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로맨틱 멜로 엔딩 (28/56)

제4장 로맨틱 멜로 엔딩

회사 연습실에서 두 배우가 합주 연습에 열중했다.

두 사람만 연주를 하다가, 나중에 드럼을 치는 중년 아저씨와 베이스 치는 대학생과 밴드를 결성한다. 두 조연 배우는 음악을 했던 연기자를 뽑았다.

이 네 명이 모던힐이 만든 곡을 열심히 연습했다.

정효주는 피아노 연주가 수준급이지만 황정우 배우는 기타를 잘 치는 편이 아니라서 합주 실력은 좀 형편없었다. 코드 잡는 손의 움직임이 그렇듯 해야 하기에 연습은 해야 했다.

작곡가들이 만든 7곡은 재즈 밴드들이 연주해서 녹음까지 마쳤다. 유명곡 저작권을 합쳐 곡 작업에만 거진 6억이 들어갔다. 전곡이 국내 최고 수준의 음질이었다.

초보밴드가 연습을 끝내고 악기를 내려놓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초반에는 낮은 수준의 연주부터 들어가니까, 지금 곡은 꾸준하게 연습하셔야 합니다.”

황정우 배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쉽지가 않네. 2주 후에 촬영이죠?”

“네. 재미는 있으시죠?”

“악기 연주도 배우 자산인데 공짜로 배우면 나야 좋죠. 그럼 먼저 들어갑니다.”

“네, 들어가세요.”

정효주가 나왔다.

“저 메인 테마 못 들어 봤는데 좀 들어봐도 될까요?”

“그래요.”

정효주와 함께 내 사무실로 갔다.

처음엔 정효주를 보고 정말 배우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직원들이 이제는 가볍게 눈인사를 한다. 신입 매니저 하나만 휘둥그레진 눈으로 보고.

내 사무실에 들어가 난 의자에 정효주는 소파에 앉았다.

사무실에 제법 음질이 좋은 스피커가 있었다.

음악을 틀어 놓고 잠시 감상했다.

믹싱과 마스터링을 거친 메인 테마 피아노 솔로다.

유키 구라모토에게 안 꿀릴 만큼 피아노 선율이 좋다.

물론 연주는 피아니스트가 했다.

“아, 정말 좋다.”

정효주가 두 손에 턱을 괸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녀와 주요 장면의 연기 리허설을 하면서 어색한 건 다소 풀어졌다. 이따금 날 훔쳐 보긴 했는데, 그 이상의 뭔가가 감지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가만히 보는 게 정효주의 버릇인가 싶기도 했다. 당연히 서연에게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었고.

“감독님, 혹시 오늘 시간 있으세요?”

“네? 약속이 있긴 합니다.”

약속 없다.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만들어 두고.

정효주가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제 친한 후배가 로큐에 들어오고 싶어해서 감독님과 자리를 좀 마련해줄까 싶어서요.”

“아, 그러세요. 후배 누구시죠?”

“진세경이에요”

“아, 그분요. 효주 씨랑 친해요?”

“네. 예전에 같은 회사에 있었어요.”

20대 중엔 연기 잘하기로 한 손에 꼽히는 배우다.

드라마는 안 나가고 영화만 한다.

“네. 그분이 회사에 오시면 저희도 좋죠.”

* * *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맥주를 마셨다.

여배우들의 아지트라 불리는 곳이었다. 남자 배우들의 아지트는 들어봤어도 여배우 아지트는 처음 듣는다.

정효주와 함께 그 카페에 들어가서 진세경을 기다렸다.

그런데 오라는 진세경은 안 오고 웬 여자 탤런트들이 카페에 몰려 들어왔다.

“효주 언니 와 있었네.”

“어, 최신성 감독님 아니세요?”

“최 감독님, 처음 뵈어요!”

“와, 언니. 최 감독님과 친하세요?”

미녀 네 명이 난입해서 내 정신을 쏙 빼놨다.

한 명은 톱스타급이고 세 명은 인지도 높은 신인이다.

탤런트들이 서슴없이 내 옆에 앉아서 애교를 떨었다.

정효주가 물었다.

“이 시간엔 웬일이니?”

“저희 볼링 모임 있었거든요.”

“감독님 저희랑 사진 한 번 찍어요.”

“그래요, 애들에게 자랑해야지.”

인형같이 생긴 탤런트 하나가 스마트폰을 들자 정효주를 뺀 나머지 세 명이 내 뒤에 붙었다. 다들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사진을 찍을 찰나! 급히 카메라를 손으로 막았다.

“잠깐만요.”

“왜요? 감독님, 사진 찍으면 안 돼요?”

“감독니이임. 저희랑 한 번 찍어요.”

두 탤런트가 내 팔에 매달리며 앙탈을 부렸다.

금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도 남자인지라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이 애들과 어울리며 맥주나 마실까 싶던 그때.

탤런트들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네 명의 성격이 똑같을 리가 있나.

정효주를 슬쩍 보았다.

맥주를 마시던 정효주가 그제야 나섰다.

“감독님 난처하시게 왜들 그러니.”

“사진 찍으면 안 되는 거예요?”

“감독님 세경이 만나러 오신 거야.”

“그냥 사진만 찍으려는 건데.”

탤런트들이 그제야 내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정효주가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애들이 올 줄은 몰랐어요.”

“진세경 씨는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럼.”

바로 일어났다.

그러자 탤런트들도 급히 일어났다.

“감독님! 죄송해요, 저희는 그냥 반가워서….”

“효주 언니, 어떡해요?”

정효주도 난감한 얼굴이긴 마찬가지였다.

얼굴만 봐선 도무지 모르겠다.

우연인지, 꾸민 일인지.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촬영 때 보죠. 먼저 가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날 따라나서려는 네 여자를 정효주가 잡았다.

뭐라 혼을 내는 소리를 들으며 카페를 나섰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나만 그런 건 아닐 터다. 예쁜 탤런트들이 애교를 부리며 매달리면 그 어떤 남자라도 못 버틴다. 서연과 난 그냥 연인이 아닌 운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걸 떠올리는 순간 욕망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이성이 돌아왔다.

탤런트들이 원래 그렇게 거침없이 남자 팔짱을 끼고 그럴까. 내가 서연과 만나고 있다는 걸 알 텐데도. 다들 연기를 한 거라면 소름이 돋을 일이다.

정말 우연히 그 카페에 왔던 걸까.

아니면 탤런트들 모임 뒤풀이가 있다는 걸 알고 정효주가 일부러 그 카페에 날 데리고 간 걸까.

정효주가 의도한 거라면 무섭다.

사진이 찍혔으면 그 여자들 SNS에 올라갔을 테고, 서연은 말은 안 할지라도 날 의심한다. 날 믿어도 섭섭해할 테고.

