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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동쪽의 귀인 (32/56)

제8장 동쪽의 귀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자들이 날 에워쌌다.

한국인이 미국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제작하고 연출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그러다 보니 국내 언론의 관심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무시하고 나갈 수는 없으니 짧은 기자회견을 했다.

“미국 촬영은 순조로웠습니까?”

“한국 영화 촬영 계획은 없나요?”

“미국 현지 스튜디오는 언제 완공됩니까?”

“다음 영화 여주인공은 안서연 씨인가요?”

쏟아지는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서연이가 할리우드 영화 여주인공이 되는 건 좀 어렵다. 그녀도 영어로 연기할 자신이 없었고. 다음 한국 영화는 서연의 단독 주연으로 할 생각은 있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자 서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온 최수혁은 마중 나온 회사 차를 타고 먼저 갔다.

서연이 몰고 온 차에 올랐다.

“내가 운전할게.”

“아니야, 오빠 피곤할 텐데.”

서연은 김영석 선배와 찍은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에 다녀왔다. 내가 촬영을 시작한 올해 2월 초라 나는 동행하지 못했다. 상을 받지 못해서 좀 아쉽긴 했지만 평가도 좋았고, 흥행도 어느 정도 했다.

회사에 도착하자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있었다.

전 직원이 로비에 나와서 박수를 보낸다.

이건 뭐 회장님 출두도 아니고.

나도 금메달리스트처럼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환하게 웃는 구 대표님과 악수를 나누었다.

“고생했네. 내년 1월 개봉이라지?”

“예. 회사는 좀 어때요?”

“보시다시피.”

직원이 한 300명은 되는 듯하다.

회사가 비좁을 지경이다.

“사무실 부족하지 않아요?”

“부족하지. 안 그래도 자네가 왔으니 회사 확장에 대해서 의논 좀 해야겠어. 사옥을 지을 건지, 매입할 건지.”

“자본금은 충분하죠?”

“우리 회사만큼 자금 넉넉한 회사도 드물어. 현금만 1,000억이 넘네. 1,500억 정도는 우리 회사 관련 기업들 지분을 사들였지. 우리가 지분을 확보하니 겁을 먹더구먼.”

그럴 만하다.

내 영화 해외 수출로 벌어들인 돈만 3,000억 가까이 된다. 거기에다 회원이 900만에 이르는 플래닛 케이의 매달 영업이익이 200억이다. 신개념 VR 영화가 출시되면서 초대박을 쳤다. 회사 운영 자금과 제작비 등은 소속 아티스트 활동 수익으로 감당하고, 나머지는 전부 여윳돈인 셈이다.

내가 해외에 있었기에 신규 사업 재투자를 안 한 거다. 그렇다고 ‘저금’만 해 놓고 있을 순 없으니 1,500억 정도는 다른 회사에 투자한 거고. 그래도 현금이 1,000억인 건 좀 심했다. 하기야 두 대표의 결재가 모두 있어야 했으니.

서연은 회의실로, 난 내 사무실로 향했다.

서연과 함께 귀국했던 유희진 씨가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본인이 눈치껏 1층 카페에서 받아온 거였다.

구 대표가 말했다.

“신사옥은 어떻게 생각하나?”

“제가 없어서 답답하셨나 봐요.”

“말도 말게. 자네 영화 찍는 데 방해될까 봐 물어보지도 못하고 말이야. 그러니 어떻게 해. 혼자 구상할 수밖에. 신규사업. 신사옥 건설. 건물 매입 등등 얼추 구상은 나왔지.”

“아무래도 짓는 게 낫겠죠?”

“그렇지. 16층 규모는 어떤가? 건설부지를 합쳐 평당 400만 원에 500억 정도를 잡고 있네.”

“건물이 상당히 육중하겠네요.”

“그렇지. 넓고 높으니까.”

“저는 좋습니다.”

구 대표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사옥은 용산 쪽을 알아보고 있네. 직원들로 미어터질 지경이니 근처에 건물을 하나 매입하는 게 먼저야. 연습생 숙소와 보조 사무실로 쓸 걸세.”

“그것도 좋습니다. 신사옥 생기면 거길 본사로 하고, 여긴 콘텐츠본부와 플래닛 케이가 남으면 되겠네요.”

“그렇지. 주가는 확인해 봤나?”

“아직요.”

“이렇게 무신경해서야….”

구 대표가 갑자기 날 안았다.

포옹에 진심이 느껴진다.

가족을 안은 느낌이 들었으니.

내 어깨를 잡은 구 대표가 날 가만히 보았다.

“자네와 싸우던 때가 참 꿈만 같구먼. 우리 회사가 이렇게 번창할 줄은 정말 몰랐네. 솔직히 자네 없었으면 내가 3,000억대 부자가 되지는 못했겠지. 고맙네, 최 대표.”

“별말씀을요.”

“그래, 자네가 결재했으니 추진하겠네.”

“네.”

구 대표가 내 어깨를 두드리곤 나갔다.

본인이 알아서 경영하면 될 것을 날 존중하려고 미루어 두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3,000억대라.

컴퓨터 앞에 앉아 R&C엔터를 쳐 보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78,900원.

내가 보유한 주가 총액이 6,000억이다.

로큐는 업계 2위이고.

한국 최대 음악유통사를 거느리고, 모회사가 대기업인 로안엔터 다음이다. 이 회사는 연 매출액이 5천억쯤인데, 영업 이익은 우리 회사보다 훨씬 낮다. 로큐의 주가가 높은 건 플래닛 케이의 매출과 영화 제작의 순수익률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 플래닛 케이에서만 상영되는 영화가 30편이 넘는다. 로큐 제작 영화가 6편 정도고 나머진 다른 제작사가 제작한 걸 상영하고 있다. 콘텐츠본부 심사를 통과한 작품들로 대부분 저예산 장르 영화다. 그 영화들에 장르물 팬들이 열광하고 있다.

이를테면 주성치 감독 초기 스타일의 ‘이상한’ 영화는 한국 극장에서 보기 어렵다. 하드코어 공포물이나 60분짜리 독특한 장르물도 그렇고. 특히 괴상한 설정의 성인물은 우리 회사가 욕을 먹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뻔한 웰메이드 영화보다 B급 장르물을 좋아하는 팬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극장에서 상영할 수가 없기에 제작사들이 만들지 않았는데, 상영 플랫폼이 있으니 만들게 된다. 10억 들여서 20억 벌면 다음 작품 제작할 수 있는 거지.

기분 좋았다.

내가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열게 한 것 같아서.

물론 의도한 거다. 감독이 투자자와 배급사 눈치를 안 보고 만들고 싶은 영화 만들고, 팬들도 색다른 영화를 봐서 좋고. 제작비는 로큐 투자와 펀딩으로 해결이 되니까.

극장과 배급사와의 관계는 상관없었다. 상영하는 영화 종류가 다른데다 큰 작품만 상영해도 스크린이 꽉 차기 때문에.

영화인들이야 플래닛 케이의 존재를 ‘찬양’하는 지경이다.

독립영화나 다큐, 저예산 장르 영화를 찍어서 개봉을 해도 일주일이면 간판 내린다. 그런 영화들을 플래닛 케이에서 장기간 상영하면 낫지 않겠나. 영화인들이 환호하는 이유다.

우리야 무기한 상영도 가능하고.

어쨌거나 내 귀국은 영웅의 귀환처럼 되었다.

나와 밥 한 끼 먹자는 문자가 수도 없이 날아오고 있으니.

어떤 건 연을 맺어 보려는 의도겠지만, 대부분이 감사 인사였다. 한국 영화를 위해 노력해 줘서 고맙다고 하니까.

사무실로 최수혁이 들어왔다.

“콘텐츠본부에서 검토한 시나리오들입니다.”

“읽어 보셨어요?”

“시놉시스만 확인했어요. 기발한 에로 영화 조회수가 높다 보니 절반이 성인물이네요.”

“어딜 가나 그렇죠, 뭐.”

사실 성인물이 돈이 되는 건 맞다.

최수혁과 함께 콘텐츠본부를 통과한 시놉을 읽었다.

여섯 작품인데 세 작품은 출품자가 직접 연출할 영화고, 나머지는 전속 감독들이 연출한다. 예산은 5억에서 20억까지.

골 때리는 작품들이다.

명색이 한국 최대 영상 플랫폼인데 삼류 에로 영화가 통과될 리가 있나. 나름의 작품성도 있고, 성인물임에도 엄청 웃기는 작품들이 있었다. 대학생이 쓴 ‘21세기 가루지기’는 정말 웃겼다. 이 작가는 전속 작가로 뽑을 생각이 들 정도로.

그중 하나를 보자면.

‘진돌이를 찾아라!’

어느 프로야구단 마스코트가 진돗개다. 구단주가 그 개를 입양하면서 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우승했다. 3년 연속으로. 그러다 개가 사고로 다치자 그 해 성적은 꼴찌였다. 개가 완쾌한 다음 시즌에선 또 우승하고. 징크스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야구선수들이 특히 징크스에 민감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 개가 실종되었다.

구단에서 난리가 났다.

명탐정까지 동원해서 그 개를 찾으려고 하는데, 알고 보니 포스트시즌 진출팀 팬이 그 개를 납치했다. 그 와중에 진돌이가 도망을 쳤는데 개장수한테 잡혀서 식용으로 팔려나갈 위기에 처한다.

주인공은 구단의 프론트 신입 직원이다. 산 넘고 물 건너 온갖 고생을 하며 진돌이를 찾아다닌다.

개를 빼돌리려는 경쟁팀 팬들. 개의 ‘몸값’을 받아내려는 악당들. 구단의 우승을 위해 천라지망을 펼치는 열혈 팬들.

이들이 뒤죽박죽 얽히면서 난리법석이 난다.

경쟁 구단의 사주와 음모. 닮은 진돗개로 바꿔치기.

점점 다가오는 한국시리즈. 진돌이를 찾아야 우승한다는 선수들의 믿음 때문에 포스트시즌 성적은 엉망진창이고.

진돌이가 테헤란로 한복판을 신나게 질주하고, 그 뒤를 수많은 사람이 고함을 지르며 쫓는다. 이 장면은 정말 배꼽을 잡았다.

아니, 개 한 마리가 뭐라고.

어쨌든 주인공이 거지꼴이 된 채 진돌이를 찾아오면서 구단은 기적처럼 한국 시리즈에 진출한다. 과연 우승을 했을까, 안 했을까. 웃음과 감동에 생각할 거리도 주는 작품이었다.

이런 게 플래닛 케이의 영화다.

극장에 걸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재미는 있는.

통과된 작품들이 다 재미가 있었다.

최수혁 씨에게 말했다.

“차기 한국 영화는 서연이를 주인공으로 해 볼 겁니다. 수혁 씨가 써 놓은 작품이 있거나, 좋은 소재를 발굴하면 좀 알려 줘요. 들어오는 시나리오 중에 선택할 수도 있고요. 할리우드 시리즈물로 제작할 수 있는 소재도 좀 알아보고요.”

“네. 안 그래도 제 역할이 그거라 알아보는 중입니다.”

“수혁 씨가 발굴한 소재는 공동 작가로 올려 줄게요. 당분간 내 비서 노릇을 하겠지만 언젠가 수혁 씨도 감독 입봉할 수 있을 겁니다. 몇 년 만 고생해요.”

“고맙습니다. 대표님.”

최수혁은 내가 좋아할 만한 작품을 고르는 임무를 맡았다. 나와 성향이 좀 비슷하기도 해서. 할리우드 차기작은 이왕이면 시리즈로 갈 수 있는 걸 할 생각이었다. 영화 소재는 코어와 상관이 없어서 보조해 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사무실에서 나가 회의실로 갔다.

