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감독으로서 첫 촬영
신들린 해결사의 제작사 대표와 감독의 얼굴.
당장 나가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으나.
말이나 한번 들어보자는 두 분의 표정이다.
“이유가 뭐지요?”
“웹툰의 인기 포인트를 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촬영에 들어갔다면 제가 감히 간섭할 일이 아니지만, 아직 촬영 전이라 수정할 수 있기에 왔습니다.”
“이봐요, 최 작가. 이미 스토리보드 다 왔고, 다음 달이면 촬영 들어갑니다. 진행 다 됐는데 고치란 말이에요? 투자사에서도 오케이가 난 거고, 우리 스태프들도 재밌다고 한 작품입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연출부 막내를 불러 주세요.”
“막내?”
날 물끄러미 보던 감독이 일어났다.
“지욱아, 여기 좀 와 봐.”
“네!”
20대 중반인 연출부원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지욱이란 친구에게 말했다.
“최신성 작가라고 합니다.”
“아, 예. 말씀 들어봤어요.”
“신들린 해결사 시나리오를 읽다가 뭔가 좀 이상한 점을 발견해서 찾아오게 되었는데요.”
감독과 대표가 연출부 막내의 표정을 살폈다.
난 봤다. 그럴 줄 알았다는 지욱이란 친구의 표정.
“지금 시나리오로 영화 찍으면 대박 난다고 보세요?”
“그게 저…….”
연출부 막내가 감독의 눈치를 보았다.
감독이 말했다.
“신경 안 쓸 테니 말해 봐.”
무서운 말이다.
회사 부장님이 저런 말을 해서 솔직하게 문제점을 지적하면 찍힌다.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연출부 막내는 판단은 감독 몫이라고 본 것 같다.
“솔직히 원작을 좀 망친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시나리오를 본 건 6고 때인데, 원작을 제대로 못 살린 것 같아서 초고를 봤더니 초고가 훨씬 나았어요.”
“초고가 나았다고?”
“예. 초고에는 원작의 특징과 재미를 그대로 그렸는데, 재고가 늘어날수록 원작의 특별한 걸 못 살리고 뻔한 영화 전개 방식으로 변했더라고요. 그냥 제 느낌엔 웹툰 원작이 아니라 그냥 일반 영화 같았어요.”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초고는 훌륭했는데 감독이 영화적 특성을 부여하고 살리려다 보니 원작 느낌이 빠졌던 것이다.
대표가 물었다.
“그래서 이대로 찍으면 안 될 것 같아?”
“어느 정도 흥행은 할 것 같은데, 원작 팬들에게 욕을 엄청 먹을 것 같아요. 웹툰 주인공의 개성이 우리 영화에선 좀 죽었어요. 그것만 살려도 2, 300만은 더 들 거 같기도 하고.”
2, 300만이 아니다.
이대로 찍어도 손익분기점은 훌쩍 넘는다. 그런데 한두 달 더 고생하면 본전치기에서 2배 수익으로 바뀐다.
대표가 다시 물었다.
“다른 친구들도 생각이 같아?”
“네. 팀장님들은 시나리오만 보셨지만, 저나 형들은 웹툰도 다 봤어요. 저만 이상한가 싶어서 물어봤더니, 다들 반응이 같았어요.”
“그걸 왜 이제 얘기를 해.”
“팀장님이나 조감독님은 작품이 좋다고만 하고, 형들도 말을 안 하는데 제가 어떻게 말씀을 드려요. 막내들 말 한마디 때문에 진행을 원점으로 돌릴 수도 없잖아요.”
감독의 막강한 권위 때문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도 스태프들이 따라온 경우다. 사회 조직이라는 게 이런 거지 뭐.
대표가 내게 물었다.
“그러면 최 작가는 혹시 각색 때문에 찾아오신 건지?”
“그렇습니다.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각색을 해서 다시 진행해야 합니다.”
감독이 나섰다.
“다들 시나리오 재밌다고 하는데, 사소한 문제 몇 가지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는 없어요. 각색하는 데 최소 한 달이 걸리고, 그걸로 스토리보드 짜고 그 예산으로 다시 프리 작업을 하면 석 달이나 걸려요. 이미 개봉 날짜 정해졌고, 스태프들은 같은 계약금 받고 일을 이중으로 하는 겁니다.”
맞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그 점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한데 제가 각색을 한다면 1주일 안에 끝날 것이고 프리도 50일 안에 끝날 겁니다. 주요 배우들은 그대로 가고 로케이션만 달라질 뿐이니까요. 이미 작성한 문서에 그 점만 바꾸면 됩니다.”
대표가 감독을 보자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캐릭터와 사건 몇 부분만 달라질 것이기에 기존에 작성한 촬영 준비 문서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프리를 새로 하는 게 아니라, 문서 내용만 바꿀 뿐이다.
“다음 달 촬영이면 사실상 한 달만 추가되는 셈입니다. 스태프들 일이 늘어난 건 수당으로 지급하시면 될 테고요.”
“그런데 각색도 그렇고, 수당도 그렇고. 예산이 추가됩니다. 개봉 날짜는 어떻게 하고요.”
“제가 알아보니 이 작품 포함하여 CG와 로테는 내년 여름 성수기까지만 배정된 상태이고, 그 직후는 유동적입니다. 그러니 추석 개봉을 목표로 잡고 진행하시면 됩니다. 50일 연기되면 딱 그때쯤입니다.”
“각색료는 얼마로 생각하세요?”
“제가 각색을 하면 각색료는 받지 않겠습니다.”
“왜요?”
“대신 흥행 수익 배분 1%를 주십시오.”
감독과 대표가 서로 보았다.
내 제안이 어째 묘했기 때문이다.
각색하지 않으면 영화 대박이 어렵고, 내가 각색하면 1%로도 각색료를 충분히 챙긴다는 뉘앙스.
대표가 물었다.
“1%를 얼마라고 추정하는데 그래요?”
계산하는 척하다가 입을 뗐다.
“유명 작가 계약금의 두 배로 봅니다.”
“…….”
감독과 대표가 내심 놀란 표정을 보였다.
유명 작가의 각본 계약금은 5천만 원이다.
그 두 배가 1억이면 제작사 순수익이 100억.
일부러 1억이라 하지 않았다. 흥행 수익이 정확히 얼마일지는 짐작하지 못하도록. 나도 정확히는 모르니.
내친김에 몰아붙였다.
