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예상 못 한 변화
1회 차 촬영.
보라매공원 운동장에 파란 천을 붙인 거대한 스튜디오를 만들어 놨다. 온통 파란색 천지인 그 안에 좀비 보조 출연자 300명이 대기했다. 분장만 6시간 걸렸다. 7시에 소집하여 오후 1시에 분장이 모두 끝났으니.
CG 소스를 만들기 위한 촬영이었다. 앞으로도 초반 촬영엔 CG 소스를 위해 촬영하거나, 폐차가 즐비한 거리에 좀비만 어슬렁거리는 장면을 찍는다. 소스와 배경 등을 미리 찍어서 CG 팀에 넘겨야 후반 작업 기간에 맞출 수 있었다.
300여 명의 출연자가 조감독 승철이의 고함에 따라 열심히 좀비 연기를 했다. 카메라는 온갖 앵글로 그들을 찍었다. 부감으로 찍고, 원거리에서 찍고, 정면에서 찍고.
앞에서 찍힌 출연자들은 뒤로 보내고, 뒤에 있던 이들은 앞에 세우고 또 같은 앵글로 찍었다. 다른 의상으로 바꿔 입고 난 뒤에도 똑같은 장면을 계속 찍었다.
액션도 다양했다. 배회하는 장면. 질주하는 장면. 뒤엉켜 나뒹구는 장면. 쏟아져 나오는 장면 등등
이렇게 찍은 소스를 좀비가 몰려오거나, 한곳에 우글거리는 영상에 붙여 넣는다. 잠실운동장 근처 수만에 이르는 좀비 몹씬은 오늘 찍은 소스를 사이즈만 줄여서 복제하고 뒤섞은 뒤 붙여 넣게 된다.
다음 날에도 소스 촬영이었다.
어제와 같은 스튜디오 안에 폐차 직전이거나 부서진 차량을 도로에 방치된 차처럼 배치해 두고 수도 없이 찍었다. 멀리서 봤을 때. 혹은 공중에서 봤을 때 거리에 붙여 넣을 소스들이었다. 폐차장에서 헐값으로 빌려 온 차량이다.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
이번엔 방치된 차량 사이로 좀비 100여 명이 쏟아져 나오는 씬. 차량도 바꾸고 좀비들 동선도 바꿔 가며 수도 없이 찍었다.
이렇게 찍어 두고 도시 배경을 붙이고, 영동대로 저 끝에서부터 좀비 수천 마리가 쏟아지는 것처럼 만든다. 해서 좀비들이 도로 중앙으로 달려오는 것과 골목골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좀비 연기를 시켰다.
그렇게 3일 내리 소스만 찍었다.
내일 설 연휴가 시작되기에 소스를 찍어 놔야 또 후반 작업 시간을 번다. 고생한 스태프들에게 떡값을 준 뒤 촬영을 마무리했다. 사실상 명절 휴가는 없었다. 텅 빈 거리를 찍기 위해 설날 당일에 다시 소집하기로 했다.
설 연휴 전에 촬영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 * *
설 연휴 첫날.
지성이에게서 연락이 와서 집에서 나갔다.
국산 고급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누구 차지?
하는데 차에서 지성이가 나왔다.
“요즘 돈 좀 버나 보네?”
“얼른 타기나 하셔.”
조수석에 오르자 지성이 출발했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할부야. 그리고 나 연봉 4천은 돼.”
“벌써?”
“벌써라니? 나 3년 차야. 형이 착각하나 본데. 나 형 빽으로 팀장 된 거 아니거든?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관한 내 동물적인 본능과 감각을 직원들이 높이 평가하는 거지.”
“직원이 내 눈치를 본 건 아니고?”
지성이가 뭔 말을 하는 거야 싶은 얼굴로 본다.
농담이다. 지성이는 감각 면에선 나보다 나은 점이 많다. 예술적, 대중적 균형 감각이 뛰어나서 긴가민가한 부분은 직원들이 지성이에게 묻는 편이다. 회사의 복덩이라고 할까.
코어가 내 동생이라고 이 녀석에게 호감을 보였겠나.
그런 녀석이 매니지먼트나 콘텐츠 부서에 안 가고 경영부서로 갔다. 기획사 경영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게 말은 안 했지만, 경영부서에 큐즈 쪽 직원이 많아서 감시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 같다. 하여간 너구리 탈을 쓴 여우 같은 놈이다.
집에 도착하자 부모님이 웃으며 반겼다.
매년 명절 때 찾아뵈었지만 이번엔 유난히 더 반기신다.
로즈 엔터가 큐즈와 합병하고 주가가 오른다는 건 아버지도 알고 계셨고, 어머닌 내가 만든 영화와 서연이 출연하는 드라마를 꼬박꼬박 챙겨 보셨다.
“밥은 먹었어?”
“배고파요.”
“그래, 너희 기다리느라 아직 식전이다. 여보.”
“네. 얼른 들어가. 갈비 만들어 놨다.”
“앗싸, 엄마표 갈비!”
동생은 집에만 오면 막내가 된다.
그렇게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식사를 했다.
내가 영화를 하는 것. 지성이가 매니저를 하는 것에 대해 두 분은 입 밖에도 안 내신다. 취업준비생이던 지성이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난 회사 대표가 되었으니.
어머닌 그런 형제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버진 여전히 무뚝뚝하시고.
“서연이와 한번 오지 그러냐?”
“이번에 오려고 했는데, 내일 제가 촬영이 있어요.”
“큰 집에 안 가고?”
“네.”
“날도 많은데 하필이면 명절에도 일을 해?”
“그럴 이유가 좀 있어요.”
지성이가 웃으며 말했다.
“큰집엔 제가 가서 형이 뭘 하고 있는지 말씀드릴게요.”
“그래, 나도 그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
어머니의 말에 지성이가 대충 설명했다.
회사는 어떻게 합병을 했으며, 현재 내 주식 지분이 얼마라는 둥. 돈에 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회사 최대 주주인 것만 알려드렸다.
지성이 말을 듣고 나니 부모님께 해 드린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부모님은 뭘 바라는 눈치는 전혀 없으시고.
어쩌면 약아빠진 지성이가 은근슬쩍 부모님도 좀 챙기라고 말을 꺼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천만 영화가 될 거라고 장담한 웹툰 원작 영화는 예상대로 대박을 내고 곧 정산이 나온다. 그 영화는 1,102만이 들었다. 내가 시나리오 수익 배분을 명시했던 영화들 정산을 합치면 곧 3억에 가까운 돈이 들어온다.
그리고 조약돌이 제작한 영화 ‘다이스’가 개봉하고 그 영화가 흥행하면 목돈이 좀 생긴다. 그 영화에 내 돈과 로즈 엔터의 자금 20억을 투자했다. 합병 전이라 내 수익 85%로 정산이 된다. 700만 정도 들면 50억은 들어올 터다.
그때 아버지 차를 바꿔 드리고, 집도 사 드릴 생각이었다.
* * *
식사 후 지성이와 함께 시내에 나갔다.
나도 좋을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간만에 시내에 나가보기로 했다. 명절 때 시내에 나가면 동창과 자주 마주친다. 서울이나 경기도 각지에 있는 친구들이 명절에 고향에 오면 시내부터 나오니까. 서울과 달리 소도시는 그렇다.
시내에 나가자 예상대로 나와 지성이 동창이나 선후배를 수도 없이 만났다. 우리 형제가 뭘 하는지 다들 알고 있었다.
그 중 어릴 때 가장 친했던 동네 친구와 만났다. 사진을 찍자고 해서 찍었는데, 그렇게 말을 나누다가 커피 한잔하기로 했다. 지성이는 자기 동창과 따로 만나고.
“애들이 너 재작년에 백상예술대상 나와서 상 받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줄 아니. 안서연이랑 사귄다며?”
“응.”
“네가 안서연이랑 사귀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애.”
“그렇긴 하지. 하하.”
나와 동창이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 동생은 요즘 뭘 하나.
어릴 때부터 날 유난히 잘 따르던 녀석이다.
“네 동생 지금도 유도해?”