정효주가 무서운 사람인 건지, 여자들에게 원래 그런 면이 숨겨져 있는 건지. 사실 서연도 같은 여자들 상대할 때는 좀 무서운 데가 있기는 하다만.

식겁한 마음을 다스리며 집으로 향했다.

문자가 왔다.

[미안해요. 여배우들 술 마실 곳이 많지 않아서 그 카페를 골랐는데, 제가 미처 그 얘들 생각을 못했어요. 오해 없었으면 합니다.]

[네.]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앞으로는 선을 확실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정효주가 뭘 시도하려 한 것인지도 알겠다.

나와 서연이 멀어지게 하려는 거다.

그렇다면 정효주가 날 좋아한다.

무리해서라도 날 자기 남자로 만들겠다는.

대 여배우가 왜 나 같은 남자에게 마음을 준 걸까.

그동안 자주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첫 만남 때 내가 그녈 무시해서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나?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게 해 놓고 날 차버리려고? 아니면 날 감독으로서 존경해서? 아니면 내가 가진 돈 때문에?

모르겠다.

내가 이쯤 했으면 정효주도 마음을 접겠지.

실실 웃음이 났다.

대체 내가 뭐라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정말 우연히 탤런트들이 온 걸 두고 내가 이러고 있는 거라면 진짜 쪽 팔려서 쥐구멍을 팔지도 모르겠다.

정효주는 내 영화 주인공이고 회사 식구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길 바랄 뿐.

* * *

며칠 후 강원도 정선으로 향했다.

‘은하와 민수’ 중 내 출연 장면이 있는 회차였다.

차에서 내리자 수호가 날 반겼다.

“오셨습니까.”

“촬영 잘 돼가고 있지?”

“예. 그런데….”

“왜?”

“서연 누나께서 어제부터 저기압이십니다.”

“왜?”

“모르겠습니다. NG를 자주 내고 계십니다.”

분명 사진 안 찍혔는데.

몰카라도 찍었으면 그건 정말 아니다.

정효주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닐 텐데.

세팅 중인 촬영장 한쪽에 서연과 건하가 앉아 있었다.

날 본 서연이 활짝 웃었다. 건하는 넙죽 인사를 하고.

“왔어? 오는 길에 차 안 막혔어?”

“조금. 컨디션 어때?”

“괜찮아.”

연출부가 의자를 내줘서 나도 두 사람 옆에 앉았다.

서연의 표정을 슬쩍 봤다.

수호가 저기압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멀쩡했다.

건하와 이번 씬 촬영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잠시 더 서연을 보다가 말을 꺼냈다.

“수호가 너 저기압이라고 하던데,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아니. 오늘 그날이야.”

“아. 약은 먹었어?”

“그 정도는 아니야.”

“촬영갑니다!”

서연과 건하가 도로 저편으로 갔다.

승철이가 구상한 이 영화의 이미지는 4차원 동화다.

이번 장면도 그림이 독특하면서도 매력이 있었다.

둘이서 커다란 나뭇잎을 우산처럼 들고 걸어온다.

햇빛이 쨍쨍한데 이슬비가 내리는 이상한 씬.

나중에 알고 보니 뇌에 이상이 생긴 민수의 환상이다.

녀석의 환상이 증강현실처럼 보인다고 할까.

영화 중에 은하가 공중에 떠서 걸어가는 환상도 보고.

“강우!”

태양이 작열하는 가운데 물방울이 날렸다.

빛줄기가 흩날릴 때 역광을 받아 매우 아름다운 그림이 연출되었다. 거기에 무지개까지 떠서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민수가 보는 환상 장면이 제대로다.

승철이 저거 천재네?

“우와! 무지개, 빨리 찍어! 빨리!”

“감독님이 콜을 하셔야죠!”

“그냥 콜하고 찍어요! 무지개 사라지겠다!”

“스피드!”

“레디!”

“액션!”

“롤링!”

콜이 엉망진창으로 맞물렸다.

스태프들이 입을 막은 채 소리 죽여 웃었다.

살다 살다 이런 촬영은 처음 본다.

서연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고.

어쨌거나 녹음이 되고 카메라는 찍으니 촬영은 된다.

“컷! 대박!”

“하하하하하!”

컷이 나오자마자 폭발하듯 웃음이 터졌다.

어찌나 웃겼는지 스태프 몇 명은 눈물을 다 훔친다.

스피드 다음에 레디. 액션 다음에 롤링이 나온 전무후무한 촬영이다. 갑자기 예상 못 한 그림이 나오니 어쩔 수 있나.

덕분에 촬영장이 무척 밝아졌다.

승철이가 감독의 권위를 내려놨으나, 워낙 연출이 독특하고 현장 장악력도 있어서 촬영장 분위기가 좋다.

“다음 씬은 최 감독님과 수호 씨 촬영입니다!”

“예.”

촬영 버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내 역할은 면내에서 돈 좀 만지는 유흥업소 사장이다.

아가씨가 있는 다방과 노래방을 운영하는.

수호는 경운기를 몰고 장에 가는 청년 농부.

의상을 갈이 입고 분장도 했다.

촌스러운 의상과 분장이 아닌 그냥 건달 같은 모습이다.

서연이 내 의상과 머리를 만져주었다.

아내가 남편 출근시키는 듯한 모습이다.

제법 기분이 좋았다.

“캐릭터 연구는 좀 했어?”

“했지. 면내의 제왕.”

서연이 웃으며 의상 점검을 해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는 도로 저편으로 가서 경운기에 탄 채 대기했다.

난 그랜저 승용차에 기대 서 있고.

“슛 갑니다!”

승철이가 외쳤다.

“수호야! 네 맘대로 해! 최 감독님이 알아서 할 거야!”

“알겠습니다!”

승철이가 내 밑천 뽑아 먹으려고 작정을 했네.

자유롭게 풀어놓고 좋은 씬을 건져 보겠다는 의도다. 나중엔 각본대로 찍을 거고.

“레디!”

“액션!”

수호의 경운기가 탈탈탈 거리면서 내게로 향했다.

난 실실 웃으면서 수호를 보다가 경운기를 세울 의도로 도로로 나섰다. 그런데 수호 놈이 흠칫 놀라더니 방향을 틀었다. 나도 그 방향으로 막듯이 다가서고.

수호가 다시 방향을 틀었다.

“야, 인마! 경운기 안 세워?”

“왜요!”

“세우라고 새꺄!”

“아이 씨! 진짜.”

“아이 씨? 어어? 왜 이쪽으로 와!”

“어어어! 비켜요!”

“야, 저리 가라고! 저리…”

쿵-

경운기가 그랜저를 받아 버리곤 밀고 나갔다.

“야! 이 새꺄! 내 차!”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들어요!”