“이대로 촬영하면 500만 내외입니다. 흥행은 하죠. 그러나 각색을 하고 찍으면 훨씬 더 들어옵니다. 그 500만에다 300만에서 500만이 추가로 왔다갔다하는 일입니다. 한 달만 더 고생을 한다면요.”
두 사람이 할 말을 잃었다.
그제야 본인들 영화가 천만 관객이 들 수도 있음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표정.
당연하다. 영화 흥행이라는 게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는 있어도 확신하기는 어렵다.
대표가 다시 말했다.
“최 작가 실력이야 요새 유명하다는 건 알아요. 단지 자신감 때문은 아닌 것 같고. 무슨 근거로 그런 장담을 합니까?”
“그 웹툰은 하나의 큰 줄거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웹툰에 나온 에피소드를 몇 개 섞어서 영화로 재구성한 것이 이 책입니다. 이 영화는 섞는 방식이 아니라, 웹툰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세 개 정도의 에피소드에 집중해야 합니다.”
“세 개 에피소드라면?”
“첫 번째. 관객 몰입을 위한 짧은 사건. 두 번째. 인물과 배경 소개를 위한 사건. 세 번째. 영화 줄거리가 되는 굵직한 큰 사건. 웹툰의 주제가 반영되었고, 단일 사건으로 가장 분량이 길었던 사이비 종교 집단 추적 사건이 그겁니다.”
웹툰은 미치광이 천재 해결사 이야기다.
엄청 웃기고 기발하며 감동도 있는.
그런데, 지금 시나리오는 일종의 섞어찌개다. 여러 에피소드에서 나온 재미있는 장면을 주로 가져왔고, 영화 줄거리가 되는 사건도 영화에서 흔히 보는 킬러와 주인공의 대결이다. 영화적으로 쓸 수 있는 사건을 찾다 보니 그 에피소드를 선택했던 거다. 웹툰의 인기와 주제, 재미 포인트는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따라서 웹툰 팬들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웃겼으며, 가장 감동 받았던 에피소드를 써야 합니다. 섞지 않고 단일 에피소드로 가야 일반 관객도 직관적으로 영화를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그 웹툰 누적 조회수가 8억이고, 회당 평균 조회수는 300만이 넘습니다. 그들이 열광하면 적어도 300만은 잡고 가는 겁니다.”
50대인 감독과 대표는 내 말을 다 믿지는 않을 것이다.
웹툰이 왜 재미있는지도 잘 모르는 분들이다.
그 이유는 알 만했다.
“혹시 작가가 기획해서 초고를 쓴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친한 작가가 해 보자고 해서 시작한 겁니다. 써온 게 재미있기에 판권 사서 진행한 거고요.”
“그 작가가 쓴 초고가 아마 가장 나을 겁니다.”
“그래요?”
감독이 물었다.
“아까 각색을 하려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했죠?”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제가 감독으로 영화를 찍으려고 하는데, 배급이 어렵게 됐습니다. 그래서 불고염치하고, 도움도 드릴 겸 해서 왔습니다.”
“우리 작품 연기되면 최 작가 입봉작 개봉하시려고?”
“예.”
감독과 대표가 삐딱하게 날 보다가 슬그머니 웃었다.
감독이 말했다.
“최 작가, 참 귀여운 분이시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예측이 맞든 아니든 두 분으로서는 한 달 연기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감독과 대표도 이 영화가 500만은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영화가 더 잘된다면 욕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안 그래도 잘될 영화를 뽑고자 각색을 거듭했던 분들이다. 천만까지는 안 가더라도 작품이 더 잘 나오면 좋지 않겠는가. 제작이 연기되어 발생할 예산은 흥행 성적으로 정산해도 될 테고.
대표가 말했다.
“다들 모여서 의논을 좀 해야겠습니다. 50일쯤 더 고생을 해야 하니, 팀장들 말도 들어봐야죠.”
“예. 그럼 연락 주십시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감독이 불러 세웠다.
“혹시 천만 관객이 들 거라 보세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천만 관객이 드는 영화 소재는 따로 있다고 봅니다. 이 작품이 그렇습니다. 이 좋은 소재와 300만 웹툰 팬을 두고 500만에 그치면 안 되죠.”
“초고를 보내 드릴까요?”
“예. 각색을 한다면 초고로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알았어요.”
다시 인사를 하고 제작사를 나섰다.
대작 신들린 해결사가 한 달 개봉 연기되면 그 자리에 내 영화가 들어갈 수 있다. 물론 이 작품 스크린 수 1,000여 개가 반으로 나누어지고, 국내외 다른 영화가 그 반을 잡고 상영한다.
로즈 엔터에 돌아왔다.
메일에 신들린 해결사 초고가 와 있었다.
내가 각색할 가능성이 높으니 보내 준 거겠지.
그로부터 3일 후.
각색을 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 제작사에서 조감독이 와서 각색 계약서를 썼다.
내 조건대로 작가료는 없고 수익배분 1%로 명시했다.
진행비로 300만 원도 줬다.
그 사흘 동안 웹툰과 초고, 현재 책을 가지고 각색 준비는 이미 끝냈다. 캐릭터를 가장 우선했다. 그다음 사건 배치.
이틀간 구성과 장면을 꼼꼼하게 결정한 뒤.
코어를 발동한 채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장담을 한 터라 나는 보스다만큼 공을 들였다.
그렇게 3일에 걸쳐 시나리오 작업을 끝냈다.
딱히 코어가 아니라도 시간을 들이고 원작만 잘 살리면 대박이 될 작품이었다. 영상화를 구현하면 흥행 예측이 정확하게 나오겠지만 시력이 나빠질 것이기에 하지 않았다.
이젠 코어가 전달하는 직감과 내 생각과 경험을 조합하여 예측해야 했다. 정확한 흥행 수치는 몰라도, 천만 관객이 들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기존 천만 관객 영화와 비교해 보면 일반 영화 제작자라도 예측 가능하다.
교정을 끝내고 작품을 제작사에 보냈다.
바로 다음 날 저녁.
회사에서 퇴근하고 서연을 만나러 가던 때에.
그 제작사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최 작가님!
“예. 책은 읽어 보셨어요?”
-그럼요! 하하하하하!
웃음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재미는 있던가요?”
-말도 마세요. 난리가 났습니다. 스태프들이 어제만 해도 한 달 연기된 것 가지고 힘들다 어쩐다 말이 많더니 책을 보고 나선 쏙 들어갔어요. 작품이 정말 좋습니다. 진작에 최 작가님에게 맡길 걸 그랬어요.
“다행입니다.”
-최 작가가 써도 별 차이 없을 거라고 봤는데 작품이 이렇게 달라질 줄 몰랐네요. 언제 밥 한 끼 합시다.