“교통사고 당하고 나서 국대 계속 탈락하더니 군대 갔어. 신성아, 그래서 말인데. 너희 회사에 내 동생 좀 채용해 주면 안 돼?”
“지도자 생활 안 하고?”
“용인대 중퇴했는데 뭘. 동생이 매니저 일도 잘할 거야. 걔가 특수부대 나왔거든. 좀 있다가 올 거야.”
가만있어 보자.
유도선수에 특수부대 출신.
그 녀석 어릴 때 착했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지금은 뭘 하는데?”
“제대한 지 얼마 안 됐어. 경찰특공대 준비한대.”
그때 동창에게 전화가 왔다.
그 동생이었다.
얼마 뒤 건장한 남자가 들어왔다.
녀석을 보자마자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어릴 때 얼굴 그대로였다. 게다가 앞머리는 일자로 잘라 놔서 덩치 큰 초등학생을 보는 듯했다. 녀석이 날 보더니 깜짝 놀랐다.
“신성이 형!”
“어, 오랜만이다.”
녀석이 날 덥석 안았다.
키는 나와 비슷한데 몸이 강철이다.
그런데 놈을 보자마자 강렬한 호감이 전달된다.
건하 다음으로 강하다. 이 녀석을 만나려고 시내에 와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내 주변에 인재가 많은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우연히 만난 사람 중 나와 인연이 강한 사람을 알아보았고,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두었을 뿐이다. 그 연줄이라는 것이 묘해서 상대도 대부분 내게 뜻 모를 호감을 느낀다.
이 친구는 나와 무슨 인연이 되려는 건지.
셋에서 마주 앉았다.
“경찰특공대 준비한다고?”
“예. 한 달 전에 노량진에 들어갔습니다.”
“경쟁률 장난 아니지?”
“공부가 좀 어렵습니다. 형님은 요즘 뭐 하십니까?”
“신성이 연예기획사 대표잖아.”
“예? 아니 어쩌다가 그렇게 됐습니까?”
녀석의 반응에 나도 동창도 웃었다.
연예기획사 대표가 무슨 사기꾼인지 아나 보다.
동창에게 말했다.
“수호는 경찰 되려고 하는데, 매니저하고 싶을까?”
“그거야 모르지.”
“예? 매니저요?”
동창이 녀석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다른 건 몰라도 서연과 사귀고 있다는 말에 녀석의 눈과 입이 쩍 벌어졌다. 무슨 귀신을 목격한 듯한 표정.
“형님. 저, 매니저 하겠습니다.”
“일이 좀 힘들어.”
“뭘 한들 지옥주 훈련보다 힘들겠습니까.”
“지옥주? 너 해군특전단 전역했어?”
“그렇습니다.”
속에서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수정아. 안 되겠다. 해군특전단이면 경찰특공대 가는 게 맞아. 매니저 할 인재가 아니다.”
“그래?”
군대를 잘 모르니 누나 입장에선 동생이 경찰공무원 되는 게 어렵다고 봤을 터다. 필기를 통과해야겠지만 해군특전단 정도면 경찰특공대에 들어갈 확률이 높다.
그런 친구가 왜 매니저를 해.
수호가 물었다.
“그런데 매니저 하면 여자 연예인과 사귈 수 있습니까?”
“얘, 지금 뭐래는 거니?”
수호의 순진한 눈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났다.
매니저가 뭘 하는진 모르겠고, 내가 서연과 사귀는 것만 귀에 들리는 모양이다. 여자 연예인과 사귈 수 있다면 매니저를 하겠다는 표정. 수정인 그런 동생이 어이가 없고.
수호가 매니저가 되라고 코어가 직감 형태로 내게 전달해 준 건 아닐 테고. 나와 무슨 인연인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영화 스태프나 연기자는 더욱 아니고.
수정이가 동생 걱정했다가 괜한 바람만 넣은 꼴이다.
마침 지성이가 오고 있었다.
“나중에 또 보자.”
“그래. 네가 만든 영화 항상 응원할게.”
“고마워.”
커피점에서 나갔다.
수호가 따라나오려는 걸 수정이가 잡고 있었다.
지성이가 친구들과 함께 내게로 왔다.
녀석의 동창들이 넙죽 인사를 한다.
“애들이랑 술 한잔 먹기로 했어. 내 차 몰고 집에 가. 난 며칠 쉬고 버스 타고 갈 테니까.”
“그래. 집에 들러서 인사드리고 바로 갈게.”
“응.”
지성이와 녀석 친구들이 다시 인사를 하곤 술집으로 향했다. 나도 바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수호가 뛰어 왔다.
“저, 형님!”
수호가 내 앞을 막아섰다.
“형님 회사에 하이니스! 무려 하이니스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서 매니저 하면 하이니스 만날 수 있습니까?”
“월급 약해. 넌 경찰 되는 게 맞다니까.”
“저 매니저 하겠습니다. 지성이 형도 형네 회사에서 매니저 한다고 들었습니다. 안 좋은 직업이면 친동생 매니저 시키겠습니까? 저도 할 수 있습니다.”
할 말을 잃었다.
냉정히 잘라야겠다. 나라의 인재 하나 망칠라.
“매니저 힘들어. 연예인 비위 맞추고 심부름 하고 그러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형님.”
수호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너무 진지해서 기세가 폭발하는 것만 같다.
“힘든 군 생활 동안. 제게 유일하게 힘이 되어 준 게 하이니습니다. 4년 4개월 내내 제 관물대에는 하이니스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제가 하이니스의 지현과 사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형님에게 일을 배워 저도 기획사 대표가 될 겁니다. 그러니 저를 매니저로… 앗!”
“뭔 소릴 하는 거야, 얘가! 얼른 집에 가!”
“누나! 잠깐만!”
누나가 동생의 귀를 잡고 끌고 갔다.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마냥 애처럼 연예인과 사귀고 싶어서 매니저를 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네. 연예기획사는 자금이 있어도 쉽게 설립할 수가 없다. 관련 경력이 없으면 법인 허가를 내주지 않으니까. 그러니 인수를 하거나, 매니저 경력을 쌓고 회사를 차리는 방법밖에 없다. 대표가 꿈이라면 수호가 매니저를 해도 되는 거고.
* * *
설날 당일 오전 5시에 스태프들이 소집했다.
설날은 이른 아침에 다들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사람도, 차도 안 보일 정도로 거리가 한산했다.
오늘 촬영은 두 팀으로 나눈다.
한 팀은 항공 촬영. 또 한 팀은 도로를 달리며 배경이 될 장면을 찍는다. 텅 빈 도시와 차들이 별로 없는 거리. 영동대로, 잠실운동장 인근 등등.
“항공팀은 촬영 직후 용인으로 와 주세요.”
“예!”
스태프들이 잠실로 이동하다 잠시 대기했다.
멀리 한강 위로 헬기가 오르는 게 보였다.
그 헬기에 항공촬영 전문팀과 조감독 승철이가 탑승했다. 잠실 운동장 쪽을 돌며 찍다가 바로 영동대로 상공을 지나 분당, 수지를 거쳐 용인으로 간다. 용인 쪽 시내를 찍고 다시 잠실로 오면서 찍는다.
헬기가 잠실 일대를 몇 바퀴 돌고 남쪽으로 향하자 코엑스 쪽에 있던 지상 촬영팀이 잠실운동장 쪽으로 갔다.
오전 6시. 올림픽 주경기장 주변에 정말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주차된 차조차도 없다. 촬영진은 주경기장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 놓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주인공 시점에서 주경기장 인근에 좀비들이 바글바글한 장면부터 찍었다. 나중에 두 동원이 잠실로 가는 장면을 찍을 텐데, 지금 찍는 장면과 교차 편집한다.
다양한 각도에서 주경기장 일대를 찍은 뒤.
차를 타고 진입하는 장면을 찍었다. 이어 주경기장 대피소에서 탈출한 주인공이 뒤돌아 봤을 때 좀비들이 몰려오는 배경 장면도 찍고.
이어 영동대로로 진입했다.
배경을 따기 위해 이따금 정지한 채 고정 앵글로 찍었다. 영동대로 남쪽, 북쪽 모두. 찍다 보면 신호에 걸려서 전방 일부가 텅 비는 절묘한 타이밍이 온다. 이걸 마스터 쇼트 삼아 영동대로 전체가 텅 빈 것처럼 CG 처리하면 된다.
