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10년 대계 (18/56)

제2장 10년 대계

띠리리리-

휴… 오늘만 세 번째.

전화를 꺼 놓을 수도 없고.

“네. 최신성입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저희 맥스필름인데요. 지금 대화 좀 가능하세요?

“지금 시나리오 작업 중입니다. 계약은 좀 곤란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초고로 시나리오 쓰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 그렇다면 그 작업은 곧 끝나지 않겠어요?

“초고 시나리오로 촬영 진행한다는 말은 과장된 소문입니다. 이후에 재고 작업을 해요.”

-아, 그러세요. 이번에 저희가 액션 스릴러를 진행하고 있는데 각색이라도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예. 일단 책이라도 보내 주시면 검토할게요.”

-책을 보내 드리는 건 내용 보안상 좀 곤란해서요.

“그러면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할게요. 죄송해요.”

-아쉽네요.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수고하십시오.”

전화를 끊었다.

밀려드는 계약 전화를 거절하는 것도 기술이 필요했다. 내 작품이 줄줄이 개봉을 기다리는 중이라 당분간은 다른 제작사 작품을 쓸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이상하니까.

소파에 누워 미국 추리소설을 읽었다.

건하는 오랜만에 제니스 스케줄이 없는 영진이와 함께 운동하러 갔다. 4년간 몸이 너무도 약해져서 몸에 근육을 좀 붙여야 했다. 다행히 건하가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몸이 건강해지니 정신도 건강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띠리리리-

또 전화가 와서 보니 투자사 사장님이었다.

“네. 사장님.”

-뭐 하고 지내나?

“그냥 한가하게 지내고 있어요. 드디어 작품 의뢰하시려고요?”

-회사에서 통과된 작품이 두 개 있네. 직원들은 작품이 좋다고 하는데, 나는 어째 걸려서 말이야.

“보내 주세요. 작품 2개 의뢰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곧 메일 보내겠네.

“예.”

소파 앞 테이블에 있는 노트북을 켰다.

얼마 뒤 메일이 와서 열어 보았다.

투자사에 들어온 시나리오라 기획안이 꼼꼼했다.

무협 코미디.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무인이었던 한 남자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한국에 태어난다. 그 무인은 당시 마교라 불리던 신비 종교의 금지 영약을 먹었는데, 그 약을 먹은 후 전생을 기억하며 살아온 것이었다.

현재 그 무인은 어느 중소기업의 과장.

생을 거듭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은밀히 생활 속 의협으로 살던 그에게.

엄청난 적수가 나타난다.

무려 마교의 교주.

고대 중원 전쟁 당시 교주가 주인공에게 죽었다. 그러나 어떤 대법을 통해 부활했고 영혼 전이라는 또 다른 금지 약물을 먹고는 2천 년을 훌쩍 뛰어 주인공을 추적했던 것이다.

세계를 집어삼키려는 마교 교주.

그 마교 교주를 막으려는 공 과장.

두 사람의 격돌에 관한 이야기.

제목 신촌검호.

작가 홍준석.

드림메이커 작가 팀에서 고생만 하다 잘린 그 홍 작가다.

그 친구가 무협 마니아였네.

일단 읽어 보았다.

* * *

시나리오 마지막 장면을 읽고 허리를 폈다.

예상했던 내용이었다.

건물에서 건물을 날아다니며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상황과 코미디도 좀 약하고.

한국 관객은 날아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도 설정이나 이야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한국 영화의 특성을 살리고 영화적 전개를 강화하면 충분히 흥행은 할 것 같다.

몇 가지만 바꾸면 된다.

우선 주인공이 처음부터 강하게 나오는데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운동선수 수준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교 교주가 나타난 걸 알아낸 후부터 도망 다니면서 피나는 수련을 한다.

마교 교주도 갑자기 현대로 와 버리는 바람에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풀어야 한다. 일반인의 몸에 영혼이 깃들었으니 처음엔 무공도 못 쓴다.

그런 두 사람이 점점 강해지다가 막판에 가서 대오각성을 하며 한바탕 격전을 벌이는 게 좋다. 날아다녀도 고생 끝에 마침내 날아다녀야 쾌감도 생길 테고.

코어를 통해 분석했을 때 이 작품의 흥행은 400만 정도.

내가 각색한다면 200가량 더 들 수도 있다.

소재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다른 작품도 살펴보았다.

흥미로운 소재였다.

가상역사물.

한국이 일본을 식민 지배하는 대체 역사.

2차 대전의 추축국은 조선과 나치, 이탈리아였다.

핵폭탄을 먼저 만든 나치가 미국 본토에 핵폭탄을 투하하면서 미국은 동서로 분단되고, 중국은 핵폭탄 위협에 의해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로 사분오열 되었다. 조선은 그런 중국 동북과 하북, 산동을 점령한 상태.

그렇게 100여 년이 흘러 2020년.

세상은 지배 제국과 식민지 혹은 저항 국가로 나뉜 상태.

조선은 나치 다음으로 강대국이 되었으며.

일본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저항하고 있다.

주인공은 ‘대한열도’에서 활동하는 일본 독립군 수색 대장.

제목 대한제국.

시나리오를 읽어 봤더니 꽤 재밌었다.

한국인 파시스트들이 일본인에 행하는 압제와 억압. 집단 학살과 고문. 일본 독립군의 무장 투쟁. 나라를 잃은 일본인의 슬픔. 강제로 한국인이 되어 버린 일본인의 무기력.

실제 역사와 다른 것에서 오는 묘한 쾌감과 불쾌감.

그리고 아이러니.

일본 우익들 보라고 만든 작품 같다.

우리 선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일본이 역사를 날조하고 침략을 미화하는 걸 볼 때 한국인이 어떤 심정인지 한번 봐라. 이거지.

인간의 본성과 악의 평범성을 그린 것도 흥미롭고.

영화 전체가 메타포다. 재밌게 본 뒤에 ‘심도 있는 대화’를 이끌어 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예측 제작비가 120억인데 흥행은 고작 500만.

제작비 대비 수익이 그리 좋지는 않다.

두 작품에 대한 개선점과 장단점, 예측 제작비와 관객 수를 써서 황 회장님 메일로 보냈다. 각색도 가능하다는 점도 덧붙여서.

사실 내가 코어를 통해 쓴 작품이 흥행해서 그렇지.

