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사람의 인연이란
다른 지구에 진입한 장면의 예산이 좀 셌다.
좀비 역의 보조 출연 비용도 좀 들어갈 것 같고.
방치된 차량이 있는 도로는 시골 국도에서 찍으면 된다. 잠실운동장으로 갈 때 강남이나 잠실 쪽 차량과 행인은 CG로 지우면 가능하다. 그 자리에 방치된 차량을 붙여 넣으면 되고.
우선 예산을 정확하게 잡아 두고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시나리오 한 장면 때문에 예산이 뻥튀기될 수 있으니.
따로 세트를 세울 필요는 없었다.
사람만 좀비가 됐지 서울이 파괴된 것은 아니니까.
CG는 25억으로 잡았다.
영화 괴물이나 해운대처럼 섬세하게 뭘 그려 넣는 게 아니고 지우거나, 붙여 넣는 CG가 대부분이다. 수만 좀비들도 군중 씬 촬영 때는 쓰는 기법으로 한 번 불러 모은 보조출연자들을 다양하게 찍어 놓고 붙이면 된다.
두 동원이 동시에 화면에 잡히는 기법은 다양하다.
이중 노출로 찍은 화면에 겹쳐서 찍거나, 두 인물이 멱살을 잡을 땐 대역 배우의 얼굴만 주인공의 얼굴로 합성해도 된다.
더구나 두 동원은 각각 감염 방지를 위해 복면을 쓰기에 체격만 비슷해도 된다. 음성이야 후시 녹음으로 해도 되고.
그다음 총기 대여.
홍콩의 총기 대여업체에서 촬영용 프롭건 10정에 모형건 30정 정도 대여하면 된다. 프롭건은 K1과 K2 미국 민수용 버전인데, 이걸 한국 영화 수요에 의해 홍콩 업체가 프롭건으로 개조했다. 촬영용 공포탄 2만 발을 합치면 약 1억.
리허설을 많이 해서 탄을 아껴 가며 찍어야 한다.
특수효과와 의상 및 소품 제작에 약 2억.
좀비 분장에 비용이 대부분 들어갈 터다.
스태프가 추가되어 발생할 비용도 약 2억.
모두 합쳐 추가되는 비용이 30억.
일반 영화의 기본 제작비가 40억 정도다.
일견 대작 규모로 보이는 영화지만 이 예산으로 얼마든지 찍을 수 있다. 물량이나 볼거리를 과시한다고 영화가 잘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인물과 사건이지.
보통은 유일한 피난처나 좀비 백신 따위를 찾으러 떠나는 여정이 대부분이고, 시간도 많으니 느긋하게 좀비를 잡으며 간다. 그러나 차기작은 시간에 쫓긴다. 그것만으로도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생긴다.
일에 찌들어 권태에 빠진 주인공과 살아남으려 악착같이 버틴 또 다른 나. 또 다른 자신을 통해 인생과 자아를 성찰하는 은유를 보여 줄 수 있다. 좀비야말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인간에 대한 메타포가 아니던가.
또 다른 나를 굳이 넣은 것은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모르는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의 동원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고독하게 버티며 내면을 탐구하고 생존을 배웠다. 또 다른 내가 주는 그런 경험이 주인공에게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그냥 좀비 영화에 작품성을 부여한다.
물론 그런 것들은 전달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고.
속도감 있는 좀비 영화 특유의 흥행성은 있다.
여기에 예술적 장치를 첨가해도 그 흥행성에 큰 해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품이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2개의 지구 설정은 약간의 무리가 있다. 논리적 개연성은 없으나, 주인공이 과거로 가는 영화 ‘어바웃 타임’이 이런 부분을 부드럽게 잘 풀었다.
집안의 비밀스러운 내력을 할머니의 따뜻한 정이 느껴지도록 그려 놓고 시작하면 풀릴 부분이다. 똑같은 비밀을 간직한 두 지구의 같은 집안 전통이라고 할까.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다른 세상에 갔었고, 또 다른 자신을 만나 삶을 이야기하고 돌아왔다는 느낌으로.
또한 구출 대상이 아버지와 또 다른 나의 아내 대신, 아버지와 어린 딸로 대체해도 된다. 마지막 장면엔 주인공의 지구에 있는 ‘아내’를 찾아가는 것도 좋다. 결혼도 안 한 여자에게 딸이 엄마라며 달려가 안기면 묘한 울림이 있을 것 같다.
아직 구성이 미완이니 좀 더 굴려 봐야 한다.
시나리오가 나오면 좀 더 확실해지겠지.
이후 그동안 미뤄 놨던 일을 처리했다.
라이터스에 가서 들어온 작품 검토와 회의도 하고, 로즈 엔터로 가서 내 결정이 필요한 것들도 결재했다.
회사 자금이 200억에 육박했다. 난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지성이는 회사를 확장하는 게 좋지 않으냐는 제안을 했다.
물론 그 거액을 묵혀 두는 것보다 투자나 확장하는 게 낫다. 이런저런 방안이 나와서 그 중 몇 가지를 더 논의해보기로 했다. 자체적으로 확장하느냐, 인수를 하느냐 문제였다.
회의가 길어지던 가운데.
오늘 제니스가 음악 방송 1위 후보에 올랐다고 해서 기분 전환도 할 겸 MBS 공개홀로 향했다. 팬덤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 * *
MBS 공개홀 대기실에 제니스가 있었다.
새벽부터 나가서 드라이 리허설까지 마친 후였다. 다들 남자아이들처럼 널브러져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여자아이들이 숙소에선 이렇게 생활하는 모양이다.
서연은 못 볼 꼴 보여 줬다는 듯 민망해하고.
“오빠, 웬일이야?”
“구경하려고. 오늘 1위 후보에 올랐지?”
“응. MBS는 처음이야.”
“요즘엔 하이니스가 시비 걸진 않지?”
“걔들 보기도 힘들어. 신곡이 안 나오니까.”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영진이가 들어왔다.
“카메라 리허설하고 바로 사전 녹화 들어간대요.”
“네!”
제니스 멤버들이 화장을 점검했다.
무대로 향하는 멤버들을 따라나섰다.
무대까지 갈 때 수많은 아이돌이 제니스를 향해 넙죽 허리를 숙였다. 이젠 제대로 선배 대접을 받고 있었다.
제니스도 선배 가수가 보이면 깍듯이 인사했고.
그러고 보니 제니스도 어느덧 5년 차가 되었다.
연희와 미주, 리즈도 슬슬 연기를 할 시점이기도 하고.
제니스 멤버들이 무대에 올라 카메라 리허설을 시작했다.
관람석에 앉은 이들 대부분이 제니스 팬이었다.
제니스 팬클럽에 사전녹화 참가 신청을 해서 당첨되어 온 이들이다. 생방송 관람은 방송국에서 추첨하고.
