적이라 장사도 못하는 사람이야. 그런데도 외로운 건 똑같아.”

“수희 씨는 어때요?”

“저도 좋네요.”

“그럼 진 작가가 회의한 내용으로 수정해 봐요. 아니면 남자의 일상을 따로 써도 좋고요. 분량은 30분 정도.”

“시나리오가 두 개라는 말씀이죠?”

“네. 남자 부분만 따로 써서 주시면 다듬어 볼게요. 중고차 매매 장면에서 무리하게 싸우거나 하지 않아도 돼요. 딜러와 고객이 멱살잡이를 할 때 주인공은 그냥 물러나서 한숨만 쉬는 느낌이면 됩니다. 힘든 세상살이와 소외를 의미하는 장면이 될 겁니다.”

“알겠어요.”

남자 주인공에게 이 세상은 적응하기 힘든 공간이다.

소외당했다기보다 소외를 자처했을지도 모른다.

회의를 거의 마쳤을 때 수호팀 유희진이 왔다.

그녀는 회사에서 임차해 준 집에서 살고 있는데, 그 집에서 진수희 작가가 한 달 동안만 살기로 했다.

* * *

한 달여가 지났다.

그동안 진수희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내가 조금 다듬었다. 내용은 건드리지 않고, 중고차 딜러와 고객이 거친 말을 하며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 정도만 실제 쓰는 언어로 고쳤다.

이 신작은 초저예산이 될 듯했다.

촬영 기간은 보름으로 잡았고, 팀장급은 아예 없다. 내가 카메라와 조명, 음향까지 맡기로 했다. 그 외에는 전 스태프가 써드 급이다. 그것도 한두 명.

간단히 스토리보드를 작성하고 카메라 앵글과 조명은 현장에서 결정할 터였다. 편집까지 내가 하면 혼자 다 만드는 셈인데 아직 그건 좀 무리였다.

그렇게 나온 스토리보드와 제작 예산. 스태프와 배우 리스트 등을 제작실장에게 넘겼다. 조감독은 최수혁이 맡기로 했다. 스태프들도 대부분 초보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내가 다 이끌어 갈 테니 문제는 없다.

영화가 막을 내린 터라 기념 파티에 참석했다.

투자사 블루스톤이 주재한 파티였다. 거기서 조감독 에디와 제작부장을 만나 다음 작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실제로 차기작도 이 두 사람과 할 생각이었다.

이동욱 대표에게는 시나리오 투고 심사를 맡아 달라고 했다. 회사에 들어오는 시나리오 중에 골라서 차기작을 할 생각이었다. 해서 회사 사이트 시나리오 투고란에 블록버스터 시리즈 물로 갈 수 있는 시나리오를 찾는다고 밝혀 두었다.

그리고 영화 개봉 55일째인 오늘.

마침내 어웨이커의 최종 성적이 나왔다.

정말 엄청난 뒷심을 발휘했다.

북미 극장 수입 3억 8천만 달러.

제작사와 투자사 수익은 1억 9천만가량.

배급사 수수료와 각종 세금 떼면 1억 6천.

거기서 투자사 수익 배분 빼면 6천4백만 달러.

부가 판권 수익은 약 1천만가량 나올 테고.

놀라운 건 해외 극장 수입이었다.

117개국 개봉에서 189개국 개봉으로 늘어났다.

판권을 팔기도 하고, 러닝개런티 계약도 있는데 러닝개런티 계약 쪽에서 수익이 상당히 컸다. 인도와 중국이 그렇다.

해외 입장 수익만 대략 4억 6천만 달러에 이른다.

러닝개런티 덕분에 이것저것 배분을 나누어도 우리 수익이 1억 달러를 넘었다. 여전히 개봉 중인 나라도 많고 부가판권도 남아 있었다.

다 따졌을 때 총수익은 약 1억 8천만 달러.

한화로 2천억이다.

어웨이커 수준의 작품을 자체 투자로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웨이커를 우리가 투자하고 제작했다면 3억 달러 넘게 벌어들였겠지.

이동욱 대표가 상기된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그 손을 잡고 그와 포옹했다.

이 대표가 말했다.

“다른 투자사는 몰라도 블루스톤과는 관계를 유지해야겠습니다. 우리도 이제 할리우드 영화계에 영향력을 높이면 배급도 가능할 겁니다. 정말 꿈만 같네요.”

“그래야죠. 스튜디오에 설치할 새로운 장비가 있으면 구입하도록 해요.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좀 신경 써 주시고요.”

“그럼요. 한국엔 얼마나 있으실 겁니까?”

“길어야 석 달입니다. 프리는 거의 없고 후반작업만 한 달이에요.”

“좋은 작품 하나 뽑아 보세요. 감독님 덕에 저도 제작자로 칸 한번 가 봅시다.”

이동욱 대표의 덕담을 듣고 회사를 나섰다.

그 길로 수호팀 전원과 서연. 진수희 작가와 함께 한국행 여객기를 탔다.

* * *

회사에 도착하니 중국 쪽 사업으로 직원들이 분주했다.

내 결재가 필요한 사안이 있었기에 해외사업본부장이 바로 내 사무실에 들어왔다.

“축하드립니다. 감독님 첫 할리우드 영화가 정말 대박 났어요. 한국에서 700만이나 들었습니다.”

“고마워요.”

미국의 내 스튜디오는 로큐 지분만 있을 뿐이다.

로큐 수익과는 상관없음에도 진심으로 축하해준다.

본부장이 말했다.

“바쁘시니 요점만 말씀드릴게요. 다음 달에 플래닛 씨를 먼저 오픈하고 극장 체인은 20개월 후에 영업을 시작할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파트너가 우선 확보한 건물과 부지에 극장 30여 개를 동시에 건설할 겁니다. 그렇게 3년 안에 극장 500여 개를 짓고, 수익이 나는 대로 5년 안에 1,000개까지 짓는다는 목표입니다.”

“투자는 들어갔나요?”

“아직입니다. 보유 현금 절반에다, 타 회사에 투자한 지분을 매각한 뒤 현금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우리가 투자했다는 것만으로도 해당 회사의 주가가 올라서 차익이 좀 있네요.”

“본부장님과 구 대표님만 믿고 저는 영화 촬영에 전념할게요.”

“아, 그런데요. 김판수 대표를 잘 아세요?”

“아주 잘 알진 않고요. 왜요?”

“오시면 연락 좀 달라고 하더라고요.”

“알겠습니다.”

김판수 이 인간에게 무슨 일이 있나.

조약돌에서 독립한 걸까.

전화를 걸었다.

“뭐 해?”

-아이고, 할리우드 감독님. 요즘 재미 좋죠?