서연과 유희진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드라마 캐스팅이 들어와서 희진이랑 의논하고 있었어.”

“드라마 할 거야?”

“아니, 오빠 영화 찍어야지. 희진이가 이 드라마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해서 들어본 거야.”

“어떤 드라만데요?”

유희진이 대답했다.

“악덕 대기업의 차남과 시장통 빵집 딸의 영혼이 5일 주기로 바뀐다는 내용이에요. 시놉을 봤는데 재밌더라고요.”

“편성이 된 거예요?”

“아니요. 로큐 제작을 목표로 들어온 거예요. 작가는 무명이고요.”

“어디 한번 봐요.”

1화 시놉을 대충 읽어 봤는데 조금 다듬으면 재미있을 듯했다. 신인 작가티가 좀 났지만 전형적인 소재를 살짝 비틀어준 재치가 있었다.

“일단 묵혀 놔요. 몇 달 후에 제작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수혁 씨랑 함께 수고 좀 해 줘요.”

“네, 대표님.”

서연과 함께 회의실에서 나갔다.

유희진도 최수혁과 비슷한 일을 한다. 회사의 전반적인 현황을 파악하며 나와 서연의 개인적인 일도 돕는다.

두 사람이 심부름꾼으로 보이겠지만 회사 내 입지는 신입사원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나와 서연의 말이 최수혁과 유희진을 거치기 때문에. 회사나 내게 뭘 부탁할 이들도 두 사람에게 먼저 연락해야 하고.

서연과 함께 내 차를 타고 청담동으로 향했다.

한국 영화 차기작을 만들기 전까지는 아무렇게나 놀러다닐 생각이었다. 내 주식 계좌에 지난달 다시 100억가량이 배당금으로 들어왔다. 빌딩 같은 걸 사서 뭐하겠나. 좀 쓰고 살아야지. 주식 총액 6,000억. 그것도 돈으로 바꿔야 돈인 거고.

증권사에 가자 지점장이 부리나케 뛰어 내려왔다.

“아이고! 오시면 오신다고 말씀을 하시죠!”

“잘 지내셨죠?”

“잘 지내다마다요. 야, 김 대리! 감독님 내외 모셔라!”

“예!”

증권사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서연과 나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이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지점장은 갈 때마다 이런다. 내 말만 듣고 정말 안 했다가는 거래 증권사 바꿀 줄 알고.

직원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우리가 앉자마자 팥빙수와 아이스커피가 척척 놓인다.

지점장이 말했다.

“배당금이 입금되었을 겁니다. 저번처럼 은행으로 빼지 마시고 투자 좀 해 주세요. 요즘 좋은 상품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번엔 펀드 상품 몇 개 들게요.”

“저도요. 절반 정도만 넣어 주세요.”

지점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서연도 배당금이 수 억대다.

“1년짜리 안정적인 상품으로 하려고요. 내년 5월에 다시 와서 재가입할 테니까.”

“금액은 얼마나….”

“100억 전액 넣도록 하죠.”

지점장의 입이 쩍 벌어진다.

“제일 똑똑한 직원에게 맡겨 보겠습니다. 최 감독님 돈을 잃으면 내가 그 친구 잘라 버릴 거예요.”

“그러지 마세요. 손해 봐도 됩니다.”

“손해 보시면 안 되죠. 그만큼 신경을 쓸 겁니다.”

“그럼 지점장님께 일임할게요.”

“네, 감독님!”

증권 계좌에 있는 100억 모두 펀드 상품에 위탁했다.

내 은행 계좌에는 아직도 50억이 있었다. 스튜디오 공사비로 200억 남짓 쓴 뒤 남은 돈이다.

서연과 함께 청담동 명품거리를 걸었다.

나도 서연도 차나 장신구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옷에는 욕심이 좀 있었다. 평소에는 대충 입다가도 1년에 서너 번은 제대로 입을 날이 있다. 그날을 대비해 명품을 좀 사기로 했다.

명품 전문 백화점에 들어가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내 옷과 서연의 옷을 거리낌 없이 사들였다. 평소엔 남들처럼 생활하는 편이라 죄책감은 없었다. 중요한 날 입을 옷을 사는 것이기도 하고.

각자 부모님 옷과 동생 놈 선물 등도 꽤 샀다.

옷을 다 산 뒤에는 1천만 원에 이르는 가방을 사서 서연에게 선물했다. 서연이 부담된다고 했지만 그냥 안겨 주었다. 내가 평소에 쇼핑을 안 하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사 주겠나. 어쩌면 오늘 산 옷만 평생 입을지도 모르는데.

“모두 합쳐 1억 3천4백만 원입니다.”

“체크카드 되죠?”

“그럼요.”

백화점 직원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체크카드로 결재할 줄은 몰랐던 듯.

은행에서 특별히 풀어주어서 사실상 한도가 없다.

“결제되었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곧장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방금 결제한 게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는 전화다.

쇼핑백을 차에 싣고는 바로 떠났다.

“어디서 밥 먹을까.”

“나 순댓국 먹고 싶은데, 오빠는?”

“좋아.”

허름한 식당 근처에 차를 세워 두고 식당에 들어갔다.

아저씨들이 나와 서연을 빤히 본다. 나는 못 알아보고 서연은 어디서 봤는데 싶은 얼굴.

순댓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크. 감탄이 절로 나왔다.

미국에 있을 땐 먹기 힘든 음식이니.

“서연아. 내일은 어디 갈까?”

“오빠, 일본 갈래? 지금 락키 애들 일본에 있어.”

“잘됐네. 내일 아침에 가지 뭐.”

* * *

다음 날 오전 도쿄행 비행기를 탔다.

하네다 공항 게이트로 나갈 때였다.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욘짱! 손사마! 하고 외치고 있다. 한 200명 된다.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서연도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았다.

“한류 스타 팬들인가?”

“그런가 봐.”

“같은 비행기에 있었나? 누구지?”

서연이 손을 잡고 걸어갔다.

그때 갑자기 기자와 사람들이 우리에게 몰려왔다.

뭐야?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서연을 보았다.

그녀가 날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아! 서연이가 한류 스타지.”

“오빠! 너무 웃겨!”

서연이가 정말 배를 잡고 웃었다.

너무 웃어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내가 한류스타가 아니라서 이따금 깜박한다. 그 한류스타라는 여배우가 내게는 그냥 여자친구로 보일 때가 더 많으니.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 대고 팬들은 소리를 질러 댔다.

한데 내 팬도 있는 모양이다. 서연에게만 선물을 건네는 게 아니라, 네게도 선물을 주고 사진도 찍자고 청했다.

졸지에 나까지 한류스타가 되어 사진도 찍고 즉석 팬미팅도 했다. 일본팬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포옹도 했다. 팬들이 정말 좋아했다. 한류 스타들은 원래 이렇게 안 하는 건가?

서연은 그렇다 치고 나는 왜 팬이 있는 거지?

“고맙습니다. 여러분.”

“사랑해요, 손짱! 욘짱!”

손짱은 나고 욘짱은 서연이다. 신성의 성. 서연의 연.

발음이 안 되어서 그렇게 부르는 거였다.

팬 200여 명은 우리 두 사람의 팬인데, 남자도 제법 있었다. 특히 우리 커플 사진이 들어간 티셔츠를 입은 친구는 상당히 잘생겼다. 나와 포옹하면서 눈시울까지 붉어진 친구다.

내게 왜 팬이 생긴 것인지는 도무지 모르겠고.

공항에서 나가 택시에 올랐다.

창밖에 그 친구가 보였다.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리를 숙였다. 정말 인연이라면 또 보겠지.

락키 아이들이 있다는 도쿄 프린스 호텔에 도착했다.

그런데 호텔에도 팬들이 모여 있었다.

락키 애들 팬인가 싶었는데 서연과 내 팬도 있었다.

우리가 택시에서 내리자 호텔 매니저가 달려나왔다.

“저희 호텔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락키 멤버들에게 연락을 드릴까요? 룸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한국인 직원이다.

“우선 저희 방으로요.”

“스위트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약을 안 했는데요?”

“저희 호텔 회장님께서 두 분의 팬이십니다. 무료로 묵으실 수 있어요. 자, 이쪽으로.”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우리가 오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서연의 표정을 보았다.

뭔가 있었다.

킥킥대며 웃는 걸 보니.

* * *

정말 호텔 스위트룸으로 안내를 받았다.

호텔의 가장 비싼 방은 아닌 듯한데 그래도 하루 숙박 비용이 수백만 원은 될 듯했다.

룸에 들어오니 또 뭔가 강렬한 호감이 전해진다.

이건 또 무슨 이유일까.

한국인 매니저가 말했다.

“며칠 푹 쉬시다 귀국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무료일 수는 없을 테고. 이유가 있죠?”

매니저가 주저하다가 말했다.

“혹, 회장님과 식사 한번 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게 답니까?”

“네. 회장님께서 두 분을 워낙 좋아하셔서요.”

“알겠습니다. 오늘 혹은 내일 약속을 잡아 주세요.”

“고맙습니다.”

매니저가 깊이 허리를 숙이곤 나갔다.

회장님이 우리 팬이라서 이러는 건 아닐 텐데.

호감이 전달되는 걸 봐선 뭔가 있다.

서연과 함께 창가에 섰다.

멀리 도쿄 타워와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떤 일?”

“호텔 측이 우리가 온 건 어떻게 안 거야? 팬들도 그렇고.”

서연이 날 보더니 웃었다.

“사실은 어제 SNS에 글을 살짝 올렸어. 오빠가 사 준 백 자랑하려고. 일본에 간다고도 했고. 일본 팬클럽이 그걸 보고 마중 나온 거야.”

“SNS 안 하잖아?”

“회사에서 만들어 줬어. 오빠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워낙 많았거든. 회사에 메일이 너무 많이 와서 만든 거야. 희진이나 내가 오빠 근황을 이따금 올렸어.”

“나는 왜 팬이 생긴 건데?”

서연이 즉답을 안 하고 또 묘한 표정을 짓는다.

기분 좋은 얼굴이긴 하다.

“전 세계? 아니면 일본?”

말문이 막힌다. 전 세계는 또 뭐야.

“일본.”

“실은 일본에 발매한 멜로디 DVD와 사운드트랙 음반이 대박 났어. 그 DVD 안에 멜로디 메이킹 필름하고 촬영 스틸 사진도 들어 있었거든.”

전혀 생각을 못했다. 듣지도 못했고.

“영화는 200만 들고 끝났는데?”

“오빠가 영화 찍을 때 DVD 발매된 건데, 100만 장 정도 팔리고 영화도 다시 개봉했어. 일본에 멜로디 열풍이 불어 가지고 난리도 아니었어.”

“별일이 다 있네.”

“응. 회사 직원들도 얼떨떨했대.”

어째 일본 바이어들이 멜로디를 사겠다고 그 난리를 치더라니. 첫 개봉 때는 한국 영화를 즐겨 보는 일본인만 보고 개봉 끝났는데 뒤늦게 입소문이 나서 DVD 소장 열풍이 불었던 모양이다. DVD 100만 장이면 엄청난 수치다.

하긴 ‘멜로디’가 일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하다.

재즈도 그렇고, 영화의 톤도 그렇고.

예전에 흥행했던 일본영화 쉘위댄스도 비슷한 느낌이다.

서연이 다시 말했다.

“음악과 영화가 딱 일본인이 좋아하는 타입이었나 봐. 오빠랑 내가 연인 사이라는 것도 일본에선 되게 이슈가 컸어. 일본 기자들이 회사에 찾아와서 취재하고, 일본 방송이 오빠 영화에 대한 뉴스를 내보내고 그랬대.”