로즈 엔터에서 뭘 해 준 것도 없는데 제니스 만의 무대 세트가 상당히 화려했다. 이 세트를 해체하고 생방송에 들어갈 테니, 오늘 출연은 사전 녹화분이 나가는 모양이다.
헤드셋을 착용한 FD가 외쳤다.
“녹화 들어갑니다! 스탠바이 해 주세요!”
“네!”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FD가 조정실에 있는 PD와 무전을 주고받더니 손짓을 했다.
곧 음악이 나오며 카메라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사전녹화는 생방송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제니스가 깔끔하게 녹화를 끝내고 내려왔다.
바로 들어가지 않고, 팬들과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하고 그랬다. 팬클럽에선 사진 찍는 팬도 추첨하는 모양이다.
바쁘게 나가는 제니스를 따라나갈 때였다.
낯익은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큐즈 대표였다.
“정말 이러깁니까?”
“뭐 말입니까?”
큐즈 대표의 얼굴이 착잡해 보였다.
자신이 막무가내로 내게 항의하고 있다는 걸 본인도 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럴까. 큐즈 소속 배우 중 5명이 로즈로 갔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그가 말했다.
“우리 배우들 스카우트를 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오겠다는 배우를 막습니까?”
“그리고 말이에요. 우리 회사 배우들 여전히 영화 출연이 잘 안 됩니다. 제대로 된 시나리오가 안 들어온단 말입니다. 본인만 관계없다고 말한다고 다가 아니잖아요. 무슨 조치를 해 줘야 전에 했던 거래가 성립되는 거 아닙니까?”
“제가 그렇게 해야 할 의무라도 있어요?”
큐즈 대표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상 변한 것이 없으니 이런 말을 하는 거 아니에요?”
“저는 영화사에 큐즈 배우를 쓰지 말라고 한 적이 없고, 그런 말을 할 위치도 아닙니다. 제가 제작사에 찾아가서 큐즈 배우를 써 달라고 부탁이라도 할까요? 캐스팅 문제는 전적으로 큐즈 역량에 달린 겁니다. 저한테 항의하실 일이 아니에요.”
바로 자리를 떴다.
큐즈 대표가 따라붙었다.
“제작사들이 최 대표가 운영하는 라이터스에 작품을 맡기고 싶어 한다면서요? 제작사가 최 대표 눈치를 봐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내가 뭐라고 제작사들이 내 눈치를 봐요?”
“사실상 그렇지 않습니까?”
“더 할 말이 없네요.”
다시 걸었다.
뒤에서 큐즈 대표가 언성을 높였다.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지난 7개월간 회사 수익이 반 토막 났습니다. 주가도 폭락했고요! 이대로 큐즈가 망하면 내가 가만있을 것 같아요?”
뒤돌아 보며 말했다.
“거래 없던 일로 하자 이겁니까?”
“회사 운영이 어려우면 하이니스가 나가야 할 판인데 못할 것 같아요? 당신들이 우리 협박해서 돈 뜯어낸 거. 재판 한번 가 볼까요?”
지나가던 아이돌이 놀란 얼굴로 나와 큐즈 대표를 보았다.
큐즈 대표에게 말했다.
“우릴 건드린 건 큐즈의 이리나가 먼저입니다. 걔가 일찍 사과만 했어도 그쪽과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어요. 그쪽 본부장이 영화 못 찍을 거라는 내 경고 무시하지 않았다면. 대표님이 직접 내게 찾아올 일도 없고, 배우들이 나갈 일도 없었을 겁니다. 애초에 하이니스 애들이 제니스 애들한테 욕하고 시비를 건 게 잘못인 겁니다.”
큐즈 대표가 한숨을 쉬었다.
인제 와서 보니 그렇게 된 거다.
그가 말했다.
“당신… 후회할 거요.”
이 말 나올 줄 알았다.
“큐즈가 우릴 건드렸기에 지금의 결과로 이어진 겁니다. 똑같은 실수하지 않길 바랍니다. 만약 또 우릴 건드리면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될 테니까.”
큐즈 대표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탤런트와 가수는 대부분 남아 있지만 배우는 거진 빠져나간 곳이 큐즈다. 앞으로도 영화 출연은 쉽지 않을 터다. 우선 배우들이 큐즈에 들어가질 않을 테고, 탤런트도 나갈 공산이 크다. 영화도 찍어야 하니까. 큐즈의 이미지는 그렇게 낙인이 찍혔다.
큐즈 대표는 법정 싸움을 통해서라도 이미지를 바꾸려 할 것 같다. 영화계 힘이 센 로즈 엔터 대표가 협박했고, 본인들은 피해자라고 할 테지. 재판에 들어가면 로즈 엔터와 제니스는 상관없고 나만 파렴치한 놈이 된다. 반면 큐즈는 영화 출연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될 텐데, 이미 그런 상황이다.
큐즈 대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오늘 무언가 결단을 내리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재판까지 가면 본인들도 손해이니 다른 방법이겠지. 그걸 해보고 안 되면 소송 거는 거 확실하고. 해서 지성이에게 전화하여 모종의 조치를 했다.
일이 터지면 꺼낼 카드다.
저녁이 되어 생방송이 진행되었다.
제니스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1위 후보 MC 소개를 할 때 잠깐 출연하고 다시 대기했다. 그러다 1위 후보들과 출연자 모두 무대에 섰다.
“10월 첫째 주 1위는… 제니스입니다!”
“축하합니다!”
축포가 터지고 색색의 꽃가루가 날렸다.
제니스 멤버들 다들 눈이 붉어졌다. 세라와 연희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고. 감사 인사와 앵콜 무대까지 한 제니스 멤버들이 기쁜 얼굴로 달려와 하나둘 내게 안겼다.
“우리 MBS 처음 1위 했어, 오빠!”
“그래, 수고했다.”
무뚝뚝한 리즈도 내게 안겼다.
서연은 흐뭇하게 멤버들을 토닥이고.
애들을 데리고 1위 뒤풀이를 하러 갔다.
신곡 활동 준비 때문에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뭘 좀 먹이고 싶었다. 당연히 메뉴는 꽃등심.
* * *
고깃집에서 소고기 만찬이 벌어졌다.
그동안 돈이 없어서 애들에게 꽃등심을 안 사 준 게 아니었다. 살찔까 봐 못 사 준 거지. 영진이도 마음껏 고기를 흡입했다. 그런데 연희가 자꾸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친구가 축하 톡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영진이에게 물었다.
“연희 혹시 연애해?”
“연애요? 아닐걸요.”
“아이돌 애들이 추근거리진 않고?”
“말이야 많이 걸죠. 저한테 연락처 좀 달라고 한 매니저도 있었고요. 제니스만 그런 게 아니라 여자 아이돌은 대부분 그래요. 주로 선배들이 후배들한테 찝쩍대죠. 제니스는 선배급이라 요즘은 그런 것도 없어요.”