“브레이크 당기라고! 위에 있잖아!”

“으아악!”

경운기가 그대로 그랜저를 밀고 나가 도로에서 벗어났다. 그랜저는 논두렁에 처박히고, 경운기는 논두렁에서 널을 뛴다. 수호가 간신히 운전대를 잡더니 그냥 가 버린다.

“야! 그냥 가면 어떡해!”

“미안해요! 경운기가 말을 안 듣네!”

“너 일부러 그랬지, 새꺄! 거기서!”

도망가는 수호를 쫓아 달렸다.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쫓아가던 그때.

“컷! 대박!”

뛰다가 멈췄다.

뭐야, 이대로 가는 거야?

승철이 놈은 대박이 오케인가 보다.

스태프들이 바로 다음 촬영 세팅을 하니.

어떤 스태프는 나와 수호에게 엄지 척을 선보이고.

승철이가 외쳤다.

“건하야! 네가 서연 씨랑 저 승용차를 몰고 가버려!”

“그래도 돼요?”

“에피소드 추가된 거야! 조명 팀! 논두렁 세팅요!”

“알겠습니다!”

승철이에게 말했다.

“원래대로 안 가고 이렇게 가는 거야?”

“최 사장이 수철이한테 돈 갚으라고 하는 씬인데, 다음 씬에서 그 말 꺼내면 돼요. 차값도 물으라고 하고. 그림 좋으면 됐지 뭐.”

“네가 무슨 홍성수 감독이냐? 즉흥으로 찍게.”

“다 제 머릿속에 있다니까요.”

내 의자로 갔다.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촬영장 재밌지?”

“이거 이대로 가도 되나 몰라.”

“승철 오빠가 저래 봬도 되게 꼼꼼해.”

“그래, 알아서 하겠지.”

서연의 표정이 밝다.

그런데 눈에는 수심이 비친다.

서연은 뭔가 스트레스가 있으면 밝은 모습을 보인다.

전에 여우야 1 찍을 때도 그랬고.

따라서 내가 없을 때는 저기압이었다는 말이다.

내게 안 들키려고 일부러 웃는다는 뜻.

“서연아. 혹시 오해한 거 있어?”

그 말에 서연이 바로 대답을 안 했다.

“아니. 왜?”

뭐가 있었네.

대체 뭘 본 거지?

내가 뭘 물어도 대답해줄 서연이 아니다.

서연과 건하는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수호를 불렀다.

“서연이 언제부터 저기압이었어?”

“어제부터 인 것 같습니다.”

“누구 전화나, 문자를 받은 후부터야?”

“잘 모르겠습니다. 통화는 가끔 하십니다.”

서연이 대기 중에 날 보았다.

어째 그녀의 표정이 처연했다.

연기에 몰입 중인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 있다.

* * *

촬영 틈틈이 서연을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웃기는 한다. 슬쩍 흘겨보기도 하고.

좀 전의 처연한 표정은 연기에 몰입 중이었나.

포털에 뭔가가 떴나 싶어 찾아봐도 서연이 의심하거나, 섭섭해할 기사가 없다. 있었다면 지성이가 냉큼 전화했겠지.

혹시나 싶어 정효주나 카페에 왔었던 탤런트들의 SNS도 확인했는데 볼링 모임에 관한 사진과 내용이 있을 뿐이었다. 정효주는 SNS를 하지 않았고.

나와 수호의 나머지 촬영을 다 찍고 촬영진이 철수했다.

서연은 수호가 모는 밴을 타지 않고, 내 차를 탔다.

서울로 향하면서 서연은 말이 없었다.

가만히 창 밖을 스치는 산과 논을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화보 같았다. 이젠 그냥 있어도 그림이 된다. 영화 속 은하 그 자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서연아. 무슨 생각해?”

서연이 배우다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세상이 새롭게 보여서.”

나한테 서운한 게 있느냐고 하려다 다르게 물었다.

대답도 전혀 예상한 게 아니었고.

“왜 세상이 달라 보여?”

서연이 먼 들판을 보며 말했다.

“은하가 바다에 도착하면 죽을 텐데, 그 심정이 어떨까 생각 중이었어. 은하 생각을 하니까, 울적해져. 이런 게 몰입인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데?”

“은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까, 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거 있지. 살 날이 얼마 안 남아서 다시는 못 보는 거잖아. 처음엔 왜 아픈 사람이 굳이 바다를 보러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갈까 했거든.”

“이젠 이해가 가?”

“응. 건강한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닌 게 은하와 민수에겐 다 소중했던 거야. 그중에 가장 하고 싶었던 건 여행이었고, 가장 보고 싶었던 건 바다였던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승철 오빠가 의도한 거 같아. 뇌에 이상이 생긴 민수가 보는 세상은 아름답잖아.”

“그러네.”

“내가 은하와 같은 상황이었으면 어떨까 생각도 나고.”

서연은 말을 하곤 창 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가 며칠 은하에 몰입해서 여러 생각이 들었나 보다.

죽음. 이별. 떠나는 사랑. 남겨진 추억 등등.

민수에 날 대입했을 수도 있고.

그녀가 슬슬 메소드 연기의 맛을 내려나 보다.

단순한 연기가 아닌, 그 배역이 되어 생각할 줄 안다. 저기압이었던 게 아니라 연기에 몰입해서 그랬던 걸까.

서연이 내 손을 잡아 왔다.

내가 공연한 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울로 향했다.

* * *

정선에서 촬영 후 며칠이 지나도 별일이 없었다.

회사에서 마주치는 정효주는 카페에서 일 때문인지 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 날 향한 마음을 접었거나, 내가 착각을 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서연은 강원도에서 촬영에만 집중했고.

난 신작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하고 있을 때 지성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예능에 정효주 씨가 나왔는데, 형이 언급됐어.

“뭐라고 했는데?”

-포털 들어가서 확인해 화. 지금 검색어에 올랐어.

우선 포털 검색어부터 보았다.

6위 최 모 감독.

9위. 최신성 감독

해당 영상을 찾았다.

종편인 TBC의 인기 예능인 ‘예능 학교’란 프로그램이었다.

국민 MC인 강호석이 이끄는 프로인데 게스트가 정효주였다. 연희가 고정 출연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게스트가 나오면 MC와 패널들이 사정없이 물어뜯기로 유명한 프로다. 회사에서 영화 홍보를 위해 정효주를 출연시킨 모양이다.

강호석이 정효주에게 물었다.

“정효주 씨. 데뷔 후 스캔들 한 번 없었죠? 남자 보는 눈이 까다로운 거에요? 기가 막히게 스캔들을 숨기는 거에요?”

패널들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기가 막히게 숨긴다에 한 표!”