“미국엔 안 왔는데?”

“구 대표님이 촬영에 방해된다고 절대 알려 주지 말라고 하셨거든.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영화 제작하고 연출한다고 하니까, 일본 사람들이 충격받았다더라. 게다가 보통은 영화감독이라면 아저씨가 생각나는데 오빤…….”

서연이 배시시 웃었다.

젊고 잘생긴 할리우드 천재 미혼감독이다 이건가.

자화자찬에 담긴 이 미친 설득력은 뭐지?

아무튼 일본사회에서 희한한 일이 일어난 셈이다.

음악 영화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일부러 여길 오자고 한 거야?”

“응. 이 호텔 회장님이 꼭 좀 모셔 오라고 당부를 하셔서. 회장님이 제니스 팬이기도 하거든.”

“호텔 회장님을 알아?”

“한 번 만났어. 밥 사 준다고 해서.”

그러니까, 서연이는 일본에 내가 오면 어떻게 된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짐작도 못 하고 있었으니 일종의 서프라이즈 이벤트였다.

룸에 간단히 챙겨 온 짐을 풀었다.

영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일본에 오셨어요?

“응.”

-지금 신주쿠에 있어요. 신오오쿠보에서 멤버들이 밥 먹고 있습니다. 여기서 팬 미팅 행사를 했거든요.

“그쪽으로 간다.”

-넵!

서연과 함께 호텔 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팬들이 몰려왔다.

서연은 바로 나가려고 했으나 난 이런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팬들과 사진을 찍고 사인도 해 주었다. 일부 팬들은 포장지도 뜯지 않은 DVD를 가져와서 내밀었다. 공항에서도 DVD에 사인을 했었는데, 왜 멜로디 DVD를 가져왔나 했다.

* * *

택시에서 내려 주변을 보았다.

한국 식당과 한류 스타 관련 상점이 상당히 많았다.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자 영진이가 달려왔다.

“오실 때 별문제 없었어요?”

“무슨 문제? 없었는데.”

“일본에서 두 분 인기가 엄청나서요. 팬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 같은데.”

“엄청나긴 뭘 엄청나. 내가 무슨 연예인이야?”

“저기 봐요.”

영진이가 내 뒤에 있는 한 상점을 가리켰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 DVD를 파는 곳이었는데.

이건 뭐야?

“우리 사진이 왜 여기 걸려 있어?”

“DVD에 들어 있는 사진이잖아요.”

영화 멜로디 마지막 촬영 때 나와 서연이 서로 마주 보며 환하게 웃는 사진이다. 영화를 찍을 때 홍보팀이 현장 스틸 사진을 찍기는 했다. 메이킹 필름도 DVD용으로 찍고.

홍보팀이 서연과 함께 있는 내 사진도 찍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어웨이커’ 촬영 초기에 지성이에게서 연락을 받은 기억이 난다. DVD에 촬영 스틸을 넣어도 되느냐고 물어서 알아서 하라고 했다. 난 주연배우들 사진만 들어가는 줄 알았지.

그런데 사진이 상당히 잘 나오긴 했다.

촬영장 주변은 포커스 아웃이고 나와 서연만 꽤 아름답게 부각되어 있다. 색상 보정까지 해서 봄날처럼 화사하다. 연출을 해도 이런 그림은 안 나올 것 같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이 이 커플의 남자가 멜로디 감독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는 거 아닌가. 내가 봐도 환상의 커플 같기는 하네.

“꺄악!”

갑자기 들린 소리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일본인인지, 한국 유학생인지 모를 여자 두 명이 나와 서연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거 영 적응이 안 되네.

“가요. 멤버들 기다리고 있어요.”

안 그래도 우릴 알아본 사람들이 점점 모이고 있었다.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한국 식당에 락키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가득했다.

날 보더니 일제히 일어난다.

“오셨어요? 대표님.”

“언니!”

멤버들이 벌떡 일어나 나와 서연에게 달려왔다.

남자 멤버들은 그저 인사만 하고.

“대낮부터 삼겹살 파티야? 너희 소주도 먹어?”

“멤버 오빠들이 마시는 거예요.”

멤버들 자리에 합석했다.

대낮부터 술에다 삼겹살에 파전에 아주 난장판이다.

“미니 콘서트가 언제죠?”

남자 멤버가 대답했다.

“3일 후 저녁에 있어요. 오늘은 예능에 출연하고요.”

영진이가 덧붙였다.

“일본 프로모션하고, 곧 월드 투어 다닐 거예요.”

“벌써 그 정도야?”

“대표님! 우리한테 신경 좀 써 주세요.”

락키 애들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벼락스타가 된 것도 모르는 판에 락키 애들 인기를 어떻게 알겠냐고. 유튜브 안 본 지도 오래됐는데.

식사한 뒤 식당을 나섰다.

식당 앞에 팬들이 가득했다. 차마 식당에 들어오진 못하고 기다리던 이들이다. 그런데 락키보다 나와 서연의 팬이 더 많았다. 남자들은 죄다 락키 팬이고.

“꺄아! 서연 씨!”

“신성!”

“오빠아!”

팬들이 소리를 질러 댄다.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소리만 지르는 일본팬들이다. 일본 사람들 소리 안 지른다고 들었는데.

남자 스태프들이 보디가드 노릇을 하는 가운데 팬 몇 명이 멜로디 DVD를 내밀었다. 내 선물은 아닐 테니, DVD에다 사인을 해 주었다.

몇 명에게 사인해 준 뒤 곧장 버스로 이동했다.

버스에 오르자 멤버 하나가 혀를 내둘렀다.

“대표님 인기 장난 아니다.”

“감독님. 일본 인기 즐기려고 오신 거죠?”

“난 전혀 몰랐어. 서연이가 가자고 해서 온 거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기자들이 회사에 막 찾아오고 그랬는데?”

“야, 대표님은 미국에서 영화 찍었잖아.”

“그럼 아무도 말을 안 해 준 거야?”

영진이가 나섰다.

“최지성 팀장이 비밀로 하랬거든. DVD에 넣은 사진 때문에 얼굴 팔린 거 알면 자기 죽일 거라면서.”

“하하하하.”

“영진아. 일본에서 내 인기. 무슨 현상으로 봐야 하냐?”

“몰라요. 일본인이 특이한 거지.”

일행이 다시 웃었다.

락키 남자 멤버가 말했다.

“제 생각에는 감독님과 서연 씨가 만나는 게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세기의 커플이라고 할까요. 로맨틱한 연애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까요. 두 분 사진 자체가 인기가 많은 것 같더군요.”

락키 리더인 소정이가 말했다.

“자자, 여자 입장에서 정리를 할게요. 대표님 외모가 남자답고 근사해서 그런 거예요. 옷도 잘 입으시죠, 손가락도 기시죠. 서연 언니한텐 미안하지만, 샤프한 남자 좋아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영화감독 중에 그런 남자가 몇이나 있겠어요. 게다가 무려 할리우드 감독. 자, 정리됐죠?”

서연과 락키 멤버들이 웃었다.

남자 멤버들은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싶은 표정.

에휴, 모르겠다.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고 살지 뭐.

호텔에 돌아왔다.

또 팬들이 아우성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할 때 한국인 매니저가 왔다.

“혹시… 오늘 저녁 괜찮으세요?”

서연을 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 7시. 호텔 라운지에 자리를 만들어 놓겠습니다. 부담 없이 식사하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나와 서연은 룸으로 갔다.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서연은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웃으며 물었다.

“적응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됐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딱 내 경우잖아.”

“갑자기 인기가 많아진 건 아니야. 처음엔 영화 멜로디가 떴고, 그다음은 음악이 대박 났어. 그러다가 방송에서 오빠랑 나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면서 오빠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거지.”

“내가 그렇게 매력 있었나?”

서연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일본은 유난히 인기가 많은 거고, 중국이나 동남아에서도 오빠 인기가 꽤 많아. 오빠가 미국에서 영화 찍는 동안 CNN 뉴스가 여러 번 나왔거든. 그 마이클 플린 기자.”

“봐라, 내가 말했지 않았느냐. 그랬지?”

“봤어?”

“아니. 당연히 그런 말을 할 테니까.”

“오빠에게 관심이 크니까 그런 거지.”

“그래. 그렇다고 해 두자.”

영화감독이 인기가 있으면 흥행에 도움은 되겠지.

서연이 손을 잡아끌어 내 옆에 눕혔다.

그렇게 나란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어웨이커 개봉 전후로 작은 영화 하나 찍을 거야. 이 작품으로 너랑 깐느 가 보고 싶어.”

“오빠 영화로는 처음이자 마지막 출연이겠지?”

그런가.

수상에 실패하면 서연이랑 또 찍어야 한다.

대중은 자기 여자친구를 자꾸 자기 영화에 꽂는다고 뭐라고 할 게 분명하다. 둘이서 계속 도전하는 건 모양새가 안 좋다. 상 노리고 찍는다고 욕먹을 거 틀림없고.

“수상이 어려울 것 같으면 다른 배우랑 찍을게.”

“그렇게 해. 나도 오빠랑 만든 첫 작품으로 상 받는 게 가장 자랑스러울 것 같아. 나이도 좀 먹어야 연기도 무르익을 것 같고.”

차기 한국 영화 주인공을 서연으로 낙점했었다.

한데 서연이 생각을 들어보니 정말 확신이 드는 작품일 때 서연이랑 찍어야 할 것 같다. 이번 영화가 될지. 한 10년 후에나 그런 작품이 찾아올지.

* * *

서연과 함께 정장을 차려입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한국인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창가 자리로 갔다.

웬 할머니가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마츠다 미치코 회장님이십니다.”

회장님이 무척 고상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와 서연이도 맞절하듯 허리를 굽혔다.

할머니 회장님이 환하게 웃었다.

“반가스므니다. 미치코입니다.”

“저희도 반갑습니다. 회장님.”

한류 팬이 맞는 것 같다.

열심히 한국말을 배우신 걸 보면.

회장님을 따라 연신 허리를 숙이다가 자리에 앉았다.

곧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영화 멜로디에 나오는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식사하면서 회장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장님이 한국말이 서툴렀기에 한국인 매니저가 통역을 했다. 팬으로서 보자는 이유 말고 다른 목적이 있을 것 같았는데, 내 예측이 맞았다. 사업가는 헛돈 쓰는 법이 없으니.

“회장님께서는 일본 극장 체인 업계 3위인 유나이티드 시네마 회장이시기도 합니다. 30년 전부터 극장 사업을 하셨고요. 혹, 중국에서 극장 체인 사업을 함께하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중국에서요?”

“중국 기업이 메인 투자 및 건설을 하고, 저희와 로큐는 지분 투자로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중국은 외국기업이 자국 기업과 동반관계를 맺지 않으면 사업하기 어려운 곳이라서요. 대신 플래닛 케이가 중국기업 합작 법인으로 중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을 겁니다.”

호텔에 왔을 때 전해진 호감의 정체인가.

내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중국 기업이 나중에 극장 체인을 장악하고, 로큐와 회장님 회사는 철수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코어가 전달하는 느낌은 그게 아니다.

중국 회사는 플래닛 케이의 플랫폼과 할리우드 감독이라는 내 명성을 이용하려고 한다. 거기까지는 내 상식적인 판단인데, 코어는 우리도 이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플래닛 케이가 중국에 진출하면 회원 수가 폭발할 것은 확실하다. 한국 드라마를 바로 중국에 상영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는 거다. 수익배분은 중국 측과 조율하면 되는 거고.

생각보다 리스크도 적다.