영화 흥행이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코어 없이 온전히 내 실력으로만 썼으면 내 작품도 그만한 흥행이 안 나왔다. 소재의 한계가 있으니 코어가 무작정 만능인 것도 아니고.

3일 후 답장이 왔다.

CT가 신촌검호에 투자하기로.

또한 각색도 맡아달라는 말과 함께.

계좌에는 작품 분석비로 2천만 원이 입금되었고.

대한제국은 설정 리스크가 있어서 보류되었다.

각색은 어렵겠다는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서스펜스나 작품성을 좀 더 올릴 수 있는데 제작사 측에서는 지금이 무난하다고 보는 거다.

CT는 제작비가 120억이나 드는 게 걸렸겠지.

신촌검호 각색은 해 보기로 했다.

* * *

신촌검호 제작사 대표와 홍 작가를 만났다.

두 작품 제작해서 근근이 수익을 낸 제작사였다.

대표가 웃으며 날 맞이했다.

홍 작가는 말없이 인사만 하고.

“최신성 작가님이 좋게 보셨다고 하니까, 저희로선 좀 안심이 됐습니다. 사실 만화 같은 내용이라 걱정이 되었거든요.”

“감독님은 계시고요?”

“아직 찾는 중입니다.”

“예. 감독님 스타일에 영향을 좀 받을 시나리오입니다. 이 작품은 대놓고 오락으로 찍으면 위험해요. 오히려 사실주의 느낌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날아다니는 장면이 덜 부담스러워요.”

대표가 홍 작가를 보았다.

내 말에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라면 아예 날아다니질 말아야 하는 게 맞으니까.

그러나 홍 작가는 내 말뜻을 이해했다.

“영화 와호장룡 느낌을 말씀하시는 거죠?”

“영화 톤은 그게 맞습니다.”

홍 작가가 뭘 좀 아네.

대표가 홍 작가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차이인데요?”

“진지하게 풀어야 한다는 뜻이죠. 화려하고 액션에만 중점을 두면 몰입이 어려워요. 현실 세계에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을 줘야 하죠. 그러니까, 제 말은 개연성입니다. 일반인이 수련해서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 고대에 존재했던 고수가 이 시대에 왔다는 점을요.”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대표만 아니라 감독도 이런 차이를 잘 모를 수 있다.

개연성만 있다면 날아다니는 건 괜찮다.

다만 영화의 톤을 현실적인 느낌으로 바꿔야 비현실적 액션의 유치함이 조금은 완화된다.

그런데 현재 작품은 명랑하고 밝은 톤이다.

몇 년 전에 신생 영화사에 작품 계약하러 갔다가 나이 많은 무술감독의 장황한 액션씬 설명에 기가 질린 적 있다.

21세기 액션 영화인데 그 무술감독은 옛날 영화 ‘돌아이’의 액션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멋있다고 내내 주장하면서.

그런 인간들 때문에 영화 엎어지는 거다.

“그럼 제가 각색하는 건가요?”

“네. 최신성 작가가 각색했다는 말만 나와도 투자가 될 판입니다. 솔직히 이름만 빌리고 각색은 안 해도 좋다는 심정이 들 정도예요.”

“그럴 수야 없죠. 그럼 계약하죠.”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자리를 파한 뒤 대표는 보내고, 홍 작가는 따로 불렀다.

“어디 가서 맥주 한잔할래요?”

“좋죠.”

홍 작가는 이번에 입봉 기회를 맞아서 내내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자기 원안이기도 하고. 내가 각색에 참여한다고 하자 그도 반겼다고 한다.

인상도 좋고 감각도 있어서 호감이 좀 들었다.

실제로 코어가 홍 작가를 좋게 보기도 했고.

* * *

호프집에서 홍 작가와 맥주를 마셨다.

홍준석 작가는 무명 기간이 나보다 짧지만 제법 고생을 했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고.

내 권유로 반말하기로 했다.

“친구들이 뭐라고 안 해? 돈도 안 되는 영화 한다고?”

“다들 비웃지 뭐. 나 원래 드라마 썼었어. 방송작가교육원 출신이거든. 근데 요즘 드라마는 여자만 보잖아. 남자 작가가 비빌 자리가 있어야지.”

“요즘은 장르 물 많던데.”

“지금이야 그렇지. 내 동기들이나 선배 중에 메인 작가가 된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다 보조작가지. 드라마로는 안 풀리겠다 싶어서 충무로에 있는 영상작가교육원도 다녔지 뭐.”

“나도 거기 다녔는데?”

“진짜? 몇 긴데?”

“36기. 전문반까지 다녔어.”

“선배님이네. 나 40기. 연구반까지.”

말을 하곤 둘 다 웃었다.

사실 내가 이른 나이에 시나리오에 당선된 게 교육원 덕이 좀 있었다. 독학으로는 알 수 없는 강의를 받는 데다, 그곳 선생님들의 인맥이 작가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선생들이 시나리오 심사위원들과 친해서 넌지시 제자 작품 좀 잘 봐달라고 하기도 하고, 영화제작사에 추천도 해 준다.

물론 그게 다다.

실력과 운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호프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동기들은 잘되고 있고?”

“전혀. 요샌 공모전도 없어서 다들 빌빌대고 있어.”

“잘 쓰는 작가 없어?”

“모르겠어. 요샌 다 감독이 각본 쓰니까.”

옛날 생각이 났다.

교육원 수강이 끝나면 밤 10시였다. 강의 때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곤 했다. 김영석 선배도 그 교육원 선배로 만났던 거고. 지금 드라마 보조작가로 일하는 분도 그렇고.

이참에 작가 팀을 만들어 볼까.

매번 내 이름으로 작품을 쓰면 누가 봐도 의심스럽다.

창작집단으로 타이틀을 올리면 어떨까.

필명을 다르게 하거나, 창작팀 이름으로.

공동 작품은 내가 지휘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각 작가의 작품은 팀원들과 내가 돕는 방식으로 하면 나중에 강력한 작가 그룹이 될 수 있다. 준석이 동기나, 내 지인을 합류시키면 드라마도 쓸 수 있는 거고.

“혹시 창작그룹 생각 없어?”

“작가팀 말이야?”

“응. 공동집필, 단독집필 다 되는.”

홍 작가의 눈이 빛났다.

수익 구조가 조금 걸리긴 할 거다.

계약하는 작품이 많으면 상관없다.

공동은 1/N. 단독은 7대3.

즉흥적으로 발상한 건 아니다.

이전부터 창작그룹을 만들 꿈이 있었다.

