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음악 영화 (27/56)

제3장 음악 영화

회사 직원 30여 명이 연습실에 모였다.

연습실 저편에는 무대 의상에 퍼포먼스 분장까지 한 록키 멤버 8명이 자리를 잡았다. 데뷔를 앞두고 직원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점검이었다.

박상희 본부장이 지성이에게 말했다.

“애들 아직 어린데 의상이 너무 선정적인 거 아니야?”

“노이즈 마케팅 방향으로 봐주세요. 데뷔 때 확 눈길을 잡으려고 일부러 시도하는 건데요.”

“역풍 불면 최 팀장이 책임질 거야?”

“여성분들에게 제니스 인기가 워낙 좋아요. 음악이 그냥 그러면 여성분들이 화를 좀 내시겠지만 남자들이 주로 듣는 메탈이잖아요. 콘셉트라고 생각할 거에요.”

“그런가?”

내가 봐도 락키 아이들 의상이 좀 야했다.

몸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그래도 눈도장은 제대로 찍을 것 같다.

지성이 전략은 이랬다.

눈으로 사로잡은 뒤 귀로 묶어 둔다고.

곧 락키가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연습실에 메탈 펑크가 쾅쾅 울렸다.

이어지는 아이들의 발랄한 무대 매너.

빠르고 경쾌한 연주와 자유분방한 안무.

공연을 보고 있으니 코어가 새삼 놀랍다.

락키 아이들을 처음 봤을 때 세계적인 걸그룹 밴드가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당시 로즈 엔터 규모나 상황을 봤을 때는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단편영화로 우연히 락키 아이들 인지도가 세계적 수준이 되어 버렸고, 로즈와 큐즈가 합병했으며, 영화 플랫폼이 얼마 전에 출시되었다. 그런 것들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데뷔와 동시에 세계 무대에 보일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코어가 이런 것들을 예견했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내가 구상한 것들이 어느 정도 바탕이 되었겠지만.

이미 인지도가 있고, 노래 또한 좋다.

데뷔만 하면 바로 성공이다.

다시 징- 하는 소리와 함께 연주가 끝났다.

짝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상희 본부장이 외쳤다.

“5월 1일에 데뷔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표정이 밝았다.

지성이가 기획하고, 박상희 본부장이 지휘했다.

그 결과물이 잘 나와서 다들 기대가 컸다.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로 향했다.

이제 회사에 직원만 100명이 넘는다.

제니스와 하이니스 신곡 준비팀. 락키 데뷔팀.

플래닛 케이 관리팀. 드라마 관련팀. 등등.

동시 다발로 일이 벌어져서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내 사무실에 들어와 앉았다.

메일이 와 있었다.

내 친구 동식이다.

10일 전에 동식이에게 사업 제안서를 보낸 터였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벌써 결정이 났어?”

-VR 기술을 영화에 적용하는 거 그리 어렵지 않아. 게임 속 동영상 구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테스트는 해 봤어?”

-그래. 극장에서 보는 듯한 현장감과 생동감이 좀 있어. 원본이 2D라서 효과는 그게 전부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기존 입체 영화는 좀 어지러운데 네가 개발한 건 괜찮을까?”

-그거랑은 관계없어. 네가 360도 가상현실로 영화를 찍으면 완벽한 가상 현실 영화가 될 것 같은데, 그건 좀 어렵겠지?

“작정하고 공포 영화를 찍으면 몰라도 일반 영화는 가상 현실로 만들 필요가 없어. 한 편당 제작 기간은?”

-한 사람이 맡으면 15일 정도. 좀 긴가?

“아니야. 적당해. 장비는 VR 헤드셋 쓰면 되지?”

-그래. 초점만 맞추면 돼. 스마트폰보다 PC와 바로 연결하는 화면은 더 좋고. 영화 관람용 기어를 새로 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네가 연구비 대면 내가 하고.

“예산 견적 뽑아서 보내 봐.”

-그래. 직원들도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니까,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이거 우리한테 의뢰만 할 거야? 독자적인 회사를 세울 거야?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만든 기술이니까, 나로선 독자적인 회사가 낫지. 지금 게임사와는 별개이기도 하고.

“그럼 독자적인 회사로 하자. 너와 나 지분 반반으로.”

-그래. 다음 달 초에 한국 들어간다. 너희 회사에 파견 나갈 직원들도 함께 갈 거야. 영화에 적용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아서 회사 규모는 20명이면 적당해.

“VR 영화 기술 특허는 신청했어?”

-너랑 합작할 것 같아서 미뤄놨어. 공동명의로 올려야지. 나는 기술. 넌 영화. 둘 다 있어야 하니까.

“알았어. 특허 관련해서 준비 좀 해.”

-오케이.

전화를 끊었다.

기존에 VR 기어로 영화를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가상현실 게임 엔진에 영화 영상을 올리는 시스템인데, 기존 입체 영화와 조금 다른 입체감을 준다. 영화 속에 들어간 듯한 몰입감과 현장감이 생긴다.

콘텐츠 제작부 직원이 내 방에 서류를 놓고 나갔다.

플래닛 케이에서 저예산 장르 영화를 제작한다는 공고를 냈다. 제작비 20억 이하 예산으로 시나리오만 좋으면 로큐가 제작한다는 내용이다.

그 중 제작부를 통과한 작품들이 내 책상에 놓였다.

대충 읽어보니 기발한 영화가 많았다.

플래닛 케이 단독 상영이라면 기존 영화와 달리 1시간짜리로 촬영해도 된다. 어차피 플래닛 케이는 정액제이고, 대부분 무제한 관람이니까.

내가 일일이 다 관여할 수는 없는지라 박상희 본부장에게 전권을 맡겼다. 최종 5편을 뽑아 제작을 진행하라는 결재를 했다. 시나리오만 보낸 경우는 작품을 사서 전속 연출팀이 영화를 찍고, 본인이 연출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감독으로서 권한을 맡겼다. 회사는 제작 투자 및 지원만 하면 되고.

곧 출시될 펀딩 앱으로도 투자금을 모은다.

로큐 작품. 다른 제작사 작품. 플래닛 전용 작품.

이 세 종류로 펀딩이 될 텐데, 일정 기준 이상 펀딩이 안 되면 투자자가 선택한 2순위로 돌리는 시스템이다.

일이 점점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결재를 마무리한 뒤 영화 제작팀으로 갔다.

승철이가 본인 영화 조감독과 대화 중이었다.

“시나리오 완고 나왔어?”

“3고까지는 나왔는데 이대로 가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초고가 괜찮았어. 욕심부리다 망가진 게 아니라면 가도 돼. 내 느낌엔 60억 예산에 300만은 들 거 같다.”

“진짜요?”