중국 기업이 막대한 자본으로 로큐를 인수하려 하면 주주총회에서 반대할 게 분명하다. 회사가 인수당하면 내가 직원들 데리고 나가서 새 회사 창립할 테니까. 중국 기업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짓은 안 한다. 거대 헤지 펀드가 로큐를 건드리지 않는 이유가 뭐겠나.

중국의 영상 플랫폼 1위 업체가 경쟁자 제거 차원에서 플래닛 케이 중국 법인을 인수할 가능성은 있다. 중국 합작사도 보통 기업은 아닐 테니 막아줄 터다. 인수당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중국 시장은 염두에 없었으니까. 거액 받고 철수하지 뭐.

따라서 우린 중국 극장 체인 사업에 지분 투자하고 수익을 챙기고, 플래닛 케이 중국판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이것 참 절묘하다.

마치 누군가가 설계한 듯한.

“혹시 회장님이 먼저 제안한 거 아닙니까?”

내 말을 들은 회장님이 빙그레 웃었다.

그랬군.

회장님이 내 이름을 빌려 중국에 진출하려고 시작한 거였다. 나와 서연이 팬이라는 게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수익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세요?”

회장님이 뭐라 말했다.

매니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투자금 대비 극장 영업이익을 연 1,000억으로 예상합니다. 플래닛 케이의 영업이익은 그 열 배쯤 될 거랍니다. 로큐는 이름만 걸치는 투자로도 충분하시답니다.”

영업이익 1조.

중국에 진출하면 로큐가 대기업이 된다는 소리.

중국 시장에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직접 상영하는 루트가 생긴 것이다. 내가 제작한 할리우드 영화 직배도 가능할 테고.

이게 우리가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가치라는 뜻.

이 할머니가 동쪽에서 나타난 귀인이셨네.

물론 본인들 중국 진출에 로큐를 앞세운 것이겠지만.

중국 진출과 일본 진출이 동시에 이뤄지는 셈이다.

회장님 극장에 내 영화를 개봉할 수도 있으니.

“건배하실까요? 회장님.”

회장님이 빙그레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 잔에 나와 서연의 잔을 부딪쳤다.

코어가 전달하는 호감이니 믿어 보자.

중국 시장 등에 업고 그 누구도 무시 못하는 회사로 키워 보는 거다. 틀어지면 철수하면 되는 거고.

로큐가 전액 투자하는 할리우드 영화.

더는 꿈이 아니다.

* * *

다음 날.

회사에서 바로 실무진이 날아왔다.

우리와 합작할 중국 회사의 임원도 연락을 받자마자 일본으로 왔다. 중국 합작사는 영화 사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대형 건설사였다. 축구 구단을 보유한 회사로 중국에서 업계 10위 안에 든다고 했다.

중국 건설사가 영화 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는데, 극장 경영 노하우가 없어서 한국 회사와 일본 회사에 합작을 타진했다. 그때 일본의 유나이티드 시네마가 로큐를 언급하면서 우리와 손을 잡기로 한 거였다. 각자가 도움되는 구조였기에.

하여 극장 건설은 중국. 시스템 구축은 일본.

극장 체인 이미지와 한국 콘텐츠 및 인터넷 스트리밍은 한국이 맡게 되었다.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에서도 내 인지도가 상당히 컸는데 이름 덕을 톡톡히 보았다.

할리우드의 신성(新星)으로 불리고 있었으니.

그 이름을 홍보 동력으로 시작해보겠다는 거다.

삼국 실무진이 사전 조율을 하는 동안.

나와 서연은 한가하게 도쿄 이곳저곳을 구경 다녔다.

가는 곳마다 우릴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쓰고 다녔다. 한국보다 일본에서 돌아다니는 게 더 불편할 줄은 정말 몰랐다.

카페를 가면 멜로디의 사운드트랙이 나오고, 멜로디의 스틸 컷 사진이 벽에 붙어 있다. 심지어 나와 서연이 찍은 그 사진이 붙어 있을 때도 있었다. 영화 포스터처럼 인테리어 팬시 상품이 된 것이다.

다니면 다닐수록 멜로디의 인기가 신드롬 수준이었다는 걸 느꼈다. 일본인이 우리를 보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흡사 영국 왕세자와 왕세자비를 보는 듯한.

내가 체감하는 느낌이 딱 그거였다.

어쨌든 이틀 내내 식도락 순회였다.

음식이 나오면 1/3쯤 먹고 나가는 식이었다.

라멘은 종류대로 다 먹어 보고 가츠동, 규동 등 덮밥도 섭렵하고 스시와 소바도 먹었다. 그런 식으로 하루에 10끼를 먹었을 지경이다.

그렇게 이틀을 싸돌아다니고 호텔에 갔을 때.

기본적인 조율이 끝나 있었다.

해외사업본부 본부장이 말했다.

“저희가 중국과 일본 측의 사업구조와 자본금 등을 확인한 후 공식 조율에 들어갈 겁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구두 합의를 했습니다.”

“극장 체인 지분은 어느 정도로 보세요?”

“우리가 1,500억가량을 투자하기로 했는데 그래도 5% 수준에 불과합니다. 중국 측은 본인들 수익 때문에 10% 초과 투자는 달가워하지 않더군요. 딱 적절한 수준입니다.”

“일본 측은요?”

“중국과 일본이 아마 7대3 비율일 겁니다.”

“중국이 점점 지분율을 높일 거예요.”

“그럴 겁니다. 일본 측은 현지 정착에 성공한 뒤 독자적으로 극장 사업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합작을 하는 것은 일본색을 빼기 위함이죠. 일본이라고 하면 중국인들이 무조건 고개를 젓는 경향이 있어서요.”

또 하나.

“플래닛 케이 중국 법인은요?”

“‘플래닛 씨’로 이름 짓고 한국과 중국 콘텐츠를 동시에 출시하기로 했습니다. 플래닛 케이와 달리 우리 회사의 저예산 영화들은 아마 안 들어갈 겁니다. 그 외에 중국 당국 검열에 걸릴 만한 사상이나 공산당 이념에 걸리는 콘텐츠는 제외될 테고요.”

“중국이 유튜브나 아마존 같은 사이트들 차단하는데, 나중에 문제 되지 않을까요?”

“그게 유해정보사이트를 차단한다는 명목이지만, 사실은 자국 기업보호와 성장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이미 유튜브에 필적하는 동영상 사이트가 있어요. 플래닛 씨는 중국 기업이 한국 합작사의 콘텐츠를 제공 받는 방식이라 문제 될 게 없습니다. 법적으로도 중국 법인으로 보고요.”

본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국인들과는 정말 협상하기 힘드네요. 중국 시장이 넓은 게 본인들 능력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나 생색을 내면서 자기들 이익을 찾으려고 하는지.”

“요구 조건이 억지스러우면 접으면 돼요.”

“예. 대표님 스타일이자, 우리 회사 스타일이죠. 플랫폼 기반과 콘텐츠가 우리에게 있는데도 처음엔 수익을 80%나 가져가려고 하더라고요. 우리 아니면 중국에서 플랫폼 사업을 할 수 있겠느냐 이거죠. 그래서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가 버렸습니다.”

“하하하하!”

진심으로 웃음이 터졌다.

본부장도 웃다가 말을 이었다.

“호텔 룸에서 기다렸어요. 내일 락키 공연 끝내고 함께 한국으로 간다고 했죠. 그랬더니 중국 측도 버티더군요. 전에 대표님이 우리 로큐는 중국 시장은 안중에 없다고 한 말씀이 기억나서 그거 믿고 기다렸어요.”

“맞습니다. 저도 돈 때문에 굴욕을 당할 생각 없어요.”

“오늘 오후 4시까지도 연락이 없어서 귀국하려고 했는데 룸으로 찾아왔더군요. 원하는 수익 비율이 얼마냐면서요.”

“절반이죠?”

“네. 50% 이하면 없던 일로 하자고 했어요. 그 이하를 요구하면 정말 접으려고 했습니다.”

“잘하셨어요. 본부장님이 양보하셨더라도 제가 50%가 안 되었다면 접었을 겁니다.”

“그럼 저희 먼저 공연장으로 가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실무진이 캐리어를 끌고 호텔을 나섰다.

나와 서연도 짐을 챙겼다. 그러곤 다시 미치코 회장을 다시 만난 뒤 사업 성공을 빌며 재회를 기약했다.

* * *

락키 미니콘서트는 도쿄의 토보소 피트라는 6천 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열렸다. 음악 장르가 메탈 펑크인 만큼 남자 관객이 다수인 가운데 여성 관객도 상당히 많았다. SNS를 통해 특별 게스트가 있다고 알린 후 찾아온 여성들이다.

서연과 내가 차에서 내리자 줄을 서던 여성 관객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거리에서는 자제하던 팬들이 공연장 입구에선 들뜬 마음을 마음껏 분출하는 모습이다.

얼마 뒤 공연이 시작되었다.

남자 멤버들의 연주가 점점 고조되더니 전대물을 연상케 하는 의상을 입은 락키 애들이 뛰어나왔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추며 절정으로 내달렸다.

남자 관객들이야 열광하는 건 당연했고, 여성 관객도 충분히 즐길 수가 있었다. 장르와 상관없이 라이브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으니까.

나와 서연도 추하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들썩이며 공연을 즐겼다. 내가 미국에 있는 사이 락키가 정규 앨범을 발표해서 처음 듣는 곡이 대부분이었다. 가사도 일본어였고.

4번째 곡이 끝났을 때였다.

마이크를 잡은 리더 소정이가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능숙한 일본어였다.

뭐라 뭐라 말을 하는데 관객들이 일제히 날 보았다. 곳곳에서 비명과 환호가 터져 나온다. 어리둥절한 내 반응에 웃음도 터지고. 서연이는 환하게 웃고 있을 뿐.

그러다 요란한 박수가 나왔다.

“오빠 올라가.”

“어딜? 무대에?”

“응. 소정이가 우릴 소개했어.”

“아 놔!”

역정을 내면서 얼굴은 웃었다. 그런 내가 서연은 웃기기만 하고. 이벤트가 있으면 있다고 왜 말을 안 해 주는 거야, 대체.

못된 로큐 직원 놈들!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곤 서연의 손을 잡은 채 나란히 인사를 했다. 더 큰 박수가 쏟아졌다. 무슨 결혼식 축하연에 온 것 같다.

우릴 무대에 올린 의도는 좋다.

여기 온 관객들이 우릴 보러 오기도 했으니까.

“안녕하세요. 최신성과 안서연입니다.”

소정이가 바로 통역했다.

“우리 락키를 사랑해 주시고, 영화 멜로디를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일본에 자주 오겠습니다. 이왕이면 올 때마다 광고를 찍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광고주를 협박해 주세요.”

소정이가 통역하자 웃음바다가 됐다.

“농담입니다. 로큐 소속 아티스트가 일본에 오면 저희도 휴가 삼아 종종 오겠습니다. 여러분이 즐겨 드시는 음식들이 하나같이 맛이 좋아서 이번에 반했습니다.”

관객들이 내 립서비스에 환호했다.

어떤 관객이 외쳤다.

소정이가 바로 통역했다.

“멜로디 속편을 찍어 달라고 하세요.”

“아, 속편이요. 네. 이왕이면 일본에서 찍는 것도 좋겠네요. 진지하게 검토해 보겠습니다.”

다시 관객들이 대환호를 보냈다.

“아무쪼록 공연을 재미있게 즐기시고 행복한 일요일 밤을 보내셨으면 합니다.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영화 멜로디의 사운드 트랙과 삽입곡을 연주한 재즈 그룹.”