“썸 타는 것도 없고?”
“저는 모르겠던데요.”
연희를 다시 보았다.
답장하는 표정이 들떠 있다.
분명 남자다.
“연희 혼자 나간 적 있지 않아?”
“그거야 전부터 그랬죠. 인기 없을 때부터 PC방에 혼자 자주 갔는데요, 뭐. 저랑도 갔었고요.”
“앞으로 연희 혼자 내보내지 마. 게임 하고 싶어 하면 숙소에 게이밍 컴 하나 맞춰 줘.”
“네. 그런데 왜 그렇게 민감하세요?”
“미리 대비하는 차원에서.”
그때였다.
연희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더니 눈치를 살폈다.
바로 옆에 있는 세라가 연희 스마트폰을 보더니 그녀 역시 깜짝 놀랐다. 미주도, 리즈도 스마트 폰을 보고 놀라고, 서연은 한숨을 쉬었다.
“뭔데?”
서연이 난처한 얼굴로 나와 연희를 보았다.
연희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큐즈가 사전에 작업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큐즈 대표가 날 기다렸던 거군.
서연이 연희 스마트 폰을 가져와 건넸다.
연희의 스마트 폰을 보았다.
연희 메일로 사진들이 전송되어 있었다.
어느 차 안에서 연희와 한 남자가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남자 얼굴은 안 보인다. 같은 옷을 입은 남녀가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모텔 옆을 스치는 장면도 있다.
“어떻게 된 거야?”
연희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오빠. 그거 조작된 거야.”
“사진을 조작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키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키스 안 했어. 그 오빠가 우리 뽀뽀할까, 하면서 장난쳤던 거야. 나도 호감이 있었고, 계속 만나자고 문자를 보내서 만났는데 갑자기 장난을 쳐서 나도 깜짝 놀랐어.”
“모텔은?”
“그건 정말 아니야. 그 오빠가 단골 초밥집이 있다고 해서 갔던 날이야. 그 모텔에서 나온 것처럼 교묘하게 찍은 거라고.”
사진을 확대해 봐도 남자 얼굴은 안 보인다.
“만난 사람이 누구야?”
“연지훈.”
모인 이들 모두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해체된 큐즈 1호 아이돌 출신의 탤런트다. 연기력 논란 때문에 최근은 인기가 뜸한 친구. 워낙 잘생겨서 여자 연예인에게 인기가 많다. 톱스타와 염문설도 몇 번 뿌렸고.
그때 전화가 왔다.
큐즈의 남희재 본부장이었다.
전화를 받은 뒤 녹음 버튼을 눌렀다.
-좀 뵙지요. 우리가 최신성 씨만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으면 오산입니다. 이미 공사 몇 개 했어요.
“다음 누구죠?”
-서연 양이 좀 힘들 겁니다. 아주 크거든요.
서연을 보았다.
그녀는 피식 웃을 뿐이다.
협상 카드이기에 남 본부장이 공갈치는 거다.
“그쪽 대표님이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는데, 고작 이겁니까? 이게 먹힐 거라고 생각해요?”
-사진 속 남자가 스캔들을 인정할 텐데요?
“협상 안 한다면요?”
-별수 있나요. 재판 가야지. 우리야 잃을 거 이젠 별로 없습니다. 반면에 한창 잘나가는 로즈는…
말을 잘랐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죠. 사진 모두 삭제하고, 조용히 회사 운영하시라고 전하세요. 나는 경고했습니다. 다시 건드리면 돌이킬 수가 없다고.”
-동영상 공개하시게? 마음대로 하세요.
“5분 드릴 테니, 대표에게 잘 생각해 보라고 하세요.”
-지현이가 또 사고를 쳤지 뭡니까. 그래서 나가라고 했더니 일 터지면 눈물의 사죄를 하고 열심히 재기하겠답니다.
“단단히 작정했네요.”
-그럼요. 회사 사활이 걸렸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 그대로다.
말을 이었다.
“큐즈는 대주주인 주식회사 INT가 지분 30%를 보유하고 있고, 큐즈 대표가 15%를 확보하고 있을 겁니다. 현재 큐즈 주가는 1,670원. 엔터 사 중 가장 주가가 낮고, 발행 주식 수도 적죠. 최근은 배우가 빠지고 실적도 불투명해서 노리는 기업 사냥꾼도 없을 겁니다. 전망이 없으니까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지성이와 의논했던 바로 그 조치였다.
“내일부터 큐즈 엔터 지분을 확보하겠습니다.”
-뭐요?
“내가 경영권을 쥐면 대표와 당신부터 몰아내도록 하죠.”
-여보세요! 잠깐만!
전화를 끊었다.
당연히 큐즈를 인수할 생각 없다.
망해가는 회사를 인수해서 뭘 하겠나.
다만 로즈 엔터가 지분을 어느 정도 확보해서 대주주와 손을 잡으면 주주총회에서 경영권이 갈릴 수도 있다. 대주주 INT는 큐즈 경영 악화 원인을 알고 있으며, 로즈 엔터와 나에 대해서도 잘 안다.
누구에게 경영을 맡기는 게 좋을까.
* * *
나와 지성이가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지성이가 큐즈 엔터 주식 매물이 나오는 족족 사들였다.
우리가 개입하면서 큐즈 엔터 주가는 1,670원에서 단숨에 2,170원이 되어 상한가에 걸렸다. 단순 계산으로 80억 정도면 큐즈 대표 지분율 15%를 넘는다.
로즈 엔터가 큐즈 인수를 시도한다는 찌라시가 돌자, 개미와 기관들도 물량을 담기 시작했다. 자랑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데, 이는 로즈 엔터의 전망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공시를 낸 것은 아니지만 지분을 확보하다가 매도하면 개미들만 피해를 본다. 주가조작 의심을 받을 수 있고. 그러니 큐즈 지분을 확보한 이상 관여는 해야 했다.
큐즈 대표는 지분율을 높이기 어려운 실정이다.
큐즈의 보유 자산이 고작 25억이다. 대표 본인 재산이 많아 봐야 현금 수억과 부동산 몇 개일 테고.
오히려 대주주 측에서 물량을 매도했다. 큐즈 영업이익이 바닥이고, 주가도 계속 떨어져서 ‘계륵’이었는데 이참에 손을 털려는 느낌이 왔다.
만약 대주주가 보유 주식을 대거 매도한다면 로즈가 정말 큐즈를 인수합병 할 수도 있을 터였다. 아직은 모른다. 로즈 엔터에 경영권을 맡기면 실적이 좋아질 것으로 볼 테니까.
현재 큐즈 시가 총액은 430억.
로즈 엔터가 인수합병을 맘먹으면 대주주 지분율보다도 높아진다. 매수할 물량이 없어서 그렇지.