“너무 예뻐서 남자들이 접근을 못 하는 거겠지.”

“효주 씨, 연하 킬러라는 소문이 있던데?”

“야, 여배우한테 할 소리가 있지!”

정효주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 아니에요. 저도 그냥 평범한 연애가 좋아요.”

“어? 지금 연애하시는구나! 누구죠? 연예인이에요?”

“배우네! 사귀는 사람 이름이 뭐예요?”

“누구 있네! 효주 씨 얼굴이 발그레하잖아!”

논리고 뭐고 말을 막 던지는 패널들이다.

강호석이 소란을 잠재우고 물었다.

“비밀로 할 테니까, 저희한테만 살짝 알려줘요.”

“없어요, 저.”

“에이, 있는데? 배우예요? 가수? 아니면 감독님?”

카메라가 정효주의 표정을 잡았다.

내가 봐도 뭔가 숨기는 듯한 얼굴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편집한 건가.

또 패널들이 달려들었다.

“감독님이네! 어떤 감독님? 감독님이랑 사귀는 거죠?”

“누군데? 감독 누구?”

“지금 찍고 있는 영화 감독님 아니야?”

“맞네! 효주 씨 영화 홍보하러 나오셨잖아?”

“혹시 최 모 감독님?”

정효주가 헛웃음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카메라는 놀란 연희의 표정을 잡았고.

영상은 이게 전부였다.

영화 홍보를 위해 패널들이 없는 스캔들을 만들어 몰아가려고 한 거다. 정효주는 넌지시 받아주는 척하고. 그냥 웃자고 한 소린데,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법도 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이 프로그램에 나갔던 연희가 서연에게 이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정효주가 날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을 전했던 것 같다.

서연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나도 딴마음이 있어서 정효주를 회사에 스카우트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서연은 속 좁은 여자가 될까 봐 모른 척했겠지.

정효주가 뭘 한 건 아닌데 상황이 좀 애매하다.

의도적인 편집이든, 정효주의 마음에 내가 있든 없든.

이제 선을 확실히 그을 때가 왔다.

“카메라 세팅 완료입니다. 무대 쪽도 자리 잡았고요.”

“예.”

조감독에게 무전을 보냈다.

-카메라 세팅 다 됐다. 슛 가자.

조감독이 메가폰을 들고 외쳤다.

“카메라 쪽은 보시지 마시고 공연에 집중해 주세요! 촬영에 협조해 주신 분들께는 소정의 기념품을 드릴게요!”

홍대 버스킹 씬을 찍고 있었다.

금요일 밤 홍대는 촬영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람이 많고, 소음도 크다. 해서 실제로 공연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찍어야 했다. 대신 촬영 전에 협조와 양해를 구했다.

버스킹 무대 자체에 조명이 있어서 따로 조명 설치는 안 했다. 카메라는 무대 건너편 건물 창문에서 구경꾼들 몰래 촬영을 했다. 관객 중에도 카메라를 들고 찍는 연출부가 있었다. 그들 사이에 황정우와 정효주도 있고.

화면을 보다가 무전기를 들었다.

“컷. 메인 카메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요.”

구경꾼으로 출연한 연출부가 무전을 듣고 두 배우에게 전달했다. 다시 연기를 했다. 두 배우가 관객들 맨 앞에서 있어서 뒤쪽 관객은 두 배우를 알아보지 못했다.

단순한 구경 장면인데도 4시간이나 걸려 끝냈다.

“교습소 장면으로 갑니다.”

“이동합니다!”

촬영팀은 바로 한 건물로 들어갔다.

오늘이 5회 차인데 매일 같은 식으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오후 2시에 소집해서 낮에 여주인공 집이나 회사 사무실 씬을 찍고 저녁이 되면 버스킹 씬을 찍었다. 자정이 되어 가면 교습소 촬영을 했고.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재즈 카페나 공연장을 찍었다. 밴드들이 공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촬영한다고 부산을 떨지 않고 카메라를 고정해 두었다. 그 덕에 손님들이 촬영은 신경 쓰지 않고 공연을 즐겼다.

예산이 워낙 적다 보니 조명은 실제 촬영 장소에 있는 조명을 썼고, 스태프도 30명이 전부였다. 조명을 제대로 써서 찍는 장면은 보조 출연자를 동원해 오전에 대부분 찍었다. 그땐 화면 때깔이 제법 좋았다.

교습소로 들어갔다.

정효주와 황정우가 빈 연습실에서 연습하는 장면이다.

둘이 합주를 맞춰 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보았다.

서연이 질투를 한 것이라 생각하니 실실 웃음이 났다.

스크립터가 날 보더니 물었다.

“감독님. 왜 그렇게 웃으세요?”

“응? 아니 그럴 일이 있어.”

“어제 예능 학교 보셨죠?”

“봤어?”

“네. 분장팀 막내가 깜놀했다면서.”

스태프들을 보았다.

다들 포털에서 봤는지 정효주와 날 힐끔거린다.

정효주만 모른 척 리허설을 하고 있고.

급기야 황정우 씨가 나섰다.

현장에 은밀한 웃음이 도는 걸 파악한 듯.

“야, 좋은 거 있으면 나도 좀 알자. 뭔데?”

“그럴 일이 있어요.”

“이것들이 날아가는 참새 똥구녕을 봤나, 왜들 웃어!”

“참새 똥구녕이 보여요?”

“얘는 또 말귀를 못 알아들어?”

“하하하하!”

늘 현장 분위기를 챙기는 황정우 배우다.

내가 나섰다.

“리허설 따로 안 하고 바로 들어갑니다. 자유롭게 애드립하셔도 돼요.”

“네.”

“슛 갑니다! 레디!”

“스피드!”

“롤!”

“씬 26! 2 다시 1!”

“액션.”

정효주와 황정우가 말없이 연주 연습을 한다.

피아노와 기타를 치다가 문득 서로 보고는 미소 짓고 다시 연습에 열중하는 두 사람. 서로 호감이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다.

여자는 가난한 무명 가수고, 남자는 나이 차이 때문에 여자에게 쉽게 고백을 못한다. 둘 다 사랑에 관한 한 자격지심이 있어서 마음을 열기가 좀 어렵다. 한눈에 반하는 사랑이 아니라 천천히 스며드는 사랑이다.

“컷. 오케이.”

동일한 세팅으로 다음 촬영을 이어갔다.

내가 밝은 모습을 보이자 현장도 산뜻해졌다.

새벽 4시에 촬영이 끝났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던 터라 정효주와 술 한잔하자고 했다. 그녀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 * *

포장마차에서 정효주와 둘이서 소주를 마셨다.

그녀가 반 잔을 마실 때.

난 석 잔을 마셨다. 빨리 취하려고.

정효주가 연기에 달인이라면 나도 못지않다.