무명인 주제에 그런 팀을 만들 수가 없었을 뿐이지.

* * *

홍준석 작가와 헤어진 다음 날.

바로 창작그룹을 출범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나도 홍 작가도 잘 쓰는 작가에게 연락하여 사람을 모아나갔다. 그러면서 로즈 엔터 근처에 사무실을 하나 얻었다.

일부러 직사각형 구조의 사무실을 찾았다.

작가들이 마주 보는 형태로 죽 앉을 수 있도록.

36평 대. 보증금 2천에 월세 170.

회의실 하나. 대표 작가실 하나. 작가 20명이 앉을 수 있는 책상도 마련해서 칸막이를 쳤다. 조리대와 수면실도 만들고.

사무실 인테리어가 거의 완료되었을 무렵.

작가 6명과 처음으로 모임을 했다.

시나리오 작가는 4명. 알음알음으로 연락한 작가들이다.

나보다 선배도 있고, 무명도 있고.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필력이 있는 분들을 섭외했다.

드라마 작가는 2명. 둘 다 보조작가로 드라마 공모전에 당선되었던 분들이다. 나와 준석이의 지인도 이번에 합류하기로 했다. 내가 드라마를 썼다는 게 주효했다.

모인 작가들 모두 최소 연봉 5천만 원 정도는 벌게 할 자신이 있었다. 사실 날 위한 창작그룹이다. 창작팀 이름으로 작품을 써내면 1년에 스무 작품까지도 가능하다. 창작그룹 소속 작가들을 비공개로 하면 누가 썼는지 알 게 뭔가. 더구나 난 필명으로 작업할 테고.

내 이름으로 계약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별개.

따라서 내 수익은 최소 1억에서 최대 3억까지.

“창작그룹명은 그냥 ‘라이터스’입니다. 계약금이나 월급은 없습니다. 대신 제가 작품을 많이 물어올 겁니다.”

한 작가가 물었다.

“집필은 어떤 방식이죠?”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두 명 이상의 공동집필. 다른 하나는 단독집필. 모든 작품을 회의를 거쳐 집필하기에 수익은 나눠 가지는 형태가 됩니다.”

“단독이라고 해도요?”

“예. 집단 아이디어 회의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7대3으로 집필 작가가 7을 가져갑니다. 단독집필이 주를 이루고, 공동집필은 2인 1조가 될 겁니다.”

“수익이 조금 걱정되기는 하네요.”

“믿어보세요. 저희 창작팀 계약금은 최소 3천이며. 매달 세 작품 이상을 공급할 겁니다.”

누가 들으면 허무맹랑하다며 코웃음을 쳤을 거다.

하지만 모인 작가들은 내 장담을 믿었다.

영진위 홈페이지에 가보면 등록된 영화사 수가 1만 개가 넘는다. 근 10년 동안 한 작품이라도 제작한 회사는 1000곳 정도. 현재 작품을 진행하고 있는 회사는 500곳 남짓.

1년에 개봉되는 한국 영화 수는 대략 100편.

500편을 제작하면 400편은 무산되거나 연기된다는 뜻.

그 500개 회사 중 내게 연락한 곳이 60여 곳이다.

영화 제작이 인맥 위주인 걸 봤을 때 압도적인 수치다.

이걸 작가들도 알고 있었다.

작품 계약이 내게 쏠리고 있었다는 것을.

안 그래도 작가들이 나름의 계산을 하고 왔던 터였다.

작가 7명은 꼼꼼하게 계약서를 읽었다.

네 가지 조항을 작가들에게 상기시켰다.

1. 작가 프로필을 전원 비공개로 하고, 필명을 쓸 것.

2. 필명과 창작팀 이름을 함께 작가 타이틀에 올릴 것.

3. 창작팀 집필과 작가 정보에 대한 보안을 지킬 것.

4. 모든 계약과 미팅은 부대표인 홍준석 작가가 할 것.

그렇게 하여 작가 7명과 계약했다.

다들 집에서 작품을 쓰지 않고 사무실에 출근하기로 했다.

수시로 회의를 해야 할 테니까.

난 그제야 신촌검호 각색을 했다.

시나리오 분석으로 관객 수가 530만이 든다는 걸 확인한 뒤 홍준석 작가를 통해 작품을 보냈다.

그리고 정식으로 창작그룹 ‘라이터스’를 출범했다.

따로 법인은 만들지 않고 로즈 엔터테인먼트 소속 콘텐츠 제작 부분 창작팀으로 했다. 해서 로즈 엔터는 크게 매니지먼트 부분과 콘텐츠 제작 부분으로 나누었고.

이 콘텐츠 제작 부분에서 영화도 제작하게 된다.

라이터스 이름으로 각 영화사와 외주제작사 등에 홍보 문서를 발송했다. 소속 작가가 몇 명인지, 이름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내가 대표 작가라는 말만 하고.

그랬더니 발송 당일에만 작품 의뢰가 7건이나 쏟아졌다.

소속 작가들은 출근 첫날부터 회의에 돌입했다.

나는 단독으로 하나. 공동으로 두 작품을 하기로 했다.

모두 다른 필명으로.

라이터스의 어떤 작가가 나인지 모르게.

일주일 뒤 무려 30 작품이나 쌓였다.

영세 영화사의 의뢰는 그렇다 쳐도 드라마만 4개.

전부 내게 계약하자고 연락했던 제작사들이다.

이 중 15 작품을 하면 계약금 선금만 2억.

난 졸지에 시나리오 공장장이 되었다.

* * *

라이터스가 출범하고 2주가 지나는 동안.

거의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6시가 되면 퇴근을 했는데 늘 약속이 잡혔다.

서연과 데이트 약속이 없는 날에는 저녁 식사도 할 겸 사람을 만나러 나갔다. 집에 가봐야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

영화계 인사를 만나고, 지인의 작품에 조언도 해주고.

이지은 씨 소개로 알게 된 사람들도 종종 만났다.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소개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도 만나보고.

오늘 만날 사람은 펀드매니저였다.

지인의 후배가 주식 펀드 관련 앱을 만들었는데 검토해보니 괜찮은 것 같아서 내게 연락했던 터였다. 내가 영화를 찍으면서 투자받은 벤처캐피털 회사 몇 곳을 알다 보니 은근슬쩍 줄을 대려는 거였다. 나도 그 앱과 관련해서 약간 관심이 있었다.