영동대로 마스터 쇼트를 4개까지 확보한 뒤.
용인까지 달렸다. 달리다가 도로가 비는 타이밍이 오면 정지한 채 찍고. 또 달리다 차가 뜸하면 또다시 찍고. 용인으로 내려갈수록 오가는 차가 별로 없어서 질주하면서 찍기도 했다. 설날 당일 오전에 찍은 게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그렇게 용인까지 갔다.
오후엔 사람과 차가 많아서 내일 새벽에 다시 찍기로 했다.
스태프들과 용인에서 밥과 술을 먹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수호가 찾아왔다.
용인이 내 고향이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친구들이 형이 촬영하는 거 봤다고 해서요.”
“매니저가 그렇게 하고 싶어?”
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형님 비서 하겠습니다.”
“뭔, 소리야?”
살다 살다 별소릴 다 듣는다.
비서라니.
가만, 코어가 전한 호감의 정체가 그거였나?
어이없는 눈길로 수호를 보았다.
매니저를 해도 안 될 나라의 인재가 내 비서라니.
게다가 비서는 꼼꼼하고 세심해야 한다.
수호는 정말 안 어울린다.
당연히 내게 비서 같은 건 필요 없고.
“뭔 생각을 하고 왔는지 모르지만, 난 비서 필요 없어. 개인 비서 딸린 영화감독 봤어?”
“큰 회사 대표시지 않습니까? 사업을 하시다 보면 협박이나 위협을 가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운전도 하고 형님 보디가드도 하겠습니다.”
“비서는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다 하지 못하는 업무 처리를 해야 할 텐데. 넌 그런 거 전혀 모르잖아. 경호원은 따로 고용하면 되는 거고.”
“그렇습니까?”
수호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린다.
매니저보다는 날 보좌해야 출세할 거라고 봤나 보다.
그때 촬영감독이 수호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실례지만, 몸 좀 볼 수 있겠어요?”
“저 말입니까?”
“네. 몸이 상당하시네요.”
수호가 바로 점퍼를 벗었다.
배우 마동식이 생각날 정도로 몸이 좋았다.
모여 앉은 팀장들이 동시에 날 보았다.
승철이가 가장 먼저 입을 뗐다.
“영화 후반에 주인공 돕는 전직 경찰 있잖아요? 그분은 좀 더 비중이 있는 역할로 바꾸고, 이분이 그 역할 하는 건 어때요? 기존 배우보다는 이분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데요?”
그렇긴 했다. 경찰 협조 요청을 위해 일부러 만든 좋은 경찰 배역이다. 대사는 거의 없고 무지막지하게 좀비를 잡는다. 근육질에 순진하게 생긴 얼굴을 보면 수호가 딱이다.
“수호야. 너 연기 해 볼래?”
“하겠습니다. 지옥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연기는 그렇게 비교할 게 아니야.”
“해군 특수전전단은 그 무엇이든 해냅니다. 연기 아니라 연기 할애비가 와도 해냅니다.”
모인 스태프들이 킥킥대며 웃었다.
뭔 논리가 이따윈지.
스태프 팀장들이 수호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술자리에 동석해서 함께 술을 마셨다. 내 비서를 하든 연기자가 되든 수호와 내가 함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수호 녀석 친화력이 대단했다.
잠시 팀장들 말을 듣던 수호가 군대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이며 군 생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녀석의 성격이 특이했다. 선임이 물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다고, 잠수를 계속하던 중 죽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삽질하라고 하면 요령 안 피우고 온종일 삽질만 할 녀석이다. 그 무엇이든 해낸다면서.
“선임들이 또라이라고 안 그래?”
“예. 그래서 제 별명이 싸이코였습니다.”
“많이 개겼나 보네.”
“아닙니다. 조교를 패서 그렇습니다.”
“헉!”
좌중이 일제히 놀라며 수호를 보았다.
뭐, 이런 미친놈이 있나!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조교를 패다니?
영창은 둘째치고 보통은 그럴 정신이 없다.
이거 진짜 또라이 아니야?
“그때 엄청 고생했겠는데?”
“그렇습니다. 그때 후로 선임이 시키는 건 무조건 합니다.”
사고를 친 후 엄청난 고생을 해서 정신 상태와 사고방식까지 바뀐 것 같다. 그 뒤로는 시키는 건 무조건 해서 선임들 사랑을 받았을 것 같고.
얼마간 수호를 곁에 두고 보기로 했다.
군에서 경찰시험을 위해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내가 회계 업무를 완전히 파악하라고 하면, 1년 후에 회계사 자격증을 따서 사람 식겁하게 할 놈이다.
* * *
새벽부터 일어나 용인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텅 빈 도로를 찍으며 상경했다. 차가 거의 없는 도로만 다니며 찍다가 귀경 차량이 몰리기 시작한 정오에 촬영을 접었다. 그렇게 이틀간 찍은 배경 및 소스 영상도 CG팀에게 보냈다.
연휴 마지막 날은 집에서 쉬었다.
그런데 수호 녀석이 또 찾아와서 내 집 인근에 원룸을 하나 얻었다는 희한한 소리를 했다. 군에서 8천만 원을 모아 놨다네. 미친놈에다가 똥고집에 짠돌이다.
수호를 보내고 차를 가지러 온 지성이와 면담했다.
지성이가 라면을 먹다가 깜짝 놀라 날 보았다.
“수호가 비서가 되겠다고 했다고?”
“막무가내다. 경찰 될 애를 내가 망치는 거 아닌지 몰라.”
“흠….”
면발을 입에 문 지성의 잔머리가 가동되었다.
과연 이 요물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후루룩.
지성이 입으로 면발이 자취를 감췄다.
“형. 하라고 해.”
“남의 인생이라고 쉽게 말하는 거 아니야.”
“수호 잘되라고 하는 말이지. 그 자식 성격이야 원래 그런 거 모르는 애들 없고. 착한 거야 형도 알 테고. 수호 그 새끼 머리도 좋아. 운동도 머리 좋아야 잘하거든. 그 자식 교통사고 없었으면 올림픽 금메달 땄을 거야.”
“문제는 내가 비서는 필요 없다는 거지.”
“왜 필요가 없어. 형 이제 큰 회사 대표야. 촬영 때문에 바쁘면 수호가 형 지시대로 처리할 수도 있지. 해군특전단은 뭐든지 해낸다며? 한번 시켜 봐. 정말 뭐든 해내는지.”
굳이 수호 안 시켜도 코어를 통하면 내가 할 수 있다.
동생에게도 코어 얘기는 못 하겠고.
하긴 내가 조금 더 편해지기는 한다.
내 월급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직책은 뭐가 좋을 거 같아?”
“신설하면 되지. 지원관리팀.”
“지원관리라.”
구자형 대표도 비서가 없는 마당에 내게 비서가 있는 것은 좀 아니다. 지원관리팀이라면 회사 내 잡다한 일을 할 수도 있다. 매니저도 하고, 연기도 하는 전천후 직원.
“구 대표님과 의논해서 팀 신설해 봐. 1인 팀이니 바로 팀장도 할 수 있을 거야.”
“알았어. 그런데 형. 남의 인생을 형이 왜 걱정해. 본인이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지.”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수호를 데려온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렇게 추진할게.”
동생을 보내고 수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입사 가능하다고.
* * *
연휴가 끝나자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다.
주연배우 한동원이 40대 분장을 하고 중학생 아들 역과 대화하는 첫 장면이다.
아파트 벤치에서 아들과 아버지가 나란히 앉았다.
아들이 학교에서 싸워 눈에 멍이 든 모습이다.
믿거나 말거나 아버지가 집안의 비밀을 처음으로 말해 주는 장면이다. 나란히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이 부자지간의 정이 보인다.
“조명 완료했습니다!”
“슛 갑니다! 조용! … 자, 레디!”
“액션!”
아빠와 아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멀리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고.
“반 애들과 좀 친하게 지내지 그러냐.”
“아빤 몰라.”
“야, 나는 뭐 중학교 안 다녔냐? 나도 알아 인마.”