정효주도 술에 좀 취하자 느슨하게 풀어졌다.

아주 술이 센 게 아니라면 본심이나 원래 성격이 나올 터다. 맥주를 좀 잘 마시긴 했지만.

소주 빈 병이 4병으로 늘어났다.

급히 소주를 마셨더니 갑자기 확 올라온다.

정효주 얼굴이 시뻘겋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집으로 갔겠지. 나니까 함께 마신다는 표정이 얼굴에 보인단 말이지.

공작을 꾸민 건진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정효주라는 사람 자체는 좋은 것 같다. 그건 뭐 숨길 수가 없다. 착한 여자가 그렇게까지 했다면 날 엄청 사랑하는 거다.

왜 정효주 같은 미녀가 날 좋아해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건지. 내가 그렇게 매력이 있나? 내가 천재 감독이라서 그럴 거야 아마. 너무 취해서 이러다 내가 먼저 쓰러지겠네.

“효주야, 나 좋아하니?”

“네?”

정효주가 날 빤히 본다.

그렇게 보면 내가 넘어갈 거 같아?

“효주야. 네 마음은 아는데.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히끅. 효주 너도 참 예쁘고 착하고 그런데. 서연이는 내 운명의 여자라서 나도 어쩔 수가 없네. 흐끅. 왜 이렇게 딸꾹질이 나냐. 그러니까, 말이야.”

“감독님 많이 취하셨어요.”

“아니 나 안 취했어. 효주야. 내가 남자 소개시켜 줄까?”

“아니에요. 저 먼저 일어날게요.”

“가려고? 더 마시지 왜?”

정효주가 내게 인사를 하곤 부리나케 포장마차에서 나갔다. 술값도 그녀가 계산했다. 나도 따라나섰다.

밴에서 영진이가 나왔다.

“영진아! 효주 잘 모셔다 드려라!”

“예, 대표님.”

“효주야, 잘 가! 우웨엑!”

토했다.

아이고 속 울렁거려.

영진이와 정효주가 급히 달려와 내 등을 두드리고 날 부축했다. 정효주는 내가 토해 놓은 걸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손으로 입을 쓱 닦고는 효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 효주 정말 예쁘다! 연기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우리 회사에 복덩이가 들어왔어요!”

“감독님. 저는 이만 들어갈게요.”

“응. 들어가 들어가. 영진아! 정효주 배우님 잘 모셔라!”

“아까 그 말 하셨잖아요.”

정효주가 밴으로 갔다.

난 영진이 부축을 받아 어딘가로 향했다.

필름이 끊겼다.

* * *

“감독님! 일어나세요. 소집 시간이에요.”

영진이가 날 깨웠다.

여관 침대에 벌러덩 누운 상태였다.

“몇 시야?”

“오후 1시요.”

“먼저 가 있어. 나 좀 씻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도 부글부글 끓었다.

정효주에게 못 볼 꼴 보이려고 과음하고 추태를 부렸다.

그런데 내가 뭘 어쨌는지 기억이 안 났다.

일부러 반말을 하긴 했는데.

씻고 촬영장으로 갔다.

여주인공 옥탑방이 이번 촬영 장면이었다.

옥탑에 가자 정효주가 날 보곤 말없이 인사했다.

“아우, 속 쓰려. 어제는 제가 술주정을 한 것 같은데, 혹시 실수한 거 없죠?”

“아니에요.”

웃고는 있지만 큰 실수를 했다는 속내가 보였다.

정효주가 사람은 좋다. 어제 그 일을 당하고도 미소를 짓는 걸 보니. 정나미는 좀 떨어졌겠지. 그녀가 날 좋아한다는 게 여전히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만.

술에 취한 상태로 수위 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너무 과하면 영화 안 찍는다고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보여주면 되었다.

촬영을 시작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이전과 달리 촬영 틈틈이 날 슬쩍 보지 않았다.

내게 실망했다기 보다는, 서연이 내 운명의 여자라는 말이 컸던 것 같다. 자신의 속마음이 들켜서 창피한 것도 있겠고.

“감독님. 세팅 끝났습니다!”

“자, 슛 갑시다!”

내 우렁찬 말에 스태프들이 일제히 집중했다.

정효주도 바로 연기에 몰입하고.

이후 촬영은 정말 순조롭게 흘러갔다.

정효주가 이따금 날 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 뒤로 술도 마시고, 대화도 많이 했다. 지난번처럼 묘한 공작 같은 건 없었다. 물론 술 마실 때마다 술주정은 좀 했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하니까.

황정우와 정효주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다.

차분하면서도 분위기 있고, 잔잔한 미소를 감돌게 하는 연기였다. 사람을 저절로 기분 좋게 하는 연기. 영화 톤 자체가 워낙 따뜻하고 이야기도 훈훈했으니.

거기에 음악까지 실린다면 좋은 영화가 나올 것이라 확신했다. 어쩌면 음악 영화로는 최초로 500만이 넘는 성적이 나올지도 모른다. 한국 음악 영화가 딱히 없긴 했지만.

그리하여 마지막 촬영 회차가 시작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홍대 거리.

처음으로 구경꾼을 모두 차단한 뒤 촬영을 준비했다. 골목에 보조출연자들만 서 있고, 구경꾼은 촬영장을 에워싼 채 구경했다. 홍보 삼아 일부러 마지막 장면을 토요일 저녁에 찍는 중이었다.

구경꾼이 워낙 많으니 통제가 쉽지 않았다.

스태프들로는 부족해서 회사 직원들까지 동원되었다.

건물 창문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카메라 앵글 잡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한 명 단속하면 누가 카메라를 보고 있고, 그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면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황정우 배우와 정효주가 거리에 섰다.

여기저기서 환호와 박수가 나온다.

배우들을 본 구경꾼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난 줄곧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잡는 화면이 정말 아름답다. 먼 쪽은 포커스 아웃이고, 주변은 간판 불빛이 알록달록하게 반짝였다. 실제로는 소음이 좀 있지만 영화에서 이 장면은 고요하다.

그때 내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서연이었다. 그녀가 촬영 대기 중인 두 배우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내 옆에 앉았다. 촬영 뒤풀이에 참석하려고 왔다.

“조명 완료!”

“카메라 스탠바이!”

“모두 조용!”

“조용히 해주세요!”

시끄럽던 현장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내 손짓에 조 감독이 외쳤다.

“마지막 촬영갑니다! 자, 레디!”

두 배우가 천천히 걸어갔다.

“스피드!”

“롤!”

“씬 89. 2 다시 1!”

우렁차게 외쳤다.

“액션!”

다정하게 걸어가는 두 사람.

뭔가 주저하는 황정우. 긴장한 정효주.

황정우가 슬쩍 손을 내민다.

