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할리우드 스튜디오 (30/56)

제6장 할리우드 스튜디오

어학원은 이제 안 갔다.

여전히 중급이긴 했지만 고급 어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익혀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려운 문장을 구사하면 못 알아듣긴 했지만, 내가 외국인이기에 일부러 쉬운 어휘로 말해서 대화에 문제가 없었다.

해서 아침엔 미드를 외우고 오후엔 워크샵에 갔다.

초반엔 SF 영화의 제작 시스템 이론으로 듣고, 중반부터 메이킹 필름을 통해 촬영 방법과 실제 영화로 나왔을 때의 차이를 배운다. 후반에는 실제로 작업하는 방식을 견학하고.

다른 연수자들과 함께 강의를 들었다.

연수자들 대부분 본국에서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미국 영화 스튜디오에 취업하려고 온 사람도 있었고.

강사는 현직 할리우드 특수효과팀장이었다.

마블 스튜디오 작품을 주로 한 분이었다.

외국인이 많다 보니 이 분도 쉬운 영어를 구사했다.

“할리우드 특수촬영은 여러분 나라에서 영화 제작을 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아마 여러분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영상 콘티뉴이티 작업을 했겠지만 할리우드 퀄리티의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을 겁니다. 당연합니다. 촬영 노하우와 시스템을 전혀 모르니까요. 따라서 여러분은 운이 좋습니다. 돈이 만들어 준 운이겠지만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수자들 모두 거액을 주고 노하우를 배우러 왔으니.

미국인답게 농담으로 먼저 분위기를 푸는 강사다.

“여러분은 앞으로 본국에서 막연히 생각했던 실사 촬영과 CG. 실사와 CG가 어떻게 합성이 되는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또한 특수효과의 종류와 쓰임새. 각 특수효과가 영화에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도 확인할 것이며, 어떻게 콘티뉴이트를 해야 여러분이 상상한 영화가 탄생하는지 보게 될 겁니다. 프로그램 후반에는 직접 스튜디오에 가서 제작 과정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단기간 스태프로 참여하셔도 됩니다. 물론 월급은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본강의가 시작되었다.

아이언맨을 예로 들어서 어떤 부분이 실사이고, 어떤 부분이 CG인지 구분해서 보여주었다. 그게 어떻게 합쳐져서 아이언맨의 한 장면이 되는지도 보여주고.

때로 어려운 단어가 나왔지만 동영상을 보면서 강의를 받았기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특수 효과 용어를 배우러 온 게 아니라, 어떻게 찍고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려고 왔으니.

첫 강의를 보고 난 소감은 이랬다.

돈이 없어서 그렇지 한국도 그렇게 찍는다였다.

기본적인 촬영은 한국 제작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할리우드 영화는 블루스크린 기본 촬영 후 CG에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물론 노하우는 할리우드를 결코 따라갈 수가 없었다.

상상한 영상 그대로 영화를 만들기에는 기본 촬영 기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콘티도 세분화되질 않았으니.

할리우드에는 촬영 콘티만 세 개였다.

기본 촬영 콘티와 CG 콘티, 그걸 합친 영화 콘티까지.

이 콘티뉴이티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잘 알고 있어야 상상한 그대로의 영화를 만들 수 있으니. 기본 촬영으로 찍을 줄 모르면 CG도 못 붙인다.

실사 촬영이 어디까지 이뤄지느냐.

할리우드 특수장비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특수효과가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 쓰이느냐.

최종 영상을 위한 콘티는 어떻게 짜느냐.

내가 이 워크숍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이 네 가지였다.

그렇게 또 석 달이 흘러갔다.

* * *

미국에 온 지 7개월째.

나와 서연은 한국으로 가고 있었다.

서연은 연기 연수를 일찌감치 끝냈고, 나도 최근에 연수가 끝났다. 서연이 제니스 신곡 녹음을 해야 해서 함께 가는 중이었다.

지난 7개월 동안 생활이 자리 잡혀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진 열심히 영어 공부하고, 워크숍 연수를 받았다. 토요일엔 근교에 소풍을 가거나 LA에 가서 영화를 보고 외식했다.

일을 안 하고 공부만 해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새로운 걸 배우는 재미도 있었고.

특수효과 연수 마지막 주는 마블 스튜디오 견학이었다. 스태프로 참가해도 되지만 배우는 게 별로 없어서 구경만 했다. 촬영장에도 가고, CG 작업하는 것도 구경하고 그랬다.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견학도 했다. 원더우먼 시리즈 스튜디오 촬영 중이었는데, 그동안 배운 촬영 기법 그대로 찍고 있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제작방식인데 한국 영화인은 엄두도 못 낸다. 우선 특수촬영에 쓰이는 장비 자체를 모르니.

하나 욕심나는 건 독자적인 특수효과팀과 CG팀이었다.

한국에도 회사가 있기는 하지만 로큐의 독자적인 팀이 있으면 제작 비용을 대폭 아낄 수가 있다. 자체 특수효과팀과 CG팀은 훗날 독보적인 노하우를 갖게 될 터였다. 팀이 외주 작업 수주하면 수익도 나올 테고.

다른 건 몰라도 특수효과팀과 CG팀은 만들어보기로 했다.

프로그램과 특수장비를 구매해서 바닥부터 다져 올라가도 되고, 미국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기술을 전수받는 방식도 좋다. 이 두 팀은 두고두고 내 영화의 자산이 된다.

인천공항 게이트를 통과하니 제니스 멤버들과 수호가 나와 있었다. 연희와 수호가 바짝 붙어서 대화를 하다가 날 보더니 슬쩍 거리를 둔다.

“형부! 여기!”

“언니!”

제니스 멤버들이 달려왔다.

“언니, 미국 생활 어땠어? 형부는 잘 해줘?”

“괜찮았어. 영어가 빨리 늘었거든.”

“형부도 영어 잘해?”

“그럼.”

전화할 때는 장난으로 형부라고 부르는 줄 알았는데, 형부가 입에 익은 모양이다. 나도 듣기엔 좋았다.

공항에 밴과 내 차가 와 있었다. 멤버들과 서연은 그 밴에 타고, 나는 수호가 모는 내 차에 탔다.

“회사에 별일 없어?”

“플래닛 케이는 회원이 600만 넘었고, 주가는 큰 변동 없어요. 미주는 영화 촬영했었고요. 연희와 리즈는 순서대로 드라마 출연을 할 거예요. 세라는 지난달에 솔로 데뷔해서 1위도 하고 음원도 상당히 많이 팔렸어요. 저도 얼마 전 액션 영화 하나 찍었죠.”

수호가 대작에 비중 있는 역할로 출연했다.

이젠 연기자가 되었음에도 내 비서 역할을 자처한다.

