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내 감독 작품 (19/56)

제3장 내 감독 작품

창작팀 라이터스가 출범하고 넉 달째.

유명 무명 포함, 작가가 12명으로 늘어났다.

드라마 작가만 4명으로 임성희 작가도 합류했다.

단독으로 집필하면서 나와 창작팀 지원도 받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2인 1조. 혹은 단독으로 넉 달 동안 16개 작품을 진행했다. 드라마도 두 작품이나 있었다.

초유의 일이다.

기존 작가들은 집필하느라 정신없고, 새로 온 작가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고.

대체로 내가 구성안을 내면 작가들이 검토하고 진행했다. 초기에는 내 구성력에 의문을 품은 작가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물론 코어 덕분이지만 실력으로 불만을 잠재웠던 거였다.

내게 할당된 세 작품은 일찍 끝낸 뒤 한 달가량 가지고 있다가 하나씩 넘겼다. 작가들은 보름 만에 초고를 끝낸 뒤 자체 검토 및 재고 작업을 한 후에 넘겼다. 물론 코어 분석을 통과한 작품들이다.

넉 달 동안 여섯 작품을 넘겼는데 모두 통과된 것은 아니었다. 네 작품은 재고 요청이 들어와 다시 회의와 재고 작업을 거친 뒤 넘겨서 통과가 되었다. 일반 제작사에서 최대 10고까지도 가는 시나리오 작업이 재고 작업으로 끝났다.

곧 넘길 시나리오도 다섯 작품이나 되었고 지금도 꾸준히 작품 의뢰가 들어오고 있었다. 창작집단 ‘라이터스’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 나서 오히려 우리가 작품 의뢰를 까내는 지경이었다. 소재가 좀 그렇거나, 제작사 요구가 영 아닌 작품에 한해.

드라마도 임성희 작가가 주도한 작품이 통과되어 드라마팩토리라는 외주제작사에서 제작하기로 했다. 그 작품 역시 서연이 여주인공이다. 임성희 작가에게도 서연이 페르소나가 된 듯했다.

난 당분간 집필은 그만두었다. 영화 연출 공부도 좀 하고, 내 입봉 영화 구상과 준비도 이제 할 생각이었다.

코어로 분석은 계속했다. 분석 후 수정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내면 작가들이 뚝딱뚝딱 써냈고, 그 작품의 퀄리티가 괜찮았기 때문이다. 좀 아니면 자체 재고 작업에 들어가면 될 뿐이었고.

내가 집필하지 않아도 팀의 수익은 계속 들어왔다.

넉 달 사이 들어온 계약금은 총 2억 3천.

들어온 작품의 잔금까지 받으면 두 배가 된다.

드라마는 제외한 수익이다.

정산은 석 달에 한 번 하는데 지난날 첫 수익이 작가당 2천 5백만 원이었다. 다음 정산 때는 중도금과 잔금을 받게 되니 작가 한 명이 5천만 원은 가져갈 터였다. 소속 시나리오 작가 8명 전부 유명 작가가 된 셈이다.

내 수익은 내 본명으로 쓸 때만큼 크지는 않았다. 돈도 돈이지만 작가 풀을 만들고, 작가 팀의 영향력, 작가 위상을 높이기 위해 라이터스를 만들었던 까닭이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리하여 라이터스는 정상 궤도에 올랐다.

이대로 죽 가면 강력한 작가집단이 될 터였다.

따로 집필을 안 하니 나도 시간이 좀 넉넉했고.

내가 라이터스에 집중하는 사이.

신성영화사는 김영석 감독 입봉작 촬영을 앞두었다.

오상일이 제작실장으로 잘하고 있었다. 김 감독도 큰 충돌 없이 잘 해나가고 있고.

난 사실상 외부인이 된 터라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상일이가 프리 프로덕션 최종 점검을 봐달라고 했으나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이 대표님과 눈썰미 좋은 민정이도 있으니.

그래도 첫 촬영 날은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로즈 엔터에는 자주 갔다.

바닐라베이비 아이들은 친구 돌잔치 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 로즈 엔터로 왔다. 애들 부모님들과 함께.

직접 제니스를 만나고, 성 대표님도 만나고 난 뒤 정식으로 계약했다. 연습생 3년 계약. 모든 트레이닝 비용은 회사에서 대며, 회사 기준에 도달할 경우 데뷔한다는 조건.

그리고 걸그룹을 할 것인지, 걸그룹 같은 록밴드를 할 것인지 정하라고 했다. 다만, 록밴드를 하면 세계 진출을 목표로 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나 아이돌이 주류지, 세계 무대는 록과 팝이다. 록은 어느 나라를 가도 환영받는 장르이며, 특히 예쁘고 연주 잘하는 록밴드는 아이돌 팬도 잡을 수 있다.

미국의 조나스 브라더스. 일본의 베이비메탈.

우리나라의 씨앤스카이처럼.

아이들은 록밴드를 하기로 했다.

정확히는 아이돌 하우스 록밴드다.

EDM 기반으로 화려한 의상과 퍼포먼스를 곁들인 록밴드.

소정와 미진은 실용음악과 출신으로 보컬과 기타.

은미와 인희는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베이스와 드럼.

악기 중 베이스와 드럼이 그나마 배우기 쉬운 편이라 은미와 인희는 바로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네 명 모두 영어 수업을 들었다.

작곡할 줄 아는 소정은 세라와 함께 방준혁 작곡가에게 EDM과 작곡 공부를 시작했고.

팀 이름은 락키(The Rockie).

이름도 전원 캐릭터처럼 바꾸었다.

키키. 미미. 나나. 지지.

밴드 컨셉이 게임과 애니에서 튀어나온 아이돌이다.

미소녀. 여전사 등등의 코스프레를 한다.

이건 순전히 지성이 취향.

이게 전 세계 남자들에게 먹힌다면서.

내 감독 입봉 영화는 아직도 구상 중이었다.

직관적이고 명료한 액션 영화가 1순위이고, 그 주인공은 건하였다. 한데 코어는 이 작품에 대한 호감이나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이는 구상한 작품이 별로라는 의미가 된다.

해서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다른 소재를 할 것인가, 다른 배우를 쓸 것인가.

나는 마음에 드는데 코어가 호감을 비치지 않으면 어떤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코어는 내 생각도 반영하는데 분석으로는 좋은 소재가 아니면 이런 무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이를테면 나는 이 소재로 어떻게 찍을지 알기에 좋은 영화이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대중의 호응은 별로일 경우다.

코어에 기대지 않는 내 판단이 필요했다.

욕심도 버려야 할 테고.