그 손을 가만히 잡는 정효주.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배우.

갑자기 몰려나오는 듯한 인파.

자연스레 사람들 속에 섞이는 두 사람.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나와 서연도 일어났다.

모든 스태프가 격려하며 포옹했다.

서연과 정효주도 저편에서 웃으며 인사하는 게 보였다.

이제 별문제 없겠지.

그렇게 음악 영화 촬영은 끝이 났다.

이 영화가 대박인지 아닌지는 음악을 입혀 보면 결판난다.

영상은 정말 잘 나왔으니까.

* * *

후반 작업은 촬영 때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데, 이번 음악 영화는 유난히 더 그랬다.

아비도 때는 연기와 심리를 위한 편집이었고, 고정되어 정적인 앵글이 많았다. 이동원 때는 스피디한 전개이고 컷 분할이 많아서 콘티대로 가면 편집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한데 이번 영화는 영상이 아름답게 이어지고, 그 영상에 맞게 음악이 깔린다. 선곡한 음악은 정해져 있으니 가진 영상으로 음악에 맞춰서 편집해야 했다.

해서 편집실장이 콘티만으로 편집을 하지 못하고, 수시로 내 의견을 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붙였는데, 음악은 어디까지 넣을 건가. 영상과 음악이 어울리는가.

편집실 스태프들이 너무 힘들어하기에.

내가 과감히 결정했다.

콘티에 목매지 말고 편집실이 알아서 하라고.

본인들 판단에 맡긴 것이다.

편집실 직원들이 당황했으나 생각보다 빨리 적응했다.

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나와 세 작품을 함께한 편집실이다.

베테랑 편집기사인 조소현 실장은 여성이고, 음악도 좋아한다. 여자의 심리야 당연히 잘 알고.

즉, 예쁜 게 무엇인지, 여자가 좋아하는 게 뭔지 잘 아는 사람이다. 나를 비롯한 남자 팀장들이 머리로 구성한 콘티보다 여성이 보는 영상이 낫지 않을까. 물론 촬영한 데이터에 한해서.

그렇게 맡기고 일부 편집본을 봤다.

행여 나한테 욕을 먹을까 봐 조소현 실장이 잔뜩 긴장했다. 본인이 감독 노릇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나아졌다.

촬영 때 메인 카메라 하나에 보조 카메라 석 대가 동원되어 온갖 장면을 찍어 놨다. 사람이 워낙 많은 홍대에서 찍다 보니 다큐처럼 계속 카메라를 돌렸던 터다.

그 많은 데이터를 편집실 직원들이 샅샅이 훑었다.

그중 쓸 만한 영상을 붙이기도 해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편집본이 나왔다. 여성의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영상이었다. 당연히 콘티가 중심이고 쇼트 일부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대로 가도 돼요. 훨씬 낫네요.”

“정말요? 저희는 걱정 많이 했는데.”

“효주 씨가 디렉팅을 안 한 장면에서도 연기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여성의 미묘한 심리를 잘 살려 주셔서 아주 좋습니다. 멜로는 여성 감독이 찍어야 하나 봐요.”

조소현 실장에게 맡기기로 했다.

기본 편집보다는 잘 나올 것이 확실해서. 그래도 걱정이 없진 않아서 1/3 분량 편집본까지만 확인하고 다 맡겼다.

간만에 회사에 출근했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수호가 회사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서연이 매니저 노릇을 할 때 외에는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 녀석이다. 서연도 촬영 종료했고.

“현재 플래닛 케이 회원 수는 321만입니다. 첫 매출이 집계된 지난달 매출은 36억입니다. 영업이익은 회계 결산 후에 나올 것이며 약 5억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콘텐츠 매입에 투자가 있었고, 아직 무료로 관람하는 회원이 적지 않으므로 다음 달 매출은 50억, 영업이익은 30억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펀드는?”

수호가 서류를 빠르게 넘겼다.

“대표님의 작품과 박승철 감독 작품 펀드가 각각 10억으로 완료되었고, 현재 4개 작품 펀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플래닛 케이 단독 상영 영화 3편과 타 제작사 작품 1편입니다. 이 역시 무난하게 펀드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내 작품과 승철이 작품은 펀드가 구성되고 3일 만에 돈이 다 모였다. 최소 100만 원에서 최대 1천만 원을 투자할 수 있는 펀드였다. 이 펀드를 만든 이유는 로큐가 만드는 영화로 일반인들도 수익을 좀 보게 하려는 의도였다. 영화 홍보 수단이기도 하고. 우리 영화에 투자해 돈을 조금이나마 벌면 그들이 다 내 편이 아니겠나.

“동식이와 사업 건은?”

수호가 기다렸다는 듯 읊었다.

“지난달 말에 합작사를 창립하여 VR 기술을 적용한 신개념 영화 출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영화 관람 전문 헤드셋도 개발 중입니다.”

“샘플은 나왔어?”

“아직 안 나왔습니다. 고품질 사운드를 위해 기존 헤드폰 회사와 협의 중입니다. 소속 배우들 활동과 매출, 회사의 주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됐어.”

“알겠습니다. 필…”

수호가 자기도 모르게 경례를 하려다 멈췄다.

녀석이 멋쩍은 표정을 짓고는 고개만 까딱하곤 나갔다.

저놈의 군기는 언제 빠질는지.

내 영화에 들어갈 음악을 틀어 놓고 편히 쉬었다.

그러다 컴퓨터 옆에 붙어 있는 메모가 눈에 띄었다.

하성진 교수?

대학 때 은사다. 종종 연락을 드리는 분인데.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저 신성입니다.”

-오! 최 감독. 많이 바쁜가?

“영화 하나 끝내고 쉬고 있어요. 전화하셨더라고요.”

-그래. 내 염치없이 부탁을 좀 하려고.

“뭔데요? 제자들 스태프 시켜 주게요?”

-아니. 학교에서 특강 한번 할래?

“무슨 특강요?”

-시나리오 특강 좀 해 줘. 돈은 얼마 못 줘.

“갈게요. 언제죠?”

-다음 주 금요일.

“알겠습니다. 다음 주에 연락드릴게요.”

-고마워, 최 감독.

“별말씀을요. 들어가세요, 교수님.”

그러고 보니 신입생들 특강이 몰리는 시기다.

내가 나온 학교는 방송영화 관련 전공은 물론 실용음악, 실용안무, 아나운서, 디자인 등 영상 예술과 관련한 다양한 전공이 있다. 난 영화 연출과를 나왔고.

신입생 2학기 때 나도 특강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현직 작가나 감독, PD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그랬다. 유명한 작가가 아니었음에도 나도 저 사람처럼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감독이 되는 건 당시로선 언감생심이었으니.

편집실과 회사를 오가며 강의 내용을 준비했다.