소정이가 통역을 끝내기도 전에 비명이 터진다.

“반갑게 맞아 주십시오! 모던 힐입니다!”

“와아아아!”

모던 힐 멤버들이 환하게 웃으며 무대로 나왔다.

그들과 악수하고 포옹한 뒤 나와 서연은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본인 소개도 없이 모던 힐이 바로 멜로디 삽입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곡이었나 보다.

남자고 여자고 간에 다들 음악을 즐겼다.

이번에 실무진이 올 때 모던 힐도 함께 왔다.

이젠 우리 회사 식구들이다.

신 나는 재즈 선율이 몇 곡 이어지다가 다시 락키의 공연이 이어졌고, 마지막엔 두 밴드의 합동 공연도 했다. 같은 회사 소속이라 합주도 몇 번 해 봤던 듯.

그렇게 일본 공연은 성황리에 끝을 맺었다.

* * *

일본에서 돌아온 지 두 달이 지났다.

그 두 달 동안 편집과 CG 작업 확인차 미국에 두 번 다녀왔다. 이후 서연과 전국 식도락 일주를 했다.

전주에 먼저 갔다가 군산과 광주를 거쳐 목포에서 며칠 묵었다. 전주 음식도 기가 막혔지만 목포 음식은 정말 헛웃음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그 뒤 여수를 거쳐 통영으로 갔는데, 통영의 해산물도 정말 좋았다.

이어 부산에서 3일간 이것저것 구경한 뒤 경주에 들러 특산품인 황남빵을 선물용으로 잔뜩 샀다. 포항에선 과메기를 먹어 보고 영덕에선 대게도 배불리 먹어 봤다. 속초로 간 뒤 물회를 먹고 춘천으로 이동한 후엔 원조 닭갈비와 막국수도 먹었다.

그렇게 해서 서울에 왔는데.

나도 서연도 몸이 꽤 불어났다.

그래서 바로 운동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서연이 운동 좀 하라고 잔소리를 했던 터라. 이제 내 몸이 나 혼자만의 몸이 아닌 거지 뭐.

이후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아침에 서연과 함께 피트니스 클럽에서 한두 시간 운동을 한 다음 서연은 숙소로 가고 난 회사에 출근했다. 난 프로듀서 역할만 하기에 보고를 받는 것 외에는 직접 관여하는 건 없었다.

퇴근을 하면 술을 한잔하거나, 플래닛 케이에만 있는 VR 영화를 보았다. 입체영화와는 다른 생동감과 현장감이 느껴져서 극장에서 볼 때만큼이나 재미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일상을 보내며 영화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최수혁이 이 소재는 어떠냐며 내게 찾아왔다.

시나리오 세 개였다.

하나씩 천천히 읽어 보았다.

첫 번째 작품.

‘샌드위치.’

혼자 사는 평범한 직장 여성이 주인공이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겪는 일.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먹고. 혼자 영화보고.

갈등도 드라마틱한 구조도, 반전도 없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일과 우리네 사는 인생을 그냥 그대로 보여 줄 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할 뿐인데 가슴이 먹먹했다. 우리 인생의 현실이 그냥 영화였던 것이다.

특히 여주인공이 샌드위치를 사 들고 한강에서 바람을 쐬다가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을 쏟는 장면. 5분 동안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눈시울 뜨거워졌다. 여주인공은 영화 내내 아무 표정 없이 사람을 만나고, 하는 일을 하고 그랬을 뿐이다. 그런데도 뭔가가 가슴 깊이 와 닿았다.

현대인의 지독한 고독과 경쟁. 그리고 소외.

한 여성의 무덤덤한 일상생활에서 그게 느껴졌다.

이건 공감이었다.

내가 공감했기에 눈물이 나왔던 거다.

또한 치유의 영화이기도 하고.

여주인공이 먹던 편의점 샌드위치.

실컷 울고 난 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남은 샌드위치를 먹는 여주인공을 볼 때도 마음이 짠했다.

예술영화다. 영화의 한 기능을 제대로 발휘했다.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영혼의 치유가 된다.

그래, 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그러니 열심히 살자. 이런 느낌이 들었으니.

두 번째 작품.

‘가을날의 색깔’

전 남편을 죽이고 7년 동안 복역하고 출소한 여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떠돌이 화가.

사랑을 할 수 없는 처지인 두 사람의 정통 멜로다.

비포 선 라이즈처럼 단 하루에 벌어지는 이야기.

뉴욕이 배경이다.

두 사람 다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여자는 뉴저지에 사는 딸을 찾아가는 길이다. 버스 안에서 부랑자나 다름없는 남자를 만난다. 여자는 전남편의 부모가 빼앗아 간 딸을 찾지 못하면 삶을 놓아 버릴 각오를 했다.

남자도 어떤 깊은 상처가 있는데 영화 내내 그게 뭔지 모른다. 시답지 않은 농담이나 하고 있지만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고행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만 여자가 느낄 뿐.

전 시부모의 미국 주소를 잘 모르는 여자를 위해 남자가 집을 찾아 주려고 나서면서 두 사람은 동행한다.

그 길지 않은 여정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이루어지진 않는다.

그러다 여자는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된다.

7년 전 총기 난사로 사람들 죽였던 사람의 형이었다.

남자는 그림을 그려서 번 돈을 동생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유가족에게 보내고 있었다.

헤어질 때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살아갈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면.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로 오라고.

죄를 지은 사람의 죽음과.

남은 자의 용서를 그렸다.

시나리오 수준이 매우 높아서 영상도 정말 멋있고 품위 있게 나올 듯싶었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영화 뉴욕의 가을이 생각났다. 어디서 찍으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도.

세 번째 작품.

‘사랑의 불시착.’

조폭이 되고 싶은 양아치와 봉제 공장 시다의 순애보다.

여자는 가리봉동에서 미싱사 보조로 일한다. 공순이인 그녀는 매달 월급을 받으면 동료 시다들과 함께 영등포 경양식 집에서 돈까스를 사 먹는 게 낙이다.

남자는 학사주점 웨이터다. 큰 룸살롱 웨이터가 되고, 형님들에게 잘 보여 조직에 들어가는 게 꿈이다. 그러다가 자리가 하나 나서 영등포 최고의 룸살롱에서 일하게 된다. 조폭의 민낯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른 채.

그런 두 사람이 영등포 디스코텍 123에서 만난다.

디스코텍에선 프랑스 댄스 듀오의 ‘누 데 포리’라는 노래가 쾅쾅쾅 울리고.

“이 노래 죽이죠?”

“무슨 노랜데요?”

“에투 숑트 숑트 숑트 서브 팡키 투 플레이. 이츠 다프 다프 다 프시타 파소내미. 서리 무끼 투퀠 무지시코 무드라미 엘레용 투왈레 투비 요나 누 데 포리… 몰라요?”

“몰라요. 그래도 좋아요!”

나도 뭔 노랜지 모르겠다.

이어 콘도 마사히코의 긴기라기니도 나오고, 부르스 타임 때는 나가부치 츠요시의 홀드 유어 라스트 찬스가 나온다.

디스코텍에서 부르스 타임 같은 게 있었나?

어쨌든 그 시대에 유행했던 것들 줄줄이 등장한다.

때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기 한 해 전이었다. 조폭 똘마니가 된 남자는 폭력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고, 남자의 사랑을 믿었던 여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남자를 오해하여 헤어지고 만다.

그로부터 13년 후.

2002년 월드컵 응원전이 있던 서울 시청 광장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친다.

중장년층의 추억을 소재로 잡은 영화였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영화의 톤이 대체로 따뜻하고 정감이 있었다. 두 사람의 풋풋한 첫사랑의 맛도 좋았고. 특히 조폭물과 멜로가 정신없던 혼란의 시대와 묘하게 잘 어울렸다.

영화 천장지구와 첨밀밀, 건축학 개론이 섞였다고 할까.

세 영화의 장점만 녹인 시나리오가 꽤 재미있었다.

20대도, 그들의 부모 세대도 즐길 수 있는 영화.

한국적인 소재라 해외 영화제 출품은 어려운 영화다.

반드시 칸을 목표로 영화를 찍어야 하는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사실 영화제 수상을 목표로 영화를 만든다는 게 좀 그랬다.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에 확실히 하기로 했다.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되, 출품 요청이 오면 출품하는 것으로.

꿈은 오래 묵을수록 값진 것일 테니까.

최수혁이 새 커피를 가져왔을 때 결정했다.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드세요?”

“다 마음에 듭니다. 사랑의 불시착을 할까 싶어요.”

수혁 씨가 환하게 웃는다.

“왜요?”

“그거 제가 쓴 거예요.”

“아, 그래요?”

“예전에 써둔 건데 혹시나 해서요.”

“89년 상황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실은 저희 엄마 이야기에요. 실제로 봉제공장에서 일했고, 영등포에 놀러다녔다는 것만 맞아요.”

경험 많은 작가가 쓴 것으로 알았는데 놀랍다.

코어가 최수혁을 제대로 알아본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눈과 감각이 보통이 아니다.

“이 시나리오 조금 더 굴려 보죠. 현재 영화의 톤은 그대로 두고 구조도 좀 드라마틱하게 바꿔야겠어요. 1989년의 디테일도 좀 강화해야 합니다. 사소한 소품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해요. 중장년층 관객이 감탄할 수 있도록.”

“예. 제대로 취재해 볼게요.”

“그래요.”

최수혁이 웃으며 인사하곤 나갔다.

멋진 가족 영화 하나가 나올 것 같다.

다음 날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89년 당시 20살이었고 서울에 살았던 성 부사장님이 정말 많이 알고 있었다. 성 부사장님 집이 영등포에서 가까운 신길동이라 영등포 나이트에 자주 갔다고 한다. 2,000원짜리 콜라권을 사서 입장했다나 어쨌다나.

롤라장에 대해서도 술술 이야기가 풀려 나왔다.

신림동 오아시스 롤라장. 화양리 국제 롤라장.

당시 연흥극장에서 상영했던 영화도 줄줄이 꿰고 계시고.

구 대표님도 함께 있었는데 두 분이 침을 튀어 가며 당시 일을 끝없이 말해주었다. 듣는 우리도 재밌는데 당시를 살았던 분들의 추억은 오죽할까.

그렇게 취재한 뒤 수혁 씨와 함께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보름 뒤에 완고가 나왔고 회사에서 바로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했다. 옛날 배경이라 프리에서 신경을 좀 써야 했다.

그 사이 나는 미국을 한 번 더 다녀왔다.

CG와 색 보정 마지막 점검이었다.

석 달에 걸쳐 프리를 거진 끝냈을 무렵.

새해가 찾아왔다.

‘어웨이커’의 최종본이 나왔다는 소식과 함께.

* * *

혼자 미국에 건너갔다.

주요 점검이 있을 때마다 미국을 다녀왔고, 미국에 남은 수호를 통해서도 후반 작업 상황은 잘 알고 있었다. 철저하게 사고나 실수에 대비한다는 엠마의 말을 믿고 한국에 갔던 터다.

실제로 작업 진행을 보니 그랬다.

후반작업도 주먹구구식은 일절 없었다. 어떤 편집본이든 반드시 백업을 하고, 세세하게 편집 시트에 기록했다. 엠마가 철저하게 관리하기도 했고. 이게 할리우드 시스템이다.

LA에 도착하자마자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로 향했다.

공장처럼 꾸며진 작업실에서 최종 사운드 점검을 하고 있었다. 조감독 에드워드가 내가 결정한 시트대로 삽입 음악, 사운드, 후시 녹음 등을 진행했다. 지난번 왔을 때는 CG와 톤 보정 작업을 점검했었고.