건하가 영화를 찍어도 되는 상황인지 확인하고 판단하기로 했다. 아직 주인공을 할 여건이 안 된다면 조연을 하든가, 아예 다른 소재를 선택하든가.

난 라이터스 사무실에서 나가 ‘특검’ 촬영장으로 향했다.

김영석 감독에게 첫 촬영 축하도 할 겸.

첫날 촬영지는 인천 송도였다.

* * *

고층빌딩 앞에서 촬영이 한창이었다.

한 주상복합아파트로 일반 검찰 수사관들이 압수수색을 하는 장면. 경비원들과 피의자 경호원들이 막무가내로 진입을 저지한다. 대통령 실세와 관련한 피의자 집인데, 권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의도로 찍는 장면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 찍는 장면은 지미집 부감.

난장판이 벌어지는 걸 높은 곳에서 찍는다.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연출부는 새로 온 팀이다.

오천일 감독과 연출부가 다른 제작사와 계약했기 때문에.

아직도 인물 담당 세컨드인 승철이도 그쪽에 있었다.

당연히 내가 부르면 올 친구다.

조감독이 외쳤다.

“보조출연자분들은 상대편 움직임에 따라 적극적으로 행동하세요! 진입하는 팀은 뚫고! 막는 팀은 필사적으로 방어합니다! 아셨죠?”

“예!”

건물 입구에서 몸싸움을 하는지라 딱히 짜인 동선은 없었다. 상대방이 움직이는 데에 따라 뚫고 막으면 될 뿐.

“조명 완료!”

“슛 갑니다. 대기해 주세요!”

지미집 카메라가 공중 높은 곳에 있다.

촬영팀이 외쳤다.

“카메라, 아리 알렉사! 렌즈, 울트라 프라임 85!”

스크립터가 바쁘게 스크립트지에 기록했다.

메인 카메라가 아닐 때는 씬의 카메라와 렌즈를 콜 해준다.

카메라가 부감 상태에서 찍기에 슬레이트를 칠 수는 없다.

연출부 막내는 혼자 대기하고 있고.

조감독이 외쳤다.

“레디!”

이내 콜이 들려온다.

“스피드!”

“롤링!”

이미 연기는 시작되었다.

3초 후.

“액션!”

연기자들과 보조출연자가 한데 뒤섞이며 고함을 질러댄다.

“비켜요! 수색영장 안 보입니까!”

“못 들어가게 막아!”

“밀지 마세요!”

“공무집행 방해입니다! 물러서시라고!”

“5분만 버텨!”

건물 입구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함과 몸싸움이 30여 초 이어지더니.

“컷!”

콜이 떨어지자 공중에 있던 카메라가 내려왔다.

연출부 막내 앞으로.

막내가 슬레이트를 거꾸로 든 채 외쳤다.

“엔드 슬레이트! 씬 11. 3에 3!”

“다시 갑니다!”

뒤집힌 슬레이트를 찍은 카메라가 다시 원위치로.

슬레이트를 치기 어려울 때 하는 역순 슬레이트다.

우리 김영석 감독은 결정장애 같은 건 없었네.

그때 누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김판수였다.

“여긴 웬일이야?”

이 인간 대꾸없이 씩 웃더니 날 안았다.

그렇게 한 참이나 날 안고 있었다.

왜 이러는지 알만하다.

떨어져서 보니 김판수 눈시울이 벌겋다.

“빚 다 갚았어?”

“그래. 한 방에 갚았다. 신 대표가 보너스 3억 줬어.”

“꽤 썼네.”

“당연하지. 내가 너 소개해준 사람인데.”

“커피 한잔해.”

커피를 사 들고 촬영장 근처 벤치에 둘이 앉았다.

김판수에게 물었다.

“차기작은 시작했어?”

“이제 준비하려고.”

“이번에도 손 감독이랑 할 거지?”

“당연하지. 메이저보다 돈을 더 주는데 친구 신 대표 놔두고 딴 데 갈 필요 없잖아. 그런데 말이야.”

“시나리오?”

“자식 눈치도 빨라. 너 좀 꼭 잡아달라고 신 대표가 신신당부를 하더라. 너 무슨 창작집단 한다며?”

“조약돌 작품은 내 개인적으로 할 게. 소재는?”

김판수의 눈이 빛난다.

이어 차기작 소재와 줄거리가 줄줄 나왔다.

첩보물인데 지금까지 나온 영화보다 박진감이 더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시나리오를 봐야 알 것 같다.

“… 그래서 북한 공작원과 국정원 특수요원이 독일에 망명한 그 북한 외교관 신병을 확보하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거지.”

“돈 좀 벌었다고 벌써 대작을 찍게?”

“왜? 영 아니야?”

“영 아닌 건 아니고. 망명한 외교관이 북한 정권의 최고 기밀을 들고 나왔다는 게 좀 개연성이 부족해서. 나중에 시놉 보내주면 대안을 좀 찾아볼 게.”

“그래, 안 그래도 신 대표가 네가 말한 거 지적했다.”

“시놉 다시 정리해서 보내줘 봐.”

“알았어.”

“나 먼저 갈 게. 구경하다가 가.”

“그래.”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김 감독에게 간다는 인사를 하고 촬영장에서 나갔다. 바로 그 길로 건하가 운동하고 있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신성영화사가 촬영을 시작했으니 이제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 * *

건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샌드백을 차고 있었다.

같은 곳을 끊임없이 하이킥을 질렀다.

체육관 원장에게 갔다.

“지금 계속 저것만 하고 있어요?”

“예. 건하 저 친구 집중력이 장난 아니에요. 쟤 지금 8시부터 11시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같은 킥만 하고 있습니다.”

“킥만 계속하는 겁니까?”

“아니요. 어제는 펀치만 4시간이나 했죠. 지난달에 펀치와 킥에 체중이 안 실린다고 했더니 저러고 있네요.”

“체중이 지금은 실리는 거죠?”

“그럼요. 쟤는 무슨 태국인 무에타이 선수도 아니고 말리지 않으면 종일 킥만 할 겁니다. 운동했으면 아마 잘했을 거예요.”

원장은 건하에게 자폐 성향이 있었다는 걸 모른다.

그냥 착하고 말 수가 적으며 낯가림이 있을 뿐이라고 여긴다. 게다가 운동 신경이 좋다고 착각한다.

건하는 내가 운동을 권해서 한 것이지 운동신경이 좋아서 한 게 아니다. 운동을 하다 보니 몸과 정신이 달라져서 건하도 이젠 운동을 좋아하게 되었던 거지.