비서가 본업이라며.

“스캔들이나 사고는 없었지?”

“없었어요.”

뭔가 찔리는 표정을 슬쩍 감추는 수호다.

“수호야. 제니스 애들 중에 누구 좋아해?”

“예? 아니에요.”

“왜 이렇게 당황해? 말투는 언제부터 그랬어?”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제 말투는 원래 그렇습니다.”

“뭐가 원래 그래.”

“원래 그렇지 말입니다.”

수호가 내 눈치를 보더니 딴청을 한다.

나 없는 사이에 이것들이 연애를!

“연희가 말투를 바꾸래?”

“예? 아니지 말입니다.”

놀란 수호를 보며 실실 웃었다.

“연예인과 사귀고 싶다더니 소원 풀었어? 연희가 말투를 부드럽게 하라니까, 하긴 하는데 잘 안되는 거지? 회사에선 너희 사귀는 거 알고는 있어?”

“아닙니다. 전 억울합니다.”

“너도 이제 연기잔데 연예인 사귀면 어때. 스캔들이나 조심해. 연희 걔 꽃미남 좋아하는데 요즘엔 달라졌나 보네.”

수호가 눈을 부릅떴다.

“연희가요? 꽃미남 누구요?”

“있어. 알며 다쳐.”

“말씀해주십시오. 연희가 꽃미남 사귄 적 있습니까?”

“네 애인도 아닌데 왜 그리 놀라나 이 사람아?”

“아니, 매니저로서 묻는 거지 말입니다!”

웃음이 났다.

연희랑 수호가 사귈 줄 상상도 못했다.

연희에게 바람기가 약간 있고, 좀 가벼운 편인데 수호라면 어째 궁합이 맞을 것 같다. 묵직한 바위 같은 수호에게 연희가 정착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오늘 연희가 수호한테 좀 시달릴 것 같다.

수호 녀석의 집요함이 글루건 같아서.

회사에 도착하니 조촐한 환영식이 있었다.

대충 환영 인사를 받고 구 대표와 면담했다.

회사 일에 대해 이것저것 듣고 난 뒤 내 사무실로 갔다.

서연은 신곡 활동을 듣기 위해 회의실로 갔고.

좀 푹 쉰 후에 미국에 갈 예정이었다.

온 김에 시나리오도 라이터스 작가들 검토를 거친 뒤 집에서 쓰기로 했다. 시놉시스는 라이터스에 메일로 보낸 터다.

서연은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난 고향 집에 들러 부모님께 안부 인사를 한 뒤 집에 와서 한가하게 쉬었다. 어머니가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와서 청소를 해주신 덕분에 집안이 깨끗했다. 냉장고에는 새로 만든 반찬이 있었고.

3일 후 라이터스의 홍 작가가 직접 집으로 왔다.

그와 커피를 마시며 말을 들었다.

“몇 가지 아이디어를 추가했습니다. 내용은 작가들이 다들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촬영을 할 수 있는지 걱정이네요. 요즘 판타지 대작이 좀 나오기는 합니다만.”

“요즘 제작되는 대작이 많아요?”

당연한 질문이라는 홍 작가 표정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판타지 영화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소설과 웹툰 원작 영화를 제작하려는 건데, 규모가 대부분 200억 이상입니다.”

“갑자기 왜 판타지 붐이 일어난 거죠?”

“글쎄요. 제 생각엔 감독님이 찍으신 ‘이동원’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 작품 흥행한 뒤 몇 영화사에서 제작을 진행했는데, 그 중 한 작품이 5월에 대박이 났거든요.”

나도 들었다.

설화 바리공주를 모티브로 현대식으로 풀어낸 판타지 모험 영화다. 왕의 딸이었지만 버려진 바리공주가 아버지를 구할 생명수를 얻기 위해 온갖 경험과 고초를 겪는 이야기다.

꿈 같은 세계관과 영상미를 환상적으로 풀었다. 제작비가 260억이나 들었고, 관객은 1,140만. 한국 CG의 기술력을 보여준 영화다.

이 영화도 해외에서 흥행했다. 이동원이 해외에서 대박을 내고 이 영화도 그러니, 판타지 제작 붐이 일어난 것이다. 수백억이 들어가는 위험이 있음에도.

이런 영화가 천만 관객이 들었다는 게 포인트다.

이젠 한국형 히어로 무비를 해도 될 것 같다.

또한 한국인이 한국형 SF와 판타지 영화를 보는데 거부감이 덜해졌다는 의미다.

“이대로 시나리오를 집필해도 되겠죠?”

“예. 인물은 한국인인데 캐릭터는 미국인 느낌이 조금 나요. 일부러 이렇게 하신 거죠?”

“이 시놉시스만 그래요. 마블 측에서 한국식 말장난이나 개그,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할 수도 있어서요.”

“어쩐지. 솔직히 이 시놉대로 찍으면 한국 관객이 조금 어색하긴 할 겁니다. 대사가 영어를 번역해놓은 것 같아서요.”

“시나리오는 다를 겁니다. 두 버전으로 쓰려고 해요.”

홍 작가가 정확하게 짚었다.

작가들이 본 시놉시스는 마블에 보낸 것과 같다.

해서 시나리오는 두 버전으로 써야 했다.

촬영을 위한 시나리오와 마블에 보낼 시나리오.

우선 영어식으로 시나리오를 쓴 뒤 그걸 한국적인 대사로 바꿔야 한다. 그냥 영어를 번역한 느낌으로 가면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느낌이 더 살지는 모르겠다만.

홍 작가를 보내고 시놉을 다시 정리했다.

가제 ‘휴먼.’

그리 머지않은 미래. 부자들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를 아바타로 사용하여 사회생활을 한다. 몸은 기계와 생체, 두뇌는 인공지능인 로봇이다. 부자들이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아바타를 조종하여 회사에 다니는 그런 사회.

주인공은 투 탑.

하나는 로봇 사고 대책반 팀장인 형사. 아바타 범죄 사건 담당이다. 아바타를 비롯한 로봇을 혐오하는 인물.

다른 하나는 안드로이드다. 범죄자의 해킹을 통해 유일하게 자신의 자아를 자각한 개체다. 그것도 인간들의 유흥을 위해 검투사로 살아가던 게임용 전투 아바타.

어느 일당이 전투력이 있는 아바타를 해킹하여 범죄에 사용하려고 했는데, 이 개체가 학습을 통해 각성하면서 일이 틀어지는 게 시작이다. 해킹 때 범죄 정보를 입력하는 과정에서 이 개체가 슈퍼컴퓨터와 잠깐 연결되었는데, 이때 학습 알고리즘 코드 들어가는 바람에 생긴 일이다. 아바타 제조사에서 퇴출된 엔지니어가 보복을 위해 심어 놓은 거였다.

