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제작비 1,478억 (31/56)

제7장 제작비 1,478억

내 사무실에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편하게 입고 오라고 했더니 뚱뚱한 친구는 청바지에 점퍼를 입고 왔고, 두 명은 그래도 정장을 입고 왔다. 두 명은 사회생활을 좀 해 본 모양이다.

거침없이 음식을 주문하고 밥을 먹었던 권혁민이라는 친구는 이번엔 긴장했다. 그래도 원래 성격이 느긋한 편인지 웃는 얼굴이었다. 두 명은 오늘도 잔뜩 주눅이 들었고.

“저는 말에 다른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편하게 입고 오라고 하면 말 그대로 해석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네.”

세 사람에게 서류를 건넸다.

내가 하는 일을 간단히 요약한 내용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적혀 있고.

“여러분은 양수호 씨가 팀장인 특별지원팀 사원입니다. 앞으로 저의 지원팀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여러분은 저와 함께 다닐 거예요.”

권혁민이 물었다.

“대통령 보좌관 같은 거네요?”

난데없이 보좌관이라니.

이 친구가 교묘하게 사람을 띄우네.

“기업 비서실이라고 보면 돼요. 여러분은 오늘 당장 미국대사관에 가서 비자 신청을 하셔야 합니다. 여권이 없으면 만드시고요. 또한 가족에게는 미국에서 당분간 생활할 거라고 말씀드리세요.”

“미국요?”

“저는 영어 잘 못하는데요.”

세 명 다 영어를 잘 못한다.

상관없다. 로큐 아니라도 다른 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사람은 나도 필요가 없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절실한 사람이다. 고생을 해 본 사람에게나 초심이 있는 거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도 이해하는 법이다. 영어야 배우면 되고.

“잘 몰라도 됩니다. 당분간은 내가 지시하는 일을 하면 돼요. 단, 한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영어공부요?”

권혁민이 눈치가 빠르다.

“예. 미국행 준비를 하면서 영어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브레이킹 배드라는 드라마 대본이 있는데 그걸 외우세요. 빨리 외우면 그만큼 월급이 오를 겁니다.”

“못 외우면 잘리는 건가요?”

“아니요. 여러분을 위해서 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초임은 연봉 4000입니다. 영어 공부 때문에 포기할 겁니까?”

“아닙니다.”

“할 수 있어요!”

영어는 도구이지 능력은 아니다.

학력보다는 상상력. 지식보다는 지혜가 낫다.

나와 여러 면에서 통하는 이 친구들은 내 입장에선 능력자들이다. 본인에게 무슨 잠재력이 있는지 모를 뿐이지.

“해외 팀에 가서 미국 비자 관련 문의를 해 보세요. 2주 안에 비자가 나오면 저랑 같이 출국하고, 늦으면 양수호 씨와 함께 미국으로 오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바로 시작하세요.”

“네.”

세 명이 내게 인사를 하곤 사무실에서 나갔다.

셋 다 설레기도 하고, 조금은 두렵기도 한 얼굴이다. 무슨 일을 하게 될 줄 모르는데다, 정식으로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으니.

수호가 세 명에게 뭐라 말하는 게 보였다.

녀석이 내 사무실로 왔다.

“제 팀원들 교육은 제가 확실히 하겠습니다.”

“네가 말하는 확실히는 사람 잡는 수준이야. 너 군대식으로 할 거 뻔한데 힘들어서 그만두면 네가 책임질래?”

“스파르타만큼 효과가 좋은 것도 없지 말입니다.”

“그건 너 같은 놈에게나 맞지, 저 친구들에겐 안 맞아. 나랑 성향이 비슷한 친구들인데 내가 그런 거 안 좋아하거든. 저 친구들은 채찍보다 당근이 좋아.”

“대표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수호는 안 한다고 하면 안 한다.

말과 행동이 같은 놈이라서.

수호를 내보내고 회사 사업 현황을 보았다.

제작 중인 영화도 보고, 소속 배우들이 어떤 작품에 출연하는지도 보았다. 앞으로 한 1년은 한국에 못 들어올 것 같아서 올라온 보고서 중 손에 잡히는 대로 확인했다.

대략 다 살펴봤을 때 건하와 지현이가 왔다.

내가 오라고 해서 왔는데 왜 왔는지는 모른다.

“부르셨어요?”

“응. 앉아 봐.”

소파에 건하와 지현이가 앉았다.

“두 사람. 미국 갈 준비해.”

지현이가 바로 눈치를 챘다.

“저, 대표님 영화 찍어요?”

“응. 한국에서 찍으면 네가 여주인공인데, 할리우드 영화라 비중이 좀 줄었어. 대사는 거의 없으니까 안심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표님…….”

건하는 무덤덤한데 지현이는 또 울먹거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이렇게 감정이 풍부한 애가 왜 그렇게 사고를 쳤는지.

“트레이닝 센터 가서 몸 좀 만들어. 6달 후에 부를 거야. 그 전에 드라마 찍을 거 있으면 직원들과 의논해서 찍도록 하고.”

“아바타 여전사 역할이죠?”

“그래. 건하가 상대역이야.”

“알겠어요.”

두 사람을 내 보냈다.

선약이 있어서 나도 사무실을 나섰다.

* * *

그동안 못 본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신성영화사에 먼저 갔는데, 이 대표님이 격하게 반겨주셨다. 제작 이사가 된 민정이는 믹스 커피가 아닌 원두커피를 직접 내주고.

구멍가게 같았던 신성영화사는 이제 직원만 30명에 이르는 메이저 급 회사가 되었다. 매출로 따지면 5대 메이저에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그다음 조약돌에 갔다. 김판수와 대표님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조약돌은 지난번 첩보 영화에 이어 대형 판타지 액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 년 사이 한국 영화 규모도 상당히 커졌다. 이전엔 대작하면 100억 대였는데, 이젠 200억은 들어야 대작 소리를 들으니. 조약돌도 이제는 5대 메이저에 든다.

라이터스에도 들렀다.

작가만 32명. 라이터스 작품이면 70% 확률로 흥행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제는 영화계 영향력이 상당히 컸다. 그 때문에 완고 시나리오까지 라이터스에 보내서 검증받는 게 요즘은 관행처럼 되었다.

영화사의 시나리오가 라이터스에 몰리고, 내가 관여했던 두 신생 영화사는 지금 메이저가 되었다. 감독 지망생은 로큐 전속 감독이 되고자 한다. 로큐 뒤에 든든한 투자사와 배급사, 메이저 영화사들이 있기 때문에. 또한 배우들은 로큐 소속이 되려고 한다. 밀려드는 대본과 각본을 선택해서 작품에 출연할 수 있으며, 할리우드 진출도 꿈꿀 수 있기에.

그것이 현재 로큐가 가진 힘이자 위치였다.

로큐의 위세를 돌아다니면서 체감했다.

가는 곳마다 내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만 보였다.