“네. 연락 주세요.”
-앞으로 종종 연락하고 지냅시다.
“예.”
대표가 기분 좋아 보이니 나도 기분이 상쾌했다.
청춘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 나이 대 사람이 영화를 만드는 게 가장 좋다. 그런데 그 나이대는 아직 경험이 없다.
웹툰 원작도 마찬가지다. 그 웹툰 팬이 만드는 영화가 그 웹툰 원작 영화를 가장 잘 만든다.
내 경우가 그런 상황이었다.
웹툰을 재밌게 봤고 코어 덕분에 시나리오를 잘 쓸 수가 있었으니. 사실 핵심만 파악한다면 시나리오 작가 누구라도 잘 쓸 수 있는 원작이었다. 한번 어그러진 각색고를 또 각색하려니 잘될 턱이 있나.
며칠 뒤 촬영감독이 찾아와서 작품 계약을 했다.
저예산인 만큼 A급 촬영감독은 쓰지 못하고, 이제 아비도가 두 번째 작품인 촬영감독이다. 스승이 국경의 끝을 했던 촬영감독이라 실력은 안 봐도 안다. 나이와 경력이 부족해서 아직 A급이 아닐 뿐.
퇴근 무렵에는 조명기사가 와서 계약을 했다.
조명기사는 아비도가 네 번째 작품. 전작 모두 작가주의 영화를 했던 조명기사다. 제작실장 추천으로 온 사람.
* * *
아비도 프리가 한창일 때.
로즈 엔터에 기막힌 미인이 찾아왔다.
최근 들어온 남자 직원들과 연출부 승철이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섹시한 미녀였다. 조감독도 저도 모르게 눈이 돌아갈 정도로.
나와 지성이는 그저 물끄러미 보고 있었고.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오디션 보러 온 정미라라고 해요.”
“아, 예.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지성이가 정미라라는 여자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현재 신인 배우 오디션을 보고 있기는 했다. 정해진 기한 없이 신인이 찾아오면 지성이가 1차 면접을 하고, 고 본부장님이 합격을 판가름한다.
회의실 밖에서 정미라를 보았다.
상당한 미인인데다 눈웃음을 치며 지성이를 홀리고 있었다.
그런데 미녀를 많이 봐와서 그런지 지성이는 눈도 깜짝 안 했다. 그 때문에 당황한 건 정미라라는 여자였다.
나만큼이나 눈치가 빠른 놈이 지성이다.
신인 연기자치고는 어째 느낌이 이상했던 거지.
내가 봐도 딱 룸살롱 에이스 같다.
룸살롱 에이스도 지적이며 우아한 스타일이 있겠으나, 정미라는 예쁘고 섹시할 뿐이다. 성형한 티도 좀 나고.
저런 여자가 왜 왔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봤다.
퍼뜩 생각나는 이름이 있었다.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리라 보았다. 그 수가 저열해서 그렇지.
날 유혹해서 몰카를 찍으려는 걸까.
아니면 미인계로 하이니스 동영상을 빼내려는 걸까.
지성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강성철이 보낸 여자 같다. 넘어가지 마.]
지성이가 바로 답장을 보냈다.
[여기 왜 온 거지?]
[너 아니면 나 유혹해서 몰카 찍으려고.]
[어이가 없네. ㅋ]
잠시 뒤 여자와 지성이가 나왔다.
지성인 웃고 있고, 정미라는 난감한 표정.
당연히 탈락이니까.
“저, 배우 되고 싶어요. 기회 좀 주세요.”
“연기의 기본이라도 좀 배우고 오셨으면 합니다. 저흰 예쁜 여자를 뽑는 게 아니라, 배우를 뽑고 있어요.”
지성이가 단호하게 말을 한 뒤 사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축객령.
여자가 날 힐끔 보며 나가지 않자 지성이 녀석이 슬쩍 정미라의 등을 밀었다. 그러곤 쾅. 문을 닫았다.
동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기 자리로 갔다.
착하고 순수하게 생긴 사람을 써도 안 될 판에 저런 여자를 보내서 어쩌자는 건지. 내가 불법 영업 신고를 할까 봐 불안하긴 했겠지.
퇴근한 후 서연을 만나러 갔다.
곧 서연이 드라마 촬영을 시작하면 만날 시간이 없는지라 촬영을 이틀 앞둔 오늘 간만에 데이트할 참이었다.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 스케줄을 간 서연을 기다릴 때였다.
뒤에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새빨간 미니 원피스를 입은 정미라가 내 앞에 나타나 방긋 웃었다.
“혹시 로즈 엔터 대표님 아니세요?”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저 상담할 게 있는데 앉아도 되죠?”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앉는 여자다.
날 기다리고 있었나.
커피를 들고 바로 일어났다.
“선약이 있습니다.”
“저기요. 최 대표님!”
그냥 커피점에서 나왔다.
정미라가 다짜고짜 따라오더니 내 앞을 막았다.
“저, 상담 겸 술 한잔 사주세요. 제가 속상한 일이 있어서.”
“배우가 되고 싶으시면 차근차근 연기 연습을 하시고…”
갑자기 정미라가 내게 바짝 붙었다.
그러면서 눈웃음을 친다.
“저 배우 되고 싶어요. 어떻게 안 될까요?”
“다른 회사를 찾아보세요.”
돌아나가려 하자 또 막았다.
“저기 대표님만 좋으시면 오늘 밤 저랑……”
그때 뒤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뭐하시는 거죠?”
나와 정미라가 동시에 뒤를 보았다.
서연이 웃는 얼굴로 정미라를 보고 있었다.
일순 두 여자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서연은 웃고 있고 정미라는 콧방귀를 뀌고.
서연이는 정말 화가 나면 무표정해진다.
그러나 어이없는 상황을 보면 미소를 짓는다.
그만큼 정미라의 행동이 황당했던 거다.
서연이 오해한 건 아니겠지.
“서연아 내가…”
“오빠는 기다려 봐. 이봐요, 대화 좀 할까요?”
“그쪽과는 볼일 없거든요.”
정미라가 갑자기 내 팔짱을 꼈다.
그때 서연이 다가오더니 정미라의 팔을 잡고는 꺾어 버렸다.
“아악! 왜 이래요!”
“대화 좀 하자니까요. 이리 와요.”
“놔요! 어머머! 이 여자 왜 이래!”
서연이 정미라를 질질 끌고 갔다.
키는 정미라가 더 큰데 서연의 힘을 못 당한다.