“남자 주연은 누굴 생각하고 있어?”

“건하요. 서연 씨는 확정이고.”

“건하가 되려나 모르겠네.”

“왜요?”

승철이는 건하가 전에 어땠는지 전혀 모른다.

예전 의학 드라마 사고 이후 건하는 사람 자체가 달라졌다. 이젠 말도 행동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건하에게 여성팬도 상당히 많아졌다. 대작에선 조연이겠지만 저예산 영화에선 주인공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불치병 환자 역할도 건하가 하기에 적당하고. 늘 병에 걸린 배역을 맡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 건하가 어울리긴 하네.”

“그럼 서연 씨와 건하가 하는 걸로 할게요.”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네가 알아서 다 해.”

“시나리오 검토도 안 해줘요?”

“난 초고 보고 오케이 했다니까.”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승철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사무실을 나섰다.

자리가 자리다 보니 처리할 일이 많다.

임원들에게 다 맡겨버리자니 아직 회사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 게 아니라서 신경을 써야 했다.

내가 생각한 안정 궤도란.

플래닛 케이 시청자를 백만 명까지 확보하는 것.

펀딩 앱이 활성화되는 것.

락키가 세계적 인지도를 가진 그룹이 되는 것.

수익 구조를 고정하는 것.

이런 것들이 구성되면 회사 일에서 손 뗄 생각이었다.

혁신이나 변화가 필요하면 다시 신경 쓰면 된다.

코어가 생긴 후 내가 목표했던 일의 첫 번째 단계까지는 일단 왔다. 투자받을 걱정 안 하고 영화를 찍고 개봉할 수 있게 되었으니.

* * *

5월 1일.

락키가 화려한 데뷔를 했다.

포털과 플래닛 케이에 광고 배너를 올리고, 유튜브 본사에도 연락을 보냈다. 안 그래도 유튜브가 언제 락키가 데뷔하나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단편영화로 광고 수익 재미를 본 유튜브라 락키 뮤비도 글로벌 메인에 걸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화제를 만들어 낸 뒤 뮤비를 올렸는데.

한국과 세계 시장에서 동시에 터졌다.

한국은 록 메탈 데뷔곡으로 음원 순위 3위에 오르는 전례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에선 이 정도로도 센세이션이었다.

정말 대박은 뮤비였다.

유튜브에 올리고 이틀 만에 무려 7백만.

단편 영화를 보고 락키에게 관심을 보인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 예쁜 아이들이 ‘헤비메탈’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세계 각국 남자들의 반응이었다.

내 영화 이동원. 단편영화. 플래닛 케이. 제니스.

그리고 지금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여우야 2.

그동안 나 혹은 우리가 해낸 많은 결과물의 수혜가 락키에게 전부 쏟아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락키 뮤비 조회수가 천만 넘었어요!”

“축하합니다! 프로듀서팀!”

“우리 회식 한번 하죠!”

“야! 미리 샴페인 터뜨렸다가 훅 가는 수가 있어.”

“지금 아이튠스 16개국에서 1위에요. 곧 있으면 빌보드 차트까지 오를 기세인데.”

“빌보드가 옆집 개 이름이냐? 설레발 치지 말고 침착하게 기다려 보자고.”

구 대표가 말은 그렇게 해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본인이 락키 데뷔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터라.

작곡가 출신이라 작곡에도 관여를 많이 했고.

이동원은 해외에서 대박.

여우야 시즌 2 시청률 고공 행진.

락키는 유례없는 성공을 예고하고 있다.

플랫폼도 성황을 이어가고 있다.

하는 일이 다 잘되고 있어서 사실 좀 불안했다.

사람의 운은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운이 일시에 모이면 남은 건 불운밖에 없는 건 아닐까.

뭐, 재벌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 운이 좋다고 봐야 하겠지만. 어쩌면 운은 좋아도 행복이 없을 수도 있고.

운과 불운이 아니라, 행과 불행으로 봐야 하나.

어쩌면 코어가 진화하면서 코어를 발동하지 않아도 예측력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딱히 분석을 안 해도 그냥 직감적으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알 수 있는 거다.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 그런 경우다.

계산하고 분석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

남들은 어떻게 알았느냐고 궁금해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냥 저절로 아는 것이다.

이대로 가도 괜찮겠지.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고.

노력하는 만큼 얻는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달력에 붙여둔 메모를 보았다.

지난 몇 달 동안 붙여둔 것들이다.

이동원이 해외에서 대박 난 후에 날 만나자고 한 분들이 무척 많았다. 마블에서 이동욱 씨가 와서 식사하자고 하고, CG E&M 이지은 상무가 보자고 하고. 로테 엔테테인먼트 본부장이 내 다음 작품 배급은 무조건 하겠다고 하시고.

국내뿐이 아니었다. 내 영화로 재미를 좀 본 미국과 유럽 쪽 투자자들이 영화에 투자하겠다고 하질 않나, 수입사들이 시놉시스가 있으면 보내달라고 하질 않나. 심지어 마블에선 내 차기작에 전액 투자할 용의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차기작이 아니면 그다음 작품이라도 할 테니 연락 달라고 했다.

일단 기다려달라고 그랬다.

그게 벌써 넉 달 전이다.

다들 내가 차기작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대작을 할 것인가, 작가주의 영화를 할 것인가.

작품성 있는 작품을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따뜻한 영화를 해 볼까.

서두르지 않았다.

근 1년 동안 빠르게 달려왔기에 이제는 호흡을 좀 고를 시기였다. 이미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그것들을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짓고 차기작을 시작하기로 했다.

매일 출근해서 같은 일정을 소화했다.

여우야 시청률과 댓글을 모니터하고, 락키 뮤비 조회 수와 세계 각국의 팬들 반응도 보았다. 회사에 들어온 시나리오도 검토하고, 주가 변동도 살펴보았다.

여우야와 락키가 동시에 터진 게 주가에 반영되었다.

여우야 1화가 방영된 다음 날 로큐 주가가 상한가를 쳤다가 다음날 소폭 하락했고 이후 등락을 거듭했다. 그러다 락키가 폭발하면서 연일 상한가를 쳤다.

여우야의 해외 수출은 당장 확인하기 어렵지만, 락키 애들 음원 수익은 각국 음원 사이트에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뮤비 조회수가 곧 음원 성적이 될 테고.

해서 현재 로큐 주가는 46,900원.

4만 원대에서 매도하고 나가는 투자자들이 좀 있었는데, 그 물량을 기다렸다는 듯 외국인과 기관이 매수하기 시작했다. 주가가 4만 원대가 되자 일반 개미 투자자보다는 기관이나 큰 손이 물량을 흡수하는 모양새였다.

대기업이나 외국 자본의 수상한 조짐은 안 보였다.