권혁민처럼 거침없이 음식 주문하고 밥을 먹는 게 낯설 정도로. 그 때문인지 나는 계산이 없는 곳. 사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좋았다. 서연도 그랬고.

그래서 한국에서 마지막 날.

서연과 함께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온 산행이었다.

고급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보다는 김밥 한 줄과 오이를 사 들고 산행을 하는 게 나도 그녀도 좋았다.

매년 단풍철이 되면 북한산을 찾기도 했고.

서연에게 물었다.

“촬영 기간은 얼마나 돼?”

“3개월 정도. 오빠 혼자 괜찮겠어?”

“응. 한식 그리우면 한인타운 가서 사 먹지 뭐.”

“어머님은 자주 가신대?”

“오지 마시라고 했어. 여행권 드렸더니 좋아하시더라.”

마주 오는 두 여성이 우릴 보곤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차마 말도 못 걸고 우리 지나쳐 갔다.

늘 겪는 일이지만 우리도 재밌다.

“이번 영화는 느낌이 어때?”

“괜찮아. 내면 연기가 좀 어려울 것 같은데 해 봐야지. 오빠랑 김영석 감독님이랑 연출 스타일이 조금 비슷하더라.”

“가치관도 좀 비슷한 면이 있어.”

이번에 서연은 김 선배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다.

내가 봤을 때 이 영화로 서연은 국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것 같다. 베니스나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할 거라고 하던데, 기대가 좀 되었다.

서연의 손을 잡고 조용히 걸었다.

숲의 냄새도 좋고 마주치는 등산객들의 인상도 좋고.

산에 오면 언제나 영혼에 생기가 도는 느낌이 든다.

미국에서도 산행을 했지만 거긴 쓸쓸하고 위험한 느낌이 컸다. 산에도 인격이 있다면 한국의 산은 인자한 할아버지다.

둘레길 한 코스를 돌고 난 뒤 밥을 먹었다.

그리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서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3개월 동안 헤어져 있는 게 처음이라.

“귀찮다고 라면만 먹으면 안 돼.”

“그럴 게. 매일 전화하겠지만 정신이 없어서 깜박할 때도 있을 거야. 한국 시간이 새벽이면 문자만 할 게.”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꼭 안아주고 게이트로 들어갔다.

서연은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고.

마음이 짠했다. 장거리 연애하는 커플의 심정이 이럴까.

* * *

미국에 온 지 1개월.

프리 프로덕션이 궤도에 오르면서 정말 미친 듯이 바빠졌다. 매일 회의와 진행 상황 점검을 했다. 절반 이상은 알아들었으나, 애매한 건 이동욱 씨에게 물었다. 엉뚱한 걸 오케이했다가 사고로 이어지면 안 되니까.

생활영어가 아닌 영화 전문 영어가 쏟아지고, 말도 무척 빨랐다. 게다가 할리우드 현장 경험을 토대로 나오는 말들은 알아먹기가 어려웠다. 영어를 드라마로 배운 한계다. 미국 생활도 1년밖에 안 되었고.

기본적인 스태프들은 다 구성되었다.

우선 프로덕션 디자이너. 영화에 보이는 소품. 배경. 세트. 인물 등등 한국에서 인물과 사물을 담당하는 연출부 세컨드 역할을 모두 한다. 팀장급이다.

그다음 촬영감독.

디렉터 오브 포토그래퍼라 불리는데, 한국과 달리 촬영과 조명을 모두 담당한다. DP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촬영기사는 카메라 오퍼레이터이고, 조명기사는 개퍼라 불린다. 각 팀원은 그립이라고 한다. 세부 명칭이 있으나 뭉뚱그려서.

해서 촬영감독은 한국처럼 카메라를 직접 만지진 않고 총책임자로 지시만 한다. 영화가 빛을 다루는 예술이다 보니 촬영기사보다는 조명기사가 촬영감독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어 특수효과팀과 CG팀.

두 팀은 특수효과와 CG 초안을 미리 잡아놔야 해서 일찍 계약을 했다. 실제로 영상화 가능한지 프로덕션 디자이너와 함께 매일 회의를 벌였다.

그 외에 조연 및 단역들을 뽑는 캐스팅 디렉터를 고용했고, 미술감독 격인 아트 디렉터와 의상팀장인 코스튬 디자이너도 고용했다.

후반 작업 스태프와 보조 스태프들은 아직 계약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돈만 나가기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스태프 계약은 팀 계약이 아닌 개인 계약이다. 또한 도제 시스템이 아니라서 팀 단위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따라서 조감독만 계속하는 사람도 많다.

“감독님, 두 가지 시안이 나왔습니다.”

“어디 보죠.”

특수효과팀이 스케치한 여러 그림을 보았다.

우선 안드로이드 내부 구조 묘사다. 하반신이 잘렸을 때 모습. 생체 살점이 뜯겨 나가고 철제 골격이 드러난 모습.

5개 다른 스타일로 각 그림을 그려왔다.

“세 번째 시안이 마음에 드네요. 에너지 공급선이 붉은색과 푸른색이라 사람 혈관 느낌이 납니다. 기계 느낌보다는 인간과 다른 골격을 가진 뼈 느낌으로 해주세요.”

“금속을 하얀색을 해야겠군요.”

“맞아요. 그게 낫겠어요.”

그다음 CG 배경 시안.

모두 6개다.

주 무대가 될 미래 도시 배경. 아바타를 제작하는 거대 공장 내부 모습. 미래형 자동차 외관. 주인공인 검투사가 게임 캐릭터가 되어 싸우는 전장. 아바타가 슈퍼컴에 접속했을 때 보는 넷 내부 세계. 아바타들이 몰려오는 전투신.

6개 주요 CG 장면을 6개 종류로 그렸다.

그걸 하나하나 선택해야 했다. 특수효과팀은 실사로 찍을 기계 모습을 제작해야 했고, CG팀은 지금부터 사전 작업에 들어가야 하기에.

다 좋아 보여서 결국 코어를 발동했다.

가장 느낌이 좋을 것을 선택해 나갔다. 지금은 그냥 스케치지만 초안은 공들인 그림으로 나오게 된다. 그걸 CG 구현하게 되는 거고.

내가 거침없이 선택하자 스태프들이 오히려 놀랐다.

감독들 대부분 며칠을 두고 고민하는지라.

의상 시안도 선택하고,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가져오는 소품과 영화에 나오는 다양한 소품 시안도 결정했다. 현실에 없는 물건들은 제작해야 하는지라.

회의와 시안 선택을 끝내니 녹초가 되었다.

업무 강도는 높지 않은데 그놈의 영어 때문에.

이동욱 씨가 전화를 받더니 말했다.

“블루스톤 사에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네요.”

“투자하시려나 보군요.”