스튜디오 내 시사실에 들어갔다.

에드워드가 인사하며 말했다.

“영화 걱정도 안 되세요? 개봉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선택은 이미 다 했고, 실무는 전문가들이 하는데 내가 지켜본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건 그렇네요. 콘티와 시트대로 사운드 소스를 썼습니다. 그런데 좀 밋밋한 느낌이 있네요.”

“일단 한번 봅시다.”

“예.”

나와 조감독. 제작부장과 사운드 관련 스태프만 좌석에 앉았다. 사운드가 후반작업 마지막 부분이다. 그전 과정은 다른 팀장들과 함께 다 확인했다.

곧 사운드까지 끝낸 최종본이 상영되었다.

다들 소리를 죽인 채 영화를 보았다.

세 번째 보는 영상이다.

처음 봤을 때는 내가 찍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조금 생소했다. 조명의 톤과 색감, 편집 방식이 한국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촬영 때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 영화 느낌이 나지 않겠나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남의 영화를 보는 듯한.

그런데 조감독 말대로 총성이 좀 밋밋하다.

영화 쉬리나 내 영화 이동원의 흥행에는 실제와 가까운 총성 영향도 있다. 동시 녹음한 총성을 그대로 쓴 덕분이다. 반면 할리우드 영화에는 총소리 소스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총격전에 박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국의 스태프와 관객은 이걸 당연하게 여기겠지만.

어쨌든 영화를 계속 보았다.

총소리 외에는 다 마음에 들었다.

편집과 CG야 전에 왔을 때 오케이했었고.

작은 시사실에 불이 켜졌다.

담당 스태프들이 일제히 날 본다.

“프리미어까지 얼마나 남았죠?”

“2주 남았습니다. 뭔가 걸리는 게 있어요?”

“총성이 좀 약하네요. 다른 소스를 써야겠습니다.”

조감독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에디도 ‘이동원’을 봤으니 총소리가 걸렸던 거지.

“2주 안에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좋은 소리를 고르느라 3주가 걸렸던 거지, 실제 사운드를 입히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좋아요. ‘투 도어즈’ 때 쓴 총성 소스를 쓰도록 하죠. 산탄총과 리볼버 총성은 따로 녹음해야겠어요.”

“알겠습니다.”

곧장 한국에 있는 제작실장에게 전화했다.

그로부터 1시간 후 클라우드 저장 방식을 통해 총성 소스가 전달되었다. 그리고 총기를 빌려서 캘리포니아 황야와 숲에 간 뒤 총성을 땄다. 샷건과 리볼버, 글록 등의 총성이다.

10일 후.

새로운 사운드를 입히고 믹싱까지 끝낸 영화를 다시 보았다. 시간이 이제 없는 터라 나도 스태프들도 긴장했다. 사운드 스태프들도 처음으로 밤을 새우며 작업했을 터다.

다시 시사회를 시작했다.

좀 시끄럽긴 하지만 총성만으로 영화 분위기가 확 산다.

실제 전장에 들어온 것처럼 총성으로 정신이 없으니.

사운드 매니저는 나한테 한 수 배웠다는 표정이다. 믹스 커피만 먹다가 다방 커피를 맛본 얼굴이라고 할까.

사실 사운드 소스를 쓰지 않고 직접 녹음한 사운드를 쓰는 건 후진적인 제작방식이긴 하다. 때론 그게 더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내가 할리우드의 관행을 조금 벗어난 셈이다.

에디가 말했다.

“작업하면서 느끼긴 했지만 영화 전체가 달라지는군요. 큰 소리 때문에 처음엔 깜짝 놀라겠지만, 집중하게 되는 요인은 확실히 됩니다. 이전의 총성은 어째 장난감 총을 쏜 느낌이에요.”

“다음에도 이렇게 갑시다. 사운드만큼은 할리우드에 널리고 널린 소스 쓰지 말고 직접 녹음하는 것으로요.”

“저도 동감입니다.”

“개봉 축하해요, 감독님.”

“고마워요, 엠마.”

고생한 스태프들과 악수하고 포옹했다.

영화 재미에 대한 객관성은 잃었지만 코어는 흥행을 예고하고 있다. 아주 재미난 할리우드 영화로 잘 빠졌다. 거기에 나 혹은 한국 영화 특유의 감성적 울림도 있다.

프리미어 시사회 3일 전.

서연과 지현이, 건하가 수호팀과 함께 미국에 왔다.

서연와 수호팀은 날 지원하기 위해, 지현과 건하는 출연 배우로서 프리미어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주로 나와 두 주연배우를 중심으로 인터뷰가 끝없이 이어졌다. 미국 언론. 유럽 언론. 한국과 일본 언론의 인터뷰를 계속 반복했다. TV와 신문, 유명 영화 사이트 등 매체마다 인터뷰 순서가 달라서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그리고 일주일 뒤.

LA의 유명한 극장인 시네라마 돔에서 프리미어 시사회를 열었다. 언론과 VIP 시사회를 합친 형태의 축제다.

이동욱 대표가 마련해준 리무진을 타고 극장 앞에 내렸다.

나와 지현이, 건하가 차에서 차례로 내렸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한류 팬이거나,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다.

세 명이 나란히 레드카펫을 걸었다. 주변에는 영화 속 아바타 분장을 한 이들이 근위병들처럼 서 있고, 한국처럼 포토 라인도 있었다.

먼저 셋이서 사진을 찍고 단독 사진도 찍었다. 우리가 한쪽으로 대기하자 두 주연배우인 주드 로와 데인 드한도 장난스럽게 팔짱을 낀 채 걸어왔다.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환호가 터진다.

조연 배우들도 하나둘 입장해서 사진을 찍었다.

이후 주요 배우들이 모두 모여 포즈를 취했다.

“싸랑해요, 손짱!”

“지현!”

“건하 오빠!”

일본팬과 한국 교민도 상당히 많이 왔다.

그때 구경을 하던 서연이 민망한 얼굴로 내 쪽으로 왔다.

수호가 떠민 모양이다.

주드 로가 상황을 파악하곤 얼른 서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서연이 내 옆에서 서자 일본 기자들이 이게 웬 그림이냐는 듯 정신없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사전 행사를 끝내고 배우들 먼저 극장 안에 자리 잡았다.

기자들이 입장하고, 귀빈들이 객석을 채워 나갔다.

내 옆에 서연과 주드 로가 앉았다.

서연은 전체 리딩 때 와서 인사를 했고, 촬영 때도 종종 와서 밥을 사곤 했기에 배우들과도 잘 알고 있었다.

앞 열에 앉은 데인 드한이 물었다.

“영화 어때요? 잘됐나요?”

“보면 알아요.”

주드 로도 물었다.

“사운드에 문제가 있었다던데 괜찮은 거죠?”

“별일 아닙니다. 사운드 보정이었어요.”

“영화가 잘돼야 할 텐데.”

“잘될 겁니다.”

에디가 웃으며 말했다.

“깜짝 놀랄 거예요.”

“그래? 이거 기대되는데.”

엠마가 스크린 앞에 섰다.

“프리미어 시사회에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영화 재밌게 보시고 좋은 평 좀 내려 주세요. 특히 토마토에 리뷰를 올리실 때는 3번쯤 생각해 주세요. 여러분 리뷰 하나에 우리 영화의 숨통이 걸려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요.”

객석에서 작은 웃음이 들려왔다.

귀빈 다수가 여러 유력 매체의 평론가와 기자들이다. 세계적인 유명세를 가진 이들도 있다. 특히 이분들이 ‘토마토’에 올리는 리뷰는 믿을만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엠마가 쿨하게 인사도 없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 * *

영화가 끝났다.

크레딧이 오르자 박수가 터졌다.

뒤를 보니 귀빈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주드 로가 날 안았다. 옆에 앉은 서연도 눈이 붉어진 채 날 안았고. 데인 드한도 옆에 앉은 지현과 건하를 차례로 안았다.

이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미국 시사회에서는 한국 언론 시사 때와 달리 웬만한 영화는 귀빈들이 기립 박수를 보낸다고 들었으니.

엠마가 평론가들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주드 로와 데인 드한도 아주 만족한 모습.

지현이는 또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대표님.”

“응.”

“고마워요.”

“그래.”

끝내 눈물을 흘리는 지현이를 서연이 안아주었다.

혹시 편집 당하는 거 아닌가 조마조마했던 모양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고 마침내 개봉하게 되니 감격이 되겠지. 건하도 울컥한 표정인 걸 보면.

주드 로가 말했다.

“영화를 수도 없이 찍었지만 이 정도로 마음에 드는 영화는 처음입니다. 내 영화를 보면서 숨고 싶었던 적이 많았는데, 지금은 자랑스럽네요. 고마워요. 나도 몰랐던 내 표정 하나를 알게 해 주셔서.”

“당신이 영화를 빛내 주신 겁니다.”

주드 로의 표정에서 아비도의 형사가 보였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감정 연기가 아니었다. 관객은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할리우드식 클리셰를 지양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부터가 그랬다.

할리우드 배우가 한국 배우처럼 연기한 느낌이다.

물론 프리 과정에서 그 점을 디렉팅했었다.

할리우드와 한국의 접점을 찾았다고 할까.

데인 드한도 감사를 표했다.

“연기할 때는 이렇게 해도 되나 싶었는데, 진작에 감독님을 믿을 걸 그랬네요.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 영화의 특징적인 연기와 표정을 볼 줄은 몰랐어요. 사실 찍을 때는 이 영화와 맞는 건가 싶었거든요.”

“나도 그랬어요. 다행이죠?”

“네. 저… 동료 배우들에게 최 감독님 좀 소개해도 되죠? 연기가 달라질 거라고요. 제가 그랬거든요.”

말없이 데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연기력이 한 단계 성장했다는 뜻이겠지.

조연 배우들과 귀빈들이 나와 눈인사를 하고 하나둘 자리를 떴다. 엄지를 보이거나 활짝 웃는 것으로 영화를 본 감상을 표현하고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이긴 한데 독특한 정서가 담겼다.

한국 특유의 내러티브로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었으니까. 투자자들이 시나리오에 반한 이유가 그거다. 전체적으로 익숙한 가운데 감정선이나 전개 방식, 앵글 같은 게 새로운 것. 정서의 느낌이라 정확히 형언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신선한 할리우드 영화다.

이게 미국 관객에게 먹힐지는 두고 봐야 할 테고.

프리미어 시사회를 마무리했다.

곧 기자간담회를 겸한 파티에 참석했다.

영화 개봉 자축연이자, 스태프 송별회도 겸한다.

개봉 준비는 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에서 책임졌다. 이동욱 대표는 시사회 참석도 못하고 각 극장에 데이터를 전송하는 데 사고가 나지 않도록 뛰어다니고 있었다.

서연과 함께 어바인의 집에 와서 쉬었다.

국경의 끝을 개봉할 때처럼 긴장이 되었다.

그렇게 개봉 당일은 금세 찾아왔다.

1월 19일.

북미 전역과 세계 18개국 동시 개봉이었다.

* * *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극장 예매율 현황을 보았다.

마음을 졸이며 사이트를 열었는데.

북미 전체 예매율 6%. 4위

내 집에 모인 이들 모두 숨을 죽였다.

예매율은 기대작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한다.

기대작 수준은 아니라는 뜻이다.

미국 영화 시장은 한국처럼 뒷심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입소문이 늦게 퍼지는 데다 초반 반응이 영 그러면 간판을 내리기 때문에. 경쟁작은 폭스사의 재난 블록버스터다. 일주일 먼저 개봉했음에도 여전히 1위.