“아빠가 뭘 알아?”
부자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아빠가 입을 뗐다.
“아빠가 젊었을 때 사람들이 모르는 이상한 일을 겪었어. 네 엄마랑 할아버지, 누나 빼고 아무도 몰라. 말해도 사람들은 안 믿을 거야.”
“무슨 일?”
“이건 우리 집안의 비밀인데. 들어볼래?”
“뭔데?”
“그러니까, 아빠가 29살 때 이야긴데…”
“컷! 다시 갑니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엄마에게 달려가는 바람에 NG가 났다.
다시 찍어 세 번째에서 오케이가 났다.
다음 씬은 마지막 장면. 영화 내내 이어지던 내레이션이 이 마지막 장면으로 끝난다. 이 장면은 두 번 테이크 만에 오케이가 났다.
바로 모두 용인으로 이동했다.
용인의 산에서 한창 촬영할 때였다.
수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표님. 저 입사했습니다.
“오늘?”
-예. 지원관리팀 직원입니다. 그런데 팀에 직원이 저 하나밖에 없지 말입니다.
“너 하나면 충분해. 내 비서 역할이니까.”
-알겠습니다. 업무를 주십시오.
“앞으로 내가 뭘 지시하면 네가 알아서 처리해야 돼. 그러니 지성이에게 부탁해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반적으로 알아 놔. 직원들 귀찮게 하지 말고, 물어 볼 거 있으면 지성이한테만 물어. 일단 업무 관련 서류부터 확인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그래, 수고해라.”
정말 시키는 대로 할 작정인가.
* * *
12회 차.
두 동원이 제2 지구로 넘어온 장면이다.
주인공은 한동원이 그대로 하고, 제2 동원은 체격이 거의 똑같은 대역이 맡았다. 오디션을 통해 모델을 뽑았는데 눈의 모양마저 비슷한 친구다.
동원과 대역의 뒷모습. 대역은 K2를 메고 손에는 단검을 쥐었다. 너덜너덜한 천으로 얼굴과 상체를 감쌌고. 한동원은 야구방망이를 들었으며 점퍼 차림이다.
산길 아래에 좀비 두 명이 대기하고 있다.
조명팀이 엄지를 보이자 승철이가 외쳤다.
“슛 갑니다! 좀비 움직이세요!”
콜이 이어진 뒤.
“액션!”
제2 동원이 말했다.
“좀비 수가 적을 땐 총을 쏘면 안 돼. 총소리를 듣고 좀비가 몰려오거든. 갓 좀비가 된 놈들은 매우 빨라. 저놈들도 먹지 못하면 힘이 없어. 얼굴 상태를 보고 파악해. 해골이 드러난 놈은 매우 느리니까.”
한동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한동원이 말하고 본인이 고개를 끄덕인 거였다.
“내가 왼쪽. 네가 오른쪽 맡아.”
“알았어.”
두 동원이 걸어 내려갔다.
스테디 캠이 뒤를 따랐다.
좀비들이 먹잇감을 발견하고 몸을 튼다.
대역이 성큼성큼 걸어가 주저 없이 좀비의 정수리에 단검을 박았다가 뽑았다. 한동원도 주저하다가 방망이로 좀비 옆머리를 후려쳤다.
그대로 걸어가는 두 사람.
“컷! 오케이!”
“다음 씬 갑니다!”
스태프들이 이동했다.
다음 씬 장소로 도착하여 촬영을 하려던 때였다.
16일 만에 수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표님. 모든 업무 파악했습니다. 이제 뭘 합니까?
“정말 모든 걸 파악했다고 자신해?”
-서류는 다 읽었습니다. 지성이 형님도 더는 가르칠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성이도 배우는 입장인데 뭘 다 가르쳐. 매니저 뛰어 봤어?”
-아직 안 해 봤습니다.
“영진이 도와서 일일 매니저 한 번 뛰어.”
-저, 하이니스 매니저 하면 안 되겠습니까?
“다음에 해.”
-알겠습니다.
“잠깐. 전화하지 말고 문자 보내. 그리고 네가 알아서 업무를 찾아. 차라리 게시판에 광고를 해. 뭐든지 도와드린다고.”
-예. 대표님.
전화를 끊고 나니 다들 나만 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바로 갈게요.”
승철이가 연기자들에게 외쳤다.
“공포탄이라고 해도 바로 앞에서 사람을 쏘면 다칩니다! 불꽃이 세게 나가서 화상 입을 수도 있어요! 동선대로 움직이시고, 애드립은 절대 안 됩니다!”
“예!”
프롭건과 모형 총을 든 약탈자들이 대답했다.
무술팀과 단역이 섞인 약탈자들이다.
“자, 레디!”
“액션!”
투타타탕-
총성과 함께 차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무선으로 조종하는 특수효과다. 총탄 구경의 펀칭으로 미리 구멍을 뚫어 놓고 화약 딱지를 붙인다. 그게 터지면 총알 자국이 나는 방식.
총성이 그야말로 천둥 치는 소리다.
군대 갔다 온 남자들도 움찔움찔 한다. 여성 스태프들은 정신이 쏙 빠진 모습이고.
“컷! 음향팀, 총성 사운드 어때요?”
“소리가 크긴 한데 나중에 줄이면 됩니다!”
“오케이!”
바로 다음 씬 촬영으로 들어갔다.
제2의 동원이 맹활약하며 약탈자 4명을 잡는다.
이후 주인공도 총을 손에 넣고.
이 장면 찍고 나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이 잠실운동장에 도착하기까지 계속 낮이다. 경찰서에 촬영 시간을 고지한 터라 더는 찍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 벌어지는 일임에도 회차가 늘어났다.
이후 서울과 용인 인근. 서울과 국도변. 서울과 터널 등을 매일 오가며 촬영했다. 국도를 막아 놓고 폐차를 배치한 뒤 좀비들이 몰려나오는 씬도 찍었다.
마침내 영동대로에 진입하는 장면을 찍었다.
우회 가능한 지방 도로 30미터 가량을 통째로 빌렸다. 그 도로 전방과 좌우로 블루스크린을 쳤다. 왕복 10차선인 영동대로 중 4차선 정도만 실제 도로에서 찍고, 다른 차선과 배경은 찍어 놓은 영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두 주인공이 몰려드는 좀비들에게 고립되는 상황.
좀비 연기자는 35명. CG로 처리했을 때 300명 정도 되는 좀비가 몰려나오는데, 두 주인공이 전진하며 싸우는 좀비가 딱 35명이다. 이 장면을 위해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장면을 미리 찍어 놨다. 현재 앵글과 그때 찍은 앵글이 같다.
이 장면도 무사히 찍었다.
아비도 촬영 때와 달리 이번 현장에선 보조 출연자도 많고 하니 고성이 때때로 나온다. 낮 촬영만 계속하는지라 다들 그리 예민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게 촬영이 순조롭게 이어져 28회 차가 되었다.
딱 중반 회차다. 어느새 3월 말.
그동안 수호가 이따금 회사 상황을 보고 했는데.
이 자식. 일을 꽤 잘했다.
[지원관리팀 양수호입니다. INT 지주회사인 필립 인베스트먼트가 본사 지분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처음 보는 회사가 주식을 공격적으로 매수해서 직접 찾아갔습니다. 필립 회장 아들이 세운 회사였습니다. 필립이 의결권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닙니다. 로큐 투자 가치가 높아서 투자하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필승.]
어째 숨이 막히는 듯한 문자였다.
그래서 편하게 문자 하라고 했더니.
일주일 전에 온 문자는 이랬다.
[어제 회사 주차장에서 양아치들이 구 대표님 납치하려고 했음. 강성철이 사주한 거임. 강성철 부하 시켜서 경찰에 불법 영업 신고했음. ㅋㅋㅋㅋ.]
무슨 일인가 해서 지성이에게 전화했다.
구 대표가 지분 확보를 위해 집과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그 대출을 대신 갚아 줄 테니, 주식을 양도하라는 협박을 하려 한 거였다. 구 대표가 무슨 약점이 잡힌 모양이었다. 그게 뭔지 물었으나 지성이는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했다.
촬영 때문에 정신이 없는지라 지성이에게 맡겼다.