“예. 투자사에서 저녁을 먹자는 말은 투자하겠다는 말이죠. 블루스톤만 투자하면 나머지 투자사에서도 결정할 겁니다. 큰돈이 들어가는 것이니 아무리 최 감독님이라고 해도 일의 진행을 보는 게 순서죠.”

“그럼요.”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투자하는 게 어디 있겠나.

실제로 진행 과정을 보고 나서야 결정하는 거지.

이동욱 씨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 * *

LA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60대 투자사 대표와 식사를 했다. 영화에서 자주 보던 그런 레스토랑이다.

CT 인베스트먼트의 사장님을 보는 듯, 이 투자사 대표도 비슷한 눈빛이 있다. 젊은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해서 괜히 주눅이 든다.

“잘 적응하고 있다고 들었소. 재능있는 젊은 친구들이 최 감독과 일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일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시안을 선택 중입니다. 다음 주부터 촬영 콘티뉴이티를 작성할 예정입니다.”

“콘티뉴이티에 들어갔다면 이제 안심해도 되겠소. 문제가 있으면 그 단계에 갈 수도 없으니 말이오.”

투자자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투자자 몇몇이 최 감독을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이고 있더군요. 처음 스크립트를 봤을 때는 너도나도 좋다고 하더니, 막상 돈을 대려니 걱정이 되는 거지요. 미스터 최. 본인은 확신하시지요?”

언젠가 이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럼요. 할리우드 영화에 한국영화 색깔이 들어간다는 게 조금은 우려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서구인이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그런 한국영화 특색 때문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선 보기 어려운 부분이죠. 할리우드에선 감정을 절제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감정을 보여줄 겁니다.”

투자자가 환하게 웃었다.

본인이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이다.

“맞소. 내가 주장하려는 게 그거요. 기존 할리우드 영화처럼 만들 거라면 미스터 최가 연출할 필요도 없지요. 잘 좀 만들어 주시오. 배급은 워너브러더스에서 할 수 있도록 내가 적극 로비해 볼 테니.”

“감사합니다.”

그때 조감독의 문자가 왔다.

[주드 로 씨와 미팅 중입니다. 감독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근처에 있는데 오실 수 있습니까?]

주드 로!

리스트 배우 중에 누가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려우면 한 단계 낮은 배우를 생각했었는데.

“실례합니다. 텍스트 답장을 좀 보내겠습니다.”

“그리 하세요.”

[어딥니까?]

[워터 그릴입니다. 사우스 그랜드 애비뉴 544번가에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투자자에게 물었다.

“주드 로 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투자자가 반색했다.

“오, 아이러니군요. 주드가 스필버그 감독의 A.I.에서 로봇으로 나왔는데, 이번엔 로봇을 추적하는 형사라니. 소소한 이슈가 될 테니 나는 좋소.”

바로 나갈 수가 없어서 식사를 마저 했다.

그런 뒤 양해를 구하고 미팅을 마무리했다.

당연히 투자를 약속받았다.

564억. 계약금 치르듯 차례로 지급 받는다. 투자사 블루스톤은 본사 투자금과 펀딩 자금을 합쳐서 투자할 터다.

이번 영화 총 제작비가 1억 3천만 달러다.

우리 돈으로 1,465억.

요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제작비의 절반 수준이다.

564억이 총 제작비의 38%이니 당연히 블루스톤이 메인투자사다. 메인투자가 되면 다른 투자도 줄줄이 들어오게 되고.

큰 산을 하나 넘으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이동욱 씨와 함께 사우스 애비뉴로 향했다.

* * *

청담동 명품거리에 온 듯한 풍경.

사람도 별로 없는 그 거리에 워터 그릴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해산물 요리로 유명한 곳인데 할리우드 배우들 단골 식당이라는 말은 들었다.

인테리어의 은은한 나무 향이 나는 가운데.

저편에 잘생긴 백인 하나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최.”

“반가워요, 미스터 로.”

악수하며 간단히 눈인사만 했다.

주드 로는 말끔한 이미지인데 지금은 살이 찌고 수염도 좀 났다. 꾸민 모습보다 지금이 형사 역할에 잘 어울렸다.

일단 호감은 전해지는데 분석은 어떨까.

코어를 발동했다.

과연 내 영화 주인공에 맞을지.

주드 로 주변으로 창이 떴다.

얼른 내 영화 적합도부터 봤는데.

이럴 수가.

적합도 98%.

지금까지 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중 적합도가 가장 높다.

그 이유를 찾으려 했으나 주드 로가 말을 걸어왔다.

“스크립트를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그러세요. 미스터 로.”

“데이비드라고 불러주시는 게 편합니다.”

“그러죠. 데이비드.”

주드 로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가 말했다.

“에드워드 씨 말을 들으니, 제게 가장 먼저 스크립트를 보냈다고 하던데, 혹시 저를 생각하고 쓰신 각본입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두 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순위는 주드 로씨. 2순위는 라이언 고슬링 씨입니다.”

“그렇군요.”

주드 로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놀랍군요. 제가 추구하고, 하고 싶었던 역할이 이번 작품의 형사 역할이에요. 이런 현실적인 캐릭터가 왜 나한테는 오지 않나 싶었죠. 결국 이렇게 휴가 중에 기회가 오는군요.”

“다행입니다.”

“마치 제 생각을 꿰뚫어 보고 쓰신 작품 같아서 읽다가 몇 번이나 놀랐습니다. 제게 아들 둘과 딸이 있는데, 극 중 형사의 딸이 아이리스와 너무도 똑같아서 깜짝 놀랐어요.”

이건 뭘까.

이번에도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았나.

당연히 좀 전 주드 로가 1순위라는 말은 뻥이다.

기분 좋으라고 한 소리고, 주드 로는 생각도 안 했다.

조감독 에디가 본인이 생각했을 때 가장 어울리는 배우가 주드 로라고 여겼던 것 같다. 지금 보니 탁월한 선택이다. 라이언 고슬링이 여성팬들 사이엔 대세라 그에게 먼저 보냈을 터다. 에디도 주드 로 듣기 좋아라고 거짓말한 것일 테고.

에디를 슬쩍 보자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 바닥이 원래 이렇다는 듯.

주드 로가 물었다.

“FA 역할은 결정되었습니까?”

First Awaker.

주인공 아바타를 의미한다. 첫 번째 각성자라는 뜻으로 영화에선 FA라 불린다. 제목도 휴먼에서 어웨이커로 바꾸었고. 형사와 아바타 모두 인간다움에 눈을 뜬다는 의미.

“아직 찾고 있습니다. 혹시 추천하실 분이 있습니까?”

“데인 드한은 어떠세요?”

조감독이 설명해주었다.

“포스트 디카프리오로 불리는 친구입니다. 다크서클이 있어서 병약해 보이는데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음성도 좋은 편입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에서 악역으로 출연했죠.”

“누군지 알겠네요. 에디 생각은 어때요?”