“뭔데? 조약돌에서 나간 거야?”

-나한테는 관심도 없구만. 조약돌에서 나간 지가 언젠데.

“영화 제작은 잘되고 있고?”

-그게 좀 잘 안 되네. 조약돌에서 연거푸 대박 영화를 만들었는데도 독립하니까, 찬바람 쌩쌩 분다. 쌈마이 이미지가 사라진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

“다시 조약돌에 가서 수련 좀 더 해야겠네.”

-야, 프로듀서는 더 못해 먹겠다. 아무리 내 후배가 대표라지만 그 인간은 영화 제작해서 수십억씩 벌고, 난 고생만 죽으라고 하고 겨우 보너스 2, 3억이야.

회사원들 연봉이 얼마인지는 알고 하는 소린가.

상대적 박탈감이다 이거지.

“형 경력이면 독립하는 게 맞긴 하지.”

-말 나왔으니까, 말인데 우리 회사 작품에 너희가 투자 좀 해라. 투자제안서 보냈는데도 뭔 대꾸가 없어.

“일단 전화 끊어 봐.”

콘텐츠본부에 연락을 했다.

곧 직원 하나가 문서를 들고 내 사무실로 왔다.

김판수가 보낸 투자 제안서다.

그 제안서를 읽어 보았다.

홍콩 합작으로 누아르 영화를 찍는다?

홍콩 제작사가 중국 영화사 놔두고 왜 한국 신생 영화사와 합작을 하나. 사기 냄새가 물씬 나는 제안서였다.

내용은 분명 의심스러운데 이상한 호감이 일어난다.

혹시 이게 김판수의 잠재력이 아닐까.

예전 양수리 촬영소에서 김판수를 만났을 때다.

내 인생의 조력자라는 잠재력이 떴다.

그 뒤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게 그거 아닐까.

뜬금없이 홍콩 영화사와 합작하는 것도 그렇고.

이 시기에 로큐는 중국 쪽 사업을 하려고 하고.

다시 김판수에게 전화했다.

“홍콩의 어떤 회사야?”

-거기도 신생이야. 그 회사 한국인 프로듀서가 내 지인이거든. 중국과 세계 시장을 동시에 노리려면 한국 제작진과 작업해야 한다고 해서 시작한 거야.

일리는 있다.

중국 제작사의 영화는 동남아 화교권 빼고 전 세계에 수출되는 영화가 별로 없다. 한국 영화 시장에서 중국 영화는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고.

중국은 그들만의 영화 시장이다.

완성도도 정서도 세계 기준과는 동떨어져 있다.

물론 중국 시장은 북미 시장만큼 크다.

그때였다.

김판수와 관련한 사업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내 인생의 조력자라는 게 정말일 수도 있다.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판수 형. 형네 회사와 그 홍콩 회사와 합치는 건 어때?”

-뭔 소리야?

“로큐 계열 영화사를 중국에 설립하는 거야. 그 홍콩 회사와 합쳐서 중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거지. 형이 그 회사와 합작하는 건 중국 영화 시장을 염두에 둔 거잖아.”

-그렇긴 한데.

김판수 형이 내 말에 솔깃했다.

말을 이었다.

“로큐가 회사 설립에 투자할게. 예컨대 형이 지금처럼 제작사를 하면 50억을 번다고 쳐. 그런데 우리랑 손을 잡으면 500억 벌 수 있어. 제작비는 로큐나 미국에 있는 내 회사가 댈 수도 있고. 잘 생각해 봐.”

-나 지금 무지 헷갈리는데.

“간단해. 지분 100으로 50억 버느냐, 지분 30으로 500억 버느냐. 편의점 점주냐, 대형마트에 지분이 있느냐 차이야.”

-중국 배급사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지금 중국 극장 체인 사업을 준비 중이야. 형네가 영화를 만들면 그 극장에 걸 수가 있게 돼.”

-진짜야?

“그래. 중국 영화 사업에 제대로 진출해 봐. 중국에선 형이 쌈마이인 줄 모르잖아?”

-야! 말을 해도 꼭!

“내 할리우드 차기작을 형네 회사에서 수입해서 배급해. 배급 쪽도 영향력을 좀 키우고. 자금은 우리가 얼마든지 댈 테니까.”

-중국은 자국민이 아니면 규제가 좀 있을 텐데.

“홍콩 회사 대표를 앞세우면 되지. 그쪽에서도 분명 환영할 거야. 투자와 배급이 안정적이면 금방 성장해. 내가 할리우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 영화를 한국식으로 제작하면 흥행한다. 이건 장담할 수 있어.”

-알았다. 아, 심장 떨려.

“회사가 성장하면 홍콩 회사가 독립하려고 할 거야. 그러면 우린 손 뗀다고 해. 돈 많다고 영화 잘 만드는 거 아니라는 거 알면 함부로 못 해.”

-그래, 생각 좀 하고.

“심사숙고해 봐.”

전화를 끊었다.

즉흥적인 모양새가 되었지만 이거구나 싶었다.

미국 스튜디오가 점차 자리 잡고 중국 쪽 수익을 통해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다면 못 만들 영화가 없다. 그렇게 되면 배급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배급은 영화계의 영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배급사가 가진 돈의 힘이기도 하고.

한국에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존 배급사와 좋은 관계에 있는데 그들을 밀어낼 수는 없다. 극장 체인을 가진 대기업 계열사이기도 하고. 게다가 한국에서 수백억짜리 영화를 만들게 되면 다른 제작사들은 투자를 못 받는다. 한국 영화계에는 투자와 수익으로 순환되는 돈의 크기가 제한되어 있다. 딱 영화 시장 크기다.

그러니 미국과 중국에서 내 꿈을 실현하는 거다.

머리 아픈 사업은 이 정도로 마무리했다.

그 어떤 영화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고, 앞으로 달린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 모델은 ‘스타워즈’다.

전 세계인이 기다리고 열광할 영화.

귀국한 첫날부터 프리 작업에 들어갔다.

기존 상업영화와 달리 샌드위치는 프리가 없어도 될 정도로 내 소신껏 만들 영화였다. 프리를 하는 이유는 제작비에 맞게 일정을 맞추고, 쓸데없는 돈을 쓰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설계도를 통해 촬영하게 되는 거고.

그런데 이번 영화는 내가 편집 빼고 다 한다.

현장에서 결정하고 바로 찍어도 된다.

프리 기간은 고작 2주였다.

촬영 일정 짜고 스토리보드를 최종 결정하고.

스태프들은 로케이션 헌팅만 할 뿐이다.

사전 연기 리허설도 없고, 각본 전체 리딩도 없다.

미술도 따로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찍을 뿐.