서연은 골목으로 정미라를 끌고 가더니 사라졌다.
가 보지는 않았다. 서연의 쌍욕을 들을까 봐.
“까아악! 미쳤어, 이 여자! 아아아! 뭐 하는 짓이야!”
싸움 잘하는 리즈와 미주도 꼼짝 못 하는 사람이 서연이다.
정미라 저 여자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잠시 뒤 서연이 나오더니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오빠, 가. 오늘 곱창 먹으러 가자.”
“살찔 텐데?”
“괜찮아. 요즘 운동 많이 해.”
서연과 함께 내 차로 걸었다.
차에 올라 단골집으로 향했다.
골목을 지나치며 사이드미러를 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정미라가 봉두난발이 된 꼴로 골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립스틱이 뺨 주변으로 번지고, 눈두덩은 판다처럼 시커멓다. 속눈썹은 너덜너덜.
“저 여자 때렸어?”
“아니. 머리랑 화장 다시 해 줬어. 본인 손으로.”
나도 서연이도 웃었다.
서연이가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전에 말한 강성철이 보낸 여자야.”
“참나, 상대가 될 여자를 보내던가.”
“대단한 자신감.”
서연이 날 흘겨보다가 피식 웃었다.
“정효주 선배도 안 되는데, 저 여자 정도로 되겠어?”
서연이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정효주와 마주쳤던 그날 서연이 확신했던 모양이다.
서연에 대한 내 마음을.
서연이 말했다.
“나 촬영할 때 저 여자 나타나면 말해. 리즈나 미주가 나갈 테니까.”
“괜찮아요. 그런 걱정 붙들어 매시고요.”
“내가 안 괜찮거든요. 남자들 다 똑같거든요.”
“다 똑같진 않거든요.”
“술 먹으면 다 똑같거든요.”
“질투하는구나?”
“아니. 아무 생각 없고 예쁘기만 한 여자는 오빠가 안 좋아하는 거 알거든. 정효주 선배처럼 우아하고 지적인 여자면 몰라도.”
말에 굵직한 뼈가 있다.
그래서 입을 닫았다.
오히려 미안해하는 쪽은 서연이었다.
“나, 오빠 믿어.”
“응.”
곱창집에 도착해서 마음껏 곱창을 먹었다.
나와 만나다 보니 서연의 주량도 조금씩 늘었다.
이날 데이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단출했다.
멀리 가면 다음 날 일에 지장이 있기도 해서.
* * *
며칠 후 정미라가 또 나타났다.
그때 강성철 사장에게 경고했다.
다시 수작 부리면 신고 들어간다고.
내 입을 막으려고 폭행을 했다가는 강 사장 사업장 영업 못한다. 그래서 실익을 되는 보복을 찾다 보니 몰카나 하이니스 동영상을 입수하려고 했던 거다.
그랬더니 정미라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법 영업 신고는 안 했다. 강성철이 수틀리면 폭력을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업정지가 되면 서연을 납치해서 협박할 수도 있고.
또 무슨 수를 쓴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강성철은 사업가다. 실익이 없는 일은 안 할 사람이다. 정미라가 그냥 왔겠나. 룸살롱 매상에 준하는 돈을 받고 왔을 거다. 헛짓하면 본인 돈만 쓰는 거지.
프리 프로덕션이 두 달 조금 안 되었을 때.
드디어 투자와 배급이 결정되었다.
배급은 로테 엔터테인먼트. 개봉은 6월 말.
영화 신들린 해결사 개봉이 뒤로 밀리고, 그 자리에 내 영화가 들어간 셈이었다. 내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는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로 블록버스터는 아니었다.
로즈 엔터 사무실에는 스태프들이 분주히 촬영 준비를 했다. 스태프도 전원 구성했고, 후반 작업 계약과 진행 방향 회의도 이어졌다. 내가 신성영화사에서 하던 일은 제작실장이 다 했다. 난 감독으로서 회의를 주도하고, 각 팀에서 나온 안건에 대한 선택과 결정을 할 뿐이었다.
영화 제작에 필요한 사안이 약 1,000개가 있다면.
그 1,000개 모두 내 허락이 떨어져야 통과되었다.
자질구레한 소품 하나부터 로케이션까지 전부.
스토리보드 작성을 위해 촬영감독, 조명기사와 하루에도 수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 이견을 조율해 나갔다. 내가 모르는 점은 두 사람이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제작실장일 때와 달리 배우들도 신경 써야 했다.
주연배우를 만나 각 씬에 대한 연기를 설명하고, 감정선에 대한 디렉팅을 했다. 조연 배우들도 마찬가지. 그걸 토대로 주요 장면의 연기 리허설도 했다.
그러다 촬영지 확인차 지방으로 갔다.
로케이션만 확정되면 이 영화 제작의 3대 능선을 넘는다.
강원도에 있는 촬영 예정지에 왔을 때.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다.
예전에 탄광이 있었던 작은 읍내였다.
한때는 번성했으나 지금은 광산업체의 흉물스러운 폐허가 남아 있는 곳. 근처 작은 마을은 보통 시골이다. 한데 읍내는 전체 분위기가 어째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읍내 상점의 반은 문을 닫았고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다.
황량하면서도 스산한 적막감이 도는 2차선 도로.
이 동네 자체가 하나의 세트였다.
일부러 만들기도 어려운 자연의 세트.
읍내를 그냥 찍어도 영화 분위기의 반은 먹고 들어간다.
조감독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동네를 걸었다.
긴 2차선 도로 양옆으로 읍내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문을 닫아서 그렇지 있을 건 정말 다 있다. 상당수 주민이 인근 도시로 이주한 터라 빈집이 많고, 영업하지 않는 식당과 상점도 많았다.
산이 마을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서 답답한 느낌도 준다.
조감독에게 말했다.
“빈 상점이 많아서 미술팀이 고생 좀 하겠는데요.”
“용의자 7인의 상점은 내부까지 세트로 조성하고, 화면에 걸리는 상점은 겉만 꾸미면 됩니다. 간판이야 뭐, 먼지만 닦아내면 되고요.”
읍내를 지나 근처 마을로 갔다.
60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가운데 큰 나무가 있고, 마을 회관도 있다.
“이장님과 이야기는 됐어요?”
“네. 처음엔 영화 내용 때문에 좀 어려웠는데, 이장님에게 마을이 벌 돈을 말씀드리니 바로 달라지시더라고요. 두 달간 2억 넘게 벌게 되니까요.”
“예. 이장님께 인사드리러 가죠.”