현재 큐즈 엔터의 사옥은 110억대 5층 건물이다. 큐즈가 7년 전에 33억에 매입하여 리모델링한 뒤 3배 넘게 올랐다. 대주주나 큐즈 대표가 보유 주식을 팔고 나가면 사옥은 사실상 로즈 엔터의 것이 된다. 주주들에게도 지분이 있고.
일단은 나중의 일이다.
야금야금 주식을 매입해서 15%까지 이른 뒤. 경영권을 협상해 보고, 큐즈와 로즈의 합병도 그때 생각해보기로 했다.
대주주인 INT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다.
만약 인수를 하게 된다면.
주가가 아직은 낮을 때 35%까지 확보해야 한다.
로즈 엔터 지분 30%. 나 개인 지분 5% 정도.
큐즈 엔터 쪽은 잠잠했다.
실제로 로즈 엔터가 지분을 확보하자 비상이 걸린 모양이었다. 대주주인 INT에 가서 같은 편이 되어 달라 요청할 거 분명하고. 회사 경영권이 날아갈 판인데 소송이 문제랴.
소송을 걸어도 상관없다. 하이니스 애들 동영상은 없다고 하면 그뿐이다. 큐즈 경영에 관여한 자가 왜 소속 식구 동영상을 풀겠나.
일주일 내내 주식을 매수했다.
76억을 투입하며 지분율이 13. 5%가 되었을 때.
큐즈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유는 몰라도 만나 보기로 했다.
* * *
한식당에서 큐즈 대표와 만났다.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수척한 모습이었다.
로즈 엔터에 200억에 이르는 여유 자금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모양이다. 이대로 로즈 엔터 지분이 15%가 넘고 대주주 INT와 내가 손을 잡으면 그는 경영권을 잃게 된다.
아마도 INT와 협상을 했으나 결렬되었겠지.
방송국 공개홀에서 만난 큐즈 대표와 지금의 큐즈 대표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인지상정인지라 마음이 짠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다가 나 같은 인간을 만나 이런 상황까지 되었는지.
“내 술 한 잔 드세요.”
“네.”
큐즈 대표가 따라주는 전통주를 한 잔 받아 마셨다.
나도 큐즈 대표에게 술을 따랐다.
그도 한잔 쭉 들이켰다.
“이렇게 최 대표와 내가 마주 앉아 술을 한잔 마실 때는 아는 동생 보듯 하는데 말입니다.”
큐즈 대표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동정심을 유도해서 로즈 엔터의 공격을 중단하려고 하는 작전일 수도 있다. 그런데 목적이 그것이라고 해도 지금 큐즈 대표의 심정은 진짜였다. 정말 후회하는 속내가 보였으니.
그가 말했다.
“우리가 한 일이 있으니 중단해 달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그냥 오늘은 그동안 최 대표와 내가 가졌던 여러 감정들. 쌓인 앙금들. 그런 것들 좀 훌훌 털고 싶어서 보자고 한 거예요.”
진심이다.
이 말을 왜 하는 것인지도 알 것 같고.
큐즈 대표가 말했다.
“12년 전에 작곡으로 돈을 번 제가 무모하게도 기획사를 차렸죠. 운이 좋아서 키운 애들이 대박이 난 덕분에 지금의 큐즈가 되었어요. 그런데 7년 전에 33억 들여 큐즈 사옥을 매입한 것이 첫 번째 실수였습니다.”
“지금은 110억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러면 뭘 합니까. 회사 자산이지 내 건물은 아니죠. 사옥에 대한 내 지분은 15억밖에 안 됩니다. 내가 그럴듯한 사옥을 가질 욕심에 자산이 부족한 상태에서 거액을 썼던 거예요.”
지금 큐즈 대표는 내게 교훈을 알려주고 있었다.
겉모습에 욕심내지 말고 내실을 다지라는.
큐즈 대표의 말이 이어졌다.
“돈이 필요했는데 마침 INT가 투자를 하겠다고 했죠. 급히 투자를 받아 그다음부터 승승장구했지요. 위기를 넘기고 나니 그게 독배가 되더군요. INT 지분이 늘 35에서 40이었고, 회사를 창립한 내 지분은 15%를 넘기기 어려웠어요. 사옥을 매입할 때 무리를 했던 겁니다. 결국 회사의 이익은 INT가 다 가져가는 구조가 되고 말았죠.”
대충 감이 잡혔다.
“INT가 상장을 종용했군요.”
“맞아요. 상장을 해야 자본금이 늘어 4대 기획사로 발돋움할 수 있다며 강압적으로 요구하더군요. 말을 안 들으면 날 자른다고 하면서요. 사실상 난 바지사장이나 마찬가집니다. 해서 하는 말인데. 최 대표가 큐즈 대표이사가 되어도 INT가 잘 협조해줄 거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회사를 살려 놓으면 저를 내칠 수도 있겠네요.”
“그래요. INT는 외국계 금융사의 자회사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중국 자본을 끌어들인 뒤 회사를 중국에 거액을 받고 넘길 심산으로 큐즈에 투자를 했던 겁니다. 난 그걸 알고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
큐즈 대표가 물을 마셨다.
회사 구조가 다른 기획사와 좀 달라서 예상했던 바다.
대주주가 회사 창립자보다 지분이 높았으니.
내가 물었다.
“이런 말을 해주시는 이유는 뭔지요?”
“최 대표도 예상했겠지만 큐즈는 이제 가망이 없습니다. 나도 더는 휘둘리고 싶지가 않네요. 내가 세운 회사를 빼앗긴다는 것이 정말 마음이 아프지만 이참에 새로 시작하는 게 낫겠다 싶네요.”
큐즈 대표가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그동안 미안했어요. 오늘 이 자리에서 다 털고 갑시다. 지현이나 리나가 실수를 한 건 맞아요. 다 내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나나 남 본부장이 최 대표를 얕본 것도 있고요. 해서 여기서 다 털고 우리 앞으로는 업계 동료로 잘 지내봅시다.”
진심 어린 사과였다.
코어가 봐도, 내가 봐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제가 먼저 누굴 공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대표님께서 새로 기획사를 시작하신다면 저와 다툴 일이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큐즈 대표가 희미하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사옥에 대한 지분을 주식으로 양도받고 보유 지분 처분하면 한 100억 즘 될 터다. 새 기획사를 하는 데 무리가 없다. 다시 한다면 오로지 회사 자산으로 성장하겠지.
대표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그가 말했다.
“다음엔 서로 동료로 함께 가봅시다. 난 방송국 쪽에 인맥이 많고, 최 대표는 영화계에 영향력이 있으니 서로 도우면 좋지 않겠습니까. 최 대표 같은 사람을 친구로 만났어야 하는데, 적으로 만났으니 이거 원.”
“동감입니다.”
나도 큐즈 대표도 맥없이 웃고 말았다.