팡- 팡- 팡-

정말 건하가 무에타이 선수처럼 킥을 한다.

체력도 상당히 좋아졌고, 무술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저렇게 몰입하고 운동만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더불어 정신 건강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더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의식의 침전이 아직 남아 있을 뿐.

지난 1월 말에 건하를 만났으니.

건하를 안 지도 벌써 10개월이 다 되어 간다.

기초 체력 운동까지 합치면 운동을 한 지는 6개월.

건하는 이제 몸이 몰라보고 탄탄해졌고, 무술도 곧잘 한다.

지금 배우는 건 일반 특공무술인데, 나중엔 실전무술인 ‘시스테마’ ‘칼리 아르니스’ ‘실랏’ 등도 배울 참이다. 당연히 영화 촬영용으로 배우는 수준이다.

매일 발성과 발음 연습도 하고, 연기 연습은 꾸준하게 해 왔다. 같은 집에서 살고 있으니 건하의 정신 상태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고. 이대로 몇 달 더 있으면 평범한 청년으로 변모할 터다.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상태는 된 것 같다.

묵묵히 발차기하는 건하를 보고 있으니, 기존 소재로 찍고 싶은 욕심이 또 생긴다.

결국 결정했다.

다른 소재를 하기로.

내가 좋아하고 찍고 싶은 영화보다

대중이 좋아하고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하기로.

찍고 싶은 영화는 나중에 해도 된다.

* * *

집과 라이터스 사무실을 오가면서 늘 소재를 염두에 두고 생활했다. 나만의 스타일로 영화를 찍겠다는 욕심도, 건하를 주인공으로 하겠다는 계획도 버렸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뭔지 생각했다.

하고 싶을 걸 제쳐 두고, 대중이 좋아하면서도 나도 좋아하는 장르를 하는 게 나을 듯해서.

그렇게 소재를 찾아다니다 최종 2개를 골랐다.

첫 번째 이야기.

백 투 더 퓨처를 오마주 한 타임슬립.

부모님이 이혼을 앞둔 대학생이 있다.

부모님과 여자친구 부모님은 모두 친구였고, 두 부모님 다 학교 선배이자 CC였다. 여자친구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장난처럼 약혼한 사이였고.

그런 주인공이 여자친구와 학교 뒷동산에서 말다툼하고 헤어지던 그때. 땅에 묻힌 이상한 모래시계 같은 걸 발견한다. 그 시계를 뒤집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난데없이 1997년으로 떨어진다.

학생들이 삐삐를 차고 다니고, 죄다 눈을 가리는 뻗친 머리를 하고 다니던 시절. 주인공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헤매고 다니다 닭살 커플인 엄마와 아빠를 만나게 된다.

기겁하여 도망친 주인공은 정신없이 과거의 낯선 광경 속에서 헤매다 원래 시대로 돌아간다.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엄마와 아빠가 모르는 사이! 결혼을 안 했다!

주인공은 자신의 몸이 사라지려고 하자 급히 모래시계를 돌린다. 다시 1997년으로 가서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는데 일이 점점 더 꼬인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부모님을 연결시켰다. 현재로 돌아와 보니 웬걸, 주변 환경이 변했다. 무심코 했던 뭔가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집안이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과거로 가서 겨우 수습을 했다.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준 한 여자와 친해졌는데 맙소사. 여자 친구 어머니였다. 현재로 돌아왔더니 이번엔 여자친구가 사라질 판.

여자친구는 그녀의 엄마와 성격이 똑같았다. 그 덕분에 여자친구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 일 수습했더니 또 다른 게 터진다. 터진 게 또 터지면서 미래가 엉망진창이 되어간다.

그 사태 수습하느라 똥줄 빠지게 달리는 주인공.

모든 걸 해결했을 때. 부모님은 이전과 다르게 다정한 부부가 되었고, 여자친구와도 잘 되고.

뭐, 이런 내용.

두 번째 이야기.

스릴러다.

형사가 친구인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러 온다.

형사는 차분하게 자신이 수사를 맡은 사건에 관해 이야기한다. 한 여자가 살해되었다. 알고 보니 동네 남자들이 그 여자를 성적으로 농락하고 살해했던 거였다. 정확히 몇 명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는 가운데 동네 남자들이 하나 둘 시신으로 발견된다.

주인공 형사는 여자를 농락한 남자들과 죽어나가는 남자들에 대한 수사 이야기를 한다. 담담한 어조로 한 변두리 동네의 집단 이기주의와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악에 대해 말한다. 결국 동네 남자 7명이 죽었고, 사건은 미제로 끝났다.

형사는 모든 말을 끝내고 상담실에서 나간다.

얼마 뒤 정신과 의사는 검색을 통해 죽은 그 여자의 이름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그 여자는 친구인 형사의 전처였다. 그리고 동네 남자들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도.

정신과 의사는 갈등에 빠진다.

과연 친구는 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 두 이야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코어는 가칭 ‘1997’과 ‘아비도(阿鼻島)’ 모두에게 좋은 느낌을 보였다. 1997은 상업 영화고, 아비도는 저예산 작가주의 풍 영화다.

향 후 감독으로서 내 이미지를 구축하기엔 아비도가 낫다.

1997은 누구라도 찍을 수 있는 영화고.

해서 아비도를 하기로 했다.

인간 세상에 아비지옥의 섬이 있다는 뜻.

흥행성은 좀 낮지만 감독 입봉작으로는 적당하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연출 공부부터 시작했다.

코어는 내 생각을 반영하고 정보를 분석한다. 해서 주체인 내가 어느 분야에 대해 많이 알수록 분석과 추천이 정확해진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를 분석할 경우엔 내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정보 분석 결과만 나온다. 이전의 주식 분석처럼.

시나리오는 내가 가장 잘 아는 분야인 거고.

그래서 라이터스 사무실에서건, 집에서건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하루에 영화를 두 편 이상을 보고 그 영화 앵글과 카메라 워킹에 대해 공부했다. 조명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물론, 이론과 현장에서 본 것들을 대조하며 익혀나갔다.

아이디어도 생각이 나는 족족 메모해서 이야기를 확장하고 굴렸다. 내 감독 입봉작인 만큼 충분히 다듬고 난 뒤에 시나리오를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회사에서 새로 들어온 시나리오를 코어를 통해 분석하고 있을 때였다. 기본 분석 결과가 어째 애매해서 영상화를 시도해 보았다. 10분 하고 10분 쉬기를 반복하면서. 코어 레벨이 좀 높아져서 근 몇 달 동안은 10분 정도 풀 가동해야 두통이 왔었다.