싸울 만하니까 싸운다고 봤다.
그 뒤로는 별일이 없었는데.
바로 어제.
[강성철이 제대로 빡침. 안양 쪽 양아치들이 내일 대표님 촬영장에 가서 촬영 방해할 거예용. 이참에 강성철이 저희한테 얼씬도 못하게 확실히 뿌리를 뽑아야 합니당. 제가 내일 출동함. 수고하십시오.]
그 문자를 받고 설마 싶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번졌기에 이렇게 되나 했는데.
정말 양아치들이 현장에 난입했다. 모두 빈손인 걸 보면 정말 촬영을 방해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이 건들거리며 들어오던 그때.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수호가 걸어왔다.
마스크를 쓴 20여 명이 현장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 앞에는 정상 상의를 벗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는 수호가 있었고. 스태프들은 촬영 장비를 에워싸고 있고.
수호가 웃으며 말했다.
“안양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총 3회 촬영 방해 조건으로 일당 20만 원씩 받는 걸로 압니다. 촬영 방해하면 여러분 모두 고소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하루 촬영 지연되면 2억을 손해 봅니다. 모두 21명입니까? 한 사람당 손해 배상금이 천만 원입니다.”
그 말에 양아치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촬영을 방해하면 모를 거라고 봤는데, 안양에서 온 걸 수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명이 뒤로 슬금슬금 빠졌다.
수호가 손짓하며 외쳤다.
“아저씨! 그냥 가면 안 되지 말입니다!”
양아치들이 현장에 진입했을 때만 해도 슬쩍 겁을 먹었던 스태프들이 어느새 난입한 이들을 포위했다. 수호의 존재만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양아치 하나가 외쳤다.
“그냥 가겠습니다! 우린 모르고 왔어요!”
“예! 사장님이 무조건 가라고 해서 온 겁니다!”
수호가 다시 말했다.
“자, 이젠 마스크를 벗어 주십시오!”
당연히 아무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그럼 제가 벗겨 드리겠습니다.”
수호가 걸어가자 몇 명이 도망치려 했다.
스태프들이 얼른 막아섰다.
“야! 잡아!”
“놔요, 이거! 우리가 뭘 어쨌다고!”
스태프와 양아치들이 몸싸움을 벌였다.
양아치가 아니라 룸살롱 웨이터들인 모양이다.
방해꾼들이 스태프들에게 오히려 밀린다.
몸싸움이 과격해지자 내가 외쳤다.
“그냥 보내요!”
“대표님!”
“그냥 보내. 저 사람들 뒤처리하면 정말 촬영 지연된다.”
“그렇습니까?”
스태프들이 풀어주자 웨이터들이 도망갔다.
그들을 향해 수호가 외쳤다.
“안양 1번가, 서 사장님에게 전해 주십시오! 강성철 사장 돕다가 본인 사업이 망할 수가 있습니다!”
스태프들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달아나는 자들을 보았다.
대체 뭔 일이기에 촬영을 방해하나 싶은.
강성철은 촬영 방해로 구 대표를 압박하려고 한 거다. 누가 잡히면 강성철이나 안양 서 사장이란 사람은 잡아뗄 거고. 웨이터들은 안양의 조폭이자 업소 사장이 시키니 어쩔 수 없이 한 거겠고.
수호가 그제야 내게 왔다.
“어떻게 된 거야?”
“강성철 사장이 자꾸 구 대표님을 괴롭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강 사장 업소에 가서 뭘 좀 알아냈습니다.”
“구 대표는 무슨 약점이 잡힌 건데?”
“강성철과 남희재 본부장이 손을 잡았답니다. 남희재 본부장에게 큐즈와 구 대표님 약점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때는 친한 사이여서 직접 공격하진 못하고 강성철 사장 꼬신 거라고 합니다.”
“남 본부장은 무슨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지현 양 남자 가수랑 사진 찍힌 거. 구 대표님이 강성철과 신인 여자 연예인이랑 술 마신 거. 구 대표님 부탁으로 강성철이 다른 회사 연예인 빼 온 거 등등이라고 합니다.”
“구 대표님이 말해 줬어?”
“그렇습니다.”
약점이 다 약하다.
이러니 지성이가 해볼 만하다 했겠지.
수호를 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지현이 사고 친 걸 안다는 거네.
“너 지현이 실체는 알고 있어?”
수호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힘들었습니다. 아직도 마음이 아픕니다. 솔직히 지금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지현 양에게 말을 걸었다가 무시를 당하고 나서 아, 이건 아니구나. 연예인은 사람들이 아는 게 다가 아니구나. 지현 양이 남자 연예인들하고 소위 그렇고 그런…”
왜 이렇게 횡설수설해?
“그래서 마음 접었어?”
“그게 말입니다. 영진이 형 따라 방송국을 가보니 착하고 예쁜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특히 아나운서 분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아, 여자는 우리 누나나 지현 양과 달리 마음씨가 고와야 하는구나. 그 아나운서께서는 제가 인사하자 환하게 웃으시면서……”
“됐다. 그만 해라.”
지난 한 달 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회사 업무 파악했다고 들었다. 무작정 연예인과 사귈 속셈으로 매니저를 하겠다고 한 건 아닌 것 같다. 말하는 걸 보아 그 이유도 없진 않겠지만 나와의 묘한 인연이 작용했던 거다. 그래서 매니저가 아닌 비서가 되겠다고 한 거고.
근데 이놈의 말투는 영 적응이 안 된다.
“넌 말투 좀 바꾸면 안 돼?”
“시정 하겠습니다.”
“시정 할 게 아니라 좀 더 부드럽게 바꾸라고. 표정도 좀 풀고. 그래 가지고 여자랑 사귈 수 있겠어? 좀 웃어 봐.”
“이렇게 말입니까?”
이를 드러내고 어색하게 웃는 수호.
그래, 급할 거 없다. 시간이 해결하겠지.
한데 수호 녀석의 집요한 성격이 이상한 재능으로 풀렸다.
안양 웨이터들이 동원된 건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수호가 말했다.
“제가 알아낸 강 사장 불법 업소만 5개입니다. 다시는 강 사장이 우리한테 이상한 짓 못하게 할 겁니다.”
“뭘 어떻게 하려고?”
“지난 8년 동안 강성철에게 사기와 공갈 협박으로 업소를 빼앗긴 사람들을 좀 만났습니다. 강제로 고리로 대출해 주고, 못 갚을 경우 업소를 빼앗는 방식으로 사업을 늘린 사람이 강성철입니다. 강성철 부하를 통해서 강 사장이 경찰에게 뇌물을 준 정황도 확인했습니다.”
“강성철 부하들을 고문이라도 했어?”
“조폭 킬러로 위장했습니다. 특수전 대원은 매우 위험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따라서 임무와 생존을 위해 연기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목숨이 걸린 연기입니다.”
지가 무슨 첩보원이라도 되나.
수호가 일을 처리하는 걸 보면 지성이 말대로 머리도 제법 돌아가는 모양이다. 사회 경험이야 앞으로 쌓으면 되고.
승철이에게 물었다.
“세팅 끝났어?”
“네. 바로 들어가면 돼요.”
촬영을 재개했다.
촬영 현장에 별의별 일이 다 있었으나 이런 일은 처음이다. 수호가 난입한 이들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면 몇 번이나 방해를 당했을 것 같다. 촬영 중에 멀리서 고함을 질러 버리고 도망가면 잡을 수도 없다.
촬영하다 수호를 가끔 봤다.
웃는 연습이라도 하는 건지.
녀석이 자동차 유리창을 보며 손을 흔든다.
안녕. 나 수호야. 반가워. 이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여자 스태프들은 킥킥대며 웃고.
이후 촬영은 매우 순조로웠다.
봄이 되어 날씨도 포근했고, 비도 안 왔다.
그리하여 대망의 잠실 운동장 탈출 씬.
좀비역 보조 출연자 100여 명이 대기하고, 주경기장 근처에는 2중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파괴된 차들이 띄엄띄엄 있고, 차량 하나는 불길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내뿜는다.
경찰서와 구청에는 저녁 7시에서 9시까지만 총기 사용 촬영을 한다고 고지했다. 그 이상 가면 민원이 들어갈 터였다.