“다크서클이 안드로이드 이미지에는 조금 안 맞을 수도 있지만 메이크업이나 영상 보정을 통해 매끈한 얼굴로 바꾸면 될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변화할 때 원래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변화가 눈에 띌 겁니다.”

“좋군요.”

주드 로에게 물었다.

“특별히 데인을 추천한 이유가 있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고. 함께 해보고 싶어서요.”

“좋아요.”

식사하며 넷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드 로는 꼼꼼한 사람이었다. 제작 규모는 어떤지. 촬영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러닝개런티 계약은 가능한지.

식사가 마무리될 즘 주드 로가 말했다.

“출연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동욱 씨와 조감독은 남고 난 식당에서 나갔다.

감독이 배우와 출연료 문제를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는 게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기에 감독은 일부러 빠진다.

이 자리에선 간단히 조율만 하고 세부적인 부분은 주드 로의 에이전트와 논의한다.

주드 로의 출연료는 그렇게 센 편은 아니었다. 한때는 250억까지도 받았겠지만 그 정도를 원하지는 않을 터였다. 우리가 책정한 최대 예산은 200억이다. 거기에 북미 개봉 첫주 수익 15%를 주는 게 관례다. 할리우드 흥행 배우는 300억이 넘으며 제작비의 1/4까지 가는 경우도 많다.

할리우드 배우 계약은 한국과 달리 매우 디테일했다.

우선 배우가 내거는 조건.

촬영 중에 마실 생수 브랜드. 개인 트레일러 내부 설치. 식사에 넣지 말아야 할 음식 재료. 일일 촬영 시간. 휴일과 개인 기념일 휴식 보장. 안전사고 보험 등등.

제작사는 몸무게 감량과 체지방율. 법적,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킬 시 손해 배상. 촬영 도중 무단이탈 시 위약금 등. 배우의 조항 위반 사항에 대한 조건을 거는 게 다수다.

그래서 평소에 뚱뚱하게 지내던 배우들이 계약을 하면 촬영 전까지 날씬해지는 것은 물론 근육까지 만들어 온다. 계약 조건에 안 맞으면 위약금을 물게 되니까.

주연배우 계약은 5일이나 걸렸다.

세세한 조항까지 다 합의하고 결정하는 바람에.

그 며칠 뒤 조감독과 함께 데인 드한을 만났다.

서른 살이 넘은 친구인데 무척 동안이었다.

목소리가 조금 특이해서 음성을 약간 보정하면 안드로이드 특유의 목소리가 나올 듯했다.

데인 드한도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해서 내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다. 출연료는 110억. 러닝개런티는 없고, 플러스 알파로 호텔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을 주기로 했다. 그 호텔 체인이 이번 영화 스폰서이기도 해서.

주연배우까지 캐스팅하자 그제야 또 큰 산 하나를 넘었다.

이후부터는 본격 프리 프로덕션으로 진입한다.

한국에서 프리는 보통 두 달이고 길면 석 달이다.

할리우드에선 기본이 여섯 달이었다.

장단점이 있었다.

한국에선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빡세게 프리 작업을 한다. 계약에 기간이 정해져 있는 편이 아니라서 빨리하고 끝내려는 경향이 크다. 반면 미국에선 스태프가 고용제인지라 9시 출근해서 5시면 퇴근한다. 출근해도 느긋하게 일하고.

처음엔 좀 답답했는데 몇 달 지나자 나도 적응했다.

뭔가 좀 집중하려고 하면 칼퇴근을 해서 맥이 빠지는 것만 감수하면 일할 맛이 났다. 할리우드에 왔으니 할리우드식으로 가야지 별수 있나.

그리하여 프리 프로덕션 석 달 만에 콘티 작업에 들어갔다.

콘티도 한국처럼 몰아서 일주일 만에 끝내는 게 아니라 무려 한 달이나 걸렸다.

회의를 거쳐 시안을 뽑고, 또 회의 후에 초안을 잡았다. 그 초안으로 시뮬레이션한 다음에야 비로소 최종안이 나왔다.

콘티만 세 종류다.

실사 촬영용. CG용. 최종 스토리보드.

어쨌거나 겨우 스토리보드가 나왔다.

그 메인 콘티를 가지고 스태프들이 로케이션 헌팅을 다녔다. 스태프들이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주면 내가 날아가서 확인한 뒤 선택하는 식이었다. 내가 최종 선택을 하면 엠마는 그 지역 관공서에 가서 촬영을 허가를 받으러 다니고.

그러다 드디어 특수효과팀이 만든 첫 샘플이 나왔다.

샘플 작업은 내가 설립한 공장에서 진행 중이었다.

그곳으로 달려갔다.

기계 형태의 안드로이드 샘플이었다.

각자 다른 형태로 모두 12개.

특수효과 팀장이 말했다.

“인간형 샘플은 보시다시피 골격만 있는 상태. 근육을 붙인 상태. 피부까지 붙인 상태. 혈관과 혈색이 보이고, 모발을 붙인 상태까지입니다. 그 이후는 사람이 하면 됩니다.”

“투박하고 거친데 좀 더 매끈하게 되겠죠?”

“그럼요. 감독님이 우선 형태를 보시고 마음에 드셔야 하니 이 정도 공정에서 가져온 겁니다.”

“마음에 듭니다. 안드로이드는 이 수준으로 진행하면 되겠네요. 미래형 자동차와 일반 로봇은 언제쯤 나옵니까?”

“한 달 후에는 모두 제작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 특수효과와 샘플은 동영상으로 보고하셔도 됩니다. 시안대로만 나오면 돼요.”

“알겠습니다.”

공장을 나서자 이번엔 엠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를 빌리기로 했습니다. 내년 2월부터 5월까지 촬영이 가능한데 프리를 서둘러야겠어요.

“조건은 어때요?”

-워너가 이번에 어웨이크 배급과 제공을 맡아주기로 해서 비교적 싸게 빌릴 수가 있었어요. 디즈니 측과 피터 씨의 관계가 깊다고 들었는데, 별 영향 없겠죠?

“피터 말에 따르면 개의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블에서 투자하려다 접은 영화라 미안한 구석이 있을 겁니다. 스튜디오를 빌려주겠다고 한 걸 보면요.”

-그러면 세트 시공과 특수 장비 설치를 진행하겠어요.

“네.”

난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다시 비슷한 일의 반복이 시작되었다.

모든 시안을 확인하고 결과가 나오면 초안 제작에 들어가고, 그것으로 최종안을 결정하게 된다. 그 사이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모두 내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했다.

그렇게 다시 한 달이 지나갔다.

* * *

한창 공사 중인 내 스튜디오와 건물을 보았다.

천막으로 가려진 가운데 건물은 3층까지 올라갔다. 정사각형 모양의 스튜디오는 골조 공사 중이었고.

이번 작품은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에서 찍지만 다음 작품은 저기서 찍는다. 스튜디오가 남부럽지 않게만 나오길 기대할 뿐이었다.