시나리오 작법서야 시중에 많으니 실제 작업을 어떻게 하고, 현장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해 주는 게 나을 터다. 작법을 몰라서 좋은 시나리오를 못 쓰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준비를 한 뒤 특강에 나섰다.

* * *

교수님 사무실에 들렀다.

노 교수님이 환하게 웃으며 날 반겼다.

“이야, 우리 신성이 출세했어.”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여기요.”

선물로 가져온 와인을 건넸다.

와인을 워낙 좋아하시는 분이라 반색하신다.

예전에 영화는 천재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던 교수님이다. 반만 맞다. 천재는 노력과 시간을 줄여 줄 뿐 범재도 좋은 시나리오 쓸 수 있다.

“학생들이 자네 온다고 하니 난리가 났네. 강의실에서 하려다 신청한 학생이 많아서 아트홀에서 하기로 했어.”

“다른 특강에 방해되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오늘 강의 마지막이야. 이제 가지.”

“예.”

교수님을 따라 아트홀로 갔다.

복도에 학생들이 가득했다. 내가 온 걸 보고 몰려온 모양이었다. 손을 흔들자 학생들이 넙죽넙죽 인사를 했다.

다들 교수님과 내가 지나가자 뒤따라왔다.

이윽고 아트홀로 들어갔는데.

“와!”

“반갑습니다, 선배님!”

앉아 있던 모든 이들이 기립하며 박수를 보내왔다.

150명 정도가 정원인 아트홀에 200명은 들어온 것 같았다. 뒤에 서 있는 학생도 많았고, 심지어 무대 앞 바닥에 앉아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무대로 가려니 쑥스러웠다.

무슨 연예인 보듯 카메라로 날 찍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교수님은 흐뭇한 얼굴로 자리를 잡으셨다.

아마도 교수님은 본인이 현직에 있는 제자를 부르면 온다는 걸 넌지시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난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고.

무대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기자 간담회 하듯 편안하게 강의하는 자리였다.

학생들이 워낙 요란하게 반겨 주어서 얼굴이 들떴다.

“감독님! 아비도 잘 봤어요!”

“서연 언니랑 보기 좋으세요!”

학생들을 보며 웃다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영화감독 최신성입니다.”

“와! 목소리 좋으시다!”

“감독님! 잘생기셨어요!”

방금 소리친 학생을 보았다.

“학생, 이름이 뭐에요?”

“이수연입니다!”

하성진 교수님을 보며 말했다.

“교수님, 이수연 학생 이번 학기 에이뿔 가능할까요?”

“농담이지?”

“진심입니다.”

“하하하하!”

학생들도 그 정도 농담은 알아듣는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입을 뗐다.

“제가 이 아트홀에서 특강을 듣던 때가 기억나네요. 여기 몇몇 남학생들은 연기 예술과가 있는 층에서 괜히 어슬렁거리고 있을 테고요.”

“맞아요!”

지금 학생들과 우리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시나리오 특강을 왔으니 제가 경험한 걸 소소하게나마 나누고자 합니다. 시나리오 작법에 관해서는 다들 잘 아실 것으로 압니다. 책에 있는 내용이 핵심이긴 해요. 그래도 작가들은 나름의 노하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제가 가진 약간의 노하우를 알려드리고자 해요. 죽을 때 가지고 갈 거 아니니까요.”

“네!”

학생들이 눈에 빛을 내며 답한다.

“시나리오의 소재. 주제. 설정. 뭐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뭘 써도 상관은 없지만,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해요. 원로 작가들이 늘 하는 말씀이 있어요. 옛날에는 시나리오를 발로 썼다고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자료 조사를 많이 했다는 거죠?”

“맞아요. 쉽게 썼다는 게 아니라, 직업 현장에 들어가서 취재를 했다는 겁니다. 지금이야 워낙 자료가 많아서 딱히 그럴 필요는 없지만 현장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그 취재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써야 영화가 살아 숨 쉽니다. 취재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쓸 작품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 좋은 시나리오가 나온다는 뜻이죠.”

기성 작가들도 현장 취재를 잘 안 한다.

취재해도 잘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오히려 취재한 걸 다 녹일 욕심에 작품이 산으로 가기도 한다.

“두 번째는 기술적 구조를 알고 있어야 해요. 작가마다 다르지만 저의 경우에는 디테일한 시놉시스를 써요. 초고를 쓰기 전에 시놉시스 작성에 공을 들입니다. 영화 제작으로 말하자면 시놉시스는 프리 프로덕션이고, 초고 작업은 촬영입니다. 재고 작업은 후반 작업쯤 될 것 같네요.”

누군가 물었다.

“프리 프로덕션은 완벽해야 한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영화를 촬영하기 전에 프리가 완벽해야 촬영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고, 예산대로 찍을 수가 있습니다. 촬영을 시작하면 거액이 들어가요. 그런데 프리에서 실수가 있어서 촬영을 못 하면 큰돈을 버리게 되는 거죠.”

“구성을 잘해 놓고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건가요?”

“그렇죠.”

질문하는 학생들과 눈을 맞춰 가며 답했다.

특강인데 어쩌다 보니 문답식이 되어간다.

상관없다. 소통 방식이니까.

“시놉시스 혹은 트리트먼트 작업은 설계도입니다. 설계 없이 공사를 하면 부실공사가 되죠. 초보 작가일수록 구성을 대충하고 바로 시나리오 집필에 들어가는데, 그건 어떤 이야기를 빨리 풀어 보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아, 이거 재밌겠는데 한번 써 봐야지. 그런데 써 보니 별로 재미가 없어요.”

“제가 그랬는데.”

한 학생의 말에 작은 웃음이 터졌다.

“저도 습작기 때는 그랬습니다. 프로의 세계에 아마추어가 접근하는 방식이 대개 그렇습니다. 집을 하나 지으려면 많은 걸 알고 있어야 하는데, 소재와 설정만 가지고 집을 지을 수는 없죠.”

“시나리오가 그렇게 복잡한 거예요?”

“그렇지는 않아요. 감각만으로 쓴 작품도 얼마든지 좋은 영화가 됩니다. 그러나 늘 좋은 작품은 나오기 어렵죠. 그래서 설계도를 그릴 줄 알아야 해요. 얼마나 구성이 치밀하고, 얼마나 재미있느냐는 작가의 실력에 달렸지만, 기본 구성을 할 줄만 알아도 프로의 세계에 들어가는 셈이에요.”

“구성은 어떻게 짜는 거죠?”

복잡한 이야긴데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뭐, 작법서에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이건 준비한 내용은 아니었다.