K2를 든 두 동원이 대기했다. 한동원은 아버지를 맡았고, 대역은 7살 딸을 업고 천으로 묶었다. 좀비들을 뚫고 나가는데 영화에선 좀비 수만 명이 몰려오는 장면이다.
승철이가 메가폰을 들고 외쳤다.
“특수장치를 착용한 분들만 주인공 동선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보조출연자분들은 너무 빨리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마지막 리허설 갈게요!”
“모두 움직이세요!”
연출부 세컨드의 외침에 보조 출연자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주인공과 세 명이 좀비들 가운데를 뚫고 들어갔다. 총을 쏘는 시늉을 할 때마다 좀비가 하나씩 쓰러져 나간다.
탄창을 가는 사이 고립되는 상황. 두 동원이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두른다. 오후에 시작한 첫 리허설 때는 이렇게 허술하게 찍어도 되나 싶었는데, 보조출연자들이 적응해서 그림이 제법 잘 나왔다.
이제부터는 촬영이 곧 리허설이었다.
“슛 갑니다! 다시 대기하세요!”
무전을 보냈다.
“효과팀! 특수장치 이상 없죠?”
-이상 없습니다!
“A 카메라?”
-세팅 완료!
“B 카메라?”
-프레임 셋!
“지미집?”
-프레임 인!
승철이가 외쳤다.
“자, 레디!”
콜이 이어지고.
“액션!”
두 동원이 단검으로 좀비 머리를 찍으며 길을 열기 시작했다. 좀비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나간다. 좀비 40여 명이 나오는 네 사람을 향해 몰려들었다.
“너무 많아!”
“총을 써!”
단검을 수납하고 바로 총을 겨누는 두 사람.
두 동원이 총을 쏘며 길을 열기 시작했다.
타탕- 탕-
좀비들이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진다.
그렇게 네 명이 메인 카메라까지 왔다.
“컷! 오케이!”
“바로 연결합니다!”
스테디 캠이 네 사람 앞에서 대기했다. 이제부터는 카메라가 인물 주변을 맴돌면서 액션을 찍는다. 중요한 장면이라 프리 때 리허설을 많이 했던 장면이다.
“액션!”
배우 액션과 카메라가 절묘하게 맞물리며 돌아갔다.
좀비들이 우수수 나자빠진다.
“컷! 다음 쇼트!”
얼추 그림이 나왔으니 다시 찍을 필요가 없었다.
촬영 시간도 촉박하고.
총탄이 바닥난 시점부터는 사선을 넘는 싸움이었다.
어느새 9시가 넘었다. 단검만 쓰는 장면이고, 액션 쇼트를 개별로 따는 촬영이라 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영화상에도 여명이 올 때 겨우 탈출한다.
그렇게 새벽 5시가 되었을 때.
잠실운동장 탈출 장면을 다 찍었다.
이후 촬영은 차를 타고 영동대로를 질주하는 장면이었다.
좀비를 치고 지나가는 장면까지만 찍고 촬영을 끝냈다.
분장과 리허설 포함, 무려 22시간 동안의 촬영이었다.
돈을 가장 많이 쓴 날이기도 했고.
* * *
47회 차. 이제 촬영 막바지였다.
겨우 탈출한 네 명이 약탈자를 만나는 장면이다.
두 동원에게 일원이 죽은 뒤 약탈자 패거리가 노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잡혀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는 장면.
이때 경찰 출신 방랑자가 돕는다. 가족을 죽인 약탈자 두목을 찾아 헤매는 남자다. 이 역할을 정말 수호가 하기로 했다.
수호와 배우들이 리허설을 했다.
한데 약탈자 오른팔을 할 배우가 안 왔다.
승철이가 연신 전화를 하다가 내게 다가왔다.
“영 안 되겠대?”
“예. 장염이 너무 심하다네요. 응급실에 있답니다.”
“바로 섭외할 수 있는 배우 없어?”
“있긴 한데… 총을 사용하는 씬이라 동선 숙지 못하면 사고 날 수도 있어요.”
촬영 시트를 보았다.
그 배우 대사는 이번 장면에 딱 한 번 있다.
‘죽여! 이 지옥에서 멀쩡한 사람이 몇이 돼! 죽이라고!’
그 말 뒤에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정확히 미간에 총탄 구멍이 뚫린다.
스태프들을 보았다.
연기가 좀 되는 친구 없나?
스태프들이 다들 내 시선을 피했다. 전직 경찰의 아내와 아들을 무참히 죽인 자 역할이다. 연기 동선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스태프도 없고. 승철이는 연기가 안 되는 친구고.
결국 내가 하기로 했다.
“분장팀! 나 분장해 줘!”
바로 분장팀에게 가서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분장했다. 약탈자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바셀린을 발라 떡지게 했다.
K1을 들고 나도 리허설에 참여했다.
얼마 뒤 촬영을 재개했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약탈자 패거리는 승합차 뒤에서, 전직 경찰은 숲에서 총격한다. 숲이 떠나가라 총성이 울려 퍼지다 마침내 모두 죽고 약탈자 보스의 오른팔만 남은 상황.
찍고 나서 확인하니 수호가 연기를 꽤 잘했다. 총을 겨누고 쏘는 자세가 제대로 나왔다. 표정도 놈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이라 역할에 잘 맞았고.
나도 그럭저럭 괜찮게 나왔다. 부하들이 하나 둘 죽어나가자 분노와 당황이 뒤섞인 표정이 나온다. 메소드 연기가 뭔지는 이따금 엑스트라 출연을 하면서 깨우쳤다.
내 어깨와 다리에 총상을 당한 분장을 했다.
이어 특수효과팀이 내 미간에 총탄 구멍 효과를 내는 인조 피부를 부착했다. 할리우드에서 공수한 장치다. 무선 조종으로 터지는데 버튼은 내가 쥐고 있다.
분장을 끝내자 세팅은 이미 끝나 있었다.
난 주저앉아 있고, 수호는 내 이마에 권총을 겨누었다.
악에 받친 얼굴로 수호를 노려보았다. 수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날 차가운 시선으로 본다. 그러고 보니 촬영 때 내게 말도 걸지 않았다.
목숨을 건 연기를 해야 한다더니.
이 녀석 연기에 재능이 있나?
내 요청으로 리허설은 안 했다.
지금 내 감정 상태가 딱 좋은 것 같아서.
“슛 갑니다! 제가 감독님 콜 할게요!”
팀장들 콜이 지나가고.
“액션!”
헉헉!
숨을 몰아쉬며 수호를 올려다보았다.
내 이마에 권총을 겨눈 채 날 보는 수호.
수호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 그랬습니까?”
“그냥 죽여! 이 지옥에서 멀쩡한 사람이 몇이나 될 거 같아! 네 마누라는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라고!”
탕-
순간 눈앞에 빛이 터졌다.
* * *
어둠 속에 한동안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연과 내가 극장 좌석에 앉아 있었다.
왜 갑자기 극장에 와 있는 거지?
영화가 방금 끝난 모양이다. 관객이 하나둘 일어나는 게 보였다. 뜬금없이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들려오는 한 커플의 대화.
“재미는 있는데 설정이 별로 공감이 안 가네.”
“왜? 난 재밌던데.”
“차라리 좀비로 세상이 멸망한 걸로 나오던가. 다른 지구에 가서 돌아가신 아버지 구해 온다는 설정이 억지야. 왜 그 고생을 하는 건데?”
“나는 따뜻한 판타지 같아서 오히려 마음에 들던데. 오빠만 이상한 거 아니야?”
“야, 영화 본 사람들한테 물어봐. 나만 그런지.”
지나가는 커플들 말이 이상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흡사 내 영화를 말하는 것 같았다.
좀비. 다른 지구.
서연이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오빠, 신경 쓰지 마. 오빠가 의도한 두 지구의 의미를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해석하는 거 같아. 기자들은 영화적 장치로 보는데 어떤 사람들은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하나 봐. 우리나라 사람들은 현실적인 거 좋아하잖아”
뭐라고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간 것처럼.
서연이가 다시 말했다.