스태프와 배우 포함 75명이 60일 숙박한다. 한 명당 3만 원으로 잡으면 1억 4천만 원이다. 밥은 어르신들이 한 끼에 4천 원에 해 주기로 했는데 식대가 5천4백만 원이다.
마을 주민 60가구가 두 달에 2억을 벌게 되는 셈이다.
거기에 75명이 두 달을 머물게 되니 읍내 술집과 식당, 슈퍼마켓 장사로 버는 돈도 있고. 그 액수가 식비에 맞먹는다. 출퇴근이 없으니 술을 오죽 먹겠나.
마을 회관에 들러 스태프 숙소로 적당한지 확인했다.
2층이라 남자는 1층과 민박에서 자고, 여자는 2층에서 자면 된다. 배우들은 읍내 모텔에서 자면 되고.
40대 후반의 젊은 이장님이 웃으며 우릴 반겼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이장입니다.”
“예. 촬영 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부탁 드려야죠. 가구마다 300만 원씩 벌게 되었는데요.”
이장님이 안내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마을 회의를 해서 가구마다 돌아가면서 밥을 하기로 했지요. 식사는 회관에서 매 끼니 드시면 되고요. 회관에 다 주무실 수가 없으니 30가구는 집을 비워두기로 했습니다. 민박을 해 주십사 하고요.”
“예. 배우들도 민박이 나을 겁니다.”
탄광촌 광부 숙소 폐허를 보았다.
벽돌과 슬레이트로 이뤄진 건물 형태다.
“저기는 따로 촬영 허가를 받아야 합니까?”
“관리하는 회사도 없는데요, 뭐.”
저 광부 숙소 폐허에서 살인 장면을 찍어야겠다.
책상에서 상상한 장면보다 나은 장면이 현장에 있다면 그걸로 간다. 마을 저편에 작은 강도 하나 있는데, 저 강에서 시신이 둥둥 떠내려오는 장면도 좋다.
숙소 폐허와 강, 마을 풍경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럼 촬영 때 다시 뵙겠습니다.”
“예. 그때 뵙지요.”
차를 타고 읍내로 다시 갔다.
문을 닫은 상점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상점 안을 보았다.
다른 상점과 달리 입구가 작고 내부는 긴 형태다.
큰 상점들 사이에 옴짝달싹 못 하게 껴 있는 느낌.
“이 상점을 빵집으로 하죠. 전반적으로 따뜻한 마을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갈수록 마을 분위기가 황량해지는 현재 읍내의 분위기로 갈 겁니다. 이 읍내 분위기로 후반을 먼저 찍어 놔야겠어요.”
“마지막 읍내 풍경을 먼저 찍는다는 말씀이시죠?”
“네. 상점들이 문을 닫은 현재 읍내를 먼저 담아 놓고, 평범한 읍내 풍경으로 미술팀이 바꾸는 사이에 형사 씬과 마을 씬, 정신과 상담 씬 찍을 겁니다. 미술팀 작업 끝나면 영화 초반부 읍내 장면을 찍고요.”
“알겠습니다.”
읍내가 실제로 주민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미술팀이 몇 달 전에 사전 작업을 하기는 어렵다. 촬영진이 마을에 도착한 뒤 현재 읍내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찍어 놓고, 그다음 미술팀이 일반적인 읍내로 바꾸어 놓는다.
로케이션 헌팅을 끝내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촬영지가 차로 3시간 거리라 촬영 기간 중 집에 다녀오기에도 좋다.
가장 중요한 촬영지 섭외까지 끝나자 프리 프로덕션에 탄력이 붙었다. 촬영감독과 미술팀, 조명팀도 한 번은 촬영지에 다녀왔다. 하나같이 촬영지 느낌이 좋다는 반응이었다.
* * *
프리 프로덕션 두 달째.
스토리보드 작업에 들어갔다.
구경할 때와 직접 하는 건 천양지차였다.
씬과 쇼트 별로 하나하나 화면을 구성하자니 몸이 힘들었다. 내 의견을 촬영감독과 조명기사가 대체로 받아주었고, 나도 두 분의 경험과 노하우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5일 만에 스토리보드 작업이 끝났다.
이 영화는 주인공인 형사가 관찰자인 만큼.
정적인 화면이 상당히 많았다.
주인공이 주민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장면.
관객이 보기에는 형사가 그저 사건을 추리하거나, 동네 주민을 의심하는 듯한 얼굴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처를 농락한 동네 남자들을 보는 표정이며, 감정 없는 얼굴로 극도의 분노를 표현한다. 영화를 다시 봐야 보이는 내면 연기다.
스토리보드까지 끝나자 프리는 곧장 최종 점검까지 내달렸다. 보험이나, 영진위 지원, 협찬 등등을 안 하니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작품에 애착 아닌 애착을 두자 예술성을 부여하고 싶은 욕심이 자꾸만 생겼다. 작가주의 풍 영화에서 정말 작가주의 영화가 될 판이었다.
어떻게 하면 인간 본성에 대한 은유를 기막힌 셔레이드로 표현해 볼까. 상징적인 소품은 뭐가 있을까.
영화의 톤을 깨지 않는 선에서 굴리고 또 굴렸다.
제작실장으로서 내 영화 마인드는 비즈니스였다.
감독인 지금은 영화의 예술성이 더 중요했다.
물론 이 작품에 한해서.
감독이 칭찬받는 영화는 두 가지다.
흥행이 되었거나, 작품성이 높거나.
이왕 작가주의 풍을 했으니 작품성을 노려보는 거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영화에 집중하는 동안.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서연과 함께하지 못했다.
나는 시간이 되는데 서연은 드라마 촬영 중이라서.
별수 없이 내년을 기약했다.
새해를 맞이하고 20일 후 마침내 촬영이 시작되었다.
스태프 46명과 배우 29명이 촬영지로 향했다.
감독으로서 설레고 긴장되는 첫걸음이었다.
* * *
마을 회관에 스태프들이 짐을 풀고, 배우들은 마을 주민이 마련해준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1회 차는 아직 미술을 시작하지 않은 읍내를 찍을 예정이었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황량하고 음산한 읍내 풍경이다.
미술팀과 소품팀이 분주히 촬영 준비를 했다.
촬영팀과 조명팀도 세팅을 시작했다.
난 연출 브레이크다운 시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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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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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씬 97. (약 1시간 소요.)
장소와 시간 : 적막한 읍내 길. 낮.
등장인물 : 없음.
소품 : 신문지. 뭉쳐진 먼지.
씬 내용 : 사건이 모두 끝난 뒤 적막한 읍내 풍경.