캐스팅은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제작실장이 끝냈다.

남자 주인공은 임시환이다.

배역에 정말 잘 맞는 역할인데 몸값도 비싸고 바쁘기도 했다. 그래도 혹시 할까 싶어 연락했더니 하겠다는 답변이 왔다. 임시환의 소속사 측에서 무조건 하라고 했다나. 아이돌 출신이지만 연기력만큼은 탑 배우급이다.

서연과 임시환의 몸값만으로도 5억이 넘어갈 텐데.

두 사람 다 1억만 받았다.

이번 영화 제작비가 고작 15억이었으니.

촬영 이틀 전 배우들을 모았다.

고사도 없고, 제작발표회도 없었다. 프리도 하는 둥 마는 둥했던 터라 다들 의아한 기색이었다.

“기존 현장과 다르게 아주 편하게 찍을 겁니다. 연기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각본대로 할 필요도 없어요. 생활 연기든, 애드립이든 시나리오 내용대로만 가면 됩니다. 모든 촬영이 롱테이크입니다. 쇼트로 나누어 찍지도 않고 컷 분할도 안 합니다.”

한 베테랑 배우가 물었다.

“딱 시나리오 분위기대로 찍는군요?”

“맞아요. 관찰하듯 찍습니다. 인위적인 편집도 없어요. 찍은 그대로 편집할 겁니다.”

“누가 보면 촬영에 미숙한 사람이 찍은 줄 알겠네.”

임시환의 말에 다들 웃었다.

그럴 수도 있다. 고등학생이 찍은 영화처럼.

카메라는 그저 담담하게 인물을 담는다.

가만히 직시해야 사물에 담긴 뭔가를 볼 수 있다.

고정된 카메라가 인간의 마음을 볼 것이다.

* * *

전혀 꾸미지 않은 사무실.

로큐 본사에서 가까운 무역회사를 빌렸다.

현장에 와 있는 스태프는 고장 15명.

조명도 3개뿐이고 반사판도 거의 안 썼다. 여배우가 화사하게 나올 필요가 없어서 웬만하면 실내등과 자연광을 쓰려고 했다. 다소 칙칙하긴 한데 그게 현실이니까.

“감독님. 카메라 세팅됐는데요.”

“어디 봐.”

써드급 스태프가 팀장 노릇을 하다 보니 자기 기준이 아직은 없다. 스태프들도 모두 30대 초반 이하다.

조도계로 광량을 확인한 뒤 설치된 카메라를 보았다.

조명 적절하고, 구도도 그럭저럭 괜찮다.

조명의 마술이나 카메라 기법은 가급적 안 쓴다. 관찰자처럼 카메라는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특정 시점으로 포인트를 줄 때만 빼고.

서연과 과장 역할의 베테랑 배우가 자리를 잡았다.

조감독인 최수혁이 말했다.

“이대로 가시는 거예요?”

“응.”

“현장이 원래 이래요?”

“아니. 이 영화만 이래.”

나보다 7살 아래인 최수혁과 이제야 말을 텄다.

수혁이가 날 좀 어려워해서 일부러 기다려 준 터였다.

과장 역의 배우가 웃으며 말했다.

“최 감독님 믿고 가면 돼요. 저는 아주 편하고 좋은데요.”

“네. 바로 갑니다.”

서연과 배우가 대기했다.

음향 헤드폰을 쓴 채 카메라 모니터를 보았다.

내 손짓에 카메라와 음향 스태프가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수혁이가 슬레이트를 들었다.

“씬 1. 1에 1.”

“액션.”

두 사람이 바로 연기했다.

연기라고 할 것도 없는 그냥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는 장면이다. 과장과 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만 본다.

이 상태로 거의 1분을 찍었다.

“컷. 과장님 퇴근하시고, 직원들 세 명 빠져요. 사무실 저쪽은 불 끄고요.”

“예.”

촬영 시트가 따로 없는지라 최수혁이 내 지시대로 출연자를 내 보내고 사무실 등도 몇 군데 껐다.

카메라만 서연의 앞에 설치했다.

이 영화에선 디졸브나 포커스 아웃, 오버랩 같은 영화 기법이 없다. 최대한 영화처럼 안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카메라 모니터를 보며 스타트를 지시했다.

이번에도 1분쯤 찍었다.

“컷. 모든 직원 퇴근하세요. 불 다 끄고요.”

서연이 앉은 책상 빼고 불을 다 껐다.

카메라는 서연의 옆에 설치했다.

그냥 삼각대에 카메라만 얹었다.

“액션.”

멍한 얼굴로 컴퓨터 모니터를 보는 서연.

문득 조용함이 느껴져서 다른 자리를 본다.

물끄러미 어둡고 텅 빈 사무실을 보는 그녀.

짧은 한숨을 쉬곤 업무를 마무리한다. 책상에 널려 있던 소지품 따위를 대충 백에 쓸어 담은 뒤 일어난다. 컴퓨터를 끄고 나가는 서연. 어두운 사무실을 걸어가는 뒷모습이 쓸쓸하다. 탁. 하고 사무실 문이 닫힌다.

“컷. 바로 야외 촬영갑니다.”

몇 안 되는 스태프들이 분주히 세팅을 해제했다.

삼각대와 조명 세 개 접고, 조명 라인은 플러그에서 뽑아서 둘둘 말아 케이스에 넣고 끝.

그나마 고참인 스크립터가 물어왔다.

“감독님. 오케이 안 하셔요?”

“응. 다 오케이야.”

“말씀을 안 하시니까, 헷갈리는데요.”

“너만 헷갈리지. 다들 오케이인 줄 알고 나가잖아.”

스크립터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 친구는 일을 꼼꼼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행여나 실수를 할까 봐.

모두 사무실에서 나가 건물 앞에서 대기했다.

보통 영화 촬영이면 촬영 차량이 줄줄이 서 있고, 스태프 수십 명이 모여 있을 텐데 여긴 그런 게 없다. 그래서 독립영화나 대학생이 영화를 찍는 줄 알고 행인들이 그냥 간다.

건물 로비에서 서연이 분장을 점검했다.

분장과 헤어 담당이 서연의 얼굴에 습관적으로 뭘 바르려 하자 서연이 웃으며 저지했다.

“왜 자꾸 바르려고 그래?”

“나도 모르게 습관이 돼서요.”

서연도 분장팀원도 웃었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분장과 헤어는 틈만 나면 배우 상태를 점검하고 자꾸 뭘 더 하려고 한다. 이 영화는 분장이 없다. 그냥 화장한 그대로.

조명팀원이 물었다.

“조명 설치 안 하시는 거죠?”

“응.”

“화면 상으로 좀 어둡지 않을까요?”