초밥 전문집에 양석천이라는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매일 피 말리는 단타매매를 해서 수익을 올리는 그런 게 아니라 투자상품을 개발해서 관리 운용하는 사람이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어요.”

양석천이란 사람은 인상이 좋다.

“다름이 아니고 펀딩 유료 앱을 개발한 회사가 있는데 투자가 좀 안 붙는 모양이에요. 비슷한 앱이나 사이트가 많거든요. 추천 종목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요.”

“좀 다른 게 있나 보죠?”

“펀드매니저, 애널리스트, 자산관리사가 평가한 상품을 앱에서 골라줍니다. 가상투자를 하다가 바로 현금을 이체해서 실제 투자로 넘어갈 수 있는 앱이에요.”

“비슷한 게 있는 것 같던데요.”

“있죠. 자문료가 비싸서 그렇지.”

대화를 나눌 때 두 명이 나타났다.

한 명은 말끔한 양복을 입었고, 한 명은 점퍼차림.

그런데 양복을 입은 쪽은 아는 사람이었다.

“최신성? 네가 여기 웬일이야?”

“오랜만이네.”

고등학교 동창이다.

일진과 어울리면서 약한 애들 괴롭히던 놈.

어쨌거나 서울 살면서 동창을 만나는 건 처음이다.

양석천 씨가 동창에게 말했다.

“아는 사이세요?”

“고등학교 동창요.”

“아, 그러세요.”

동창 놈이 과장되게 친한 척했다.

“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애들이 너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하던데?”

“그럴 일이 좀 있어.”

“근데 여긴 왜 왔어? 너 글 쓴다고 듣긴 했는데.”

양석천 씨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내가 눈치를 슬쩍 주었다.

놈이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동창 놈은 자리에 앉고 점퍼를 입은 친구는 넙죽 인사를 했다. 태도를 보아 동창은 대표고 저 친구는 개발자 같다.

“안녕하십니까. 앱 개발자 문인규라고 합니다.”

“네. 앉으세요.”

두 사람이 앉은 뒤 코어를 발동했다.

동창 놈은 변한 게 없다.

어떻게 하면 누구 등쳐 먹을까. 어떻게 해야 큰돈을 만질 수 있을까. 어디 만만한 호구 없나 혈안이 된 놈이다.

그런 놈이 IT 개발자 꼬드겨서 회사 하나 차린 듯.

반면 점퍼차림의 남자는 전형적인 연구생 타입이다.

저 친구 주변으로 다양한 기술과 관심이 보였다.

앱. 게임. 웹 사이트 개발. 인공지능 알고리즘 등등.

실력도 있고, IT 관련 동료도 풍부한 편이다.

그 동료는 대부분 학생이거나, 가난한 개발자고.

동창이 웃으면서 말했다.

“야, 최신성. 너 동창회 한 번 안 나오냐?”

“내가 거길 왜 가.”

“너보고 싶어 하는 애들 많아. 아, 동식이 애 돌잔치 하는데 거기나 오던지.”

동식이.

동네에서 함께 자란 내 절친이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던 놈.

싸움도 잘해서 일진 애들과도 친했다.

다른 놈은 몰라도 그 친구는 좀 보고 싶었다.

일진 애들은 강남에서 술장사한다는 말은 들었다.

시골 깡패보단 서울 깡패가 낫다 이거지.

“동식이 서울 살아?”

“미국에 있지. 애 돌잔치 때문에 잠시 들어왔어.”

“돌잔치 언젠데?”

“다음 주 금요일. 역삼동 크라운 호텔.”

“알았다.”

“식사들 하시죠.”

“네.”

초밥이 나오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추 식사가 마무리되자 양석천 씨가 본론을 꺼냈다.

“앱은 얼마나 개발되었죠?”

“예상 10단계 중 3단계 겨우 넘었습니다. 투자가 안 되니 개발 속도가 좀 느려지네요.”

“포트폴리오와 투자제안서는 가져오셨어요?”

“그럼요.”

동창이 주섬주섬 서류를 꺼냈다.

그걸 펀드매니저가 받아 내게 건넸다.

내가 받아서 보자 동창 놈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네가 왜 그걸 보느냐는.

코어가 문서를 분석했다.

앱의 기술력은 모르겠지만 내용이 너무 허술했다.

유료화 전망. 앱의 효율. 실제 투자 예상 실적.

애매하고 모호하고 두리뭉실. 설득력이 전혀 없다.

어설퍼도 이렇게 어설플 수가 있나.

이런 식이면 그 어떤 투자자도 투자 못 한다.

동창 놈이 어디서 사기를 치다가 처음으로 문서 같은 걸 써 봤나 보다. 동창 놈 창업자본으로 앱을 개발했다면 직원은 개발자인 문인규 씨 하나다.

서류를 바닥에 놨다.

“투자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런 제안서는 거의 100% 까여요. 이런 서류는 첫 페이지 보고 접습니다. 기술력을 보지도 않아요. 기본이 안 되어 있으니까.”

내 말에 동창 놈의 입이 비틀어졌다.

일부러 세게 나갔다.

순진한 개발자 등쳐 먹지 말고 끝내라는 뜻으로.

양석천 씨도 투자제안서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러네요. 투자를 받으려는 자신감과 호소력이 전혀 안 보입니다. 하다못해 절박함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건 대학생이 하기 싫은 과제를 억지로 제출한 느낌이네요.”

동창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놈이 다급히 말했다.

“그거 이 친구가 쓴 건데 그렇게 안 좋습니까?”

그 말에 개발자 문인규가 고개를 숙였다.

개발만 하던 친구가 문서를 제대로 쓸 줄 알겠나.

양석천 씨가 말했다.

“제가 봐도 투자는 좀 어렵겠네요. 투자제안서를 다시 쓰셔야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분위기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양석천 씨는 괜히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고 후회하는 눈치고, 동창 놈은 날 슬쩍 노려본다. 개발자는 나와 동창 놈 눈치나 보고 있고.

양석천 씨가 이 곤란한 분위기를 알아서 깼다.

“식사 다 하셨으면 이제 일어나죠.”

“예.”

“서류는 이리 줘.”

동창이 내가 건네는 서류를 낚아채듯 가져가 가방에 넣었다. 그러곤 말없이 눈인사만 한 후 먼저 자리를 떴다.

양석천 씨는 미간을 좁혔고, 난 웃었다.

동창 놈이 욕을 안 하고 간 게 용하다.

그제야 일어나는 개발자에게 말했다.