감독 주문 : 인적이 없는 황량함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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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씬 86. (약 4시간 소요.)
장소와 시간 : 적막한 읍내 길. 늦은 오후.
등장인물 : 약사. 세탁소 내외. 슈퍼 내외. (5명)
소품 : 의자 2개. 담배(세탁소 주인).
씬 내용 : 동네 남자 7인 중 4명이 죽은 상황. 살아남은 3명은 서로 의심하고 있으며, 이 중 세탁소와 슈퍼 남자는 서로 짜고 내일 약사를 죽일 생각임. 현재 마을 분위기가 너무도 두려운 두 남자의 아내. 남편의 팔을 잡아끈다.
감독 주문 : 카메라가 오갈 때 배우들 연기 숙지를 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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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씬 96. (약 1시간 소요)
장소와 시간 : 적막한 읍내 길. 밤 / 폭우.
등장인물 : 형사.
특수장비 : 살수차 1대.
특수효과 : 번개 라이팅.
음향효과 : 천둥. 후시 녹음.
주요의상 : 형사의 양복과 구두. 진흙이 묻을 것.
씬 내용 : 죽은 전처의 복수를 끝낸 남자의 분노와 허망함을 드러낸다. 관객은 이때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감지함.
감독 주문 : 카메라 앞에서 번개 치는 순간 형사의 복잡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나와야 함. 리허설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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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촬영 시트다.
촬영팀과 조명팀은 같은 시트에 카메라와 조명 등 장비가 추가로 적혀 있다. 분장팀과 음향팀도 대동소이하고.
하나둘 세팅이 끝났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첫 촬영갑니다!”
도로 저편에 큰 선풍기가 있었다. 소품팀과 미술팀, 연출부 사물 담당 세컨드가 낙엽과 신문지. 실타래처럼 뭉쳐진 먼지 따위를 들고 준비했다.
“조명 완료!”
조감독이 날 보았다.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슛 갑니다! 선풍기 트세요!”
선풍기가 돌아가고 도로로 신문지와 낙엽. 뭉쳐진 먼지가 하나둘 굴러갔다. 인위적인 느낌이 안 들도록 지켜보다가 내가 손짓을 보냈다.
“자, 레디!”
“스피드!”
“스타트!”
연출부 막내가 슬레이트를 댔다.
“씬 97에 1에 1!”
딱.
연출부 막내가 빠져나갔다.
난 묵묵히 모니터 화면을 보았다.
카메라 워킹이 없는 단조로운 장면이다.
약 30초 지났을 때.
“컷! 오케이.”
감독으로서 내 생애 첫 촬영이자, 오케이 컷이었다.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오다니.
“다음 씬 갑니다!”
바로 세팅이 해체되고 다음 씬 세팅을 시작했다.
조감독이 승철이에게 말했다.
“저기, 상가 2층 창문에서 구경하시는 분이 있어. 저쪽 미용실에는 입구에서 구경하시고. 가서 말씀 좀 드려. 구경은 하시되, 머리는 내밀지 마시라고.”
“예.”
승철이가 달려갔다.
카메라에 잡히진 않았지만 행여 촬영 중에 머리를 내밀고 구경할까 봐 미리 단속하는 거다.
다음 씬은 아직 살아 있는 동네 남자 3명이 불안한 기색으로 눈치를 살피는 장면이다. 서로 살인범이 아닐까 의심하는 눈초리. 이 3명이 다 죽을 폭풍우 전날 광경이다.
“살수차 왔어?”
사물담당 세컨드가 대답했다.
“예. 대기하고 있어요.”
도로 가운데에 레일을 깔았다. 꽤 긴 세팅 작업이었다.
카메라가 레일을 타고 약사와 세탁소 주인을 찍으면서 지나간다. 레일 끝까지 갔다가 카메라를 돌린 뒤 되돌아가며 도로 반대편 슈퍼 주인을 찍는다. 이렇게 찍은 장면을 세 배우의 감정과 시선에 따라 교차 편집한다.
장면만으로 긴장감을 주는 내 독창적인 쇼트다.
6번 왔다 갔다 하는데 처음엔 남자들만 찍고, 3번째부터는 두 남자의 아내가 각자의 연기로 두려움을 표현한다. 남편의 팔을 잡고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데에서 씬은 마무리.
“카메라 세팅 완료!”
“조명도 끝났습니다!”
“86씬 갑니다!”
남자 배우 3명이 대기했다. 아내 역 배우들도 상점 안에서 대기했다. 영화 중반까지만 해도 형 동생 하던 이들이 이제는 서로 범인으로 간주하며 노려보기만 한다.
“슛 갑니다. 배우분들 대기하세요.”
남자 배우들이 각자 위치에 섰다.
두 명은 의자를 꺼내 와 앉았고, 약사 역은 약국 문에 서서 두려운 기색으로 두 사람을 본다.
“레디!”
콜과 슬레이트가 이어지고.
배우들도 연기를 시작했다.
“액션!”
고요한 가운데 치열한 연기가 펼쳐졌다.
카메라가 여섯 번 왔다갔다하기에 한 번에 찍기는 어려운 씬이었다.
“컷! 두 번째부터 다시요!”
“두 번째부터 다시 갑니다!”
도로 저편에서 올라오는 장면부터 다시 찍는다.
난 일부러 첫 테이크 전에 리허설을 안 했다. 배우들이 나름대로 연구한 캐릭터와 연기를 먼저 보기 위함이었다.
그게 내게 영감을 주기도 하니까.
“컷! 네 번째부터 다시요!”
“네 번째부터 다시 갑니다!”
내 콜에 따라 카메라가 수도 없이 레일을 오르내렸다.
배우들 연기도 점점 세밀해져 갔다. 처음이 나은 것도 있고, NG 세 번 끝에 달라지는 부분도 있고.
난 고르기만 하면 된다.
이 장면만 3시간에 걸쳐 찍었다.
촬영 첫날 이후 바로 미술팀이 작업을 해야 해서 미술이 안 된 읍내를 오늘 다 찍어야 했다.
스크립터에게 말했다.
“약사 오케이 테이크가 어떤 거였지?”
“일곱 번째요.”
“약사 컷만 다 봅시다.”
현장 편집 기사가 약사를 찍은 테이크를 보여주었다.
연기는 대동소이하다. 세 번째를 킵하고 테이크를 더 간 뒤에 일곱 번째를 오케이했는데, 세 번째가 낫다.
“세 번째를 오케이로 해.”
“일곱 번째는 킵으로 해요?”
“응.”