내가 없으면 로큐가 이전의 큐즈로 돌아간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나가면 그냥 나가겠나. 소속 연예인과 직원들 다 데리고 나가지. 플래닛 케이는 내 소유나 다름없고.

출근하자마자 매일 체크하는 것들을 확인한 뒤 제작부로 넘어갔다. 승철이가 완고를 내고 프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완고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웃기고 따뜻하고 슬픈 멜로, ‘은하와 민수.’

초고 때보다 약간 더 좋아졌다.

다 읽고 나자 승철이가 물었다.

“어때요?”

“좋아. 마무리가 더 낫네.”

“네. 아무래도 은하와 민수가 차례로 죽는 게 좀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은하가 민수품에서 편안하게 죽고 민수는 물끄러미 바다를 보는 마지막 장면으로 갔어요. 은하가 바다로 떠난 것처럼. 그게 낫죠?”

“그러면 관객에게 민수는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은하는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나고, 민수는 추억을 간직한 채 남아 있고. 민수와 관객은 같은 사랑과 추억을 공유하는 거지.”

승철이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작가도 아닌 녀석이 시나리오를 제법 쓴다.

내가 느낀 결말을 관객도 느낄 것 같다.

“제목은 이걸로 가게?”

“은하와 민수가 관객의 마음에 여운으로 남아 존재할 텐데, 존재는 곧 이름이잖아요.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요.”

좋다. 영화를 보고 오래 기억나는 건 사람이니까.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건 이름이고.

완고를 들고 내 사무실로 갔다.

약간의 첨삭만 했다. 승철이가 연출만 했던 터라 대사 발이나, 영상 특유의 예술적 표현인 셔레이드가 좀 부족했다.

시나리오 수정을 해서 보냈더니 승철이가 읽어보고 바로 프리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녀석이 나와 수호를 캐스팅했다. 수호는 시골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순박한 농사꾼. 나는 그런 수호를 괴롭히는 빚쟁이.

사실 내가 어디 가서 말을 안 했지, 이동원 때 내 연기가 꽤 인상적이었다. 전직 경찰인 수호의 총에 맞아 죽기 전 세상이 지옥이라며 악을 써대는 연기. 새로운 씬 스틸러가 나타났다며 입소문이 났는데 알고 보니 그 영화의 감독이었다는.

따뜻한 영화라 흔쾌히 출연하기로 했다.

이왕 나쁜 놈 전문으로 유명해졌으니 그 길로 가지 뭐.

승철이를 도우면서 나도 내 차기작을 슬슬 구상했다.

멜로 영화 프리 작업을 보고 있으니 난 로맨틱 코미디나 휴먼 드라마로 한 템포 쉬어 갈까 싶기도 했다.

일단 그렇게 잡아두고 하루하루 바쁘게 지냈다.

여우야는 마지막회 시청률 34%를 찍고 종영했다.

방송 3사를 통틀어 올해 최고 시청률이었다.

외국의 반응은 더욱 컸다. 이동원처럼 한국보다는 외국인에게 거부감이 덜 드는 소재였던 터라.

드라마 본방과 재방 모두 광고가 완판되었기에 제작비는 일찌감치 회수했고, 플래닛 케이 방영과 별도로 여러 나라에 텔레비전 판권 판매로도 이어졌다.

락키는 정말 빌보드 차트 79위까지 올랐다.

한국 신인의 데뷔곡으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지성이가 예측한 대로 전 세계 남자들의 반응은 뜨거움을 넘어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

플래닛 케이는 출시 석 달 만에 107만 회원을 확보했다.

드라마 여우야로 시청자를 유입한 뒤 영화와 다른 드라마를 보게 하려는 시도가 먹혀들었다. 한국 드라마를 좀 더 싸고 쉽게 보는 사이트로 자리 잡는 중이었다.

로큐 제작의 저예산 영화도 속속 제작을 시작했고, 제니스와 하이니스도 신곡을 발표했다. 한번 올랐던 산은 금세 오른다. 일주일 차로 발표한 두 그룹의 신곡 모두 1위를 찍었다.

영화 ‘은하와 민수’가 프리 프로덕션을 끝낼 무렵.

나도 차기작을 결정했다.

두 개였다.

하나는 전액 마블의 투자를 받아 로큐에서 제작하는 대작.

할리우드 특수효과팀과 일할 수도 있어서 이 작품은 영화 제작 전체가 3년은 걸릴 터였다.

따라서 대작은 느긋하게 준비할 생각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저예산이다.

대작을 준비하는 기간 안에 찍을 수 있는 영화.

예산 30억 정도. 촬영기간 한 달.

흥행은 200만가량.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많은 로큐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영화. 사람들의 마음에 기분 좋은 온기를 전해줄 수 있는 영화. 내 개인적인 취향을 담아보고 싶은 영화.

로맨틱 ‘음악’ 멜로다.

* * *

환자복을 입은 은하와 민수.

은하는 서연. 민수는 건하다.

둘이 나란히 병원 벤치에 앉아 있다.

“액션!”

승철이의 우렁찬 콜이 울렸다.

민수와 은하가 물끄러미 앞만 본다.

병색이 완연한 두 사람. 청초하고 아름답다.

한참을 앞만 보던 민수가 말했다.

“우리 바캉스 갈래요?”

“바캉스요?”

“네. 병원에만 있으면 억울하잖아요. 저는 이번 여름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거든요.”

은하가 민수를 물끄러미 본다.

더는 치료가 불가능하여 의사는 주변 정리를 해 두라고 했다. 살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 포기하고 주변 정리도 끝냈다. 죽는 게 무서워서 병실에서만 지냈는데, 민수라는 친구를 만났다. 뇌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은하는 이 친구와 이따금 만나서 대화하는 게 하루의 낙이었다. 그런 친구가 웃으면서 바캉스를 가자고 한다. 은하도 이번 여름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어디로 바캉스를 가요?”

“동해요. 저 일출을 한 번도 못 봤거든요.”

“바다에 가 봤어요?”

“네. 바다는 정말 커요. 그거 알아요? 지구 모든 생명의 고향이 바다래요. 난 바다에 가면 건강해질 거 같은데.”

“오늘 갔다 올 수 있어요?”

“그럼요. 동해까지 4시간도 안 걸려요.”

“저, 그럼 바다 보게 해 주세요.”

“좋아요. 오늘 당장 가요.”

일어나 은하에게 손을 내미는 민수.

은하는 수줍게 그 손을 잡는다.

“컷! 야, 연기 좋아!”

“고맙습니다.”

서연은 웃고 건하는 꾸벅 인사를 했다.

건하의 연기가 일취월장했다.

그때 스크립터가 물었다.

“감독님, 오케이에요, 뭐예요?”