“저 친구 어떻게 만난 겁니까?”

“학교 동아리 카페에 제가 글을 올렸는데 제가 개발하는 앱이 마음에 드신다고 해서 합류하게 됐어요.”

“아직 학생이에요?”

“네.”

명함을 꺼내 개발자 문인규에게 내밀었다.

“제 명함이에요. 인규 씨가 만든 앱에 관심이 좀 있습니다. 혹시 다른 파트너가 필요하면 연락해요. 주식이 아닌 다른 종류 앱이에요.”

“어떤 앱인데요?”

“영화 관련 앱이에요.”

양석천 씨에게서 연락을 받고 이 자리에 나온 건.

그 앱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해서 개발자를 만나 코어로 잠재력을 분석한 뒤에 내 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했다. 두뇌도 명석하고 기술력도 좋은 친구다. 주변에 IT 관련 개발에 능숙한 친구들도 있고.

문인규가 내 명함을 받곤 넙죽 인사를 하고 나갔다.

나와 양석천 씨도 머쓱한 얼굴로 악수하곤 자리를 떴다.

주차장으로 가는데 동창 놈이 기다리고 있었다.

놈이 내게 걸어왔다. 실실 웃으면서.

“야, 시발. 너 뭐하는 새낀데 남의 일에 초를 쳐?”

“순진한 애들 바람 넣지 말고 똑바로 좀 살지?”

“아 놔, 이 새끼가…”

한 대 칠 기세로 다가오는 놈을 마중 나갔다.

언제 나한테 이긴 적이나 있나?

놈의 얼굴에 내 얼굴을 들이댔다.

“한 대 치게? 너 고삐리야?”

잠시 다 큰 애들의 눈싸움이 벌어졌다.

동창 놈이 씩 웃더니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어른이면 참아야지. 다음에 보자.”

놈이 걸어가다가 돌아봤다.

“동식이 애 돌잔치 때 꼭 좀 보자. 애들 많이 올 거야. 동식이 그 새끼 우리 중에 가장 성공했거든. 너 온다고 그러면 애들 좀 올 거다.”

웃으며 돌아서는 동창 놈 속이 훤히 보였다.

잘 나가는 놈들 불러서 대 놓고 날 무시하겠지.

동창회엔 그런 놈들이나 가는 데고.

이전에는 그런 데 안 갔지만 이번엔 간다.

동식이를 보기 위해서라도.

애들을 만나게 됐으니, 유치한 짓 한 번 하자.

아주 졸렬하고 절륜하게.

* * *

역삼동 크라운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댔다.

1층 연회장으로 가자 화려한 돌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멀리 한복을 입은 동식이가 보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모습만 봐도 성공한 것 같다.

“여, 최신성! 어쩐 일이냐?”

뒤를 보자 고급 정장을 입은 놈들 두 명이 있었다.

예쁘게 생긴 어린 여자애 네 명과 함께.

일진이었던 김종수와 놈의 따까리였던 서일구.

코어를 통해 두 놈을 보다가 헛웃음이 났다.

이건 뭐 운명의 장난인가.

강남에서 술집을 하는 놈들인데 내가 만나본 어떤 인간의 이름이 불쑥 나왔다. 하기야 경기도 소도시에서 놀던 놈들이 서울에 와서 할 일이 유흥업밖에 더 있겠나.

그것도 서울에서 유흥업이 가장 발달 된 곳.

두 인간이 예쁜 여자애들을 데리고 온 이유도 알겠다.

서울 참 좁다. 이런 식으로 이어질 줄이야.

서일구가 껄렁껄렁하게 내 아래위를 훑었다.

“야, 이 새끼. 돈 좀 버나 본데?”

“글쟁이가 벌어야 얼마나 번다고.”

그때 그 동창 놈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아이고, 이 새끼 오란다고 진짜 왔네?”

세 명 무시하고 바로 동식이에게 갔다.

인사하느라 바쁜 동식이가 날 보더니 눈이 커졌다.

“야! 최신성!”

“응, 오랜만.”

“야, 진짜 반갑다! 연락 좀 하지!”

“일하느라 바빠서.”

동식이가 내 손을 잡고 끌었다.

그의 와이프가 내가 웃으며 인사를 했다.

“여기 내 아내. 이쪽은 내 어릴 때 친구. 신성이.”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동식이가 날 자리에 앉히곤 본인도 앉았다.

“너 전화 받고 깜짝 놀랐다. 글 쓰는 건 잘 되고 있고?”

“뭐, 그럭저럭. 넌 요새 뭐하냐?”

“나야 뭐. 사업하지.”

“무슨 사업인데?”

“파이널 어택 들어봤어?”

“가상현실게임?”

“응. 그거 내가 개발한 기술로 만든 거야.”

미국에서 작년에 출시된 슈팅 게임이다.

월 매출이 300만 달러라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 게임의 엔진을 내 친구가 만들었다는 게 놀랍다.

게임 회사는 합작 형태로 미국 측이 거액을 투자했을 테고.

그때 옛 양아치 3명이 여자애들을 데리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저 인간들은 동식이에게 뭐 뽑아 먹을 거 없나 싶어 얼쩡거리는 중이다.

김종수가 여자애들에게 말했다.

“이분이 내 친구다. 인사들 해.”

“안녕하세요. 신인 걸그룹 바닐라베이비입니다!”

여자애 네 명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아, 예. 안녕하세요. 다들 예쁘시네요.”

“고맙습니다!”

김종수가 얼른 나섰다.

“얘들 내가 이번에 키우는 아이돌인데. 얘들 잘해. 예쁘지?”

“연예사업에 관심 없다니까, 그러네.”

“야, 얘들 얼굴 봐라. 데뷔만 하면 바로 뜬다니까?”

동식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친지들 인사를 받았다.

김종수가 투자해달라고 질척대는 모양이다.

연습시키고 데뷔하려면 몇억이 필요하니까.

진행자가 들어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개그맨 박상일이 인사드립니다. 자, 지금부터 마동식 님과 신혜은 님의 귀여운 왕자님 마일훈 군의 돌잔치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박수 한 번 주십시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곧 돌 행사가 시작되었다.

서 있던 이들 모두 자리에 앉았다.

내 자리는 김종수 일당 바로 옆이었다.

여자애들은 긴장한 얼굴로 진행자를 보고 있었다.

얘들은 이제 18살 정도다. 어쩌다가 조폭 똘마니한테 걸려서 이 자리까지 왔는지. 하긴 술장사하면서 기획사에 슬쩍 발을 걸치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랴.