형사 역인 김강헌이 대기하고 있었다.
장면마다 연기 디렉팅이 끝났기에 현장에서 더 요구할 건 없었다. 특히 이 장면은 전에 리허설할 때 공을 들였다.
카메라팀과 조명팀은 세팅을 하면서 방수 작업을 했다.
어느새 해도 져서 어둠이 깔렸다.
승철이를 불렀다.
“온수 준비했어?”
“예. 아주 뜨끈뜨끈합니다.”
“김강헌 씨 감기 걸리면 큰일 난다. 물 식지 않게 주의해.”
“예.”
양복을 입은 김강헌이 도로 저편에서 대기했다.
이미 찬물로 체온을 좀 낮춘 김강헌이다. 그냥 찬물을 맞으면 몸에서 김이 오르기 때문에.
다시 세팅이 끝났다는 콜이 들어왔다.
카메라 바로 뒤에 번개 효과를 내는 특수 조명이 있다.
번개가 칠 때 김강헌의 기괴한 얼굴을 잡는다.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았다.
“오늘 마지막 촬영입니다! 한 방에 끝내고 갑시다!”
“예!”
조감독이 외쳤다.
“강수!”
도로 위로 물이 세차게 뿌려졌다.
산속에서 벌어진 살인 사태 이후 형사가 혼자 비를 맞으며 걸어오는 씬이다. 흙투성이가 된 채. 관객은 형사가 왜 저런 모습으로 혼자 걷고 있는 거지? 하고 의문을 품을 장면.
“레디!”
“스피드!”
“스타트!”
“씬 96에 1에 1!”
“액션!”
형사가 어둠 저편에서 비척거리며 걸어왔다.
카메라 쪽으로 곧장 걸어와선 멈춘다.
그때 조명팀이 특수 조명을 때렸다.
번쩍.
그때 보이는 김강헌의 무표정한 얼굴.
어둠에 잠겼다가 다시 번개가 친다. 이번엔 좀 더 길게.
번쩍-
기이하게 일그러진 형사의 음울한 표정.
분노와 허망함. 복수를 끝낸 자의 얼굴이다.
관객은 그 이유를 전혀 모르고.
김강헌의 눈에선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이 흘러내리고.
고정된 카메라는 한동안 그런 김강헌을 담았다.
이때 콰르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터질 테고.
김강헌이 쓰러지듯 옆으로 빠져나갔다.
“컷! 오케이!”
짝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연기가 정말 좋았다.
표정에 온갖 내면의 번뇌가 다 담겼다.
김강헌이 한 방에 가려고 엄청 몰입한 모양이다.
그가 덜덜 떨며 제작진이 마련한 온수통에 들어갔다. NG가 거듭되었으면 저 온수통에 수도 없이 들락날락했을 터다.
조감독이 외쳤다.
“내일 오전 8시에 소집하고 9시에 촬영합니다!”
“수고 많았어요!”
난 눈인사를 보내오는 팀장들과 스태프들과 일일이 수고했다는 말을 하곤 스테이션에서 나왔다. 승철이가 축하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았다.
“축하해요. 감독 데뷔.”
“참 빨리도 한다.”
첫 촬영이 무난히 끝나서 안도했다.
내게 결정 장애가 생기는 건 아닐까. 또 다른 변수가 있는 건 아닐까.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 다행히 별일이 없었다.
숙소이자 촬영지이기도 한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회관으로 가는 스태프들의 눈이 커졌다.
밤 8시에 난데없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장님이 웃으며 우릴 반겼다.
“촬영 첫날 기념으로 돼지고기 좀 삶았어요. 넉넉하게 준비했으니 마음껏 드세요.”
“예. 고맙습니다, 이장님.”
조감독이 왔다.
“막걸리 좀 먹어도 되겠죠?”
“그럼요.”
“감독님이 술 드시랍니다!”
“예!”
스태프들이 잔칫상이 벌어진 멍석에 앉았다. 할머니들이 부지런히 삶은 돼지고기를 내왔다. 이미 한 잔 걸치신 할아버지들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대접에 따라 주시고.
나도 연출부와 함께 멍석에 앉아 막걸리부터 한잔했다.
주변에 양조장이 있는지 막걸리 맛이 기가 막혔다.
배추쌈에 삶은 고기를 한 점 올려 먹으니 긴장이 풀렸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들려왔다. 벌써 얼굴이 벌게진 스태프들도 있고. 내일 촬영에 지장은 좀 되겠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회차는 조정이 될 테고, 개봉 날짜가 넉넉하니 며칠 쉬어도 별로 표시가 안 난다.
난 오늘 좀 과음할 것 같았다. 스태프들이 한 잔씩 따라주고, 배우들과도 대작했다. 두 달간 동고동락할 사람들이니 이참에 서먹했던 것도 풀고.
김강헌이 주전자를 들고 내 잔에 따라주었다.
“이런 촬영장 분위기는 또 처음이네요.”
“두 달 동안 지내다 보면 싸움도 날 겁니다.”
“그거야 어딜 가나 마찬가지죠.”
* * *
다음 날 촬영은 오전 11시가 되어서 시작했다.
서울의 제작사에 소집해서 촬영하는 식이었다면 대형 사고다. 그러나 같은 장소에서 계속 찍기 때문에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도 스태프들 닦달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다들 숙취에 절은 얼굴로 촬영에 임했다.
이런 상황이 자기가 봐도 웃긴지 실실 웃는다.
술 먹고 늦게 일어나 아무 때나 촬영하는 듯했으니.
스태프들이 싸우는 이유는 촬영이 10시간 이상 이어지고,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별로 없으면 싸울 일도 없다.
오늘 못 찍으면 내일 찍고.
밤 씬이라고 해서 밤을 새우거나 하지도 않았다.
촬영이 좀 늦게 끝났을 때 나눠서 찍으면 되니까.
연출부만 조금 고생했다. 씬과 회차 조정을 하느라.
그래도 출퇴근 고민이 없으니 다들 얼굴이 밝았다.
늘어나는 건 술이었고.
이건 촬영을 온 건지, MT를 온 건지.
촬영이 좀 널널하고 현장이 밝다고 스태프나 배우가 일에 집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놀 때 놀더라도 촬영을 할 때는 알아서 긴장했다. 정신적인 여유가 있으면 집중도 더 잘 되는 법이다.
* * *
촬영 20일째.
현장으로 나가는 스태프들은 여전히 표정이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몸이 피곤할 일이 없었으니까.
대개 아침 8시에 시작해서 오후 5시쯤에 끝났다.