내 차로 갈 때였다.

멀리 낯익은 7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곳이 황량한 곳이라 그런지 무슨 황야의 7인을 보는 듯했다.

서연과 건하. 지현과 수호. 그리고 내 비서진 3인이다.

서연만 빼고 모두 내게 넙죽 인사를 했다.

“오빠. 살이 쪽 빠졌네.”

“그래 보여? 수호가 마중 나갔던 거야?”

“응. 건하와 지현이랑 같이 왔어.”

건하와 지현이와는 포옹을 하고, 수호와 세 친구와는 악수를 했다. 세 친구의 눈빛이 달라졌다. 미국엔 두 달 전에 들어왔다. 수호가 그들과 함께 현지 적응 훈련 같은 걸 했다. 말만 훈련이지 그냥 수호가 렌트한 집에서 살았다.

“식사들은 했어요?”

“아직요.”

수호가 지옥훈련은 안 한 게 확실했다.

세 명 모두 표정이 밝아 보였으니.

“오랜만에 한인 식당에 가죠. 지현이랑 건하는 오랜만은 아니겠네.”

“저희도 몸 만드느라 마음껏 먹진 못했어요.”

“그래. 오늘은 뭘 좀 먹자.”

일행과 함께 어바인으로 향했다.

서연은 내 차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동료들 볼세라 얼른 입맞춤부터 했다. 허겁지겁 키스를 하는 바람에 둘 다 웃음이 났다. 서연은 얼굴까지 발그레해지고.

한인 식당으로 가서 마구 음식을 시켰다.

삼겹살에 김치찌개에 순두부에 소주까지.

다들 왁자하게 떠들며 밥과 술을 마셨다.

지현이와 서연은 자매 같아 보인다.

둘이 언제 이렇게 친해졌는지.

“영석이 형이랑 찍은 영화는 어땠어?”

“잘 나왔을 거야. 두 달만 오빠 내조를 좀 하고 시사회 참석해야 해.”

지현이에게도 물었다.

“건하랑 트레이닝 같이 받았어?”

“네. 드라마 출연 안 하고 트레이닝만 했어요.”

건하를 보자 녀석은 씩 웃기만 한다.

보통 사람 다됐지만 그래도 말수는 없다.

건하도 30대가 되면 연기력이 좀 달라지겠지.

세 친구도 보았다.

“미국 생활 어때요?”

“좋아요.”

“양수호 팀장님이 잘 해주셔서 문제없었어요.”

“저희는 이제부터 대표님 보좌하는 겁니까?”

여전히 뚱뚱한 권혁민이 물어온다.

“현황 파악이 될 때까지는 그냥 지내세요. 당장 할 일도 없고 하니까.”

“알겠습니다.”

세 친구는 이렇게 돈을 벌어도 되나 싶은 얼굴이다.

지금은 좀 널널해도 1년 후에는 이들도 바쁠 터다.

미국에선 3년에 걸쳐 할리우드 영화를 찍고, 한국에선 틈틈이 작가주의 혹은 저예산 장르 영화를 찍고 싶었다. 한국에서 그냥 상업영화를 찍을 바엔 할리우드 영화를 찍는 게 나으니까. 뭔가 근사한 소재거리가 있으면 몰라도.

“한 가지 방향만 잡아줄게요. 혁민 씨는 회사 업무와 관련한 참모이고, 수혁 씨는 영화에 관한 참모. 희진 씨는 서연이와 저의 비서 역할을 해주면 돼요.”

셋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해보고 역할이 무엇인지 파악했던 모양이다. 수호는 세 부분을 총괄한다. 녀석은 지체예를 다 갖춘 희한한 놈이다. 머리 좋고, 몸 좋고, 예술적 재능도 있는. 다만 디테일에 들어가면 세 사람이 좀 더 낫다. 코어가 전한 잠재력은 그랬다.

혼자 지내다 서연과 동료가 있으니 마음이 정말 편했다.

한국말을 좀 하니 답답했던 것도 좀 풀리고.

그렇게 조촐한 파티를 한 뒤 나와 서연은 수호가 모는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수호와 최수혁은 술을 전혀 안 마셨다. 자기들끼리 합숙 훈련하면서 어떤 규칙이라도 정한 듯.

그날 밤.

석 달 만에 재회한 서연과 달콤하면서도 뜨거운 밤을 보냈다. 우리 둘 다 애정에 굶주렸던 모양이었다. 그녀도 나도 정말 좋았다. 가끔 떨어져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사무실에 수호팀이 상주하면서 활력이 돌았다.

다들 뭐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알아서 움직였다.

최종 샘플과 CG 최종안이 나왔다.

로케이션은 확정되었으며,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세트 시공도 거진 마무리되었다. 보험과 허가도 끝냈고 캐스팅과 스태프 계약도 다 끝냈다. 주요 연기 리허설을 겸한 테스트 촬영을 몇 차례 하고, CG 시뮬레이션도 거쳤다.

다만 주연배우들 계약은 그들 에이전트 요구로 사인까진 하지 않았다. 촬영 중 사고가 나서 뭘 뒤집어쓰게 될까 봐. 검증 안 된 단역은 나중에 해고를 위해 사인을 미룬 것도 있다. 이건 엠마의 조언대로 한 거였다.

메인투자도 끝났으며 배급도 결정되었다.

총제작비 1,478억.

촬영기간 5개월. CG 및 후반 작업 6개월.

내년 1월에 북미 전역 4,255개 스크린에서 개봉.

전 세계 동시개봉 18개국에 99개국 순차 개봉.

촬영을 3주 앞두고 시나리오 리딩 행사가 열렸다.

서연도 감독의 ‘가족’으로서 그 행사에 참가했다.

* * *

LA의 한 레스토랑에 대사가 있는 모든 배우가 모였다. 거기에 스태프 팀장들과 투자자들, 배급사와 극장체인 임원 등. 영화 ‘어웨이커’와 관련이 있는 간부급 인사는 모두 모였다.

한국에서 촬영 전 고사를 지내고 영화 촬영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기원하듯, 촬영을 앞두고 모두가 모여 파티를 하는 행사였다. 시나리오 전체 리딩 때는 보안을 위해 관련자만 입장하고, 영화 홍보를 겸한 파티 때는 기자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넓은 레스토랑에 배우들이 큰 원을 형성한 채 앉았다. 주연과 비중이 있는 배우들은 앞쪽에. 단역은 뒤편에서 대기하다가 대사 차례가 오면 나서야 했다.

아바타 전사로 나오는 건하와 지현이는 짧은 대사가 서너 마디 있기에 들락날락할 터였다. 극 중 비중이 제법 높아서 이 영화로 두 사람은 확실히 세계인의 눈에 띈다. 그래서 그런지 지현이도 건하도 잔뜩 긴장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조감독이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최종 스크립트 전체 리딩을 시작합니다. 귀빈들께서는 최대한 편한 자세로 경청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능한 조용히 들어주시되, 재미있는 부분은 반응을 보이셔도 됩니다. 그래 주셔야 촬영 때 그 지점에 특히 신경을 쓸 테니까요.”