“나가자. 기자들 평은 좋았잖아. 영화제 반응도 좋았고.”
영화제?
무슨 영화제?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더니 암흑으로 변했다.
그제야 인식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었다.
* * *
어딘가에 누워 있었다.
정신을 잃었었나.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났다.
정신이 몽롱했다. 미간에는 약간의 통증이 있었고.
눈을 뜨자 형광등 불빛이 조금 눈이 시렸다.
“오빠, 깨어났어?”
서연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정말 병원이었다. 이마를 만져 보자 작은 붕대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두통이 좀 있고, 시야도 다소 흐릿했다.
“어떻게 된 거야?”
서연이 짧은 한숨을 쉬곤 말했다.
“스태프들도 잘 모르겠데. 수호 씨가 총을 쐈을 때 오빠가 기절했어. 권총이 이마에 가까이 있지도 않았대. 이마에 피도 안 났고.”
서연의 얼굴이 뿌옇게 보였다.
코어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코어를 발동하자 전과 다름없이 서연의 몸 주변에 정보 분석이 줄줄이 떴다. 그런데 금세 두통이 심해졌다.
“오빠, 괜찮아?”
“응. 혹시… 나, 뇌 사진 찍었어?”
“찍었대. 난 못 봤구.”
움직이는데 불편한 게 없어서 바로 일어났다.
현기증이 났다. 미간에 붙인 특수효과가 터지면서 코어와 관련한 뭔가를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코어가 사라지진 않았고. 코어를 중단해도 두통이 있는 게 좀 신경 쓰였다.
“오빠, 어디 가려고?”
“담당의 좀 보자고 해.”
얼마 뒤 담당의 진료실로 갔다.
내 뇌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내 뇌가 전부 하얗다. 특히 미간은 너무 밝았다.
의사선생님이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두통이 있으세요?”
“네. 시야도 약간 흐릿하네요.”
“최신성 씨 주치의이신 오광혁 박사님과 통화했는데요. 아주 특이한 케이스라고 하시더군요. 사진 보세요.”
이미 사진은 보고 있었다.
“이런 사진은 처음 봅니다. 미간에 손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뇌에는 문제가 없어요. 시야가 흐린 건 뇌압 때문인 것 같은데, 이 미간에 전해진 자극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나도 모르게 미간에 신경이 쓰였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주 앉은 의사선생님에 대한 영상 같은 것이 무수히 스쳐 지났다. 전에는 입은 옷에 대한 쓸데없는 정보가 떴는데, 이번엔 그 옷에 관련한 정보가 영상으로 떴다. 텍스트가 아닌.
그런 영상이 시야에 따라 수도 없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의사 가운에 꽂힌 펜을 보자 의대생 때 교수에게 선물 받는 영상이 떴다. 시야를 옮기자 바로 사라지고.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그러다 서연을 봤는데.
웬 여자아이가 그녀의 얼굴과 겹쳐지더니 사라졌다. 이어 서연의 목걸이를 보자, 작년 그녀 생일 때 내가 목걸이를 걸어 주는 영상이 떴다. 내 시점이 아닌 서연의 시점이었다.
바로 그때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더는 뭘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급히 미간에 집중된 신경을 차단했다.
정말 머리가 터지는 것만 같았다. 눈앞도 뿌옇게 변해서 앞이 잘 안 보였다. 영상 구현을 동시 다발로 한 셈이었다.
머리를 부여잡았다가 서연이 걱정할까 봐 얼른 손을 뗐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오빠, 왜 그래? 머리가 심하게 아파?”
“아니. 조금 어지러워서.”
“병실로 가자. 무리해서 그래.”
의사선생님이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영화 촬영하시면 안됩니다. 입원하셔서 경과를 봐야 해요.”
“예.”
서연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마치 미간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그저 창백할 뿐이다. 내 시야로만 보이는 빛이었다.
병실에 와서 누웠다.
서연이 걱정스레 보고 있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예전부터 두통이 좀 있었어. 평소엔 괜찮아.”
“당분간 내가 있을 게.”
“드라마 촬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스케줄 조정했어. 하루 비워도 돼.”
눈을 감은 채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다듬었다.
코어가 변질이 된 건지, 진화를 한 건지.
코어가 처음 생긴 건 교통사고로 미간을 다친 후였다. 늘 미간에 신경을 쓰고 있기는 했는데, 콩알탄 수준으로 터지는 특수 효과가 미간에 영향을 줄 줄은 몰랐다.
미간에 제3의 눈이라도 생긴 걸까.
지금까지 코어는 현재의 정보만 분석했다. 달라진 코어는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 보여주는 것일까.
문득 영화 촬영이 생각났다.
“촬영은 어떻게 됐어?”
“철수했어. 조감독님이 그동안 찍어 놓은 거 미리 CG 작업을 해 놓으면 후반 작업에는 큰 영향이 없대.”
날짜와 시간을 보았다.
같은 날이다. 5시간 흘렀고.
의식을 잃었을 때 무수히 많은 꿈을 꾼 것 같았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은 영화관에 있었던 것 하나.
달라진 미간 쪽 때문에 예지몽 같은 걸 꾼 모양이다. 깨어났을 때 두통이 없었던 걸 보면 꿈에서 코어가 작동하는 건 상관없는 듯했다. 내가 꿈을 조종할 수는 없으니 내가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극장에서 본 게 정말 미래인지도 알 수 없고.
다행히 두통이 가라앉았다.
오늘 하루 쉬기로 했으니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었다.
서연을 보며 다시 미간에 집중했다.
의식적으로 영상화 구동은 중단했다.
그러자 아무 것도 안 떴다.
코어만 의식하면 이전처럼 텍스트만 뜨고.
미간만 달라졌을 뿐 코어 능력은 그대로였다.
6시간 후 서연이 잠시 집으로 갔다.
지성이와 구 대표가 다녀갔고, 조감독도 들렀다.
두통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시야에 더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미간에서 뭔가가 열리고, 빛을 보면 눈이 시리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내 요청으로 다시 MRI 촬영을 했다.
여전히 뇌 전체가 밝은 것은 같았다.
유난히 밝았던 미간도 이제는 다른 부분과 같았고.
얼마 뒤에 퇴원했다.
멀쩡했으니 병원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 * *
다음날 선글라스를 쓰고 촬영장에 나갔다.
스태프들이 멋있다고 아부를 했는데, 멋 부리려고 쓴 게 아니었다. 태양 빛이 눈이 부셔서 쓸 수밖에 없었다.
별 탈 없이 촬영을 진행했다.
수호는 자기 때문에 내가 다친 줄 알고 매일 현장에 왔다. 이것저것 스태프들을 돕더니 제작부 노릇을 했다. 촬영하면서 지켜보니 정말 집요한 놈이었다. 착한 놈이라 망정이지 스토커였다면 사람 피 말려 죽일 타입이었다.
강성철이 그랬다. 수호 때문에 업소 대부분 정리하고 잠적했다. 계속 신고를 당하면 수입이 바닥나고 조직도 흔들리니 별수가 있나. 수호가 우릴 건드리면 평생 쫓아다닐 거라고 경고 한 후였다. 얼마나 지독하게 들러붙었으면 그랬을까.
그렇게 깔끔하게 강성철을 쳐냈다.
남 본부장 하나가 남았는데, 그 사람은 별 문제가 없었다.연예기획사를 하려면 우리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
서연이 촬영장에 나왔다.
드디어 마지막 촬영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동원이 제2의 동원에겐 아내이자, 자신에겐 중학교 동창인 여자와 만났다. 제2 지구에서 부부였던 영향이 미쳤는지 여자는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꼈고,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이후 딸을 만나러 오는 장면이다.
딸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고, 한동원과 서연은 저편에서 대기했다. 아련한 느낌을 주기 위해 딸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배경은 흐릿하게 프레임을 잡았다.
“조명 완료!”
“마지막 촬영갑니다! 자, 레디!”
“스피드!”
“스타트!”
“씬 135에 1에 1!”
“액션!”
카메라가 그네를 타는 아이를 찍고 있다. 엄마가 보고 싶어 시무룩하게 자신의 발을 보는 아이. 그러다 정면을 보더니 어? 하고 놀란다. 아이가 급히 그네에서 내려 뛰어간다.