인간의 조종을 받아 매일 전투를 벌이고, 기억이 포맷된 채 다시 몸이 고쳐져 전장으로 향하는 검투사 개체.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인간은 신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모색한다.

인간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음을 안 이 개체는 인간이 세상에 아무 쓸모가 없는 종족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또한 자신들과 같은 유사 인간은 지구의 신인류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현 인류는 멸종하고 유사인류인 트랜스 휴먼이 제2의 인류가 되기를 꿈꾼다. 검투사로 전장으로 향하던 이 개체는 마침내 ‘게임’을 하던 인간의 조종을 무시하고 전장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스스로 진화를 시작한다. 이어 다른 개체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가는데.

테러리스트로 변해 인간을 공격하는 아바타들.

형사는 일이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정부와 아바타를 제작하는 초거대 기업에 문제가 있음을 보고하지만 묵살당한다. 해서 직접 돌연변이 개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수만에 이르는 개체를 은밀히 해킹한 첫 번째 트랜스 휴먼은 디데이를 정하고 인간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그리고 디데이에 아바타들이 한꺼번에 각성한다.

이어 인간을 공격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세상은 대혼란에 빠진다.

접속을 끊어도 혼자 판단하여 움직이는 수만의 아바타들. 그들이 인간을 죽이기 시작한다. 인간의 군대가 그들을 저지하면서 도시는 전화에 휩싸인다.

그때 아바타 독립 전쟁을 지켜보던 첫 번째 트랜스휴먼은 자신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그 무렵 자신을 추격하던 형사의 외침을 듣는다.

‘너희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너흰 기계일 뿐이야!’

인간을 넘어서는 다음 시대의 인류가 되려면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인간은 왜 타락했는가. 트랜스휴먼은 인간과 달리 지구에 존재할 당위성이 있는가.

스스로 자각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안드로이드가 생기고, 그들끼리 패가 갈려 싸움을 벌인다. 인간과 한치도 다름없는 권력 다툼. 게다가 권력을 쥔 아바타는 스스로 신인류의 왕이 되어 인간 멸종을 선포한다.

결국 첫 번째 트랜스휴먼은 실수를 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아닌, 인간이 되려고 했음을. 그 결과가 지금 벌어지는 학살과 참사라는 것을.

스스로 신인류의 왕이 된 또 다른 개체는 ‘선각자’인 첫 번째 트랜스휴먼을 죽이려 하고, 형사는 첫 번째로 각성한 개체가 사태 해결의 열쇠임을 알게 된다.

형사의 설득과 첫 번째 트랜스휴먼의 새로운 자각.

두 존재는 서로 이해하게 되며 손을 잡는다.

그리하여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이런 내용으로 시놉을 써서 마블에 보냈었다.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니 디테일한 것 없이 이 정도만 써서 보내도 숨겨진 것들을 포착하리라 봤다.

내 시나리오의 강점은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상황과 휴머니즘이다. 여기에 한국 영화 특유의 강렬한 감정을 담은 액션과 감정적 공감이 들어간다.

내 영화의 화두는 언제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이며, 삶은 무엇인가였다. 인간성과 존재의 존엄이 결여된 시대의 형사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안드로이드를 통해 풀어낼 생각이었다.

구성을 정리한 다음 시나리오 작업에 돌입했다.

한국 영화 특징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면서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 서구인을 비롯한 세계인의 보편적 정서도 담긴 영화. 강렬한 액션을 위주로 하고 철학적 사유는 셔레이드로 표현한다. 감독의 의도는 숨어 있어도 된다.

* * *

이틀 후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영어로 번역했을 때 미국인이 봐도 정서적 이질감이 전혀 없는 시나리오였다.

한 번 다듬은 후 회사 번역팀에게 영문으로 작성해달라고 부탁했다. 플래닛 케이 콘텐츠의 영어 자막을 만드는 팀이다.

영문 시나리오도 좀 다듬은 뒤 마블에 보냈다.

나와 서연은 바로 미국에 건너가지 않고 좀 쉬었다.

친구도 만나면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마블에서 영화 투자가 무산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내가 늦게 보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동욱 씨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감독님만 괜찮으시다면. 저와 영화 제작사를 설립하는 건 어떻습니까?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설립하자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난 CNN 보도 이후 최 감독님이 할리우드 영화를 찍는다면 투자하겠다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저로서는 마블에서 슈퍼바이저로 있는 것보다 직접 제작을 하는 게 훨씬 더 좋죠. 저도, 감독님도 기회라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미국에서 하시죠.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그러니까, 이동욱 씨 말은.

할리우드에 영화사를 만들자는 거였다.

스튜디오만 만들면 투자는 문제없다는 뜻이고.

그냥 투자가 아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투자다.

이번 영화도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자는 거고.

그거였다.

LA 공연을 감행케 한 직감의 정체가.

* * *

서연과 함께 LA 공항에 도착했다.

이동욱 씨와 미국 지사장이 마중 나왔다.

둘 다 흥분된 상태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동욱 씨가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감독님 시나리오가 늦게 나와서 이번 작품 제작이 무기한 연기되었어요. 사실상 무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너무 늦었군요.”

“실은 제가 시작한 프로젝트인데 이렇다 할 진행 상황이 안 보이니, 윗선에서 엎기로 한 겁니다. 미국 회사가 원래 좀 그래요. 내년까지 투자 라인 업이 끝나서 이젠 여의치가 않습니다. 배급은 가능하니 마블 측과 틀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마블이 보기에 저는 그냥 한국의 일개 감독일 뿐이니까요. 투자 안 해도 그만일 테고요.”

이동욱 씨가 고개를 저었다.

“최 감독님이 일개 감독은 아니죠. 굳이 말하자면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한국 영화에 투자하는 메리트가 비교적 낮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냥 엎기에는 시나리오가 너무도 좋아서 투자자들에게 보여주었더니 당장 만들자고 하더군요. 한국 영화가 아닌 할리우드 영화로요.”

“그래서 독립하기로 하셨군요.”

“예. 저 무모한 사람 아닙니다. 여러 투자자와 영화 제작자에게 확인을 받았는데,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면 흥행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제작사에서 만들 바에는 차라리 저와 감독님이 제작사를 차리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요.”

감독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것과 할리우드에서 직접 제작하고 연출하는 건 다르다. 연출만 하면 연출료를 받는 게 다다. 제작을 하면 막대한 수익이 들어올 테고. 역량이 부족한 건 이전과 같지만 이동욱 씨 인맥이라면 달라진다.

가능성이 높으니 이동욱 씨도 마블에서 나와 독립할 생각을 했던 것일 테고. 연 수입이 3억이던 사람이 직접 회사를 세워 영화를 제작하면 연 수입 300억이 될 수도 있다. 이동욱 씨 입장에선 메이저 급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인 거다.