“노출을 좀 줘야지. 광식아.”

“예.”

이동원 촬영팀 써드였던 친구다.

난 모니터를 보고 광식이는 노출계를 만졌다.

“조금 더 밝게. 명암 편차를 좀 줄여 봐.”

“다분할 측광을 조금 줄까요?”

“응. 감도도 약간 높이고.”

어두웠던 화면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도 조금 어둡다.

“심도는 건드리지 마. 사람이 보는 것과 비슷하게 가자.”

“예.”

사람이 보는 시야와 아주 같지는 않지만 밝기는 충분했다.

더 밝으면 원래 색이 옅어져서 이 정도에서 찍어야 했다.

핸드 스테디캠인 핸드짐벌에 카메라를 고정했다.

행인이 지나가다 날 보더니 어? 하고 놀란다.

구경하지는 않고 그냥 가긴 했다만.

“음향 팀 빼고 모두 행인 통제 좀 해. 여기서부터 논현역까지. 무조건 막지 말고 양해를 구해. 아니면 보조 출연을 부탁하던가.”

“알겠습니다.”

수혁이에게 무전을 보냈다.

“보조 출연 몇 분이나 되셔?”

-30명까지 모았습니다!

“상품권을 먼저 드리고 말씀드려. 카메라만 안 보시고 그냥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촬영 시작되면 한 분씩 두 분씩 원래 가던 길 가시라고 해.”

-예, 감독님!

서연이 나왔다.

풀 메이크업을 하면 정말 여신으로 변신하는 서연이지만 지금은 그냥 미모가 뛰어난 직장인처럼 보인다.

서연을 알아본 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스태프가 워낙 없으니 대체 무슨 촬영인가 싶은 얼굴들이다. 진행 방향 뒤쪽에 구경꾼이 있는 건 상관없다.

“붐 마이크.”

음향팀 두 명 중 하나는 붐 마이크를 들고 하나는 녹음장치가 담긴 케이스를 들었다. 라인이 연결된 터라 둘이 나란히 붙어서 따라올 예정이다. 붐 마이크는 서연의 발 앞에 댄다.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를 집중적으로 따기 위해.

목에 걸린 헤드폰을 쓴 뒤 카메라를 들었다.

“서연아.”

“응.”

“여기서 지하철역까지 안 끊을 거야. 팬들이 알아보더라도 감정 유지한 채 걷기만 해. 이 장면은 그냥 걷기만 하는데 어쩐지 슬픔이 전달될 거야.”

“알았어.”

무전기를 들었다.

“모두 스탠바이. 수혁아, 섭외한 시민분들 지금 보내!”

-예!

내 손짓에 스크립터가 슬레이트를 들었다.

“씬 2. 1에 1!”

“액션.”

서연이 건물에서 나와 걸었다. 난 서연의 옆 모습을 찍으며 같이 걸었다. 내 뒤로 음향 팀원 두 명이 바짝 붙었다. 뒤에는 스크립터만이 행인을 통제하고 있다.

챙길 장비가 없으니 그냥 이대로 간다.

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걷기만 했다.

난 계속 그녀의 옆모습만 찍었다. 앞쪽에서 걸어오는 섭외된 시민도 적극 협조해 주었다. 서연을 보고 반가워하다가 카메라가 찍는 지점에선 앞을 보고 걸었다. 서연과 카메라가 지나가면 그제야 입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구른다.

계속 걸었다.

간판 조명 때문에 때론 광량이 커질 때도 있었지만 이것도 현실이기에 조절하지 않고 갔다. 자동차 경적. 사람들의 목소리. 때론 서연이다! 라는 소리까지 잡혔다. 이 부분은 후반 작업에 다른 소리로 보정하면 된다.

50미터 전방에 수혁이가 보였다.

논현역 앞에 모여 있던 스태프들이 인근 골목으로 들어가 숨었다. 수혁이는 막 섭외한 시민과 여고생들에게 상품권을 주며 이제 가면 된다고 손짓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걸어와 서연의 옆을 스쳤다.

서연은 묵묵히 걷다가 논현역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짐승의 입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 카메라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까지 찍었다.

“컷. 오케이.”

“와! 대박!”

“진짜 끝내주네요, 감독님!”

골목에 숨어 있던 스태프들이 환호하며 뛰어나왔다.

이런 촬영이 가능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대충 찍는 것 같은 현장도 그렇고, 그 와중에 연기에 몰입하는 서연도 그렇고. 한 방에 이 장면을 찍은 것도.

회사 건물에서 논현역까지.

무려 7분에 이르는 롱테이크였다.

“그녀의 집으로 이동!”

스태프들 모두 탑차와 촬영버스로 향했다.

이번 영화에는 음악도 안 들어간다.

현실의 소리만 들릴 뿐.

묵묵히 걸어가는 여주인공의 모습만으로 눈물이 날 수도 있는 영화다. 현대인의 고독이 그대로 전달되기에.

* * *

촬영 8일째.

임시환의 촬영 씬이다.

장소는 수원의 한 중고차 매매업체. 신뢰가 있는 중고차 거래 업체인데, 여성 대표에게 영화의 내용을 설명해 주고 허가를 받아냈다. 실제 사기꾼이 있는 중고차 거래 단지에서 촬영하면 고소당할지도 모르니.

카메라는 사무실 쪽에 원거리로 설치했다.

멀리서 보는 시점은 제3자의 눈이다. 인간사의 부조리를 보는 관조자의 눈이며, 인간들이 왜 저러고 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앵글이다.

베테랑 배우들이 모였다. 임시환은 차를 닦고 있고.

조명은 없다. 자연광 그대로.

헤드폰을 쓰고 카메라 모니터를 보았다.

배우들에게 외쳤다.

“각본대로 안 해도 됩니다! 발음 꼬여도 상관없어요! NG 상황은 개의치 말고 그냥 가면 됩니다!”

“예!”

수혁이가 슬레이트를 쳤다.

“액션!”

고객이 온다.

사무실에서 딜러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나온다.

“차 보러 오셨어요?”

“예. 산타페가 600에 나온 게 있더라고요. 전화 드렸는데.”

“아, 산타페 DM? 캬, 운도 좋으시네.”

“차 허위 매물 아니죠?”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허위 매물을 올립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저 차 아닙니까.”

고객과 딜러가 차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자, 보세요. 상태 아주 끝내줍니다. 1인 신조고요, 완전 무사고라 보험 이력도 없습니다. 전주인이 애지중지하던 차라서 내부도 아주 깔끔해요.”

고객이 차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

“제가 고른 차는 단순교환이 있었는데요? 앞 펜더하고 라디에이터 볼트 체결했던데. 그래서 싼 거 아니에요?”