그런데 세 번째 영상화를 할 때였다.

영상화가 12분이 되어도 두통이 미미할 뿐이었다.

또 진보했나 싶어서 5분을 더 가봤는데 갑자기 띵- 하며 종을 치는 듯한 특이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영상화가 멈춰 버렸다. 코어가 중단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되더니 두통이 왔다.

좀 지나면 가라앉으려나 해서 누웠는데 두통이 2시간이나 이어졌다. 슬슬 오한도 들고.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다가 다시 코어를 발동했는데 두통이 극심했다. 그저 5단계 확장 정도로 정보를 분석하는 수준이었는데도 그랬다. 이래선 영상화는 불가능했다.

영상화 불가능이란 말은 영화 분석을 못 한다는 뜻.

지난 2년 동안 너무 혹사했던 건가.

다시는 코어를 못 쓰는 건가 싶었으나 그건 아니었다.

다행히 시간이 좀 지나자 두통이 사라졌다.

혹시나 해서 코어를 발동해서 점점 수준을 높여 봤다.

10단계 정보 확장까지는 두통 없이 가능했다.

뇌 활용도를 완전 가동하는 영상구현도 되기는 했다. 그런데 3분을 못 넘기고 시야가 흐려졌다. 10분이 안 된 터라 두통은 없었고. 아무래도 코어가 확장되면서 눈에 영향을 주는 듯했다.

결국 병원으로 갔다.

사실 지난 2년 동안 6개월에 한 번은 병원에 왔었다.

뇌 사진이 조금씩 하얗게 변하고, 뇌에는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 결과는 좀 달랐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시야가 뿌예졌다고 하셨죠?”

“네.”

“이 사진을 보세요.”

의사가 뇌 사진을 가리켰다.

하얀 부분이 6개월 전보다 조금 늘어났다. 전체적으로 하얀 부분이 퍼지다 보니 안구 쪽으로도 조금 확장되어 있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하얀 부분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두통이 없다고 하셨고, 사진상에서는 종양이나, 손상된 부분이 없어요. 손상이 있으면 몸에 이상이 있겠죠. 그런데…”

의사가 안구 쪽을 짚었다.

“이 하얀 쪽이 아무래도 시신경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뇌압이 높아져서 그 때문에 안압이 상승했거나, 혈액공급 이상으로 시신경에 자극을 줬을 수도 있고요.”

“지금은 괜찮은데요.”

“그래서 이상하다는 겁니다. 뇌압이나 스트레스성 혈압 상승 때문이라면 어떤 특별한 두뇌 활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혹시 무슨 일을 하시죠?”

“글 쓰는 작가입니다.”

“다른 두뇌 활동은 따로 없고요?”

“상당히 강하게 집중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머리가 아파요?”

“네.”

코어를 발동할 때 두통이 생긴다는 말은 못했다.

뇌 활용도가 상당히 높아지면 뇌압이 상승하는 것 같다.

의사가 말했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모르겠지만 집중할 때 두통이 생긴다면 앞으로는 좀 자제하셔야 합니다.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는 특이체질이셔서 어떤 경과가 나올지 알 수가 없어요. 만약 계속 뇌압이 높아져서 시신경을 건드린다면 차후에 실명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말을 못했다.

실명이란 말을 듣고 나니 숨이 턱 막혔다.

진화한 코어가 눈에 영향을 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과도한 집중이 아니라면 생활하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건강한 사람도 어떤 일이 너무 신경을 쓰면 두통이 오기 마련입니다. 최신성 씨 경우에는 다소 예민한 편이고요.”

“알겠습니다. 다른 이상은 없죠?”

“장담은 못합니다. 지켜봐야죠. 이제 석 달에 한 번씩 오셔야 합니다. 혹, 다른 이상이 생기면 바로 병원에 오시고요.”

“네.”

진료실에서 나갔다.

병원 입구에 잠시 서 있었다.

“후….”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코어를 쓰면 뇌압이 상승한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으나, 안구 쪽까지 코어가 확장하면서 시신경을 건드리게 된 거다.

코어는 일반 정보 분석 때는 이상이 없지만 영상화 구현처럼 풀 가동하거나, 뇌활용도가 극히 높아지면 시야가 흐려진다. 계속하면 시신경이 죽어서 실명할 수도 있다.

영상 구현은 단 3분. 작품 하나 끝내려면 밤을 새워야 한다. 수도 없이 되풀이하면 그만큼 시신경이 죽을 테고.

코어 진화 과정 중 잠시 일어나는 일일까.

아니면 이제 영상화는 못하게 되는 걸까.

물론 영상화가 아니라도 시나리오 분석은 할 수 있다.

영상화가 가장 완벽하게 분석할 뿐이고.

이제 영화 잘 될 거라는 장담은 어렵게 됐다.

확실하진 않지만 코어는 지금 내 뇌와 하나가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하얀 부분이 점점 확장하면서 분리되어 있던 두 개의 뇌가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 같은.

혹시 내 원래 뇌와 코어가 합일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는데.

내 머리가 코어이니 따로 코어를 발동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려는지.

가장 좋은 건 둘이 상쇄되어 반반이 되는 거다.

기존의 뇌 활용도는 높아지고, 코어 능력은 낮아지고.

영상화는 힘들 수 있으나 늘 코어 5레벨 수준으로 살아가게 되는 셈이다. 코어를 발동한 상태로 생활하니 뇌압이 높아지지 않을 것이며, 시력도 잃지 않을 테고.

코어를 계속 쓰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봤는데, 이만하면 다행이다 싶다. 무리만 안 하면 되니까.

남다른 능력 가지고 이런저런 욕심을 낸 것도 돌아보게 된다. 여기서 더 나가지 말고 멈추라고 코어가 경고를 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그 경고는 내 무의식이겠지만.

다음 날부터 아비도 시나리오 작업 준비를 했다.

아비도는 딱히 자료 조사를 할 것이 없었다.

한적한 지방 변두리 도시가 배경이라.

우선 줄거리.

주인공인 형사가 친구인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형사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하고, 의사는 그 원인이 뭔지 들어보려 한다.

이에 형사는 담담히 사건 하나를 꺼내 든다.

평범한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나에 대해서.

형사와 의사의 대화와 사건 회상이 교차된다.

우울증에 걸린 한 여자가 변두리 마을에 빵집을 연다.

미망인으로 알려진 미모의 빵집 주인을 동네 남자들이 친절하게 대해준다. 여자의 어린 딸도 동네 주민이 잘 해주고.