“응? 오케이라고 했는데?”

“안 했는데요?”

“했거든!”

“안 했거든요?”

어이구. 승철이 저게 초짜 티를 내고 있네.

제작사 대표로서 촬영을 보고 있었다.

어느 감독이든 생애 첫 촬영 때는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겪는다. 회차가 거듭하면 비로소 진짜 감독이 되는 거지.

충동적으로 바다에 가자는 민수의 말에 은하도 하루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서 간호사와 가족 몰래 병원에서 탈출한다. 그렇게 떠났는데 민수가 지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민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병원 밖의 세상이 좋았던 은하가 오히려 바다로 가자고 이끈다. 그렇게 떠난 여행길이 무려 7일이나 걸린다. 만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안타깝고, 슬프고, 기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 사연을 듣기도 하고, 얼떨결에 해결도 하면서 나아간다.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서 차라리 죽는 게 낫구나 싶다가도, 힘들어도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걸 보니 살고 싶기도 하고.

로드무비이자 행복하게 사는 걸 배우는 성장기다. 행복이 뭔지 알았을 때 죽음이 찾아오니 아이러니이기도 하고.

세팅 중일 때 서연과 건하가 진지하게 대화를 했다.

건하가 아직 연기가 부족해서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캐릭터나 연기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서연도 이제 스타가 아닌 배우가 되어 가는 모양이다.

남자는 40부터. 여자는 30부터 연기의 맛을 낸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서연이도 이제 내년이면 서른이네.

“세팅 완료!”

“조명 끝났습니다!”

다시 촬영이 이어졌다.

그늘에 앉아 지켜보고 있을 때.

수호가 전화를 받으며 내게 왔다.

건하의 매니저로 현장에 와 있는 수호다.

“대표님. 정효주 씨가 이번 역할 하고 싶다고 합니다.”

“정효주? 내 영화에?”

“예. 전화번호 찍어 주셨습니다.”

저예산 영화에 정효주가 나오면 대박 캐스팅이다.

내가 무명작가였을 때도 정효주는 톱스타였다. 지금은 한 손에 꼽는 한국의 여배우다. 몸값은 수억 대고.

정효주 측이 보내 준 번호로 전화했다.

“최신성입니다. 정효주 씨 매니저…”

-저예요. 시놉시스 잘 봤어요.

매니저가 아니라 본인 번호였어?

“여주가 피아노를 좀 칠 줄 알아야 하는데, 가능하세요?”

-피아노는 어릴 때부터 했어요. 노래도 전에 부른 적 있고요. 음악 영화가 나오면 꼭 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저, 예산이 30억이라 출연료를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촬영 기간은 한 달이고요.”

-출연료는 별로 신경 안 써요. 제가 지금 인터뷰 중이라 만나 뵙고 이야기하시면 안 될까요.

“네, 그러세요.”

전화가 끊어졌다.

나도 모르게 저편에 있는 서연을 보았다.

정효주가 내 영화에 나오면 나야 좋긴 한데, 괜한 오해를 사는 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정효주가 재즈를 좋아하나?

그쪽 음악 영화가 딱히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내 저예산 차기작은 음악이 중심인 로맨틱 멜로다.

어쿠스틱. 재즈. 그리고 밴드.

여주인공은 걸그룹 출신으로 5년이나 그룹이 뜨지 못해 결국 탈퇴하고 본인의 음악을 선택했다. 그러나 서른이 넘도록 이도 저도 아닌 무명 가수가 되고 말았다.

미래가 암울했던 그녀는 마지막 거리 버스킹을 하고 미련없이 음악을 접기로 했다. 원 없이 연주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그녀에게 한 남자가 쭈뼛거리며 다가온다.

중견기업의 39세 노총각 과장. 어렸을 때 밴드를 하고 뮤지션을 꿈꾸었던 평범한 직장인이다. 일에 치여 살다 보니 결혼 시기도 놓치고, 삶이 권태롭기 그지없었다. 그가 어느 날 홍대에 갔다가 길거리에서 피아노를 치는 한 무명 가수를 보게 된다. 그때 남자는 결심한다. 음악을 다시 하기로.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재즈 밴드를 결성한다.

열심히 연습하며 새로운 삶과 음악에 눈을 뜨는 두 사람.

음악으로 삶의 위안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새로운 인생은 덤이고.

어쨌거나 정효주가 보자고 하니 만나러 갔다.

* * *

작은 카페였다.

일전에 이태원에서 정효주를 만났을 때도 카페였는데, 이곳도 그녀의 친구가 운영하는 곳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효주의 친구가 사장이었다. 이태원에서 연남동으로 옮긴 거였다.

내가 들어가자 정효주와 미모의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백상 뒤풀이 때 보고 처음이죠?”

“네. 그땐 제가 경황이 없어서 수상 축하한다는 말도 못 드렸네요.”

“저도요.”

경황이 없기는 했지만 서연과 함께 참석한 자리라 여배우들과는 일부러 거리를 뒀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손님은 안 들어오실 거예요.”

“네.”

정효주 맞은편에 앉았다.

어색했다.

전에 만났을 때는 나는 작가였고, 정효주는 톱스타였다.

지금은 대충 위치가 비슷해졌다고 할까.

그래서 그런지 날 보는 정효주의 눈빛도 조금 달라졌다.

전에는 일반인을 보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감독에 대한 존경이 아주 조금은 비친다. 물론 내 느낌이다.

정효주가 말했다.

“남자 주인공은 생각해 둔 분이 계세요?”

“나이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개런티가 좀 안 맞을 것 같네요. 효주 씨는 추천하실 분이 있어요?”

“반드시 10년 차이가 나야 하는 거죠?”

“네. 15년도 좋고요.”

“흠…….”

나도 쉽지 않은데 정효주라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까.

그녀가 말했다.

“황정우 선배님은요?”

“황정우 씨는 출연료가 너무 세서요.”

“황 선배님 음악 좋아하시고, 뮤지컬도 하셔서 하실지도 몰라요. 기타도 수준급이시고요. 제가 연락해 볼까요?”

“친하세요?”

“매니저가 황 선배님을 알아서요.”

정효주가 문자를 보냈다.

얼마 뒤 전화가 왔다.

“네. 정효주예요. 다름이 아니고. 최신성 감독님이 이번에 저예산으로 음악 영화를 하신다는데… 혹 선배님은 생각 없으신가 하고요. 네. … 아, 정말요? 시나리오는 아직이에요. 네. … 네에.”

정효주가 밝게 웃었다.

“시나리오 보내 주시면 긍정적으로 검토하시겠대요.”

“출연료도 말씀드려야 하는데.”

“문자로 보냈어요. 한 장에 러닝개런티면 하시겠대요.”

“한 장이라면…….”