맞는 말이다. 큐즈 대표가 무슨 악인도 아니고, 나도 그리 나쁜 놈은 아니다. 소속 연예인 때문에 분쟁과 갈등이 생긴 것이고, 큐즈 대표도 회사를 위해 일을 벌였던 거고.
합리적인 생각을 해야 했다.
큐즈 대표가 회사를 포기하고 나간다고 한다. 나와의 분쟁 탓이겠지만 더는 INT에 휘둘리기 싫다는 이유도 크다.
큐즈 대표가 나가면 INT는 내게 대표이사를 제안할 테고. 로즈 엔터가 35% 이상 지분을 확보하지 않으면 나도 조종하려고 하겠지. 큐즈를 키울 수는 있으나 INT만 좋은 일이 된다. 이젠 경영권을 획득할 이유가 없다.
큐즈 대표가 내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그의 진심도 확인했고.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로즈와 큐즈가 합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수합병 말입니까?”
“예. 저는 영화감독이기에 회사 경영에 집중할 여력이 없습니다. 대표님이 큐즈 대표를 그대로 맡으시면 됩니다.”
큐즈 대표가 내 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의도인가 싶은 얼굴.
말을 이었다.
“저와 대표님이 공동대표로 하죠. 기존 큐즈는 가수 담당과 드라마 제작. 기존 로즈는 배우 담당과 영화 제작을 각각 할 수 있습니다.”
큐즈 대표가 다시 물을 마셨다.
그가 말했다.
“INT 배후 금융사가 견제할 텐데요.”
“그러면 이렇게 하죠. 대표님은 회사를 나가시고, 배우들도 모두 계약해제하고 로즈로 간다고 하세요. 그러면 INT는 이제 더는 잡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지분을 매각할 겁니다. 그걸 저와 대표님이 매수해서 각각 35%. 20%까지 확보한 뒤에 합병하는 겁니다.”
“생각은 좋습니다만, INT가 넘어갈까요?”
“제가 INT 쪽 사람을 만나 큐즈를 포기하도록 유도해 보죠.”
큐즈 대표가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내 말을 과연 믿어도 되는가.
사실 안 믿어도 상관없다. 이미 큐즈를 포기한 사람이니.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요?”
“친구가 되자고 하셨잖아요. 친구가 아닌 가족이 되는 겁니다. 큐즈와 로즈는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드라마 제작과 영화 제작. 음반 유통 등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로즈가 5년이 걸릴 일을 큐즈와 합치면 1년 안에도 가능합니다.”
큐즈 대표가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그동안 헛살지는 않았죠. 한데 최 대표와 내가 공동대표가 된다 해도 내 입장에선 지금 상황과 별로 달라질 게 없어요. 최 대표가 날 쫓아내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요. 어차피 내 수익 배분은 얼마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차리리 새로운 회사를 차리는 게 낫지요.”
큐즈 대표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일은 없다고 해도 순진하게 믿을 수도 없고.
관건은 큐즈와 로즈가 합쳤을 때. 현재와 같은 지분이라도 수익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제가 장담하건대.”
기분 좋은 웃음을 보였다.
일이 이렇게 극적으로 달라질 줄 나도 몰랐다.
내 원대한 목표. 그걸 말할 차례였다.
“로즈와 큐즈가 합병한다면. 5년 이내에 대한민국 최고의 기획사가 될 것을 장담합니다. 연 매출 5,000억 대. 당기순이익 800억 대가 되며 주가 총액은 2조가 넘을 겁니다.”
큐즈 대표의 얼굴에 의문이 들어찼다.
“대체 무슨 근거로….”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표님이 지금 가진 지분 15%와 그때 보유한 15%는 100배 차이가 날 겁니다. 그러니 대표님은 회사가 커지는 걸 지켜보시면서 지분을 확보해나가세요. 대표님이 인간적인 사과를 하셨으니, 저도 사과의 손을 내미는 셈입니다.”
회사가 커지면 주식회사가 되는 건 수순이다.
로즈가 주식회사가 되면 오로지 내 회사는 아닌 셈이고.
현재 로즈 엔터 자산도 내 영화로 번 돈이 대부분이지만 온전히 내 돈이라 볼 수 없다. 물론 그 자산의 80%가 내 지분이다. 그러니 로즈 엔터 자산으로 큐즈 엔터 지분을 확보하면 그 역시 내 지분이 되는 거고.
장고에 빠졌던 큐즈 대표가 마침내 입을 뗐다.
“이 자리에선 확답할 수가 없네요. 인수한 지 2년 된 로즈 엔터 자산이 200억대에 이른다면 최 대표 역량을 믿어도 되겠지요. 로즈와 합병하는 건 긍정적으로 보겠습니다. INT만 손을 털고 나간다면 확실할 겁니다.”
“악수 한 번 할까요?”
큐즈 대표가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았다.
대표가 말했다.
“이 자리에 나올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그러게요. 사람 일이란 모를 일입니다.”
큐즈 대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최 대표.”
“저도요.”
나와 대표가 또 웃었다.
진심 어린 미소였다.
인생이란 어떻게 흘러갈지 참 모를 일이다.
전화위복이라 해야 하나, 새옹지마라 해야 하나.
식당에서 나갔다.
바로 둘이서 맥주를 마시러 갔다.
두 회사가 합치면 회사명은 무엇으로 할지. 회사 구조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나누었다. 합병에 대해 차분하게 검토하겠다는 분이 더 열심이었다.
그러다 대표님이 그랬다. 적으로 만난 최 대표와 동지로 만난 최 대표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그러게. 사람의 인연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 *
며칠 후 INT 전무라는 사람을 만났다.
나와 큐즈 대표가 만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코어를 발동한 채 마주 앉았는데, 음흉한 속내가 풀풀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최 대표에게 원망 많았어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큐즈 측이 공격을 하니 저는 방어 차원에서 대응했던 거죠.”
“큐즈 대표는 사람은 좋은데, 물러설 때를 몰라요. 갑질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지 말입니다. 승승장구하던 큐즈가 이렇게 추락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INT에서 보유 지분을 좀 매각했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간만에 상한가를 쳐서 손실을 좀 메웠어요. 상장가 2천 원일 때 40%까지 확보를 하고 6천 원까지 올랐었는데, 천 원대까지 떨어졌으니 우리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회사에선 3천까지 오르면 다 털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어요.”
전무가 내 표정을 슬쩍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로즈가 큐즈를 인수할 거라는 찌라시가 돌고 있습니다. 매수 물량이 없을 정도로 증권가 관심도 크고요. 해서… 최 대표가 큐즈를 한 번 맡아 보시는 게 어떤지요?”
“안 그래도 그 점을 논의하러 왔습니다.”
“아, 그래요?”