“에이, 좀 일찍 오시지. 그 차는 이미 팔렸잖아요. 그냥 이 차 사세요. 이 차 10만 킬로밖에 안 됩니다.”

“이 차는 얼만데요?”

“차값이야 거의 똑같죠. 차는 마음에 들어요?”

“그렇기는 한데.”

“천천히 둘러보세요. 차가 기가 막힙니다.”

고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를 살펴본다.

임시환은 세차를 멈추고 고객을 물끄러미 본다.

어째 기운이 없는 모습이다.

“컷! 사무실로 이동합니다.”

카메라를 사무실로 옮겼다.

배우들도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실내등에 조명과 트레이페이퍼 하나씩만 추가했다.

“액션.”

고객이 커피를 마시다 계약서를 보고 깜짝 놀란다.

“어? 600만 원이라면서요?”

“누가 600만 원이래요? 비슷하다고 그랬지.”

“990만 원이 어떻게 비슷한 겁니까?”

“아, 시발 천만 원 안 넘어가면 거기서 거기지.”

“지금 뭐하는 겁니까? 왜 욕을 해요?”

“내가 고객님한테 욕한 게 아니고, 그냥 추임새죠, 추임새. 300만 원 더 쓰면 될 것 가지고 참 까다로우시네.”

고객이 일어났다.

“차 안 삽니다. 이건 뭐, 사기도 아니고.”

딜러의 얼굴이 일순 변한다.

“헐. 이 고객님 말하는 꼬라지 보세요. 야, 문 잠가라.”

임시환이 문 앞에 섰지만 잠그진 않았다.

“문 안 잠가, 새꺄!”

“문을 왜 잠급니까! 당신들 조폭이야?”

“거, 흥분하지 마시고 앉으세요, 고객님.”

조폭 태세로 돌변하는 딜러.

황당해서 입이 쩍 벌어지는 고객.

“컷! 남주 시점으로 갑니다!”

카메라를 임시환이 서 있던 곳으로 옮겼다.

이내 촬영을 재개했다.

고객과 딜러가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남자주인공이 물끄러미 보는 장면이다. 싸우는 소리는 안 들리고 임시환이 숨 쉬는 소리와 심장 박동만 들려온다. 갈수록 숨이 가빠진다. 답답한 세상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

고객과 딜러가 사무실에서 밀고 넘어지며 몸싸움을 하는데 그 합이 기가 막히다. 짠 것도 아니고 리허설도 안 했다. 주어진 상황 그대로 알아서 할 뿐이다.

일반 영화에선 NG인 상황도 있다. 싸우다 중심을 잃어 뒤로 주저앉는다. 보통 영화에선 매끄러운 장면을 위해 다시 촬영을 할 텐데, 난 그냥 갔다. 몸싸움이 원래 그런 거니까.

다음 촬영은 중고차 업체를 그만둔 임시환이 쓸쓸하게 앉아 있는 장면이다. 돌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행인을 지켜보는 씬. 사람들은 분주히 오가는데 혼자 섬이 되어 버린 듯한 모습이다. 오갈 데 없는 심리의 셔레이드다.

카메라는 도로 쪽에 있고, 임시환은 카메라 정면에 앉아 있다. 그 사이 인도로 사람들이 오간다. 카메라는 앉아 있는 임시환만 찍을 뿐이고.

“액션!”

임시환이 멍한 얼굴로 정면을 본다.

테이크가 길어지자 점점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연기력이 정말 일품이다.

세상 다 산 젊은이의 절망이 보인다. 좌절감에 빠져 무기력한 모습. 눈빛은 공허하고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임시환은 안 그래도 모성 본능을 일으키는 외모인데 지금은 너무도 처량해 보였다. 분주한 대도시에 혼자 버려진 듯한.

이 장면 그대로 5분을 찍었다.

한 대상을 관심 있게 바라보면 그 대상은 특별해진다. 흔한 돌마저도 애지중지하면 가치가 생기기 마련이다. 모르는 사람을 오래 주시하면 아는 사람이 된다. 나아가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컷! 오케이!”

몇 되지도 않는 스태프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아무 연기도 안 한 듯한 최고의 연기였다.

어찌나 몰입을 했는지 컷을 외쳤는데도 임시환은 물끄러미 도로 건너편을 보고 있었다. 그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깜짝 놀랐다.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 청춘의 아픔을 대변하는 모습이었나.

그래, 눈물을 보이는 것보다 참는 게 맞다.

보이는 눈물은 보는 사람의 눈으로 스며들지만, 참는 눈물은 가슴에 스며드니까.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은 여주인공의 마지막 눈물로 나와야 한다. 그게 클라이맥스다.

* * *

촬영 14일째.

이 영화가 슬픈 영화라는 걸 촬영하면서 알았다.

시나리오는 장면과 연기를 연상하기에 즉시 와 닿지 않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다 읽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한데 실제로 연기를 보고 있으니 먹먹한 장면이 너무 많았다. 갈등 하나 없는 영화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영화 중반에서 관객이 울면 후반이 약해지는지라 일부러 감정을 자제했다. 주인공들이 의도적으로 밝게 살아가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늘 무표정이었던 이들이 웃음을 띠며 살아가는데 그게 더 울컥해지는 건 또 뭔가. 이러다 영화 망칠 것 같아 최대한 감정 표현을 눌러 달라고 요청할 지경이었다.

여자는 아무 문제 없이 회사에 다니고, 집에선 청소하고 빨래하고 혼자 밥을 먹는다. 그런 사소한 장면까지 울컥해지니 대체 어쩌라는 건지. 단지 조용히 혼자 움직이며 작은 소음을 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독한 외로움이 전달된다.

남자 주인공은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일한다. 공사장에서도 일하고, 택배 물류 처리장에서도 일하고. 의류 회사 박스 작업도 하고. 하는 일마다 뜨내기 알바로 겉돌고 소외당한다. 열심히 살아 보려고 해도 도무지 남들처럼 살 수가 없다. 좋은 차에 가족을 태우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은 짠하기만 하고.

그리하여 대망의 샌드위치 씬.

한강에서 찍었다.

서연이 강변에 앉아 대기했다. 그녀의 뒤에는 현대화의 상징이자, 안정적인 삶을 의미하는 고급 아파트 단지가 성벽처럼 서 있다. 그 누구도 이 성벽을 쉽게 넘지는 못한다는 듯.

여자는 맞선을 보고 왔다.

자기 연봉을 자랑하고, 아버지는 뭐하시는 분이냐고 묻는 남자의 질문에 힘없이 대꾸만 하다가 나왔다.

그 길로 샌드위치를 사 들고 한강으로 왔다.