그러다 복면을 쓴 남자들이 여자를 납치하여 겁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여자는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에 신고도 못 하고. 그걸 시작으로 인두겁을 쓴 짐승들의 농락이 시작된다. 빵집 건물 주인을 비롯해, 정육점, 철물점, 슈퍼마켓, 약사 등등이 여자가 도망가거나, 이사 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여자가 온 뒤로 마을이 뒤숭숭해진 것을 남자들의 아내들도 알 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경찰에 신고하러 가던 도중.

누군가가 그 여자를 살해한다.

형사는 그 사건을 담당했다.

첫 번째 용의자로는 빵집에 우유를 배달하는 남자. 여자를 훔쳐 보았다는 증언이 있었고, 약간 백치인 그자의 옷에서 여자의 혈흔이 발견된다. 동네 사람들은 그 우유 배달원에게 악마라며 욕을 해대고.

그러나 우유배달원은 범인이 아니었다.

형사인 주인공은 단순 살해 사건이 아님을 직감한다.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동네 남자들. 뭔가 숨기고 있는 그 남자들의 아내들. 약사는 그 여자가 죽기 전 성병 치료 약을 받아갔다고 하고.

그때 형사는 포착한다. 단순 살해가 아닌 강간살해.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동네 주민 여러 명이 연루된 사건. 사악하고 더러운 욕정에 사로잡힌 악마의 짓거리들.

주인공이 수사를 하는 와중에 범인이 하나 둘 죽어나갔다. 형사는 여자를 살해한 자가 남자들도 죽이는 것으로 수사 방향을 잡았다.

동네 남자들은 그때부터 서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형사에게 사건의 진실을 말하는 자가 나올까 봐 누군가가 죽이는 것으로 보았다. 그게 누군지는 모른다.

사건의 주모자인 철물점 주인일지, 동네의 어른인 이장일지, 그것도 아니면 늘 의뭉스러운 약국의 약사일지. 남자들의 아내들은 자신의 남편은 아니라고 싸워대고.

그러다 사건 주모자인 철물점 주인도 시신으로 발견된다.

누가 살인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황.

동네 주민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진다.

형사는 그런 동네 사람들을 지켜보며 차분하게 사건을 파고 들어간다. 마을 주민을 모아 놓고 불안에 떠는 주민을 살펴본다. 급기야 형사로선 전혀 알 수 없는 이유로 부녀자들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도 하고.

‘내 남편은 아니야! 우리 그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인상이 선했던 그 여자의 남편은 다음 날 싸늘한 시체가 된다. 두 번째 유력한 용의자였던 정육점 주인이다.

형사가 찾아갔을 때 웃으며 염소의 목을 따던 자.

동네 남자들은 죽은 정육점 주인이 죽은 여자에게 몹시 집착했으며 성정이 나쁜 인간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의심스러웠던 정육점 주인이 죽었다.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형사가 사건의 작은 단서 하나를 잡았을 때.

또 두 명이 죽어나간다. 도무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희한한 사건. 형사는 괴상한 마을 분위기와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마을 주민을 보며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며 의사에게 토로한다.

그리하여 폭풍우가 치던 날 밤.

서로 믿지 못한 동네 남자들이 참혹한 살인을 벌이고, 마지막 살아남은 남자마저도 목을 매단 시신으로 발견된다.

결국 남자 7명이 죽었다.

마을 주민 일부는 죽은 여자와 관련한 남자 전원이 죽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죽은 남자들의 아내만 원통하다며 울 뿐이고.

마침내 사건은 미해결로 종결되었다.

의사가 묻는다.

‘결국 범인은 누군지 모르는 거네.’

‘이상한 사건이었지. 그 여자에 대한 정보도 지워졌고.’

‘털어놓고 나니 시원한가?’

‘어느 정도는.’

‘그래.’

형사가 나간 뒤 의사는 친구가 왜 그토록 그 사건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의아했다. 그래서 그 사건을 검색했다.

죽은 그 여자는 친구의 전처였다.

그러니까, 범인은…

진실을 본 의사는 충격에 휩싸인 채 얼어붙고 말았다.

이렇게 줄거리와 마을 분위기. 캐릭터 등을 짜 놓은 뒤.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 * *

3일 만에 시나리오를 썼다.

무리하지 않았다. 코어를 3단계 수준으로 놓고 시나리오를 썼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자제했다.

98씬. 상영시간 1시간 45분.

써 놓은 시나리오를 분석했다.

영상구현은 안 했다. 그냥 분석.

그 결과는 내가 대충 예상한 바였다.

제작비 35억. 예상 관객 350만. 흥행 수익 340억.

내가 15억을 제작 투자했을 때 수익 약 30억.

제작사 수익은 부가 판권 합쳐 약 45억.

로즈 엔터가 거두어들이는 총 수익.

약 70억.

저예산 영화로는 초대박이다.

투자자 수익은 2배이나 내가 제작을 해서 그렇다

투자배급사도 투자해야 하니 전액 투자할 수는 없고.

물론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300만 이하로 들 가능성도 있다.

얼마간 쉰 뒤 시나리오 교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 다음 일주일을 거쳐 콘티 작업을 했다.

연출자로서 어떻게 찍을지 미리 확인해 두는 일이었다.

* * *

라이터스 사무실에서 반나절 일을 하고 집으로 왔다.

내 영화에 집중해야 하는 터라, 거기에선 시나리오 분석과 회의를 하는 게 전부였다. 회의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었고.

슬슬 제작 준비를 시작했다.

지인들 대부분이 현재 영화를 찍거나 준비 중이었다.

먼저 데려와야 할 사람은 제작실장과 조감독.

이전부터 골라둔 사람이 있었다.

문자를 보내자 얼마 뒤 전화가 왔다.

“네. 최신성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성호입니다.

“지금 작품 안 하시죠?”

-예. 지금 쉬고 있습니다. 제가 제작부 맡는 건가요?

“네. 실장으로 오시죠.”

-저야 좋죠. 로즈 엔터로 가면 되나요?

“내일 오시죠. 시나리오 보낼게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김판수가 소개해준 사람이다.

박성호 제작부장.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최근 메이저에서 한 작품 한 뒤 쉬고 있었다.

이어 조감독에게서도 답 문자가 왔다.

[언제 불러주시나 했습니다.]

[내일 로즈 엔터로 오세요. 바로 프리 갑니다.]

[알겠습니다.]

김형수. 나는 보스다의 조감독이다.

조감독 경력 6년. 조약돌의 손 감독 밑에 있으면 감독 입봉이 어려워 내 작품 조감독을 자청했다. 오천일 감독처럼 나와 인연을 맺으면 입봉할 수 있다고 본 거다.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캐스팅하고 쉬고 있을 때.