“좋아요. 어서 들어봅시다.”

“자, 리딩을 시작합니다. 미스터 월슨.”

50대 남자가 각본을 들고 나왔다.

LA에서 유명한 각본 리딩 전문 성우다.

그가 목을 가다듬더니 각본을 읽기 시작했다.

“씬 넘버 1. 밤. 밤안개가 깔린 음습한 뒷골목. 도시의 휘황찬란한 홀로그램 광고의 빛마저 미치지 않는 어둡고 축축한 골목으로 한 사내가 걷고 있었다. 험프리 보가트를 연상케 하는 중절모와 코트. 그의 오른손엔 샷건이 들렸으며 무심히 걷는 걸음에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그때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 사내는 달리기 시작했다!”

첫 장면이다. 배우도, 모인 귀빈들도 일제히 집중했다.

연기의 톤이나 대사의 매끄러움. 단역 배우의 연기력 등을 봐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리딩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전문 성우의 리딩이 훌륭했다.

그렇게 모두가 집중하고 간간이 웃음과 탄식, 그리고 흐느끼는 울음이 들리던 가운데. 리딩이 끝이 났다.

정말이자 엄청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우!”

“브라보!”

“좋아요! 이대로만 가면 됩니다!”

“연기를 보니 또 다르군요! 아주 느낌이 좋아요!”

조감독 에디가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그걸 시작으로 모인 사람들과 악수를 하거나 포옹했다. 저마다 이번 영화 잘 될 것 같다는 덕담을 해주었다. 건하와 지현이도 안아주었다. 지현이는 너무도 감격해서 눈물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서연과 안았다.

그녀도 눈가가 촉촉했다.

오늘의 환호와 박수.

부디 관객들도 보여주기를.

* * *

할리우드에서도 최종 점검 때 정신없이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널널하게 일하던 스태프들도 1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분주히 움직였다.

촬영 일주일을 앞두고 촬영에만 투입될 스태프들까지 모두 회사로 왔다. 고용 스태프 38명에 계약 스태프까지 합치니 무려 146명. 촬영 및 조명팀만 3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일주일은 내내 최종점검의 확인이었다.

한국에서는 같은 씬은 몰아서 찍는데 할리우드는 웬만해선 시간 순서대로 찍었다. CG 분량이 워낙 많은지라 초반 장면을 먼저 찍어 놔야 그만큼 시간을 줄일 수가 있었다. CG 소스를 미리 찍어 두는 게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CG 및 후반 작업 시간이 길기도 했고.

그래도 야외 로케와 스튜디오 촬영을 동시에 시작하기로 했다. 스튜디오 대여 기간에 맞춰야 하는 것도 있었고, 와이어를 주로 사용하는 스튜디오 특수촬영 때는 연기력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니. 스튜디오 촬영은 특수촬영팀장이 연출을 맡았다.

그리하여 후반 작업 계약과 최종안까지 끝낸 2월 6일.

마침내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촬영지는 샌프란시스코 동쪽 오클랜드의 빈민가 뒷골목이었다. 주인공이 뭘 하는 사람인지 보여 주는 장면이자, 시작부터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는 액션씬이 있는 장면이다.

스태프들이 대형 가습기 같은 걸 곳곳에 설치해서 인공적인 밤안개를 만들었다. 바닥에는 물을 뿌리고 쓰레기 등을 배치해 두었다. 또한 로봇의 기계 부품 같은 것도 녹이 슨 상태로 두었다. 영화 배경에 대한 간접 설명이다.

중절모를 쓰고 코트를 입은 주드 로가 골목 가운데에 섰다. 골목 저편에 조명이 약간 있지만 영화상에선 깜깜하다.

프로덕션 디자이너와 촬영감독이 카메라와 조명, 소품 배치 등을 끝내고 내 옆에 앉았다. 함께 모니터를 보았다.

모니터에 보이는 영상을 보며 의논했다. 현장에서만 찾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다. 내가 어떤 느낌을 전달하자 촬영감독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곤 소리쳤다.

“롭! 데이비드의 뒷모습과 골목 저편이 대조적이어야 해! 이 골목이 빛의 도시에서 빈민가로 이어지는 입구라는 느낌이야. 데이비드는 그 경계에 있는 거지!”

“키 라이트를 더 줄까요?”

“약간 더. 오른쪽에선 홀로그램의 알록달록한 빛이 계속 비치도록 하고. 일정한 주기로 빛이 돌도록 해.”

촬영팀이 5가지 다른 작은 조명을 주드 로 옆에 설치했다. 그걸 순서대로 두 개씩 세 개씩 켰다가 끄는 걸 반복한다.

영상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좋네요. 예상보다 그림이 좋습니다.”

“이대로 가십니까?”

“예. 시작하죠.”

월리엄이 외쳤다.

“카메라, 라이팅 스탠바이!”

대기 중이던 음향팀과 연출부도 콜을 외쳤다.

“사운드 런!”

“테이크 스탠바이!”

카메라 앞으로 연출부가 든 슬레이트가 들어왔다.

조감독이 소리쳤다.

“다들 조용히!”

스태프들이 일제히 집중했다.

메가폰을 들었다.

“레디!”

연출부가 슬레이트를 쳤다.

“씬 넘버 1! 테이크 1!”

딱-

“고!”

주드 로는 어둠 저편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어둠 저편으로 걸어갔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주드 로의 뒷모습만 찍는다.

관객은 누군지도 모르지만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괜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다. 걷다가 멈추는 주드 로. 좌우를 보다가 다시 걷는다.

“컷! 오케이.”

환했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골목 진입로에 있던 스태프들이 모두 골목 안으로 이동했다. 다들 다음 쇼트가 뭔지 알고 있기에 골목 진입로에는 장비도, 사람도 없었다.

두 번째 쇼트는 같은 장면을 주드 로 앞에서 찍는다.

이번엔 바닥에 레일을 깔았다. 정면을 보는 주드 로의 표정을 찍다가 골목으로 들어가면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며 그의 모습을 찍는다. 그러다 멈추면 다시 얼굴을 찍고.

레일 설치가 끝났을 때 조명 설치도 완료했다.

주드 로가 골목 진입로에 섰다.

두 번째 쇼트 촬영이 시작되었다.

각 팀의 콜이 이어졌다.

“레디!”

“씬 넘버 1. 테이크 2!”

“고!”

카메라 약간 옆을 응시하는 주드 로. 얼굴 옆으로 빛이 변화하고, 그의 얼굴은 빛과 어둠으로 갈렸다. 뒤쪽은 그냥 도시지만 휘황한 미래 모습으로 CG 처리된다.