유유히 흐르는 강과 아파트 단지.

그 사이에 낀 서연을 찍기 시작했다.

강을 보며 샌드위치를 먹던 서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갑자기 숨을 몰아쉬며 흐느끼더니 굵은 눈물을 쏟았다. 그러곤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동안 쌓였던 모든 감정이 한 번에 터지듯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나도, 스태프들도 모두 울고 있었다.

슬픔이 아닌 해소의 눈물이었다.

인간은 원래 혼자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삶의 본질을 묻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을 토닥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래도 이 영화.

내가 생각한 수준을 훌쩍 넘어 버릴 것 같다.

* * *

서연은 차분하게 눈물을 흘리다 점점 흐느끼고, 마침내 통곡했다. 몇 분간 서럽게 울던 그녀는 5분쯤 지났을 때 차츰 마음을 수습하고 눈물을 닦았다.

그러곤 코를 훌쩍이며 남은 샌드위치를 마저 먹었다.

그렇게 또 몇 분이 지나갔다.

무려 10분간 이어진 롱테이크였다.

다시 가 봐야 더 좋은 게 안 나온다.

눈물을 다 쏟아냈기 때문에.

서연은 원 없이 울고 난 뒤 표정이 밝아졌다.

내가 디렉팅한 부분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감정에 따라간 결과다. 울고 나서 쌓인 감정이 해소된 까닭에.

서연은 기분 좋은 얼굴로 한강을 보았다.

정말 후련했다. 가슴에 막혀 있던 뭔가가 한강 바람에 날려 다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런데 묘한 체험을 했다.

서연을 따라 나도 스태프들도 실컷 울었더니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냥 울고 끝났다면 감정이 남아 있었을 텐데, 서연이 밝은 표정으로 한강을 응시하는 것을 보자 마음에 쌓인 재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를 본 관객도 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

희망을 제시하진 않았지만 위로를 받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라는 게 참 묘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아무런 드라마가 없는 영화인데도 가슴이 아리고, 또 그런 영화가 영혼을 치유할 수도 있다는 게.

샌드위치 씬을 찍고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옆집에 이사 오는 장면까지 찍었다. 서로 마주치진 않고 두 남녀는 각자 집에서 오갈 뿐이다.

관객은 내내 두 사람을 주시했기에 둘 다 친구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 모른다는 게 아련한 느낌을 준다. 두 사람이 같은 건물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안도감과 완결의 느낌도 주고.

그렇게 신작 영화 촬영을 끝냈다.

촬영 기간은 17일 걸렸다.

시나리오대로 찍기는 했으나 현장에서 내용을 바꾸기도 했고, 생각해 둔 앵글과 전혀 다르게 찍기도 했다.

이전 영화에선 말 그대로 감독 노릇만 했으나, 이번 영화는 대부분 내가 관여하고 주도했다.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스태프 도움을 받아 내가 한 땀, 한 땀 만든 작품이다.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배우들도 그랬다.

다들 처음 경험하는 촬영 방식이었다. 배우들이 지금까지 작품을 하면서 이번 영화만큼 집중적인 롱테이크로 찍은 적이 없었다. 배우로서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보여 줄 수 있었으니 정이 가는 게 당연했다.

촬영을 마치고 쫑파티를 했는데 그 말이 나왔다.

임시환이 말했다.

“회사에서 왜 최 감독님 작품은 무조건 하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저 이번 작품으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영화의 힘이 뭔지도 알 게 되었고요. 솔직히 영화 찍고 나면 아쉽기도 하고 부끄러운 장면도 있었는데, 이번엔 제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만족하면 안 되는데 말이에요.”

“아니야, 정말 잘했어. 작품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작품에선 최고의 연기를 했어. 대한민국에서 임시환 말고는 할 사람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

“고맙습니다.”

주드 로와 데인 드한도 임시환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

배우들이 내 작품을 하면 자신도 모르는 모습을 찾는 건지. 혹 배우들의 잠재력이나 숨어 있는 얼굴을 내가 발견하고 끄집어내는지도 모른다. 코어가 그걸 찾을 테니까.

서연이 말했다.

“나, 이번 영화 느낌이 정말 좋아. 평소 오빠 보면 그냥 보통 사람인데, 영화 찍을 때 보면 낯설 만큼 천재 같아.”

“그냥 남들이 모르고 하는 소리야.”

“천재 맞으세요. 제가 확인했습니다.”

임시환도 한마디 거든다.

천재는 무슨. 코어가 인도해 줄 뿐인데.

내가 잘나서 좋은 영화를 찍고, 그 영화들이 다 좋은 결과를 얻은 게 아니다. 코어가 생긴 것 자체가 운이다. 이룬 게 많으니 이젠 좀 베풀고 살아야겠다. 베푼 만큼 돌아온다는 말도 있으니.

샌드위치가 개봉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흥행은 안 되겠지만 좋아하는 분들은 있겠지.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 복잡한 머리를 비우기 위해 영화를 보는 분들도 있으니까.

특이한 영화가 나왔다는 반응은 있을 것 같다.

여자 스태프들이 ‘그녀’가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는 장면을 보다가 울었던 적 있다. 그러니 좀 이상한 영화인 거지.

스태프들이 이번 영화 촬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서연도 말이 없고, 나도 그렇다. 촬영 내내 괜스레 먹먹해지는 장면들이 이어지다 보니.

해서 서연은 집에서 후유증에서 벗어나기로 하고, 난 기분을 전환하려 회사 일을 했다. 편집은 느긋하게 배우면서 하기로 하고. 안 그래도 신사옥 때문에 구 대표가 날 불렀다.

* * *

구 대표와 함께 신사옥 조감도를 보았다.

시안이 4개 나왔다.

하나만 일반 건물과 같고 3개는 특이하게 생겼다.

구 대표가 말했다.

“이런 건물들은 매각할 때 불리하지 않을까?”

“회사를 매각할 일이 있을까요?”

“그거야 모르지. 회사가 더 확장하면.”

“확장해도 신사옥을 본사로 하면 되죠.”

“그래, 건물 매각을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용산에 부지 공사는 진행 중이야. 자넨 어떤 건물이 좋을 것 같나?”

“이 시안이 마음에 드네요.”

내가 고른 시안은 M자 형태였다. 서울 중앙 우체국, 포스트 타워와 비슷하다. 하층부는 붙어 있고, 상층부는 가운데가 뚫린 설계. 내가 영화감독이라 무비에서 M을 따온 모양이다.

설계 사무소 대표에게 말했다.

“이 형태는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를 뾰족한 형태가 아닌 엎어진 반구 형태로 하는 건 안 될까요?”

“필기로 M자를 쓴 것처럼요?”