“천만 원요. 저도 그렇고요.”

말을 하고 아름답게 웃는 정효주다.

시놉이 마음에 들었던 건가.

30억 예산에 1억이면 세고, 1천이면 맞다.

그때 정효주 친구가 맥주를 가져왔다.

“제가 미리 주문했는데 드실 수 있죠?”

“저, 제가 차를 가지고 와서요.”

“아, 그러세요. 음료수 드실래요?”

“그러죠. 커피로 할게요.”

“아메리카노 맞죠? 현정아, 여기 아메리카노 한 잔.”

정효주가 친구에게 주문을 하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다시 어색해졌다.

영화 캐스팅으로 만났을 뿐이다.

그런데 어째 정효주는 매니저를 안 부른다.

원래 그런 스타일인 건지.

“저는 영화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꼭 하고 싶어요. 여배우들은 멜로를 좀 하고 싶은데, 요즘은 멜로가 워낙 안 나와서 출연료를 깎아서라도 해야죠. 음악은 잘 나오겠죠?”

“그럼요. 로큐에 작곡가들 많습니다. 이태원이나 홍대에서 실제로 활동하는 재즈 밴드를 섭외해서 OST를 만들 겁니다. 합주 씬은 그분들 도움도 좀 받고요. 그런데 피아노는 어느 정도로 치세요? 대역이 치긴 하겠지만요.”

“잠깐만요.”

정효주가 걸어가더니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바로 연주를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내가 좋아하는 곡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피아노 연주곡.

“올웨이즈 위드 미네요.”

“어머? 이 곡 좋아하세요?”

“그럼요.”

“그럼 이 곡은요?”

또 익숙한 곡이 흘러나왔다.

“이웃집 토토로죠?”

정효주의 눈이 커진다.

그녀가 또 다른 곡을 쳤다.

이번엔 좀 어려웠다. 어떤 영화에서 들어본 곡이다.

그 영화가….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들었던 곡 같은데요?”

“맞아요. 유키 구라모토의 로맨스.”

“아, 그러네요.”

정효주가 웃으며 걸어와 앉았다.

“남자 분 치곤 피아노 곡 잘 아시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록만 줄기차게 듣다가 우연히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라고 편안한 재즈곡에 빠져서…”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도 아세요? 저 좋아하는데!”

“아, 어느 곡이요?”

“저 앨범 다 있어요. 그분들 내한공연 때도 갔었고요.”

내가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네.

곡이 아닌 앨범 단위가 나오니.

이번 영화 모티브가 된 게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의 곡들이다. 난해한 재즈가 아닌 피아노 중심의 듣기 편한 재즈이고, 대중적이기도 하다.

좋은 음악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한다.

음악 영화가 은근히 흥행하는 것도 그런 이유고.

한국엔 이렇다 할 세련된 음악 영화가 없었다.

없으니 내가 만드는 거지.

음악 덕분에 정효주는 나와 한층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나도 어색함은 좀 풀렸는데 뭔가 좀 이상하게 흐른 것 같은 위화감을 느꼈다. 분위기가 이래선 안 되는데.

그나저나 정효주가 생각보다 피아노를 잘 쳤다. 유키 구라모토 곡은 꽤 어려울 텐데,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다.

그때 카페 사장이 내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효주가 며칠 전부터 피아노 연습을 많이 하던데, 영화 때문이었네요. 재밌겠다.”

그 말에 정효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평소 연습한 게 아니었나?

정효주가 날 물끄러미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이거 갈수록 분위기 이상해지네.

“저, 그럼 시나리오가 나오면 바로 보내 드릴게요.”

일어나려는데 정효주가 말을 꺼냈다.

“저, 이번에 회사 옮기려고 하는데…”

“아, 예.”

“로큐에 갈까 싶어서요.”

“…오시면 저희야 좋죠.”

안 된다는 말이 나올 뻔했다.

내가 안 된다고 하는 건 분명 오버다.

그냥 배우와 소속사 대표이자 감독의 관계다.

괜히 찔리는 마음이 드는 내가 이상한 거지.

* * *

다음 날부터 이태원과 홍대 쪽에 밴드를 찾으러 다녔다.

시나리오를 써 놓고 밴드를 찾는 것보다 함께할 밴드를 먼저 찾은 뒤 구상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태원 쪽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연주하는 나이가 지긋한 재즈 밴드가 좀 있었는데, 음악 수준이 너무 높았다. 그만큼 음악이 복잡해서 일반 관객은 접근하는 게 어려울 듯했다.

홍대 쪽에는 퓨전 재즈나 뉴 웨이브를 하는 밴드가 눈에 띄었다. 그 중 모던 힐이라는 어쿠스틱 퓨전 재즈 밴드가 우리 영화 음악에 가장 잘 어울렸다. 내가 생각한 어쿠스틱 기타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음악을 하는 밴드였다.

사실 재즈 음악은 현실에선 접근이 좀 어려운 장르다. 그런데 영화에서 재즈가 나오면 달라진다. 관객이 영화 내용과 함께 음악에도 집중하기 때문이다. 가요보다는 재즈가 영화에 좀 더 어울리기도 하고.

해서 배경으로 깔리는 연주나 주인공들이 구경하는 재즈 밴드의 곡은 좀 어려워도 된다. 주인공들이 재즈 초보자이기에 OST는 훨씬 더 대중적인 곡이 될 테고.

5일간 재즈 밴드 모던 힐의 공연을 구경하다가 공연이 끝내고 내려간 그들을 만나러 갔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재즈 카페에 근 일주일 동안 매일 왔던 터다.

“안녕하세요.”

“예. 최근에 자주 오신 분이시네요.”

“제가 영화를 찍는 사람인데, 이번에 음악 영화를 하려고 해요. 괜찮으시면 간단히 맥주 한잔하시겠어요?”

“영화요?”

밴드 멤버 네 사람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흥미가 있는 사람과 시큰둥하거나 귀찮은 사람.

몇 마디 더 나눈 뒤 그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작은 바에 그들과 둘러앉았다.

잔 맥주가 나와서 다들 한 모금 마셨다.

“무슨 영화를 찍으시는데요?”

“로맨틱한 음악 멜로입니다. 모던 힐이 영화 음악 전체를 좀 맡아주시면 안 될까 해서요.”

“영화 내용은요?”

“걸그룹 출신인 무명 가수와 왕년에 기타를 좀 쳤던 만년 과장 노총각이 우연히 만나 재즈 음악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재즈를 하면서 여자는 하고 싶은 음악이 뭔지 알게 되고, 남자는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주제입니다.”

멤버들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다.

“거기에 무미건조했던 두 사람의 삶에 사랑이 찾아온다는 가벼운 로맨스가 영화의 두 줄기에요.”