김종수는 강남역 조폭 강성철이 부하였다.

큐즈와 관련 있는 강성철 영향으로 김종수가 기획사를 차린 모양이다.

여자애들은 잘 뽑았다. 얘들 보는 순간 상당히 마음에 들었으니까. 실력은 몰라도 외모는 합격이다. 아직 고등학생이라 화장을 안 해서 그렇지.

김종수가 날 빤히 보다가 다시 말했다.

“야, 너 아까부터 왜 자꾸 우리 애들 쳐다봐? 걸그룹 처음 보냐 새꺄?”

“여고생들이야?”

“여고생이면? 예쁜 애들 보니까, 막 시발…”

그때 진행자가 말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인기 걸그룹 제니스!”

서연과 제니스 멤버들이 환한 얼굴로 입장했다.

김종수가 말했다.

“와, 졸라게 예쁘네. 그것들.”

“서연이 봐라. 미모에 물이 올랐네.”

“동식이 쩐다. 쟤들을 돌잔치에 다 부르고.”

여자애들은 선망의 눈길로 제니스 멤버들을 보고 있었다.

서연과 멤버들이 무대에 섰다.

이내 날 발견하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제니스를 보며 웃던 세 양아치가 동시에 날 보았다.

이건 뭐지? 하는 얼굴로.

난 서연과 멤버들을 보며 그저 웃을 뿐.

세 양아치 동창 놈들이 벙찐 얼굴로 날 본다.

황당한 표정. 이게 뭔 일인가 싶겠지.

제니스는 돌잔치 상 앞에서 현란한 안무를 추며 노래를 불렀다. 무명 때와 퍼포먼스가 다르다. 여유가 넘친다.

미소 지으며 좌중을 보다가 날 보면 더 활짝 웃고.

바닐라베이비라는 애들은 두 손을 쥔 채 제니스 무대를 보고 있었다. 아직 방송 출연 한번 못한 애들이다.

아직 어리긴 하지만 묘한 느낌이 드는 친구들이다.

혹시나 해서 코어를 통해 애들을 보았다.

응? 이건 뭐야?

걸그룹으로서 성공 가능성을 보았는데 엉뚱한 게 나왔다.

여성 EDM 록밴드 성공 가능성 91%.

세계적인 여성 비주얼 록밴드가 될 가능성 84%

걸그룹이 아니라 록밴드라니! 그것도 세계적인 록밴드!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었다.

내 옆에 있는 애에게 물었다.

“너희 원래 뭐하던 친구들이야?”

“저희요? 그냥 음악 했는데요?”

“록밴드를 했어?”

“아니요. 저랑 미진이만 학교에서 밴드했는데.”

“무슨 악기?”

“전 피아노하고, 미진인 기타 쳤어요.”

“록 좋아해?”

“애들은 몰라도 저와 미진이는 좋아해요.”

대화를 나눈 아이만 코어로 다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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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정 : 한성공연예술고 3학년.]

[나이 : 18세.]

[키 : 165cm] [몸무게 : 46kg]

[인상 : 눈웃음. 귀여움.]

[성격 : 일명 4차원. 명랑 발랄. 노력파.]

[신뢰도 : 85% 긍정적.]

[장점 : 포용력. 리더십. 창의력.]

[이력 : 중고교 교내 밴드 5년.]

[능력 : 탁월한 고음. 피아노 연주. 작곡.]

[……]

【최종 분석 : 로즈 엔터의 화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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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엔터의 화수분이라니.

애들이 로즈 엔터의 보물단지가 된다는 뜻이다.

세계적인 밴드가 된다면 정말 그렇겠지.

장차 리더가 될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록밴드를 하지 왜 걸그룹이 되려고 해?”

“저희 현실적이에요. 록밴드 해봐야 팔리지도 않는데.”

“하고 싶은 마음은 있고?”

“저랑 미진이는 나중에 하고 싶긴 해요. 우선 저희가 데뷔를 해야 뭐라도 하죠.”

김종수는 이 아이들 데리고 있어봐야 잠재력도 모르고, 키우지도 못한다. 무명으로 전전하다가 해체될 거 뻔하고.

그러나 로즈에 오면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다.

우선 내가 록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데 얘들에겐 뭔가 얽매인 느낌이 없다.

“계약은 했니?”

“아직요. 투자를 받으면 계약한다고 해서요.”

“그럼 트레이닝은?”

“투자받을 때까진 회사에서 소개해 준 보컬 학원에서 저희 돈 내고 연습하라고 했어요.”

애들이 계약을 안 한 게 묘한 호감의 원인 중 하나다.

그나저나 김종수 이거 웃기는 놈이네.

본인 돈은 안 쓰고 거저먹으려고 든 거 아닌가.

연습생 계약을 하면 데뷔할 때까지 트레이닝비, 레슨비, 밥값으로 수천에서 수억이 들어간다. 기획사가 돈이 없다는 게 드러나니까 계약서를 안 쓴 거다. 애들이 계약할 때 부모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부모들이 대번에 눈치채 거든.

“좋은 회사 가지 그랬어?”

“좋은 회사예요. 큐즈 자매 기획사거든요.”

김종수 이 인간이 얘들 속였구만.

좋은 회산데 왜 계약도 안 하고 자비로 연습을 시켜.

“연습한 지 얼마나 됐어?”

“5개월요. 저랑 미진이는 그냥 학교에서 연습하고 있어요. 실용음악과라서.”

“두 멤버는 보컬 학원 다니고?”

“네. 그런데 왜 물으세요?”

곧 데뷔할 아이들인 줄 알았더니.

곡도 없고, 안무도 없다. 투자를 안 받았으니.

“야! 너 왜 우리 애한테 자꾸 찝쩍거려?”

김종수의 말을 웃음으로 대꾸했다.

제니스 공연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 돌잔치가 다시 진행되었다.

제니스 멤버들이 내게로 달려왔다.

“오빠! 우리도 먹어도 되지?”

“그럼. 여기 앉아. 너희 먹고 가라고 내 친구가 자리 비워놨어.”

멤버들이 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으러 갔다.

행사 온 걸그룹이 밥을 먹고 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연하다. 행사하러 온 게 아니라 축하하러 온 거니까.

그래서 공연도 딱 한 곡만 한 거고.

서연이 말했다.

“이분들은 누구야?”

“응. 고등학교 동창. 얘들은 바닐라베이비.”