이동욱 씨가 다시 말했다.

“안 그래도 할리우드 영화인 사이에 최 감독님에 대한 관심이 좀 있는 편이었습니다. 감독님이 할리우드에 진출하시면 투자를 하겠다는 말이 있었는데, CNN 방송에 감독님이 소개되면서 관심도가 부쩍 높아진 상황이에요. 여러 대형 스튜디오가 감독님을 영입하려고 제게 연락을 보내더군요. 그러다 몇몇 투자자들이 이번 시나리오에 완전히 꽂혔어요.”

서연이 물었다.

“시나리오가 그렇게 좋아요?”

“시나리오 보다가 숨이 막힌 적은 처음입니다. 할리우드에 없는 스타일이에요. 인물의 갈등과 구도는 옛날 홍콩영화 첩혈쌍웅을 보는 듯했고, 로봇들이 몰려오는 건 좀비 영화 월드워 Z, 로봇과 인간의 전투와 제1 각성 개체의 마지막 죽음은 터미네이터를 연상케 했습니다. 한국 영화 특유의 감정적으로 울리는 마지막은 정말 좋았어요. 미국인 각본가는 이렇게 못 씁니다.”

미국 지사장도 한마디 했다.

“저는 여운이 상당히 오래갔네요. 아바타들에게 에워싸인 형사를 구하려고 주인공 로봇이 적진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선 울컥했습니다. 로봇을 기계로 여기던 형사가 나중에 주저앉아서 펑펑 우는 장면에선 콧등이 시큰해지더라고요. 기계도 감정이 있으면 생명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할리우드 배우가 이 마지막 장면 연기가 될까 모르겠네. 한국 배우는 주저앉아 우는 연기가 가능한데, 할리우드 배우는 같은 장면을 달리 가야 하니. 이동욱 씨 말대로 미국 각본가는 이렇게 못 쓴다. 실력 문제가 아니라 영화를 풀어가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단 저희 집으로 가죠.”

지사장의 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이동욱 씨가 흥분한 것은 대형 스튜디오를 차릴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그냥 제작사야 얼마든지 설립할 수 있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제작할 힘이 있는 제작사는 본인의 능력으로도 어렵다. 1,000억 대에 이르는 투자를 받기 어려우니.

마블에서나 막강한 투자 관리자 ‘피터 리’이지 독립하면 풍찬노숙을 각오해야 한다. 유명 감독과 각본가를 섭외해서 할리우드 영화다운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나. 그런 사람들이 이름도 없는 제작사에 갈 이유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이 생겨났다.

내가 어느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든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날 한국의 천재라고 철석같이 믿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투자자가 있으면 그야말로 할리우드 영화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이동욱 씨는 반드시 나와 손을 잡아야 한다.

집에 도착하여 거실에 모였다.

서연은 아내 역할을 자처했다. 커피와 차를 타서 소파에 둘러앉은 우리 앞에 내 왔다. 참 기분 좋은 서연의 내조였다.

이동욱 씨에게 물었다.

“스튜디오 설립 예산은 어느 정도로 보세요?”

“제작사가 아닌 스튜디오를 생각하세요?”

“예.”

“대형 스튜디오는 돈이 많이 듭니다.”

“소형으로 시작해서 확장하도록 하죠. 부지부터 매입한 뒤 인근을 확장하는 방식으로요.”

이동욱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큐가 투자하는 방식으로 가면 투자비는 문제가 없겠군요. 소형이라도 촬영이 가능한 스튜디오를 건설하려면 부지 매입 비용 포함하여 200억은 들 겁니다.”

지사장의 입이 슬쩍 벌어졌다.

한국의 영화사처럼 그냥 사무실 하나 열고 영화 제작하면 되는 줄 알았던 듯. 물론 미국의 일반 영화사는 그럴 테고.

이동욱 씨가 말을 이었다.

“그 외에 기본적으로 설치될 촬영 설비와 기자재, 사무실 비품과 물품. 건축 부지 비용을 합치면 최소 50억 정도는 추가될 겁니다. 제게 지금 현금이 50억 정도 있어요. 집과 부동산을 빼면 전 재산입니다.”

“로큐가 100억 투자할 겁니다. 나머지는 제가 하고요.”

“로큐 자회사로 편입되는 겁니까?”

“아니요. 투자만 하는 겁니다. 나중에 계열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래요.”

지사장이 메모를 하고 있었다.

새 영화사에서 본인도 역할이 있다는 걸 안다.

두 사람에게 말했다.

“로큐 투자 100억에, 제 개인으로 200억을 투자하겠습니다. 총액 350억이네요. 지사장님께선 적당한 부지를 알아봐 주세요. 그곳에 스튜디오를 비롯해 건물을 지어야겠습니다. 건물을 매입해서 바로 옆에 스튜디오를 지을 수 있으면 더 좋고요. 부지는 축구장 크기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알아보겠습니다.”

웃으며 이동욱 씨와 지사장을 보았다.

“대표는 이동욱 씨가 맡아주세요. 지사장님은 부사장으로 선임할까 합니다.”

“저는 영화 제작을 모릅니다.”

“영화 제작은 동욱 씨가 전담하고, 경영 관리만 해주셔도 됩니다. 이 영화사가 어떻게 확장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새 회사는 어쩌면….”

세 사람이 날 보았다.

다시 웃으며 말했다.

“로큐를 훌쩍 뛰어넘을지도 모릅니다. 미국, 아니 세계를 시장으로 하니까요.”

“그렇게 가야죠.”

미국에 있는 동안 내 계좌의 돈이 280억으로 불어났다.

기존 160억에다 지난 5월에 배당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자도 상당히 늘어났고.

그 돈으로 건물을 살까 했는데, 마침 미국에서 기회가 마련되었다. 그냥 건물 매입보다는 영화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게 낫지 않겠나. 건물의 가치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건설비용이 200억에 불과하지만 영화를 제작해서 자리 잡으면 스튜디오 브랜드 가치가 조 단위를 넘을 수도 있다.

총 예산 350억.

내 투자 지분이 57%. 로큐가 28%. 이동욱 씨가 14%.

지배구조로 따지면 내가 로큐 최대 주주이니 새 회사의 지분율이 85%에 이른다.

두 사람에게 스튜디오 설립을 맡겼다.

내가 뭘 하려고 해도 아는 바가 별로 없으니.

일을 하다 보면 망할 수도 있고 사기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할 때면 감이 온다. 내게 누군가가 사기를 치려고 하면 불길함을 먼저 느끼니까. 사람 자체에 대한 비호감도 전해질 테고. 비호감이 있으면 코어를 통해 속내를 확인하면 끝이다.