한 멤버가 물었다.

“초보가 재즈를 제대로 연주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주연 배우분들이 연습을 좀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트레이닝을 좀 해주시면 영화 찍을 때 미숙한 걸 어느 정도 감출 수 있어요. 주요 삽입곡은 여러분 창작곡이고, 저희 회사 작곡가들이 협업으로 도와드릴 겁니다.”

“회사요? 영화사에 작곡가가 있어요?”

“로큐 엔터라는 기획사입니다. 영화도 만들어요.”

두 멤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다른 두 멤버는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고.

놀란 멤버가 말했다.

“로큐 엔터 요즘 핫한 회산데. 후배들이 거기 오디션을 보러 다녀서 저도 조금은 알아요.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가장 영향력이 높은 회사라고 그러던데.”

“그 회사에서 재즈 음악 영화를 한다고요?”

두 사람의 반응에 나머지 둘도 덩달아 놀랐다.

내가 무슨 사기꾼인 줄 알았나 보다.

질문에 대답했다.

“네. 그 영화에 음악도 맡아주시고, 주인공들의 멘토로 출연도 좀 해주세요.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고, 영화상에서 연주하는 모습이면 됩니다.”

그제야 본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아챈 얼굴이다. 다들 어안이 벙벙하다.

리더가 물었다.

“주연배우가 누군지 물어도 될까요?”

다들 그게 가장 궁금했던 모양이다.

캐스팅을 보면 영화의 성공도 가늠할 수 있으니.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정효주 씨와 황정우 씨가 이번 영화를 하실 것 같네요.”

“진짜요?”

네 사람이 또 깜짝 놀랐다.

두 배우 모두 한국 최고의 배우이니.

리더가 다시 물었다.

“그럼 감독님은 누가 하시는데요?”

“제가 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맥주를 마시는 멤버들을 보며 말했다.

“최신성이에요.”

“예?”

“쿨럭! 쿨럭!”

세 명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한 명은 맥주를 마시다 사레가 들리고.

다들 외계인 보듯 날 본다.

리더가 간신히 입을 뗐다.

“이동원 찍으신 그 최 감독님이시라고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영화 하실래요?”

“하겠습니다!”

네 명이 동시에 소리쳤다.

가장 중요한 재즈 밴드 섭외에 성공했다.

영화의 성패가 곡에 달렸으니.

사흘 후.

시나리오를 완성한 뒤 회사에 출근했다.

내 사무실에 들어가서 시나리오 교정을 할 때였다.

사무실에 소란이 일어서 봤더니.

정말 우리 회사와 계약하러 왔다.

정효주가.

* * *

회의실로 들어갔다.

정효주와 성 부사장이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정말 오셨네요.”

“네.”

성 부사장이 말했다.

“정효주 씨가 우리 회사로 올 줄 생각도 못했네요. 배우 전문 기획사를 선호하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솔직히 이래도 되나 싶습니다. 정효주 씨면 억대 계약금 주고 모셔가려는 회사도 많을 텐데요.”

“돈 많이 받으면 부담만 커요. 전에 있던 회사도 계약금은 없었어요.”

“그렇긴 하네요. 식사하러 가시죠.”

“네.”

일어나는 정효주 씨에게 물었다.

“계약은 마음에 드세요?”

“좋아요. 회사 분위기도 좋고.”

“이전 회사 매니저분과 친분이 깊어 보이던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정효주 급 정도면 계약 후 대표가 식사를 대접하는 게 관례였다. 구 대표도 없고, 성 부사장에게 맡기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고.

또 괜한 신경을 쓴다. 그냥 밥을 먹을 뿐인데.

셋이서 회사에서 나가 식당으로 향했다.

고급 중식당에 들어가서 앉았다. 정효주가 나타나니 사람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쏠린다. 손님들이 로큐 소속 연예인은 자주 보지만 정효주는 의외였던 모양이다.

주문한 식사가 나와 밥을 먹었다.

나도 정효주도 말이 없었다.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성 부사장이 애써 분위기를 밝게 하려 쉴새 없이 말을 꺼냈다.

“요한을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 효주 씨가 그 영화로 여우주연상 받는 거 보고 저도 기분이 참 좋더군요. 지난 백상 때도 최고연기상 받으셨죠?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부사장님.”

성 부사장이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을 계속했다. 락키가 어떻고, 영화 플랫폼이 어떻고. 회사 자랑이 대부분이다.

짜장면을 비운 뒤에야 말했다.

“여주인공 확정되면 한두 달간 보컬 트레이닝과 피아노 연습을 좀 하셔야 합니다. 먼저 보컬 트레이닝부터 하시고, 작곡팀에서 곡이 나오면 그 곡으로 피아노 연습하시면 돼요. 돈도 얼마 못 받는데, 일은 좀 힘들게 됐네요.”

“제가 선택한 음악 영화니 당연해요.”

“러닝 개런티는 넉넉하게 책정하겠습니다. 흥행이 될지는 미지수지만요.”

“흥행할 거에요. 감독님 영화니까.”

정효주가 말을 하곤 날 물끄러미 본다.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시나리오는 나왔나요? 저 얼른 보고 싶은데.”

“네. 회사로 들어가면 보내드릴게요.”

“마침 오늘 제가 시간이 좀 남아서 감독님과 영화에 대해서 의논 좀 하고 싶어서요.”

내 착각일까.

정효주가 자꾸만 어떤 건수를 만드는 듯한 느낌이다.

전혀 아닌데 내가 무슨 차단벽을 치면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꼴이다. 겉과 속이 다른 연예인처럼 무슨 수를 쓸 사람은 아닌데.

“회사에서 하시죠.”

“그렇게 해요.”

* * *

회의실에서 정효주와 마주 보고 앉았다.

정효주는 출력한 시나리오를 읽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지 표정이 밝았다.

남자 주인공 한 과장은 홍대에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여주인공의 마지막 버스킹을 보고 음악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재즈를 배우려면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데, 여주는 교습소를 알려주고 떠난다.

남자는 다음날부터 교습소에 다니며 연습을 한다. 퇴근 후 술도 안 마시고 연습만 하길 수개월. 삶이 변화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연습을 하던 중.

교습소에 피아노 선생으로 들어온 그녀와 재회한다.

친해진 두 사람은 매일 교습이 끝나면 여러 밴드 공연을 보러 다니고, 점점 재즈의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젊음과 유행으로 가득한 홍대 입구 거리.

버스킹하는 사람들. 무명 화가들의 그림들.

북적거리는 골목. 팬들의 환호성.

네온사인과 곳곳에서 울리는 음악들.