예매율이 낮은 이유는 안다. 메이저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도 아니고, 마케팅도 조금 부족했다. 3,000억 대 대작 영화인 것도 아니며, 감독은 신인에 동양인이다. 주연배우도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는 주드 로이고.

다들 조금은 의기소침하던 그때였다.

이동욱 대표의 전화가 왔다.

-토마토 확인해 보세요! 방금 올라왔습니다!

“평점 말이에요?”

-아니요, 리뷰요! 평점도 곧 나올 겁니다!

잔뜩 흥분한 이동욱 대표다.

우리는 모르는 뭔가를 아는 건가.

컴퓨터 앞에 앉은 수호가 토마토 사이트를 확인했다.

여러 매체의 평론가 리뷰가 올라와 있었다.

제임스 카메론은 다시 한 번 자극받을 것이다. 로봇과 아바타가 어떻게 진화를 했는지 보게 된다면.

-Simon Adams (Village M)

한국형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최신성 감독은 본인이 천재임을 증명했다.

-Maggie Graf (Variety)

메이저 스튜디오는 이 놀라운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을 필요가 있다.

-Peter D. Carlos (RogerEbert)

긍정적인 충격!

당신은 로봇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Daniel Modine (Film Journal Int.)

할리우드 액션 무비의 새로운 기조 탄생.

-Bradley Uhrich (The Playlist)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극찬 일색이었다.

이후로도 계속 리뷰가 올라왔다.

수호가 말했다.

“술판이라도 벌일까요?”

“그래, 밖에서 먹자.”

수호팀이 지하로 내려가서 그릴과 숯을 가져왔다.

나와 서연은 냉장고에서 미국식으로 커팅된 고기들을 내왔고, 지현이와 건하는 채소를 씻었다.

정원에서 소맥을 마시며 바베큐 파티를 했다.

리뷰를 보고 있다고 망할 영화가 흥행하겠나.

그냥 맘 편하게 며칠 기다리면 되는 거지.

지현이가 말했다.

“내일이면 달라질 것 같아요. 오늘은 금요일이니까요.”

“그래. 주말을 기대해 봐야지.”

다들 잔뜩 기대했다가 예매율이 낮아서 적잖이 실망했다. 예매율 1위가 되어도 흥행이 조심스러운데 4위이니. 1위와 격차가 좀 커서 쉽게 오르진 않을 성 싶다.

영화의 흥행은 일반 대중에게 달렸다.

토마토 같은 평점 사이트를 보는 이들은 영화팬이고.

간만에 영화나 볼까. 하고 극장을 찾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웨이커는 여러 면에서 검증된 브랜드가 아니다 보니.

다들 만취하여 방으로 갔다.

소파에서도 자고, 거실 바닥에 대충 자기도 하고.

모르는 게 약이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다음 날에도 신경을 안 썼다. 어차피 첫 주는 지나야 성적의 향방이 나올 테니까. 해서 모인 이들에게 아무도 성적을 말해 주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금요일에 다시 모두 모여 또 바베큐 파티를 했다.

아무도 결과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첫 주 성적 발표가 오늘이기도 했고.

이동욱 대표와 조감독에게도 문자나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수호가 녀석답지 않게 떨리는 손으로 사이트를 열었다.

북미 박스오피스 오프닝 위크엔드.

“어?”

“응?”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 채 성적표를 보았다.

일단 1위다.

지난주에 개봉했으니 개봉 첫 주 1위인 것은 당연할 테고.

그런데 숫자가 어째.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 124,583,220

“1억 2천만 달러?”

“이거 진짜예요? 첫 주인데?”

“언니! 저 소름 돋았어요!”

나도 소름 돋았다.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했다.

충격은 조금 늦게 오는 법이다.

“됐어요! 우리 영화 되고 있어요!”

“와! 1억 2천만 달러!”

“대표님!”

“오빠!”

모인 멤버들이 서로 얼싸안고 제자리를 뛰었다. 날 어려워하던 수호팀까지 날 부둥켜안고 방방 뛴다. 나도 기쁨을 좀 표현하고 싶은데 이 인간들이 팔로 날 묶어 놔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덩달아 뛰어야지 뭐.

북미 개봉 첫 주 성적 1억 2천만 달러.

제작비가 1억 4천임을 따지면 계산이 나온다.

기록적인 오프닝 성적은 아니다.

마블표 블록버스터가 첫 주에 1억 5천은 찍으니까.

이동욱 씨는 이렇게 될 줄 예상했던 것일까.

아침에 전화 좀 하라고 문자를 했었는데.

“여보세요? 이 대표?”

-감독니이이이임! 우와아아!

소리가 너무 커서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요! 대중 무시하면 안 돼요! 재밌는 영화를 알아본단 말입니다! 하하하하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모두 환한 얼굴로 내 앞에 모였다.

그들의 면면을 보고 있다가 팔을 벌려 안았다.

이게 할리우드 영화의 힘이구나.

우리가 해냈구나.

우리가 박스오피스 성적을 봤을 때 내 영화 관계자들도 봤던 모양이었다. 이동욱 대표에게 전화하고 얼마 안 되어 조감독과 제작실장, 투자사와 극장 체인 임원 등 전화와 문자가 폭주했다.

하나같이 흥분한 음성이었다.

오프닝 성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매율이 좋지 않았음에도 흥행이 시작된 것에 무척 고무된 상태였다. 미국에서 유례없이 첫 주에 바로 입소문이 폭발했다. 뒷심이 상당히 빨리 왔다고 할까.

다들 컴퓨터 앞에 모여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첫 번째는 첫 주말 때 SNS를 통한 퍼져 나간 재밌다는 소문이었다. 두 번째는 대도시 유력지의 호평이었고, 세 번째는 세계적인 평론가들의 리뷰와 평점이었다.

게다가 개봉 일주일째인 바로 오늘.

영화 평점 사이트 토마토에서 놀라운 평점이 나왔다.

신선도 98%.

아직 평가가 100% 다 채워진 것이 아니지만 할리우드 액션 영화로는 이례적인 평점이다. 이전에 이동원에 96%를 준 적 있기에 단지 내 영화에 호감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할리우드 상업 영화에는 점수가 짜다는 점을 보면 상당히 높은 점수를 준 거였다.

“어? 대표님. 포털에도 나오는데요?”

다들 스마트폰으로 포털을 열어서 보았다.

나는 서연이가 보여주는 폰 화면을 보았다.

포털 검색어 1위가 어웨이커다. 가장 많이 본 기사 1위도 각 방송사 뉴스 보도였다.

“지금 한국 몇 시야?”

“토요일 12시 30분쯤 돼요.”

“정오 뉴스에 나왔나 봐.”

서연이 말대로 정오 뉴스에서 일제히 내 영화 소식을 다뤘나 보다. 우리는 보도 자료를 보낸 적도 없다. 알고 보니 CNN의 마이클 기자가 내 영화 첫주 개봉 성적 소식을 전했던 거였다. 본인이 한 번 띄워 주더니 끝까지 책임지는 모양새다. 아니면 자신의 선경지명을 자랑하고 싶었거나.

한국 뉴스를 다시 보았다.

‘한국의 최신성 감독이 만든 첫 할리우드 영화 ’어웨이커‘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력 언론에서는 벌써 상반기 최고 흥행작이 되리라 예측하고 있는데요. 미국 현지 반응을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관객 반응과 특파원의 리포팅이 이어졌다.

특보 형식이라 이 단신이 전부였다.

아마 오늘 특파원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취재해서 한국 저녁 뉴스에도 나올 듯싶다. 회사에 찾아가는 기자들도 있을 테고.

한국 관객 반응을 보았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포털 뉴스에 악플을 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반인 평점도 꽤 높다. 기자간담회에서 만나 친해진 기자들은 대부분 호평이다. 내가 영화에서 의도한 걸 그대로 짚어낸다.

다소 모호하며 고급스러워 보이려는 미국 평론가들보다는 한국 평론가들의 리뷰가 훨씬 나았다. 그 이유를 지금은 안다. 미국 평론가들은 일반 관객이 대상이지만, 한국 평론가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 관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로서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고객이다. 한국에서 실패하면 어느 나라를 가도 성공이 어렵다고 본다. 관객으로서도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다는 게 미국 영화인들 인식이고.

그런 한국에서 내 영화가 흥행하고 있다.

첫 주에 260만을 찍었으니.

기대작으로 뽑혀서 첫주 성적만 좋고, 갈수록 나빠지는 경우가 아니다. 언론의 평가와 관객의 추천에 의해 평일 동안에 기록한 성적이다. 따라서 이번 주말 성적이 나오면 확실해진다. 평일에 영화를 못 본 이들이 오늘 아니면 내일 볼 테니까.

일단 현재 예매율은 1위다.

폭풍 같았던 분위기는 잠잠해지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서연만 집에 남아 오붓하게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둘이서 자정까지 분위기를 내다가 간만에 마음 편히 사랑을 나누었다. 영화 성적에 흥분한 것이 사랑의 미약이었나 보다. 우리 둘 다 정말 좋았다. 갈수록 깊어지는 사랑의 마음처럼.

* * *

다시 일주일이 지나갔다.

혹시 반짝 불타오르다 꺼지는 건 아닐까 싶었으나 오히려 불길이 거침없이 번졌다. 그것도 무섭도록 타올랐다.

처음 입소문이 난 후 맞이한 첫 주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폭발 기세였다.

누적 입장 수익 $ 284,931,850

1억 2천 달러에서 2배 이상으로 뛰었다.

나와 서연이 입을 다물지 못하던 그때였다.

이동욱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감독님! 박스오피스 확인하셨어요?

“예. 변동 사항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죠. 극장 측에서 스크린을 1,000개 정도 늘일 거라고 합니다. 상영 기간도 14일 늘어났어요. 단관만 있는 극장에선 금요일 토요일에 매진되어서 다른 영화를 선택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예요.

“한국과 해외 쪽은 어때요?”

-한국은 현재 400만이 넘어가고, 중국은 600만 넘었어요. 일본도 한국 영화 신기록을 달성 중입니다. 현재 300만 넘었거든요.

2주 만에 한국에서 400만이라.

내 영화 중 개봉 둘째 주 최고 성적이다.

할리우드 영화라서 그런가.

-제 경험으로 봤을 때 이 추세로 가면, 북미에서만 3억 5천은 나올 것 같고. 해외 총 입장 수입도 3억은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과 유럽의 반응이 미국 못지않아서 더 클 수도 있어요. 한국처럼 자국 영화 힘이 큰 시장은 할리우드 영화 성적이 좋지 않은 편인데, 이번엔 좀 분위기가 다릅니다.

“한국 영화적 특성 때문일까요?”

-그렇죠. 뉴욕 타임즈와 가디언지 리뷰를 보셨어요? 어웨이커는 한국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의 장점만을 따온 매우 영리한 영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존 할리우드 영화와는 다른 신선함이 있었던 거죠.

“이제 우리 작품에 직접 투자할 수 있겠군요.”

-메인 투자는 가능할 겁니다. 이곳 투자자들과 관계 유지를 위해선 일부러라도 투자를 받는 게 좋고요. 다음에 또 전화 드리겠습니다. 하도 전화가 많이 와서 정신이 없네요.

“네.”

전화를 끊자 서연이 물었다.

“한국에선 400이래?”

“응.”

“천만까지 가는 거 아니야?”

“아닐 거야. 내 영화가 어벤져스 급도 아니고.”

“돈 많이 쓴다고 좋은 영환가. 어벤져스는 신 나게 영화 보고 나면 그걸로 충분하지만, 어웨이커는 영화도 재미있는데다가 마음에 남는 게 있어. 생각할 거리도 있고 눈물도 나고. 내 마음엔 지금도 ‘FA’가 남아 있거든.”