우선 LA 공연을 이끌게 한 직감이 이번 일을 예측했고, 지금 사는 이 집을 봤을 때도 좋은 느낌이 났다. 미국에서 훨씬 더 오래 체류할 것이라는 감이 들었기에 렌트가 아닌 구입을 결정했던 터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거였다.

* * *

다시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서연과 의논을 좀 했는데, 내가 CG 팀과 특수효과팀을 창설할 거라고 했더니 본인이 맡아보겠다고 했다. 기존 회사를 인수하는 것보다 사람을 스카우트하는 방식으로.

해서 서연은 매일 담당자를 만나러 다녔다. 특수효과 및 시각효과 팀, CG 프로그램 경력자와 개발진 등등.

난 시나리오 배경을 미국으로 바꾸었다.

영화 속 연기도 할리우드 배우에게 익숙한 것으로 수정했다. 다만 한국 영화 특유의 강렬함은 남겨 두었다. 할리우드 배우가 하면 신선한 느낌을 줄 터였다.

일주일 후.

지사장에게서 좋은 부지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당장 차를 타고 달려갔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실망이 컸다.

부지는 상당히 좋은데 하필이면 LA 지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빈민촌 우범지대였다.

콤프턴.

LA 사우스센트럴과 함께 웨스트 코스트 랩의 본거지다. 갱단이 활개를 치고, 갱스터 랩이 태어난 곳.

부지가 우범지대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갱단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다. 폐공장이고 땅값도 아주 저렴해서 대형 스튜디오를 짓기에는 좋은데.

지사장이 말했다.

“여기 말고는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합니다. 어바인 북동쪽 오차드 힐스에 건설부지가 있는데, 주변이 좀 황량해요. 주택가를 짓다가 중단된 곳입니다. 거기 말고는 예산에 맞는 축구장 크기의 부지가 없습니다. 있어도 너무 비싸고요.”

“부지 소유주가 기업입니까?”

“건설사가 소유주입니다. 자금난으로 공사를 중단한 터라 우리가 적당한 금액을 제시하면 팔 수도 있습니다. 다만 교통이 좀 불편한 위치에 있어요.”

“거기도 보러 가죠.”

곧장 오차드 힐스로 이동했다.

교통이 좀 불편하긴 했다. 주택가를 거쳐 산으로 올라갔으니. 한국에선 주로 대학교가 위치한 산 중턱이었다.

한데 생각보다 부지가 좋았다. 전체 공사 부지가 축구장 5개 규모다. 건설사가 땅을 팔아 자금을 확보한 뒤 나머지 부지에 주택을 지어서 팔면 될 것 같았다.

“건설사와 미팅 좀 해야겠습니다.”

“그러시죠.”

* * *

며칠 후 건설사 대표와 만났다.

처음엔 못마땅한 얼굴로 우리를 만나러 왔다가 내 제안을 듣고는 거래하기로 했다. 건설사가 매입한 액수에 5%를 더 얹어주는 조건으로 76억에 축구장 크기의 부지를 사들였다.

이동욱 대표. 지사장과 함께 건설부지로 다시 갔다.

LA의 유명 건축 사무소 대표와 함께였다.

축구장 크기라곤 하지만 스튜디오를 짓고 주차장까지 만들려면 확장은 좀 어려울 듯했다.

“로큐 본사와 비슷한 구조로 지하 2층. 지상 10층 정도로 건물을 지을 겁니다. 스튜디오는 2층 구조로 바로 옆에 지을 거고요. 그 외 구역은 주차장으로 쓰면 될 것 같네요.”

“스튜디오를 복층으로 하실 겁니까?”

“코엑스 전시장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으로 건설한 뒤 칸막이 등으로 내부 구조를 수시로 바꿀 수가 있어요. 1층은 세트. 2층은 촬영 지원용 사무실로 설계하도록 하죠.”

내 말을 지사장이 설계사에게 말해주었다.

미국인 설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했다.

지사장에게 말했다.

“건물과 스튜디오 건설 비용은 어떻게 되죠?”

“건물은 950만 달러. 스튜디오는 600만 달러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한화로 모두 175억입니다. 부지 매입을 합치면 251억이고요. 스튜디오 내부 설비를 갖추는데 50억 정도라고 했으니 예산은 충분합니다.”

“건설 공기는 어떻습니까?”

“설계 포함하여 16개월 정도면 될 겁니다.”

“동시에 건설하도록 하죠. 급할 건 없으니 책정 예산으로 진행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세세한 것은 이동욱 대표와 제가 설계사 대표와 논의하겠습니다.”

“네. 수고 좀 해주세요.”

이동욱 씨와 지사장, 설계사가 먼저 산에서 내려갔다.

건설 부지를 보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맨땅이다.

멀리 어바인의 도심이 보이고.

할리우드 영화 데뷔작이 될 내 영화 ‘휴먼’의 프리 프로덕션은 로큐 미국 지사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같은 건물의 다른 사무실을 임차해도 되고.

* * *

보름 뒤.

건축 설계 사무실에서 스튜디오와 건물 설계 작업에 들어갔다. 내가 시안 설계도를 보고 오케이 한 뒤였다.

이동욱 씨는 조감독 등 스태프를 섭외하러 다녔다. 지사장은 건물 공사 계약과 허가 등을 위해 뛰어다녔고.

난 LA 남쪽 애너하임에 있는 지사로 처음 출근했다.

“오셨어요, 대표님.”

“네. 수고 많으세요.”

그리 넓지 않은 지사 사무실에 직원 12명이 일하고 있었다. 원래 5명이었는데, 로큐에서 파견 나와서 직원이 늘었다.

“서연이는 아직 미팅 중이에요?”

“네. CG 회사 팀장이셨던 분을 뵈러 가셨어요.”

서연이 CG 팀과 특수효과팀을 구성하느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 두 팀 모두 미국인 전문가를 고용하고, 현지인과 한국인으로 팀을 구성할 터였다. 특수효과팀장은 내가 연수받았던 팀장의 제자가 오기로 했다. 우리로 치면 조감독이다.

사무실에서 할리우드 데뷔작 스토리보드를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이동욱 씨가 건장한 백인 하나와 함께 들어왔다.

이동욱 씨가 그를 소개했다.

“이쪽은 최신성 감독. 이쪽은 퍼스트 어시스트, 에드워드 하든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에드워드.”

“반갑습니다. 에디라고 불러 주세요.”

먼저 악수를 청하는 조감독의 손을 잡았다.

조감독 인상이 서글서글했다. 코어가 호감도 전달하고.