여자애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또 90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네. 식사하세요.”

“예!”

서연이 어린 여자애들을 보고 웃었다.

곧 멤버들이 자리에 앉아 식사했다.

김종수 일당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와 제니스 멤버들을 보기만 하고 있고. 이 인간들은 그 유명한 백상아리 고백 ‘짤’도 못 봤나 보네.

서연이 여자애들을 보다가 말했다.

“애들은 어느 기획사야?”

“동창이 기획사를 하고 있대.”

“우린 후배 육성 안 해? 지성 씨가 신인 배우는 오디션 보고 있다던데.”

“글쎄. 얘들은 어때?”

“쟤들?”

서연이 바닐라베이비 멤버들을 보았다.

가까이 있어서 우리 말이 들렸던 멤버들이 슬쩍 긴장했다. 본인들 소속사가 큐즈 계열사인 줄만 아는 친구들이다. 그러나 계약도 안 하고 대우도 부실해서 좀 이상했을 거다.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은 거 같다. 다들 개성도 있고. 예쁘고.”

“애들 내가 스카우트할까?”

“데뷔 안 했어?”

“안 했다네. 계약서도 안 썼더라고.”

“그럼 위약금은 없겠네. 트레이닝 비용을 안 썼으니까.”

“응. 그냥 데리고 와도 돼.”

“돈을 아예 안 쓴 거야?”

“그렇다네.”

미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야? 회사가 돈이 없다는 거잖아?”

“뭔 기획사가 그래?”

연희도 덩달아 웃는다.

서연이 물었다.

“너희. 쟤들 우리 회사로 오는 거 어떻게 생각해?”

“우리 회사? 쟤들 계약은?”

서연이 상황을 설명하자 멤버들 모두 웃었다.

황당하다는 웃음이다.

기획사와 저 아이들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니.

멤버들이 잠시 의논하더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물었다.

“너희 후배로 괜찮아?”

“우린 좋아.”

“그래.”

난 소속 식구들 의견도 중요했다.

내 옆에 앉은 바닐라베이비 리더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본 여자애의 눈이 커진다.

“로즈 본부장님이세요?”

“응. 너희 소속사는 큐즈하곤 아무 관련이 없어. 기획사가 연습생 계약도 안 하면 이상하잖아?”

“저희는 그냥 실력이 없어서 그런 줄 알고.”

“너희가 로즈에 오면 정식으로 계약하고 트레이닝 할 거야. 너희끼리 의논해 보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려.”

여자애가 명함을 슬쩍 숨겼다.

김종수가 알면 큰일 난다는 것쯤은 안다.

* * *

돌잔치가 끝났다.

제니스 멤버들은 식사를 끝내고 먼저 나갔고, 난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동식이에게 갔다. 김종수는 바닐라베이비 애들을 찾으러 나갔다. 화장실 간다던 애들이 돌아오질 않아서.

동식이에게 물었다.

“미국 들어가면 언제 나와?”

“글쎄. 내년 설에나 올까 싶은데.”

“너희 회사 VR 기술 말이야. 적용 범위 넓지?”

“당연하지. 콘텐츠가 부족해서 그렇지. 시중에 나온 일반 VR 기기 착용하면 돼.”

“나중에 관련 문의 좀 할게.”

“무슨 사업해?”

“아마… 너희 회사 기술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나야 너랑 하면 좋지.”

“그래, 종종 연락해.”

“알았어. 오늘 제니스 불러 줘서 고맙다.”

“고맙기는.”

동식이와 그의 예쁜 아들과 아내와 인사를 한 후 연회장에서 나갔다. 연회장 입구 밖에 김종수가 전화하고 있었다.

“왜 이것들이 전화를 안 받아!”

“걔들 왜 도망간 건데?”

“내가 아냐, 새꺄. 지들끼리 쑥덕거리더니만.”

내가 지나가자 김종수가 걸어왔다.

“어이, 최신성. 넌 우리 애들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너희 대표 조폭이라고 그랬지.”

“뭐야, 이 새꺄?”

김종수가 내 멱살을 잡으려 다가왔다.

놈에게 말했다.

“바닐라베이비는 너와 실질적인 관계가 없으므로 다른 회사와 계약해도 문제가 없다. 따라서 걔들이 어느 회사로 가건 자유야. 만약 애들을 건드리거나 협박한다면 너희 사업에 아주 큰 불상사가 생길 거다.”

“이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사기꾼 동창 놈이 황당한 표정으로 날 본다.

다시 김종수에게 말했다.

“강성철이한테 전해. 나. 혹은 바닐라베이비 소속사 이적으로 문제 삼는다면 사업하기 어려울 거라고. 그리고 너희들.”

동창 놈들을 빤히 보았다.

“서른이 넘었으면 이제 나잇값을 해.”

“이 새끼가 진짜!”

따까리 동창이 날 치려는 걸 김종수가 말렸다.

강성철이란 말이 나왔을 때 흠칫했던 놈이다.

놈에게 말했다.

“바닐라베이비는 내가 거둔다.”

바로 돌아서서 걸었다.

“야, 이 새꺄! 네가 뭔데?”

“제니스 소속사 대표.”

놈들 표정이 어떤지 관심도 없다.

말을 잃은 걸 보면 안 봐도 비디오.

* * *

건하와 함께 한강 변을 달렸다.

창작그룹 라이터스가 출범하고 내 생활은 매우 규칙적이 되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건하와 함께 한강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간 뒤 조깅을 했다.

이후 건하는 특공무술을 배우기 위해 체육관으로 갔고, 난 라이터스 사무실로 출근했다. 건하는 이제 혼자서도 어디든 잘 다녔다. 힘든 일이 생기면 내게 전화를 하긴 했지만.

“운동 끝나면 바로 집에 가서 발음과 발성 연습해.”

“네!”

건하가 자전거를 타고 집 쪽으로 달려갔다.

나도 자전거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건하가 부쩍 씩씩해졌다.

이젠 살과 근육이 조금 붙어서 유약하기보다는 날렵해 보인다. 마음의 병이 치유되면서 건하에게 약간의 후유증이 발생했다. 본인이 꽃미남이라는 걸 이제 제대로 알고 있다.

이젠 여자들의 시선을 즐길 지경이다.

저러다 사고 치는 거 아닌지 몰라.

“오셨어요?”

막내 작가가 대걸레질하고 있다가 인사를 했다.

늘 1등으로 출근하는 친구다.