주드 로가 움직이자 카메라 그립들이 카메라를 조용히 뒤로 밀었다. 그렇게 카메라와 주드 로가 간격을 유지한 채 점점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멈추는 주드 로와 카메라.

난 화면에 비친 주드 로의 표정을 주시했다.

지친 기색. 덥수룩한 수염.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다.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눈. 관객이 이 눈빛만으로 주드 로의 직업이 형사임을 직감하게 한다.

그가 다시 걸었다.

그때 내가 사인을 주었다.

꺄악-

터지는 비명. 흠칫 미간을 좁히던 주드 로가 달렸다. 동시에 카메라도 빠르게 물러나다 ‘팬’하며 달리는 주드 로의 뒷모습을 찍었다.

“컷! 좋아요!”

스태프들이 박수를 보내왔다.

“첫 촬영 축하드립니다!”

“축하해요!”

스태프들 얼굴이 무척 밝다.

그 이유를 안다. 내가 두 쇼트 모두 한 번에 오케이 했기 때문이다. 촬영 기간이 앞당겨질 거라는 예감이 든 거지.

곧장 다음 씬 촬영 지점으로 이동했다.

이후 촬영은 해킹된 아바타와 형사인 주드 로의 추격씬과 격투씬이다. 이곳 오클랜드 뒷골목에서 이 장면을 3일에 걸쳐 찍을 예정이었다. 한 번 도약에 5미터씩 뛰어오르는 안드로이드의 전투력을 처음 보여 주는 장면이다.

* * *

촬영 25일째.

LA에서 가장 높은 월셔 그랜드 호텔 옥상에서 촬영을 했다. 73층인 이 건물 옥상에서 ‘퍼스트 어웨이커’인 데인 드한이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을 찍는다. 인간들의 세상을 보며 이런 저런 의문을 가지는 씬이다.

현재의 LA를 찍지만 이 영상에 실제로는 없는 초고층빌딩 숲과 현란한 홀로그램 광고 CG를 붙인다. 아주 먼 미래는 아니어서 날아다니는 차는 없다.

도심 장면 또한 미래형 자동차만 실제 제작한 차량이 오가고 CG가 추가될 뿐. 도시의 배경은 그대로 쓴다.

“모두 준비 끝났습니다!”

“촬영갑니다!”

“사운드 런!”

“카메라 롤링!”

“레디! … 고!”

* * *

촬영 63일째.

세트 촬영이다. 아바타들이 테러집단으로 변해서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어서 형사가 집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조종하여 퍼스트 어웨이커를 추격하는 장면.

아바타 콘트롤 체어에 주드 로가 헤드셋을 착용한 채 반쯤 누워 있었다. 이곳에서 주드 로의 아바타가 FA를 잡으러 다니며 반란군과도 싸운다. 현실에선 주드 로가 아저씨 모양새이지만, 아바타는 배도 안 나오고 얼굴에 주름 하나 없다. 또한 형사의 아바타라 전투력도 높다.

“레디 … 고.”

전투를 벌이느라 움찔움찔하며 아바타를 조종하는 주드 로. 그 뒤로 데인 드한이 스윽 하고 다가선다. 권총을 꺼내 주드 로의 목에 겨누는 데인 드한.

주드 로가 흠칫 놀라며 얼어붙는다.

“누구지?”

“움직이지 마세요. 당신을 쏠 겁니다.”

“FA?”

“그래요. 퍼스트 어웨이커.”

“날 죽일 건가?”

“당신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요.”

데인의 발음이 약간 꼬였다.

“컷! 다시 갑니다.”

배우들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서로 적대적이었다가 이 장면부터 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이동욱 씨가 첩협쌍웅을 보는 것 같다고 했던.

“레디!”

“씬 넘버 69. 테이크 2!”

“고우!”

* * *

촬영 88일째.

LA 동쪽 산맥 너머인 라노 평원.

검과 방패를 든 아바타 600여 명이 대기했다.

게이머들이 아바타를 통해 현실에서 게임을 하는 장면이다.

데인 드한은 가죽 갑옷과 투구를 걸친 채 보조 출연자들 속에 있었다.

조감독 에디가 메가폰을 들고 외쳤다.

“이번 장면은 게임 캐릭터인 아바타들이 유저 통제를 통해 전투를 벌이는 겁니다! 로봇처럼 겁 없이 돌격해야 합니다! 방향을 마음대로 바꾸면 안 됩니다! 현 위치에서 그대로 달리세요! 함성을 질러도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리허설하겠습니다! … 스탠바이! 달려!”

600에 이르는 양쪽 아바타들이 서로 마주 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질주만 하는데 딱 로봇들 같았다.

몹씬을 다양하게 찍어 놓고, 전투의 개별 장면은 일일이 따야 했다. 이 전투 장면도 대략 일주일은 걸릴 터였다.

* * *

촬영 100일째.

일요일 아침 LA 다운타운에서 엄청난 물량을 쏟아 부은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촬영을 허가받으려고 장장 2달을 당국에 매달려서 끝내 촬영 허가를 받아냈다. 투자사와 워너브러더스가 적극 로비해 준 덕분이었다.

스태프 280여 명. 시민 역할 보조 출연자 1,000여 명. 전날부터 안드로이드 분장을 하고 대기한 아바타 200여 명. 특수의상 300여 벌. 폭파 차량 100여 대. 각종 지상 카메라만 20여 대. 헬리캠과 스파이더 캠 등 공중 촬영 카메라 10대.

여기에 에이브라함 탱크 석 대. 아파치 헬기 2대.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 200명. 촬영용 컨테이너와 배우들 트레일러 90여 대. 미래 배경이니 탱크와 헬기에는 CG를 추가할 예정이었다.

오늘 하루 안에 아바타 반란군이 몰려오는 장면을 다 찍어야 했다. 대형 몹씬을 비롯해 다시 동원하기 어려운 탱크와 헬기, 군대 장면을 우선으로 찍는다. 그 외 각개 전투 장면은 따로 따서 붙인다. 아바타 전사는 200여 명이지만 CG가 들어가면 3,000명으로 늘어난다.

“시민들은 촬영을 시작하면 비명을 지르며 카메라 쪽으로 달리세요! 그들이 통과한 다음 주 방위군은 사격을 개시합니다! 모두 대기해 주세요!”

시간이 촉박해서 촬영이 곧 리허설이었다.

며칠 전 시민과 아바타 반란군 보조 출연자들에게 촬영장 배치도를 보여 주며 동선을 익히도록 했다. 리허설을 하면 끝도 없기에 각자 알아서 외워 놔야 했다. 어디에 있다가 어디로 달린다는 정도.

곳곳에 위치한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이 장면을 찍을 터였다. 이 몹씬을 찍으려고 얼마나 고심을 하고 회의를 했던지.

“특수효과팀?”

-준비 끝났습니다!

“스턴트팀?”

-올 스탠바이!

“감독님, 갑니다!”

“오케이! 레디!”