두 주인공은 이 홍대와 공연장을 모험하듯 분주히 돌아다닌다. 이 시간의 흐름을 현란한 재즈 연주와 함께 경쾌한 몽타주로 편집한다. 주인공들도 관객들도 재즈라는 신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 있도록.

정효주가 시나리오를 다 읽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나리오가 훨씬 더 좋네요.”

“다행입니다.”

“다만 여주인공 말투에 개성이 부족한 느낌이에요. 이건 제가 다르게 해도 되겠죠?”

“그럼요. 생각해둔 성격이 있어요?”

시나리오를 볼 때 정효주가 메모를 했었다.

처음 읽을 때 캐릭터를 잡아가는 듯.

“제가 본 주인공 소정이 이미지는 이래요. 나이는 차고 벌어 놓은 돈은 없고. 연애 세포는 말라버려서 사람 만나는 것도 귀찮고. 술 취한 아저씨들이 치근대는 것도 진절머리나고. 걸그룹 때 사귀었던 옛 남친은 요즘 잘나가기만 하고. 앞이 안 보여서 음악 계속해야 하나, 그러고 있는데 남자주인공 한 과장이 나타나는 거죠.”

“맞습니다. 별 설명을 안 했는데 바로 잡아내시네요.”

“제 일이니까요.”

역시 배우는 배우다.

영화상에선 여주인공의 이력은 자세히 안 나온다.

버스킹 할 때 구경꾼 하나가 ‘재 걸그룹에 있던 소정 아니야? 어쩌다 저렇게 됐어?’ 이런 식으로 여주인공을 설명한다.

그런 몇 장면의 이미지만 보고 정효주는 여주인공의 성격과 고민까지 파악해 냈다.

정효주가 말했다.

“시나리오 잘 쓰시는 건 알았지만 이 작품의 이미지 기법은 정말 고급스럽네요. 몽타주에 셔레이드가 이어지는 걸 보고 솔직히 감탄했어요. 빠르고 경쾌한 재즈 음악이 어울리면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될 것 같아요.”

“네. 의도한 장면입니다.”

나 또한 놀랐다.

시나리오 문장만 보고 어떤 영상이 나올지 아는 정효주다. 연기 잘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음악이 세련됐는데 영상이 못 따라가면 곤란하다. 음악에 맞춰서 피아노 솔로는 서정적인 화면. 현란한 재즈 음악이 나올 때는 빠르고 독특한 씬 전환이 좋다.

따라서 영화 분위기가 고급스러워진다.

정효주가 말했다.

“초고인 것 같은데 저는 이대로가 마음에 들어요.”

“더 손을 안 봐도 될까요?”

“네. 로맨스가 플라토닉해서 좋네요. 두 사람이 은근히 마음만 두고 있다가 마지막에 손을 잡는 것도 좋고요. 진도가 더 나아갔으면 실망했을 것 같은데 감독님이 만나는 분이 계셔서 그런지, 적절하게 엔딩하셨네요.”

말을 하곤 또 날 뚫어져라 보는 정효주다.

은근슬쩍 서연이 얘기를 하네.

뭘 떠보려는 건가.

“그럼 프리 준비를 하겠습니다. 악기 연주와 보컬 트레이닝은 팀이 갖춰지는 대로 연락 드릴게요. 프리 기간이 짧아서 2달 안에 어느 정도는 해주셔야 해요.”

“그럴게요. 대신 곡이 빨리 나와야 해요.”

“그럼요.”

정효주가 인사를 하고 회사에서 나갔다.

몇 시간 뒤 재즈 밴드 ‘모닝힐’이 회사에 왔다.

주인공이 연주할 삽입곡 4곡을 만들기로 계약을 했다.

영화 메인테마곡은 모닝힐과 작곡팀이 협업을 하고, 내가 음악 감독 노릇까지 하기로 했다.

제작실장이 프리 프로덕션을 전담한 덕분에 난 종일 음악만 들었다. 내 영화에 어울리는 음악이 나오기도 하고, 기존 재즈곡을 편곡해서 삽입할 수도 있으니.

황정우 배우도 마침내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농담조로 노느니 영화 찍자는 마음으로 하겠다고 했다.

촬영 기간이 한 달이라는 게 마음에 드셨다나.

프리에 들어간 지 2주.

두 주연 배우는 보컬과 악기 연습에 돌입했다.

매일 회사 연습실에 와서 하루에 4시간씩 연습했다.

그 사이 메인 테마곡 피아노 데모가 나왔다.

이 테마곡을 다양하게 편곡해서 쓰게 된다.

소식을 듣고 녹음실로 갔다.

모닝힐 멤버들과 작곡가와 프로듀서 8명. 회사 직원 10여 명이 녹음실에 모여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이 왔어? 지성이 넌 일 없어?”

“궁금해서 왔지.”

“다들 그래요?”

“네.”

모인 이들 모두 이번 영화 삽입곡이 궁금했나.

제니스와 하이니스 신곡은 별 관심도 없더니.

방준혁 작곡가가 말했다.

“한 번 들어보시죠.”

다들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뭔가 아련하면서도 산뜻한 느낌이 드는 곡이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연주가 끝나자 직원들이 박수를 보냈다.

“이 곡 너무 좋아요!”

“누가 작곡한 거야? 곡 좋은데?”

작곡가들이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작곡가들이 작곡한 게 아니라는 뜻.

방준혁 씨가 말했다.

“세라가 작곡한 거예요.”

“세라가?”

“네. 구 대표님이 소속 작곡가들에게 모두 곡을 써보라고 해서 곡을 모은 다음 블라인드 청음을 했거든요. 다들 이 곡이 좋다고 해서 알아봤더니 세라가 쓴 곡이지 뭡니까.”

“지성아, 세라 어딨어?”

“일본에 갔는데? 팬미팅하러.”

“다시 한 번 들어봐요.”

“네.”

다시 곡을 들었다.

또 들으니 더 좋은 것 같다.

영화의 메인 테마곡이면서 여주인공의 테마다.

쓸쓸하면서도 희망이 느껴지는.

다른 작곡가들이 작곡한 곡들도 들어보았다.

세라의 곡만큼은 아니지만 다 좋았다.

모두 8곡이었는데 그 중 6곡을 선택했다.

피아노 솔로지만 재즈로 편곡될 곡들이다.

“1번은 이루마 씨의 키스 더 레인 느낌이 나네요. 도입부에 여주인공이 쓸쓸히 집으로 갈 때 들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2번은 로비 월리엄스의 미스터 보쟁글스 같은 아련한 느낌이 듭니다. 일에 치여 사는 남자 주인공의 테마로 어울리네요.”

내 말에 다들 노래를 검색하느라 바빴다.

작곡가들은 바로 어떤 느낌인지 캐치했고.