“다들 늦네.”

“어제 늦게까지 술 마셨어요.”

“나 빼고?”

“대표님은 약속 있다고 먼저 가셨잖아요?”

“아, 그러네.”

출근 시간은 자유다.

난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작가도 직장인처럼 생활해야 글이 잘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 스타일을 다른 작가에게 고집할 수는 없었다. 새벽에 써야 잘 쓰는 작가도 있으니.

오전 10시가 되자 작가들이 하나둘 출근했다.

집필 중일 때는 몰입감이 깨지기에 인사도 안 하고 그냥 자리에 앉는다. 눈이 마주치면 손이나 흔들어 주고.

점심을 먹은 뒤 회의 혹은 집필에 들어갔다.

내가 한 작품의 분석을 끝내서 시놉시스를 정리해서 주면 작가들이 그 시놉시스를 통해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 그 후 정교한 시놉시스가 나오면 내가 한 번 더 분석한 뒤 집필에 들어간다. 들어온 작품 순서대로.

내 퇴근 시간은 6시이지만 다른 작가들은 자기 마음대로였다. 늘 밤까지 있다가 술 마시고 집으로 가는 것으로 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 나오니 나무랄 일이 아니다.

코어를 통한 분석과 7명의 집단 토론으로 시나리오가 가공되기 때문에 작품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난 집으로 가지 않고 사람을 만나러 갔다.

일전에 펀딩 앱을 만들었던 그 친구다.

고민 끝에 며칠 전 전화를 걸어왔다.

해서 펀딩 앱 기술에 대한 정보를 가져오라고 했다.

* * *

카페에 그 친구가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앉아요. 고민 많았나 보네요.”

“네. 그래도 저한테 투자한 분 배신하는 거라.”

“배신이 아니에요. 그 인간 투자받으면 튀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앱 개발은 포기하겠다고 했어요?”

“소송 건다고 해서 알아봤는데, 개발한 앱을 두고 회사를 나가면 문제없대요.”

“그럴 거예요. 기술 정보는 가져왔어요?”

“네.”

개발자 문인규가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다른 건 다 넘기고 기술에 대한 부분만 보았다.

문인규가 독자 개발한 펀딩 시스템 같다.

내가 염두에 둔 앱 시스템과는 다르지만 혼자 이런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것만으로도 실력은 충분했다.

앱 개발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핵심은 펀딩 주관 금융사와 금융 거래 보안 시스템이다.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부분이고.

그러니 초기 개발 단계에선 이 친구만으로 충분하다.

돈 많이 들어가는 전문 인력은 지금은 없어도 된다.

커피를 마시고 문인규에게 말했다.

“크라우드 펀딩 앱 하나 만들어 볼래요?”

“크라우드 펀딩? 어디에 투자하는데요?”

“영화요.”

“아, 영화라고 하셨죠.”

내가 영화 앱 만든다는 건 이미 들었다.

말을 이었다.

“일반인들이 소액 투자를 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일반인도 영화에 투자하고 싶을 텐데 방법이 거의 없거든요. 날 포함한 전문 평가단이 투자가치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리면 일반인이 검토하고 투자하는 방식입니다. 정산 시스템이 잘 갖춰져야 하는 것이 이 앱의 관건입니다.”

내 작품에 투자하면 100% 수익 난다는 말은 차마 못 했다.

난 투자를 받을 수 있고, 투자자는 수익을 얻고.

물론 배급 때문에 대형투자배급사도 투자해야 하고.

내 작품에 투자한다면 대부분 2배 수익을 얻는다.

분석해서 수익이 2배가 되는 작품만 펀딩할 테니까.

그리고 영화 플랫폼.

이건 친구 동식이와 관련한 사업이다.

영화 전문 플랫폼을 만든다면 그 플랫폼만을 위한 영화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극장 스크린 수 부족으로 영화 상영을 못 하는 경우는 없어진다.

영화를 보는 방법은 VR 기기로.

영상 구현은 가상현실 구동 방식.

집에서 극장 영화를 보는 체험을 준다.

내가 만약 한 달에 한 작품을 할 경우.

극장에 걸지 못하는 걸 플랫폼에는 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창작그룹 ‘라이터스’가 쓴 작품들을 배급에 상관없이 상영할 수가 있다. 물론 영화 규모는 작아지겠지만.

영화가 좋으면 당연히 배급사가 극장 배급을 하는 거고.

펀드 앱을 발견하고, 동식이를 만나면서 발상은 시작됐다.

코어는 이 아이디어를 분석했다.

성공확률 95%. 부족한 5%는 자금.

창작그룹에 영화 펀딩, 그리고 영화 전문 플랫폼.

예정되었던 것처럼 발상이 줄줄이 이어졌다.

영화 플랫폼을 위해서는 먼저 창작그룹이 필요했다는.

그 플랫폼에서 상영하는 영화 제작비는 펀딩으로 마련한다.

영화 제작사야 널리고 널렸고.

플랫폼 사업은 동식이와 합작 형태로.

물론 이 사업은 훨씬 훗날의 이야기다.

지금 시작해야 그 훗날에 상용화 가능하니까.

문인규가 날 빤히 보고 있다.

“영화 펀딩 앱을 만들어 봐요. 나중에 영화 플랫폼도 만들 텐데, 그 플랫폼 웹 사이트도 미리 좀 만들어 보고요. 필요한 개발자가 있으면 소개해 줘요.”

“아, 알겠습니다.”

개발자 문인규는 이래저래 활용도가 높은 친구다.

앞으로 전문가 못지않게 성장할 것 같다.

뭐든 창의력과 아이디어 문제지 기술력은 별 차이 없다.

* * *

동식이를 만나고 한 달 후.

드디어 나는 보스다 정산이 되었다.

총 흥행수익 1,212억.

예측한 것과 거의 들어맞았다.

예전에 계산했을 때는 10억을 대출한 것으로 가정했다.

그러나 대출 없이 15억을 투자했다.

그 수익에서 내 투자 몫 15억을 따지니.

44억 남짓.

여기에 흥행 배당이 3%면 5억 9천.

“후…!”

나는 보스다로 50억 벌었다.

이 돈을 벌면 고함이라도 지를 줄 알았지만 덤덤했다.

그래도 간질간질 속에서 웃음이 나오려 한다.

50억.

목표한 종잣돈이다.

영화 투자도, 영화 플랫폼도 만들 수 있다.

먼저 내 영화를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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