“맞아요. 가운데 둥글게 들어간 부분에 정원을 꾸미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 휴식처를 만들자는 거죠?”

“예. 이왕이면 직원들이 바베큐 파티도 할 수 있도록 넓게 해 주시고, 바닥은 나무를 깔아 주세요. 작은 숲과 벤치도 형성해 주시고요.”

구 대표가 웃었다.

“직원들이 먼저다 이거구먼.”

“어차피 안으로 푹 들어가는 설계인데 뭐라도 좀 있으면 좋죠. 나누어진 양쪽 상층부에서 내려다보이는 정원이라 직원들이 상사 눈치를 볼 수도 있겠네요.”

설계 사무소 대표가 말했다.

“유리 천장을 설치하던가, 개폐식 지붕도 가능합니다. 지붕을 만든 뒤 가운데만 뚫어 놓을 수도 있고요. 비가 오면 나무 바닥이 부식하니 마루가 있는 곳은 지붕이 있어야 합니다. 배수시설도 당연히 있어야 하고요.”

“나는 마음에 드네. 유리창 밖에 편안한 휴식처가 보이면 마음이 편하지. 직원들이 한가하게 정원에서 거닐고 있는 걸 봐도 편안해지는 게 직장인이거든.”

“그런가요?”

“회사가 삭막해 보이지가 않잖아. 직원들이 커피 한 잔 들고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으면 보기에도 좋고.”

안 그래도 우리 회사 복지는 최고 수준이다.

그 점에 관해선 구 대표와 뜻이 같다.

설계 사무소 대표에게 말했다.

“신사옥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곳이 몇 곳 있습니다. 미용실. 피트니스 클럽. 어린이 놀이방. 영화관람실. PC 게임방. 흡연실. 세탁실. 수면실. 스낵 바와 구내 술집입니다.”

“술집?”

“네. 간단히 맥주 한잔할 수 있는 곳요.”

“무료는 아니겠지?”

“직원 할인은 있겠죠.”

“그래. 나가서 마시느니, 그게 낫겠네. 거기서 간단히 손님 접대도 하고.”

구 대표님과 마음이 통하니 좋다.

회사에 술집이 있다고 직원들이 일 안 하고 술을 마시겠나. 상사들 눈치가 보이니 제대로 마시려면 나가서 마시지. 구내 술집은 말 그대로 간단히 한잔하는 곳이 된다.

다니고 싶은 회사가 좋은 회사다.

고생하는 매니저들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복지였다.

시안 결정을 했다.

회사 임직원들은 두 대표가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 두 사람을 신뢰하는 거겠지.

구 대표는 세부 논의를 위해 남고 난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에 김판수가 와 있었다.

표정을 보니 결과가 좋았던 모양이다.

그가 구내 카페에서 가져온 커피를 마셨다.

“야, 회사 좋다. 커피도 공짜로 마시고.”

“홍콩 회사와는 어떻게 됐어?”

“내 얼굴 보면 모르겠냐? 원래 중국인들이 내색을 안 하는 편인데, 내가 제안을 하자마자 대번에 얼굴이 펴지더라. 투자 확실하지, 극장 체인 사업에 모회사가 투자했으니 영화 개봉 확실하지. 손 안 잡으면 바보인 거지.”

“잘됐네.”

“그럼 우린 로큐 계열사가 되는 거야?”

“형과 홍콩 회사 자본금은 얼마나 돼?”

“영화제작사가 무슨 돈이 있냐. 많아야 20억이지.”

“그럼. 로큐가 출자한 중국 영화 제작사로 시작해. 로큐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무래도 나으니까. 건물 매입 자금으로 50억 댈게. 제작비는 진행이 되는 대로.”

김판수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런데 홍콩 회사 대표가 지분을 반반으로 요구할 것 같다. 지금이야 돈이 없어서 투자를 받지만, 나중에 수익 지분이 로큐에 다 넘어가는 건 좀 아니잖아.”

“영화 제작으로 수익이 나면 지분 확보하라고 해. 우리가 지분을 조금씩 내줄 테니까. 그렇게 절반까지 가면 돼. 비상장 주식 발행하는 건 당연한 거고.”

“상장까지 생각하는 거야?”

“그래야 홍콩 쪽이 함부로 배신 못 하지. 두 회사가 반반씩 가지고 있다가 상장할 때 지분을 몇 %까지 보유할 건지 논의하자고. 두 회사가 합쳐서 30%까지 보유하고 나머지는 공모주로 매각하면 될 거야.”

“회사 대표가 되더니 사람이 달라 보이네.”

“나야 영화만 찍고 싶지.”

“그래. 몇 가지 조건이나 확인해 줘.”

“줘 봐.”

김판수가 가져온 서류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홍콩 회사에 일종의 기회를 준 셈이기에 조건은 무난했다. 홍콩 회사 대표의 자필 편지를 보니 홍콩 사람은 중국 본토 사람과 의식 수준이 좀 다르긴 하다. 신사 같다고 해야 할까.

플래닛 씨는 출시 보름을 앞두고 있었다.

실무진이 알아서 다 하고 있기에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없었다. 중국 극장 체인 사업 투자도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고.

3일을 더 쉰 뒤.

편집실로 향했다.

* * *

편집을 배우기 위해 편집실에서 살았다.

편집실장의 조언을 받으며 내가 직접 편집했다.

편집실에는 듀얼 모니터가 있다.

왼쪽엔 데이터 원본과 잘라낸 분량.

오른쪽엔 씬 편집본. 전체 편집본.

네 개의 영상을 헷갈리지 않게 좌우로 띄워 놨다.

원본에서 0.1초 단위로 시작과 끝을 잘라낸 뒤 편집본에 넣고, 같은 작업으로 이어 붙였다.

편집의 기술과 묘미는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촬영하긴 했는데 씬 연결이 튈 때가 좀 있었다.

“이렇게 튀면 어떻게 자연스럽게 붙이죠?”

편집실장이 말했다.

“브릿지로 촬영하신 거 붙이던가, 킵한 씬을 붙여도 돼요. 영화 느낌을 안 주시려고 그러는 거죠?”

“예.”

“그럼 이렇게 해요. 서연 씨가 물끄러미 사물 응시하고, 서연 씨 시점으로 사물을 찍은 커트 있잖아요. 그걸 잘라 내서 붙여도 돼요. 워낙 롱테이크가 많아서 몇 초 잘라내도 별로 표가 안 날 거예요.”

“한번 해 보죠.”