전무의 얼굴이 미소가 돌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
“좋습니다. 저희가 밀어드릴게요. 4분기 총회에서 최 대표를 큐즈 대표 이사로 추천하겠습니다. 최 대표 경영 능력이야 로즈만 봐도 알지 않겠어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전무의 안색이 살짝 바뀐다.
말을 이어갔다.
“로즈 엔터가 큐즈 경영에 참여하면, INT는 로즈 엔터 보유 지분보다 항상 낮아야 합니다.”
“예?”
“제가 경영에 참여하여 큐즈의 영업이익이 상승하고, 주가도 올랐을 때. INT가 실질적 경영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저를 쫓아내고, 현 큐즈 대표를 다시 선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전무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말을 이었다.
“남 좋은 일 하고 쫓겨날 순 없죠. INT 지분율은 항상 15%로 유지해주십시오. 그 이상 지분을 가지신다면 경영권을 획득하려는 시도로 볼 것이며, 로즈 엔터는 INT가 경영권을 위해 지분을 확보하려 한다는 공시를 내고 즉시 발을 뺄 겁니다. 대중이 로즈 엔터를 믿는지, 큐즈 대주주를 믿는지는 주가로 판가름날 겁니다.”
전무가 이맛살을 찡그렸다.
큐즈가 망가진 원인이 내게 있다고 보기에, INT도 내게 적잖은 원한이 있다. 이용해 먹고 버리겠다는 뜻.
한 마디 더했다.
“그리고, 로즈 엔터가 발을 뺄 때는 제가 키우고 영입한 연예인 모두를 데리고 나갈 겁니다. 계약서에 그걸 명시할 것이고요. 다만, 제 제안대로 해주시면 2년 안에 큐즈를 정식으로 인수합병 합니다.”
전무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요?”
“보유한 지분 매각하고 큐즈 일에 손을 뗄 겁니다. 큐즈 대표가 싸움을 걸어왔어요. 그러니 큐즈가 망할 때까지 밀어붙일 겁니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할 거에요.”
“큐즈가 쉽게 망할 것 같아요?”
“큐즈 대표가 나가면 그냥 나갈 것 같습니까? 소속 연예인 다 데리고 나갈 겁니다. 다른 경영자가 큐즈를 경영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으세요? 저 때문에 큐즈가 이렇게 된 겁니다. 저 아니면 큐즈를 살릴 사람이 없어요.”
전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날 보았다.
내가 한 말은 허언이 아니다. 배우들이 빠지고, 배우와 탤런트 영입을 못 하는 상황 때문에 큐즈가 이렇게 됐다.
이미 망해가는 상황이다.
결정타를 먹였다.
“제 제안대로 해주지 않으시면 큐즈를 맡지 않는 것은 물론, 큐즈 소속 배우와 탤런트 모두 로즈로 모실 겁니다. 큐즈 대표가 하이니스와 신인 아이돌 데리고 나갈 거 뻔하고, 남은 연예인은 배우와 탤런트밖에 없습니다. 소속 연예인이 없는 회사에 기성 배우들이 갈까요? 큐즈가 망하고 상장 폐지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INT가 용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말을 끝으로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INT 측에서 연락이 왔다.
지분을 15%로 낮춰 보겠다고. 다 털고 나가길 바랐으나 내게 기대하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매물이 나왔는데, 그걸 로즈 엔터가 사들였다. 큐즈 대표도 개인 부동산을 팔아 현금을 확보한 뒤 주식을 사들였고.
INT가 지분 14. 5%.
사실상 내 지분인 로즈 엔터가 33%.
큐즈 대표가 17%까지 지분을 확보했을 때.
로즈와 큐즈가 합병한다는 공시를 냈다.
증권가도, INT도 발칵 뒤집혔다.
각자 다른 이유로.
* * *
로즈와 큐즈가 합병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한 달 후.
나와 큐즈 대표가 인수 합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회사는 기존 큐즈 사옥.
합병 후 회사명은 알앤시(R&C) 엔터테인먼트.
별칭은 로큐 엔터.
두 회사의 임직원과 소속 연예인들이 모두 모여 합병 자축연을 벌였다. 하이니스와 제니스는 친해질 수가 없는 사이였으나, 하이니스가 이젠 시비를 걸지 않으니 다투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서연에게 설사약을 먹였던 최초 사건 유발자인 이리나는 참석을 안 했다. 남 본부장도 오지 않은 걸 보면 남 본부장이 이리나를 데리고 독립하려는 모양이었다. 남 본부장 입장에선 황당했을 법도 했다. 기껏 싸웠더니 대표들끼리 손을 잡아버렸으니.
로즈 엔터는 회사 자금 180억에 내 돈 15억을 투자했다.
그러고도 회사 자금이 30억 남았다. 아비도 해외 판권과 제니스 신곡 수입, 유튜브 광고수익이 정산된 덕분이었다.
로즈와 큐즈가 합병한다는 소식은 증권가에 톱뉴스가 되었다. 관객이자 개미인 투자자들이 로즈 엔터의 발전 가능성을 매우 높게 쳐주었다. 내가 쓴 영화들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었던 분들이다.
발표 당일 바로 상한가를 쳤고, 이후 한 달 내내 등락을 거듭하며 꾸준히 상승했다. 물타기를 하며 눈물겹게 붙들고 있던 개미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람 하나 살린 일이라며 반겼다.
3,700원인 현 주가가 4만 원까지 간다는 예측이 가장 많았다. 합병한 로즈 엔터의 영화 수익만 따져도 4만 원은 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최소 그때까지는 들고 가겠다는 투자자가 많아서 매도 물량이 전혀 나오질 않았다. INT가 차명이나 다른 회사로 지분을 확보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INT는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나와 큐즈 대표가 손을 잡을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혹여 INT가 꼼수로 지분을 확보해서 압박할 경우. 사옥만 포기하고 회사를 다시 설립하기로 했다. 또한 이점을 INT와 투자자들에게 분명히 밝혔다. 앞으로 투자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 터였다.
지금 로즈 엔터의 지분은 35. 3%.
큐즈 대표의 지분은 19%.
INT는 15. 9%다. INT는 나와 큐즈 대표에게 속았다는 걸 알고 뒤늦게 지분을 확보하여 딱 마지노선까지 채웠다. 구두로 협상한 것이기에 나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로즈는 평균 2,450원에 매수했다.
지금은 65% 상승한 3,700원. 정확한 계산은 어렵지만 195억이 한 달여 만에 320억 된 셈이다. 여기에 오로지 내 지분을 환산하면 270억 정도.
앞으로 내가 영화를 제작하여 벌어들일 수익이 내 돈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 수익은 주가에 반영될 터였다. 주가가 오르면 오를수록 로즈 지분 35%는 난공불락의 성이 될 테고, 전문가들 평가대로 정말 10배가 된다면 320억이 3,200억이 된다.