고개를 끄덕였다.

규모와 물량이 어마어마하고 그만큼 재밌는 영화.

일정 수준의 재미도 있고 마음도 사로잡는 영화.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거지.

천만 다행히 흥행이 되고 있다.

이동욱 대표 말대로 흥행이 된다면 미국의 메이저 스튜디오의 반은 따라잡는다. 직접 제작 투자하게 될 테니. 배급만 할 수 있다면 완벽하게 자리 잡는 것이고.

이 대표 말대로 북미 수익은 3억 5천을 찍을 것 같다.

한데 해외 극장 수입은 아직 판단하기에 이르다.

코어는 여러 반응 등을 통해 이 대표의 짐작보다 높게 봤다. 기존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선 정확한 예측이 어렵다. 북미 수입보다 더 나올 수도 있다.

특히 중국에서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친근한 동양의 정서를 느끼는 것 같다. 그 점은 일본과 동남아 쪽도 비슷했다. 한국에서의 열광적인 반응은 자부심 같기도 하다. 한국 사람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찍었다는.

미국에선 개봉이 끝날 때까지 머물 예정이었다.

정산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해서 느긋하게 신작 준비를 했다.

귀국하면 바로 촬영할 수 있도록.

그런데 승철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영화 잘되고 있다면서요?

“그래. 다행히 자립할 정도는 될 거 같아.”

-저 진행하던 영화 엎었어요.

“왜? 6개월이나 진행했잖아?”

-잘 안 되네요. 형님이 안 도와주셔서 그렇잖아요.

“너 혼자서도 잘 쓰잖아.”

-솔직히 입봉작은 제가 오랫동안 굴리고 굴렸던 거라서 잘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이게 말로만 듣던 소포모어 징크스 같은데요. 더 욕심을 내서 그런 건지.

“다른 소재 찾아서 다시 해 봐. 네가 마음에 드는 거면 나도 마음에 들 거야. 마음 급하게 먹지 말고.”

-형님은 할리우드 영화 계속 찍어서 할리우드에 빨리 정착하는 게 좋지 않아요?

“여긴 제작 기간이 기니까, 그 사이에 한 작품 정도는 찍을 수 있으니까 하는 거야. 시간 허비하기도 싫고.”

-나 같으면 할리우드 영화에 더 공을 들이겠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승철이가 잠시 말을 못했다.

뭔가 부탁을 하려고 전화한 거였다.

엉뚱한 소리로 몰고 가는 걸 보니.

-실은요. 콘텐츠 본부 통과 안 된 작품 중에 형님이 지목했던 세 작품 있잖아요. 그중 하나를 형님이 찍기로 했고요.

“그래서?”

-저… 사랑의 불시착,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이 녀석이 헛소리하는 건 아닐 테고.

뭔가를 발견한 건가.

“너 지금 진심이야?”

-형님한테 진짜 미안한데… 제가 그 작품 너무 욕심이 나서요. 수혁 씨 말 들어 보니까, 나머지 두 작품도 하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가을날의 색깔이나 샌드위치 가지고 서연 씨랑 찍으면 좋을 것 같은데.

“딴소리 말고 날 설득해 봐.”

-이런 말 좀 그런데… 제가 찍으면 800만 이상 들 겁니다.

“무슨 근거로?”

-제가 좋아하는 코드가 있어요. 프리 진행 지켜보면서 자꾸 마음에 걸려서 왜 그런가 했더니, 저랑 궁합이 맞아서 그런 거였어요. 제가 할 영화를 형님이 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감이 무슨 근거가 돼?”

-저 한 번 믿어보세요. 형님은 다른 영화 하셔도 되잖아요. 지금 시나리오로 형님과는 다른 디테일로 풀어보고 싶어요.

승철이가 뭔가를 포착했다는 건데.

사실 영화 하면서 진짜 천재는 승철이가 아닌가 싶었던 적이 많다. 질투가 났던 것도 승철이가 유일하고.

내가 찍으나 녀석이 찍으나 상관은 없다.

나야 솔직히 돈 벌려고 한국 신작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작가주의 풍을 우선 골랐던 거다.

듣고보니 나보다 승철이가 사랑의 불시착을 하는 게 맞을 것도 같다. 분위기도 그렇고, 캐릭터 성향도 그렇고.

세 작품 다 하고 싶었는데 그냥 다 할까.

프리야 어차피 제작실장이 한 거고.

“전화 끊고 기다려 봐.”

-넵!

옆에서 듣고 있던 서연에게 말했다.

“어떤 작품 하고 싶어?”

“그 두 작품 중에?”

“응.”

아무래도 서연은 멜로가 낫겠지.

가을날의 색깔이 뉴욕에서 찍는 우아한 멜로니.

연기력이 제법 필요한 영화이기도 하고.

서연이 말했다.

“샌드위치가 조금 욕심나네.”

“배우로서?”

“관객으로서도. 소재나 영화 규모상 한국에서 쉽게 찍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니잖아. 신인이나 기존 감독도 흥행성이 낮아서 함부로 못 찍는 영화이기도 하고.”

맞다. 내가 찍어야 극장 개봉이 가능한 영화다.

드라마트루기가 아예 없는 영화를 누가 본다고 극장에 걸어주겠나. 망할 게 뻔한 영화를 제작할 영화사도 없을 테고.

그러고 보니 난 정말 이상적인 감독이 됐다.

대형 상업영화도 찍고, 예술 영화도 찍을 수 있으니.

서연에게 말했다.

“샌드위치는 칸에 갈 정도는 아닐 거야. 너나 나나 큰 기대는 하지 말고 한 번 찍어보자.”

“이번 영화 오빠랑 찍고, 나도 오빠도 좋은 작품이 나오면 그때 다시 찍자. 난 10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

“그래. 마음이 가는 대로 가야겠지.”

“응.”

처음으로 서연과 찍는 영화다.

나도 그녀도 이젠 개인의 돈에는 초연해져서 영화 그 자체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작가영화를 찍어야지.

최수혁에게 전화했다.

“난 데요. 사랑의 불시착을 내가 안 찍게 되었어요.”

-그런가요? 좀 아쉽긴 하네요.

“박승철 감독이 곧 찍을 겁니다.”

-아, 박 감독님이요?

목소리에 실망보다 반가움이 드러났다.

나보다 승철이가 하는 게 낫다고 봤나?

-안 그래도 박 감독님이 자꾸 저한테 뭘 물어보셔서 왜 그러시나 했어요. 프리 과정도 지켜보셨고요.

“승철이가 하는 것도 괜찮죠?”

-네. 저는 괜찮아요. 시나리오를 고쳐야겠죠?

“약간 수정이 있을 겁니다. 나랑 승철이는 개그 코드가 좀 달라요. 박 감독은 이상하게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거든요. 남자 캐릭터가 좀 더 살 겁니다.”

-저도 그 점은 알고 있어요. 은하와 민수가 흥행한 이유가 박 감독님 특유의 영화 정서였거든요. 그럼, 저 한국에 들어가야겠네요.

“그렇게 해요.”

-알겠습니다. 모레쯤에 들어갈 게요.

“예.”

컴퓨터를 열어 샌드위치 파일을 불러냈다.

작가 이름을 보니 여성 작가다. 진수희.

서연이 말했다.

“나, 이 작가 한번 보고 싶어. 편하게 대화 좀 해보고 싶은데, 미국에 초청하면 안 될까? 내가 한국 들어가도 되지만, 작가도 바람이나 좀 쐴 겸 미국에 와도 괜찮을 것 같아서. 경비는 내가 줄 수 있어.”

“그래. 물어나 보자.”

시나리오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네.

“진수희 작가님이시죠?”

대꾸가 없었다.

한국 시각이 오전이라 무례는 아니다.

“작가님?”

-저 작가 아닌데요.

“샌드위치 쓰신 분 아니세요?”

-네?

깜짝 놀란 음성.

작가가 아니었나.

“샌드위치 쓰신 진수희 작가 아니세요?”

-제가 쓴 건 맞는데요. 저 무명이라서 작가라는 호칭이 좀 어색해서요.

“지금 회사 다니세요?”

-7년 다니다가 관두었어요. 지금은 그냥 쉬면서 시나리오 하나 쓰고 있어요.

“로큐에 시나리오 보낸 건 아시죠?”

-네. 아무 연락이 없었는데요.

“콘텐츠 심사에서 탈락하긴 했습니다. 저예산이지만 재미있는 장르 영화를 우선 뽑거든요.”

-예. 그래서 다른 거 쓰려고요.

“샌드위치 재미없다고 생각하세요?”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제 경험을 진실하게 써보려고 했어요. 한강에서 샌드위치 먹는 씬은 제 실제 경험이고요.

“그랬군요. 혹시 미국에 오실 수 있어요?”

-미국에는 왜요?

서연이 전화를 좀 달라고 해서 건넸다.

그녀가 받았다.

“여보세요. 저 안서연이라고 해요.”

-예. … 예? 배우 안서연 씨요?

“네.”

대답이 안 들렸다.

“여보세요? 작가님?”

-그럼 아까 그분이 혹시…

“네. 최신성 감독이에요.”

-앗!

진수희 작가가 놀라는 소리가 다 들린다.

서연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그런데 미국에는 왜요?

“제가 작가님을 좀 뵙고 싶어서요. 감독님이 당분간 미국에 좀 있어야 하는데, 휴가 삼아 작가님이 오시는 건 어떨까 해서요.”

-저, 갈게요.

“네. 다음에 뵙도록 해요.”

다시 폰을 건네받았다.

“수희 씨.”

-네, 감독님!

“저랑 샌드위치 찍읍시다. 로큐로 가셔서 미국행에 대해 물어보세요. 비행기 표도 마련해 줄 겁니다. 한 달 정도 머물 수 있는 짐을 챙겨서 오시면 내가 마중 나갈게요. 시나리오 수정을 조금 하고 같이 한국 들어갑시다.”

-네. 감독님.

전화기 너머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는 무명작가가 참 많다.

다들 잘 되었으면 좋으련만.

진수희 작가가 다음 주에 미국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최수혁 작가에 이어 진수희 작가도 내 보조 노릇을 하다가 입봉하면 된다. 경험이 곧 실력이다.

회사에는 오늘부터 샌드위치 프리에 들어가라는 감독 지시를 내렸다. 제작실장은 사랑의 불시착을 제작 1팀장에게 넘기고 다시 프리를 하게 되는 셈이다. 프리가 촬영 자체보다도 중요한 면이 있으니 제작부의 수장이 해야 한다.

회사에서 영화 제작을 동시에 서너 편을 하다 보니 제작부 자체가 크다. 제작실장 아래에 팀장이 5명이나 있으니. 토론토에도 동행했던 제작실장은 내 작품 전담이고.

다음 날 아침.

서연과 데이트 삼아 외출했다.

도착한 곳은 내 영화사 스튜디오 공사 현장이었다.

나와 서연은 건설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산에 올랐다.

탁 트인 넓은 부지에 공사가 한창이었다.

건물은 10층 외관까지 완성되었고, 내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넓고 하얀 사각형 건물이 있다.

내 영화 스튜디오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서연이 물었다.

“얼마나 남았대?”

“완공은 두 달. 내부까지 합치면 석 달.”

“다음 영화는 저기서 찍겠네.”

“응.”

“내가 다 뿌듯하네.”

어웨이커의 최종 성적이 나올 때면.

저 공사도 끝나겠지.

과연 성적이 어떻게 될까.

이동욱 대표 예측대로 총 수익 6억 달러일까.

아니면 코어가 전달하는 느낌대로 더 나올까.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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