“우리가 보통 시놉시스라고 하면 10장 내외 줄거리를 말합니다. 그 시놉에 디테일이 들어가면 30장 내외의 트리트먼트라고 불리기도 하고요. 뭐가 되었든 프리 프로덕션에 해당하는 디테일한 구성을 이 시놉시스 작업에서 해야 해요.”

“씬별로요? 아니면 시퀀스별로요?”

시나리오 좀 써 봤네. 작가 전공인가.

“시놉시스는 시퀀스나 씬으로 구성하지 않아요. 전환점과 디테일한 국면으로 구성합니다. 전환점은 사건이나 인물이 극적으로 변하는 지점이고, 각 국면은 연결되는 사건의 나열이라고 보면 됩니다.”

몇몇 학생이 메모하기 시작했다.

“보통 영화의 국면은 약 30개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크게 3막으로 구성합니다. 도입, 전개 그리고 절정. 도입에서 전개로 넘어갈 때가 전환점이에요. 전개에서 절정으로 넘어갈 때도 그렇고요. 사건이나 인물이 그 터닝포인트에서 확 달라지죠. 이건 세계 영화사에서 기술적으로 입증이 된 구조적 장치입니다.”

학생들이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이어갔다.

“1막 도입부를 예로 들죠. 시작부터 액션이 벌어집니다. 관객의 눈길을 잡는 이 첫 장면이 제1국면. 그다음 인물과 배경을 소개하는 제2국면. 이어 상황과 사건을 알려 주는 제3국면. 그리고 제4국면 즘에서 첫 위기가 터져야 합니다.”

시나리오의 어느 지점인지는 모를 터다.

“이 지점이 영화가 시작된 지 15분쯤 흘렀을 때이고, 시나리오는 10쪽 정도 될 겁니다. 영화사 프로듀서는 들어온 시나리오를 10쪽까지 보고 아니면 책을 덮습니다. 이 지점에서 반드시 관객의 몰입을 유도해야 해요. 그래야 제작자도 다 읽습니다.”

상업영화 구조가 대부분 이렇다.

학생들도 그제야 영화 구조가 그랬구나 싶은 얼굴이다.

“그렇게 국면이 이어지다가 전개로 연결되는 제8국면 즘에서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는 사건이나 반전 국면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 터닝포인트입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적고 있다.

좀 어렵겠지만 나중에 써 보면 안다.

“첫 번째 전환점 이후 전개가 고조되다가 절정 즈음에 두 번째 터닝포인트가 발생합니다. 이때는 절정으로 단숨에 치달아 올라갈 수 있는 동력이 생겨야 해요. 인물이 숨 가쁘게 달려야 할 정도로 강한 것이어야 합니다. 누가 배신했다던가, 결정적인 뭘 찾았다던가. 적의 정체를 알아냈다던가. 아니면 주인공이 대 위기를 맞이한다든가.”

어느새 학생들이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작가 전공 교수들만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노하우는 다르지만 핵심은 같으니까.

“이런 식으로 1막 도입부에 8개 국면. 2막 전개부에 16개 국면. 절정부에 8개 국면 정도가 배치돼요. 이 국면 하나하나를 재미있게 구성한다면 틀림없이 재미있는 영화로 완성이 됩니다. 캐릭터의 성격. 서스펜스. 상황과 인물 등의 갈등. 영화의 톤과 매너. 씬과 씬의 연결 등을 점검하고 사족과 중복된 건 쳐내야 해요. 이렇게 구성을 해 놓고 시나리오는 최대한 빨리 쓰는 게 좋아요. 영화는 흐름의 예술이니까.”

시나리오 써 본 사람은 아는 눈치다.

그냥 작법을 들으러 온 친구들은 어렵겠지.

“재고를 중요시하는 작가도 있지만 저는 시나리오 초고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초고가 좋으면 재고도 좋으니까요. 좋은 초고는 시놉에서 어떻게 구성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초고는 영화를 보는 듯한 흐름을 구성한다고 보면 되고, 재고는 매끄럽게 다듬는 과정으로 보면 됩니다.”

다시 물을 마셨다.

“그리고 시나리오 문장은 깔끔해야 합니다. 문장을 보고 바로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는 직관적인 문장이어야 해요. 호흡도 빨라야 합니다. 술술 읽히는 글은 좋은 글이며, 시나리오를 휙휙 넘기면 아주 재미있는 것으로 봐도 될 겁니다.”

“문장력은 상관없는 건가요?”

“상관없어요. 맞춤법이 틀리면 작가 자질을 의심받겠지만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시나리오는 엄연히 영화의 설계도지, 그 자체로 문학이 아니니까요.”

작가와 감독으로서 노하우가 담긴 강의가 이어졌다.

셔레이드 기법. 씬을 배치하는 방식. 캐릭터 변주. 다른 영화에서의 응용법. 영화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일 등등.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앞서 기술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방법을 말했지만, 그건 구조적인 문제이고, 관객의 마음은 흔드는 것은 캐릭터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그에 따른 구성을 만드는 것은 따로 비법이 없어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작가라는 직업과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불확실성과 싸우는 일입니다. 감독이 오케이 할지. 투자사가 오케이 할지. 관객 반응은 어떨지. 전혀 예측이 안 되는 상황에서 불모지를 개척하는 일입니다.”

슬슬 지루해하는 학생이 몇 명 보였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의 모든 작가가 같은 고민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작가 재능이 있는 건가. 내가 작가로 살아가도 되는 건가. 저도, 여러분도, 저기 계시는 교수님들도 같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천만 관객 영화의 작가도 마찬가지였고요.”

학생들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작가는 그러한 불확실성을 숙명이라 여기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점을 인내하고 받아들이고 꿋꿋이 나아간다면 불확실성을 예측할 수 있는 단계가 올 겁니다. 제가 예전에 선배 작가에게 들었던 말을 끝으로 이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마지막을 말을 시작했다.

“선배가 그랬습니다. 모든 작가가 본인이 재능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10년만 하면 중간은 간다. 이 말은 어느 직업, 어느 분야에도 통하는 말일 겁니다. 재능은 곧 경험입니다. 경험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상으로 지루한 강의를 마칩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어나 인사를 했다.

갈채가 쏟아졌다.

교수님들이 나와 악수와 포옹을 청해 오셨다.

학생들은 손뼉을 치거나 사진을 찍기 바쁘고.

올해는 내가 시나리오 작가가 된 지 10년이 된 해다.

코어가 생기기 전 나는 미래가 불안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는 경험이 부족했던 거였다.

그러니 오늘의 강의는 나에게 한 말이었다.

무명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강의가 끝나자 피자 상자를 든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어리둥절한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선배 노릇 좀 하려고요.”

“와! 대박!”

“잘 먹겠습니다, 선배님!”

후배들과 둘러앉아 피자를 먹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다.

선배로서 들려주는 생생한 현장의 경험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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