합병 전에 기존 로즈 엔터 자산의 지분 85%가 내게 있음을 명확히 했다. 내 돈으로 로즈 엔터를 사들였고, 신곡 제작비 등도 내 돈으로 했다. 합병 직전 자산 대부분도 내가 제작하고 감독한 영화 수익이었고. 나머지 15%는 제니스와 로즈 엔터 직원 지분으로 명시했다. 하여 로큐 엔터의 내 지분은 딱 30%다.
서연과 함께 이젠 로큐 사옥이 된 건물 내부를 구경 다녔다. 기존 인테리어를 크게 바꾸지 않고 부서를 층으로만 나누었다.
1층은 전용 카페와 식당.
2층은 매니지먼트 본부
3층은 콘텐츠 제작본부
4층은 경영관리본부
5층은 대표와 임원 및 회의실.
지하 1층에는 연습실, 녹음실, 프로듀서실 등이 있었다.
3개 본부에 7개 부서, 16팀.
대표 이사는 구자형 전 큐즈 대표가 맡았다.
성 대표는 부사장. 고 본부장은 매니지먼트 본부장.
지성이는 경영관리부 지원팀장. 영진이는 매니지먼트 1팀장. 로즈 콘텐츠제작부 박상희 팀장은 이번에 콘텐츠제작 본부장을 맡았다. 그 외에 본부장과 여러 팀장은 전 큐즈 임원들이 담당했다.
난 최대 주주 및 총괄 프로듀서.
소속 연예인은 개인 포함 23팀.
일반 직원만 30여 명. 스태프를 포함한 팀장 21명.
매니지먼트부 실장만 9명. 매니저는 아티스트 수에 따라 한 명씩. 아티스트는 급에 따라 차량이 지급되는데 밴만 12대. 나머지는 기아 카니발을 탔다.
나와 서연은 구경을 마치고 카페에 앉았다.
우리가 앉으니 바리스타가 진한 커피를 내줬다.
“우리 회사… 이제 잘 되겠죠?”
“잘 될 겁니다.”
바리스타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제 자리로 갔다.
기존 큐즈 직원들이 우릴 밉게 보는 건 아닌가 싶었으나 그런 내색은 없었다. 경영 쪽 직원 중엔 우릴 반기는 사람이 더 많았다. 회사 경영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
“회사에 없는 게 없네.”
“응. 내가 있을 때만 해도 4대 기획사로 뽑혔거든.”
파티가 슬슬 마무리할 참이라 두 회사의 임직원들이 나오며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구 대표도 샴페인 잔을 들고 환하게 눈인사를 하고. 지난 한 달간 협의를 하면서 직원들 간 앙금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다들 한껏 기대감을 표현한다.
파티로도 부족해서 소속 연예인들까지 다 불러 거하게 고기를 먹으러 갔다. 그 술자리에서 남아 있는 모든 감정의 찌꺼기까지 다 씻어냈다.
나와 구 대표. 서연과 김강헌이 나란히 앉았다.
서연과 김강헌도 회사 지분을 꽤 확보해서 이제는 주주였고, 각각 드라마와 영화 제작 이사를 겸했다.
사업 방안에 대해 논의할 차례였다.
“앞으로 드라마 외주 제작을 겸할 겁니다. 자체 투자는 항상 30% 미만으로 잡아야 하고,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외 사업 부분이 지금까지 콘서트와 콘텐츠 유통을 맡아왔는데, 앞으로는 영화 및 드라마 수출을 담당해야 해요.”
“직원을 증원해야겠죠. 신작 준비하고 계시죠?”
“네. 한 10개월 정도 정신이 없을 것 같네요. 틈나는 대로 드라마 제작이나 음반 제작 상황을 검토하겠습니다. 그리고 2년 안에 영화 플랫폼을 로큐에서 런칭할 겁니다. 그 전에 펀딩 앱을 먼저 시작할 것이고요.”
구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지성 팀장에게 보고를 받고 적잖이 놀랐어요. 모르긴 몰라도 영화 플랫폼이 시작되면 로큐가 한 단계 더 도약할 것 같습니다. 음반 유통도 병행해야겠지요.”
“예. 그쪽에 신경 좀 써주세요.”
“그래야죠.”
“제가 말씀드릴 건 이게 전부입니다. 경영에 관한 한 구 대표님이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니, 저는 제작 관련해서만 업무를 보겠습니다.”
“저야 좋지요. 대주주께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면 저만 힘들 거 아닙니까?”
“하하하하.”
다들 웃으며 건배를 했다.
구 대표가 농담하는 걸 보니 이젠 남은 감정은 없다.
그렇게 새로 시작한 회사 정리를 마무리하고 난 감독으로 돌아갔다. 때는 어느덧 날이 추워지는 11월 말이었다.
작년에 아비도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 * *
신작 ‘이동원’의 시나리오를 썼다.
상당히 공을 들였다. 아이디어 개발만 두 달이나 했다.
많은 우려를 하고 시작했는데, 상당히 잘 나왔다.
걱정했던 부분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의도적으로 판타지 모험 영화를 만들었다는 느낌을 부드럽게 녹였다. 감독이 전하는 현대식 우화이자, 할머니가 손자에게 옛날 옛적 전래 동화이야기를 하듯.
첫 장면은 40대 주인공이 중학생 아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빠가 아들에게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를 해주는 느낌으로.
이야기는 젊은 주인공이 아버지 묘소로 가는 것으로 이어지고, 할머니에게 비밀을 듣는 장면으로 나아간다. 아빠의 이야기를 듣는 중학생 아들은 ‘에이, 지구가 두 개라는 게 말이 돼?’ 하면서도 아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몇 가지 설정을 달리했다.
구출하는 인물이 아버지와 아내가 아닌, 아버지와 어린 딸로. 영화 정서는 따뜻하게 변했다. 가족애를 강조한 덕분이었다. 두 동원의 교감과 우정을 끈끈하게 녹였고, 제2 동원이 죽는 마지막 장면에선 제법 감동도 있었다.
시나리오를 뽑은 뒤 분석을 시도했다.
영상화 구현은 하지 못했다.
코어와 내 뇌가 합일화되고 있는지 코어의 능력을 평소에도 조금은 쓸 수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코어를 발동하면 이전에 그냥 분석할 때보다는 분석이 정밀한 편이었다.
예상과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다.
난 좀비와 액션 쪽에서 흥행성이 있다고 봤는데.
코어는 가족애와 우화 판타지가 큰 흥행 요인이 된다는 분석 결과를 냈다.
달리 보면 흥행성에 부가 요인이 생겼고, 작품성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냥 좀비 영화였으면 주요 관객인 여성들이 보질 않았을 거라는 의미도 된다. 여성 다수가 보고, 영화를 잘 안 보던 중장년층까지 극장으로 유도한다면 흥행한다.
익숙하지 않은 두 지구와 좀비 설정도 무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코어가 우화를 추천한 덕분이다. 아빠가 들려주는 동화 같은 이야기. 아버지가 성장하는 아들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느낌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흥행 성적은 760.