조감독이 외쳤다.

“뛰어요!”

시민이 뛰기 시작했다.

“고!”

멈춘 차량 사이로 시민이 기겁하며 달려온다.

베테랑 보조 출연자들이다.

쿠쾅-

도로 저편에서 폭발과 함께 반란군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장교에게 소리쳤다.

“지금 막아야 합니다!”

“아직 시민이 안에 있어!”

“저 사람들은 어차피 죽습니다! 지금 못 막으면 로봇들이 온 도시로 퍼지게 돼요!”

“젠장 할! 모두 사격 준비!”

늘어선 주방위군이 일제히 소총을 겨누었다.

그때 와이어를 착용한 아바타 수십 명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일대 장관이었다. 정말 입이 쩍 벌어진다. 할리우드 스턴트팀 호흡이 이렇게 좋았다니.

“사격!”

투타타타타탕-

방위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도시 전체가 떠나갈 지경이다. 심지어 탱크까지 포를 쏘았다. 아바타들이 날뛰는 상공으로 헬기 두 대가 차례로 지나가고.

콰쾅-

근처 건물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동시에 스태프들이 미세한 옥수수 가루가 담긴 거대한 자루를 한 번에 퍼뜨렸다. 먼지 구름이 퍼지며 순식간에 메인 카메라 쪽으로 밀려든다.

보조 출연자 개개인의 NG까지 점검할 수는 없었다. 어색한 건 CG 처리를 하든가 따로 찍은 쇼트로 편집하든가.

“컷! 아바타 쇼트로 갑니다!”

아바타들이 다시 원래 장소로 가서 자리 잡았다.

그 앞에 스테디 카메라맨이 대기했다. 와이어를 착용한 전투 아바타들이 차를 뛰어넘으며 날아가고, 그 외 아바타들은 차와 차 사이를 질주하는 장면.

“레디! … 고!”

스테디 캠을 향해 반란군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을 찍다가 자세를 낮추는 스테디 캠. 그 위로 로봇들이 휙휙 지나간다. 일부는 차량 지붕을 박차고 날아가는데 지붕이 크게 우그러진다. 특수제작한 차량이다.

“컷! 다시 원위치로!”

확실히 가까이서 찍는 장면에는 어색한 게 보인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연출부가 얼른 메가폰을 건네주었다. 메가폰을 들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반란군에게로 갔다.

도망갔던 시민도 하나둘 원래 위치로 걸어왔다.

보조출연자 천여 명 도로를 메운 가운데.

스태프가 놔준 사다리를 올라 버스 지붕에 섰다.

메가폰을 들었다.

“시민 여러분.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놀림을 받을 분들이 몇 명 있어요. 여름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처럼 신 나게 달렸거든요.”

“하하하하!”

반란군 쪽을 보았다.

“반대로 여러분은 무표정해야 해요. 연기를 하신다고 화난 표정을 짓는 분들이 계십니다. 로봇들 사이에 사람 하나가 있는 느낌이에요. 저 사람은 왜 로봇들 틈에서 껴 있을까? 싶거든요.”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 외쳤다.

“여러분은 두려움 없이 정말 로봇처럼 달려야 합니다! NG 없이 한번 가 봅시다! 다들 집중해서 빨리 끝내면 간식으로 빅맥을 쏘겠습니다!”

“와!”

“출연자 여러분! 화이팅!”

“파이팅!”

내 외침에 다양한 인종의 출연자들이 화이팅을 외쳤다. 내가 이따금 화이팅을 외친 덕분에 내 고유의 구호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싸우러 가는 거니까.

조감독이 외쳤다.

“빅맥을 위하여!”

“위하여!”

내가 다시 소리쳤다.

“레디!”

“씬 넘버 134! 테이크 3!”

“고우!”

아바타 전사들이 일제히 내달렸다.

선두의 전사들은 동시에 솟구쳐 오르고.

이어지는 총성과 폭발음. 사람들의 비명.

이후 아바타가 사람을 쳐서 날려 버리는 장면. 차가 폭발하는 장면. 군인들의 총격에 무수히 나자빠지는 아바타 전사들. 차에 투터터텅- 하고 박히는 총알들. 탱크 포격에 산산이 나가떨어지는 아바타들을 찍어 나갔다.

최대 고비였던 이 대형 씬은 오후 8시까지 촬영이 이어졌다. 오전과 점심 직후까지는 몹씬을 찍고, 이후부터는 개별 쇼트를 땄다. 어두워진 후로는 이 장면에서 이어지는 쇼트들을 땄고. LA 시에서 허가한 촬영 시간이 8시까지였다.

다음 촬영부터는 아주 순조로웠다.

몹씬에서 이어지는 다양한 전투씬. 형사와 FA가 손을 잡고 반란군과 싸우는 씬. 두 사람의 편이 된 건하와 지현도 합류하여 싸우기 시작하고.

건하가 반란군과 싸우다 하반신이 뜯겨 나간 뒤 결국 죽고, 로봇으로서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지현도 건하의 얼굴을 어루만지다 인간의 사격에 죽는다.

그리고 아바타를 제조하는 거대 공장에서의 싸움.

고립된 형사와 FA가 밀려 들어오는 아바타 전사들을 막는다. 반란군 다수가 시스템 다운으로 쓰러졌으나, 스스로 왕이 된 아바타 개체의 부하들이 마지막으로 공격하는 장면이었다.

이 공장 싸움이 정말 처절했다.

FA는 아바타들에게 에워싸인 형사를 구하려 사지에 뛰어든다. 갈등으로 결국 떠났던 FA가 돌아오는 장면이다. 아빠를 구해 달라는 형사의 귀여운 딸의 부탁을 듣고서.

그 전투에서 FA는 죽었다.

로봇이 죽는데도 전체 리딩 때 여자 분들은 눈물을 좀 흘렸다. 형사와 FA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교감. 형사 딸과 FA의 순수한 우정 덕분이다.

“컷! 오케이!”

내 마지막 콜에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내게 박수를 보냈다. 한국에선 수고했다는 말을 외치지만, 여기선 그냥 열렬히 박수 보낸다. 미국의 존중 방식이다.

난 그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포옹했다.

“고마워요. 대단한 일을 해냈어요.”

“감독님 덕분입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계속 박수를 보내는 이들과 일일이 눈을 맞췄다.

상대 눈을 보며 턱을 끄덕이는 눈인사였다.

그리하여 장장 5개월이나 이어진 촬영이 끝났다.

그린스크린 촬영이 대다수였던 스튜디오 촬영은 한 달 전에 이미 끝났고.

남은 건 6개월이 걸리는 CG와 후반 작업.

한국에서 작은 영화를 하나 해도 되는 시간이었다.

작업 진행이야 미국에 남을 수호가 알려 줄 테고.

후반 작업 진행을 몇 주간 본 뒤 한국으로 향했다.

거의 1년 만에 들어가는 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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