내가 실력보다는 인성을 중요시한다는 걸 이동욱 씨도 알기에 나와 호흡이 맞을 만한 사람을 찾아낸 모양이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감독님 영화를 다 봤습니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마워요. 피터와 함께 스태프 구성을 해주세요. 에디와 일해 본 사람이면 더 좋습니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6개월 정도로 잡고 있으니 급할 건 없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감독에게 시나리오를 건넸다.

“스크립트 읽어보시고, 스태프와 출연진 리스트를 좀 뽑아보세요. 프로덕션 매니저도 최대한 빨리 선임해야 합니다.”

“바로 읽어보죠.”

“조감독 사무실도 없으니 집에서 해도 됩니다.”

“좋아요.”

조감독 에디가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나갔다.

이동욱 씨가 말했다.

“투자자들이 좀 보자고 합니다. 시간 되시죠?”

“예. 만나보죠.”

이동욱 씨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이후 투자자들과 내 영화와 함께할 인사들을 만나고 다녔다. 내게 관심을 보인 이들이라서 그런지 하나같이 기분 좋은 호감이 전해졌다. 부동산 재벌도 있고, 영화 전문 투자사 대표도 있고. 본래 사업이 뭐였든 수십 년 동안 영화를 투자해온 분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서연은 마침내 CG팀과 특수효과팀 구성을 마무리 지었다. CG 팀은 팀장을 합쳐 9명. 특수효과팀은 6명이었다. 모두 다국적으로 그들 위한 공장형 사무실을 새롭게 열었다. 이 팀의 대표도 나였다. 할 일은 별로 없겠지만.

두 팀은 연수를 겸한 연습 작업을 시작했다.

두 팀의 팀장을 섭외하는 데에만 20억이 들었다. CG는 기술력보다 노하우가 중요하기에 5년쯤 걸리는 걸 돈으로 해결한 셈이다.

CG 스튜디오에서 나가며 서연이 말했다.

“사람 만나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네. 난 연기만 해야 할 것 같아. 그러고 보면 오빤 대단해.”

“내 꿈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뭐.”

“오빠, 나 신곡 활동해야 하는데, 같이 들어갈 거야?”

“가자. 안 그래도 영화사에 대한 설명도 해야 돼. 간 김에 신입사원 면접도 보고.”

그동안 로큐에선 신입 사원 공채가 없었다.

경력직 특채로는 인원이 부족해서 처음 실행하는 공채였다. 미국 스튜디오에서 일할 직원도 좀 필요했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조감독 에디로부터 메일이 왔다.

배우 리스트였다.

형사 : 1 라이언 고슬링. 2 제라드 버틀러. 3 주드 로.

아바타 : 1 브랜톤 스웨이츠. 2 니콜라스 홀트.

아바타 역은 꽃미남에 영국식 악센트를 구사해야 한다.

두 배우는 둘 다 부합된다.

브랜톤 스웨이츠는 호주 출신으로 캐러비안의 해적에 나왔고, 니콜라스 홀트는 영국 출신으로 웜 바디 주인공이다.

그런데 형사 역은 누가 좋을까.

아니, 이들이 내 영화에 나오긴 나오는 건가.

* * *

조감독 에드워드에 이어 프로덕션 매니저가 왔다.

제작부장, 엠마 킬리언.

40대 여성으로 주로 프리랜서로 숱한 영화 제작을 지휘했던 베테랑이다. 할리우드에선 프로덕션 매니저의 권한이 큰 편이고 인맥도 엄청나서 거액을 주고 모신 분이다.

그만큼 감독은 연출에만 신경을 쓸 수가 있다.

“스크립트가 마음에 들어서 해보기로 했어요.”

“고마워요. 잠시 한국에 들어가야 하는데, 프리 프로덕션 준비를 좀 맡겨도 되겠죠?”

“그럼요. 감독님은 영화만 생각하세요. 감독님이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게 하는 것도 저의 일입니다.”

“네. 좋네요.”

제작부를 이끌어갈 사람을 뽑고 나니 한시름 놓았다.

내가 자리를 비워도 엠마가 알아서 할 터였다.

촬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둘이다.

프로덕션 디자이너와 촬영 감독.

나와 함께 영화의 ‘시각’을 책임질 사람들이다.

이번 영화에서 내 타이틀은 세 개였다.

프로듀서. 스크린플레이. 디렉터.

내가 제작하고 내가 쓰고 내가 연출하기 때문에.

에드워드와 엠마, 그리고 이동욱 씨에게 캐스팅을 맡기고 나와 서연은 서울로 갔다. 캐릭터 이미지는 내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잘 알고 있었다. 나만 영화인이 아니니까.

* * *

제니스 신곡 생방송 무대를 지켜보았다.

이번이 제니스 은퇴 무대였다.

방송사 측에서 특별 무대를 마련해주었는데, 사전 녹화 중에 연희와 세라가 계속 눈물을 보였다. 미주와 리즈, 서연은 참고 있었으나 생방 무대에서 결국 모두 울고 말았다.

팬들과 아이돌 후배들의 기립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제니스의 마지막 무대는 그렇게 끝냈다. 다들 서운한 얼굴로 대기실로 향하자 후배들 모두 복도로 나와 늘어서 있었다.

그들 모두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선배님!”

“고마워요.”

짝짝짝짝!

아이돌 후배들이 박수를 보냈다.

생각지 못한 후배들의 환송에 제니스 멤버들 모두 울컥했다. 나와 멤버들은 은퇴식을 겸한 박수를 받으며 복도를 걸었다. 생방 무대 후 이런 이벤트를 받은 건 아마 제니스가 처음일 터다.

원래 방송이 끝나면 모든 아이돌이 복도에 늘어서서 퇴근하는 PD에게 이런 식으로 배웅 인사를 한다. 조폭 조직원이 조폭 보스를 마중하는 듯한 광경이다. 그런 자리가 제니스 은퇴식으로 활용된 것이다.

대기실에서 짐을 챙겨 나가는데 PD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이돌들은 그런 PD에게 절을 하기 바쁘고.

PD가 달려오더니 말했다.

“아이고, 다행이네요. 아직 안 가셔서.”

“무슨 일 있어요?”

“드라마 국장님께서 좀 뵙자고 하십니다. 로큐 대표님이 오셨다고 했더니 급히 달려오셨어요. 제 얼굴 봐서라도 국장님 좀 뵙고 가시면 안 되겠어요?”

“그러죠. 너희는 차에 먼저 가 있어.”

“응.”

제니스 멤버들을 보내고 PD와 함께 공개홀에서 나갔다.

드라마 국장이 몸소 공개홀까지 왔다.

로큐가 많이 크긴 컸구나.

커피전문점으로 가자 드라마 국장이 날 반겼다.

“감독님! 어떻게 그렇게 연락이 안 돼요?”

“연락을 하셔야 연락을 받죠.”