편집실장 말대로 씬 연결이 튀는 씬에 잘라낸 커트를 이어 붙였다. 그랬더니 브리지 효과가 났다. 주인공 시점의 브리지 컷이라 자연스럽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면 전환할 때 건물 외관이 나오곤 하는데, 그런 게 브리지 씬이다. 부드러운 연결과 장면의 장소를 알려 주는. 내 영화에선 건물 대신 사물이 들어간다.

조금 튀어도 연결이 무난한 것은 그냥 붙였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 초기 영화도 그런 면이 좀 있었다.

영화감독 초보라서 그랬는지, 개성이라고 생각했는지.

만화 같은 컷 점프가 극적인 전환을 주기도 하고.

아무튼 편집이라는 게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진작 편집 공부를 할 걸 그랬다.

현장에서 편집을 염두에 두고 촬영해도 막상 편집을 해 보니 부족하거나 연결이 어려운 씬이 더러 있었다.

꽤 재미가 있어서 혼자 할 수 있는 건 혼자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마음대로 편집해 볼 수가 있다는 점이다. 편집실장은 시트대로 편집하지만, 난 이것저것 바꿔볼 수가 있으니.

* * *

12일 만에 편집을 끝내 버렸다.

하루 10시간 이상 편집실에 앉아 있었던 덕분에.

개별 쇼트가 워낙 없기도 했고.

편집본을 보다가 조금 욕심이 나서 재편집을 시작했다.

이번엔 KEEP 해 두고 쓰지 않은 씬과 커트들을 불러내어 좀 더 자연스럽게 붙이는 시도를 했다. 편집본에 있는 걸 잘라내고 다른 걸 붙여 보기도 하고.

이번 기회에 편집을 제대로 배울 겸.

편집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또 30여 일이 훌쩍 지났다.

나온 버전만 4개였다.

마지막 버전은 롱테이크 일부 장면에 다른 인물의 씬이 들어가기도 하고, 두 주인공을 교차 편집하기도 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느낌이다.

편집의 마술이라고 보긴 어렵고, 같은 씬을 여러 개로 나누어 따로 붙인 셈이다. 그랬더니 영화가 한결 살았다. 각 씬의 테이크가 대부분 긴 편이어서 일부를 잘라내니 완급 조절도 된다. 집중할 땐 집중하고 경쾌하게 갈 때 빠르게 전환하고.

최종 편집본을 보고 있을 때였다.

김영석 감독이 놀러 왔다.

“어쩐 일이야?”

“너 이번 신작 엄청나다며? 스태프들이 SNS에서 자랑하고 난리도 아니더라. 임시환은 인터뷰할 때마다 샌드위치 얘기를 하더구만. 기자들이 하도 궁금해서 나더러 무슨 영화인지 알려 달라더라.”

나도 편집하면서 겪었다.

서연이가 샌드위치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다고 말한 적 있다. 기자들에게서도 매일 전화가 왔고, 심지어 임시환의 소속사에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어떻게 찍은 것인지도 모르면서 임시환의 말만 듣고 감사를 표한 거다.

“편집 끝났으면 한번 보자.”

“사운드 없어서 내용 잘 모를 텐데.”

“시나리오 한두 번 쓰냐? 상황 보면 척이지.”

난 이번 영화에 대한 객관성을 잃었다.

편집된 영화를 한 번에 쭉 봐야 영화의 감상이 제대로 된다. 그런데 편집 과정에서 수도 없이 봤다. 지금은 뭘 봐도 밍밍하다. 오히려 재미가 없을 정도다.

그러니 현장에서 나와 스태프가 겪었던 그 감정을 믿고 편집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느낌을 관객도 그대로 느끼기를 바라면서.

편집본이 나온 후 아무도 본적이 없었다.

김 감독이라면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수 있을 테고.

김영석 감독이 편집실에 앉고 난 뒤편 소파에 앉았다.

김 감독은 모니터 앞에 앉아 4차 편집본을 보았다.

그 사이 난 짜장면을 주문해서 먹고, 커피도 마셨다.

하품을 하며 빈둥거리고 있을 때.

김영석 감독이 뒤를 보았다.

“신성아….”

김 감독을 보곤 멈칫했다.

김영석 형의 뺨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중에도 몇 번 울었는지 눈이 충혈된 상태였다.

“흐허어어. 신성아…”

“왜, 그래.”

“흐어어어어어!”

갑자기 오열하는 김영석 형을 안아 주었다.

형이 내 품에 안긴 채 펑펑 울었다.

당황스럽지만 고맙기도 했다. 안도도 되고.

너무 서럽게 우니 나까지 눈에 물기가 맺힌다.

“신성아… 흐어엉!”

통곡을 하는 김영석 선배의 어깨를 토닥였다.

누구라도 부여잡고 울고 싶었나 보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그냥 복받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복받쳐서.

두 주인공의 삶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김 감독이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잘살고 있는 거지?”

“그래.”

“우리 열심히 사는 거지?”

“응.”

나와 김 감독은 나란히 앉아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남자 둘이서 참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뭐 어떤가.

울고 싶을 때 그냥 우는 거지.

둘이서 멍하니 앞만 보았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형이 말했다.

“고맙다, 신성아. 좋은 영화 만들어 줘서.”

난 말없이 김 감독의 등을 토닥였다.

영화 샌드위치가 인간의 무의식에 숨겨진 어떤 걸 건드리는 걸까. 아니면 마음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걸 일깨운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두 사람의 연기에 몰입한 때문인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서연이 그랬던 것처럼.

김영석 감독도 실컷 울었더니 개운하다는 미소를 보이며 편집실을 나섰다.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난 김 감독이 본 4차 편집본을 최종본으로 정하고, MI 작업실에 가서 영상 보정을 맡겼다. 몇 주 후에 나온 보정본을 가지고 사운드도 맡겼다.

그렇게 7월 초를 맞이했을 때였다.

갑자기 국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상한 억양의 영어.

-안녕하세요. 저는 안드레이 바르디라고 합니다. 한국의 최 감독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한국 감독인 미스터 킴에게 추천을 받았는데요. 안 그래도 저희 영화제에 감독님 작품을 초청하려던 차에 좋은 작품이 있다고 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미스터 킴이 최 감독 연락처를 알고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했어요.

“그렇습니까? 어떤 영화제인지요?”

-아, 저는 베니스 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입니다. 오는 8월 30일부터 11일간 베니스 리도에서 영화제를 진행하는데요. 혹, 이번 신작을 출품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베니스 영화제에서 초청이 왔다.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했던 김영석 형과 만났던 듯.

경쟁이든, 비경쟁이든 상관없다.

“출품하겠습니다.”

-오! 좋습니다! 일정이 나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영화를 보지도 않고 초청해도 되는 건지.

그래, 한번 가 보자.

사람 사는 거야 다 똑같지 않겠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