“3번은 니모를 찾아서 OST인 ‘Beyond the sea’ 느낌이 좀 납니다. 오케스트라 섭외해서 그 느낌으로 편곡해 보세요.”

“와! 나도 그 곡 생각났는데.”

여직원 하나가 유일하게 호응해줬다.

작곡가들은 어떻게 그 곡과 매치했는지 의아한 듯.

“4번은 애니 카우보이 비밥의 ‘Rush’라는 곡과 비슷한 맛이 날 것 같습니다. 영화 위플래쉬의 카라반과 비슷하기도 한데, 몽타주 씬에 쓰면 좋을 것 같네요.”

누가 바로 곡을 찾아서 들려주었다.

다들 ‘아!’ 하고 가벼운 탄성을 냈다.

연주가 정신없이 빠르고 현란해서 재즈 대가의 느낌이 물씬 난다. 주인공들이 재즈 장인들의 공연을 구경 다닐 때 넣으면 기가 막히게 어울릴 것 같다.

“5번도 카우보이 비밥의 ‘Don't Bother None’으로 가죠. 재즈 카페에서 나이 든 여성 재즈 가수의 공연을 보고 주인공들이 감동 받는 장면에 쓰고 싶네요. 삶의 회한이 느껴지는 묵직한 어쿠스틱 기타를 강조해주세요.”

해당 곡의 작곡가가 열심히 메모를 했다. 표정이 좋은 걸 보니 내가 작곡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나 보다.

“마지막 6번 곡은 두 배우가 듀엣으로 부를 수 있게 스탠다드 재즈로 가면 좋을 것 같네요. 노련한 재즈 가수 느낌이 아닌 아기자기한 아마추어 느낌으로요.”

“아이돌인 수진과 박현이 부른 ‘드림’처럼요?”

“비슷해요. 그보다는 더 깊은 느낌으로요.”

“배우들 나이가 있으니까요.”

“하하하.”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다들 내 가이드가 어떤 느낌인지 안다.

곡마다 실존하는 곡을 짚어 줬으니.

“가이드는 가이드일 뿐입니다. 작곡가님들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일로도 편곡해도 되고요. 재즈 연주자들 섭외해서 녹음해 주시되, 세라의 곡은 메인 테마로 정효주 씨가 직접 연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운드 트랙 앨범을 정식으로 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방준혁 작곡가가 물었다.

“피아노 솔로만 듣고 말씀하신 곡들이 보이세요?”

“듣자마자 느낌이 오던데요?”

작곡가들이 날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코어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재즈 곡을 듣기도 했고.

모던힐 창작곡 4곡은 주인공들이 연습하거나, 아마추어 재즈 경연에 참가할 곡이다. 방금 들은 7곡은 기존 재즈 밴드가 연주하며 사운드 트랙으로 실린다.

영화와 앨범에 유명한 재즈 넘버들도 들어간다.

물론 그 곡들은 모두 사야 한다.

다른 영화사에서 음악 영화를 만들었다면 쉽지 않은 음악 작업이다. 로큐에 작곡가들이 있으니 십분 활용하는 거지.

음악 작업만 5억은 들어갈 듯싶다.

예산이 30억이라곤 했지만 유동적이다.

쓸데없이 돈 쓰는 걸 막기 위해 정한 것일 뿐.

어쨌든 나온 곡들을 보니 예감이 좋다.

두 배우는 하는 듯 안 하는 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줄 테고, 음악은 영상과 잘 어울리는 것을 넘어 몇 배 이상의 시너지를 낼 것 같다. 나만 영상을 고급지게 만들면 된다.

작곡가들은 각각 음악 작업에 돌입하고.

난 스토리보드 구성에 힘을 쏟았다.

그러는 사이 마블의 이동욱 씨에게 제작 의견서를 보냈는데 답장이 왔다. 마블 측에서 내 영화에 전액을 투자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다행히 영화 내용은 내게 일임하며, 시나리오가 통과되면 제작이 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마블 세계관의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으면 식겁했을 것 같다. 그 세계관을 잘 모르는데다, 제작비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부담이 너무 크다. 내가 그 정도 위치도 아니고.

영화를 한국에서 만드는 것이니만큼.

제작비는 할리우드보다는 훨씬 적다. 한국에선 크고.

약 300억. 할리우드 특수효과팀과 시각효과팀이 합류한다면 더 들어갈 수도 있다.

전 세계 배급이니 세계 여러 문화권이 다 수용할 수 있는 정서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동원을 통해 그게 어떤 것인지 감은 잡았다. 다만 우리나라에선 이번에도 이질감이 좀 들 것이 같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법한 설정인데 주인공들이 한국말을 하는 게 영 어색한 거지.

반면 외국인은 부담 없이 받아들인다. 외국인은 영화 속 서울이 신비한 첨단 도시처럼 볼 수도 있겠으나, 한국 사람에겐 그냥 서울일 뿐이다. 그런 서울에서 ‘인조인간’이 돌아다니면 영 이상한 거다.

틈나는 대로 마블에 보낼 시놉시스를 썼다.

작성한 시놉을 유학파 출신 직원이 번역했다.

서두에 던진 영화 내용은 세 줄이었다.

‘인간의 오만이 극에 이른 머지않은 미래. 집에서 안드로이드를 아바타로 조종하여 사회생활을 하는 게 당연한 시대. 그 아바타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스스로 진화한 한 개체에 의해.’

메일을 보내고 열흘 뒤 질의 답장이 왔다.

규모와 예산은 얼마나 되며, 특수효과는 어느 수준인지. 할리우드 배우는 쓸 생각이 있는지.

바로 답장을 써서 보냈다.

마블의 특수효과팀과 시각효과팀이 지원해주면 좋겠다. 규모는 300억이며, 한국 배우만 쓴다. 내가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것이 아닌, 마블 자본으로 한국 영화를 찍는 것이라고 목 박아 놨다.

훗날 할리우드 영화를 연출할 기회가 올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욕심이 없다. 그럴 역량도 경험도 없고.

최종 답변을 하고 프리 마무리 점검에 들어갔다.

스토리보드 회의와 작성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삽입곡 최종 10곡을 선정하고, 영화에 출연할 재즈 밴드들도 섭외를 끝냈다. 대사는 없고 그냥 연주만 보여주는 출연이었다.

그렇게 프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마블에서 연락이 왔다.

투자 결정이 되었으니 시나리오 개발을 시작하라고.

급할 거 없었다.

시나리오 개발과 프리 작업만 1년이다.

음악 영화 찍고 나서 해도 시간이 남는다.

촬영을 앞두고 최종 점검에 들어갔다.

정효주와 황정우 주연에 음악도 아주 잘 나왔다.

내 영화 인생의 또 다른 역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촬영도 안 했는데 수입하겠다는 메일이 쏟아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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