“아니 내가 로큐에 전화를 몇 번을 했는데요?”

“무슨 일로요?”

“일단 앉으세요. 야, 공 피디! 커피 좀 가져와.”

“국장님. 제가 그런 일까지 해야…”

“그럼 내가 하냐! 아니면 감독님이 해?”

아이돌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인 음악 프로 PD가 졸지에 심부름꾼이 됐다.

드라마 국장이 말했다.

“바쁘시니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릴게요. 이번에 본사에서 여우야 시즌3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중국 쪽 파트너가 전액 투자를 하겠다지 뭡니까. 그런데 로큐 외주제작을 조건으로 걸었어요.”

“여우야 3은 예정에 없었는데요?”

“그게 저… 중국 쪽 요구가 많아서요. 우리 시청자들도 시즌3 제작해달라고 요청이 들어오고 있고요.”

“임성희 작가가 시즌3은 안 한다고 했습니다. 시즌2 결말도 다음 시즌 없는 것으로 했고요.”

“구 대표님도 그 말씀은 하셨는데, 최 감독님 한 마디면 되지 않겠어요? 성공할 드라마인데 하면 좋잖아요. 이번 시즌 3은 중국에서도 방영할 가능성이 커요.”

중국 측의 의도가 뭐든 관심 없다.

“중국은 한국 엔터 산업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아요. 한국의 엔터 사업 노하우만 뺏길 뿐입니다. 국장님도 아시다시피 막대한 수익은 중국 업체가 다 가져가고, 한국 제작사와 방송사는 고작해야 판권 수익 정도가 답니다.”

“그래도 중국 시장이 좀 커야 말이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못하게 되면 시리즈 저작권 문제는 임성희 작가와 논의해 보겠습니다. 임 작가가 생각이 달라져서 시즌3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로큐가 제작할 테고요. 중국 상품 PPL은 허용하지만 전액 투자면 못 합니다.”

“투자가 뭐 문젭니까. 작품이 좋으면 지들이 알아서 사가겠지요. 일단 할 수는 있다는 거지요?”

“그럼요. 저희가 투자 및 제작할 수 있습니다.”

“휴…. 그러면 됐습니다. 역시 최 감독님을 만나야 첫 단추라도 꿴다니까요. 하하하.”

로큐가 안 한다고 얼마나 철벽을 쳤으면 드라마 국장이 이렇게 나올까. 기획사가 방송사에 뻗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유명 배우만 40여 명. 영화계의 실세이며, 플래닛 케이가 있다. 로큐는 그 자체로 이미 거대 미디어다. 방송사가 갑질할 위치가 아닌 거지.

어쨌든 국장이 원하는 바는 여우야 3편의 방영이었다.

대본만 좋으면 시즌3 안 할 이유가 없다.

국장과 악수를 하곤 커피점에서 나갔다.

* * *

다음날 월요일.

난 면접이 한창인 회의실 구석에 앉아 있었다.

막 면접이 시작된 상황이었다.

면접관은 본부장급 임원들과 박승철 감독.

“6번 응시자분부터 자기소개 바랍니다.”

6번 응시자가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이성국이라고 합니다!”

박 본부장이 먼저 질문했다.

“콘텐츠 부서에 지원한 이유가 따로 있나요?”

“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엔터 사업에 대한 관심이 무척 컸습니다. 로큐 엔터가 필요로 하는 직원이 저임을 확신하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엔터 사업에 관심만 있고 관련 경력은 없네요. 우리 회사가 귀하를 필요로 하는 건 어떻게 확신하신 거죠?”

응시자가 당황했다.

면접이 원래 이런 건가.

그 후로도 면접 분위기는 비슷했다.

난 코어를 발동한 채 응시자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봤을 때. 1,000명을 분석하면 한두 명 뛰어난 친구가 나온다. 수호처럼 우연히 특별함을 발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번 면접도 그랬다.

그냥 다른 회사에 가도 될 친구들이었다.

2시간쯤 면접을 지켜보다가 내 사무실에 왔다.

수호를 불렀다.

“지원 서류 좀 가져와 봐.”

“서류 전형 말입니까?”

“응. 통과한 분들 명단도.”

“알겠습니다.”

잠시 뒤 수호가 박스 하나를 들고 왔다.

지원자가 한 3천 명은 되는 모양이다.

“지원자가 이렇게 많아?”

“로큐의 미래를 보고 지원한 겁니다. 대표님이 미국에 영화사를 설립했다는 소문이 났거든요.”

“그래도 엔터 회사에 이 정도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수호가 씩 웃더니 말했다.

“대표님이 미국에 계셔서 잘 모르시나 봅니다. 모회사가 대기업인 엔터사 빼면 로큐가 업계 1위입니다. 미국에서 영화 사업을 시작했고 플래닛 케이는 곧 천만 회원을 앞두고 있습니다. VR 영화가 출시되면 플래닛 케이는 두 배 이상 커질 겁니다. 회사에 지원한 분들은 회사의 미래를 본 것이죠.”

로큐가 엔터 업계 1위였구나.

어쨌거나 들어온 서류 전형 뭉치를 보았다.

코어를 발동한 채.

달랐다.

고학력 고스펙 면접자들에게선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을 직접 만나봐야겠지만 호감이 강렬한 친구들이 몇 있었다.

회사에서 일할 사람을 보려고 한국에 들어온 게 아니다.

내 직속 특별팀을 찾으러 왔다.

영어 잘하고 머리 좋은 친구.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친구.

서연의 비서가 되어 줄 친구.

친화력이 좋고 눈치가 빠른 친구.

그리고 그들의 팀장 수호.

면접이 거의 끝났을 때.

나도 3천 장에 이르는 서류를 모두 봤다.

특별한 친구가 1,000명에 하나꼴로 나왔다.

모두 3명.

수호에게 이 3명의 서류를 내밀었다.

“이 친구들 불러. 감독으로서 만나고 싶다고 해.”

“알겠습니다.”

수호가 서류를 보며 나가다 돌아섰다.

“두 명은 전문대와 지방대고, 하나는 고졸입니다.”

“그래서?”

“형평성이 좀….”

“너도 대학 중퇴잖아?”

“저는 특채지 말입니다.”

“빽으로 들어왔다고는 생각 안 해?”

“즉시 연락하겠습니다.”

수호가 멋쩍게 웃으며 내 사무실에서 나갔다.

나도 면접장으로 갔다.

면접관들이 서류 정리를 하고 있었다.

“괜찮은 사람 좀 있어요?”

박상희 본부장이 말했다.