총제작비는 105억가량.
정말 760만이 들지는 모르겠으나 600만 이상은 들 거라는 걸 확신했다. 코어가 아니라도 시나리오만으로 감이 잡힌다. 이건 영화인이라면 누가 봐도 눈에 들어오는 수치다.
바로 제작 준비에 들어갔다.
무려 10개월이나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 * *
전작 아비도 제작진을 다시 불렀다.
그간 다들 영화를 한 편씩 찍고 쉬던 중이었다. 입봉을 준비하는 일부 퍼스트만 빼고 나머진 거의 다 왔다. 거기에 블루스크린 전문 특수 촬영팀과 좀비 연기 및 연기 지도를 할 연극배우들도 다시 섭외했다.
승철이는 이번에 조감독으로 승진했다. 내가 로즈 엔터 일로 바쁠 때 다른 저예산 영화에서 조감독을 했기에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일주일 만에 주요 스태프들 모두 구성했다.
이어 배우 캐스팅을 시작했는데, 주연은 한동원이다.
처음부터 그를 주연으로 낙점하고 구상한 영화다.
서연도 카메오로 출연한다. 죽은 제2 동원의 아내이자, 주인공의 중학교 동창 역할로. 주인공의 지구에 온 어린 딸이 그녀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달려가 안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을 보고 울었다는 여성 스태프들이 있어서 일부러 서연을 캐스팅했다.
사전 프리 작업부터 먼저 했다.
컴퓨터 그래픽 업체를 선정하고 미팅을 했다. 홍콩 총기 대여 업체에 총기를 대여하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CG 작업 및 블루스크린 촬영을 하려면 정밀한 스토리보드가 필요했다. 해서 콘티팀과 미리 계약을 해서 촬영 방법 등을 논의했다. 경찰서와 구청 등에 촬영 지원 및 협조 공문도 보내고, 배급사와 투자사에 각본과 투자제안서도 보내고.
시나리오가 생각보다 좋았던 모양이다.
그냥 좀비물이었다면 투자도, 협조 요청도 쉽지 않았을 텐데 바로 해결이 되었다. 좀비 액션과 묘하게 어울리는 가족애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10여 일 만에 투자가 끝났다.
CG 엔터가 30억 투자. CT가 25억 투자. 로큐 엔터가 20억 투자. 신성영화사와 벤처캐피털 등이 나머지 투자를 결정했다.
개봉관 수는 무려 1,100개. 개봉시기는 추석 전.
12월에서 2월 초까지 프리. 2월 초에서 4월 말까지 촬영. 4월 말에서 8월 말까지 후반 작업 및 컴퓨터 그래픽.
프리와 포스트가 대단히 빠듯했다.
프리 들어간 지 3주 만에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스토리보드를 짤 때는 하루에 4시간을 자면서 강행군을 했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 워낙 많다 보니.
그렇다고 정신없이 일한 건 아니었다. 프리가 짧은 만큼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기에 평소에 안 하던 코어까지 써 가며 촬영 콘티에 문제는 없는지 분석하며 진행했다. 그 콘티로 CG팀이 사전에 프로그램 작업을 해놔야 후반 작업 기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2월 24일이 되었을 때.
나도 바쁘고, 서연도 사극 드라마 출연으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시간을 냈다. 안 그래도 근 한 달간 못 보고 지냈는데, 크리스마스이브까지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 * *
미리 예약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했다. 어느새 술이 는 서연과 함께 와인을 두 병이나 마셨다. 그 바람에 서연은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난 기분 좋게 취했다.
커플 털모자를 쓰고 연인들만 가득한 압구정동을 걸었다. 처음엔 커플룩이 창피했는데, 다들 그러고 다니니 나중엔 적응이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여자에겐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임을 거리에서 체감했다. 남친의 팔짱을 낀 모든 여자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으니.
사람들 매너도 참 좋았다.
서연을 알아본 사람들이 사진을 찍자고 할 법도 한데 날이 날이니만큼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온 사람이 죄다 커플이라서 그런 것도 있고.
캐럴이 울리는 커피점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반짝이는 트리.
거리에는 온통 빛의 물결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이런 것이었나 싶다.
“오빠 부모님께선 나 안 보고 싶어 하셔?”
“보고 싶어하시지. 부모님이 나 한번 보자고 하셨구나?”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자의 어법을 알아들으니 반가워한다.
“당장 만나뵙자는 건 아니야. 오빠 만나는 걸 아시니까, 부모님이 슬쩍 말을 꺼내시더라. 난 그냥 웃고 넘겼어.”
아직 결혼 이야기가 나올 나이는 아니다.
그저 식사 한번 하자는 말씀이겠지.
여기서 결혼은 나중에 하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된다. 여자친구는 백이면 백 서운해한다. 서연이 연예인이라 결혼을 일찍 하면 인기에 지장이 있더라도 그렇다.
“우리 당장 결혼할까?”
내 말에 서연이 웃었다.
“난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그냥 하지 뭐. 다른 남자가 채 가기 전에.”
서연이 귀엽게 눈을 흘겼다.
내가 잘도 받아넘긴다는 표정이다. 그녀도 나도 결혼은 아직 이르다는 건 안다. 말로나마 내가 이렇게 받아주니 서연의 표정도 한결 밝아지고.
서연의 손이 슬쩍 내 손을 잡았다.
나도 서연의 손을 잡고.
마침 듣기 좋은 옛날 캐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나왔다. 중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오빠.”
“응.”
서연이 물끄러미 내 눈을 보았다.
날 보는 서연의 눈동자를 읽었다.
뭘 의미하는지 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가자.”
“어디?”
“어디든 가자고.”
서연의 손을 잡고 커피점에서 나갔다.
서연도 나도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렇게 둘이서 커플로 가득한 거리를 걸었다.
아무래도 오늘.
사랑이 완성될 것 같다.
* * *
프리에 들어간 지 2달이 지났을 때.
마침내 총기가 들어왔다.
들어온 총기는 경찰서에 신고하고 맡겼다. 촬영 중에도 촬영 회차가 끝나면 신고하고 경찰서 내 총기 보관소에 총기들을 보관해야 했다. 공포탄도 마찬가지.
속속 촬영 준비 마무리에 들어가자 내가 일일이 점검했다. 제작실장에게 맡겨도 되지만, 내가 코어를 통해 확인하면 더 정확하기 때문이었다. 분석을 해보고 오류나 빠트린 점이 없으면 최종 점검으로 넘겼다.
그리하여 2월 8일에 프리를 종료했다.
며칠 후 고사를 지내고 제작 발표회도 했다.
촬영 56회 차. 촬영기간 75일. 후반 작업 125일
2월 15일에 드디어 영화 ‘이동원’이 크랭크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