카메라는 아이의 뒷모습을 찍고.
아이 앞에는 포커스 아웃 상태인 한동원과 서연이 걸어온다. 아이와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윤곽도 분명해진다. 달려간 아이가 넙죽 서연에게 안긴다.
“엄마! 왜 이제 왔어! 나 기다렸는데! 아앙!”
서연의 다리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엄마가 실종된 아빠를 찾으러 잠실대피소에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걸로 믿는 딸이다.
서연은 당황한 얼굴로 한동원을 본다.
한동원은 진실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난감한 모습.
영문을 모르는 서연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눈물을 닦고 안아 준다. 엄마가 딸을 안는 것처럼.
금세 눈물을 그치고 서연과 한동원의 손을 잡는 아이.
“엄마. 괴물들 다 사라졌대. 봐, 하나도 없지?”
딸이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고 쫑알댄다.
서연이 한동원을 보자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그렇게 세 사람은 아파트 쪽으로 걷는다.
평화롭고 한가한 아파트 단지.
이 장면에서 ‘네 엄마와 누나는 그렇게 만났어. 그다음에 엄마랑 결혼해서 널 낳은 거야.’ 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내레이션 들어갈 분량 충분하고, 연기 나무랄 데 없고.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고려할 게 많은 작품이라 그런지 너무 힘들었다.
촬영 기간이 전보다 길기도 했고.
수고했다는 말을 하며 스태프들과 일일이 포옹하고 악수를 했다. 수호 녀석도 마찬가지다. 조명 스태프와는 한 팀 같았다. 조명 지지대인 비계 설치와 해체를 도왔고, 조명도 나르고 그랬으니.
한동원과 서연이 다가왔다.
한동원과도 인사하고 먼저 보낸 뒤 서연과는 서로 등을 토닥이며 내 차로 향했다. 내가 정신적으로 녹초가 된 걸 아는 조감독과 제작실장이 현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아직도 눈이 시려?”
“좀 나아졌어.”
“백상 나갈 거지?”
“이번엔 나가야지. 꼭 오라고 했으니까.”
“오빠가 꼭 상 받았으면 좋겠다.”
“너도 이번엔 받을 거야.”
“난 모르겠어. 선배들이 워낙 대단해서.”
이번 백상예술대상에 ‘아비도’가 세 개 부분 후보에 올랐다.
작품상. 신인감독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서연은 지난달에 끝난 사극 드라마로 여자 최우수연기상과 여자 인기상 후보가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푹 쉬었다.
코어의 레벨은 점진적으로 성장하다가, 어떤 계기로 훌쩍 오른다는 걸 확인했다. 그 뒤로는 또 느리게 진보할 테고.
미간으로 보이는 진화한 능력.
이걸 마음의 눈인 ‘심안’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심안은 두통은 물론 시력에도 영향을 주기에 가능한 한 쓰지 않기로 했다. 다시 한 단계 오르면 모를까.
* * *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열리는 코엑스 D홀.
회사 밴이 코엑스 앞에서 멈췄다.
턱시도를 입은 내가 먼저 내려 손을 내밀자,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서연이 내 손을 잡고 내렸다.
카메라 플래시가 수도 없이 터졌다.
원래 각자 오기로 했는데, 주최 측에서 동시 입장하면 이슈가 되겠다고 해서 같이 왔다. 우리가 친 사고가 결과적으로 백상의 이미지를 좋게 한 것도 있고.
“두 분 잘 어울리세요!”
“이쪽 좀 봐 주세요!”
“MBS 연예가 리포트에서 나왔어요! 소감 어떠세요?”
“수상 기대하시나요?”
리포터와 기자들의 물음에 대답하며 레드카펫을 걸었다.
우리가 포토라인에 손을 잡고 서자 난리가 났다. 입맞춤을 하라는 둥, 결혼은 언제 하느냐는 둥. 심지어 외국 방송사에서도 ENG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아비도가 외국에서도 제법 반응이 좋았던 덕분이다. 서연의 인지도가 세계로 확장된 것도 있고. 톱스타와 영화감독의 사랑이 기삿거리가 되기도 했으니.
시상식장으로 들어갔다.
진행 스태프가 말했다.
“두 분 같이 앉게 해 드렸어요. 이름표가 있습니다.”
“네. 고마워요.”
원래 같은 작품의 감독과 출연진이 모여 앉는데, 나와 서연만 함께 앉게 되었다. 게다가 작가일 때와는 달리 앞에서 두 번째 자리다.
좌석으로 가자 아는 사람이 많았다.
먼저 같은 신인감독상 후보인 김영석 선배. 서로 덕담을 나누며 포옹했다. 그다음 아비도 주연인 김강헌 씨. 다른 작품으로 후보에 오른 엄아인 씨. 감독상 후보에 오른 조상미 감독도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TV 부분 연기상 후보에 오른 정효주 씨도 보인다. 그녀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나와 서연에게 인사했다. 그 뿐 아니라 국민 MC인 유재동과 강호석도 악수를 청해 왔다.
모두 자리에 앉고 얼마 뒤 시상이 진행 되었다.
여러 시상이 지나고 마침내 신인감독상 차례.
시상자가 공교롭게도 서연이었다.
주최 측이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였다.
서연이 수상자 봉투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섰다.
“제게 이 상은 좀 특별하네요. 시상자로서 공평해야 하는데, 누군가가 꼭 좀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건 왜 일까요?”
그 말에 참석한 연예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환하게 웃는 서연의 표정이 정말 아름다웠다.
서연이 수상자 봉투를 열며 말했다.
“제5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분 신인감독상 수상자는…”
서연이 수상자를 확인했다.
그녀가 실망한 표정을 슬쩍 비치더니.
“영화 아비도의 최신성 감독님. 축하합니다.”
요란한 음악과 환호가 들려왔다.
전과 달리 성큼성큼 무대로 향했다. 김강헌과 영석이 형이 기립한 채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조상미 감독도 엄아인도. 심지어 정효주까지.
무대로 나가자 서연이 빛이 나도록 웃으며 팔을 벌렸다.
곧장 걸어가 그녀를 안았다.
또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휘파람을 부르고. 장난 어린 야유도 하고, 웃음도 터지고.
서연과 내가 서로 등을 토닥인 뒤 마이크 앞에 섰다.
웃으며 말했다.
“살아가면서 주변에 천국이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천국을 찾지 못한다는 말이 있죠. 저는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음악이 터져 나왔다.
다시 서연과 포옹했다.
* * *
수상자 축하연에 참석했다.
아비도는 작품상, 신인감독상, 남자 최고연기상을 휩쓸었다. 최대 수상이었다. 대상은 내가 각색한 웹툰 원작 영화가 받았고.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샴페인을 마셨다.
서연은 최우수연기상 수상에는 실패했으나 인기상을 받았다. 수많은 톱스타를 제치고 받은 인기상이다.
모르는 사람도 꽤 많았는데, 웹툰 원작 영화 제작사 대표가 한 남자와 함께 내게로 왔다.
“인사들 해요. 이쪽은 최 감독. 이쪽은 이동욱 씨.”
“수상 축하해요. 이동욱이라고 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최신성입니다.”
제작사 대표가 말했다.
“자네 혹시… 해외 영화제 출품할 생각 없어?”
“있죠. 아비도로 말입니까?”
“아니, 지금 찍고 있는 거.”
이동욱 씨가 말했다.
“지금 제작 중인 작품 시나리오를 인상 깊게 봤어요. 혹시 토론토 영화제에 월드 프리미어로 출품할 생각 없으세요?”
“토론토 영화제 프로그래머신가요?”
“아니요. 전 마블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감독님 영화를 수입해 보고 싶은데, 그 전에 토론토 영화제에 출품하여 평가를 받아 보시는 게 어떤가 해서요.”
잠시 어리둥절했다.
마블 스튜디오는 어벤져스를 제작한 대형 회사다.
모회사는 월트디즈니고.
그 마블 스튜디오가 내 영화를 수입한다니.
그건 그렇다 치고.
전에 꿈에 나온 영화제가 토론토 영화제였나?
정말 예지몽이었던 건가.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