지성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내일 사무실에 좀 와.

“왜?”

-김강헌이 내일 여기로 온대.

“김강헌? 그 배우가 왜?”

-응. 회사에 계약 문의한 적 있거든.

“알았다. 내일 갈 게. 아, 사무실 이전 준비해야겠다.”

-어느 정도로?

“50평 대로. 경영지원부와 매니지먼트와 콘텐츠 제작부. 이렇게 세 구획을 나눠.”

-뭐야? 이제 영화 제작하는 거야?

“그래. 언제 이전할 수 있겠어?”

-사무실만 찾으면 금방이지.

김강헌이라….

이 시점에 그 배우가 온다는 게 묘한데.

형사 역할에 연이 닿으려는 모양이다.

* * *

라이터스 회의를 끝내고 로즈 엔터로 갔다.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배우 김강헌이 와 있었다.

함께 있던 지성이는 난감한 표정이고.

“김강헌입니다.”

“최신성이에요. 로즈에 오시게요?”

“제가 큐즈와 계약이 끝나서 회사를 좀 알아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로즈에서 연락 주시길 기다렸는데, 통 전화가 없어서 제가 그냥 왔어요.”

지성이가 왜 난감했는지 알겠다.

우린 기존 배우와는 계약한 적이 없다.

더구나 김강헌은 큐즈에 있던 배우고.

나 때문에 큐즈 소속 배우는 영화 촬영 못 한다는 영화계 소문이 은근히 사실이 되는 모양이다. 이왕 옮기는 거 내가 대표인 로즈에 오는 게 낫다고 본 건가.

“저희는 기성 배우 계약금이 없다는 건 아시죠?”

“예. 계약금 없는 회사야 많죠.”

정효주 소속사인 BQ 엔터도 계약금은 없다.

계약 문제로 소송할 일이 없으니 배우나 회사나 깔끔한 관계가 된다. 회사에서 지원도 잘 해주고.

지성이에게 물었다.

“회의는 해봤어?”

“했지. 형만 괜찮다면 회사가 손해 볼 건 없어. 계약도 일반 배우 계약이고.”

“그럼 계약하시죠.”

“아, 예.”

“이쪽으로 오세요.”

김강헌이 웃으며 지성이와 함께 회의실로 갔다.

계약을 하는 김강헌을 코어를 통해 살펴보았다.

영화 열정이 강하고, 지저분한 일도 안 하는 사람이다.

42세인 김강헌.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다.

사실 ‘아비도’ 형사 역으로 점찍은 배우 3명 중에 김강헌도 있었다. 일단 코어는 좋은 느낌을 주는데, 나도 그렇다.

삶에 찌든 듯한 무표정한 얼굴.

중급 예산 영화에서 주로 주연을 했고, 대작에선 조연을 하는 배우다. 개런티도 좀 높은 편이고.

4대 흥행 배우도 좋지만 형사 역에는 모두 안 맞다.

본인이 내키지 않으면 다른 배우를 쓰면 되고.

김강헌이 계약한 후 나왔다.

“지금 하는 작품 없으시죠?”

“없죠. 벌써 작품 하나 주시게요?”

“제 감독 입봉작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최 작가님 작품 마다할 배우가 몇 있겠습니까.”

“책을 읽어보시고 결정해주세요. 내키지 않으시면 다른 작품 연결해드릴 수 있어요.”

“예.”

김강헌을 처음 봤는데 강직하고 진중한 사람 같다.

그런 사람이 직접 기획사에 왔다는 게 놀랍다.

김강헌 씨를 보냈다.

큐즈의 분열이 이제 시작된 모양이다.

김강헌 뿐 아니라 큐즈 소속 배우 중 몇 명 더 로즈 엔터로 온다면 큐즈 대표 얼굴이 어떻게 될지.

그때 조감독과 제작실장이 왔다는 문자가 왔다.

지성이에게 말했다.

“성 대표님하고 고 본부장님과 의논해서 필요한 직원 좀 뽑아. 콘텐츠 제작부에는 영화사 경험 있는 회계 경력직이 필요하고.”

“알았어. 안 그래도 사람 부족했는데 잘 됐네.”

제작실장과 조감독을 만나러 나갔다.

* * *

셋이 커피점에 앉았다.

박성호 실장에게 말했다.

“제작 문서는 가지고 계신 게 있어요?”

“대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따로 준비하실 게 있나요?”

“아니요. 혹 필요한 문서나 매뉴얼이 있다면 말씀하세요. 저도 웬만한 건 다 가지고 있으니까.”

이번엔 김형수 조감독에게.

“따로 생각해둔 연출부는 있어요?”

“일반부원은 두 명 있습니다. 나머진 모집하면 되고요. 시나리오 보니까 저예산이던데 스태프는 최소로 구성해야겠죠?”

“예. 현장 스태프는 최대 45명으로 잡고 있어요.”

“좀 빡세겠는데요.”

“대신 계약금은 다른 팀과 같습니다.”

조감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팀 인원은 적은데 계약금은 같다.

일의 양이 늘어나지만 팀원이 받는 돈은 많아진다.

둘 다 베테랑이다 보니 바로 견적을 파악한다.

이번 영화는 한 동네에서 다 찍는다.

이동할 시간이 줄어드니 시간과 유류비를 아낀다.

동네에서 숙식하면 회차도 줄어든다.

제작비가 35억밖에 안 나온 이유다.

조감독에게 말했다.

“영화 내용 때문에 촬영지 찾는 게 좀 어려울 겁니다. 가능한 지방을 중심으로 찾아주세요. 산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섬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조감독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 고향에서 찍으면 되겠네요. 시나리오 보면서 거기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시골 읍내인데 있을 건 다 있습니다. 산에서 벌어지는 폭풍우 클라이맥스 장면도 거기서 찍으면 돼요.”

“예. 동네 분들께 영화 내용 말씀드리고 섭외해 보세요.”

이어 제작실장에게 말했다.

“회차는 46회. 촬영 기간은 두 달로 잡았습니다.”

“그 동네에서 지내면서 촬영하실 거죠?”

“그게 낫겠죠.”

“그러면 회차 조정도 유동성 있고, 민박이나 어르신들 집을 숙소로 쓰면 숙식비도 좀 덜 들어가겠네요.”

“시골에 놀러 간 느낌도 좀 들겠죠.”

조감독의 말에 다들 웃었다.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서 할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촬영을 한 뒤 자고. 아침에 일어나 바로 촬영하러 가고.

회의는 이것으로 끝냈다.