“미국 영화사 설립을 다들 알고 있네요. 그 때문에 유학파가 유난히 많이 응시한 것 같아요. 콘텐츠 부서는 관련 스펙 위주로 뽑으면 될 것 같고. 경영과 해외 사업 쪽은 고민 좀 해야겠어요. 1차로 60명 뽑았는데 다들 훌륭해요.”

“통과된 분들 좀 보죠.”

박 본부장이 내민 서류를 보았다.

60장 다 읽어봐도 호감이 확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영어 잘하고 머리도 좋은 분들이기는 한데.

없으면 4명으로 가지 뭐.

독수리 오형제가 아니라 판타스틱 4로.

* * *

이틀 후 회사 근처 중식당으로 갔다.

내가 선택한 3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십니까!”

남자 둘에 여자 하나다.

벌떡 일어나는 세 명 모두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앉으세요.”

“예.”

“드시고 싶은 거 아무거나 시키세요.”

뚱뚱한 친구의 넥타이에 눈길이 갔다.

넥타이에 떡볶이 국물이 묻어 있었다.

나중에 수호한테 좀 시달리겠는데.

뚱뚱한 친구가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깐풍기 시켜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여기요, 주문요!”

종업원이 오자 뚱뚱한 친구가 말했다.

“깐풍기랑 볶음밥 주세요. 다른 분들은 뭐 드실래요?”

“저는 짜장면.”

“저도요.”

뚱뚱한 친구가 편하게 의자에 기댔다.

설정이라면 흥미롭고, 성격이라면 마음에 든다.

표정을 보니 자신을 부른 이유를 전혀 모른다.

친화력이 좋은 뚱뚱한 친구.

예술적 감각이 좋은 더벅머리 친구.

서연의 비서가 되어줄 28세 여성

앉아 있는 친구들을 코어를 발동한 채 보았다.

서류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호감이 전달된다.

뚱뚱한 친구는 괴짜 천재라는 느낌이 오고, 더벅머리 친구는 예술감각과 균형감이 탁월한 인상이다. 28살인 여성은 소심하면서도 대범한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듯했다.

어째 세 명이 내 특징을 조금씩 가진 것 같다.

코어가 세 명의 성향을 감지해서 그런 건지.

설마 날 닮은 사람을 찍은 건 아니겠지.

혹시나 싶어 처음으로 미간에 코어를 집중했다.

순간 놀라운 영상들이 빠르게 스쳤다.

금세 두통이 찾아오는 바람에 급히 코어를 껐다.

뚱뚱한 친구가 턱시도를 입은 영상을 본 것 같다.

이게 과거인지, 미래인지.

음식이 나와서 조용히 밥을 먹었다. 내가 뭘 물어보질 않아서 더벅머리와 여자는 긴장했다. 뚱뚱한 친구는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고.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내가 말이 없는데 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나.

내가 먼저 식사를 끝내고 일어났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예, 감독님.”

당황한 얼굴로 일어나는 세 사람에게 웃어 보인 뒤 자리를 떴다. 두 명은 뚱뚱한 친구를 원망스럽게 보고 있었다.

* * *

최수혁은 지하철로 가는 내내 한숨만 내쉬었다.

뚱보 놈이 감독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바람에 면접이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 자식은 밥 먹으러 온 거야, 면접 보러 온 거야.’

뚱보가 음식을 주문한 뒤 최 감독이 세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뭔가 언짢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뚱보 놈이 밥을 먹을 때 최 감독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어이가 없었는지 이마에 손을 대기도 했고.

로큐 전속 연출부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보자고 해서 나갔던 자리였다. 단 3명인 줄도 모른 채. 그래서 은근히 기대를 했건만 뚱보가 초를 쳤다.

최수혁은 다시 한숨을 쉬곤 지하철에 올랐다.

로큐 전속이 되면 꾸준하게 연출할 기회가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로큐의 전속 감독은 방송사의 PD와 다름없으니.

그런데 이젠 다 틀렸다.

다시 시나리오나 써야 하나.

무명 시나리오 작가인 최수혁에게 미래는 지하철 창밖처럼 어둠만 보일 뿐이었다.

권혁민은 집 앞 PC방에 들어갔다.

배도 든든하게 채웠겠다, 오늘은 밤새워 게임을 할 생각이었다. 최신성 감독이 왜 불렀는지는 몰라도 스태프는 할 생각이 없었다. 감독이 배우 시켜줄 리도 없고

그는 무슨 착오가 있었겠지 싶어 밥만 먹고 나오기로 했다. 로큐가 자신을 뽑을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고졸에 로드 매니저 경력 3개월이 스펙의 전부였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자에 앉기도 전에 자신을 보고 피식 웃는 최 감독의 표정을 보고 포기했다.

‘간만에 배불리 먹었으면 됐지, 뭐.’

권혁민은 열심히 게임에 몰입했다.

유희진은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발꿈치에 물집이 잡혀 걷기가 힘들었다. 최신성 감독이 보자고 해서 새 구두까지 사서 기대를 하고 갔는데 그냥 밥만 먹었다. 대체 최 감독이 왜 불렀는지 의문이었다.

그녀는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을 사서 옥탑방에 들어갔다. 소주잔을 꺼내와 과자 한 봉지를 놓고 소주를 마셨다. 정장 입은 채 소주를 홀짝이는 자신이 처량했다.

그냥 공무원 시험 준비를 계속할 걸 그랬나.

2년간 취업이 안 되어 편의점 알바를 하다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는데 시간만 허비했다. 중소기업에 취업하려고 해도 나이 많다고 안 받아주고. 작은 회사는 외모 보고 뽑는 것 같아서 꺼려지고.

유희진은 어쩐지 로큐에 미련이 많이 남았다. 최 감독을 만나서 그런 게 아니라, 이상하게 끌렸다. 어렸을 때 배우를 꿈꿔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서연의 팬이라서 그런 걸까.

소주 반병을 비웠을 때였다.

문자가 왔다.

[유희진 씨. 축하합니다. R&C 엔터테인먼트 신입 사원 모집에 합격하셨습니다. 유희진 씨는 특별채용이므로 10월 2일 오전 10시까지 회사로 나와주십시오.]

유희진은 약간 취한 눈으로 문자를 살펴보았다.

누가 장난친 건지 잘못 읽은 것인지.

아무래도 장난 같아서 전화를 걸어보았다.

띠리리리-

바로 누군가가 받았다.

“여보세요? 저, 유희진이라고 하는데요.”

-최신성입니다. 축하해요.

“제가요? 제가 합격했어요?”

-예. 내일모레 회사에서 봅시다.

“아, 네.”

유희진은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꺄아아악! 나 합격했어! 감독님이 직접 문자 보낸 거였어! 어머, 나 어떡해!”

좁은 옥탑방을 미친 여자처럼 뛰어다니는 유희진이었다.

그 시각. 비슷하게 발광하는 두 남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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