바로 회관으로 가서 밥 먹고 술 먹고 잤다. 금요일에는 주로 새벽까지 밤 촬영을 한 뒤 스태프와 배우들이 집에 갔다가 일요일 저녁에 현장으로 왔다.
직장 생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밤새 고스톱을 친 스태프들이 있기는 했지만 팀장들이 혼을 낸 뒤로는 그런 일도 없었다. 내가 잘 해주니 팀장님들도 알아서 단속을 하는 거였다.
사실 잘해준 게 아니라 내가 편하려고 그랬던 거다.
그래서였는지 역대 급 현장이라는 말이 영화판에 퍼져 나갔다. 현장에서 고성 한 번 나오지 않았고, 배우들은 연기를 잘 해줬으며, 피곤하면 감독이 먼저 촬영 끝내자고 했으니.
촬영 40일째.
처음으로 사고 친 스태프가 나왔다.
조명팀 퍼스트가 옆 도시에 원정 가서 술을 먹다가 팔뼈에 금이 갔다. 부팀장이라 그 스태프가 깁스를 하고 올 때까지 촬영이 지연되었다.
조명기사가 나 들으라고 역정을 냈다.
“사고도 희한하게 친다. 술 먹다가 왜 팔이 부러져?”
“죄송합니다.”
“나한테 하지 말고 감독님하고 스텝들한테!”
조명팀 부팀장이 내게 넙죽 허리를 숙이고 세팅을 끝낸 스태프들에게도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술을 좀 줄이겠습니다!”
“저 새끼. 안 먹는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하지.”
“하하하!”
웃음과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다.
금세 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촬영이 지연되었다고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난 김강헌을 비롯한 배우들과 연기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김강헌 씨는 본인만의 독특한 연기를 하는데, 다른 배우들은 상투적인 연기를 해서 조금 더 특징을 잡아 달라고 했다. 근래 조연급 배우들의 등장 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촬영을 하니 조금은 달랐다.
이 영화는 새로운 것이 꽤 많은데 연기까지 다른 영화와 조금은 달라졌다.
저녁이 되어 촬영 철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촬영이 없는 서연이 영진이와 함께 치킨을 잔뜩 사 가지고 왔다.
스태프들이 서연이 와준 것만으로도 감격했는데, 치킨을 보자 걸신들린 것처럼 치킨을 흡입했다. 치킨을 사 먹으려면 옆 도시로 차를 끌고 가야 해서, 짜장면과 함께 현재 스태프들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
서연이 내게 왔다.
“오빠. 동네 사람 다 됐네?”
“동네 사람?”
그러고 보니 나를 비롯해 스태프들 모두 이 동네에 원래 사는 사람들 같다. 아니, 이 동네에 들어와 눌러앉은 난민들 같다.
집에 안 간 스태프들은 본인이 빨래를 해야 하는데, 세탁을 잘 안 하는 스태프가 부지기수다. 머리를 안 감아 떡 진 스태프도 수두룩하다. 아니나다를까.
“야! 좀 씻고 다녀라! 거지새끼들도 아니고!”
“예! 왕초!”
스태프들이 거지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치킨을 뜯어 먹었다.
팀장의 한 마디에 개그로 응수하는 팀원들이다.
서연이 현장 분위기를 대번에 파악했다.
“현장 분위기 정말 좋구나.”
“응. 내가 잘해서.”
“칫. 오빠도 좀 먹어.”
“그래. 온다면 말이라도 하고 오지?”
서연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꾸며놓은 현장 말고, 실제 현장 모습을 불시에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서연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현장이 이렇게 좋아?”
“그래 보여?”
“응. 다들 오빠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스태프들과 눈이 마주쳤다. 슬쩍 웃는다.
팀장들은 맥주를 마시며 흐뭇하게 팀원들을 보고.
사실 현장에서 내 권위는 강한 편이었다.
소리를 지른다고 감독 권위가 생기는 게 아니다.
감독을 얼마나 믿고 따르느냐에 달린 거지.
“신경질 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봐.”
“나도 현장이 이랬으면 좋겠다.”
“왜? 드라마 촬영 힘들어?”
“드라마는 워낙 빡빡하니까. 다들 지쳐 있고.”
“이번 주 토요일일 갈 게. 그날 촬영 없지?”
“응. 곧 끝날 거야.”
서연과 영진이는 당일 돌아갔다.
이후 촬영은 아주 훈훈하고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산에서 벌어지는 클라이맥스 장면이 육체적으로 좀 힘들었으나 내겐 신 나는 경험이었다. 연일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을 찍으며 진흙 산비탈에서 넘어지기도 많이 넘어졌다.
그때마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64일간의 촬영.
힘들었지만 정말 많이 배운 날들이었다.
즉석에서 아이디어를 내서 찍은 장면이 상당히 많았고, 배우들도 눈부신 집중력을 발휘했다.
기존 영화에 없던 새로운 것이 때로는 어색할 수도 있다. 그 점에 관해 팀장들과 수없이 토론을 했다. 새로운 것이 어색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것이 될 수 있도록.
촬영지. 현장 분위기. 스태프. 배우들. 그리고 새로움.
그 모든 것이 시너지를 일으켰고, 유례없는 팀워크로 나아갔다.
재미있었고, 큰 사고도 없었으며, 모두가 가족처럼 지냈다.
스트레스가 없었으니 스태프들이 싸우지도 않았고.
아마 내 일생에 다시 없을 것 같은 촬영이었다.
영화 내용은 무겁고 음침하기 짝이 없는데, 그 영화를 찍는 촬영장에는 웃음이 넘쳤다. 오죽했으면 김강헌이 몰입에 방해된다고 하소연을 했을까.
“컷! 오케이!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집에 가기 싫다!”
“하하하하!”
수고했다는 말과 웃음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집에 가기 싫다는 스태프의 말을 다들 동감했던 터라.
다들 거짓 꼴에 몸에선 악취가 났다.
심지어 여자 스태프들까지 옷이 꼬질꼬질했다.
모두가 웃으며 포옹하고 격려했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말과 함께.
헤어짐을 앞두고 눈물까지 흘리는 스태프도 있다.
나도 괜스레 울컥했다. 시원하고 섭섭하고.
그리하여 아직은 쌀쌀한 3월 24일.
내 입봉작 ‘아비도’가 크랭크업했다.
촬영지가 영화의 반을 만들어 주었고, 현장 분위기가 또 반을 만들어 주었으며, 배우와 스태프들이 내가 바랐던 것의 2배를 해주었다.
그 덕분에 영화가 아주 잘 나왔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과연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