현 사무실에 두 사람의 책상이 없어서 정식 출근은 로즈 엔터가 이사한 뒤에 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오천일 감독에게 가 있던 승철이가 연출부 세컨드로 일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오 감독이 흔쾌히 보내줬다면서.

며칠 뒤에는 7인의 사무원 제작부 막내였던 소현이까지 온다고 해서 받아주었다. 이 대표님이 가서 배우라고 보내준 거였다.

* * *

로즈 엔터가 방배동으로 이사 왔다.

내가 말한 대로 지성이가 세 구획으로 나눠 놓았다.

경영지원부. 매니지먼트부. 콘텐츠 제작부.

연예계에서 이제 내 이름이 조금은 알려진 모양이다.

화환이 잔뜩 왔다.

이 대표님. 조약돌 신 대표님. 오천일 감독.

투자사 사장님. CG 이지은 상무. 임성희 작가.

라이터스 작가 일동. 드라마 제작사와 영화사들.

배급사 임원과 배우들 기획사까지.

지성이가 이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책상은 일렬로 배치하면 됩니다! 영진아! 제니스 사진은 나중에 붙이고, 청소부터 해.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하죠. 회사의 얼굴인데.”

지금 있는 임원과 직원들은 물론 앞으로 배치할 직원들 책상까지 다 마련했다. 콘텐츠 제작부는 이전의 신성영화사보다는 크다. 책상 6개에 회의 테이블도 있고.

이사가 끝난 뒤 제니스와 직원들이 모두 왔다.

다들 감탄을 지르며 새 사무실을 구경했다.

서연이 환하게 웃으며 내 옆에 섰다.

“오빠 프리 들어갔어?”

“이제 시작했어. 드라마 곧 촬영하지?”

“응. 다음 주부터. 오빠 영화 잘 됐으면 좋겠다.”

“잘 돼야지.”

서연이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았다.

제니스 멤버들이 우릴 보곤 뭐라 중얼중얼 흉을 본다.

지성이와 영진이는 못 본 척. 성 대표님과 고 본부장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점심을 먹은 후 서연과 제니스는 숙소로 가고, 다들 업무를 시작했다. 조감독과 제작실장이 와서 직원들과 인사를 한 뒤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오늘부터 캐릭터 분석 후 각 캐릭터에 맞는 배우들 리스트 작성해주세요. 조감독님은 스태프 리스트 뽑은 뒤 바로 계약 시작하시고요. 신성영화사에 있었던 박승철과 이소현이 연출부 인물 담당과 제작부원으로 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일어나 새로 꾸민 내 사무실에 들어갔다.

내 영화 ‘아비도’의 프리를 시작했다.

* * *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간 지 3주.

기획사에 시나리오 책을 보내진 않았다.

김강헌이 주연배우로 낙점되었고, 마을 주민 역할 배우들은 조감독이나 내가 전화를 해서 거진 캐스팅을 마무리 지었다. 프리 작업보다 캐스팅이 먼저 완료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영화가 저예산인데다 흥행성이 낮다며 배급사 투자가 잘 안 됐다.

투자사 사장님에게 투자를 부탁할 수는 없었다. 로즈 엔터가 15억을 제작 투자하면 나머지 20억은 투자배급사가 투자해야 스크린 수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님에게 한 것처럼 영화 흥행 예측을 해서 350만이 들 거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해도 안 믿을 테고. 아비도는 누가 봐도 흥행의 한계치가 있다. 대박이 나도 300만이 최대인 작품보다 500만 이상 흥행 가능성이 있는 영화를 우선하는 법이다.

배급사가 개봉 배정을 조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흥행성이 높은 작품 위주다.

CG E&M은 이미 세 작품에 투자했고, 그 영화들 배급을 맡은 터라 내 영화에 투자해도 개봉관 확보가 어려웠다. 그 점은 이지은 씨가 도와줄 상황이 아니었다. 회사의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에. 배급사 NEO는 내년 상반기까지 배급을 결정했고, 대형투자배급사인 로테 엔터테인먼트는 내년 여름 성수기까지 투자배급이 꽉 찼다.

흥행성이 높으면 이 배급 배정을 뚫고 들어간다.

결정은 배급사 판단이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영화도 있고, 혜택을 보는 영화도 있다. 영화계도 정글인 거지.

첫 제작으로 규모도 크고 흥행성도 높은 작품을 할 수 있으나, 아비도는 제작 효율이 상당히 높은 작품이었다. 35억 예산으로 350만이 든다면 수익도 좋고, 영화 특징상 입봉작으로 감독의 첫인상 심기에도 적당하고, 첫 제작 리스크도 적다.

물론 정 안 되면 다른 작품 하면 되는 거고.

남은 투자배급사는 뉴 엔터테인먼트인데 이 회사는 내 입봉 작품 배급을 주저했다. 뉴 엔터에 와서 감독 입봉하라고 권했던 회사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작품 흥행이 안 될 거라고 봤기 때문이다.

최근 라이터스 작품들이 줄줄이 제작에 들어가면서 그 여파가 내게 돌아온 셈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원래 저예산 영화는 스크린 확보가 어렵긴 했다.

많아야 500개 정도.

아비도가 작가주의 풍 영화라 더 적을 수도 있다.

스크린 수가 500개 이하면 흥행 예측과 달라진다.

별수 있나. 발로 뛰어야지.

* * *

배급을 따내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배급이 정해진 영화를 개봉 연기시키거나, 배정된 여러 영화의 스크린을 십시일반으로 따낼 수밖에 없었다.

전자든 후자든 해당 영화 제작진과 마찰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해서 아비도를 제작해두고 개봉관이 확보되면 개봉하는 방법도 열어 두었다.

NEO 임원을 만났다.

“내년 4월과 5월에 개봉하는 그 영화들 개봉관 좀 떼주시면 안 될까요? 차기작 배급은 NEO에 무조건 맡기겠습니다.”

“최 작가 얼굴을 봐서 그러고 싶은데, 그 영화들 흥행성이 최 작가 작품보다 높아서 그래요. 아비도 읽어 봤더니 재미는 있습니다. 작품이야 좋죠. 그런데 500만 들 영화를 밀어내고 100만 들 영화를 넣을 순 없잖아요.”

“5월 이후에는 배정이 좀 나겠습니까?”

“내년 여름 성수기까지 꽉 찼어요. 그러지 마시고, 일단 만들어 두시고 비수기 때 개봉하는 방향으로 가요.”

“예. 말씀 고맙습니다.”

“최 감독. 회사 사정이 그런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우리나 최 작가나 감정 상해서 좋을 거 없잖아요.”

“그럼요.”

NEO 임원은 어떻게든 나와의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하려고 애썼다. 그의 말대로 500만이 들 영화 스크린을 줄이고 100만이 들 영화를 걸 수는 없는 거다. 300만이라도 마찬가지.

더구나 그 영화들 스크린 줄이면 그 영화의 감독이나 대표가 찾아와서 내 멱살을 잡을 수도 있고. 작가와 제작실장이었을 때와 제작사 대표와 감독일 때 입장이 이렇게 다른 거다.

뉴 엔터테인먼트는 대표님이 만나주었는데 스크린 100개를 떼어볼 수는 있다고 했다. 그 회사가 배급하는 영화의 흥행성이 내 영화 흥행성보다 약간 더 높은데, 이건 순전히 날 위한 배려였다. 그 영화의 감독은 펄쩍 뛸 일이고.

결국 없던 일로 했다.

규모가 크고 흥행성이 높은 영화를 제작해서 다른 영화를 밀어낸다면 배급사 선택이니 그러려니 했을 터다. 그런데 저예산 영화로 다른 영화를 밀어내는 건 배급사에도 피해를 주는 일이다. 두고두고 욕먹을 일이기도 하고.

결국 후반작업까지 다 끝내 놓고 몇 달 뒤 6월이나, 9월쯤에 개봉 배정을 받아보기로 했다. 한데 영화가 제 때 개봉을 못 하고 창고에 들어가면 그대로 묻혀 버릴 가능성도 있다. 그 때문에 나도 활로를 찾아본 거고.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진 채 회사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앉아 배급사들이 내년 봄과 여름에 개봉할 시나리오들을 읽어 보았다. 모두 12 작품인데 라이터스가 집필한 작품이 4개다. 라이터스 작품은 흥행성이 제법 있다.

나머지 8개 작품 중 유명 감독의 대작이나 기대작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한데 두 작품은 이렇다 할 흥행성이 안 보였다. 한 작품은 100만도 안 들고 망할 것 같고, 제작비 120억이 들어간다는 웹툰 원작 작품은 뭔가 이상했다.

흐름이 뚝뚝 끊어지고 캐릭터에 생명력도 없고.

해서 원작 웹툰을 보았는데.

그 이유를 바로 찾아냈다. 원작의 재미 요소를 영화로 바꾸는 과정에서 핵심을 놓쳤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특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은 물론, 웹툰과 다른 특별한 결말도 만들지 못했다. 웹툰의 인기만 믿고 제작한 케이스다.

대작인데 잘 되야 500만. 웹툰 팬들의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면 대형 실패작이 된다. 이 시나리오를 웹툰 팬들에게 보여주면 내 예측 그대로인 거고.

승철이를 불렀다.

“너 신들린 해결사 봐?”

“웹툰요? 중간까지 보다가 말았는데, 왜요?”

“영화 제작 중인 거 알지?”

“그래서 읽어봤죠. 그거 그 영화 책이구나.”

“한 번 읽어 볼래?”

“그러죠. 뭐.”

승철이가 ‘신들린 해결사.’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실실 웃으면서 페이지를 넘기던 승철이가 중반쯤 넘어가자 표정이 달라졌다. 다 읽기도 전에 승철이가 말했다.

“작가가 웹툰을 제대로 본 것 같지가 않네. 그냥 원작에 나온 에피소드를 그대로 쓸 것이지, 마구 뒤섞어 놨네요. 캐릭터도 웹툰하고 좀 다르고요.”

“재미는 어때?”

“글쎄요. 내가 웹툰을 봐서 그런가. 그 웹툰 안 본 사람은 설명이 부족해서 뭔 내용인가 싶을 것 같은데요. 웹툰 본 사람도 반응이 갈릴 것 같고요.”

“그 웹툰의 포인트를 살리면 이 영화 잘 될 것 같지?”

“완전 살죠. 이 영화 대작인데 이대로 가면 제작비 겨우 건질 걸요. 제작사가 웹툰 인기에 기대서 제작한 것 같은 데, 시나리오를 너무 굴렸나. 좀 과한 느낌이 드네요.”

승철이가 제대로 짚었다.

원작의 인기에 기대려면 그 원작의 핵심을 짚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쓴 작가는 그냥 스토리와 캐릭터, 영화로 구성할 수 있는 사건만 가져왔다. 어떤 점이 재미있는지 모른다는 소리.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웹툰을 보았다.

그리고 대안을 찾아냈다. 시나리오 수정 방안까지.

내 영화를 개봉할 방법은 찾았다.

* * *

영화 ‘신들린 해결사’ 제작사를 찾아갔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스태프들이 정신없이 촬영 준비 점검을 하고 있었다.

감독도 대표도 50대였다.

제작사는 창립한 지 20년이 넘은 메이저.

어쩌다 원작을 못 살렸는지 답이 보였다.

작가가 각본을 쓰고, 감독은 그 웹툰을 한 번 봤을 뿐이다.

작가가 처음 원작 각색을 했을 때는 원작의 포인트를 살렸겠지. 그걸 더 낫게 하려고 각색에 각색을 거치다 보니 처음의 매력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1년이나 시나리오 개발을 했다면 다들 지쳐서 그만 완고 내고 가자는 말도 나왔을 테고. 이미 작품의 객관성을 잃은 후다.

젊은 스태프들 얼굴에서 읽힌다. 직장 상사에게 이건 좀 아니다 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스태프들도 말을 못했던 거다. 촬영 준비 중인 상황에서 꺼낼 말이 아니기도 하고.

대표와 감독은 날 손님으로 응대했다.

“우리 영화에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감독님과 제작사에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쉽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이유가 있어서 찾아온 거고요.”

“혹시 책을 읽으셨어요?”

“실례를 무릅쓰고 읽어 봤습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이 슬쩍 긴장했다.

내 작품이 전부 성공했고, 라이터스가 써내는 작품도 잘 나온다는 말은 들어 봤을 터다. 그런 사람이 불쑥 찾아왔으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었던 거지.

“무례라고 생각지 마시고 제 고언을 좀 들어주십시오.”

“하, 이거 불안하네. 어떤 문제가 보입디까?”

“예. 120억 영화라고 들었는데, 이대로 찍으면 500만 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감독과 대표의 얼굴이 굳어졌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느냐고 생각하시겠지.

어쩔 수 없다. 이 영화 촬영이 연기되어야 나는 내 영화 개봉하고, 이 제작사는 120억 대작다운 흥행 성적을 낸다.

나도 좋고, 이 제작사도 좋은 방법이 있다.

설득할 자신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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